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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시.
하늘에선 미처 잠자리에 들지 못한 별들이 추위에 오돌오돌 떨며 명멸하고 땅우에선 동해에서 불어오는 맵짠 바람이 전선줄을 울리고 앙상한 나무가지를 뒤흔들며 눈가루를 흩날린다.
동장군은 밤이 깊어지자 자기의 위세를 더 돋구며 기승을 부리고있다.
렬차에서 내리는 길로 정든 조선소를 한바퀴 쭉 돌아보고난 최주식은 그때에야 집에 이르렀다.
그는 어머니가 단잠에서 깨날세라 발소리를 죽여가며 마당을 지나 토방돌우에 올라섰다.
허리를 굽히고 가만가만 신끈을 푸는데 안에서 《이제 오느냐?》하는 차씨의 귀에 익은 정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어 방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 문이 활짝 열린다.
(밤이 깊었는데 여태 주무시지 않고계셨구나!)
최주식은 다심한 어머니의 살뜰한 정에 눈굽이 뜨거워져 머리를 숙이였다.
《막차의 기적소리가 울린지도 시간반이 넘었겠는데 어째 이리 늦게 오느냐?》
차씨의 높지 않은 어조에는 탓함보다도 근심과 걱정이 짙게 슴배여있다.
《차에서 내려 조선소에 들렸댔습니다. 도제 이틀을 떠나있었는데 꼭 열흘이 된것 같아서말입니다.》
《그랬댔구나. 그런걸 난…》
차씨는 최주식의 삼면쟈크가방을 받아 책상우에 놓으며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띠웠다.
《그래 오가는 길은 다 무사했겠지?》
《그럼요.》
최주식은 벌씬벌씬 웃으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차씨는 갔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의 사업에 대해서는 최주식이 먼저 말하기전에는 알려고 하지 않는 차씨였다.
《배고프겠구나.》
차씨는 이러며 서둘러 부엌으로 나간다.
《기차칸에서 곽밥을 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원, 그게 언젠데…》
최주식은 하얀 토끼털모자와 재빛 반외투를 벗고 잠자기전 습관대로 밖에 나가 찬물로 손발을 씻고 들어왔다. 차씨가 그사이 방 가운데 밥상을 차려놓았다. 가마에 밥과 국을 넣어두었던 모양 그릇들에선 흰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른다.
차씨는 기차타고 먼길을 다녀오느라 피곤하고 춥겠는데 반주를 하고서 식사를 하라며 따끈한 아래목에 놓아두었던 술병을 기울여 상우의 빈잔에 술을 붓는다. 많이는 못해도 한고뿌쯤 즐겨하는 최주식이였다.
《어머니도 식사를 더 하십시오.》
《어서 너나 먹어라.》
최주식은 고뿌에 담긴 미지근한 술을 단숨에 쭉 들이켰다. 속이 대번에 화끈 달아올랐다.
《한고뿌 더 하려무나.》
《아니요. 그만하겠습니다.》
최주식은 수저를 들며 다난한 생활의 흔적을 말해주는 차씨의 이마와 입귀에 난 굵고 가는 주름을 서글픈 눈매로 바라보았다.
인생은 어찌하여 나이가 들면 늙어야 하는것일가.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태여나기도 하고 사멸하기도 함을 모르는바 아니였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보자 자연히 생각이 깊어지는것이였다. 더우기 병약한 어머니와 얼마간 또 헤여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온치 않았다.
《왜 그렇게 찬찬히 보느냐. 내 얼굴에 무엇이 묻기라도 했니?》
차씨는 어딘가 모르게 수심과 서글픔에 잠긴것 같은 최주식을 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아니요.》
《그럼?》
최주식은 눈길을 슬며시 내리깔며 대답했다.
《저… 어머니와 당분간 헤여져 살아야 할것 같습니다.》
그 말에 차씨의 눈은 놀라움으로 둥그래졌다.
《헤여져 살다니? 뚱딴지같이 그건 무슨 소리냐?》
《이번에 평양에 가서 영포조선소 기사장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래?!》
차씨의 낯에는 대번에 의문과 놀라움이 가셔지고 열아들 못지 않은 아들을 둔 대견함이 함뿍 어리였다.
