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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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의 집 2층응접실에서는 진보당추진위원회 중진들의 모임이 격렬하게 진행되고있었다.

왕골로 엮은 커다란 돗자리우에 올방자를 틀고 타원형으로 빙 둘러앉은 모임참가자들의 얼굴은 한바탕 설전을 벌리고난듯 누구라 없이 상기되여있었다.

대나무를 그린 도배종이를 알뜰하게 바른 벽에 허리를 붙인 조봉암은 넓고 시원하게 벌어진 량미간에 인상적인 깊은 골을 파놓고 범상치 않아보이는 눈빛으로 창너머 활짝 개인 4월의 하늘을 내다보며 토론에 귀를 기울이고있었다.

바위같은 무게와 엄격한 기품이 느껴지는 든든하게 생긴 거쿨진 몸은 50대 중반을 짐작케 하였다.

고향땅인 강화섬을 떠나온지 반세기가 가까워오건만 섬을 따갑게 지지던 불볕과 소금기를 실은 해풍에 타고 그슬은 옛시절의 자취런듯 거무스름한 얼굴빛과 아직도 곯은데 없이 팽팽한 볼살에 왕성한 정력과 투지가 엿보인다.

그는 저마끔 열이 올라 자기 주장들을 펴고있는 토론자들에게서 무엇인가 자극적인 론조가 튀여나오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론객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리고는 또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주며 깊은 사색에 잠기군 한다.

참가자들이 저마다 자기의 속을 바닥이 드러나도록 다 꺼내놓게 하고싶어 크고 투박해보이는 얼굴에 비하면 얇고 차거워보이는 입술을 아예 땜질이라도 해버린듯 좀체로 열지 않는다. 낯빛에도 그 어떤 감정을 실으려고 하지 않는듯 덤덤하다.

조봉암의 오른쪽으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조봉암을 따라 풍파많은 길을 함께 헤쳐온 그의 전우들인 간사장 윤기중과 부위원장 우달수 그리고 특수부장 신창균이 나란히 앉아있다.

모임의 사회를 담당한 윤기중은 토론자들을 불러세우고 혹은 지나친 흥분에 대하여서는 주의도 환기시키면서 회의를 조심스럽게 주관하고있다. 다른 두사람은 연경이 밤샘을 해가며 종합정리한 정세분석자료들을 서로 돌려가며 들여다보고있었다.

사람들은 이들 세사람을 가리켜 조봉암을 보좌하는 삼총사라고 정을 담아 불러준다. 조봉암이 고삐를 잡은 삼두마차를 끌고가는 삼두말이라고 시까스르기도 한다.

그들은 실제로 진보당추진위원회에 활력을 부어넣어 언제나 생기가 넘치게 하고 조봉암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당세를 몰아가는 기본주역들이였다.

넓은 이마와 두볼이 희고 멀끔하고 영채가 도는 크고 둥근 쌍겹눈에 풍채가 름름하여 진보당의 첫째가는 선남이라고 불리우는 윤기중은 틈틈이 토론자들의 주장을 학습장에 적어놓기도 한다.

그의 옆에 가까이 붙어앉아있는 우달수는 발언자들의 주장에는 그닥 흥미가 없는듯싶다. 그는 꼼꼼히 차려입은 양복에 단정하게 졸라맨 노란 넥타이를 조금 늦춰놓고 자료에만 눈길을 박고있었다.

사실 그는 토론자들의 격렬한 론의에는 관계없이 이미 자기의 주장을 갖고있었다.

회의에서 자기의 립장을 강한 어조로 밝혀놓은 신창균은 몸통이 실하고 살집이 좋은 윤기중과 키가 작고 몸집이 체소한 우달수와는 대조되게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다부진 보통키의 중년사나이였다. 짧게 깎은 상고머리가 밤송이처럼 쭈빗이 솟아있다.

이따금 토론자의 주장이 마뜩지 않아 잔뜩 찌프린 얼굴을 들어 힐끔 쳐다볼 때면 눈심지가 여간 날카로와보이지 않았다.

정치가로서는 청춘기라고 볼수 있는 40대안팎인 이들 삼총사는 민중에 대한 조봉암의 무한한 헌신과 사회변혁에 대한 폭넓은 경륜과 그의 인간상에 매혹되여 제발로 찾아든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지조굳고 의리가 두터운데서는 짝이 기울어지지 않지만 성격이나 기질에서는 생김새처럼 판판 다르다.

윤기중은 인간됨이 푸접이 좋고 성미가 너글너글하여 각이한 계층의 사람들과 쉽게 사귀며 대인관계를 원만히 조정하는 재능이 있다. 말과 행동과 정서가 느리면서도 사업조직에서 원만하고 활동반경이 넓어 조직자로서의 자질을 갖추고있다.

조봉암은 그를 오래전부터 수하에서 오른팔격으로 내세워온다.

지난해에 조직된 진보당추진위원회 간사장중임을 맡겨보니 그에게 꼭 알맞는 자리 같아 만족하고있었다.

윤기중은 사람이 좀 무른데가 있는것이 결함이다. 벌려놓은 일을 과단성있게 끝까지 밀고나가는 기백과 투지가 부족해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에 비해 신창균은 손탁이 드세고 검박하며 공격적인 배짱꾸러기이다. 사람이 매우 진실하고 의리심도 두터워 조봉암과 동료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반면에 사업에서 거칠고 지나치게 흥분이 빨라 자신을 걷잡지 못하는 때가 있어 조봉암이 늘 주의를 돌려온다.

