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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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은 천령배의 팔을 끼고 천천히
락엽이 두텁게 깔린 숲속길을 거닐었다. 바야흐로 만물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한 수림은 새로운 생의 활력으로 충만되여있었다. 키높이 솟은 전나무며 밑둥이 아름되는 소나무의 뾰족뾰족한 잎사귀들이 연록으로 곱게 물들었는가 하면 가지만
앙상하던 넓은잎나무에도 움이 터서 양지쪽 가지에는 벌써 동전잎만 한 잎사귀들이 내불리였다. 이따금 숲의 변두리에서는 찾고 화답하는 봄꿩들의 쟁쟁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재빛메토끼들이 두귀를 세우고 숲의 침입자들을 불안스럽게 쳐다보다가 덤불속으로 쏜살같이 달려간다. 수림은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의 웃초리를 훑어가는 바람소리만이 소연할뿐 숙연한 적막속에 묻혀있다. 두사람은 이윽토록 수림속으로 빨려들듯 그냥 걸어갔다. 수림은 사색의 피서지라고 한다. 수림속에 들어서면 가드라졌거나 오리무중에 휘감겨들던 사색이 맑고 청신한 공기와
고요에 원기를 얻어가지고 종횡무진으로 나래를 쳐간다. 먼저 입을 연것은 조봉암이였다. 조봉암은 그에게 당내형편과 이날 열렸던 회의정형을 상세하게 설명하여주었다. 천령배에게는 감출것이 없었다. 《임자 생각에는 어떤가?》 조봉암이 넌지시 물었다. 천령배는 조봉암의 길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 믿고 따르던 은사의 고결한 성품과 대의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바치려는 결곡한 마음에 크게 감심되여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선생님의 뜻은 언제나 민중을 위한 정의였습니다.》 천령배가 거침없이 꺼내놓는 대답에 조봉암은 코마루가 쩡해왔다. 여러해 철창속에 갇혀있었어도 여전히 정치적시각이
예민하고 정확하며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다. 《고맙네. 당안의 합의를 모아내는게 쉽지 않았다네.》 《그랬을겁니다. 선생님의 출마포기가 쉽게 접수되지 않았을겁니다.》 조봉암은 약간 동안을 두었다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임자를 어떻게 할가? 당장은 당내부를 틀어쥐겠나 아니면 선거전을 총괄하겠나?》 천령배는 자기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이 고마워 가슴이 뭉클해졌다. 선뜻 대답하기도 난감하여 주밋거렸다. 조봉암은 천령배의 대답을 기다리며 설명을 보충적으로 해주었다. 《당장 민주당과의 련합이 성공된다고 하여도 선거일 한주일전까지는 후보사퇴를 공개하지 않고 그냥 선거선전을 통한
우리 당선전에 화력을 집중하려고 하네. 그리고 부통령후보는 우리 당이 양보하지 않을 결심이네. 그건 아마도 저쪽에서도 쉽게 응해줄것이라고
생각하네. 한데 선거선전이 어떠해야 하는가는 임자도 잘 알테니 더 설명할것은 없네만 서정후위원장만으로는 힘들것 같네.
