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월은 흘러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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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을 잊지 않으시고

 

흔히 사람들은 피줄로 이어지는 혈육들사이의 사랑을 세상에서 가장 깊고 뜨거우며 공고한것이라고 말하군 한다. 그래서 혈육의 사랑, 부모의 사랑, 형제간의 우애라는 아름다운 말들이 생겨났으며 이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무수히 전해져왔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초월하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열렬한 사랑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라와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한 길에서 한번 손을 잡은 사람은 그가 누구이건 굳게 믿어주시고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나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절세의 백두산위인들의 사랑과 은정이다.

해와 달이 바뀌여도 변치 않고 잊을수도 없는 이런 믿음과 사랑이 있어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애국의 삶을 참답게 빛내이고있다.

강량욱선생도 그 믿음과 사랑에 떠받들려 생의 마지막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참된 애국의 길을 변함없이 걸어올수 있었다.

주체47(1958)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생일을 맞는 강량욱선생을 축하해주기 위하여 그의 집을 찾아주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의 안해에게 그새 별일없었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다 잘 있습니다. 장군님께서 이런 추운 날씨에 우리 집에 찾아오셨으니 기쁘면서도 송구한 마음 금할수 없습니다.》

수령님을 또다시 집에 모신 기쁨에 겨워 강량욱선생의 안해는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모님의 이야기를 듣고보니 집안이 전에없이 환해진것 같다고, 창덕학교시절의 숙천아지미처럼 사모님은 새색시로 보인다고 하시며 환히 웃으시였다.

《숙천아지미》라고 허물없이 불러주시는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르는 그의 눈앞에는 해방직후부터 남편의 생일을 잊지 않고 자기 집을 찾아주시던 그이의 모습이 되새겨져왔다.

해방된 그해 겨울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일을 맞는 강량욱선생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그때 안해가 먼저 달려나와 수령님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께 20년만에 이렇게 마주앉고보니 창덕학교시절이 눈에 삼삼하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창덕학교시절의 일들을 한동안 돌이켜보시고나서 강량욱선생의 안해에게 《사모님, 나는 지금도 칠골에서 사모님이 해주시던 비지밥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때 그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20여년동안 타향살이를 하느라고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는데 오늘은 그 인사를 받아주십시오.》라고 하시였다.

안해는 그 시절 고향이 숙천이여서 숙천아지미라고 부르며 종종 집에 찾아오시던 그이께 생활이 어려웠던탓에 콩비지밥밖에 해드리지 못하던 일이 어제일처럼 떠올라 눈굽을 적시였다.

《가난때문에 쌀밥 한끼 변변히 대접 못하고 비지밥만 해드렸는데 감사하다고만 하시니 도리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비지밥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었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말씀드리고나서 창덕학교시절에 장군님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한 봉창을 이제야 해드리게 되였다고 기뻐하였다.

이날 그이께서는 창덕학교시절의 일들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이렇게 시작된 위대한 수령님의 생일축하방문의 길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강량욱선생은 후퇴하여 가있던 자강도 만포에서 생일을 맞게 되였다.

그러나 준엄한 전쟁시기였던지라 강량욱선생과 그의 안해는 이해의 생일을 그냥 지나보내기로 하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었다.

그날 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별도 없이 강량욱선생이 거처하고있는 숙소를 찾아주시였다.

최고사령부에서 이곳까지는 길이 멀고 험했다. 강량욱선생은 무슨 급한 일이 생긴것으로 짐작하고 자못 긴장하여 그이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수령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오늘이 선생님의 생일이여서 축하해드리려고 왔습니다.》라고 하시였다.

그는 놀라며 《장군님, 전쟁판에 무슨 생일입니까.》라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아무리 전쟁판이라고 해도 선생님의 생일상을 우리가 차려드려야 한다고 하시면서 지금은 전쟁이여서 이렇게 소박하게 생일을 쇠지만 오히려 이날이 잊혀지지 않을것이라고 하시였다.

엄혹한 전쟁인데다 시련에 찬 후퇴시기여서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안해마저 엄두를 내지 못하였던 생일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고 몸소 생일상까지 차려주신 그 고마움에 강량욱선생은 선뜻 수저를 들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를 보시며 어서 많이 들라고,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 다음에 선생님의 생일상을 차릴 때에는 오늘일이 옛말로 될것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던 그이께서 남편의 생일을 잊지 않고 또다시 찾아주시였으니 그때 안해의 심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자식들이 올리는 인사를 받으시고 둘째아들이 새해를 맞으면 11살이고 중학생이 된다는것을 아시고는 그의 이름을 지어주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에 대하여 뜨거운 추억의 말씀을 하시였다.

