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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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원에서 좌절감에 휩싸여 여러 잔의 술을 걸친데다가 고향사람들과 같이한 자리가 무등 흥취가 나서 권하는 잔을 다 받았더니 머리가 지끈지끈하였다.
조봉암은 효경이가 들고 나온 강냉이차 한잔을 다 비우고나서 마당을 거닐었다. 5월 중순이 모내기철이라 하지만 야밤의 바깥날씨는 쌀쌀하였다. 가까운 논밭에서 개구리가 개굴개굴 울어대는 소리가 깊어가는 밤의 적막을 흔들며 야단스럽게 들려온다.
그는 마당 한가운데 솟아있는 느티나무둥치에 기대여 나무가지사이로 북악산에 걸터앉은 달을 쳐다보았다.
초경에 진을 다 뽑은듯 이제 희무스름하게 빛이 바랜 엷은 달이 마지막숨을 켜고있는것 같다.
미구하여 달이 빛을 잃고 꺼져가자 기다린듯 알알이 여문 별들이 서로 제 맵시 뽐내기라도 하듯 신명이 나서 반짝반짝 웃고있다.
이따금 서쪽에서 바쁘게 헤염쳐오는 구름장들이 그 찬란한 별의 세계에 시샘이라도 난듯 시커멓게 가리웠다가는 아기별들의 성화에 못 견디겠다는듯 동쪽으로 바삐 달아난다.
아기별들은 저마다 구름에 말쑥하게 닦이운 제 얼굴을 봐달라는듯 어리광부리며 깜박거린다.
조봉암은 자기의 가슴에도 시커먼 구름장이 밀려들어 속을 어수선하게 만들어놓고는 그 어떤 드센 일격에 쫓겨가는듯싶었다.
문득 느티나무의 웃초리에서 휘익- 소리가 났다. 밤새가 느티나무에 앉아서 꿈나락에 들었다가 아래쪽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놀라 깃을 쳐서 날아나는 모양이다. 엷은 별빛에 취해서 졸고있던 느티나무가 후닥닥 깨여나 가지를 흔들어 잎새마다 돋친 이슬방울들을 뿌려던진다.
하늘을 향해 쳐들었던 조봉암의 얼굴에 후두둑 이슬이 떨어져 선뜩했으나 달아오른 볼이 젖어들면서 속도 시원하게 열리는것 같았다.
사색은 여전히 무겁고 침울하게만 이어져갔다.
동료들과 고향사람들에게 미래를 약속하고 새로운 출발을 용기백배하여 선언하였으나 그 묘연한 앞길이 불안스럽기만 하였다.
여전히 시련과 장애물은 갈피없이 날아다니는 저 하늘의 구름처럼 끝없이 대들어올것이다.
이제는 선거에서 확보된 지지세력을 진보당으로 묶어세우는 본격적인 공격전으로 넘어가야 할가부다. 제일 큰 장애는 리승만일파의 필사적인 저항이다.
《후-》
그의 입새로 숨소리가 길게 뿜어졌다.
승리에 대한 자신만만한 약속에 반신반의하던 친구들의 가마잡잡한 모습이 느닷없이 눈앞에 어른거렸던것이다.
그들은 애당초 선거놀음을 부정하고있다. 종이장을 가지고 리승만을 꺼꾸러뜨릴수 있느냐고 머리를 기웃거린다.
농사군들의 무식한 소리라고 그저 넘길수 없는 말이다. 아니, 농사군들의 소리이기에 그 여운이 더욱 무겁다.
농사군들은 거짓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기의 체험과 자기의 육감으로 만들어낸 진실만이 있을뿐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정말 종이장으로 총칼을 이겨낼수 있는가. 리승만의 철권통치를 선거표로 끝장낼수 있느냐. 우리 력사는 이미 거기에 대답을 주었다. 오욕으로 곰팡내를 풍기는 우리의 현대사가 재확인하여주고있다.
그 력사의 진리가 농사군친구들의 너무도 소박한 말속에 담겨 그 의미를 강하게 새겨준다.
그렇다면? … 다른 길은 없지 않은가.
