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애국의 길로 끝까지
조국을 떠난 신앙생활이란 없다
가렬처절하였던 조국해방전쟁에서 세계《최강》을 뽐내던 미국을 타승한 우리 인민은 복구건설은 아무리 어려워도 단숨에 해내리라는 신심과 투지에 넘쳐있었다.
그러나 정작 복구건설을 앞에 놓고보니 무엇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복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전쟁의 포성은 멎었으나 나라의 정세는 의연히 긴장하고 전후복구건설의 앞길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난관과 시련이 가로놓여있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북반부의 8 700여개소의 공장, 기업소들과 60여만호의 주택, 5 000여개소의 학교, 1 680여개소의 병원과 정휴양소, 260여개의 극장 및 영화관과 수천개소의 문화후생시설들이 파괴되였으며 37만 1 000여정보의 농경지가 못쓰게 되였다. 지어 력사유적유물과 례배당들까지 무참히 파괴되고 재더미로 변하였다.
세상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나라와 인민이 적지 않으나 공화국북반부에서처럼 모조리 파괴되고 모조리 불타버려 온 강토가 재더미로 된 이러한 참혹한 피해를 입은 사실은 일찌기 없었다.
하기에 미국은 조선은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떠서지 못할것이라고 떠벌이였으며 벗들까지도 참혹한 전쟁후과를 보고 과연 조선의 앞날이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였다.
인민들의 생활도 몹시 어려웠다. 먹을것도 입을것도 모든것이 다 부족하였다. 복구건설도 복구건설이였지만 당장 먹고 입고 살아가는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당이 있고 인민정권이 있으며 인민이 있고 령토가 있는 이상 전쟁피해가 아무리 크고 사정이 어렵다 하여도 능히 새 생활을 창조할수 있다는 확신을 지니시고 전체 인민을 그 투쟁에로 힘있게 불러일으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후복구건설을 현명하게 령도하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강량욱선생의 사업과 생활에 늘 관심을 돌리시고 각근히 보살펴주시며 그를 애국의 한길로 변함없이 이끌어주시였다.
이 땅에 전승의 축포가 터져오른 때로부터 20여일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찌는듯 한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강량욱선생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강량욱선생내외는 전쟁을 승리에로 이끄시느라 겹쌓인 피로도 푸실 사이없이 복구건설의 험난한 길을 이어가시는 가운데서도 자기들의 집을 찾아주시는 그이를 맞이하려 신발을 신는것도 잊고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내외가 올리는 인사를 반갑게 받으시고 방으로 들어서신 수령님께서는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시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 우리가 전쟁에서 이겼는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기관청사도 빨리 건설하였으면 좋겠다는 의향을 말씀드리였다.
아직은 인민을 먼저 생각하고 인민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는 투철한 관점과 립장이 확고히 서있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전쟁의 시련을 겪고도 사업의욕에 넘쳐있는 그의 열정이 마음에 드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선생이 말씀하신것처럼 기관청사도 건설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선후차가 있듯이 복구건설에서도 선후차가 있다고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다소 놀라운 눈길로 그이를 우러렀다.
(일을 하자면 청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 응당 청사건설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수령님께서는 그의 심정이 리해되시는듯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기관청사와 공공건물을 짓는것을 좀 미루더라도 전쟁에서 고통을 이겨낸 우리 인민들의 살림집부터 먼저 건설하여야 합니다.》
언제나 인민을 가슴에 안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제는 혹심하게 파괴된 평양시가 100년이 걸려도 다시 일떠서지 못한다고 떠벌였다고 하시면서 그래서 나는 우리 인민이 전쟁에서 미제를 타승하였는데 전후복구건설에서도 미국놈들에게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리라고 결심하였다고 선언하듯 결연히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제서야 모든것이 선명해지는것 같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어찌하여 전승열병식장에서 내리시는 길로 강남벽돌공장(당시)부터 찾으시였고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이와 함께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킬데 대한 독창적인 경제건설로선을 내놓으시였는지를…
그러나 그때까지 그는 안다는것과 체득한다는것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으며 체득한다는것과 실천한다는것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는데 대하여 알수 없었다.
주체43(1954)년 1월 24일이였다.
며칠전부터 약간씩 오한이 들며 몸을 떨던 강량욱선생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였다.
그는 이틀째나 사무실에 출근도 못하였다.
이날도 온밤 신음소리를 내며 앓다가 아침녘에 약을 먹고 땀을 낸 후 몸이 거뿐해지는것을 느끼며 그가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밖에 나갔던 강량욱선생의 안해가 방안을 바삐 달려들어오며 장군님께서 오셨다고 소리쳤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있던 강량욱선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벌써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지방을 성큼 넘어서시였다.
《안녕하십니까?》
강량욱선생은 너무도 뜻밖이여서 인사말도 변변히 올리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이끌어 자리에 앉히시며 선생이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안색에는 걱정의 빛이 력연하였다.
강량욱선생은 병문안을 오신 그이를 대하고보니 고마움보다 그이께 걱정을 끼쳐드렸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앞섰다.
《나라일에 다망하실 장군님께 이렇게 걱정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별말을 다한다고 가볍게 나무람하시며 물으시였다.
