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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계십니까?》

마당에 들어선 최주식은 방싯이 열린 부엌문짬으로 물씬물씬 풍겨나오는 지지고 볶는 구수한 음식냄새를 맡으며 김석홍을 불렀다. 그러자 부엌문과 웃방문이 거의 동시에 활짝 열리고 웃방에선 김석홍이가, 부엌에선 하얀 행주치마를 허리에 두른 한씨가 엎어질듯이 한달음에 달려나왔다.

군대에서 제대되여 조선소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고있는 김찬은 아래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굳어진듯 그자리에 서며 얼굴을 붉히였다. 며칠전 기차칸에서 기중기운전공 박성임이와 2중창을 부르도록 최주식을 부추긴 일이 떠올라서였다.

(세상일이란 참…)

김찬은 속으로 열적게 부르짖었다.

《아이구, 이게 최한무아주바니네 주식이가 옳긴 옳은가? 영 몰라보겠구만. 그새 어떻게 지냈어? 어머니랑은 다 무고하시겠지?》

마음속에 쌓였던 그리움과 기쁨의 동을 일시에 터뜨리며 한씨는 자기의 손이 가시물에 젖었다는것도 까맣게 잊고 름름하게 성장한 최주식의 탄탄한 두어깨며 넙적한 등을 마구 쓰다듬었다.

눈가와 이마에 패인 굵고 가는 주름을 미끈히 펴며 환히 웃음짓는 반백의 한씨를 바라보는 최주식의 가슴은 뭉클하였다. 파란곡절에 찼던 암흑의 세월은 저 멀리 아득히 흘러갔어도 변하지 않은것은 한씨의 다심한 마음이였고 살틀한 정이였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어쩌다 별식이 생기면 치마폭에 감추어들고와서 부뚜막우에 놓으며 어머니의 귀에 대고 나직한 목소리로 자기에게 주라고 소곤거리군 하던 한씨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아니, 넌 뭘 그러고있니? 기사장에게 인사도 올리지 않구.》

김석홍은 김찬을 가볍게 나무랐다. 그제서야 김찬은 최주식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초면에 노래지명을 한 사람이 동무였댔구만.》

최주식의 말에 김석홍이와 한씨의 눈은 덩둘해졌다.

《초면에 기사장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다니?》

최주식은 껄껄 웃으며 기차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우리 찬의 일하는 본때가 그렇다네. 앞으로 잘 도와주라구.》

한씨가 곁들었다.

《아니, 체신머리없이 귀한 사람을 언제까지나 밖에 세워두려오?》

김석홍의 가벼운 질책이 스민 말에야 한씨는 문득 제 정신이 든듯 최주식을 부랴부랴 안으로 안내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너무 반갑고 기쁜김에 그만…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구.》

최주식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깨끗했다. 콩풀칠을 한 장판은 알른알른하게 윤기가 돌았으며 이불장, 양복장, 책상들은 구색이 맞게 놓여있었고 원탁우 원형어항에서는 사자꼬리퉁방울눈금붕어가 이집 생활에 만족한듯 탐스런 꼬리와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유유히 헤염치고있었다.

최주식은 들고온 꾸레미를 김석홍의 앞에 내놓았다. 인삼이 들어있는 고려인삼술 두병과 닭고기통졸임이 세개, 고급사탕, 과자가 각각 한통씩에 낙지가 스무나문마리였다.

《아니, 이건 뭘 들고왔나?》

김석홍이 최주식을 보며 가볍게 나무랐다.

《리억석부기사장이 꾸려준겁니다.》

최주식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 사람, 같이 왔으면 좋았을걸.》

《집을 알려주고는 볼 일이 있다며 돌아갔습니다.》

《원, 사람이 어쩌면…》

김석홍은 혀를 찼다.

최주식은 김석홍이와 그간의 얘기들을 주고받은 후에 아까 현장에서 보여주겠다고 한것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오, 그것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김석홍은 웃방 책꽂이에서 빨간 비로도천으로 정성껏 표지를 한 스크랩을 빼내가지고 와서 최주식의 앞에 내놓았다.

