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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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조봉암도 리승만에게 환상을 가진적이 있었다.

리승만의 평생을 돌아보면 구접스러운 행보가 무수히 찍혀있는것이 틀림없기는 해도 기나긴 세월 《반일의 의지》를 표방하며 버티여온 정객이니 그것만으로도 존경을 받을만 하다고 너그럽게 봐주었던것이다.

조봉암은 해방직후에 가끔 세상이 돼가는 꼴이 걱정스러워 서울에 돌아온 리승만을 찾아가 정사에 관한 건의를 하면서 나름으로 변혁의 일가견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리승만은 《죽산이야말로 선견지명있는 이 나라의 동량일세.》하고 고개를 끄덕여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금방 서울땅에 《국회》라는 물건짝이 만들어지고 몇번 회의를 하고나서 리승만의 비서라는 사람이 당시까지만 해도 조봉암이 두 딸을 데리고 살아가던 인천의 소박한 단칸집에 찾아왔다.

한다는 소리가 이제 《정부》를 세워야 되겠는데 체신부나 농림부를 맡아달라는것이였다. 체신부 장관이라면 한직이요, 농림부 장관이라면 제일 골치아픈 자리였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도리질하였다. 리승만의 엉큼한 속내가 짐작되였던것이다.

리승만에게는 자기의 독립운동경력이 탐났을것이였다. 한생을 공산주의운동과 독립투쟁에 바쳐온 자신을 입각시켜 《거국적내각》이라는 세인의 평가를 받는것이 필요했으리라.

리승만에게 득점을 주는 일은 피하리라 결심하고 비서가 두번, 세번 끈질기게 찾아왔으나 매번 사양하였다.

리승만까지 찾아와 자리를 맡아달라고 혀끝에 침바른 말로 꾀이기도 하였다.

지어는 미강점군 사령관이던 하지까지 그를 만나 입각해줄것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은 립장을 바꾸었다. 차라리 한자리를 맡아가지고 정치의 소신을 펼쳐보는것이 민중을 위하여서도 그리고 자신의 리상을 관철하는데서도 리로울것이라고 타산이 섰던것이다.

리승만이 나의 몸값을 리용하려 한다면 나 또한 정략적으로 그걸 리용할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어느날 조봉암은 리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넌지시 조건부를 들이댔다.

《정 그러면 농림부를 주시오. 나야 농사군의 자식이고 농사군으로 살기도 했으니 그쪽이 좋을듯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이 코코에 사회개혁을 걸고들며 훼방을 하고있습니다. 이걸 막아줄수 있겠습니까?》

《소신껏 해보게. 거친 바람은 내가 막아주지.》

《좋습니다. 우선 토지개혁을 해야 되겠는데… 북에서는 이미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여 땅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습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 … 지주들이 제땅을 공으로 내놓으라면 소동이 일어날게 아닌가?》

리승만이 덴겁을 한듯 눈이 커져가지고 되물었다.

《예, 무상몰수, 무상분배올시다. 농민들이 한푼 저축없이 사는 판이라 돈으로는 땅을 살수 없고 나라에도 돈이 없는지라 지주들에게 땅값을 물수도 없습니다. 소동을 피우겠지요. 그까짓 온 남녘땅을 뒤져봐야 지주가 얼마 되겠습니까. 정 못되게 노는 놈은 저 흑산도 같은 정배터에 귀양보냅시다.》

《그건 미국사람들과도 합의를 봐야 되는건데…》

《아, 그 사람들 눈치볼거 없어요. 북당국은 토지분배를 한 덕으로 인구의 8할에 달하는 농민전체를 손쉽게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만 한다면 농민들이 리박사만세를 부를겁니다.》

조봉암이 이렇게 기름진 먹이를 슬쩍 던져주자 리승만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해보게.》

《다음문제, 농민들이 땅을 받아놓아야 몇해 못 갈수도 있습니다.》

《그건 왜?》

《땅은 있으나 종곡이 있나, 축력이 있나, 비료가 있나, 물값을 물수가 있나? 그러니 또 빚지기 시작할게구 몇해가 지나면 하는수없이 돈많은자들에게 토지를 팔아넘길겁니다. 그러면 토지개혁도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할겁니다.》

