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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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이 후련한 가슴을 안고 회의장을 나서는데 윤기중이 따라서며 불렀다.

《천령배비서가 병보석으로 대구감옥에서 풀려나왔다고 합니다. 그의 부인이 전화로 알려왔습니다.》

《뭣이?! 천령배가?! …어데 있다오?》

조봉암이 방안이 쩌렁하게 큰소리로 물었다.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시킨걸 제가 사촌형이 원장으로 있는 여기 서울내과병원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올라왔을겁니다.》

《그래?! … 음, 큰 시름이 풀렸군. 선거를 앞두고… 좋은 소식이요. 우리 당이 흥할 길한 조짐이요!》

조봉암은 너무 기뻐 어쩔줄 몰라하였다. 껄껄 웃으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천령배가 철창속으로 끌려간지도 여러해 되여온다.

천령배는 해방전부터 조봉암을 따라다니며 사회주의운동가로 활약하던 사람이였다. 명석한 두뇌와 예리하고도 심도깊은 필치로 조봉암을 성실하게 보좌하여온 재능있는 활동가였다.

그들은 눈빛 한점을 보고도 서로의 속셈을 읽어내는 가까운 사이였다.

조봉암이 해방직후에 인천에서 공산당조직을 뭇고 시당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에도 천령배는 그의 오른팔이 되여 늘 붙어다니였다. 박헌영이 조봉암을 일체 좌익계렬의 공직에서 추방할 때 조봉암의 심복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천령배도 쫓겨났다.

천령배는 그후 조봉암이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하자 서슴없이 그의 비서가 되여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강력히 주장하고 농업공동조합조직법안을 만들고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다 썼다.

조봉암이 제3의 정당건설구상을 내놓았을 때 신당의 대중적지반으로 농촌마다에 농가회의를 설립하도록 기안하고 적극 밀고나간것도 천령배였다.

당시 조봉암은 신당건설을 여러모로 생각하다가 리승만의 독재적전횡에 맞선다는 의미를 담아 자유당이라고 우선 이름부터 달아놓았다.

그리고는 당시 미국놈들의 후각을 마비시키기 위하여 외관상 당의 강령으로 미국대통령 루즈벨트가 요란스럽게 제창하던 《4대자유》를 내세웠다.

루즈벨트는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궁으로부터 벗어날 자유, 공포로부터 벗어날 자유》라는 네가지 정치적미끼로 자기 나라 국민들의 환심을 사가지고 백악관에 입주하였다.

조봉암과 천령배는 신당건설과 자기들의 좌익경력에 최대의 신경을 쓰고있는 미국놈들의 신경을 너누룩하게 해주기 위하여 루즈벨트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던것이다.

루즈벨트라는 방탄복을 입은것을 미국에 추파를 던지는것으로 리해한 미국대사 무쵸까지도 조봉암의 신당건설을 지지하였다.
당시 설치된 신당준비사무국 책임자로는 천령배가 임명되였다. 여기로 당시 리승만에게 반기를 든 여러 정치세력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한해도 지나지 않아 조봉암이 전국적인 농민조직을 기반으로 한 당건설을 시도하는 낌새를 알아챈 리승만이 심술을 부리며 그가 만들어놓은 농민조직을 가로챌 흉심을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리승만은 흉칙하게도 자유당의 명칭을 가진 당을 결성할것이며 그 지반으로 될 관제농민단체를 창립한다는것을 제 먼저 공포하여버렸다. 이것은 조봉암의 신당건설에 대한 공공연한 탄압이였다. 조봉암의 자유당건설을 권력의 힘으로 봉쇄하려는 정치적사기행위였다.

그러나 조봉암과 천령배가 리승만의 책동에 맞서 신당건설에 박차를 가하자 리승만은 그해말에 김창룡의 륙군특무대를 내몰아 신당사무국 책임자인 천령배와 관계인물들을 50여명이나 련행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전쟁시기 부산일대를 뒤흔들어놓은 국제공산당프락찌야사건이였다.

조봉암이 여기저기로 발이 닳도록 뛰여다닌 덕으로 1심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천령배에게 해방직후의 활동을 문제삼아 징역 5년이 선고되였다. 나머지 피고들은 다 무죄로 석방시켰다.

결국 조봉암이 조직해온 자유당도 리승만이 기도한 자유당에 흡수되여버렸다.

뒤날 조봉암은 자기를 대신하여 희생양으로 된 천령배의 만기전 석방과 그의 가족들의 생활에 대하여 늘 관심을 돌려왔다. 그런데 드디여 이렇게 감옥에서 풀려나온것이다.

《어서 가세, 병원으로!》

조봉암은 희색이 만면해서 차에서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맏사위 김봉무에게 말했다.

《연경아, 너도 함께 가자. 천령배비서를 너도 잘 알지. 그래그래… 가다가 뭘 좀 마련해가지고 가야지. 어, 윤기중이, 우달수, 신창균… 함께 가세. 이건 우리 당이 길할 조짐이 틀림없어.》

조봉암은 어린애처럼 들떠서 바래주러 나왔던 사람들까지 이사람저사람 불러대며 즐거운 미소를 함뿍 지었다.