《이애의 이름을 지은것만 보아도 혁명가, 투사로서의 정숙동무가 안고 산 인생관이 무엇이였는가를 쉽게 알수 있습니다.

조선혁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 남달리 투철하였기에 가슴아픈 상처를 당한 이 집에 슬픔을 밀어내며 새 생명이 태동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즉석에서 우리는 이겼다고, 이제 태여날 애의 이름을 우리가 승리하였으니 앞으로도 영원히 승리할것이라는 뜻에서 영승이라고 짓자고 그리도 기뻐한 그의 한마디의 말에 타고난 혁명가인 정숙동무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잊을수 없는 추억에 잠기신듯 잠시 말씀이 없으시던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바라보시며 내 오늘 54번째로 생일을 맞는 선생님을 축하하려고 왔다시며 그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축원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나라일에 그처럼 바쁘신 그이께서 자기 생일을 잊지 않고 극진히 위해주시니 정말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시면서 《창덕학교시절의 옛 제자가 스승의 집을 찾는것은 인륜도덕이고 법도입니다.》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시였다.

수십년세월의 이끼속에 묻혀 이름조차 기억하기 어려운 아득한 유년시절의 스승에 대해 평생을 두고 례의를 지키시며 마음쓰시는 수령님 같으신 위인이 정녕 고금동서 그 어디에 있으랴.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례의에 감동되여 두눈을 슴벅이던 강량욱선생은 4년전 생일날에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주체43(1954)년 겨울 어느날이였다.

며칠전부터 생일을 맞는 남편을 조금이라고 기쁘게 해주려고 마음을 쓰던 안해는 이날 아침 자식들과 함께 생일상을 차려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상을 받은 강량욱선생은 기쁘고 즐거운 기분보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앞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소박하지만 색다르게 차린 생일상을 보니 위대한 수령님을 한자리에 모시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던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술 한잔 붓겠다는 안해를 만류하였다.

《그만두오. 아침에 무슨 술이요. 오늘같은 날 혹시 장군님께서 오실지 누가 알겠소.》

남편의 말에 안해는 손에 들었던 술병을 슬며시 도로 놓으며 맥빠진 푸념을 하였다.

《음력으로 쇠니 양력날자가 왔다갔다해서 같이 있는 사람들도 새겨두지 못하는 당신의 생일을 바쁘신 장군님께서 어떻게 아신단 말이우.》

《그래 해방된 그해에도 그렇고 전쟁이 일어난 해에도 장군님께서 오시지 않았댔소?》

남편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던 안해는 그럼 오늘 낮에 장군님께 청을 드려보는것이 어떻겠는가고 넌지시 말을 비치였다.

《주책머리없는 소리, 온 나라가 재더미만 남아 장군님께서 전쟁때 이상으로 바쁘신데. 그리구 나 같은 사람의 생일이 뭐라구 감히 장군님을 청한단 말이요.》

《그럼 생일상을 받구 그런 당치않은 생각은 왜 하시우?》

안해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강량욱선생의 생각에는 한가닥의 희망이 실려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해방직후에도 그렇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도 별다른 기별이 없이 집에 찾아오신적이 몇번 되였던것이다.

강량욱선생은 감히 수령님께 청을 드려볼 엄두는 못 내면서도 기다려지는 마음만은 어쩔수 없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녁시간이 되였지만 강량욱선생의 안해는 부엌에서 공연히 그릇소리를 내고 군불을 때면서도 저녁상을 차릴념을 하지 않았다. 부모들의 심정을 알아챈듯 밥먹자고 조르는 자식들도 없었다.

그 찰나였다.

밖에서 한겨울의 저녁공기를 깨치며 긴 경적소리가 울리더니 승용차가 집앞에 멎는것이였다.

《여보, 정말 장군님께서 오신게 아니우?》

강량욱선생이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 사이에 안해와 아이들은 먼저 밖으로 뛰여나가기부터 하였다.

강량욱선생도 황황히 그들의 뒤를 따라섰다.

차에서 내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땅거미가 내린 마당가에서 강량욱선생내외와 따뜻이 인사를 나누시였다.