《음, 임자 말 듣고보니 그게 문제구만. 한데 그것까지야 나라가 맡아줄수 있나?!》

《맡아줘야 합니다. 토지개혁을 치르고나서 공동조합을 무어주면 됩니다.》

《공동조합? … 모여서 농사짓는다는거요? 그거야 로씨야 꼴호즈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힘을 합쳐 농사짓는다는겁니다. 뭐, 꼭 로씨야식이라고 할것두 없습니다. 우리 농촌에도 지난 시기 두레가 조직되여 품을 들이는 일을 공동으로 하여온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설사 로씨야것이라 해서 좋은걸 받아들이지 못할 리유도 없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농민들을 공동조합에 모이게 해놓고 비료도 주고 축력도 주고 물도 주면서 농사를 짓게 하면 농민들이 다시 지주의 손아귀에 잡히는 일이 없을겁니다.》

《음, 그렇군.》

《다음문제가 또 있습니다.》

《또? …》

《농촌에서 농민들을 계몽시키고 국가일에 참여하도록 하자면 무슨 대중단체를 무었으면 합니다. 이름은 뭐 농민회라든지 농가회의라든지 해가지고 뭉쳐놓으면 리박사께서도 덕을 볼겁니다.》

리승만이 세번째 제의에는 잠시 동안을 두고 생각을 굴려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덕을 볼거라는 말에 군침이 돌았으나 반대로 액운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던것이다.

조봉암이 장관감투 쓰고 제 터밭 가꾸는 일에만 신경을 쓴다면 장차 첫눈에도 일을 크게 칠 화상인 이 사람이 뒤날 겨루기가 숨가쁜 정치적적수가 될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리승만은 조봉암이 만들어놓은 터밭을 자기의 터밭으로 만들어버리면 랑패가 없을것이라는 타산이 서자 고개를 끄덕이였다.

《료량대로 해보게.》

좀 시들한 어조였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농림부 장관직을 맡겠습니다.》

이렇게 리승만에게 오금을 박고나서 받아쓴 장관감투였다.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국회》의석의 다수를 장악한 친일파, 지주당인 민주당이 제놈들의 지반을 뒤흔드는 지각변동과 같은 개혁을 지지할리가 만무하였다.

민주당의 중진들과 지주들이 매일처럼 조봉암의 장관방에 몰려들어 자기네를 말려죽이는 놀음을 즉각 중지하라고 협박하고 기물까지 부시며 란동을 부렸다.

그자들은 리승만이 둥지를 튼 경무대에까지 몰려가서 눈물을 쥐여짜며 애원하거나 《대통령》탄핵이라는 위협과 함께 일체 자금지원도 차단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면서 조봉암을 장관직에서 내쫓고 그가 발기한 법안들을 철회하라고 요구하였다.

끝내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물론 공동조합문제도 《국회》에 법안조차 상정시키지 못한채 리승만의 서류고에 들어가버렸다.

한편 우익보수세력은 조봉암이 공산당정책으로 사회의 적색화를 추진하고있다는 흑색선전을 미친듯이 벌렸다. 그자들은 조봉암의 일거일동을 눈에 쌍심지를 켜달고 감시하다가 당치않은 일들을 꼬집어내여 검찰에 상소한다, 재판을 한다 하며 그냥 들볶아댔다. 특히 그 시기 민주당의 실권자로 있던 고병직과 탁준의가 제일 악착하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농림부에서 상정시킨 법안을 기각시키기 위하여 결사적으로 날뛰다가 나중에는 조봉암에 대한 압살을 목표로 첫 포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걸고든것은 조봉암이 일제시기 공산주의자로 활약하였으므로 즉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하는 행정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것이였다.

여러달 끌어간 조봉암을 일방으로 하고 고병직, 탁준의를 타방으로 하는 론전은 해방전 조봉암의 공산주의적활동은 반일애국운동의 일환이였다는 법정판결로 끝났다.

두번째로 걸고든것이 국가자금을 개인주택건설에 리용했다는 터무니없는 죄였다.

당시 조봉암은 장관감투를 쓰기는 하였으나 당장 서울에 집을 마련할 돈이 없어 인천에 있는 단칸집에서 출퇴근을 하였다.

농림부의 직원들이 이건 농림부의 위신을 저락시키는 일이라고 의논을 하고 지금 살고있는 2층짜리 집을 마련하여주었다.

일본관리가 쓰고살다가 마사놓고 달아난 집을 시청을 통하여 넘겨받아 직원들이 모은 돈으로 수리하여 넘겨주었던것이다.

고병직과 탁준의는 이 일을 《국회》에도 상정시키고 검찰까지 동원시켜 뒤조사를 벌려놓았다.

