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4

 

오솔길을 따라 세 늙은이가 허덕허덕 힘겹게 올라오고있었다.

조봉암의 굳어져있던 얼굴이 환해졌다.

《죽산!-》

《송아지친구들!》

조봉암은 반겨맞았다.

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그들을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위쇠! 몽득이! 병수! 어서 오라구!》

조봉암이 큰소리로 웨치듯 송아지적 죽마고우들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렀다.

반가움에 떠밀리워 허겁지겁 달려온 소시적 친구들의 초라한 행색이 조봉암의 시야에 아프게 안겨왔다. 허리가 굽고 구레나룻이 희끗희끗한데다가 때가 찌든 람루를 걸친 뼈대만 앙상한 세 늙은이…

사방에서 들이치는 바다바람에 타고 트며 농사요, 고기잡이요 하는 고난스런 로동과 보잘것없는 영양으로 때이르게 늙음에 접한 인생의 수난자들이다.

옛시절에는 조봉암이나 다름없이 씩씩하고 다감하고 혈기가 넘치던 모습들에 모진 세월이 너무도 빨리 로쇠를 들씌워준것이다. 쇠잔하고 가드러든 친우들의 모습에 조봉암은 가슴이 쩌릿해났다.

떠들썩하며 부둥켜안을듯싶던 이들이였건만 조봉암의 앞에 무춤 서버린채 어색한 웃음을 띠우며 주밋거리기만 한다.

한쪽은 민중이 희망의 별처럼 쳐다보는 《대통령》후보요, 다른 한쪽은 세상과는 담을 지고 들어앉은 막바지인생들이다. 몇해만에 만나는 옛친구라 반가움에 이끌려 달려오기는 했으나 막상 대하고보니 너무도 대조되게 초라한 자기들의 행색이 구접스러워 뭐라고 첫인사를 해야 할지 서슴어진것이다.

조봉암은 그들이 격을 두고 돌부처처럼 굳어진 리유가 짚이자 소탈하게 웃으며 혀를 찼다.

《왜들 그러고 섰나? 내 그러지 않아도 묘들을 찾아 인사나 하고 들리려고 했지. 자, 제주를 나눌 사람이 없었는데 저리로 가세. 그새 주량들이 줄지 않았나?》

오랜 정계생활에 어지간히 틀이 굳어져버리였지만 이렇게 각이한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쉽사리 그 틀을 허물고 인차 어울려 소탈하게 흉금을 나눌줄 아는 조봉암이였다.

조봉암의 텁텁한 인사를 받고서야 친구들은 몸이 좀 풀려 인사를 하는데 이들이 건늬는 인사말이라는게 해괴하기 그지없었다.

《죽산, 그동안 가내 일절 귀체만강하시겠구? …》

《암, 이렇게 보다싶이… 우리 애들도 잘 있다네.》

조봉암은 상대가 주눅이 들세라 친구들의 인사말을 탓함이 없이 받아가지고 진지한 어조로 대답을 하였다.

《죽산이 하시는 중한 일을 우리도 안다네. 그래 국무는 잘 돼가시나?》

《암, 그럭저럭 돼가지. 자네들도 이렇게 눈을 밝혀 내 일을 거들어주는데야… 자 자, 어서들 가세나.》

조봉암은 새꽁지만 한 식자를 가지고 짐짓 유식하게 인사를 차리는 친구들의 손목을 잡아쥐고 무랍없이 안해의 봉분옆의 평평한 잔디우로 이끌었다.

언제 숲에서 나왔던지 연경이와 조카가 재빨리 술자리를 펴놓았다.

친구들도 지고 온 중태들을 헤치고 거기서 막걸리방구리와 강화섬의 특산인 마니산의 버섯과 고사리며 말린 해산물들을 꺼내놓았다.

흰새우, 꽃게살, 오징어, 까나리, 조기 등 가지각색의 해산물이 줄레줄레 나오자 연경은 두손을 맞잡은채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서울에서는 보기가 힘든것들이였다.

《뭘 이렇게… 집안의 귀한것들을 다 꺼내왔네그려.》

조봉암이 이런것들은 강화도에서도 쉬이 맛볼수 없는 귀한 어물들이라는것을 알고있기에 나무람부터 하였다.

《이쯤한게 무슨 대수인가? 우리 고향이 낳은 죽산어른이 오셨다 하니 우리 며늘애가 꽁꽁 달아매두었던것들을 다 내주었네그려.》

세 친구들중에서 키가 제일 작고 몸통도 체소하나 강단있게 생긴 바위쇠가 이렇게 흐뭇하게 대답하며 턱부리에 다보록한 몽당수염을 내리쓸었다.

조봉암과 무릎을 맞대고 앉으니 인생이 다 망그러진 늙은이로만 보이던 바위쇠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면서 한결 나이가 덜어보였다.

비록 여위고 윤택이 없는 볼에 때일찍 찾아든 늙음이 거미줄같은 주름살을 서려놓기는 했어도 눈동자는 아직도 맑은게 정기를 잃지 않고있었다.

보통학교시절 조봉암이 사처에 불집을 일으키며 돌아칠 때에 그림자처럼 묻어다니며 아귀다툼도 잦았던 친구다. 영악하고 강기가 있는데다가 공부도 잘하고 의협심도 커서 조봉암의 그 시절 추억에 사랑스럽게 자리잡고있다.

연경이가 어느새 눈물자국을 깔끔히 닦아낸 싱싱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친구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서울에서 가져온 국화술을 돌렸다.

《둘째지? 활짝 폈구나. 전년에도 이 술을 가져왔더니… 하, 이거 정말 별미로구나!》

잔을 내고난 그들은 독특한 술맛에 혀를 두르며 감탄했다.

