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불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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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와 황해도의 두 대안을 련결한 얼음이 쩡쩡 소리를 내던것이 엊그제같은데 누런 물이 너테 낀 쪼각얼음장을 떠싣고 간만의 흐름따라 서해기슭으로 서서히 오르내린다.
조선소구내를 휩쓸며 랭기를 안고 불어치던 산산한 바다바람마저 완연한 봄기운에 주눅이 들어버리자 음지에 얼룩얼룩 남아있던 흰눈조차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구내길과 공지는 땅속의 여기저기에 몰켜있던 물이 약속을 하고 일시에 지상으로 샘솟아나온듯 질펀하다.
두터운 땅껍질을 들추고 바늘끝처럼 뾰족히 눈을 내밀었던 갖가지 풀들도 제법 파란 잎을 두서너개 달아놓았고 련화봉이며 해방산, 남산기슭에 자란 자작나무, 물푸레나무, 돌배나무의 거무틱틱하던 껍질도 연록색으로 물이 들었다.
하늘거리는 아지랑이를 앞세우고 드넓은 대지에 살그머니 찾아온 봄아씨는 만물의 령장인 인간들의 생활에도 소리없이 스며들어 두툼하고 무거운 여러 색갈의 솜옷이며 다양한 형태의 외투들을 하나같이 벗겨버렸다.
최주식은 겨우내 입고 쓰고 다니던 재빛 반외투와 하얀 토끼털모자를 벗어놓고 연한 회색의 닫긴 옷차림으로 출퇴근을 했고 현장에 나와다닐적엔 우에 곤색 작업복을 덧걸치였다.
강준호의 독촉을 받은 최주식은 150리밖에 안되는 평양길을 자기차로 갈수도 있었으나 하루에 다섯번이나 오가는 기차가 있는터여서 오후 2시차를 타고 국으로 올라갔다.
그가 밤색의 삼면쟈크가방을 들고 국장방으로 들어갔을 때 윤기가 번들번들 도는 커다란 책상앞에 체소한 몸을 붙이고 앉아있던 강준호는 자리에서 마지 못해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몇달전 기사장으로 임명을 받으러 갔을 때와는 최주식을 대하는 강준호의 태도와 거동이 엄청나게 달랐다.
그때는 평양역에 자기의 차를 내보내준 강준호였고 비록 문가에까지 나오지는 않았으나 반갑게 웃음지으며 살틀히 맞아주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안부며 일신상의 문제며 사업얘기를 차근차근 묻는 강준호의 말에는 진심이 배여있었고 봄볕처럼 따스한 온기가 풍기였으며 극진한 친절성이 스며있었다.
한데 이번엔 최주식을 맞는 강준호의 눈빛이 첫추위를 몰아온 랭기나 한겨울의 얼음장처럼 랭랭하고 차거웠다.
속이 단단히 뒤틀리였군.
최주식은 손님마중에 린색하기 그지없는 강준호의 처사가 영 마음싸지 않았으나 그런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례의를 지켰다.
《국장동지, 그간 안녕하십니까?》
《건강했소.》
강준호는 시틋하게 대답했는데 그 대답은 매우 실무적이였고 바짝 마른 나무처럼 딱딱했으며 후더운 감이란 꼬물만큼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새형의 선박건조계획서를 가지고왔습니다.》
최주식은 가방에서 계획서를 꺼내 강준호의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게 좀 앉소.》
강준호는 계획서를 띠여보더니 자기 앞자리를 하관이 빠른 뾰족한 턱으로 가리키였다. 최주식은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았다.
《기사장동무는 무슨 일을 그렇게 하오?》
강준호는 재털이옆에 놓여있는 담배갑에서 《금강》 한대를 뽑아 엄지손톱에 톡톡 그루를 박아 붙여물더니 짜증기섞인 목소리로 첫마디부터 타발했다.
《?》
《어째서 계획서를 몇번씩이나 촉구해서야 가져오는가말요.》
최주식은 높은 목표를 점령하기 위한 계획서를 대수 세울수 없었노라고, 구체적이고도 현실성있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세우느라 기일이 며칠간 예상외로 더 지연됐노라고 말을 하려다가 어쩐지 변명을 하는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단줄 아오?》
강준호의 눈살은 가늘게 쪼갠 참대가치마냥 꼿꼿했고 기상은 자못 표표했으며 콕 내쏘는 말은 가시같았다.
《그런거야 요구하기전에 제꺽 올려와야지 국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게 해서야 되겠소.》
그는 최주식이가 문건을 제때에 올려오지 않고 여러번 재촉을 해서야 비로소 가져온 일을 두고 한참이나 열을 올려 푸념을 하고서야 요즈음 조선소에서 진행되는 설계며 현도장과 선대장 건설이며 기중기조립 등 문제들을 까근까근 물었다.
최주식은 조선소의 실태를 그대로 얘기했다.
《물론 교시선박을 결의한 날자에 뭇기 위해 조선공들이나 설계일군들이 현장에서 침식을 하며 일할수도 있소. 그러나 조선소를 책임진 일군은 매사를 심중히 대해야 하며 어떤 일이든 깊이 생각해서 처신해야 하오.
