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오늘 령대에서 류선화가 왔다갔다.》
《류선화가요?》
최주식은 기쁨과 의문이 어우러진 목소리로 다급히 물었다.
《그래. 분명 류선화가 왔다갔어. 난 그 애가 집에 들어섰을 때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온줄로 알았다. 어쩌면 그리도 얼굴이 환하구 눈정기가 맑구 몸매가 물찬제비같은지… 처음 보는 눈에 쏙 들더구나. 네가 그리도 오래동안 그애를 기다려온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차씨는 잠시 숨을 돌리고나서 커다란 꾸레미를 최주식의 앞에 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출장을 왔다가 잠간 들렸다고 하더라만 내 보기엔 우정 왔던것 같다. 내가 앓고있는걸 조선소에서 령대탄광으로 출장온 사람한테 들었다면서 이 고려약꾸레미를 가져오지 않았겠니. 자기 집에서 자래운 구기자며 오미자, 산에서 채취한 찔광이며 삼지구엽초, 개성동무한테서 구한 인삼을 섞어 제가 직접 만든 보약이라면서 장복을 해보라고 하더구나.
어쩌면 외모두 마음두 하나같이 곱구 말씨두 상냥한지…
널 11시반까지 기다리다가 12시 기차루 꼭 가야 한다면서 떠나갔다. 아무리 붙잡아두 어디 소용이 있더냐. 난 어쩐지 그애가 왔다가 간것이 꼭 꿈만 같구나.》
최주식이도 꿈만 같았다.
집에까지 왔다가 자기를 만나지도 않고 그냥 가버릴수가 있을가.
그의 머리에는 류선화를 령대탄광에서 만났던 이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얼핏얼핏 스쳐지났다.
령대역에서 류선화의 배웅조차 받지 못하고 마음괴롭게 떠나던 일, 류선화가 철석같이 다진 언약을 저버리고 어떻게 되여 자기를 배반하게 되였는지 그 원인을 알지 못해 몸부림치던 일, 황철에서 조선소로 출장온 나이가 늙수그레한 구덕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뜻밖에도 류선화가 정호일의 어머니가 되게 된 사연을 알게 된 일…
그때 구덕보는 이렇게 말했었다.
《1953년 7월중순, 정전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였지요. 마사원인 나는 군단에 일이 있어 갔다가 약품을 가지러온 군단군의소 간호원 류선화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같이 오게 되였지요. 얼마쯤 와서 우리는 전선가까이에서 사는 한 아주머니가 원호물자를 가지고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전선에서 싸우는 남편한테 들려가려는것을 보게 되였습니다. 대호를 보니 그 아주머니의 남편이 있는 곳은 우리 사단과 린접한 구분대였지요. 그래서 우린 두살된 어린애를 업고가는 그를 마차에 태웠습니다. 기세좋게 한창 달리고있는데 적기가 산뒤에서 도적고양이처럼 불시에 나타났지요. 급해맞은 나는 채찍에 휘파람소리를 내며 숲속으로 마차를 들이몰았는데 가증스런 적기가 기총탄을 란사하는것이 아니겠소. 그바람에 말이 죽고 아주머니가 잘못되였으며 나는 복부에 중상을 당했지요. 류선화와 정호일이란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류선화는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우고 나를 군단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그 며칠후 전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지요. 군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한 나는 류선화의 행처를 알아보러 사단으로 찾아갔습니다. 류선화는 제대되면서 군의소에서 키운 아이를 데리고 영포로 갔다고 하더군요.》
최주식은 류선화의 과거지사를 듣자 크나큰 기쁨이 분수처럼 뿜어올랐고 한편 순결하고 고결하기 이를데 없는 그를 호되게 질책한 자신의 그릇된 처사가 깊이 뉘우쳐졌다.
아, 류선화는 정말이지 훌륭한 처녀로구나. 내가 여직껏 그를 잘못보지 않았었구나. 한데 그가 그렇듯 장한 일을 하고도 나에게는 어째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가.
최주식은 감동과 의문이 겹친 마음을 안고 령대탄광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그가 탄광마을에 들어섰을 때 류선화는 위생가방을 메고 막장에 왕진을 갔다오고있었다. 최주식은 류선화를 낯익은 느티나무아래에서 만나자 격한 목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선화동무, 처음 만났을 때 호일이에 대한 얘기를 왜 하지 않았소. 왜 하지 않았는가말요.》
《…》
《전쟁때 사단에서 마사원으로 복무한 구덕보아바이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숨을 톺고나서 말을 이었다.
