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3

 

고요속에 칼이 번뜩이고 마주쳐 불꽃을 튕기고있었다.

무엇인가 폭발을 배태한 이 고요가 이제 어떻게 막을 열것인가.

폭발?! … 폭발뒤에 남을것이란 무엇이냐.

당의 분해?! … 산산쪼각으로 흩어질 진보당…

서로 눈치를 살피며 숨막힐듯 한 순간순간을 보내는데 뒤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던 선전간사 심운이 언권을 청하였다.

그를 돌아본 사람들은 이제 더는 피할수 없는 폭발을 예상하며 호기심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였다.

심운은 12인위원회에서 서정후가 내놓은 발기들을 가장 선두에서 지지하여온 사람이다. 뿐더러 서정후의 주장을 그 류창한 언변과 빈틈이 없는듯 한 론조로 뒤받침함으로써 진보당해체에로 12인위원회의 결정을 끝까지 유도하여낸 서정후의 모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창균의 주장대로 한다면 그부터 방에서 나가야 한다.

심운이 신창균과 우달수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리라는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었다.

심운이 여러 사람들의 선망과 기대가 엇갈리는 속에서 침착하게 한번 앞이마를 가리운 머리칼을 쓸어올리는데 응접실의 나들문이 빼써 열리였다.

김봉무가 얼굴만 들이밀고 눈길로 연경이를 찾았다.

서기석에 앉아 두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있던 연경이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나들문쪽으로 다가갔다.

《연경이, 아버님께 드려. 즉시… 아버님더러 지체말고 읽어보시라고 여쭈어.》

김봉무는 그에게 자그마한 봉투를 넘겨주었다.

연경이는 봉투를 받아 속지를 꺼내보지 않고 곧장 조봉암에게로 다가가 앞탁에 놓아주었다.

《지체말고 읽어보시랍니다.》

조봉암은 고개를 끄덕이고 봉투안에서 속지를 꺼냈다.

《혁신대통합운동은 미8군방첩대의 고안품으로 강행되고있는 진보당과 죽산 목조르기의 일환임.

미군방첩대는 이 사기극의 주역을 오래동안 죽산선생님의 발밑에 묻어놓은 고등첩보원 심운에게 담당시켜왔음.

심운은 서정후를 리용인물로 내세워 미군방첩대의 특명을 수행하고있음. 그들에게 혁신대통합운동을 추진하여 진보당의 결당을 지연, 분쇄하고 진보당의 지방의회진출을 철저히 차단시킨 공로로 리승만의 비밀구좌에서 이미 1억환의 자금이 사례명목으로 전달됨.

이 작전은 미군방첩대내에서 <쌍-프>라는 비밀암호로 통하고있음.

요새 신문과 방송, 사회 각계에서 벌어지고있는 여론몰이도 <쌍-프>작전의 한조항으로 이미 계획되여온 도발임.

죽산선생님을 사모하는 민중의 벗으로부터.》

《사모하는 민중의 벗?!》

조봉암은 가슴이 철렁해서 입속으로 되뇌였다.

방심의 구름장너머에서 얼른거리던 그 어떤 괴상야릇한 허상이 이제야 비로소 운무속에서 미끄러져나온 달마냥 너무도 명료하게 자기 형체를 드러내놓은것이다.

조봉암은 원래 혁신계의 통합운동이 시작되던 때로부터 은근히 자신과 진보당에로 겨누어진 보이지 않는 집요한 창날을 육감으로 느껴왔다.

타격도수가 날을 따라 강해지면서 운동의 발기자들의 배신적인 기도가 의심스러워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날을 따라 그 배후가 어슴푸레 짚이우기도 하였다.

투서의 길지 않은 고발이 사태의 위험천만한 본질을 일순간에 발가놓았다. 꼬리를 감추고있던 음흉한 간계의 배후를 여지없이 드러내놓았다.

조봉암은 부지불식간에 종이장을 접으며 길게 안도의 숨을 내그었다.

당이 림종을 앞둔 이 시각에 구원의 손길을 해빛처럼 보내준 투서자가 더없이 고마웠다.

사모하는 민중의 벗이라… 벌써 여러번 요긴하게 도와준 고마운 사람이다. 이미 보내왔던 정보들도 다 정확하였다. 정보들의 신빙성은 그뒤에 벌어진 사건들로 확인되군 하였다. 이 정보도 믿어야 되지 않을가? 정보는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과 일치하고있다. 믿자니 선뜻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다. 그놈들이 감히 어떻게 재야권을 통채로 롱락하는 이 무섭고도 어망처망한 대모략을 궁리해내고 누구도 의심해볼나위가 없이 용의주도하게 벌려나갈수 있을가.

심운… 네가 정말 목에 박힌 가시였느냐. 네가 정말 흉심을 가지고 내 발밑에 잠복해있은 두더지였더냐.

조봉암의 눈이 거칠게 번뜩이였다.

그는 옆에서 기웃거리는 서정후의 눈길이 느껴지자 속지를 접어 봉투안에 넣고 웃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의 눈길이 다시 심운을 찾았다.

성공의 환희로 절절 끓고있는듯 한 희여멀끔한 얼굴이 안겨왔다. 이제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튕겨도 와그르 무너져내리게 된 목표물을 보면서 저놈은 벌써 승리의 축배를 걸탐스레 들이키고있는것이다.

해사한 얼굴에 요부의 간사스러운 웃음이 넘실거리는 상판을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듯싶었다.

(나쁜놈!)

조봉암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배신과 그 엄청난 후과에 눈앞이 아찔해지고 치가 떨렸다. 저런 놈을 끼고있다니…

그는 당장 분화구를 찾아 터질것 같은 분노를 누르느라고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숙이였다. 꽉 맞잡은 두주먹이 부르르 떨었다. 심장은 흉곽을 뚫고나올듯 급하게 요동을 쳤다.