내 일전에 기사장동무가 구내도로확장공사를 벌려놓았을 때도 말했지만 그렇게 밤낮으로 일을 하고서야 조선공들이 어떻게 견뎌내는가. 하루이틀이나 한두달에 끝날 일도 아닌데말요. 그곳 조선소내 일부 일군들속에서는 기사장동무가 조선공들을 마구 혹사한다는 의견이 올라오고있소. 그것도 문제지만 그래 설계나 현도, 선체나 부속품가공, 의장품제작이나 철판계서, 기관이나 배관조립이 맨 주먹으로 해도 되는 구내도로확장공사와 비교나 할수 있는 일이요? 그거야 기사장동무도 잘 알고있지 않소.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설계 하나만을 례로 들기요. 설계원들이 도로확장공사를 하는데 나갔다가 독감에 걸려 출근을 못하고 일부는 또 손바닥에 물집이 생겨 일을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오? 그런 일에야 설계원들을 빼놓을수도 있지 않소. 그리고 여러날 밤을 패우며 일한 설계원들이나 스무살안짝의 애어린 사도공들이 피곤에 몰려 까딱 졸수도 있는데 그때 수치나 선을 잘못쓰거나 그어보오. 그때의 실수를 과연 어떻게 수습하겠는가. 그래서 내 설계장 곽용주나 선체설계실장 허홍대에게 설계를 절대로 다긋지 말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천천히 하라고 했소. 수만매에 달하는 도면을 치자면, 더우기 방대한 일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기술자나 고급기능공들로 배를 뭇자면 그들에게 충분한 정신적휴식을 보장해줘야 하지 않겠소.》
강준호는 대줄기같은 소나기가 내린뒤 산골물 흐르듯하던 력설을 끊고 가느다란 손가락짬에 끼인 담배가치를 갈아대였다.
최주식은 그의 말이 십분 리해되면서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웬일인지 불만감이 꿈틀거렸다.
누군들 조건에 맞게 주근주근 일하면 편안하다는것을 왜 모르겠는가. 알면서도 일을 내미는것은 배를 계획된 날자에 뭇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통해 우리 나라의 선박공업을 한계단 추켜올리고 가급한 기일안에 더 큰 배를 무어 앞선 나라들을 따라잡으며 세계적수준에 당당히 이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알기에 모든 조선공들이 하루를 열흘맞잡이로 억척스레 일을 하고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설사 최주식이 일을 쉬염쉬염 하라고 해도 귀담아들을 조선공들이 아니였다. 일감이 없으면 찾아하고 일감이 많으면 열백밤을 새워서라도 해내고야마는 조선공들이였다. 포부가 남달리 크고 리상이 높으며 이악하면서도 근면하고 소탈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조선공들이였다. 위대한 김일성동지의 높은 뜻을 받들어 실천으로 꽃피우는데서 기쁨과 행복, 삶의 전부를 찾는 그들이였다.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 신의를 금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그들이였다. 최주식은 그런 정신, 그런 풍모, 그런 일본새를 바로 전쟁시기 미국놈의 기총탄에 맞아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아쉽게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서 찾아보았고 《조선소의 산 력사》로 널리 알려진 김석홍아바이한테서 찾아보았다. 리억석이나 리윤종은 물론 새로 자라나는 김찬, 윤재수, 박성임, 강은주에게서도 찾아보았다. 그것은 이 땅에 태를 묻고 태여난 인간들, 조선공들이 대를 이어 길이길이 전해갈 더없이 고귀하고 더없이 긍지높으며 더없이 자랑스런 참된 넋이였고 의지였다.
강준호는 짙은 담배연기를 입과 코로 내보내며 작은 눈을 간잔조롬히 쪼프리고 역증스레 물었다.
《그래 내 말에 생각되는것이 없소?》
《설계원들을 도로공사에 인입한것은 잘못되였습니다. 그들을 떼놓고도 능히…》
최주식은 머리를 숙였다.
사실 최주식은 설계원들을 도로공사에서 떼놓으려 했었다. 그들이 몸에 배지 않은 메질이나 삽질, 정질을 하다가 손바닥에 물집이라도 생기면 설계일에 지장을 줄것이 아닌가. 그런데 리억석이가 목에 피대줄을 세우고 설계원들은 뭐 특별한 존재인가, 조선소사람이면 누구나 사회적로동에 참가해야 한다고 너무도 강경히 주장하는바람에 좋을대로 하라고 내버려두었었다. 그런 사연을 최주식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남에게 추궁이 가도록 오그랑수를 쓰는 일을 딱 질색하는 그였다.
《알았으면 됐소. 제기할것이 있으면 말하오.》
최주식은 유능한 기술일군과 고급기능공들을 몇십명만 다른 조선소에서 좀 보내주면 좋겠다는 말이 입안의 혀끝에서 뱅뱅 돌았으나 꿀꺽 삼켜버렸다.
