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2

 

연경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9시 30분이 다되였다. 만나자고 약속한 시간보다 30분이 넘었다.

연경은 커다란 눈을 두릿두릿 굴리며 아름드리 로송이 꽉 들어찬 수림속을 둘러보았다. 시간개념이 철저한 최금룡이 보이지 않는게 이상하였다.

솔숲이 아침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소연한데 이따금 짹짹거리는 청서의 울음소리가 귀가 따갑게 들려올뿐이다.

연경은 맑은 공기를 탐스럽게 마시며 그냥 숲속을 훑었다. 숲에서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바위를 찾아앉은 연경은 손가방에서 거울과 얼레빗을 꺼내 숲바람에 흩어진 함함한 머리를 비다듬으며 금룡에 대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최금룡은 이태전부터 아버지의 서기 겸 신변호위원으로서 연경이네 집에서 아예 기숙을 하면서 한집안식솔처럼 살아왔다.

그 나날에 최금룡은 아버지로부터 전도유망한 정치지망생으로 촉망을 받아왔다. 연경과 최금룡사이의 우정도 사랑으로 소중한 싹을 틔우고 해를 넘기여왔다. 올해 설날에는 친지들의 축복까지 받았다. 그들은 이번 선거나 치르고나서 제꺽 식을 올리기로 두집사이에 약조가 되여있었다.

최금룡은 원래 고려대학교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리승만의 경무대비서실에 배치되여 대학교의 학우들속에서 커다란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던 청년이였다.

다부지게 생긴 보통의 키꼴에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준수하여 첫인상에 뭇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다가 대학시절에 벌써 태권도사범의 용력까지 갖춘터라 그야말로 지, 인, 용이 겸비된 사내라고 아버지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칭찬한다.

아버지가 더욱 각근한 정을 주는것은 최금룡이 바로 오랜 지기인 최기오의 외아들이라는데도 있었다.

최기오는 아버지와 일제때 사회주의운동을 함께 하여온 인물이다. 해방후 박헌영이나 리승엽이와 같은 남조선공산당 지도인물들의 로선과 행실에 환멸을 가지고 정치운동에 담을 쌓기는 했으나 아버지와는 의연히 속대사까지 깊이있게 나누는 지인이였다.

벗을 하나 몸가까이 두는데 천금만금도 아끼지 않는 아버지는 이모저모로 정이 가고 믿음이 생기게 하는 청년을 받아놓고 큰 호박이 제발로 굴러들었다며 흡족해하였다.

최금룡이 리승만의 비서실에 갔다가 조봉암에게로 돌아온데는 까닭이 있었다.

리승만과 친교가 있는 고려대학교 총장의 특별천거에 따라 경무대(리승만이 기거하던 곳, 뒤날에는 청와대라고 이름을 바꿈.)에 갔을 때 리승만 역시 최금룡의 례모단정한 인상과 언행에 첫눈에 반해버렸다.

리승만은 청년의 든든한 어깨를 어루만져주기까지 하며 비서실에서 심부름을 시켜보라고 일렀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다시 들어보고나서 대뜸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말아세우고 도리질을 하는것이였다.

《자네 이름이 최금룡이라 했지… 그러니 룡꿈을 성사시켜보자고 경무대에 들어섰다는거겠다… 그 야망이 발칙하다. 물러가!》

느닷없이 화증머리를 터치는 리승만앞에서 최금룡은 처음에는 무턱대고 죄스럽고 그리고 어리벙벙해졌다. 룡꿈이란 무슨 황당한 궤변이냐.

청년의 리상이란 사회를 위하여 유익한 인간으로 살려는것이였다. 민중의 사랑받는 아들로 평생에 사회적변혁의 뜻을 두고 분투하는것이였다.

그러나 그의 총명한 두뇌는 인차 리승만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아연실색하여졌다. 리승만의 수작이야말로 너무나 터무니없는 생트집이였다.

금룡이라는 이름을 뜻풀이해보면 금빛룡이라는 말이다. 헌데 예로부터 임금들이 정사에 나설 때면 발가락이 다섯개 달린 룡을 수놓은 곤룡포를 입고 왕의 존엄과 위세를 돋구어왔다고 한다. 임금들만이 룡을 수놓은 황금빛의 옷을 걸칠수 있었다. 리승만은 최금룡의 이름에서 대뜸 자기의 권력에 대한 도전자를 찾아낸것 같은 이상야릇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이 그를 자기 주변에서 멀리 쫓아버릴 리유로 되였다.

선뜻 믿기 어려운 늙다리통치배의 괴이하기 그지없는 속궁냥에 처음에는 리승만특유의 유모아가 아닐가 하여 고개를 기우뚱거려보았다.

리승만의 어리석은 수작은 롱도 아니요, 한마디 던져본 실언도 아니였다. 리승만은 자기에 대한 그 어떤 사소한 도전에도 신경을 도사리고 즉시에 무자비하게 짓밟아온다. 리승만은 자기의 예감에 대하여 언제나 절대시하여왔다. 특히 흉조가 비낀 꿈을 꾸거나 그 어떤 불길한 《계시》를 받을 때에는 고뇌를 썩여가며 안달아 한다. 그것을 들어내기 전에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주변사람들을 볶아댔다. 이렇듯 괴벽스러운 리승만이 끌끌한 청년의 외모에 욕심은 동한다 해도 최금룡의 이름에서 상서롭지 않은 느낌을 받은 이상 곁에 두자 할리 만무했다.

리승만은 최금룡을 천거한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어데서 이따위 《왕권탐위분자》를 보냈느냐고 야단질까지 하였다.