조봉암은 친구들이 가져온 막걸리를 한사발 쭉 내고 눈을 슴벅거렸다.

《좋구만. 내겐 이 막걸리가 좋아. 이런 맛을 서울서 본다는것은 어림두 없지. 이 사람, 조카! 한사발 더 붓게. 그리고 자네도 쭉 내게.》

조봉암은 자기에게 부어놓은 국화술은 친구들에게 돌리고 조카가 부어주는 희누름한 막걸리를 맛스럽게 꿀꺽꿀꺽 마시였다.

친구들은 자기들 집에서 담근 시큼털털한 막걸리를 정하게 받아주며 흡족해하는 조봉암을 고마운 눈으로 쳐다보며 호물때기 입을 헤 벌리고 히죽이 웃었다.

《오복이, 진구, 덕만이도 잘 지내나? 사실은 임자들 보고싶어 바다를 건너왔네. 어째 몽득이, 임자는 말이 없나?》

조봉암이 옆에 앉아있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몽득이라 불리운 친구가 연경이한테서 또 술잔을 받아들다가 조봉암의 소리에 허물자리가 있는 이마를 찌프리기부터 하였다.

바위쇠보다는 허우대가 썩 크기는 했으나 관골이 무섭게 삐여져나오고 오그라든 두볼이 맞붙은데다가 눈확마저 깊숙이 곯아든것이 첫눈에도 집안의 궁기가 아프게 그려지게 한다.

마음씨가 착해 남에게 해되는 일이라군 해본적이 없는 친구다. 여러 자식들이 지난 시기 좌익권에서 활동하였거나 북으로 넘어가 언제 봐야 말과 행동을 조심해온다. 그래 조봉암은 고향땅으로 올 때면 몽득이한테 왼심을 쓰군 한다.

《고맙네. 이렇게 벌레같은 인간들을 소시적 친구라고 그냥 찾아주니… 그런데…》

몽득은 금시 숨이 꺼질듯 길게 한숨부터 내그었다. 그는 잔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키고는 입가녁을 팔소매로 씻고나서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이 아근에 죽산의 옛친구들이라는건 우리 셋만 남았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니 이태동안에…》

《이젠 나이도 있잖은가. 뭐, 눈감을 때도 됐으니 떠나들 가는거지.》

몽득이 어색한 미소를 떠올리며 례사롭게 응수하였다.

《나이는 무슨 나이타령인가. 아직 예순도 차지 않았는데…》

조봉암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태전 《국회》선거때 조봉암이 이곳에 자기 측근인물들의 선거를 돕기 위하여 온 일이 있었다. 그때만 하여도 열명이 넘는 소시적 친구들이 몰려들어 동락천에서 천렵도 하면서 동네방네 들썩하게 회포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태동안에 옛친구들 태반이 벌써 그렇게 저세상사람들이 돼버리다니.

조봉암은 아직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아직은 자기 나이를 생각해보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순도 채우지 못한 나이를 두고 인생을 포기하여버리는것을 응당하게 감수하고있는것이다. 무엇때문인가?

그 답이 어렵지 않게 짐작되여 조봉암은 마음이 그지없이 서글퍼졌다.

《오복이는 작년 꽃게철에 해주앞바다로 가서 꽃게를 잡아가지고 오다가 배라먹을 바다까마귀(해상경찰)들에게 걸려들어 배와 함께 수장되고말았네.》

바위쇠가 비명에 숨진 친구들에 대하여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그건 왜?》

《왜라니?! 북과 내통했다는 죄지.》

바위쇠가 대수롭지 않게 퉁퉁 대답하였다.

《뭘?! … 사공들이란 고기떼따라 남의 나라 바다에도 가는게 례상산데 해주앞바다에나 갔던게 내통죄야?》

《진구는 지난해 가을에 천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숨이 꺼지구… 내 찾아가니 약을 쓸 형편도 못되더구만. 뼈만 앙상한게 어디 좁쌀미음이라도 들어주어야지. 내가 얼리구 달래고서 미음 한술이라도 넘기게 하려는데 입을 딱 다물고 열어주지 않네그려. 살기가 너무 힘들어 죽을 잡도리를 한게지…

덕만이는 둘째녀석의 학교뒤치닥거리에 얼마 안되는 감나무밭과 매생이까지 저당잡혔다가 끝내 떼우고말자 인천 가서 품팔이를 했네. 헌데… 그 사람도 거기서 객사를 했지.》

《뭐, 촌사람이 쉰고개를 넘었으면 살만큼 살아본거지.》

《그래, 그 말이 옳아. 살아가는 재미가 없이 길게 살아야 자식들에게서 눈총만 받을뿐일세. 세상맛이 더럽기는 해도 맛볼건 다 봤으니 숨쉬기도 고달픈 세상에 일찌감치 꺼져버리는것도 큰 복일세. 옛말에도 있지 않는가. 가난하면 소인이요, 이름도 없다고… 사는 꼴 구차해가지고 길게 살아 뭘 하겠나? 자, 술이나 듭세.》

몽득은 여전히 나이타령인데 바위쇠는 또 제나름으로 고사풀이까지 해가며 맞장구를 쳐준다.

술이 여러 순배 돌아가자 퍼그나 다사해진 그들이 속말을 거침없이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한많은 신세타령은 마디마디가 다 암담한 생활고에 지쳐버리고 삶을 포기한 눈물겨운 하소연이고 비명이다.

조봉암은 가난이 덕지덕지 흐르는 고향땅의 처참상과 비명에 떠나간 여러 친구들의 소식을 듣다가 자못 비감에 잠겨 통탄하였다.