나중에는 신문들도 이자들의 돈을 먹고 떠들어댔다.

그때 어느 한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고병직은 조봉암의 집이야말로 《고위국가공무원의 부정협잡의 상징》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주절거렸다.

당시 법무부 장관노릇을 하던 탁준의는 이것은 적어도 10년간의 금고형으로 응징해야 할 공무원의 비리라고 피대를 돋구었다.

종당에는 고병직이 거꾸로 법정의 피고석에 나앉아 명예훼손죄로 거액의 벌금을 지불하고 탁준의가 장관직에서 쫓겨나는 수치를 겪었다.

조봉암은 련속되는 사건에 휘말려들면서 더는 자신이 장관직을 감당할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승만이 당초의 합의를 줴던지고 민주당쪽으로 돌아앉는것을 보면서 리승만의 밑에서는 자기의 소신을 펼칠수 없다는것을 절감하고 장관감투를 벗어던지였다.

조봉암은 리승만의 힘을 빌어보려던 자기의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인차 소장파《국회》의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국회》부의장자리에 옮겨앉아 대중을 정치세력화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에 착수하였다.

세월이 바뀌고 리승만의 골수까지 물젖은 친미, 숭미사상과 권력만능의 체질을 파악하게 되면서부터는 령감에 대한 조봉암의 시각이 완전히 급변하게 되였다.

철저한 미국의 주구였던 리승만은 권력에 굶주린 소수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인채 독재의 화신으로 군림하였다. 민생고에 시달리는 민중은 아랑곳없이 다음기 집권을 노려 갖가지 강권과 거짓된 《민의》라는것까지 동원하였다.

리승만의 치사한 집권의지는 전쟁시기에 특히 극에 이르렀다.

1952년 리승만은 전례대로 한다면 《국회》를 통한 간접선거에서 락선되게 되여있었다.

당시 리승만의 폭정에 분개한 과반수의 의원들이 반리승만세력권을 형성하고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이렇게 되자 리승만은 임기만료를 8개월 앞둔 1951년 11월에 《대통령직접선거법안》을 만들어 불의에 《국회》에 제출하였다.

리승만이 제기한 법안은 재적의원 163명가운데서 찬성 19, 부결 143, 기권 1이라는 압도적인 표결로 부결되였다.

집권위기를 느낀 리승만은 《공산게릴라》가 부산에 침투했다는 요언을 퍼뜨려놓고 《국회》의원 40여명을 반정부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뻐스에 태워가지고 강제로 끌어갔다. 다른 20여명의 의원들은 개별적으로 구류하였다. 나머지 반대파의원들은 뿔뿔이 몸을 숨겨야 하였다.

《국회》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였다.

《국회의사당》이라는 부산시청은 《말벌떼》, 《백골단》, 《민족자경단》 등의 이름을 가진 괴한들에 의하여 포위되였다. 련일 리승만이 불러들인 지지세력이 부산시내를 휩쓸고 여기에 김창룡의 특무들과 헌병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광기를 부렸다.

이 시기 《국회》부의장노릇을 하던 조봉암은 더는 참을수 없어 리승만을 찾아갔다.

《어찌 이럴수 있습니까? 국회의원의 신변은 신성불가침입니다. 이건 어느 나라에서나 법으로 보장되고있는 민주주의의 초보적인 도덕입니다.

당장 중지시켜주시오. 헌병나부랭이들이 의원들의 턱수염을 뽑고 따귀를 붙이는 부도덕을 리박사가 어찌 묵인할수 있습니까?!》

조봉암이 절통해서 항의를 하자 리승만은 창밖을 내다보며 천연스럽게 내뱉았다.

《국회에서 이제 대통령을 뽑으려 한다면서? … 임자가 밀어주는게 아닌가? 아니면, 임자가 나서고싶어 그러나? 백골단 젊은이들이 나를 지키느라고 의로운 일을 벌린다고 하더구만.》

《그것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설혹 대통령을 반대하는 일을 하더라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 한 국회의원들을 함부로 철창에 끌어가고 고문하는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라를 위하여서도, 리박사를 위하여서도 그런 일을 눈감아주는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못됩니다. 후세의 손가락질이 무섭지 않습니까? 외손벽은 못울고 한다리론 못 간다고 했는데 이런저런 리유로 주변사람들을 다 쫓아버리면 누구하고 정사를 하겠습니까?》