그런가 하면 우달수는 매사가 정확하고 두뇌회전이 기민하다. 어떤 정황속에서도 신속히 출로를 찾아낼줄 아는 재사였다. 그런데 그는 쉽게 자기 속을 주지 않으며 교제의 벽이 두텁다. 게다가 자기를 과신하는 일이 종종 있군 하여 주위사람들이 선뜻 곁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렇기는 해도 조봉암은 만약 이 세사람중에서 자기 뒤를 이을 인물을 내놓으라고 하면 우달수를 꼽을것이다.

우달수는 윤기중과 함께 《국회》의원으로도 활약하면서 《국회》에서 조봉암의 립장을 대변하고있었다.

이번 선거에서 우달수는 《부통령》후보로 선출되였다.

조봉암이 가까운 벗들이 얼마 안되는 우달수를 《부통령》후보로 제기하고 가결여부를 은근히 걱정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서정후와 자기를 세워놓고는 그리도 론의가 분분하였지만 우달수는 경쟁대상도 없이 무난히 넘어갔다.

조봉암은 풀기 어려운 일이 제기되면 먼저 윤기중과 원칙적인 합의를 본 다음 우달수와 무릎을 맞대고 앉아 구체적인 행동방향과 방도를 탐색하였으며 그에 따라 신창균을 파견하여 일을 바로잡군 하였다.

이렇듯 생김새나 속씀이 각각인 삼총사는 서로의 장점으로 결점을 메꾸면서 인간적으로 매우 친밀한 뉴대를 맺고 조봉암이 몰아가는 배의 돛이 되고 기관이 되고 추진기가 되여 거친 세월의 풍랑을 자신만만하게 헤쳐가고있었다.

또 한명의 토론자가 열을 올려 자기의 립장을 밝히고있었다.

한마디로 압축하여보면 당수의 립장을 반대한다는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다른 선택이 있을수 없다고 뚝 찍어놓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물러서자 조봉암은 그제야 윤기중과 장내를 둘러보며 한마디 하였다.

《모두 숨이 차 하는데 좀 쉬는게 어떻습니까?》

《어, 그거 좋지요. 난 원 담배생각이 나서 죽을 맛이요.》

조봉암의 왼쪽에 앉아있던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서정후가 벌써 주머니에서 밤빛의 곰방대를 꺼내며 조봉암의 제의를 제일먼저 지지하였다.

모임참가자들속에서 제일 나많은 년장자로서 올해 팔십을 넘기는 로정객이다. 그는 진보당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여 선거준비사업을 주관하고있었다.

오랜 정치경력을 자화자찬하고 다니는 서정후에게는 실지로 당의 중진들과 조봉암이 참고할만 한 경험과 교훈이 적지 않았다.

이번에 3대《대통령선거》가 박두하자 진보당추진위원회에 당중앙의 권능을 주며 진보당의 간판을 정식 내걸고 진보당의 기발을 올리자는 전략적발기를 처음 내놓은것도 서정후다.

도에까지 당추진위원회가 그쯘하게 꾸려진 조건에서 진보당이라는 모자를 써도 무리가 아니라는것이였다.

사실 서정후의 주장대로 진보당의 이름으로 선거위원회에 정식 정당등록을 하고 《대통령》후보까지 내세웠더니 사회여론은 물론 통치권에서도 아무런 시비가 없이 진보당으로 공인되여 불리우고있다.

《10분간 휴식합시다. 담배도 피우고 차도 한잔씩 냅시다.》

조봉암이 이렇게 말하자 좌중은 기다린듯 굳어진 자세들을 풀고 웅성거렸다.

자그마한 앉은책상을 앞에 놓고 토론자들의 발언을 열심히 속기하던 연경이가 흥분으로 상혈된 얼굴빛을 감추지 못하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문을 여니 동생보다 키가 작고 동그란 얼굴이 아담지게 생긴 언니 효경이가 문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물었다.

《끝났어?》

《아니, 휴식시간이야, 10분! 차가 준비되였나요?》

《응, 기다리는중이야.》

그들은 인차 가지런히 주방으로 향하였다.

《그래, 회의가 어떻게 돼가니?》

효경이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오늘회의에서 아버지와 우달수의 선거출마를 최종적으로 합의하고 대책적인 문제를 강구한다는 정도로 알고있었다.

《어쨌든 언니 소원대로는 안될거야.》

연경이가 짤막히 대답하였다.

《내 소원? … 그러면…》

《아버지의 주장을 대부분 반대하였어요. 아버지 주장은 나에게도 청천벽력이였구.》

《왜? 아버지가 무슨 주장을 내놓으시였기에? …》

《아버진 후보출마를 포기한다고 하시였어.》

《그래? 어째서? … 그게 정말이야?! 아버지가 출마를 포기하시다니?》

연경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도 기색이 좋지 않다.

효경이는 동생의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아버지가 전쟁터와 같은 선거전에서 제발 피해주셨으면 하고
빌어왔지만 스스로 그런 문제를 정작 들고나왔다고 하니 속이 허전하다. 아버지에게 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더는 내색하지 않고 보리차를 잔들에 부어가지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자매는 김이 오르는 차잔을 참가자들의 앞에 놓아주었다.

《어, 언제면 우리가 늬들의 차값을 다 물겠는지.》

서정후가 흰 담배연기가 한가롭게 그물그물 피여오르는 곰방대를 물고있다가 효경이가 내미는 차잔을 받아들며 말을 건넸다.
효경이가 말없이 고운 눈에 미소를 담고 회의전에 가져다 놓았던 잔들을 다반에 걷어모았다.