《선화동무, 지난날 화선언약을 지키지 않았다고 동무를 탓한 나를 제발 용서해주오.》
최주식은 자책과 기쁨, 후회와 행복이 어우러진 목소리로 빌었다. 갖은 풍상고초를 연약한 몸으로 이겨내며 오랜 세월을 깨끗한 량심으로 꿋꿋이 살아온 류선화에게 빌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다. 류선화는 어깨를 떨며 흐느끼였다. 그의 볼과 턱으로는 맑고 흰 눈물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우는것이 사람의 성정이 아닐가.
최주식은 자기를 기다려 여적까지 혼자몸으로 있은 류선화를 대하자 온 세상을 얻은듯 마음이 무척 흐뭇하였다. 그는 류선화와 함께 역으로 천천히 걸었다. 미풍이 그의 번듯한 이마에 드리운 머리칼을 다정히 어루쓸며 지나갔다. 그는 발이 땅에 닿는지 어쩐지조차 가늠할수가 없었다. 최주식은 이 순간이 변하지 말고 천만년 이어졌으면 여한이 없을것만 같았다. 걷고 걸어 이 지구끝에라도 갈수 있다면… 하지만 그는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이 앞에 놓여있다는것을 문득 깨닫자 현재의 이 기쁨은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여겨졌다.
《선화동무, 우리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한집에 모시기요. 우린 너무나도 오래동안 헤여져 살았소.》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깊은 생각에 잠겨 걷던 류선화가 긴숨을 내쉬며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그렇게 할수 없어요.》
최주식은 청천벽력같은 류선화의 말에 와뜰 놀랐다.
그렇게 할수 없다니? 그건 무슨 왕청같은 소린가.
최주식의 얼굴에 함박꽃처럼 피여났던 밝은 웃음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의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영문모를 의혹이 짙게 어리였다.
《선화동무, 그건 도대체 무슨 말이요? 그럼 날 사랑하지 않는단말이요?》
《왜 사랑하지 않겠어요. 사랑해도 끝없이 사랑해요. 온 세상을 통채로 준대도 전 소대장동지와 바꾸지 않을거예요.》
최주식은 류선화의 심정을 도저히 리해할수 없었다.
《소대장동지를 끝없이 존경하고 사랑하기때문에, 오직 소대장동지만을 심장속에 안고 살아가기때문에 가정을 이룰수가 없다는거예요.》
아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에 한가정을 이루고 살아갈수 없다니? 세상에 이런 법도 있는가.
최주식은 리해못할 사연으로 하여 몸부림을 쳤다.
…
조선소로 돌아온 최주식은 류선화가 자기를 열렬히 사랑하면서도 왜 가정을 이룰수 없다고 딱 잡아떼는지 그 내막을 알아도 보고 류경훈이도 다시 만나보려 령대탄광으로 갈 생각이였으나 일이 바빠 가보지 못하고있었다.
《어머니, 그가 글 한자도 남기지 않고 그냥 갔습니까?》
최주식의 물음에 차씨는 무릎을 쳤다.
《이런 내 정신 좀 보지. 웃방 책상우에 그애가 써놓은 편지가 있다.》
최주식은 미닫이를 열고 웃방으로 올라가자 선채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기사장동지, 여기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어머님의 병환이 심하다기에 집에 들렸습니다.
예고도 없이 문득 왔댔다고 나무람 많이 해주세요.
처음으로 만나뵙는 어머니지만 꼭 저의 친어머니 같았어요. 얼마나 친절하고 살뜰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시는지…
어머님의 말씀을 통해 기사장동지가 새형의 교시선박을 뭇느라 분초를 쪼개가며 매우 바쁘게 지내고있다는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하찮은 저를 기다려 그냥 혼자 계신다는것도…
그러고보면 저는 무척 행복한 녀자예요.
기사장동지의 뜨겁고 열렬한 그 마음을 안고 저는 평생을 살아가렵니다.
한데 전번 령대에 찾아오셨을 때 제가 말씀드린것처럼 제발 저를 잊어주세요.
저는 기사장동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서 살아갈 처지가 못되는 녀자입니다. 왜냐구요? 그 리유를 요약해서 적으렵니다.》
그 아래엔 최주식이가 김석홍이한테서 들어 알고있는 그의 가정사가 씌여있었다.
