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1
두점을 때리는 벽시계의 종소리가 고요한 방안의 공기를 휘저어놓았다.
조봉암은 뒤짐을 지고 방안을 천천히 거닐다가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벽시계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흠, 뭐가 잘 안되는 모양이구만.》
조봉암이 시름겨울 때 항용 그러하듯 량미간에 패워진 그 인상적인 골이 더 깊이 패워졌다.
조봉암은 량미간을 손부리로 문지르며 다시금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 서정후의 서울집에서 열리고있는 혁신대통합12인위원회에 관여하고있는 윤기중과 조직간사를 기다리고있었다.
혁신대통합운동이란 진보당을 주축으로 하는 혁신계의 인물들을 하나의 거대야당으로 묶어세우는것을 목표로 하여 초여름부터 시작된 새로운 움직임이였다.
이 운동을 발기해나선것은 서정후와 그의 측근인물들이였다.
선거직후에 정계에서 무소속으로 있던 중도적인 《국회》의원들과 민주당의 혁신계인물들이 이 당의 최고위원 곽상훈을 위시하여 진보당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를 보이였다.
이것을 리용한 서정후가 일부 측근인물들의 부추김을 받으면서 독자적으로 혁신대통합을 주장하여나섰던것이다. 여기에 진보당을 쳐다보고있던 정계의 혁신을 표방하는 인물들이 호응하여나섰다. 이렇게 되자 각계층, 각 당파에 망라되여있던 인물들이 수많이 진보당을 찾아와 통합을 주도해줄것을 조봉암에게 제기하였다.
조봉암은 야당과 재야의 전체 혁신계를 하나의 거대야당으로 통합하는데 대하여서는 지지하면서도 자기의 정치적구상이 틀어지게 되는데 대하여서는 불안해하였다. 조봉암은 하루속히 지난해말에 선거를 앞두고 서둘러 진보당간판을 걸고 활동하여온 당추진위원회를 당중앙조직과 지방당조직으로 개편하고 나아가서 1958년에 있게 될 《국회》선거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고 그에 기초하여 1960년에 있게 될 《대통령선거》에서 리승만《정권》을 몰아낼것을 전략적로정도로 그려놓고있었다.
원래 조봉암은 진보당 중진들에게 이미 진보당의 출범을 선포한 조건에서 선거가 끝난 후 한달안으로 우선 진보당 중앙조직을 정식 결성하자고 협의하였었다.
조봉암은 이번 선거의 개표에서 패배했으나 전국적으로 자기 당에 대한 지지가 급상승한것을 확인하였으며 이 세력을 기반으로 당을 확대강화하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지난 운동의 력사를 분석적으로 연구하면서 조봉암은 승리가 가능할 때 모여드는 세력이 최대세력이라는것을 실감하군 하였다.
일단 리유여하는 불문에 붙이고 패배한 당으로서 이제 더는 그 이상의 세력을 모아들일수는 없다는것이 그의 결론이였다.
시간이 갈수록 진보당의 기치밑에 뭉쳐진 세력까지 흩어지기 마련이다.
조봉암은 당내외의 통합에 대한 의욕적인 움직임을 지지하여 일단 서정후를 대표로 하는 당의 주요인물들을 당의 통합을 위한 실무진으로 파견하면서 최대로 다그칠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혁신계의 대통합에 나선 여러 세력의 대표 12명으로 정식 위원회가 무어지고 혁신계의 통합준비가 본격화되여갔다.
그런데 그 12인위원회(혁신대통합12인위원회의 략칭)라는데서 황당한 주장이 울려나오기 시작하였다.
우선 서정후와 선전간사 심운을 비롯한 일부 인물들이 광범한 민주혁신세력을 다 결집시키자면 진보당 중앙위원회의 설립을 늦춰야 한다는 설을 내돌렸다. 아무래도 그 세력이 새로 조직되는 혁신통합의 세력권으로 흡수되겠는데 진보당 중앙을 조직하는것이 필요한가 하는것이였다.
지어는 진보당추진위원회조차 백지화하며 당명마저 아예 《민주혁신당》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였다.
이런 제안을 들었을 때 12인위원회에 파견된 윤기중과 조직간사를 앉혀놓고 조봉암은 눈이 빠지게 다불러댔다.
