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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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의 육중한 철대문앞에서 차에서 내린 조봉암은 경무대 비서의 차에 올랐다.
차가 경무대의 후원에 들어서는데 아침산책을 하던 리승만이 반색을 하였다.
그뒤로는 프란체스까가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며 따라왔다.
《하, 죽산! 이거 참 오래간만일세.
내 해공을 저세상에 보내놓고 어제 밤에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름겨워 잠 못 들다가 문득 죽산의 생각이 나더라구. 이렇게 흔연히 초청을 받아주어 고맙네. 그래 건강은 어떠한가. 여전히 몸이 충실해보이는구만.》
리승만은 조봉암에게 시퍼런 피줄이 가로세로 질러간 손을 내밀며 쉰 목소리로 먼저 인사말을 건늬였다.
《초청을 해주시여 감사합니다. 그간도 귀체만강하십니까?》
조봉암은 프란체스까에게도 허리를 약간 굽혀 깍듯이 례를 표시하였다.
그 녀자의 얼굴에 희색이 피여올랐다. 리승만도 프란체스까도 십중팔구는 비서가 조봉암으로부터 사절당하고 올것이라고 짐작하고있었다.
조봉암은 해방 이듬해에 리승만이 자리잡은 돈암장으로 갔다가 그의 양첩으로 뒤따라 하와이에서 날아온 프란체스까를 처음 만나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그 녀자는 장작같이 버쩍 말라 관골이며 매부리코가 앙상하게 삐여져오르고 눈은 옴폭하게 꺼져든게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호의호식하더니 인차 살점이 오르기 시작하여 지금은 지나치게 피둥피둥 살져 예전의 초췌하던 모상은 찾아볼수 없다.
《죽산선생님, 건강하신 선생님을 뵙게 되여 기뻐요. 선생님을 뵈온지도 여러해가 되는것 같습니다.》
프란체스까가 짜장 정감을 담아 삽삽하게 인사를 받았다.
《예, 세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54년 국회선거에서 탈락된이래 하는 일없이 지내고있습니다.》
조봉암은 리승만의 입부리가 대뜸 불거져나오는것을 보았으나 모르쇠를 하였다.
54년 《국회》선거때에 그가 선거에 아예 등록도 못하도록 갖은 음해를 벌려놓은 장본인은 바로 리승만이였다.
리승만은 김창룡을 시켜 그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것조차 포기하도록 모든 선거구들에 비밀지령을 떨구어 끝내 물러서게 하였던것이다. 그걸 걸고 즉시에 상판에 주먹을 날리니 리승만은 뒤잔등이 요글요글해왔다.
이내 리승만은 상판이 두텁게 비죽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좀 걸어볼가… 후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진지상을 받는게 좋지. 내 나이에 아침산보 천걸음이면 산삼 한뿌리보다 낫다고 하오. 허허…》
조봉암은 약간 긴장을 느끼며 리승만을 따라 후원길에 들어섰다.
후원 못가는 오월이라 만발하게 피여난 갖가지 꽃속에 묻혀있다.
개나리, 진달래가 흐무러지고 지금은 철쭉이 자기 시절을 뽐내듯 불타고있다. 사이사이에 살구꽃, 복숭아꽃, 앵두꽃 등 과일꽃이 울긋불긋하고 정향나무와 자귀나무가 향기를 풍기며 푸른 잎새들을 흐느적거린다.
《원래 여기는 사꾸라가 가득차있었소. 사꾸라란 오랑캐꽃이 아니요?! 력대 총독놈들이 이곳에 틀고앉아 제 나라 국화라고 뜨락을 사꾸라꽃으로 가득 채웠더란 말이요. 하기사 여기뿐이요? 온 나라를 사꾸라꽃으로 덮어놓았지. 왜나라의 얼로써 백의민족을 취하게 만들려고 했던거요.
그런걸 내가 48년도에 이곳에 들어서면서 사꾸라를 싹 베여버리도록 했소. 이렇게 무궁화와 과일나무들을 심었지.
여기에 총독관저를 꾸려놓고 사꾸라까지 심어놓도록 한걸 보면 쪽발이들도 풍수를 볼줄 알거던. 보오, 뒤에는 북악산이 웅장하게 들어앉고 앞으로는 일망무제한 서울시가지가 펼쳐져있고… 우리 조상님들이 개경량반들이 무서워 이 서울에 천도해와서 여기저기 궁궐을 세우면서 어째서 이 자리를 놓쳤는지 모르겠거던.…》
리승만은 천천히 대리석을 깔아놓은 련못가를 돌면서 경개자랑을 늘어놓았다.
리승만은 원체 말을 다사스럽게 늘어놓기를 즐기면서 자기의 궤변을 인내성있게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하였다.
하두 오래 살다보니 귀동냥하였거나 눈요기로 머리통에 저축해둔게 많은데다가 기억력도 그리 나쁘지 않아 한번 주절거리기 시작하면 한두시간은 거침없이 이리저리 제잡담 화제를 비틀어간다.
근래에는 기력이 모자라는데다가 프란체스까가 눈을 흘겨 대중장소에 나가 연설하는것은 삼가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생기면 여전히 입아귀에 힘을 주어 이 소리 저 소리를 굴린다.
조봉암은 령감의 습벽을 아는지라 고개를 짓수그리고 리승만의 장광설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하여달라고 리승만이 여기에 불러놓고 은근히 추파를 던지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리승만은 여기 후원의 정자에 올라 양주를 권하면서 사꾸라와 무궁화를 화제에 올렸던것 같다.
하기는 사꾸라를 찍어내고 그 자리에 심고 피워놓은 저 무궁화는 리승만의 몸값을 추켜세울만 한 치적거리가 됨직하다.
나야말로 제 민족의 모든것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나가는 이 땅의 주인이라는것이다.
그렇다면… 문득 조봉암은 옆으로 눈길이 돌아갔다.
리승만의 곁에는 프란체스까가 령감을 부축하며 령감의 말에 짜장 깊은 감동의 빛을 담은 얼굴을 다소곳이 숙인채 아장아장 걸어가고있다.