《음? 내 죄도 막중하네. 내가 48년도 농림부 장관노릇 할 때 마음먹은대로 밀고나갔더라면 이런 가슴아픈 일들을 막을수도 있었으련만…》

《이게 어찌 죽산의 탓이겠나. 팔자지, 팔자야. 팔자도망은 못한다네. 강화사람들은 예로부터 단명이랬지.》

바위쇠의 소리다. 바위쇠의 말이 조봉암의 귀에 거슬렸다.

《그런 말 말라구. 어째서 강화사람들이라구 단명이 팔자란 말인가?! 농사군들이 아직도 지지리 못살고있는건…》

조봉암은 여전히 흥분하여 자기의 가슴을 툭툭 쳤다.

농림부 장관시절이 새삼스럽게 그의 뇌리에 감겨들었다.

소꿉친구들의 장탄식을 듣고보니 그때 어찌할수 없어 장관자리에서 물러섰어도 꼭 자기가 그 시절에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옳게 하지 못하여 농촌이 더욱 황페화되고 농사군들의 명도 짧아진것만 같아서 죄스럽기 그지없었다.

불쑥 그때까지 긴말이 없이 술잔만 넙적넙적 받아서 단숨에 비우군 하던 병수가 느닷없이 물었다.

《이보게, 죽산! 그래 통일은 언제쯤 될것 같은가?》

《통일?!》

조봉암의 눈이 번쩍거렸다. 가슴이 쿵쿵 울리였다.

통일이라는 말이 나오기만 하면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속이 괜스레 화끈 달아오른다. 거기에는 한마디로 대답 못할 거창한 의미가 있다.

《왜, 못할 말인가? … 죽산이야 알게 아닌가?》

은근히 조봉암의 기색을 엿보는 조심스러운 말투다.

친구들중에서 제일 말이 무겁고 행동이 진중하던 친구다.

《음-》

조봉암의 입새로 길게 한숨이 새여나왔다.

《글쎄 그거야 리승만이 제일 잘 알노릇인데… 그 령감은 그냥 <북진통일>을 외우고있지 않나.》

《<북진통일>? … 거야 또 전쟁하자는게 아닌가?!》

《실력을 배양해서 북으로 쳐들어간다는 소리지.》

조봉암의 대답에 바위쇠가 역증스럽게 컥컥거리며 목을 틔워놓더니 고성을 내질렀다.

《안되는 수작! 그게 미쳐빠진 수작이 아닌가?!》

병수가 바위쇠의 고함소리를 받았다.

《제놈이나 카빈총 메고 38°선 넘으라구 해. 한번 불질했다가 사등뼈가 부러져봤으면 됐지 또 전쟁놀음이야? 그 두상태기가 전쟁이 뭔지 알기나 해서 그따위 수작질을 해?!

난 전쟁통에 두 아들을 떼웠네. 맏이놈은 <국방군>에 나가 죽고 둘째놈은 인민군대를 도왔다구 끌려가 매맞아죽구… 다시는 이 나라에 형제끼리, 이웃끼리 총쏘는짓이 있어서는 안되네.》

세사람이 겨끔내기로 리승만에게 욕질을 퍼붓는다. 어질어만 보이던 이들이 언제 그랬더냐싶게 눈에서 불이 일고 기상이 추상같아졌다.

리승만이 이 자리에 나타났다가는 당장 모두매에 요정이 날것 같다.

조봉암은 그들의 기대어린 눈길을 받으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자네들의 말이 다 옳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네. 동족상쟁은 우리 민족의 수치이기도 하지. 그래 우리 진보당은 평화통일구호를 내걸었네. 그런데 그게 말썽이 돼서 살이 내릴 지경일세.》

《왜? … 평화통일이면 싸움없이 통일하자는건데 좀 좋은가. 대관절 어느 놈이 그걸 싫다구 하는가?》

바위쇠가 술기운에 팩해가지고 걸고들듯 물었다.

《누구들이겠나? 리승만쪽 사람들이지. 거기에 미국이 북장단을 쳐주지.》

《미국것들이야 그럴수 있다고 하겠지만 배라먹을 그 리승만은 왜 반대인가?》

바위쇠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소시적의 급하던 성미와 말버릇은 여전하다.

《전쟁이 끝난이래 북에서 그냥 들고나오는것이 평화통일구호라는거지.》

《그게 어쨌다는거요? 북에서 하는 일이 좋은게 얼마나 많다구. 북에서 밥을 먹으면 우린 죽물을 먹어야겠구만.》

《리승만의 수작 어느 한마디 바른 심통 가지구 하는게 없어. 북에서 뭐라고 하면 우린 꼭 반대되는 소리만 내놓아야 한다니 그게 개심술 아니구 뭔가?!

에에… 우리 남녘의 백성도 편하게 살자면 뭐니뭐니해도 그 두상태기부터 들어내야 하네.

이건 어디 가서 귀속말 한마디 제대로 할수 있나. 어느 녀석 방구터는 소리까지 그날중으로 경찰지서요, 자유당이요 하는데로 들어가 단단히 졸경을 치르니 속에 찬 말두 뱉지 못하는 백성의 꼴 우습지 않는가?! 리승만도 자유당도 다 까마귀 잡듯 때려잡아야 해!》

자식들을 전쟁에서 잃은 병수가 악에 받쳐 속풀이를 하는데 바위쇠가 빈정거리는 투로 면박을 주었다.

