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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중기운전공 박성임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맨 선참으로 하고 남산을 향해 종종 걸음을 놓았다.
선체가공직장뒤에 면한 남산공원의 평양뽀뿌라나무밑에서 점심식사후에 꼭 만나자고 용접공 윤재수가 쪽지편지를 보내온 까닭이였다.
만나서 한마디 하면 될 일을 가지고 쪽지편지는 무슨 쪽지편지람. 그러다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박성임은 자기가 잠간 자리를 뜬 사이에 윤재수가 기중기운전칸벽의 사각거울못에 쪽지편지를 꽂아놓고 조종변옆에는 동그란 손거울을 놔두고 간것을 보고 입속으로 토달거렸으나 마음은 그렇지 않아 약속된 지점으로 줄달음쳐가고있는것이다. 하긴 새 선박의 선체를 멋들어지게 용접하는 윤재수를 매일 내려다보면서도 요사이에는 자꾸만 그가 그리워지는것을 어쩔수 없는 박성임이다.
키도 크지 못하고 남자싸게 생기지도 못한 그에게 어쩌면 그리도 마음이 끌리는것일가?
박성임은 발걸음을 재게 옮겨놓으며 생각했다.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때문일가? 아니면 일별계획을 150~200%씩 꼭꼭 해내는 용접솜씨때문일가? 그도 아니면 그의 남다른 정열때문일가?
따져보면 선체가공직장은 물론 조선소적으로도 그또래의 나이에 용접을 그렇듯 나무람할데없이 잘하는 용접공은 별반 없었다.
윤재수는 용접공으로 한생을 보낸 아버지의 기술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평면용접, 수직용접은 물론 제일 힘들고 까다로운 천정용접까지 아주 능숙하게 했다.
그가 용접한 부분에선 수압시험을 하든, 캄마촬영을 하든 불합격품이 나지 않았다.
(그가 남자싸게만 생겼더라면 정말 얼마나 좋을가?)
이렇게 생각하는 박성임의 머리에는 문득 그 언젠가 한호실에 있는 강은주가 출근길에 하던 말이 떠올랐다.
…
《성임이, 넌 참 행복하겠다. 윤재수동무처럼 훌륭한 청년을 마음속에 두고있으니 말이다.》
그 말에 박성임은 깔깔 웃었다.
《아이참, 내가 그를 마음에 두고있다구요? 그 동무의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 처녀처럼 가는 눈섭에 들창코? 두툼한 입술에 작달막한 키?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갈듯싶은 호리호리한 몸매?…
그런 청년을 내가 마음에 둬요?
언니가 사랑하는 김찬동무처럼 미남이라면 몰라도…》
활달한 강은주는 그의 말을 탓하지 않고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얘, 네가 잘났다고 너무 뻐기지 말아. 사람이야 마음씨와 일이 기본이지 생김새가 기본이냐?》
《언니, 난 윤재수동무가 김찬동무처럼 잘 생기고 일 잘하는 청년이라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열렬히 사랑하겠어요.
참말이지 김찬동무는 얼마나 훌륭해요.
제대군인에 당원이구 듬직하구 입이 무거운데다 진실하지요. 배관일은 또 얼마나 펄쩍 날아요.
전번엔 배관을 줄이면서도 종전의 능력을 낼수 있는 멋진 창의고안을 하여 국가에 큰 리익을 주었지요. 난 오히려 언니가 부러워 죽을지경이예요. 막 시샘이 난다니까요. 하기야 언니가 잘 생겼으니 김찬동무가 따르겠지만…》
강은주는 명랑한 박성임이 기특하고 사랑스러워 즐겁게 웃었다.
《애두 참, 못하는 말이 없구나. 윤재수동무가 어째서? 쾌활하면서도 소탈하구 용접에선 막히는 일이 없구. 그래 넌 윤재수동무가 정문영예게시판에 큼직하게 사진이 나붙은게 마음에 없어 그러니?》
《그래두 김찬동무에 비할바야 못되지요뭐.》
박성임은 이렇게 말했으나 시간이 흐르고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윤재수가 흠뻑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남녀간의 사랑엔 연분이라는게 있는 모양이다.