천하무도한 놈! 내가, 내가 청맹과니였지. 저런 놈을 지금껏 몰라보고 싸고돌다니!

심운… 네놈의 속에 시누런 황구렁이가 사리고있을줄은 내 몰랐고나!

심운은 벌써 52년부터 조봉암을 따라다닌 사람이다.

그는 조봉암을 처음 만났을 때 미중앙정보국 비밀문서고에 이름을 올리고 살아온데 대하여 고백하고 자기가 미국의 정보기관에 고용되게 된 사유를 밝히였다.

심운은 일본에서 류학을 하면서 사회주의운동에 관여하다가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고 중국관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미국의 정탐계와 손을 잡고 주로 일본관계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였다.

해방후 귀국한 심운은 미군정의 정보고문이던 노불에게 인계되여 미군방첩기관에서 주로 야당권을 대상한 정보를 분석평가하는 일을 하다가 고민끝에 조봉암에게로 손을 내밀어왔다고 하였다.

몇번 상종하여보니 수준도 있고 언변도 좋았다. 언제나 양복에 넥타이를 깐깐히 조여매고 다니는 외양도 점잖고 품성도 절제있고 단정해보였다.

해방전의 정보활동에 대하여서는 《파쑈 일제를 반대하고 조국해방의 날을 앞당기려는 열망》으로부터 시작한 나름으로서의 선택이라고 했다.

자기는 언제 한번 미국의 첩자라는 인식을 해본적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고 수긍하기도 하였다. 일본놈을 격멸하기 위해 일시 일본의 적국이던 미국과 손을 잡고 반일이라는 공동의 구호밑에 싸운데 대해서는 문제를 세울것도 못된다고 인정하였던것이다.

자기도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쏘련에 들락날락하며 그 사람들의 돈도 얻어쓰고 협조도 마다하지 않았던것이 아닌가. 국제당의 지시와 위임을 받고 오래동안 뛰여다니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그 누가 자기에게 쏘련첩자라는 감투를 씌워놓은 일도 없으며 자신도 쏘련첩자라고 생각했던적은 없었다.

그의 솔직한듯싶은 고백과 청에 끌려든 조봉암은 쾌히 자기 주변에 앉혀놓고 일을 시켜보았다.

진보당추진위원회가 무어질 때 조봉암은 윤기중과 협의하고 당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인 선전부문을 맡겨주었다. 지금까지 맡은 일은 손색없이 해온다.

그런데 이번에 서정후의 야당권의 통합놀음에 제일 앞장서서 진보당과 자신을 말살하는 발언을 많이 하고있기에 참 세상일은 오락가락이라고 이상스럽게 생각하여왔는데 이 놀음을 심운이 조종하고있다니 이런 괴이쩍은 일도 있는가.

문득 제3대 《대통령선거》전야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 심운이가 내가 긴급제안으로 상정시켰던 민주당과의 공동진출을 위한 후보양보문제를 놓고 요술을 부렸지.

당지도부의 복잡한 기회를 리용하여 태동기에 있던 우리 당의 용기있는 정계진출을 원천봉쇄하려고 보이코트하자는 황당한 갑작수를 내놓았다가 좌절당하고말았지.)

최근에 벌어지고있는 불미스러운 일들도 이제는 그 내막이 료연해진다.

그런데 심운이가 지금 일어나서 입에 거품을 물고 악담을 늘어놓으려고 한다.

배신자? 아니 그는 배신자가 아니다. 그의 체질이 원체 미국놈의 주구이고 미군방첩대의 첩자이니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있을따름이다.

열변을 토하려고 노전우에 두다리를 무겁게 버티고 선 심운을 쳐다보노라니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저절로 쓰거운 웃음이 떠올랐다.

참 세상일이란 묘하기 그지없다. 심운의 정체가 드러난 지금 그 당자는 뻔뻔스럽게도 《민중의 기대와 요망》을 또 한번 지껄이려고 한다. 무슨 말을 할가? … 뭘 가지고 야죽거릴가? 그 멋스러운 언변, 틀이 잡히고 무궁하게 흘러나오는 리론, 세상의 정의와 량심을 혼자서 가꾸어가는듯 한 처세… 이제는 드디여 진보당에서 공개적으로 반변을 일으켜 나를 밀어제끼고 야권에 더 무겁게 들어앉을수 있게 되였다는것이다. 일을 끝냈다는 기고만장한 자세가 희떱기 그지없다.

미국놈들이 참 엉큼하다. 몇해전에 내 발밑에 묻어놓을 때 오늘을 내다보고 지금까지는 동면을 시켜놓아온것이다. 근 5년이나 그렇게 재워두다니. 그러니 미국놈들은 내 가는 길에 덫을 묻어두고 내가 치우기만 노리고있었구나! 해방직후에는 나를 좌익권에서 쫓겨나도록 간교하게 모해하더니 더러운 양놈들, 네놈들은 과연 무엇이기에, 어째서 이 나라 사람들의 가슴을 허비고 수틀리면 기어이 칼을 박느냐.

조봉암은 이방오랑캐들에 대한 분노로 틀어쥔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두눈이 황황 타올랐다.