자칫하면 리승만일파의 모략에 걸려들어 초전분해될수 있고 그렇다고 눈치보기나 하면서 할 말도 주저할것 같으면 따라오던 사람들도 침뱉고 돌아설수
있네. 난 임자가 응한다면 선거대책내부사업을 총괄하는 자리를 맡아주었으면 하네. 사실 지금 우리에게는 임자처럼 두뇌와
완력을 겸비한 재목이 부족하네.》 조봉암은 말을 그치고 천령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천령배는 여전히 입을 다문채 깊은 상념에 잠겨 스적스적 걸음을 옮길뿐이다. 조봉암은 저으기 속이 불안하여졌다. (자기의 대답을 상상으로 메꾸라는것인가?!) 전에도 천령배는 조봉암이 간혹 탈선이 명백한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는 침묵으로 대답하여 그로 하여금 자기의
견해를 다시금 되씹어보고 스스로 수정하거나 철회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은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필요성과 중요성을 그만큼 강조했으니 현 실태에 대한 파악은 충분히
되였을거고 문제는 당사자의 심장이 움직여야 한다. 천령배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조봉암은 전례없이 굳어지고 마음속의 자물쇠를 잠그고있는 천령배의 침묵에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쇠사슬에 묶여 모진 고문과 갖은 협박을 받으며 염라국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오더니 심대가
가늘어졌는가? 아니면 정치권에 신물이 나서 최기오처럼 영영 물러나려고 잡도리하는게 아닐가?) 조봉암은 그럴법도 할 일이라고 속으로 그의 심중을 짚어보기도 하였다. 그런데 얼마후 그가 꺼내놓는 소리야말로 동문서답이였다. 《리승만이 이번 선거에 불참하겠다고 한것이 혹 참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고령이니 그놈두 정치하기가 퍽
고달플겁니다.》 조봉암은 기다리던 대답이라는게 왕청같은 말이고 너무 지각이 없는 소리여서 아연하여졌다. 감옥에서 들은 리승만의
터무니없는 수작에 미련을 가진 모양이다. 리승만의 더러운 권력욕과 교활한 술책을 언제나 누구보다 훤히 꿰뚫어보던 천령배가 리승만의 흉측하고도 밑창이
빤드름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을 그대로 받아들인것은 무엇때문일가. 조봉암은 실망이 컸으나 방금 철창속에서 풀려난 사람이라 정치기류에 대한 감각이 둔화되였을수도 있다고 자기를
위안하면서 무뚝뚝하게 대꾸하였다. 《리승만의 수작을 믿는 사람이 정계에 몇되지 않을걸세. 벌써 전국적으로 민의운동이 확산되고있네. 방금전에도
우리는 명동네거리에서 우마차시위라는걸 겪어보고 왔네. 그 하나만 가지고도 리승만을 권력의 자리에서 추방해야 할 리유가 서네. 내가 다 창피하고
수치스럽네. 어떻게 하든지 이번 선거에서 그 령감을 들어내야 하네. 그놈의 집권을 그냥 놔두다가는 언제인가 이 남녘의 민족은 완전히
파멸될거네.》 조봉암은 방금전에 보고 온 우마차행렬을 간단히 설명하여주었다. 천령배는 조봉암의 확고부동한 견해에 수긍이 된다는듯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리고는 무성한 숲속을 바라보며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조봉암은 이미 자기가 꺼내놓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하는듯싶은 천령배의 표정을 초조히 지켜보면서도 구태여
독촉하지는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운명적인 내부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고있는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천령배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조봉암에게로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전에없이 고뇌의 빛이 짙게 어려있었다.
