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주권기관의 성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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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위원회의 첫 서기장으로

 

생전에 강량욱선생은 1년에 한두번은 꼭 자식들에게 서가에 꽂혀있는 《김일성저작집》 제2권을 가져오라고 하군 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주체35(1946)년 2월 8일 북조선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대표협의회에서 하신 보고 《목전 조선정치정세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조직에 관하여》를 다시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 나라에 통일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중앙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야 할 필요성과 새로 조직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앞에 나선 당면과업들에 대하여 언급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연설을 곱씹어 읽어보면서 그날의 환희를 되새겨보군 하였다.

이날은 그가 비록 종교인이였지만 인민정권의 첫 서기장으로 선거된 뜻깊은 날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근 40년간 절세의 위인의 가까이에서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왔다.

그러니 그날의 그 환희와 감격을 어찌 잊을수 있으랴.

하여 강량욱선생은 자기 생애에서 있었던 의의깊고 행복하던 그 많은 날중에서도 이날을 특별히 잊지 않고 인생말년에도 수령님의 연설을 읽으면서 그때의 일을 돌이켜보군 하였던것이다.

드높은 열의를 안고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들은 해방된 이 땅에 진정한 인민의 정권을 세울것을 요망하고있었다. 오래동안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적멸시와 수모, 착취와 압박을 받아오면서 주권이 없는 민족의 불행과 고통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너무나도 뼈에 사무치게 절감하였기때문이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로부터 주체34(1945)년 11월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중앙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할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인민정권건설경험에 기초하여 북조선에 중앙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세우기 위한 준비사업을 빈틈없이 추진시켜나가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먼저 지방인민위원회들을 조직하고 공고히 하게 하시였으며 각급 인민대회를 소집하고 인민들이 직접 인민위원회 위원들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시였다.

이와 함께 주체34(1945)년 11월 19일 지방정권기관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며 각 도사이의 경제적련계를 실현하기 위한 과도적인 부문별행정기관으로서 북조선 행정10국을 조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2월 5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상무집행위원회에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과 관련한 제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토의하신 다음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을 위한 북조선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대표들과 각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장, 행정국 국장들의 예비회의를 소집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준비에 기초하여 주체35(1946)년 2월 8일 북조선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 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협의회를 소집하시고 북조선에 중앙주권기관을 세워야 할 필요성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앞에 나서는 당면과업을 밝히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보고에서 나라의 복잡한 정치정세로 하여 근로자들이 직접선거를 실시할수 없는 조건에서 이 회의에서 창설하는 북조선중앙정권은 림시정권으로 된다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회의에서는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 인민의 대표들로 진정한 인민의 정권인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위원장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항일의 나날 두만강연안 유격구에 수립되였던 인민혁명정부의 직접적계승으로서 진보적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인민민주주의독재정권이였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력사상 처음으로 자주적인 정권의 떳떳한 주인으로 되였으며 사회의 민주주의적발전을 이룩하고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할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무기를 가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강량욱선생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첫 서기장으로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그만이 아니라 정준택(산업국장), 리봉수(재정국장), 한설야(교육국장) 등 각계층 인사들을 정견과 신앙, 당파에 관계없이, 지난날의 출신과 경력에 관계없이 주권기관의 책임적인 위치들에 임명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을 비롯하여 지난날의 출신과 경력이 각이한 각계층 인사들이 주권기관의 책임적인 위치들에 임명되게 된데는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수립을 앞두고 새로 세워질 중앙정권기관을 어떻게 구성할것인가 하는 문제로 하여 깊은 사색을 모으시였다.

그도 그럴것이 새 조선을 자유롭고 번영하는 인민의 나라로 일떠세울 숭고한 사명이 바로 새로 임명될 중앙정권기관의 책임일군들에게 지워져있었기때문이였다. 그들에게 나라와 민족의 흥망과 전도가 달려있는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생각은 갈수록 깊어지시였다. 인민의 새 나라를 세우고저 항일의 혈전만리를 함께 헤치며 피를 흘려온 전우들의 모습이 되새겨지시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비록 준비된 혁명가는 아니였지만 매 사람들의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여있는 민족적량심과 애국의 마음을 그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시여 이들에게 중임을 맡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목사인 강량욱선생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내세워주신것은 애국애족의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잡고 나가시는 그이의 넓은 포옹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애국적량심을 가진 그가 내 나라, 내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을 걷게 하고싶으신 뜨거운 애정의 표시였다.