할아버지는 가난뱅이 어부였다는것, 왜놈선주의 가혹한 착취밑에서 제손으로 잡은 물고기도 마음대로 못먹으며 살았다는것, 그러던 할아버지는 굶주림을 더는 참을수 없어 생각끝에 친구어부 두명과 빚을 내여 낡은 배를 두척 세냈다는것, 그리고는 밤낮으로 고기를 잡아 팔아서 선주에게 배값을 물어주고 그 낡아빠진 두척의 배를 가졌다는것…
류선화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덕에 우리 아버지는 중학교를 거쳐 기능공학교까지 다닐수 있었다고 합니다. 책임자격인 할아버지는 〈선주〉가 되고요. 어느날 바다에 물고기잡이 나갔던 할아버지는 풍랑을 만나 그만 잘못되였답니다. 그후 아버지는 나까무라가 경영하던 철공소에 입직하여 일하였는데 해방될 무렵엔 직공장으로 일했다고 해요. 해방후에는 조선공으로 수많은 배를 무어냈답니다. 그러다가 몇년전에 오작사고를 낸것이 〈원인〉으로 되여 조선소에서 령대탄광으로 나가게 되였어요.
기사장동지, 우리 집 래력은 대체로 이러루합니다.
저도 이젠 철부지가 아닌이상 세상물정을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있습니다.
수령님의 교시와 당의 뜻은 그렇지 않지만 일부 편협한 일군들은 저를 〈선주〉의 손녀로, 왜놈때 공부하고 현재 배무이에서 사고친 사람의 딸로 색안경을 끼고 봅니다. 서른살에 벌써 기사장이 된 최주식동지에게 저의 가정경력이 옥의 티처럼 된다면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누구에게나 함부로 말못할 심중의 사연을 털어놓고보니 마음이 개운하면서도 볼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좀처럼 걷잡을수 없습니다. 저는 기사장동지를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할수 있어도 기사장동지는 절 반드시 잊으셔야 합니다.
재삼 청하건대 제발 하찮은 저를 가뭇없이 잊으시고 몸성하여 나라의 큰 일군이 되여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는 절 찾지 말으시고 빨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어머님께 기쁨을 드려주시기를 진정으로 고대합니다.
무릎꿇고 마지막 인사를 올리오니 받아주세요.
여직껏 괴롬만 끼쳐드린 류선화 올림.》
편지를 읽고나자 최주식은 가슴이 뻐개지는듯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류선화가 자기를 열렬히 그리고 끝없이 사랑하면서도 한가정을 이룰수 없다고 한 말의 참뜻, 자기의 발전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인연을 끊으려 한 그 마음을 알수 있었다.
아, 선화, 어쩌면 그렇게 생각할수 있소? 그런 사연으로 나의 곁을 떠나려 하다니…
섭섭하오. 진정으로 섭섭하오. 화선에서 맺은 언약을 헌신짝처럼 줴버리고 자기 전도나 생각하는 그런 못난이인간으로 나를 본 선화가 섭섭하단말이요.
입술을 피가 지도록 꽉 깨문 최주식은 불판처럼 화끈 달아오른 볼편과 틀어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몸부림쳤다.
방싯이 열려진 미닫이문 사이로 최주식의 험한 기상을 올려다본 차씨는 눈이 둥그래서 다급히 웃방으로 올라오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그러느냐? 중풍을 만난 사람처럼…》
최주식은 대답대신 손에 쥐고있던 류선화의 편지를 어머니에게 드렸다.
편지를 읽고나자 차씨는 가느다란 숨을 길게 내그었다.
하필이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화가 그런 집의 자손이라니…
인물 잘나구 똑똑하구 얌전하구 례절바르기 이를데 없는 선화가 그런집 자손이라니…
차씨는 손에 쥔 크고 단 참외를 놓고싶은 마음이 꼬물만큼도 없었으나 한편 촉망되는 아들의 장래에 그늘이 지게 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어머니, 저는 선화를 잊을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오래동안 마음에 두고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차씨는 숨을 돌리고나서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결혼이라는게 살고싶으면 살고 헤여지고싶으면 헤여지는걸 약속하는게 아니고 일생을 함께 살아야만 하는 인륜대사라고 볼 때 난 어쩐지 생각이 깊어지는구나. 그애로 하여 너의 진정에 다소라도 그늘이 지게 된다면 이 에미 마음은 편하지 못할거다.》
최주식은 자식을 끝없이 위하는 어머니의 다심한 마음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를 넘기며 차곡차곡 다져온 자기의 굳은 결심을 굽히고싶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만합니다. 하지만 선화를 그냥 둘수는 없지 않습니까.》
차씨는 나오는 기침을 클럭클럭 깇으며 다시금 기다란 숨을 무겁게 내쉬였다.
《네가 내 마음을 알았으니 한번 더 깊이 생각을 해보거라.》
차씨는 그러고나서 지척지척 아래방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