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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학주가 사는 두칸짜리 단층주택은 조선소에서 도보로 반시간가량 걸리는 룡정동에 자리잡고있었다. 닻거리를 따라서 영포시 중심에 위치하고있는 시립도서관을 지나 영화관앞으로 쭉 뻗은 기본도로로 들어서면 40분이 좋이 걸렸으나 닻거리를 벗어져 해방산밑으로 난 길로 잡아들면 천천히 걷는 남정네들 걸음으로 반시간이면 족하였다. 그의 집앞으로는 자동차가 겨우 어길수 있는 포장하지 않은 도로가 나있었고 길옆으로는 너비가 대여섯m가량 되는 개울이 있었으며 그 개울로는 량이 많지 못한 물이 바다로 유유히 흐르고있었다. 그 개울건너 둔덕에는 4층으로 된 남흥중학교가 번듯이 자리잡고있었고 학교에서 초간히 떨어진 아래쪽기슭에는 일제의 조선강점시기 중국 할빈역두에서 《조선통감》이였던 이또를 권총으로 쏴죽인 애국렬사 안중근의 대리석묘비가 우뚝하니 서있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핑게를 대고 퇴근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먼저 나온 홍학주는 수산사업소와 시장에 들려 사온 어물로 갖가지 료리를 해놓고 오매월이와 마주앉아 강준호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있었다.
연분홍저고리에 초록색비단치마를 맵시나게 받쳐입고 그 우에 눈같이 하얀 행주치마를 깡똥하니 두룬 오매월은 나이가 마흔살에 가까왔으나 겨우 서른두세살로밖에 나보이지 않았다.
《여보, 국장이 오긴 와요?》
어둠의 장막이 나래를 펴는 창밖을 내다보며 오매월이가 홍학주에게 물었다.
담배만 뻐금뻐금 빨아대던 홍학주는 머리를 끄덕였다.
《아 오지 않구. 그런데… 당신 거… 그 사람한테 반한건 아니요?》
오매월은 화장을 진하게 한 해반주그레한 얼굴을 들고 버들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꼬며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시샘이 나는 모양이죠?》
《그럼.》
홍학주가 메주같이 퉁투무레한 곰보얼굴에 비죽이 웃음을 담고 크고 두툼한 입술을 벌려 뱉듯 대답했다.
《원참, 걱정두 팔자다. 아무리 꽃이 벌나비를 받아들인들…》
《그래두… 하루에 열두번 변한다는 녀자들의 요지경속같은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아?》
《아이참, 사람 그만 웃겨요.》
오매월은 한참 깔깔거리다가 언제 웃었더냐싶게 새침해졌다. 그의 눈과 몸에선 동지섣달 송곳바람마냥 랭기가 확 풍긴다. 녀자가 독을 쓰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불린다는 말이 결코 우연치 않은것 같다.
《당신은 정말 바보야요, 바보. 원체 사내들이란 겉으론 점잖을 빼면서도 치마두룬것만 보면 사족을 못쓰지 않아요. 난 우리 일을 위해서 그러는거야요. 그런것도 모르고 시샘하다니. 당신이 아무리 날고 뛰여도 그 사람에겐 내 웃음, 내 눈짓 한번이 더 효과가 있단 말예요.》
《아아… 이런… 내가 왜 그걸 모르겠소. 참말이지 당신하고는… 롱말두… 못하겠구만.》
주눅이 든 홍학주는 말을 떠듬거렸다.
오매월은 낯이 벌개서 쩔쩔매는 홍학주가 민망스럽기도 하고 동정도 가서 밉지 않은 눈을 할깃거렸다.
《여보, 당신은 어쩌면… 작지 않은 체통을 가진 량반이 속대는 왜 그렇게 갈대같아요. 그래가지고야 큰 일을 어떻게 한담…》
요염스런 오매월의 간사한 말과 정어린 눈웃음에 홍학주의 마음은 대뜸 너누룩해졌다.
그때 밖에서 급정거하는 차소리가 아츠럽게 들리였다.
홍학주와 오매월은 주거니 받거니 하던 말을 끊고 바싹 귀를 강구었다.