강량욱선생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장군님의 뜻을 잘 받들어달라고 이구동성으로 당부하였다.

강량욱선생은 그들의 당부대로 김일성장군님의 건국로선을 힘껏 받들어갈 결심을 굳게 다지였다.

새 조선을 건설하는 앞길에는 수많은 난관들이 가로놓여있었다. 그중에서도 일제의 악독한 민족우매화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직후 북반부에만도 230여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문맹의 그늘속에 놓여있는것이 큰 문제였다.

이것은 사람들을 정치생활에 적극 참가시키며 그들을 새 조국건설에 조직동원하는데서 커다란 장애로 되고있었다.

이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맹퇴치사업을 건국의 선차적과업의 하나로 보시고 전체 인민을 문맹퇴치운동에로 불러일으키시였다.

문맹퇴치운동이 힘차게 벌어지고있던 어느날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을 몸소 만나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맹퇴치사업을 하자고 해도 그렇고 배움에 굶주린 수백만 어린이들을 공부시키자고 해도 그렇고 연필이 있어야 하겠는데 연필생산이 걸렸다고 하시면서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있다나니 연필공장 하나도 변변한것을 가지고있지 못한데 대하여 못내 가슴아파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연필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이 마음쓰시며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그는 수령님께 연필문제에 대하여 자기도 좀 알아보겠다고 말씀올리였다.

그러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으로부터 수공업적으로나마 연필을 만들어내고있는 자그마한 연필공장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였다.

그 공장이 바로 개인기업가인 송대관이 경영하는 공장이였다.

그는 보통강변에 연필공장을 차려놓고 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삼천리》라는 자호를 찍은 연필을 생산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정숙어머님의 보고를 받으시고 매우 기뻐하시였다.

그후 공장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부족점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조선사람이 제힘으로 처음 만든 연필인데 이만하면 성공한것이라고 하며 기뻐하시였다. 그리고 공장을 떠나실 때에는 속담에도 있는것처럼 첫술에 배부르겠는가, 이제 나라에서 큰 건물도 해결해주고 수송문제도 풀어주며 채벌림도 떼주겠으니 좋은 연필을 많이 만들며 다른 기업도 마음껏 해보라고 고무해주시였다.

공장을 돌아보고 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부르시여 당장 국영연필공장을 건설할수 없는 형편에서 민간기업체들에서 연필생산을 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보통문안에 있는 연필공장을 잘 도와줄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주체35(1946)년 2월 20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1차회의를 소집하고 연필생산문제를 첫 의정으로 토의하시였으며 그 다음날 다시 강량욱선생을 찾으시여 연필공장건물을 새로 해결해줄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그리고 얼마후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귀하던 화물자동차까지 보내주도록 하시여 공장에서 연필생산을 급격히 늘여나갈수 있게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과업을 받고 연필문제를 해결하던 나날은 주권기관의 한 성원으로서 인생의 새 출발을 한 강량욱선생에게 있어서 참으로 귀중한 체험과정이였다.

강량욱선생에게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사업을 맡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국가적인 안목을 가지고 사업을 자신있게 해나가도록 하는데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다.

력사적인 토지개혁이 한창이던 어느날 평안남도 룡강군에 사는 한 목사가 강량욱선생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그리스도교목사라고 하여 가지고있던 얼마 안되는 과수원을 몰수당하고 살던 고장에서도 추방당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그가 해방전에 살아가기 위하여 얼마 안되는 과수원을 장만했다는것은 강량욱선생도 잘 알고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그 목사가 몰수대상은 될수 없다고 판단한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가 보고드리였다.

강량욱선생으로부터 상세한 전말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아무래도 지방일군들이 편향을 범하는것 같다고 솔직히 말씀올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은 일부 일군들이 토지개혁법령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외곡하여 집행한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이것은 일부 일군들이 우리 당정책의 본질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있으며 경험과 교양이 부족한데서 온것이라고 봅니다라고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토지개혁과정에 부분적으로 결함이 나타날수 있으며 문제는 그런 결함을 제때에 발견하고 바로잡는것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선생님이 이 문제를 제때에 포착하고 제기한것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 목사에게 과수원을 도로 내주고 마을에서 축출하지 않도록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이름으로 문건을 하나 만들어 내려보내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지체없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지시문을 내려보내여 지방일군들이 잘못 처리한 문제를 제때에 바로잡게 함으로써 그 지방에서도 토지개혁이 편향없이 성과적으로 수행되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렇게 세심히 보살피고 이끌어주시였기에 강량욱선생은 국가건설경험을 하나하나 쌓으며 보람찬 애국위업의 걸음걸음을 확신성있게 내디딜수 있었다.

