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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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진- 진- 진진-》
문득 머리우에서 은방울소리같이 청아한 우짖음이 들려왔다. 연경은 걸음을 멈추었다.
처녀는 집을 떠날 때부터 무겁고도 번거로운 고민거리에 짓눌린듯 하냥 숙여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기가 풀려있던 크고 시원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처녀는 날씬한 몸을 솟구며 주위의 정적을 휘저어놓는 정겨운 소리의 임자를 찾아 구름나무의 가지들을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는 신비스러운 자연의 선률을 뽑아내는 숲속의 가수들을 찾아냈다.
물오른 황철나무의 맨 웃초리의 가느다란 가지에 희고 파란 색갈이 아롱진 동박새 두마리가 작은 부채같은 꽁지를 들까불며 신이 나서 노래부른다. 인적기를 느꼈던지 이내 노래를 뚝 끊고 녹두알같은 눈을 돌돌 굴리며 자기 령지에 침입한 낯선 손님을 내려다본다.
《어데서 온 가시내야?》 하듯 고개를 갸웃대다가 처녀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자 아닌보살하며 부리로 가지를 두세번 쫏는다.
《아이참, 고와라! 너희들 동박새로구나!》
처녀의 다물려있던 발깃한 입술이 조가비 빠그러지듯 방끗 열리면서 탄사가 어쩔새없이 튀여나왔다.
처녀의 눈에서 불꽃이 튀듯 생기가 유난하게 반짝거렸다.
처녀의 칭찬에 신명이 난듯 동박새들은 또 한번 기세를 올려 나무를 쪼아대다가 맑고도 아름다운 고음으로 숲속의 소연한 바람소리를 눌렀다.
《진- 진진- 진- 진진-》
겨끔내기로 이어대는 동박새들의 노래에 울적하기만 하던 처녀의 속이 활짝 트이였다.
연경은 저도 모르게 동심에 빠져들었다. 그는 새알같은 돌멩이를 살그머니 주어들었다가 생각을 바꾼듯 조심스레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연경은 두손을 옆구리에 올리면서 억실억실한 눈아래로 코마루가 보기 좋게 솟은 둥실한 얼굴을 들었다. 새들을 쳐다보는 그의 눈과 곱게 선이 돌아간 입가에 천진하고도 다감한 웃음이 바글거리였다.
연경은 동박새들의 노래가락을 장난스럽게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도툼하게 내불린 처녀의 입술새로 챙챙한 동박새의 노래소리가 튀여나갔다.
《진- 진진- 진- 진진-》
동박새들은 숲속에 찾아든 손님이 사귀여볼만 한 상대라는것을 확인한듯 웃초리에서 포르릉 날아와 연경의 머리우를 빙빙 감돌다가 가까운 나무가지에 와서 사뿐히 앉는다. 한동안 앙증한 꽁지를 촐싹거리더니 맑고 쟁쟁한 소리로 다시 우짖기 시작한다.
연경이도 다시 꼭같은 음조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유년과 소녀시절을 부모들의 고향인 강화섬에서 보내면서 그곳 자연과 가까워진 연경은 동박새를 특별히 사랑한다. 새가 귀엽게 생긴데도 있지만 아버지가 제일 사랑해주는 새였기때문이다.
《저 새를 동박새라고 한다.》
썩 오래전의 어느 추석때 아버지는 강화섬의 양지바른 기슭에 자리잡은 어머니의 산소에 날아온 동박새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저 동박새는 비록 작고 연해보이긴 해도 사시절 이 땅을 떠나지 않는 참 영특하고 착한 새란다.
언제나 한모양새로 우리의 하늘을 날아예며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단다. 꽃피는 시절에는 꽃나무의 꽃꿀도 먹고 꽃가루도 날라다주어 열매를 맺게 해주고 나쁜 벌레도 잡아 숲과 곡식을 지켜주지.
이 땅을 떠나지 않는 새들중에는 멋쟁이새인 꿩도 있지만 그놈은 씨앗을 파먹으니 농민들이 질색하고 몸맵시 정갈하고 울음소리 구성지기로는 두루미가 손꼽히우나 계절마다 보금자리를 바꾸는 새여서 정이 덜 간다.
