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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식이 참모회의에 제기할 새 선박전투계획을 작성하고났을 때는 한시가 훨씬 넘은 깊은 밤이였다.

주의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출입문을 꼭 닫아건채 몇시간을 꼬박 앉아있은 까닭에 여느때같으면 오금이 쑤시고 머리가 무척 무거우련만 지금 그는 피곤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정신은 더 말짱해지고 온몸엔 기운이 샘솟듯 했다. 담배생각이 나서 곽을 들어보니 세개가 다 비여있고 문풍지한 방안엔 기온이 낮은 여름날 새벽의 짙은 안개처럼 담배연기가 꽉 차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환기창과 걸었던 출입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통풍이 되자 담배연기가 환기창으로 앞다투어 물물 빠져나간다. 곰을 잡을듯 꽉 들어찼던 담배연기는 잠간사이에 방안에서 싹 없어졌다.

최주식은 환기창을 닫은후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방을 나설 때는 합숙으로 가서 몇시간을 달게 자리라고 생각했었지만 정작 밖에 나오고보니 자리에 누워 잠을 자낼것 같지를 않다.

최주식은 마음을 고쳐먹고 합숙으로가 아니라 날이 밝으면 선대확장공사가 크게 벌어질 선체가공직장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걸음을 옮길수록 가슴속에선 골짜기로 굴러내리는 눈덩이마냥 기쁨의 덩어리가 자꾸 커지기만 했다.

사람이 기쁠 때면 가장 가까운이가 생각나는 법인지 그의 머리엔 문득 홀로 계신 어머니가 떠오르면서 사무치게 그리워났다.

만약 어머니가 곁에 있어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 가르치심을 받은 격동적인 사연을 함께 나눌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이날 이때까지 크고 잔정을 일일이 쏟아부으며 자기 하나만을 믿고 살아온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영상에 이어 류선화가 생각났다. 이제는 단념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기쁠 때나 괴로울 때나 자기에게 못 잊을 첫사랑을 송두리채 안겨준 류선화이기때문일것이였다.

최주식은 기회를 마련하여 류선화와 류경훈이가 있는 령대탄광으로 다시한번 꼭 가봐야 하겠다고 내심 다짐하며 걸음을 다그쳤다. 그러던 그는 선대장과 남산기슭에서 어둠을 몰아내며 활활 타오르는 우등불과 《어기영, 치기영》소리를 치며 목고를 메고 달리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가까이 가보니 김석홍아바이와 리억석, 김찬, 강은주 등 수십명의 조선공들이 목고나 질통을 메고 웃고 떠들며 이미 놓여있는 선대웃쪽에 흙을 날라다 펴고있다. 이를테면 벌써 선대확장공사를 시작한것이였다. 그들은 모름지기 공사를 다그치기 위해 자진하여 전투장으로 달려나왔을것이다.

최주식은 저도 모르게 목이 꺽 메이고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편 합숙으로 들어가 달콤하게 눈을 붙이려고 했던 자신의 처사가 더없이 민망하고 무안하여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보면 수령님의 현지교시를 한시바삐 관철하기 위해 떨쳐나선 저들의 마음은 그 얼마나 맑고 깨끗하며 열정은 또한 그 얼마나 높고 그 뜻은 얼마나 고결하고 숭고한것인가.

조선소를 책임진 일군이라는게 밤늦게까지 좀 일했다고 하여 합숙에 들어가 아늑한 잠자리에서 편안히 쉴 생각을 하다니… 저들, 조선공들에 비하면 난 아직 멀었어.

최주식은 자신을 질책하며 청년들이 날라온 흙을 삽으로 열성스레 펴고있는 김석홍아바이와 리억석의 곁으로 가며 《수고들 합니다.》라고 미안쩍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러자 김석홍아바이가 일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기사장 나왔나?》하고 빙그레 웃는데 리억석은 이마에 번지르하게 내밴 땀을 손수건으로 뻑뻑 훔치며 《참모회의에 내놓을 전투계획은 어떻게 하고 여길 나왔소?》하고 묻는다.

《내딴엔 힘을 넣어 세우느라고 했는데 아마도 빈구석이 많을거요. 아침에 모두들 출근하면 내 방에 모여 토론하기오.》

최주식은 대답하고나서 김석홍아바이에게서 삽을 억지다짐으로 달래 들었다.