《그래 몸은 어떻습니까?》
《장군님, 약을 먹고 땀을 푹 냈더니 감기가 달아난것 같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마십시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아직도 충혈을 가시지 못한 눈을 보시고 감기를 소홀히 대하여서는 안된다고 다정히 말씀하시며 아직도 열이 있는것 같은데 몸조리를 잘하여야 하겠다고 당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이제는 전쟁에서 이겼기때문에 마음을 푹 놓고 얼마든지 치료를 받아도 일없다고 하시며 몸이 건강해야 일을 더 많이 할수 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인정미가 가슴에 닿아와 강량욱선생은 수건으로 눈가에 괴여오르는 눈물을 찍어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올해부터 미제에 의하여 파괴된 인민경제를 복구하고 령락된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한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수행에 착수하게 된다,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은 실로 방대하고 아름찬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업을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이 수행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래야 백년이 걸려도 조선이 다시 일떠설수 없다고 떠벌인 미제의 궤변을 짓부셔버리고 조선사람의 본때를 다시한번 보여줄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 그러기 위하여서는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와 같이 전체 인민이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우리는 지난날에도 그러했던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인민의 힘을 굳게 믿어야 한다, 우리 인민이 발동되면 못해낼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해서 례외로 될수 없다, 그러므로 전후 인민경제복구발전 3개년계획수행에로 전체 맹원들을 조직동원하기 위한 사업을 강화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뇌리를 치는 말씀이였다.
(그렇다. 내 나라가 있고서야 신앙생활이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나라잃은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조국이 없는 종교인에게 누가 신앙의 자유를 담보해주겠는가.)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이런 생각에 잠겨있던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문득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있었던 일이 돌이켜졌다.
…
주체40(1951)년도 다 저물어가던 12월 28일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각청사에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사업과 관련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강량욱선생을 만나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우리는 전쟁의 최후승리를 앞당기기 위하여 전선을 힘있게 지원하고 후방을 더욱 공고화하며 조국전선을 계속 강화하여 전체 인민을 조선로동당과 공화국정부의 두리에 굳게 묶어세워야 한다고, 모든것을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리스도교도련맹을 지도하는 자기가 사업에서 빈틈이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심각해진 모습을 일별하시며 강조하시듯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우리의 조국, 우리의 공화국을 떠난 신앙생활이란 있을수 없습니다.》
수령님의 이 말씀은 나라없던 그 세월이 강량욱선생의 가슴속에 남겨놓은 아픈 추억의 빗장을 열어제끼며 철의 진리로 새겨졌다.
해방전 이 나라 교인들은 일제가 강요하는 민족적천대와 멸시, 참기 어려운 가난과 고통을 가셔줄것을 그토록 념원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그들에게 차례지는것이란 식민지적학대와 고통뿐이였다.
강량욱선생도 그 세월 교인들속에 《황도정신》을 주입할것과 일본군의 승전을 비는 기도회를 가질것을 강요당하였다. 나중에는 교회의 종까지 저들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해 헌납할것을 강박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교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해주고 민주주의적인 행복한 새 생활을 안겨준것은 김일성장군님께서 수십여성상 항일혈전을 벌리시여 찾아주신 조국이였고 인민정권이였다.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다가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선생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종교인들은 얼마나 가혹한 탄압을 받았는가, 미국의 식민지가 되여도 일제시기와 같이 종교인들도 미제의 야수적인 압박과 박해를 받는다는것을 알아야 한다고 절절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며 미국이 종교를 내세우는것은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기 위하여 제놈들에 대한 환상을 퍼뜨리려고 그러는것이라고, 종교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민들은 미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하시면서 지난 시기 일부 교인들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잘 참가하지 않고 지어 나라와 민족앞에 엄중한 죄를 지은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 아래일군들의 말만 듣고 사업하다보니 현실을 똑똑히 알지 못하고 전쟁승리에 지장을 준데 대하여 말씀올리였다.
사실 그때 많은 교인들은 미국이 저지른 야수적인 살인만행을 직접 목격하고 《하느님의 나라》로 자처하는 미국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피맺힌 원쑤이라는데 대하여 깨달은데로부터 신앙생활을 포기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교인들조차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일부 종교인들이 감행한 학살행위에 대하여 수치를 느끼고 전쟁승리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고 애써 노력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앞으로 련맹이 해야 할 사업에 대하여 의논하시면서 교인들속에서 애국주의교양과 반미교양을 강화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특히 반미교양에 힘을 넣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그러기 위하여 미국이 우리 나라에 종교를 침투시킨 목적을 똑똑히 인식시키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미국의 살인만행과 평화적인 주민들 지어는 례배당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범죄행위들을 사실적자료로 하여 미국의 침략적이며 반동적인 본질을 깊이 인식시킬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교인들이 전쟁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옳게 이끌어줄데 대하여서도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집무실을 나서기 전에 심중에서 고패치는 생각을 모아 그이께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장군님, 오늘 중요한 가르치심을 받았습니다. 나라없던 그 세월 우리 교인들이 언제 이처럼 곡진한 타이르심을 받아보았겠습니까.
앞으로 장군님의 의도를 받들어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
전쟁시기에 있었던 이 일을 돌이켜보던 강량욱선생은 수령님께 더는 교인들때문에 마음을 쓰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참관사업과 견학을 교직자들이 조국의 현실을 똑바로 알고 공화국정부시책의 정당성을 인식하도록 조직할데 대하여서도 일일이 일깨워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께서 자기의 생각을 틔워주시니 이젠 일욕심이 난다고 진정을 담아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왔는데 병세도 수그러들고 그리스도교도련맹사업에 대하여서도 신심을 가지는것을 보니 이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였다고 못내 기뻐하시였다.
