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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속으로 달리는 렬차안은 활기에 넘쳐있다.
주패놀이로 한창 열을 올리고있는 패들이 있는가 하면 새로 나온 노래를 신이 나서 뽑아대는 처녀들도 있다. 그중에서도 제일 시선을 끌기는 수자맞추기를 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수자가 틀리기만 하면 차내의 손님이 늙은이건 젊은이건 아이어머니건 처녀이건 관계없이 지명 2중창을 시켜댔다.
창문곁에 앉은 최주식이만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현상과 높직이 담을 쌓고 차창밖만 묵묵히 내다보고있다.
이제 가서 처리해야 할 일들과 새로운 임지에 가서 할 일감들… 이러한것들이 주위세계에 대한 감각마저 잃게 한것이다.
와하는 웃음소리가 터지고 《사색가》하는 여럿의 웨침이 울릴 때도 그는 그것이 자기와 관계되는것임을 전혀 몰랐다.
《저… 손님!》하는 나지막한 부름소리가 옆에서 두번이나 반복되여서야 최주식은 자기를 찾는다는것을 알고 고개를 들었다.
갸름한 얼굴이 진달래꽃빛으로 물든 처녀가 자기를 보며 숫저운 미소를 짓고있다.
최주식은 흠칫 놀라며 처녀를 뜯어보았다.
날씬한 몸매며 반듯한 이마, 쌍겹진 눈이며 선이 곧은 코, 앵두입술이며 하얀 목…
류선화?
그 언제, 어데서도 잊은적 없는 옛 전우, 아니 화선에서 한생을 언약한 류선화의 모습과 자기앞에 서있는 처녀는 착각할만큼 너무나도 방불했다. 다른점은 처녀의 키가 류선화보다 작은것이였다.
최주식의 속심을 모르는 처녀는 그의 행동을 소심성으로 리해한 모양 힘을 주듯 말했다.
《어쩌겠어요.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였으니… 미안하지만 저와 같이 노래를…》
그러자 수자맞추기를 하던 패들이 《빨리 빨리 나오시오》하고 박수를 쳐대며 성수가 나 고아댄다.
그중에서도 보통키보다 작고 어깨가 딱 바라진 청년이 더 극성이였다. 얼굴이 둥그스름하고 눈이 어글어글한, 순박하게 생긴 청년은 손바닥이 터져라 그저 박수만을 쳐댄다.
최주식은 앉은 자리에서 마른 벼락을 맞는듯 했다. 인민학교때부터 노래를 좋아는 하지만 자신이 부르라면 십리나 뛰는 최주식이였다. 하지만 자기 못지 않게 딱한 처지에 빠진 처녀를 그대로 세워둔채 언제까지나 앉아있을수 없음을 인식한 최주식은 얼굴이 수수떡처럼 붉어져 일어섰다. 그가 무슨 노래를 부를것인가 하고 속으로 갑자르는데 처녀가 속삭였다.
《저… 〈세상에 부럼없어라〉, 좋지요?》
《녜.》
최주식은 자기가 잘 아는 노래를 처녀가 선택한것이 천만다행이다싶어 선뜻 대답했다.
처녀가 선창을 뗐다.
하늘은 푸르고
내 마음 즐겁다
손풍금소리 울려라
처녀의 목소리는 마치도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듯 맑고 청아했으며 감정 또한 풍부했다. 아래소리와 웃소리도 정확했다.
최주식은 아름다운 처녀의 고운 목소리에 손색이 갈가 저어하며 웅근 목소리로 나직이 따라불렀다.
사람들 화목하게 사는
내 조국 한없이 좋네
그런데 노래는 예상외로 채 끝나기도전에 《재청》하는 웨침소리에 눌리웠다.
차창턱에 장기판을 올려놓고 《장이야!》, 《멍이야!》하며 장기를 두던 늙은이들이며 떠들썩 주패를 놀던 청년들, 새로 나온 노래를 부르던 처녀들까지도 박수를 쳤다.
《이번엔 손님이 노래제목을 선정하세요.》
처녀가 영채도는 눈을 살며시 치뜨고 낮은 소리로 정겹게 말했다.