헌데 저 심운이란 놈은 얼마나 치사스러운 놈팽인가. 꽤나 똑똑해보이는 놈이 해를 넘어오며 양놈들에게 염통을 저당잡히고 살아오다니. 정말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해방전에는 제 말대로 나라독립을 하자니 일본의 교전국인 미국과 손을 잡았다치고 내 나라에 와서야 내 겨레, 내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될게 아니야. 후손들이 뒤날에 뭐라고 하겠는가. 에, 불쌍한 인간! 허지만… 너도 이제는 야당권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의 첩자로서도 수명이 끝나버렸다. …

조봉암이 착잡한 생각에 갈마드는데 심운이 마지막 넉두리를 심심하고 안타까운 음조로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저는 신창균부장의 연설도 우달수부위원장의 연설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반대를 위한 반대론에 불과한 감정의 표출이지 정당한 론거도 리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인물에 대한 아부와 지성을 잃은 무분별한 감정만 있을뿐입니다. 맹목적인 복종과 원칙없는 충정-그것은 아첨입니다. 위험합니다! 그래 우리가 미래를 위한 포석을 다시 다져가고저 하는 이 자리에서 그 어떤 감상이나 인정에 발목이 잡혀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당의 미래에 대하여 책임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더우기는 나라와 겨레의 래일을 걸머졌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뼈아픈 일이지만 흘러간 어제날에서 교훈을 찾아내야 하며 랭철하게 종처를 도려내고 활로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당의 건전한 모습입니다. 저 역시 당수와 함께 오랜 세월 경난을 치르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당수의 초지일관한 사상, 탁월한 조직력, 견결한 의지, 고결한 인망에 매혹되여있는 죽산선생의 신봉자입니다.

그런데 왜서 오늘의 력사적인 변혁의 시대에 와서 아프지만 자기의 궤도를 수정하게 되였는가? 그것은 우리 당의 진로, 민중의 진로를 모색하는 이 전환적인 국면에서 진보당의 한계선을 리해하였기때문이며 우리 당수의 영향력이 극한점에 이르렀다는것을 인정하였기때문입니다.

전략과 전술은 절대로 리상에 머무르지 말아야 하며 고정불변한것도 아닙니다. 현실에 발을 붙이고 현실이 제기한 문제들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현실변화에 민감하고 림기응변하자-이것이 우리 당수가 늘 우리에게 가르쳐준 금언입니다. 당수가 찾는 3의 길은 그러한 뜻과 의지의 고귀한 응결체입니다. 나는 파란곡절 많으면서도 모험과 위훈으로 수놓아진 인생행로를 헤쳐온 우리 당수의 가르침이야말로 천만번 지당한 정치가의 절대지론이라는것을 절감하군 합니다.

우리 당수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해방후에는 제3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농촌의 혁신을 위하여 입각도 불사하였고 정치운동의 일선에서 리승만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일선지휘관으로 분투하였습니다.

우리 당수의 로고로 오늘 반독재세력은 우리 력사에서 처음으로 광범위한 력량으로 결속되는데 성공하였고 대통령선거들에서 련속 압승을 차지한 력사적인 쾌거를 이룩하였습니다.

전쟁전에 남로당의 무모한 로선의 여파로 진보세력이 발붙이기도 힘들었던 민주주의의 동토대에서 죽산선생은 그 해빙기를 드디여 열어놓고야말았습니다. 서울판 파시즘인 리승만의 극우반공체제의 밑뿌리를 흔들어놓았단 말입니다.》

《음-》

문득 조봉암에게서 크게 코소리가 새여나왔다.

심운이 간사스럽게 이리저리 뒤집어가는 말장난이 역스러웠던것이다. 척 듣건대는 미끈하게 사개가 딱딱 맞물린듯 하고 상대의 마음속에 제꺽 파고드는 론리와 감정이 넘친다.

심운의 연설들은 언제나 대중을 움직이는 기백과 열정이 있었다. 화려한 말마디로 치장된 론리도 있었다. 바로 그로 해서 진보당의 선전에 공로가 있었다.

조봉암은 지금 그의 감언리설속에 깔려있는 시꺼먼 배속을 꿰뚫어보고있었다. 웅변의 마술로 청중의 눈과 귀와 리성을 흐려놓는 그의 설교가 혐오스러웠다.

《그래 뭘 말하자는거야?!》

이번에는 서정후가 볼부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소리에 심운은 말을 무춤 끊었다. 그리고는 어줍잖은 눈길로 자기를 쏘아보는 서정후를 보고는 쓰거운 미소를 담았다.

서정후의 늙고 회전이 둔한 두뇌감각을 가지고서는 기름을 친듯 기민하게 굴려가는 심운의 혀바닥롱간이 노리는 오묘한 적의를 쉽게 투시할수 없었던것이다.

서정후는 조봉암을 신화적인 명망인물로 추켜올리는 심운의 연설이 사태를 뒤집어놓을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마치도 다 쒀놓은 잣죽에 재가루를 치는것만 같아 등이 달아올랐다.

그러건말건 심운은 더욱 승기가 나서 변사처럼 줄줄 열변을 토해놓았다.

그의 말을 얼핏 들어보면 진보당안에서 심운이만큼 당수를 아끼고 내세워주고싶어 하는 사람이 없을것 같다. 당수의 정치적전도에 대하여서도 충의를 가지고 극진히 념려하는 인물은 더는 찾아볼수 없을듯싶다. 그는 화제를 가장자리에서 점차 복장으로 몰아갔다. 흑심을 슬쩍슬쩍 내비친다.

조봉암도 그의 열변을 막고싶지 않았다. 그가 밸굽까지 말짱 훑어내놓아보라는 배포였다.

《여러분! 어느 시대나 다 어울리는 정치가란 허구입니다.

매 시대마다 내놓는 구호가 다르며 그를 담당하는 정치가도 달라야 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만능의 정치가란 있을수 없다는것은 이미 선행한 시대가 보여준 교훈입니다.

우리 당수는 격동하는 우리 시대, 전쟁과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시대의 정치가로서의 비상한 력량을 갖춘 유일한 대중정치가로서 시대와 겨레의 요청을 걸머지고있었습니다.

우리 당수에 대한 민중의 사랑과 존경은 바로 그때문에 열광에 닿았으며 우리 진보당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이건 부인할수 없으며 부인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력사입니다.