《무슨 수작들을 하고있는거요? 진보당의 이름이 지금 수백만 민중속에 깊이 뿌리박았는데 그걸 말살한단 말이요? 안되오. 절대로 안되오. 하나의 정당이 대중의 마음속에 자기 이름으로 뿌리박는것이 떡먹듯 되는 일이요? 오늘 우리 당의 권위가 이 정도로 되기까지 당신들도 얼마나 어려운 시련을 헤쳐왔고 얼마나 큰 희생을 당해왔소?! 안되오!》
조봉암의 책망은 종아리에 감겨드는 회초리처럼 맵짜고 단호하였다.
윤기중도 조직간사도 자기 당수의 확고한 립장에 비껴있는 지나간 시절의 간고무쌍한 투쟁과 그 투쟁속에서 흘린 피와 눈물을 너무도 잘 알고있기에 변명 한마디 못하고 그가 내리는 회초리를 받아들였다.
기실 진보당이 지금처럼 과반수의 대중의 심장에 뿌리내린것은 어제오늘에 갑자기 이룩된 결실이 아니다. 그것은 조봉암이 일찌기 농림부 장관시절부터 시작되여 2대와 3대를 거쳐온 《대통령선거》에서 받아낸 대중의 지지가 진보당으로 직결되여 서서히 민중의 의식으로 침투된 간고분투의 결과이다.
그들은 괴로운 침묵속에서 회오리같이 흘러간 세월과 자기들의 주위에 갑자기 불어닥친 엄혹한 정치의 노도에 밀려 뒤전으로 사라져간듯싶던 추억이 조봉암의 쇠소리나는 경종을 통하여 마치도 어둠속에서 타오르는 우등불과도 같이 너무도 령롱한 빛으로 너울거리는것을 보았다.
그것은 진보당의 창당에 귀한 땀과 열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더구나 조봉암과 더불어 동고동락의 세파를 넘어온 진보당의 골간들에게는 목숨처럼 귀중한것이였다. 그 소중한것을 송두리채 버려야 한다니… 이게 쓸개빠진짓인것만은 분명했다. 사태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계속 밀리고있다.
조봉암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입을 다물고 뒤전에 물러나있는 서정후의 계략이라는것을 간파하고있었다. 그 계략이 자신을 2선으로 밀어내기 위한 놀음으로 귀착되리라는것도 내다보고있었다. 하지만 이런 놀음이 서정후의 탐위의식을 리용한 막후세력의 보다 음흉한 계략이라는것까지는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12인위원회가 매일처럼 모여앉았으나 조봉암지지세력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서정후세력의 주장은 일단 보류되였다. 따라서 통합운동도 세월없이 끌어갔다.
날이 갈수록 첨예해지는 두 파간의 대결이 당안에서 여러가지 잡음을 만들어내면서 지지세력들이 하나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6월중에 중앙당을 만들어가지고 8월에 진행되는 지방의회에 당의 지방대표들을 내세워 지방의회를 장악하려던 조봉암의 시도는 좌절되고말았다.
진보당은 집안싸움에 지치고 기력이 빠져 선거후보들을 미처 장악하고 내세울수 없었던것이다.
결국 지방의회를 장악한 다음 그를 통하여 전국적인 규모에서 당조직을 확대하고 완비하려고 했던 조봉암의 전략적목표도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서정후의 거대야당이란 본질에 있어서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진보당추진위원회를 비롯한 당의 기초로 될 조직들과 이미 마련하여놓은 대중적지반마저 분산되고 약화되였다.
서정후와 그의 추종인물들은 혁신계의 다른 세력들과 규합하여가지고 진보당 당명을 고수하고 진보당조직을 모체로 하여 야당통합을 실현하고저 하는 조봉암과 지지세력들을 대중운동의 분렬과 《조봉암우상화를 꾀하는 분렬주의집단》으로 몰아대면서 집요하게 압력을 가하여왔다.
조봉암과 측근인물들은 이에 대하여 경계하고 긴장성을 늦추지 않았으나 당과 혁신계의 분렬을 막아내기 위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서정후측의 주장을 대폭 받아들이는수밖에 없었다. 우선은 진보당의 이름을 내놓기로 하였다.
한걸음의 탈선과 양보가 두걸음, 세걸음의 후퇴로 이어졌다.
이번에는 조봉암의 정계퇴진이 선언되여야 한다는것이다. 2선에서 당의 조정자로서의 지위를 줄수 있으나 1선에서의 공식적인 지위는 내놓아야 한다는것이다. 그 리유는 조봉암이 지금까지의 도전에서 실패한것이 공산당경력을 가지고있는탓인데 앞으로도 그걸 지워버릴수는 없다는것이다.