온종일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있다고 몇번이나 자기를 질책하던 강량욱선생도 수령님을 정작 만나뵙고나니 그이께서 어떻게 오시였을가 하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의 이런 속내를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정하신 음성으로 늦어서 미안하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선생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강량욱선생은 바쁘신 시간을 내여 이렇게 찾아주시니 무어라고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진정을 담아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좀 일찌기 오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바쁘다보니 이렇게 되였다고 오히려 미안한 안색을 지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가족들을 둘러보시며 바깥날씨가 찬데 빨리 집으로 들어가자고, 선생이 집주인인데 앞에 서야 한다고 하시며 강량욱선생의 등을 떠밀어 앞세워주시였다.

방안으로 들어서신 수령님께서는 그의 안해가 드리는 방석을 밀어놓으시며 조선사람에게는 이런 장판구들이 더 좋다고 하시며 아주머니는 지금 무슨 일을 하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강량욱선생이 집사람은 녀맹사업을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동안 아주머니가 많이 발전하였다고, 녀맹사업을 하는것이 참 좋은 일이라고 하시였다.

수령님의 말씀에 마음이 즐거워진 안해는 일을 하느라고 하는데 모르는것이 많아 애를 먹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해야 일을 더 잘하겠는지 방도를 가르쳐주셨으면 좋겠다는 청까지 드리였다.

그의 청을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크게 웃으시며 모르면 배워야 한다고, 《정치지식》을 비롯한 정치서적들을 보면 된다고, 거기에는 우리가 알고있어야 할 정치문제들이 다 들어있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을 자기 집에 모신 행복에 한껏 잠겨있던 안해는 거듭 보내는 강량욱선생의 눈길을 받고서야 그이께 저녁상을 차리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식구들이 아직 저녁식사전이라니 마침 잘되였다고 하시며 선생이 저녁생일상을 받는것을 보고나면 자신께서도 더없이 기쁘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상이 너무도 소박하여 옹색해하는 그들내외에게 오히려 상을 검소하게 차린것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며 주저하는 강량욱선생을 주인의 자리에 손수 앉혀주시고 그옆에 안해의 자리도 잡아주시였다.

가족들도 방으로 불러주신 수령님께서는 해마다 선생의 생일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일이 바빠서 오지 못하였는데 앞으로는 생일마다 찾아오겠다고 하시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선건설시기는 물론 조국해방전쟁시기와 전후복구건설시기에도 강량욱선생을 비롯하여 나이많은 일군들의 생일은 잊지 않고 꼭꼭 생일상을 차려주군 하시였다. 그리고 자신께서는 보통사람들도 다 쇠는 생일까지 극력 만류하시며 인민들과 꼭같이 잡곡밥을 잡수시면서도 일군들의 생활에서 자그마한 불편도 있을세라 언제나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특히 그이께서는 언제나 강량욱선생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시며 사람들앞에 내세워주시군 하시였다.

언제인가 그가 수령님께 이제는 자기를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온 나라 백성을 돌보시고 가르치시는 장군님이 선생이지 자기가 어떻게 선생이겠는가고 말씀드린적이 있었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웃으시면서 그러면 선생을 어떻게 불러야 하겠는가고 반문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최고인민회의 서기장이라는 직무도 있고 또 나이로 보나 자기는 장군님의 가까운 전우였던 김책선생과 같다고 하면서 지난 일은 어떻든 오늘 자기의 선생은 늘 모르는것을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장군님이시라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그의 두손을 잡으시고 누구에게나 어려서 글을 배워주고 이끌어준 선생이 있기마련인데 나에게라고 왜 선생이 없겠는가고,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자신께서는 강선생을 잊을수 없다고 말씀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고결한 도덕의리심에 대하여 강량욱선생이 이미전부터 모르는바 아니였다. 그렇기때문에 자기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그이의 숭고한 도덕의리에서 받는 감동이 남달리 컸던것이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5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강량욱선생이 그동안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하시며 그의 가슴에 몸소 훈장까지 달아주시였다.

4년전의 생일날에 있었던 일을 감동속에 돌이켜본 강량욱선생은 자기의 생일날을 잊지 않고 거의 해마다 찾아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이시야말로 인민을 스승으로 여기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음속에 애민의 정만을 꽉 채우고 계시는 절세의 위인이시라는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였다.

2

값높은 평가속에

 

강량욱선생은 근 40년간 절세의 위인의 품속에서 애국의 참된 삶을 마음껏 누리였다.

이 기간에는 새 조선의 기초를 다져나가던 민주건설의 시기도 있었고 조국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전쟁시기도 있었으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의 벅찬 년대들도 있었다.