서정후가 받아든 잔을 쭉 들이키고나서 빈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잔 더 다오. 이제 또 늬 아버지와 목이 쉬게 소리쳐봐야겠는데 한잔 더 받아놓자꾸나.》

《선생님도 참, 우리 아버지하고는 왜 목이 쉬게 소리쳐봐야 하나요?》

효경이가 오래전부터 이 집 문턱을 제일 뻗닿게 드나들며 터수없이 정을 주는 서정후를 쳐다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늬 아버지탓이야. 그건 말이다.》

서정후는 말꼬리를 끌며 흘끔 조봉암쪽을 돌아보다가 뒤말을 삼키였다. 효경이 차 한잔을 내려놓고 자리를 옮기자 서정후는 또다시 곰방대를 뻐금뻐금 빨기 시작하였다.

서정후는 지독한 담배군이다. 앉은자리에서 곰방대에 써레기 담배를 연방 갈아대며 팽팽한 두볼이 맞붙도록 기운을 내서 들
이 빨 땐 담배질이라면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는 신창균마저도 코살을 찡그리고 돌아앉는다.

서정후는 곰방대에 두번째로 써레기담배를 꽁꽁 다져넣은 다음 아직도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정세자료만을 걸탐스럽게 들여다보고있는 우달수에게로 느적느적 다가갔다. 우달수앞에는 금방 가져다 놓은 차잔이 그대로 김을 올리고있었다.

《우부위원장!》

서정후는 우달수의 곁에 앉으며 불렀다.

그제야 우달수는 그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임자는 함구무언이나? 반대요, 찬성이요? 우부위원장의 발언을 모두 기다리고있소.》

서정후는 제사 답답하다는듯 질책기어린 어조로 우달수의 심중을 건드려놓았다.

… 사실 오늘 제기된 안건은 매우 심중한 문제였다.

조봉암이 제기한 문제였는데 누구에게나 천만뜻밖이였다.

조봉암은 이번 선거에서 리승만의 집권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인 신익희에게 양보하여 그를 야당권의 단일후보로 밀어주자는 긴급제안을 정식 상정시켰던것이다.

조봉암이 리승만의 집권당인 자유당과 야당세력권을 분석하고나서 자기의 제안을 선포하자 그때부터 회의장은 격렬한 론쟁으로 죽가마 끓듯 소란스러워졌다.

조봉암의 긴급제안은 선거를 앞두고 자연스럽게 당의 간판을 내걸고 첫 정치전에 돌입하게 되여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높아진 진보당추진위원회에 던져진 폭탄같은것이였다.

모두가 아연해지고 혹은 흥분한 모습들이였다.

《안될 말이요!》

맨 처음 노성을 터뜨린것은 조봉암의 왼쪽자리를 차지한 서정후였다.

서정후는 돗자리를 깐 방바닥을 주먹으로 자근자근 두드리며 채수염을 부들부들 흔들었다.

조봉암은 뒤통수까지 훌렁 벗어진 서정후의 번대머리를 힐끔 돌아보고는 그럴법하다고 그의 심정을 리해하여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서정후는 나야말로 백의민족의 정통직계후손이라는듯 언제나 흰 무명으로 지은 바지저고리에 흰 버선에 흰 고무신을 신고 흰 두루마기를 걸치고 다니는데 거기에 길게 드리운 풍신좋은 채수염과 번대머리를 에워싼 머리칼도 은빛이니 그야말로 소복단장이다.

하지만 아직도 허리가 꼿꼿하고 눈초리가 예민하다. 얼굴에는 로인반점도 얼마 없다. 이마와 볼에 가로세로 엇갈린 주름발이나 허연 서리가 내불린 채수염에서는 락엽진 인생이 느껴졌으나 그의 거동에는 젊은 시절의 도고함과 함께 그 어떤 야망과 끈질긴 기질이 비껴있었다.

연단에 내세우면 두세시간이 지나도록 장광설을 늘어놓아 청중을 놀래운다. 서울정계에서 발언권도 가지고있다. 지지세력도 적지 않게 가지고있었다.

서정후는 이번에 후보출마를 위한 준비단계에서 크게 애를 먹이였다.

초기에 진보당추진위원회는 조봉암의 제의에 따라 《대통령》후보로 서정후를 내세우기로 하고 지난달 마지막날에 열린 간사회의에 제기하였다.

그런데 대표회의에서 벌어진 경선(경쟁선거)에서 이것이 바뀌였다.

대표들의 과반수가 당선가능성을 고려하여 서정후는 《부통령》후보로 급을 떨구며 조봉암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울것을 제창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경선에서 락선된 서정후는 그 결과에 도전하여 조봉암을 내세우는것을 반대하여나섰다.

개인의 실력이나 대중적공감대로 보면 조봉암이 리승만을 제압할수 있겠지만 미국의 여론이나 서울정치권의 감각에 극좌익인물로 비쳐있기때문에 출마시켜야 패배의 확률이 높다는것이였다.

한편으로는 몇명의 측근인물들을 내세워 자기를 후보로 그냥 내세우게 하고 진보당안에서 조봉암배척운동을 벌려놓았다.

그러나 진보당추진위원회의 절대다수는 벌써 정계와 민중들속에 진보당이자 조봉암이며 조봉암이자 진보당이라는 같기식이 확고히 자리잡고있는 형편에서 조봉암을 출마시켜야 민중의 기대에 보답할수 있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그들은 조봉암이 여러번 서정후의 출마를 제기하였으나 끝내 당대표자회를 열고 경쟁선거에서 결정하도록 합의를 이루어냈다.