최금룡이 리승만의 턱밑이 인간오물들이 모여드는 시궁창이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총장의 각별한 호의를 받아든데는 그나름으로의 리유가 있었다.

대학총장은 정치가로서의 장래가 촉망되는 최금룡에게 정치 1선에 나서려는 인간은 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도 가져봐야 한다면서 경무대비서실에서 젊은 인재를 찾고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떠밀어주었던것이다.

최금룡도 그 말이 그럴상싶었다. 그는 더구나 민중의 강한 지탄을 받고있는 리승만의 가까이에서 리승만의 실체를 속속들이 투시해보고싶었다. 이 나라 정치권의 진면모를 그 심부에서 낱낱이 파헤치고싶었다. 그래서 총장이 후하게 써준 소개신을 받아쥐고 경무대의 대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보았던것이다.

최금룡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서울정치권에 몸을 담아보려는 인간이라면 군침을 흘리는 자리를 박차고 흔연히 돌아섰다.

그 얼토당토않은 일을 겪으면서 최금룡은 항간에서 돌아가는 리승만의 독재와 로망과 봉건적악습에 대한 무수한 설들을 똑똑히 확인할수 있었다. 리승만을 한시바삐 경무대에서 들어내야 민중이 살고 나라가 허리편다는 리유 하나를 더 새겨넣게 되였다.

독재에는 도덕성과 문명이 결여되기마련이다. 도덕성을 잃은 권력, 문명을 잃은 권력은 절대로 시대에 따라설수 없다는 어느 책에서 읽어봤던 구절을 떠올리며 최금룡은 지체없이 경무대를 떠났다.

총장은 리승만의 터무니없는 궤변에 쫓겨나 벌쭉벌쭉 웃으며 되돌아온 최금룡을 세워놓고 제 생각에도 리승만의 트집거리가 어처구니가 없어 령감이 로망든게 틀림없다며 한참 폭소를 터뜨려놓았다.

최금룡은 대학교 총장에게서 물러나자 곧바로 서울시의 동남쪽변두리에 있는 성동구의 신당동으로 향했다. 신당동에는 당시 리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도전자로서 서울정계 반체제세력의 사령탑으로 눈길을 모으고있던 조봉암의 집이 있었던것이다.

그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 육중한 대문을 열고 그를 처음 맞아준것이 바로 연경이였다.

《아니, 선배님이 어떻게? …》

연경은 선통이 없이 불쑥 나타난 면목이 있는 최금룡을 보자 까닭없이 두볼이 새빨개지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고려대학교를 한해차이로 다닌 선후배사이였다.

막역한 친구로 오랜 세월을 누벼온 아버지들의 친교로 해서 그들은 어릴 때부터 가끔 어울려왔다.

대학시절에도 비록 연경은 정치과에서, 최금룡은 법과에서 공부하고 학년도 달랐으나 최금룡이 대학교의 학생회장으로 활동하고 연경이 역시 학생회의 핵심운동원이였던 관계로 해서 가까이 지내왔었다.

최금룡에게 있어서 키넘는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신당동의 2층집은 언제나 각별히 정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곳이였다. 어린시절에는 갈적마다 반기며 쥐여주던 사탕곽을 그려보며 동심에 젖어 아버지의 손목을 잡고 찾던 인정많은 집이였고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관여하면서부터는 사회변혁의 리상을 꽃피울수 있는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조봉암의 집이여서 민주와 진보의 성지처럼 돋보이던 곳이였다.

연경의 안내를 받아 조봉암의 면담실에 들어선 최금룡은 단도직입으로 찾아온 사유를 밝혔다.

《선생님, 최기오의 아들 최금룡입니다. 저를 슬하에 받아주십시오. 선생님의 큰뜻을 받들어가겠습니다.》

《오, 임자가 최기오의 아들인가? 세월이란 류수와 같다더니 끌끌하게 번졌군.》

조봉암은 혈기와 열정이 넘쳐나고 결패가 엿보이는 친구의 아들을 대견한 눈으로 여러번 오르내리훑었다.

인사를 받아본지 여러해가 흘렀는데 참으로 몰라보게 달라진 친구의 아들을 보자 조봉암은 두눈섭사이에 깊은 골이 패워 첫인상에는 매우 엄해보이는 둥글넙적한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담았다.

조봉암은 인차 고개를 끄덕여주지는 않았다.

그는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더니 심각한 어조로 그의 말을 시정시켜주었다.

《나의 뜻만이 아닐세. 민중의 위업일세. 그리고 날 따라나서는 길은…》

조봉암은 이렇게 한마디한마디에 힘을 주어 무겁게 이어가다가 그 어떤 추연한 회억에 잠겨들어 청년의 어깨너머로 창밖을 내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조봉암은 자기 수하에 이렇게 제발로 찾아들었다가 뜻을 따라 뜻을 지켜 비명에 숨졌거나 지금도 족쇄를 차고 철창속에 있는 지사들을 생각하였던것이다.

조봉암을 찾아들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리승만일파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인 피해를 받았거나 감옥살이를 하였고 지금도 무시로 신변의 위협과 생계에 장애를 받고있다.

조봉암은 큰뜻을 품고 자기에게 찾아들었던 지사들이 비명에 숨지거나 권력의 핍박을 받는것을 목격할 때마다 썩어빠진 리승
만《정권》을 어서빨리 쳐갈겨야 되겠다는 의기를 더 굳건히 다지면서도 그 의롭고 혈기넘치는 애국지사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을 두고 통탄해마지 않아온다.