이것때문에 또다시 통합회담은 결렬되고 달이 바뀌여갔다.
진보당의 당명을 바꾸게 하는데 성공한 서정후와 그의 세력들은 다시금 진보당밖의 혁신계를 동원하여 마지막공세를 벌렸다.
조봉암은 또다시 자기의 퇴진문제가 공개되고 당안팎에서 여론이 분분하자 그에 대한 결정은 12인위원회에 실무대표로 참가하고있는 윤기중과 조직간사에게 일임하여버리고말았다.
이날 저녁에 드디여 혁신계의 대통합원칙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제 그 결정내용을 가지고 윤기중과 조직간사가 조봉암을 찾아오게 되여있었다.
《아버지, 이젠 그만 쉬세요!》
며칠전에 병원에서 퇴원한 연경이가 방안에 소리없이 들어섰다.
《넌 왜 지금까지 자지 않구 있었느냐?》
조봉암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제 윤기중이 가지고 올 문건을 연경이가 자기 못지 않게 기다리고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럼 차 한잔 가져올가요?》
《차? … 아니, 배고프구나. 저녁에 먹다가 남은 죽이 있으면 한보시기 가져오너라.》
조봉암이 빙그레 웃자 연경은 얼른 부엌에 나가 좁쌀죽 한보시기를 덥혀가지고 양념간장종지를 곁들여 다반에 담아 들여왔다.
《너도 날 따라 밤새울 잡도리면 숟가락 가지고 오너라.》
《난 배고프지 않아요, 어서 잡수세요.》
연경이는 원탁우에 들고 온 죽보시기와 양념간장을 놓고 앉았다. 그리고 턱을 두손에 받쳐들고 맛있게 죽을 드는 아버지를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조봉암은 저녁에는 늘 죽으로 끼니를 에우군 하였다.
죽가운데서도 좁쌀죽을 제일 즐겨한다. 옛날 아이적에도 죽을 먹으며 자라난데다가 상해에 가있을적에 좁쌀죽에 맛을 들인 후로는 신의주감옥살이를 마치고 인천에 돌아와서도 늘 좁쌀죽을 찾았다.
효경이, 연경이가 처음에는 부디부디 죽을 드실건 뭐냐고 지청구가 많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조봉암을 따라 저녁 한끼는 좁쌀죽을 쑤어 달게 먹는다.
그런 저녁이면 가끔 조봉암은 딸들과 사위에게 이렇게 곱씹군 한다.
《난 이 죽을 먹을 때마다 나자신에게 이르군 한다. <죽산은 농군의 자식이다.> 하고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근본을 잊지 말라고 늘 속을 다지는 아버지의 웅심을 받아안으며 연경이도 속깊이 덧새겨간다.
(연경이, 넌 농군의 손녀다.)
조봉암이 죽보시기를 밑굽까지 반반히 비우고 연경이가 내미는 물 한고뿌까지 마시고나서 일렀다.
《돌아가서 자거라. 좋은 소식이면 깨우마.》
《괜찮아요. 소식 듣지 않고서야 잠이 오겠나요.》
연경이가 이렇게 말하며 그릇을 챙겨가지고 나가는데 대문에 련결되여있는 초인종소리가 두세번 찌릉찌릉 울렸다.
조봉암이 이내 덧옷을 입고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에 나서는데 벌써 대문열리는 소리가 나고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봉무가 어느새 대문의 쪽문을 열어주고 윤기중과 조직간사를 맞고있었다. 그도 잠들지 못하고 접수실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다가 초인종소리에 놀라 뛰여나왔던것이다.
《수고들 하셨소. 어서 들어갑시다.》
조봉암은 그들을 데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는데 연경이가 차잔과 차주전자를 다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그는 윤기중과 조직간사가 긴장한 자세로 앉아있는 앞탁에 잔을 놓아주고 차를 따랐다.
이내 조용히 물러가려는 연경을 조봉암이 불러세웠다.
《연경아, 너도 참석해라. 이건 우리 당중앙대표들의 중요한 협의회다. 그러니 기록을 남겨야 한다. 아직 우리 당의 해산은 결정되지 않았다.》
조봉암은 담담하나 무게있게 딸에게 지시하였다.
다반을 내려놓은 연경은 말석을 차지하고 속기할 준비를 서둘렀다.
방안의 분위기가 한결 엄숙해졌다.
윤기중과 조직간사는 차잔에 손을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한채 무겁게 앉아있었다.
