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산이 불타던 나날에
조국보위에 떨쳐나선 교인들
1950년 6월 25일은 례사로운 날이 아니였다.
이날 많은 사람들이 아직 단잠에 들어있던 이른새벽 미국은 리승만도당을 부추겨 불의에 38°선 전 지역에 걸쳐 공화국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침공을 개시하였다.
강량욱선생은 이날 아침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놀라움속에 들었다.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여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에서는 얼마전에 채택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호소문을 지지하는 통일기원례배를 가진데 이어 호소문에 밝혀져있는 평화적통일방책을 실현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앞에 나서는 과업들을 토의하기로 되여있었다.
강량욱선생은 공화국의 평화적인 통일방안들을 끝끝내 거부하고 침략전쟁을 일으킨 미국과 리승만도당에 대한 분노를 누를길 없었다.
사실 공화국정부는 어떻게 하나 전쟁을 방지하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해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안들을 여러차례 내놓으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였다.
공화국정부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통해 이미 1949년 6월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었다. 그러나 미국과 그 주구들이 이를 거부하고 전쟁도발책동에 계속 매여달리자 1950년 6월 7일 또다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통해 8.15해방 5돐을 계기로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적인 최고립법기관을 창설할데 대한 평화적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이어 6월 1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남조선《국회》를 단일한 전 조선립법기관으로 련합하는 방법으로 조국의 평화적통일을 실현할것을 내용으로 하는 《평화적조국통일추진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미국과 그 주구들의 새 전쟁도발책동으로 평화통일실현의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가고있던 엄혹한 정세하에서도 어떻게 하나 전쟁을 방지하고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방법으로 이룩하려는 공화국정부의 애국애족의 일념과 인내성있는 노력의 뚜렷한 증시였다.
그러나 미국은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이 모든 노력을 외면하고 저들의 대조선정책실현을 위해 끝내 리승만괴뢰도당을 사촉하여 침략전쟁을 일으켰던것이다.
이때부터 미국에 의하여 3년동안 강요된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참으로 헤아릴수 없이 큰 고통과 재난을 들씌웠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우리 인민은 수난자의 운명만을 강요당한것이 아니다. 전쟁을 통하여 우리 인민은 더욱 강해졌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미국을 타승하고 내리막길에 처넣은 영웅조선의 기개와 영예를 떨치였다.
강량욱선생의 경우만 놓고보아도 강산이 불타던 전화의 나날은 그의 한생에서 잊을수 없는 시절로 되였다.
이 나날에 그는 해방과 혁명의 열파속에 가난과 무지의 누데기를 벗어던지고 인간의 행복된 삶을 알게 된 인민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는 그 지향과 념원을 대포와 폭탄으로 짓밟아버리려고 한 미국에 대한 치솟는 증오와 침략전쟁에 정의의 해방전쟁으로 대답해나선 인민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특히 전설로만 들어오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천출명장의 풍모와 전화의 불길속에서 승리할 래일을 설계하시는 그이의 모습에서, 더우기는 그이의 숭고한 사랑과 은정의 세계를 직접 체험하면서 그이이시야말로 민족의 구세주이시라는것을 더욱 깊이 절감하였다.
준엄한 전화의 나날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그야말로 불면불휴의 로고를 바쳐 초인간적으로 사업하시였다. 매일마다, 아니 순간마다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이여서 그이께서는 분과 초를 쪼개가며 일하시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몸소 찾으시였다.
그날은 전쟁이 일어난지 닷새째 되는 날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가슴들먹이는 흥분을 금할수 없었다. 어려운 전시에도 자기들 종교인들을 잊지 않으시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려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기때문이였다.
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을 때였다.
수령님께서는 예나 다름없이 강량욱선생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다정히 자리를 권하시였다.
그러신 후 그이께서는 6월26일방송연설에서 지적한 내용을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송연설에서 전쟁승리를 위하여서는 전체 인민이 동원되여야 하며 전쟁에 모든 힘을 동원하는것은 전쟁승리의 중요한 담보라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에게 미국과 리승만매국역도의 무력침공을 격파하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에 전체 그리스도교인들도 한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크나큰 믿음과 고무가 담겨진 뜨거운 말씀이였다.
조국이 가장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겪고있을 때 그 승리를 위한 투쟁에 그리스도교인전체를 불러주는것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강량욱선생은 한없이 뜨거운 눈길로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에 전체 그리스도교인들을 동원시키기 위한 방도에 대하여서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먼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우리가 진행하는 전쟁의 정의적성격에 대하여 똑똑히 알려줌으로써 그들이 전쟁승리에 대한 신심을 굳게 가지고 전시생산과 후방을 강화하는 사업에 적극 참가하도록 하는것이였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비행기, 땅크기금헌납운동을 전개하며 인민군대에 대한 전인민적원호사업에 다같이 동원되도록 하여야 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사업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미국과 리승만도당의 무력침공을 격파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자유를 위한 정의의 전쟁에 전체 인민을 동원할데 대한 사상을 일관하게 강조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눈앞이 환해졌다.
예상치 않게 들이닥친 준엄한 시련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교도련맹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알게 되였다.
자기가 서야 할 위치와 역할을 깨달은 강량욱선생은 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로 교인들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련맹의 일군들속에 위대한 수령님의 방송연설과 말씀사상을 다시금 해설하는 한편 직접 교인들속에 들어가 그들이 공화국정권의 두리에 굳게 뭉쳐 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 적극 나서도록 하였다. 이렇게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이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 일떠서니 온 그리스도교인들이 떨쳐나섰다.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군술에 의하여 짧은 시일안에 남반부의 넓은 지역이 해방되였다는 승리의 소식은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 애국적열의를 한층 고조시켰다.
청년교인들은 자기들에게 진정한 삶과 행복을 찾아준 공화국을 지켜싸우기 위해 용약 전선으로 탄원하였다. 후방에 남아있는 교인들도 전선지원사업과 인민군대후방가족 원호사업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특히 교인들은 그리스도교군기헌납위원회를 조직하고 군기기금헌납운동을 힘있게 벌렸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난지 한두달사이에만도 당시 화페로 약 2 000만원의 자금을 헌납하였는데 평안북도에서만도 300여만원을 헌납하는 애국적열의를 발휘하였다. 평양시와 평안남도에서는 비행기를 한대씩 헌납하여 전쟁승리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녀성교인들도 군기기금헌납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오래동안 소중히 간직하였던 귀중품들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이렇듯 교인들의 애국적인 소행에 의하여 군기헌납운동이 힘있게 벌어진 결과 짧은 시일안에 1억 1 000만원의 자금이 헌납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북조선그리스도교교직자대회를 진행하였으며 산하의 모든 교회들에서는 전쟁에서 공화국이 반드시 승리할것을 바라는 전승기원례배도 진행하였다.