그런데 필시 범상치 않아보이는 또 한명의 젊은이를 수하가까이에 받아두었다가 또 쓰라린 가슴을 허벼뜯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우려감을 금할수 없는것이였다. 더구나 친구의 아들이라는데서 생각이 깊어졌다.

욕심은 나면서도 선뜻 결단을 내리기 힘들어하는데 그때까지 아버지의 안색을 긴장하게 살피던 연경이가 귀속을 간지럽히며 속살거렸다.

《저 선배가 태권도 4단이라나요. 난 저 선배를 나의 무술교관으로 모실래요. 받아들여요.》

조봉암은 둘째딸의 왕청같은 청탁에 소리내여 웃고말았다.

그러지 않아도 연경은 방과후이면 때없이 닥쳐드는 정치적적수들의 모해와 폭력배들의 망나니짓으로부터 아버지를 보호할수 있는 신변경호도 장차 맡아하겠노라며 서울 장충동에 있는 무술관으로 부지런히 다니고있다. 거기서 요새는 서울에 한창 류행처럼 퍼지고있는 태권도를 배운다고 한다.

날아드는 총탄앞에서 연약한 처녀의 손칼재주가 무슨 방패가 되련만 그 마음이 기특하였다. 마음씨가 착하고 어진 맏딸과는 상반되게 기질이 강하고 세찬 둘째딸의 성격에도 어울려 조봉암은 지금껏 모르쇠를 해오고있다.

그런데 그걸 턱에 걸고 총각을 두둔해나서니 웃음을 터뜨릴수밖에 없었다.

최금룡도 연경의 청탁에 멋적어져서 씩 웃었다.

연경이 당자도 자기가 얼결에 꺼내놓은 말에 얼굴이 온통 잘 익은 사과빛으로 되여버렸다.

뒤날에 최금룡은 드문히 이때 일을 거들군 하였다.

《나를 붙잡은 리유가 고작해서 태권도사범이라는거였나?!》

《그래도 그 리유때문에 실직을 면하지 않았나요.》

그때마다 연경은 생긋 웃으며 이렇게 퉁을 준다.…

조봉암은 다짐을 두듯 이런 말부터 던져놓았다.

《고행길일세.》

《압니다. 죽음도 불사해야 하는…》

최금룡은 기다리기나 한듯 선뜻 대답하였다.

《허허… 각오하고 왔군. 허나 그건 영광스러운 헌신일세. 진보의 력사는 그러한 헌신의 대가로 마련되지.》

《그래서 선생님의 평생을 따르렵니다.》

역시 최금룡의 대답은 거침없고 단호하였다.

《허허… 나의 평생을 반복해서야 안되지. 그건 일고의 가치도 없네. 나의 평생이란 고난과 좌절, 뼈아픈 실책과 후회의 끊임없는 반복과 교차였지. 한걸음의 전진을 위해 흘린 피와 뿌린 땀이 너무도 많았어.》

《압니다. 저는 선생님의 평생을 거울로 삼고 실패없는 인생길을 탐색하겠습니다.》

안팎으로 다져진 최금룡의 그 대답이 조봉암을 더욱 감동시켰다.

《아버지와는 합의가 되였나?》

《아직은… 그러나 제가 선생님의 슬하에 들어선다면 저의 아버지도 기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하, 그건…》

《저도 압니다, 아버지는 선생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였다는것을. 그러나 저의 아버지도 선생님을 예나제나 사랑하고 선생님의 뜻을 존중하고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야 한다고 늘 말씀하십니다.》

《그래?! … 젊은이, 우린 아마도 좋은 친구가 될것 같애. 좋네. 그럼 어디 함께 풍랑을 맞받아 노를 저어보세.》

조봉암은 흐뭇한 미소를 넙적한 얼굴 가득히 담고 그의 단단한 잔등을 큰 손으로 투덕거려주었다.

온몸에서 약동하는 담찬 기백과 말마디에 고즈넉이 깃들어있는 정숙한 멋이 조봉암의 심장의 벽을 울렸다.

이렇게 되여 최금룡은 조봉암의 개인사무소격인 집에서 파수 겸 련락관계를 맡아보다가 지난해에 진보당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되고 당의 조직기구를 완비하기 위한 투쟁이 본격화되자 문건그루빠에 망라되여 조봉암의 사업에 깊숙이 발을 잠그게 되였다.…

시간이 이슥하도록 최금룡이 나타나지 않자 연경은 골이 났다. 그는 거울과 빗을 손가방에 넣고 잠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짜증난 어조로 소리쳤다.

《금룡씨! 어디 숨어있어요? 어서 나와요.》

그러자 정말 숲속에 숨어있었던듯 연경의 바로 등뒤에서 나무가지 밟히는 소리가 나더니 보통키의 사내가 땅에서 솟아나듯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내는 약이 오른 처녀를 보며 히쭉 웃고나서 롱담부터 했다.

《소리치지 마오. 좋지도 못한 목청, 그렇게 청을 돋구니 숲에서 때아닌 게사니소리 듣는것 같구만. 기분나빠.》

《언제는 종다리 봄노래하는것 같다더니 이제는 게사니예요?》

처녀의 얼굴이 순간 성냥을 그어댄듯 눈부시게 환해졌다가 이내 밝은 빛이 꺼져버렸다. 일부러 매운 독을 써보는것이다.

총각은 연경의 변덕과 투정에 접하자 장난기짙은 얼굴에 정을 고이며 소리내여 웃었다.

