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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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만은 이날 아침 대사관 서기로부터 조봉암과의 면담을 준비하여달라는 통보를 받자 일찌기 인천을 떠나 신당동의 조봉암의 자택에 당도하였다.

《죽산선생님, 롤만이 왔습니다.》

롤만은 대문가에 있는 초인종을 누르며 큰소리로 불렀다.

그 소리에 처음에는 연경이가 맨발바람에 고무신을 찰찰 끌며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이어 조봉암이 사위 김봉무와 같이 나왔다.

《아, 롤만선생! 아침 일찌기 어찌된 일이시오?》

조봉암은 싱글벙글거리는 롤만을 포옹하면서 허물없이 인사를 받았다.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새벽녘에 까치 한마리가 야단스럽게 울어대서 반가운 손님이 오려나 했더니 롤만선생이 오셨구려. 자 어서…》

조봉암은 롤만의 팔을 끼고 천천히 2층의 응접실로 향하였다.

그들의 교제는 1946년 삼복철부터 시작되여 이제는 열번째의 돌기를 감아온다. 그 10년동안 그들은 자주 상종하면서 우의를 두터이 하여왔는데 변함없는 친우로, 벗으로 사귀여온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은 인천의 팔미도에 있는 해수욕장에서였다.

그때 인천에서 좌익계의 사업을 맡아보던 조봉암은 수하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뙤약볕을 피하여 바다가로 갔다.

해수욕장에는 삼복의 복더위를 피하고저 몰려온 피서객들로 붐비였는데 그중에는 미국사람들도 있었다.

조봉암이 해수욕장에서 자맥질을 하고나서 따가운 모래불에 등을 붙이고 높게 들린 푸른 하늘을 쳐다보고있는데 옆에서 나지막하게 휘파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선률이 바로 국제적으로 널리 불리우던 《인터나쇼날》노래였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선률에 취해든 조봉암은 자기도 의식할새가 없이 코노래로 소리를 합쳤다.

국적이 다른 생면부지의 두사람이 무심결에 입밖에 올린 휘파람소리와 코노래가 조화롭게 화음을 이루었다.

문득 저쪽에서 놀란듯이 휘파람소리가 뚝 끊어졌다.

조봉암도 인차 실수를 느끼고 코노래를 그치고 휘파람소리가 들려오던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에서도 누운채로 고개를 돌려 조봉암의쪽을 바라보고있었다.

두사람의 눈이 뎅그래졌다가 동시에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들은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갔다.

이렇게 되여 그들은 해수욕장에서 수영빤쯔만 입은채로 통성을 하게 되였다. 《인터나쇼날》로 그들의 우의가 시작된 셈이다.

당시 롤만은 남조선에 틀고앉은 미군정에서 좌익과 우익의 합작사업을 맡아보던 테일러의 보좌관으로 주로 좌익적인 인물들과의 사업을 하고있었다.

롤만은 원래 문건상으로 조봉암을 료해한바가 있었다. 첫 대상에 너무도 가식이 없고 진국이고 강직한 멋이 풍겨 흠뻑 반하고말았다.

그들의 접촉이 잦아졌다.

사귈수록 그들은 상대방에게 깊이 끌려들어갔다.

롤만이 문건상으로 알고있던 조봉암은 남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과 결별하고 당에서 뛰쳐나온 사람이였는데 사귀고보니 그것은 외곡된 평가였다.

그는 여전히 평생에 지켜온 신념이 투철한 투사였다. 그 신념의 기둥을 세워놓고 박헌영과는 다른 제3의 길을 모색하여 고민하고 방황하는 수난자였다. 3의 길이란 결국 민족주의 내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로의 전환이다.

롤만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롤만은 조봉암을 통하여 남조선의 좌익운동에 대한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를 가질수 있게 되였다. 이것으로 하여 테일러는 물론 강점군사령관 하지나 미중앙정보국의 남조선책임자의 후한 칭찬을 자주 들었다.

조봉암도 롤만에게서 남조선에 와있는 수많은 미국인들과는 다른 건전하고 정바른 체취에 취하여 쉽게 친구로 되였다.

롤만은 어느날 자기 가문의 조상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게 희한하기 그지없었다.

자기 할아버지는 인류력사상 첫 로동계급의 정권을 만들어낸 프랑스의 꼼뮨참가자로서 꼼뮨이 실패한 후 백색테로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는것이였다. 그리고 자기의 아버지는 에스빠냐공민전쟁시기 국제주의련합부대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인터나쇼날>노래를 즐겨 부릅니다. 그 노래를 지은 뽀찌에는 우리 할아버지와 꼼뮨에서 활동할 때 가까운 동지였다고 합니다.

그 노래에는 인류의 미래가 있고 우리 후손들의 무궁한 행복이 있습니다.

헌데 나야말로 가문의 족보를 다 잊고 조상의 혼백을 버리고 살아가는 불효한 놈이지요.》

이렇게 탄식하는 롤만의 두눈에는 이슬기가 어려있었다.

제가끔의 리해관계와 필요성으로부터 사귀게 된 두사람의 우정은 점차 깊이 감추어놓은 속말까지 터놓으며 서로 아껴주는 지인으로 가까워졌다.

그뒤로 롤만은 조봉암을 위하여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미국의 시각을 부드럽게 해주기 위하여 미국무성이나 미중앙정보국을 대상하여 적극 변호하였다. 그리고 조봉암의 신변과 활동에 유익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각이한 경로를 통하여 조봉암이 알게 모르게 통보하군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 도우며 도움을 받는 친밀한 동료가 되여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신뢰를 두터이 해온다.

《제가 전화도 없이 찾아온것은…》

롤만은 조봉암의 안내를 받아 쏘파에 앉자 이내 찾아온 용건부터 내놓았다.

《다울링대사가 조봉암선생님을 찾아뵙겠다구 기별이 와서 아침을 치르기 바쁘게 달려온겁니다.》

《다울링대사가? … 하, 그 사람이 날 찾아온다구? … 선거전에 한번 만나구싶었는데…》

《그럴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롤만은 며칠전에 다울링의 방에서 있었던 버드와의 론쟁을 짤막히 추려서 설명하였다.

조봉암이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음… 그랬구만요.》

《우리 대사를 만나보시겠습니까. 아마도 제눈으로 직접 진위를 알아보고싶어 만나자는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롤만의 눈빛에 한번 만나는것이 좋을상싶다는 속심이 력력히 어려있었다.

조봉암은 또다시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만나야지요. 롤만선생이 모처럼 마련해준 자리인데…》

조봉암이 쾌히 응하자 롤만은 기뻐하였다.