《이보게, 병수! 자네 또 파출소에 끌려가 수염 뽑히려고 마구 흰소린가?! 자중하게. 썩어빠진 이놈의 천지간에는 입 다무는게 재주일세. 그예 밀파간첩이 돼볼려나?》

《흥!》

바위쇠가 롱조로 엄포를 놓으며 시까스르자 병수는 쓰거운듯 코방귀를 뀌는데 조봉암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밀파간첩? 대체 어찌된 일인가?》

조봉암이 놀랍기도 하고 희한하기도 해서 묻자 병수가 어처구니없는듯 《허허…》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폭소를 터뜨려놓
았다.

다른 두사람도 덩달아 허리를 젖히며 껄껄거렸다.

《그런 일이 있었지. 저 사람이 밀파간첩이 되여 이 강화섬의 유명인물이 됐다네, 배라먹을 놈들 덕에… 죽산어른께 그 사연 좀 들려주게나.》

바위쇠가 웃음섞인 소리로 충동질하자 병수는 기가 우쩍 동한듯 한무릎 나앉으며 기염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죽산! 이놈의 세상 왈칵 뒤집어달라구. 우리 농사군들이 거 뭐 비단 두르고 고래등같은 기와집에서 살겠다구 했나?! 그저 조밥이래두 하루 세끼 에우구 게딱지같은 오막살이에서나마 뜨뜻이 지내구 좀 마음편히 살아보는게 소원인데 이거야 어디 숨이 막히고 염통이 졸아들어 견뎌내겠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데 이건 갈수록 막막하여 죽지 못해 살아가니 백성들을 이 꼴로 만들어놓구 대통령은 웨 있구 그 많은 장관나리들은 어째 있노?!

내 지난해 여름에 마지막으로 고기잡이 나갔다가 바람질을 당해 진남포까지 밀려갔던 일이 있었다네. 북녘사람들이 풍랑속에 숨이 간들간들하던 우리를 건져주구 후한 대접을 하데그려. 치료도 말끔히 해주구 부서진 배두 번듯하게 수리해주구…

이왕 발을 들여놓은지라 에라, 모르겠다 그 사람들보구 비위를 써봤지. 평양이 크게 달라졌다고 하는데 한번 구경을 시켜줍사 하고 말일세.

가보니 정말 전쟁이 끝난지 도무지 이태가 남짓한데 야단스럽게 달라졌어. 우선 뭐가 좋은가 허니 정신이 번쩍 드는게 희한해. 모두 기세가 좋더구만. 잘살아보겠노라 윽윽거리는데 나두 오금에 힘이 막 뻗치더란데. 어데 가나 상점에 상품이 가득차있구 논밭들이 알뜰하게 다루어지구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나구 있는거며…

참 희한해요, 희한해. 방송을 들어보면 전쟁소리는 한마디도 없더라구. 사람사는 세상 같더라니.》

주름발이 얼기설기 덮인 얼굴우로 잔물결 일듯 미소가 퍼져갔다.

《이게 참말로 조선나라구나, 이 사람들이 참말로 조선사람들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글쎄 눈물이 나겠지. 노래 한마디, 춤 한가락에두 가슴이 쩡한게 내 나라 멋이 있더라니.

아, 그 세상이 오죽 희한하구 부러웠으면 우리들중 총각애 셋이 그쪽에 아예 눌러앉겠다 떼를 써서 종내 떨어졌겠나. 걔들이 지금쯤은 사각모를 쓰고 다닐거야. 다들 복을 뒤집어쓰고 살걸세. 엥히, 나도 달린게 없었으면 팔자를 고쳐보는건데…

헌데 말일세, 이런 변 봤나?! 정말 어처구니없게 변도 큰 변을 당했지.》

병수의 볼편에 일렁이던 미소가 일시에 사라지고 시퍼런 분노가 가득 서렸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인 팔로 삿대질까지 해가며 기염을 토해놓았다.

《내가 섬에 돌아와 별천지를 보고 온 얘길 했더니 여기저기서 불러다 을러메는데 날더러 북에서 <세뇌교육>을 받고 온 밀파간첩이라나. 뭐, <적화임무> 시행한다나.

하, 간첩이라는게 그전에는 신기하게 생각됐는데 당해놓고보니 별게 아니야. 이렇게 제깍 간첩이 되겠더라구.

임무받은게 뭐냐 대라구 야단을 하겠지. 한달이나 대구 주리를 트는데 내사 기가 차서…

아, 그래 이 병수가 이 강화섬에서 죽산 다음가는 유명인물이 됐다네. 하하… 파출소에서 풀려나온이래 아예 페인이 돼서
배구 농사구 손을 털고말았네.

이 사람, 죽산! 제 새끼 잡아먹는 망둥이같이 미련한 그 령감쟁일 제발 들어내달라구. 임자가 옥좌에 오르면 내 경무대에 가서 잔디깎는 일이며 집안청소며 손발이 닳도록 해주겠네.

그래 난 진구나 오복이처럼 쉬이 죽을 생각이 없네. 리박산지 뭔지 한 그 미친 령감태기를 들어내구 미국놈 쫓겨가는걸 보구야 눈을 감겠네. 그러면 통일도 될테지. 통일되문사 우리 백성들도 잘살게 아닌가. 저쪽 세상 보고 온 다음부터는 난 정말이지 죽을 생각이 없어졌다네.

후유, 북에서는 한피줄이라 반겨주구 통일하자 그냥 손 내밀고있는데 리승만은 힘두 없는 주제에 웨 그냥 썩어빠진 북진타령이야? 이래서야 통일세상 언제 보겠나?!》

병수는 가슴을 박박 쥐여뜯으며 울분을 터치고나서 목이 타드는듯 연경이 잔에 부어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얼굴이 부석부석하고 어깨가 앙상하게 솟은 소꿉친구의 멍이 진 부르짖음이 조봉암의 페부에 스며들어 깊숙이 새겨졌다.