《하하… 이건 도무지 가량이 없어. 그저 요즘은 나하고 해보지 못해 양양하니. 만나기만 하면 고추물 한바가지 들씌우지 못해 안달이구.》

처녀의 싱싱한 멋과 향기에 쉽게 취한 최금룡이 반죽좋게 너들거리자 연경의 목소리가 또 커졌다. 지어내는 얼뜬 표정에 골이 났던것이다.

《불집은 누가 쑤셔놓구 이제 와서는 시치미를 뚝 떼는거예요?》

《아이구, 쐑소리에 화약같은 그 성미… 갈데 없는 게사니라니.》

이렇게 애정과 해학으로 기지있게 처녀의 성깔드센 공세를 받아주는 사내의 장난기어린 목소리는 무척 평온하고 서글서글하다. 마치도 쏟아지며 소란을 피우는 소낙비를 묵묵히 받아주는 대지라 할가, 요동치는 구름장을 끌어안고있는 하늘이라 할가, 오가는 눈바람에도 거연히 솟아있는 바위라 할가.

만나자바람으로 토달거리고 골이 나서 씨근거리는 처녀를 정으로 따스히 품어주고 느슨하게 웃는 사내의 그 모습이 잘 어울렸다.

《좀더 소리쳐봐. 목청을 다듬는데는 수림속이 그저그만이라나. 왜냐하면 수림속에는 오존이라는 인체에 좋은 원소가 많아 페를 좋게 해주기때문이지. 나도 회장노릇할 때 여기 와서 구호도 웨쳐보고 연설하는 련습도 자주 했어. 연경이는 좀 음정을 높이면 쐑소리가 나오는데 이게 청중의 귀맛을 나쁘게 자극할수 있거던. 다시 더 크게 소리쳐봐.》

한껏 기가 오른 처녀의 분을 믿음과 사랑으로 무랍없이 기꺼이 받아주는 최금룡의 그 태평한 타이름에 연경은 더욱 약이 오른듯 발을 구르며 소리를 높였다.

《오존? … 쐑소리? …》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던 연경이는 최금룡의 설레발에 피씩 웃어버렸다.

《보라, 웃으니깐 얼마나 보기 좋아. 하지만 명심해. 그런 웃음은 아무곳에서나 누구에게라 없이 함부로 던져주는게 아니야. 사내들이란 어리석어서 다른 색갈의 신호로 접수할수 있으니깐.》

《뭐예요? 호호호…》

그만에야 처녀는 깔깔 소리내여 웃었다. 구름이 끼였던 처녀의 얼굴에 꽃다운 미소를 피워올리게 하고야만 최금룡이도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듯 허리를 젖히며 즐겁게 웃었다.

둘은 그렇게 수림속에서 한바탕 들썩하게 웃었다.

최금룡이란 사내는 언제나 그랬다.

연경이는 사납게 뒤발질을 하며 좀체로 길들지 않는 망아지같은데가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 천성이 고지식하고 유순하지만 옳다고 확인되면 벼랑도 들이받고 나가는 세찬데가 있다. 아니라고 돌아서면 아무리 끌어도 두발을 떡 버티고만다.

그래 슬하에 자매를 두고 살아온 아버지는 맏딸 효경이가 이쁘고 아기자기한 봉선화라면 둘째딸은 찬바람, 비바람도 즐겨맞는 들국화같다고 하면서 누굴 닮아 저런 남자번지개가 조씨가문에 삐져나왔는지 모르겠다고 이따금 웃기도 한다.

그러면 연경이도 입술을 내밀고나서 기꺼이 대답한다.

《죽산 조봉암선생을 닮았지요. 아버지는 제 나이에 벌써 감방에서 왜놈들과 누가 질기나 경쟁을 해서 이기지 않았나요.》

둘째딸의 당돌하고도 의미있는 대꾸질에 아버지는 《어허, 우리 집 둘째따님과의 경쟁에서는 내가 졌다.》 하며 혀를 내두르군 하였다.

일제때 그런 일이 있었다.

3. 1인민봉기때 아버지는 고향땅인 강화도의 사람들을 휘동하여가지고 만세시위를 벌리다가 서울감옥에 끌려갔었다.

아버지는 감방안에서 독립운동소식에 접하면 온 감옥이 들썩하도록 만세를 불렀다. 뿐더러 왜놈들이 수인들을 학대하면 감옥문을 두드리며 소동을 부리였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고문장으로 끌려가서 가죽채찍에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군 하였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그냥 독립만세를 웨쳤다.

한번은 간수부장이라는 놈이 매질을 시작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야, 이놈아! 만세 한번에 매 한대다. 네놈이 얼마나 견뎌내나 어디 보자!》

그 소리를 제꺽 받아문 아버지가 손을 허리에 얹고는 눈빛을 번뜩거리며 맞고함을 질렀다.

《정말 나하고 누가 질기나 해볼셈이냐?!》

《그럼, 만세 한번에 매 한대!》

《약속했다! 만세 한번에 매 한대다. 때려도 기운 다해서 때려라!》

《자식, 말이나 많다. 어디 계속 소리쳐봐라!》

《좋다! 어디 누가 못 견디나 보자!》

이렇게 되여 채찍을 잡은 왜놈과 아버지사이에 《질기기경쟁》이 시작되였다.

이 소식이 순간에 퍼져 그들의 경쟁구경을 하려고 숱한 간수들이 고문장으로 욱 밀려들었다.

드디여 간수부장의 매타작이 시작되였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조선독립 만세!》 하고 소리치고는 《만세, 만세, 만세…》 하고 연거퍼 목청껏 웨쳤다. 백번을 웨치고나서 왜놈간수부장을 위압적으로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자, 어디 더 쳐봐라! 백번이다. 백번을 쳐봐라. 똥집기운까지 다 짜내서 쳐보란 말이다. 조선이 이기나 왜나라가 이기나 겨루어보자! 자, 쳐라!》

왜놈간수부장은 악악 소리를 내지르며 매질을 시작하였다. 스무대를 넘기자 그놈의 고함소리에도 기운이 빠지고 매질에도 힘이 없어졌다.