조용히 방안에 들어와 수령님의 말씀을 듣고있던 강량욱선생의 안해는 황급히 일어서서 문설주를 잡으며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장군님, 집에 오셨다가 이렇게 그저 가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는 점심때가 멀지 않았는데 식사를 하고 떠나십시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고맙다고 하시며 강량욱선생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이르시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려는 그를 거듭 만류하시고 따라서는 안해에게 강량욱선생의 병구완을 잘해주어야 한다고 이르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밖에 나와 위대한 수령님께서 떠나가신 길을 바라보며 조국을 떠난 신앙생활이란 있을수 없다고 하신 그이의 말씀을 오래도록 외워보았다.
《나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1950년대 중엽에 들어서면서 나라안팎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긴장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은 세계를 《열핵전쟁》으로 위협하면서 반공소동을 미친듯이 벌리고있었다. 이에 겁을 먹은 현대수정주의자들은 반제투쟁을 포기하고 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는 길로 나아갔다.
게다가 미제의 사촉을 받은 리승만도당은 《북진》소동을 요란하게 벌리면서 새 전쟁도발책동에 열을 올리고있었다.
당시 공화국의 내부형편도 매우 어려웠다.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된 경제는 기본적으로 복구되였으나 전쟁의 상처는 곳곳에 남아있었고 인민들의 생활은 아직 펴이지 못하였다. 인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악전고투하며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고있었다.
바로 이처럼 어려운 시기 당과 국가의 요직에 숨어있던 일부 견실치 못한자들은 자기들의 더러운 정치적야욕을 실현해보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이미 해방직후부터 그자들의 행위에 대하여 간파하시고 여러 기회에 경고도 하시였으며 그들이 개준할 날이 올것을 바라시고 아량있게 포섭하여 당과 정부의 요직에도 등용하시였었다.
그러나 저들의 고질적인 악습을 버리지 않고있던 이자들은 전후의 어려운 시기에 음으로양으로 현대수정주의로선을 들고다니면서 혁명과 건설에 대한 수령의 유일적령도를 반대해나섰고 당의 로선과 정책을 악랄하게 공격해나섰다. 지어 미국과 결탁하여 당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음모까지 꾸미였다.
나라안팎의 정세가 그처럼 복잡하던 주체44(1955)년 12월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재더미를 털고 새로 일떠선 평양시내의 살림집으로 이사한 강량욱선생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새 집으로 이사한 그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집안팎을 세심히 돌아보신 수령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해하시였다.
이윽고 방안으로 들어오시여 자리를 잡으신 위대한 수령님께 강량욱선생은 이미전부터 생각해오던 상임위원회 실태에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책임적인 위치에 있던 일부 사람들과 그 추종자들은 저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더욱 로골적으로 책동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을 심중하게 들으시고 자신께서도 그자들이 나쁜 장난을 하고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지만 이번에 선생을 통하여 그 죄행을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 일부 사람들이 해방직후부터 오늘까지 당과 국가의 정책을 시비질하며 선생님을 모해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였지만 선생님은 일편단심 우리 당의 로선과 정책을 지지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자기를 모해하는 갖은 랑설이 돌아가고있는 속에서도 변함없이 믿어주시며 높이 평가해주시는 그이를 다함없는 흠모의 마음안고 우러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믿음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나는 선생님을 누구보다도 믿고 존경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의 그 말씀을 듣는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문득 1년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당과 국가의 요직에 있던 일부 견실치 못한자들은 저들의 더러운 정치적야욕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때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품들여 키워오신 일군들을 모해하여나섰었다.
해방후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속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사업에 헌신하고있던 강량욱선생도 이자들의 모해대상에서 례외로 되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도교목사라는것이 그들의 주요한 근거로 되였던것이다. 그자들은 우리 정권은 무신론자인 로동자, 농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정권인데 종교를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주의를 위해서 함께 일할수 있는가고 하면서 그를 시비해나섰다.
물론 강량욱선생에 대한 이자들의 시비는 이때가 처음이 아니였다.
이자들은 해방직후는 물론 조국해방전쟁시기에도 저들에게 추종하지 않는 그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은근히 압력을 가하였었다.
강량욱선생은 괴로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뒤에서 종교를 믿는 사람은 믿을수 없다고 시비질하는 소리가 그의 귀전에도 그대로 들려왔던것이다.
누구보다도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다고 자부해온 그였다. 하지만 자기의 그 진정을 토로할길 없어 모대기였다.
그는 《하느님》께서 건져주시기를 조용히 기다리는것이 좋은 일이라는 성경의 구절을 외우기도 해보면서 그 어떤 새로운 희망이 솟아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얻을수 없었다.
그때 그를 더욱 괴롭힌것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의 중책에 있으면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사업을 마음처럼 받들지 못하고있다는 자책감이였다.
