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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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중이 일어나서 회의를 계속하겠다고 선포하였다.
조봉암이 회순에 따라 결정채택을 위하여 일어섰다.
그는 좌중을 엄숙한 눈빛으로 천천히 일별하고나서 다소 흥분한 소리로 선언하였다.
《아까 어느 동지가 주장하였소. 나도 당수로서 그 말에 찬성하여 반복하려고 합니다.
여기는 진보당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진보당의 회의장이요. 따라서 당결정을 따르지 않을 사람은 이 방을 떠야겠습니다. 당의 지향과 어긋나게 사고하고 당의 근본원칙에서 탈선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더이상 있겠습니까.
우리를 따라오지 않을 사람들을 무한정 기다릴수는 없는거요. 우리는 그들에게 거의 반년이라는 시간을 주었소. 더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지 않겠소. 그러지 않아도 우리 진보당은 되지 않을 민주혁신당의 창설을 기다리느라고 제일 중요한 대목을 놓쳤고 크게 후퇴하였소. 더는 밀릴수만 없소.
다시한번 강조하오. 진보당을 따르지 않을 사람은 이제 곧 이 방에서 나가시오. 자기의 견해를 받아줄수 있는 집단을 찾아가시오.》
북받쳐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느라고 무진 애를 쓰면서 조용히 내뱉은 조봉암의 말은 삽시에 가뜩이나 긴장해있던 응접실을 꽁꽁 얼어붙게 하였다.
서정후도 심운이도 그리고 윤기중이며 조직간사며 모두가 조봉암이 뜻밖에 꺼내놓은 날카로운 주장에 깜짝 놀랐다. 드센 방망이에 뒤통수를 한대씩 얻어맞은듯 얼떨떨해서 조봉암을 멀거니 올려다볼뿐이였다.
조봉암은 준엄한 얼굴로 거연히 서있었다. 이미 결심은 입밖으로 튕겨나갔다. 그걸 다시 거두어들일 생각은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방안의 공기가 당장 터져버릴듯 한껏 팽배하여졌다.
서정후의 낯빛이 창백해지고 대머리에 뿌질뿌질 식은땀이 내돋았다. 수건을 꺼내여 신경질적으로 대머리를 벅벅 닦던 그는 갑자기 사레가 들린듯 줄기침을 깇었다.
심운은 복장이 터져나갈것 같은 분통을 감추느라고 이를 사려물고 조봉암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쌍-프》작전이 바야흐로 결속단계에 이르렀는데 불의의 역공세를 받게 된것이다. 조봉암의 예리한 판단과 배짱있는 용단에 의하여 그동안 면밀하게 준비하고 아슬아슬하게 밀고나온 작전이 다시 수습해볼 여지가 없이 틀어지고있는것이다.
지금쯤 미군사령부 방첩대장 버드대좌의 련락원이 아지트에서 눈이 까매서 앉아있을것이다. 《쌍-프》작전을 마지막단계에서 결속한다는 소식을 날리고 왔으니 버드대좌도 결말보고를 초조하게 기다리고있을것이다.
심운은 조봉암이 자신의 분노를 짓누르고 극히 부드럽고 담담한 어조에 실은 준엄하고 드팀없는 선고가 그 모든것을 일격에 산산이 짓부셔놓았다는것을 뼈아프게 실감하고있었다.
(에 쌍, 판은 더럽게 됐군! … 저놈을 어떻게 해야 좋담! 다 된 일이 이렇게 흙담 무너지듯 손써볼 여지도 없이 끝나버리다니! …)
심운은 혼비백산해져서 조봉암에게 귀먹은 저주를 퍼부었다.
한편으로는 조봉암의 신통력과 담기에 혀를 찼다.
(다 기울어지게 된 위기에서 성큼 솟아오르다니. 이건 정말로 너무 예상밖이다. 거물은 거물이다.)
눈알이 곤두서고 가슴복판으로 고드름이 쭉 뻗치는듯싶다.
(어휴, 나는 어떻게 한다? 그냥 진보당에 버티여있어야 되겠는데… 버드가 알면 부산을 피우며 그냥 진보당으로 때려몰겠는데 이제는 잡아볼 연줄마저 다 끊어지지 않았는가.
당초에 내 의사를 정면에 로출시키는게 아니였는데… 죽일놈의 두상태기! 저 두상의 손아귀가 세지 못해 하는수없이 나섰더니… 다된 죽이라고 판단하고 마음놓고 주장을 폈다가 이렇게 오도가도 못하게 궁지에 빠질줄이야… 에, 이 일을 어찌한담…)
심운의 불안과 공포에 시커먼 막을 내려주듯 조봉암은 다시금 타협의 여지가 없는 짤막한 지령으로 방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진보당존재의 필요성을 접수하는 사람들만 남아주시오.》
서정후는 자기 의도대로 회의가 흘러가는것 같아 은근히 속으로는 쾌재를 올리다가 조봉암의 뜻밖의 역공세에 화닥닥 놀랐다.
조봉암의 위압적인 어조에서 이제 다시 흥정을 붙여볼 빈틈이 없다는것을 깨달은 서정후는 그만 발끈해졌다.
《그렇다면 다들 물러나야지. 여기에 남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고…》
그는 좌중을 한바퀴 휘둘러보고는 인사도 없이 씽하니 찬바람을 일구며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회의장은 폭풍전야의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보다 난감해진것은 서정후의 주장을 따르던 10여명의 상무위원들이였다. 서정후가 문을 후려닫고 나가는 서슬에 가뜩이나 후두둑 속이 떨려나 전전긍긍하던 그들은 조봉암의 묻는듯 한 눈총에 오금이 저려서 닁큼 꽁무니를 뺐다.
빼곡이 들어찼던 방안에서 여러 사람이 자리를 내자 방안의 공기가 한결 너누룩해진것 같았다.
신창균이 창문을 열어 공기갈이를 하였다.
밖에서 신선한 바람이 쓸어들어와 담배내와 한숨으로 탁하여진 방안의 공기를 몰아내고 깨끗이 정화시켰다.