그 녀자 역시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땅의 모든것에 습관되기 위하여 애쓰는 《국모》임을 광고하려고 양단치마저고리를 차려입고 쪽진 머리에 은비녀까지 꽂았으나 그게 여겨보니 가관이다.
우선 불룩한 젖가슴에 저고리가 꿰질듯 솟아 볼품이 없고 살진 엉덩이가 너무 커서 양단치마가 풍덩한게 꼭 장독에다가 비단을 둘러감은듯싶다.
거기에 파르께하게 주어바른 눈확이며 불개미빛갈의 머리칼이 진회색양단저고리에 어울리지 않고 너무 이색적이여서 웃음집부터 흔들거린다.
프란체스까야말로 무궁화와 너무도 대조를 이루는 리승만의 안팎이 다른 정치의 일단이요, 언행의 불일치, 숭미사대와 민족허무주의의 극치가 아닐가.
부모가 맺어준 인연에 묶이워 기나긴 세월 떠살이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시부모를 깍듯이 공양하여온 조강지처를 헌신짝처럼 차던지고 이방의 녀인을 차고 이 집에 들어설 때 과연 리승만에게 민족의 혼이라는게 쪼각인들 있었더냐.
조봉암은 실소를 금할수 없었다.
자기 말을 들어주며 잠자코 있는 조봉암의 기맥을 은근히 짚어보던 리승만이 슬쩍 불렀다.
《이보게, 죽산!》
《예.》
살이라도 떼줄듯 한 리승만의 살가운 부름에 조봉암이 뚝뚝하게 대꾸하였다.
《내 죽으면 죽산이 여기 틀고앉아 이 꽃나무들을 가꾸게.》
리승만은 이렇게 한마디 띄워놓고는 얼른 걸음을 옮기였다.
조봉암은 벌써 두상의 음흉한 궁리가 짐작되였다.
죽을 때까지 이 경무대에 틀고있겠으니 아직은 이 집에 들어설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엄포이다.
《우리 비서가 기다리는군. 아침상을 받으러 갑시다.》
리승만은 몇걸음 옮기다가 문득 생각이 난듯 물었다.
《참, 내 죽산에게 경호원을 한 열명쯤 보내주라고 했는데? …》
《예, 아침에 비서가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헌데 경호원들을 나에게 보내면 리박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맙지만 돌려보낼가 합니다.》
《아아, 선거가 끝날 때까지 곁에 두고 지내라구… 훈련받은 사람들이니 곁에 세워놓으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걸세.
원체 우리도 선거일이 가까워오면 대통령후보들에게도 대통령과 똑같이 례우를 해야 되겠는데 헌법기조자들이 무식해놔서 세상에 그런 례법이 있는것조차 몰랐거던.
내 해공의 급사를 겪고나서 두루두루 생각하다가 때늦게 생각해낸것이니 그대로 둬두도록 하세.》
조봉암은 신창균의 열띤 목소리가 귀전을 때렸다. 리승만의 흉심이 밑바닥까지 빤드름히 들여다보이지만 더이상 리승만과 필요없는 설전을 만들어내는게 귀찮아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감사합니다.》
잘 차린 아침상을 물린 그들은 차 한잔을 비우면서 담소를 나누다가 다시 후원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리승만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묵묵히 물오리가 한가로이 떠다니는 못에 눈길을 박은채 걸음만 옮겼다.
리승만은 후원을 한바퀴 돌자 청사에로 향하였다.
1층은 집무실을 비롯한 공식적인 행사를 하는데 리용되고 2층은 생활처소로 되여있다.
리승만은 1층에 있는 자기의 집무실과 응접실, 대기실이며 무도장과 오락실들을 돌아보게 하고 2층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리승만은 2층에 와서도 작은 영사실과 선물보관실 지어는 저들내외가 사용하는 침실과 식사방을 차례차례 구경을 시키고 일일이 설명까지 해주었다.
조봉암은 리승만이 전례없이 친절을 보이고 경무대를 보여주는것이 무엇을 노린것인지 짐작이 되였다. 그럴수록 긴장해졌다.
리승만이 확실히 엉뚱한 큰것을 노리여 자기에게 추파를 던지고있는것이다.
회담실에 이르자 리승만을 부축하고 다니던 프란체스까마저 조봉암에게 고개를 까딱거려보이고는 사라졌다. 이것도 드문 일이다. 리승만이 그 누구를 만나건 그의 옆에는 언제나 그림자처럼 프란체스까가 붙어앉아있는게 상례다.
리승만은 회담실에서 조봉암에게 담배부터 권하였다.
《사양말고 태우오. 꾸바사람들이 만든것이라고 하더구만. 죽산이 담배를 즐긴다고 하던데 내 집에서 피우는 담배라 맛이 다를수도 있소.》
《고맙습니다. 이제는 줄담배기호는 버렸는데 권하는 담배에 그걸 깨끗이 끊지는 못했습니다.》
조봉암은 리승만이 엄지손가락만큼 굵은 려송연이 빼곡이 찬 갑을 내밀고 각근히 성냥까지 켜주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한가치 뽑아 입에 물었다. 그는 한모금을 길게 빨아들이면서도 도대체 두상이 왜 이렇게 노죽을 피우는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대충 짚이우는게 있기는 했으나 리승만이 아직은 진속을 가무리고 아리숭한 안개발을 거두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리승만은 조봉암이 담배를 달게 피우는것을 흡족해서 지켜보다가 드디여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나누는 얘기는 두사람만이 주고받은것으로 끝내자는것을 미리 약속합시다. 내 그래서 우리 마미도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말라고 일렀소. 그 사람이 없이 이렇게 회담실에 앉아보기는 아마 처음일거요.》
리승만은 그 무슨 굉장한 선의라도 베푸는듯 무척 살가운 어조로 첫말을 뗐다.
조봉암은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여주었다.
령감이 무슨 흥정을 걸어올지 대뜸 예상되였다.
