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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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다울링은 리승만과 조봉암을 만나보기로 하고 아침모임을 하고나서 일찌기 대사관의 철대문을 나섰다.

경무대비서실에는 리승만이 자기의 후계인물로 내세우고있는 《국회》의장 리기붕과 민주당 당수 고병직 그리고 이번에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된 정제관을 배석시켜달라고 선통을 하였다.

그리고 롤만을 찾아 10시경에 조봉암의 자택을 방문하겠으니 자리를 마련하여달라고 부탁해놓았다.

다울링은 조봉암을 만날 생각을 하고 전례없이 옷차림을 깐깐히 하면서도 위엄과 정중성을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경무대에 들어서니 정문에서 리기붕과 고병직과 정제관이 나란히 서서 상전을 모시듯 깍듯하게 영접을 하였다.

리기붕이 다울링을 면담실로 안내하였다.

다울링은 리기붕과는 여러차례 만난지라 비교적 익숙되여있는 처지였다.

서대문에 있는 그의 집에까지 서너번 초대를 받아 가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대사내정자로 서울에 와서 집권여당으로 불리우는 자유당의 대표라는 명목으로 초청을 하기에 방문하였고 두번째는 그의 처인 박마리아의 생일잔치가 있다고 해서 초대되였고 얼마전에는 리기붕의 생일이라 해서 그 집 문턱을 넘어섰다.

그가 리기붕의 집에 들어설 때마다 인상에 남았던것은 세련되고도 우아한 멋을 풍기는 안주인의 거드름스러운 거동과 그앞에서 사족을 쓰지 못하고 요부들처럼 추파를 던지고 허리를 꺾어질듯 굽석거리는 통치권과 여당의 중진인물들의 비굴하기 그지없는 꼴이였다.

미국에서부터 들어온 안방계집들의 밀실정치의 일단을 보여주는 구역질나는 그 광경앞에서 다울링은 무쵸의 말이 생각났다.

무쵸는 다울링에게 서울에 가면 열두폭치마로 서울정계를 휘감아가지고 사는 구미여우를 보게 될것이라며 껄껄거렸다. 그 구미여우가 리기붕의 처로서 한때는 리승만의 정부로도 있었고 리승만의 녀편네와 자매간처럼 지내는 박마리아라는것이다.

다울링은 리기붕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무쵸의 말부터 생각하며 실소를 금치 못하군 하였다.

지금도 다울링은 떠듬거리는 영어로 인사말을 겨우 번져가는 리기붕을 보면서 이러루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리승만이 프란체스까와 함께 면담실에 들어섰다.

다울링은 극비에 속하는 대화가 진행되게 될 자리에 녀편네를 차고 들어서는 리승만이 어이없었으나 속을 누르고 짐짓 모르쇠를 하는수밖에 없었다.

다울링이 지난해에 서울에 도착하여 두번째로 리승만을 만나 국무성의 비밀통보를 전하였을 때 이미 겪어본 체험이 있었던것이다.

그때 다울링은 리승만이 녀편네를 옆에 앉혀놓자 외교관례에 없는 일이라 한마디 넌지시 건네보았다.

《대통령각하, 이것은 미국무성이 대사관에 보내온 1급기밀사항입니다. 각하외에는 누구도 몰라야 합니다.》

리승만은 프란체스까쪽을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다가 마누라의 매운 눈총을 받자 정색해가지고 대꾸하였다.

《괜찮습니다. 대사, 이 사람은 나의 안해이고 개인서기이며 보좌관입니다. 우리사이에는 어떤 비밀도 따로 있을수 없습니다.》

그뒤로 다울링은 리승만의 곁에 앙큼하게 붙어다니는 프란체스까에게 습관되여왔으나 오늘 좌석에서만은 그가 없는것이 좋을듯싶어 입을 쉽게 열지 않았다.

《말씀하시오. 중대사항이 있는것 같은데 이 자리에는 이 나라의 정계와 행정권을 대표할수 있는 실권인물들이 다 참가하였습니다.》

리승만은 다울링이 자기의 녀편네를 경계한다는것을 눈치차리고 앞질러 강조하였다. 자기 마누라도 실권인물에 속하니 눈빨게 없다는 수작이다.

다울링은 하는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찾아온 용건을 실꾸레미 풀어놓듯 천천히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나는 얼마전에 서울의 일부 세력이 전번 선거에서 선거자들의 지지를 크게 받은바 있는…》 하며 다울링은 리승만의 표정을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예상했던대로 대뜸 리승만의 상판에 불편한 심기가 내비치였다.

두터운 눈덕이 흔들리고 오만상이 돼가는것이 헨둥하다.

다울링은 리승만에게서 뗀 눈길을 프란체스까의 틀어올린 금발의 머리칼에로 옮기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조봉암과 진보당을 제거해야 한다는 설을 내돌리고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선거가 썩 지나간 현시점에서 중대한 사회적문제를 배태하고있다고 인정하고 각하와 집권당과 야당 그리고 행정부를 대표하는 여러분들의 고견을 청취하고싶어 경무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남조선의 정치적위상에 대하여 깊이 관심하고있는 미국으로서는 스쳐보내기 힘든 문제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문제가 사회적혼란과 나아가서 동란으로까지 번질수 있는 심각한 위기를 안고있다는 우려를 표시하고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솔직한 해명과 건설적인 대책이 세워져야 하리라고 봅니다.》

다울링은 롤만이 무겁게 지적하던 내용을 되살려보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였다.