《기사장동무, 래일부터는 자동차, 부르도젤 등 운수기재를 총동원해야 하지 않겠소? 등짐으로나 져날라서야 어느 하가에 선대확장공사를 해내겠소?》

삽질이나 하자니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그야 물론 총동원해야지요. 그러나 내 생각엔 등짐도 소홀히 해선 안될것 같소. 티끌모아 큰산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겠소.》

김석홍아바이가 리억석에게 하는 최주식의 말에 머리를 끄덕여 찬성을 표시했다.

《기사장말이 옳거니. 난 거 앞으로 돌격대원들뿐아니라 종업원들의 가족들도 어른이나 아이 할것 없이 다문 몇시간씩이라도 매일 여기 나와서 지원을 했으면 하네. 털어놓고 말해서 토량운반이야 뭐 기술이 필요한것도 아니지 않나. 조직만 하면 누구든 발벗고 나설걸세.》

최주식은 그 말에 귀가 번쩍 띄였다.

《아바이, 거 정말 좋은 궁냥을 하셨습니다. 부기사장동무의 생각엔 어떻소?》

《기사장동무의 마음이자 내 마음이지요. 내게 무슨 딴 생각이 있겠소.》

리억석의 시원스런 대답에 최주식은 껄껄 웃었다. 리억석인 역시 사내야. 옹졸하지 않거든.

그는 자못 기분이 좋아 삽질을 세괃게 했다. 그러나 얼마를 하지 않아 삽을 놓고 가슴을 움켜쥐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전쟁시기에 부상을 당한 자리가 뜨끔뜨끔 결리며 심한 동통을 일으켰던것이다.

《자네 왜 그러나? 어디 아픈가?》

깜짝 놀란 김석홍아바이가 해쓱해진 최주식의 땀난 얼굴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아… 아무일도 아닙니다. 안하던 삽질을 갑자기 하니 종아리에 쥐가 일어서…》

최주식은 범상하게 대답하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다시 삽을 쥔다.

《혹시 부상자리가 결리여서 그러는게 아니요?》

리억석이 근심스레 입을 연다.

《아니라는데…》

최주식은 강잉히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좀 쉬고하기요.》

리억석은 최주식의 손에서 강다짐으로 삽을 빼앗더니 목고를 메고 온 김찬이와 강은주를 보며 소리쳤다.

《동무들도 좀 쉬고하시오.》

《부기사장동지, 우린 쉰번을 나르고 쉬기로 했어요.》

강은주가 명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데 김찬은 씩- 소웃음을 웃는다.

《서른번을 나르고 쉬자고 하는데 은주동무가 쉰번으로 정했습니다.》

《날 녀자라고 얕잡아보니까 그러지요.》

강은주가 김찬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악의없이 하는 말에 한손을 허리에 짚고 선 최주식은 싱긋이 웃고 리억석은 사내웃음을 터뜨렸으며 김석홍아바이는 너털웃음을 허허 웃었다.

《녀자라고 얕보면 안되지. 그건 봉건이야.》

《아버지, 새 세대에게 무슨 봉건이 있겠습니까.》

김찬이의 얼굴이 벌거우리 물이 드는데 강은주는 그것이 깨고소한듯 소녀애처럼 생긋이 웃고 한마디 더 시까슬렀다.

《아니, 아바이 말씀이 옳아요. 김찬동무에겐 아바이에게도 없는 봉건이 꼴딱해요.》

《챠, 이거 녀자에게 인정을 베풀려한것이 나중엔 봉건으로 되는구만. 좋소, 내 다신 은주동무에게 인정사정 두지 않겠소.》

《어서 그러세요.》

그들은 목고의 흙을 쏟아놓자 서로 마음에 없는 싱갱이질을 해가며 남산쪽으로 반달음을 친다.

《아바이, 저 두사람사이가 남달라보이지 않습니까?》

최주식은 리억석이한테 담배 한대를 달래들고서 빨간 불티를 탁탁 튕겨올리며 기세좋게 타오르는 우등불곁에 주저앉으며 김석홍아바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남다른것 같습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흉허물없이 서로 시까스르지 못하지요. 아바이보기엔 은주가 어떻습니까?》

《글쎄… 같이 생활을 해보지 못했으니 어디 알겠나.》

김석홍이 여유를 두고 뜨직뜨직 대답했다.