보아라. 한생토록 태여난 땅을 가꿔가는 저 동박새가 얼마나 예쁘고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우냐.》
연경은 동박새를 띄여볼 때면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늘 생각나고 그래서 더더구나 동박새는 연경의 마음속에도 류달리 정들어왔다.
한참이나 동박새들과 신비로운 자연의 언어를 주고받던 연경은 그만에야 새들을 향하여 손짓하며 깔깔 웃었다.
《요 귀염둥이들, 그냥 까부는구나.》
처녀의 청맑은 웃음소리가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에 실려 숲속으로 날아갔다.
서울시가지에서는 련일 그칠길 없는 정치적사건들에 휘말려 봄이 아장아장 찾아드는것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렇게 와우산기슭에 들어서보니 완연한 봄계절이다.
시커매보이던 소나무잎새에 어느새 연록색의 즙과 빛이 어리고 다양한 볕이 가지만 앙상하던 진달래와 매화나무에 파르끄레한 움을 살그머니 틔워준다.
봄바람이 나무가지사이로 솔솔 불어와 처녀의 옷자락에 감겨들고 함함한 머리칼도 슬쩍 건드리며 수집음타는 새색시처럼 곱게 아양을 떤다.
차고 엄혹한 겨울날에 못내 그리워하던 봄날의 아지랑이가 연경의 봉긋이 부풀어오른 가슴에도 야들하게 파고들었다. 꽃샘잎샘계절이라 숲새로 빠져나오는 실바람은 맵사해도 바야흐로 푸름이 짙어가는 숲의 싱그러운 향내를 한껏 뿜어주며 처녀의 마음속에 싱숭생숭한 정서를 야릇하게 피여올렸다.
《진- 진진- 진- 진진-》
다시 숲속으로 봄날의 환희와 랑만이 어울려든 처녀의 고운 목청이 청아하게 울려가고 그뒤로 숲속의 정취가 어린 티없이 맑고 밝은 웃음소리가 챙챙 바스러져 이어졌다.
잠시후 불현듯 갈마든 생각에 웃음이 사그라진 연경은 낯빛을 흐렸다. 그는 새들을 쳐다보며 쓸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사실 나에겐 지금 너희들과 웃어볼 경황이 없구나. 난 너희들과 호들갑을 떨고있을 가시내가 못된단다.》
그러거나말거나 새들은 처녀를 내려다보며 그냥 까불어댄다. 마치 저희들과 함께 싱그러운 솔바람을 마시며 신비로운 자연의 노래를 부르자고 꾀이는것 같다.
《동박새들아, 난 지금 무거운 시름을 안고있단다. 어쩌면 내 운명도 바뀔수 있는 그런 시름이란다. 어서 가보렴.》
그제야 동박새들은 노래부르기를 그만두고 처녀의 얼굴을 말끄러미 내려다본다.
동박새들은 더는 사귀여볼 흥심을 잃은듯 또 한번 《진- 진-》하고 깔끔하고도 유정한 가락으로 작별인사를 하고는 나무잎사귀에 맺힌 이슬방울들을 후두둑 떨구며 홀연히 날아가버렸다.
《미안해.》
연경은 새들을 서글픔이 어린 눈으로 바래주고는 어깨를 실그러뜨리고 스적스적 걸음을 옮겼다. 소나무가 꽉 들어찬 수림에 들어서자 가슴이 급하게 뛰기 시작하였다.
이태동안 아버지의 슬하에서 가까이 지내는 과정에 한생을 약속한 애인과 더불어 자주 밀회를 가지던 숲이다. 지나간 날과 달들에 사랑과 정을 깡그리 쏟아부어온 남자-그는 최금룡이였다.
이끼덮인 바위츠렁이며 껍질 두터운 로송들, 숲속을 솔솔 어루만지는 봄바람이며 그 부드러운 애무에 가벼이 흐느적거리는 물오른 나무가지들마저 애틋한 사랑의 추억을 속삭여주는듯싶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무아경에 마음도 몸도 다시는 헤여나오지 못할듯 빠져들던 그 나날 서로의 가슴에 새겨두었던 언약이 천이던가, 만이던가.