《어머니, 어깨가 정말 무거워집니다. 지난날 별로 한 일도 없는 저를 당에서 이렇게까지 믿어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구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은덕에 보답해야 한다. 의리가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지. 너의 아버지는 조국을 찾아주시고 행복한 생활을 마련해주신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저 있는 힘껏 일을 했단다.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계셔 큰 기업소의 기사장이 된 장한 네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대견해하겠니.》
이렇게 말하는 차씨의 주름많은 눈가에는 물기가 축축히 어리였다.
최주식의 머리에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아버지 최한무의 모습이 스쳐지났다.
《나와 떨어져있는것은 당분간이겠지만 네가 합숙생활을 또 하게 됐구나. 언제면… 제 사람의 손에서 밥을 먹겠는지…》
차씨는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았다. 숱한 처녀들이 나서는데 언제까지나 그러고있겠느냐고 청원한것이 한두번만 아니였기때문이였다.
최주식은 마음이 무죽해졌다.
병약한 어머니에게 찬비오는 여름이나 바람세찬 겨울이나 동자질은 물론 하지 않아도 될 이러저러한 궂은 일들을 하게 하는것이 자기 잘못만 같아서였다.
그럴수록 최주식은 류선화가 못견디게 그리워났다. 이른아침 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여난 한송이 장미꽃처럼 아릿다운 그의 자태가 눈에 삼삼하고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는듯 한 그의 정겨운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차씨는 최주식의 속심을 낌새챈듯 밥상을 치우고 들어오자 그와 마주앉았다.
《너에게 이제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 속다짐했다가도 또 하게 되는구나. 그래 넌 언제까지나 그 선화란 처녀를 기다릴 작정이냐. 싸움판에서 약속을 했다는 그 처녀를 기다리는 네 마음을 내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만큼 기다렸으면 이젠 되지 않았니? 인생에 십여년 세월이란 결코 짧은것이 아니니라. 난 어쩐지 그 처녀가 아직도 혼자있을것 같지를 않구나.》
최주식은 숱많은 머리를 수굿하고 애꿎은 담배만 피워댔다. 어머니의 심정이 충분히 리해되였다. 그렇다고 선뜻 응할수는 없었다. 조국이 불탈 때 전선에서 맺은 언약을 어떻게 세월이 흘렀다고 저버릴수 있단 말인가. 류선화가 전날의 약속을 지켜 그 어디선가 기다리고있는데 다른 녀자와 가정을 이룬다면 그보다 더 큰 배반이 어디 있겠는가. 믿음에 대한 배반, 그것은 돌이킬수 없는 죄악이다. 한생을 변상한다 해도 갚을수 없는, 그 무엇으로써도 보상할수 없는 량심의 빚이다. 물건이나 돈은 리자를 붙여 되돌려줄수 있지만 량심의 빚은 반환할수 없는것이다. 값높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무엇때문에 마음에 꺼리는짓을 하고 량심의 빚을 지랴.
《어머니, 그의 소식을 알 때까지 전 기다릴 결심입니다.》
차씨는 한숨을 길게 내그었다.
《네 좋을대루 하거라. 나에겐 어쩐지… 꼭… 너 혼자 기다리고있는것 같은 생각이 드는구나.
글쎄 네가 그동안 그 처녀의 행방을 알려고 영포를 비롯하여 사처에 편지인들 얼마나 띄웠느냐. 그리구 〈선박공업〉이란 잡지에는 네 이름과 글이 또 얼마나 많이 실렸느냐. 네가 선박을 전문으로 하는걸 그 처녀가 아는이상 배무이에 대한 잡지라도 한권 들춰보았으면 너에게 소식을 보냈을게 아니냐. 아직 깜깜 무소식인걸 보면…》
《어머니, 하지만 전…》
《알겠다. 그 처녀의 행방을 명백히 알 때까지 더 기다려보렴.》
《…》
벽시계가 뗑뗑 넉점을 쳤다.
최주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장에서 이부자리를 꺼내며 차씨에게 말했다.
《어머니, 이젠 주무십시오. 벌써 네시입니다.》
《그러마. 너도 눈을 좀 붙여라. 먼길 다녀온 너를 내가 너무나 오래동안 붙들었구나.》
《어머니두 원, 별말씀을 하십니다.》
최주식은 빙그레 웃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전 밖에 나가 바람을 좀 쐬고 들어오겠습니다. 어쩐지 이대루 누워선 잠을 잘것 같지 않군요.》
차씨는 머리를 끄덕였다.
최주식은 옷걸개에서 재빛 반외투를 벗겨입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