아마도 《대통령》감투를 놓고 어리손을 칠것이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나 이 집을 차지하라는 말에 령감의 속궁냥이 그대로 비껴있다. 결국 죽기 전에는 감투벗을 생각이 없다는 소리다. 이 집이 네가 살 집이 분명은 한데 아직은 이 집을 넘보지 말라는 수작이다. 아니나다를가 리승만은 직방 선거문제를 화제에 올려놓았다.
《뭐, 피차간에 아침시간이란 귀한거니 긴말할게 없지. 에둘것도 없구. 선거말일세.》
리승만은 그때까지 상통에 지어내고있던 희색은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소 어색하게 말꼭지를 뗐다.
《말씀하십시오.》
조봉암은 리승만의 소리에 대뜸 긴장해졌으나 스스럽게 대꾸하였다.
《내 그제 밤에 선거유세를 더하지 않기로 눌러놓았네. 유세는 하지 않겠노라고 못박아놓았는데도 주변에서 자꾸만 들쑤셔서 몇번 서울지경밖을 돌아봤지. 헌데 이게 골치아프기로 이를데 없는 일이야. 문제점도 많아. 국론분렬, 재정랑비, 인적랑비…》
《원,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선거유세란 어느 나라나 선거때면 다 벌려놓는건데… 그렇게 해서 선거자들의 찬반의사를 불러내는 일인데 마땅히 나서는게 옳은 일입지요.》
조봉암은 리승만의 말을 천연스럽게 받아넘겼다.
(그 일이 고달프면 물러서는게 씨원하지 않겠는가. 선거선전이라는게 자기의 정견을 발표하고 선거자들에게 자기의 약속을 내놓는 일인데 그게 없다면 민중의 지지를 어떻게 받아낸다는것인가. 그리고 이 기회에 민중의 심판을 받아야 정치가 바른길로 갈게 아닌가.)
《내 말이 그런게 아니야. 제 자랑하고 제 주장을 내보이자니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 말이야. 이게 참 슬픈 일이야. 선거라는게 참 못해먹을 일이거던. 해공의 선거유세 전해들었겠지? 온통 이 우남의 얼굴에 흠집내는 말뿐이였지. 그 사람이 원체 소가지가 고약한 사람은 아니였는데… 선거놀음이라는게 사람을 악인으로 되게 한거라니. 선거놀음에도 문화라는게 있어야 한단 말이요.》
《선거연설문이야 원체 민주당에서 작성한것이니 해공선생을 나무람할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피차일반이지요. 물론 흠집내기로 돼서야 안되겠지요. 더구나 대방의 비판을 흠집내기로 받아들여서도 안될줄로 압니다.》
《거야 그렇지. 하지만 내 아래사람들이 만들어오는 연설문을 보느라면 골이 아프고 그걸 읽어가느라면 내 속도 편안치 않단말일세.》
《일없습니다. 나에 대해서도 리박사께서 보는 그대로 지적하여주십시오. 비판이란 써도 약이 되는게 아니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버리는겁니다. 리박사가 비판하는 문제가 지당하다고 인정되면 그대로 받아들여 금후 우리 당과 나의 활동에 충분히 활용하고저 합니다. 저도 우리의 정치문화가 도덕성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렵니다. 저의 공개비판에서 참고될게 있다면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죽산이 말귀가 어두워졌네그려. 참, 임자가 내가 준 장관감투 벗어던지고 떠나갔던게 언제였더라?》
리승만이 문득 화제를 뒤집어 옛일을 건드려놓았다.
《49년이니 이젠 7년이 돼옵니다.》
《자넨 내 호의를 다 뿌리쳤지. 숱한 사람들과 미국사람들이 자네가 공산당이라고 손을 내둘렀으나 난 자네의 인끔을 높이 사서 부의장과 농림부 장관으로 내세웠는데 굳이 떠나갔지. 그리고는 그냥 나하고 빗서왔지.》
리승만은 지나간 일을 두고 한이 맺혀있으련만 아무런 악의도 없이 주절거린다. 그 저의가 수상쩍다.
《그건 내탓이 아니올시다. 생각나지 않습니까? 장관직을 수락할 때 난 북에서 한것처럼 토지의 무상몰수와 무상분배 그리고 장차 공동조합을 만들어 빈고농생활을 안정시킬데 대한 조건부제안을 내놓았고 리박사도 지지하였지요.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되였습니까? 농지개혁은 흐지부지되고 공동조합은 물망에도 오르지 못하고 무산되였지요. 그러니 당초의 계약이 파기되였는데 내가 무슨 체면으로 리박사밑에서 장관노릇 해먹을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그때 일을 거들면 북동조죄요, 리적행위요, 까박붙이는자들도 있겠지만 그때 아마 내 소신을 끝까지 지켜주었더라면 이 남녘인구의 8할이 넘는 농민들이 리박사사람으로 됐을겁니다.》
《음, 그랬을수도 있지. 헌데 말일세. 그뒤에도 난 임자를 믿고 농민당을 부탁했지. 그것도 퇴를 놓았지.》
《리박사님, 옛일이라고 해서 직접 겪어본 두사람이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까지 진실을 외곡해서야 되겠습니까?
자유당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 나는 지금까지 솔직한 말로 피해만 당해온 사람이올시다.》
《허, 이 사람아! 이제 와서 지나간 일 옴니암니 캐볼 멋이야 없지. 내가 옛말을 거드는건 피차에 아픈 상처를 쑤시자는게 아닐세. 나 이젠 여든을 넘긴 사람이야.》
리승만은 틀어지기 시작한 조봉암의 심사를 엿보고 아직도 이들이들한 상판에 게면쩍은 웃음을 띠웠다.
《육체가 한계선에 이르렀으니 정치적으로도 잔명이 길지 않다 그 말일세. 기껏해야 이 집에서 한두기 더 보내겠는지… 때가 되면 임자에게 이 집 열쇠가 고스란히 넘어가지 않을가? 그러한즉 괜히 헛기운을 뽑으며 눈을 흘길게 있겠나? 난 우리끼리 필요없는 정쟁을 그만두자는걸세.》
조봉암은 순간 속깊이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는것을 느꼈다.