꺼칠해있던 아버지의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이 만발한것을 본 연경이도 덩달아 눈시울이 불깃불깃해졌다. 지나간 몇해동안 천령배와 함께 옥에 갇힌 심정이 되여 속을 태워온 아버지에 대한 동정과 련민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아릿하게 하였다.

그들은 인차 중절모를 푹 눌러쓴 윤기중을 자동차의 앞좌석에 태우고 내과병원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서울시가지에서 번화가라고 불리우는 명동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교통순경이 갑자기 정지신호를 주었다.

《왜 그러오?》

《소와 말들이 시위를 하고있소. 이제 우마차대렬이 여길 지나가니 기다리시오.》

교통순경의 늘어빠진 대답이였다.

《소와 말들이 시위를 한다니 그게 무슨 말같지 않은 소리요?》

김봉무가 교통순경의 말이 황당해서 꽥 소리질렀다.

《부산에서 민의운동이 시작된걸 모르시우? 리박사가 대통령 안하겠다는데 소와 말이라고 가만있을수 있는가?! 그래 그것들도 민의운동에 한바탕 나섰다는거요.》

교통순경도 대답을 해놓고보니 짜장 우스웠던지 키득거렸다.

둘러보니 숱한 차들이 오도가도 못한채 주런이 차도로에 묶이워 있었다.

연방 꼬리를 물고 늘어서는 바람에 돌아설수도 없어 김봉무는 윤기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는수 없지. 거 뭐 소와 말들이 시위한다니 구경해봅시다. 볼만 하겠소.》

윤기중이 히죽이 웃으며 늘어진 어조로 대답을 주었다.

잠시후에 인천행 대도로방향에서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눈앞으로 가까워왔다.

어데서 들이닥쳤는지 소와 말들이 끄는 수백대의 우마차대렬이 중심도로를 넉줄로 차지하고 덜커덩거리며 굴러오고있었다.
우마차들에는 오색기발과 함께 《리승만박사를 다시 경무대에 모시자!》라고 쓴 프랑카드들이 봄바람에 펄럭이고있었다.

조봉암과 일행은 자동차에서 내려 끝없이 이어지는 우마차행렬을 구경하였다.

서울이 생긴이래 처음으로 보는 희한한 광경이였다.

삽시에 서울에서도 호화판 거리라고 하는 명동네거리에 소똥냄새가 코를 찌르고 《음메- 음메-》 하고 경쟁적으로 길게 뽑아대는 소들의 구성진 영각소리와 말투레질소리가 시가지를 흔들어놓았다.

자동차와 전차에 타고있던 승객들뿐아니라 오가던 행인들과 명동네거리를 에워싸고있는 고층아빠트와 기관청사들에서 일을 보던 시민들도 난생처음 보는 이 희한한 구경거리를 놓칠세라 창문을 열고 코줌방을 싸쥔채 내려다보며 희희덕거렸다.

우마차행렬에서 시누런 천으로 머리를 질끈 동인 농군들이 이따금씩 소영각소리를 짓누르며 창자가 터지도록 일제히 소리를 지른다.

《리승만박사를 경무대에 다시 모시자!》

자유당패거리로 짐작되는 젊은 녀석들이 우마차의 사이사이에 끼여들어 메가폰에 입을 대고 우마차들의 간격을 보장하라고 몰아대는가 하면 더 기운껏 구호를 웨치라고 을러메는 악다구니가 그들에게까지 들려왔다.

하기는 뛰여다니기 좋아하는 말들과 느렁뱅이소들을 한대렬에 나란히 세우고 몰고 가는게 고역이 아닐수 없다.

우마차에 앉아 고삐를 잡고있는 소몰이군들은 엉기적엉기적거리며 아스팔트우에 함부로 오줌똥을 쏴갈기는 소들의 여윈 엉뎅이에 연해연방 채찍을 휘둘러댄다.

그런가 하면 말몰이군들은 한바탕 달리고싶어 대갈질하는 말들의 보폭을 소들의 느린 걸음에 맞추기 위하여 말고삐를 뒤로 잡아채느라고 웃고 손가락질하며 떠들썩거리는 시민들을 둘러볼 경황이 없다.

《에도는 길이 없을가. 메스꺼워서 보지 못하겠군.》

신창균이 눈살을 찡그리며 두덜거리는데 윤기중이 반죽좋게 그 소리를 받았다.

《뭘 그러시오. 구경거리치고는 꽤 눈맛이 있는데. 에돌기는 어떻게 에돈다고 그러시오? 엊그저께는 부산에서 녀인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리승만을 부르며 통곡해서 세상을 웃겼다더니 여기서는 소와 말들이 민의에 합세했구려. 가관이군. 세상에 처음 보는 일이요. 어데 가서 돈을 낸들 이런 구경을 해보겠소. 자유당이 참 엉뚱하군. 하하…》

윤기중이 너무도 기괴망측한 광경에 폭소를 터뜨렸다. 모두가 배를 그러쥐고 웃었다.