이 나날에 오랜 투쟁속에서 단련된 혁명가도 아니고 더우기 나이도 적지 않았던 그가 힘에 부쳐 주저앉고싶을 때가 어찌 없었으랴.

그러나 그는 그 모든것을 이겨내고 애국의 한길을 곧바로 걸어왔다.

여기에 그 모든 비결을 전해주는 사랑의 이야기가 있다.

주체60(1971)년 4월 15일이였다.

만사람의 축복을 받으셔야 할 뜻깊은 이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강량욱선생내외를 저택으로 불러주시였다.

축하의 인사를 올리는 그들내외를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어서 편히 앉으라고 하시며 함께 있는 가족들의 안부부터 물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그들에게 외국에 나가 사업하는 아들이 건강하여 일을 잘하고있다는 소식도 알려주시면서 건강을 돌보면서 일을 보라고 다정히 이르시였다.

당시 강량욱선생은 체육부문 사업도 함께 보고있었는데 이 사업에 대하여 그리 자신을 가지지 못하고있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젊은 시절의 애국의 뜻을 굽히지 말고 활력에 넘쳐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나가기를 바라시는 절세의 위인의 그 사랑에 감복할뿐이였다.

하지만 역시 나이는 속일수 없는 법이였다.

마음은 아직도 가슴속에서 불을 달고있는데 행동은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수령님, 체육사업은 이젠 나이가 있어서인지 욕망뿐입니다.

제 소견에는 체육을 지도해본 경험도 많고 저보다 젊은 사람에게 맡기면 어떻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시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가고, 우리 간부들가운데 선생님만큼 체육에 조예가 있고 능력있는 간부가 어디 있는가고 하시며 체육사업을 선생님이 그대로 맡아보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 나도 힘껏 돕겠으니 우리의 체육을 한번 본때있게 추켜세워보자고 말씀하시였다.

사람들은 흔히 비범한 안목으로 온 우주를 내다보시며 통이 큰 용단과 결단을 내리시는데 위대한 정치가로서의 그이의 특징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때로는 이렇듯 생활의 세부까지 깊은 사려속에 투시해보시며 힘을 주고 용기를 안겨주시는 바로 여기에도 그이의 위인적특징이 있다.

비록 육체는 늙어도 애국의 정신만은 젊은 시절에 살기를 바라시는 그이의 은정이 다시금 가슴에 알알하게 닿아와 강량욱선생은 온몸에 힘이 용솟음치는것을 느꼈다.

하여 자기도 모르게 옛날 어느 시인이 신동으로 소문났던 어린시절에 지었다는 시 한수를 마음속으로 읊었다고 한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 어이 늙다 하리

 

그날 경기장에서는 오후에 축구경기가 조직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이많은 강량욱선생이 힘들어할것 같으시여 오후에 조직한 축구경기에 나가보겠는가고 하시면서 집에서 휴식하는것이 어떻겠는가고 그의 의향을 물으시였다.

그러자 강량욱선생은 활력에 넘친 모습으로 내가 맡은 사업인데 나가보겠다고, 경기를 관람하는것도 휴식이니 너무 걱정마시라고 하면서 경기들을 자주 보아야 체육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궁리도 더 잘 떠오른다고 말씀드리였다.

애국주의는 형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행동이며 나라와 인민을 위해 자기 직무에 충실하는것이 곧 애국주의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강량욱선생은 이런 결심을 안고 나라의 인민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과 대외사업, 체육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자기의 정열을 다 바쳤다.

강량욱선생이 비록 나이가 많지만 활력에 넘쳐 사업하고 생활하기를 바라시여 빛을 주고 열을 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사랑과 은정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더해만 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만나실 때마다 첫째도 둘째도 건강이라고 하시며 어떤 날에는 그를 데리고 경치좋은 곳에 일부러 가시여 시간을 보내기도 하시고 또 그가 앓을 때에는 병치료를 위하여 다른 나라의 국가수반에게까지 전화를 거시여 의논하기도 하시였다.

주체62(1973)년 6월말 어느날이였다.

그때 머나먼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한 나라에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갔다가 며칠전에 돌아온 강량욱선생은 이날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시며 이번에 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와 대사급외교관계를 맺도록 한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이 대외사업을 잘한 결과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은 앞으로도 대외활동을 많이 벌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앞으로 외교활동을 많이 벌리자면 건강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가족들과 함께 휴양을 떠날데 대하여 권고하시였다.

