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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주는 주먹을 쥐고 종종걸음을 놓았다. 발이 땅에 놓이는지 어쩌는지 알수가 없다. 마음속에선 강준호의 그릇된 처사에 대한 반발만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그가 가쁜 숨을 내뿜으며 조선소외래자합숙 2층 3호실, 강준호가 든 방앞에 이르렀을 때 문틈으로는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목소리들이 고즈넉한 밤공기를 헤가르며 새여나왔다.
《그전부터도 그랬지만 오늘 회의를 통해서 전 국장동지의 결단성과 과감성에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허, 그렇다? 하지만 동무들도 내 의도대로 토론을 비교적 괜찮게 했소. 하나의 현상을 놓고 그 본질을 사상적으로 예리하게 들여다보았단말요.》
《최기사장을 비호하려던 리억석이나 김석홍, 김용택이들이 막 쩔쩔매는 꼬락서니를 보니 10년체증이 다 내려가는것 같았습니다. 더우기 내노라 하던 최기사장이 매한테 쫓긴 까투리마냥 머리한번 쳐들지 못하고있는게 어떻게나 가관이던지… 제 오래전부터 생각해오던것인데 국장동지는 국장일보기엔 참으로 아까운 인재입니다. 그래서 제 상동지앞으로 그런 내용을 담아 편지를 써보내려고 합니다.》
《고맙소. 그러나 편지를 써보내지 않아도 될거요. 이제 오부상이 조동되면 내…》
《아, 그렇습니까. 역시 우에선 사람을 알아보는구만요. 그럼 머지 않아 부상으로 영전될 국장동지를 축하해서…》
쟁가당하고 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상대방을 이리 춰주고 저리 춰주고 하는 그들의 말이 더없이 역겨워난 강은주는 들어갈가말가하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강준호가 래일아침 일찍 차를 타고 가기라도 하면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이밤에 누가 왔을가?》
《허실장동무, 누군 누구겠소? 우리 집 사람이 또 음식을 차려가지고 왔겠지요.》
《하기야 오늘은 홍형이 한상 단단히 낼만도 하지요. 머지 않아 〈부〉자를 떼버리겠으니까요.》
《국장동지의 사랑이면 되지 직장장이 뭐 꼭 되여야 맛이겠소? 난 직장장이 된것보다 더 기쁘오. 자, 술과 안주는 걱정을 말고 오늘밤 어디 실컷 마셔봅시다. 실은 국장동지가 우리 집으로 가셨으면 더 좋았을것인데…》
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마에 내솟는 땀을 훔치며 갑자기 나타난 강은주로 하여 덩둘해졌다.
강준호조차도 어지간히 놀라와했다.
《아니, 네가 어떻게?…》
《삼촌을 좀 만나보러 왔어요.》
《오늘은 손님들이 왔으니 래일아침 얘길하자꾸나. 그러지 않아도 래일 널 좀 만나보고 가려던 참이다.》
《아니, 래일아침엔 제가 일을 나가야 해요. 이제 좀 조용히 만났으면 해요.》
강은주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으나 그의 어조에는 강경한 의사가 슴배여있었다.
강준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줄땀을 씻으며 문가에 서있는 강은주와 자기옆에 앉아있는 두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흥이 깨진 홍학주는 허홍대와 서로 눈짓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국장동지, 은주동무가 무슨 긴히 할 얘기가 있어 찾아온것 같은데 만나보십시오. 우린 밖에 나가 잠간 소풍을 하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러오.》
강준호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허홍대와 홍학주는 비칠거리며 문을 나가고 강은주는 자리에 앉았다.
《삼촌, 이게 뭐예요? 회의를 지도하러 내려왔으면 일을 보고 올라가실게지 밤새도록 술추렴이나 하구…》
은주는 꼿꼿해진 눈길로 방가운데 놓인 술병이며 상밑에 나뒹구는 빈병을 쏘아보고나서 강준호를 힐난했다.
강준호는 허거픈 웃음을 허허 웃었다.
《그래 그 말을 하자고 이 깊은 밤에 날 찾아왔느냐?》
《아니예요.》
《그럼 뭐냐?》
《삼촌은 사람을 잘 가려보고 일을 분별있게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래 내가 사람을 잘못본건 뭐고 일을 잘못 처리한건 뭐냐?》
강준호는 따져물었다.
《일을 하자고 아글타글 애쓰는 최주식기사장동지에겐 처벌을 주구 실수없이 일해야 한다는 명목밑에 굼벵이 천장하듯 하는 허홍대실장이나 홍학주부직장장은 칭찬을 하구… 이게 어디 바른 처사예요?》
강은주는 자기의 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구 또 뭐냐?》
강준호는 불쑥 나타난 은주의 가시돋힌 말에 은근히 화가 치밀어올랐으나 꾹 누르고 다그쳐물었다.