각지에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전시생산보장을 위한 사업에도 헌신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공장과 농촌에서 전시생산과 후방을 강화하는 사업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폭격으로 파괴된 도로와 다리를 복구하는 일에도 량심적으로 성실히 참가하였다.
강량욱선생은 각지에서 들어오는 이러한 소식들을 접할 때마다 기쁨을 금할수 없어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군 하였다.
《달라졌어! 교인들모두가 애국자가 되였거던.》
사랑의 명령
강량욱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를 회상할 때마다 매일처럼 날아들어 무고한 주민들에게 폭탄을 마구 퍼붓던 미군비행기들의 만행에 대하여 격분에 차서 이야기하군 하였다. 그만큼 미군비행기들은 이 땅의 모든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악착스럽게 기승을 부리였다.
조선전쟁초기에 590여대의 비행기를 갖추고 이것만 동원되면 전쟁은 《72시간만에 결속》된다고 호언장담하였던 미국은 인민군대의 성난 파도와 같은 진격앞에서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게 되자 바빠맞아 비행대를 대대적으로 증강하였다.
미국은 극동공군의 비행기대수를 전쟁이 시작된지 한달후인 7월에는 890대로, 또 두달후인 9월에는 무려 1 200대로 늘이였고 매일 수많은 비행기들을 출동시켜 전선과 후방의 이르는 곳마다 맹폭격을 들이대였다.
평양, 남포, 해주, 원산, 함흥 등 공화국북반부의 평화로운 도시와 농촌들이 무차별적인 폭격을 받았다.
미군비행기들은 길가던 로인들과 부녀자들에게 기총사격을 가하고 어머니품에서 재롱을 피우던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의 머리우에 폭탄을 퍼붓는것을 오락으로 여기였다.
미국은 평화적인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머리우에 매일같이 수천t의 폭탄을 퍼붓는 이런 야만적인 행위에 대하여 자랑삼아 보도하면서 이것을 우리 민족에 대한 《선행》이라고 떠벌이였다.
이 땅의 어느 시인이 단죄했듯이 미국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참새마저 없어진 조선은 불바다로 변했고 이 땅의 모든 가정들은 피의 상처를 입었다.
1950년 8월 31일이였다.
이날도 한차례의 폭격을 겪고난 뒤 강량욱선생은 이번 폭격에 여러채의 례배당건물들이 또 파괴되고 지어 그 주변의 민가들에서 인명손실까지 입었다는 소식에 분격을 누를길 없어 방안을 거닐고있었다.
이때 방안의 고요를 깨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강량욱선생에게 걸어오시는 전화였다.
그가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전화기를 들자 그이의 다정하신 음성이 전류를 타고 들려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놈들의 폭격이 심한데 목사들가운데 다친 사람은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마음을 다잡으며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장군님, 다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폭격에 례배당이 많이 파괴되고있습니다. 폭격에 례배당이 파괴되는것을 보고 목사들이 미국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고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 미국놈들에 대한 환상이 적지 않게 깨졌다고 하시면서 지난 시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미국놈들의 교활하고 음흉한 간계에 넘어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놈들을 숭배하였다고, 때문에 적지 않은 그리스도교인들은 해방후 민주개혁의 혜택을 많이 받고도 미국놈들에게 미련을 가지고있었다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속에 남아있는 숭미사대주의사상을 없애기 위한 사업을 강화할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 방도에 대하여서도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놈들은 제놈들의 침략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지난날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입버릇처럼 외우던 《인도주의》의 가면마저 벗어던지고 조선인민을 전쟁의 참화속에 밀어넣었다는것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지게 하며 지어는 제놈들이 선도하여 지어놓은 례배당에까지 폭탄을 퍼붓고있다는 사실자료를 가지고 교양하여야 한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미국놈들의 귀축같은 폭격만행으로 해방후 우리 인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귀중한 재부들이 형체마저 알아볼수 없게 되였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있다는것을 알려주면서 미국놈들은 우리의 벗이 아니라 철천지원쑤라는것을 똑똑히 인식시켜줄데 대하여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리스도교인들속에 남아있는 숭미사상을 없애고 그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을 끝까지 걸어나가도록 보살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고결한 마음이 그대로 어려오는 말씀이였다.
잠시후 수령님께서는 목사, 장로들이 미국놈들의 폭격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례배당들이 대체로 둔덕진 곳에 있기때문에 미국놈들의 폭격피해를 더 받을수 있으므로 례배당근처에 방공호를 파서 대피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떨쳐나선 그리스도교도련맹일군들은 미국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지어 례배당까지 파괴된 상세한 자료를 가지고 교인들속에서 교양사업을 적극 벌려나갔다. 한편 강량욱선생은 례배당근처에 방공호를 파서 목사, 장로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사업도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일부 교인들의 머리속에 깊이 뿌리박힌 숭미사대주의사상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공습경보가 나면 방공호로 대피하는것이 아니라 례배당으로 모여들군 하였다. 미국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도이고 자선가, 인도주의자들이기때문에 교회를 폭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그 믿음, 그 환상은 비싼 대가를 치르었다.
미군비행사들이 수만발의 소이탄과 폭탄을 퍼부어 국경도시 신의주시를 순식간에 불사르고 무고한 사람들을 불태워죽인 사실은 《하느님의 나라》로 자처하는 미국의 본성을 적라라하게 보여주었다.
미군비행기들이 신의주를 폭격하던 날은 바로 일요일이였다. 이날 시내의 교회마다에는 교인들이 가득 모여 안식례배를 하고있었다.
이때 불의에 날아든 미군비행기들은 십자가를 단 례배당도 가림없이 폭탄과 소이탄을 마구 퍼부었을뿐아니라 불길속에서 하느님을 부르며 겨우 뛰쳐나오는 교인들에게 기총사격까지 가하였다.
그래서 제1, 제2교회에서만도 수백명의 교인들이 한꺼번에 처참하게 살해되였다. 당시 희생된 교인들속에는 하느님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 모습대로 불타죽은 장로와 그의 아들도 있었다고 한다.