최주식은 표지를 들치였다. 그러자 표지와는 달리 퇴색한 《로동신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신문 꼭대기를 보니 1948년 6월 26일이란 활자가 또렷이 찍혀있다.

《아니, 이 신문을 어떻게 다 건사해두었습니까?》

최주식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우리 조선소에 대한것이 실려있는 신문인데 보관을 안하다니… 그것도 건사하지 않고서야 무슨 조선공이겠나. 난 우리 조선소에 대한 글이 당보에 실리면 꼭꼭 여기에 오려붙인다네.》

김석홍은 이러고나서 주를 달았다.

《이걸 볼적마다 참으로 생각이 깊어지군 하지. 더우기 첫장에 붙인 이 신문, 1948년 6월 26일 〈로동신문〉을 볼 때면 가슴이 막 후더워진다네. 지난날이 생각나서지.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과 국가의 일을 한몸에 지니시고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계셨지만 우리가 강철선을 무어냈다는 보고를 받으시자 몸소 우리 조선소를 찾아주셨네. 그이를 모시고 존경하는 김정숙녀사께서 어리신 경애하는 령도자 김정일동지와 함께 오시였댔어. 김책동지를 비롯하여 당과 국가의 간부들도 오구. 참, 그때 자네도 진수식장에 있지 않았던가?》

《아니, 전 그때 옥천대로 수학려행을 갔더랬습니다.》

《거 일이 공교롭게 되였댔구만. 력사에 길이길이 새겨질 그 훌륭한 광경을 보지 못하다니…》

김석홍은 제사 아쉬운듯 혀를 끌끌 차더니 말을 이었다.

《참으로 장관이였어. 진수식장에 나오시는 위대한 수령님을 환영하려고 영포시민이 전부 떨쳐나섰댔으니까. 진수식장인 선대주변은 물론 남산이며 련화봉까지 사람들이 꽉 찼댔어. 아마 그런걸 가리켜 인산인해라 하겠지. 쪼무래기들은 나무꼭대기와 지붕우에까지 기여올라갔댔다니.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조선공들이 무은 배를 돌아보시고 너무도 만족하시여 〈이 배가 하늘에서 내려왔소. 땅에서 솟아났소.〉라고 하시면서 배이름을 〈신흥호〉라고 친히 달아주셨네. 그러시고는 우리들의 수고를 높이 치하해주시면서 선박공업이 나아갈 길을 환히 밝혀주시였지. 모두들 감격에 넘쳐 눈물을 흘렸네.

이윽고 그이께서 진수식장에 마련한 주석단에 오르시자 폭풍같은 환호성이 천지를 진감하며 터져올랐다네. 아아, 그때의 감격과 영광이란…

여보게, 내 말을 듣느니 차라리 그 신문을 읽어보게. 참말이지 그 신문을 보면 볼수록 그때 일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르면서 감회가 새로워지고 힘이 막 용솟음친다네.》

목이 메인 김석홍은 물기가 축축히 내밴 눈귀를 손으로 꾹꾹 누르며 최주식이더러 신문을 읽으라고 했다.

최주식은 《신흥호》 진수식때에 있은 일을 이미 들어 알고있었지만 마치도 처음 듣는듯 감회가 새롭고 감격이 컸다. 그는 앞에 놓여있는 스크랩에 오려붙인 신문을 웅근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23일 영포조선소에서는 조선로동자들의 손으로 처음으로 만들어진 철강선 〈신흥호〉의 진수식이 성대히 거행되였다.

진수식에는 김일성위원장, 김책부위원장을 비롯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각 국장과 각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오전 9시. 진수식은 장엄한 애국가의 주악으로 개막되였다.》

이렇게 시작된 기사는 산업국장이 한 개회사내용을 추려서 실었다.

