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공동의 조국통일3대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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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를 주도하다

 

고대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일찌기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후세에 전해졌다. 그의 이 말을 놓고 후세의 많은 사가들과 사람들은 자기나름대로의 평가와 해석을 가하고있다.

필자 역시 그의 말에서 이러한 나름대로의 의미를 도출하여보군 한다.

《그대 한반도 민족인임을 잊지 말라.》

바로 이 땅에 태를 묻고 사는 모든이들이 민족의 일원임을 자각하고 너도나도 분발할 때 분렬의 아픔을 딛고 통일조국이라는 민족의 거대한 집을 일떠세울수가 있다.

이것은 한돌기 또 한돌기 수십년의 년륜을 새겨오는 민족분렬의 아픔을 육신의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필자의 뼈아픈 생활체험이고 인생교훈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40년전, 7. 4공동성명이 발표되던 당시의 《한》반도와 그 주변정세를 보고 대하는 립장에서 남북의 상호 다른 시각차를 보아왔고 그것이 향후 통일문제해결에 각이한 영향을 준 부정할수 없는 력사적사실앞에서 필자는 새삼 소크라테스의 말을 음미하게 되는것이고 이 땅에 태를 묻은 민족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을 갖게 되는것이다.

사실 지나온 력사를 돌이켜보는것은 오늘을 리해하고 래일을 기약하기 위한것이다.

21세기의 10년대의 현시점에 서서 7. 4공동성명이 나오던 당시의 력사를 돌이켜보는것 역시 이러한 의미를 갖고있는것이다.

최근 미국과 남쪽어용언론들이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로 된다.》는 괴벨스의 흑백론리와 거두절미의 기교를 발휘하여 반북론리와 그 행위에 더욱 열을 가하고있는 현실은 그것을 더욱 필요로 하고있다.

거슬러보면 지난 세기 70년대 초반을 경계로 하여 국제적으로는 커다란 변화 즉 긴장완화의 흐름이 세계적인 추세로 대두하고있었다.

그 유화적흐름의 진원지는 미국이였다. 국제적으로 미쏘간의 데탕드가 시작되고 미국의 국력쇠퇴가 뚜렷이 나타나 저들의 지배주의가 종전같이 통하기 어렵게 된 미국은 세계전략을 재검토하고 전쟁과 평화의 량면정책에 매달리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른바 《닉슨주의》라는 새로운 전략이 그것이다. 《닉슨주의》의 중요한 고리의 하나는 아시아에서는 아시아사람들끼리 싸우게 하고 《한》반도에서는 《한》반도인들끼리 서로 싸우게 하는 정책이였다. 이를 기반으로 미국은 1970년대 초반 저들의 동북아시아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재편에 착수하였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남에 대한 군사적인 주도권은 유지하되 남북간의 과도한 대치를 완화하여 《한》반도의 윁남화를 막는데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닉슨의 중국방문계획의 발표는 국제정치무대에서 우려를 자아내고있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때 북이 닉슨의 중국방문은 미국이 대내외적인 위기로부터 출로를 찾으려고 기만적인 《평화전략》을 내세우면서 《랭전》으로부터 《평화》에로, 《대결》로부터 《대화》와 《공존》에로 이행한 정책전환의 산물로 분석하고 그 본질을 지난날 6.25전쟁에서 패배한 미제가 판문점에 흰기를 들고 나오듯이 베이징으로 흰기를 들고 찾아가게 된것으로, 승리자의 행진이 아니라 패배자의 행각이며 제국주의의 서산락일의 운명을 그대로 반영한것이라는 립장을 밝혀 세계를 들끓게 하였다.

사실에 있어서 이것은 동북아시아에서의 긴장완화추세의 일단을 의미하는것이였다.

1970년대 초반 동북아시아에 형성된 이같은 긴장완화추세는 남북모두에게 유리한것이였다. 즉 민족적인 립장에서 본다면 대단히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정세였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그러한 정세가 자신의 집권기반과는 배치된다고 보았다. 집권기반이 흔들린다고 판단한 박정희는 국내적으로 적대체제를 구축하는데 주력하였다. 《사회안전법》이 제정되여 사회생활을 하던 좌익수들이 재수감되고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살인적인 전향공작이 진행된것이 그 하나의 실례였다.

