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겹으로 찾아온 기쁨과 마음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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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선화의 극진한 간호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차씨는 문을 열어놓고 빈방에 홀로 앉아 조선공들이 일하며 낄 벙어리장갑을 한뜸두뜸 정성담아 깁고있었다.
코등으로 스르르 미끄러지군 하는 돋보기를 추스르면서 한창 바느질을 다그치던 그는 눈이 사물거리자 일손을 놓고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련화봉우에 장바 두기장쯤 되게 걸려있는 가을해가 여름볕마냥 다양하게 쏟아지고있다. 하루종일 마당을 날아예던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피곤에 몰려서인지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회칠을 한 울타리우에 재간스럽게 앉아 하르르한 나래를 살짝 늘어뜨리고서 까딱까딱 조을고있고 뜰안에 조성한 오각별모양의 화단에는 키다리 맨드라미며 접중화, 노란 나리며 소담한 함박꽃이 활짝 피여 진한 향기를 풍기고있다. 그우를 벌들이 뻔질나게 날아들었다. 한놈이 꿀을 따가지고 날아가면 다른 놈이 날아들고 그놈이 가면 또 다른 놈이 날아들고…
(참, 부지런도 한 놈들이지. 한데 저놈들의 규률이 그렇게도 세다면서?… 꿀을 못따가지고는 보초꿀벌에게 걸려 제집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니… 참, 꿀벌같은 미물들도 제 앞채기를 하고 살아가는데 난 이게 무슨 꼴이람.
늙마에 병이 들어 방구석에 들어박혀가지구 조선공들의 일을 제대로 돕지조차 못하고있으니… 한데 주식이조차 병에 들건 뭐람.)
한숨을 길게 내그은 차씨가 창밖에서 눈길을 떼고 바늘을 집어드는데 천장에서 호박씨만 한 거미가 락하산을 타고 내리듯 뚝 떨어져 방의 중간에 둥둥 매달린다.
예로부터 거미가 줄을 타고 내려오면 반드시 손님이 온다는데…
차씨는 그 어떤 기대속에 한가닥 희망을 가지고 귀한 손님이 오기를 기원했다.
그때 밖에서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다급히 났다. 이어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낯이 발갛게 상기된 류선화가 숨을 할딱거리며 들어온다. 반듯한 이마와 량볼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정채도는 눈엔 미소가 함뿍 어렸다.
여느날 같으면 몇시간 더 있어야 조선소에서 퇴근해올 류선화가 기쁨에 넘쳐 허둥거리며 오래로 들어서자 차씨는 눈이 덩둘해졌다.
《오늘은 어찌된거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니냐?》
《어머니, 오셨어요.》
류선화는 가쁜숨을 내뿜으며 쌍겹이 진 고운 눈에 생글생글 웃음을 담고 대답했다.
웃방에서 공부하던 정호일이가 미닫이를 드르륵 열고 내려오며 간참했다.
《어머니, 누가 오셨나요?》
차씨도 궁금증을 못참겠는모양 덩달아 물었다.
《새애기야, 말을 좀 차근차근 하렴. 네 말을 듣고선 무슨 말인지 통 알수가 없구나.》
흥분한김에 지내 덤벼쳤음을 자인한듯 류선화의 갸름한 얼굴은 딸기빛으로 더 빨갛게 물들여졌다. 그는 선이 곧은 코등에 송글송글 내밴 좁쌀땀과 주름살 하나없는 이마로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줄땀을 하얀 손수건으로 자근자근 눌렀다. 가슴속에 차고넘치는 기쁨과 환희는 쌍겹진 눈에도 도툼한 입에도 명랑한 목소리에도 담뿍 어리였다.
《병치료를 갔던 그이가 완쾌되여 조선소로 돌아왔어요.》
《아버지가 왔단 말이지요? 야, 좋네.》
호일이가 손벽을 치며 방안이 좁다하게 깡충깡충 뛰며 팽이처럼 돌아가는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차씨는 《뭐라구? 애아버지가 병이 다 나아서 왔어?》
라고 반문하며 류선화가 마치도 최주식이기나 한듯 그의 손을 덥석 잡는다.
《그래 그 사람이 지금 어데 있느냐?》
《조선소를 돌아보고있어요.》
류선화는 가쯘하게 박힌 박속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상그레 웃었다.
차씨도 진정 마음이 개운하고 흐뭇하여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웠다. 설 자리, 앉을 자리를 알고 공과 사를 가려 분별있게 처신하는 아들이 못내 미덥고 대견했다. 그라고 왜 오래동안 헤여져있던 이 에미가 보고싶지 않고 정든 집으로 한달음에 달려오고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해방전 류사리 사과밭 가시울타리를 뛰여넘다가 과수원주인한테 붙잡혀 자기의 애간장을 지지리 태우던것이 엊그제 같은데 해방후 수령님의 자애로운 품에 안겨 최주식이 이젠 어엿한 조선소의 주인으로 자라났다.