리승만이 반갑지 않은 초청을 불의에 들이대여 아침상을 안겨주더니 그 값으로 결국은 《대통령》감투를 무난히 사자는것이다. 선거출마를 철회하고 선거경쟁도 그만두자는것이다. 단독출마, 경쟁없는 선거를 치르자는것이다.
(안될 말이다! 네놈의 까딱수에 넘어갈 조봉암이 아니다!)
조봉암은 더는 이 자리에 앉아있기가 싫어서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볼편으로 매운 바람이 스쳐가는듯싶었다.
추하고도 렴치없기 그지없다.
(내가 그래 밥상 하나에 신념도 지조도 다 버리고 손들고 돌아앉을 얼간이로 보이느냐?! 내가 그래 두상의 부귀영화를 위해 민중의 기대를 저버릴 배신자로 될것 같으냐?!)
조봉암은 자기의 존엄을 너무 가볍게 저울질해보는 리승만의 수작이 너무도 역겹고 불쾌해서 단호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니 날더러 후보자리에서 물러나 10년을 기다려달라는겁니까? 어떻게 이 나라의 정사를 주관하는 리박사가 그런 흥정을 하는겁니까?! 참말로 놀랍습니다. 나는 민중의 요청으로 나선겁니다. 나는 이 집도 과원도 원치 않습니다. 나에게는 민주화된 조국의 미래가 귀중하고 민중의 복지가 이루어진 잘사는 나라가 귀중하며 남북이 의좋게 합쳐사는 통일조국이 귀중할뿐입니다. 나의 선택은 당신의 소망이나 결재에 의하여 달라지는게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그걸 바라신다면 내 한번 우리 당 추진위원회와 지지자들에게 호소해보지요.》
《이 사람아, 예나 지금이나 자넨 과시 다혈질이야. 왜 이렇게 말떨어지기 급하게 설설 끓는가? 우리야 정치에 몸담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아닌가. 내 임자에게 솔직하게 하나 묻겠네. 임자는 이번 선거에서 이 우남을 타고앉을수 있다고 믿나?》
《좋습니다. 나도 솔직하게 대답을 하지요. 나는 행운을 믿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나는 선거의 결과가 승산이 있다면 나서고 패배의 확률이 높다면 물러서는게 아닙니다. 선거전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사회의 진보를 촉진하는 하나의 정치행위입니다. 주권자로서의 민중의 정치성을 높이는 정치의 한마당입니다. 그리고 민중의 심판대에 정치가들을 올려놓고 그들을 각성시키고 분발시키고 나라와 겨레에 대한 참된 복무정신을 깨우쳐주는 선거자들의 권리행사입니다. 당신은 단독출마로 권력의 자리에 아무런 거침도 없이 오를것을 바라고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우리 사람들의 정치수준이 세계앞에서 얼마나 유치하게 평가되겠습니까?
지금은 왕권과 독재정치가 민중의 의사에는 관계없이 성행하던 세기가 아니라 민중이 주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20세기입니다. 여기에는 민중에 대한 우리 정치가들의 관점문제도 크게 걸려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의 정치참여의식은 소학교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있습니다. 모두가 나라의 정치향방에 대하여 눈을 밝히고 제때에 마음껏 자기 소신들을 내놓는 정치풍토가 마련되여야 정치가 정확한 궤도를 따라가겠으나 그렇지 못합니다. 이제 겨우 투표지 한장을 가지고 정치에 참여하게 되였습니다. 이를테면 투표지를 가지고 주의주장이 마음에 드는 정치가를 선택하는것으로 우리 민중의 정치참여가 형식상으로나마 보장되게 되였다는 말이올시다. 그런데 선거에 경쟁자가 없는 투표를 한다면 우리 민중의 정치선택의 이 가느다란 의사표명가능성마저 앗아내는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를 놓고서는 유감스럽지만 나는 다른 대답을 할수가 없습니다.》
조봉암은 자기도 다잡을길 없이 목소리가 거세졌다.
그는 말뗀김에 자기의 립장을 명백히 표명하였다. 이 정도로 강조하면 리승만도 정치의 륜리에 대하여 좀 생각해보지 않을가. 원체 이러루한 강변은 공직자로서 리승만이 전체 민중을 대상하여 해야 할 사람들의 정치성과 관련한 문제가 아닐가.
그의 이야기에는 정치와 력사의 실체를 뿌리채 샅샅이 훑어보는 예리한 투시력이 비껴있었다.
지금 리승만에게는 정치의 도의나 륜리에 대한 초보적인 감각도 없었다. 이미 만사를 리성적으로 판단할 사고능력도 마비되여있었다.
리승만은 마뜩지 않아 눈자위를 희번뜩거렸다.
《그래 죽산은 기어이 선거전을 치러야 되겠다는거겠소?》
아직까지는 숨이 눌린 어조다.
《물론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이것은 민중의 요청이고 우리 진보당추진위원회의 당론입니다. 그리고 선거전이란 그 나라의 성숙을 보여주는 정치의 마당이기도 합니다.》
《거 뭐 꼭 그렇게만 생각할것도 없어. 북녘을 올려다보게. 북녘의 령수는 해방직후부터 지금껏 나라와 집권당의 최고자리에서 정사를 주관하여오지 않나. 그쪽 선거를 보면 하나의 축제를 치르는것 같더구만. 우리도 그렇게 해서 안될게 있나. 이를테면 우리의 선거문화도 바꿀수 있지 않나.》
《예? 북녘이요?! 그러니…》
조봉암의 눈이 떼꾼하여졌다.
자기가 무엇인가 헛갈려들은것 같다.
(아니, 령감이 지금 실성한것이 아니냐? 북녘의 령수와 자기를 동렬에 세워보다니?! 그게 어방이나 되는 궤변이냐?!
북녘의 령수야말로 만민의 흠모와 신뢰를 한몸에 받을만 한 화려한 인생경력과 공적과 덕망을 지니고있는 현세기의 영걸이다. 북녘사람들이 남녀로소 할것없이 그분을 유일무이한 령수로 세월을 이어가며 받들어모시는것은 너무도 의당하다.