촌구석에서 세월의 흐름에 눈을 감고 살아가는듯싶은 농사군들이 대세를 가장 선명하게 갈라보고 그 해법 또한 단순하고도 명백하지 않는가.

리승만을 들어내고 미국놈들 쫓아내면 통일세상이 된다! 그러면 우리도 잘산다! 그래, 그렇구말구!

숱한 정객들이 아침저녁으로 찧고 까불고 론의를 거듭하면서도 정답을 찾지 못하는 통일문제를 농사군들은 이렇게 쉽고 너무도 명쾌하게 풀어낸다.

우리 진보당은 백성의 이 주장을 따라야 한다. 그 어떤 사리나 공명도 다 버리고 애오라지 백성의 요구, 백성의 지향을 기치로 들어야 한다.

《나도 한마디 합세.》

몽득이 병수의 긴 사설에 힘을 얻은듯 관골이 툭 삐여오른 얼굴을 덮은 구레나룻을 쓸며 나앉는다.

《죽산두 아다싶이 우리네 자식들이라는게 다 제 뜻에 살다가 지금은 <월북자>요, <부역자>요 하는 딱지가 붙어있네.

맏이는 해방후 좌익바람에 몰려다니다가 북으로 갔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네. 둘째는 형을 따라다니다가 잡혀서 대구에서 옥살이를 했지. 전쟁이 시작되여 리승만이 부산으로 도망갈 때 수인들을 끌어내여 무리로 죽였는데 둘째가 그렇게 사라졌지. 그리고 셋째는 서울서 의원노릇 했는데 인민군대가 서울로 왔을 때 부상병을 두어명 치료해준게 죄가 되여 가막소에 갔다가 올해초에야 겨우 풀려나왔네. 부역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사는 판이지.

딸 하나 생긴건 전쟁때 의용군으로 나가 제 맏오래비가 간 북으로 갔지. 뭐, 그애들이야 평양으로 갔으니 잘 지내겠지.

경찰에서는 무시로 닥쳐들어 북과 내통하지 않느냐고 문초를 하고 뒤지기도 하는데 손자, 손녀들이 큰 야단이야. 공부를 시켜보자고 인천이요, 서울이요 보내면 영낙없이 미끄러져 돌아오네. 우리 애들은 사공노릇도 못시킬 팔자야. 배를 타면 북으로 도망친다나.

정말 어떤 때는 자다가 벌떡 일어나앉아 손주들을 다 깨워가지고 기여서라도 북녘에 가서 살고프네.

이렇게 해서야 무슨 놈의 <대동단결>이요, 백성이 사는 세상이란 말인가?!

옛적에는 량반이요, 상놈이요 하면서 백성을 괴롭혔다면 지금은 백성마저 층층만층으로 갈라놓아 이웃간에 곁도 주지 않고 살게 만들었으니 험악한 판일세. 서로 도우며 의좋게 살던 조상전래 미풍량속두 옛말로 돼가네그려.

바른말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해방후에 다 좌익바람을 쐬고 살았지. 그 사람들을 다 떼치고 리승만의 자유당만 가지고 정사를 어떻게 해낸다는건가? …

좀 팔자를 고쳐 눈에 쑤악스러운 꼴 덜어보자는 생각에서 저 바위쇠가 망녕들었다며 막아서는걸 아니할짓으로 식솔중에 한두녀석 자유당에라도 들여볼가 하고 나서게 하니 부역자의 집안이라 코웃음치며 자격불량이라고 퇴를 놓질 않겠나?! 살아보겠노라 기를 박박 쓰면 불온집안이라고 살구멍 앞질러가며 막아놓고…

그럼 우리같은 사람들은 어쩌라는건가?! 씨원히 정배살이 보내거나 가막소에 들이밀어 깡보리밥을 먹여줘도 살아갈 걱정거리는 없을게 아닌가?!

고약해, 고약해! 세상이 개심보가 됐어. 돌아보면 사람들의 마음씀씀도 하루가 다르게 고약해지네그려. 강화섬이라면 예로부터 도적없고 강도없고 거러지없는 섬이라 일러왔는데 이제는 잠시잠간 눈 감고있으면 코 베고 귀 베가는 세상이 되고말았다네.》

어져보이던 사람이 기염을 토하기 시작하니 속에 차있던 울분이 터진 보뚝물처럼 마구 쏟아져내려 사람들을 울려놓았다.

바위쇠가 갈린 목소리로 위로하였다.

《이보게, 자중하게.》

《내 속이 타서그래. 이 사람은 이제 대통령이 될 사람이 아닌가.

이보소, 죽산! 제발 비네. 그 두상태길 이번 선거에서는 배지기를 휭 하니 떠서 자빠뜨려주게. 병수생각이 내 생각일세. 아니, 강화사람이 백에 아흔아홉이 그걸 바란다네. 내 이번에 임자가 후보로 나섰다는 말을 듣고 집의 애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네.

나두 저 병수처럼 그 령감 꺼지는걸 보기 전에는 눈까풀에 버팀대를 뻗치고서라도 살아볼 생각일세. 그놈 리승만이 망해빠지는 꼴 기어이 보고서야 죽을 생각일세!