그제서야 강량욱선생은 먼길갔던 자기를 휴식시키기 위하여 수령님께서 찾으셨다는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자기를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은정이 고마와 그가 휴양가는 문제를 고려해주실것을 말씀드리자 그이께서는 앞으로 대외활동을 많이 해야 하겠는데 건강하지 못하면 다른 나라에 다니기 곤난하다고, 빨리 떠날 준비를 갖추어야 하겠다고 하시였다.

(태양이 빛만을 발산한다면 어찌 꽃이 피고 열매가 무르익을수 있겠는가.

정녕 그이는 빛을 주시고 열을 주시여 고목에도 꽃을 피워주시는 위대한 태양이시다!)

늙으면 눈물이 헤퍼진다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더해만지는 절세의 위인의 그 은정에 그는 끝내 뜨거운것을 쏟고야말았다.

며칠후 강량욱선생은 가족들과 함께 어느 한 휴양지에 도착하였다.

그날 저녁이였다.

당시 그 지방을 현지지도하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또다시 만나주시고 저녁식사도 함께 나누신 후 숙소조건에서 불편한 점은 없는가고 물어주시였다.

아무런 불편도 없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생활에서 자그마한 불편이라도 있으면 제때에 이야기하라고, 호수에 물고기가 많은데 배를 한척 드리겠으니 래일부터 배를 타고 낚시질도 하라고 하시면서 휴양기간에 일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면서 즐겁게 보내야 휴양을 한 보람이 있다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그 이튿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과 약속하신대로 배와 함께 낚시도구들을 보내주시였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젊음에로 되돌아선듯 비길데 없이 벅찬 감격과 환희, 행복 등 인간정서의 절정을 난생처음 느껴보는듯 한 휴양생활을 통하여 그는 머나먼 외국출장길에 쌓였던 피로를 말끔히 가시고 젊은이처럼 정력에 넘쳐 다시 사업에 헌신할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을 방문한 아프리카의 어느 한 나라 대통령과 함께 만경대혁명학원 강의실을 돌아보시였는데 거기에는 인체해부에 대한 그림들도 걸려있었다.

그이께서는 그것들을 돌아보시다가 한 걸그림을 가리키시며 강량욱선생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라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선생님은 바로 여기에 탈이 났다고, 그러나 걱정할것은 없다고, 병이란 치료하면 고칠수 있다고, 한번 본격적으로 치료해보자고 하시였다.

걸그림을 보시면서도 한 일군의 병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외국의 대통령은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일이 있은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량욱선생에게 병이 나았다고 마음놓지 말고 계속 치료받도록 하라고, 일하는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일은 하지 않아도 일없다고, 나는 강선생이 일을 못하여도 좋으니 그저 오래 살아계시기만 한다면 그 이상 기쁠것이 없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이렇듯 뜨겁고도 진실한 절세의 위인의 믿음과 은정속에 그는 그후에도 활력에 넘쳐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자기의 열과 성을 다 바쳐갈수 있었다.

강량욱선생을 위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그의 생의 마지막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가 자기 생애의 마지막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날이였다.

그날 아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오시였다.

로환에는 백약이 무약이라고 그때 강량욱선생의 병세는 퍼그나 기울어져있었다.

강량욱선생이 입원해있는 기간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를 하시던 수령님께서 그의 병세가 걱정되시여 이날 아침 또다시 전화를 걸어오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며칠있으면 생일인데 몸이 호전되여야 가족들의 마음도 좀 가벼워질것이 아닌가고 하시고는 그의 병치료를 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하도록 하시였다.

그 사랑이 그대로 불사약이 되여 강량욱선생은 78번째 생일을 맞이할수 있었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크나큰 믿음과 사랑, 극진한 보살피심속에 해방직후부터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애국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온 강량욱선생은 림종의 시각 자기가 다하지 못한 충정을 합쳐 위인중의 위인이신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 의리를 다하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였다.