《자, 말씀들 하시오. 누가 보고하겠소. 12인위원회의 결정부터 들어봅시다. 그래 통합원칙은 확정되였소?》
《예, 최종적으로 결정이 되였습니다.》
윤기중이 앉은자리에서 이렇게 맥이 풀려가지고 대답하였다.
《그 원칙을 만들어내느라 반년을 끌었구만. 하여튼 만들어냈으니 다행이요. 간사장이 보고하시오.》
조봉암의 호명에 윤기중이 선뜻 일어서지 못한채 쌍겹눈을 내리깔고 한숨부터 길게 내쉰다.
조직간사는 조봉암의 시선이 자기 얼굴에 박힐가봐 걱정스러운듯 하얀 천정만 멀거니 쳐다본다. 그는 함경도출신인데 강직하기로 당안에서 신창균과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였다. 원칙이 강하고 융통성이 좀 부족한것으로 극좌적이라는 평도 들어온다.
조봉암은 이들이 분명 매우 달갑지 않은 소식을 가지고 나타났다는것을 짐작했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불안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고 재촉하였다.
《허, 간사장이 웬일이요? 쓰든달든 어차피 삼켜야 할게 아니요. 어서 보고하시오!》
윤기중이 입을 쩝쩝 다시며 말떼기가 난처해서 그냥 자리에 엉치를 박은채 궁싯거렸다. 원래 혈색좋은 얼굴이 벽돌빛으로 달아올랐다. 뒤로 더 물러설수가 없다는 생각에 느릿느릿 들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냈다. 그는 이 종이 저 종이 부산스럽게 번지다
가 그중 한장을 골라 손에 들었다.윤기중은 이내 읽지 못하고 손수건을 꺼내들더니 벌써부터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는 땀방울을 꾹꾹 눌러 지웠다.
《그러면 제가 12인위원회 결정내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그의 첫말은 무척 소심하고 떨리기까지 하였다. 그 말에는 이게 내 뜻은 아니니 량해하여 들어달라는 구차스러운 변명이 깃들어있었다.
몸집이 좋은 사람이 처신이 난감해서 어깨를 옹송그리고 진땀을 빼고있는 모양이 무척 가긍하게 보이여 조봉암은 그에게 힘을 주느라 한마디 더하였다.
《허허허… 오늘은 웬 일이요. 우리 간사장이 언제부터 이렇게 열통이 작아졌소? 결정이라는걸 들어봅시다. 귀맛이 좋건나쁘건 들어야 할게 아닌가? 어서!》
《에… 원문그대로 읽겠습니다.》
드디여 윤기중은 어려운 고비를 빨리 겪고 도망이라도 칠듯 재빨리 종이장에 있는 글들을 읽어내려갔다.
《혁신대통합12인위원회는 당조직건설의 기초로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전원일치로 합의결정한다.
첫째, 일체 입당청원은 개별자격으로 한다.
둘째, 혁신대정당의 당명은 <민주혁신당>으로 명명한다.
셋째, 민주혁신당에 통합되는 모든 정파, 당파들은 당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넷째, 진보당추진위원회를 백지화한다.
다섯째,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당지도부에서 일정한 기간 후퇴시키도록 권고한다.》
보고를 바쁘게 속기하던 연경은 입을 딱 벌린채 윤기중을 쳐다보다가 외마디소리를 냈다.
《세상에…》
경악과 반발이 분명한 연경의 소리에 윤기중은 마치도 자기 등골을 찔리우기라도 한듯 큰 몸을 흠칫 떨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를 푹 수그린 조직간사도 속이 달아오르고 입술이 바짝 말라들어 혀끝으로 연신 감빨았다.
《혁신대정당건설이란 결국은 진보당말살, 그 당수 죽산제거작전이였군요? 그래…》
조봉암이 손을 들어 흔들며 딸의 입에서 마치도 기관총의 련발총성처럼 급하고 명백하게 쏟아져나오는 대찬 부르짖음을 엄하게 가로챘다.
《연경! 버릇없이 앉아서 그게 뭐냐? 제일이나 해! 너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내 뭐라고 했니? 이건 협의회야. 당중앙대표들의 협의회라구! …》
윤기중이나 조직간사는 연경의 예리한 정치적감각에 크게 놀랐다. 연경이 비록 나어린 처녀였지만 일순간에 12인위원회의 결정이 가지는 본질과 그의 해독성을 정확히 꿰뚫어본것이다.