다울링이 자리에 앉자 좌중에는 한동한 침중한 분위기가 떠돌았다. 그가 쏴갈긴 엄포가 어마어마한데다가 어느 정도의 립장표명을 해야 할지 다울링의 진속이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던것이다.

다울링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해당 문제에 대하여 반대하는지, 아니면 찬성하고있는지, 이미 준비된 결론은 없는지 아리숭하였다.

리승만이 계속되는 침묵이 답답한데다가 갑자기 의기소침해진 부하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할 자격지심이 살아나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았다.

《말을 해보지. 조봉암이를 저대로 놔두라는건데… 속에 있는 말 툭툭 털어놓아보지. 자네들 직함에 눈치보기가 있어서야 될법인고…》

그것은 조봉암을 철저히 제거한다는쪽으로 공론을 몰아가라는 리승만의 지령이였다. 공공연한 부추김이기도 하였다.

리승만의 소리에 떠밀린듯 리기붕이 먼저 발언하였다.

오리오리에 서리가 내불린 백발의 머리칼부터 쓸어올리는 리기붕의 마디불거진 손이 가늘게 떨렸다.

원래 당뇨병이 심한데다가 좌골신경통으로 늘 시름시름 앓고있다.

여윈 얼굴에 검버섯까지 거밋거밋 돋쳐있어 리승만보다도 더 겉늙어보인다.

껑충한 키에 고목처럼 버썩 마른 허리통이 인품을 깎는듯싶어 박마리아의 지꿎은 성화로 늘 흰 샤쯔에 고급넥타이를 매고 그우에 윤기가 나는 회색공단조끼를 받쳐입고 양복을 두텁게 입고다닌다.

조끼주머니에는 금물을 올린 회중시계줄이 멋스럽게 드리워있었다.

그는 항상 시간에 쪼들리는듯 한 자유당과 권력층의 실력자로서의 위상과 신분을 강조하는듯 이따금 그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보고는 도로 조끼주머니에 찔러넣군 한다.

그게 이제는 버릇이 되여 그 누구와 이마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큰 회의장의 중간자리에 위엄있게 앉아있을 때도 꼭 10분에 한번씩은 규칙적으로 회중시계를 꺼내보군 한다.

지어 그 습관은 리승만앞에서도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그래 언제인가는 리승만이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는 그에게 눈이 돌아가다가 마침내는 넌지시 비꼬아주었다.

《이봐, 임자는 바쁜 일이 있으면 가봐.》

《아니올시다.》

리기붕이 그 자리에서 급급히 사죄를 했다. 지금도 그 버릇은 개 주지 못한것 같다. 그는 또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요즈음은 심기가 불편스럽기 그지없다. 더구나 이번까지 하면 두차례나 《부통령》선거에서 장면에게 련속 패하여 자기를 밀어준 미국과 리승만에게 면목이 없다. 갖은 폭행과 더러운 술수로 후원한 자유당과 행정부앞에서도 망신스러워 어디 가서나 기가 처지고 어깨가 늘어지기부터 한다.

그러나 조봉암문제가 화제에 오르고 리승만이 이미 첫 발언으로 립장표명까지 해놓으니 갑자기 기운이 용솟아오르는것을 느끼였다.

미국의 대표까지 참석한 이 자리가 어쩌면 운명을 건 자리가 될수 있다는 생각이 불쑥 뇌리에 떠올랐던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든지 리승만한테서 권력의 자리를 넘겨받아야 한다. 그 문제는 리승만이 여러번 공언도 해놓았고 자기를 만나는 기회마다 다짐을 두군 한다. 리승만의 나이로 보면 이번 임기를 다 채워내겠는지도 의심스러운 일이다.

리승만이 물러서면 상대역은 장면이나 조봉암으로 될것이다. 그까짓 장면따위는 관권을 동원시키면 크게 무서울게 없다. 민중의 바람을 휘몰고 다니는 조봉암은 여간 뻐근하지 않다. 조봉암이 생각나면 잠자리에 들어서도 진저리를 칠 정도다.

이번 선거에서도 실상 조봉암의 승리가 압도적이였다. 그런데 이제 조봉암이 진보당의 기초까지 다 세워놓고 다음기나 그 다음기에 자기와 맞붙으면 승패는 따져볼 여지도 없다.

따라서 리기붕은 자기의 후계체제에 도전하는 조봉암과 절대로 타협할수 없었다. 좋기는 리승만의 손으로 말살해버려야 한다.

이런 속셈끝에 회중시계를 공단조끼에 쑥 찔러넣은 리기붕은 처음부터 자극적으로 자기의 주장을 폈다.