강량욱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몸소 령구가 안치된 곳에 나오시여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은 창덕학교시절 자신의 선생이였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나는 선생을 잊지 않고 지냈다고, 그는 창덕학교때 헤여져서 해방직후 다시 만난 때로부터 오늘까지 평범한 날에나 시련을 겪던 날에나 나를 만나 이야기를 듣기를 제일 좋아하였고 그 무슨 색다른 음식이 생겨도 나에게 대접하려고 마음을 썼다고, 그것이 아마 어제날 스승의 심정이였던것 같다고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강량욱부주석이 래년 초겨울쯤이면 만으로 팔순인데 참 아쉽게 되였다고 하시며 좀더 앉아있었더라면 생일상을 받아볼것을 그랬다고 하시였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량욱부주석은 창덕학교시절 위대한 수령님의 선생이였습니다, 그러나 부주석동지는 수령님을 제자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위대한 스승으로, 어버이로 믿고 따랐습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한생을 값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진정 강량욱선생은 절세의 백두산위인들의 품에 안기였기에 해방직후부터 생의 마지막시기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부위원장, 국가부주석 등의 중요한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한생을 추호의 드팀도 없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걸어올수 있었고 오늘도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애국렬사로 값높은 삶을 누리고있는것이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잊지 못해하시는 백두산위인들의 추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애국렬사릉이 일떠섰을 때 강량욱선생을 잊지 못하시여 그의 유해를 그곳에 안치하도록 해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추억해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9(1990)년 4월 20일 창덕학교를 찾으시여서도 그때 강량욱선생이 나의 담임선생이였는데 풍금을 타며 노래를 배워주던 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고, 강량욱선생은 나의 창덕학교시절의 잊을수 없는 스승이라고 또다시 그에 대한 말씀을 하시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2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난 주체97(2008)년 5월 어느날 2. 8비날론련합기업소의 기술개건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1960년대초의 어느 가을날 이 기업소를 찾으시여 비날론솜을 보아주시는 사진에서 50대의 강량욱선생의 모습을 찾아보시고 오래도록 눈길을 떼지 못하시다가 1960년대에 찍은 사진이니 일군들이 모두 젊었다고, 강량욱선생도 젊었다고 하시며 그를 추억해주시였다.

어제날의 그리스도교목사였던 강량욱선생의 한생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등의 화원을 현실로 펼쳐주시고 더욱 만발하게 가꿔가시는 백두산위인들을 믿고 따를 때 매 개인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애국의 마음도 참답게 꽃피울수 있으며 민족과 더불어 영생하게 된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주고있다.

3

사랑과 은정은 대를 이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세월의 눈비속에 산천은 변하기마련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산천이 몰라보게 달라진대도 변하지 않는것이 있으니 그것은 애국의 길에서 믿음을 준 사람이라면 그 후대들의 삶까지 책임지고 그 길에서 빛내여주시는 절세의 백두산위인들의 무한한 은정의 세계이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변함이 없고 혈연의 관계보다 깊고 뜨거운 이러한 인간사랑의 미덕은 강량욱선생의 후대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있다.

이 땅에서 사회주의건설이 한창 벌어지고있던 1950년대말 강량욱선생의 가정에서는 아들이 결혼식을 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되였다.

예로부터 결혼식은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큰 인륜대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해방직후 반동들에 의하여 자식들을 무참히 빼앗긴 강량욱선생의 안해에게 있어서 그 기쁨과 행복은 남다른것이였다. 그래서 먼저 간 자식들의 몫까지 합쳐 아들과 며느리가 좋은 세상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결혼식날 합근박까지 내놓았다고 한다.

옛날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시집장가를 보낼 자식들이 있는 부모들은 따뜻한 볕이 쪼이는 봄날 돌각담밑 깨끗한 땅에 애박씨를 심었다. 가을에 애박덩굴이 돌각담을 뒤덮을 때 애박을 정히 따서 집안에 간수해두고있다가 결혼식날에 그것을 둘로 쪼개여 한쪽(수박 즉 신랑박)에는 청실을 달고 다른쪽(암박 즉 신부박)에는 홍실을 달았다. 그것을 합근박이라고 하였다.

결혼식날 이 사랑의 박에 술을 담아 신랑신부가 동시에 마시는것은 인생반려의 변심없는 사랑을 약조하는 고상하고 웅심깊은 례식이였다.

결혼식이 있은 때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량욱선생의 가정은 또다시 크나큰 경사에 접하게 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새 가정을 축하해주시려고 그의 가족모두를 댁으로 초청하여주시였던것이다.