한데 그 연분은 생김새보다 조국을 끝없이 사랑하는 마음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 시대를 안은 뜨거운 열정과 포부, 아름다운 리상에 기초를 두고있는게 아닐가.
박성임은 요즈음에 와서 윤재수가 회의에 가고 일터에 없는 날이면, 한겻이라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때면 마음 한구석이 비기라도 한듯 허전했다.
그래서 처녀는 하루일이 끝나고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윤재수를 생각하면서 손수건에 용접봉을 끼운 고대를 정성담아 수놓군했다.
…
박성임이 청사앞에 펼쳐진 넓은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는 주름 하나 없는 반듯한 이마로 줄땀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겨드랑이와 옷깃에도 질쩍하니 땀이 배였다.
한여름의 한낮, 구름 한점 없이 높고 푸른 하늘에서는 은백색 태양이 불비를 쏟아붓고있었다. 그 폭양에 지구상의 생명체는 물론 무생명체조차도 다 녹초가 되여버린듯했다. 길가의 풀들과 화단의 꽃잎들은 가마에 데친 배추잎처럼 시들해졌고 푸르싱싱하던 가로수잎도 생기를 잃고 박죽마냥 오그라들었다.
포장도로도, 스레트지붕도, 철판도, 선체도 화끈하니 달아올랐다.
불꽃을 날리며 한자리에서 일하는 용접공들은 용접하기에 매우 바빠했으며 선체내부에서 일손을 다그치는 배관공이나 도장공, 제관공들은 더 힘들어했다.
확확 달아오른 대지와 불판처럼 뜨거운 선체를 식히고 기가 죽은 동식물들에 활력을 부어넣으련듯 바다바람이 이따금씩 슬렁슬렁 불어왔으나 그것은 오히려 열기를 더 보태줄 따름이였다.
조선소에서는 상급의 조치에 따라 점심시간을 늘구었다. 하지만 조선공들의 대다수는 무더위를 무릅쓰고 일을 억척스레 해댔다. 선박무이는 직접적인 정신로동이 아니여서 로력을 투하하는만큼 일자리가 났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소를 현지지도하며 주신 교시를 높이 받들고 최주식이 생각해낸 지상확대식배무이조립방법을 받아들여 선박건조를 하게 되니 배무이가 눈에 띄게 진척되였다.
하늘을 찌를듯 키높이 미칠하게 자란 평양뽀뿌라나무밑에서 윤재수를 기다리며 서있던 박성임은 콩알만 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12시 25분이다.
점심식사후에 인차 만나자고 쪽지편지까지 써서 운전실벽에 끼워놓고선 어째 아직도 안오는걸가?
박성임은 물탕크에 물이 차오르듯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하기야 일상생활에서 사람을 기다리는것이상 마음이 초조하고 조급하고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디 있을가. 일단 약속을 해놓고서 그 시간을 어기는것은 인간의 초보적인 례의나 도리에도 어긋나는법이다. 하물며 남녀간임에랴!
(꽃본 나비처럼 내 주위를 에도는 주제에 제쪽에서 오히려 약속한 시간을 어겨?)
처녀는 작업복주머니에서 동그란 손거울을 꺼내였다. 윤재수가 쪽지편지와 함께 기중기운전칸의 조종변옆에 놓았던 거울이다. 맑은 거울에선 새파랗게 성이 난 처녀가 성임이를 올려다보고있다. 그는 거울을 뒤집었다. 그러자 정자로 쓴 글자가 한눈에 안겨왔다. 《거울처럼 티가 없고 끝이 없기를! ㅇㅈㅅ》
흥, 약속도 지키지 않으면서 거울처럼 마음에 티가 없고 그 둘레처럼 끝이 없기를 바라? 어처구니 없네.