조봉암은 조직간사와 윤기중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 눈길에 도전하듯 윤기중이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나 부르짖었다.
《저나 조직간사를 저 무리속에 뒤섞어놓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참… 저는 죽산선생님의 단호한 결단을 지지합니다. 이미전에 그랬어야 할것이였습니다.》
그러자 방안에는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조봉암은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받았다.
《다행이요. 배신과 실책은 다른 의미가 있소. 그런데…》
조봉암의 엄한 눈길이 심운에게 가서 박힌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또 그 류창한 언변과 기발한 말의 유희로 청중을 업어넘기고 기어이 자기의 흉계를 실행할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혀 짐짓 오만상을 짓고 괴로움에 모대기는듯 한 시늉을 하고있는 심운의 속통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조봉암은 쓰거운 미소를 짓고 환멸과 증오의 가시가 돋힌 비양조로 권고하였다.
《심운이, 문은 열려있소. 가고싶은 곳으로 가시오. 아니, 가야 할 곳이 있겠지?!》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인식착오를 범하였습니다.》
심운은 재빨리 립장을 바꾸어 고개를 꺾어질듯 푹 떨구었다.
그는 다시금 속으로는 이 고비를 참아내야 하며 이제 들씌워질 수치와 모욕을 어떻게 하나 견뎌내고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꿰진 허울을 움켜잡고있었다.
여기서 쫓겨나면 버드대좌가 결코 용서하지 않을것이다. 노랑눈에서 뿜어져나오는 독기에 접할 때면 오싹해지군 한다.
그의 총명한 두뇌가 재빨리 회전했으나 용수가 나오지 않는다. 배를 튀겨볼 여력도 없지만 그렇다고 빌붙어봐야 공연한짓일것 같다. 평소에는 참기름을 바른듯 그리도 잘 돌아가던 혀바닥도 조봉암의 드세찬 반타격을 받자 졸지에 입천정에 가드러붙은채 꿋꿋해지고말았다.
그래도 이대로는 물러설수가 없었다.
이제 여기서 쫓겨나면 내무부쪽에서도 가만있지 않을것이다. 선불로 제공한 정보비를 당장 토해놓으라고 윽윽거릴것이다.
지금껏 심운은 버드와 내무부쪽에 량다리를 걸쳐놓고 량쪽에서 돈을 타먹고있었다. 버드에게는 정식요원으로 등록되여 비밀공작에 종사해오고 내무부와는 권태구때부터 줄이 이어져 드문히 조봉암과 진보당의 동향자료를 제공하군 하였다. 그들과의 관계는 건건 철저한 상적거래일뿐이다. 생사여탈권을 쥐고있는것은 물론 버드쪽이다.
심운은 비밀공작요원들의 운명이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목대가 성해가지고 비밀권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인물이 몇되지 않는다.
우선은 상대방에 의하여 비참하게 생을 끝내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기가 몸을 담근 진영의 이단자로 몰려 볕을 보지 못하고만다.
심운은 울며 겨자먹기로 무슨 술수를 쓰든지 내키지는 않아도 그냥 늘어져붙는수밖에 없었다.
심운은 마치도 버드대좌앞에 나서기라도 한듯 조봉암이 버티고 선 앞쪽으로 걸어가 그의 발부리에 이마가 닿도록 허리를 깊이 꺾었다.
그리고는 숨이 꺼질듯 한 어조로 꺼이꺼이 용서를 빌었다.
《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저는 사실 이모저모로 당수와 진보당에 리로울듯싶어서 서정후령감의 발기를 지지했던겁니다.
그리고 서정후령감이 이건 당수와 큰 선에서 합의가 된 문제라고 담보하기에 숭어 뛰니 망둥이도 뛴다는 격이 되였습니다.
제 어찌 선생님께 다진 맹약을 버릴수 있겠습니까?!
제 지금껏 선생님과 우리 진보당에 언제 한번 욕된짓을 한게 있습니까.
잘 모르고 한짓이니 저에게 기회를 한번 주십시오.》
심운이 이렇게 마디마디에 후회와 자책을 담는듯 노죽을 피우자 의협심이 강하고 속이 깊은 우달수가 조심스럽게 건의하였다.
《선생님, 선전간사의 청을 받아주시는게 어떻습니까?
그의 말대로 기회를 한번 주어봅시다. 실은 저 역시 동요했더랬습니다. 그것이 신의를 저버리는것으로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심운간사의 자기비판을 중히 여기시고 그에게도 반성할 시간을 주는것이 어떻습니까? 이것은 우리 진보당의 영상관리에도 좋을듯싶습니다. 객적은 말로 용서는 감복과 보답과 충정을 낳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통합문제토의과정에 손상된 당의 영상을 돋우고 불리한 형세를 역전시킬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달수는 조봉암이 이 자리에서 자기를 속 간지럽게 비난하고 도전해나선 심운의 배신을 용서해주는것이 당수의 훌륭한 인덕을 보여주는 도량이라고 간청을 하고싶었다.
조봉암은 우달수의 마음을 리해하고있었다. 평소에도 자기 당수의 영상관리를 위하여 자심하게 마음을 써오는 지극한 사람이다. 진보당의 영상이요 뭐요 하지만 사실은 당수에 대한 세심한 념려이다. 그는 동지 한사람을 위함이라면 천리 불속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다.
이 자리에서 우달수만이 꺼낼수 있는 제의였다.
여러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우달수의 제기를 받아주었으면 하는 여리고 선한 마음들이 느껴졌다. 동료의식도 있고 조봉암의 립지에 대한 충의도 깔려있다.
그러나 조봉암은 단호하게 일축하였다.
《안되오! 우리가 저 사람과 지금 비로소 결별하는게 아니요.
이미전에 저 사람은 우리와 딴 길을 걸어왔소. 동상이몽이 바로 그게요. 앞으로도 우리의 길은 합쳐지지 않을거요.