《전호속의 나의 노래》
최주식은 순간적으로 떠오른 제목을 댔다. 그것은 적탄알이 비발치는 격렬한 싸움끝에 무기를 청소하고 벌둥지처럼 파헤쳐진 전호를 수리하며 부르던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노래였다. 부르면 부를수록 파도소리 정답게 들려오고 전선으로 떠나올 때 잘 싸우고 돌아오라 절절히 당부하던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이 비껴오는 노래였다.
《좋아요.》
처녀는 머리를 까딱했다.
이어 최주식이와 처녀가 부르는 은은한 노래소리가 정숙해진 차칸안에 울려퍼졌다.
…
전호속의 나의 노래 고향으로 울려가라
우리 행복 삼키려는 원쑤 미제 쳐부시고
빛난 훈장 가슴팍에 내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하는 부모처자 두팔로써 안기리
…
두번째 노래 역시 우뢰같은 박수에 묻혔다.
《빨리 빨리 나오시오》하고 동무들을 부추기며 극성을 부리던 청년이 순박하게 생긴 청년에게 눈을 끔쩍해보이더니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가득 담긴 과일구럭을 들고 최주식이와 처녀앞으로 걸어왔다.
《우리 성임동무와 같이 노래를 불러주어 감사합니다. 목이 마르겠는데 변변치 않지만 한개씩 드십시오. 그리고 에… 한번만… 더 불러주십시오.》
능청스러운 청년의 말에 모두들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처녀도 웃고 최주식이도 웃었다.
《우리만 불러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소. 내 이 사과구럭에 엿묶음을 덧놓아줄테니 이번엔 동무가 한곡 부르오.》
최주식의 말에 그 청년은 뒤더수기로 손을 가져갔다.
《이거 자기가 던진 돌팔매에 제가 맞는 격이로구만.》
청년의 말에 다시금 유쾌하고 명랑한 웃음보라가 일었다.
《재수동무, 입담은 그만하고 어서 한곡 부르라구.》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 말했다.
《김찬동무까지 이러면 곤난한데…》했으나 그의 얼굴표정이며 행동거지는 말에 담긴 뜻과 달랐다.
《그럼 한곡 부릅시다. 남의 노래를 들었으니 나도 들은 값을 내야지요.》
윤재수가 싱글벙글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데 처녀는 최주식에게 사색을 깨뜨려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제 자리로 돌아갔다.
(어쩌면 그리도 류선화와 비슷할가. 생김새며 목소리며 지어 쾌활성까지…)
사과구럭을 최주식의 창턱에 놓은 청년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 구성진 목소리로 《밀양아리랑》을 건드러지게 불러댔으나 최주식의 귀에는 그 노래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꿈결에도 못잊을 류선화의 아름다운 모습이 고르롭게 울리는 렬차바퀴의 음향을 타고 선히 안겨왔다.
…
무명고지를 지켜 싸우던 최주식은 허리와 대퇴부에 심한 중상을 당하여 사단군의소에 입원하였다. 그가 의식을 차렸을 때 침대앞에는 눈처럼 하얀 위생복을 산뜻이 입은 한 처녀가 서있었다. 호리호리한 키에 날씬한 몸매, 갸름한 얼굴에 쌍겹이 진 영채도는 눈, 앵두알처럼 발깃한 입술…
《아이, 정신이 드셨군요.》
처녀는 얼굴에 어렸던 근심과 걱정, 불안과 초조감을 일시에 활 날려버리더니 자그마한 두손을 봉긋한 앞가슴에 꼭 모두어쥐며 환성을 올리였다.
그가 바로 최주식의 담당간호원 류선화였다.