《선생님께서 어련하시겠습니까만은 오늘의 면담에서 중요한것은 다울링의 속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버드가 그냥 신경과민이 돼서 떠들어대니 다울링도 그쪽으로 기울어지는게 헨둥합니다. 아무튼 미국대사를 업지 않고서는 선생님의 웅지도 펼칠수 없는것이 비극이기는 하여도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선생님의 지론대로 1보전진을 위한 2보후퇴라고 생각하시고 자존심은 일단 접어두는것도 득책이 아닐가싶습니다.》

롤만은 대사의 비위를 맞추어주라는 건의를 하는것이 조봉암의 체면을 건드리는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롤만의 소심한 태도에 조봉암은 크게 소리내여 웃었다.

《하하하… 어째 오늘은 이렇게도 눈치보기를 하는거요. 내가 롤만, 당신의 진심을 몰라줄가봐 걱정이요. 알겠소. 명심해서 다울링을 잘 어루만져주리다. 나도 그 사람을 한번 만나고싶었소.

사실 리승만의 명줄은 그 사람이 쥐고있소. 미국이 없다면야 리승만의 몸값이 얼마 되겠소?》

그들은 효경이 가져다놓은 차잔을 들면서 진보당과 관련한 문제들을 놓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롤만은 진보당을 놓고 거세지고있는 역풍에 대하여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가며 걱정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의 의지는 굳건하였다.

《물러설수 없소!》

조봉암은 이제 며칠후에 중앙당결성식을 하고 래년초부터는 지방의 도와 군에 이르기까지 당조직을 정연하게 내올 구상을 개괄하였다.

그들의 이야기는 벽시계가 열점을 때릴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어찌된 일일가?》

열시가 지나자 롤만은 짜증이 나서 투덜거렸다.

오래동안 례의와 격식을 중요하게 내세우고있는 외교무대에서 부대껴온 롤만은 다울링이 약속된 시간을 넘기자 조봉암에게도 미안하기 그지없어 자주 시계를 쳐다보았다.

10시가 퍼그나 지나서 대기실의 전화종이 맵짜게 울렸다.

이어 연경이가 문을 열고 응접실에 들어섰다.

《롤만선생님, 대사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사관에서? … 그러면…》

롤만은 이렇게 연경의 말을 받으며 조봉암을 돌아보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던것이다.

《어서 전화를 받으시오.》

조봉암이 흔연히 미소를 지으며 권하였다.

연경이 롤만에게로 전화기를 옮겨다주었다.

《롤만입니다. … 아, 서기요? … 뭐라구? … 국무성에서 긴급지령이 내려와 대사의 일정이 달라졌다구? … 그러니 다음기회로 … 이게 무슨 아이들의 유희요? 국무성의 긴급지령이 내렸다 해도 면담상대가 누구인데 그렇게 가볍게 취소할수 있소?!》

롤만이 흥분해서 수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잘못된 처사요. 아주 잘못되였소. 오만방자해도 분수가 있어야지… 함께 계시오. 사죄의 말씀을 전해달라구? 걷어치우시오. 사죄하겠거든 대사가 직접 하란다고 하시오.》

롤만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좌석마련을 부탁까지 해놓고 방문일정을 취소하다니? 례의상으로도 안될 일이지만 다울링의 결심변화가 가지는 의미가 대뜸 불길하게 짐작되였다.

다울링마저도 버드와 리승만이 단짝이 되여 벌리고있는 《조봉암고사작전》에 푸른 신호등을 켜주려 경무대문턱을 넘어섰다는것을 시사하는것이 아닐가. 매우 상서롭지 않은 일이였다.

그는 잠시토록 속에서 지글지글 끓어번지는 분노를 가라앉히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니… 경무대에 가서 침을 단단히 맞고 돌아왔군.》

롤만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냥 씨근덕거렸다.

그는 불괘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있다가 한참후에야 조봉암에게 심심하게 사죄의 말을 하였다.

《선생님! 정말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울링대사가 국무성에서 온 긴급지령때문에 일정이 바뀌여졌다고 합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듯싶기는 한데… 이거 참 분망하신 선생님께 오히려 큰 페를 끼쳤습니다. 제가 괜한 일을 벌려놓고…》

《아니, 아니, 롤만선생, 난 언제나 당신의 신의를 고맙게 생각하오. 이게 어디 롤만선생이 사죄할 일이요. 오늘 이렇게 만나 요긴한 말을 들은것만 해도 난 헛된 시간을 보낸게 아니요.》

조봉암은 미안해서 어쩔줄 모르는 롤만을 위로하느라고 진심을 고여 사례하였다.

그리고는 연경에게 소리쳤다.

《얘, 아저씨더러 자동차를 준비하라고 해라. 11시경에 떠나자. 시립극장을 돌아봐야겠다. 간사장이 지금 그곳에 가서 기다릴게다.》

이제 진보당의 중앙위원회결성을 선포하게 된다.

이날 조봉암은 간사장을 비롯한 핵심들과 함께 회의장을 돌아보면서 회의와 관련한 마지막 실무토의를 하게 되여 있었다.

롤만은 조봉암의 말을 듣고나서 더욱 어쩔줄을 몰라 하였다.

《참, 이거… 제가 선생님께 괜한 부담거리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아까운 시간만 지체시켰군요. 죄송스러운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일은 저의 불찰입니다. 대사가 마지못해 응해나서는걸 그냥 몰아왔는데 결말은 이렇게 흐지부지되고 선생님의 긴한 일만 지체시켰으니…》

《롤만선생… 우리가 뭐 한두해 사귀여온 사람들이요. 롤만선생의 마음을 난 언제나 나에 대한 믿음과 정으로 받아들여 왔소. 뭐, 대사야 너무 바쁜 사람이니 그럴수도 있지요.》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아직 20분이 있소. 우리 집에 왔으면야 국화술 한잔이야 맛을 보고 가야지요. 이렇게 함께 앉아본게 설날후에는 처음이 아니요?》

《국화술? … 좋습니다.》

일어서던 롤만이 벌쭉 웃으며 조봉암의 소탈한 권유에 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연경이가 연분홍빛갈이 곱게 든 술병에 마른안주를 곁든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들어왔다.

연경이에게서 술병을 받아든 롤만은 잔을 채워 먼저 조봉암에게 내밀었다.

《10년대사를 드디여 성사시킨것을 축하합니다.》

두사람은 속이 후련해서 술잔들을 냈다.