결과는 뻔하였다. 며칠간의 격렬한 당내부의 소요끝에 공개적인 론쟁과 비밀투표를 통하여 조봉암이 압도적인 표차이로 서정후를 누르고 진보당의 후보로 선출되였다.

사태가 급변하자 서정후는 자기는 당의 공천이 아니라 당에서 나가 백의종군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어거지를 부렸다.
서정후의 심복자로 자처하는 인물들이 그의 두루마기자락에 숨어서 부추겼다.

그러나 그게 쉽게 성사될리가 만무였다.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는 5개이상의 시, 군에서 5천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련명지지수표를 받아야 한다. 자개바람이 나게 돌아다녔건만 천명선을 넘을수 없었다.

조봉암이 80객의 원로급정객이 늙마에 자기를 다잡지 못하고 권력야심에 환장이 되여 돌아가는것이 하도 보기가 딱하여 우달수에게 량해를 구하고 정 그러시다면 《부통령》후보로 나서라고 다시 넌지시 권해보았다.

서정후는 조봉암이 우달수까지 달고 와서 술자리를 펴놓고 여러 시간 타일러서야 바른 정신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일부 눈이 제대로 박힌 서정후의 측근인물들이 당의 결정에 승복해야지 우겨봤댔자 사회적여론의 질타를 면치 못하고 정치적여생에 어지러운 추문만 남길것이라고 솔직한 조언을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여 령감은 어느날 조봉암을 찾아와 면구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자신을 뉘우쳤다.

《죽산, 내 참 실언이 많았소그려.》

그러고나서 이제부터 자기는 일체 사욕을 다 버리고 정치선생노릇이나 하겠다고 하였다. 뿐더러 자신의 과실을 씻는 의미에서 선거대책위원회를 떠맡겠노라고 나섰다.

하지만 무수한 가시덤불을 헤치며 한생 편답해온 정치행로에서 성격처럼 굳어진 권력에 대한 집착과 욕망만은 버릴수가 없는 서정후였다. 하기에 그는 무분별한 객기로 망신스러워진 지금에 와서는 마음을 바꿔 차라리 조봉암의 힘을 빌어 진보당이 권력을 장악하면 자기는 진보당의 대표로 나서든지 아니면 《총리》직을 맡아 정사를 총괄하여보려는 꿈을 꾸고있었다.
그런데 조봉암이 자진사퇴하면 모처럼 생겨난 기회를 잃고 이대로 잔명을 마치게 된다. 이것은 권력에 대한 자기의 마지막기회마저 잃게 하는것이였다. 그래 서정후는 후보사퇴와 관련한 조봉암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장시간 기염을 토하였다.

민주당에 양보하겠다니 이건 당초에 쓸개빠진 일이라는것이다. 당의 결정을 가지고 당수라고 마음대로 흔들어서는 안된다고 삿대질까지 해가며 조봉암을 공격하였다.

서정후가 잦은 기침을 해가며 자리에 앉자 윤기중이 뒤를 이었다.

《후보양보란 있을수 없는 당의 후퇴입니다!》

윤기중은 이렇게 웅글진 어조로 우선 결론부터 내리고 토론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 흥분에는 서정후와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는 당추진위원회에서 내부사업을 총괄하고있다. 군대로 말하면 참모장격이다. 조봉암을 형님처럼, 스승처럼 사심없이 아끼고 따르며 받들어가고있다.

이런 사람이 조봉암이 제기한 후보사퇴를 견결하게 반대하는 리유는 조봉암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너무도 큰데 있었다.

여러해전에 리승만의 손끝에서 떨어져나와 지금까지 줄곧 조봉암을 받들어 활약하여온 윤기중은 이번 선거에서는 조봉암이 경무대를 타고앉을 승산이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마지 않았다.

윤기중은 침착하게 자기의 주장을 폈다.

《리승만의 정치는 지금 썩을대로 썩고 곪을대로 곪아 툭 치면 터져나가게 되였습니다. 무서워말고 힘껏 걷어차면 무너져버릴것입니다. 력사적인 시각, 정치의 성숙된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윤기중의 열변은 오래동안 계속되였다.

윤기중은 원래 타고난 웅변가요, 리론가이다. 일상생활에서는 말과 행동이 느려보이지만 일단 열이 오르면 굵고 우렁우렁한 목청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리군 한다.

그는 리승만정치의 부패상을 단죄하면서 당수가 승리할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빈틈없이 엮어내렸다.

그가 한참 목청을 돋구고 자리에 앉자 여러명의 참가자들이 그의 명쾌한 분석과 절절한 충의심에 열렬한 박수로써 공감을 표시하였다.

서정후도 두차례나 일어나 조봉암의 제안을 반대하였다.

그는 장시간의 반대토론을 이런 말로 마무리하였다.

《선거전에 돌입하여야 할 현 시각에 당수가 야당련합을 명분으로 후보출마를 단념하는것은 당헌장에 대한 유린으로 그리고 소기의 목표에서 리탈하는것으로 됩니다. 나는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당수가 긴급제의를 철회할것을 강하게 요구합니다.》

신창균은 립장표명을 요구하는 윤기중의 지명을 당해서야 정세자료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좌중을 둘러보는 눈길이 곱지 않고 몹시 흥분되여있었다.

사실 그는 속에서 끓어번지는 울화를 참느라고 여적 머리에는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는 정세자료를 번지며 버티고있었던것이다.