…일제식민지하에서는 우리 민족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적이 오늘 현실로 되였다는것, 민주북조선산업의 비약적발전과 함께 황해제철소 용광로에서는 철강선을 만들수 있는 철판과 《앙그루》(산형강)를 생산해냈으며 원산조선소에서는 열구식4기통엔진을 개작하여 철강선건조를 가능케 하였다는것, 이와 같은 실례들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조선로동자들의 영웅성을 또한번 전세계에 시위한것으로 된다는것, 김일성장군의 지도를 받는 우리 인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것을 이번에 다시금 증명하였다는것…

《이어 김책부위원장이 축사를 하였다.》…

최주식이 다음을 읽으려는데 김석홍이 입을 열었다.

《축사는 전문이 따로 실려있으니 그 부분은 빼고 그뒤에 있는것을 읽게.》

최주식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축사부분이 끝난 다음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뒤이어 전체 종업원들은 김일성위원장께 맹세문을 올리였다.

력사적인 순간, 10시 40분! 철강선 〈신흥호〉는 선대에서 권인기에 끌리워 해상으로 미끄러져내려갔다.》…

《참, 그때 광경이 눈에 선하구만! 그래서 기자들을 사회적으로 존경하는게 아닐가.》

김석홍은 이러고나서 돋보기를 꺼내 끼더니 영포조선소 《신흥호》 진수식에서 한 김책부위원장의 축사를 뜨직뜨직 읽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북조선인민위원회를 대표하여 여러분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 민족력사상에 찬연히 빛나는 강철선의 진수식에 림하여 여러분에게 열렬한 감사와 축하를 드립니다.

여러분!

지난 2월 김일성위원장께서는 금년도 인민경제부흥발전계획을 발표하시면서 〈북조선에서 처음으로 철선이 건조될것이다〉라고 말씀하시였습니다.

여러분은 김일성위원장의 이 말씀을 받들고 불타는 애국적열성을 다하여 온갖 자재와 기술부족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분투한 결과 오늘의 빛나는 성과를 거두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두말할것 없이 우리 민족은 결코 미개하고 저능한 민족이 아니라 능히 선진국가대렬에 들어설수 있는 우수한 민족이라는것을 사실로써 증명하여주는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열화같은 조국애와 창조적인 선진기술로써 이루어진 이 철선의 건조는 금년도 인민경제계획실행에 있어서 커다란 성과일뿐아니라 장래 우리의 해양사업발전에 커다란 기초로 될것입니다.》

그때 부엌에서 한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령감, 계속 신문만 읽고있겠소? 이제는 준비가 다 되였수다.》

그 말에 최주식이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작은어머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조선소로동계급이 수령님께 드리는 맹세문까지 읽어보구서 식사를 합시다. 아버지들이 무은 〈신흥호〉 진수식때의 글을 보니 가슴이 막 설레입니다.》

《하기야 그럴테지.》

한씨는 흔연히 응해나섰다.

최주식은 신문에 다시 눈을 주었다.

김일성위원장께 드리는 맹세문》이였다.

《…

존경하는 김일성위원장이시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명하신 위원장의 옳바른 령도밑에 승리적으로 완수한 제반 민주개혁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없는것을 창조하고 부족한것은 부족한대로 모든 곤난과 장애를 뚫고나가야 한다는 위원장의 고귀한 말씀을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이 정신으로 초과달성하였으며 오늘 진수하게 되는 강철선을 이 고귀한 정신으로 건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자그마한 승리에 결코 도취하지 않으며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국제국내반동들과의 계속되는 가혹한 투쟁속에서 우리가 부강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우리앞에 심각하고도 거대한 과업들이 허다히 제기되고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는 고귀한 이 민족적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위원장님의 지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우리 조선인민들의 힘에 단결이 있으며 단결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승리가 있다는 굳은 신념밑에 오늘 이자리에서 위원장님이 주신 명확한 지침을 굳게 명심하고 모든 곤난과 장애를 물리치고 위원장님이 가리키시는 조국창건의 길로 돌진함으로써 우리 공장을 북조선에서 가장 우수한 모범적인 국영기업소로 만들것을 위원장님께 맹세합니다.…》

무한한 감격과 크나큰 환희로 설레이던 력사적인 그날의 격정이 그대로 되살아나는지 김석홍의 주름진 얼굴로는 굵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여보게, 그 맹세문을 바로 자네 아버지가 읽었다네. 어쩌면 자넨 생김새도 목소리도 아버지 최한무와 그렇게도 비슷한가?》

《아바이, 제가 아버지를 닮지 않고 누굴 닮겠습니까.》

못잊을 추억을 감회깊이 더듬는 김석홍을 눈여겨보며 최주식이 말했다.