사실 강량욱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불구름을 헤치며 최전연의 전사들을 찾아가실 때나 전후 파괴된 공장과 농촌을 찾아 험한 길에 오르실 때 두팔 벌려 그이의 앞길을 만류해나서고싶은 간절한 심정이면서도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그이께서 걸으실 길을 과연 누가 대신하여 걸을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주체43(1954)년 11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는 자기를 왜 찾으시는지 영문을 모른채 그이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모색을 보시고 대번에 그의 모든 심중을 헤아려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두팔을 벌리시고 마주 나오시여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려깊은 눈길로 그를 바라보시며 나쁜 놈들이 선생님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비질하였지만 내가 보증하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내가 전적으로 선생님을 보증하기때문에 그 누구도 선생님을 다치지 못합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말씀은 가슴속에 가라앉아 그리도 마음을 괴롭히던 그 모든 앙금들을 말끔히 가셔주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미 주체42(1953)년 12월 18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차전원회의를 비롯하여 여러 기회에 전후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하나로 굳게 묶어세워 복구건설을 위한 투쟁에 적극 조직동원하기 위하여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 밝혀주시였었다.
그후 절세의 위인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이 사업이 힘있게 벌어져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들은 인민경제복구건설을 위한 투쟁에 자기들의 애국의 구슬땀을 다 바쳤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듯 전후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하나로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방도들을 환히 밝혀주시고 그 투쟁을 현명하게 이끌어나가시는 속에서도 강량욱선생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이 돌고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를 만나주시여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믿음의 말씀을 주시면서 그를 애국의 한길로 변함없이 이끌어주시였다.
《나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정녕 그이의 이 말씀은 강량욱선생으로 하여금 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가도록 이끌어준 마음의 기둥으로 그의 심장속에 깊이 세워졌다.
강량욱선생이 이처럼 날이 갈수록 더욱 커만 가는 자신에 대한 절세의 위인의 믿음을 돌이켜보는데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행복한 그 시간은 빨리도 흘러갔다.
강량욱선생의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던 수령님께서는 전쟁전에 있던 피아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과 가족들은 그이의 다심하신 은정에 어려움도 잊고 피아노가 없어진 사연을 말씀드리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그의 가정에서는 피아노를 칠골에 소개시켜놓기로 하였다. 부피가 큰것이여서 후퇴하는데 지장이 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런데 평양에 기여들었던 미군이 그 피아노를 빼앗아가버리였다.
피아노를 생각하면 제일 속이 상해하는것은 강량욱선생의 딸이였다.
그때에도 그는 금시 눈물을 쏟을것 같이 울먹울먹해서 위대한 수령님곁에 서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 그보다 더 좋은 피아노를 마련하자고 하시면서 옆에 서있는 강량욱선생의 딸에게 피아노가 없어 섭섭하겠는데 조금 참으라고 살뜰하게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무엇인가 마음에 내려가지 않으시는듯 그를 바라보시며 이제 당장 피아노는 없지만 우리 집에 바이올린이 있는데 그것을 줄터이니 같이 가자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의 딸은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수령님을 따라나섰다.
세월은 류수같이 흘러 그 바이올린의 주인들은 여러번 바뀌여졌다.
그러나 그 바이올린소리는 오늘도 이 땅에 울려퍼지고있다.
그 소리는 자기에게 거듭되는 믿음을 안겨주시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서 영원히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강량욱선생의 다함없는 칭송의 메아리였고 그이를 따라 끝까지 애국의 한길을 변함없이 걸어갈 새 세대들의 드팀없는 신념의 발현이기도 하다.
다시금 새겨안은 진리
주체52(1963)년 12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서 들어오라고, 기다리던 참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이끄시였다. 그러시고 오늘은 우리 집에 온 손님으로 생각하고 들라고, 앉아서 음식을 들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시였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출장기간에 앓지는 않았는가고 하시며 얼마전 뽈스까에서 진행된 세계평화대회에 참가하였던 정형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1963년 11월 28일부터 뽈스까에서는 세계평화대회가 열리였는데 강량욱선생은 여기에 공화국대표단 단장의 자격으로 참가하였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 진행된 세계평화대회에서 미국군대가 침략을 중지할것과 남조선에서 모든 살인무기를 걷어가지고 즉시 물러갈것을 요구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활동을 광범히 전개해나갈것을 호소한 결의가 채택되도록 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으로부터 회의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신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회의에서 연설을 아주 잘하였다고, 미제의 침략적이고 기만적인 정체를 잘 폭로하였다고 하시였다.
그가 과분한 치하라고 조용히 말씀드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님이야 칠골 창덕학교때부터 론리가 있고 사리정연하여 학생들속에서 인기가 높지 않았는가고, 나는 산에서 싸울 때 창덕학교를 생각하면 늘 선생님이 떠오르군 하였다고 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거듭되는 치하의 말씀에 몸둘바를 몰라하던 강량욱선생은 회의에 참가하여 느낀 소감에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세계평화대회와 같은 국제무대에 처음 나서는 그가 아니였다. 하지만 매번 느끼게 되는것이 있었다.
그것은 매개 나라의 대외적권위는 곧 그 나라 수령의 권위라는것이였다.
인류자주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서 쌓으신 업적으로 보나 뛰여난 인품과 고매한 덕망으로 보나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명성과 권위가 있어 그때 벌써 공화국의 대외적권위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로부터 많은 나라들과 세계 진보적인사들이 공화국의 자주적평화통일방안을 적극 지지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나서 우리 나라의 통일은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사업이라고, 그러나 이번 평화대회가 보여주는것처럼 미제는 지금 세계 각국에서 고립배격당하고있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며칠전에 발표된 공화국 외무성대변인 성명을 실례로 드시였다.
유엔총회 제18차회의에서는 미국의 강요에 의하여 조선문제를 비법적으로 결정하였다.
공화국 외무성대변인은 조선문제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론의할것이 아니라 조선사람끼리 토의하여야 한다는 립장으로부터 조선문제에 관한 유엔총회 제18차회의결정을 무효로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던것이다.