몸소 마당에까지 나오시여 강량욱선생의 일가를 기다리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도착하자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그간 건강하였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이 그이께서 귀중한 시간을 내여 저택으로 불러주신데 대하여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를 바라보시며 선생이 며느리를 맞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부터 한번 자리를 같이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는데 늦어서 안되였다고 오히려 량해를 구하시며 그를 비롯한 온 가족을 방으로 이끄시였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그이께서는 강량욱선생의 며느리에게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가고 따뜻이 물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앞에 처음으로 나서는 그였던지라 얼굴이 붉어져 인차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강량욱선생이 그를 대신하여 며느리가 평양음악대학(당시)을 졸업하고 그 대학 교원으로 배치받아 일하게 되였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거 참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음악과 예술을 발전시키려면 음악대학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키워내야 한다고, 음악대학은 음악가, 예술가들을 키워내는 원종장과 같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끌끌하게 자란 강량욱선생의 자식들을 대견하게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이제는 선생의 아들딸들이 다 커서 혁명초소에서 일을 잘하고있으며 또 며느리를 맞아 가족이 번성하게 되였으니 내 마음이 좀 놓입니다.》

잠시후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준비한것이 없지만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며느리를 맞은 선생의 가족들과 이렇게 자리를 같이하니 매우 기쁘다고, 선생과 부인의 건강을 위하여,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하여 모두 축배를 들자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의 건강을 축원하여 먼저 축배를 올릴 대신 인사부터 받았다는 생각에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몰라하였다. 그래서 그는 늦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위대한 수령님의 건강을 축원하여 축배를 들겠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수령님께서는 감사하다고 하시며 모두 사양하지 말고 많이 들라고 거듭 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다고, 우리가 조국에 돌아와서 이애들을 처음 만나던 일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가정을 뭇게 되였다고 하시며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15년이 되여오니 사람도 변하였고 산천도 변하였다고 감회깊으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해방후 지나온 나날들을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애국자》, 《지도자》로 자처하던 해방직후의 그 어려운 환경속에서 우리 인민은 제반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일떠세웠으며 조국해방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냈다. 그리고 전후 재더미밖에 남은것이 없었던 이 땅우에 우리 인민은 허리띠를 졸라매가며 복구건설의 첫삽을 박았으며 오늘은 살기 좋은 인민의 락원을 일떠세우기 위하여 사회주의건설의 힘찬 투쟁을 벌리고있다.

후대들에게 준엄하고도 영광에 찬 지난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주시려는 그이의 숭고한 의도가 어려있는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강량욱선생의 내외는 뜨거운 눈길을 주고받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바라보시며 선생은 해방직후부터 오늘까지 우리를 도와 노력을 많이 하였다고 하시면서 앞으로 더욱 활약해주리라고 기대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그이께서는 좌중을 둘러보시며 지금 우리앞에는 할 일이 많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나라를 해방한지 15년이 가까와오는 지금까지 조국을 통일하지 못하였으며 조국의 인공적인 분렬로 하여 우리의 마음은 한시도 편안하지 않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를 이어 싸워서라도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는 지원의 사상을 내놓으시고 조선독립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우리 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 김형직선생님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우리는 아직은 아버님의 뜻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조국의 절반땅을 미제에게 짓밟히고있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것은 한시도 미룰수 없는 민족최대의 과업이며 우리의 당면목표이라고,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안해에게도 따뜻한 은정의 말씀을 건네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를 바라보시며 지금도 평양시녀맹에서 사업하는가고 물어주시였다.

언제인가 말씀드린 자기 말을 잊지 않으시고 물어주시는것이 너무도 고마와 그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그렇다고 대답을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안살림은 물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자기의 성실한 노력을 바쳐가고있는 그를 기쁘신 안색으로 바라보시며 수도의 녀성들을 사회주의건설에 동원하기 위한 사업을 잘하여야 하겠다는 믿음의 말씀을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헤여지기 아쉬워하는 강량욱선생의 가족들의 심정을 헤아리시여 그들과 함께 새로 나온 조선예술영화까지 보시며 가정의 행복을 축복해주시였다.

그로부터 1년후 강량욱선생의 집을 또다시 찾아주시고 자식들이 이제 시집장가가서 아들딸들을 낳게 되면 식구가 늘어 방이 좁겠는데 살림집을 2층으로 번듯하게 새로 짓자고, 내 언제부터 생각하고있었는데 집을 2층으로 짓고 칸수도 늘구자고 하시며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헤아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자식들도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자기들의 재능을 다 바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희망대로 교단에 서서 예술인후비들을 키워내는 사업에 자기의 정열을 다 바치던 강량욱선생의 며느리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게 되였다.

그를 만나주시고 대학사업에 대하여 료해하시던 수령님께서는 문득 학교에 피아노가 몇대 있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대학에 있는 피아노대수를 말씀올리자 그이께서는 음악대학에 대형피아노를 보내려고 하는데 피아노선생이 마음에 드는것을 선택하라고 하시면서 그를 피아노앞으로 이끄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에게 피아노를 연주해보도록 하시였다.