아직까지는 이 길만이 승리에로 이어진 확실한 길이다. 이제는 되돌아설수도 없다. 우리는 민중의 심판을 종이장으로 모아 독재를 청산하는 새 력사를 반드시 창조해야 한다. 종이장으로 총칼을 짓누를수 있다는 새시대의 정치의 모습을 안아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앞길을 막아서고있는것은 리승만뿐이 아니다.
이번 선거를 두고보면 미국도 진보당이나 혁신정당이 이 땅우에 솟아나는것을 원치 않고있다. 장애라고 할진대 사실은 이게 제일 큰 장애다.
미국의 속심은 이미 조봉암이 알고도 남음이 있다.
자유나 민주라는 말이 좋기는 하지만 아직도 너희들에게는 시기상조라는것이다. 리승만과 같은 반공독재자가 있어야 현 단계에서는 제놈들의 세계전략실현에 리로울수 있고 북과의 대결을 저들의 요구대로 밀고나갈수 있다는것이다.
그놈들이 식민지나라 민중이 겪고있는 불행이나 정치의 지향점같은것을 안중에 둘리 없다.
조봉암은 나날이 이러한 생각을 깊이하여온다.
지난달말부터는 미국공보원에서 주동적으로 제기하여 진행되여온 영어수강도 중단되였다.
서울공보원 원장이 미국대사관과 심중한 협의끝에 합의된 문제라고 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밀접해지게 될 앞날을 위하여 영어강의를 받는것이 어떠냐고 제기해왔을 때 조봉암은 나이를 핑게삼아 좋은 말로 사절하였다.
그런데 오랜 친구인 인천총령사관 주임연구원 롤만이 그에게 영어수강에 응하라고 곡진히 권고하였다. 대사관에서 영어수강을 제기하는 의도가 여러가지인데 구태여 피하지 말고 자기의 목적에 리용하는것이 실리라고 설복하는것이였다.
미공보원에서 파견되는 영어강사가 중앙정보국소속이니만치 그와의 사업을 잘하면 미국의 불신과 경계심도 눙쳐주고 그를 통한 미국과의 통로가 생겨날수 있다는 롤만의 말에 조봉암은 수강에 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주에 2강의씩 수강해오면서 강사와의 사업에도 품을 넣어 그가 상전들에게 긍정적인 반영을 하여 그들의 의심짙은 예민한 후각을 너누룩하게 해주도록 하였다.
올해 갓 40을 넘긴 독신녀성인 강사는 조봉암을 여러차례 접하면서 그의 인격에 매혹되여있었다. 그는 마지막강의를 마치고나서 조봉암에게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였다.
《저는 선생님의 인품에 매혹되여 서울에서 롤만박사님 다음가는 린접이 되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되여 정말 유감입니다. 이번 선거가 잘될것 같지 않군요.》
이것을 되짚어보면 미국은 조봉암을 질시하고있으며 자기를 동료로 선택할 의향이 없다는 암시이기도 하였다.
롤만은 조봉암의 판단을 긍정하면서 다울링과 미국무성이 리승만의 히스테리적인 발작에 시한부적으로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실상 미국은 이번에 진행된 선거부정에 대하여 비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진보당에 가해진 대규모적이며 공개적인 테로가 여론의 비발치는 공격을 받고있음에도 미국은 일언반구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있다.
오히려 선거직후 미국무성은 정치참사의 담화라는것을 발표하여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속에서 벌어진 이번 선거는 순조롭게 선거자들의 의사표현이 보장되였다고 낯짝이 간지럽게 요사를 떨었다.
바위쇠가 미군이 있어가지고 통일도 민중세상도 되겠느냐고 걱정하는게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길이야 없지 않은가.
그는 다시금 바위쇠한테 주었던 대답을 곱씹어보며 심장을 다독거렸다.
당안의 분위기도 분명 어수선하여졌다.
조봉암은 아서원에서 서정후와 그 추종자들이 보인 상서롭지 못한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생각되였다.
흥분한 당내 주요인물들의 강한 압력으로 일시 주춤거렸으나 서정후의 성격적기질로 보아 이제 필경 더 큰 바람을 몰아와 걸음걸음마다 풍랑을 일으키고 눈보라를 들씌우려고 할것이다.