《참 언제라 했던가요?》

《? …》

《당중앙결성식말입니다.》

《예, 래일모레 다섯시에 시작하겠습니다. … 래일 오전에 대사관들에도 초청장을 보내겠습니다.》

《예, 버드와 경찰기관의 방해책동에 대처하자면 될수록 외국인들을 래빈으로 많이 받아들이는것이 좋을겁니다.》

《옳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에 와있는 외국기자들에게도 다 초청장을 띄우겠습니다. 이건 당대회를 반대세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보신술이기도 합니다.》

《우리 령사부에도 다섯장정도 보내주십시오. 제가 공보원사람들도 몇명 끌고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일본에서도 여러명이 옵니다. 도꾜에 가있는 천령배에게 이미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대표부에서 입국사증을 발부해주지 않아 회사와 개인자격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빈틈이 없군요. 잘했습니다. 그쯤되면 중앙당조직결성은 그다지 무리없이 될것 같군요. 버드나 리승만이 아무리 리성을 잃었다고 하여도 그쯤되면 범접하지 못할겁니다.》

《문제는 지방조직결성입니다. 저쪽에서 지금 그리도 독을 쓰고있다 하니 지방조직을 결성할 때는 아마도 피를 봐야 될것 같습니다.》

《옳습니다. 지방조직을 결성할 때도 외국인들을 불러들일수는 없고… 피를 본다? … 당조직을 만들어내는데 피를 흘리게 되다니…》

롤만이 비분강개하여 중얼거렸다.

《맞받아나가는수밖에 없지요. 더는 진보당이 물러서는 일이 없을것입니다. 노래에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를 구제 못하리.

우리는 다만 제손으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리라, 다만 제 손으로! 허허허…》

조봉암이 비장한 속마음을 웃음으로 가리우자 롤만은 더욱 격동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열차게 부르짖었다.

《참 놀랍고 부럽습니다. 선생님의 그 기상, 그 의지, 그 담력… 이 철권의 암흑천지를 두드리는 그 장쾌한 웃음소리가 부럽습니다.》

《하하하… 칭찬할게 못됩니다. 나야 이 땅을 합치고 민중세상을 세울 때까지 싸워야 할 사람이니 그게 어찌 보면 숙명이지요. 자, 떠나볼가요.》

눈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밝아왔다.

드디여 11월 16일, 진보당 중앙위원회결성을 선포하는 날이 왔다.

이날 조봉암의 집은 명절분위기에 휩싸였다.

대회장에서 하게 될 개회사와 보고문을 다시한번 검토한 조봉암은 오후 네시가 되여 떠날 차비를 하였다.

그때 효경이가 대회장에 나설 아버지를 위하여 마련한 새옷을 들고 방에 들어섰다.

《아버지, 옷을 입어보세요. 입어보시고 마음에 드는것으로 선택하십시오.》

효경이는 쏘파의 앞탁에 두벌의 옷을 가져다놓았다.

《고맙다. 그런데 이 옷도 괜찮은데 뭘 두벌이나 갖추었느냐?》

언제나 검박하게 지내는데다가 옷차림새에는 원래 텁텁한 조봉암이였다.

《그렇게 되였습니다.》

먼저 밤색양복에 넥타이까지 받쳐매고 거울앞에 나섰다.

《좋구나! 몸에도 맞고 어울리는것 같구나.》

효경이가 목깃이며 팔소매를 여미여주며 깐깐히 살피다가 제 눈에 무엇이 마땅치 않은지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아니, 품이 좀 커보여요. 몸에 딱 붙어야겠는데. 색갈도 너무 로색이고.》

《얘, 옷이란 품이 넉넉한게 좋다. 그리고 색갈도 이게 내겐 어울려.》

조봉암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이 옷도 한번 입어보세요.》

이번에는 효경이 진곤색의 양복을 내밀었다.

《뭘, 이게 좋은데…》

《그래두요.》

효경이는 각근하게 권하였다.

조봉암은 하는수없이 밤색양복을 벗고 효경이가 내미는 진곤색양복을 입었다. 밤색양복과는 달리 진곤색양복에는 나비넥타이를 두르게 되여있었다.

거울앞에 나선 조봉암의 너부죽한 얼굴이 벙시레해졌다.

《아버지, 팔을 올려보세요.》

효경이는 거울에 비쳐진 아버지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다가 말했다.

조봉암이 딸의 말대로 팔을 몇번 쳐들어보았다.

《팔이 켕기지 않아요?》

《일없다. 몸에 꼭 맞는구나. 내 몸을 재여보구 만든것 같구나. 그런데 얘, 이거 너무 젊어보이는것 같구나. 너희들 눈에는 어떠냐?》

조봉암이 거울에서 눈을 떼고 멋적은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됐어요! 이 옷을 입으세요. 얘, 연경아!》

효경이가 기쁨에 젖어 아래방에 대고 소리쳤다.

연경이도 말쑥하게 화장을 하고 아버지가 떠날 시간을 기다리다가 들어왔다.

《아버지 옷이 어때? 아버지가 퍽 젊어보이지 않아?》

그러자 연경이가 조봉암에게 다가와 마치도 백화점에 세워놓은 인형모델을 둘러보듯 주위를 빙글빙글 돌아가며 아버지의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아유!》

연경이가 마침내 두손을 가슴팍에 소리나게 모아쥐며 탄사를 내질렀다.

《우리 아버님이 10년은 더 젊어지신것 같애! 만점이야, 만점! 우선 이 양복은 색갈이 바로 선택되고 세련미가 있어요. 우아한 멋도 있고 그런가 하면 장중한 무게도 느껴지거던. 그리고 그 나비넥타이도 아버지에게 꼭 어울려 신선하고도 고상한 품격을 살려주거던. 진작 이렇게 차려입으셔야 되는건데.》

연경이는 40대를 찾아보게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희한하도록 보기가 좋아 연해연송 탄사를 올렸다.

진곤색의 옷색갈도 좋지만 나비넥타이까지 매니 조금 밭아보이던 목도 휘연해보이고 힘과 기백과 젊음을 되찾은듯싶었다.

《얘얘, 호들갑을 떨지 말아.》

조봉암이 여느때없이 수다스러워진 연경에게 눈을 짐짓 흘겨보이며 좀 머쓱해서 말하였다.

《에, 나이를 줄여서야 안되지. 나이들면 늙어보이는것도 그 시절의 멋이야. 흐르는 세월이 불만스러워 자꾸 젊어보이려 하는것은 속된짓이 아닐가?》

조봉암이 서둘러 옷을 벗으려 하자 연경이가 아버지의 팔을 잡으며 눈을 빨았다.