무엇인가 말을 꺼낼듯말듯 바재이고있었다. 조봉암이 어서 말하라고, 임자 말이라면 절대로 탓하지 않을것이라고 고무하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천령배는 스스로 용기를 북돋으려는듯 심호흡을 크게 하고나서 조봉암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죽산선생님, 제 언제부터 선생님께 묻고싶은게 있었습니다.》 《그래? … 음… 우리사이에 뭐 서슴을게 있겠나? 어서 말하게.》 《이렇게 묻는다고 저를 교만하다거나 방종스럽다고 책하진 말아주십시오. 그건… 저… 그건 말입니다.》 천령배가 말을 갑자르다가 또다시 입을 닫아붙였다. 《아, 령배! 오늘은 왜 이리도 소심해졌나? 난 여적 임자의 말을 놓고 견해상충돌까지 포함하여 임자에 대한
정이나 믿음을 저울질해본적이 없네. 이건 임자도 잘 알지 않나. 헌데 어찌된 일인가?!》 조봉암은 천령배가 자기앞에서 이것저것 재며 주저하는것이 노여워 가볍게 나무랐다. 《선생님, 용서하십시오. 이런것입니다. 선생님은 정말 공산주의대오에서 자기를 스스로 추방하였습니까?!》 《뭣이?!》 조봉암은 몸을 떨었다. 너무도 뜻밖의 질문이였다. 아니,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조봉암의 심장에 날아든 총탄이였다. 조봉암의 심중에
면바로 날아든 불꼬챙이였다. 순식간에 온몸이 굳어졌다. 가뜩이나 거뭇하던 얼굴빛이 더욱 꺼멓게 타들었다. 눈살이 푸들거렸고 심장이 와당탕
흉벽을 급하게 두드렸다. 조봉암은 머리가 어지러워 비칠거렸다. 천령배가 그의 몸을 꽉 잡으며 급한 어조로 사죄를 하였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안할 말씀을 드린가 봅니다.》 《아, 아… 저기… 저기로…》 조봉암은 더듬거리며 좌측의 로송곁에 가로누워있는 바위를 턱부리로 가리켰다. 천령배가 조봉암을 부축하여가지고 천천히 그쪽으로 갔다. 조봉암이 두툼한 이끼가 깔린 너럭바위우에 주저앉자 천령배는 그옆에 송구스럽게 서있다가 조봉암의 등을 자근자근
두드려주었다. 조봉암은 기운을 가다듬으며 하늘을 가리운 나무의 웃초리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도 답답해보이는 수림속에서
솟아오를 구멍이라도 찾듯이 열심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드디여 나무가지사이로 손바닥만큼 드러난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찾아낸 하늘이고보니 더 파랗고 더 소중히
느껴진다. 그는 이윽토록 그 하늘에서 눈길을 옮기지 못하였다. 공산주의, 그것은 캄캄칠야속에서 찾아낸 별처럼, 하늘처럼 희망과 힘을 주던 조봉암의 인생의 표대였다. 그것은
가난뱅이의 자식이였던 자기의 심혼을 단숨에 매혹시킨 진리요, 념원이요, 정의였다. 서울과 상하이, 모스크바와 도꾜에서 피가 뛰던 공산당선언의 구절구절에 심취되여 불모의 땅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것처럼 기쁨과 환희에 들떠다니던 때가 어제일처럼 너무도 선명한 추억으로 안겨와 지금도 가슴을 들먹거리게 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공산대학으로 떠나던 때부터 벌써 서른세해가 지나갔다. 공산주의는 가슴에 새겨안을 때부터
사상의
위대성과 진리성, 인간성, 도덕성, 과학성으로 하여 그의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인간이 사상을 접수할 때 그 힘은 백배해진다. 조봉암은 공산주의리념을 접수한것으로 하여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지칠줄 몰랐고 감옥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으로 하여 단두대에도 얼마든지 웃으며 오를 담과 기개가 그의 평생을 오직 투쟁으로 떨치게 하였다. 공산주의-그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영원히 끝장나는 인류의 리상향이였다. 만민이 똑같은 이 행성의