조봉암도 딸의 예민한 반응과 정치적감각에 실은 혀를 찼다.
결정의 모든 사항이 연경이가 분석, 평가한 그대로 진보당과 자기를 겨냥한것이라는것이 명백하였다. 입당청원을 개별자격으로 한다는것은 결국 진보당을 해산하는것을 전제로 한다는것이다. 새로 조직되는 민주혁신당이라는게 당명은 거창한것 같아도 빠개놓으면 그 기본세력은 진보당추진위원회와 그 지지자들이며 당의 이름을 가지고있는 력량도 진보당뿐이다. 그런데도 진보당추진위원회를 백지화한다는 조항까지 결정에 박아넣었다. 이것은 진보당에 대한 로골적인 무시이며 공갈이다. 주객이 바뀌여가지고 결정이라는것이 만들어진게 분명하다.
가슴속에서는 분노의 격랑이 무섭게 갈기를 쳐들었으나 조봉암은 의연한 자세로 앉아 아직도 오연하게 버티고 서있는 딸에게 엄하게 일렀다.
《자기 임무를 계속 수행해라. 보충설명을 해보시오.》
조봉암의 지적에 연경은 아래입술을 옥물고 자리에 앉았다. 그대신 조직간사가 주밋거리며 일어섰다. 위태로운 벼랑끝에 간사장만 세워두고 자기는 비렬하게 뒤전에 숨어있다는 수치심에 더는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이건 맞아도 함께 맞아야 할 매다. 비켜설수도 없다.
《에, 제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죽산선생이나 모두가 다 알고있는것처럼 극좌적이라는 평판을 많이 받고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이번에 자신의 인격까지 깎이면서 중도세력의 립장을 대폭 수렴한 이같은 결정을 받아물게 되였는가. …
저도 서정후와 일부 인물들의 주장에 진보당과 우리 당수를 말살하려는 저의가 깔려있다는것을 느끼지 못한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12인위원회가 대표하는 범야권적인 집단을 놓치고싶지 않았기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추진하고있는 야당이 창립되면 그야말로 거대야당으로서 민중의 대다수를 대표할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더는 자기의 기존립장을 견지할수 없었던것은 진보당세력의 분렬과 조직적약화를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기때문입니다.
지금 서정후와 야권의 인물들은 우리 진보당이 당리당략에 집착되여있기때문에 야권의 통일적정당건설이 지체되고있으며 민중의 지지를 잃고있다고 민심과 여론을 몰아가고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보당은 민중의 지탄을 받아 지리멸렬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것이 내외의 일치한 평가입니다. 서정후는 바로 이것을 노리고있습니다.
중요한 문제가 또 있습니다.》조직간사는 차츰 론의가 심화되여가자 처음과는 달리 사리정연하고도 자신있게 자기의 주장을 펴나갔다.
사실 이날 저녁 그들이 12인위원회결정을 받아문것은 여러날에 걸치는 고민과 암중모색끝에 내린 괴로운 결단이였다.
12인위원회는 각 계파들에서 한명의 대표들만 참가하고 유독 진보당만은 그의 무게를 고려하여 네명이 참가하였다.
그 네명중에서 절반씩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있었다. 진보당고수파는 윤기중과 조직간사였고 진보당 해산파는 서정후와 심운이였다.
그런데 12인위원회의 다른 성원들에게는 처음부터 서정후의 주장이 거대야당조직에서 당파적리해관계를 초월한 진취적이고 폭 넓은 그러면서도 도량이 크고 량심이 바른것으로 비쳐졌다면 윤기중과 조직간사의 주장은 협애하고 권력야심적이며 완고하기 그지없는 진보당의 독판치기로 평가되군 하였다.
이에 대하여서는 이미 조봉암도 알고있었다. 조봉암은 통합시도가 시작될 때부터 자신과 당을 난처하게 만들고있는 서정후의 교묘한 간계에 눈을 밝혀오기도 하였다.
조직간사가 보충설명을 계속하였다.
《우리 당의 전략적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술적후퇴를 하자는것입니다. 죽산선생의 2선후퇴와 진보당 당명의 포기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반년 되게 완강하게 버티여온 이 문제를 받아물게 된 리유는 책임회피나 변명 같습니다만 이러합니다.
우선은 당을 만들어놓자. 자유당이나 민주당을 압도할수 있는 거대야당을 한지붕아래 세워놓자-이겁니다.