그런데 감히 사기와 협잡으로 악취나는 인생편력과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한만 사고있는 두상이 그분이 받고계시는 대접을 바란다니 이게 제정신 가지고 하는 소리냐?! 그분은 고사하고 그분의 발치에 미치더라도 나는 평생토록 받들며 허리숙이고 살아갈것이다.)
조봉암은 이렇게 박아주고싶었다.
《왜? 내가 못할 소리를 했는가?》
리승만이 너무도 어안이 벙벙해서 입만 다시는 조봉암의 기색에서 그의 쓰거운 조소를 헤아린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 비교가 그리 적중치 못한것 같애서…》
조봉암은 어줍잖게 응수하였다. 명분을 세워 두말을 못하게 확고한 어조로 립장을 밝혔다.
《북의 정치문화는 사회주의적입니다. 자본주의정치문화를 거기에 비교하거나 접목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
진속을 슬쩍 가무리기는 했어도 반론이 명확한 어조에 리승만이 또 한번 분기가 치밀어 궁글은 어조로 따지고 들었다.
《다시 묻겠네. 그래 나하고 맞서서 기어이 싸워보려나?》
《나는 당신이 우리 겨레의 진심으로 되는 추앙을 받고있다면 구태여 선거에 나서지 않았을것입니다. 당신의 정사를 받들어 평생을 바칠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은 지금 당신이 물러서기를 요망합니다. 나는 이들의 소원을 당신이 받아들이기 전에는 절대로 당신과의 평화적인 결투에서 물러서지 않을것입니다.》
《죽산, 당신의 그 결심이 언제까지 남아있을런지 념려되는구려. 임자는 인걸일세. 한냥짜리 굿하다가 백냥짜리 징 깨치게 되지 않을가?》
《위협인가요?!》
비위를 긁어내는 알량한 수작에 조봉암은 맞받아 례절있게, 그러나 랭담하게 응대하였다.
리승만의 두터운 입술이 푸들거리였다. 숨소리도 눈에 뜨이게 거칠어졌다. 자기 의사와 거슬리는 사소한 반발조차 오만불손한 반역이라고 생각하는데 습관되여온 리승만이고보면 조봉암의 로골적인 도전은 절대로 간과할수 없는 망동일수밖에 없다.
리승만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시절부터 《권위주의》에 물젖어왔다. 자기는 언제나 바르며 자기의 말은 론의할 여지없는 진리이며 따라서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와 가까워지거나 수하에 들려면 맹종맹동해야 한다는 권위의식때문에 리승만은 무지한 인간들에게서는 《신적인 존재》로 떠받들리우기도 했다. 반면에 지각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쉽게 빈축을 사서 돌리우기도 하였다. 그물이 삼천코라도 벼리가 으뜸이라는 말을 리승만은 곧잘 외운다.
실상 권위의식이 참다운 덕망과 광휘로운 리념으로 이루어져 인간세상을 아름답게 이끌어갈 때는 그로써 사회진보에 이바지된다. 하지만 그것이 권세와 나아가서 폭력의 도움을 동반할 때에는 인간사회에서 그보다 더 유해로운것은 없다.
집권자로서의 리승만의 권위는 폭력을 떠나서는 존속될수 없다는데 그 비렬성과 위험성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정치가로서의 리승만의 비극이 있었다. 그의 주위에 맴돌고있는 부하심복이라는자들도 리승만에게 맹목적인 복종만 하는 간신배무리였다. 그자들이 《충정》이라고 떠들어대는것은 뒤집어보면 사실상 저들의 부귀와 공명을 노리는 은페된 리기심이였다.
그런즉 이 자리에서 통일조국과 민중세상건설에 몸바치는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세워오는 조봉암에게는 개인의 리기만을 추구하는 리승만의 권위라는게 추호도 통할수 없었건만 바로 그것때문에 리승만은 격노해하는것이였다.
《아니, 마지막호의일세. 자네와 같은 공산주의신봉자에게 정권을 던져주는 일이 없도록 내 사람들은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 할걸세. 나 역시 그러할거고. 난 자네가 해공과 같은 비참한 인생종말을 맞을가봐 큰 걱정일세. 다시 말하네. 이건 그 어떤 협박이나 경고가 아닐세. 이건 이 우남의 특별한 호의일세.》
《각오하고 나선 길입니다. 당신이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닌줄 압니다.》
《좋아! 열심히 뛰여보라구!》
리승만은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늙은이답지 않게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앞으로 튀여나온 퉁방울눈에서 시퍼런 불칼이 번쩍거렸다.
조봉암도 쏘는듯 한 눈길로 리승만의 상통을 맞받아보았다.
조봉암은 지금 망조가 비낀 골동품같은 인간을 보고있었다.
생의 불꽃이 진하여 꺼벅거리고있는 인간의 더러운 체질이 역겹기만 하다.
(오로지 권력욕 하나에만 집착하여 여생의 한초한초를 구질구질 이어가는 인간페물,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한 판별능력조차 잃어버리고 래일에 대한 령수다운 꿈도 지향도 없이 권력의 맛을 게걸스럽게 포식하는것으로써 운명의 황혼을 즐기는 가련하고 용렬한 막바지인생, 권력에 미쳐 력사의식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는 지성이 결핍된 권력자…
세간의 눈초리나 후세의 평가라는 랭정한 력사의 교훈이 저 인간에게는 한갖 고담으로만 남아있을것이다. 력사에는 영원한 빙하기가 없다. 어느 한 시대, 어느 한토막의 정치사는 권력자의 폭압에 꽁꽁 얼어붙을수 있지만 그것은 기필코 어느 시대에 가서는 봄볕을 받은 얼음산처럼 녹아내리고 집권자가 영원한 비밀로 묻어두려고 어리석게 시도한 시커먼 악의 형체를 깡그리 드러내놓기마련이다. 리승만이 지금 이 엄연한 력사의 변증법에 도전하고있다.