우마차행렬은 한시간이 퍽 지나서야 명동네거리를 벗어나 경무대가 자리잡은 북악산기슭을 향하여 여전히 영각소리, 투레질소리, 고함소리, 삐거덕거리는 달구지바퀴소리를 야단스럽게 내지르며 느릿느릿 몰려갔다.

우마차가 굴러간 도로들에는 소와 말들이 어정어정 걸어가며 갈겨버린 누런 똥오줌이 한벌 깔리여 가뜩이나 매연이 서린 서울의 공기를 악취로 더럽혀놓았다.

《리승만이 치사하기 그지없군. 소와 말같은 미물들까지 민의운동에 내세우다니. 이제 도로청소부들이 노발대발하겠군. 똥오줌은 누가 갈겨놓고 거기에 미끄러져 코박을 놈은 누구냐고…》

윤기중이 아직도 웃음을 참을수 없어 껄껄거리는데 우달수가 덜커덩거리며 멀어져가는 우마차행렬을 쏘아보며 신중하게 분석을 가하였다.

《아니 웃어넘길 일만이 아닐것 같소. 내가 세여봤는데 300대는 넘어되겠소. 300대의 달구지면 서울근방의 거의 모든 농촌마을을 동원시킨셈이요. 결국 서울교외의 농촌을 자유당이 전반적으로 장악하고 벌써 교묘하게 선거공세를 시작했다는거요.

치사스럽기는 해도 매우 치밀하고 공개적이며 광범하다는데 문제성이 있소. 우리 당의 선거운동대책을 점검해봐야겠소.》

조봉암은 어지럽게 굴러가는 달구지들을 바라보다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동차에 올랐다.

자동차는 윤기중의 손짓에 따라 명동네거리를 벗어나 한강변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질주하였다.

자동차는 어느새 중량천으로 꺾어들어 망우리고개를 넘어 불암산줄기의 깊은 계곡으로 빨려들듯 들어갔다.

조봉암은 자동차의 등받이에 허리를 붙이고 눈을 내려붙인채 무거운 상념에 빠져들었다.

리승만의 내흉스러운 몰골이 우마차행렬에 어울려 떠올랐다.

리승만이 바로 열흘전에 기자들을 경무대에 불러놓고 자못 비장하게 선언하였다.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을 두번이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본인은 북진통일도 못하였고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대통령선거에 나서지 않겠다. 나이도 이젠 나라의 상좌에서 왈가불가할 때를 지났다. 이건 본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내린 대용단이니 널리 량해해달라.…》

물론 리승만의 이 수작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승만의 측근에서도 리승만의 이른바 대용단을 두고 최대의 조심을 하나 세상의 눈을 속일수는 없다.

여느때 같으면 리승만이 입을 열기 바쁘게 《각하의 고견은 하늘의 빛이요, 청산의 푸른 기운이요. …》하면서 극성을 부리고 경쟁적으로 개올리겠는데 이번에는 입들을 봉하고 눈치만 살살 보고있다.

괜히 리승만의 대용단이 《위대》하다고 개올렸다가는 옛날 서정후처럼 미움을 받아 《임자, 좀 쉬여보지.》하는 말과 함께 당장 밥통을 떼울것이 분명하였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할것 같으면 《대통령》의 일생일대의 대용단을 놓고 그래서 쓰냐고 속이 없는 지청구를 듣거나 리승만의 립장에 반론을 내돌렸다고 수하에서 쫓겨날 판이다.

자유당의 요직인물들중에서 비교적 천진한 사람들이나 저들끼리 뒤에서 이제는 고불통을 들어내게 되였다고 락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민주당의 신익희와 진보당의 조봉암을 맞붙여 선거전을 벌리게 하는게 상책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한다. 하지만 선거날자가 박두한 지금에 와서는 그들도 리승만이 절대로 제발로 옥좌에서 내릴 위인이 아니라는 견해에 동조하고있다.

리승만의 얕은 계교는 열흘도 안되는 지금에 이르러 밑바닥이 드러났다.

《민의운동》이 전번 선거때 세상을 들썩거리게 했던 《민의》의 발상지인 부산에서 시작되였던것이다.

사흘전에 부산의 중심도로로 소복단장을 한 가정부인 500여명이 《대한부인》이라고 쓴 완장을 두르고 굿장단에 신바람난 무당들처럼 팔과 다리를 너울너울 휘저으며 걸어갔다.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그들은 마치도 달보고 짖는 개처럼 그냥 고아댔다.

이따금 대렬의 여기저기서 저네들의 소견에도 주제가 볼성 사나워보였던지 깨드득 웃음소리도 났는데 귀청째듯 아츠럽게 날아가는 욱박지름에 눌리워 인차 잦아들군 하였다.

그런데 그 녀인들이 시청앞광장에 이르러 별안간 일제히 보도우에 꿇어앉더니 쪽진 머리를 풀어헤치고 대성통곡부터 터뜨려놓았다. 그러면서 저마끔 《리박사께서 대통령을 그만두시겠다니 세상에 이런 변이 또 있겠소.》하고 꺼이꺼이 설분을 토해놓는것이였다. 녀인들은 한시간이나 내내 돌포장을 한 시청마당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이마를 쪼으며 닭의 물똥같은 눈물을 쭈룩쭈룩 쥐여짰다.