그는 볼부은 소리로 누구에게라 없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1보 후퇴입니까?》

《아니, 2보 후퇴요. 그리고… 착실한 한걸음의 전진이요!》

조봉암이 마치 기다리기나 한듯 던져온 공을 맞받아 차던지였다.

조봉암의 거침없는 대답에서 커다란 무게와 드팀없는 의지가 느껴졌다.

신창균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관자노리에서 푸들쩍 경련이 일었다.

신창균은 이것이 공식장소가 아니고 조봉암과 1 대 1로 맞붙은 자리였다면 서슴지 않고 이렇게 격분을 터쳐놓았을것이다.

《어찌된 일입니까?! 지레 혼뜨검을 당하신게 아닙니까?! 리승만일파의 백색테로에 물러서는게 아닙니까?!》

조봉암도 신창균이 한마디 질문으로 그쳤으나 그의 거동과 거친 표정에서 격한 심정을 헤아리고있었다. 그의 불만이 어느 정도라는것도 짐작하고있었다.

좀더 머리를 굴리게 하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리성의 소리를 꺼내놓게 하자. 우리는 민중앞에 책임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조봉암은 심사가 꼬인 신창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기의 중대제안이 쉽게 통과될수 없다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사실 그자신도 여러날에 걸쳐 낮과 밤을 이어가면서 깊은 고민과 암중모색끝에 매듭을 지어야 했던 결단이였다.

《나는 죽산선생님이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여주실것을 정중히 제의합니다.》

신창균은 다른 설명이 없이 자리에 앉았다.

이 문제를 놓고는 구태여 왈가불가할 필요가 없다는 속심이 단호하게 내비친 그의 짧은 발언에 서정후도 만족한듯 고개를 힘있게 끄덕이였다.

이 회의에서 조봉암의 립장을 앞장에서 가장 열렬하게 옹호한것은 선전간사 심운이였다.

참가자들속에서 류달리 얼굴이 맑고 해사하게 생긴 사나이였다. 키꼴이 호리호리하고 언제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감돌아 뭇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끌어내는 사람이다.

연경이만은 언제나 꾸며낸듯 한 엷은 웃음이 떠도는 그 해사한 안면표정을 질색한다. 어딘가 모르게 남자다운 강의함과 성실성이 결여된듯싶고 진심이 우러나온것 같지 않아보이는 그 웃음에서 무엇인가 차고 선뜩한 느낌이 드는 이중적성격의 소유자라는것이다.

어느 저녁에 밥상을 받아놓고 딸의 모가 진 평가를 들은 조봉암이 시뭇이 웃으며 연경이를 나무람하였다.

《너야말로 이중적인 립장이다. 믿고 우리 대렬에 받아주었으면 끝까지 믿어주어야지 느낌을 앞세운다는것은 과학적인 인식관이 못된다. 사람의 진속을 들여다보자면 색안경은 벗어놓아야 하느니라.》

조봉암은 심운의 몸가치를 비싸게 정하고있다.

심운은 연사로서는 윤기중과 쌍벽을 이룰만 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웅변가이다. 사회주의리론에 밝으며 언행에 기지도 있어 그가 연단에 나서면 청중은 시간가는줄을 모르고 독연같은 그의 웅변에 빠져들군 한다.

심운은 한때 미국의 정보계통에 복무한바 있는 인물이다. 몇해전에 리승만을 제끼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며 조봉암의 수하에 들어왔다.

심운은 선전간사답게 조봉암이 보고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조항별로 분류하여 그 정당성을 해설하였다. 조봉암의 긴급제안이야말로 당면한 진보당의 구호로 채택되여야 한다고 힘을 주어 강조하였다.

심운이 조봉암의 제안을 장시간에 걸쳐 지지하자 그에 공감한 여러명이 잇달아 일어나 지지연설을 하였다.

회의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였었다.

모두가 두세차례씩 자기 립장을 밝혔다.

유독 우달수만은 여적 입을 성문처럼 닫아붙이고있다. 서정후에게는 그게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는 해방후에 민주독립당 당수 홍명희의 측근에서 활약하였다.

4월남북련석회의(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도 홍명희의 수원으로 따라갔었는데 지금껏 당국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남북의 협상을 통한 평화통일소신을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있다.

홍명희가 평양에서 활동하면서부터 조봉암을 찾아와 바람새 사나운 정치밭을 함께 헤쳐온 지조있는 정치인이였다. 우달수는 오래동안 중도좌익권에 몸을 담아오면서 정치에 대한 일가견도 있고 사색의 깊이가 있어 당안에서 발언권이 크다.

서정후는 우달수 역시 조봉암의 후보사퇴를 반대할것이며 우달수까지 주장한다면 조봉암이 자기 제안을 거두게 될것이라고 단정하고 휴식참을 빌어 우달수에게 다가와 건드려놓은것이다.…

서정후의 예상은 완전히 오판이였다.

이 회의에서 우달수만이 후보사퇴에 얽힌 조봉암의 고뇌와 진실을 정확히 짚고있었고 그의 결단을 진심으로 지지하고있었던것이다.

그는 사실 정세자료에 눈길을 묻고있었으나 두귀는 토론자들의 주장을 걸탐스럽게 빨아들이고있었다. 그 어떤 감정에 유혹되거나 구속되지 않고 당수의 긴급제안을 분석하고 재빨리 자기 립장을 세워가지고있었다.

《이보게, 우부위원장! 내 말을 듣나?》

서정후가 다시 뚱겨놓는 바람에 우달수는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서정후를 쳐다보는 눈길이 매우 착잡하다.