심운이! 여기는 임자가 있을 자리가 아닐세. 그건 자신이 너무 잘 아는바이니 임자앞에서 구태여 밝히지 않겠네. 우리 당을 위하여 나가주게. 나와 우리 동지들을 더이상 우롱할 생각은 걷어치우게. 더이상 남아있어야 우리에게는 백해무익이야!》
심운은 조봉암의 반석같은 의지가 더는 드티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아차렸다. 그에게서는 빌붙어볼수 있는 뿌다귀를 조금도 찾아낼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도 애원이 파들거리는 눈길을 굴렸으나 측은해하는 빛은 보이면서도 인차 외면하여버린다.
(하는수 없다. 좀 뜸을 두어보자. 오늘은 물러서는게 수다. 한걸음 비켜서자. 조봉암이 지금 모든것을 알고있는게 틀림없다. 여기서 더 비벼봐야 헛짓이다. 어느 누구도 조봉암이 일단 내린 결심을 흔들지 못할것이다.)
《그럼…》
심운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허리를 여러번 굽실거리다가 물러갔다. 그에게는 쫓겨가는 뒤모습도 곱게 남겨야 할 필요가 있었던것이다.
《유다같은 놈! 우리 당을 제껴보겠다구?! 세살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언제면 개버릇 버릴가!》
심운의 발걸음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오자 참아오던 조봉암의 격노가 드디여 터졌다.
또 한번 놀란 여러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자기를 이겨내기 힘들어 하는 조봉암의 처연한 모습에 사람들은 누구나 의아해하였고 불만스러워하였다. 어쨌든 심운이는 본인의 말대로 지난 나날들에 고락을 같이해온 전우였고 조봉암이나 진보당에 한번도 해를 준 일이 없지 않았는가, 쫓겨가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한맺힌 욕을 뿌려던질것까지야 있는가 하는 심리가 흘렀다.
우달수도 신창균도 지나친 감정의 표현이라고 랑패스러워하는 표정이다.
원체 조봉암은 자기 감정의 밑바닥을 좀체로 드러내지 않는다. 면전에서 가해지는 시비중상이나 더더구나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에 대하여서는 아무리 참기 힘들어도 혼자 묵새기였으며 거기서 교훈을 찾아내군 한다. 그의 전우들도 자기 당수의 그러한 품성을 사랑하였고 그에 습관되여왔다.
그러나 그는 아첨과 배신으로 철면피하기 그지없는 심운의 노죽에는 자기를 다잡지 못하고 흥분하고있는것이다.
조봉암은 자기에게로 던져지는 참가자들의 예민한 시선들에서 그들의 속심을 다 읽고있었다. 리해와 비난과 은근한 질시의 색갈을 다 찾아냈다.
심운을 수하에 받아들인것도, 그에게 중임을 맡겨준것도, 그에게 속아넘은것도 다름아닌 자신이다. 오히려 여러 사람들의 타매의 눈길이 고맙다.
그는 주머니에 마구 꾸겨넣었던 봉투를 꺼내 속지를 펴들었다.
《창문들을 닫으시오.》
창문옆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창문을 다 닫았다.
《회의를 계속합시다. 안건은 진보당의 진로에 대한 문제요. 당회의운영에서 나타난 나의 독선적이며 돌발적인 처사에 대하여서도 함께 토의합시다.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보고는 간사장이 하시오.》
《예? 제가 말입니까?》
얼굴빛이 온통 꺼칠해있던 윤기중의 가뜩이나 큰 눈이 휘둥그래졌다.
우선 보고문이 준비된게 없다. 생각해둔것도 없다. 지금 꺼내놓을 말도 없다. 준비하여온것이 있다면 당의 해체와 관련한 실무적대책들이였다.
윤기중은 지난 사흘낮 사흘밤 조직간사와 무릎을 맞대고 뜬눈으로 이어왔다.
어떻게 하여야 새로 조직되는 당의 체질을 진보당과 일치시키겠는가. 중요한것은 당기구의 조직과 간부문제다. 거기서 진보당출신간부들의 발언권을 강화하는것이 기본이다.
중요한것은 조봉암의 2선후퇴를 용의주도하게 보장하는것이다. 다음기 《대통령선거》에 조봉암의 출마를 무조건 보장하도록 명분을 세워놓고 물러나도록 하여야 한다. 서정후를 비롯한 일부 세력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묘수를 내놓아야 한다.
그들은 이 문제에 힘을 넣고 밤샘을 하였다. 비교적 나름으로 당추진위원회 상무위원회의 동의를 받아낼수 있는 방안을 준비해왔다. 이제 그것은 휴지장이 되였다. 필요없을뿐더러 당에 해로운것이 되였다. 그걸 위해 련 사흘 고민하고 속을 썩이다니.
그런데 이제 나서서 무슨 말을 할게 있단 말인가.
당의 진로? … 할 말이 없다.
보고라고 내놓을 그 무슨 주장도 얘기거리도 없다. 있다면 커다란 오유에 대한 반성, 자책, 고민, 괴로움뿐이다. 더구나 자
기가 이 판에 와서 간사장의 직함을 가지고 보고자로 나설 체면이 있는가.
윤기중은 우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으나 얼이 빠진채 조봉암을 지켜볼뿐이였다.
조봉암의 말은 례사로웠다.
《그렇소. 간사장이 하시오. 보고문은 준비되였소. 이걸 그대로 전달하는것으로 보고를 대신합시다. 자, 전달하시오. 거기서 필요한것만 선택하여 전달하시오.》
조봉암은 그에게 쥐고있던 속지를 넘겨주고 자리에 앉았다.
윤기중은 조봉암이 넘겨준 《사모하는 민중의 벗》이 보내온 한장의 정보문을 천근만근인듯 무겁게 받아들었다. 한글자한글자에 온 심혼을 모아 또박또박 강약을 주어 읽어내려갔다.
한 문장을 지나가자 부지중 그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종이장을 받쳐든 두손도 떨리기 시작하였다. 길지 않은 통보문에 담겨져있는 무서운 배신과 더러운 패륜에 심장이 와들거렸다.