《아유!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데… 아버진 사상은 진본데 생활은 보수야. 그러니 존귀하신 아버님의 따님들도 아버지의 보수적인 생활관에 타협하여 류행에 뒤떨어진 문명의 락오자들이 되여가지요. 아버지에게 진곤색이 어울리구 나비넥타이가 맞는다는걸 왜 우린 이제야 알았을가?!》

《허허… 되게는 감투를 씌우는구나.》

《아버지, 이 옷을 그냥 입고계세요. 저도 참 보기가 좋아요.》

효경이가 정색을 하고 한마디 하자 조봉암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너희들이 좋다면 그렇게 하자꾸나. 나도 이 양복이 좋을듯싶구나. 뭐니뭐니해도 내 몸에 꼭 맞으니 좋구나.》

조봉암이 품이 넉넉해야 좋다고 한 조금전의 립장을 쉽사리 바꾸고 딸들의 정성을 사뭇 즐겁게 받아들이는데 연경이가 웃음을 남실거리며 또 호들갑을 떨었다.

《아유, 글쎄 그렇다니깐요. 딸들의 효성이 어쩌구저쩌구 해도 어머님의 사랑에야 어림두 없지. 언니, 그렇지 않아?》

《거야 뭐, 그렇지 않구.》

《아, 생각난다. 어느 책이였더라? 이렇게 되여있었어.

자기의 귀중한 사람이 젊어있기를 바라는 마음, 젊어보이기를 바라는 마음… 세월의 해와 달을 붙잡아 세워두고 련인의 머리에 내린 서리를 다 지워주고싶은 간절한 소망, 이것이 녀인의 사랑이더라.》

《정말 그런가봐.》

사뭇 다감한 어조로 시읊듯 하는 연경에게 효경이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매간에 연신 웃음꽃을 피우며 맞장구를 치고 돌아가는게 의아해서 조봉암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그건 무슨 소리냐?》

《아유, 아버지는 이런데서는 너무 무디셔. 그 양복은 류선녀선생님이 손수 지어가지고 오셨어요.》

《뭐? … 선녀선생이? …》

연경의 소리에 효경이도 어쩌는수가 없어 토설하였다.

《선생님이 실은… 엊그저께 오셨는데… 아예 짐까지 싸가지구…》

《그게 무슨 소리냐?》

조봉암이 미간의 골이 깊어지고 낯빛이 신중해졌다.

《대통령선거》전을 앞두고 찾아왔다가 돌아가면서 그 녀자가 남기고 간 말이 피뜩 생각났다.

《저는 다시 오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시여 경무대에 들어가신다면 다시는 선생님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의를 위해서는 선생님이 승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저를 위하여서는 패자가 되여주시기를 빌고 빌겠습니다.》

이렇게 하고 떠나갔는데 정말 선거에서 패하니 이렇게 다시 나타난것이다.

그날에 가슴에 묻어놓고 간 녀인의 야릇한 애모의 정을 떠올린 조봉암은 불시에 속안이 따스해옴을 느끼면서도 난색을 지어보였다.

《이거 야단이 났군. 이러면 안되는데…》

조봉암이 양복을 벗으려고 하였다.

《아버지…》

연경이가 아버지의 팔소매를 잡으며 아이들처럼 응석부리듯 몸을 흔들었다.

《그냥 입고계세요. 이 옷을 입고 대회장에 가세요. 선생님도 기뻐하시게요. 선녀선생님을 저의 방에 모셨어요. 이번에는 제발 보내지 말아주세요.》

《너희들 참, 이런 일을 이런 대목에 와서 꺼내놓을건 뭐냐?!》

자매가 겨끔내기로 청을 올리자 조봉암은 난처해졌다.

《아버님께 뒤날에 여쭙는다는게 그만 제가 입빠르게…》

부녀간에 피차에 어색한 말이 오고가는데 어느결에 나갔댔는지 효경이가 중년의 녀인을 데리고 들어섰다. 화려한 얼굴모색에 날씬한 몸맵시가 처녀시절을 그려보게 하는데 한가닥의 애수가 느껴지는 표정이 뭇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을 아직도 잃지 않은것 같다.

깜장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단정히 입고 설렁하게 솟아오른 목우에는 닭알형의 새뽀얀 얼굴이 수집은 미소를 담고있다.

윤기가 자르르한 머리칼이 시원하게 뻗어간 가리마좌우로 갈라져있는것이 미인도에 나오는 조선녀인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보게 한다.

녀인은 살풋이 숙이고있던 고개를 들어 조봉암을 아련히 쳐다보다가 착잡한 눈길에 부닥치자 급기야 당황한듯 고개를 떨구었으나 백옥같은 앞이를 드러내며 유정한 말씨로 인사말을 하였다.

《죽산선생님께 축하를 드립니다. 진보당 중앙조직의 결성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녀인의 축하에 마디마디 진정이 고여있어 조봉암의 안색도 순간에 밝아졌다.

《고맙소, 선녀선생. 이 귀한 선물까지 가지고 찾아온 선생이 정말 고맙소.》

조봉암이 녀인의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이는데 연경이가 얼른 언니의 팔을 끌고 나가버렸다. 문턱에서 연경이가 돌아서서 고개를 돌리는데 처녀의 두눈에 향기로운 웃음이 재글거리였다.

방문이 꼭 닫기자 방안은 일시에 호젓해지고 두사람은 서로 거북해져서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조봉암은 녀인을 반가이 맞아들이고 기뻐하는 딸들이 은근히 고마왔다.

홀아비들의 하정을 들어보면 새살림을 차리는데서 제일 뻐근한것이 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것이라 한다.

딸들이 매운 서리를 치면 두번째 혼사가 이루어지기 힘들고 설사 성사된다 하여도 열곱으로 진을 뽑아야 한다는것이다.

더구나 류선녀가 선거전에 왔다가 돌아간 일로 해서 녀인의 남다른 웅심이 곡해되여 두 딸의 가슴에 옹쳐져있었는데 그게 쉽사리 풀리였으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류선녀가 먼저 방안에 드리운 침묵을 맑고 은근한 목소리로 가볍게 흔들었다.

《선생님, 저는 이번에 대학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왔습니다.》

《사직서를? 어째서요? … 짐까지 싸가지구 왔다지요? …》

《예, 지난 선거때 선생님께서도 반승낙정도는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때 선생님이 선거에서 패하시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렸구요.》

《하, 그런 일이 있었던가.》

류선녀가 차분하게 들이대는 소리에 조봉암은 면구스러워 뒤통수에 손이 올라갔다.

《그저 가정부라도 좋습니다. 평생을 선생님의 시중군이 되여 살아가렵니다. 선생님곁에서 따님들과 함께 선생님의 신상을 돌봐드리고싶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녀인은 정이 그윽한 어조로 청을 올렸다.