《어머니, 기쁨은 그뿐만이 아니예요.》
《그래 또 뭐가 있느냐?》
차씨의 흥떠운 물음에 류선화는 눈을 빛내이며 서둘러 대답했다.
《그이가 글쎄… 우리 조선소 지배인으로 임명을 받구 내려왔대요.》
《어머니, 아버지가 지배인 됐어요?》
정호일은 너무 기뻐 짜랑짜랑 울리는 목소리로 웨치듯 말했다.
류선화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아니, 우리 주식이가 지배인으루?
갑자기 찾아온 기쁨이 너무도 크면 잘 믿어지지 않는법이다. 차씨는 겹으로 온 어벌찬 기쁨에 그만 얼떠름해졌다.
세계적으로 하나밖에 없다는 병원, 보통사람들은 입원하지조차 못한다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온것만도 무상의 영광인데 지배인으로까지 되여오다니…
차씨는 꿈이 아닌가싶어 살빠진 허벅다리를 손톱으로 슬쩍 꼬집어봤다. 따끔한 촉감이 느껴진다.
꿈은 분명 아니로구나.
하지만 그는 류선화의 말을 채 믿을수가 없어 한마디 더 물었다.
《새애기야, 그게 뜬소문은 아니냐?》
《뜬소문이라니요? 아무렴 제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겠나요.》
죄다 사실이란말이지. 하기야 그런 말을 허투루 할수 없구말구.
차씨의 주름진 눈가에는 핑그르르 눈물이 어리였다.
세상만물엔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데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믿음에는 진정 한계점이 없구나. 그이의 하늘같은 은덕과 은정에 어떻게 하면 천만분의 하나라도 보답을 할가. 하늘땅이 열백번 변하고 백골이 진토된대도 다는 갚지 못하겠구나.
그의 주름진 눈귀로는 고마움에 젖은 행복의 눈물이 줄을 지어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할머니, 기쁜 날에 울긴 왜 우나?》
정호일이가 눈이 올롱해서 물었다.
《얘야, 기쁨이 너무 크면 눈물이 나오기마련이란다.》
차씨가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어른들은 정말 이상해. 슬퍼두 울구 기뻐도 울구.》
류선화가 찧고 까부는 정호일을 곱게 흘겨보고 행복의 무아경속에 잠겨있는 차씨에게 뭘 좀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차씨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암, 준비해야 하구말구. 너 이제 얼핏 식료상점을 다녀오너라.》
차씨는 분부하고나서 앓던 사람같지 않게 치마바람을 일구며 방으로 들어간다.
류선화는 부엌에 들어가 저자구럭을 들고 나왔다. 정호일이 따라나섰다.
《어머니, 나도 같이 갈래요.》
《그러자.》
그들이 손을 잡고 오손도손 말을 주고받으며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계십니까?》
대문밖에서 남자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부르듯 대답하며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류선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흠칫했다.
홍학주가 얼기설기 얽은 곰보얼굴에 간교한 웃음을 담고 반쯤 열려진 대문가에 서있었다.
류선화는 조선소에서 돌아가는 여론과 자기가 직접 목격한 일들로 하여 홍학주를 좋지 않게 보고있었다. 더우기 최주식이 병치료를 간 뒤로는 길가에서 만나도 쓴오이보듯 했고 입가에 경멸에 찬 랭소를 띠우고 지나치군하던 홍학주였다. 그런 그가 얼굴에 반가운 웃음을 띠우고 불쑥 집에 나타났으니 류선화로선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비단결같은 류선화는 찾아온 사람을 차마 문밖에서 돌아가라고 할수 없었다.
《들어오세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홍학주는 류선화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갑삭 인사를 하며 뜰로 들어섰다.
《사모님, 정말 기쁘시겠습니다. 경사가 겹으로 와서…》
《고마와요.》
류선화는 웃는 낯에 침을 뱉을수가 없어 아니꼬운 심정을 간신히 누르고 공손히 대답했다.
홍학주는 손에 들고온 지함을 토방에 올려놓았다.
《저… 이거 약소하지만… 지배인동지에게 대접하십시오.》
《뭔데요?》
《풀어보시면 압니다. 자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안됩니다.》
정색을 지은 류선화가 굳이 마다했다. 그 말을 듣고 차씨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새애기야, 무얼 그러느냐?》
《아니, 어머님두 계셨구만요.》
홍학주는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며 허리굽혀 굽석 인사를 했다.