방안의 분위기도 또 한돌기의 회오리가 지나간듯 완전히 돌변되였다.
윤기중과 함께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가슴들이 들먹거렸다.
《전달하시오. 마저… 다 들어야 하오.》
윤기중이 더는 읽지 못하자 조봉암이 준절하게 타일렀다.
크지 않은 그 목소리가 커다란 메아리를 일으켜 방안의 어수선한 공기를 일격에 준엄하게 얼어붙게 하였다. 서정후와 심운일파를 내쫓아버린 조봉암의 단호한 응징이 다소 야박한게 아니냐고 속이 쭝해있던 사람들도 숨소리를 죽이고 윤기중이 떠듬떠듬 읽어주는 음모군들의 추악한 정체와 미국놈들이 벌려온 악랄한 모략에 치를 떨었다.
모두가 대경실색하였다. 다음에는 저마다 저주의 목소리를 높였다. 당수가 보여준 단호한 징벌이 쉽사리 접수되였다. 당수가 단행한 대담무쌍한 단병접전이 천만다행스러웠다. 무등 고마워졌다.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윤기중이 정보의 출처는 밝히지 말라는 조봉암의 암시대로 마지막 글줄을 생략하고 정보전달을 마치자 방안은 그대로 반대세력과 그에 놀아난 일부 당안의 인물들에 대한 격렬한 성토장으로 되였다. 윤기중이 자리에 무너지듯 앉자 토론들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앞을 다투어 격노를 터뜨렸다.
조봉암의 결단성있는 반타격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가 방안을 찌렁찌렁 울렸다.
방안에 규탄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윤기중과 조직간사의 고개가 더 깊이 떨어졌다.
조직간사가 가슴미여지는듯 한 자책과 후회를 더는 이겨낼수가 없어 갈린 어조로 자기비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 더 할 소리 없습니다. 그저 벌을 청하게 될뿐입니다. 그놈들이 거 뭐라고 했더라- 쌍… 쌍…》
그가 너무도 격한 나머지 인차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갑자르는데 참가자들속에서 누가 큰소리로 《쌍-프》라고 튕겨주었다.
《그렇지! <쌍
-프>지! … 시간을 끌다가 우리 당을 공중분해시키자는 작전이였다지요?! 바로 거기에 말려들어 숱한 손해만 봤습니다.바로 저같은 놈이 눈이 멀어 떨떨해진탓이였지요. <쌍-프>에 미물이 됐지요. 그놈들의 계교에 놀아나서 함정에 발을 들여놓은 이놈은 눈뜬 소경이였습니다. 이건 단순한 실책이 아니라 탈선이였습니다. 당적인 수양이 부족하고 안목이 무디고 신념이 부족한데서 생겨난 범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범죄입니다.
우리가 력사와 겨레앞에 얼마나 막중한 죄를 지을번 하였습니까?! 아니, 지었지요.
이제 와서야 명백해졌습니다. 아직도 우리 당중앙이 정식 조직되지 못하고 지방의회에 진출하지 못한것은 미국과 리승만이 끈을 쥐고있는 <거대야당>건설에 현혹되여 놈들이 의도하는대로 놀아난데 있는것입니다.
결국 놈들의 꾀바른 수작에 넘어가 우리 당수와 진보당제거작전에 동조했으니 참말로 제가 지은 죄는 막중합니다. 눈에다가 불초롱을 달고 살아야 할 조직간사라는게 이 꼴이 됐으니 저부터 징계하여주십시오. 그러되 내쫓지는 말아주십시오.》
이어 윤기중이 그냥 일어서려는것을 조봉암이 앉으라고 엄하게 눌러놓고 자기의 립장을 분명하게 내놓았다.
《실책으로 말하면 나에게 많소. 그로 인한 손실에 대하여 내가 우선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난 이번에 사실 당과 함께 내 문제가 처음부터 심각하게 상정되였기때문에 자기 체면부터 생각하면서 심히 관조적인 립장을 취하여왔습니다. 마음가볍게 2선이 아니라 아예 초야에 묻혀버릴 생각도 했지요. 이것은 사실상 탈선정도가 아니라 참호에서 도피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모두가 또 한번 정치의 키가 솟아올랐습니다. 원쑤의 흉계를 알게 되였습니다. 우리의 죄과를 이렇게 뉘우치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당을 지켜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새로운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눈물로 회계나 하고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아까도 강조하였지만 절대로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더는 놓쳐서는 안됩니다. 시간을 놓치면 기회를 놓치고 기회를 잃으면 당은 련속 수세에 빠져 더는 일떠서지 못합니다. 합법이라는 모자를 눌러쓴 민중의 당으로만 되면 우리는 무서울게 없습니다.
현 단계에서 우리의 목표는 바야흐로 고조된 진보당세를 계속 상승시켜나가는것입니다.
이렇게 합시다! 우선 우리 당 추진위원회를 시급히 수습정리합시다. 진보당청산을 요구하여 이 방을 나선 사람들은 상무위원회에서 내보냅시다. 아예 당적에서 제명합시다. 이 작업은 래일 윤기중간사장과 우달수부위원장이 서정후, 심운을 제외한 사람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한 후 래일 저녁에 그 결과를 가지고 매듭을 지읍시다. 만약 자기를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손을 다시 내밀어 포옹합시다. 아까 우달수부위원장이 말했소. 모르고 한 일을 놓고 죄인으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는 어찌하든 다음달중으로 지금까지 진보당의 간판을 걸고온 당추진위원회를 해산하고 중앙당결성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게 마무리되면 수난도 많은 이해가 지나갑니다. 래년 봄철부터는 지방당조직건설에 착수하여 전당적인 정연한 조직체계를 완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1957년이 지나갑니다.
이에 기초하여 1958년 4대국회선거에 리승만과 맞붙어봅시다.
분명 우리 당의 립지가 전국적판도에서 완성될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강대해지고 조직화된 력량을 가지고 1960년도에 진행될 대선에 당당하게 진출하여 민중의 심판을 다시 받아봅시다!》
조봉암은 열정적으로 자기의 정치구상을 굵직굵직하게 눈앞에 보듯 방불하게 펼쳐놓았다. 일단 결심이 서면 돌진적으로 밀고나가는게 조봉암이다.