녀인의 청이 어찌도 절절히 가슴에 사무쳐들었는지 조봉암은 온몸을 떨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되오. 가정부라니…

선녀선생은 아직도 좋은 시절의 미모와 재능을 가지고있지 않소. 난 선생에게 인격도 있고 권세나 재력도 갖춘 청혼자들이 찾아가군 한다는 말을 들었소.

그런데 이 사람은 여러모로 부실한 사나이요. 난 선녀선생을 위하여 해줄것이 없게 인생이 기울어진 사람이요.》

조봉암이 이렇게 진심을 담아 자기 뜻을 밝히자 솔곳이 수그렸던 녀인의 고개가 쳐들렸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을 위해 해드릴것이 많습니다.

우선 선생님께 지체와 년세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해드릴수 있고 영양관리를 해드릴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배운것도 있으니 선생님의 영상관리도 해드릴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곁에는 녀인이 꼭 있어야 합니다.》

《허허허…》

조봉암은 수집음을 머금은 녀인의 대꾸에 저도 모르게 웃고말았다.

순간 류선녀는 말을 뚝 끊고 고개를 떨구었다. 속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낸듯싶었다. 분화장을 연하게 한 말쑥한 두볼이 활딱 붉어졌다.

조봉암도 좌석에 어울리지 않은 자기의 웃음에 후회를 느끼며 얼굴을 붉혔다. 자기들의 례사롭지 않은 인연이 얽혀든 여러해전의 추억이 즐거운 상념속에 비껴들었던것이다.

1950년 설날이였다.

당시 《국회》부의장으로 있던 조봉암은 어느 한 자선단체가 차린 연회에 초대된 일이 있었다.

연회에는 녀류명사들이라 불리우는 녀인들도 참가했는데 그속에는 류선녀도 있었다. 그날의 연회에는 대체로 부부동반으로 참가했다. 초청자측에서 외짝으로 온 그들의 신상에 대한 배려였던지 한탁에 마주보게 앉혀놓았다.

류선녀는 처음에는 서울정치권뿐아니라 녀인들의 안방화제에도 선망의 사나이로 자주 떠오르던 조봉암의 앞에 자리잡은것으로 하여 당황해지면서 몸가짐이 굳어졌다. 그런대로 몇마디 나누고나니 상대가 소문과는 달리 너무도 소박하고 인간적인 남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자 류선녀는 자꾸만 눈길이 상대의 가슴팍으로 가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류선녀는 원래 가정학교수라는 직업적인 타성으로부터 상대의 옷차림을 눈여겨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벌써 조봉암의 옷차림에서 두세가지 결점을 재빨리 찾아냈다.

우선 조봉암은 웃몸이 큰데 비하여 목이 좀 밭은데 닫긴 옷을 입고있는게 어울리지 않는다. 좀 답답한감을 준다. 조봉암의 몸에는 시원하게 앞이 터진 제낀옷에 샤쯔의 흰색이 뚜렷하게 대조가 되도록 나비넥타이를 매는것이 어울릴것이다.

다음으로는 50대의 장년나이인데 연한 토색의 양복색갈도 잘못 선택되였다.

지금은 진회색이든지 곤색으로 되여야 나이와 지위와 인격과 성품에 어울리는 활력과 열정을 돋보이게 할수 있다.

이 자리에서 그냥 스쳐넘어갈수 없는것도 있었다. 목깃밑에 있는 단추가 떨어질듯말듯 위태롭게 붙어있는것이였다.

류선녀는 섬세한 관찰을 통하여 조봉암이 상류사회의 향락과 방탕에는 등을 돌리고 허례허식에 아랑곳없는 대틀인 남성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녀인의 섬세한 손길을 받지 못하고 사는 불우한 사나이라는 련민과 동정을 금할수 없었다.

세상만사는 음과 양의 결합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서글픈 생각도 들게 하였다.

결국 남성과 녀성이 모여사는것도 인간세상의 바른 모양새다. 류선녀는 자기 눈이 당장 떨어질듯 실 한오리에 간신히 달려있는 단추에 가는것을 의식하자 제사 면구스러워졌다.

마침내 류선녀는 연회가 한창 흥이 오를무렵에 용기를 내여 말을 붙였다.

《부의장님, 방안공기가 너무 탁하지 않습니까?》

《예? … 예, 그런것 같습니다.》

《대기실에 나가시여 잠간 숨을 돌리시지요.》

《하, 그것도 좋지요.》

조봉암은 별생각없이 녀인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들여 쾌히 자리를 떴다.

조봉암이 대기실 쏘파에 자리를 잡는데 뒤따라 연회장에서 나온 류선녀가 조심스럽게 부탁하였다.

《실은… 초면에 실례인줄은 알면서도 청을 올릴게 있어서… 그 양복을 벗어 인주십시오.》

류선녀는 제꺽 손가방에서 바느실을 꺼내들었다.

조봉암으로서는 뜻밖이였다. 첫눈에 보매 생활의 안방과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우아하고 현숙한 녀인의 청이라는게 지극히 생활적이고 스스럼없는것이여서 선뜻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양복을요? … 허, 이놈의 단추가 끝내 일을 쳤군.》

조봉암이 황황히 웃단추에 손을 올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에 거울앞에서 당장 떨어질듯 한 단추를 고쳐달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저녁에 집에 돌아와 손질을 하기로 하고 그대로 입은채 집을 나섰던것이다.

하지만 녀인의 다심한 눈길에 걸려든지라 양복을 벗어주는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리에서 녀인의 각근한 정을 받아주지 않는것도 실례이며 녀인의 친절에 대한 무시가 아니겠는가.

류선녀는 손기빠르게 얼른 단추를 제대로 달아놓고는 괜스레 귀밑이 발갛게 되여가지고 미안쩍어 하였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류선녀는 사나이의 자존심을 더이상 건드릴세라 머리를 다소곳이 숙여보이고 총총히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일에 부닥쳐 어쩔새없이 녀인에게 끌려들고만 조봉암은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채 단아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녀인의 뒤모습을 홀리운듯 바라보았다. 그들은 쉽사리 《국회》부의장과 대학교수라는 직무를 뛰여넘어 한 남성과 한 녀성으로 되였다.

결국은 떨어질번 했던 단추가 그들을 이렇게 가까이 다가서게 한 인연이 된 셈이다.

그것은 참으로 즐겁고 황홀한 추억의 잊을수 없는 첫 토막이였다.

류선녀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저는 지난번 선거때 선생님의 선거선전장을 빠짐없이 찾아갔습니다. 선생님에게는 이런 면에서도 저의 도움이 요긴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습니다.》

녀인은 은은하면서도 세련된 어조로 마디마디를 또박또박 씹으며 자신있게 들이댔다.