죽산이 옥좌에 오르면 통일이 될거구 통일이 되면 우리 맏이와 딸년도 만나볼게 아닌가. 난 임자가 대통령된다는 소리를 들은 후로는 잠이 안 오네. 통일이 가까워오는것만 같애서 말이네. 누우면 그저 북에 간 애들 얼굴이 선하다네. 이젠 그쪽에도 한구들 생겨났을 내 손자, 손녀들이 보고싶어 못 견디겠어. 죽기 전에 그애들 만나 엿가락 한개씩이라도 걔들 입에 내 손으로 물려보는게 소원일세, 어휴-》

몽득이 콩알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목이 걸려 더 말을 잇지 못하자 바위쇠가 막걸리 한사발을 따라서 내밀었다.

《이 사람, 몽득이! 한사발 쭉 내게. 속이 좀 열리게.》

《에, 이걸 마셔 속이 열린다면 좀 좋을가?!》 하면서도 몽득이는 막걸리를 받는다. 마시는것이 아니라 단숨에 목구멍에 쏟아붓는다.

조봉암은 숨쉬기조차 가빠졌다. 갑자기 하늘이 통채로 무너져내려 두어깨를 지지누르는듯싶었다.

저들의 소원을 풀어줄수 없다는 말인가. 저들은 애초에 분수에 넘는것을 바라지 않는다. 저들의 소원에는 호화찬란한것이 없다. 주리고 헐벗지 않는것, 마음껏 일하고 마음편히 살아가기를 바랄뿐이다. 갈라진 혈육이 모여살기를 바랄뿐이다. 백성은 어느때나 솔직하다. 백성의 마음에는 꾸밈이 없다. 저들의 눈에는 거짓이 없다. 저들이 도출해내는 결론은 생활의 터전에서 우러나온것이기에 그릇됨이 없다. 우리 정치가들이 그냥 저들-백성의 희망을 롱락해서야 될법인가. 저들은 언제나 자기와 나라와 후손들을 떼여놓고 살지 않는다.

외적이 침노하거나 변이 생길 때 나라의 록봉에 살찌던 량반사대부들은 제 한몸, 제 혈붙이, 제 가산이 귀해서 싸움판을 기피하거나 외적에게 무릎꿇었지만 칼날앞에 목을 내댄것은 어느 세월에나 통치배들이 무지렁이라고 숫보던 백성들이였다.

그런데 어찌되여 저들은 최저의 수준에서 바라는 소원을 풀지 못해 가슴을 두드려야 하는가.

조봉암이 페부를 쿡쿡 찌르는 비통한 생각에 미처 위로의 말을 꺼내지 못하고있는데 아래쪽에서 발자국소리가 조심스럽게 나더니 중년의 사나이가 엉거주춤거리며 숲속에서 나타났다.

그러자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리승만과 자유당에 대고 주먹찜질을 하던 늙은이들이 금시 찔끔하여 입을 꾹 닫아붙인다.

조카가 일러주었다.

《지난해 뭍에서 건너왔는데 리장노릇 합니다.》

사나이는 불량기있어보이는 눈찌로 늙은이들을 한번 가르써보고나서 조봉암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긴 허리를 굽석거렸다.

《내 이 고을의 리장이올시다.》

《그런가? … 수고하이. 난 조봉암이란 사람일세. 이리 와 술 한잔 받게.》

《아니, 황송합니다. 선생의 성함은 익히 들은바 있는데…》

사내는 불룩하게 튀여나온 개구리눈이 머룽머룽해서 말꼬리를 길게 달았다.

사내는 술잔에 부어져있는 분홍빛갈의 국화술을 힐끗 보며 울대를 움씰거렸으나 연경은 불청객을 아니꼽게 쏘아볼뿐이였다.

조봉암은 내키지 않는 일은 목을 끌어도 하지 않는 연경의 올곧은 성미에 속으로는 쓴웃음을 금치 못하였으나 턱짓으로 한잔 권하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냥 시치미를 떼고있던 연경은 술이 부어져있는 잔을 두손으로 집어들긴 했으나 얼결에 팔을 들어올린 리장에게가 아니라 바위쇠앞으로 내밀었다.

리장이 쳐든 팔을 건사하기 무색해서 얼굴이 단박에 벽돌빛이 되는데 조봉암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왔나? 용건을 말하게. 구청에서 보내던가?》

《예, 딱히 그런건 아니구… 지금은 3월말이라 선거유세는 엄금한다고 해서… 자유당지부에서 거 뭐, 통지가 왔기에…》

《어, 리장이 오판했네그려. 난 선거선전 온게 아닐세. 오래간만에 산소도 찾아보구 향촌의 정취도 맛볼겸 해서 건너왔네. 참, 내가 강화내기인줄 모르렷다?》

《거야… 강화사람치고 그걸 모를수 있나요? 저도 알고있습죠. 그런데 이 사람들은? …》

리장이 자기를 지켜보고있는 바위쇠네를 손가락으로 쭈욱- 훑으며 물었다.

조봉암은 이 얼치기같은 인간을 더 대상하고싶지 않아 조금 언성을 높여가지고 위엄있게 훈계를 하였다.

《이봐, 리장! 수수대에도 아래웃마디가 있다는 말 들어보았나?》

《예?》

《리장노릇 잘할라면 말하는 법부터 잘 배워두어야 해. 자네 안사람더러 하는 말과 마을존장께 하는 말이 같애서야 안되지. 여기 모인 어른들은 자네한테서는 존장대접을 받아야 의당한 일인즉 이 사람들이 아니라 이분들이라 불러야 례법에 맞을듯 하네. 그리고 자네 그 손가락질은 또 어데서 배워둔 고약한 버릇인가?!》

조봉암의 말꼬리가 그자신도 다잡을 겨를이 없이 매워지고 높아졌다.

조봉암이 제일 경멸하는게 사람의 법도를 모르고 사는 아전나부랭이들의 고약한 말버릇과 무도한 행패이다.