주인된 권리와 의무속에 화목하게 살아가는 민중의 락원을 의미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조봉암이 열번 목숨을 바쳐도 아까울것이 없고 자기의 피로써 기어이 안아오리라 골백번 맹세를
다지게 하고 그 길에 청춘도 가정도 사랑도 다 바쳤어도 후회를 모르게 한 생의 목표이고 보람이고 뜻이였다. 그런데 어느때부터였던가. 아마도 해방된 그해부터였을것이다. 조선공산당창건때부터 악랄하고 파렴치한 종파활동으로 모처럼 무어진 공산당을 깨지게 하고 혁명력량을 사분오렬시켜온
박헌영일파는 해방이 되자마자 더욱 살판치기 시작했다. 박헌영은 당의 령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서울의 좌익권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조봉암을 공산주의대렬에서 배척, 거세하기 위한 공세를 집요하게 벌렸다. 조봉암은 자기에 대한 그자들의 공개적인 비난과 모해를 받으면서도 력대로 파쟁군으로 살아온자들의 상투적인
인신공격이라 이에 아랑곳없이 자기 할바를 조용히 해나갔다. 그는 박헌영이 틀고앉은 서울의 지도기관에는 발을 들여놓을념도 않고 남조선의 혁명운동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있던 인천일대의 혁명운동과 로동운동 그리고 통일전선운동을 지도하면서 혁명력량을 확대하는 사업에 전심전력하였다. 조봉암은 날을 따라 더욱 우심해지는 박헌영의 종파적책동과 공산주의대오를 사분오렬시키고 좌경적인 망동으로 대오를
약화시키는 행위를 더는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그의 량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면전에서 운동의 극좌적오유에 대해 경종을 울려주기
위해 내키지는 않았지만 박헌영을 여러번 찾아갔으나 매번 문전거절을 당하였다. 박헌영은 조봉암이 1925년에 국제당의 위임을 받고 조선공산당을 조직할 때 고려공청도 조직하면서 동맹의 비서로
내세워주었던 인물이였다. 박헌영은 이미 일제에게 투항변절하고 해방후에는 하지에게 포섭되여 미중앙정보국의 지령에 따라 남조선에서 당시
주도적이였던 정치의 좌경화를 막기 위해 좌경적구호를 가지고 좌경세력을 지리멸렬시키고있었다. 박헌영의 투항변절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조봉암은 어떻게 하든지 그의 오유를 시정시키기 위하여 그냥 그를
찾아다녔으나 박헌영은 끝까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봉암과 그의 가까운 동지들을 모해,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느라 동분서주했다. 공산주의를 목숨보다 귀중히 간직한 조봉암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으나 공개적으로 의견상이와 모순을
격화시키고싶지는 않았다. 공개적인 충돌이 가뜩이나 파쟁으로 백해무익한 피와 희생을 당하고있는 혁명대오의 분렬과 파산을 촉진시킬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박헌영일파의 극좌적인 망동때문에 총체적인 파멸에로 줄달음치는 혁명운동을 그저 보고만 있을수도 없었다. 조봉암은 암중모색끝에 박헌영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작성하였다. 박헌영의 오유와 혁명운동의 강화발전을 위한
대책적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밝힌 진언서였다. 그는 그 한통의 편지를 완성하는데 여러달을 바쳤다. 론박할 여지가 없는 정당한 주장과 분석, 공명정대한 출로가
편지에 그대로 비끼게 하려고 애를 썼다. 글귀마다에 혁명대오의 재출발과 확대강화를 바라는 공산주의자로서의 량심과 애정을 담았다. 편지는 하나의 완성된 론문이였다. 일생을 몸담아온 공산주의위업에 대한 그의 충직성과 무한한 사랑의 고백이였다.
그 길에 평생을 바치리라는 서약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천에 둥지튼 미군방첩대가 조봉암이 편지작성을 마친 날 그가 기거하던 인천공산당본부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수색끝에 여러 문건들과 함께 그 편지도 압수하여갔다. 미군방첩대는 남조선혁명운동의 분렬을 부채질하기 위한 모략에 그 편지를 리용하였다. 교묘하게 재가공한 조봉암의