지내보니 처녀는 아무리 일이 바쁘고 힘에 부쳐도 언제나 생글생글 웃었고 어여쁜 입에서는 삼복더위에도 마를줄 모르고 끊임없이 솟는 샘마냥 맑고 청아한 노래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아무도 몰라》였다. 처녀는 부상병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면 어느때건 그 노래를 기꺼이 부르군 했다. 처녀의 아름다운 노래와 미모, 례절바르고 교양있는 품성, 바지런하고 이악한 일본새에 이끌려 사단군의소내 군관들은 물론 입원한 군관들이나 하전사들까지 류선화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최주식이만은 류선화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리유란 그의 지나친 미모라고 할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처녀한테서 쓰디쓴 고배를 맛본적이 있는 그였다.
고중시절, 최주식의 학급에는 함향옥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그는 뛰여난 아름다움으로 어디서나 돋보이는 처녀였다. 졸업학년에 이르자 최주식의 눈길은 자연 함향옥에게 쏠렸다. 함향옥이 역시 그랬다. 그는 학교민청위원장을 하는 최주식이, 전교적으로 공부는 물론 체육이며 미술 등 예능과목에 이르기까지 1인자로 꼽히는 사내다운 최주식을 놓을수가 없었다. 그러나 최주식의 마음은 함향옥에게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고생을 모르고 고스란히 자라난 함향옥은 힘든 일에 몸을 적시지 않았다. 남이 어려움을 당해도 못본척 하는 동지애가 없는 처녀였다. 최주식은 향옥이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향옥은 최주식에게 더 바싹 접근하였다. 고중을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최주식이 김책공대에 입학하자 향옥의 편지는 사흘이 멀다하게 기숙사로 날아들었다. 최주식은 향옥이가 소설책에서 뽑아내여 명문장으로 엮어놓은 달콤하기 이를데 없는 사랑의 편지를 무작정 불태워버리군했다. 함향옥의 애잡짤한 눈물로 군데군데 얼룩이 진 마감편지조차 재와 한줄기의 파르스름한 연기로 되여 그어디론가 자취없이 날아갔다.
어느날 최주식은 화장을 진하게 하고 대학으로 찾아온 향옥이를 만났다.
두사람은 실실이 드리운 푸른 버드나무가지가 미풍에 그네를 뛰듯 하느적거리는 대동강가로 나가 인적드문 길을 천천히 걸었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은 그들의 즐겁지 못한 산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향옥은 한가닥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가슴조이며 찾아왔던 길을 쓰디쓴 눈물을 뿌리며 되돌아갔다. 최주식은 등에서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듯 마음이 개운하고 거뜬해졌다. 그것으로 둘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던것이다. 그후부터 최주식은 손이 희고 얼굴이 아름답게 생긴 처녀들을 멀리했다. 류선화도 그러했다. 하지만 류선화는 날이 갈수록 물이 모래에 스며들듯 최주식의 마음에 깊이깊이 슴새들었다. 함향옥이와는 전혀 다른 류선화였다. 최주식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 류선화는 친어머니마냥 갖은 시중을 들었고 입맛을 잃었을 때는 산나물을 좋아한다는것을 알고 남 다 자는 깊은 밤 가파로운 산을 톺군 하였다. 그래서 최주식의 밥상에는 늘 얼벌벌한 고추장에 무친 생신한 산나물이 오르군 했다. 한데 최주식을 더욱 감동시킨것은 류선화가 그에게만 아니라 모든 환자들에게 꼭같은 정성을 쏟아붓는데 있었다. 그는 남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여난 처녀이기나 한듯 팔 못쓰는 환자에게는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밤을 밝혀가며 대신 써주는가 하면 군의소에 영화가 왔을 때는 다리 못 쓰는 환자의 다리가 되여 영화를 보게 해주었으며 환자수송이 제기되면 야밤도 가리지 않고 솔선 나서군 했다. 《O》형의 피를 가진 처녀는 전선에서 후송되여오는 부상병이나 입원환자를 위하여 서슴없이 자기의 팔을 걷어붙이군 했다.
류선화, 그는 자기가 여직껏 리상으로 그려보던 그런 처녀였다. 그의 미모가 꽃같은것처럼 그의 마음 또한 티없이 깨끗한 처녀였다.