미군비행기들의 맹폭격이 계속되던 10월초 어느날이였다.
이날 이른새벽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화로 강량욱선생을 찾으시였다.
그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자 수화기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울려나왔다.
수령님께서는 지금 적들의 비행기폭격이 심하니 목사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례배당건물은 대체로 높은 곳에 있는것만큼 적의 항공에 로출되기 쉽습니다.
미국놈들은 례배당도 가리지 않고 폭격하고있습니다.
그러니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순간 강량욱선생은 뜨거운 격정에 목이 메였다.
(자신께서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깊은 밤에도 쉬지 못하시면서도 잠자리에 든 종교인들의 안전을 위하여 이렇게 전화까지 걸어주시니 그 사랑, 그 은정의 깊이를 무엇으로 다 헤아릴수 있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강량욱선생은 목사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도록 하였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간 목사들은 강량욱선생의 손을 잡고 자기들의 심정을 이렇게 터치였다.
《지난날 그 누가 우리들의 신변에 대하여 이처럼 세심하게 관심을 돌리며 극진히 보살펴준 일이 있었습니까. 정녕 김일성장군님은 우리들의 생명을 지켜주시는 은인이십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해주시는 그이의 은정은 이때만이 아니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선형편이 달라진것과 관련하여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조직하기 위한 투쟁에 전체 인민과 인민군대를 조직동원하기 위하여 주체39(1950)년 10월 11일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라는 력사적인 방송연설을 하시였다.
새롭게 조성된 정세앞에서 강량욱선생은 다소 당황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시련을 많이 겪어보지 못했던 그로서는 정세가 급변할 때마다 무엇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대책과 방도가 잘 떠오르지 않았던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를 찾아 가르쳐주시고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방송연설이 있은지 며칠이 지나 강량욱선생이 사무실에서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한참이나 생각을 굴리고있을 때 전화종소리가 울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를 찾아 걸어오시는 전화였다.
강량욱선생은 어쩐지 가슴이 활랑거려 《쿵, 쿵-》하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귀전에 울려오는것 같았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송수화기에서 울려오는 수령님의 진중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은 저절로 안정되였다.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착잡한 심중을 헤아리신듯 부드러운 음성으로 목사들을 데리고 강계쪽으로 후퇴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날 강량욱선생에게 하신 말씀은 종교인들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의 말씀이였고 그들이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나가기를 바라시여 내리신 사랑의 명령이였다.
절세의 위인의 사랑과 믿음은 그대로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여 강량욱선생은 여러 목사들과 함께 온갖 시련과 난관을 이겨내면서 전원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후퇴할수 있었다.
목사들은 자기들의 생사에 대하여 그처럼 마음써주시며 따뜻이 보살펴주신 절세의 위인에 대한 고마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래서 그후부터 례배때마다 그이의 안녕과 그이의 령도밑에 공화국이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느님》께 기도하는것을 어길수 없는 일과로 여기였다.
사소한 불편도 있을세라
미국이 그처럼 요란스럽게 떠들며 벌려놓았던 《크리스마스총공세》가 인민군대의 총반공격에 의해 《이것은 미국륙군사상에서 가장 큰 실패》라는 아우성으로 바뀌고 일시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에서까지 완전히 쫓겨났던 1951년 1월 어느날이였다.
후퇴하여 가있던 곳을 떠나 평양을 향해 출발하였던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은 이날 평양교외의 어느 한 곳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가까이 모시고 일하는 일군들을 만나게 되였다.
낯선 골짜기입구에서 이미전부터 안면이 있던 그들을 만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마중나왔던 그들을 따라 이미 마련되여있는 집들에 들어선 순간 놀라움과 경탄으로 바뀌였다.
자기들이 들게 될 아늑한 집들에 깃든 사연이 그들의 가슴을 울렸던것이다.
평양으로 먼저 나온 최고사령부가 어느 한 곳에 자리를 잡은 이튿날이였다고 한다.
아침일찍 일군들을 부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보시던 지도에서 눈길을 떼시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위치를 현지에 나가보고 정해주어야 하겠다고, 지도상에 표시해놓은것을 보고는 마음을 놓을수 없다고 하시였다.
영문을 모르고 그이의 부르심을 받았던 일군들은 저으기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소개해갔다 돌아와 자리잡을 상임위원회의 위치로 말하면 그이께서 얼마전에 구체적으로 따져보고 정해주신 곳이였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자리잡을 위치때문에 마음쓰시는 그이께 일군들은 최고사령부부터 꾸리도록 해달라고 청을 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그들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시였다.
그러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이 대부분 나이많은 사람들인 조건에서 그들이 사소한 불편도 없이 하루빨리 사업을 시작하도록 하자면 자신께서 현지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결심을 굳히신 수령님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최고사령부도 위치를 잡고 사업에 착수한만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도 만포에서 나와 안전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일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현지에 나가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어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이르시였다.
일군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마당가에 나섰을 때는 아직 아침해도 솟아오르기 전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일행이 산기슭으로 난 구불구불한 눈길을 따라 고개를 넘고 여러 골짜기를 지났을 때였다.
어느 한 골짜기입구에 이르신 수령님께서는 잠시 차를 멈추게 하시고 차에서 내리시였다.
그이께서는 한동안 주위를 둘러보시다가 이 고장이 눈에 익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이 골짜기로 들어가자고, 내가 지도에서 보아둔 곳이 여기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를 모신 차가 사연깊은 골짜기로 얼마동안 들어가다가 골바닥끝이 보이는 산기슭경사면에 이르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차를 멈추게 하고 먼저 차에서 내리시여 골짜기지형을 한동안 살피시였다.
북쪽을 가로막으며 뻗은 산줄기에서 두줄기의 가지가 동서쪽을 막으며 뻗어내려 골짜기가 생겼는데 동쪽에 흘러내린 산줄기는 트일번 한 남쪽마저 막으며 휙 굽어들다보니 말그대로 사면팔방이 산줄기로 둘러막혀 마치 함지박속에 들어온 느낌을 주는 곳이였다.
둘러막힌 산줄기들은 남쪽을 내놓고는 다 경사가 비교적 급한데다가 참나무, 밤나무, 소나무들이 소소리높이 자라고있었다. 수림이 어찌나 빽빽이 들어찼는지 한여름철이면 록음방초에 하늘조차 보일상싶지 않았다.