《여보게, 하지만 겉만을 닮아선 안되네. 속을 닮아야지. 속을!》

《명심하겠습니다.》

최주식의 대답에 김석홍은 머리를 끄덕였다.

《기사장일을 해나가느라면 힘든 일이 많이 제기될걸세.》

《그럴것 같습니다. 조선소를 돌아보고 문건들을 보고서 전 〈내가 과연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일해나갈수 있을가〉하고 생각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첫눈에 너무도 많이 띄는군요. 긴장한 저예망선건조, 좁은 구내도로를 넓혀야 할 일, 〈계절병〉과 〈월초 월말병〉을 없애는 일, 미달된 계획을 추켜세워야 할 일, … 솔직히 말해서 전 근심이 큽니다. 구내도로확장공사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습니다. 꼭 해야 될 일임을 인정하면서도 왜 그런지 자꾸 주저들합니다. 아바이가 앞으로 잘 도와주십시오.》

《암, 그야 여부가 있나. 한데 〈배쟁이〉가 되자면 배심이 든든하고 주대가 있어야 해. 말이 난 김에 자네에게 꼭 하고싶은 말은 모든 일을 해나가는데서 아버지처럼만 일하라는걸세. 자네 아버진 수령님의 의도와 구상을 깊이 연구하고 그이께서 하라는대로만 했지.》

《알겠습니다.》

《그리구 내 말하지 않아도 어련하겠지만 철저히 당위원회에 의거해서 일하라구. 그러면 등탈이 없네. 당위원장이 겉보기엔 딱딱해만 보이지만 사람이 진국이야. 전쟁참가자구. 조선소에 오기전엔 시당부부장을 했다네. 정말 좋은 당일군이지. 리억석부기사장 역시 솔직하구 일욕심이 많은 일군이라네. 서로 믿고 의지하면 세상에 못해낼 일이 없지.》

최주식은 진심으로 하는 김석홍의 조언에 가슴이 달아올랐다.

《시장하실텐데 식사를 하면서 얘기들을 나누십시오.》

김찬이 웃방에서 두리반을 들고 내려와 방가운데 놓자 한씨가 부뚜막에 있는 소반에 챙겨놓은 음식그릇들을 들여다 상우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자, 상앞에 나앉으라구.》

김석홍이 푸짐히 차린 두리반앞에 먼저 나앉으며 최주식에게 권고했다.

최주식은 밥상앞으로 자리를 옮겨앉았다. 그리고는 상옆에 놓인 고려인삼술병의 마개를 열고 인삼이 우러나 노르끼레해진 술을 반고뿌들이 유리잔에 그득 부어 김석홍에게 두손 받쳐 권하였다.