최주식이 퇴원할무렵에 이르러서는 그의 마음속에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였다. 그에게서 류선화를 떼여낸다는것은 이제와서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로 되여버렸다. 그럴즈음 최주식은 처녀가 가장 소중히 간직하고있는 사연에 대해서도 알게 되였다. 그것은 류선화가 군대에 입대할 때 조선소에서 일하는 그의 아버지가 밤새워 들려준 이야기였다.
《선화야, 어디 가서나 지난날 우리 어부들과 〈배쟁이〉들의 피눈물나는 처지와 또 해방을 맞아 참다운 삶을 누리고있는 우리 인민의 기쁨이 어떤것인가를 잊지 말아라. 그리고 늘 아버지가 일하는 조선소를 생각하고 조국을 생각하거라.》
최주식은 류선화가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하는 말을 들으며 처녀의 뒤를 대들보처럼 꿋꿋이 받쳐주고있는 아버지의 억센 기상을 보았다. 그는 그런 아버지밑에서 일찍 여읜 어머니를 대신하여 마르고 진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살아왔을 류선화라고 생각하니 처녀가 더욱 소중하게만 여겨졌다. 하지만 자기의 마음속에 세차게 소용돌이치는 불처럼 뜨거운 말을 류선화에게 좀처럼 할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한다면…
번민과 고뇌, 우울에 싸인 최주식의 식욕은 마가을 락엽이 떨어지듯 대번에 뚝 떨어졌다.
최주식의 심중을 알바 없는 류선화는 어느날 그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세요?》하고 물었다.
최주식은 살뜰한 처녀의 다심한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벙어리 랭가슴 앓듯 마음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최주식에게 퇴원할 날이 다가왔다.
퇴원전날, 번열로 몸부림치던 최주식은 약을 가지고 들어온 류선화에게 자기의 마음속 고민을 더는 참지 못하고 불쑥 털어놓았다.
《선화동무, 동무는… 내 심장에… 불을 질렀소.》
순간 류선화는 그자리에 못박혀버렸다.
최주식의 련정을 전혀 낌새채지 못한바 아니였으나 그의 입에서 화산의 분출시에 거세차게 흘러넘치는 용암같은 말이 왈칵 쏟아져나왔을 때 처녀의 작은 심장은 밖으로 튀여나올듯 했다.
그는 약봉지 든 자그마한 두손을 앞가슴에 꼭 모두어쥐고 낯빛이 가을고추빛이 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난… 난… 몰라요.》
잠시후에야 뱉듯 말을 남긴 그는 뒤로 홱 돌아서 황급히 병실밖으로 달려나갔다.
최주식은 류선화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몸이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진듯 했다.
아, 랑패로구나!
그는 땅꺼지는 한숨을 내불었다. 마음이 허전했다. 일시에 온몸에서 맥이 다 빠져나가는듯싶었다. 하지만 강잉히 참아버렸다.
다음날, 사단군의소의 군의며 간호원들이며 친숙해진 환자들이 떨쳐나서 전선으로 떠나는 최주식을 배웅했다.
류선화는 어제 있은 일로 해서인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다박솔이며 개암나무며 떡갈나무가 자란 산등성이 자드락길까지 조용히 따라왔다.
숲속에선 이름모를 갖가지 새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부르고 골짜기에선 꽃향기가 진하게 풍겨왔다. 나비가 꽃을 희롱하고 벌이 꽃술을 뒤다리로 튕기며 꿀을 따고있었다.
최주식은 그런것은 아랑곳않고 얼굴이 수수떡마냥 벌겋게 달아올라 평상시의 쾌활성과 락천성을 하루밤사이에 줴버린듯싶은 류선화의 꼭 닫힌 자그마하고 예쁘장한 입만을 줄곧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헤여지면서 할 처녀의 말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그 말에 자기의 생사운명이 전적으로 달려있기라도 한듯…
그러나 이슬머금은 꽃망울처럼 꼭 닫혔던 류선화의 방긋이 열린 입에서는 그 누구에게나 할수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작별의 인사말이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내물처럼 조용하게 그리고 한껏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소대장동지, 잘 가세요. 그리고 용감히 싸워주세요!》
최주식은 그런 처녀앞에서 활활 타번지는 심중의 말을 다시금 꺼낼 용기를 잃어버렸다.