서정후는 어떻게 하든지 진보당을 자기의 권력야심을 실현시킬수 있는 정치집단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첫 도발을 해본것이 틀림없다. 좌절되기는 하였으나 물러설 위인이 아니다.
서정후란 인물은 체질적으로 그렇게밖에 달리될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정치적야심을 위하여 평생을 뛰여온 사람이였다.
정치적야심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나섰고 정치적야심을 위하여 리승만에게 다가섰다. 바로 그걸 위하여 다시 리승만의 수하에서 뛰쳐나왔고 민주당의 문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정치적야욕을 기어이 실현하려고 조봉암을 찾아왔고 진보당을 업으려 한것이다.
지금 바로 서정후는 진보당이 처한 오늘의 정치적혼란기를 드디여 조봉암을 배제하고 진보당을 통채로 깔고앉을 절호의 기회로 포착한것이다. 조봉암은 이에 대하여 아직은 안개속에서 형체가 명료하지는 않았지만 육감으로 느끼고있었다.
당수에겐 2선으로 물러설 권리가 없다고 하던 신창균의 노기서린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너무 급진적이라는 모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샘물같이 맑은 인간이다. 그래, 그것은 아름답고 정의로운 인간만이 낼수 있는 주장이였다. 나는 마땅히 정의에 사는 인간들, 정에 사는 인간들의 목소리에 의지해야 한다. 진실과 정의를 대변한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권력탐위군들의 훼방에 귀를 기울이는건 민중에 대한 배신이다.
강화사람들이 피로 새긴 그 념원을 내가 저버릴수 있는가. 내가 힘들다고 혹은 서푼어치의 체면에 쫓기워 그들의 그 간곡한 부탁을 배신할수 있는가.
신창균의 말이 옳다.
나에게는 물러설 권리가 없다. 운명을 달리 선택할 권리가 없다.
살아도 죽어도 민중의 노복으로!
조봉암은 이렇게 흉벽에 다시금 저력을 모아 쪼아박고있었다.
그는 그냥 느티나무의 실한 둥치에 허리를 붙인채 하늘의 뭇별들을 올려다보며 하염없이 밀려드는 생각에 파묻혀있었다.
문득 그의 어깨에 외투가 씌워졌다.
딸내외가 아까부터 말소리가 없이 뒤에 와 서있었다. 아버지의 고뇌짙은 사색을 방해할가봐 그냥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고향친구들이 잠들었느냐?》
《예, 두분이 다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주무세요.》
효경이가 대답하였다.
《코를 드렁드렁 곤다? … 그것도 사람이 사는 재미니까. 헌데 내게는 그런 재미가 차례지지 않는구나.》
조봉암의 말투가 여느때없이 쓸쓸하게 들려 효경이는 금시 두눈에 눈물이 촉촉히 고여 눈가를 넘을듯말듯 잘박거린다. 아버지가 괴로워할 때면 위로의 말보다 눈물부터 앞서는 효경이다.
《아버님, 너무 상심을 마십시오.》
김봉무가 안해를 대신하여 각근하게 위로하였다. 그도 아서원모임에 참가하여 당안의 소요가 시작되였다는것을 불안속에 통감하였던것이다. 당안의 불협화음이 지금 장인의 가슴에 예리하게 에여들리라는 생각에 그의 심정도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자신없는 말로 다만 정을 고여 조봉암의 속을 쓰다듬었다.
《승리에 대한 욕심들이 너무 컸으니 일부 사람들이 아마 실의를 느꼈겠지요. 너그러이 량해를 하시고 용서해주십시오.》
《음… 아니… 내가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하는노릇이야.》
《아버님,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싶지 않습니다. 아버님은 응당 승리자로 자부할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무성의 여론조사가 그것을 확인하여주지 않습니까?! 리승만이 너절하게 놀지 않았더라면…》
《아니야. 그 모든것을 미리 헤아려서 대책을 세우며 나가야 될 일인데… 양놈들의 코도 좀 어루만져 그놈들의 후각을 적당히 마비시켰어야 할 노릇이였지. 그리고… 확실히 뭔가 놓친것이 있어… 뭔가 큰것을… 당초에 우리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선거전을 벌렸던거야. 다만 진보당의 초석을 굳건히 다진다는 명분만 내세웠지… 우리는 …》
조봉암은 지금 어제날을 돌이켜보고 앞날을 내다보며 무엇인가 자기가 큰것을 놓치고있었다는, 아직은 그 실체가 분명치 않은 자기불만과 회의를 금할수 없었다.