그는 피아노앞에 마주앉아 곧 연주를 시작하였다.

방안에는 은은하면서도 정서적인 선률이 울려퍼지기 시작하였다.

잠시후 그의 연주가 끝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피아노연주를 아주 잘한다고, 기술이 높다고 치하하시고나서 앞에 놓여있는 두대의 피아노를 가리키시며 어느것이 마음에 드는가고 물으시였다.

《둘 다 좋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올리자 그이께서는 한 일군에게 피아노선생이 마음에 들어하는것을 대학에 보내주라고 이르시였다.

사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음악대학에 피아노를 그냥 보내주실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연주해보도록 하신것은 그리스도교 교직자의 자손으로서 교직자의 집에 시집온 그가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 자기의 재능을 다 바쳐 나가기를 바라시는 어버이의 다심한 심정에서였다.

이때뿐이 아니였다.

주체58(1969)년 10월 어느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아들내외를 몸소 저택으로 불러주시였다.

당시 강량욱선생의 아들은 동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가서 사업하게 되여있어 며칠후에는 그 나라로 떠나게 되여있었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이 방으로 들어서자 따뜻이 맞아주시며 언제 떠나는가고 물으시였다.

아들이 그에 대하여 대답을 올리자 수령님께서는 그 나라는 기후도 좋고 농사도 잘되는 나라라고 하시며 그 나라의 형편을 알려주시고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업과 생활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의논해주시였다. 그리고나서 부인이 피아노를 잘 치니 외국사람들이 좋아할것이라고, 해외에 나가서 일을 잘하고 돌아오라고 당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의 아들의 가슴속에는 그이의 뜻을 받들어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길에서 애국의 땀방울을 아낌없이 바쳐갈 신념이 더욱 굳게 자리잡혀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그가 부모들의 뒤를 이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 조국통일을 위한 애국의 한길을 곧바로 걸어나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날로 높아가는 겨레의 통일열망을 안고 공화국을 찾아온 남조선그리스도교교회협의회 총무를 비롯하여 남조선과 해외동포들은 물론 외국의 여러 대표단들을 만나시는 뜻깊은 좌석들에 강량욱선생의 아들을 불러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81(1992)년 8월 20일 미국전국그리스도교교회협의회대표단을 접견하시여서도 온 민족이 사상과 리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대단결을 이룩하여 조국을 통일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강량욱선생에 대하여 이런 뜻깊은 말씀을 주시였다.

《강량욱선생도 기독교목사이지만 해방직후부터 우리 당의 평화적조국통일방침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시고는 그 자리에 참석하였던 강량욱선생의 아들에 대하여 대표단성원들에게 소개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강량욱선생과 그의 자식들에게 안겨주시던 사랑과 은정 그대로 강량욱선생의 자손들이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과 통일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나가도록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아들이 생일을 맞을 때마다 생일상을 보내주시였을뿐아니라 사업에서 자그마한 성과를 거둘 때마다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몇해전 그의 안해가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시였을 때에는 그가 한생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재능있는 예술인들을 많이 키워낸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의 장례를 잘 치르어주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절세의 위인들께서 강량욱선생의 집안에 돌려주시던 사랑과 은정은 오늘날 또 한분의 절세의 백두산위인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에 의하여 변함없이 이어지고있다.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너무도 갑자기 서거하신것으로 하여 온 나라 강산이 아직 비분에 잠겨있던 때에 강량욱선생의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애석해하시며 장례식을 잘해주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여 아버지와 나란히 조국통일상수상자, 애국렬사의 영생하는 삶을 누리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불철주야로 이어가시는 선군령도의 길에서도 그의 후대들에게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할아버지, 아버지들처럼 나라와 민족의 부강발전과 조국통일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길에서 순결한 량심과 의리를 다하도록 따뜻이 보살펴주고계신다.

하기에 강씨일가의 자손들과 일가친척들은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있다.

《우리모두를 한품에 안아 키워주고 애국애족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절세의 백두산위인들의 믿음과 사랑에 대를 이어 애국의 한마음으로 보답하는것이 우리 일가의 의리이고 도리이다.》

민족의 찬란한 미래를 약속해주는 사랑과 믿음의 최고화신이신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을 높이 모시여 이 땅우에 인간사랑의 대화원은 더욱 활짝 꽃펴날것이고 우리 민족은 반드시 번영하는 통일강성대국을 일떠세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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