처녀는 손거울을 풀숲에 내던질가 하다가 주머니에 넣고 선체가공직장쪽으로 향한 길을 따라 몇걸음을 옮겨놓았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가버려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걸음을 오똑 멈추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닐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 안올텐가. 그렇지만 그 일이 어떤것이든 나와 무슨 상관이람. 만나서 결별을 선언하고서 가야 한다. 그 잘난 거울도 돌려주고… 내가 언제 그를 사랑했다구.
그러는 사이에 15분이 또 지나갔다.
처녀는 바짝 약이 올랐다. 통통한 볼근육이 팔딱거리고 눈에서는 노기가 번뜩인다. 윤재수에 대한 좋은 감정은 비누거품처럼 되고말았다.
그를 마음속 깊은곳에 간직했던 내가 맹꽁이지. 오늘 퇴근하면 수놓던 손수건을 찢어버릴테다.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 박성임은 둥치가 굵은 평양뽀뿌라나무밑을 떠나 다시금 자드락길을 타박타박 내리걸었다. 그런 박성임을 조롱하듯 풀숲에서 풀매미가 찌륵거렸다. 그는 돌을 주어 내던졌다. 조용해졌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자마자 풀매미는 다시 운다. 네놈들까지 날 숙봐. 그가 돌을 집으려 허리를 굽히는데 저쪽에서 관목숲을 다급히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성임은 일어서며 뒤돌아봤다. 땀으로 미역을 감은 윤재수가 헐금씨금 달려오고있다.
《성임동무!》
박성임은 못본척, 못들은척 걸으려 했다. 하지만 가슴속에 고인 불만이 그를 그자리에 못박았다.
처녀는 쌀쌀하게 대답했다.
《왜 그래요?》
윤재수는 처녀의 곁에 오자 손수건을 꺼내 땀흐르는 얼굴을 뻑뻑 문지르며 자책이 스민 목소리로 사죄했다.
《약속한 시간을 어겨서 정말 미안해.》
《미안한걸 알면서도 남을 기다리게 해요? 다시는 동무와 상대를 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날 만날 생각일랑 아예 마세요. 그리고 이런 싱거운짓은 하지 마세요. 자 거울을 받아요.》
박성임은 동그란 손거울을 내밀며 깔끔한 눈매로 윤재수를 쏘아본다.
《사실은…》
윤재수는 손거울을 받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말을 갑잘랐다.
《사실이 어쨌다는거예요. 어서 거울이나 받아요.》
박성임의 기상은 여전히 표표했고 독촉은 불같았다.
윤재수는 처녀의 속이 여간만 뒤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런 때는 그 어떤 구실이나 변명도 필요가 없다. 오직 진실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다.
그는 약속한 시간을 어기게 된 사연을 할수없이 털어놓았다.
《성임동무, 사실은말야. 점심식사하러 작업반휴계실문을 나서는데 세포위원장동지가 좀 얘기할게 있으니 남으라고 하더구만. 그러니 안남을수 있어?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하다가 당규약책을 주면서 공부를 잘하라고 하더구만. 그래 너무 기쁜김에, 동무가 기다릴것 같아 점심도 먹지 않고 막뛰여오는 길이야.》
윤재수의 꾸밈없는 말에 앵돌아졌던 박성임의 속은 대번에 풀리였다. 마치도 웅뎅이의 살얼음이 다양한 해볕에 녹아버리듯.
《그런 일이 있은것도 모르고 난… 동무를 원망했어요. 축하해요.》
그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고 눈은 별처럼 반짝인다. 언제 노기가 어렸던가싶다.
《고마와.》
그들은 평양뽀뿌라나무밑으로 가서 기다란 의자우에 사이좋게 나란히 걸터앉았다. 무성한 나무잎이 불볕을 막아주었다.