녀인들이 그 누군가의 구령에 따라 팔을 내두르고 애고대고하는 통곡을 높였다낮추었다, 끊을락이을락하는데 그 꼴이 얼마나 망측했던지 부산시안의 아이들이 다 모여들어 그 흉내를 내느라고 이마빼기로 보리방아를 찧으며 웃고 떠들고 법석거렸다.

거기에 오가던 행인들까지 모여들어 한바탕 부산이 생겨나 처음 보는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그런데 가관은 이날 부산과 서울의 석간신문들이 일제히 《두번째 시일야방성대곡인가? 부산이 호곡하노라》라는 요란한 표제를 달고 부산녀인들의 미친 짓거리를 대서특필로 보도한것이다.

신문들은 녀인들이 통곡하는 사진까지 곁들어 부산부인들이야말로 《애국》에 몸살이 나고 리승만에게 줄줄이 《헌신할 각오
가 투철한》 이 나라 녀인들의 귀감이라고 칭찬인지 야료인지 아리숭하게 극구 떠들어댔다.

뒤날에 들려온 말에 의하면 이날 저녁 이마를 돌바닥에 쫏느라고 새알같은 혹을 두세개씩 만들어가지고 집에 돌아간 녀인들은 주제가 망측스러워 누구라 없이 남편들의 주먹찜질을 면하지 못하였고 이를 가상히 여긴 시청에서 포상금 1만환씩을 주어 남편들을 진정시키고 녀인들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부산녀인들이 터뜨린 통곡을 발화점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민의》라는 해괴한 광대극이 미친듯이 벌어져 세상을 웃기였다.

어제 조간신문들에는 시민들과 시외의 농민들 20만명이 참가한 리승만추대국민대회가 한강변에서 열린 소식이 일제히 실렸다.

자유당과 군과 면에 깔려있는 파출소들이 총동원되여 얼리고 때리며 끌어낸 촌사람들이였다.

그들은 리승만이 웅거하고있는 경무대를 에워싸고 《우리의 대통령은 리승만!》, 《다시 리승만박사를 모시자!》 하고 한바탕 기세를 올렸다고 한다. 그들의 안주머니에는 이날 점심을 치를수 있는 돈과 함께 수건, 양말짝 등속이 하나씩 들어있었다. 열성껏 소리쳐대는 값으로 자유당지부들에서 안겨준 리승만의 선사품이였다.

어제 오후에는 서울시내의 중, 고등학교 교장들이 내무부의 등쌀에 견딜수 없어 학생들과 함께 바람에 흩날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리승만할아버지, 대통령을 안하겠다니 웬 말씀입니까? 그러면 멸공통일은 어떻게 합니까?》라는 구호판을 들고 경무대에 몰려가 여러 시간 리승만의 치적에 대한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불렀다고 한다. 그들에게도 공부를 하루 건너뛰기까지 하면서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른 값으로 미국제껌봉지가 하나씩 차례졌다.

관권의 압력에 고개를 꺾은 서울의 일부 영화인들과 무대예술인들도 끌려나와 거리를 누비였다. 그들의 손에도 역시 《리박사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시는 날은 서울영화가 망하는 날입니다》라는 구호판이 들려있었다.

지어는 여러 고장에 널려있는 비구승들까지 끌려나와 《나무아미타불, 리승만박사는 나서시오!》 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거리를 휩쓸고있는 판이다.

사실 이것은 리승만의 안방에서 몇몇의 모사들이 짜낸 각본에 따라 감행되는 일종의 선거운동의 시작이였다.

조봉암은 강화섬에서 겪었던 일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거기서도 농사군들과 어민들이 모여들어 리승만추대운동을 벌려놓았을것이다. 리승만은 다른 후보들에게는 선거유세를 선거일 한달전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법》으로 못박아놓고는 제놈은 이런 요사스럽고 껄렁한 짓거리로 벌써부터 선거운동을 남녘의 전역에서 벌려놓은것이다.

하기에 리승만이 제아무리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지껄여도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는 정치가란 몇되지 않는다. 좀 식자가 있고 량심의 끄트머리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침뱉고 돌아서기 십상이다.

거짓과 모략을 능사로 여기며 귀맛좋은 요설과 아첨이 체질화 되고 폭압에 환장이 된 무지막지한 사기군들만이 리승만의 주위에서 그가 던져주는 권력과 재물에 입을 벌리고 남아있을뿐이다.

리승만이 일이 뒤틀어질 때면 잠꼬대처럼 외우는 념불이 있다.

《이 우남에게 사람복이 없어. 인물이 없다니깐.》

우연이 아니다. 사실상 리승만의 주변에는 나라를 움직일만 한 동량재목이 너무 없다. 정책의 모사도 없고 조직적인 수완가도 없으며 대중을 선도해나가는 선동가도 없다. 다만 만세나 내지를줄 알고 재간이라 해야 치고 부시고 쏘고 찌르는게 전부고 아부아첨에 이골이 난 무뢰한들과 간신배들이 욱실거릴뿐이다.