따라서 1970년대의 박정희체제는 미국의 긴장완화정책을 반민족적인 견지에서 역으로 거슬러 반공체제를 강화하는것으로 나왔다.

민족적인 립장에서 본다면 정상적인 대응은 긴장완화국면을 보다 발전시켜 미국으로부터의 자주권을 획득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했으나 박정희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갔던것이다.

이러한 속에서도 1970년 11월 로동운동에서 분기점을 열어놓은 전태일분신자결사건, 각 대학을 휩쓴 1971년 3~4월 반교련투쟁, 1971년 4월 민주수호국민협의회결성 등 이남에서의 대중적투쟁이 격화되였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는 북에 있어서 통일의 유리한 국면으로 되였다.

북은 내외의 정세를 통찰하고 이에 주동적으로 대처해나가는 방향 즉 통일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한 여러 갈래의 대화와 폭넓은 협상제안들을 내놓고 그 실천적리행의 시간표를 이끌어내는데로 나갔다.

그 일환의 하나로 북은 1971년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5차회의에서 《현 국제정세와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촉진시킬데 대하여》를 토의하고 북이 이미 제의해온 평화통일방안들에 기초하여 8개 항목의 통일방안을 내놓게 된다.

① 남으로부터의 미군철거 ② 남북의 군대를 각각 10만 또는 그아래로 축소 ③ 이남이 외국과 체결한 모든 매국적이며 예속적인 조약들과 협정들의 페기, 무효 선포 ④ 자주적, 민주주의적원칙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 실시, 통일적인 민주주의중앙정부 수립 ⑤ 이남에서 각계각층 인민들의 민주주의적권리 보장, 모든 정치범 석방, 전국적범위에서 자유로운 정치활동의 조건 성숙 ⑥ 과도적대책으로서 남북련방제 실시 ⑦ 남북사이의 통상과 경제적협조, 과학, 문화, 예술, 체육분야의 상호 협조, 인사래왕과 서신거래의 실현 ⑧ 민족의 당면과업을 협의하며 나라의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정치협상회의 소집안이 그것이였다.

이 방안은 이미 북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조성된 정세에 부응하게 재천명한것이며 통일문제에서 나서는 당면문제들을 남북대화를 통해 촉진하기 위한 현실적방도들로서 민족의 통일열기에 불을 달아주었다.

남북대화를 성사시키는데서 결정적인 시간표를 제공해준것은 김일성주석의 유명한 8월6일연설이였다.

김일성주석께서는 1971년 8월 6일 당시 캄보쟈국가원수 노로돔 시하누크의 평양방문을 환영하는 군중대회의 연설에서 남쪽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는 폭넓은 남북협상방침을 내놓으시였다.

그분께서는 남쪽당국자들이 8개 항목 평화통일방안을 접수하는가 안하는가 하는것은 딴 문제로 치고라도 그들이 참말로 나라의 통일을 바란다면 무엇때문에 남북이 접촉하고 협상하는것을 두려워하겠는가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시였다.

《우리는 남조선의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인사들과 아무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습니다.》(《김일성저작집》 제26권 232페지)

이 제안은 대세의 흐름을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하는데 최대한으로 리용하여 남북사이의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대책이라는 내외의 응분의 평가를 받았다.

사실상 북은 그때까지 남의 집권당과의 대화를 제기한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남쪽당국자들의 반민족, 반통일적인 자세와 립장에 기인되고있었다.

북은 당시 대세의 흐름을 유리한 국면으로 유도해 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대책으로서 폭넓은 대화방침을 제시하기에 이른것이다.

김일성주석의 8월6일연설을 통해 제시된 폭넓은 남북협상방침의 당위적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 변화된 국제정세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에 기초한것이다.

이미 언급이 되였지만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세력의 약화와 긴장상태의 완화는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투쟁에 유리한 국제적인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추이는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의 해결을 위한 남북대화의 실현을 십분 가능케 하고있었다.

▲ 우리 나라에서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간의 력학관계를 과학적으로 타산한것이다.