《내 여기 들렸다가 갈테니 먼저 가라구.》
강준호의 위엄기있는 목소리에 이어 부르릉 하고 차떠나는 소리가 차거운 밤공기를 헤갈랐다. 그다음 언땅을 밟는 가벼운 발걸음소리가 들리더니 문밖에서 뚝 멎었다.
《부직장장동무 있소?》
홍학주는 압착되였던 용수철에서 튕겨난 사람마냥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문을 열어제꼈다. 밖의 찬공기가 방안으로 씽 들어오고 방안의 전기불이 캄캄한 어둠의 장막을 밀어내치며 부채살처럼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어이구. 이제야 오십니까? 시장하실텐데 어서 들어오십시오.》
홍학주가 반색을 하며 귀빈을 모시듯 강준호를 방으로 안내했다.
《참말 오래간만이예요. 전 국장동지가 우리 집에 영 발을 끊었는가 했죠.》
오매월이 애교어린 웃음을 엷은 입가에 살짝 띄우며 방으로 들어서는 강준호에게 다소곳이 머리를 숙여보였다. 그리고는 강준호가 벗어주는 털모자와 외투를 받아 날렵한 동작으로 옷걸개에 걸어놓는다.
《그새 아주머니의 가슴앓이는 좀 어떻소?》
《그저 그러루해요. 어서 앉으세요.》
오매월은 함박꽃무늬의 비단방석을 강준호의 앞에 내놓았다.
《이거 올적마다 페를 끼쳐서 미안하오.》
강준호가 꽃방석에 스스럼없이 앉으며 하는 말에 오매월은 교태를 부리며 정찬 눈을 곱게 할긴다.
《국장동지두, 별말씀을 다 하세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그런데 어쩔가? 갑자기 준비를 하다보니 주안상이 변변치 못해서… 담배를 피우며 잠간만 기다리세요.》
오매월은 초록색비단치마꼬리를 방바닥에 찰찰 끌며 부엌으로 내려간다.
강준호는 정갈한 방안을 둘러보고나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홍학주가 제꺽 성냥불을 켜서 두손으로 받치였다.
강준호가 담배를 반대도 피우지 못했는데 오매월이 찬그릇들을 소반에 담아 들여왔다. 커다란 두리반우에는 삽시에 잉어회, 방어회를 비롯한 어물료리들과 소회갓까지 놓이였다.
강준호가 회라면 사족을 못쓰는줄 이미 아는터여서 오매월이 모조리 회를 친것이다. 두리반옆에는 목긴것이 우뚝우뚝 서있었는데 그 이름도 각이한것들이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인삼뿌리가 든 고려인삼술, 워드까, 지어 《나뽈레옹》까지 한병 놓여있다.
강준호의 입귀는 그만에야 저절로 귀밑까지 쩍 벌어졌고 누런 금테안경속에선 크지 않은 눈이 한껏 생기를 띠고 반짝거렸다.
오매월은 허리가 잘룩한 유리 술잔을 강준호와 홍학주앞에 놓고 나서 어느술병을 터치라는가고 상냥스레 물었다.
홍학주가 잠시 머뭇거리자 강준호가 손을 들어 《나뽈레옹》을 가리켰다.
오매월이 《나뽈레옹》의 마개를 솜씨있게 열더니 무릎을 꿇고앉아 두 사나이의 잔에 각기 술을 따랐다.
《아주머니도 같이 들기오.》
강준호가 점잖게 권했다.
《저야 뭘… 어서 국장동지나 많이 드세요.》
오매월이 일부러 사양했다.
《국장동지가 권하시는데 같이 하자구.》
홍학주까지 이렇게 말을 하자 오매월은 부엌으로 나가 깜찍하게 생긴 작은 유리술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강준호가 그 잔에 술을 부었다.
《자, 들기오.》
셋은 잔을 입에 가져다댔다. 도수가 높은 《나뽈레옹》이여서 목구멍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슴이 찌르르 했다.
《아, 그것참 좋구만. 나뽈레옹이 력사에 남아있는 〈유명한 인물〉이듯이 〈나뽈레옹〉술 역시 세계적인 술이 분명해.》
강준호가 고명을 얹어 맛갈스러운 방어회를 저가락으로 집으며 찬탄했다.
