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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은 깊은 밤이다.
대기는 푸근하다.
하늘에선 놋양푼같은 달이 은은히 빛을 뿌리고 수억만개의 크고 작은 별들은 졸음실린 눈을 비비며 제나름대로 명멸하고있다.
선대장에서 얼마쯤 떨어진 방파제우에는 두사람이 나란히 앉아 반짝이는 별과 밝은 달과 발밑에서 어리광치듯 출렁이는 물결과 검누레한 색을 띤 자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고있다.
한시간이 되나마나한 썰물때를 리용하여 바다로 깊숙이 뻗어들어가는 레루를 놓느라 힘겨운 전투를 벌리다가 밀물이 들어와 잠시 휴식하고있는 돌격대장 김찬이와 도장공 강은주다.
강은주는 요즈음에 와서 자기를 뜨아하게 대하면서 멀리하는것같은 김찬을 조용히 만나 심중의 얘기를 나누고싶었는데 오늘은 그가 먼저 이곳으로 이끌어서 따라온것이였다.
《일이 힘들지 않소?》
김찬은 드넓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을 페부깊이 들이키며 나직이 물었다.
《일이 힘들어요. 하지만 참고 견디죠. 배를 다 뭇고 어버이수령님을 우리 조선소에 모실 영광의 그날을 위해서…》
강은주는 김찬의 마음을 가량할수 없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날까지 은주동무가 여기에 꽤 있을가요?》
김찬은 낮은 목소리로 반문했는데 그 어조에는 어쩐지 야릇한 비웃음과 서글픔이 스며있었다.
《아니, 그건 무슨 말이예요?》
강은주는 별처럼 반짝이는 고운 눈에 의문을 실었다.
《은주동무, 난 뭐 귀가 없는 녀석인줄 아오? 내가 일터에만 붙박혀있는것 같지만 동무에 대한 얘기는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단말요.》
《도대체 뭘 안단말예요?》
김찬의 영문모를 말에 강은주는 속이 달아서 물었다.
《동무가 합숙에 찾아온 무역성 지도원청년을 만나본 사실말이요. 듣자니 어느 대학인가를 나온 그 지도원은 박식하고 머리가 총명해서 앞날이 촉망되는 멋쟁이 미남자라더군요.》
그제서야 강은주는 김찬이가 최근에 와서 왜 자기를 미지근하게 대해주었고 멀리하려 했는가를 알수 있었다.
(남의 진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참 어이가 없어서…)
처녀는 외곬으로 생각을 하고 자기의 속을 지지리 태운 김찬이가 괘씸하였다. 그러자 김찬을 골려주고싶은 얄궂은 생각이 땅을 헤치고 솟아나는 봄풀싹처럼 살며시 머리를 쳐들었다. 그래서 강은주는 시침을 따고 일부러 얼굴에 밝은 표정을 지으며 깔깔거렸다.
《동무말이 옳아요. 그 무역성 지도원은 키가 크고 얼굴이 둥그스름한게 정말이지 잘 생겼더군요. 국제관계대학을 나와 지식도 많구요. 글쎄 외국어를 세개씩이나 한다질 않아요. 그것도 우리 나라 말하듯 자유자재로…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어느 중앙기관의 간부라고 하더군요.》
처녀의 명랑한 웃음과 희망넘친 말은 가뜩이나 무거운 김찬의 기분을 더 잡치였다. 그의 낯색은 거멓다 못해 창백해졌다. 지나가는 구름이 달빛을 가린게 다행이였다. 김찬은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내불었다. 내가 은주를 잘못보지 않았었구나. 하긴 내가 이 처녀를 사랑한게 애당초 잘못이지. 잘 생기고 모든게 그쯘한 은주가 나같은걸 마음에 둘게 뭐람.
처녀는 처녀대로 애타하는 김찬을 보며 생각했다.
아이참, 김찬동무는 어쩌면 그리도 고지식할가. 아무렴 금년초 위대한 수령님의 현지교시를 받은 날 밤 발걸음도 가볍게 어깨나란히 선대장으로 걸어나가면서 앞으로 배무이영웅이 되고 선박기사가 되여 우리 나라의 선박공업을 한계단 추켜올리자고 한 약속을 내가 어길텐가. 그리고 내가 자기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지 그렇게도 모를가.
강은주는 자기를 믿지 못하는 김찬이가 몹시 야속했으며 야속한만큼 그를 골려주는것이 깨고소했다.
《앞으로 두고보세요. 내가 어떤 길을 걸으며 어떤 생활을 하게 되는가를…》
《가장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겠지요.》
《그야 물론이죠. 아마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하구 가장 떳떳한, 깨가 쏟아지는 생활을 할거예요.》
강은주는 김찬이보다 한술 더 떴다.
《동무의 앞날을 축복하오.》
김찬은 마음속에 부걱부걱 차오르는 괴롬을 안고 억이 막혀 부르짖었다.
《김찬동무의 축복이니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한데 그 축복을 하려고 날 여기로 불렀는가요?》
강은주는 김찬의 속을 너무 태우는것 같아 슬쩍 화제를 돌리였다.
《아니, 그때문은 아니요. 동무에게 한가지 부탁할 일이 생겨서…》
《저에게 무슨 부탁할 일이 생겨요?》
《은주동무, 앞으로 조선소를 떠나 행복의 보금자리를 찾아갈 땐 가더라두 나의 부탁만은 꼭 들어주오.》
김찬은 사정조로 말했다.
《무슨 부탁이기에 그렇듯… 강조하는거예요?》
강은주는 정색해서 다그쳐 물었다.
《동무도 오늘 회의소식을 들었겠지요?》
《아니, 여직 못들었는데요. 오늘 회의에서 무슨 문제가 토론되였는가요?》
김찬이와 강은주는 마주 바라보았다. 미묘한 속대사가 눈빛을 타고 오갔다. 잠시후 김찬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동무의 삼촌이 내려와서 현도장사고문제를 가지고 심의회를 열었는데 거기에서 우리 기사장동지가 되게 비판을 받구 처벌루 현도장에서 현도공으로 무보수로동을 하게 됐단말요. 그리고 류경훈아바이는 탄광으로 보내라고 했다오.
물론 성과 합의를 보고 처리한 문제겠지만 내 생각엔 너무 지나친것 같소. 그래서 동무가 삼촌을 찾아가서 좀 얘기를 하라는거요. 성에 올라가면 다시토론을 해서 우리 기사장동지나 류경훈아바이가 그냥 그자리에서 일하도록말요. 내가 찾아가 하는 얘기보다 은주동무의 말이 더 효력이 있을것 아니겠소.》
듣고보니 강은주는 기가 막혔다.
어쩌면 삼촌이 그렇게 일을 처리할수 있단말인가. 최주식기사장이 기업소
를 책임졌으니 비판을 받을수도 있을테지. 하지만…
그는 동그란 어깨를 바르르 떨더니 입을 열었다.
《김찬동무, 내 이제 합숙으로 들어가도 일없을가요?》
《국장동지가 쉬지 않을가?》
《쉬면 깨워서라도 얘길하죠뭐.》
《그럼 그렇게 좀 해주오. 이거야 속이 타서 어디 견디겠소?》
김찬은 강은주가 선뜻 응해나서자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이어 두사람은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