2

안식일에 한 좋은 일

 

1946년에 북반부에서 토지개혁과 중요산업국유화, 로동법령과 남녀평등권법령 등과 같은 민주개혁들이 성과적으로 완수됨으로써 우리 인민들은 인민민주주의제도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마음껏 누리게 되였다.

민주개혁의 과업들이 성과적으로 수행된 결과 사회경제제도의 식민지 및 반봉건적성격이 완전히 없어졌으며 북반부의 사회경제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새로운 경제관계는 사회의 계급관계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북반부에서 지주, 예속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청산되고 근로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되였으며 로농동맹이 강화되였다.

민주개혁의 과업들이 완수되는데 따라 북반부에서는 점차 다음 단계의 과업수행에로 넘어갈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이로부터 주체35(1946)년 9월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2차회의를 비롯한 여러 회의들에서 우리 나라의 실정에 맞는 사회주의정권건설에 관한 독창적인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림시적성격을 띤 인민위원회를 법적으로 공고한 정권으로 강화발전시키는것을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시고 사회주의정권수립을 위한 민주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시였다.

1946년 9월초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위원회에서는 각급 지방인민위원회 위원선거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에 따라 11월 3일에 북반부의 모든 지역에서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실시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산하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온 나라 인민들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민주선거인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그것을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사업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민주선거의 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안팎의 원쑤들은 선거사업을 파탄시키기 위하여 갖은 책동을 다하였다.

첫 민주선거의 실시를 앞두고 일부 그리스도교 교직자들은 자기들의 그릇된 선입견으로부터 이들의 책동에 동조하면서 인민정권과 엇서나갔다.

그들은 1946년 10월 24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서북로회 련합회의를 소집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이 선거에 참가하지 않기로 의결하였다.

그리고는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종교인들은 정치에 참가할수 없다, 절대안식하게 되여있는 성수주일에는 례배이외의 어떠한 행사에도 참가할수 없다, 주일날의 선거실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다 등을 선거에 참가할수 없는 이른바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인민정권에 대해 마구 험담하면서 밤 12시 교회종을 일제히 울리고 바로 그때 반대투표함인 흑함에 투표지를 넣으라고 각성되지 못한 일부 교인들을 암암리에 부추기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량욱선생은 격분을 금할수 없었다.

선거당일까지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조건에서 그들의 처사가 선거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 우려때문이였다.

(내 나라를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로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력사적인 첫 민주선거에 교인들이 적극 참가하도록 선동하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망녕된짓인가?)

강량욱선생은 그들을 찾아가 해방후에 처음으로 진행되는 력사적인 선거에 교인들도 다 참가해야 하지 않느냐고 설복했으나 그들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난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기로 마음먹고 주체35(1946)년 10월 25일 그이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강량욱선생으로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 서북로회 련합회의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11월 3일에 진행되는 민주선거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는데 대한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그런 일이 있었는가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반동분자들이 우리의 첫 민주선거를 파탄시키려고 책동할수 있다고, 이에 대하여 철저히 경계하고 미리 필요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무엇때문에 선거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는지 알아보았는가고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조선예수교장로회 서북로회 련합회의에서 내세운 조건에 대하여 그대로 말씀드리였다.

그가 올리는 대답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선거날이 그리스도교의 안식일이 되여 그와 같이 결정하였다면 그리스도교에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것으로 되여있는가고 다시 물어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성경에는 안식일에 선하고 좋은 일을 할수 있다고 써있으며 또 일요일에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를 선거하기도 한다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 보라고 하시며 준절하신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러므로 일요일이기때문에 선거에 참가할수 없다고 하는것은 순전히 우리를 반대하기 위하여 꾸민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

강량욱선생은 나쁜 놈들이 교인들속에 끼여들어 인민정권을 반대하여 갖은 술책을 다 쓰고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중하신 안색으로 련합회의에 참가한 목사들모두가 선거에 참가하는것을 반대하였는가고 또다시 물으시였다.