강량욱선생은 오늘 남조선인민들과 정계인사들 및 사회활동가들에게 발송한 호소문을 보아도 조국통일을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립장이 잘 반영되였다고 흥분된 어조로 자기의 심정을 말씀드리였다.
그가 말한 호소문이란 1963년 1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공동련석회의에서 채택된 《남조선인민들과 정계인사들 및 사회활동가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조선으로부터 모든 외국군대를 물러가게 하고 남북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무력을 줄이는것은 조국통일로 나가는 길에서 중요한 첫걸음으로 된다고, 조국통일에 대한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이러한 립장은 론박할수 없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 나라와 우호적인 국가관계를 맺고있는 새로 독립한 나라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발전시켜나갈것이며 공동의 원쑤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서로 긴밀히 협조하고 조선문제의 평화적해결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라는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나라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그토록 마음쓰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뵈오면서 강량욱선생은 앞으로 그이의 높으신 뜻을 받들어 모든 대외활동을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하는데 지향시켜나가리라 마음다지였다.
강량욱선생은 수령의 권위이자 곧 해당 나라의 대외적권위라는 진리를 그후 진행한 여러 나라들에 대한 방문과정에 다시금 절감하게 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반대하며 자주와 독립, 새 사회건설을 위한 반제민족해방운동이 급속히 확대발전된것으로 하여 국제무대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독립국가로 되였으며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나라들이 제국주의기반에서 해방되였다.
1960년은 《아프리카의 해》로 불리울 정도로 한해에만도 무려 17개 나라가 독립국가로 되였으며 1961년까지 이 대륙에서는 29개의 나라들이 독립을 이룩하였다. 이것은 아프리카 전체 면적의 3분의 2와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였다.
민족해방의 불길은 미국이 《고요한 뒤동산》으로 부르던 라틴아메리카대륙에서도 세차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1960년대초에 이르러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 독립한 나라는 무려 50여개에 달하였다.
당시 이 나라들은 반제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 생활을 창조하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리면서 국제무대에서 사회주의나라들 특히는 투철한 반제자주적립장을 확고히 견지하고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맺을것을 희망하고있었다.
이로부터 공화국은 1960년대에 사회주의나라들과의 친선협조관계를 계속 강화하는 한편 새로 독립한 나라들, 신흥세력나라들과의 친선관계를 새로운 단계에로 확대발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나라들에 정부대표단 및 친선대표단들을 파견하였다.
그무렵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의 중책을 지니고있던 강량욱선생도 공화국의 대외적권위가 나날이 높아짐에 따라 자주 외국출장길에 오르게 되였다.
그가 최고인민회의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1964년 4월초부터 한달나마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였다.
당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대통령은 대표단을 환영하여 보고르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마련하였다.
인도네시아인민들로부터 《봉카르노》(형 카르노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불리우며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들리운 그는 1955년 4월 아시아, 아프리카나라들의 반둥회의를 발기하고 주최한것을 비롯하여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였지만 이미전부터 위대한 수령님을 열렬히 흠모하며 존경하여오고있었다.
연회가 한창 고조되였을 때였다.
강량욱선생은 대통령에게 조선인민과 인도네시아인민들간의 친선협조관계가 더욱 깊어진것을 축하하여 노래를 한곡 부르겠다고 하였다.
만장의 눈길을 받으며 일어선 그는 공화국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리해를 깊게 하기 위하여 노래 《내 나라》를 불렀다.
강량욱선생의 노래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였다. 그러자 령도자가 위대하니 나라도 위대하고 그분을 모시고있는 일군들도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고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수카르노대통령도 엄지손가락을 머리우로 높이 쳐들며 《김일성, 김일성》 하고 몇번이나 거듭 외웠다.
강량욱선생은 그러한 수카르노대통령의 모습에서 비록 언어와 피부색, 정견과 신앙은 달라도 절세의 위인을 흠모하는 진보적인류의 한결같은 마음을 읽을수 있었다.
절세의 위인에 대한 끝없는 흠모의 마음을 깊이 간직한 수카르노대통령이였기에 그해 11월초 국가대표단을 이끌고 공화국을 방문하여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올수 있었으리라.
인도네시아에서만이 아니였다.
강량욱선생은 캄보쟈와 스리랑카를 비롯하여 가는 곳마다에서 절세의 위인을 끝없이 흠모하는 사람들을 볼수 있었다. 그들은 연도에서나 모임장소에서 그를 비롯한 대표단성원들을 만나면 누구라 없이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김일성, 김일성》 하고 이구동성으로 수령님의 존함을 외웠다.
그럴 때마다 강량욱선생은 절세의 위인을 수령으로 모시고있는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슴뿌듯이 느끼군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표단이 조국으로 돌아온 후 강량욱선생을 만나주시고 앞으로 더 많은 나라들을 방문하여야 하겠는데 건강을 잘 돌봐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그는 절세의 위인의 당부를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대외활동을 더 정력적으로 벌려나갔다.