《변변찮지만 많이 드세요.》
한잔 술에 낯이 복숭아꽃처럼 발깃해진 오매월이 빈잔에 술을 치며 생글거렸다.
《저… 레코드를 틀어놓을가요?》
《술에 노래라? 그거야말로 안성맞춤이지요.》
강준호가 쾌히 응하자 오매월은 자리에서 냉큼 일어섰다. 그는 책상앞으로 가만사뿐 걸어가더니 그 우에 놓인 전축의 뚜껑을 조심히 열고 방싯 입을 열었다.
《어느것을 걸가요? 베토벤? 챠이꼽쓰끼? 쇼팡? 아니면 우리 나라의 민요 〈양산도〉? 〈도라지〉?…》
먼저 쇼팡의 《관상곡》을 들어보자고 강준호가 말했다. 방안엔 《관상곡》의 은은한 선률이 흐르기 시작했다. 음악만은 세계어로써 번역할 필요가 없다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았다. 세사람은 음악의 세계에 잠겨들었다.
《4살때 피아노를 탔고 7살때 첫 기악작품을 발표한 쇼팡은 〈뽈스까의 모짜르트〉란 절찬을 받을만도 해. 확실히 그의 음악은 표현성이 풍부하단 말요.》
한잔 술이 들어가자 강준호는 말이 헤퍼졌다.
《부직장장동무, 난 동무네 집에 오면 꼭 내집에 온것 같은 감이 든단 말요. 마음이 푹 가라앉구 기분이 좋구…》
《저도 역시 국장동지와 마주앉으면… 무슨 얘긴가 자꾸만 하고싶어지구 울적하던 마음이 화창한 봄날씨마냥 개여집니다.》
홍학주가 때를 놓치지 않고 발라맞췄다.
《그게 바로 마음이 통한다는거요.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야 절대로 그럴수가 없지. 아주머니 내 말이 틀리오?》
《옳은 말씀이세요. 그런데 저… 술과 안주를 드시면서 얘기들을 나누세요.》
오매월의 말에 강준호와 홍학주는 술잔의 밑굽을 냈다.
《아니, 아주머니도 드시오. 술이란게 뭐 남자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게 아니니까.》
오매월이 수태를 머금고 술잔을 비우자 얼근해지기 시작한 강준호가 손벽을 쳤다.
《역시 아주머닌 현대녀성이요. 국제사회활동가인 클라라체뜨낀같다니까… 자, 이번엔 내가 한잔 부읍시다.》
강준호는 소회갓이며 잉어회를 한점씩 집어 입에 넣고나서 《나뽈레옹》을 홍학주와 오매월의 잔에 기울였다.
《고마워요. 하지만 전 더 못하겠어요.》
오매월은 얼굴이 더욱 발깃해져서 겸양했다.
《아니, 석잔이라는데 석잔쯤이야 해야지요. 안그렇소? 부직장장동무.》
강준호가 홍학주를 부추겼다.
《그렇구말구요.》
《아주머니, 그렇단 말요. 한데 아주머니의 음식솜씨가 어쩌면 이리도 훌륭하오? 정말이지 이거야… 민간에서 흔히 말하듯 둘이 먹다 셋이 죽어두 모를 지경이거든…》
《아이참, 국장동지두… 국장동지네 사모님이야…》
《우리 집사람? 그 사람은 아주머니의 발바닥에두 가지 못하오. 발바닥에두… 음식을 만드는걸 보면… 짜지 않으면 싱겁구, 싱겁지 않으면 짜구. 참 가관이지요.》
《호호… 국장동지두… 우스운 말씀을 곧잘 하세요. 아마도 댁에 가셔선 전국을 다 다녀봐도 〈우리 집사람이 그저 제일이야.〉라고 하시겠죠.》
《허허… 그렇기야 뭘.》
강준호는 쭉 잔을 비웠다.
공복에 마시는 술이라 세사람은 인차 취기가 올라 낯빛이 불깃불깃해졌다.
오매월은 강준호의 잔에 쪼르륵 소리를 내며 재치있게 술을 따르고나서 정겨운 눈길로 살짝 치떴다가 살며시 내리깔았다.