리승만이 그걸 탓할바가 못된다. 그렇게 된것은 전적으로 리승만자신의탓이다. 그래도 해방직후 서울에 통치집단이 생겨날무렵에는 정치에서 나름으로 일가견을 가지고있는 사람들과 오래동안 독립운동에 관여하면서 두뇌와 주먹을 인정받은 인물들이 리승만에 대한 그릇된 정보와 그로부터 생겨난 환상에 물젖어 그의 두리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길게는 한두해, 대체로 두석달을 채우지 못하고 리승만에게서 쫓겨나거나 침을 뱉고 제발로 떠나버렸다. 전횡과 반역과 매국이 참기 어려운 구린내를 풍겼던것이다. 거기에 리승만이 본처를 제껴놓고 끌어들인 서양녀편네까지 치마바람을 너무 야하게 일구어 도대체 인간이라는, 정치인이라는 체면을 가지고서는 견디여낼수 없었던것이다.

이제 저 더럽고 용렬하기 그지없는 달구지시위를 놓고 외국사람들은 뭐라고 할가. 그네들이 조선사람들의 문명에 대하여 어떻게 평하겠는가. 서울의 정치가들의 정치의식수준에 대하여서는 뭐라고 론하겠는가.

조봉암은 어쩐지 자기가 저 치사스러운 놀음을 벌려놓은듯싶어 수치감에 얼굴이 화끈하여왔다.

리승만은 이제는 로망기가 성해서 분별을 잃고 산다고 쳐도 그 수하에 저렇게도 무지하고 단수가 낮은 모사들밖에 없다는것
인가.

저것은 자유당이나 리승만일파는 젖혀놓고라도 민족의 수치일수밖에 없다.

조봉암이 이렇듯 통분한 생각을 그냥 이어가는데 자동차가 멎어섰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차있고 사이사이에 구름나무와 과일나무가 구색에 맞게 어울려있는 수림속에 물매가 급하게 솟은 고지크식양철지붕을 한 2층짜리 서양건물이 여러채 나타났다. 기하학적인 선과 각이 뚜렷한 매우 아담하고 산뜻한 건물인데 병원이라기보다 마치도 료양지의 정각들같이 느껴졌다.

윤기중이 건물의 외양과는 달리 적갈색의 벽돌담벽이 무겁게 둘러간 철대문앞에 다가가 초인종을 눌렀다.

인차 몸이 바짝 여윈 사람이 총총히 걸어나왔다. 대문지기인 모양이였다.

윤기중은 그에게 《국회》의원 명함장을 내보이고는 원장을 찾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경비원이 철대문안으로 다시 들어가버리자 윤기중이 설명하였다.

이 건물은 일제때 아베총독과 고관들의 별장이였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미강점군사령관 하지와 군정장관들이 이곳에 와서 경개좋은 산수를 즐기며 유흥을 하고 치료도 받았다. 그러다가 해방전 서울일경에 내과의로 명망이 높던 윤기중의 사촌형을 이곳에 끌어다놓고 아예 하지와 몇몇 고관전용내과전문병원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가 물러간 다음에도 이 병원은 여전히 미국의 현지고위인물들이 기본이 되여 유흥 겸 치료를 받는 료양소로 운영되고있
었다.

원장은 전쟁시기 인민군부상병들을 치료하여준것으로 하여 화를 크게 입을번 했다. 하도 의술이 능한데다가 그의 치료를 받은 미국고관들이 리승만까지 꾹 눌러놓아 지금까지 병원을 유지하여오고있다.

이윽고 위생복을 입고 목에는 청진기를 두른, 아직도 눈자위가 맑고 얼굴에 벌깃한 혈색까지 도는 로인이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나왔다.

《자네가 어떻게? … 오라, 천령배선생때문에…》

로인은 중절모를 벗어쥐고 다가오는 윤기중을 띄여보자 호인같은 푸수하고 선한 얼굴에 반색을 지었다.

윤기중의 사촌형이라 하여 중년배로 생각하고 왔던 조봉암은 백발을 떠인 풍신좋은 로인이 싱글싱글 웃음을 날리며 다가오자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우리 동지를 받아주시는게 헐치 않았겠는데…》

윤기중이 재빨리 소개를 하였다.

《우리 진보당 당수이신 죽산 조봉암선생님이십니다. 저 왕년에 국회부의장과 농림부 장관을 두루 력임하셨던…》

《아, 죽산선생님… 선생님의 성함과 지체를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왔소이다. 우리 나라의 민중대표이신 선생님의 성함을 이 산속에 은거하고있는 의원이라고 해도 왜 모르겠습니까. 이렇게 존안을 뵈오니 그지없이 반갑습니다.》

로인은 조봉암에게 정중하면서도 례절바르게 인사를 차렸다.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원장님의 치하를 받기가 너무 황송합니다. 민중을 위해 살아온다고 소문만 냈지 민중을 위해 해놓은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봉암이 겸양을 보이자 로인이 더욱 감복된듯 손을 휘휘 내둘렀다.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5천년력사가 이루지 못한 뜻을 세우는 일인데 그게 식은 죽 먹듯이야 되겠습니까.