《아바이, 한잔 드십시오.》

《고마우이!》

김석홍은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술잔을 받았다. 마치도 전쟁때에 세상을 떠난 《항우》형님이 살아돌아와 마주앉은듯한 감이 들었다. 정녕 이 좌석에 《배쟁이》인 최한무가 앉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 그는 영포일대에서 결패가 세기로 소문이 짜하게 났었다. 사람들은 그를 한무라고 부르지 않고 《항우》라고 불렀었다. 한무라고 부르면 모르는 사람이 많았어도 《항우》라고 부르면 누구나 다 알았었다. 나까무라철공소에서 제관공으로 일한 그는 큰 함마를 마치도 아이들의 장난감나무망치 휘두르듯 했다. 그런 최한무는 인정이 헤펐다. 월급을 타가지고 오다가 길가에서 배고파 우는 아이를 보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사람을 깔보는 왜놈에 대하여는 용서가 없었다. 멱살을 틀어쥐고 하늘로 건듯 추켜올리기가 일쑤였다. 그래서 옥고도 여러번 치르었다. 해방을 맞아서야 사람사는 보람을 뼈속깊이 느낀 그는 철장대를 들고 철공소(조선소의 전신)를 지키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었다. 해방전부터 전설처럼 들어오던 위대한 장군님을 《신흥호》진수식때 처음으로 직접 만나뵙고는 《우리 장군님이시야말로 인걸중에 인걸이시고 장수중에 장수이시다.》라고 하면서 기쁨과 환희에 넘쳐 장밤 얘기했었다. 전쟁때 군함을 뭇다가 적기의 기총탄에 맞아 운명하면서는 차씨와 김석홍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였었다. 《주식이가 이제 미국놈들을 쳐물리치고 전선에서 돌아오면 꼭 이르오. 누가 뭐라해도 장군님만을 믿고 살라고. 그리고 내가 장군님앞에서 다진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가니 조선공이 되여 큰 배를 꼭 무으라구.》

이 세상에 한번 왔다 한번 가는것이 누구에게나 차례진 운명이지만 그는 악귀같은 미제원쑤놈들의 흉탄을 맞고 너무나도 일찌기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자, 같이 들자구.》

김석홍은 최주식에게 술을 권하며 단숨에 쭉 들이켰다. 대번에 밸굽이 훈훈해지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잔 하자니 자네 아버지 생각이 간절해지네. 〈항우〉형님이 담배는 안피웠지만 술은 무척 좋아했지. 철공소에서 대여섯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제끼고 나와 같이 어깨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다간 주막집에 들려 못된놈의 왜놈세상을 저주하며 울분에 못이겨 외상술을 먹군하였다네. 그러나 해방후엔 꼭 한고뿌만을 했어.

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살기 좋은 우리 나라에서 무엇때문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주정을 하겠느냐, 적당히 마신 다음 피곤을 풀고 새 조국건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는게 조선공 된 본분이 아니냐고 하면서 말일세. 자, 이번엔 내가 한잔 부어주지.》

김석홍은 사양하는 최주식의 빈잔에 술을 채웠다.

《아바이, 고맙습니다.》

최주식이 불깃하게 달아오른 둥그런 얼굴을 손으로 슬슬 문지르며 진정을 담아 말했다.

《어서 들게. 술이란건 참 괴상한 물건이야. 기분이 좋을 때 마시면 마음이 곱절 즐거워지지만 괴로울 때 마시면 울분이 또 배나 커지거든.》

취기가 오른 김석홍은 예상외로 말수더구가 많아졌다.

그는 해방전과 해방후, 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 그리고 천리마운동이 이 땅에 태여나던 때에 배뭇던 일을 성수가 나서 이야기했다.

아래목에 앉아 김석홍이와 최주식이가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듣고있던 한씨가 말참녜를 했다.

《정말이지 전후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수고들을 많이 했지. 밤낮이 따로 없었다니까. 현장에서 자며 일하며 세괃게 배들을 무어냈다네. 주식인 아마…》

《원참, 어머니두… 기사장동지더러 주식이가 뭐예요?》

내물 흐르듯 거침없이 흐르던 한씨의 말은 김찬의 면박에 동강이 나고말았다.

《이런 소갈머리없는 녀석이라구야. 에미가 말하는데 무슨 참견이냐, 참견이. 난 기사장이라고 부르는것보다 주식이라고 부르는것이 훨씬 더 혀가 잘 돌아간다.》

오지랍이 여간 넓지 않은 한씨가 김찬이의 말을 타박했다.