박진력있는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짧은 연설은 참가자들의 우렁찬 박수에 여러번 토막이 나군 하였다. 누구나 신념과 패기에 넘쳐 파산직전에 있던 당을 건져내고 새로운 활기와 의욕을 북돋아주는 자기 당수에게 열렬한 축하와 지지를 보냈다.
아무 일에서나 조봉암은 해야 할 일이 결정되면 즉각 실행에 옮긴다. 주변에서 예산책정이요, 인원동원이요 하면서 신중을 기하자고 하면 껄껄 웃으며 타이른다.
《여보, 시작이 반이요. 시작을 해놓으면 되기마련이요. 승자는 달려가며 계산한다지 않소.》
그러면 일은 정말 돼가는것이다.
자기 당수의 이러한 사업전개방식과 속도와 기개에 습관된 참가자들은 거침없이 펼쳐지는 그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원스럽게 박수를 쳤다.
《마지막으로 부탁하고싶은게 있소.》
그는 전우들의 열띤 모습을 미덥게 둘러보며 간곡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여기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은 심운이나 방에서 나간 사람들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되겠다는겁니다. 글쎄 심운이야 원래 미국의 개노릇 하는자이니 변절이라는 말도 가당치 않소. 변절이란 원래 추악하며 인간성마저 상실한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누구든 변절이라는 더러운 락인이 인생에 찍히지 않도록 해야 하오. 만약 싸워나가다가 이러저러한 리유로 투쟁하기 베차고 자기희생이 두렵다면 어느때든지 찾아오시오. 우리는 그들에게 아량과 사랑을 가지고 문을 열어줄것이며 가능한껏 생계에 도움도 줄것입니다. 이건 자비가 아닙니다. 우리 당은 절대로 협애하지 않을것이며 매 성원들의 운명을 끝까지 맡아줄것입니다.
우리는 뜻과 정으로 뭉쳐진 당을 지향합시다. 뜻과 정! 바로 이겁니다! 민중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시작과 목표로 되여 뭉쳐진 우리 당의 당원들은 마땅히 뜻과 정으로 얽혀야 합니다. 저의 부탁은 이게 답니다.》
조봉암은 참가자들의 폭풍같은 박수에 묻혀 자리에 앉았다.
윤기중이 손을 들어 언권을 요구하였다. 이날 여러차례 발언기회를 가지려고 했으나 끝내 차례지지 않아 속을 썩이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전우들앞에서 벌을 받지 않고서는 견딜수 없는 그런 충동을 그냥 자제할수 없어 당수의 결론이 끝났으나 전례를 깨고 부등부등 일어나고야말았다.
조봉암도 윤기중의 타끓는 속을 헤아려서 이번에는 더 만류하지 않았다. 자기에 대한 울분으로 꽉 차있을 가슴을 시원스럽게 터치게 하는것도 윤기중을 위하여서는 좋을듯싶었다.
조봉암은 지금까지 자기를 에워싸고 험난한 세월의 언덕을 넘어오는 삼총사들인 윤기중과 신창균, 우달수들이 언제나 안팎이 따로 없는 정직하고 결바른 인간들이라는것을 믿어마지 않았다.
윤기중은 참가자들을 바라볼 면목이 없어 천정을 쳐다보면서 말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응당 타매되여야 할 인간은 바로 접니다. 간사장으로서 누구보다도 당수의 의중을 잘 읽고있던 제가 이렇게 부실하기 그지없는 인간으로 되여 졸지에 우리 당에 막대한 혼란과 장애를 조성하여놓았습니다.
간사장인 제가 매개 사건들의 막전막후를 꿰뚫어보는 안목이 부족한탓으로 <대동단결>의 꿈을 꾸다가 간교한 덫에 치우게 된것입니다. 각성도 부족하였고 당에 대한 사명감도 부족하였습니다.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저한테 있습니다.
따라서 저의 문제를 심의해줄것을 제기합니다. 간사장으로서, 당수를 오래전부터 모셔온 사람으로서 조직적인 책임을 통감하면서 그리고 당수에게 그래서는 안되는 배신행위에 동참한 도의적인 책임을 통감하면서…》
《간사장!》
조봉암이 벼락치듯 그의 말허리를 뭉청 잘랐다. 자신을 질책하는 론조가 지나치게 날카롭고 모가 져서 들어주기가 숨이 찼던것이다.
윤기중이 물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조봉암은 그냥 매몰차게 후려쳤다. 천성이 고지식하고 정에 여린 윤기중이 너무도 자신을 타매하는게 언짢았다.
《뭘 제기하겠다는건가?! … 뭘 심의해달라는거요?! …》
《우리 당안에 저와 같은 배신에 대해서 어벌쩡 넘어가는 선례를 넘겨서는 안됩니다. 마땅한 징벌로 교훈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우리 당에서 도의라는 훌륭한 전통이 깨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뭐요? … 그래서 간사장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거요? … 그게 도의라는거겠소? … 앉소! 앉으라니깐! …
간사장답지 않소. 윤기중답지 않단 말이요! 과오를 범하였으면 반복되지 않도록 가다듬어야 하는거요. 그것도 행동으로, 당활동으로 보상해야 하오.
당수와 간사장이란 인체로 말하면 머리와 심장과 같은건데 뭘 도의요, 배신이요 딴 의미를 찾아내여 정을 끊으려 한단 말이요?! 난 지난 5년동안 간사장을 남의 사람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소. 지금도 다름이 없소. 뜻을 떠난 도의, 정을 떠난 도의란 있을수 없소. 그래서는 안되오!》
조봉암이 이렇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불뭉치가 치밀어올라 목이 꽉 잠기여 제 먼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가장 가까운 전우에 대한 사랑과 노여움이 자기도 걷잡을새없이 뜨거운 물줄기를 만들어놓았던것이다.