우리 당수는 력사의 한토막을 휘감은 시대의 풍운아입니다.》

(저런! 아첨치고 너무 도수를 넘어서는군. 이 조봉암을 도대체 어디까지 끌어올리려나. 사람을 앉혀놓고 무슨 놈의 요설이냐?)

갑자기 심운의 류창한 어조가 바뀌여졌다. 괴로움이 짐짓 비껴든 침울한것이 느껴진다.

《여러분! 이 시대가 드디여 변화되여가고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시대의 주인들로 등장하고있습니다. 변화된 시대에 부응할수 있는 새로운 지도력을 찾는것은 력사의 순리이며 시대가 제기한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수 있는 최우선적인 방책입니다.

리승만은 바로 이 력사의 교훈을 무시하고있기때문에 독재자로 지탄을 받고있는것이며 구경에는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죽산선생님은 리승만이 밟아가는 전철을 밟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결단을 내려 죽산선생님이 시대와 더불어 산 정치가로서 자기의 빛을 잃지 않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12인위원회의 결정에는 바로 이러한 재야권의 대표자들의 의지와 정이 모아져있습니다. 따라서…》

심운은 절정에로 치달아오르던 장광설을 뚝 끊고 자기 말의 효과를 찾아보듯 좌중을 빙 둘러보았다.

서정후의 굳어졌던 얼굴에 흡족한 빛이 떠도는것을 본 심운은 자신도 어쩔새없이 고개를 의미있게 끄덕여보였다.

두사람사이에 오가는 교감이 참가자들의 불안한 가슴들에 회오리바람처럼 날아들어 이상야릇한 감정을 자아냈다.

그것은 분명 실수였다.

심운은 인차 자기의 실책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로 해서 생긴 감정의 토막을 이어놓을 심산으로 재빨리 보다 우렁찬 목소리로 자기의 토론을 결속하여버렸다.

《따라서 저는 당명의 교체, 진보당해체, 지도자의 영예로운 2선후퇴를 골자로 한 12인위원회의 결정을 지지합니다.》

여기저기서 투덕투덕 박수소리가 나왔다.

그런데 그 박수소리를 짓누르듯 우달수가 일어섰다.

조봉암이 손을 들어 끝없이 가지쳐갈 횡설수설을 제지하고는 윤기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간사장, 론쟁을 더 계속할 필요가 있겠소? … 가결에 붙여야지.》

《예, 글쎄…》

윤기중이 괴로운듯 허리를 구부정히 해가지고 대답을 마무리하지 못하였다.

《음… 가결이라…》

조봉암은 이렇게 조용히 혼자소리를 내며 잠시 뒤짐을 지고 연탁앞을 오락가락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긴장된 눈길이 창끝처럼 날아와 그의 얼굴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량미간에 패운 골을 버릇대로 손부리로 문지르며 이제 해야 할 자기의 발언을 골라보았다.

《가결합시다. 12인위원회결정에 찬성하는 상무위원들은…》

이렇게 말해야 할것이다. 그러면 주먹들이 오를것이다. 지금 같아서는 결정지지에 필요한 과반수의 주먹들이 오를것 같다.

그러면 모임은 끝나게 된다.

그런데 그 말이 인차 씹히지 않는다. 목구멍에서 걸려 넘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미상불 나도 손을 들어야 할것이다. 자기에게서 《독재자》의 감투를 벗겨주려는 반대파세력의 호의와 결단을 마다할수 있느냐. 서정후의 말이였지. …

찬성? … 그것은 나의 《영예로운 2선후퇴》와 진보당해체에 찬성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영예로운 2선후퇴》라? … 흥, 묘하게 찾아낸 미사려구인걸… 심운이 참 재미나는 인간이거던. …

반대? 그것은 진보당의 고수를 의미한다. 그 다음… 그 다음이 난처하다. 내가 고집스럽게 자신의 지도적지위에 그냥 집착하는것으로 되기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러한 주장은 곧 일종의 독재에 대한 찬미로 해석되고 지탄받게 되여있다. 서정후와 심운이 그런 마술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나의 측근들을 그 마술로 꽁꽁 묶어놓았다.

반대쪽에 주먹을 들어주면 이제 래일중으로 서울일판에 조봉암은 다음기 《대통령선거》를 노리여 체면도 량심도 줴버린 권력지망자라는 어지러운 몰골로 알려질것이다. 언론이 송곳처럼 뾰족하고 살찬 부리로 짓쪼아대고 허벼뜯으면 정치가의 명예나 인격은 창졸간에 넝마가 돼버린다.

이런 난처한 일이라구야. 호미난방이라더니 이거야말로 범의 꼬리를 놓지도 못하고 그냥 잡고있을수도 없는 딱한 일이 아니냐. …

미군방첩대라… 수가 괜찮은걸. 아예 덮쳐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수족을 옭아매놓는구나. … 《쌍-프》라… 그래, 쾌재를 올리게 되였군.

심운이… 나쁜 놈! 이번에는 우리 당을 아예 공중분해시키겠다는거지. …)

그는 숨이 콱 막혔다. 그는 허리가 부러지는듯 한 아픔과 좌절감으로 당황하여졌다.

윤기중이 자기 당수의 고뇌짙은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제야 조봉암은 자기가 지금 만장의 눈길을 받고있다는것을 인식하고 잠에서 깨여나듯 기수없이 떠오르는 생각에서 헤여나왔다.

조봉암은 거수가결을 앞두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있는 참가자들을 둘러보다가 다소 맥빠진 소리로 말했다.

《가결을 앞두고 문제가 심중한것만큼 각자 자기 립장을 정리하도록 10분간의 휴식을 줍시다.》

《휴식?》

서정후가 대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으며 조봉암의 말에 무슨 의도가 숨어있는지 가늠해보았다.