그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그간… 수고했소. 몸성히… 잘… 있길 바라오.》
전선으로 달려나간 최주식은 그전에 함향옥이 그랬듯이 사흘이 멀다하게 류선화에게 편지를 써보내였다. 류선화한테선 웬일인지 회답편지가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류선화에 대한 그의 그리움은 기름친 섶단에 달린 불마냥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런가운데 몇달이 지나 최주식은 사단지휘부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사단지휘부에서 전선시찰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최고사령관 김일성동지를 뜻밖에 만나뵙고 높뛰는 심정을 주체하지 못한채 사단군의소에 들리니 류선화는 《아무도 몰라》란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며 산천어가 유유히 헤염치고 맑은 물이 돌돌 흐르는 내가에서 붕대를 빨고있었다. 그의 모습은 흡사 한폭의 그림같았다.
최주식은 처녀에게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온 감격을 흥분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부러움으로 눈을 빛내이는 류선화에게 전선에서 자기가 보낸 편지들을 받아 보았는가고 물었다.
《받아 보았어요.》
처녀는 버들개지가 통통한 내가의 버드나무가지를 살짝 꺾어들면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럼 왜 한자도 써보내지 않았소?》
최주식은 부리부리한 눈에 열기를 담고 더운 입김을 내불었다.
류선화는 까맣고 긴 속눈섭을 살그머니 치뜨고 상그레 웃었다.
《지금이 뭐… 사랑편지나 주고받을 때인가요? 모두들 목숨을 내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고있는데…》
《단지… 그것때문이였소?》
최주식은 처녀의 입에서 다른 말이 튀여나올가봐 가슴을 조이며 그를 주시했다.
류선화는 치떴던 고운 눈을 살며시 내리깔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최주식은 순간 안도의 숨을 길게 내그었다.
《선화동무, 난 지금 대학으로 가는 길이요. 실상 이제 헤여지면 언제 만날지 몰라 들리였소.》
《아이참, 언제 만나긴요. 맑고 푸른 하늘에 축포가 오르는 전승의 날 열병식장에서 만나지요.》
류선화는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무랍없이 대답했다.
전승의 날 열병식장에서!
음미해보면 뜻이 깊으나 그의 대답은 너무나 수월했다.
최주식은 갑자기 빨라지는 심장의 박동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야 그렇지. 그런데말요, 내 동무에게… 꼭 할 말이 있소.》
《전… 안듣겠어요.》
최주식의 마음을 이미 오래전에 넘겨다본 류선화는 소녀처럼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꼭 들어주오. 지난날 내가… 동무에게 무수히 보낸 편지들에 썼듯이 … 나의 마음속엔… 오직 선화동무만이 자리잡고있소. 만약 내 심장속에… 선화동무가 자리잡고있지 않다면… 난… 난 하루도 살지 못할거요.》
류선화는 체통 큰 사나이의 거친 숨결에 온몸이 녹아지는듯 얇다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아이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전번 퇴원할 때처럼 속이 활 열리는 시원스런 대답을 듣지 못한 최주식은 크고 억센 손으로 류선화의 희고 부드럽고 통통한 손을 꽉 잡았다.
《선화동무!》
열기에 차 부르짖는 최주식의 눈에선 펄펄 불이 일었다. 열렬한 사랑이 지펴올린 그 거세찬 불은 다정다감한 처녀의 심장을 대번에 뜨겁게 달구었다.
《무슨 손이 그렇담. 손이 막 바스라지겠네.》
류선화는 쌍겹진 눈을 곱게 할기며 이렇게 말했으나 잡힌 손을 빼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젊은 혈기가 온몸에 차넘치는 최주식은 처녀의 야릇한 행동과 단풍잎처럼 빨개진 얼굴, 가쁜 숨소리, 비꼬인듯싶은 말투가 가져다주는 진속을 낌새채지 못하고 표면화된 직선적인 대답만을 기어이 들으려고 했다.