윤기중은 쇠붙이마냥 강하게 다져진 인간이 도저히 깨버릴수도 허물어낼수도 없는 동지적뉴대와 정에 사무쳐 제 먼저 눈물을 보이자 참고참았던 더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윤기중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세차게 어깨를 들먹거리였다.
윤기중은 천성이 순박하고 깨끗한 인간이기에 자기에 대한 요구성도 남달리 높았다. 리념과 생활방식에서 일찌기 일가견을 가지고 간사장이라는 큰 자리를 맡아 손아귀가 드세게 가지많은 당내부사업을 주관해가지만 자기에게서 흠이 드러나거나 탈선이 포착되면 체면보기나 권위의식은 티끌만치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서 바른길에 들어서는 사람이였다. 이것때문에 조봉암이 그를 사랑하고 동료들도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따르는것이다.
그들 두사람은 다같이 5년전의 그 어느 봄날을 생각하였다.
조봉암이 《국회》연단에서 용감하게 《대통령》후보출마를 공개한 며칠후 저녁 윤기중이 예고도 없이 술 한병을 들고 조봉암의 집대문을 두드렸다.
그때 윤기중은 리승만이 만들어낸 자유당소속의 30대의 젊은 의원이였다. 젊은 의원들속에서 리론이 있고 웅변술이 높고 주견머리가 있는것으로 하여 인기가 있고 미래가 촉망되는 쟁쟁한 인물이였다.
그날 조봉암은 자기 방에서 선거선전에 내세울 자기의 공약을 작성하고있었다. 《국회》부의장이던 조봉암은 윤기중의 얼굴을 알고있었고 소문도 듣고있었으나 방문을 받아본적은 처음이였다.
윤기중은 구름노전우에 넙적 엎드려 절을 한번 하고나서 우렁우렁 잘 울리는 어조로 스스럼없이 자기소개를 하였다.
《선생님, 제가 윤기중이라는 소인배올시다. 죽산선생님께 나라건질 방략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시겠는지요?!》
조봉암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그를 맞았다.
리승만계의 인물이라 관심밖이여서 이따금 《국회》일로 오갈 때마다 너푼 고개를 숙여오면 손을 들어주는 정도였는데 어째서 대문을 열고 들어섰는가?
자기가 일단 리승만과의 선거대결을 공개해버리자 평소에 그렇게 따르며 저들의 대표로 내세워주던 무소속계의 40여명의 의원들이 언제 두령으로 모셨던가싶게 슬금슬금 꼬리를 사리는 판이다.
그래 후보로 등록한 다음 선거본부를 차려놓아야 되겠는데 주역으로 나서주는 인물이 신창균이나 우달수밖에 없어 입만 다시고있는 형편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것도 반대진영의 인물이… 혹 리승만이 보내서 왔을가?
1인후보로 무난하게 선거를 치르려고 했던 리승만이 자기가 선거상대로 나섰다는 통보를 받자 불맞은 승냥이처럼 길길이 날뛰며 사납게 이발을 갈고있다고 한다. 《이놈, 두고보자! 이 우남과 맞서다니…》 하면서 나서봐야 하루살이운명 면치 못할거라며 기광을 부린다고 한다.
가뜩이나 리승만과 잠시잠간 엇섰다가 헌병대로 끌려가 초주검을 당하고 정치깡패들의 발길에 채워 얼혼이 나간 《국회》의원들은 리승만의 눈치를 보고는 조봉암이 호박쓰고 돼지굴에 들어섰노라고 야단들이다.
그런데 윤기중이 이렇게 태연자약하게 만나자바람으로 나라건질 방략부터 내놓으라니 믿어야 할지, 쫓아내야 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혹 리승만의 협박장을 속에 품고 왔거나 내탐하러 온것은 아닐가.)
윤기중이 의심기짙은 조봉암의 표정에서 속셈을 읽어본듯 사람좋게 히쭉 웃어보이고는 무릎걸음으로 더 가까이 다가들었다.
《선생님! 저를 죽산선생님의 선거운동본부 성원으로 채용하여주십시오. 저는 오면서 선물 하나만은 선생님의 마음에 꼭 드실만 한것으로 마련하여가지고 왔습니다. 이를테면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능청스러운 청년의 익살에 조봉암은 바싹 구미가 동하였다.
의심은 호기심으로 바뀌여졌다. 그래서 우선 가장자리를 툭 쳐보았다.
《가만… 이렇게 날 찾아오면… 자유당은 어떻게 하고? …》
《방금전에 저는 자유당 중앙에 탈당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윤기중은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하, 그렇군… 가만 내 마음이 어떤줄 알고 무슨 선물 마련해왔다고?》
《예, 선거구호를 생각해가지고 왔습니다.》
《선거구호? … 그래?! 들어보세.》
《<이대로 더 4년을 살수 없다! 갈아보자!> 뭐 이런겁니다.》
《뭐?! … <이대로 더 4년을 살수 없다! 갈아보자!> 하하하…
신통해, 신통해! 우리 민중의 요구와 정서를 한 문장에 꿰놓았구만! 그 선물 정말 만금짜리요. 하하하… 이제 당장 집앞에 선거본부라는 패말을 세우고 그 구호를 써서 기치로 들자구! 이건 너무도 뜻밖에 굴러든 호박이라 떨떨해지는구만!》
조봉암은 청년이 내놓은 구호가 마음에 흠뻑 들어 대뜸 탄사를 내질렀다.
《저를 믿어보십시오. 죽산선생님께서 이 윤기중이라는 소인배를 대충 파악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살아온 지난날을 이실직고하겠습니다.
제 왜정때는 법관이 되겠다고 고시를 해서 합격하였지요. 도법원에 취직해서 일약 친일파가 됐습니다. 헌데 창씨개명에 끝까
지 응하지 않아 법원에서 쫓겨나 락향하여 농사짓다가 해방을 맞이하니 이번에는 반일파가 됐습니다.