배지기를 떠서 다 넘어지게 된 막판에 휴식이라니.

기운을 돋구고 다시 덤벼들어볼 심산인것 같은데 기회를 주어서는 안될것 같다.

그냥 밀어던져야 한다. 다시는 추서지 못하게 기운이 뻗쳤을 때 아예 쓸어눕혀야 한다.

《애햄?》

서정후가 빈 곰방대로 허공을 찍으며 서둘러 말문을 떼려고 하였으나 선수를 놓치고말았다.

《예, 그게 좋겠습니다.》

윤기중이 서정후의 반발을 무시하듯 큰소리로 동의하였다.

윤기중이 10분간의 휴식을 선포하자 조봉암은 이내 자기 침실로 향하였다.

10분이란 실상 자기에게 차례진 시간이기도 하다.

침실에 들어선 조봉암은 문을 안으로 잠그어놓고 침대우에 올라가 사지를 쭉 펴고 누웠다. 피곤하였다. 이대로 눈을 붙이고 잠에 곯아떨어지고싶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여러번 났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문 열어달라고 하는 소리가 안타깝게 연방 들려왔다. 조봉암은 지꿎게 열어주지 않았다. 신창균의 목쉰 소리도 났다.

《죽산선생님! 선생님!》

신창균이 조심스럽게 손기척을 내며 부르다가 문이 종시 열리지 않자 두세번 꽈당탕 두드리더니 웨치듯 찾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겁니까? 2선후퇴라니?! 가결할것도 없습니다. 서정후, 심운이… 그따위들의 잡스러운 소리에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죽산이라는 의미 잊어버린게 아닙니까?!》

우달수도 소리친다.

《죽산선생님, 한마디만…》

효경이가 차를 끓여왔다고 소리쳤어도 조봉암은 일어나지 않았다.

눈앞이 자꾸만 흐려져와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부지불식간에 그도 의식할새가 없이 눈귀로 뜨거운 눈물이 줄지어내렸다.

고난과 시련, 좌절과 상실의 련속이였던 인생의 머나먼 길이 이 순간 매연이 서린듯 희뿌옇게 뇌리에 흘러갔다.

그는 지금 난생처음으로 자기의 처지가 가긍해보였다.

민중세상이라는 현란한 채색을 한 삶의 종착점이 지금처럼 허무하게 생각되여본적이 없다.

그것은 애당초 너무도 무거운 짐이였다. 거기에 또 새라새로운 그리고 보다 무거운 짐들이 덧쌓여 자기를 압박하고있다.

그 짐에서도 고통스러운것은 이렇게 드문히 거세게 일어번지는 당안의 불협화음이다. 각이한 당파에서 이런저런 리유로 뛰쳐나와 찾아드는 정객들을 정치적무게가 탐나서 대오에 세워놓으면 얼마간은 어깨를 움츠리고 지내다가는 개개명창이 되여 여러가지 리유에서 시작되는 주의주장으로 당안의 맑은 공기를 흐려놓고 이쪽저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쪼각내기도 한다.

내 인생에 락이라는게 있었던가. … 새삼스럽게 이런 통분한 생각에 감겨들었다. 어느 한 시절에도 큰 기쁨을 모르고 지냈던것 같다.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쓰라린 추억만이 앞선다.

인생백년에 고락이 반반이라는 말이 있다. 허지만 돌아보면 나의 인생의 길이란 걸음걸음에 파도처럼 덮쳐들었던 오욕과 실망과 후회와 피와 눈물의 고행길이였다.

누가 강요한것은 아니였는데 산더미같이 인생의 빚을 잔뜩 짊어지고 하루같이 그 길에서 숨차게 달려왔다.

언제 한번 인생의 보람으로 해서 혁띠를 풀어놓고 호탕하게 즐겼던적이 없었다. 돌아보면 삶이란 고통과 아픔이다.

조선공산당을 무어냈을 때더라. … 드디여 우리 조선에도 공산주의첨병부대를 만들어냈다는 자부심… 아니였다. 그 기쁨은 너무도 짧았다.

뿐더러 그것은 환멸과 저주로 이어진 추억으로 바뀌여졌다. 오히려 가슴을 허벼내는 쓰라린 아픔을 영원히 못박아놓게 하였다.

끝없이 이어진 무익한 파쟁들, 테로, 체포, 전향… 끝내 해산이라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종점을 찍은 그 팔삭둥이를 만들어 후세에 시비거리를 넘겨준 산파역의 한사람으로 이 조봉암이라는 이름도 새겨져있다. 하지만 후회란 언제나 때가 늦는 법이요, 그걸 씻는다는게 실상은 어려운 일이다.

실수란 언제나 순간에 생겨난다. 그를 만회하자면 일생이 모자라기도 하다.

해방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끝없이 이어진 정치의 란무속에서 좌충우돌하며 빛을 모르고 살아야 했던 고행의 련속이였다.

아, 지겹구나! 뜻은 만리에 두었지만, 그 뜻에 심혼을 다 바쳐왔건만 정치란 이렇게도 차고 음흉하고 배신과 악덕이 무섭게 판을 치고있으니 어느때 가야 이 비정의 인생사를 끝낼수 있으랴.

언제면 내게도 인생의 락을 미식할수 있는 행운이 차례질가.

《고산무미목이라… 허, 서정후령감이 신통한 소리 한마디 했는걸… 고산무미목이라…》

조봉암은 열적게 중얼거리며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높은 산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없다고? …

그래, 높은 자리에 오래 있느라면 사람들의 말밥에 자주 올라 온전하게 남지 못한다는 소리렷다… 음, 그 소리두 비슷해…

차라리 이 기회에 저눔들이 밀어붙이는대로 2선으로, 아니 아예 초야에 내 인생을 영 묻어버리는것이 어떨가. 후배들을 돕는것으로 여생을 보내는것도 정치가로서 원숙한 모습이 아닐가.