《자유당의 립장은 종국적으로는 진보당이 서울정치권에 필요가 없다는것입니다. 조봉암은 지금 자유당이나 민주당에 도전하기 위한 정치적력량을 꾸리려고 전력을 기울이고있습니다. 조봉암의 움직임이 각하에 대한 도전이라고만 보는 견해는 매우 협애한것입니다. 문제를 보다 폭넓게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정치적야욕이 실현되면 서울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가 내세운 강령만 봐도 이를 잘 알수 있습니다.

평화통일론-이것부터 온당치 않지요. 그건 북의 평화통일론의 복사판입니다. 우리의 북진통일론에 대한 도전이고 북에 대한 동조이며 리적행위이지요.

수탈없는 경제, 국가가 관리하는 경제-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경제적토대이며 근간인 시장경제를 배격하고 사회주의경제를 세우자는것입니다.

부의 균등한 분배-이것도 역시 본질은 같습니다. 모든 독재를 청산한 사회-이것 역시 자유민주주의적인 미국식의 정치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입니다. 공산사회주장이지요. 우리 서울사회가 이렇게 돼가는것을 용납할수 있습니까?!

자유당은 조봉암과 그 지지세력의 진출을 억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데 대하여 이의가 없습니다.》

리기붕이 저력있게 강변을 마치고나서 공단조끼주머니에 또다시 손을 찔러넣었다.

《음, 그렇단 말이요. 자유당의 립장은 명백해.》

리승만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리기붕이 그만하면 소신표명을 신통히도 한것 같다. 조봉암의 움직임을 자기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미국에 대한 공세로 밀어붙인것이 이 자리에서는 썩 효과있는 말치레다.

(괜찮거던. 저 사람이 이런 때 보면 정 맹물은 아니야.)

리승만은 리기붕이 대견스러워 속으로 중얼거렸다.

리승만이 리기붕을 자기의 후계로까지 지목하고 통치권의 2인자의 지위를 안겨준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따금 한담자리에서는 《나와 임자는 리조 태종의 뿌리에서 돋아난 혈족이야.》 하고 쏙닥거려보기도 하지만 그건 리기붕의 귀맛을 돋구어주는 말대접에 불과하다.

리기붕을 아무리 밉게 보자고 하여도 자기를 제쳐놓고 권력의 정상을 노릴만 한 야심가나 재목감이 못된다는것이 기본이다.

리기붕은 언제 봐야 집권자의 그늘에 가리워있는 자기의 존재에 만족해하며 그 이상의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 무슨 비상한 통치력이나 두뇌도 없었다. 정치에 대한 일가견도 없어 속대굵은 소리 한번 변변히 내지도 못하는 위인이다. 그런가 하면 밤낮으로 이병저병으로 골골거리고 손아귀힘도 약하니 그의 주위에 모여드는 놈도 별반 없다. 제 녀편네가 하두 몰아대고 닥달질해서 내세우니 그 치마바람에 밀려 가까이로 접근해온 인물이다. 일을 시켜봤더니 심부름군으로는 그럭저럭 쓸모가 있고 다루기도 편해서 후계로까지 내세웠다. 그러니 저 다울링에게는 눈에 찰리 만무할것이다.

사실 다울링은 흡족해하는 리승만과는 달리 리기붕의 설명에 그닥 흥심이 없는듯 고병직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이미 고병직에게 다음기의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한 다울링은 그의 주장은 들으나마나하였지만 그래도 딴소리가 나오지 않을가싶어 들어보기로 하였다.

고병직은 첫마디부터 결론을 명백히 밝혔다.

《우리 민주당은 력사적으로 이 서울사회에서 조봉암과 그 지지세력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것을 기본임무의 하나로 설정하여왔습니다.》

고병직은 이렇게 다울링을 향해 파격적인 발언부터 던져놓고는 그 말의 파문을 응시하듯 잠간 입을 다물었다.

조봉암을 제거하고 진보당을 청산하는 일이라면 고병직이도 리기붕 못지 않게 리해관계를 가지고있었다. 당안에서 2인자로 공인받고있는 장면은 지금의 《부통령》자리로 흡족해하고있었다. 다음기는 고병직이 《대통령》후보로 나서기로 이미 장면과 밀약이 되여있었다.

다음선거에서 리기붕이나 조봉암을 앞지르자면 조직적기반을 넓혀야겠는데 여기서 기본장애는 진보당이다.

진보당이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기 시작하자 지금 민주당안의 당원들과 지지세력이 적지 않게 그쪽으로 쏠리고있다.

특히 신익희가 죽은 후에 추모표요, 뭐요 하면서 조봉암과 진보당을 배신한 고병직의 행위를 놓고 당안에서 그를 배격하는 목소리가 날을 따라 거세지고있다.

정치에서도 의리가 있어야 된다는것이다. 민주당이 신의를 버리고 량심을 팔아먹었으니 이런 인간들을 그냥 둬두고 그들밑에서 움직이는게 가련하다고 통탄해하고있다.

그러므로 조봉암과 진보당을 어서빨리 봉쇄하는것은 조봉암의 터밭을 앗아내고 민주당의 기반을 다지는 가장 믿음직하고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다.