《동무는 머지 않아 당원이 되겠군요.》
처녀는 정겹게 말하고나서 가공직장과 그아래로 아득히 펼쳐진 서해를 내려다봤다. 청년들이 한마음한뜻으로 조립한 왁새기중기가 선체곁에 기다란 팔을 쭉 펴고 거연히 서있었고 바다에서는 누런 물이 늠실늠실 춤을 추며 방파제로 밀려온다. 그우를 배 흰 갈매기가 끼르륵거리며 날아예고 그우에선 또 눈부신 태양이 빛을 뿜는다. 태양도 바다도 갈매기도 윤재수를 축하하는듯싶다.
(재수동무는 얼마나 기쁠가.)
처녀는 윤재수가 부러웠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선박을 무은 후엔 성임동무도 당원이 될거야.》
《그럴가요?》
《난 꼭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윤재수는 크고 억센 손으로 박성임의 자그마한 손을 꽉 잡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박성임은 윤재수에게 잡힌 손을 빼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상그레 웃으며 나지막하게 속살거렸다.
《그렇게 됐음 얼마나 좋을가요.》
《당원이 되기 위해 일을 더 잘해야지. 당면하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시선박을 제기일에 어김없이 무어내야 해.》
윤재수는 이러고나서 웬일인지 한숨을 길게 내쉰다.
박성임은 웃음을 거두고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무슨 다른 일이 생겼어요?》
《생겼어. 내 며칠전부터 한가지를 깊이 생각하구있는데 잘 풀리지 않는구만.…
그래 성임동무는 내가 무엇이 걸려 그러는지 알아?》
《?…》
처녀는 가슴이 널뛰듯했다.
때없이 던지는 재수의 롱말, 은근한 눈빛, 쪽지편지, 동그란 손거울, 거울뒤면에 쪼아박듯 정자로 써넣은 글…
윤재수가 불쑥 《내 심장속엔 성임동무가 들어있는데 동무는 내 청을 기꺼이 받아줄수 있겠어.》하고 물을듯한 예감이 온몸을 서리서리 휩싼다.
그가 정말 그렇게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할가?
《모르겠어?》
윤재수가 다그쳐 물었다.
《아이참, 내가 알게 뭐예요?》
《아니, 한생 한지붕밑에서 걸어갈 성임동무가 그것도 모르다니?…》
(어쩌면… 마치도 자기 사람이 다 된것처럼 말하네.)
박성임은 윤재수의 억센 손아귀에서 자기 손을 살그머니 빼내며 불이 이글거리는 윤재수의 눈을 할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은 웬일인지 훗훗했다.
《도대체 그게 뭐예요?》
이번엔 박성임이 안달이 나서 물었다.
윤재수는 다시금 한숨을 길게 내긋더니 입을 열었다.
《전기용접대신 탄산가스용접을 짬짬이 연구하고있는데 잘 안되여서그래. 그것만 되면 전기를 절약하면서도 용접을 배나 빠르게 하고 용접의 질도 더 높일수 있겠는데…》
박성임은 윤재수의 입에서 마음조여 기대했던 말이 아니라 왕청같은 말이 불쑥 튀여나오자 몹시 서운했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감정이였으며 생각이였다.
고급용접공으로 조선소에 소문이 자자하게 난 그의 가슴속에 어쩌면 그런 대담한 구상이 또 나래치는걸가.
박성임은 키도 몸도 크지 않은 윤재수가 마치도 《갈리버려행기》에 나오는 거인처럼 느껴졌다.
《최주식기사장동지가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여기 계셨으면 나의 창안을 쌍수들어 환영하면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을텐데…》
《그래요. 그런데 기사장동지가 안계시니 어쩌겠어요. 거 왜 공업시험소 용접연구실의 강현복연구사동지랑 좀 토론해보지요.》
《그와도 몇번을 토론해보았는데 뾰족한 수가 나오질 않아서 그래.》
《난 동무가 꼭 그 안을 성공시키리라고 봐요. 그 열정, 그 패기를 가지고 무엇인들 못해내겠나요.》
박성임은 윤재수가 자기보다 몇배나 더 속이 깊고 일욕심이 땅두께보다 더 두껍고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더 높음을 진실로 절감하면서 기중기운전공으로서 자기도 의의있는 일을 꼭 찾아서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