어제까지도 사람값에 들지 못하고 심부름이나 하고 속에 든게 없이 사회에 큰 도움도 주지 못하던 젊은 녀석들이 세도줄이나 금권의 덕으로 출세해서 권력의 끈을 잡기만 하면 벌써 백성들과 수하사람들에게 반말질부터 하면서 거드럭거리고 존대를 받으려고 한다. 자기 자리가 백성과 나라를 섬기는 자리라는 자각은 없이 우쭐렁거리는 설된 녀석들은 언제 봐야 이렇게 아버지벌 되는 사람을 웃사람이라고 생각지 않고 인간의 격이 저따위와는 대비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먼저 허리굽힐줄조차 모른다.

조봉암은 이러루한 패륜을 목격할 때마다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례의분별을 모르고 웃사람을 얕보는 막된 사람들을 즉석에서 호되게 답새기며 한편으로는 서글픈 고민도 해본다.

어떻게 하면 할아버지를 웃어른으로 모시고 선생님을 깍듯이 존대할줄 아는 문명하고 건전하고 지성감이 넘치는 풍조를 만들어낼수 있을가. 어제날의 제자가 웃자리에 올랐다고 스승더러 아무개씨라고 부르는 사회는 절대로 문명개화된 사회가 못되며 후진국으로 남기마련이라는 리치를 저 리장이나 주재관따위들이 생각이나 해볼가. 관리란 말그대로 나라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심부름군이지 그것이 인격의 총체도 아니요, 인간의 금새를 가르는 자대도 아니요, 사회적존경을 의미하는 그 무슨 자격 같은것도 아니다. 존대란 어디까지나 나이와 인간의 무게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례의다. …

조봉암의 생각이 이렇게 가지를 뻗어가는데 리장의 태도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헤헤, 지당하신 가르침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조봉암의 부드러우면서도 마디마디 씨가 박힌 꾸지람에 비로소 상대의 지체와 무게를 헤아린듯 리장은 헤식은 웃음을 띠우며 눈을 껍적거리다가 돌아섰다. 더 있을 체면도 배심도 없어졌던것이다.

《리장님, 국화술 한잔 받고 가시죠.》

연경이는 그제야 짐짓 정나미가 철철 흐르는 요요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유, 리장님! 돌아오세요.》

《얘, 너무 호들갑 떨지 말아. 한잔술에 눈물난다더라.》

조봉암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 했으나 연경이는 여전히 승이 나서 리장의 등뒤에 대고 야료이다.

《저런, 공술 한잔 보고 십리 간다던데…》

그러나 리장은 한번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오히려 그 소리에 쫓기듯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좌중에 웃음이 한고패 지나갔다.

리장은 저 아래쪽에 이르러서야 돌아서며 꽥 소리질렀다.

《령감님들! 래일 정오에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멸공>대회가 있다는걸 잊지 마슈.》

피대를 돋구는게 꼭 시어미역정에 개배때기 차는 격이다.

《저것들은 밤낮 <멸공>이요, <북진>이요… 시끄럽기도 하다.》

바위쇠가 이마살을 찌프리고 중얼거리는데 돼지 멱따는듯 한 리장의 고함소리가 또 들려왔다.

《다들 들었겠죠? 그리고 오늘 저녁에는 농민회의가 면에서 열리니 해떨어지기 전에 다들 원면에 가야 합네다.》

《배라먹을! 술맛없어진다. 농민회의란 또 뭐야?》

바위쇠가 주기가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맞받아 고함을 내질렀다.

조봉암이 옆에 바위처럼 틀고있으니 무서울게 없다는 배포다.

《챠, 령감님네들이 안방에 박히더니 세상 돌아가는데는 영 깜깜이군. 리승만박사가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않겠노라 선언하신걸 모르시우?》

《저런! … 그런 꿈같은 소식도 있었군. 그거 참, 잘됐네그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건가? 리박사가 참, 거룩한 결단을 내
렸노라 만세삼창 부르라는가?!》

바위쇠가 리장이 전해준 소식이 너무 희한해서 급하게 말꼬리를 잡아챘다.

《저렇다구야. 남녘천지에 온통 소동이 났는데 여기서는 무사태평이군. 리박사께서 옥좌에서 내리시면 나라가 깨진다는걸 모
르우?! <북진통일>은 누가 하구 <멸공>은 누가 하구… 당신네들 아니, 령감님들 누구 덕에 사는거요? … 그런즉 민의를 발동해서라두 리박사를 다시 나라상좌에 모시자는거요.》

리장은 령감들과 그냥 대거리하기 귀찮은듯 그쯤 일러놓고는 돌아서서 씽하니 오솔길로 사라졌다.

《흥, 배라먹을… 그 두상 또 지랄이군!》

《민의란 또 무슨 말라빠진짓이야!》

《개똥같은 수작이지. 리승만을 받자할 놈 남녘천지에 몇되겠다고 민의야?》

세사람은 저마다 한마디씩 열이 나서 리승만에게 저주를 보냈다.

《허허…》

조봉암은 리장이 사라져간 오솔길을 점도록 바라보다가 《민의》라는 소리가 턱자없어 껄껄 웃었다.

리승만이 벌써 4년전에 써먹은 주패장을 또 써먹는것이다.

어제 배에서도 자유당 지부장이 《민의》라는 수작을 붙이더니 그놈이 이 강화섬에서도 민의바람을 일구고있는 모양이다.

조봉암의 거친 눈빛에 마음을 쓰던 연경이가 생글거리며 국화술을 잔에 부어 내밀었다.

《아버지, 제가 올리는 술도 한잔 드세요.》

《그래.》

조봉암이 사양하지 않고 잔을 비우고는 지나가는 어조로 한마디 하였다.