아, 통분하구나! 이 나라의 맨 웃자리에 애초에 이런 늙다리를 세워놓다니… 민족의 체면이나 존엄이 어디에 있느냐. 참으로 서울땅에는 인류의 문명을 향하여 시대를 선도하는 민족을 이끌수 있는 성인이 없었더냐. …)
부지불식간에 마음의 한끝에 지금까지 억눌리고 속박되여있던 막연한 불안감이 무서운 분노가 되여 장대처럼 쭉 뻗쳐올랐다.
(양놈들! 더러운 놈들! 하필이면 이런 놈을 골라 민중우에 군림시켜 이 나라의 체모와 민족의 존엄을 욕되게 하다니… 쓸어버려야 한다, 이 두상태기부터! 다음차례는… 그래, 다음차례는 너희 미국놈들이다. 내 기어이 리승만을 옥좌에서 들어내고 그 다음에는 이 망조든 인간을 내세워 마음내키는대로 이 나라를 모욕하는 네놈들을 쳐몰아낼테다.)
두사람은 한참이나 뒤걸음을 모르는 하늘소처럼 주단우에 발을 묻고 한걸음의 드팀도 없이 맞서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타협도 없고 화해도 할수 없는 맹수들마냥 당장 상대를 물어뜯고 자빠뜨릴 기세로 적의와 분노가 펄펄 뛰는 사나운 눈에 서로 상대의 모습을 마치도 보복의 총탄을 재우듯 새겨넣고있었다.
《아침을 잘 먹고 갑니다.》
마침내 조봉암이 한마디 던지고는 주단우에 거연히 박고있던 발을 돌려 먼저 방을 나섰다.
리승만은 작별하려고 나오지도 않고 《흥-》 하는 코소리로 인사를 대신했을뿐이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있던 비서가 그를 안내하여 경무대의 철대문을 향하여 나란히 걸어갔다.
《조찬회동이 잘되였습니까?》
비서가 벙글써 미소를 짓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잘되다니?… 어떤 의미에서 말이요?》
조봉암이 불쾌한 어조로 되물었다.
《저… 글쎄요. 저도 딱히 조찬회동에서 무슨 문제가 의제가 되였는지 모릅지요.》
비서는 조봉암의 표정에서 조찬에서의 론의가 수나롭지 않았으리라는 예감을 하였다.
《잘되였소. 좋은 술도 한두잔 얻어마시고 배불리 먹기도 하고… 그러니 두루두루 찾아온 소득이 있다고 봐야지.
유감스러운것은 식탁에 된장국과 김치가 없는거요.》
조봉암은 장쾌하게 웃었다.
《거야… 리박사가 미국에서 지내던분이라 미국식음식문화에 젖어있어서…》
《미국식음식문화? 허허, 미국식이라… 그럼 정치는 어떤 식일가? 거기에도 미국식이라는 말을 붙이면 좋지 않을가? 하여튼 보람있는 아침이요.》
《그래요? 축하합니다.》
비서가 반죽좋게 인사를 하였다.
《축하? 허허허.》
조봉암은 쓰겁게 웃었다.
(이 사람은 무엇을 가지고 축하를 한다는건가?! 불맞은 메돼지상이 되여버린 자기 상전의 꼬락서니를 봤다면 이 사람은 아예 대경실색이 되였을걸.)
그러나 조봉암은 이날 아침에 경무대를 찾아온 걸음이 정 헛걸음같지는 않았다.
(초청에 응해준게 잘된것 같다. 그만하면 정 실리가 없는게 아니다. 리승만의 진의를 다시금 똑똑히 확인할수 있게 되였다. 이제부터 리승만이 어떻게 대결해오겠는지도 예상된다. 리승만의 장기집권야망에 대하여 재인식하게 된것도 성과이다. 리승만은 이 땅에서 명이 진할 때까지 영구집권야망을 절대로 버리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절감하였다. 그리고 리승만은 더 악랄하게 걸음걸음을 막아설것이다. 그놈은 그 어떤 흉악한 모살행위도 마다하지 않을것이다. 리승만의 로골적인 위협과 경고는 결코 빈말이 아닐것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선거전에서 절대로 물러설수 없다. 우리 역시 빈말을 하지 않는다. 더 굳세고 비장한 결사의 의지와 각오를 가지고 끝장이 날 때까지 싸워야 할것이다.)
조봉암은 세차게 흉벽을 때리는 감정을 사그라뜨리고 미래를 향해 의지를 가다듬었다.
《경무대가 과시 명소입지요?》
비서가 침중하게 느껴지는 조봉암의 기분을 가볍게 해주고싶어 화제를 돌리며 왼심을 썼다.
《그런가 보오.》
조봉암은 상대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한번 돌아보고난 사람들은 누구라 없이 입이 벌어집니다. 저기 경무대의 후원에 보름달을 띄워놓고 좋은 술 몇잔을 얼근히 걸치고 풍악속에 아릿다운 무녀들의 춤가락에 취해드는 멋이란 참으로 인생의 일미입지요.》
비서가 조봉암의 깊은 속을 속단하고 그의 허욕을 자극하고싶은듯 구성진 어조로 자못 신명이 나서 엮었다.
《허, 그래요? … 음, 그게 인생의 일미일가? …》
조봉암이 비서의 경망스러운 말을 받는데 대번에 눈빛이 서늘해졌다.
조봉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불현듯 기억을 더듬어 시조를 한수 읊었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천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진귀한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초불눈물 떨어질 때 백성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
권력자의 턱밑에 기생하여 환락에 물젖어있는 무위도식자에게 주는 조봉암의 의미심장한 대답에 비서는 헤식은 웃음을 지었다.
《제가 크게 실언을 하였나 봅니다.》
비서는 얼굴이 단박에 벽돌빛처럼 벌개가지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철대문옆의 접수실에서는 윤기중과 연경이와 김봉무가 그를 기다리고있다가 조봉암이 나타나자 마치도 사지판에서 풀려나온것처럼 반가워하였다.
《어떻게 되였습니까?》
윤기중은 쌍겹눈을 슴벅거리며 궁금해서 물었다.