《없습니다. 국장동지의 말을 들으니 수령님께 맹세올린 새형의 선박을 어김없이 제 기일에 건조해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집니다. 이제 조선소에 내려가서 배무이 조직사업을 더 빈틈없이 짜고들뿐아니라 자체로 기능공을 양성하고 후방사업에도 관심을 높이겠습니다.》
강준호는 최주식의 도전적인듯싶은 말에 야릇하고도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띠웠다.
《기능공을 이제 양성한단 말이요? 그건 언제 써먹으려구…》
《지금 당장은 못써먹어도 앞으로는…》
《앞으로는 써먹을수 있다는거지. 그건 동무 마음대로 하오. 하지 말라는 구내도로확장공사도 우둥뿌둥 했을라니…》
그는 야유했다. 최주식은 밸이 꿈틀거렸으나 자신을 자제했다. 야유가 상대방에 대한 질시고 모욕이라는것을 몰라서가 결코 아니였다. 한편 참는자에게 복이 있다는 허황한 궤변을 믿어서도 아니였다. 인간이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아무런 말이나 탕탕 하게 되면 서로의 감정을 더 야기시키고 격화시키며 앞으로의 사업에까지 영향을 주어 응당한 성과를 거둘수 없게 하기때문이였다.
《홍학주를 직장장으로 임명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였소?》
《아직 못했습니다.》
《아직도?…》
《제 리윤종당위원장동무와 내려가서 토론하겠습니다.》
강준호는 최주식의 처사가 못마땅한듯 눈살을 찌프리였다.
《그렇게 하오. 그런데… 말을 듣자니 몇년전에 조선소에서 내보낸 류경훈이를 다시 데려다 쓰겠다고 동무가 직접 탄광에까지 갔댔다는데 그게 사실이요?》
《사실입니다.》
최주식은 솔직히 대답했다.
강준호의 숨결은 대뜸 거칠어졌다. 낯은 설익은 도마도처럼 푸르벌개지고 눈살은 꼿꼿해졌다. 당장 무슨 일을 칠것 같은 기상이다.
《동문 도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하오? 국장이 조선소책임일군과 토론하고 내보낸 사람을 동무는 데려다 쓴다?》
《류경훈을 료해해보니 조선공들의 평도 좋고 믿을만 한 사람입니다. 그래 당위원장동무와 토론을 하고…》
강준호가 최주식의 말을 탁 잘랐다.
《믿을만 한 사람? 여보 기사장동무, 그 사람이 어떤 출신인지나 아오? 선주의 아들이요, 선주의 아들. 해방전엔 뗑뗑거리며 공부하구 왜놈에게 복무했소. 해방후엔 배를 무으며 사고를 몇번씩이나 내구. 그가 국가에 준 손해는 막대하오. 그런 류경훈일 믿어? 그 사람을 믿다간 새형의 배를 제 기일에 뭇기는커녕 하늘로 날려보낼수 있소.》
최주식은 가만있을수 없었다. 한 인간의 운명문제가 화제에 올랐는데 어찌 수수방관할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운명문제는 흥정할수 없다.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해방전에야 먹고 살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왜놈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했지요. 그의 아버지가 선주라는데 여럿이 빚을 내여 배를 한두척 장만한것도 그래 선주입니까. 국장동지는 사람을 너무 편협하게 그리고 일면적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최주식의 말에 강준호의 얼굴은 새파래지고 관자노리는 부나비날개처럼 팔딱거렸다.
《내가 사람을 일면적으로 편협하게 본다구? 말이 났으니말이지 실상 사람을 일면적으로 보는건 동무요. 동무는 자기의 리기적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류선화와의 관계를 어떻게든 잇기 위해 류경훈이를 조선소로 데려오려고 하는것이 아닌가.》
《…》
최주식은 억이 막혔다. 류선화때문에 류경훈이를 조선소로 데려오려고 한다?
강준호가 어쩌면 이렇게까지 외곬으로 생각할수 있단 말인가. 그가 지금 리성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
최주식은 불이 이글거리는 날카론 눈으로 강준호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잘못보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를 류선화의 아버지로보다 혁명동지로, 배무이에서 선배로 존경하고있습니다. 그런만큼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신 새형의 배무이과업을 마음껏 수행하도록 그를 조선소로 다시 데려오는것은 너무도 응당하다고 봅니다.》
《기사장동무, 믿음은 아무에게나 주는게 아니요. 믿음은 줄만 한 사람에게 주어야 하오. 나는 류경훈이를 다시 조선소로 데려오겠다는 동무의 견해엔 찬성할수 없소.》
강준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를 데려와서 배뭇는 일이 잘못되면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최주식이도 자기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두사람의 눈길은 예리한 섬광마냥 허공에서 부딪쳤다.
(최주식이가 류선화로 하여 혹시 분별을 잃은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강준호는 이런 생각이 불쑥 들자 자기가 한발 늦추기로 했다.
《좋소. 후에 두고보기요. 일이 어떻게 되나.》
최주식은 치미는 분을 안고 강준호의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