고병직은 불만기를 드러내보이는 다울링을 굽어보면서 틀진 어조로 느릿느릿 자기의 속을 밝혀놓았다.

《우리가 1952년에 선거전에 리시영후보를 내세웠던것도 실상은 당시 리박사의 자리를 탐냈던것은 아니고 조봉암에게 지지표가 쏠리는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대사각하의 부탁도 있고 해서 우리 당이 세간의 비발치는 원성을 들으면서도 선거력사에서 전무후무한 추모표라는 낱말을 만들어내고 야당공조를 깨버린것도 조봉암의 정권인수를 막자는것이였습니다.

왜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조봉암에게 행정권을 안겨주어서는 안된다는 우리 민주당의 원칙론으로부터 출발하여서였습니다.

왜 이러한 원칙론이 제기되겠습니까?

조봉암이 바로 공산주의자인 까닭입니다.》

고병직이 좌석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파격적인 발언을 련발하자 다울링은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조봉암의 반대파들로부터 너무도 흔해빠지게 들어둔 소리다.

그런 소리를 한 당의 대표라는자가 아무런 정치적고려나 주저도 없이 거리낌없이 공개석상에서 던질수 있는가.

뿌리깊은 앙심이라면 너무 수준이하이고 정치적보복이라면 허무맹랑하다.

다울링은 놓칠세라 고병직의 주장을 걸어챘다.

《조선공산당창건자의 한사람이라는 경력때문인가요?》

《물론이지요. 그는 그때문에 감옥문턱을 처가집 문턱넘듯 했던 사람입니다.》

《당신은 감옥신세를 진적이 없었는가요?》

다울링이 천연스럽게 물었다.

《없었지요. 여기 모인 어르신들도 다 보증할수 있을것입니다.》

고병직의 대답에 거만과 배짱이 느껴져 다울링은 우선 밸통이 꿈틀거렸다.

다울링은 교만에 가까운 고병직의 거만스러운 꼴이 보기가 불쾌했으나 또다시 천연스럽게 그를 궁지에로 몰아갔다.

《그렇군요. 헌데 조봉암이 드나든 감옥은 누구들의 감옥이였던가요?

내가 알건대 당신들은 해방전에 감옥살이를 한 사람들은 례외없이 독립운동가에다가 애국자라는 칭호를 주었던것 같은데요.》

《예? …》

고병직이 다울링의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다가 그만에야 그게 함정이라는것을 알고 급급히 달아빼려고 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감옥살이를 해본 일이 없다는것은 사실 자랑거리가 못된다는것을 비로소 깨달은것이다. 현시대에 서울정치권의 지도적인물로 자격통과가 되자면 왜놈감옥에 적어도 두세번 들락날락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다울링은 오금을 박듯 한마디 훈계하는것으로 고병직의 도고한 자세를 단박에 허물어버렸다.

《똥묻은 개가 겨묻은 개를 흉본다는 소리가 있소.》

그리고는 고병직이 또 귀찮은 수작을 늘어놓을듯싶어 그를 무시해버리고 내무부 장관 정제관을 일궈세웠다.

고병직은 다울링이 슬쩍 던져놓은 미끼를 물었다가 여지없이 면박을 당하고나서 부아가 꼭뒤까지 치밀어올랐으나 상대가 호랑이수염같은 존재라 어쩌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정제관은 선임자였던 권태구와는 생김새부터 판판 달랐다.

권태구는 언제나 막 두드려잡은 부엉이처럼 머리칼이 부드드해가지고 다녔으나 정제관의 머리는 언제나 동백기름에 절어있는듯 뒤로 찰싹 붙어 윤기가 자르르 돈다.

항아리몸통이던 권태구와는 달리 허리가 이깔나무밑둥처럼 미끈하고 말씨 또한 부드럽고 말도 재미나게 굴릴줄 안다.

해방전에 일본의 명문대학이라는 도꾜제국대학에서 법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까지 따온 인물이라 프란체스까도 몇번 자리를 같이해보고나서 이제야 내무가 제대로 들어앉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정제관은 다울링의 눈길을 받으면서 될수록 여유작작하게 대응하려고 애를 썼다.

정제관은 조봉암문제와 관련하여 리기붕이나 고병직처럼 절박한 리해관계에 얽혀 심술을 부릴만 한 리유가 없었다.

다만 정제관은 이런 자리에서 자기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권한이 없으며 오로지 미국이나 리승만의 의향을 따를뿐이고 특히 리승만의 감정과 립장에서 출발한 발언을 해야 한다는 심복부하다운 자세를 가지고있을뿐이였다.

미국의 립장은 다울링의 말을 들어보면 모호하다.

어느쪽을 지지하는가? 조봉암말살인가, 존속인가?

리승만의 립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알고있다.

얼마전에 리승만은 정제관에게 특별지시를 준적이 있었다.

《이봐 내무, 권태구가 똑똑히 일을 못하구 비명에 죽었어. 조봉암의 주리를 틀어놓으라고 했는데 아직도 펀펀해있단 말이야.