두사람사이에만 오가던 그 언약의 증견자들이 바로 여기 한강가까이에 솟아있는, 서울에서도 명산이라고 일러주는 경개좋은 이 와우산의 로송들이다.
이 와우산의 산자락에 빽빽이 들어찬 나무새로 누렇게 깔린 락엽우에는 그들이 찍어놓은 발자취가 무수히 어려있다.
그런데 이 울창한 숲에 어리고 감춰진 그 사랑이, 뜨거운 입김과 다급한 심장의 박동으로 전해졌던 그 언약들이 졸지에 물거품처럼 스러져버릴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며칠전에 최금룡은 돌연 연경이앞에 한장의 종이장을 내놓았다.
그것을 훑어본 연경은 너무 아연해져서 가뜩이나 큰 눈이 그만에야 덩둘해졌다. 그 종이장이란 사직서였다. 여러가지 리유로 진보당추진위원회 서기직을 사임하게 된다고 짤막하지만 모호하게 사직리유를 밝혀놓았다.
연경은 최금룡의 사직신고에 접하자 제사 흥분되여 펄펄 뛰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최금룡의 심경변화에 전혀 느낌이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진보당의 조직기구를 확대강화하기 위한 준비사업이 심화될 때부터 최금룡의 얼굴에, 아니 마음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는 낌새가 엿보이였다. 언제나 진지하고 열정과 생기가 비껴 뭇사람들로부터 믿음과 기대와 사랑을 받아오던 최금룡의 모습에 자주 랭소가 비끼군 하였다.
최금룡의 회의적인 태도는 진보당의 당수로 나선 아버지가 벌리는 여러가지 사업과 투쟁을 포괄하고있었다. 진보당이 기치로 추켜들 강령초안에 대하여서도, 그 강령실현을 위한 방책에 대하여서도 그리고 아버지의 수하에 모여드는 정치인들에 대하여서도 랭소적이였다.
최금룡은 이따금 불만기가 다분한 씨박힌 말을 퉁퉁 던져 연경이를 놀라게 하였다.
《아버님은 원칙에서 탈선하고있어. 1보전진, 2보후퇴? … 난 그 말이 모호하단 말이야. 레닌의 유명한 명제를 자기 리론의 합리화에 써먹는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요, 기회주의란 말이야.》
아버지의 뜻과 운동의 철저한 신봉자인 연경은 입을 비쭉거리며 자신있게 공박하였다.
《노루꼬리만 한 지식, 뽐내지 말아요. 그건 전술에 관한 문제예요.》
연경이가 이렇게 단언하면 최금룡은 더 론쟁하려고 하지 않고 시뭇이 웃기만 하였다.
어떤 때는 이렇게 한마디 무겁게 꺼내놓았다.
《우리의 구호를 다시 검토해야 돼. 나의 인생좌표로 말한다면…》
《노루꼬리만 한 인생, 과신하지 말아요.》
연경이는 불만기가 어린 최금룡의 주장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가봐 사방을 살피며 잽싸게 못을 박았다.
《이제라도 아버지가 붉은기를 쳐드는게 옳지 않을가?》
《제발 현실에 발을 붙이세요. 우린 지금 반공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서울복판에서 살아요. <보안법>이 왜 있나요?! 당장에 철창, 아니 교수대에 모실 판이예요. 괜히 그러다간 정치는 고사하고 목건사도 못해요.》
《죽음을 두려워해서야 투사가 아니지. 아버님은 평생을 투사로 살아오신분이 아니야?!》
《정치와 혁명은 예술! 아버님이 즐겨쓰시는 레닌의 명언이예요.》
정치학을 전공학문으로 선택한 전문가답게 척척 쳐던지는 연경의 명쾌한 반격에 최금룡은 씩 웃으면서 제 먼저 언쟁에서 피해섰다.
그들의 언쟁은 최근에 조봉암이 5월에 진행되는 《대통령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또다시 리승만과 전체 민중앞에서 정면으로 맞붙게 된다는 설이 서울정계를 새바람처럼 휩쓸고있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더이상 사랑의 짧은 실랑이로만 그쳐버릴수 없게 되였다.