자고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란 말은 목탁우의 념불에 불과하였지요. 력대의 임금들이란 노상 만백성 위한다고 떠들어왔지만 뒤끝에 차례지는것은 언제나 주림과 헐벗음과 고됨뿐이였지요.》

《원장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저의 구호도 목탁우의 념불로 그칠가봐 걱정스럽습니다.》

《제 방금전에두 천령배선생을 진찰하면서 선생님얘기를 들었습니다. 약관의 청년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난하고 당하기만 하는 민중을 위해 분투해오셨다는 얘기였지요. 그 사람이 여러해 옥살이를 했다는데 시국을 두루 살피는 혜안이 참 신통합디다.》

《예, 훌륭한 동지입니다. 그 사람은 일찌기 전쟁와중에서 실은 제가 당해야 하는 고초를 받아안고 령어의 몸으로 여러해동안 고생했습니다.》

《그 사람 말이 이제 죽산선생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어지러운 세상이 훌딱 뒤집혀질것이라 합디다. 그러면 우리 남녘사회도 북녘처럼 깨끗해지고 조봉암선생의 천하에서 민중이 마음놓고 편하게 사는 때가 올것이라고요. 나라의 통일도 성사되고…》

《어찌 조봉암의 천하겠습니까? 민중천하입지요. 민중이 하나로 뭉쳐 뜻과 힘을 합친다면 민중이 주인이 되는 만민복지의 민중천하가 기필코 올것입니다.》

원장의 말에서 크게 흥분된 조봉암은 그 무슨 장쾌하고도 거대한 바다가 가슴속에서 움씰거리면서 갑자기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워옴을 느꼈다.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 그 사람이 지금 포도당점적을 받고있습니다. 몸이 너무 허했습니다.》

로인은 조봉암일행을 안내하여 어느 한 건물을 향해 뚱깃뚱깃 걸어갔다.

그들이 접수실에 들어서자 간호부가 눈처럼 하얀 위생복을 하나씩 안겨주었다. 위생복을 걸친 일행은 원장을 따라 천령배가 입원한 호실로 들어갔다.

볕이 잘 드는 남향받이의 정갈한 방이였다. 침대는 하나이고 쏘파가 주런이 있고 큼직한 원탁도 있는걸 보니 고관들이 쓰던 방인것 같았다.

팔에 점적바늘을 박은채 무던하게 생긴 중년녀인과 이야기하고있던 천령배가 줄레줄레 들어서는 조봉암일행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입에서 환성같은 웨침이 일행을 향해 총알처럼 날아갔다.

《아, 선생님!》

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봉암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하였다. 천령배의 안해였다.

《고맙습니다. 저희들은 지금 선생님의 얘기를 하던중입니다.》

《이러지 마우. 어서 일어나시오. 이 사람은 내게로 날아온 살을 대신해서 받아준 내 평생의 은인이요.》

그러자 누워있던 천령배가 벌써 두볼에 눈물줄기를 세우고 소리쳤다.

《여보! 간호부아가씨를 불러오오. 어서! … 내가 죽산선생님을 누워서 맞아서야 되겠소?!》

조봉암이 그에게로 다가가 반가움과 고마움에 젖어있는 천령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윤기중이! 신창균! 우달수! … 다들 왔구려. 연경이도 왔구나. 감방에 있을 때 너희 자매의 웃는 모습이 제일 보고싶
더라.》

천령배는 자기를 에워싼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목메여 불렀다.

《선생님, 우리도 무척 그리웠어요.》

연경이도 울먹이며 그의 손을 잡아 얼굴에 비비였다.

《령배, 이 사람! 진정하오. 원, 이렇게 상했다구야… 무정한 이 조봉암이 임자에게 할 말이 없소.》

조봉암의 눈에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선생님,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할바를 했고 제가 한 모든것에 지어는 징역살이조차도 자부심을 가질뿐입니다. 더구나 제가 선생님을 일찌기 모셨고 선생님의 뜻을 받들어 고초도 겪고 옥살이랑 한것을 한생의 행운으로, 복으로 생각합니다.》

천령배는 자기때문에 괴로워한 조봉암의 심중을 너무도 잘 알고있는지라 이렇게 진심으로 오히려 조봉암을 위로하였다.

천령배의 안해가 간호부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 간호부아가씨! 이걸 좀 뽑아주오.》

《아이, 그래서는 안돼요.》

간호부가 손을 내둘렀다.

《부탁이요. 죽음이 눈앞에서 늘 오락가락하던 가막소에서도 살아나왔는데 아무렴 병원에 와서 숨이 꺼지겠소?! 난 여러해 철창에 갇혀 선생님께 인사 한번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오. … 도와주오. 누워서 인사를 하다니… 이런 인사불성이 어데 있소?!》

《야, 정말… 안됩니다.》

키가 작고 소담하게 생긴 간호부가 어쩔줄 몰라 원장에게로 도움을 바라듯 쳐다보았다.