《몇몇 목사들이 주동이 되여 그렇게 하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속에 종교의 가면을 쓰고 우리의 선거를 파탄시키려고 날뛰는자들이 있는것 같으니 우리는 경각성을 더욱 높여야 하겠다고 하시며 교인의 《벗》이라는 탈을 쓴 미국놈들의 앞잡이들이 교인들로 하여금 선거를 반대하도록 추동하고있는것이 틀림없다고 하시였다.

고요가 깃든 집무실로는 마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락엽을 날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강량욱선생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교인들이 선거에 참가하지 못하게 책동하는 일부 교직자들이 마치도 자기 계절을 다 살고 물러가는 저 락엽들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윽고 련합회의에서 중심적인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교에서 영향력있는 사람들인가에 대하여 알아보시였다.

그들에 대하여 말씀올리는 강량욱선생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무엇인가 생각하시던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련합회의 중심인물들과 시내 유력한 목사들을 한번 만나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그의 의향을 물으시였다.

순간 가슴에 가득 쌓이였던 시름이 사라지면서 기쁨이 강량욱선생의 온몸을 감쌌다.

그래서 그는 기쁨절반, 웃음절반 섞인 말로 선뜻 말씀드리였다.

《그렇게 하시는것이 좋겠습니다.》

수령님께서는 한번 만나보자고 하시며 강량욱선생도 참가하라고 이르시였다.

그리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오후 장로교, 감리교계통의 목사들 10여명을 몸소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시고 다정히 인사를 나누시였다.

인정미 넘쳐흐르는 모습, 심금을 울려주는 우렁우렁하신 음성, 새 조선의 기상인양 약동하는 젊음으로 경탄을 자아내는 절세의 위인께서 지니신 인간적향기는 어느새 목사들의 가슴속에서 서먹서먹하고 조심스럽던 생각을 날려버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신 후 례사로운 이야기를 하시듯 따뜻한 음성으로 나라는 해방되였으나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인민의 정권을 세우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세우려는 인민민주주의정권은 로동자, 농민뿐아니라 지식인, 민족자본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이 다 망라된 진정한 인민의 정권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여러분은 이번에 진행하는 선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잠시후 한 목사가 일어서더니 선거는 나라를 다스릴 대표들을 뽑는 좋은 일이라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옳게 말했다고 그의 말을 긍정하시고나서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진행되는 선거가 일요일이라고 해서 교인들에게 선거불참지시를 내려보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고 물으시였다.

방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더는 침묵을 지킬수 없는듯 다른 목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거가 좋은 일이긴 하지만 선거날이 안식일이 되여 그렇게 결정하였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성경에는 좋은 일은 안식일에도 할수 있다고 씌여져있지 않는가고 하시며 그에 대한 실례를 드시였다.

그이께서 성경이야기를 하시자 목사들은 모두 놀라는 기색이였다. 장군님께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모르시리라 속단한 그들이였다.

수령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고 민주선거가 좋은 일이라는것을 인정한다면 인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 교인들을 참가하지 못하게 할 근거가 없지 않는가, 교회에서도 안식일에 장로나 집사를 선거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고 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사리정연한 말씀에 목사들은 술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원쑤들이 우리 민족이 단결되는것을 무엇보다 무서워하기때문에 북반부의 민주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교교리를 악용하고있는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당신들이 반동들의 음모책동에 속아넘어가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길에 들어서서야 되겠는가고 하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자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것을 금지하는 종교는 없을것이다, 자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일하는것보다 더 큰 영예와 자랑이 또 어데 있겠는가고 하시면서 종교인들도 자기 조국과 인민을 사랑할것이다, 인민위원회선거사업은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하는 좋은 일인데 그리스도교인들이 일요일에 좋은 일을 할수 있는 이상 왜 선거에 참가 못하겠는가고 말씀하시였다.

사실 나라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나라일을 잘해나가기 위한 인민의 대표를 선거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일이 아닐수 없었다.

목사들은 가책되는바가 있어 머리를 숙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둘러보시며 조국과 민족의 흥망은 전체 인민의 손에 달려있다, 조선사람이라면 자기 조국의 부강발전과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싸울 의무가 있다, 종교신자들도 자기 조국이 있어야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활동가들도 응당 자기 조국을 위하여 복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열화와 같은 애국의 마음으로 일관된 절세의 위인의 말씀은 편벽과 고집으로 굳어져버린 목사들의 리성의 벽에 드디여 균렬이 일어나고 애국의 더운 피가 흘러들게 하였다.