《원, 무슨 소린지. 선녀선생이 내 선거선전장까지 돌아다녔다는거요?》

《선생님을 먼발치에서라도 뵙고싶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와 선생님의 주장도 듣고싶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가지고 다니였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모실수 있을런지 여러모로 재단을 다시 해보았습니다. 끝내 저는 선생님의 지지자가 되였습니다.》

류선녀는 복잡하게 이어져왔던 자신의 고민과 결단을 간략해서 고백하였다.

《허허… 원 참, 내 소리 듣자고 먼길을 다녔단 말이요. 원 참…》

조봉암은 세심하고도 다기차게 다가드는 녀인의 불같은 정에 어떻게 대답을 주어야 되겠는지 미처 떠오르지 않아 연방 혀를 차기만 하였다. 그런데 자기도 측근의 여러 사람들도 그걸 미처 모르고 지내온것이 여간 미안스럽지 않다.

《참, 오빠와는 상론이 있었습니까?》

조봉암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류선녀의 오빠 류선민은 이번에 법무부 장관대리로 선발되였다.

리승만은 말썽많은 법무부 장관직을 놓고 고심하다가 장관직임명이 끝난지 반년이 지나서야 차관으로 있던 류선민을 장관대리직에 앉혀놓도록 하였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비롯하여 사회적영향력이 있는 여러 인물들이 오랜 인테리인 류선민에게 법무부를 맡기는것이 법무부의 추락된 영상을 돋구고 《정부》의 무게를 살리는데 바람직할것이라고 한입 모아 권하였던것이다.

그래 리승만은 크게 파악은 없었으나 그들의 뜻을 쫓아 여러달이 지난 다음에야 마지못해 대리라는 임명장을 내주었다.

《예.》

녀인은 눈길을 살풋이 접으며 대답하였다.

《뭐라고 합디까?》

《이번에도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 그럴겁니다.》

《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던 류선녀가 입술을 감씹다가 뒤말을 이었다.

《저더러 꽃을 들고 불무지에 뛰여든다고 하였습니다. … 그리고…》

《하, 꽃들고 불무지에 뛰여든다. … 그리고 뭐라고 하시였소?》

조봉암은 입가에 선한 미소를 담으며 뒤말이 궁금해서 다우쳐물었다.

류선녀는 뒤말까지 내놓기 서슴어졌으나 조봉암이 기다리기에 솔직하게 토설하였다.

《부디부디 골라서 풍랑속에 뛰여들건 뭐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허허, 그 말들이 적실하오. 오빠가 바른말 하셨소. 그런데도 온단 말이요?!》

《이제는 저를 쫓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선생님에게 허물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가까이에서 돕고싶을뿐입니다.》

조봉암은 녀인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감도는것을 보면서 깊은 숨을 내쉬였다.

모든것을 각오하고 단단히 강심을 먹고 자기의 생활에 줄기차게 따라선 녀인을 이번에도 그저 돌려보내는것은 아무튼 박정한 일인것 같다.

그렇다고 가까이 둬두어서도 안될 일이 아닌가.

(허 참! 이 일을 어찌할고.)

그는 지금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고결한 의미를 되새겨보며 깊은 번민에 빠져들었다. 어쩔새없이 가슴속이 따스해지고 황홀하여지고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당황하여지기도 하였다.

오래동안 사랑의 감정이 억눌리고 메말라 있었는데 그 어떤 고결하고 감미로운것이 감돌며 그의 가슴을 다정히 애무하고있는것 같았다.

자기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여직껏 잠자고있던 감정이 녀인의 불같은 사랑의 힘에 이끌려 불쑥 리성의 금선을 헤치고 솟아오른것이 아닐가.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녀인의 수집어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오른 봄버들처럼 나긋하고 흰비둘기처럼 정결하며 풍만한 지성이 출렁이는 녀인이 귀하게 아껴온 순결을 서슴없이 풍랑속에 던지려 하는것이다.

녀인이 수집은 한걸음을 내짚어 조봉암의 마음속동요에 재기있게 못질을 해주었다.

《선생님, 그럼 저는 선생님의 시간을 더이상 축내지 않으렵니다. 효경따님에게는 가정부면접시험에 통과했다고 알려주겠습니다.》

류선녀는 조봉암으로부터 또 사절당할가봐 방에서 나가려고 서둘러 돌아섰다.

《가만, 거기 좀 앉으시오. 얘, 연경아-》

조봉암이 아래방을 향하여 큰소리로 연경이를 불렀다.

늘씬한 키꼴에 앞가슴이 풍만하고 곡선미가 또렷한 연경이가 반짝거리는 미소와 알싸한 향수내를 앞세우고 종종걸음으로 나타났다. 연경의 출현으로 그 어떤 열적은 마음의 압박감으로 가쁘게 느껴지던 방안의 공기가 일순 싱싱해졌다.

대회장에 가기 위하여 말끔하게 분화장을 하고 하늘색치마저고리를 입은 연경이의 모습도 한결 생신하고 말쑥해보였다.

두사람은 속이 후련해지는것을 다같이 느끼며 활기에 넘친 연경이를 즐거운 눈빛으로 맞아들였다.

처녀는 방안에 들어서다가 두사람의 찬찬한 눈길에 접하자 당황해져서 누구라 없이 물었다.

《왜요?》

의미가 없는 처녀의 명랑한 물음에 류선녀가 한마디 하였다.

《그렇게 차려입으니 연경이가 너무 어여뻐서…》

연경이가 《호, 선생님은…》 하며 수집은 태를 짓고 류선녀의 등에 숨어드는데 조봉암이 일렀다.

《얘, 바이올린을 좀 가지고 들어오너라.》

《아버지, 시간이…》

《안다. 어서… 효경이와 봉무도 들어오라고 해라.》

《예.》

연경이가 인차 돌아가서 바이올린을 가지고 왔다.

효경이와 김봉무도 들어와서 류선녀의 옆에 가지런히 섰다.

연경이가 바이올린을 어깨우에 올려놓고 연주자세를 취하고 아버지의 분부를 기다렸다. 바이올린은 최금룡이 어느해 봄날에 연경의 생일선물로 사준것이였다. 그때부터 연경은 바이올린을 배워가지고 종종 아버지의 피로를 가셔주기도 했는데 최금룡이 집에서 나간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울려본적이 없었다. 아버지도 굳이 찾지 않았다. 연경이도 내키지 않아 벽장에 처박아두고 거들떠보지 않았다.

연경이는 아버지가 깊은 사색에 잠겨있자 물었다.