사람의 앞모습도 좋아야 하지만 뒤모습도 좋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그래 그것도 멋이다.

인생이란 결국 풍랑우에 떠가는 배와도 같다. 제때에 닻을 올릴줄도 알아야 하지만 제때에 닻을 내릴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우리 력사의 한토막을 새롭게 조명하는데 다소나마 기여를 했다는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것이다. 이것이면 거치른 세파를 넘어온 내 인생의 보람이라 할수 있지 않을가? 내 삶이 그닥 허무한것은 아니노라고 자부할수 있지 않을가?

방금 심운이 잔등을 살살 긁어주는 요사스러운 말로 나의 치적을 야단스럽게 치켜올렸는데 결국 반대파들도 나의 과거를 부인하지는 못한다는게 아닌가.

2선후퇴… 정말 쾌히 손을 들어주는게 장부다운 기개가 아닐가. 2선후퇴라…)

그는 그 의미를 새삼스럽게 다시 새겨보았다.

(아니, 그건 좋은 말로 가리워진 안식을 의미한다. 정치현장에서 도피한다는것을 의미한다. 아니, 그렇게 눈앞의 현실에 욕되게만 그 뜻을 달지 말자.

그까짓… 나도 이제는 손자, 손녀들의 인심후한 할아버지친구로 돼주는것도 즐거운 일이다. 고난스러운 인생을 마무리하고 초야의 소일거리에 묻혀 한 선량한 인생으로 여생의 락을 이제라도 가능한껏 영위하는것… 이게 로년의 멋이 아니런가. 최기오도 그런 뜻으로 자주 권유해온다.

마음이 솔깃하게 끌린다. 저앞에서 아름다운 인생의 저녁노을이 자기를 유혹하며 령롱한 무지개의 한 뿌리를 보내오는듯싶다. 그걸 넌떡 붙잡기만 하면 내 여생에도 포근한 잠자리, 평화로운 가정의 저녁이 차례질수 있다. … 그래 이제라도 마누라를 메올가…)

그러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시도 때도 없이 청혼들이 들어와서 어떤 때는 화도 나고 마음이 번거롭게 헝클어지기도 한다.

그 녀인들중에서 지금 리화녀자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는 류선녀의 얼굴이 선참으로 가까이 다가선다. 가정부라도 좋으니 죽산선생의 곁에 있겠다고 그냥 다가드는것을 자기는 절대로 좋은 남편구실을 할 위인이 못된다고 좋은 말로 설복해서 여러번 돌려보냈는데 생일과 명절에는 번번이 축하엽서를 보내오고 기념품을 마련해서 연경을 찾아 보내온다.

손님시중이라도 맡아주겠노라며 찾아왔다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을 알알하게 한다.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말았으면 기쁘겠다던 그 녀자의 뜻이 자못 의미심장해서 그 녀자의 사라지던 뒤모습이 한결 돋보이고 정이 들었었다.

두 딸이 지금도 기회가 있으면 새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한다. 조봉암은 말 꺼내기 바쁘게 눈을 부라리군 한다.

조봉암이 녀인들의 진심으로 되는 정을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는데는 자기를 위해 너무 일찌기 산화한 안해의 순정을 고이 지켜주고싶은데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기의 앞길이 너무나 험난하고 기약할수 없다는데도 큰 리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자리를 훌훌 털고 나도 보통의 남성으로 되면 어떤가? … 사실 난 보통인간들의 삶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아왔느냐? …)

갖가지 달콤한 유혹이 그의 마음속에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문득 선거후에 만났던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눈앞을 가리웠다. 하나같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자기를 지켜보는것 같았다.

백발의 로인이 자기에게로 다가오더니 노염이 서린 말로 후려친다.

《죽산! 임자야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리승만의 죽마고우로서 서정후와 함께 지난 세기말부터 반일의 기류에 혼을 실었다는 로정객이다. 부산정치파동때 리승만에게서 떨어져나와 이제껏 통치권의 변두리에서 방랑하여온 사람이였다.

《죽산! 나를 받아주겠나? 이번 선거를 보노라니 난 진보당과 죽산에게 미래를 걸게 되였소.

내 여생이 이 땅에 민중복지의 세상을 만들고 나라통일을 이루려는 죽산의 위업에 거름이 된다면 기쁘겠네.》

이렇게 뜨겁게 속삭일 때 조봉암은 진보당의 기틀을 다 세워놓은 다음에 기꺼이 문을 열어드리겠다고 확약까지 하였다.

로성팔은 또 뭐라고 하였던가.

《죽산, 내 리승만과 10년을 붙어살고나니 이제야 깨도가 되는것 같네. 정치라는게 뭔지 알게 되니 나도 백발이 되였네그려.

내가 이제 진보당에 입당한다면 세상이 웃지 않을가? 철새라구… 하, 그런 욕사발은 견딜수 있는데 진보당사람들이 날 받아줄가. 아니, 진보당의 색갈이 너무 거무스레해진다고 진보당의 밭두렁이 줄어들지 않을가? … 그래, 그게 제일 걱정이구만.

난 이젠 권력에는 침뱉고 돌아앉은 사람이니 자리에는 욕심이 없네. 임자네가 받아만 준다면 여생을 휘뜩 번져가지고 내 이름에 덕지덕지 껴묻어다니는 퀴퀴한 냄새를 날려버릴수 있으련만…》

키가 꺽두룩하고 강마른 사나이의 눈굽에 맑은 이슬이 반짝이였다. 한생을 돌이켜보니 너무도 어지러워 그 어데서 세척해볼곳이 없고 그럴 시간마저 없다는것이 그를 통탄하게 하였던것이다. 조봉암보다 아홉살우인 로성팔은 일찌기 영국의 옥스포드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가서 리승만가까이에서 교포운동에 관여한바가 있었다. 일제시기 려운형이 일본천황을 찾아갈 때 다들 겁먹고 물러났는데 동행에 쾌히 응해준것이 로성팔이였다. 이것이 교포사회에 알려져 일약 주대가 센 배짱꾸러기로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였다.