《예.》

《임자발언에 큰 의미가 걸려있네.》

《회의가 속개되면 처음으로 발언하겠습니다.》

《기대하겠네.》

서정후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오금을 박고나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잠시후에 자리가 다시 정돈되고 회의가 계속되였다.

우달수가 약속한대로 먼저 토론에 참가하였다.

회의장은 물뿌린듯 잠잠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조봉암이 우달수가 담담하게 토론을 시작하는데 《가만…》 하고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한마디 합시다. 앞에서 대체로 찬반립장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 이미 발언한분들은 달라진 견해들이 있다면, 회의과정에 납득된바가 있어 자기 립장을 바꾸었다면 간단간단히 제기하도록 합시다. 계속하시오, 우달수부위원장!》

우달수는 이미 마음속에 명백하게 준비하여둔 자기 립장을 물쏟아버리듯 거침없이 꺼내놓았다.

《여러분! 당수의 제안을 다시한번 랭철하게 분석해봅시다. 그 제안의 출발점과 종착점을 살펴봅시다. 우리 당수는 보다 넓은 안목으로 앞을 내다보고있습니다.

서울의 현 권력구조와 민심의 향방을 고찰할 때 공정한 선거를 기대할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당 후보가 리승만을 제껴버리고 승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특히 현 단계에서 우리 당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기대할수도 유도해낼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리승만독재는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기어이 거꾸러뜨려야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리승만을 밀어던질 가능성은 있습니다. 문제는 리승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의 구호밑에 묶어세우는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후각을 마비시킬수 있는 온건적인 인물을 리승만과 맞세우는것입니다.

오늘 서울정치권에서 리승만을 대신할수 있다고 미국을 안심시킬수 있는 세력은 민주당과 그의 후보로 나선 신익희입니다. 만약 신익희를 둘러싼 민주당세력과 우리 당수를 위시한 진보당세력을 대치시켜 선거전을 벌리면 결국 반리승만세력권이 둘로 갈라집니다.

야권의 표밭이 둘로 갈라지는데서 어부지리를 얻을건 리승만과 자유당입니다. 그러므로 당수의 긴급제안은 리승만을 제껴야 하는 오늘의 시대적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착실한 한걸음의 전진을 위한 2보후퇴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비현실적인 욕망에 현혹되지 말고 보다 현실적인 안목에서 사태를 꿰뚫어보고 당수의 긴급제안을 당론으로 결정합시다.》

사리가 분명한 우달수의 발언에 얼마 안되는 사람들만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쳤을뿐이였다.

서정후는 우달수를 실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우달수의 주장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서정후도 앉은자리에서 반대를 다시 선언하고 윤기중도 자기 립장을 짤막히 반복하였다. 조봉암의 긴급제안을 지지하여 두세차례 자리에서 일어났던 선전간사인 심운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회의참가자들의 주장을 압도하는 큰소리로 발언권을 다시 요구하며 일어섰다.

그런데 그가 내놓은 제안이 매우 충격적이였다.

《저는 당수의 제안을 지지한다는것을 다시금 명백히 합니다. 뿐더러 저는 차라리 우리 진보당이 이번 선거에서 보이코트할것을 주장합니다.

이번 선거도 치러봐야 미국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는 보수적인 우익통치권을 미화분식하는 행위에 불과할것입니다. 야당후보들이란 본질에 있어서 좀 까다로운 둘러리격입니다. 둘러리가 잘났다고 신랑신부가 달라지겠습니까.

따라서 반독재적인 우리 당은 선거보이코트를 정식 선언하고 불참함으로써 우리 당의 진보성을 내외에 천명하고 우익보수정치일반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을 선언하여야 합니다.》

심운의 주장에 방안은 새바람을 맞은 갈숲처럼 또 한번 세차게 술렁거렸다.

조봉암도 너무도 뜻밖의 제의에 어리둥절하여졌다.

모두들 한마디씩 그의 제의에 거친 반응을 보이는데 당자는 그것을 예감한듯 태연자약해서 방안의 소요가 진정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조봉암은 손을 흔들어 참가자들에게 자중할것을 요구하였다. 심운에게는 자기 주장을 더 전개하여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심운은 자기의 발언에 깊은 관심을 돌리는것 같은 조봉암에게 얄팍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서두름이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당수의 후보직사퇴주장을 선거보이코트로 더 강하게 몰아가자는것은 첫째로, 현재 우리 당이 처한 내외사정과 관련됩니다.

아직 우리 진보당은 자기의 조직기구를 완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중앙당조직은 대체로 기틀이 서있으나 지방당은 처녀지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빈틈없는 준비를 가지고 대처해야 할 정치전에 도전한다는것은 무리이고 모험입니다. 해봐야 패배를 면치 못할게고 그렇게 되면 지지자, 동정자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주게 될것입니다. 이것은 장차 당의 기초를 쌓는데 결정적인 장애로, 후퇴로 이어질것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선거보이코트를 주장하는 리유는 그자체가 하나의 강력한 반체제, 반독재의미를 가진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바가 없습니다. 이미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이러한 투쟁으로써 해당 정치세력의 진보성과 선명성을 과시한 전례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체제세력을 확대하고 독재지반을 약화시키며 내외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효과적인 전술로 리용되고있습니다.

셋째로, 선거전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질 또 한차례의 리승만일파의 폭압으로부터 이제 겨우 맹아에 불과한 우리 당조직을 보호하자는데도 있습니다.