조봉암의 웅심을 아직은 리해할수 없는 김봉무는 여전히 진정을 담아 그를 위로하고 밝고 신선한것을 안겨주려고 애를 썼다.
《아버님이 어떻게 그것을 다 책임질수 있겠습니까? 선거위원장은 바로 서정후선생이 아닙니까? 선거책임은 누구보다도 서정후선생이나 거기에 참가한 선거관계 일군들이 져야 할 일이 아닙니까. 저는 모임에 참가하여 서정후선생에 대하여 두루 생각되는게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노리는바가 다릅니다.》
《아, 봉무! 그러지 말게. 그 늙은이말고 누가 내게 그런 훈계를 해주겠나? 원래 정치인들은 특히 정당의 당수는 끊임없이 사회적비난과 자기 동료들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거야. 그래야 부단히 각성되고 오유와 탈선을 최소화할수 있는거지.》
조봉암은 사위한테서 자기의 측근들에 대한 뒤소리를 듣는것이 언짢아서 이렇게 밀막아버리려고 했으나 말꼭지를 떼놓은 김봉무는 자못 흥분하여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서정후선생은 빈번히… 후보선출때부터 자기가 나서려고 얼마나 애를 먹이고 막후에서 못나게 돌아쳤습니까?》
《그만하라구. 후보경선이란 필요한거야. 당안에 필요한 절차에 의하여 당당하게 벌어진 사업을 놓고 다른 색갈을 먹이면 안되지. 당내민주주의라는게 도대체 무엇인가? 비판이 없고 경쟁이 없는 당은 부패되기 쉬우며 쉽게 어느 한 개인의 집권야망만 충족시키는 사설정당으로 굴러떨어지기마련이야.》
《저도 그건 압니다. 필요한 당의 활동방식이라는것도 압니다. 저는 서정후선생이 아버님의 경쟁대상으로 나섰다고 원한을 가지는게 아닙니다. 문제는 당안에 세워진 질서와 륜리를 교란시키는것입니다.
당에서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가결에 따라 후보가 선정되면 누구라 없이 당의 결정을 존중해야 될게 아닙니까. 아버님한테 밀려나니깐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어떻게 움직였습니까. 로병은 죽산을 따라 지팽이를 짚고 나서겠노라고 한게 언제라고 그럽니까?
그래놓고 후보출마가 취소되니 무소속으로 당에서 나가 출마하겠다고 소란스럽게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이게 어디 당내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행위입니까? 그건 분당행위입니다. 저는 그후에도 여러차례나 당안에서 이러저러하게 말썽을 피우는것을 보면 그의 정체에 대하여 의심이 갑니다.
이번 선거기간에 보내온 투서들중에는 그를 당의 비밀권에서 내보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당도 이제는 중앙집권제를 론의할 때가 되였다고 봅니다.》
김봉무는 말문을 열자 자신도 모르게 격하여가지고 자기가 지금까지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
평소에 조용하고 온순하던 사람이 진속을 툭툭 헤쳐놓고 밸을 쓰니 그 기세가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다. 사위도 그사이 정치적으로 크게 자란듯싶다.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조봉암은 어깨너머로 손을 올려 자기의 어깨를 꽁꽁 주물러주고있는 사위의 손목을 잡았다.
《허, 임자는 나를 히틀러나 나뽈레옹처럼 만들셈이군.》
롱조로 사위의 격한 말을 받아준 조봉암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차분한 어조로 달래였다.
《어쩌겠나?! 사람들을 하나의 모양으로 만들어놓을순 없지 않나. 사회란 다양한 생활의 총체야. 생활은 곧 인간이 아닌가. 인간상이 천태만상이라는거야 설명할나위도 없는거지. 당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하나로 만든다는것은 더욱 힘들거야.