로성팔은 영어를 류창하게 한것으로 하여 미24군단이 오끼나와섬에 상륙할 때에 군단장 하지의 통역으로 따라다니다가 서울에 와서는 하지와 얽힌 인연으로 인차 미군정의 경찰청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하지가 물러간 후에는 리승만의 측근인물이 되여 통치권의 핵심속에서 리승만의 손발이 되여 초대외무부 장관이요, 《국회》부의장이요, 《총리》요 두루 력임하여왔다.

그러던 인간이 두해전에 웬일인지 아무런 까닭도 밝히지 않은채 일체 공직을 다 버리고 남해의 바다가마을에서 자그마한 귤밭을 가꾸며 살아왔다.

그 인간의 무게와 실력이 탐나서 리승만도 여러번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민주당에서도 저들의 울타리안에 끌어들이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다 썼으나 그를 귤밭에서 떼낼수 없었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그전에 리승만의 사냥개라는 험담까지 붙었던 로성팔의 명성이 대단해졌다. 일흔에 가까운 나이와 경력을 갖추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락락장송으로 우뚝 솟아나게 된것이다. 그 덕으로 지금은 무소속의원들이 그를 두령으로 내세우고있다.

그런 인물이 리승만일파와 미국것들까지 집요하게 공산당이라 몰아대고있는 진보당의 우산밑으로 아무런 야욕도 없이 들어오겠다고 하였다.

그 뜻이 너무도 절절하고 그 기개가 너무도 결곡하여 조봉암은 그에게도 반승낙을 해주었다. 과거를 진심으로 참회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민중의 위업에서 찾는 인간의 소원을 어떻게 뿌리칠수 있으랴.

그런데 지금 로성팔 그 사람이 이렇게 침대우에 누워서 미국놈들과 반대파들의 도전에 흰기를 들고 자기의 안락과 평온을 찾아 달팽이처럼 움츠리고있는 나를 본다면 어떻게 할가.

그의 눈앞으로 또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났다. 배경이 다르고 딛고 선 풍토가 판판 다른 부류의 인생들이다.

볕과 해풍에 까맣게 타고 압제에 시달리고 주림에 여위여 쭈그렁박처럼 쪼그라든 얼굴들이다. 이발이 다 빠져버린 호물때기입들을 째지게 열고 웃는 얼굴들이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앞날을 축복해주던 그 얼굴들이다.

그들은 세상변두리에 내던져진 비천한 막바지인생이지만 그들이야말로 아무런 간격도 구속도 없이 무릎을 맞대고 막걸리에 얼추 취해볼수 있는 우리의 형제들이다.

나의 사람들, 나의 벗들, 나의 친구들…

그네들은 권세에 요사를 부릴줄을 모르며 안팎이 따로없이 깨끗하다.

《바위쇠… 몽득이…》

조봉암은 소꿉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속으로 다정히 불렀다.

그는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때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앉았다. 서류함으로 쓰는 농짝을 열고 귀하게 간수한 자개박이함을 꺼냈다. 함을 열고 거기서 고향친구들이 가져왔던 무명필을 꺼냈다.

《이 사람들아!》

그는 고향사람들의 체취를 그리듯 그 무명필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망녕이 들어있었나. 혼맹이가 쭉 빠졌댔구나!》

선거후에 강화도의 대표로 바다를 건너왔던 바위쇠와 몽득이가 하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아침밥상을 물리고나서 이왕지사 바다길을 넘어왔는데 서울구경이나 하라고 붙잡는 조봉암에게 남아있어야 바쁜 사람의 발목을 잡는다고 서둘러 일어나던 몽득이가 불쑥 말했다.

《이보게, 우리 자네에게 절하고 가야겠네.》

《뭘, 절하다니?! 실성들 하지 않았나?!》

조봉암이 깜짝 놀라 소꿉시절 친구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바위쇠도 몽득의 옆에 나란히 서며 간곡하게 말하였다.

《이보라구, 우리는 지금 저 련판장을 드리러 온 강화사람들의 대표일세. 섬사람들이 우리더러 죽산어른께 꼭 절을 하고 오라고 일임했은즉 가서 할 소리가 있어야 될게 아닌가. 받아주게.

더두 말구 북쪽만 한 세상 만들어주게. 빨리 통일을 시켜달라구. 거긴 참 희한하더구만.》

두사람은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어쩌는수 없이 절을 받는수밖에 없었다.

조봉암이 울대를 움씰거리고는 그들앞에서 맞절을 하였다.

그렇게 떠나간 이들이 지금 자기가 모든것을 포기한 비참한 꼴불견으로 안식처나 찾고있다는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하고 서운해하겠는가. 아니 실망하는 정도가 아닐것이다.

성미가 불같은 바위쇠는 마니산에 올라가 싸리 한단 베여들고 바다를 건너올것이다. 초달을 내리고 이 무명필을 찾아 불태워버릴것이다. 고향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무도한 놈이라고, 백성들의 깨끗한 피를 모독한 역적이라고 침을 뱉을것이다.

정말 내가 목표도 투쟁도 포기한다면 나야말로 피로써 사랑과 믿음을 새겨준 그 사람들의 무리매에 열백번 요정이 나도 할 소리가 없다.

《아, 아! 친구들! 여러분! 이 조봉암이 겁을 먹었댔소. 모함에 걸려 혼맹이가 빠졌댔구려. 부디 용서하여주오.》

조봉암은 무명필을 책상우에 펴놓고 두어걸음 물러섰다.