류선화가 토방우에 놓인 지함을 가리키였다.
《홍부직장장동지가 이걸 가져왔기에…》
《그게 뭔데?》
《뭐, 변변치 않은겁니다. 지배인동지 몸보신하라고 식품을 조금 들고왔습니다.》
홍학주의 말에 차씨가 손을 내흔들었다.
《생각해주는 그 마음 더없이 고맙지만 가져가시우. 우리 그 사람은 그런걸 영 질색한다우.》
《어머님두 참, 그저 성의뿐이니 다르게 생각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너무 그러시면 제가 섭섭하지 않습니까.》
홍학주는 이러고나서 누가 붙들세라 황황히 대문밖으로 나가버린다.
차씨와 류선화는 그가 뺑소니치듯 사라진쪽을 어이없는 눈길로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하지만 홍학주가 성의로 가져다놓고 간것을 다시 돌려보낼수가 없어서 포장끈을 풀고 지함뚜껑을 열어보았다. 순간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쩍 벌리였다. 지함은 비록 크지 않았지만 그속에 들어있는것은 진귀한 식품들이였다. 산삼 세뿌리, 고급술 네병,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넣은 말린 낙지…
《야, 그 아저씨 대단한데요. 아버지 잡수시라고 산삼까지 가져오구.》
정호일이 방글거리는데 류선화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걸 그대로 놔두었다가 그이가 들어오신 다음에 물어보고서 처리하는것이 어떨가요?》
《잘 생각했다. 실은 나도 그랬으면 하고 여겼었는데 네 마음이 어떨지 몰라 말을 하지 않았었다.》
차씨의 흔연한 대답에 류선화는 본래대로 지함뚜껑을 꼭 닫고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 제 상점에 얼른 갔다오겠어요.》
《어서 그래라.》
차씨는 부엌으로 들어가고 류선화와 정호일은 저자구럭을 들고서 대문을 나섰다.
최주식은 저녁 여덟시가 되여서야 조선소에서 집으로 들어왔다.
어둠에 덮인 창밖을 내다보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눈이 빠지게 최주식을 기다리던 정호일은 목에 동동 매달렸고 차씨는 환히 웃으며 아름에 버는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 병은 뚝 떼고 왔겠지?》
《그럼요, 어머니. 건강해진 이 몸을 좀 보십시오. 그런데 그사이 어머님병엔 좀 차도가 있습니까?》
최주식은 이러며 껄껄 웃는다.
사실말이지 최주식의 신상은 그사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불깃불깃하게 혈색이 도는 둥그스름한 얼굴, 펑퍼짐한 넓은 어깨, 보기 좋게 배가 나온 실한 몸…
지난날엔 비할수도 없게 그의 체모는 름름해지고 틀이 잡혔다.
《나도 새애기와 호일이 덕분에 병이 퍼그나 수그러졌다.》
차씨는 최주식에게서 눈길을 떼고 옆에 서있는 류선화와 정호일이를 정찬 눈매로 바라보았다.
《아버지, 난 아버지를 꿈에서 몇번씩이나 보았어요.》
《그래.》
최주식은 귀여운 호일이의 머리를 살틀히 쓰다듬었다.
《어머니!》
류선화는 그들의 이야기가 인차 끝날것 같지 않아 여러번 덥혀서 방가운데 차려놓은 밥상을 눈짓했다. 차씨는 제 정신이 쑥 빠졌다며 최주식을 밥상앞으로 이끌었다.
모자간이나 부부간이나 그 정은 각별했다.
《이거 뭐 명절처럼 듬뿍 차렸군요.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은게 천만다행입니다.》
《원, 무슨 말을…》
차씨는 시장할텐데 어서 들라고 했다.
《어머니도 같이 합시다.》
《기다리다가 우린 먼저 먹었다.》
《어서 드세요.》
차씨와 류선화가 웃으며 다정히 권하는데 정호일이 께끼였다.
《아버지, 밥 많이 잡수셔야 해요. 그래야 몸이 튼튼해서 일을 꽝꽝 할수 있대요.》
《그래그래. 건강해야 일을 많이 할수 있지.》
식욕이 좋아진 최주식은 수저를 들자 밥과 국사발 밑굽을 반반하게 냈다.
차씨는 그가 상에서 물러나 담배를 붙여물자 외국에 가서 어떻게 지냈고 치료는 어떻게 받았는가고 물었다.
《어머니, 그렇지 않아도 제 그 얘길 하려던참입니다.》
최주식은 이렇게 대답하고나서 부엌에서 류선화가 설겆이를 끝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보건성국장인 송두성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직접 목격한 가슴뜨거운 사연을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