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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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64년 겨울의 첫눈은 류달리도 많이 내렸다. 천지의 거대한 공간을 꽉 메우며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은 마치도 하늘의 한귀퉁이가 뭉청 찢어지기라도 한듯 온밤을 쏟아졌다. 그리하여 희붐히 동이 틀무렵에는 수도의 거리며 건물의 지붕이며 다리란간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두툼한 눈이불로 덮어놓았다. 그 어디를 보아도 눈천지였다.

라진-평양행렬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대자연이 밤새 이뤄놓은 조화에 마음이 상쾌해져 기나긴 려행의 피로도 말끔히 잊고 즐거움과 기쁨에 휩싸여 아이들마냥 떠들썩거리며 평양역을 나섰다. 그런데 까만 모직바지에 재빛 반외투를 입고 하얀 토끼털모자를 숱진 눈섭우에까지 푹 눌러쓴 서른안팎의 한 청년만은 신비스러운 설경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긴채 천천히 역을 나섰다.

기계공업성 선박관리국의 부름을 받고 올라온 《ㅎ》조선소 부기사장 최주식이다.

(무슨 일이 있어 급히 올라오라고 했을가? 배무이에서 제기된 문제라면 지배인이나 기사장을 불렀을텐데… 혹시 내가 맡은 일에서 빈틈이 생긴것이나 아닐가?)

장거리전화를 받은 그 순간부터 떠오른 의문을 망돌돌리듯 굴려보았으나 이렇다할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중 짚여지는것이 있다면 선박관리국장 강준호가 이러저러한 기회에 언제까지 총각의 몸으로 있을 작정이냐, 로약한 어머니가 지어주는 밥을 아직 몇해나 더 먹겠느냐, 중이 제머리를 못깎는다는데 내가 소개를 하라는가 하던 말이였다.

혹시 그가 얌전한 처녀를 점찍어놓고 선을 보라고 부른것이나 아닐가.

이 역시 어림짐작이였다. 자기에 대한 강준호국장의 관심이 아무리 크다한들 그런 사사로운 일때문에 천리밖에 있는 사람을 긴급 호출할수는 없는것이다.

그는 붐비는 역사를 나섰다. 그때 《부기사장동지!》하고 부르는 소리가 사람들의 떠들썩한 말소리와 명랑한 웃음소리를 헤가르며 들려왔다.

최주식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난쪽으로 눈길을 돌리였다.

키가 호리호리한 강준호국장의 운전사가 가볍게 머리숙여 인사하며 빠른 걸음으로 마주 걸어온다.

최주식은 누구를 마중나왔는가고 물었다. 젊은 운전사는 싱글싱글 웃으며 최주식을 마중나왔다고 했다.

《나를말요?》

《녜.》

운전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서있는 최주식에게서 가방부터 빼앗아들며 차에 오르기를 재촉한다.

무슨 급한 일이 제기되였기에 차까지 내보냈을가?

차에 오른 최주식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다시금 뻗쳐올랐다.

《갱생》은 백설에 덮인 운치좋은 거리를 따라 기세좋게 달리다가 몇분후에 김일성광장옆에 자리잡고있는 종합청사마당에 멎어섰다.

차에서 내린 최주식은 운전사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힘있는 걸음걸이로 2층으로 올라가 먹으로 《선박관리국장》이라는 표쪽을 써붙인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귀에 익은 강준호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주식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T형으로 놓인 커다란 책상앞에 앉아서 무슨 문건인가를 들여다보고있던 몸매 자그마한 강준호가 금테안경너머로 최주식을 띠여보더니 명민한 눈을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는 손만 내밀고 최주식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최주식이보다 외국 함선대학 5년선배이고 나이도 10년이나 우인 강준호는 체소한 몸에 어울리게 얼굴이 작았고 눈도 코도 입도 손도 다 작았다. 유독 얇다란 입술을 헤치고 나오는 목소리만이 국장의 위풍을 돋구어주듯 굵고 높았다.

