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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마음이 무겁고 몸이 나른했다.
그는 캪쓴 머리를 짓숙이고 철추를 매단듯싶은 걸음을 끌며 집으로 가고있었다.
가로수의 황든 잎이 길가의 여기저기에 나뒹굴고있다. 가벼운 바람에 속절없이 흩날리는 그 잎을 밟으며 스적스적 걷느라니 이즈막의 사업과 생활이 돌이켜졌다. 그러자 가슴속에서는 당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받고서도 그에 보답을 하지 못하고 산 자책감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허탈감, 모멸감, 허무감이 장마철 산골물 불어나듯 자꾸만 커지였다. 문득 그의 머리에는 자기를 비판하던 사람들의 근엄한 얼굴이며 격한 음성이 언뜻언뜻 되살아났다. 기계공업상 조문광이며 조선소 담당지도원 송명근, 조선소 당위원장 리윤종이며 최주식, 리억석, 김석홍, 강은주… 그런가 하면 자기의 주위를 삽살개처럼 맴돌며 살갑게 굴던 홍학주며 허홍대, 오매월의 역겨운 모습들…
어쩌면 내가 인생을 그렇게도 너절히 살아왔을가. 어쩌면 내가 사람들을 그렇게도 식별해보지 못했을가. 청맹과니면 나같은 청맹과니가 또 있을가. 눈앞에서 선웃음치며 돌아가는 비렬하기 그지없는 서푼짜리 인간들을 진실하게 믿고 나를 진정으로 대해주는 인간들을 배척하다니…
강준호는 자기가 오작을 낸것도 낸것이려니와 여직껏 국장을 타고난 벼슬로 여기면서 당의 믿음을 저버리고 내노라 우쭐대며 살아온것이 더더욱 억이 막혀 가슴을 쳤다. 그러느라고 강준호는 뒤에서 다급히 울리는 승용차의 경적소리도 듣지 못하였다.
《여보, 죽지 못해서그래?》
강준호는 자기뒤에서 《갱생》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고 젊은 운전사가 차창밖으로 상반신을 쑥 내밀고 성이 독같이 나서 거칠게 꿱 소리를 질러서야 펀뜩 제 정신이 들어 그자리에 말뚝처럼 섰다.
《미안하오.》
강준호는 자기가 길복판에 서있다는것을 알아보고 머리숙여 사죄했다.
《보아하니 나살이나 건사…》
운전사의 몰인정하고 투박하고 걸쭉한 욕설을 차에 타고있던 사람이 뭉청 잘랐다.
《아니, 강동무 아닙니까?》
강선에 철판과 환강때문에 출장을 갔다가 오는 리억석이였다.
《기사장동무, 내가 그만… 생각에 옴해서… 차도를 따라 걷고있는것도… 몰랐소.》
면구스러워난 강준호는 말더듬이처럼 떠듬떠듬 대답했다.
평소에 그를 아니꼽게 보아온 리억석은 그냥 가버릴가 하다가 강준호가 여간만 옹색해하지 않아하는터라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건늬였다.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합니까?》
《지난날 생활해온거며 오늘 상갑판오작을 낸거랑 두루…》
그 말에 리억석의 눈은 화등잔처럼 둥그래졌다.
《상갑판오작이라니요?》
《이 주책머리없는것이 랭장운반선 선수상갑판 오작을 냈소.》
강준호의 자책어린 힘없는 말에 리억석의 가슴속에선 분기가 스르르 괴여올랐다.
그게 어떤 배라구 상갑판오작을 낸단 말인가. 대관절 강준호가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인가.
다혈질인 리억석은 흥분했다. 그는 자기가 서있는 곳이 사람들의 왕래가 번다한 길가라는것도 생각지 않고 돌덩이처럼 꽉 틀어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버럭 어성을 높이였다.
《요즈음 한초한초가 얼마나 귀중한줄을 몰라서, 그게 얼마나 귀한 철판인줄을 몰라서 오작을 내는거요? 도대체 제 정신을 가지고 한 일인가말요.》
《…》
잘못을 저지른 강준호는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 발끝만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망두석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리억석은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강준호를 쏘아보았다.
저런 의리도 없는 사람을 믿고 최주식이 상갑판제작을 맡기다니…
시어미역증에 개옆구리 찬다고 그는 최주식이까지 원망했다.
당장 최주식을 만나 저 사람을 상갑판제작조에서 떼자고 해야겠어. 거기에 그냥 뒀다가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리억석이 부걱부걱 괴여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고 강준호에게 욕설을 퍼부으려는데 행인들속에서 한사람이 뚱기적거리며 오리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살이 피둥피둥 오른 허홍대였다. 그는 퇴근길인모양 머리에 반지르르 기름을 바르고 밤색 가방을 옆구리에 꼈다. 리억석에게 머리를 가볍게 숙여보인 그는 침방울을 튕기며 입을 열었다.
《기사장동지, 말썽만 일으키는 저런 사람을 무엇때문에 우리 기업소에 둬둡니까? 우리 조선소가 뭐 저런 인간들이나 먹여살리는 곳입니까?》
리억석은 허홍대의 말에 동감이였으나 달라는것 없이 미운 그와 맞장구를 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더러운것들!
리억석은 비맞은 수탉처럼 후줄근해 서있는 강준호와 그옆에 막달찬 임신부처럼 배를 잔뜩 내밀고 오만하게 서있는 허홍대를 멸시와 조소에 찬 눈길로 일별하고 차에 올랐다. 그러자 허홍대도 곧 자리를 떴다.
강준호는 리억석이와 허홍대가 옆을 떠나버리자 땅꺼지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나서 모닥불을 들쓴듯 홧홧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였다.
내가 이젠 길가에서까지 욕을 먹다니… 그것도 날 끝없이 올리춰주던 허홍대한테서.
아, 수령님과 당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 의리를 저버리고 값없이 살아온 가엾은 인간아. 너는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저 나무잎과 다름없구나.
그가 자기를 끝없이 타매하고 문책하며 집에 들어서자 요즈음 신경질이 버쩍 늘어난 안해가 지청구를 했다.
《여보, 당신이 국장을 할 때 홍학주인가 하는 녀석에게 직장장을 시켜준다고 하면서 인삼이며 양복지며 술이며 숭어따위의 뢰물을 받아온것이 있잖았소?》
《그래서?》
강준호는 흐르는 세월의 망각속에 깊이 파묻혀버린 구역질나는 지난 생활의 더러운 갈피를 들추어내는 소갈머리없는 안해를 못마땅한 눈길로 흘겨보았다.
《그 값을 내라고 그 집 댁네가 와서 한겻이나 앙탈을 부리다 갔수다.》
《…》
강준호는 실로 기가 차고 화가 동했다.
배라먹을년. 해죽거리며 내 품으로 기여들던 때가 언젠데 이제 와서 물건값을 내라는거야.
《여보, 그년이 이제 다시 오면 저 뒤간의것이나 콱 퍼다 먹으라고 해. 그게 값이라구.》
역증스레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선 그는 쓰러지듯 방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그래 이건 믿음을 저버리고 살아온데 대한 응당한 보상이지. 지난날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더럽게 산 삶의 대가야.
그는 쓰리고 아픈 가슴을 부여안고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