《술 한잔 걸치게 할걸 그랬다.》

《저따위 인사불성의 사내에게는 당치않아요.》

《리유야 어쨌든 산소에까지 찾아온 사람이 아니냐.》

《산소에 찾아왔으면 조상법도대로 인사할줄도 알아야지요. 민의요, 농민회의요 어쩌구저쩌구…》

연경이는 아버지앞에 와서 감히 경박하게도 리승만을 추켜올리는 소리를 마구 지껄이고 달아나는 리장이 괘씸해서 야멸차게 부르짖었다.

《허허… 우리 둘째가 이렇다우. 서울장안에서 고집이 세구 세차기로 짝이 없다오. 오죽했으면 애비를 벌까지 세웠겠소.》

조봉암이 존엄을 지켜 바늘귀만 한 틈새도 보여주지 않는 연경의 다기찬 모습에 흐뭇해져서 껄껄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여러 사람들도 기분을 바꾸어 연경이는 과연 겉보기가 안보기라며 혀를 내둘렀다.

《헌데 거 따님이 아버지를 벌 세웠다는건 무슨 얘기시오?》

바위쇠가 궁금해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우. 얘야, 네 한번 그 얘기 들려주려마.》

《에이, 아버지는… 내가 언제…》

연경이가 두볼이 금시 화로를 뒤집어쓴듯 활딱 붉어져서 곱게 눈을 빨다가 아버지의 등뒤에 숨어들며 종주먹으로 두드려댔다.

처녀의 응석에 한바탕 웃음통이 터졌다.

《허허, 그럼 내가 말해볼가.》

《아유, 아버지는 둘째딸 망신을 깨깨 시키시려네.》

연경이는 아버지의 넙적한 잔등을 한번 살짝 꼬집어주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숲속으로 달아나버렸다.

그의 등뒤로 조봉암과 고향사람들의 정찬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조봉암은 즐거워지는 마음으로 연경의 학교시절을 떠올렸다.

조봉암이 가족과 함께 인천에서 살던 때였다.

어느날 연경이네 담임인 처녀선생이 집에 찾아와 딸애의 이번 학기 품행점수를 4점으로 매길 결심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일인즉은 며칠전 체육시간에 벌어졌다고 한다.

이날 학생들은 두패로 나뉘여 이어달리기를 하였다. 선생이 곁눈을 판 틈에 상대편에서 반칙을 하여 연경이가 속한 편이 그만 지고말았다. 경기전 약속대로 진 편은 운동장 다섯바퀴를 돌게 되였다. 연경이를 선두로 한 몇애가 대뜸 상대편의 반칙에 대한 고소를 하며 떠들썩했다.

사연을 알고 잠시 머뭇거리던 체육선생은 교권을 지킬 의도밑에 선생의 지시에 불복하는 연경이네와 반칙을 한 상대편의 두 선수에게 수업후 손을 들고 한시간동안 서있으라는 벌을 주었다.

교실에 남아 여러 애들과 함께 벌을 서던 연경이가 선생의 처사는 부당한것이니 더이상 벌을 설수 없다고 동무들을 추동하는통에 모두들 집으로 헤쳐가버렸다. 교원의 지시에 불복하도록 선동한 연경이의 행동이 교장에게까지 상정되여 결국 연경의 품행점수에 영향이 미치게 된것이다.

조봉암은 담임선생의 말을 다 듣고나서 심중해졌다. 물론 체육선생의 오심으로 시작된 일이지만 연경의 두차례에 걸친 무분별한 반항과 선동은 도덕적으로 봐도 심히 잘못된 일이였다. 이를 방임하면 연경에게 쓸데없는 우월감을 키워줄수 있었다. 그렇다고 남달리 정의감이 강하고 승벽이 센 연경이의 자존심을 무작정 나무라며 꺾어버릴수도 없었다. 양기를 잃고 부정의에 타협하는 나약한 기질은 조봉암도 질색이거니와 자칫하다가는 연경의 대바른 품성이 이지러질 우려가 있었다.

조봉암은 생각던 끝에 찬바람이 불어치는 마당가로 나가 팔을 쳐들고 섰다. 처녀선생과 연경이 깜짝 놀라 말리러 들었으나 자식교양 잘못한 아비부터 벌을 받는것이 마땅하다며 우뚝 서있었다. 눈물이 글썽해진 연경이는 물론 크게 감동된 처녀선생까지 팔을 들고 조봉암의 곁에 다가섰다.

이렇게 되여 섣달그믐의 추위속에서 아버지와 선생과 어린 딸이 나란히 벌을 서는 류다른 광경이 펼쳐지게 되였다. …

《그 일이 있은 후로 난 우리 연경이가 정의감과 강직한 성품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무익한 고집을 버리고 처세나 변덕에 오염되지 않도록 부단히 다듬질하였다우.

지금까지 연경은 기대를 저버림이 없이 꿋꿋하게 자라면서 매사에 실수없이 자신을 지켜가느라고 하는데 좀더 지켜봐야지. 젊은 시절이란 정처없이 떠다니는 구름같은데가 있어서 자칫 한눈을 팔고있으면 크게 탈선할수도 있는거요.

얘, 연경아! 이젠 이리 나오너라. 벌받던 이야기는 끝났다.》

조봉암이 이렇게 큰소리로 연경이를 부르자 또다시 좌중에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올랐다.

《그거 참, 장관이였겠소. 세밑에 부녀와 나란히 선생까지 팔들고 서있다니, 하하…》

《허허허…》

소꿉시절친구들의 흥에 겨운 술자리는 점심무렵까지 그냥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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