구경하던 왜놈간수들이 일제히 희희닥거리며 《스물, 스물하나…》 하고 기세를 올려주기까지 했으나 그놈은 겨우 40대를 넘기고서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말았다.

온몸이 피자박이 되여 기진하여버린것 같던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졌지?!》

그리고는 또 한번 크게 만세를 불렀다.

《조선 만세!》

《별수가 없는 놈이군!》

간수부장은 채머리를 떨며 신음소리를 냈다.

간수부장의 행패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놈은 보복의 구실을 찾다가 아버지의 건장한 체구가 시샘이 났던지 유도장으로 끌고 가서 다짜고짜 수십번 멨다꽂군 하였다.

《이 새끼야, 맛이 어때?! 이게 일본의 유도라는 무술이다. 촌놈새끼가 뭘 안다구 까불어!》

어느날 아버지는 또다시 그놈의 유도훈련상대가 되여 땅바닥에 연신 곤두박질 당하고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한 보름 더 여기로 끌고 와서 훈련시켜주오. 며칠 당신의 교련을 받고보니 나도 이젠 유도 초단쯤은 된것 같소. 보름만 더 당신의 상대역을 하고나면 나도 아마 3단쯤은 될것 같소. 아무튼 감옥에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유도 3단까지 배워가지고 나가면야 감옥살일 헛하는게 아닐게요. 잘 배워가지고 나가서 못된 놈 달구는데 써먹겠소.》

땀을 쭉 빼고 혀를 가로물고있던 간수부장은 그 소리에 아예 손을 들고야말았다. 이렇게 아버지는 감옥안일지언정 기개를 굽히지 않고 일본을 짓누른 승자가 되였다.

평생토록 한모양으로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와 선을 지켜 꿋꿋이 살아오는 아버지이다. 아버지의 이런 대쪽같이 굳세고 배심든든한 기질을 연경은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각이 들면서부터는 아버지처럼 정의와 진리를 위함이라면 작두날우에도 기꺼이 올라서는 이 나라의 지조있는 딸이 되리라고 골백번 마음을 다져왔다.

이러한 연경의 눈에 비친 최금룡의 사직서는 분명 배신의 락인이 찍힌 문서장이였다. 그리고 최금룡은 이제 더는 련정을 나눌 사랑의 상대가 아니였다.

하건만 《그래도…》 하는 실오리처럼 가늘어진 희망을 부여잡고 이 숲속으로 총각을 불러냈던것이다. 그 희망이란 연경이가 아무리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하여도 좀체로 밀어낼수 없는 사랑의 미련이였다.

하기에 이날도 마구 쏟아지는 폭포수를 묵묵히 받아주는 바위돌처럼 의연하고 드팀없는 최금룡의 정깊은 자세앞에서 더 토달거려볼 여력마저 잃고말았다.

연경은 그 맑고 시원한 눈으로 최금룡을 쏘아보며 그앞에서는 언제나 응석꾸러기로, 사랑스러운 심술꾸러기로 되여버리고마는 자신에게 맘속으로 화를 냈다.

《그래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소? 사실 나도 사직서를 쓰고나서 잠을 못 자. 하지만 아버님도 언젠가는 이 최금룡을 리해하게 되실거요. 난 믿어.》

이렇게 조용히 뇌이는 최금룡의 목소리에는 여적 연경의 앞에서 내색을 하지 않았던 한없는 고뇌가 어려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처녀를 더욱 발끈하게 했다.

《아버님이라 부르지 말아요. 금룡씨는 그렇게 부를 자격을 상실했어요.》

《뭐,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다구?! 왜? … 장인될분을 아버님이라 부를수 없다면 나는 누구고 연경이는 누구요?》

《그렇게 부를 권리를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고말았지요.》

《포기하다니? 아무리 화났대도 그렇지. 다신 그런 말 말어.》

최금룡은 지금까지 배포유하던 기색과는 달리 단호하게 오금을 박았다.

연경이가 자기를 여기로 불러낸 리유를 짐작하고 마음의 준비도 갖추고 왔던 최금룡이였지만 연경이가 자기들의 사랑을 걸고 화제를 끌고나가는데 대하여서는 그저 스쳐보낼수 없었다. 애초부터 연경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빗장을 든든히 질러놓아야 되겠다고 결심한듯 마디마디에 힘주어 자기 립장을 밝혔다.

《이봐, 연경이! 우린 아버님들의 축복을 받은 사이지?! 연경인 내 사람이야.》

그 소리에 처녀의 고개는 꺾어질듯 더 위태롭게 아래로 떨어지고 발갛게 물들여졌던 두볼은 창백해졌다.

연경은 가슴속깊이에서 불쑥 솟구치는 열렬한 애모의 감정을 가까스로 이겨내고있었다. 정말 최금룡의 품에 몸을 던지고 눈물이라도 좔좔 쏟아놓고싶었다.

잠시후에 연경은 용기를 내여 손가방에서 여러날 줄곧 속을 썩게 하던 문제의 그 종이장을 꺼냈다. 종이장을 펴드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연경은 불이 이글거리는 사내의 눈길을 애써 피하며 최금룡의 앞으로 종이장을 내민채 애통하게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건 뭐예요?! 처녀의 순정을 깡그리 앗아내고서 어쩌자는거예요? 정말 날 사랑한다면 이걸 여기서 찢어버려요!》

최금룡이 얼결에 손을 내밀다말고 두어발자국 뒤걸음쳤다.