분명 이번 선거도 이미 진행된 48년, 50년, 52년, 54년 선거처럼 피비린 란투극으로 될것입니다. 우리 당은 이 란투극에서 차라리 씨원스럽게 물러나봅시다. 그 란투에서 피를 흘리게 될것은 자유당이나 민주당일것입니다. 그 어지러운 싸움판에서 어차피 두 당은 이기든 패하든 서로의 허물잡기놀음에 만신창이 될것입니다.

그러나 그 더러운 권력잡기싸움판에 뛰여들지 않은 우리 당의 영상은 민중에게 더욱 깨끗하고 신선하고 원숙한 모습으로 비쳐질것입니다.》

심운이 기세좋게 주먹까지 내두르며 예까지 밀고나가자 방안의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투덕투덕 울렸다.

심운은 말을 이내 잇지 않고 좌중을 자신있는 눈으로 한바퀴 둘러보며 참가자들의 반응을 살피였다.

그때 신창균이 심운을 쏘아보며 격분하여 웨쳤다.

《보이코트라니?! … 그건 열걸음 후퇴요. 아니, 그건 항복이요. 민중은 선거놀음에서 피를 흘리겠는데 민중의 당이라는건 비켜앉아 팔짱끼고 구경이나 한다? … 민중이 우리를 뭐라고 하겠는가?!》

《흥분하지 마오. 우달수부위원장이 옳게 말했소. 우리는 멀리 앞을 내다봐야 하오.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기고만장해서 피투성이싸움판에 나서고있습니다. 그까짓 두 당이 이번 싸움에서 실컷 맥을 뽑고 지쳐빠지도록 놔둡시다. 우리는 어지러운 란장판에서 발을 쭉 뽑고 멱살을 잡고 함께 망해가는 두 집안을 구경이나 하면서 때를 기다립시다.》

심운은 희고 해사한 얼굴에 잔웃음까지 쳐가며 재기있게 달변을 엮어갔다.

얼핏 들으면 파격적이기는 하여도 감칠맛이 있다. 청중의 심리를 쉽사리 유도하여내는 그럴듯한 론리도 있다.

여러명의 참가자들이 랭정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가볍게 휘저어놓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명쾌하게 장식하는 심운의 토론에 입이 휑해진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건…》

신창균이 또 맞받아 소리치려고 하자 조봉암이 손을 흔들어 제지시켰다.

조봉암은 신창균의 거센 반응에 아랑곳없이 침착하고 미끈하게 자기의 제안에 화려한 채색까지 하는 심운에게로 눈길을 보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요?》

《기본적으로는…》

심운은 불만기가 느껴지는 조봉암의 질문을 받자 의기양양하던 기세가 대뜸 사그라지면서 당황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앉으시오.》

조봉암의 소리에 근육이 굳어져버린 심운은 두말없이 입술을 감빨며 자리에 앉았다.

심운이 자리에 앉는데 신창균이 허공을 찌르듯 손을 번쩍 들었다.

《제 한마디…》

짧게 깎은 상고머리가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도전적인 거동에서 청중은 벌써 그의 강직하고도 정의감이 넘치는 결패와 분노를 가늠할수 있었다.

심운의 제의는 천만부당한 패배의식의 표현이라고 신창균이 사정없이 두들겨댈것이 분명했다.

조봉암은 그의 심중을 헤아리고 또 한번 손을 내저었다. 명백한 문제를 놓고 당안의 분위기가 필요없이 극으로 치닫는것을 제때에 눌러놓아야 하였다.

《앉소, 앉으시오.》

조봉암이 거듭 밀막는데도 불구하고 신창균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일어선김에 한마디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우리 당에서 저렇게 얼찌근한 소리가 나오는것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앉소. 그리고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억제하는 유해로운 발언은 각자가 삼가해야 하오. 앉으시오!》

신창균이 조봉암의 엄한 타이름에 얼굴이 수수떡처럼 벌개가지고 짧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조봉암이 심운에게 시선을 박은채 웅글은 어조로 자기의 립장을 꺼내놓았다.

《나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선전간사의 주장에는 반대요!》

그는 심운이 충격적으로 자기를 쳐다보는것을 느꼈으나 무시하여버리고 그냥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력사에서 배워야 하오. 착잡한 오늘의 정치환경을 바로 리해하고 당의 진로를 실패없도록 명확히 규정하자면 과거를 돌아보며 교훈을 끌어내야 한단 말이요.

해방직후말이요. 정치세력의 무게로 보면 좌익권이 훨씬 압도적이였지. 여러분들도 다 인정할거요. 그런데 박헌영이 합법운동을 포기하여버렸소. 바로 보이코트에로 나갔단 말이요. 어처구니없는 일이였지. 결국 서울의 정치무대는 리승만세력의 독주무대로 돼버렸소. 좌익은 공개적인 정치전에서 자기의 진지를 다 잃어버렸소.

난 그때의 랑패스럽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오지 않소. 그때 좌익세력이 합법적인 정치권에서도 우익세력과 대결하였더라면 한줌도 안되던 리승만세력이, 다 그러모아야 미국망명객들과 친일나부랭이들에 불과한 리승만일파가 쾌재를 부를수 있었겠는가.

박헌영의 보이코트는 결국 리승만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숨이 꺼져가던 우익이 되살아났소. 리승만으로 하여금 별다른 장애없이 독재의 지반을 닦게 하였단 말이요.