북에서는 조국통일의 정신물질적토대가 축성되고 대외적인 권위도 높아졌다.

남쪽에서는 박정희군사《정권》의 파쑈적인 탄압이 가중되는 속에서도 대중적인 반미반《정부》투쟁이 계속되여 식민지통치체제에 치명상을 가하였다.

이러한 변화되는 정세에 대한 옳바른 평가와 분석, 《한》반도에서의 통일세력과 반통일세력간의 력학관계에 대한 과학적인 타산 등에 기초하여 북은 남쪽의 집권당도 포함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인 인사들과 폭넓은 대화방침을 제시하는 주동적인 조치로 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게 된것이다.

이것은 남쪽의 당국자들로 하여금 내외정세의 흐름에 역행하는 길을 계속 걷는가 아니면 평화와 협상의 추세에 편승하여 정책전환을 하는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하였다.

결국 남쪽당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선건설 후통일》론, 《승공통일》론을 내들고 통일에 대한 론의와 남북간의 그 어떤 접촉도 거부하여오던 종전의 립장에서 벗어나 남북적십자회담형식으로나마 대화마당에 응해나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그렇다고 남북대화에서 남북의 시각이 일치되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였다.

북은 적십자회담을 우선 성사시키고 인도적회담을 정치적회담으로 승화시켜 분렬된 조국을 하루속히 통일시키려는 정책적의도에 립각하였다면 이남당국은 인도적회담에서 지연전술을 쓰면서 껄렁껄렁 시간을 보내여 결국 《두개 조선》정책을 추구하자는 속구구가 있었다. 그후의 사태발전이 그것을 립증하여주었다.

북은 남북에 흩어져 오랜 세월 안부조차 모르는 가족, 친척들의 인도주의적문제를 하루속히 해결해주며 적십자회담을 성사시켜 그것을 디딤돌로 하여 대화의 격을 높여 정치회담을 마련하는데로 나갔다.

이리하여 1971년 8월 20일부터 남북의 적십자단체 파견원들의 5차례에 걸친 접촉이 있었으며 그후 1971년 9월 20일부터 판문점에서 쌍방 적십자단체들의 예비회담이 시작되였다.

북은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시작된 첫날부터 민족분렬의 고통을 덜고 조국통일의 디딤돌을 마련하기 위하여 회담을 성사시키려는 애국애족적인 립장에 서서 문제토의에 림하였다.

그러나 남쪽당국자들은 적십자단체들의 회담에 응하기는 하였으나 처음부터 《남북접촉과 대화에 기대를 걸지 말라.》, 《성급한 통일론의는 경계되여야 한다.》, 《정치적타결에는 10년이 걸리게 될것이다.》 등의 여론몰이를 하면서 회담이 열리기 전부터 그 순조로운 진행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1971년 12월초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같은 류례없는 파쑈악법을 조작해내여 《한》반도의 정세를 긴장시킴으로써 쌍방적십자단체회담을 방해하고 통일에 새로운 난관을 조성하였다.

하지만 북측의 적극적인 대화요구, 그에 호응한 남쪽민심에 어쩌는수없이 형식상으로나마 대화에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남북적십자단체들의 예비회담을 통하여 서로의 의견상이를 극복하면서 본회담 제1차회의를 평양에서, 제2차회의를 서울에서 진행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져 결국 남북적십자단체 대표들의 회담으로 대화가 실현되게 되였다.

이러한 조성된 대화분위기에 맞게 북은 적십자회담을 계속 추진시키는 한편 보다 높은 남북정치협상의 길을 개척하면서 대세를 통일에 유리하게 주도해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남북간의 적십자회담이 열리고 한편으로는 고위급정치회담을 위한 접촉이 실현되였으며 적십자회담과는 별도로 남북고위급정치회담을 여는것으로 남북이 원칙적인 합의에 도달하게 되였다.

이것은 1971년 8월 6일 폭넓은 남북협상방침에 근거하여 인도주의적회담을 성과적으로 전진시키며 정치회담을 마련하기 위한 북의 진지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내외의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민족의 편에 튼튼히 서서 력사의 노를 통일목적지에로 힘있게 저어갈 때 결과는 명백해지기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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