《아니… 이걸 아직 아버님께 드리지 않았어?》

연경은 총각에게로 한걸음 다가서며 애절한 어조로 혼자만이 안고 몸부림쳐온 자기의 괴로움을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내가 어떻게 드려요?! 아버지는 지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셔요. 음식도 제대로 들지 못해요. 아버지가 시작하신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거기서도 잘 알지 않나요.

아직 선거전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도 복잡하고 너무도 힘겨워요. 아버지를 따르던 사람들도 일부는 눈을 빨며 떠나가요. 경무대에서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하면서 위협도 하고 얼리기도 하며 그냥 아버지를 괴롭혀요. 거기서도 마당으로 날아드는 불량배들의 돌벼락을 맞아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어려울 때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아껴주고 지켜주어야 할 사람이, 아버지가 그렇게도 사랑해주던 사람이 철새처럼 날아가려고 하니 내가 어떻게 이 종이장을 아버님께 드릴수 있겠나요?! 이건 아버지에게 가해지는 그 무엇에도 견줄수 없는 혹독한 타격이예요.

다시한번 생각을 해줘요. 난 정말이지 금룡씨를 아버지곁을 떠나간 못난이들과 나란히 세울수가 없어요. 자, 도루 받아요. 예?!》

처녀의 순정이 어린 그윽한 눈에 물기가 함뿍 고여 반짝이고있었다. 깨끗한 순정을 다 바쳐온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처녀는 마지막으로 처녀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그 사랑의 이름으로 울며 저리도 안타까이 애원하는것이다.

너무도 가긍하고 연연한 처녀의 모습에 속이 엷어지고 심장이 화끈 달아오른 최금룡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는 처녀의 둥실한 어깨에 이마를 박고 한동안 더운 숨만 내뿜었다. 두해가까이 정을 나눠오면서 이렇게도 절망에 찬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언제 봐야 연경은 한여름철의 수목처럼 푸르싱싱하였다. 생활에서는 자신감에 넘쳐있었고 일에 들어서서는 막힘이 없었다. 처녀는 눈물과 슬픔과는 인연이 없는듯 노상 밝게 웃으며 활기에 넘쳐 주변을 명랑하게 한다. 뭇사람들을 아름다움과 랑만의 세계에로 쉽사리 끌어들이는 매력과 열정이 처녀의 모습을 사랑스럽게 해준다.

속씀에 있어서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대범하였으며 큰뜻을 세워놓고 줄기차게 미래에로 달음치는 씩씩하고 과감한데가 있었다. 그는 여느 처녀들처럼 자질구레한 신변잡사나 잔정에 발목을 잡히우는 처녀가 아니였다. 진보당추진위원회의 사람들이 나이나 성미에는 관계없이 연경이를 홍일점이라 불러주며 딸처럼, 누이동생처럼 아껴주는게 까닭이 있었다.

어느 명절에 최기오와 자리를 같이한 조봉암이 최금룡이 올리는 국화술잔을 받아들고 건늬던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금룡이, 임자 우리 연경이를 거느리자면 무척 베찰걸세.》

그때 연경에게서 술 한잔을 받아든 최기오가 쌍북을 울렸다.

《연경이는 조씨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기질을 지닌 녀인이니 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겠네. 죽산, 당신은 대륙을 넘나들며 풍운을 휘감고 예까지 이른 풍운아라면 연경은 이제 그 풍운을 떠안고 서울에 솟구쳐오를 녀걸이 될걸세. 우리 소시적부터 품어온 꿈을 금룡이와 연경에게 물려줍세. 난 연경이를 절대로 안방에 묶어놓고 동자질이나 잘하는 아녀자로는 만들지 않겠다는것을 약속하네.》

《고맙네. 하지만 난 우리 연경이가 제 언니 성미를 절반쯤 덜어가졌으면 하네. 녀자는 녀자다운데가 있어야 하거던.》
그때 연경이가 살그머니 아버지의 허리를 꼬집어놓아 조봉암이 《아이쿠-》 하며 엄살을 부리고 좌중에 웃음이 물결쳤다.
사실 언니 효경이는 어머니없는 조씨가정의 안방주인이 되여 하루종일 엉치붙일새없이 가분가분 돌아간다.
끊임없이 찾아드는 식객들을 륭숭하게 겪어야 했다. 수입보다 지출이 늘 웃도는 풍요치 못한 세간살이를 펴나가야 했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크고작은 방이 여러개가 되는 집안을 정결하게 거두어야 하였다.

그 모든 일을 효경이는 군소리없이 그러면서도 여무지게 해낸다.

연경이는 대학을 다닐 때부터 책에만 묻혀살았고 아버지의 조수가 되여 정치현장에도 즐겨 뛰여들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정식으로 아버지의 서기로 임명되면서부터는 언니의 동자질에서도 손을 뗐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정세자료를 묶어내고 아버지의 연설문이나 글을 정서하고 아버지가 참여하는 행사장들에 빠짐없이 따라다니였다. 아버지의 사상과 투쟁을 지지하는 연설까지 하여 청중의 환호를 받군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이따금 공식적인 의례행사장들에 아버지를 내조하여 참가하는 일도 있는데 그때마다 각이한 인물들과의 교제를 원활하게 하여 아버지의 인끔을 말없이 돋구어주기도 한다.