최금룡은 아버지의 출마를 애초부터 반대하였다. 승산이 없는 결투, 희생만을 가져올 도박, 무모한 힘의 소모전이라고 랭철하게 규정하고 부정하였다.
와우산의 숲길에, 한강변의 유보도에 이어지는 련인들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에는 어차피 여러가지 정치담도 끼여들기마련이였다. 차츰 깊이있는 론쟁이 벌어지고 그러면 어떤 때는 두사람의 말소리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다행으로 최금룡이 애인의 반발을 사나이다운 도량과 웃음으로 받아들여 보다 큰 마찰로 번져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경이는 아늑한 잠자리에서 두사람의 사이를 돌아보면서 점차 소원해지는 감정의 앙금이 자리잡기 시작했다는것을 느꼈다.
근래에 최금룡의 아버지인 인천고무공장의 공장주인 최기오가 자주 아버지를 찾아오는것도 심상치 않았다.
최기오가 왔다가 가는 날이면 아버지도 시쁘둥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날이면 최금룡도 안절부절하였다.
최기오는 죽산의 밑에서 활약하는 아들때문에 공장경영이 애를 먹고있는데 최근에 와서 그 압박도수가 훨씬 강해져서 기업이 언제 파산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군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연경은 최금룡이 차마 사직서를 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애인에 대한 믿음이 너무도 크고 깊었던것이다.
최금룡이 조봉암의 슬하에서 달과 해를 넘김에 따라 어떤 문제에서는 회의적이거나 실망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해도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큰 선에서는 변함이 없다는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중간에서 아들을 돌려세우려고 하지만 최금룡은 절대로 그 누구의 부추김이나 공갈에 휘여들어 자기의 신조를 버리는 정치의 철새로는 되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이 무엇보다 강했다.
지금도 《나의 좌우명》이라고 쓴 최금룡의 수첩의 두세번째 페지에는 아버지가 언제인가 최금룡과 측근들앞에서 한 말이 좌우명처럼 새겨져있지 않는가.
《우리 배달민족이 예로부터 소나무를 상징처럼 귀하게 여기고 숱한 그림들에 익히 올려온것은 소나무가 사시장철 푸름을 잃지 않는데 있다. 소나무는 바람새 많은 층암절벽에도 뿌리박고 거연히 솟아 푸름을 자랑한다. 하거늘 나무로 살려면 사철 한빛으로 꿋꿋한 소나무가 되라.》
선생님의 금언이야말로 자기와 같은 정치초년생이 일생토록 외우고 명심하고 자기의 금새를 비쳐보며 살아야 할 좌우명이라고 격정에 넘쳐 부르짖던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여서 지금도 선하다.
그런데 아버지의 금언을 자기의 수첩에, 아니 심장에 쪼아박던 그 손으로 배신과 타락과 철새의 기질이 비쳐진 종이장에 제 이름 석자를 올려가지고 온것이다.
연경은 충격이 너무 크고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도 괴로워 그걸 받은 때로부터 닷새가 되는 오늘까지 아버지한테 감히 드릴수 없었다.
《대통령》후보출마때문에 무성해지는 찬반론조와 사면팔방으로 가해오는 갖은 모해와 악담, 공갈과 회유때문에 침식을 바로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옆에서 애절한 눈으로 지켜보면서 아버지못지 않게 속을 썩이고있는 연경이였다.
아버지의 출마에 제일 예민하게 반응하고있는것은 두말할것없이 리승만이다. 아버지가 선거전에 나서면 전쟁전부터 그와 앙숙간인 리승만이 《조봉암고사작전》을 다시 벌릴것이라는 흉담이 서울정계에 나돌고있다. 아들이 조봉암의 턱밑에 있다고 최기오가 압력을 받고있는것이 우연한게 아니다.