이윽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곁에 선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골짜기가 묘하게 생겼다고, 이 골짜기는 경사가 심한 높은 산들로 둘러막혀있는데다가 나무가 무성하여 적비행기가 대상물을 발견하기 힘들게 되여있다고 만족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손을 드시고 앞뒤산턱을 번갈아 가리키시면서 설사 적비행기가 이 위치를 발견하고 폭격하자고 해도 저공비행하다 내리꽂혀야겠는데 그러다간 저 산중턱에 걸려 박산이 나겠다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때마침 동녘에서 솟아오른 태양은 골짜기에서 마지막그늘을 몰아내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상임위원회일군들이 만포에서 나와 이곳에 오면 마음에 들어할것이라고 하시면서 줄곧 만족하신 웃음을 지으시였다.
일군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절세의 위인의 숭고한 덕망이 후덥게 느껴져 그이를 우러렀다.
이윽고 수령님께서는 산밑에 듬성듬성 들어앉은 주민가옥들에 시선을 돌리시였다.
어지간히 덩지큰 해묵은 돌기와집들이였다.
전쟁전 행복했던 가정생활을 보여주듯 뜨락들에는 대추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와 같은 과일나무들이 지붕보다 키높이 자랐지만 문풍지가 찢어지고 싸리바자가 넘어진채로 있는것을 보아 주인들이 없는 빈집들이였다.
주인없는 빈집들을 둘러보시며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이 도착하면 저 빈집들에 당분간 숙소를 정하도록 해야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맨 웃쪽에 떨어져있는 집으로 걸음을 옮기시며 상임위원회는 간부들이 나이가 많고 남조선에서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를 믿고 들어온분들도 많은만큼 그들의 사업과 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좋은 집들을 골라 들게 하여야 한다고 다시금 이르시였다.
주민가옥들을 차례로 다 돌아보신 수령님께서는 저 집에는 누구를 들이고 저 집에서는 누가 살게 하면 좋겠다고 하시며 일일이 정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집들은 주인이 돌아오면 내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인차 청사건설을 해야 한다고, 만일 경우 적비행기공습을 받으면 인차 대피하여 일을 계속 할수 있도록 청사옆에 갱도도 파야 한다고 하시면서 몸소 그 위치까지 정해주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상임위원회 일군들의 집을 잘 지을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방으로 드나드는 문이나 부엌문을 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시였다.
이 모든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고난 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곳에 상임위원회일군들이 자리를 잡게 되면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하시였다고 하였다.
전쟁의 엄혹한 환경속에서도 자기들에게 더 좋은 사업조건과 생활조건을 마련해주기 위해 마음쓰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은정에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상임위원회일군들은 뜨거운것을 삼키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상임위원회가 자리를 잡은 정형을 구체적으로 보고받으시고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고 기뻐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자리를 잡아주시고 그해 3월 중순 또다시 상임위원회 일군들을 찾아오시여 생활에서 불편한 점들이 없는가를 알아보시고 사업방향도 주시였으며 그해 늦은봄부터는 자신께서 손수 심고 가꾸신 남새까지 여러차례 보내주시였다.
하늘에 포연이 자욱하게 떠있는 준엄한 전시였지만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상임위원회일군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보살피심과 은정속에 아무런 불편도 없이 사업에 전심할수 있었다.
1952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국제법도 란폭하게 위반하고 세균무기와 화학무기까지 사용하면서 대량적인 살륙만행을 감행하는 한편 도시와 농촌에 대한 야수적인 폭격을 그 어느때보다 강화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의 이러한 책동속에서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이 마음놓고 사업할수 있도록 은정어린 조치들을 취해주시였다.
주체41(1952)년 8월 5일이였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갔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상임위원회사업과 일군들의 생활형편에 대하여 따뜻이 물으시였다.
전시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자기들에게 더 좋은 사업조건과 생활환경을 마련해주시려고 그토록 마음쓰시는 그이께 강량욱선생은 장군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이 있어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일하며 생활하고있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정세가 매우 긴장하다고 하시면서 적들은 매일같이 우리의 도시와 농촌을 야수적으로 폭격하고있다고, 우리는 절대로 안일하게 지낼수 없으며 정세에 대처하여 긴장하고 동원된 태세를 견지하여야 한다고, 그러므로 상임위원회에서도 굴을 파고 일군들이 거기에서 사업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방공호를 어떻게 파야 하는가 하는데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때 상임위원회에는 비행기의 기총사격이나 피할수 있을 정도의 방공호가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실태를 료해하신 수령님께서는 방공호를 든든하게 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고나서 그안에 위원장과 부위원장, 서기장의 방을 따로 꾸림으로써 일할수 있는 사업조건을 보장할데 대하여서도 강조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방공호를 파는데 필요한 로력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돌리시며 군인들을 동원하여 빨리 완성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은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뜨거운 은정속에 그해 가을에 영화관람실까지 갖춘 방공호를 번듯하게 완성해놓고 전시조건에서도 마음놓고 자기 사업을 원만히 진행할수 있었다.
그들은 매번 정기적으로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모든 힘을 전쟁의 승리에로 조직동원하기 위한데로 주권활동을 지향시켜 활발히 벌려나갔으며 립법사업과 국가표창사업을 비롯하여 제기되는 사업들도 성과적으로 진행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의 어려운 속에서도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상임위원회일군들이 아무런 불편없이 사업을 원만히 진행해나가도록 온갖 조건을 다 마련해주시는 한편 그들이 건강한 몸으로 전쟁의 승리를 위한 투쟁에서 자기의 모든것을 다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거듭 베풀어주시였다.
더우기 그이께서는 조국해방전쟁의 어려운 시기였지만 새해를 맞을 때면 나이많은 상임위원회일군들과 조국전선의장단 성원들을 찾아오시여 식사도 함께 하시며 새해를 맞는 그들을 축하해주시였다.
그래서 강량욱선생은 해마다 양력설이 오면 절세의 위인을 모시고 소박한 연회상앞에 마주앉아 온갖 시름을 잊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전쟁시기의 그 잊을수 없는 날들을 커다란 흥분속에 회억하군 하였다.
주체41(1952)년의 새해를 맞으며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과 조국전선의장단 성원들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과 자리를 함께 하시여 식사도 같이하시며 그들이 유쾌한 시간을 보내도록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주체42(1953)년 1월 1일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조국전선의장단 성원들도 참가하는 신년연회를 마련하시고 새해를 맞이하는 연회참가자들과 인민군장병들, 전체 조선인민들을 축하하시였다.