통분할 일이였소. 물론 당시 미국것들이 철저히 리승만세력을 밀어준데 큰 리유가 있었지. 세월은 흘렀어도 정세는 비슷하오. 어떻소, 선전간사? …》

조봉암은 이렇게 마디마디에 힘을 넣어 통분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그는 심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여전히 우렁차게 자기의 소신을 밝혔다.

《다른 문제들도 있소. 우리 당은 투쟁을 통하여 단련하고 자기 힘을 키워가야 하오. 당은 투쟁의 수단이지 간판이나 치장물이 아니요.

우리는 이미 진보당의 존재를 선포하였으며 당추진위원회가 당중앙을 대신하고있고 첫 투쟁으로 선거전에 돌입하였다는것을 내외에 선언하였소. 우리는 반드시 이번 선거를 리승만의 전제적인 폭정을 심판하는 공개적인 연단으로 만들어야 하오. 이를 통해 진보당의 존재를 내외에 과시하며 당의 기초를 착실히 쌓아야겠소.

아직도 우리 민중은 독재의 독버섯에 질식되여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어하오. 우리는 독재가 만능의 정치가 아니며 신성불가침도 아니며 민중에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응징도 하고 쳐몰아낼수도 있는 권리와 힘이 있다는것을 깨닫게 해야 하오.

아울러 우리 당의 강령을 민중속에 심어주는 대정치전으로 되게 해야 하오. 우리 당을 옹호하고 선전하는 이 합법적이며 공개적인 기회와 무대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오.

여러분, 생존을 구실로 달팽이처럼 움츠리고 지낼 생각은 아예 걷어치웁시다. 그래서는 안되오! 대세를 관망하면서 눈치보기나 하다가는 기회주의적당으로 전락되고마오.

우리는 마땅히 살아움직이는 당을 만들어내야 하오!》

조봉암이 이렇게 방안이 쩌렁하게 웨치자 모임참가자들은 누구라 없이 크게 격동되여 열렬한 박수로 지지하였다.

이로써 심운의 보이코트주장은 더 재론할 여지없이 즉시에 쑥 들어가버렸다.

방안의 분위기에 압도된 심운마저 허여멀끔하던 얼굴이 벌겋게 타들어가지고 박수를 쳤다. 그러나 조봉암의 긴급제안에 대한 찬반론의는 매듭이 없이 그냥 격렬하게 벌어졌다.

윤기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란한 장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제기하였다.

《자, 다른 제안이 없다면 당론을 확정합시다. 결정합시다.》

그러자 서정후가 야단스럽게 건기침을 톺아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 문제는 중진회의결정을 깨치는 중대문제요. 그러니 상임부서장들을 다 참가시켜가지고 표결에 붙여야 하오.》

서정후의 소리에 우달수가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이였다.

우달수는 현재 모임참가자들의 동향으로 보아 조봉암의 긴급제안이 통과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참가자들에게 달아오른 흥분을 가라앉히고 리성적인 사고를 할수 있는 시간을 주며 보다 폭넓은 론의에 붙이는게 필요했다.
그러자 신창균이 옆에 앉아있는 우달수를 마뜩지 않게 흘겨보며 툭 내쏘았다.

《시간랑비요, 오늘이 며칠이요?》

《그래도 당규범이 있지 않소.》

우달수가 단호한 어조로 잘라맸다. 신창균이 맞받아 어성을 높였다.

《당안의 기본핵심이 여기에 거지반 다 모이지 않았소?》

조봉암이 그들의 열띤 언쟁에 끼여들었다.

《선거위원장과 우달수부위원장의 의견이 옳을듯싶소. 상임부서장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더 론의하여보고 결정합시다. 간사장은 래일중으로 지방에 가있는 부서장들을 다 부르시오. 래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에 당사에서 모임을 가집시다.》
《알았습니다.》

조봉암도 시간랑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걸음 비켜서기로 하고 결정을 뒤로 미루었다.

당안의 일부 사람들속에서 당이 조봉암의 《사당》으로 돼가고있다느니, 조봉암의 《독선독주》라는 말들이 돌아가고있다는것을 그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그도 우달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있었다.

제나름으로의 뿌리깊은 권력욕과 리해관계나 혹은 승리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흥분에 들떠있는 사람들에게 랭철한 리성을 찾을 말미를 주는것이 좋을듯싶었다.

자기가 이번 선거에 나서봐야 패자가 되리라는것은 야밤에 불 보듯 한 일이다.

서울정치는 선거에서 지지표가 많다고 승자로 되는게 아니다.

구속이 없는 선거선전, 관권의 중립, 민주화된 선거, 미국의 태도,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수 있는 정치풍토… 이밖에도 선거에서 승패자의 판결이 공정하게 되는데는 작용하는 인자가 많다.

그러나 아직 진보당이 승자가 될수 있는 객관적인 인자가 너무 부족하다. 아직 서울정치는 권력에로의 길에 진보당에는 푸른등을 켜주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이기는 길을 찾아내자면 어차피 민주당을 내세워밀어주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당의 중진들이 말떨어지기 바쁘게 욱 끓어올라 대세를 랭정하게 투시해보려 하지 않고있다. 지나친 욕망에 눈이 흐려 들떠있다.

《후-》

조봉암은 느닷없이 숨을 길게 내그었다. 그들의 심중이 십분 리해되였으나 머리는 더욱 복잡하기만 하였다.

그는 자신도 자기의 긴급제안을 다시한번 굴려볼 여유를 가지고싶었다. 반대의견에 대하여서도 심중히 검토하여야 하였다.

모임참가자들은 무거운 걸음으로 흩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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