리승만이 <독립의 대성인>이요, <만고애국자>라 해서 찾아갔더니 친리승만계로 되였습니다. 몇해 지내보니 그 어디에도 짝이 없을 무지하고 권력에만 환장하고 미국에만 매워사는 천하졸부라 기회를 보아오던중 이렇게 도망쳐온겁니다. 반리승만에로 방향전환한 저의 결심이 결코 오늘에 비로소 생겨난것이 아니라는것을 믿어주십시오.
제 경력을 그대로 고백하였는데 사꾸라라는 말만은 붙이지 말아달라는것입니다. 이렇게 놓고보면 죽산선생님을 향한 방황이였습니다. 그 방황이 이제야 끝난것 같습니다. 저의 인생에서 우왕좌왕이란 더는 없을것입니다.》
《하하… 그 경력도 듣기 좋구만! 나더러 대세에 도전하는 역풍의 정치가라… 욕절반 칭찬절반인데?! 자네야말로 대세에 도전해온 역풍의 사나일세. 우린 손발이 잘 맞을것 같애. 좋아! 나와 함께 역풍의 정치권에 돛을 달아보자구. 어디까지 갈테요?》
《운명의 끝까지 가렵니다. 썩은 세상 바로잡기가 끝날 때까지!》
《그래?! 좋소! 난 이번에 조그만치도 선거승리를 믿지 않소. 따라서 선거에서 임자에게 차례질 실리란 꼬물만치도 없소. 다만…》
조봉암이 에돌지 않고 말하자 윤기중은 더욱 감심이 되여 제꺽 받아물었다.
《생각하고 왔습니다. 종신독재의 개꿈을 꾸는 리승만에게 도전하는 후보가 없다면 나라와 겨레가 불쌍해보인다는 선언… 그것이면 저는 됩니다.》
《그러면? …》
《운명을 같이하렵니다. 기치는 올랐으니 이제 이 나라의 뜻가진 지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겁니다.》
《바람새 많을거요. 닻을 올리기 전에 난 벌써 난파선처럼 표류하고있소.》
《함께 맞받아갑시다. 키만 잡아주십시오. 노는 제가 젓겠습니다.》
《좋소, 어디 기운껏 달려보기요.》
《고맙습니다. 술 한잔 받아주십시오.》
윤기중은 그제야 신문에 둘둘 말아가지고 간 남도의 명주인 안동술 한병과 마른 오징어를 꺼내놓았다.
《원, 이런…》
조봉암은 두석달전 사위로 받아들인 김봉무까지 불러들여 효경이가 날래게 차려온 소반에 셋이 둘러앉아 상봉주를 달게 들었다.
그후로 윤기중은 감옥에 끌려간 천령배를 대신하여 우달수, 신창균과 함께 지금까지 조봉암의 곁을 줄창 지켜온다.
가까이에서 지내보니 윤기중은 정치적으로 명석하고 언변이 류창하고 성미가 직심스러웠다. 조직자로서의 천품을 가지고있는듯싶었다. 해학도 있고 익살도 부려가며 집단의 분위기를 화락하게 유도할줄 아는 여유작작하고 락관적인 자세 또한 조봉암의 마음에 썩 들었다.
그들은 언제나 복잡한 정치적세파들을 넘어오면서 집단의 뇌수가 되고 심장이 되여 착착 맞아돌아갔다. 조봉암지지세력이 오늘과 같이 진보당이라는 만만치 않은 조직을 내올수 있게 된데는 윤기중의 수고가 크게 깃들어있다.
지금도 조봉암은 윤기중을 자기의 팔과 다리처럼 여기고 자기의 심장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믿어마지 않는다.
이번 일을 놓고도 노여운바가 없지 않았지만 윤기중의 심중을 십분 리해하고있었다.
미군방첩대의 흉계를 누구인들 상상이나 했던가. 심운이,
그놈이 서정후를 부추기며 간교무쌍한 궤변을 늘어놓으니 당의 운명과 자기 당수의 미래를 제나름으로 걱정하여 놈들이 던지는 미끼를 덥석 받아문것이다. 거기에다가 그놈들이 벌린 여론몰이에 휘말려든것이다.
조봉암은 갑자기 몸처신이 난감하여 고개를 떨구고있는 윤기중을 련민에 겨운 눈으로 지켜보다가 헌걸차게 소리쳤다.
《어때, 신창균, 우달수! … 용서해야지?!》
《예!》
《예!》
신창균과 우달수가 자기 당수의 굳세면서도 열화같은 웅심과 만사람을 걷어안는 넓은 도량에 가슴이 훈훈해져서 일제히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용서합시다!》
참가자들모두가 그들의 대답에 목소리를 합쳤다.
《그런데 벌주는 석잔 줘야 합니다!》
우달수가 한마디 하자 신창균이 그 말을 받아 시까슬렀다.
《저런! 간사장은 넘어져도 떡함지라… 잔까지 받게 됐으니 젠장!》
그 소리에 방안에서는 《흐아
-흐아-》 하고 사나이들의 장쾌한 폭소가 터졌다.《자, 이것으로 회의를 끝냅시다!》
조봉암이 속이 시원하게 틔여서 선언하였다.
그 소리가 밖으로 나갔는지 효경이가 문을 빼써 열고 동생을 눈짓으로 불러냈다.
그들은 술상을 맞들고 들어왔다.
《어이쿠, 정말 벌주가 들어오는구나! 그것도 국화술이구나.》
신창균이 벌씬거리며 자리에서 성큼 일어나고 우달수도 뒤따라 일어나서 술상을 받았다.
진보당의 핵심들은 존경하여마지 않는 당수를 가운데 앉히고 진보당의 창창한 미래를 위하여 잔을 들었다.
조봉암은 다시 활력과 원기를 되찾은 당안의 분위기가 흐뭇해서 밤늦게까지 동지들과 즐기였다.
자정이 지나서 그들을 바래주고난 조봉암은 인차 잠자리에 들었다. 하나의 큰 전투를 치르고난것처럼 잠자리에 들기 바쁘게 피로가 쓸어들었다.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여버린듯 하였다.