인차 진보당 중앙을 결성한다는데 이제 그게 지방까지 일사불란하게 쭉 만들어지면 자네 일이 얼마나 고단해지겠는지 생각해봤나?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말일세.》

그때 정제관은 꼬리가 좌우로 약간 들린 눈을 껌벅거리기만 하였다.

치고 부시는데서는 서울장안에 자기를 따를만 한 주먹잡이가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호통치던 권태구와는 달리 정치적감각이 예민해서 주로 내무계통에서 모사로 활약하여온 정제관이였으나 아직은 리승만의 의중을 함부로 넘겨짚을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래서 정제관은 조용히 아뢰는수밖에 없었다.

《각하께서 가르치심을 주십시오. 저는 오로지 따를뿐이옵니다.》

사실상 가장 교활한 자기보신이고 꾀바른 아부였다.

뒤날에 차례질수도 있는 책임과 그로부터 얻게 되는 초달을 자기에게 넘겨씌우려는 정제관의 간사한 말장난질이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있는 리승만에게는 공손하기 이를데 없는 심복의 충직한 자세로만 비쳐들었다.

그래 상전다운 도량과 현명성을 보여주고싶어 자못 승이 나서 어깨를 다독여주며 가르침을 주기 시작하였다.

《그건 4대국회선거를 위한 준비야. 4대국회를 깔고앉자는 수작이야. 국회를 진보당에 빼앗길수 있나?》

《안됩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충의가 철철 넘쳐나는 부하답게 정제관이 주먹을 쳐들고 소리질렀다. 이럴 때는 음계가 높을수록 상전의 환심을 사로잡는 법이다.

《그렇구말구. 안되지… 국회를 빼앗기면 대통령감투도 헛된거야. 내가 부산에서 얼마나 졸경을 치르었는지 임자는 다 알탁이 없어.》

《념려마십시오. 제가 막아내겠습니다. 4대국회선거 역시 권태구내무가 전번 선거를 치르었듯이 이겨내겠습니다.》

《허 이 사람아, 그 사람 본따를건 하나도 없네. 내무가 주먹패만 돼서는 안되는거야. 그래서 이번에 식자가 있는 임자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거야.》

《방략을 만들어내겠습니다.》

《뭘, 방략은 서있지. 선거때가 돼서야 복닥소동을 벌려 세상 웃기지 말고 지금부터 정신을 번쩍 차려서 잡두리를 해야 하는걸세. 임자들은 꼭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판단 말이야.

방략이라는건 별게 아니야. 그게 뭔지 알아? 조봉암과 진보당을 짓눌러버리는거야. 짓눌러… 숨도 못쉬게… 그게 방략이야.

원체 일전에 벌써 김창룡이더러 아예 제껴버리라고 했는데 그 녀석이 범 본 아낙처럼 벌벌 떨다가 기회를 놓치구 제가 먼저 뒈졌거던. 자네 일이 뭔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이번 선거를 치르고나서 조봉암이 아예 불가사리같은 인걸이 됐어. 무엇이든지 못할 일이 없게 됐다는걸세. 하, 인걸이야. 인걸일세. 그 사람이 이제 이 우남의 어깨를 딛고 자네 목칠 날이 올걸세.》

《각하, 황송합니다. 너무 심뇌하지 마십시오.》

《하, 이 사람아! 일은 고약해져가는데 이 우남더러 심뇌는 하지 말래, 저들은 팔짱 끼고 목 떼울 날만 기다려… 어쩌자는거야?!》

《저희들이 알아서 해내겠습니다.》

《그러니 임자네 일거리라는것이 무엇이겠나. 조봉암의 주리를 틀어놔야지. 그 다음에는 모여드는 놈들을 쳐갈겨서 조봉암의 팔다리를 잘라버리는걸세. 자네 솜씨를 어디 두고보세.》

이게 리승만과 나눈 대화의 전부다.

(이걸 그대로 미국대사에게 내들어도 일없을가? 아니 리박사는 당초에 대사의 승인도 받지 않고 그런 방략을 세워놓았을가? …)

지금 정제관에게는 리승만의 뜻에 알맞도록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방략이 크게 선이 그어져있다.

(좋기는 리승만의 임기기간만이라도 조봉암을 사회와 격페시켜놓는것이다. 이제 기회를 보아가다가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해외에 나가 살도록 추방령을 내리든지 아니면 정 부득이한 경우에는 어느 무인도에라도 쫓아보내 현대판 류배살이를 시키면 된다. 이걸 대사에게 그대로 말해도 될가? 그리고 고병직이 있는데서 그대로 토설해도 될가?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했는데 저 절구통같은 놈팽이가 심술이 나면 그걸 턱에 걸고 협박해올수 있다. 그것도 난사가 아닌가.)

정제관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등심에 땀줄을 세우고있는데 리승만의 마른기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기 등뒤에 와 박히는 리승만의 비수같은 눈총을 느끼며 서둘러 말을 시작하였다.