칼을 물고 덤벼드는것은 리승만일파만이 아니다. 당안에서도, 아버지의 몸가까이에서도 각이한 인물들이 제나름의 리해관계에 얽혀 격렬하게 충돌하고있다. 당안의 유력한 인물인 서정후선생과 같은 로정객은 원체 평생 꿈꾸어온 《대통령》꿈에서 깨여나지 못한탓으로 아버지의 출마를 반대하여왔다. 그런데 그 선생의 립장을 지지하는 인물들이 당의 중진들속에 몇명 잘된다. 그런가 하면 선거에서 물러서자는 설도 나돌고있다.
물론 아버지를 오래동안 보좌하여온 신창균, 윤기중, 우달수를 비롯한 진보당추진위원회의 다수세력은 아버지의 출마를 무조건 지지하고있다. 그들의 완강하고 사리정연한 주장으로 초기에 후보로 제기되였던 서정후가 밀려나고 출마를 사양하여온 아버지가 당안의 경쟁선거를 통하여 진보당의 후보로 정식 확정되였다.
아버지의 출마문제는 가족성원들속에서도 여러가지 견해상차이에 따라 엇갈린채 아직까지 마음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있었다. 그 문제를 놓고 연경이는 아버지가 집안에서까지 지지와 반대라는 두 극의 격렬한 틈새에 끼여 힘겹게 자신을 버티고있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언니인 효경이는 더는 피투성이싸움판에 나서지 말아달라며 아버지의 팔을 잡고 여러번 눈물을 보였다. 《대통령선거》가 전쟁판같은 싸움이라는것을 이미 체험한바 있는 언니인지라 심장이 초들초들 말라들어 안타까워한다.
아버지를 겨냥한 괴이한 일들이 벌써부터 벌어지고있다.
회의에서 《대통령》후보로 정식 눌러지자 그 다음날부터 신당동의 2층집 담벽에 《빨갱이 조봉암은 즉살하라!》는 글이 나붙는가 하면 《조봉암! 그리도 죽고싶어 몸살이냐?!》 하는따위의 협박투서들이 돌멩이에 감겨 울안에 날아들기도 한다. 전화가 도청당하고 후보철회를 하지 않으면 집안식구들이 무사치 못하리라는 협박전화도 무시로 들어온다. 이틀전에는 다섯살 잡힌 조카애가 괴한들에게 꼬박 하루동안 랍치되여있다가 돌아왔다. 그러니 언니가 아버지의 팔에 그냥 매달릴만도 하다.
여기에 힘을 얻어가지고 둘째사위감으로 정해져있는 최금룡이 목청을 높이고 맞장구를 친다.
지지자는 아저씨인 김봉무와 연경이자신이다. 민중의 요청을 받은 정치가로서 아버지의 선택은 되돌려세울수 없는 정치가의 운명이라며 연경은 언니와 맞서 열변을 토하군 한다. 조봉암의 가족이라면 어찌하든 아버지의 립장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을러멘다.
그들의 언쟁은 아버지앞에서도 벌어졌다.
어느날 저녁식사뒤끝에 언니가 최금룡의 지원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후보사퇴를 다시 물망에 올려놓았다.
처음에 아버지는 입가에 미소를 담은채 식구들의 언쟁에 끼여들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신변과 가정을 지켜내려는 맏딸의 간절한 요청과 이를 둘러싼 자매와 두 사내의 열띤 론쟁을 한시간 넘게 흥미있게 들을뿐이였다.
어느 한쪽도 양보없어 론쟁이 끝없이 이어지자 아버지는 마치도 자기의 전우들앞에 나서기라도 하듯 진지한 어조로 자기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자신의 투쟁에 대한 투철한 지지를 측근중의 측근이라고 할수 있는 가족들로부터 먼저 받아내고싶었던 모양이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통일과 새 생활을 바라는 민중의 요청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자신이 왜 선거전에 뛰여들려고 하는가에 대하여 일장연설하였다.
아버지의 연설에 가족들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일후로 언니도 더는 조봉암을 괴롭히지 않았다. 최금룡도 더는 반대의사를 꺼내놓지 않았다. 허나 언니나 최금룡이 결코 자기들의 립장을 바꾼것이 아님을 연경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아버지의 출마를 반대하는 사람들속에는 지어 아버지를 그지없이 아끼고 사모하는 녀인들도 있어 연경을 아연케 했다.