한 목사가 먼저 일어나 자기들이 반동들의 꾀임에 넘어가 처신을 잘못한것을 진심으로 사죄하며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교인들이 민주선거에 참가하도록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다른 목사들도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날 목사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이의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사람의 종교인이라도 나쁜 놈들의 꾀임에 걸려들어 나라와 민족을 외면하고 인생길에 오욕을 남길가봐 저으기 마음쓰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절세의 위인의 그 마음에 감동되여 안주, 박천, 정주, 선천, 신의주 등 여러 지방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그이의 뜻을 알려주고 모든 교인들이 민주선거에 빠짐없이 참가할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한편 절세의 위인의 접견을 받고 자기들의 처사가 잘못된것임을 깨달은 목사들도 교인들에게 조선예수교장로회 서북로회 련합회의결정이 잘못된것이라는것을 알려주면서 교인들모두가 선거에 적극 참가하도록 이끌었다.

첫 민주선거를 앞두고 인민정권과 엇서나가며 교인들의 선거불참이라는 그릇된 결정을 채택하였다가 후에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건국의 대하에 뛰여든 교직자들도 그후 신앙의 자유를 계속 누린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드디여 11월 3일 력사적인 첫 민주선거의 날이 왔다.

이른새벽부터 민주선거선전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돌아가고 선거장마다 흥겨운 춤판이 펼쳐졌다.

이날 민주선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속에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게 된 기쁨을 안고 걸음을 다그치는 교인들의 모습도 섞이여있었다.

온 나라 전체 인민이 크나큰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이는 가운데 위대한 수령님께서도 평양시 제6호선거구 제52호분구에서 로동자출신 후보자에게 투표하시였다.

우리 인민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도, 시, 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성과적으로 끝났다.

선거결과 94명의 종교인이 도, 시, 군인민위원으로 선거되였고 이듬해 2월에는 10명의 종교인이 북조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그후 공화국이 창건되였을 때에는 14명의 종교인들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였다.

이렇듯 종교인들도 진정한 제 나라가 있었기에 신앙생활에서의 자유와 함께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는 정치적자유도 마음껏 누릴수 있었다.

3

목사의 선택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여러날째 진행되고있던 주체37(1948)년 9월 어느날이였다.

이날의 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초안)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였다.

연단에 나서서 한결같이 헌법에 대한 보고를 열렬히 지지하는 토론자들을 바라보는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헌법초안에 대한 전인민적인 토의의 나날들이 펼쳐졌다.

전조선적인 통일정부를 세우는데서 헌법을 제정실시하는데 큰 의의를 부여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시고 나라의 기본법을 제정하는 사업을 정력적으로 밀고나가시였다. 그리고 헌법초안이 완성되자 이를 곧 전인민적인 토의에 붙이도록 하시였다.

여기에는 공화국헌법이 명실공히 인민의것으로 되게 하며 헌법토의과정을 통하여 우리 인민이 이제는 나라의 기본법까지도 제손으로 만드는 새 조선의 참된 주인이라는 높은 자각과 크나큰 긍지를 안고 부강조국건설에 적극 나서게 하시려는 수령님의 깊은 의도가 담겨져있었다.

헌법이란 낱말조차 모르던 인민, 나라의 기본법이라는 그 엄엄한 법이 자기들을 위해 제정되였을뿐만아니라 그 법이 옳게 만들어졌는지 의견까지 묻는다는것을 안 북과 남의 전체 인민들은 흥분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북반부의 각급 정권기관, 기업소, 학교와 가두, 농촌은 물론 남반부의 인민들도 앙양된 열의에 휩싸여 헌법토의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헌법초안에 대한 전인민적토의사업은 1948년 2월 중순부터 두달 남짓한 기간에 걸쳐 북남조선 전 지역에서 진행되였다. 헌법초안은 전체 인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로동자들은 자기들을 나라의 령도계급으로 규정한 헌법을 절대적으로 지지찬동하면서 1948년도 인민경제계획과제를 초과완수하겠다고 굳게 결의다졌다. 지난날 고역에 시달리며 무지몽매하게 살아온 자기들에게 땅을 분여해준것만으로도 그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는데 나라의 법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헌법토의에까지 참가시켜주신 장군님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농민들은 더 많은 알곡을 생산하겠다며 한결같이 떨쳐나섰다.

