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조국통일3대원칙을 기초로 한 6. 15공동선언
세기와 세기의 분기점에서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간의 투쟁속에 도래한 세기와 세기가 바뀌는 력사의 분기점인 2000년을 전후하여 내외정세에서는 새로운 변화들이 일어나고있었다.
북의 선군정치에 의하여 제국주의련합세력의 반공화국, 반사회주의고립압살정책이 물먹은 담벽처럼 되였다. 이것은 미국 클린톤행정부로 하여금 대《한》반도정책을 다시 검토하고 유화정책을 내세우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99년 5월 김정일국방위원장께 드리는 클린톤의 친서를 가지고 미대통령의 특사로 북을 방문하였던 페리는 현 단계에서는 조미기본합의문을 리행하며 여러 갈래의 협상을 계속해나가는것이 상책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1999년 10월 북의 국가체제와 제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초우에서 대결이 아닌 화해로 《관계정상화》에로 나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페리정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특히 이 시기 1999통일대축전 10차범민족대회를 계기로 남북, 해외의 3자련대가 실현됨으로써 통일운동이 전민족적범위에서 더한층 조직화, 적극화되였다. 이로 하여 통일을 지향하는 애국세력과 분렬을 추구하는 반통일세력사이의 력량관계는 조국통일에 유리하게 전변되고있었다.
당시 남쪽민중들속에서 집권자의 인기도는 지지률이 30%선으로 곤두박질하는 심각한 상황이였다. 이것은 임기 5년간 남북대화탁에 한번 나와보지도 못하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전 집권자와 별반 차이가 없는 운명이였다.
이로부터 남측당국자는 여러 통로를 통해 김정일국방위원장께 평양방문을 요청하였다. 달리할수 없는 선택이였다.
변천되는 대세의 흐름을 통찰하신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조국통일문제와 관련된 웅지를 피력하신데 이어 민족통일사에 중대한 획을 그으실 대용단을 내리시였다.
그리하여 력사적인 남북수뇌상봉을 위한 남북간의 접촉이 싱가포르에서 시작되여 베이징을 거치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진행되게 되였다.
남북접촉정형을 보고받으시고 구체적인 지도를 주신 그분께서는 베이징접촉에서 주요쟁점의 하나로 되고있던 초청합의문에 자신의 존함을 밝힐데 대한 남측의 요구도 대범하게 받아들이시고 남쪽당국자와 상봉하게 된다는것을 밝힐데 대한 그들의 요청도 동의를 주시였다.
그리고 남북합의서에 명기할 내용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4월 8일 력사적인 남북합의서가 채택되게 되였다.
2000년 4월 10일 남북이 각기 상부의 뜻을 받들어 북측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과 남측의 문화관광부 장관이 수표한 4. 8남북합의서가 평양과 서울에서 동시에 발표되였다.
채택발표된 4. 8남북합의서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과 남은 력사적인 7. 4북남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3대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민족의 화해와 단합,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김대중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김대중대통령이 금년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
평양방문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신 김정일국방위원장과 김대중대통령사이에 력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북남최고위급회담이 개최된다.
쌍방은 가까운 4월중에 절차문제협의를 위한 준비접촉을 갖기로 하였다. …》
4. 8남북합의서의 발표와 관련한 내외의 반향은 대단했다.
남북합의서발표에 접한 남쪽의 여야당과 경제, 사회, 시민, 로동계는 물론 군부까지도 앞을 다투어 합의서를 지지환영하는 립장들을 밝혔다.
합의서발표후 남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남북수뇌회담이 《바람직하다.》는 사람이 81%에 달했으며 과반수가 남북수뇌회담이 《남북관계개선에 전기가 마련될것》이며 이로 하여 《통일이 더 빨리 올것》이라고 했다.
남북합의서발표에 따른 세계 각국의 반향도 컸다.
중국외교부와 로씨야외무성은 남북합의서를 지지환영하는 정부의 립장을 밝혔다. 미국과 일본도 속은 어쨌든 합의서를 지지환영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클린톤이 남쪽당국자에게 축전을 보내왔는가 하면 미국무성의 대변인은 《우리는 이 사변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무장관의 보좌관은 《뉴욕 타임스》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은 남북간 《정상회담》을 오래동안 직간접적으로 지지하고 권유해왔다고 제스츄어를 취하였다.
일본의 고위정객들도 남북수뇌회담이 일조관계발전에 훌륭한 영향을 미칠것이라고 했다.
남북합의서발표후 남북은 력사적인 평양상봉과 남북최고위급회담준비를 위한 5차례의 준비접촉과 2차례의 통신, 보도실무자접촉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5월말에는 남측선발대가 평양에 왔다.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김일성주석의 유훈을 관철하기 위한 민족의 중대사로 보시고 그 바쁘신 속에서도 준비접촉과 부문별실무접촉진행정형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일일이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특히 그분께서는 2000년 6월 3일 두번째로 찾아온 남측특사일행을 4시간 반동안이나 접견해주시고 만찬도 베풀어주시면서 남쪽당국자의 평양방문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일련의 문제들에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남측 특사일행을 위해 베푸신 만찬에서 《대통령》을 만나서 꼭 하고싶은 말이 있다고 허두를 떼시고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가 우리는 북남이 서로 마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민족적자존심을 가지고 살아나가야 한다, 자존심이 곧 힘이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분께서는 계속하여 4. 8합의서발표와 관련한 주변나라들의 반향에 대하여 언급하시고나서 조선문제는 어디까지나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이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 남쪽당국자를 만나서 하게 될 담화의 기본종자를 명시하여주신것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남북수뇌상봉을 확약하는 4. 8남북합의서가 채택발표되고 그 실현을 위한 준비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으로써 우리 민족의 조국통일운동사에 일찌기 없었던 격동적인 사변이 도래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