내 옛말 하나 해줄가? … 25년도에 우리가 코민테른이 쥐여준 붉은 기발 하나만을 들고 무어냈던 조선공산당이 왜 세해도 넘기지 못하고 망해버렸는지 아나? 그건 당의 기발아래 모여온 사람들이 개개명창이여서 도무지 보조를 같이할수 없었기때문이야.
당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가 당대에 이름들이 뜨르르한 리론가들이였는데 뭘 자그마한 문제를 놓고도 합의를 만들어낼수 없고 사소한 분규로 다시 패가 갈라지고 합쳐지고 종당에는 뿔뿔이 흩어져버렸지. 그러나 그때 우리가 추켜들었던 기발은 단 하나, 붉은기였어.
하물며 각이한 경력과 리념을 가지고 색갈도 각이한 기발을 들고 살아온 사람들이 단지 리승만을 쳐몰아내자는 구호밑에 모여들었는데 어떻게 중앙집권제를 론의할수 있겠나? 아직은 시기상조야. 현 단계에서 진보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서는 안돼. 통일전선적인 대중정당이야. 여기에는 리점도 있고 실점도 있어. 독재정권타도에 뜻을 둔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이라는데 그 리점이 있는거야.
얼마전에 리승만과 가장 가까운 지기의 한사람이였던 늙은 정객이 나한테 와서 여생을 마치겠노라며 아들을 보내왔구 리승만의 오른팔로 자처하여온 로성팔이 앞으로 진보당이 서면 자기도 명함장을 들여놓겠다고 전해왔네. 이들이 어떤 인물들인가?
로성팔이만 해도 일생토록 우익에 몸을 담아온 리승만의 측근중의 측근이였지. 그 사람의 입당청원이 어찌도 간곡한지… 외곽에서 도와달라니 자기는 측면지원이 아니라 주공전선의 병사가 꼭 되겠다고 떼를 쓰는거야.
이 사람들의 속바꿈을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혹은 리해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혹은 추켜든 기발의 색갈이 노랗다고 배척할수가 없지 않나?!
자라난 정치의 토양이 다르고 물고 나온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모양으로 다듬어낸다는것은 불가능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아니, 그래서는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인 독재청산과 국토통일을 할수 없어. 우리에게는 이들을 묶어줄 웅지와 덕망이 있어야 하네. 이게 바로 정치야. 이게 없다면 진보당은 소수 당으로 영원히 남아있을걸세. 현 단계 서울정치권의 수준에서 우리가 중도파라는 냄새를 풍기는것은 어찌할수 없는 비극일세. 이 사람, 내 말이 어떤가?》
《아버님, 리해됩니다.》
김봉무는 장인이 절감하고있는 고민을 읽게 되자 쉽게 공감을 하였다.
《어, 좋구나! 난 사실 오늘 기분이 썩 나쁜건 아니야. 득표에는 이겼거던. 누구도 부인 못하지. 어떻게
마련된 승리나. 기
발도 올리지 못한 우리 당이… 해냈거던… 연경이도 좀 나아졌다고 했지…》
《예, 연경이가 의식도 회복하구 오늘 아침부터 제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애가 이번에 수고가 많았다. 우리 연경이가 확실히 보통내기가 아니야.》
조봉암이 화제를 돌리고 기분을 바꾸었다.
《그런데…》
효경이가 말을 잇다가 김봉무의 눈길에 걸려들어 머뭇거렸다.
《그런데? … 왜? 힘들겠다더냐? 의사가 뭐라고 하더냐?》
조봉암이 맏딸이 뒤말을 삼키는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듯 불만스럽게 다그었다.
《안요. … 수술결과는 좋구… 그런데…》
《에, 말해라. 뭘 그러느냐?》
평소에 조봉암은 효경의 착하고 얌전하고 례절바른 품성이 어머니를 쏙 빼물었다고 칭찬하지만 이렇게 소심한 태도를 보일 때면 속이 답답해진다.
《저… 어떻게 알았는지 최금룡이 내내 연경이 머리맡에 붙어있었습니다.》
《최금룡이? … 그게 어쨌다구 말 꺼내기 힘들어하느냐? 최금룡이 찾아왔다니 반갑구나. 헌데 그가 어떻게 알구…》
《글쎄 말입니다.》
《음… 금룡이가 왔더란 말이지… 그래, 찾아왔다니 마음이 놓인다.》
조봉암은 흔연하게 대꾸하며 흡족해하였다.