《먼길 오느라 수고했겠소. 불편은 없었소?》

《차를 보내주어 잘 타고왔습니다.》

강준호의 앞으로 다가간 최주식이 큼직한 손으로 그의 살결이 보드라운 자그마한 손을 힘껏 잡으며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어머니랑은 무고하시오?》

《잘 있습니다. 국장동지도 건강하셨습니까?》

최주식은 겉옷을 벗어 문옆에 세워놓은 옷걸개에 걸고나서 강준호의 앞의자에 가서 앉았다.

《늘 바쁘다보니 어디 앓을새나 있소?》

강준호는 입가에 선한 웃음을 담고 안경속의 가느다란 눈으로 젊음이 넘쳐흐르는 최주식을 보며 커피를 마시겠는가고 물었다.

최주식은 사양했다.

《그 조선소에서 몇년 일했던가?》

강준호의 새삼스러운 물음에 최주식의 부리부리한 눈은 덩둘해졌다.

《3년입니다.》

《중앙선박설계연구소에서도 책임기사루 3년간 일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러니 최동무가 류학을 하고 나온지도 벌써 6년이 되였구만.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 정말 빠르거든. 바람질이 세찬 북방에서 그새 수고가 많았소.》

강준호의 《그새 수고가 많았소.》라는 마감말에 최주식의 눈은 더욱 커졌다.

그새 수고가 많았다는것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걸가? 무엇때문에 이런 치사를 할가?

최주식은 자기를 평양으로 급히 부른것과 강준호의 말이 어쩐지 련관성을 띠고있는것만 같아 온몸이 긴장해졌다.

그때 국장의 책상우에 놓인 까맣고 흰 두개의 전화기중에서 흰색의 전화기가 따르릉하고 경쾌하게 울었다.

강준호는 유유히 송수화기를 들었다. 허나 송수화기를 들 때의 배포유한 행동거지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매우 례절있고 정중했다.

《국장 강준호 전화받습니다. 예, 금방 도착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예? 외국에 내보낼 선박부문 기술일군대표단성원말입니까? 기본적으로 선발했는데… 저녁에 문건으로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구 청진조선소횡진수대설계도면도 지금 검토중인데 저녁에… 예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송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은 강준호는 최주식을 보면서 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는 상동지가 기다리니 어서 가보라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주식은 자기를 여기로 부른 사람이 관리국장이 아니라 상이였다는것을 알자 의문이 더욱 커졌다. 그래서 강준호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자기의 궁거운 내심을 내비치였다.

상이 무슨 일로 불렀는가. 왜 급히 오라고 했는가. 그 내막을 좀 알려달라.

강준호는 최주식의 둥실한 얼굴을 보며 이제 가보면 알게 될거다, 무릇 모든 일은 사전에 알면 재미가 없다면서 싱글거렸다.

최주식은 아닌보살하는 강준호를 일별하고 국장방을 나와 곧장 3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상방에 들어서자 《상동지, 안녕하십니까?》하고 군인식으로 뒤발꿈치를 딱 소리가 나게 가져다붙이며 절도있게 인사했다.

키가 크고 몸이 거쿨지며 얼굴이 너부죽한 반백의 조문광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좋은 웃음을 띄우고 《오, 〈호랑이소대장〉이 왔구만!》하면서 성큼성큼 마주 걸어왔다. 기억력이 비상한 그는 민족보위성 부상으로 있는 친구한테서 전쟁시기 최주식이가 《호랑이소대장》으로 잘 싸웠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얼핏 들은 후부터는 이름대신 별호를 부르군 했다.

조문광은 최주식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고나서 쏘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친절히 권하였다. 최주식이 폭신한 쏘파에 앉자 조문광은 응접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군 하던 전례를 깨뜨리고 자기의 자리로 갔다.

《동무를 부른건…》

최주식은 몸매를 바로가지고 정색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시험장에 들어선 학생이 선생앞에서 시험문제를 뽑는 때마냥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제껏 품고 씨름질하던 의문이 비로소 밝혀지리라는 기대때문이였다.

조문광은 성량이 풍부하고 잘 울리는 웅근 목소리로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동무를 부른건 당중앙위원회의 위임에 의하여…》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 얼핏 최주식을 건너다보았다.