문화인들의 열의는 남달리 뜨거웠다. 지성인들인 그들은 전인민적토의에 붙인 헌법이 어떤 력사적의의를 갖는가를 알고도 남았던것이다. 그래서 헌법토의에 참가한 작가, 예술인들은 솟구쳐오르는 뜨거운 격정을 참을길이 없어 장군님께 편지까지 올렸다.

이런 격동적인 나날들을 돌이켜보던 강량욱선생은 흥분을 누를길 없어 연단으로 올라갔다.

원래 지나칠 정도의 과묵한 성격으로 하여 하루종일 몇마디의 말밖에는 하지 않는것으로 알려진 그였다.

하지만 이날 연단에 오른 강량욱선생은 북반부의 전체 종교인들의 의사를 대표하여 헌법에 대한 보고를 열렬히 지지한다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는 북반부의 모든 애국적종교단체들이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굳게 결속되였으며 그 산하의 일원으로서 민주건설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있는데 대하여 자랑스럽게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황해도 신천군 온천면 장제리(당시)에 사는 한 그리스도교목사의 애국적인 소행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자기들의 의사를 반영하여 나라의 정사를 론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진행되던 날 이른새벽이였다.

전에없이 마을과 그 아근에 교회당의 종이 은은한 소리를 내며 울려퍼졌다.

그러지 않아도 선거날을 맞이하여 교인들이 집집마다 어뜩새벽부터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명절처럼 음식을 만든다, 입고 나갈 옷을 손질한다 하면서 분주탕을 피우고있는데 자기들을 부르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오는것이 아닌가.

교인들은 무슨 일인가싶어 앞을 다투어 교회당으로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가 늘 그러하듯이 조선옷을 깨끗이 차려입은 마을의 목사가 밝은 얼굴로 교회당의 종을 힘껏 울리고있었다.

그는 교인들이 다 모이자 그들앞에 나서서 이번에 진행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가지는 의의에 대하여 줄을 달아 일장연설을 하였다.

목사의 류창한 언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듣고있던 교인들의 얼굴은 누구라 없이 환하게 밝아졌다.

목사의 말을 긍정하듯 머리를 끄덕이던 교인들은 그가 말을 마치자 마을사람들의 맨 앞장에 섰다.

그리하여 이곳에서는 교인들이 질서정연하게 대렬을 지어 인민의 대표를 선거하는 선거장에 다같이 입장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게 되였다.

참으로 자랑할만 한 애국적소행이였다.

강량욱선생의 토론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기쁨을 금치 못하시여 토론에서 들은바와 같이 마을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 적극 참가하도록 이끌어나간 황해도 신천군의 한 그리스도교목사의 소행이 매우 아름답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우렁우렁하신 음성이 회의참가자들의 격동된 심정을 더한층 고조시키였다.

회의장안에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러지 않아도 강량욱선생의 토론을 들으며 깊이 감동되였던 회의참가자들의 격정의 분출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말씀을 계속 이어가시였다.

《지금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조국의 통일독립과 부강발전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대오에 튼튼히 서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종교인을 포함한 각계각층 인민들이 한마음한뜻이 되여 투쟁한다면 조국통일도 더 빨리 실현될것입니다.》

그리스도교 교직자의 한사람으로서 최고인민회의의 높은 연단에 올라 토론을 하고 종교인들에 대한 믿음의 말씀까지 받아안은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그 목사를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강량욱선생은 자기가 담당한 교회의 교인들을 모두 데리고 선거에 참가한 목사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보았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는가라는 강량욱선생의 물음에 나이가 지긋한 그 목사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해방이 된 후 세상도 많이 변했지만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다고 하면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다.

…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의 실시로 이곳 농민들도 래세에서나 누릴수 있을것으로 믿었던 소원을 졸지에 성취하게 되였다.

해방전 우리 민족 누구나가 다 그러하였듯이 이들도 착취와 압박의 무거운 사슬에 얽매여 제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져본것이 없고 자기 권리를 행사해본적도 전혀 없는 지지리 못살고 가련한 사람들이였다. 그러던 사람들이 해방후 나라의 주인, 땅의 주인이 되여 존대받고 남부럽지 않게 기를 펴고 의젓이 살게 되였으니 세상이 달라진다한들 이보다 더 달라질수 있겠는가.