《다시 돌아올 생각은 없다더냐? 이제는 선거도 끝나지 않았느냐?》
《아버지두 참, 그 사람이 다시 들어설 면목이 있습니까? 배가 가라앉을가봐 저만 살겠노라 도망칠 땐 언제구… 그런건 묻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돌아올 기색도 아니였구요.》
《생각하면 그 사람 행실이 밉습니다. 저는 어저께 병원에 갔다가 만났는데 그래도 아버님의 건강부터 묻더군요. 생각같애서는 주먹질이라도 하고싶은걸 겨우 참았습니다.》
맏딸내외의 격분에 조봉암은 소리내여 웃었다.
《허허, 참… 어떻게 하겠느냐.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떠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사람모양새가 하나같지는 않다고 말하지 않았나. 천령배비서도 래일 서울을 떠나겠다고 인편에 전해왔더라.》
《천령배비서요?》
《그래… 다 제 뜻을 따라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데 최금룡이도 그렇게 속이 크게 생각해주자. 언젠가는 제발로 찾아들지 않겠나. 그 사람이 전일에 내앞으로 편지를 보내왔더라.》
《편지요?》
《응, 무슨 긴 얘기는 없구… 두루두루 죄송하다는 인사더라.》
조봉암은 최금룡이 선거후 신창균을 통하여 보내온 편지생각이 나자 명치가 무죽하여왔다.
최금룡의 편지는 짤막하였으나 그 짧은 인사말속에 숨겨진 속말이 그를 괴롭혔던것이다.
《저에게 사랑을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열과 담을 키워주신 선생님! 막상 하직인사를 드리자니 너무 죄송스러워 연경에게 사직서를 전해올려달라고 하였는데 연경이까지 불쾌하게 했습니다. 저는 비록 떠나왔어도 언제나 선생님의 제자로, 연경의 변함없는 벗으로 인생길을 곧추만 달려갈것입니다. 선생님의 슬하를 괴롭게 떠나가는 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리고 탈가리유를 지켜보아주십시오. 슬하에 다시 안길 그날을 믿어주십시오.》
탈가리유? … 그의 탈가리유가 대뜸 짚이웠다.
진보당의 강령에 대한 불만, 제3의 길에 대한 반발, 진보당의 구성원들에 대한 랭소, 당안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대한 환멸…
그러면 너는 도대체 어느 길로 어떻게 갈것이냐?
조봉암은 그의 탈가를 때묻지 않은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속에서 왕왕 느끼게 되는 오랜 정치인들에 대한 권태감이며 도전이요, 단순하면서도 천진한 객기라고 속이 크게 아량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그가 이 나라 정치의 심부에 깊숙이 발을 잠그어가느라면 자기 행동의 경솔함을 깨닫게 될것이고 종당에는 돌아오리라고 기다려주기로 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즈음에는 그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그 짤막한 편지의 여운이 점점 무거운 중력으로 심신을 짓누르는듯 한 압박감을 느끼군 한다.
조봉암은 헌헌한 어조로 아픈 속을 가리우며 말을 이었다.
《난 믿고 기다린다. 이제 만나면 내가 한번 오란다구 전해라. 내가 선거놀음에 빠져서 밥 한술 같이 들지 못하구 떠나보냈구나. 최기오의 안부도 알고싶구… 그 사람이 참 선거자금을 가져온게 있더라?》
《예, 50만환을 보내온걸 돌려보냈습니다.》
김봉무가 공손하게 대답하느라고 했지만 거기에 깔린 감정은 례사롭지만 않았다.
그 소리에 조봉암이 놀라서 고개를 홱 돌리였다.
《돌려보내다니?! … 가져온 자금을 돌려보냈단 말이냐?》
조봉암의 반응이 예상밖이여서 김봉무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게 정말이냐? … 그건 잘된 일 같지 않다. 어려운 시절인데 피전 한잎 보내와도 그건 성의가 아니냐?! 보내온 정은 돌려보내는게 아니야.》
랑패스러움이 실린 어조로 딸내외를 책망하던 조봉암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무겁게 말을 이었다.