최주식의 숨결은 높아졌다. 그 숨결따라 쩍 버그러진 가슴이 잦게 오르내린다.

《동무가 영포조선소 기사장으로 임명되였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요.》

최주식은 귀가 멍멍해졌다.

기사장으로? 내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였다. 그는 몇백t급의 선박을 언제까지 무으라는 과업을 받았다면 《상동지 알았습니다.》라고 기쁨과 환희, 열정과 신심에 넘쳐 씩씩하게 대답했을것이였다. 하지만 지금 최주식은 발끝만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앉아있었다.

크지 않은 기업소 부기사장을 하던 나더러 특급기업소 기사장일을 맡아 수행하라? 군대로 말하면 련대에서 참모일을 하던 사람에게 사단참모장의 직무를 맡으라는격인데 내가 그 직무를 어떻게 수행한단 말인가. 날 믿어주는 그 마음은 더없이 고맙지만 그건 나에게 너무 과중하고 아름차다.

최주식은 내리깔았던 눈을 치뜨고 조문광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상동지, 절 지금의 직무에… 그냥 있도록 해주십시오.》

최주식의 청이 뜻밖인듯 조문광의 어글어글한 눈은 둥그래졌다.

《전, 능력도 경험도 그리고 나이도… 아직은 다 어립니다. 저는… 기사장일을 감당 못합니다.》

최주식은 사정하다싶이 말했다. 그 어조에는 진정이 어려있었다.

《그렇다?》

조문광은 반문하며 최주식을 이윽히 바라보았다. 웬만한 사람같으면 《예》 하고 믿음에 기쁨을 표시하겠는데 전혀 그 반대다. 하지만 그는 웬일인지 최주식에게 호감이 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책임감을 크게 느낄줄 아는 이런 일군이야말로 맡겨진 직무를 등탈없이 원만하게 수행하기때문일가.)

조문광은 이렇게 생각하며 입가에 피여나는 미소를 일부러 가무리고 짐짓 엄하게 말했다.

《일이란 배우며 하는거요. 임명된 직무를 수행하시오.》

《상동지, 저대신 능력있는 일군을… 몇해후엔 해보겠습니다.》

최주식은 물러설념을 하지 않았다. 조문광은 딱 잘라 말했다.

《더는 고집을 부리지 마오. 사업에서 고집은 금물이요.》

《…》

《당에서는 동무가 기사장일을 감당할수 있다고 보고있소. 왜 그런가. 그것은 동무에게 화선을 헤쳐온 강의한 의지가 있고 함선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있으며 중앙선박설계연구소와 조선소에서 일한 실천적경험이 있기때문이요.》

조문광은 옆에 놓인 원탁우의 보온병에서 꽃무늬를 새겨넣은 사기고뿌에 김이 몰몰 피여오르는 물을 부어 한모금 마신후 보다 더 진중한 목소리로 웃말에 발을 달았다.

《동무에 대한 당의 기대는 매우 크오. 배무이력사가 비교적 오래고 경험있는 조선공들이 많은 영포조선소에서 머지 않아 새형의 큰 배를 무어야겠는데 그걸 담당할 일군이 없거든. 그곳 조선소 지배인은 장기환자로 입원해있지, 기사장은 결원이지, 해군출신의 리억석부기사장은 욕망에 비해 아직은 실무가 좀 부족하오. 말하자면 룡마는 있는데 그걸 탈 사람이 없단 말이요.

이런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최주식동무를 영포조선소 기사장으로 임명하는게 좋겠소. 상동무가 전번에 얘기한것처럼 최주식동무는 2년이 걸려야 무을수 있다던 배를 반년이나 앞당겨 건조해낸 경험이 있소. 그것도 수입자재가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자재로말요. 확실히 그 동무는 지식도 있고 통이 크고 대담하며 내밀성이 있소. 그런가하면 결패도 세고 배짱도 있소. 전쟁때 전선시찰을 나갔다가 사단에 들린적이 있는데 대학에 가라는 간부과장의 말을 최주식동무가 마다하더란말요. 전쟁이 끝난 후엔 갈수 있어도 지금은 절대로 갈수 없노라고. 내가 이긴 싸움을 하고있으니 걱정말고 대학에 가라고 해서야 그는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소. 상동무, 나는 최주식동무가 기사장직무를 훌륭히 수행하리라고 보오.〉라고 말씀하셨소.》

최주식은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수령님께서 지난날 별로 해놓은것도 없는 날 그렇게까지 믿어주시다니…)

조문광은 들고있던 물고뿌를 제자리에 놓고 흥분한 최주식을 선망에 찬 눈길로 바라보았다.