《임자 걱정할것 없네. 그리구 알아두게. 지지도 반대도 민주야. 젊은이들이 반대세력을 반대하여 자기의 민주권리를 행사하는데 민주의 수호자인 이 우남이 거기에 개입하여 삿대질까지 해서야 되겠나? 자네 심중은 알겠네만 그리 알고 물러가주게. 말이 많으면 쓸말이 적은 법일세.》

이 일을 겪으면서 조봉암은 더는 리승만에게 나라도 겨레도 맡길수 없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독재자를 몰아내지 않고서는 절대로 흥하고 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를 기대할수 없다고 강심을 먹었다. 이제부터는 독재자를 몰아내는 싸움에 뛰여들것을 맹세다지였다.

결국 리승만이 미국의 비호밑에 구축한 반공체제란 미국의 리권과 가부장적인 리승만의 절대권력을 지키기 위한 폭압체제에 불과한것이였다.

개인의 권력과 영달을 위함이라면 그 어떤 악행도 수법도 내키는대로 벌리는 독재자…

조봉암에게 그날에 비쳐진 리승만의 몰골은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있다.

끝내 리승만이 제안한대로 《대통령직선제》개헌이 통과되였다. 그에 따라 52년에 선거가 진행되였다.

조봉암은 《국회》에서 리승만을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할 기회를 놓친 이상 민중의 반대의사를 묶어 축출하는것이 유일한 방도라고 판단하였다.

어차피 리승만과 맞세울 후보를 찾아내여 그를 중심으로 대중을 뭉쳐놓아야 하였다.

이것은 성패를 떠나 리승만일파의 전횡을 견제하는데서도 커다란 경종이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난감한 일에 부닥쳤다.

정계에서 기라성같은 존재라고 공인되여오던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알고보니 하나같이 속대무른 겁쟁이들이였던것이다.

조봉암은 수하비서인 천령배를 달고 처음에는 《국회》의장을 하는 신익희를 찾아가 자신이 선거위원회를 조직하여 밀어주겠으니 후보로 나서달라고 부탁하였다.

신익희는 리승만의 독재에 눌려 손을 내저었다.

《대세는 기울어졌네. … 날 살얼음낀 늪으로 몰아가지 말게.》

조봉암은 게걸음을 치는 그에게 더 권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리시영을 찾아갔다.

리시영은 리조 중엽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리항복의 후손으로서 리조 말엽에 외부교섭국장, 평안남도 관찰사, 한성재판소 소장을 력임했던 인물이였다.

그는 1910년에 합방이 되자 독립의 꿈을 안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림시정부가 설립될 때 초대법무장관으로 들어앉아 독립운동에 헌신해왔었다.

해방이 되자 김구와 함께 귀국하여 초대《부통령》으로 나섰던 사람이였다. 그러나 리승만과 번번이 마찰하고 분규를 일으키다가 사표를 던지고 물러나서 초야에 묻혀 대세를 관망하고있었다.

야권을 대표하여 나서라는 조봉암의 간곡한 권고에 그 역시 겁부터 집어먹고 뒤걸음질하였다. 일생토록 갖은 세파를 넘어온 그조차 로년의 명이 귀해서 피하였다.

리승만과 대결을 할만 한 인물을 찾아 조봉암은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였다. 허리부러지도록 절을 하며 청을 들여보았다. 리승만의 칼날이 무서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고 게걸음질이였다.

사실 당시 리승만과 선거에서 맞서는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결단이 있어야 하였다.

리승만에 대한 도전은 반역이요, 불만은 《불충》이요 하는따위의 리승만《신화》와 독재에 정계가 위압되여있던 시절이였다.

리승만과 맞세울 야권의 지도인물을 끝내 찾아내지 못한 조봉암은 드디여 자기가 나서는수밖에 없다고 주먹을 부르쥐였다.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그의 발꿈치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으나 단연코 뿌려던졌다. 신창균이 지지하였다.

조봉암은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출마를 선언하였다.

《나는 대통령이 될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번 선거에 리승만과 대결할것을 선포한다. 그러면 승산없는 싸움에 왜 뛰여드는가.

그것은 리승만과 싸울 사람조차 없다면 우리 사회가 너무 초라하기때문이다.

리승만은 지금 미국에만 아부하면서 민중에 대한 책임의식이 완전히 결여되고 너무 변질되였다. 따라서 행정수반으로서 더는 적합하지 않다는것이 명백해졌다.