《저는 내무부 장관의 책무를 실감하면서 대사각하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답을 드리고저 합니다. 앞으로 저는 임기 4년동안 국가존망과 관련한 두가지의 대사를 치르어야 합니다. 그게 뭔고 하니 58년도에 있게 될 국회선거와 60년도에 치르게 될 대통령선거입니다. 그런데 올해나 래년도에 추진위원회라는 헝걸써한 물건짝을 버리고 중앙당과 지방당까지 일사불란하게 만들겠다고 주먹을 부르쥐고 움직이고있으나 그를 봉쇄하기 위해 벌어졌던 민주대통합놀음은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조봉암의 선언이 말잔치가 아닙니다. 진보당의 체모가 완전히 형성되면 우선 국회부터 조봉암의 거수기가 될겁니다. 전번 선거에서는 사실상 우리 내무부가 발바닥이 닳도록 뛰였기에망정이지 어림있는 일이였습니까?!》

《어험-》

리승만이 다시 거드름스럽게 지어내는 마른기침으로 정제관의 말허리를 찍었다.

(이크! 내가 이 무슨 실언인가.)

정제관이 리승만이쪽을 흘끔 돌아보았다. 령감이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잡아먹을듯 뜯어본다.

자기의 대답이 리승만의 기분을 크게 잡쳐놓게 한것이다.

사태의 엄중성을 부각한다는게 리승만의 체면은 미처 계산하지 못하였다.

정제관은 마치도 등어리에 감겨드는 채찍소리를 들은듯 흠칫하였다. 말머리를 급기야 돌려세웠다.

《물론 이것은 진보당의 수작이기는 하지만… 아, 그러한즉 이번에 조봉암의 진보당의 체통이 굳건해지면 4대국회는 여불없이 란투장이 될것입니다. 다음기 선거도 위태로워질수 있을것입니다.

지금 현시각에서 조봉암을 어떻게 하든지 2선으로 밀어내고 진보당을 짓눌러야 합니다.

내 개인의 의견을 감히 내놓는다면 조봉암을 미국이나 서유럽쪽에 서너해 쫓아보내면 서울정계가 좀 가라앉을것 같습니다.

서울지경에 배겨내지 못하도록 안팎으로 압을 조성하면 그 문제는 쉽게 성사되리라고 봅니다.

하여튼 우리 내무부는 진보당세가 확대되는것을 저지시키는것을 당면한 과제로 설정하고 총력을 기울일것입니다.》

제가 펴놓은 방략에 스스로 심취되여버린 정제관은 마치도 다울링앞에서 맹약을 다지듯 기름기도는 머리빡우로 주먹까지 쳐들어보이며 기세를 올렸다.

다울링이 자기 말에 무엇인가 동의한다는듯 고개를 주억거리는것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그러자 정제관은 재빨리 돌아서서 리승만에게 량해를 구한다는 의미에서 허리를 굽석거리고 자리에 앉았다. 리승만은 여전히 시푸녕스러운 표정이였다.

그것이 정제관을 불안하게 하였다.

물론 내무부 장관이라는 행정부의 노란자위같은 자리를 따자면 미국대사의 결재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미국이란 장관들에게 있어서 한다리 건너있는 존재이다. 리승만이야말로 눈앞에서 늘 얼른거리는 주먹이고 목에 걸어놓은 올가미를 쥐고있는 형리이다.

다울링은 세사람의 견해가 조금씩 변형되기는 했어도 하나의 곬으로 흘러가자 모임을 결속하고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

갑자기 리승만이 손을 내들었다.

《나도 한마디 합세다.》

리승만은 때마침 접대부가 차잔을 들고 와서 놓아주자 천천히 목을 추기였다.

《대사! 난 이 문제와 관련하여 대사의 립장 다시말하면 미국무성쪽의 견해를 먼저 알고싶습니다.》

《나의 견해요? … 나는 자기 견해를 세우고있는중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의 허심탄회한 설명을 듣고싶어 찾아온것입니다.》

《난 다울링대사가 부정적이라는 말을 들은바가 있소.》

리승만이 상대의 진속을 저울질하듯 거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자 다울링은 당황해졌다.

다울링은 순간 8군방첩대장 버드대좌의 으스스한 상판부터 떠올랐다.

며칠전에 론의한 문제를 벌써 리승만에게 그대로 통보하다니…

버드가 저들이 벌리는 공작에는 리승만측의 립장도 반영되여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헌데 이들의 밀착이 이리도 가까울수 있을가?

대사와의 극비회동에서 제기된 자료까지 넘겨주다니…

다울링은 생각지 않게 뒤머리를 한대 쥐여박힌 기분이였다.

아마도 버드는 다울링이나 롤만이 이러저러하게 반대하고있지만 자기의 립장은 흔들림이 없을거라고 리승만앞에서 떠들어댔을것이다.

그러나 다울링은 리승만의 엉큼한 수작에 얼마든지 대처할수 있는 수완과 담기를 가지고있었다. 아무리 말장난을 부리고 심술을 쓰고 롱간을 부려도 어쨌든 리승만은 자기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주구배에 불과한 초라한 인생이 아닌가.

그는 리승만의 비틀어진 속을 달래주면서도 상전으로서의 처신에 알맞도록 재기있게 언변을 굴리기 시작하였다.