《국장동지! 우리 주인은 아마도… 직장장재목이 못되는 모양이죠? 내내 〈부〉자가 이름앞의 성처럼 붙어다니니 말예요.》
《여보, 무슨 말을… 난 실상 부직장장두 과남하오.》
홍학주가 오매월의 말을 본의아니게 은근히 탓하는데 강준호는 그 말엔 전혀 개의치 않고 안주를 집었다. 그리고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그런 말은 그만둡시다. 하지만 내 한마디 할건 이곳 조선소에 홍동무만 한 사람이 열명만 있어두 마음을 푹 놓겠다는거요.》
《그래요? 그런걸 전… 말만 들어도… 정말 고마워요.》
오매월이 진정 기쁜듯 몸둘바를 몰라하는데 홍학주가 《절 그렇게까지 믿어주시니… 정말 사는 보람, 일하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 새로 온 기사장같아서야 어디…》하고 슬쩍 말꼬리를 흐리마리 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달뜨게 하고 끌어당기는데는 그렇게 하는것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기때문이였다.
아닌게아니라 저도 모르게 홍학주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강준호는 웃음을 거두고 금테안경속의 가느다란 눈을 한껏 치떴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글쎄… 신임기사장이 합숙생활을 하길래 아래사람으로서의 도리가 그렇지 않아서 성의껏 음식을 준비해놓고 집에 초청을 했지요. 그런데 나같은건 거들떠보지도 않고 리억석부기사장과 함께 김석홍령감네 집으로 훌쩍 가버리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날 난 이 사람한테 진땀을 뺐습니다. 조선소에 나가서 부직장장일을 어떻게나 하길래 합숙생활하는 기사장을 데려오지 못했는가구 들이대는데… 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 밸이 난 김에 성의껏 마련한 음식을 그대로 개울창에 팽가치고 말았지요.》
《음. 그런 일이 있었댔구만. 부직장장의 성의를 그렇게도 몰라주다니…》
강준호는 혀를 찼다. 그러자 홍학주는 한술 더 떴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법이니 이런 때 속에 품은 말을 하지 않고 어느때를 또 바라겠는가.
《어디 그뿐인줄 아십니까? 기중기가 〈고장〉나서 몇분간 참모회의에 늦었는데 큰 일이라도 난듯이 과따쳤지요. 또 직장장들이 사정이 있어 부직장장들이 회의에 대신 올수도 있는건데…》
《그런데?》
《대신 참가한 부직장장들을 인민학교애들마냥 일쿼세우고 당장 가서 직장장을 보내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구내도로공사를 벌리는데 의견이 있으면 제기하라기에…》
강준호는 홍학주의 불만에 찬 얘기를 들을만해 있다가 지나친것 같아 듣기 좋게 말했다.
《부직장장동무, 최주식기사장이 큰 기업소일을 처음으로 맡아하니 그럴수도 있지 않소. 그런걸 가지구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마오.》
홍학주는 강준호의 어조와 낯빛에서 그가 지금 안팎이 다르게 말하고있음을 간파했다. 그래 그의 기분과 심선을 건드리는 말을 더 덧붙였다.
《국장동지, 물론 처음하는 일이니 그럴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국장동지의 하나밖에 없는 조카를 도장공으로 박아넣는거야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하지 않습니까. 국장동지의 체면을 봐서도 그렇게 해선 안되지요.》
《…》
술잔을 드는 강준호의 관자노리가 눈에 띄게 팔딱거린다.
두사람사이에 오가는 말과 그들의 기분상태를 저울질해보고있던 오매월은 홍학주의 하소연이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자 강준호의 빈잔에 술을 치고 홍학주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 모처럼 오신 국장동지에게… 저… 오늘저녁은 사업얘기를 그만하시고 술이나 어서 드세요.》
강준호는 술잔을 단숨에 또 쭉 들이켰다.
작은 체통 그 어디에 술이 들어가는지 아무리 마시여도 끄떡이 없다.
어지간히 취한 강준호는 홍학주내외앞에서 최주식을 두둔하려던 애초의 마음을 날려버리고 손을 홰홰 내저으며 흰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내가 술이나 한잔 마시자고 여기에 온줄 아오? 아래실정을 알기 위해서… 실정을 알아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요. 한잔 술이 안들어간 다음에야 누가 이렇게 흉금을 터놓고 솔직한 얘길 하겠소.