《그러지들 말아. 우리는 목표를 크게 세우고 뭉쳐진 사람들이다. 그를 위해 민중과 고락을 같이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속이 좁아서는 절대로 대성을 이룰수 없다. 그리고 크건작건 성의에는 성의로 대답하는것이 미덕이야.
난 그런줄을 몰랐구나. 최기오가 나를 크게 원망할거다. 참 애들도… 그런 일은 그렇게 처리하는게 아닌데… 이 일은 아무튼 랑패다.》
《아버님,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김봉무가 조봉암이 너무 락심천만해하자 선뜻 용서를 빌었다.
《음, 이건 잘못한거다. 맏이야, 날 대신해서 찾아가 사죄를 해라. 래일 아침에 갔다오너라.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다.》
조봉암이 이렇게 진지하게 타일렀으나 효경이는 새침해서 인차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기 안해가 앵돌아졌다는것을 알아차린 김봉무가 손가락으로 효경의 허리를 쿡 찔렀으나 대척을 하지 않았다.
조봉암이 딸의 속내가 대충 짚이웠으나 다시 오금을 박았다.
《그렇게 하거라. 네가 정 가지 못하겠다면 내가 틈을 내보겠다.》
조봉암은 딸의 온곱지 않은 반발이 리해는 되면서도 노여움이 끓어올라 그들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집을 향하여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걸음발이 전에없이 무겁고 시름겨워보였다.
눈부리가 알알해난 효경이가 《아버지-》 하고 애바르게 부르며 급하게 뒤쫓아가 앞을 막았다.
《어찌된 일이냐?》
조봉암의 언성이 높아졌다.
조봉암은 앞을 막아서는 맏딸을 의아쩍은 눈으로 보며 여느때없이 노여움을 짙게 내비치였다.
《그래서는 안된다는걸 너야 잘 알지 않느냐.》
효경은 절대로 남에게 아픈 말을 할줄 모르는 마음씨가 너무 착한 녀인이다. 원체 남을 위해 태여난듯 궂은일은 제가 다 맡아안으며 욕이나 벌이 차례질것 같으면 기꺼이 자기 몸을 회초리에 내댄다.
그 어데 나설줄도 모르며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절대로 생색을 낼줄도 모른다. 제 하는 일, 제
하는 말이 남을
해치는것으로 될가봐 늘 조심을 하며 남이 언짢아하는 일이 생기면 제가 괜히 죄스러워 얼굴을 붉히고 고민을 한다.
한해에 한두번 연경이와 다투는 일도 있는데 그래놓고서는 자매간에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이 판판 다르다.
연경은 하루밤 자고나면 그런 일이 언제 있었더냐싶게 웃고 떠들어대는데 효경이는 여러날 속앓이를 하면서 자신을 원망하고나서 아버지에게까지 용서를 빌군 한다.
그때마다 연경은 옹색해서 쩔쩔 맨다.
《뭘 그래 언니? 거야 내가 백번도 잘못한 일인데. 내가 맞을 매는 내가 받게 해줘. 괜히 아버지가 또 내대신 벌 서주면 이 연경이 뭐가 되게?》
역시 탁 트인 연경이라 화를 낸 다음에는 제풀에 깔깔거린다. 지금의 효경은 자기의 속생각을 옹쳐두고 아버지의 뜻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있다.
《어찌된 일이냐, 효경아?! 말을 해봐라. 어디 들어보자.》
조봉암이 한걸음 비켜주며 너그럽게 말하였다.
《저는 가지 못하겠습니다. 돈을 돌려보낸것도 애아버지가 아니라 제가 그렇게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럴수 있습니까? 자기 기업이 망해버린다고 아버지더러 선거에 나서지 말라고 막아나서고 그 다음에는 아들까지 빼가고…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오고… 병주고 배만져준다더니… 이건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니 겁기가 나서 물러선 사람이 그들뿐이나요? 난 그런 사람들이 미워요. 아버지가 이번 선거에서 권세를 쥐고 부귀영화 누려보자고 몇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연경이까지 쓰러뜨리며 선거전을 치르었습니까? 이제 와선 머리를 짚어주고…
저는 정말 싫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더는 가까이 하고싶지 않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도 그렇지요? 그러면서도 그 아린 속을 참고 이겨가는거지요?! … 아버지-》
효경이가 조봉암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며 소리내여 울기 시작하였다.