《제 보기엔 훌륭한 처녀같습니다. 제대군인이여서 그런지 성격이 탁 틔고 활발한것은 물론 맡은 일에 대한 열성이 높고 책임감이 강하지요. 여기에 와서 조선소를 쭉 돌아보고는 자진하여 도장일을 택했단말입니다. 더우기 어제는 홍학주부직장장이 강국장의 요구를 들어서 직장도면관리원으로 임명한걸 알고 성이 독같이 나서 마다했답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은주동무는 정말이지 용모도 아름답지만 마음은 그보다 더 아름답다고 봅니다.》

《하긴 기사장말이 옳은것 같네. 홍부직장장이 선대확장공사 돌격대원명단에서 제 이름을 뺐다고 은주가 정색하고 대들어 다시 넣었다니 마음이 대쪽같단말이야. 얼굴화장이나 곱게 하고 쉬운 일자리나 찾는 그런 서푼짜리 처녀같질 않거든. 종업원궐기모임때 토론하는걸 봐도 역시 씨가 먹었어. 둘이만 좋다면 난 절대 찬성일세.》

김석홍아바이는 붙여문 담배를 몇모금 맛나게 뻐금뻐금 빨고나서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데 기사장, 남의 일을 생각해주는건 고맙네만 난 자네 일이 진정으루 걱정일세. 그래 자넨 언제까지나 그렇게 혼자몸으로 있을 작정인가. 그에게 아이가 있다고 해서 주저하나? 사나이가 한번 사랑을 언약했으면 죽을 때까지 하는거지. 안그런가?》

《아바이, 그렇긴 한데…》

최주식은 괴로운 마음을 구구히 얘기하고싶지 않아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그러자 리억석이 대뜸 얼굴을 붉히며 그들의 말에 끼여들었다.

《아바이, 난 반댑니다. 세상에 처녀가 없어서 사랑을 배반한 그런 녀자를 다시 사랑한단 말입니까?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최주식은 리억석의 입에서 배반이란 말이 튀여나오자 이상하게도 그(리억석)에 대한 불만이 밀물처럼 치밀어올랐다. 류선화가 《화선언약》을 지키지 않은것도 사실이였고 자기가 류선화앞에서 어쩌면 자기와 한 마음의 맹세를 헌신짝버리듯 쥐여버렸는가고 호되게 질책한것도 사실이였으나 류선화를 타매하는 리억석의 말이 더없이 고까왔다.

분위기는 자연히 서먹해지고 어설퍼졌다. 그러자 김석홍아바이가 화제를 바꾸었다.

《여보게 기사장.》

《왜 그럽니까?》

《내 자네한테 한가지 량해를 구할 일이 생겼어.》

《저에게 무슨 량해를 얻는단 말입니까?》

최주식은 김석홍아바이를 뻔히 쳐다보았다.

《다른게 아니구 내 몇번 말해두 자네가 응하지 않기에 리억석부기사장과 당위원장서껀만 토론하고 어머니에게 집이 되였으니 여기로 나오라고 자네 이름으로 며칠전에 전보를 쳤네.》

최주식은 김석홍아바이의 진심이 십분 리해되였으나 낯빛을 흐리였다.

《원, 어쩌면… 집도 없이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 집이 있지 않나. 비좁은대루 같이 지내자구. 그러다가 집이 해결되면 따로나구.》

《고맙긴 하지만 그러지 말걸 그러셨습니다. 합숙생이 뭐 저 혼자뿐입니까?》

《그렇긴 하지만 내 심정두 좀 리해해줘야 할게 아닌가. 어머니를 옆에서들 잘 돌봐드리긴 하겠지만 자네옆에 있는것만치야 하겠나.》

김석홍아바이의 인정깊은 말에 리억석이 주를 달았다.

《기사장동무, 아바이의 말씀이 난 백번 옳다고 보오. 합숙에 합숙생이 많긴 하지만 서른넘은 합숙생은 기사장동무뿐이요. 아바이네집에 있기 정 뭣하면 우리 집에 가있읍시다.》

머리를 끄덕이던 김석홍아바이는 리억석의 마감말에 펄쩍 뛰였다.

《원, 부기사장두 별소릴 다 하누만. 그것두 말이라구 하나.》

최주식은 김석홍아바이와 리억석이 사이에 싱갱이가 벌어질것 같아 손사래를 치며 웃고말았다.

《됐습니다, 됐어요. 그러다 어성이 높아지겠습니다.》

그제서야 김석홍아바이가 노여움을 풀고 뒤를 눌렀다.

《어머니는 아마 곧 오실거네. 어머니가 오신 다음엔 아예 다른 말 말라구. 알겠나?》

《알겠습니다.》

최주식은 할수없이 알겠다고 대답할수밖에 없었다.

우등불은 여전히 탁탁 소리를 내며 무한대한 밤하늘로 별찌같은 불티를 튕겨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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