《최동무, 나는 동무가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충성으로 보답하기 위해 일한다면, 〈호랑이소대장〉으로 조국을 지켜싸운 그 드높은 열정과 기백, 그 불굴의 투지와 정신으로 일한다면 그 어떤 선박도 다 건조할수 있다고 확신하오.》

《알겠습니다.》

최주식은 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문광은 그제서야 사람좋은 웃음을 얼굴가득 피워올렸다.

《좋소, 영포조선소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강준호국장에게서 듣소. 동무에게 권고하고싶은것은 사업을 빨리 인계하고 영포로 갔으면 하는거요. 아마 많은 일감이 동무를 기다리고있을거요.》

잠시 사이를 두었던 그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최동무, 수령님과 당의 믿음을 심장깊이 간직하고 새 직무에서 본때있게 일하시오.》

최주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조문광의 방을 나서는 그의 마음은 더없는 행복감으로 부풀어올랐고 한편 마치도 등에 커다란 바위를 진것처럼 몹시도 무거웠다. 당의 기대와 믿음은 하늘같은데 자기의 능력과 열정, 지식은 너무나도 옅은것이였다.

그가 머리를 수굿하고 국장방으로 내려왔을 때 강준호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최주식이 기쁨에 넘쳐 환한 얼굴로 들어설줄 알았는데 의외에도 표정이 밝지 못한것이였다.

《국장동지, 영포조선소 기사장으로 임명받았는데… 제가 수령님과 당의 믿음에 꽤 보답하겠는지 자못 걱정됩니다.》

그제서야 강준호는 마음속 의문을 풀며 밝게 웃었다.

《무슨 소릴 하는거요? 보답해야 하구말구. 전쟁시기 조국이 살점을 뜯기우고 피를 흘릴 때 외국에서 편안히 지내며 배운 지식을 머리속에만 묻어두어선 안되지. 말이 났으니 말이지 즐겁던 류학의 나날이 떠오르는구만. 그때 류학생들중에서 동무는 이미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소.》

그랬었다. 강준호는 해방을 맞은지 두해째 되는해 류학을 가서 전쟁기간을 고스란히 외국에서 보냈었고 최주식은 전쟁을 하다 수령님의 배려로 외국류학을 갔었는데 최주식이 1학년때 강준호는 5학년이였었다. 그들은 아득히 펼쳐진 광대한 지식의 바다를 탐구의 배를 타고 열정의 노로 쉬임없이 저어갔었다. 그때 머리가 남달리 뛰여난 최주식은 1학년에서, 강준호는 5학년에서 단연 첫자리를 차지했었다. 강준호는 앞으로 선박공업부문에서 자기와 겨룰 사람은 오직 최주식일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세월은 그의 예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증했다. 학구적이고 진지하며 대담하고 통이 크며 전개력이 출중한 최주식은 어디에 가나 자기의 발자국을 뚜렷이 냈다.

《국장동지, 결심을 실천으로 옮긴다는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기사장임무를 맡고보니 어쩐지 겁이 납니다.》

강준호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웠다.

《원 세상에… 동무가 그런 소릴 하다니. 다른 사람앞이라면 몰라도 내앞에선 그런 말 다시 마오. 지식과 능력, 힘과 열정이 있고 리상과 포부가 남달리 큰 동무에겐 우는 소리가 어울리지 않아.》

최주식은 자기를 고무해주는 그가 고마왔으나 마음속 근심은 여전히 가셔지지 않았다.

그는 강준호가 들려주는 영포조선소에 대한 실태를 극히 필요한것만 자그마한 수첩에 적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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