《<고향의 봄>을 켤가요?》

그 노래를 아버지가 즐겨한다. 옛날 타향을 떠돌 때 늘 친구들과 더불어 그 노래를 부르며 비애에 젖어 강화섬을 그려보군 했다고 한다.

《아니다!》

조봉암은 손을 내저었다.

《그럼 당가를 켤가요?》

진보당 중앙의 결성대회를 앞두고 당가를 만들었다.

진보당에 입당을 신청한 전문시인들과 작곡가들이 여러번의 합평을 거쳐 완성하였다. 한소절한소절의 선률과 글줄이 조봉암과 동지들의 심혼을 그대로 담은것이였다. 가사도 좋고 선률도 훌륭하다고 나오자마자 인기가 대단하다.

조봉암은 자못 격동된 자세로 대답을 기다리는 연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봉암은 효경이와 김봉무를 거쳐 류선녀의 상기된 모습에 눈을 주다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그러나 그 무슨 선언처럼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노래제목을 지정하여주었다.

《인터나쇼날!》

《예?!》

연경이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도 크게 놀란 기색이였다.

최금룡이 언젠가 이 노래를 켜다가 조봉암에게 되게 경을 치른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그 노래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날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한없는 비감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울분과 자책이 어려 연경이의 심금을 크게 울려놓았다.

그게 벌써 두해전이다. 그후로는 한번도 그 노래가 이 집에서 크게 울린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각, 평생의 꿈이 바야흐로 실현된 이 시각 아버지는 다름아닌 그 노래를 들려달라는것이다.

(아! 아버지!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연경은 목청껏 소리쳐부르고싶었다.

평생토록 가슴에 안고 사는 그 노래, 일찌기 젊음을 불태워 진리를 찾아헤매던 시절 모스크바의 동방공산대학에서 처음으로 배우고 대바람에 심취되여 심장에 새겨넣었다는 그 노래.

구절구절이 그대로 피가 되고 뼈가 되여 조봉암이라는 혁명가를 만들어냈다던 그 노래…

저주로 인맞은 주리고 종된자들의 세계를 더는 용납할수 없어 붉은 주먹을 들고나선 길, 짓밟히고 천대받는자 모든것의 주인이 될 인류의 리상의 세계, 그 뜻을 안고 한생토록 풀무를 불며 용감히 단쇠를 두드려온 아버지!

개무리와 도살자에게 내릴 큰 벼락을 마련하고저, 머리우에 찬란한 태양이 비칠 그날을 위하여 이날이때까지 숱한 경난과 모욕과 모해와 폭압을 다 겪어온 아버지!

언젠가 대학시절에 연경은 최금룡이 몰래 가져다준 《공산당선언》이라는 소책자를 본 일이 있었다. 피가 용솟음치고 주먹이 틀어잡히는 책의 내용에 완전히 넋이 빠졌던 연경은 그날 저녁 아버지의 눈치를 보아가며 조심히 물었다.

《아버지는 <국회>부의장이지요?》

그 소리에 조봉암은 새삼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넌지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니 반공이지요?》

다시 질문을 받은 조봉암은 표정이 굳어졌다. 아버지의 모습에 겁이 나서 이내 고개를 떨구고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 용서하세요. 제가 철없이…》

아버지의 입에서 벼락같은것이 떨어질줄 알았건만 피를 토하는듯 한 한숨이 거칠게 흘러나왔다.

조봉암은 뜻밖에도 딸의 손을 잡고 그의 보동보동한 손등을 쓸어주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는것이였다.

《얘야, 나는 지금은 물론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공분자도 아니다. 반공이란 시대의 진보에 대한 반동이고 인류의 량심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사회적공정성에 대한 유린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야말로 썩어빠진 착취제도를 뒤집어엎고 인류의 문명개화를 이룩할수 있는 력사발전의 진리이며 인간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줄수 있는 량심의 독본이기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공산주의란 절대로 리승만이 떠드는것처럼 무서운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인류의 가장 량심적이고 리성적인 진보사상이다. 너 한번 <인터나쇼날>노래를 외워보아라. 그 구절구절을 씹어보며 그 장쾌하고 심오한 의미를 새겨봐라.

공산주의라고 해서 외면해서도 안되며 무턱대고 배격해서는 안된다. 리승만이 반공을 부르짖고있는것도 사실은 공산주의의 이 위대한 진리성을 몰라서 그러는것이 아니다. 자기의 통치를 합리화하고 이 세상의 악의 왕초로 군림하고있는 미국의 지지를 얻자니깐 반공이라는 패쪽을 이마에 달아놓은거다.

문제는 그 위대한 사상을 우리 나라 현실에 알맞게 써먹는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찌하여…》

해방직후에 그 신성한 대오에서 왜 물러섰는가고 연경은 묻고싶었다.

조봉암은 딸의 뒤말이 헤아려져 괴롭게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시대의 제약을 받는 인간들의 불행과 고뇌가 있는거란다. 박헌영은 이미전부터 공산주의배신자였지. 그러니 그놈에게는 좌익권의 정수분자들이 용납되지 않을수밖에 없었고…

물론 나에게도 커다란 실책이 있었다. 내가 당에서 나오지 말고 그 대오에서 끝까지 박헌영의 진면모를 파헤쳐 몰아내고 대렬의 순결성을 지켜내야 할것이였다. 뒤날에 박헌영이 미국의 개로 판명되였는데 이미전에 몰아냈더라면 우리 좌익권이 쟁쟁하였을게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놈의 정체를 모르고있었다. 제딴에는 혁명대오의 분렬을 가져올가봐 당에서 조용히 나와 제3의 길을 모색하였지. 그것이 오히려 좌익권의 단결에 저해를 주는 과오로 된것 같다.

나는 일후로 미국과 리승만일파가 굳건한 반공체제를 다져놓은 형편에서 나름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 하였다. 반공을 <국시>로까지 선포한 정치적환경에서 다른 방법으로는 무산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돌파구를 열수 없었기때문이였다.

내 늘 말하는것이지만 정치란 예술이다. 부단한 창조를 요구한다. 참다운 사상이란 창조적인것이다. 혁신적안목이 없이 구태에 사로잡히면 지리멸렬하게 되는것이 정치고 정치가의 명이야. 환경에 대한 자기식의 적응이야말로 진화의 유일한 법칙이고 생물체의 생명보존의 비결이지. 해방직후에 우익을 훨씬 압도하던 좌익이 오늘에 와서 립지를 잃어버린것이 바로 그때문이다. 너도 앞으로 정치를 희망하는데 이걸 명심해라.