인민이 올리는 축하의 인사를 받기 전에 먼저 인민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내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는 사람들의 눈가에는 감격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날 저녁 6시경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들과 조국전선의장단 성원들모두를 다시금 가까이 부르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며 새해를 축하하시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이렇듯 각별한 보살피심과 뜨거운 은정이 있었기에 강량욱선생을 비롯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은 전쟁의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인민정권을 더욱 굳건히 다져 전쟁승리에 이바지할수 있었다.
남북조선그리스도교도항의대회
1952년 11월 19일이였다.
이날 평양에서는 북과 남의 이름있는 그리스도교 교직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미국이 조선에서 전쟁의 불을 지른 후 감행한 야수적만행을 폭로규탄하는 남북조선그리스도교도항의대회가 엄숙히 진행되였다.
이날 대회연단에 오른 보고자와 토론자들은 미국이 저지른 야수적만행에 대하여 격분에 넘쳐 성토하였다.
특히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황해도 신천군(당시)을 비롯하여 미국이 일시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의 모든 지역에서 무고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인간도살행위들을 사실그대로 회의참가자들과 세계의 종교인들앞에 고발하였다. 그리고 미군비행기들이 평화적주민지대와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학교, 환자와 부상자들이 치료받는 병원은 물론 례배당까지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례배보던 교인들까지 학살한 자료들을 낱낱이 공개하였다.
대회에서는 북과 남의 60여명 그리스도교 교직자들이 서명한, 외래제국주의침략자들을 타승하기 위하여 영웅적으로 싸우고있는 우리 인민의 투쟁에 국제적인 지지와 련대성을 보내주고있는 전세계 그리스도교인들과 종교인들에게 사의를 표하고 미국의 야수적인 살인만행을 폭로규탄하는 목소리를 더욱 높여줄것을 열렬히 호소한 호소문이 채택되였다.
그리스도교 교직자들이 터친 분노의 함성, 이것은 미국을 《하느님의 나라》로 여기던 이 나라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났다는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피의 절규였다.
대회연단에서 미국의 만행을 절규하는 토론자들과 그들의 토론을 들으며 분노의 치를 떠는 참가자들을 바라보는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숭미사상에 사로잡혀있던 그리스도교인들을 환상에서 깨여나게 만든 미국의 죄행들이 되새겨졌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미국은 오래전부터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척후대로서 그리스도교의 간판을 든 선교사들을 우리 나라에 파견하여 각지에 례배당과 학교, 병원을 차려놓고 《하느님의 사도》처럼 행세하면서 조선사람들에게 숭미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해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미국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적지 않은 그리스도교 교직자들과 교인들이 숭미사상에 물젖어 미국을 《하느님의 나라》로 믿게 되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국해방전쟁을 겪는 과정에 미국의 야수성과 악랄성, 흡혈귀적만행을 직접 목격, 체험한 후부터 《문명하고 강대한 나라》, 《하느님의 복음을 받은 나라》라고 믿었던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게 되였다.
우리 민족에게 침략전쟁을 강요한 미국은 전쟁의 첫 시기부터 공화국북반부의 도시와 농촌마을은 물론 십자가가 걸려있는 례배당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구 폭격하였다.
전쟁전 공화국북반부에는 12만명의 그리스도교신자들과 1 400여개의 교회당이 있었다.
평양시에만도 기림리교회, 서문밖교회, 산정현교회, 창동교회, 련화동교회, 남문밖교회, 중앙교회, 남산현교회를 비롯하여 70여개의 교회당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평안북도에도 680여개의 교회당과 수많은 교회부속건물들이 있었다. 또한 황해남북도에 300여개, 함경남북도에 200여개, 자강도에 70여개, 강원도에 90여개의 교회당이 있었으며 신학교를 비롯한 교회관련 건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기간 미국의 야수적인 폭격으로 북반부의 도시와 마을에 있던 그 많은 교회당과 신학교, 교회관련건물들이 몽땅 재더미로 변하였다.
남조선도서 《한국기독교해방 10년사》의 저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 련합군의 폭격은 … 철저한 무차별폭격이였으므로 도시와 지방에 입재한 수천의 교회당과 신학교… 건물이 모두 재로 사라졌다.》
지어 미군비행기들은 안식날에도 교회당에 폭탄을 퍼부어 례배를 보던 그리스도교 교직자들과 신자들을 수십, 수백명씩 폭사시키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던 평안북도 신의주시 제1, 제2교회는 물론 의주읍교회와 룡천군 동상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교회들에서 안식날 살륙전쟁을 그만두고 이 땅에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던 그리스도교 교직자들과 신자들의 머리우에 미국은 폭탄을 마구 퍼부어 수많은 목사, 장로, 전도사, 집사들과 교인들을 학살하였다.
강량욱선생의 부인에게도 이 시기에 목격한 가슴아픈 추억이 있었다고 한다.
후퇴의 길에 올랐던 그는 어느 한 마을에 례배당이 서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그는 여러사람들과 함께 례배당에 들어가 남편과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도를 드리고있었다.
이때 갑자기 날아든 미군비행대가 아무런 군사적대상물도 없는 평화로운 이 마을에 마구 폭탄을 퍼붓고 기총사격을 가하였다. 폭격에 례배당이 무너지면서 그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였다고 한다.
요행 화를 면한 그는 방금전까지 례배를 주관하던 목사가 폭격에 두다리가 잘리운 상태에서 눈물을 흘리며 찬송가를 부르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였다.
목사가 부른 찬송가, 이것은 자기의 두다리를 앗아가고도 《하느님의 나라》로 자처하는 미국에 대한 저주였고 그가 흘린 눈물은 독실한 교인들에게까지 폭탄을 마구 퍼붓는 미국은 《천당》이 아닌 사탄의 제국이라는 때늦은 후회로부터 흘린 피눈물이였다.
강량욱선생의 부인은 그때의 광경을 잊을수 없어 그후 이런 내용으로 기도하군 하였다고 한다.
《나는 주님의 은총을 바라였지 미국의 폭탄세례를 바란것은 아니옵니다. 저 미국의 폭탄이 하느님이 주신 이 땅의 죄없는 수많은 생명들을 앗아가고있습니다. …
주님께서도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라고 가르치고계시지 않습니까.