왜놈이 없어지고 지주와 수리조합과 같이 농민들의 등을 쳐먹던 기생충들이 없어진 세상에서 그들은 누구에게 억눌리거나 뜯기울 근심걱정없이 서로 돕고 이끌며 행복하게 살았다.

우리 민족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이 세기적변화를 두고 마을사람들은 자기들의 이 행복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셨고 그분께서 이끄시는 인민정권이 주었다고 한결같이 말하였다.

교인들의 경우도 례외가 아니였다.

사실 나는 지금껏 교인들에게 하느님을 믿으면 천당에 간다고 설교했지만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주님께서도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마련이라고 말씀했듯이 사람들에게 토지개혁과 같은 좋은 열매를 가져다준 인민정권은 좋은 나무일지언정 결코 나쁜 나무로는 될수 없다.

그러니 교인들이 누구를 믿고 따라야 하겠는가는 불을 보듯 뻔한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량심으로 살면서 량심으로 모든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것으로 말을 하고 행동한다. 량심을 속일수는 없으며 그것을 버리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것과 같을뿐더러 사람이라 할수 없다.

나는 량심이 가리키는대로 했을뿐이다. …

그 목사와 마찬가지로 강량욱선생 역시 해방후에 실시된 제반 민주개혁들을 목격하면서, 더우기는 보통강개수공사를 통하여 절세의 위인을 믿고 따를 때 행복만이 약속되여있다는데 대하여 절감하고있었다.

보통강은 대동강과 함께 유구한 세월 평양을 감돌아 흐르는 유서깊은 강이다.

그러나 지난날 이 강은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의 후과로 사람들에게 재난과 불행만을 가져다주었다.

일제는 보통강상류 수원지대의 산림을 마구 찍고 강변의 토지를 략탈하였으며 오물을 강에 마구 버리고 쓰레기를 처넣었다. 그러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보통강의 물과 자원을 마음대로 리용할수 없게 하였다. 때문에 수원지대로부터 흐르는 강물과 함께 흙이 내려쌓여 보통강의 강바닥은 계속 높아지고 제방은 토막났으며 물줄기는 여기저기로 구불구불해졌다.

그러므로 조금만 비가 내려도 강물은 넘쳐나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는데 수재는 평양사람들이 안고 사는 눈물겨운 생활이요, 하늘이 주는 재난이였다.

1942년에 큰물이 났을 때에만도 2 000여정보의 토지와 1 000여호의 집과 사랑하는 혈육들을 수장당한 5만명의 사람들이 한지에 나앉아 가슴을 쳤다.

보통강의 재난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살길을 잃고 헤매이는 사람들을 여기 강변에서 살게 하였는데 그들은 토성랑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움막생활을 하였다.

토성랑이란 말은 옛날에 성이 쌓아졌던 제방뚝을 따라 란간처럼 나란히 움막을 치고 사는 빈민촌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보통강의 재난은 외세에게 짓밟힌 이 땅이 겪는 축소판이였으며 우리 민족이 겪어온 모든 불행과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였다.

보통강의 재난의 력사를 끝장내는것은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이곳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맺혀있는 세기적숙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 모든것이 부족하였지만 토성랑인민들의 재난을 끝장내기 위한 보통강개수공사를 발기하시였다.

해방된 그해도 다 저물어가던 12월의 어느날 보통강기슭에 나오신 수령님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나는 어렸을 때 이곳을 여러번 지나다녔습니다. 만경대에서 평양에 나올 때면 이곳을 지나다가 늘 보통강다리에 서서 저 집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저 게딱지같은 집들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였습니다. 산에서 싸울 때 공작원을 내보내여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처지를 료해하게 하였고 그들에게 앞으로 일제는 망하고 조선은 독립되여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게 될 사회가 온다는것을 알려주게 하였습니다.

거랑촌, 빈민굴, 적굴동으로 알려져있는 저 가난한 마을사람들에게 행복을 마련하여주어야 합니다. 좀 곤난이 있어도 우리는 인차 우리의 힘으로 보통강개수공사를 착수합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설계와 시공계획, 기간 등 개수공사를 성과적으로 진행하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밝혀주신데 이어 주체35(1946)년 5월 21일 보통강개수공사 착공식에 나오시여 몸소 첫삽을 뜨시였다.

그리고 제반 민주개혁수행을 령도하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여러차례 공사현장에 나오시여 건설자들을 고무해주시면서 공사를 줄기차게 밀고나가도록 현명하게 이끌어주시였다.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로 녀성들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어리신 경애하는 장군님과 함께 공사의 가장 어려운 작업현장에 나가시여 이신작칙으로 건설자들을 고무해주시였다.