《리승만은 회동내용을 둘만이 주고받은것으로 끝내자고 하였소. 나도 응했소. 약속을 지켜줍시다. 그러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알고 참고할 문제가 있으므로 이제 내 말을 듣고 더 발설하지 말았으면 하오.》
조봉암은 달리는 차안에서 조찬회동의 내용을 간추려 들려주었다.
조봉암의 말이 끝나자 차안의 공기는 한결 무거워졌다.
누구나 조봉암이 들려준 내용에서 앞으로 자기들앞에 다가들 시련들을 어렵지 않게 감수하고있었던것이다.
《허, 왜들 이렇게 시무룩해졌소? 그러면 뭐 그 령감한테서 고운 소리 나올줄 알았소? 등치고 간빼먹을 짓거리니
새겨둘게
없소.
참, 모두들 기다리느라고 배고프겠구만. 한꾸레미 싸가지고 나와야 되는건데… 미끼로 차려놓은것이니 풍성하기는 했어두 내 입에 붙는건 없더라구. 미국식음식문화라나, 허허허.》
말끝에 조봉암은 호걸웃음을 달았다.
그러나 조봉암이 일부러 터뜨려놓은 웃음은 자동차안의 침울한 분위기에 눌리워 이내 잦아들었다.
《그러니 그 두상이 선생님의 기를 꺾으려구 불러들였군요.》
윤기중이 여전히 심각한 빛을 띠운채 고개를 무겁게 가로흔들었다.
《정말 심사가 놀부같은 두상입니다.》
《언제는 그 령감 흥부였던적 있었소? 허허…》
신당동의 집대문에 이르렀을 때 다들 자동차에서 내리는데 연경이만은 그때까지 입을 꼭 다물고있다가 《아버지-》 하고 가만히 불렀다.
연경이는 모두의 눈길을 피하듯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옥문다.
《왜 그러느냐?》
조봉암이 차에서 내리다가 딸의 거동이 심상치 않아 물었다.
연경은 인차 말을 잇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마당에 들어서더니 뾰족한 구두코숭이로 마당의 흙을 허비기만 하였다.
《간사장이 있으면 안되겠느냐?》
조봉암이 딸의 거동에서 그 무슨 례사롭지 않은 일이 있는가부다 하는 직감이 들기는 했으나 짐짓 롱조로 물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 아닙니다.》
연경이가 아버지의 롱에 바빠맞아 윤기중을 돌아보며 낯이 새빨개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연경의 거동에 조봉암과 윤기중이 껄껄거렸다.
《난 아버지가 걱정스러워요. 그러다가 혹시…》
연경은 신익희가 급서했다는 소식을 렬차에서 들었을 때부터 속이 한줌만큼 졸아들었다.
그게 꼭 신익희의 참변으로 끝날 일 같지 않았다. 그래 지금까지 손톱여물을 썰고있었다.
연경이는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세우도록 기회를 보다가 잘 말씀드리라고 하던 언니의 간곡한 부탁을 명심하고있었다.
이제까지 말거리를 찾아내고 기회를 기다려왔다. 드디여 때가 온것 같았다.
신익희의 급서가 리승만일파의 작간에 의한 타살이라는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수 있다.
리승만이나 미국놈들에게 아버지는 신익희에 비할바 없이 원한을 사고있는 몸이다. 뿐더러 리승만에게는 아버지가 신익희보다 훨씬 무게가 가는 상대이다.
아버지가 이제 신익희를 대신한다면 그 결과가 너무도 명백하다.
오늘의 회동내용을 들어보니 리승만이 분명 아버지에게 최후통첩을 들이댄것이 틀림없다. 아버지는 물론 의연한 자세를 보였을것이다. 지금도 변함이 없다. 연경이는 그것이 더욱 불안스러워지는것이였다.
그는 차를 타고 오면서 내내 최금룡이 하던 소리를 생각하였다.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무모한 희생만 가져오는 무익한 힘의 랑비야.》
그때는 그 소리가 미웠다. 코웃음을 쳤다. 지금은 그 의미가 새롭게 실감된다.
모든것이 마치도 최금룡의 말이 옳다고 시인해주는듯 되여가고 있다. 이제라도 멈춰서는것이 옳지 않을가.
《걱정스럽다니? 뭘 걱정할게 있다구. 바빠맞은거야 리승만이지. 바빠맞았기에 날 찾은게 아니냐. 얘, 괜한 말 들고다니지 말아. 언니에게두 딴소리 말아.》
조봉암이 딸의 걱정을 모르는바가 아니였으나 무시하여버리고싶어 일부러 무뚝뚝하게 받아주며 걸음을 옮겼다. 리승만과의 조찬회동내용을 돌려야 괜히 사람들에게 위압감만 줄뿐이다.
《아버지!》
연경이 자기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귀밖으로 흘려보내는 아버지를 막아서며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통령자리보다 아버지가 더 귀중하다고 언니가 말했더랬죠?! 저도 이젠 언니의 뜻에 마음을 합치고싶습니다. 이제라도 후보사퇴를…》
연경의 간절한 부탁이다. 하지만 말을 꺼내놓고보니 그 의미가 너무 거창해서 자기 속도 졸아든다.
《뭐라구?!》
조봉암이 어성을 높이는데 윤기중이 얼른 그사이에 끼여들었다.
《연경이, 우리모두가 아버님을 지켜드리겠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
윤기중은 연경의 속을 가볍게 해주고싶어 일부러 정중하게 확약을 하였다.
《간사장아저씨, 해공선생님도… 민주당이 힘이 약해서 그렇게 됐습니까?!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으면서도 결국 해공선생님을 지키지 못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콩 볶아먹다 가마 깬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너도 신통한 말 하는구나. 리승만이 나더러 한냥짜리 굿하다가 백냥짜리 징 깨칠가봐 걱정일세 하더라, 허허…》
조봉암이 호걸스럽게 웃어버리자 연경이가 자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것이 안타까워 엉석부리듯 아버지의 팔소매를 잡고 몸을 흔들었다.