미국의 폭탄이 더는 죄없는 생명들을 마구 해치지 못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미국은 무차별적인 폭격과 함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저들이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착스러운 방법으로 무고한 인민들과 애국적인 그리스도교 교직자, 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남조선에서 출판된 어느 한 도서에는 《이북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은 한국전쟁 3년간 미군이 유일하게 이북을 점령하였던 1950년 10월부터 12월 두달사이에 벌어진 학살만행들이다. 너무나 짧은 기간이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짧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루가 천년 같던 학살의 시간이 이북전역에 피의 강물이 흐르게 만들었던것이다.
미군은 … 일시적으로 이북을 점령하게 되자 무자비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선량한 민중들을 차마 눈뜨고는 볼수 없는 참혹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이북에 살고있는 민중은 모두다 <빨갱이>였으며 모조리 죽여야 했다. 피의 학살은 미군이 이북땅에서 쫓겨갈 때 더욱 참혹하였다.》(남조선도서 《움직이는것은 무엇이든 쏴라》 177페지)라고 씌여져있다.
미국이 일시적으로 강점하였던 공화국북반부의 전 지역에서 감행한 인간도살만행은 미국이야말로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서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현대판 식인종이며 포악한 살인마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신천땅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저들의 주구들로 《경찰대》, 《치안대》, 《학생무장대》와 같은 각종 테로단들을 조작하여 두달도 못되는 강점기간 군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되는 3만 5 000여명의 인민들을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신천에서만이 아니였다. 미국은 해방후 공화국정부의 시책을 지지하였다는 죄아닌 죄로 평안남도 룡강군 진지동교회 장로 김석훈,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교회 장로 김광한, 함경남도 정평군 무산교회 장로 한성도, 평안북도 운산군 립석교회 장로 강처인, 황해남도 안악군 봉산리교회 장로 김영섭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적그리스도교 교직자들과 교인들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
또한 평안남도그리스도교도련맹 위원장 윤재만목사가 교인들을 건국사업에 불러일으키는데 앞장섰다고 하여 그를 《빨갱이목사》라고 하면서 체포하여 갖은 고문을 다 하다가 학살한것을 비롯하여 강점기간 평양시에서 3 000여명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패주하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을 기관총으로 마구 쏴죽였는가 하면 원자탄을 떨군다고, 피난가지 않으면 빨갱이로 인정하고 처형하겠다고 위협하며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가다가 대동교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 붐빌 때 다리를 폭파시키고 비행대까지 동원하여 폭탄을 떨구고 기총사격을 가하여 4 0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때 학살당한 주민들속에도 적지 않은 교직자들과 그리스도교신자들도 있었다.
특히 조선사람의 이름으로 변신한 미국선교사들과 일부 친미적인 교직자들이 이러한 학살만행들을 직접 조종하여 사람들의 경악과 분노를 자아냈다.
이들은 《이제는 마음대로 믿을수 있는 세상이 되였다.》, 《믿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그리스도교인들을 기만하여 교회에 불러내고는 지난날 《사랑》과 《박애》에 대해 운운하던 입으로 애국자들을 체포학살할것을 강요하였다.
미국군대와 종교의 가면을 쓴 선교사들, 일부 친미적인 교직자들이 저지른 이러한 만행은 사람들에게 미국과 그를 추종한 사람들과는 한하늘밑에서 같이 살아갈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미국이 저지른 온갖 야수적인 만행들은 지난날 그들이 떠들던 《박애》와 《하느님의 사랑》, 《자비심》이 모두 거짓이였다는것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평안남도 대동군의 어느 한 마을에 한 목사가 살고있었는데 그는 전쟁전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앉아 공화국을 비방하면서 미국군대가 들어오기만 기다렸었다.
그러다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그는 제일먼저 미군을 마중하러 나갔었다. 그런데 미군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농민들의 닭을 마구 쏘아 잡아갔으며 녀성들을 희롱하였다. 나중에는 그 목사의 딸까지 끌어다 무참히 릉욕하였다.
이것을 본 목사는 미국이 지난날 그리스도교의 간판밑에 사람들을 속여왔다는것을 똑똑히 깨닫게 되였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공화국정권을 지지하여 전쟁의 승리를 위한 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결국 미국은 이 땅의 교인들이 저들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나게 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가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마도 양의 털을 깎는다고 하면서 가죽까지 벗긴다는 말이나 성서를 읽기 위해 교회당의 초불을 훔친다는 말은 미국의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듯싶다.
평화적주민들뿐아니라 애국적인 교직자들과 교인들에 대한 미국의 학살만행을 목격한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는 미국에 대한 환멸과 증오심이 높아진것은 물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륭성번영을 위해서는 외세를 배격하여야 하며 종교를 믿어도 조선사람의 정신을 가지고 믿어야 하겠다는 의식이 강해졌다.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에서는 교인들의 이러한 의식상태를 반영하여 온 세계에 미국이 조선에서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것과 동시에 교인들에게 미국의 정체를 다시금 똑똑히 알게 할뿐아니라 그들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애국사업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기 위하여 남조선그리스도교민주동맹과 공동으로 미국의 만행을 폭로규탄하는 항의대회를 열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정작 항의대회를 열자고보니 이 대회의 조직과 운영을 주도해야 할 강량욱선생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부족하였다.
그러던 주체41(1952)년 11월 9일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걸어오신 전화를 받게 되였다.
대회조직과 운영과 관련한 경험이 부족하여 마음속고충을 겪고있던 그는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과 한가지 의논할 문제가 있어서 찾았다고 하시면서 선생도 알고있는바와 같이 미제국주의자들은 정전담판의 막뒤에서 우리를 힘으로 누르기 위하여 못하는짓이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이 시각에도 놈들은 수백대의 비행기와 함선을 동원하여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과 포격을 감행하여 우리 강토를 페허로 만들고있다고, 이러한 만행을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해서 가만히 보고만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신중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의 말씀을 듣고 너무도 뒤늦게야 미국의 만행을 폭로규탄하는 항의대회를 준비한 자신의 실책을 뉘우쳤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인민적인 애국투쟁의 대오에서 뒤떨어질세라 그리스도교인들을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그이의 한량없는 도량에 저절로 머리가 숙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는 미제국주의자들의 기만성과 우리 강토를 페허로 만들고 무고한 인민들을 야수적으로 학살하는 파렴치한 만행을 세계면전에서 발가놓으며 아직도 숭미사상에 물젖어있는 일부 교인들을 각성시켜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고나서 이 전쟁에서 종교인들이 하여야 할바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였으며 새로운 사명감과 열의를 안고 대회준비를 실속있게 진행해나갔다.