대중운동가로서의 연경의 자질은 벌써 고등학교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연경은 그 시절에 동료학생들을 무슨 시위요, 운동이요 하는데로 곧잘 이끌고 다니였다. 경찰곤봉에 얻어맞아 들것에 실려온적도 드문하였다.

조봉암은 아들없는 집안에 연경이 같은 드센 성격의 딸이 나온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은근히 그의 앞날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한다. 그래서 책방에 들리면 명성을 떨친 녀걸들의 운명을 엮은 책들을 사가지고 와서 연경의 책상우에 슬그머니 놓아주기도 한다. 인간은 책으로 수양되고 거창한 혁명도 책으로부터 시작된다는것이 조봉암의 지론이였다.

최금룡도 연경의 남다른 기질을 사랑하였고 존중하였다. 얄팍한 정에 구속되지 않고 주위의 눈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목표를 향해 곧추만 내달리는 드세찬 기질을 가진 연경이야말로 자기 아버지가 물러선 사회변혁의 크나큰 꿈을 함께 나누어갈 련인이라고 만족해하였다.

그런 연경이가 지금 품에 안겨 슬프게 울며 애걸하고 탄식하지 않는가. 그는 안타까움에 젖어드는 눈으로 처녀의 애절한 모습을 지켜볼뿐이였다. 총각이 벙어리 랭가슴 앓듯 하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조봉암의 슬하를 뛰쳐나온데 대하여 그 진실을 밝힐수 없는것이 그의 고민거리였다. 그에 대하여서는 그렇게도 자기를 사랑하여주었고 자기 또한 그지없이 존경하여마지 않는 조봉암은 물론 자기 몸과 마음의 한 부분처럼 소중해진 애인에게도 밝힐수 없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최금룡이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그렇듯 심각하고도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연경이를 위로할수 있을가. 최금룡은 저도 모르게 속이 답답해서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러지 말어, 응?! 연경이…》

최금룡은 애인의 뭉실한 가슴에서 급하게 전해져오는 박동에 그냥 짜릿한 아픔을 느끼며 달래였다.

연경이 흐느끼며 고개를 까닥거리였다. 그리고는 최금룡의 귀전에 대고 속삭이였다.

《쿨쩍거리는 내 꼴 보기 싫지요?》

《응, 연경이는 새매처럼 용감해야 돼. 이건 연경이답지 않아.》

《나도 금룡씨의 고민이 싫어요. 자기 모습을 다시 찾아줘요.》

연경이가 끝내 최금룡이 물러서는 기미가 보이는듯싶어 살뜰하게 다가들었다.

《엉? … 자기 모습을? … 내 모습이 어떻기에? …》

《뭐라구요?!…》

연경이가 짜증조로 되받아넘기고는 일부러 미욱을 부리는듯싶은 금룡이가 얄미워서 그를 떠밀어버렸다. 무엇인가 최금룡에게서 희망적인것을 감촉하고 속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는데 최금룡의 속대는 여전히 쇠붙이같다. 자기가 사내의 속을 헛짚은게 틀림없다. 정에 호소하고 사랑에 기대했던것이 언제였더냐싶게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고 속눈섭에는 노기가 다시 돋쳤다.

《정말 이러겠어요?! 그만큼 울며 빌었는데도 성차지 않은가요? 이 사직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 모른단 말이예요?》

연경의 목소리는 여느때없이 침착하였다. 밝아지는가싶던 얼굴에 분기가 다시 서리면서 아래입술이 옥물려졌다. 이쯤되면 연경의 말은 감정에 지쳐버린 넉두리나 앙탈을 벗어난 심각한것이다.

하지만 의연히 사내의 표정은 연경의 다양한 눈매에 이미 습관된듯 눈섭 한오리 흔들리지 않은채 범상하다. 그의 두툼한 입술이 열리더니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내가 말했지, 이미 굳어진 결심이라구.》

그리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여전히 흔들림이 없을 낮고도 담담한 대답에 연경은 또다시 골이 나고 짜증이 났다.

결국 자기들의 론쟁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간셈이다.

연경은 억이 막힌듯 한동안 입을 반쯤 벌린채 점차 초점을 잃어가는듯 한 눈으로 멀거니 사내를 쳐다보았다.

벼랑에 대고 골받이를 하는 자신이 어리석고 불쌍해보였다.

정말 이 인간은 우리 아버지슬하를 떠나갈 결심인가? 우리의 어제날도 미래도 차던지고저 하는가? 그렇다면 이제 더는 여기서 눈물까지 쥐여짜며 매달릴 리유가 없다. 처녀의 가슴속에 서리발같은것이 솟구쳐올랐다.

하지만 최금룡은 꿋꿋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이미 정한 결심에서 한발자국의 양보나 타협의 여지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수 더 떠서 엉큼하게 늘어붙는다.

《연경이! 날 사내다운 인간으로 그냥 믿어줘. 녀자의 치마폭에 심혼을 저당잡히고 값싼 눈물에 발목이 얼어붙는 시라소니를 보고싶지는 않겠지? 사나이의 매력이 뭐라고 했지?》

《뭐라구요? … 값싼 눈물? … 사나이의 매력? … 그래요. 금룡씨가 정말 매력있는 사나이라면 이걸 찢어던질 용기를 보여줘요. 사나이매력은 담과 기백이라고 했잖았나요.

마지막으로 말해요. 앞날에 들이닥칠 위험에 지레 간덩이가 줄어들어 배신이라는 비렬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사내라면 나는 기꺼이 물러서겠어요. 아버지를 배신한 인간을 나는 절대로 용서할수 없어요.