굴종과 굴욕이 의무로 되여가고있는 우리 사회에 대하여 민중은 거부하기 시작하였다.

리승만에 대한 민중의 실망을 누구라도 대변하여 리승만과 미국에 경종을 울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후보에 나선다.》

이로써 조봉암이 종신유일후보로 년대를 넘겨가며 무난히 《대통령》옥좌에 앉아있으려고 무사태평한 꿈을 꾸던 리승만의 야망을 분쇄하여버린것이다.

조봉암의 선거활동은 첫걸음부터 시련이였다.

리승만의 철권통치의 수법과 정치보복행위를 체험한 정계인물들이 조봉암을 마음속으로는 적극 지지하고 그의 용감한 배짱에 탄복하였으나 그의 진에는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조봉암의 주변에는 신창균, 우달수만이 붙어다니며 발이 닳게 뛰여다녔다.

다행으로 젊은 의원들중에서 가장 용기있고 영향력이 있던 윤기중이 찾아왔다. 다음으로는 리승만의 측근인물로 앞서렬에 올라있던 금진호가 리승만의 무지와 전횡에 신물이 나서 조봉암의 수하에 들어섰다.

금진호라는 인물은 평양에서 민주당 당수로 있던 조만식의 심복으로 서울에 그의 대표로 파견되여왔었다. 그런데 리승만이 미국놈의 주구로 설치는데다가 영구집권야망에 미쳐 민족을 헤여날수 없는 생지옥에로 끌고 가는 매국행위에 더는 동조할수 없어 단연코 리승만의 턱밑에서 반기를 들고 빠져나왔던것이다.

마침 《대통령선거》직전이라 금진호는 주저없이 조봉암을 찾아와 조봉암선거본부의 부책임자로 들어앉았다.

이들이 찾아들자 련이어 제 소리 낼만 한 담기를 가진 젊은 정치인들이 여러명 조봉암의 선거사무소문턱을 넘어섰다.

선거선전 한번 크게 해볼수도 없었지만 리승만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여 용감하게 나선 그들의 진출은 남녘사회를 뒤흔들어놓았다.

선거는 리승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벌써 이때 세상여론은 처음으로 조봉암은 득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패했다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렸다.

그보다 더 소중한것은 독재의 칼부림으로 동면에 빠져들었던 주권자로서의 민중의 의식이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것이였다.

조봉암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였다.

선거로 인한 피해는 이미 예상했던대로 참혹하였다.

경쟁자없는 선거를 꿈꾸며 도전의 자그마한 요소라 할지라도 반역으로 몰아대는 독재자가 공공연하게 반기를 들고나선 조봉암과 지지자들을 곱게 놔둘리가 없었다.

미국의 절대적인 후견을 받으며 봉건군주의 체질로 굳어진 리승만에게는 공개적인 비판이나 건전한 정책적의견을 접수할만 한 리성이나 지성이 결여되여있었던것이다.

선거를 전후하여 리승만은 곧 정치적반대파들에 대한 비렬한 보복을 감행하였다. 조봉암의 가장 측근인물인 천령배부터 선거전에 벌써 국제공산당프락찌야사건의 주범으로 철창으로 끌어가 법정에 내세웠다. 선거본부 부책임자로 맹활약을 했던 금진호도 간첩으로 몰아가지고 재판도 없이 학살하였다.

금진호는 《조봉암고사작전》으로 헌병대지하감방에 끌려가 불귀의 객이 되고만 첫 희생자였다.

국제공산당프락찌야사건이 그 의미가 흐지부지되자 리승만은 련이어 강원도 속초에 있던 1군단 참모장과 륙군정보국장까지 조봉암과 련결시켜 동해안반란이라는 사건을 꾸며냈다. 그 골자는 리승만이 1군단을 시찰하는 기회에 군단참모장이 직접 리승만을 저격사살하고 일부 병력을 륙군정보국장이 지휘하여 리승만이 도사리고있던 부산의 도지사관저를 점령한 후 조봉암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것이다.

사건이 군법회의에 넘어가 과장, 날조로 확인되였으나 륙군정보국장은 철직되고 1군단 참모장은 심문도중에 절명되였다.

리승만은 이일저일 뒤틀려지자 륙군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조봉암을 완전히 말살해버릴데 대한 특별지령을 이를 갈면서 떨구
었다.

세월을 넘어온 리승만의 악착하고 검질긴 《조봉암고사작전》은 이때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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