편지가 신문들에 일제히 공개되였다. 공개된 편지는 마치도 조봉암이 박헌영일파의 청산을 촉구했으며 당의 령도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갖은 중상과
비방을 한것으로 일관되여있었다. 이것은 미군방첩대와 그와 내통한 박헌영일파가 꾸민 엄청난 모략극의 서막이였다. 박헌영은 미군방첩대의 신호를 접수하자 곧 남조선의 공산주의세력을 총동원하여 조봉암과 그 지지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압력과 배척운동을 벌려놓았다. 조봉암과 그 지지자들은 미국의 모략가들의 간특한 계교에 휘말려 끝끝내 당대오에서 축출되고말았다. 그들이
관계하고있던 모든 좌익조직들에서도 공직을 박탈당하였다. 이때부터 조봉암은 박헌영이 주도하는 남조선의 공산주의운동에 등을 돌리게 되였다. 다시는 공산주의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박헌영에 대한 사소한 미련도 버리였다. 자기식으로 제3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후 미군정의 탄압과 박헌영의 의도적인 좌경망동으로 조선공산당도 비법화되여 지하로 들어갔다. 좌익운동은
합법운동의 가능성을 깡그리 잃고말았다. 조봉암은 제3의 길을 더욱 제창하였다. 제3의 길이란 남조선민중의 의사와 남북으로 갈라진 조선반도의
객관적현실을 고려하여 자기나름으로 찾아낸 민중사회건설의 길이였다. 그러나 지금껏 조봉암은 일찌기 자기가 신봉하였던 그 위업에 대한 향수를 씻어버릴수는 없었다. 아니, 세월이
갈수록 그리워지면서 그를 괴롭혔다. 미군의 강점하에 있는것으로 하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리상을 입에 담지도 못하는 남조선현실이
저주스러웠다. 평생토록 부르짖어온 그 위대하고 신성한 리상을 마음속에 묻어놓고 꿈속에서나 그려봐야 하는 자신이 용렬하게도
느껴졌다. 그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것을 찬미하고 자랑해야 할 평생의 뜻을 애써 피해가야 하는 죄의식을 매일매시 짓씹으며 살아온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슬픔이고 고통이였다. 그런데 바로 누구도 아닌 자기의 그림자와도 같던 사람이, 자기 심장의 박동소리마저 들을줄 알던 제 혈붙이같은
동지가 그 아픈 가슴을 불갈구리같은것으로 사정없이 후벼놓은것이다. 마음이 산란해진 조봉암은 천령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천령배는 삽시에 기가 풀리고 얼과 열이 사그라진 스승의 눈길을 받자 죄스러운듯 이내 고개를 돌렸다. 조봉암을 따르다가 그 신성한 대오에서 추방된 일후로는 그 역시 공산주의라는 말을 피해온다. 조봉암은 잠시후에야 바위에 등을 붙이며 웅글은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나도 한가지 묻고 넘어갑세. 자넨 자신을 <공산주의 배신자>라고 찍어놓은 나쁜 놈들의 락인을
접수하나?》 그러자 천령배가 고개를 높이 들며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박헌영이 락인을 찍어놓았건 그 누가 뭐라고 하건 저는 민중해방의 리상을 위하여 자신을 다
바쳐왔다고 량심적으로 인정합니다.》 천령배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그 어조는 확고했고 자부심이 비껴있었다. 조봉암은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어쩐지 질투비슷한 불쾌감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조봉암은 이렇게 격한 어조로 다우쳐묻다가 꿀꺽 뒤말을 삼켰다. 그의 심장이
그 뒤말을 받아 격렬하게 고동치며
웨치고있었다. (내가 제창해온 민중세상이란 어떤것인가? 농림부 장관시절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한것이 무엇때문인가?