《대통령각하, 나는 외교관이올시다. 외교관에게는 자기의 주장이 없지요. 따라서 국무성이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세우지 않은 이상 그 모든 뒤말은 험구쟁이들이 지어낸 군사설이거나 억측에 불과하다는것을 리해하여주기 바랍니다.》

네가 버드에게서 들은 소리쯤은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주고받는 한담정도라는것이다.

리승만은 발빠르게 얼른 물러서는 다울링의 약삭바른 응수가 미덥지 않아 입을 쓰겁게 다시였다.

《예,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속담에 이런게 있지요. 불 안 땐 굴뚝에서 연기 나올가, 허허허… 객담이라고 들어주시오. 그러면 나도 대사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몇마디 합시다.

난 지금 미국의 정치방식을 모델로 세워놓고 따라가고있소. 미국의 정치방식에서 우리가 삼켜야 할것은 뭔고? 그건 보수량당을 쌍기둥으로 버티여놓고 그우에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얹어놓고있는거요. 나는 이 땅에도 장차 그러한 정치방식이 실현되는것이 가장 리상적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통치권에는 진보당과 같은 색채를 가진 좌경적인 급진혁신당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에 있는 공산당이란 로동조합의 변종에 불과한것으로서 권력층에는 접근조차 못하고있습니다. 내 말이 틀렸소? …

그런데 왜 미국은 지금 이 서울에서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고있는 공산당계의 진보당의 존재를 허용하려는가? 북이 자기의 정치적영향력을 최대로 활용하려고 하는 이 땅에서 그래 그러한 모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단 말이요? 미국의 정치가들이 우리보다도 더 계산하고있겠는데 난 정말 모르겠소. 이 서울땅에도 맥카시즘이 다시 불어야 될것 같소.

아마 이번 선거에서 우리보다도 당신들 미국이 더 큰 불안과 우려를 가졌을거요. 그래 조봉암과 그의 체질을 닮은 진보당이 집권하여 공산사회를 향해 정치의 노대를 저어가는것을 미국이 정말 원한단 말이요?

조봉암이 공산당이라는 감투를 뒤집어쓸가봐 3세력이요, 3의 길이요 하면서 요술을 부리는데 뒤집어보면 그것도 뻔하지요.

미국은 반미세력과 사각테이블에 대좌해서 딱딱한 분위기속에서 갑론을박하는것보다는 아무튼 부드러운 쏘파에 앉아 속말도 꺼릴게 없이 주고받는 친미세력과의 안정적인 협력관계가 더 유익할거요. 안 그렇소, 대사?》

《거야 여부가 있습니까?》

다울링은 저도 모르게 입귀가 벙그레 들렸다.

리승만이 나이가 한물진 뒤여도 아직도 사람을 주무르는 장끼가 있는것 같다. 정치를 굴리는 단수도 있다. 따져보면 모순투성이요, 심술기짙은 말인데 상대의 혼을 뽑아내는 묘술이 있고 설득력도 있다. 그리고 그 비유도 직설적이기는 해도 참 기묘하면서도 신통하다. 사각테이블과 쏘파라…

《바로 그런 세력이 이 서울땅에서 누구들이요? 조봉암이 설사 반공과 친미의 길을 걷는다고 하여도 미국은 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사이좋게 지내기가 매우 버겨울것이요. 그러니 결론이 다르게 나올수 있는가.

미국으로서는 진보당이 더 뿌리내리기 전에 조봉암과 진보당을 제거하는것이 득책임에 틀림없소. 버드대좌나 미군부쪽 사람들이 쉽게 리해하는걸 어째서 미국무성의 정책두뇌들이 스치고있는지 나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요. 버드대좌네는 벌써 움직이였거던. 나도 그게 현명지책이라고 손을 들어주었소. 헌데 미국무성쪽에서는 여론이 어떻다고 볼부어있으니 어쩌자는거요? 조봉암이 역시 수완이 있고 손탁이 드센 놈이라 완력으로 밀어붙여 버드대좌가 손들고 물러서기는 했지만 결단코 돌아앉아서는 안될 일이 아닌가.

조봉암은 한번 으르릉거리면 산하를 울리는 배짱드센 인물이요. 그 사람을 그냥 놔두어보시오. 나는 이것이 무섭소. 미국도 물론 무서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국대사는 더욱 그리해야 될줄로 압니다. 서울정치가 소란스럽고 서울땅이 흐물거려야 대사에게 좋을건 하나도 없을거요. 반공도 친미도 이 우남이 하는게 미국으로서는 썩 소망스러울거요. 내 말을 명심해주시오. 대사, 내 할 말은 이게 다요.》

다울링은 마침내 소박받은 아낙네의 설분처럼 역겹기만 하던 리승만의 장황한 궤변에 끌려들어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깊이 숙여보였다.

정치의 속성과 통치철학을 깊이 헤아리는 솔직한 론조가 사뭇 귀에 쏙쏙 들어온다. 곡절 많고 길다란 인생체험으로 터득한 로장다운 일가견에 반론을 붙여볼수 없다.