《여보, 로친네. 세살난 아이말도 귀담아들으랬다구 그애 말을 들으라구요. 말은 바른대루 우리 찬이가 옳게 말했지.》

김석홍이 점잖게 타일렀으나 한씨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가재는 게편이라구 령감은 언제봐두 애편이라니까. 부자가 아무리 맞장구를 쳐두 난 내 마음내키는대루 부르겠수다.》

《그참. 제 마음에도 그랬으면 합니다. 앞으로두 내내 그렇게 허물없이 불러주십시오.》

최주식이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령감, 보라구요. 우리 주식이가 좋다구 하질 않나.》

《아니, 그럼 본인이 자기를 기사장이라고 부르라고 할텐가. 그러면 안돼. 조선소에 나가서나 집밖에 나가선 꼭 기사장이라고 부르라구. 도장공아낙네들이나 사택아낙들 앞에서 푼수없이 주식이, 주식이 하지 말구.》

김석홍이 눈을 부릅뜨고 어성을 높여 오금을 박았으나 성미가 워낙 서글서글한 한씨는 그 말을 전혀 탓하지 않고 넙죽넙죽 제 할 말을 했다.

《걱정두 팔자웨다. 아, 조선소나 집밖에 나가서야 내 어련히 〈우리 기사장〉이라고 깍듯이 말하지 않으리요. 그쯤한건 나두 아웨다. 그리구 정 집에서까지 그렇게 강박을 하면 조카라고 부릅시다구려.》

그리고는 김찬이나 김석홍에게 말머리를 떼울가봐 저어하며 서둘러 웃말에 발을 단다.

《여보게 조카, 그런데 거 언제까지나 어머니 고생을 시킬 작정인가. 그래 한생을 총각으로 지낼려나. 어떤 녀석은 세곳에 무엇이 나듯마듯 장가를 못가 지랄인데 자네 마음은 영 갈피를 잡을수가 없다니까.》

최주식은 어디가나 듣군 하는 이런 말에 이제는 귀가 솔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다정한 사람들이 갖게 되는 너무나도 응당한 관심사였고 너무나도 당연한 동정이였다.

최주식은 한씨의 악의가 슴배여있지 않는 푸념을 듣는 순간 김석홍이나 한씨가 류선화와 그의 아버지에 대하여 혹시 알고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쳐지났다. 그런 생각이 어째서 이제야 드는지 그는 도저히 가량할수가 없었다.

《작은어머니, 저라고 왜 약속한 처녀가 없겠습니까. 옛말에 헌 신도 짝이 있다고 하던데…》

《아니, 그럼 약속한 처녀가 있으면서 서른이 되두룩 그러고있나?》

최주식은 찰랑거리는 술잔에 잠간 입을 댔다가 떼고나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전선에서 류선화란 처녀와 한생을 언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러질 않습니까. 고향이 영포고 아버지도 조선소에서 일했다고 하기에 류학을 갔다온 후 이곳 조선소 로임부에 편지를 띄웠댔는데 그런 처녀가 없다는겁니다. 주소안내소에도 알아보았는데 아직 못찾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한씨도 김석홍이도 와뜰 놀랐다.

《이제 류선화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혹시 그게 선박완성직장에서 일하던 류경훈의 외동딸이 아닌가? 군대에서 제대되여와서 조선소 진료소에서 일하던…》

김석홍이 한씨를 보며 하는 말에 최주식은 술기운이 싹 가셔지고 정신은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말짱해졌다.

《아바이, 류경훈이란분이 조선소에서 오래 일했습니까?》

《오래 일하다마다… 왜놈때부터 일했다네. 그때엔 세도가 당당한 철공소주인밑에서 명색없는 직공장을 했었지. 배무이에서 막히는것이 없고 기능두 상당히 높았으며 일두 참 잘했다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되였습니까? 지금 조선소에 있겠지요?》

흥분한 최주식은 김석홍의 옆으로 한무릎 다가앉으며 다급히 물었다. 기대와 희망이 온몸을 불태웠다.