농업공동조합의 결성을 주장한것은 무엇때문인가? 수탈없는 경제요, 국가독점의 경제요, 부의 공정한 분배요 하고 떠들어댄것은 또 무엇때문이였던가? 나는 독재를 반대했다. 리승만독재를 청산하자고 주장하였다. 바로 그것이 민중해방위업이 아니란 말인가?! 억압받던 무산자계급이 무엇때문에 공산주의에 매혹되였는가? 《일체 권력을 청산하라!》, 바로 이것이다. 지배계급의 권력을 일체 청산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고 만민이 잘사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그 리상이 위대하고
고결하기때문이 아닌가. 내가 주장한 민중세상은 그것을 구현한것이다. 그래 이걸 자네가 모른단 말인가? 우리의 현실을 보라. 반공이 《국시》로 되고 련북이 《보안법》의 칼날에 가차없이 죽탕이 되는 파쑈사회에서
우리가 이 구호를 든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발을 붙여야 한다. 현실을 떠난 구호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따라서 민중에게 접수될리
만무다. 정치를 놓고 량자택일의 론리를 세우는것은 위험한 탈선이다. 정치는 현실이다. 현실에 발을 튼튼히 붙이지 못할 때 정치는 리상에 불과하며
패배를 면할수 없다. 구호도 원칙도 그자체를 위해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물론 그 누가 이 천령배처럼 네가 공산주의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할수 없다. 내가 일찌기 공산주의자가 되기를 기피한 까닭이다. 그러나 제발 이에 대해 전향으로 몰아대진 말아다오!) 조봉암의 심장은 이렇게 열렬하게 부르짖고 호소하고 주장하고있었다. 이러한 심장의 주장은 종종 자신의
정치적색채에 혐오가 느껴지거나 자기가 찾아낸 제3의 길이 일생을 바쳐온 민중해방위업에 대한 탈선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마다 해보는 자기변명이고 위안이기도 하였다. 천령배의 조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지난 5년간 감방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더우기는 해방후에 벌려온 자신의 투쟁에 대하여 랭정하게
자기 검토를 하였습니다. 뼈저린 가책을 금할수 없습니다.》 《뼈저린 가책?!…》 조봉암은 천령배의 말을 받아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인가 자기의 가슴을 예리하게 파고드는것이 있었다.
(해방후 천령배의 투쟁이라면 대체로 나의 이름과 결부되여있다. 그러니 천령배가 감방에서 했다는 검토는
자신뿐아니라 우리가 함께 벌려온 투쟁전반을 포괄하고있을것이다.) 천령배의 뒤말이 기다려졌다. 대답이 두렵게도 생각되였다. (뼈저린 가책이라니… 그런즉 천령배는 우리의 투쟁을 부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했다는것이다. 무엇때문에? … 어떤
의미가 있을가?…) 조봉암은 속이 활활 끓어번지는것을 느끼며 천령배의 뒤말을 기어이 듣고싶어 그늘이 비낀 그의 옆모습에 눈길을
박은채 떼지 않았다. 천령배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짤막하고 은근하였으나 그것은 조봉암의 심혼에 가해진 또 하나의 드센 방망이였다.
천령배는 자기의 볼에 파고드는 조봉암의 시선을 의식하자 괴롭게 고개를 떨구고는 입을 쉬이 열지 못하였다. 조봉암은 천령배를 진퇴가 어려운 미궁에 밀어붙이고있다는 생각이 들자 《음-》 하고 괴롭게 숨을 내쉬며 눈길을
거두었다. 돌연 천령배가 입술을 철문처럼 닫아붙인 조봉암에게로 몸을 던지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선생님!》 조봉암은 사랑하여마지 않는 전우의 듬직한 어깨를 꽉 그러안았다. 드디여 열렬한 심장들은 부딪치고 얼싸안고 툭툭 급하게 마주쳐오는 상대방의 맥박과 호흡을 헤아렸던것이다.
천령배는 조봉암의 가슴에서 뿜어져나온 심장의 메아리를 가려들었다. 《선생님을 괴롭혔습니다.》 천령배는 조봉암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채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 나를 또 한번 매질해준거지. 령배가 아니면 누가 나에게 그런 경종을 울려주겠소?! 령배, 내
다시금 맹세하오. 살아도 죽어도 그 길에서!…》 《선생님!》 천령배는 두손에 힘을 모아 존경하는 스승의 허리를 그냥 부여잡았다. 잠시후 그들은 다시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천령배가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숨쉬기조차 괴로운 이 땅을 떠나고저 합니다. 용서하여주십시오. 반공의 아성인 미국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당의 간판을 내걸고있는데 어찌하여 우리 땅에서는
그게 <국시위배>요, <보안법>관련이요 하며 문제시돼야 합니까?! 저는 미군이 강점하고있는 이 척박한 극우의 풍토에서 정당정치란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것이라고 이미전부터
생각하여왔습니다. 더는 자기의 얼굴을 감추고 살고싶지 않습니다.》 《그럼, 북에? …》 《아닙니다. 그거야말로 투쟁에 대한 포기요, 지옥에서 락원에로의 도피행이지요.》 《뭐, 그렇게까지 모나게 생각할건 없소. 나도 이따금 훌떡 38
《선생님, 선생님은 이 땅의 민중을 버리고 절대로 참호를 넘어 락원행을 하지 못하실겁니다. 저도 이 땅을 떠난다 하여도 선생님가까이에서 숨쉬고저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가겠소?》
《일본으로 가고저 합니다. 그곳에서 선생님의 싸움을 지원하려고 합니다. 우리 당에 대한 국제적인 련대성을 강화하는 사업도 그리고 기타 사업도 효과적으로 조직할수 있으리라고 보아집니다. 앞으로 진보당이 자기의 조직기구를 완비하면 저는 도꾜에 해외지부나 당대표부를 내오겠습니다.》
《음, 그것도 중요하구 필요한 투쟁이요. 그런데 여기를 떠난다는게… 후- 난 망명객의 슬픔을 뼈속깊이 체험했던 사람이요.