이렇게 되여 항의대회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커다란 관심속에 성과적으로 진행될수 있었다.
항의대회에서 참가자전원의 련명으로 채택된 호소문은 전세계 진보적인민들과 종교인들의 가슴속에 정의의 불을 지폈다.
세계의 수억수천만에 달하는 평화애호인민들과 종교인들은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 떨쳐나선 조선인민에게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였으며 《미국은 조선에서 손을 떼라!》는 그들의 목소리는 전세계를 진감시켰다.
신문과 방송, 라지오를 통하여 미국을 반대하여 일떠선 전세계인민들의 투쟁소식을 들을 때마다 강량욱선생은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깨여난 조선의 그리스도교인들이 발휘하는 힘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슴뿌듯이 느끼군 하였다.
우리는 이겼다
조국해방전쟁시기 강량욱선생은 승리에 대한 신심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바란다고 해서 생기는것이 아니라 오직 위대한 수령을 모실 때 지니게 된다는것을 자기의 실생활을 통해 똑똑히 깨달았다.
다 아는바와 같이 지난 조국해방전쟁은 철과 철, 불과 불의 대결인 동시에 사상과 신념, 의지의 대결이였다.
미국은 200여만의 대병력과 수많은 비행기와 땅크, 대포와 함선들에 원자탄까지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이에 비해볼 때 공화국은 창건된지 불과 2년밖에 안되였고 인민군대의 무장장비는 미국과 대비할 형편이 못되였다.
일반적인 전쟁의 객관적법칙으로 볼 때 이것은 승패가 너무도 명백한것이였다.
하지만 조선땅에서는 세계가 공인한 그 법칙이 뒤집어졌다.
수적, 기술적우세를 믿고 날뛰는 미국의 힘만능론에 당이 있고 령토가 있고 인민이 있는 한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의 신념과 의지로 맞서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일군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시며 그들이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것을 다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주체41(1952)년 7월 27일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일어난 후 세번째로 강량욱선생의 집을 찾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교외에 자리잡고있던 그의 집에 도착하신것은 한낮이 가까와올무렵이였다.
차소리를 듣고 문밖으로 달려나간 강량욱선생과 부인은 감격과 환희에 휩싸였다.
부인이 환성을 올리며 강량욱선생보다 먼저 달려나가 수령님을 맞이하였다.
《온 나라 인민이 의지하고 사는 장군님께서 그 귀하신 신변의 위험도 무릅쓰시고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하십니까. 우리들을 그토록 잊지 않으시니 고마운 심정 무어라 말씀드릴지 모르겠습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강량욱선생과 가족들이 올리는 인사를 반갑게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일일이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오래간만에 위대한 수령님의 모습을 뵈온 부인은 그동안 쌓였던 그리움이 한번에 솟아올라 뜨거운것을 걷잡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인을 위로하시며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부인에게 장군님앞에서 주책머리없이 처신한다고 나무라며 위대한 수령님을 방안으로 모시였다.
준엄한 전쟁의 불길속에서도 자기들을 잊지 않으시고 또다시 집을 찾아주신 수령님의 은정에 혈육의 정을 한껏 느끼며 부인은 성수가 나서 점심식사준비를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방안에서 강량욱선생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시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이 시기 강량욱선생과 가족들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끝난 후 수령님께서 몸소 잡아주신 골짜기 양지바른 곳에 폭격에도 끄떡없게 벽체를 두텁게 지은 아늑한 살림집에서 살고있었다.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사업을 하던 강량욱선생에게 불편한것이 있다면 줄창 사무실에 앉아 일을 보다나니 바깥세상물정을 잘 모르고 지내는것이였다.
그는 며칠에 한번씩 오군 하는 신문으로는 성차지 않아 어떤 때에는 불쑥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에 찾아가 정세이야기를 들어볼 생각까지 하고 일어섰다가도 바쁘신 그이께 부담을 끼쳐드릴것 같아 제풀에 주저앉군 하였다.
그러던 그에게 있어서 이날은 오래동안 기다리다가 맞이한 행운의 날이였다.
강량욱선생은 수령님께 가정형편과 상임위원회사업실태를 말씀드린 후 정전담판과 전쟁의 전망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실것을 스스럼없이 청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물어보는 문제들에 대하여 허물하지 않으시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군사정치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변되여가고있다, 미제는 기술적우세를 믿고 《강대성》을 떠들면서 이 전쟁을 결속하려고 발악하고있지만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의 두리에 굳게 뭉친 우리 인민과 인민군대의 단결된 힘앞에 수치스러운 참패만 거듭하고있다, 전쟁기간 인민군대는 대단히 강화되였고 후방도 공고해졌다, 반면에 미제는 거듭되는 군사정치적참패로 하여 헤여날수 없는 궁지에 몰려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전선에서 이룩되고있는 전과에 대하여 하나하나 알려주시였다.
수령님의 이야기에 한껏 끌린 강량욱선생은 긴장하게 다잡았던 몸가짐도 풀고 그동안 알고싶었던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서도 연방 청드렸다.
《지금 미국이 공화국북반부지역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들이대고 세균탄까지 떨구는데 그놈들이 무슨 승산이 있어 그럽니까?》
《이제 미국이 정전담판에서 어떻게 나올것 같습니까?》
…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알고싶어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느것이나 다 후련한 대답을 주시였다.
미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은 놈들의 패망상을 보여주는것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제는 지난 2년간 조선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때보다 더 큰 손실을 당하고 수세에 빠지고있다. 지금 미제의 앞에는 정전을 하느냐 아니면 지금 같은 전선대치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확대하여 제3차대전과 같은 큰 전쟁을 일으키느냐 하는 세 길이 놓여있다. 그런데 미제는 3차대전과 같은 큰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여있지 못하다. 미제에게 남은 길은 정전협정에 조인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 그런데 왜 정전을 질질 끌고있는가. 미제는 이른바 《영예로운 정전》을 하여 《승리자》로 둔갑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놈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싸움에서 패한자를 《승리자》로 인정하지 않을것이다. …
이렇게 한동안 조성된 정치정세와 전선형편을 이야기하신 수령님께서는 신심에 넘친 음성으로 선언하시듯 말씀하시였다.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우리 인민의 승리는 확고하며 우리는 반드시 최후승리를 달성하고야말것입니다.》
들을수록 승리의 신심이 백배해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는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의 명령을 받고 강량욱선생네가 후퇴하여간 자강도 만포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들이 함께 있었다.