《현장에 내려오면 유람식으로 빙 돌아보지 말고 몸을 푹 잠그고 군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세요. 늦긴 했지만 이제 성에 올라가시면 최주식기사장동지나 류경훈아바이에 대한 문제를 성간부들과 다시 토론하구 그분들을 그 자리에서 종전처럼 그냥 일하도록 하구요.》
강준호는 그 말에 더 참지 못하겠는모양 가느다란 목에 퍼런 피대를 세웠다.
《너 보자보자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래 의리도 인정도 없는 사람, 그만큼 얘길했는데두 조선소에서 내보낸 류경훈일 다시 데려다 중요한 현도장일을 시키고 만회할수 없이 큰 사고까지 저지른 덜돼먹은 최주식에게 처벌을 주고말고하는것이 뭐 애들 장난인줄 아느냐.》
《애들 장난이 아니기에 심사숙고해야 한다는거예요.》
강은주는 숙어들지 않고 맵짜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강준호는 버럭 어성을 높였다.
《닥쳐라. 이런 일은 네가 감히 상관할바가 못돼. 오히려 넌 네 앞일이나 깊이 생각해보고 처신을 똑바로 해라. 듣자니 김석홍령감의 아들인 배관공 김찬일 마음에 두고있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사실이예요.》
《그래서 내가 소개한 무역성 지도원을 얼음장처럼 차게 대해주었니?》
《그래요.》
은주의 옹골찬 대답에 강준호는 실로 기가 막혔다.
기분좋게 마신 술이 대번에 깨여버리는듯 싶었다.
자기는 하나밖에 없는 조카를 진정으로 생각해서 마음을 깡그리 쓰고있는데 은주는 왜 그렇게도 자기 마음을 모르고 물덤벙술덤벙 한단말인가.
나이 스물넷이 그래 적은가. 철이 없고 분수가 없고 마련이 없어도 너무나도 없다. 이런 은주를 두고 그 누가 다년간 군대에서 복무했다고 볼수 있을텐가.
강준호는 답답한 심정을 털어버리듯 길게 한숨을 내불었다.
형님이 전쟁시기 전선에서 싸우다 희생되지만 않았어도, 형수가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은주에 대하여 이렇게까지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어이하랴. 그들은 이미 가고 나만 남았으니 내가 그를 돌봐주어야 할게 아닌가.
강준호는 목소리를 낮추고 달래이듯 은주에게 권고했다.
《은주야, 너에게 재삼 얘길 한다만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어라. 무역성지도원과 인연을 맺고 평양에 올라와 살면 너도 좋고 나도 좋지 않느냐.》
《삼촌, 제 앞날을 걱정해주어 고마와요. 하지만 저도 이젠 어린애가 아닌이상 제 생활을 제가 개척해나가겠어요. 삼촌의 신세를 지며 살고싶지 않아요. 그건 그렇고… 다시 부탁하는데 최주식기사장동지와 류경훈아바이문제를 성에 올라가 토론해주세요.》
은주의 말에 일단 사그라졌던 강준호의 어성은 다시금 높아졌다.
《그건 안된다. 최주식이나 류경훈에게 그건 너무나 응당한 책벌이야. 한번 쓴맛을 봐야 정신을 버쩍 차리게 된다. 넌 그를 철직시키지 않은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철직을 시켜요?》
강은주도 삼촌이 노여워서 내쏘았다.
《최주식인 기사장이 되더니 사람이 영 달라졌다.》
《제보기엔 그가 아니라 삼촌이 달라진것 같아요. 전 아이적은 물론 군대에 있을 때만해도 아니, 제대되여와서도 삼촌을 무척 존경했어요. 그런데 여기와서 일하며 보니 삼촌은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삼촌이 아니예요. 지금처럼 일을 하며 생활하다간 삼촌이 어떤 구렁텅이에 빠질지 모르겠어요. 당이 요구하는대로 혁명적으로 사업하며 생활하세요. 제발 부탁해요.》
강은주는 진정 가슴이 아파 눈물을 머금고 하소연했다.
강준호는 은주를 삼킬듯 노려보았다.
《그만하지 못하겠니? 네가 누굴 감히 가르치려들어.》
《좋아요. 전 가겠어요. 마지막으로 삼촌에게 꼭 하고싶은 말은 당의 신임을 받아 국장을 하면 그 신임에 보답하기 위하여 성실히 일해야 한다는거예요. 당의 믿음을 저버리면,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당의 믿음에 보답을 못하면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말아요. 그땐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소용이 없단말이예요.》
강은주는 발딱 일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흐느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 세상에… 형님은 어쩌면 저리도 망녕된 자식을 남겨놓고 먼저 가셨습니까.
화가 굴뚝같이 치밀어오른 강준호는 길게 탄식하며 제절로 커다란 고뿌에 술을 따라 상우에 수두룩히 놓인 맛있는 안주도 집지 않고 강술을 꿀꺽꿀꺽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