주체62(1973)년 5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이날도 강량욱선생을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어느 한 나라에서 대통령취임식이 있는데 그 나라에 우리 나라 대표단을 파견하는 문제를 토의하자고 찾았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며칠전에 그 나라 대표단이 우리 나라에 와서 2일간 체류하고 돌아갔는데 대표단 단장은 자신에게 자기 나라의 정치정세와 대통령취임식과 관련한 문제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 나라 대표단 단장은 이번에 자기 나라 대통령취임식에 우리 나라 대표단을 초청한다고 정식 제기하였다고, 그래서 나는 즉석에서 당신네 나라 대통령취임식에 우리 나라에서는 강량욱부주석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대표단을 보내겠다고 답변해주었다고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는 강량욱선생의 머리에는 며칠전 그 나라 집권당대표단이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고 흥분을 금치 못해하였다는 사실이 돌이켜졌다.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은 그 나라 대표단성원들은 그이의 비범한 위인상에 완전히 감동되였다.
그들은 일찌기 인디아의 유명한 시인 타고르가 노래한것처럼 20세기 조선이 아시아의 등불이 된다면 그이는 아시아의 등불, 아니 세계의 등불, 인류의 구세주가 아니신가고 하면서 이런 인민의 수령, 세계적인 위인을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 자기들은 먼저 자기 나라 인민들속에 수령님의 불멸의 업적과 공화국에 대한 소개선전을 널리 하여 공화국과의 친선관계를 발전시키겠다고 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나라에 가게 될 대표단의 사업에서 제기되는 모든 조건들을 원만히 보장해주도록 필요한 조치를 다 취해주시고도 나이가 많은 강량욱선생이 먼길을 떠나게 되는것이 걱정되시는듯 이번 로정이 멀고 초행길이기때문에 힘들수 있다고, 어려운 길인데 수고가 많겠다고 거듭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자기를 그토록 위해주시는 그 사랑에 목이 메여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기를 위해주시는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다 알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때로부터 이틀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해가 창문너머로 사라진지 얼마 안되는데 전화종소리가 고요한 방안의 정서를 흔들었다.
무심히 전화기를 들던 강량욱선생은 깜짝 놀랐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 걸어오신 전화였던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선생님의 건강이 어떻습니까?》
반가움과 그리움이 앞서는 마음을 다잡으며 일없다고 대답올리는 그의 눈앞에는 문득 잊지 못할 주체47(1958)년 10월의 가을날이 떠올랐다.
그날 그는 뜻밖에도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비범한 위인상이 빛발치는 그이의 모습을 뵈올 때마다 그리고 백두산시절부터 그이를 백두광명성으로 높이 받들어올린 항일투사들의 회고담을 들으면서 민족의 밝은 전도를 두고 격동된 심정을 금치 못해한 그였지만 그때의 흥분은 비길데 없는것이였다.
강량욱선생과 인사를 나누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를 수행하시며 체험한 사실들을 알려주시면서 수령님께서 교시하신것처럼 제 나라 혁명을 잘하려면 자기의것부터 잘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자신께서는 앞으로 김일성종합대학과 조국의 들끓는 현실에서 배우려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조선의 혁명가가 되려면 조선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이자 수령님의 뜻입니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나오신 위대한 수령님을 맞이하여 커다란 환희에 휩싸였던 강량욱선생이였다. 그런 그가 조선을 이끄실 또 한분의 백두산위인을 모시고 그이의 웅지를 새겨안게 된것은 한생에 다시 없을 행운중의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강량욱선생이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는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이젠 나이도 많은데 건강에 주의해야 하겠다고 따뜻이 이르시면서 대표단의 출발날자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사업이 다 되였는지 알아보려고 전화를 걸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기본적으로 준비되였다는 그의 대답을 들으시고 대표단의 준비사업에서 나서는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책을 세워주시고나서 《나는 선생님이 이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리라고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도 그 나라에 공화국대표부가 없는 조건을 고려하여 대표단의 사업을 원만히 보장하도록 구체적인 조치까지 취해주시였으며 그 나라와 공화국과의 시간상차이로 하여 갑자기 환경을 바꾸면 몸에 해로울수 있으므로 건강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고 당부하시였다.
령도자가 위대하니 나라와 민족의 대외적권위도 나날이 높아진다는 진리를 심장에 새겨안았기에 강량욱선생은 20여일동안 자기 사업을 성과적으로 끝마치고 돌아올수 있었으며 그후에도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절세의 위인들의 위대성과 존엄높은 우리 공화국의 위용을 널리 선전하는 전파자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할수 있었다.
평양에 온 교직자
강량욱선생은 지난날 걸어온 생활경위가 서로 다른 해외교포들이 마치 태양의 인력에 끌리는 저 하늘의 행성들처럼 공화국의 품을 찾아와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위인상에 감복하는것을 목격하면서 어버이수령님이시야말로 위대한 인간태양이시라는것을 온몸으로 절감하였다.
공화국의 권위가 날로 높아지자 지난날 이 땅을 떠나갔던 해외교포들속에서는 공화국을 방문하려는 열의가 높아갔다. 그러한 사람들가운데는 교직자들도 있었다.
1970년 가을 어느날 강량욱선생은 한 해외교포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게 되였다.
편지내용에 의하면 그는 해방전 평양에서 크지 않은 약방을 경영하던 사람의 아들이였다. 그의 아버지도 그리스도교인이였다.
그 해외교포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교직자가 된 사람이였다.
그도 나이가 점점 들다나니 자기가 태여난 고국이 더없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해를 넘기며 고민하다가 그리스도교목사출신의 강량욱선생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하였던것이다.