《아버진 그냥 롱이시네. 간사장아저씨, 저는 정말 가슴이 떨립니다.》
연경의 소리에 윤기중도 말문이 막힌듯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때 조봉암이 《음-》 하고 거센 코소리로 연경의 말을 가로챘다.
자기의 선거출마를 맏딸 효경이가 처음부터 반대한것은 조봉암도 리해하였다.
신변에 대한 념려때문이였다.
너무 무르고 심경이 섬약하기도 한 효경이로서는 그럴법한 일이라 조봉암은 크게 타내지 않고 들어만 주었다. 그리고 좋은 말로 타일러주었다. 그런데 자기의 선거출마를 가장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연경이까지 이렇게 기울어지니 조봉암은 속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굳건하던 성새의 한 귀퉁이가 와르르 허물어지는것 같다.
(결국 그렇게 대차던 연경이마저 겁을 먹은게 아닌가. 이러한 나약하고 위축된 정서가 당안에도 만연될수 있다. 누구인가 나서야 할 싸움이다. 한가정의 평온과 나 하나의 목숨이 귀해서 나서야 할 결사의 싸움터에서 물러선다면 이 땅에 변혁의 새시대는 언제 오며 통일조국은 언제 가야 이루어질수 있단 말인가.)
조봉암은 뇌리를 때리는 강한 충격을 느꼈다.
눈앞으로 려운형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려운형과는 상해에서 매우 절친하게 지낸바가 있다.
국제공산당의 원동지부 대표로 중국과 일본의 공산당지도인물들과 어울려지내면서 이른바 동방지역의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한다고 신바람나서 뛰여다니던 시절이였다.
원동지부의 조선담당 대표는 조봉암이였는데 그때 려운형이도 여기에 관여하였다.
어느날 려운형이 조봉암을 찾아와 느닷없이 조대표도 호를 가져야 되겠다고 하였다.
려운형의 뜻밖의 제의에 조봉암은 송구스러운 생각이 들어 겸양을 보이며 사양하였다.
《몽양선생님, 제가 무슨 큰 인물이라고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호를 따로 가지겠습니까.》
려운형은 일단 말을 꺼낸 이상 쉬이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려운형은 옳다고 생각한다면 절벽이 막아서도 밀고나가는 기질이였다.
《안될 말이요. 한갖 산골유생들도 호를 붙여 자기를 부르게 하는데 공산주의운동의 거물로 나선 조대표를 함부로 불러서야 되겠소. 내 생각에는 죽산이라고 부르는게 좋겠소. 여러 지기들도 찬성했소.
산우에 솟은, 아니 산마루에 우뚝 버티고 굽힘이 없는 왕대라는 뜻을 담고저 했소.》
《에? 선생님두… 제가 어떻게 산마루에 우뚝 솟은 재목감이 되겠습니까. 또 사실인즉 참대란 산기슭이나 마을들에서 숲을 이루고 자라지 않습니까?》
《알고있소. 허나 조대표는 어차피 기슭에서 무리속에 의지하여 례사롭게 살아갈 팔자가 아니요. 마루에 우뚝 버티고 서서 곧음을 버리지 않고 오가는 바람을 다 이겨내며 살아가야 할 운명이요.》
《헌데… 참대는 60년이나 혹은 120년이 지나서야 꼭 한번 꽃을 피우는데 그리고는 새 줄기를 이어주고 죽어버린다고 합니다.》
《허허… 그러니 죽산은 이제 빨라서 서른해 지나서야 자기 꽃을 피울수 있겠구만. 참대가 그렇게 줄기차고 이악한 노력으로 꽃을 피우고야만다면 그거야말로 조대표의 인생이요. 이보게 죽산! 우리 뜻을 크게, 빛나게 세워놓고 비바람, 눈보라 다 이겨내고 해밝은 세상을 향해 허리굽히지 말고 살아갑세. 용사는 싸우는 멋에 산다고 했어.
죽산, 전우들의 기대를 페부에 새겨주게.》
이렇게 되여 조봉암은 전우들속에서 죽산으로 통하게 되고 이제는 누구나 그를 가리켜 죽산이라는 호로 불러준다.
려운형은 그 시절에 조봉암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의 사상적지향과 인격과 장래에 대하여 그 가치를 무겁게 매겨놓았던것이다.
그리고 련련히 이어져온 그리고 또 이어져갈 모진 시련과 곡절에 대하여서도 예상하고있었던것이다.…
뜻하지 않게 그때 일을 돌이켜보던 조봉암은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죽산이라는 호를 받아안은 때로부터 30년이 가까워온다.
(그래… 난 죽산이다. 동지들이 그렇게 나를 불렀다. 민중이 나를 그렇게 불러준다. 바람새 어지럽다고, 역풍이 너무 모질다고 곧음을 버려서야 무슨 죽산이랴. …)
조봉암은 마치도 집회장의 연단에 나선듯 엄하고도 장중하게 거센 목소리로 딸의 간곡한 청을 꾹 눌러놓았다.
《안된다! 그런 소리 다시는 내앞에서 하지 말아. 후보출마는 그 누구도 흔들수 없는 당론이다.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느냐.
나에게는 너희 자매만이 아닌 민중모두가 소중하다. 민중이 지금 나를 부르고있는데 내가 제 명줄 귀한 생각부터 앞세울수 있느냐?! 내게는 민중이 목숨이다. 내가 민중을 내 목숨처럼 여기기때문에 민중도 나를 사랑해주고 따르는게 아니냐.》
《아버지!》
연경이 길고 새까만 속눈섭을 살풋이 내려깔았다. 그의 두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경아, 명심해라. 그건 리승만이 바라는거다. 리승만이 바로 그것때문에 날 불러들인거다. 아버지가 독재자의 위협에 민중을 배신했다는 말을 너도 듣고싶지 않겠지?! 죽산이라는 뜻 너도 알지?! 그걸 버리면 아버지는 영원히 패자로 되고만다.》
조봉암은 말했다. 그것은 자기의 가슴속에 다지는 엄숙한 맹세이기도 하였다.
(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