부직장장동무, 정말 고맙소. 기탄없이 속마음을 털어놔줘서. 그래서 내 오라는 집 많지만 여기에 왔소.》
쇼팡의 《광상곡》이 끝나자 방안은 한결 조용해졌다.
오매월이 자리에서 일어나 챠이꼽쓰끼의 곡이 든 레코드판을 끼워넣으며 강준호가 낌새채지 못하게 홍학주에게 눈을 끔쩍했다.
홍학주는 그 뜻을 알았다는듯 머리를 끄덕였다.
《국장동지, 버릇없이 이 말, 저 말 함부로 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사실 심중의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하겠습니까. 절 믿어주는 국장동지니 마음놓고 아뢴겁니다.》
그리고는 무엇을 잊었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내 정신 좀 보지. 밤일 나온 배관반에 30㎜ 철관을 내주라고 창고원에게 지시하는걸 깜빡 잊었댔군.
국장동지, 제 현장에 좀 갔다오겠습니다.》
《꼭 가야 하오?》
강준호가 흥심없이 물었다.
《나갔다 와야 합니다. 맡은 일이야 책임적으로 해야지요.》
홍학주는 자기야말로 가장 책임성이 있는 사람인듯 잘라말하고는 옷걸개에서 모자와 외투를 벗겨서 쓰고 입는다.
《그럼 나도 가겠소. 같이 가기오.》
《원, 별말씀을… 여보, 국장동지 섭섭하지 않게 잘 돌봐드리오. 그럼 전 좀 실례하겠습니다.》
홍학주가 문을 열고 나가자 오매월이 강준호의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국장동지, 어서 잔을 내세요.》
오매월의 목소리에는 더더욱 잔정이 뚝뚝 흐른다.
《자, 그럼 들기오.》
술이 거나해진 강준호는 맛좋은 안주에 세계명곡을 들으며 밉지 않은 녀자가 쳐주는 술을 마시려니 기분은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저, 이걸 좀 맛보세요.》
오매월은 소회갓이 담긴 꽃접시를 들어 강준호앞에 바투 가져다 놓는다.
《아아… 이러지 마오. 내 손두 여기 있는데 뭘.》
기분이 한껏 뜬 강준호는 체소한 몸을 앞뒤로 흔들며 껄껄거렸다.
《일 많이 하는 손은 이런 때 좀 쉬우세요.》
오매월은 호들갑스럽게 아양을 떨더니 한숨을 길게 내쉰다.
《전 국장동지를 만나뵈올적마다 사모님이 무척 부러워져요. 평생 국장동지 같은 큰 일군을 곁에서 모시겠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나요… 어서 잔을 내시고 저에게도 한잔 부어주세요. 오늘은 웬일인지 한껏 마시고 취하고싶군요.》
《마시기오. 나도… 오늘은… 량껏… 마시겠소. 좋은 술… 좋은 안주가… 상에 그득한데… 어째… 안… 안마시겠소.》
강준호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혀를 간신히 놀리며 허허 웃는다.
오매월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발깃하다못해 하얘진 얼굴로 종알거렸다.
《저… 제가… 옛시 한수를 읊을가요?》
《시를?… 아니… 시까지… 외우고있소?》
《저라고 왜 감정이 없겠나요. 저도 책을 즐겨읽는답니다.》
《그렇소?!》
강준호는 업혀가는 돼지눈처럼 게슴츠레해진 눈에 웃음을 담고 어서 시를 읊으라고 재촉했다.
오매월은 옷매무시를 바로잡고 무릎을 꿇고앉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옛 시를 읊기 시작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말아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제 쉬여간들 어떠리
《아… 아니… 우리 나라에… 그… 그런… 로맨틱한 시… 시도 있었는가. 난… 뿌… 뿌쉬낀이나 하이네, 괴… 괴테…》
《아이참, 국장동지는 외국음악가들과 시인들은 손금보듯 횡하게 아시면서도 우리 나라의 시인은 모르시네. 그게 개경 3대명물의 하나인 황진이란 기생이 쓴 시랍니다.》
독한 술에 잔뜩 취한 강준호는 오매월의 주절임을 꿈속에서마냥 아렴풋이 들으며 썩은 나무 넘어지듯 방바닥에 모로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