《그 사람은 지금 조선소에 없네. 몇년전에 배를 뭇다가 사고를 쳤는데 일부 편협한 일군들이 사고를 구실로, 실상은 출신성분과 본인의 경력에 걸어 령대탄광으로 내보냈지. 그때 그 사람뿐아니라 고급기능공들을 가정주위환경이요 뭐요 하는 딱지를 붙여 여러명 내보냈다네.》

《그럼 류선화는요?》

《류선화? 그 녀자는 원래 조선소에 그냥 있게 되여있었는데 탄광합숙에서 생활할 아버지를 생각해서 자진하여 따라나갔지. 한데… 전쟁때 약속한 처녀가 류선화가 분명한가?》

《아, 그럼요.》

《그렇다? 그 녀자를 기다려서 여직껏 혼자몸으로 있단 말이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로군…》

김석홍은 동정과 련민이 어린 눈길로 최주식을 보며 말꼬리를 길게 끌었다.

최주식은 오매불망 애타게 그리고 그리던 류선화의 행처와 생활을 다소 알게 된것이 기쁘기만 하여 김석홍이와 한씨가 놀라운 표정을 짓고 따지듯 묻는 말도, 류선화를 처녀라 하지 않고 녀자라고만 부르는것도 그리고 말끝을 맺지 못하고 얼버무리는것도 안중에 없이 자기나름의 세계에만 파묻혀 그렇노라고 선선히 대답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김석홍의 낯빛은 반가움대신 비를 안은 검은 구름마냥 컴컴해졌다. 그것은 수다스런 한씨의 행동도 기색도 마찬가지였다. 한잔이면 만족하다고 하던 김석홍은 제 손으로 술잔에 술을 그득 부어 단숨에 쭉 들이켰고 한씨는 길게 한숨을 내그었다.

김석홍이와 한씨의 돌발적인 언행에 누구보다 놀란것은 김찬이였다. 그는 둥그래진 눈으로 세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석홍은 무슨 말인가 할듯말듯 망설이다가 술잔으로 다시금 손을 가져갔다.

최주식이도 그제야 김찬이처럼 얼떠름해졌다.

그때 한씨가 방안에 첩첩 드리운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기막힌 일도 다 있지. 글쎄 한쪽에선 약속을 지켜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한쪽에선…

여보게 조카, 그 녀자를 이제 더는 기다리지 말고 다른 곳에 마련을 보게.》

최주식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다른곳에 마련을 보라니? 그는 자기가 한씨의 말을 잘못 듣지나 않았는가 하여 상대방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보 로친네, 무슨 말을 함부루…》

김석홍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붙여물며 온곱지 않은 눈길로 흘기였다.

《아니 뭐, 내가 못할 말을 했수? 아무래두 알 일인데… 난 조카의 마음을 더 이상 괴롭히고 그의 구만리같은 앞길에 그늘을 던져주어선 절대로 안된다구 보우다.》

한씨는 김석홍에게 역증스레 말하고나서 최주식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엔 불만과 원망, 노여움이 한데 어울려 노기로 번뜩였다.

《이보라구 조카, 그 곱살하게 생긴 녀자에겐 이미 아들애가 있어. 그런 녀자를 여직껏 기다리다니…》

최주식은 한씨의 분노에 찬 말이 청천벽력같았다. 앞이 캄캄해지고 귀는 멍멍해졌다.

류선화에게 아들애가 있다니? 거짓말이다. 거짓말.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할수 있는가.

참으로 억하심정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온몸엔 진땀이 내돋았다.

최주식은 의지의 힘으로 자신을 간신히 수습했다.

《그의 아들이 분명합니까?》

《분명하다마다. 제대되여오면서 데리고 왔다네. 그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다구. 하긴 고슴도치도 제새끼는 함함한다고 하

데만…》

최주식의 귀에는 한씨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에겐 등대를 찾아 망망대해를 애써 헤매던 자기의 배가 사나운 격랑에 형체없이 박산난듯 했다.

아, 어쩌면, 어쩌면… 류선화가 그럴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 아들애가 있다는게 도대체 웬말인가.

10여년 남짓한 세월속에서 류선화의 신상에 그 어떤 일이 없으랴만 충격적인 사실이 가져다준 너무나도 크나큰 흥분으로 하여 리성을 잃은 최주식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으로 장판바닥을 세괃게 짚고 자기도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누가 붙들새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차거운 랭기와 짙은 어둠이 혼탁된 밖으로 비척비척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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