나는 지금 에돌아가고있다. 3의 길이라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초행길을 걷자니 힘이 든다. 일부 사람들이 나의 걸음발을 놓고 좌로, 우로 평가하고 눈을 흘긴다는것도 나는 안다. 난 <인터나쇼날>리념은 사랑하지만 본의든 타의든 그 신성한 대오에서 쫓겨난이래로 사실상 공산주의자는 아니였다. 여기에 네 아버지의 한생의 비극이 있고 고민이 있다. 이걸 알아다오. 지금도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를 시비할 때는 아니다. 당장은 나라를 통일해야 한다. 독재를 청산하여야 한다. 하지만 나의 종착점은 달라질수 없다. 인터나쇼날은 나의 정치인생의 출발점이며 종착점이다!》

연경은 아버지의 절절한 목소리가 금시 귀전을 두드리는듯싶었다. 류달리 길었던 아버지의 그날 얘기는 한없는 비감에 젖어있었다.

그런데 《인터나쇼날》을 지정해주는 지금 아버지의 어조에는 기쁨과 자신심과 기백이 넘치고있다. 《인터나쇼날》은 여전히 아버지의 가슴에 살아서 울리고있었다. 그 억세고 줄기찬 메아리가 그냥 아버지의 평생을 떠밀고있다.

연경이는 눈물이 핑그르르해졌다.

효경이와 김봉무가 방음장치가 잘되여있는 창문들을 닫았다.

연경이는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더운 눈물을 감빨며 힘있게 활을 올렸다가 쭉- 내리그었다.

바이올린의 현이 부르르 떨며 비장한 선률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혁명가들의 신념과 의지를 격조높이 구가한 무산자들의 단결의 노래, 투쟁과 련대성의 상징으로 빛나는 장엄한 곡조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바이올린의 가느다란 현으로써는 그 장엄함과 비장함을 도저히 다 담아낼수 없는 음악이였다. 대고가 둥둥 울리고 징이 부서지고 트럼베트며 호른이며 튜바 같은 관악기들의 우렁차고 장중한 곡조에 바이올린이나 콘트라바스며 첼로와 같은 현악기의 맑고 부드러운 소리가 화음을 이루는 대관현악의 장엄한 연주로 만들어내야 할 폭풍같은 노래였다.

그러나 조봉암은 둘째딸이 온 심혼을 모아 열정적으로 켜고있는 바이올린의 떨림을 타고 더없이 신성하고 고원한 리상의 세계를 향하여 수리개처럼 나래쳐가고있었다. 그 세계에는 그 어떤 사리나 공명이나 허욕이 없다. 오직 하늘처럼 맑고 태양처럼 불타며 노도처럼 억센 고귀한 리상과 결사의 싸움만이 있을뿐이다. 료원을 휩쓰는 불길마냥 세기를 어지럽혀 오는 악마의 무리들을 쓸어버리고야말 억척의 신념과 광명한 미래에 대한 드팀없는 확신이 넘쳐있다.

전투성이 강하면서도 비장하고 장엄한 노래가 불러일으킨 격앙된 감정의 상승기류를 따라 심장이 달아오른 조봉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힘찬 걸음으로 거닐었다.

1절의 선률이 끝나자 연경은 가만가만 노래까지 부르며 연주를 계속하였다.

    …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리싸움이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

김봉무도 손을 힘있게 내두르며 따라불렀다.

연경은 2절이 끝나자 3절을 계속 이어갔다.

연주자도 격동되고 조봉암도 격동되고 효경의 내외와 류선녀도 크게 격동되여 커다란 감동에 휩싸여있었다.

효경이도 연경의 노래에 목소리를 합쳤다.

연경이가 련이어 두번째로 연주를 마치고나서 바이올린을 내렸으나 모두가 한자리에 굳어져 벅찬 흥분에 사로잡혀있었다.

조봉암도 가슴속에 일고잦는 폭풍에 휩싸여있다가 연경에게로 돌아서서 나직한 어조로 칭찬을 하였다.

《고맙다! 그동안 네 연주솜씨도 퍽 늘었구나!》

그리고는 류선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류선녀선생, 우리 딸의 첫인사가 너무 자극적이 아닌가요?》

조봉암은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류선녀는 대답을 쉽게 할수 없어 머뭇거렸다.

류선녀는 이 집에 드디여 자기 보짐을 풀어놓게 된 행복의 시각에 조봉암이 자기를 세워놓고 뜻밖에도 《인터나쇼날》노래를 들려주는것이 그지없이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믿음이였다. 믿어마지 않는 인간이기에 마음속을 바닥채로 펼쳐준다는 인간적인 신뢰였다. 그리고 이 노래를 부담없이 들을수 있는 사람이여야 이 집에 들어설수 있다는 조봉암의 엄정한 요구이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최종면접시험이기도 하다.

(내가 정말 이 요구에, 저분의 뜻높은 기개에 나를 따라세울수 있을가?)

지금까지 류선녀는 조봉암의 비범한 인격과 사나이다운 기질에 흠뻑 반해있었지만 그의 사상과 리념의 신봉자로는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의 심장에 아직도 무산혁명의 불멸의 메아리가 남아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번에 《대통령선거》전에 따라다니면서 조봉암의 공약이 만사람의 찬탄과 지지를 불러일으키는데서 커다란 공명을 받고있다는것으로 하여 크게 감복되여왔지만 《인터나쇼날》노래까지 자기가 받아안을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아니요! 좀더 생각을 하고싶습니다. 다만 선생님을 아직도 잘 모르고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또 새롭습니다! 선생님의 의지를 따르도록 노력하렵니다.》

류선녀는 생각깊은 어조로 솔직하게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는 청을 올렸다.

《죽산선생님, 저도 오늘 진보당 중앙위원회결성대회에 참가하고싶습니다.》

《선녀선생이? … 어… 참가자격문제가 있는데…》

뜻밖의 제기에 조봉암이 당황해져서 쉬이 대답을 못하는데 연경이가 《아버지-》 하며 뛰여가 선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앞질러 대답을 주었다.

《고마워요. 선생님, 가시자요. 가셔야 해요. 선생님이야말로 아버님의 신봉자, 진보당의 지지자이니 회의참가자격이 있구말구요.》

조봉암이 자기의 대답을 대신해준 둘째딸의 당돌한 처사에 《허허-》 하며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말았다.

《자, 그럼 모두 함께 떠나자. 출발!》

조봉암은 인생의 달고쓴 고행길에 몸과 마음을 합쳐주고저 자기의 생활에 문득 뛰여든 충직하고 순결한 지지자를 또 한명 받아들인 류다른 감개와 행복으로 하여 다소 흥분에 떠가지고 기세좋게 구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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