령배! 이 사람아, 다시한번 생각을 굴려보는게 어떤가? 일시적감정이나 충동이라면… 후회하지 않을가? … 제 나라를 떠나 산다는게 고행일세. 설음이지.》
《각오합니다. 이건 어제오늘이 아니라 감방에서 오래동안 따져보고 세워놓은 결심입니다. 다만 이런 말을 하자니 가슴이 아픕니다. 선생님을 이곳에 두고 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을것 같습니다.》
《음- 그렇단 말이지.…》
조봉암은 괴로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떠나겠다는 결심이 드팀없을것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쪽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어서 떠나가라고 선뜻 등을 떠밀수 없는것이 안타깝기도 하였다.
천령배는 조봉암과는 달리 박헌영과 대판들이로 싸움까지 하고 공산당에서 나왔다.
료정에 가서 기생들을 차고 먹자판을 벌려놓고있던 박헌영의 멱살을 거머쥐고 《네가 과연 공산주의자가 옳으냐?》고 따지고 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박헌영이 눈을 뜨고있는 공산당의 대문안에 다시는 기웃거리지 않겠노라고 선언하고 뛰쳐나온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여적 몸바쳐온 리념에 충실하고 가슴속깊이 간직한 그 세계에서 살려고 모지름을 쓰고있다.
아, 참으로 사상은 얼마나 정의롭고 위대한가. 그 기발을 추켜들 때 인간은 얼마나 고결해지는가. 그 기발을 지킬 때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조봉암은 새로운 감동으로 속이 훈훈하여왔다.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 나는 왜 그를 곁에다가 붙잡아두려고 머뭇거리는가. 이것 역시 사리가 아닌가. 나를 위한 일방적인 헌신만을 요구하는것은 동지적감정이 아니다.
천령배는 어데 가서나 우리의 대오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게 될것이다. 그는 무겁게 생각을 굴려 말을 하며 일단 입에 올린 말에 대하여서는 책임을 지고 신의를 지키는 인간이다. 그는 우리의 위업, 민중의 위업을 위하여 보다 유익하고 보다 활력있는 지원을 해줄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안에는 현실적인 타산도 있다.
이제 천령배가 완전석방된다고 하여도 《부역자》로서의 딱지가 붙게 되며 그것때문에 정치활동에서 제한을 받을것이 뻔하다. 그를 《국제공산당파견간첩》이라고 몰아붙였던 놈들이 앞으로 그에게 무슨 트집인들 걸지 못하겠는가.
그의 걸음걸음에 쌍심지를 켜고 막아나설것이다. 사실 그의 문건에는 적어도 10년간 일체 정치활동에 관여할수 없다는 문구가 쪼아박혀있었다. 뿐더러 석방후에 한주일에 한번씩 거주지 경찰서에 출두하게 되여있었다. 그의 손발을 꽁꽁 묶어 조봉암에게 합류하지 못하게 하려는 리승만일파의 악착한 책동이였다.
마침내 조봉암은 그의 결심을 지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