조봉암은 자기 품에서 오돌오돌 떨고있는 맏딸의 연한 어깨를 꽉 그러안고 은하수가 비낀 하늘을 쳐다보았다.
부지불식간에 별빛이 도글거리는 하늘에 안해의 갸름한 얼굴이 비껴들었다.
자기를 그리여 청춘을 불태우고 만리타향도 서슴지 않고 따라섰다가 끝내는 그 길에서 얻은 병마로 눈을 감은 안해…
(그도 지금 살아있다면 이애처럼 내 앞길을 울며 막아나설가? 그래, 사랑과 정으로 이 가슴을 달아오르게 할것이다.
효경이 아니면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이처럼 세심히 헤아려보고 쓰다듬어줄수 있을가… 네 말이 옳구나. 그래, 이겨가구있지. 어떻든 난 이겨내야만 한단다. … 왜냐하면 …)
조봉암은 한동안 딸의 어깨를 쓸어주다가 흉중에서 격렬하게 일고잦는 격론을 눌러잦히며 진지하게 대답을 하였다.
《맏이야, 봉무! 내 너희들의 심정을 다 안다. 고맙다. 누가 너희들처럼 다심하게 마음을 쓰겠느냐?
그러나… 이런걸 생각해보아라. 정치라는 의미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아. 우리로부터,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해봐라.
예로부터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전해져온다. 그건 천하를 평정하자면 제 나라부터 옳게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자면 제 가정부터 깨끗이 거두어야 하며 제 집안을 옳게 끌고 나가자면 자기 마음부터 착하게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다.
만사를 제껴놓고 성의에는 성의로 대하는것이 도리이니 우리가 무슨 구실을 붙이든지 사람의 성의를 무시해버린것은 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괴로웁지만 아픈 속을 지르밟고 넘어서야 할 일이라면 지체말고 넘어서야 하느니라. 우리 집 허물을 깨달았으니 될수록 빨리 지우도록 하자. 이건 사람이 살아가는 법도다.》
《아버님, 저희들이…》
김봉무가 조봉암의 이야기에 감동이 커서 이렇게 받으며 뒤말을 가무리지 못하였다.
《됐다. 이건 좀 다른 말이기도 한데, 정치한다는 사람은 아무튼 그릇이 커야 한다. 제 하는 일, 제 하는 생각, 제가 꺼낸 말이 똑 제일이라고 자화자찬하면 그게 바로 독재자로 돼가는 첫걸음으로 된다. 제 뜻에 거슬린다고 배반이라 밀어붙인다면 그게 바로 전횡이 되는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말이 별게 아니다.
셋이 모이면 벌써 뜻이 갈라지고 패가 생겨난다. 그런다고 상대를 배척한다면 어떻게 대사를 도모할수 있겠느냐?
그런즉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는 도전자와 반대세력을 맞받아나가는 의지와 담과 슬기이기도 하다.
사람 한생이 많아서 구십이다. 길지 않은 이 세월에 될수록 남에게 해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인생이란 미결건이 적을수록 홀가분하고 아름다운 법이지.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허리를 굽힐 때 가서는 먼저 허리를 굽힐줄 아는것이 현명한 처사이다. 그건 도량이기 전에 배짱이고 담이야. 경우에 어긋나는 체면이나 자존심은 한푼의 가치도 없는거란다.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모난 돌이 먼저 정에 맞고 좋은 나무 먼저 찍힌다는 격언이 꼭 기회주의나 변신이나 처세로만 풀이되는게 아니다.》
조봉암의 절절한 깨우침에 크게 감심이 된 김봉무가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아버님의 높은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제가 래일 최기오선생을 찾아가겠습니다.》
내성적이지만 깨달음이 빠른 효경이도 남편의 말을 받아 이렇게 선뜻 뜻을 밝히였다.
조봉암이 대답대신 효경의 잔등을 다독거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