갈테면 가세요. 그러되 나를 영원히 잊어버려요. 사랑에서 선택의 권리가 사내들에게만 있다고 생각지 말아요.》

말을 꼭꼭 씹어뱉는 처녀의 도담한 선언에 최금룡이 화들짝 놀라 크게 소리질렀다.

《연경이! 그게 무슨 막말들이야?! 앞날의 위험이 어떻다는 소리는 그리고 내가 아버님을 배신한다는건 대체 무슨 소리야? 더구나 물러선다는건 또 뭐구?! 안돼! 아버지문젠 아버지문제고 우리는 우리야.》

《정말이예요?》

최금룡은 리성을 애써 가다듬고 차분하게 따지고 드는 처녀의 영악스러운 눈총에 고개를 크게 한번 끄덕이였다.

그만에야 연경은 자제력을 잃고말았다.

《그렇다면?! … 좋아요. 똑똑히 명심해요. 아버지는 나고 나는 아버지예요! 난 아버지가 택한 길에서 한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요. 금룡씨가 끝내 아버지곁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상 우리네 관계도 이젠 끝나버렸어요.》

그는 사직서를 갈기갈기 찢어 최금룡의 발치에 던져버렸다.

찢어진 종이쪼각들이 그들이 마주선 사이로 너울너울 춤을 추듯 흩어져 떨어졌다.

최금룡은 처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일순간 굳어져버렸다. 그렇게도 사랑스럽던 련인이 이렇게도 매정하게 나오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연경이 정말 자기들의 사랑마저 쪼각내서 던져버린것이란 말인가. 그럴수 없다. 그래서는 안돼! 최금룡이 다시 처녀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자 연경은 뿌리쳐버렸다.

《다시는 내 눈앞에 얼씬거리지 말아요!》

연경은 이렇게 한서린 어조로 오연하게 절교를 선언하고는 홱 돌아서서 오던 길로 달려갔다.

사랑의 정이 깊었던것만큼 분노의 감정도 컸다.

최금룡이 《연경이! 연경이!…》하며 바삐 따라서다가 솔숲에 발이 잡힌듯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싸쥐고 반달음으로 달려가는 처녀의 뒤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옆으로 약간 기울어진 처녀의 뒤모습이 숲에 잠겨들자 최금룡은 흉중을 꽉 메운 비분을 억제하며 잠시 우두커니 서있다가 반대켠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연경이와 이렇게 점점 멀어져갈듯싶었다.

(아, 이 일이 장차 어떻게 번져가려나.)

최금룡은 괴롭게 중얼거렸다.…

와우산을 내리던 연경은 산자락에 있는 너럭바위에 이르자 바위가운데 솟아오른 로송을 끌어안았다.

너럭바위우에 주저앉은 연경은 가슴굽을 쓰르르 치훑어오르는 통곡을 터뜨렸다.

해와 달을 넘겨온 자기네의 사랑은 쪽박 부서지듯 다시 붙여볼 여지가 없이 깨져버렸다. 더구나 최금룡이 떠나갔다는 소식에 접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할가 하고 생각하니 더없이 가슴이 쓰려왔다.

친자식 못지 않게 사랑과 정을 주고 정치의 넋을 이어줄 후비로까지 크게 믿어주시던 아버지다. 일이 이렇게 된것이 꼭 자기의 불찰만 같아 더구나 죄스럽다. 자기들의 사랑이 굳건하였더라면 목숨처럼 귀하게 여겨온 존엄마저 다 줴버리고 애걸하듯 하는 련인의 애바른 심정에 최금룡이 어찌 저렇게도 랭담할수 있을가.…

(아, 나에게서 사랑의 봄계절은 이렇게 흘러가버리려나.)

그는 아름드리로송의 둥치에 허리를 붙인채 푸르른 하늘을 뿌얘오는 눈을 슴벅이며 안타까이 쳐다보았다. 뭉게구름이 두둥실 어데론가 정처없이 흘러가고있었다. 그렇게도 아름답게 가꾸어왔던 사랑도 저 구름처럼 자기의 눈앞을 지나 자꾸만 아득한 멀리로 사라져버리는것만 같았다.

연경은 눈물속에 연신 한숨을 내쉬다가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림속에 주저앉아 끝나버린 사랑과 아버지의 위업의 이단자를 놓고 맥풀린 한숨이나 쉬고있을 처녀가 아니였다.

래일 그의 집에서는 중요한 회의가 열린다. 연경에게는 회의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기를 수습한 처녀의 모습은 순간에 달라졌다. 패배에 좌절을 모르는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처녀이다.

(숲이여, 잘 있으라!)

연경이는 입속으로 부르짖고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바로하고 옷매무시도 다시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푸름이 청청한 와우산의 숲, 자기들의 사랑의 자국이 무수히 새겨져있는 수림을 잠시 얼없이 바라보았다. 부지중 그의 도툼히 내불린 입술새로 시 한구절이 흘러나왔다.

 

사랑과 자유-

이는 내가 념원하는 모든것!

하기에 사랑을 위해서는 내

목숨을 바쳐 뉘우침 없으리라

허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사랑이여, 내 너마저 바치리라!
 

조용히 읊고나서 그 의미를 다시 음미하고나니 마치도 시의 구절구절이 자기를 위하여 씌여진것 같아 또다시 가슴 한밑에서 설음뭉치가 왈칵 치밀어올랐다.

(이겨내자. 이겨내야 한다. 난 이 세상에 도전해나선 죽산의 딸이다.)

연경이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고 크게 발을 옮겨놓았다.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아래입술을 감쳐물고 걸음을 다우쳤다.

보라빛으로 아름답게 채색하여왔던 사랑의 추억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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