한편 속으로는 여전히 자기의 집권을 도와달라고 애걸하는 늙은이의 속물근성에 구토감이 생겨남을 어쩔수 없었다. 이것은 로골적인 미국에 대한 아부이다. 그래도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이다지도 비굴한것일가. 이렇게 해도 아래 심복부하들앞에서 자기 체면을 세울수 있을가.

저보다 더 골수까지 젖어있는 친미분자를 꼽아보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제 입 싹 씻고 해대는 이런 두상을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았으니 서울정사가 바로될수 있는가.

다울링은 이런 인간추물에게 의거해야 하는 미국과 미국의 현지대표인 자기의 처지가 가련해보였다.

(사실 리승만은 미국의 리용물에 불과하다. 그 리용물의 쓸모가 이제는 한계점에 이른것이 틀림없다. 쓸모없는 리용물에 의지해야 하는것이 미국의 비극이다.

어찌하여 미국이라는 세계초대국이 애당초 이런 엉큼하고 변덕스럽고 몰지각한 늙다리를 내세워 자기의 리권을 지키게 하였을가? 이 나라에 정말 이렇게도 인물이 없어서일가?

권력의 자리를 지키느라고 제 겨레를 타국에 볼모로 섬기려 헤덤비는 인간, 이런 인간페물과 손을 잡고 감독노릇을 하는 자기도 꼭 알콜에 중독된 인간이나 다를바 없다.

같은 값이면 이따금 뒤발질도 하고 뿔질도 해대는 인간을 상대역으로 둔다면 그를 후려가야 하는 대사일도 한결 의젓하고 보람도 있을것 같다.

그래, 그렇단 말이야… 태가락부리는 계집다루기가 달라는대로 주는 계집보다 한결 재미나는 법이야.)

왕청같은데로 가지치는 생각에 다울링은 제풀에 히죽거렸다.

그러나 그는 인차 도리질하였다.

(아니, 그렇지도 않지… 괜히 헛기운 뽑을거 있나? 이런 고급한 천치와 맞다든게 다행이 아닐가?

철저한 주구배, 손짓, 눈짓으로도 다룰수 있는 꼭두각시, 밟아도 꿈틀거리지 않는 송장같은 인간…

그래, 바로 그것이다. 리승만의 그 수작질은 참 엉큼도 하고 명석하기도 하다. 부드러운 쏘파에 앉아 속말도 주고받을수 있는 숭미세력이라 했지.

그래, 이 리승만이야말로 미국의 리해관계에 가장 알맞는 존재다. 그러니 나 역시 리승만을 비호하고 그가 임기를 무난히 치르도록 주변을 지켜주고 정적들을 쳐갈겨주어야 한다.

무례하고 사납기는 해도 버드의 주장이 정치의 도덕성을 력설하는 롤만의 점잖은 립장보다 더 현실적이며 필요하다. 그리고 보다 미국적이다.)

이제는 다울링도 자기의 견해를 확고히 세울수 있었다.

(롤만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나는 미국대사로서 미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선택을 존중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롤만은 이것을 경시하고있다.

미국의 국익을 내놓고서는 이 나라의 정치의 도의나 이 나라 사람들의 감정이나 의식은 고려할 여지도 없다.

모든것은 미국의 국익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정치와 외교의 지주로 되고있는 실존주의의 대명제가 아닌가. 조봉암도 진보당도 현시점에서는 서울정치무대에서 퇴장시켜야 한다.)

다울링은 여러모로 의의있는 회동이였다는 한마디만을 리승만에게 남기고 경무대를 떠났다. 복잡한 심경으로 찾아왔다가 거뿐하게 가는 걸음이였다. 그리고 만족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그는 자기 서기가 무겁게 안고 가는 악어가죽가방안에 딸라가 가득 차있다는것을 냄새맡고있었던것이다.

리승만은 프란체스까에게서 넘겨받은 열쇠를 쥐여주면서 귀띔하였던것이다.

《댁에 가서 부인과 함께 열어보시오. 부인이 서울살림을 펴자면 쉽지 않을거요. 약소하지만 우리 마미의 성의로…》

다울링은 경무대에서 진행한 담화내용을 상기하면서 사색에 잠겨있다가 차가 한강다리를 넘어서자 짤막히 지시하였다.

《대사관으로!》

그러자 서기가 물었다.

《그럼 신당동에는 가시지 않으렵니까?》

지금 신당동에 있는 조봉암의 집에는 롤만이 가있을것이다.

다울링은 아침에 대사관을 떠나올 때 서기에게 경무대비서실에서 일을 본 다음 신당동의 조봉암집으로 가자고 지시하였던것이다.

다울링은 시계를 들여다보고나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전화로 롤만을 찾아 대사의 일정이 달라졌다고 전하시오. 국무성에서 긴급지령이 왔다는 리유로 설명하시오. 조봉암에게는 다음기회를 마련하잔다고 하시오.》

다울링은 이제는 조봉암을 정계에서 제거할데 대한 자기 견해를 수정하고싶지 않았다. 따라서 조봉암을 만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서기는 전번 선거에서 남조선사회는 물론 미국의 정계에도 돌풍을 일으킨 조봉암의 집을 방문하는 기회를 놓치는것이 아쉬워 심드렁해서 대꾸하였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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