그리고는 뇌리에, 페부에, 뼈에 새기듯 고향사람들의 이름이 피로써 수놓아져있는 무명필을 향하여 속깊이 다짐하였다.

(나는 이제 더는 자기 운명에서 다른 선택을 할 권리가 없다.

살아도 민중과 더불어, 죽어도 민중을 위하여!

그 어떤 명분을 세우건 다른 선택이란 겨레에 대한 배신이요, 인생의 타락이다. 민중은 나에게 너무도 큰 사랑과 기대를 투자하였다. 나에게는 일생을 다 바쳐 보상할 의무만이 있을뿐이다.

절대로 나는 2선으로 물러서지 않을것이다.

내 심장에 피가 뛰고 내 눈에 흙이 덮이기 전에는 나 조봉암은 독재와의 결사전의 맨 선두좌지에서 절대로 도피하지 않을것이다.

설사 내가 지도권을 내놓더라도 난 한 병사로서 자기의 참호를 떠나지 않을것이다.

친구들, 여러분! 이 조봉암을 지켜보라!)

조봉암은 불끈 틀어쥔 돌덩이같은 주먹을 머리우로 추켜들고 고향사람들의 뜻이 피로써 새겨져있는 련판장앞에 서있었다.

또다시 문이 흔들렸다.

《아버지- 아버지- 시간이 됐어요.》

연경이가 조용히 알려준다.

조봉암은 그제야 시계를 들여다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연경이가 두손에 차 한잔을 정하게 받쳐들고 서있었다.

《목을 좀 추기고 나가세요.》

연경이가 원탁우에 차잔을 내려놓고 나가다가 책상우에 있는 무명필이 눈에 띄자 그쪽으로 다가갔다.

무명필을 보던 연경이가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결심했나요?!》

그에게도 격앙된 아버지의 심중이 헤아려졌던것이다.

조봉암은 차잔을 들어 훌훌 불다가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였다.

《아버지! 전 아버지가 꼭 그러시리라고 믿었어요.》

《믿는다… 무얼? 어떻게?》

《아버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거예요.》

《음… 고맙구나. 련판장이 나를 정신차리게 해주었구나. 고향사람들의 저 뜻을 버리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어서 마시세요. 아버진 지금 목이 막 갈려있어요. 어서 마시세요. …》

《그래그래… 내 인차 마시고 나가마. 나가봐라.》

조봉암은 차를 한모금한모금 천천히 넘기며 과단성있게 이제 자기가 할바를 더듬기 시작하였다.

(이제 회의를 시작하면 가결해야 한다. 고수냐 해산이냐?

결정은 명확하고 그 방법도 지극히 간단하다.

승산이 있느냐? … 지금 회의장분위기로 보아 과반수가 진보당해산으로 기울어지고있는것 같다. 간사장마저 접수해가지고 왔으니 다른 사람들이 원쑤들의 교활무쌍한 모해에 넘어갈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런데? … 나의 주먹은 가결에서는 한표를 행사할뿐이다. 한표라? …)

조봉암은 다시 생각을 굴리였다.

지금까지 나는 당내민주주의를 진보당사업의 첫째가는 규약상원칙으로 강조하여왔다. 독재의 전횡에 신물이 나서 리승만한테 반기를 들고나선 사람들이 당의 중진중에 적지 않은 형편에서 민주주의는 더구나 목숨과도 같이 귀한것이다. 그에 대한 종말은 곧 당의 종말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두려워 정의를 외면하고 민중의 근본리익을 버릴수 있는가. 옳다고 그 길로 나가야 한다고 암중모색끝에 찾아낸 진리를 두고 당내민주주의를 위하여 줴버리거나 후퇴할수 있는가.

당대표의 권위는 당을 대변하는 자리일뿐아니라 당원전체를 이끌고 선도해야 하는 사명감을 의미한다.

다수의 의견이 곧 정의가 되는것이 아니다. 목소리가 가늘다고 해서 무시할바도 아니다. 민중의 근본리익에 부합되고 민중의 지향에 일치된다면 마땅히 그쪽으로 몰아가야 한다.

당대표는 어찌 보면 기러기떼를 끌고 선두에서 방향을 잡고 날으는 길잡이와도 같은것이라고 신창균이 이미전에 말하였다. 길잡이의 소리와 날개짓에 따라 무리가 정연한 대형을 유지하고 만리하늘길을 헤치듯이 당도 자기 지도자의 리념과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당의 성숙한 모습이며 당대표의 지도적인 자세이다.

사공이 많은 배가 산으로 오르고 말많은 집의 장맛이 쓰다고 각이한 주장을 정의에로 지향시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당으로 튼튼히 묶어세워야 하는것이 바로 당수의 기본임무요, 마땅한 본분인것이다.

당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하여있는 이 시각 당안의 반발에 위축되여 정의를 버리거나 다수의 압력이 두려워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로써 나는 사실상 당수로서의 권위도 자격도 잃게 될것이다. 당대표의 주먹은 산수적인 한표로 끝나서는 안된다.

그는 마치도 회의장에 나선듯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옳다! 과반수의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정의를 상실했을 때 나는 그에 승복할수는 없다.

당수의 한표는 당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한표이며 오직 진리가 가리키는 승리의 길로 당원들과 지지세력을 인도하여야 하는 한표이다. 이제 나는 그 한표를 행사해야 한다.》

그는 선거전에도 당수로서의 자기의 위치를 놓고 바로 이 한표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격론을 벌리던 일이 새삼스럽게 생각났다.

일단 결심이 되자 그는 지체없이 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갔다.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눈길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고요… 고요… 예리한 감정이 세차게 부딪치고 불꽃만 튕겨놓으면 순식간에 터질것 같은 고요가 흐르고있었다.

조봉암은 제자리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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