《남들이 보겠어요.》
심장이 끓인 뜨거운 열과 그 열로 하여 광채를 뿜는 눈과 눈이 허공의 한점에서 소리없이 부딪쳤다. 그제서야 최주식은 천만마디의 말로도 대신할수 없는 처녀의 심정을 그 눈빛에서 읽었다.
《고맙소. 선화!》
최주식의 열차게 부르짖는 말을 들으며 류선화는 그가 자기의 심중을 비로소 알아낸것이 더없이 기뻐 눈을 살풋이 내리깔았다.
《소대장동지, 저의 마음속에는 오직 소대장동지만이 있을거예요. 오늘도 래일도 그리고 먼 후날에도…》
최주식의 귀로는 처녀의 나직하나 진정이 배인 말이, 아무에게나 할수 없는 뜻깊은 말이, 그렇게도 듣고싶던 말이 격류마냥 흘러들었다. 실상 최주식이 류선화에게서 이 말이상 무엇을 더 바랄것인가. 말은 비록 길지 않았으나 그 말에는 자기의 운명과 잇닿은 류선화의 미래가 확고히 기약되여있었다.
아, 나의 사랑 선화! 내 그 믿음을 가슴속 깊이 안고 가겠소. 부디 건강하길 바라오.
최주식은 류선화의 손을 꽉 쥐여 흔들고는 웃음발을 날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떠났다. 그런데 평양에 도착해보니 그의 앞에는 류학의 길이 놓여있었다.
최주식은 류학을 떠나기에 앞서 서둘러 류선화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선화동무!
조국을 위하여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친 전우들의 몫까지 배워가지고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몸성히 날 기다려주오.
그리고 제대되면 영포에 계시는 우리 어머니를 꼭 찾아가 보오.
너그럽고 인자한 어머니이니 무척 반가이 맞아줄거요.》
그밑에는 어머님이 계시는 집주소를 적어놓았다.
류학의 나날 최주식은 공부에 심혈을 쏟아부으면서 어느 한시도 류선화를 잊지 않았다.
그는 류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를 만나뵈온 후 한 제대군인처녀가 찾아오지 않았댔는가고 슬며시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찾아온 처녀가 없었다고 했다. 최주식은 마음 한귀퉁이가 덜컥 내려앉은듯 허전했다. 살던집을 폭격맞고 어머니가 다른 곳으로 옮겨앉았으니 찾아올리 만무한 일이였지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일구월심 그리던 애인이여서 그의 번뇌는 참으로 컸다.
가슴이 뻐개질듯 한 괴로움을 안고 최주식은 어머니와 함께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중앙선박설계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최주식은 영포조선소와 선박수리공장, 수산사업소 로임부들에 류선화란 이름을 가진 처녀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한달, 두달이 지나서 온 회답편지들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처녀가 없다고 했다. 영포조선소에서 온 회답편지는 글씨를 처음 배우는 인민학교학생마냥 삐뚤삐뚤했고 내용 또한 매우 불성실했다. 최주식이 《ㅎ》조선소에 와서도 두루 알아보았으나 류선화의 종적은 마치 바다에 떨어진 구슬처럼 묘연했다. 한데 엎친데 덮치기로 그에게 골치아픈 일이 자주 생겼다. 미남일뿐아니라 일정한 사회적직위가 있는 그의 집으로 숱한 소개군들이 베틀에 북나들듯 하고 수많은 처녀들이 은근한 눈길을 보냈던것이다.
…
끝없이 달리던 최주식의 생각은 《손님, 여기 자리가 비였습니까?》하는 중년남자의 물음에 끊어지였다.
그는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고나서 건너편 좌석을 바라보았다.
자기와 2중창을 부르던 얼굴이 갸름한 처녀와 《밀양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르던 청년일행은 어느 역에선가 내리고 그자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류선화를 련상시킨 미모의 처녀는 최주식의 진지한 사색을 더는 깨뜨리지 않기 위하여 아마도 그냥 내리였을것이다.
최주식은 단조롭게 울리는 렬차바퀴소리를 들으며 눈을 지그시 감고 다시금 추억의 바다를 헤염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