민주혁신당이건 무슨 당이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보당이 주축으로 되여있고 죽산선생의 제자들인 우리가 핵심으로 되여있는 당으로 될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이 우리의 영향속에 있는 한 죽산선생의 리념을 받드는 당으로, 죽산선생의 정치의 무기로 될것입니다.
따라서 4년후에 있게 될 4대대통령후보에 죽산선생이 재출마되리라는것은 확고한 전망이며 민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혁신당의 유일한 선택으로 되리라는것은 명백합니다.
물론 12인위원회에서 서정후를 비롯한 몇몇 분자들이 죽산선생을 의도적으로 말살하고 저들의 지도권을 확보하려고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습니다. 12인위원회의 과반수 성원들이 죽산선생과 진보당을 지지하고있으며 우리의 절충적인 견해에 대하여 리해를 표명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요인들로 하여 저와 간사장은 고민과 숙의끝에 서정후측이 내놓은 민주혁신당건설의 원칙에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조직간사는 루루하게 변명하고 자기들의 립장을 설명하면서도 이따금 조봉암의 심적변화에 신경을 쓰고 자주 그에게로 눈이 돌아갔다. 그러나 조봉암은 눈섭 한오리 흔들림이 없이 반석같이 앉아있었다.
조직간사는 수건으로 땀이 질벅하게 내배인 목덜미와 이마를 씻으며 자리에 앉았다.
방안에는 한동안 납덩이같은 무거운 정적이 서렸다.
연경이 두터운 입술을 철문처럼 닫아붙이고있는 아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연경이는 아까와는 달리 침착하고도 차분하게 제기하였다.
조봉암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쉽게 자기를 다잡고 리성을 가다듬은 둘째딸의 침착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연경의 모습이 무척 세련미가 있어보였다. 어깨에 흘러내려 춤을 추던 멋스럽던 산발도 언제부터 중단발로 바뀌여지고 노상 장난스럽게 반짝거리던 눈에는 그윽한 고요가 어려있다. 늘쌍 리성보다 감성이 앞서던 고집스러운 태도, 옳다고 생각하면 좌우를 살핌이 없이 영악스럽게 골받이하던 시절은 지나간듯 얼굴에 정숙이 깃들어 혀끝까지 치밀어오른 신랄한 주장과 표현들을 깊이 묻어두고있는듯싶다. 확실히 연경이는 달라졌다. 착실하게 정치를 배우고 익히며 나날이 커가고있다.
조봉암은 이제 자기가 고개만 끄덕이면 딸이 론리정연한 주장으로 12인위원회결정의 부당성과 해독성을 낱낱이 해부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은 머리를 조용히 흔들었다.
아직 이 중대한 사변적인 결정을 놓고 서뿔리 론의를 시작해서는 안될것 같다. 보다 신중성을 기하여야 한다. 당의 운명을 두고 보다 무게있고 책임적인 의사를 종합해야 한다. 이 결정에 자신뿐아니라 진보당 당원들의 미래도 달려있음을 심각하게 의식했다.
《아니, 여기서 론의되고 결론할 문제가 아니다. 이건 지난 10년가까이 뿌려진 수많은 동지들의 피와 땀과 희생에 대한 평가에 관한 문제이다. 당과 당원들의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조봉암은 연경이를 눌러놓고는 윤기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추진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결정을 받읍시다. 필요하면 각급 당추진위원회들에 통보해주고 그들에게 선택할수 있는 기회도 줍시다. 상무위원회는 사흘후에 이 자리에서 합시다.》
조봉암이 다른 의사표명이 없이 하는 말에 두사람은 의아해서 서로 눈길을 마주쳤다. 조봉암에게서 졸경을 당할 각오까지 하고 무겁게 들어섰던것이다.
《알았습니다.》
윤기중이 자기들의 충심을 헤아려준듯싶은 조봉암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어 한결 가볍게 대답을 하고 바삐 방을 나섰다.
그러나 자기 당수의 속궁냥을 누구보다도 잘 가려온 윤기중이 이번에는 일견 덤덤해보이는 표정에 가리워 소용돌이치고있는 조봉암의 흉중을 헛짚고있었다.
조봉암으로서는 예상치 않았던 타격이였다.
지금까지 당해온 외적인 타격에서 전례없이 예리하고 치명적인것이였다.
그는 새로운 싸움에 나서야 하였다. 당장은 자기를 이겨내야 하는 싸움이다. 어떻게 하는것이 자기를 이겨내는것일가. … 쉬이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리속이 삼검불처럼 복잡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