그는 편지에서 과연 강목사가 한피줄을 타고난 자기를 만나줄수 없겠는가고 하면서 만나주겠다면 그 장소는 어디로 정하겠는지, 3국이 아니면 혹시 바다에서 만날수 있겠는가 하고 자기의 간절하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그대로 적어보냈다.
오랜 세월 공화국에 대한 그릇된 선전만 들어온 그는 과연 공화국에서 자기와 같이 정견과 신앙이 다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는가에 대하여 회의심을 품고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과히 모를 사람도 아닌 그의 편지를 받은 강량욱선생의 생각은 깊어졌다.
그러던 10월 중순 어느날 그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만나뵙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해외교포가 보내온 편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해외교포들과의 사업에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밝혀주시였다.
해외교포문제는 약소국들에 대한 제국주의렬강들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후과로 생긴 력사적문제이다. 우리 나라의 해외교포문제도 바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40여년에 걸치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에 력사적근원을 두고있다.
물론 인생의 길이 서로 달라 해외로 흩어져간 사람들도 있겠지만 절대다수의 해외교포들은 일제의 조선강점과 가혹한 식민지략탈정책으로 말미암아 생존의 길이 막혀 조국을 떠나 해외로 간 사람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로부터 항일무장투쟁의 첫 시기부터 해외동포들의 민족적권리를 옹호하는것을 민족해방혁명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여기시고 그것을 조국광복회강령에 밝히시였으며 해방후에는 이 문제를 공화국정부의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우시였다.
공화국정부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방금 재더미를 털고 일어나 5개년계획수행에 들어서기 위하여 신들메를 조이고있던 1957년부터 해마다 재일동포들에게 많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었으며 조국으로 돌아오고싶어하는 그들의 소망대로 1959년부터 조국에로의 귀국의 배길도 열어주었다.
공화국정부는 재일동포들뿐아니라 나라의 분렬을 반대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세계 그 어디에서 사는 해외교포들이라도 공화국을 방문할수 있도록 하는 동포애적조치를 취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에게 지금 해외교포들속에서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있는데 대하여 언급하시고나서 미국, 카나다 등 여러 나라들에 가있는 교포들이 조국통일이 실현되지 못한것을 가슴아파하며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을 민족분렬의 장본인으로 보고있다고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날 강량욱선생에게 《조국통일은 전체 조선인민의 민족적숙원이기때문에 조선사람치고 관심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누구에게나 리해관계가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해외교포들이 요구한다면 조국에 와서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을 직접 보게 하는것도 좋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방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해외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교포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선생님은 우리 나라 종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그들과의 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조국을 사랑하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디에서 살건, 지난날의 경력이 어떠하건 그 모든것을 불문에 붙이고 너그럽게 품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도량과 포옹력, 한없는 은정을 글줄에 담아 그 해외교포에게 편지를 썼다.
… 제 나라, 제땅을 두고 무엇때문에 남의 나라 땅에서 만나겠는가. 그리고 무슨 죄를 졌다고 숨어서 쫓겨다니는 백성처럼 바다우에서 상봉하겠는가.
어서 자기가 나서 태를 묻은 땅, 선조의 무덤이 있는 제 나라, 제 집으로 오라. 온 나라, 온 민족이 피줄을 함께 나눈 그대를 두팔 벌려 기다리고있다. …
편지를 받은 그 해외교포는 곧 평양으로 날아와 수십년만에 늙은 어머니와 가족, 친척들을 감격속에 만나보았으며 공화국의 여러곳도 다녀보았다.
어디를 가보아도 공화국의 모습은 그가 서방에서 듣던바와는 너무도 판이하였다.
이국에서 듣던바가 있어서 의혹이 앞서는가 하면 현실은 너무도 달라서 놀라움이 뒤따르고 이어서 저절로 경탄이 따라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강량욱선생을 만난 기회에 이번에 와서 공화국의 위력과 발전모습에 참으로 감탄했다고 하면서 인민대중중심의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에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하였으며 이 땅에 세기적변혁과 기적을 이루어놓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평양을 찾아와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감복하여 머리를 숙인 교직자는 비단 그 해외교포만이 아니다.
1981년 6월 어느날이였다.
미국에 있는 조국통일촉진회 회장이며 이전 남조선 숭전대학교 총장인 79살의 김성락목사가 평양비행장에 내리였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취재기자들에게 자기의 도착소식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자기에게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으니 북에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돌아가고싶다는것이였다.
20세기 초엽 평양의 한 교회목사의 가정에서 태여난 김성락목사는 평양숭실중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류학까지 한 사람이였다. 그후 류학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와 교회목사로 있던 그는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교회연단에서 《내가 죽어서 다시 부활해가지고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겠다.》고 의분에 넘쳐 웨치고는 1936년에 다시 미국에 가서 종교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직후 그는 재미독립운동자의 한사람으로 서울에도 왔었다.
그는 미국종교계의 영향력있는 인물로서 미국의 정객들속에서도 잘 알려져있었으며 당시로서는 미국당국으로부터 년봉금을 받는 유일한 조선사람이였다.
그는 오래동안 미국에서 종교활동을 하는 과정에 공화국에 대한 심히 그릇된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세차게 굽이치는 조국통일운동의 조류에 실려 고향과 친척들이 있는 공화국을 방문하는 그 시각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공화국에 대한 의혹과 경계심이 없지 않았다.