얼마전에 아버지를 찾아 애오라지 련모의 정에 떠밀려 무거운 걸음으로 대문을 넘어왔던 지체있는 한 녀인이 아버지가 끝내 진보당의 결정으로 후보로 출마한다는 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서 홀연히 대문을 도로 넘어갔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 녀인이 제일 기뻐해야 되겠는데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 일이였다.
《대통령》부인이 되는게 너무 힘겨워서일가? 무시로 날아드는 협박에 심장이 떨려서일가? 하지만 그만한 각오도 없이야 어떻게 아버지를 내조할수 있는가? 평생토록 가시밭길을 걷고있는 아버지를 리해 못한다면 절대로 아버지의 곁에 설수 없다.
연경은 해를 넘겨오며 차곡차곡 포개여왔던 녀인에 대한 좋은 감정이 싹 지워졌다.
이러한 례사롭지 않은 일들을 목격할 때마다 연경은 아버지가 얼마나 힘겨운 선택을 하였으며 앞으로 또 얼마나 처절한 시련을 겪어야 하겠는가 하는 생각에 그냥 속이 졸아들기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도 믿어마지 않던, 이제는 자기 마음의 한 부분으로 소중하고 아끼고싶은 사람이 가렬해질 정치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끝내 아버지곁을 떠나겠다고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사직서를 제출하여온것이다. 도전치고도 옆구리에 찔러드는 비수와 같은것이였다.
최금룡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님에게 드려줘… 내 손으로 올리자니 좀 괴로워.》
사직서를 받고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연경은 골이 올라 진의를 따져물었다.
《말해봐요. 이게 진정이예요? 속심을 밝혀요.》
《속심? … 별게 아니야. 나의 방황과 고민은 끝났다는거야. 오늘부터 난 나의 세계를 찾아 이 집 대문을 나서자는거야. 날 지지해주지?》
《뭐예요? … 나의 세계? 그러니 끝끝내 인천아버님을 따라서자는거예요? 고무신이 그렇게도 귀해요?》
《아니, 내 일에 우리 아버지는 상관이 없어. 고무신은 더욱 그렇고…》
최금룡은 눈을 부릅뜨고 연경이가 자기 아버지의 공장소리는 더 꺼내지 못하게 눌러놓았다.
연경은 그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고 그냥 세차게 몰아댔다.
《흥! 알만해요. 그래 아버지네 공장 고무신만 나오면 다라는건가요? 통일이 사찰의 목탁소리만치 여겨진다는거예요? 신음하는 수천만 민중은 안중에 없다는거예요? 그래 이태동안 우리 아버님의 수하에서 배우고 익혔다는게 고작해야 겁먹은 소리고 둘러맞추는 말재간이예요?》
《하, 이건…》
최금룡이 총알처럼 연방 쏘아대는 처녀의 공박에 난감해져 뒤더수기를 슬슬 긁었다.
연경이가 최기오의 고무공장을 거드는것은 괜히 씩둑거려보는 엇드레질이였다.
연경은 지금 아버지와 최금룡 그리고 자기와 최금룡사이에 무엇인가 심각한 모순이 제기되였으며 그 해결책으로 최금룡이 이태동안 정을 들였던 아버지의 슬하를 벗어나려 한다고 단정하였다.
사실 연경은 언제인가는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는것을 막연하게나마 불안속에 예상하여왔다. 그것때문에 미상불 자기와도 심각한 충돌이 있으리라는것도 서글프게나마 각오하여왔다.
다만 연경은 다른 때도 아닌 지금, 아버지에게 그 어느때보다도 측근인물들의 철석같은 지지와 단합이 필요한 매우 중대한 대목에 최금룡이 몸을 빼려 하는것이 미웠고 용납할수 없었다.
그들의 공방전은 처음부터 매우 자극적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연경은 최금룡의 사직에 절대로 동의할수 없었고 최금룡은 이미 굳어진 결심을 취소하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연경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기의 감정을 눅잦히느라고 애썼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당장은 그가 사직서를 제손으로 찢어버리고 다시 돌아서도록 해야 하였다. 그래서 사직서는 자기 손가방에 재워놓고 머리를 짜내여 방법을 여러가지로 엇갈아가며 들이댔다.