원장이 호인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천선생 부탁을 들어주는게 좋을것 같군. 그게 아마도 건강회복에 어떤 보약보다 훨씬 유익할수 있을거요.》

원장은 뜻을 같이하는 의로운 인간들의 뜨거운 동지적세계에 자기도 모르게 취해들었던것이다.

그러나 조봉암이 간호부를 막아나섰다.

《그러지 마오. 령배, 뭘 급해서 그러오? 가만히 누워있소.

얌전히 누워있는 임자 얼굴을 좀더 보자구. 우리 함께 스무해세월 가까이 보냈지만 언제 한번 이렇게 편안한 자리에 있어본적이 있었소? 나는 항상 들볶아대구 임자는 언제나 뛰여다니기만 했지.》

조봉암이 정에 넘쳐 천령배의 훌쭉 깎인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손으로 쓰다듬어주자 당자는 더구나 감개에 목이 메여 흐느꼈다.

《자, 어서…》

사나이의 울음섞인 독촉에 떠밀리운 간호부가 하는수없이 천령배의 팔에서 점적바늘을 뽑아주며 속삭이듯 타일렀다.

《30분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고 누워계세요. 인차 움직이면 심장에 큰 부담이 된답니다. 안정을 꼭 해야 해요.》

《허허, 용사가 30분을 참아낼가.… 점적을 달아놓은지 얼마 안되였으니 30분까지 누워있지 않아도 될것 같애. 10분정도는 누워계시오. 그럼 죽산선생님, 말씀들을 나누십시오. 저는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원장은 이렇게 훈훈한 정을 남겨놓고 간호부를 앞세우고 호실에서 나갔다.

조봉암은 원장이 당부한대로 천령배를 10분동안 꼼짝도 못하게 하였다.

침대에 걸터앉은 조봉암도, 울음을 삼키는 천령배도 놓으면 또 멀리 헤여질가봐서인지 서로의 두손을 꽉 잡고있었다.

정과 정이 이어져 흐르는 감동깊은 화폭앞에 일행은 가슴을 울렁이며 말없이 서있었다.

잠시후 자리에서 일어난 천령배는 안해에게 옷을 가져다달라고 재촉했다.

천령배는 흰 바탕에 푸른 줄이 선 환자복을 벗었다. 그의 안해와 연경이가 양복을 입는 천령배를 거들어주었다. 그는 단추까지 꼼꼼히 다 채우고나서 조봉암의 앞에 자세를 바로하고 섰다.

키꼴은 보통인데 뼈대가 단단하고 웃몸이 가로퍼진게 그렇게 차려입고 서니 위엄이 있고 바위처럼 드팀이 없어보인다.

그는 불시에 조봉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하신다는 소식을 옥중에서도 다 듣고있었습니다.

52년 선거때도 그렇구, 54년 국회선거때도 끝내 등록까지 못하시구 그리고 이번에는 진보당의 기틀을 더욱 강화하게 되였고 또다시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시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저는 선생님의 신상걱정부터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정이 어린 차입품을 받을 때마다 너무 그리워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하신 선생님을 뵈오니 이제는 한이 없습니다.》

조봉암이 자기 발치에 엎드려있는 천령배의 잔등에 더운 눈물을 후두둑 떨구었다. 김창룡의 륙군특무대 지하감방으로 천령배가 끌려간이래 수십번 찾아가기는 했으나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이다.

구류장에서나 감옥에서나 천령배는 《대통령》의 허락이 없이는 절대로 바깥사람과 접촉할수 없는 요시찰인물로 등록되여있었던것이다. 그래 차입품은 들여보낼수 있으나 면담요청은 어느 한번도 성사되지 못하여왔다.

리승만은 천령배와 조봉암이 만나면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고 사건의 허위성이 세상에 공개될가봐 될수록 천령배를 외부와 완전히 격페된 감방에서 말려죽이려고 꾀하였다.

세월이 흘러 조봉암과 천령배로부터 사기협잡의 방법으로 가로챈 자유당과 농민조직을 자기의 어용단체로 완전히 길들여놓은 리승만은 그제서야 천령배를 석방할데 대한 류선민차관의 거듭되는 특별사면요청서를 선심이나 쓰듯이 접수한것이다.

《이보게, 령배! 난 자네들앞에 면목이 없는 사람일세. 금진호가 날 따라 선거전에 나섰다가 리승만의 빈축을 사서 헌병사령관하던 원용덕이한테 맞아서 죽었지. 그뒤로는 1군참모장이 나와 가까이 지낸 죄로 또 리승만의 모함에 걸려 끝내 저세상사람이 됐지.…》

조봉암은 여러해동안 옥중에서 모진 고초를 겪으며 몸이 퍼그나 졸아들고 때이르게 희끗희끗 서리가 내린 전우의 머리를 가슴아프게 내려다보며 쓰라린 감회에 갈마들어 그 자리에 굳어진채 스르르 눈을 감았다.