마가을의 찬 바람에 락엽이 흩날리던 주체39(1950)년 11월 19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곳을 몸소 찾아오시였다.
그이께서 인적드문 산골에 자리잡고있는 자기들을 찾아주시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상임위원회일군들의 기쁨은 한량없었다.
환한 미소를 지으신 수령님께서는 이런 산골에 와서 수고를 한다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해주시며 상임위원회가 림시로 자리잡고있는 집뜰안으로 걸음을 옮기시였다.
그들은 그이를 모실 집 한채 변변히 마련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송구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런것을 탓하지 않으시고 우리는 빨찌산투쟁을 할 때 이런 집에 들려 휴식한 때도 있었다고 하시면서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고하기도 하시고 일군들과 허물없이 자리를 같이하시고 방이 뜨뜻하여 좋겠다고 하시며 그들의 사업형편과 생활형편을 알아보시였다.
후퇴의 길에서 퍼그나 축간 그들의 모습과 어수선한 사업조건으로 하여 안착되지 못한 그들의 기분상태를 헤아리신듯 수령님께서 잠시후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수 있는 전선형편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지금 정세는 우리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변되고있다고,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련을 이겨낸 우리 인민군대는 재진격의 길에 들어섰다고, 지금 적들은 완전히 피동에 빠져 남으로 패주하고있다고, 평양은 곧 해방될것이며 우리는 머지않아 공화국북반부 전 지역을 완전히 해방할것이라고 격정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듣는 모두의 얼굴에는 환희와 열정이 넘쳐있었다.
사실 그때 전선서부와 전선동부에서 벌어진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기 위한 타격전은 인민군대의 혁혁한 전과로 장식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10월 하순부터 진행된 전선서부에서의 전투와 전선동부에서의 드세찬 공격으로 그해의 감은절인 11월 23일전으로 전조선을 강점하려던 미국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단 성원들에게 승리에 대한 신심을 안겨주기 위하여 바쁘신 속에서도 험한 산골길을 헤치시며 어려운 걸음을 하시였던것이다.
승리에 대한 신심으로 진정할줄 모르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던 수령님께서는 평양이 해방되면 우리는 곧 평양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상임위원회에서는 평양으로 나갈 준비를 갖추는것이 좋겠다고, 상임위원회뿐아니라 중앙의 각 기관들이 평양에 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후 이 땅에 펼쳐진 현실을 목격하면서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지니신 승리에 대한 필승의 신념과 배짱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으며 그이가 계시는 한 공화국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심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였다.
그가 이러한 생각을 더듬고있는데 수령님께서는 화제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사업에로 이어가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지금 상임위원회 서기장사업을 맡아보시는데 상임위원회가 일을 잘하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전시공로자들에 대한 국가표창사업부터 잘해야 한다고, 그러자면 사무실에 앉아 문서에만 파묻혀있지 말고 공로자들을 찾아 현실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리고 전시환경에 맞게 나라의 법질서를 세우는 사업에도 힘을 넣고 모든 일군들이 최고주권기관일군답게 전투적인 생활기풍을 세워야 한다고 일깨워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강량욱선생이 맡아보고있던 그리스도교도련맹사업에 대하여서도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선생은 그리스도교도련맹사업의 중책을 겸직하고있는것만큼 그리스도교인들을 공화국정부의 주위에 하나로 묶어세우는 사업에 큰 힘을 넣어야 하겠다고, 그들과의 사업에서 애로도 있고 힘도 들겠지만 어떻게 하든 그들을 잘 교양하여 묶어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량심적이고 애국적인 교인들, 우리 공화국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교인들과는 언제나 통일전선을 하며 힘을 합치자는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교양하는데서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그들의 머리속에 뿌리깊이 남아있는 숭미공미사상을 철저히 뿌리뽑고 민족자주정신을 확립하는것이라는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교인들이 기도를 드려도 미국이 잘되기를 바랄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자기 인민이 잘되기를 바라야 한다는데 대하여 절절히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에 감복한 강량욱선생은 머리를 깊이 숙이였다.
사실 전쟁기간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교회가 거의다 파괴되다보니 그리스도교도련맹의 사업은 활기를 잃고있었던것이다.
이런 실정을 알고있으면서도 전쟁이니 할수 없는것으로 여기던 그에게 있어서 그이의 가르치심은 암흑속에 광명을 주는 등불과도 같았다.
하기에 강량욱선생은 자신의 진정을 담아 수령님께 꼭 그렇게 하겠다고, 정말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드리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강량욱선생의 부인이 점심상을 차려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거기에는 산나물무침과 여름나박김치 그리고 국수그릇이 정히 놓여있었다.
너무도 검소한 음식상이여서 부인은 송구스러워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옹색해하는 강량욱선생과 부인에게 뭘 그러는가고, 무더운 여름철에 국수를 시원한 김치국물에 말아먹으면 아주 좋다고 하시며 환히 웃으시였다.
식사를 마치신 수령님께서는 국수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이 즐겨하는 고유한 민족음식이라고, 특히 평양랭면은 소문난 음식이라고 하시고는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는 개성의 설렁탕과 신선로를 비롯하여 지방마다 자랑하는 음식이 있었는데 평양에서는 대동강의 숭어국과 랭면이 유명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산에서 싸울 때에도 메밀이나 밀가루가 생기면 국수를 눌러먹었다고 하시며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단란한 가정적분위기에서 담소하시며 강량욱선생과 가족들의 생활의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시고 그곳을 떠나가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께서 무엇때문에 그처럼 쉽지 않은 걸음을 하셨는지 잘 알고있었다.
정세가 어려울수록 승리에 대한 신심을 더욱 굳게 간직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내디딘 애국의 걸음을 끝까지 걸어가도록 힘을 주고 용기를 주시려고 옛 담임선생을 찾아오시였으리라는것을.
그로부터 꼭 1년후에 전승의 축포가 오르던 날 강량욱선생은 1년전의 이날을 회고하면서 절세의 위인께 마음속으로 이렇게 아뢰였다.
《우리는 1년전의 바로 그날에 오늘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