하기는 아차 잠간 눈 팔고있었더라면 당이 무너지고 한생을 세워두고 왔던 정치의 표대마저 사라질번 했던 위험천만한 고비였다.
어려운 싸움을 이겨냈으나 어쩐지 이상하게도 마음은 전혀 개운치 않았다. 오히려 체기를 받은것처럼 속이 무직하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이불속에 들어가 눈을 꾹 붙이고 잠을 청했다. 그래도 그냥 머리속은 새롱새롱거리는 뭇생각에 시달려 꿈나락에 잠겨들지 못하였다.
몇해째 리승만을 반대하여 한전호에 서있던 사람들이 권력에 환장이 되다보니 원쑤들의 모략에 놀아나서 결국 당에서 쫓겨난것이다.
회의장에서는 그렇게도 밉게 보이던 그 인간들이 이렇게 잠자리에 드니 그냥 눈앞에서 서물거리며 심혼을 괴롭히는것이다.
그 사람들앞에서 어쩐지 죄스러운감을 덜수 없다.
내가 지나치지 않았는가. 너무 과격해서 리성을 잃지 않았던가.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 못하고 마른기침을 연방 터치며 휘적휘적 걸어나가던 서정후의 모습도 그냥 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에 참,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가?)
조봉암의 사색이 괴롭게 이어졌다.
(서정후가 조변석개로 속을 굴리면서 옥좌를 기어이 타고앉으려는, 실현될수도 없는 룡꿈을 버리지 못하는 리유가 무얼가?
서정후의 지나간 인생행적을 살펴보면 원체는 지조가 굳건하고 투쟁력이 강한 인간으로 평가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오기도 하였다. 문명개화에 눈을 떴을 때는 쇄국으로 나라를 여위게 하는 봉건왕조를 무너뜨리는 길에 나선 몇 안되는 우국지사의 대오에 들어선 사람이 아닌가.
일제의 총칼에 맞받아 주먹을 쳐들어보기도 했고 리승만의 썩어빠진 체질을 알게 됐을 때는 분연히 우인의 자리를 걷어차고 반대진영에서 목소리를 높여오기도 하였다. 그게 결코 누구나 결행할수 있는 의거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되여 그런 인간이 선거를 전후하여 추한 몰골을 드러내보이다가 끝내는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는가. …)
조봉암은 괴로움에 시달리다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조용히 거닐기 시작하였다.
새벽빛이 푸릿푸릿해질 때까지 조봉암은 지겨운 생각에서 풀려날수가 없었다.
조봉암은 그 어떤 안개발처럼 뚜렷한 실체를 알수 없는것이 줌에 잡힐듯 하다가도 막상 꽉 잡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것처럼 끝내는 자기를 위로할수 있는 명쾌한 대답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동창이 환해졌을 때에야 다시 자리에 들었다.
그것은 조봉암이 애써 피하고싶어 하는것이였지 결코 찾아낼수 없는 미지의 문제는 아니였다. 한마디로 권력에 대한 욕망이였다. 그 야심이 서정후를 어리석게 만들어놓은것이다.
해방이 되였을 때부터 자기도 능히 이 나라의 정상에 오를수도 있다는 꿈에 집착되여 이날이때까지 살아오는 서정후다.
해방이 되여 독립전의 거목들로 솟아있던 려운형이 쓰러지고 김구가 사라지고 리승만이 집권하자 서정후도 권력에 대한 자신심이 생겼다.
(리승만이 하는데 내가 왜 못해?! …) 하는 배포였다.
서정후는 이쪽저쪽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권력장악의 기회를 노리다가 진보당에까지 민심의 추이를 따라 밀려왔다.
여기 와서 때를 기다려왔는데 이미 민중의 심장에 깊이 뿌리내린 조봉암이라는 거목에 부닥쳤다.
1 대 1 공방전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것을 확인한 서정후는 선거패배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봉암을 정치권에서 소외시키기 위한 목표를 걸고 움직였는데 이를 내탐한 미국의 특무기관과 리승만일파가 심운을 내세워 제놈들의 계략에 따라서도록 유인하였다. 그것이 성공의 찰나에 분쇄되였다.
손써볼 여지도 없이 조봉암의 발길에 채워 쫓겨났다. 결국 서정후의 기도는 좌절되고 평생을 꿈꾸어온 정치적야망도 졸지에 종말을 고하게 된것이다.
초지일관한 투쟁경력으로 사람들의 존대를 받아왔던 한 로정객이 지나친 권력욕으로 자기의 한생을 매장해버리고만것이다.
그가 만약 조봉암을 찾아왔을 때 다지였던 언약처럼 로정객답게 야권의 지팽이가 되여 불의에 끝까지 도전하고 후배들을 성심성의로 밀어주었더라면 그 인간의 한생이 얼마나 아름답게 후세에 전해지겠는가.
그러나 지금 조봉암은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굳이 도리질을 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고 뉘우치고있었다.
빈번히 애를 먹이고 속을 썩이게 하던 그 인간이 떠나가버린것이 꼭 자기가 처신을 잘못하고 너무 문제를 박정하게만 내세운탓인것만 같았다.
서정후의 80평생이 무척 아쉽다. 인생의 마무리를 잘하도록 성의를 고여야 하지 않을가.
달리 생각하면 서정후도 미국놈들과 심운의 피해자이다. 그놈들에게 교묘하게 리용당한것이다. 심운이 그의 권세욕을 부채질하면서 그를 내세워 제놈들의 흉계를 실현하도록 꾀인것이 틀림없다.
서정후의 권력야심은 그자신도 인정하고 세상도 다 아는것이므로 구태여 이 시각에 와서 특별히 타매할것은 없다.
문제는 버드와 리승만일파와 그것들이 하수인으로 내세운 심운에게 그 간특한 책임이 있다.
그러니 서정후령감에게 이에 대하여 툭 빠개주면 이제라도 깨도가 되여 다시 복귀할수 있지 않을가.
서정후의 기나긴 평생에 이쯤의 곡경이 어디 한두번이였더냐.
그는 래일중으로 로인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드디여 코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