《내 마음을 더는 흔들지 말아. 이미 굳어진 결심이야. 어렵게 찾아낸 길에서 나를 떼내려고 하지 말아.》
최금룡은 오랜 고민끝에 마침내 내린 결단이 애인의 따가운 눈총과 하소연에 녹아내릴가 겁이라도 난듯 서둘러 딱 잡아떼군 하였다.
《길? … 설명해줘요. 어떤 길인가요? 나를 납득시켜보세요.
민중을 위한 세상을 만들자,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 아버지의 정치적리상을 간추려보면 이것이예요. 이를 위해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왔어요. 진보당의 기틀을 만들어내였어요. 정권전취를 위한 또 하나의 결사의 싸움에 나서게 된것이예요.
어디 대답해봐요. 이보다 더 훌륭한 리상과 전략이 있다면 난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 길에 평생을 바쳐가겠어요. 그래 금룡씨가 그걸 찾아냈다는거예요?》
《연경이, 난 아직 명백한 대답을 줄수는 없어. 다만 아버지가 가는 길을 더는 따라설수 없다는거요.
모색끝에 찾아낸 새로운 길… 아직은 많은 문제가 있어. 그러나 우린 끝까지 달려갈거요.》
허망해보이는 결심을 고집하는 최금룡의 대답에 연경이는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았으나 물러설수는 없었다. 애인의 리성을 흔들고 감성에 불을 질러야 하였다.
… 아버지는 새로운 싸움에 나섰다, 물론 이 싸움은 생사기약이 없고 승부기약도 없는 싸움이다, 이런 때일수록 아버지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것이 우리의 본분이고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 어려운 시각에 아버지곁을 떠나는것은 배신이다, 제발 결심을 돌리라. …
그것은 눈물겨운 애원이였다. 그래도 최금룡은 꾹 닫아붙인 입을 좀체로 열지 않다가 한마디 던진다는것이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굳어진 결심이요.》
그러자 처녀는 총각의 자존심을 다시 건드려보았다.
…사내라면 사내싸게 배심을 가져라, 정치의 대를 허물어버리는것이 사내대장부가 생각이나 할수 있느냐, 우리 아버님이 뭐라고 하셨나, 심장에 쪼아박았노라 하던 금언은 어데다가 구겨박았느냐, 나무가 되려면 소나무가 되라? 그 말씀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받들고 따르겠노라고 하던 맹세는 술기운을 빌어 외워본 넉두리인가, 아버지는 슬하에 받아들여 줄수 있는 모든것을 주지 않았더냐, 무얼 더 바라느냐, 그런데 이 사직서가 웬 일이냐, 그 모든것에 대한 대답이 고작 이것이였느냐…
그 소리에도 최금룡은 대답을 되풀이했을뿐이였다.
연경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최금룡의 결심을 돌려놓기에는 이미 늦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의 가슴노리가 이상스럽게 파들거리기 시작하였다. 최금룡의 사직서를 아버지에게 전할 일이 기가 막혔다.
아버지도 요즘 주변에서 최금룡이 보이지 않는것이 이상스러웠는지 가끔 물어보군 한다. 그때마다 급해맞아 적당히 구실을 대며 오늘까지 시간을 끌어온 연경이다.
두사람의 언쟁은 평행선을 그은채 도무지 타협의 사귐점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여러날이 숨가쁘게 흘러갔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토설해야 한다. 어제 오후에는 사품까지 다 챙겨가지고 갔으니 사직서를 물릴수는 없을것 같다. 그렇다고 계속 아버지와 숨박곡질을 할수도 없다.
그래 연경은 이날 아침 그를 마지막으로 만나 매듭을 풀어보리라는 결심밑에 자기들의 감미로운 추억이 깃들어있는 이 솔숲으로 최금룡을 불러냈던것이다. 사랑과 정이 가지마다 얽혀있는 이 솔숲이 최금룡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효험이 클지도 모른다.
그것은 연경이가 마지막으로 찾아내고 매달리고싶어지는 처녀다운 착상이고 마지막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