그는 유서깊은 만경대와 봉화리를 비롯하여 조선혁명박물관과 조선중앙력사박물관, 금성뜨락또르공장과 미림갑문, 김일성종합대학 그리고 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 등 각지의 여러곳을 돌아보는 과정에 절세의 위인들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인민의 락원으로 일떠선 공화국의 현실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그럴수록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려고 했던 당초의 자기 생각이 잘못된것이였음을 깨닫게 되였다.
(내가 왜 이제야 북에 왔던가? 왜 내가 나의 평양도착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는것을 두려워했던가? …)
생각할수록 자신의 처사가 민망스러워난 김성락목사는 자기의 조국방문보도와 함께 각지를 참관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소감을 그대로 신문과 통신에 보도해줄것을 부탁하였다.
강량욱선생은 자기를 찾아온 김성락목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화국의 발전모습과 조국통일에 관한 공화국정부의 원칙적립장에 대하여, 더우기는 절세의 위인의 위인상에 대하여 깊이있게 이야기해주었다.
김성락목사는 그의 말을 긍정하면서 절세의 위인들께서 자기에 대하여 지난날을 묻지 않으시고 꿈에도 바랄수 없었던 행복을 베풀어주시는것을 생각할 때 참말로 그 고마움과 은혜로움을 무슨 말로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알수 없다고 하였다.
특히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자기를 만나주신것을 잊지 못해하였다.
머나먼 길을 찾아온 김성락목사를 따뜻한 동포애의 정으로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늘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게 된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시면서 평양을 오늘처럼 웅장화려한 도시로 건설한데 대하여서와 우리 나라에서 사대주의의 력사적근원과 그 해독성, 조국통일을 반드시 조선인민자체의 힘으로 실현할데 대한 문제, 북과 남이 련합하여 고려민주련방공화국을 창립하는 방법으로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할데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차근차근 말씀해주시였다.
(과시 거룩하신분이로구나!)
만나뵙자마자 인덕이 넘치는분이시라는 인상을 받은 목사는 자기를 애국지사로 불러주시며 민족의 중대사인 통일문제도 허심탄회하게 론의해주시는 그이의 넓으신 도량과 믿음에 가슴이 후더워났다.
이날 그를 위하여 오찬까지 마련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식사하기에 앞서 그에게 식전기도를 올려야 하지 않는가고 하시며 어서 기도를 드리라고 하시였다.
순간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렀다.
그러나 그이의 인자하신 모습에서 그것이 사실이라는것을 확인하였을 때 목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신론자인 주석님께서 종교인의 식전기도에까지 관심을 돌려주시다니? …)
식전기도를 올리도록 관심을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감동된 목사는 앞으로도 공화국이 계속 부흥되게 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기도를 올렸다.
그의 정신세계에서의 변화는 날로 더욱 깊어져 평양을 떠나던 날에는 비행장에서 스스로 기자회견을 가지고 출발성명까지 발표하였다.
그는 성명에서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과 조국방문과정에 느낀 소감에 대하여 이렇게 격찬하였다.
《민족도 강산도 그 민족, 그 강산이되 오늘과 같이 놀라운 현실을 국토우에 가꾸어놓게 된것은 위대한 령도자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김일성주석은 하늘이 내신 위인이십니다.
그분은 왜놈들이 말했듯이 신출귀몰하고 축지전해하는 술법을 가지셨나 봅니다. …
예로부터 령도자는 <지, 인, 용>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주석은 그것을 다 겸비하신 위인이십니다.
그 소탈하심과 겸허하심, 높으신 덕망, 선견지명을 주석의 접견을 받으며 확인했습니다. 그분의 인자하심과 넓으신 포옹력, 구수한 말앞에서 이 로목사는 황홀경에 잠겼습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국민은 주석의 현명한 령도를 찬양하였는데 주석은 모든 공로와 영예를 국민에게 돌리시였습니다.
그러니 령도자와 국민이 일체화되지 않을수 없습니다.
국민들이 주석을 따르고 받드는 참뜻을 잘 알았습니다.
조국이 빨리 발전할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인은 확신하는바입니다.
주석께서 이런 훌륭한 조국을 마련해주셨는데 이 조국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조국에서 다능다재하신 지도자선생을 주석의 후계자로 모신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
지금까지 미국에서 들은 북에 대한 선전은 모두 거짓이였습니다. 저는 여기 내 조국에 와서 내 눈으로 진실을 보았고 그것을 신념으로 간직하였습니다. 현실을 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발언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여생을 민족의 비원인 나라의 통일을 위해, 장래번영을 위해 미력이나마 바치려고 합니다.
… 분렬된 조국은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하신 고려민주련방공화국창립방안대로 통일되여야 하며 하루빨리 그 방안이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는것을 다시 확언합니다.》
그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공화국에 가서 보고 들은 모든것을 동포들에게 그대로 이야기하였고 미국잡지에도 글을 써내였다. 그가 쓴 글을 보고 많은 미국사람들과 동포들이 그에게 전화도 걸어오고 편지도 하며 그를 축하해주었다.
그는 자기의 말을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공화국에 가보라고 권고하군 하였다.
김성락목사는 그 다음해 부인과 함께 조국을 또다시 방문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였으며 생의 마지막까지 조국통일위업실현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쳤다.
많은 해외교포들과 교직자들이 이렇듯 평양을 찾아와 공화국의 현실과 조국통일을 위한 공화국정부의 원칙적립장을 더 잘 알게 되였으며 통일운동에 적극 떨쳐나서 조국통일을 위한 운동은 더욱더 전민족적인 거세찬 대하를 이루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