《헌데 임자까지 잘못된다면 내 무슨 낯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산단 말인가?!

령배! … 어서 일어나게. 드디여 우리가 꿈에도 그려보던 신당이 고고성을 울리게 됐네. 진보당은 자기의 후보를 공개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선거에 출진시키게 되였네.

오늘의 이 혁혁한 성과에는 임자를 비롯한 지사들의 붉은 피와 수고가 깃들어있네. 기쁨을 함께 나누게 된것이 정말 기쁘네.
살아돌아온 임자를 보니 난 지금 사단, 군단의 원군을 맞는것 같이 기운이 솟네. 자, 일어나게.》

조봉암은 두손으로 그의 허리를 조심히 부여잡아 일으켰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령배는 연경이며 봉무의 인사를 받고나서 삼총사가 내미는 손을 모두어잡으며 감개무량해하였다.

《이번에도 선생님을 곁에서 보좌하느라 모두들 수고했겠네. 리승만이 그걸 막아내려고 악을 쓰는 꼴이 선하네. 고맙네. 선생님을 지켜드린 자네들이 정말 고맙네.》

《령배, 선생님은 자네 걱정을 할 때면 눈물을 짓군 했지. 우리도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선생님을 보좌하여 언제나 돌파구를 열던 자네가 더없이 그려지군 했다네. 사실말이지 나같은거야 자네 근량에 비교나 될텐가.》

천령배와 나이도 같고 오래전부터 함께 조봉암의 측근에서 활동한 신창균이 그의 한쪽팔을 잡고 진정을 터놓았다.

《천비서의 일감이 산처럼 쌓였지요. 얼른 자리를 털구 당사에 나오시우. 다섯해나 절벽강산에서 팔자좋게 지냈으면 됐지 뭘 아직도 부족해서 침대에서 딩군단 말이요?!》

《아무렴! 속편히 몸을 낼 생각이랑 아예 거두라구요. 아주머니, 랑군님 부산골방으로 데려가 아늑한 보금자리 펼 생각은 아예 마시소. 천비서는 우리 당 서렬에서 두번째 될 인물이니 아예 진보당에 바친셈으로 쳐야 할겁니다.》

《벌써 사업에 착수한걸 보시우. 주로에 나섰는데 누가 앞을 막아선단 말이요?!》

윤기중과 우달수가 겨끔내기로 롱을 하자 방안의 분위기는 인차 화락해지고 웃음이 넘쳐났다.

천령배의 머리맡에 있는 상두대에는 방금 받은듯 한 신문과 잡지며 두터운 책들이 무드기 쌓여있었다.

원래 천령배는 늘 책을 끼고 다니는 박식가였다. 감옥에서도 차입해오는 출판물을 통하여 바깥정세를 예리하게 살피면서 지식의 탑을 쌓는데 시간을 바쳐왔다.

그런 지독한 독서가가 옥살이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새로운 안목에서 사회의 밑바닥을 투시하고 제 현상들을 관찰하기 시작한것이다. 아마도 저 출판물들은 남편의 생활방식과 속내를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는 그의 다심한 안해가 마련하여왔으리라. 조봉암은 상두대우의 출판물들을 보면서 자기가 그저 기쁜김에 한달음에 달려오면서 당의 강령과 규약, 선거공약 같은 문건들을 가져오지 못한 때늦은 후회를 하였다.

《이젠 그만 자리에 오르오. 어서!》

조봉암이 여러차례 타일러서야 천령배는 다시 침상에 올랐다. 그 두리에 여러 사람들이 걸상을 하나씩 가지고 와서 앉았다.
그들은 연경이가 준비해온 다과를 들면서 그동안의 곡절많은 사연을 나누었다.

시간이 흐르자 연경이가 김봉무의 옷섶을 잡아끌고 나가더니 시내에 들어가 점심상을 챙길 여러가지 음식들을 마련하여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병원측의 량해를 구한 다음 넓다란 원탁우에 점심을 차려놓았다. 원장과 담당의사, 간호부까지 찾아가지고 즐겁게 점심을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자 간호부가 다시 점적을 달았다.

천령배는 전우들과 연경이가 엇갈아 펼쳐가는 시국담이며 당의 실태와 투쟁소식들을 들었다.

천령배는 분초를 쪼개가고있을 조봉암에게 너무 페를 끼치는것 같아 그만 돌아가시기를 이따금 권했으나 조봉암은 그저 얼굴가득히 미소를 담고 고개만 끄덕일뿐이였다.

그는 그냥 천령배의 얼굴을 정이 어린 눈길로 굽어보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였다.

이윽고 점적도 끝나고 헤여질 때가 되였다.

문득 조봉암이 방에 들어온 간호부에게 물었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여도 일없을가?》

《예.》

간호부는 발쭉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려보였다.

처녀도 서울민심을 사로잡고있는 조봉암을 이렇게 만나 부탁까지 받게 된것이 무척 기뻤던것이다.

조봉암이 천령배와 함께 방을 나서자 다른 사람들은 방에 남아서 천령배의 안해와 한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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