하여 우리 인민은 단결의 힘으로 강줄기를 돌리고 진펄을 파헤쳐 뚝을 쌓아 일제가 15년이 걸려도 못한다던 공사를 단 55일동안에 해내는 기적을 창조하였다.

보통강이 드디여 불행을 털고 새 물길을 따라 행복을 싣고 기쁨을 싣고 흐르기 시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 그 강물우에 비쳐졌던 수난의 모습은 멀리 사라져갔다. 해마다 범람하던 홍수로 가족을 잃고 가산을 잃고 몸부림치며 나라없는 무정한 세월을 한탄하던 모습이 비껴있던 그 물결은 바다로 흘러들었는지도 모른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나 물은 그 물이 아니다. 지금 물결우엔 새로운 생활의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그래서 그 물을 두손에 움켜뜨며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성이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이처럼 강량욱선생은 해방후 절세의 위인께서 토성랑의 비극을 가시여주신것을 목격하면서 그이의 정치를 받드는 길이 곧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이라는것을 다시한번 확신할수 있었다.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 참가하여 이 모든것을 돌이켜보는 강량욱선생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믿음과 사랑보다 더 감화력이 큰것은 없는 법이다.

하기에 이날 최고인민회의에서 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자자구구 되새겨보며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종교인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그이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사는 인간이 되였음을 긍지높이 자각하였다.

4

위인의 가까이에서

 

부강번영하는 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자기의 열정을 다 바칠 결의가 드높았던 강량욱선생이였지만 아는것보다 생소한것이 더 많았다.

더우기 주체36(1947)년 2월에 수립된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서기장의 중임을 지닌 그에게 있어서 제일 애로되는것은 국가활동경험이 부족한것이였다.

부디 경험이라야 1년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을 해본것뿐이라는것을 놓고볼 때 그의 고충이 얼마나 컸으리라는것은 짐작하기 과히 어렵지 않을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민의 국가를 세우고 건설하는 길은 아직 그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력사의 초행길이였다.

그러다보니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일군들은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좌왕우왕하였으며 결국 주인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었다.

이 력사의 초행길을 진두에서 헤쳐나가시며 일군들을 인민주권기관의 참다운 일군으로 튼튼히 준비하도록 이끌어주신분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이시였다.

1948년 정초에 들어서면서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을 총화하고 1948년도 인민경제계획을 법화하는 문제가 긴절하게 제기되였다.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인민경제계획이였다. 한편 전 조선적인 통일정부의 림시헌법(초안)도 여러차례의 심의를 거친것만큼 전인민적토의에 붙이는 문제가 성숙된 요구로 나서고있었다.

그럼에도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일군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료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1월 24일 강량욱선생을 부르시였다.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회의에서 토의할 문제에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2월 6일부터 열리게 되는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회의에서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실행총화와 1948년도 인민경제계획을 토의하자고 하는데 회의준비를 빨리 하여야 하겠다고, 회의에서는 1948년도 종합예산을 심의하고 정령을 승인하며 조선림시헌법을 전인민적토의에 붙일데 대한 문제를 토의하려고 한다고 하시며 회의에서 토의하게 될 문제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최고주권기관에서 해야 할 사업들에 대하여 새롭게 깨닫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또한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회의소집과 관련하여 상임위원회에서는 대의원들에게 회의를 통지하고 회의준비를 잘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서도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집무실을 나서는 강량욱선생은 마치도 캄캄한 밤에 망망대해를 떠가던 쪽배가 등대를 발견한듯 눈앞이 환히 트이는것을 느끼였다.

신심이 생기고 의욕이 끓어올랐다.

그는 돌아오는 길로 해당 일군들을 사무실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회의소집과 관련하여 주신 수령님의 말씀사상을 알려주고 회의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조직사업을 진행하였다.

비로소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명백히 알게 된 일군들은 모두 흥분하여 맡은 사업에 달라붙었다.

그리하여 1948년 2월 6일부터 2일간에 걸쳐 진행된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회의에서는 상정된 모든 의제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하고 회의를 성과적으로 결속할수 있었다.

이때뿐이 아니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을 때 공화국의 헌법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대의원들과의 사업을 진행한다는 조항이 명기되여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은 이 조항을 놓고 진지하게 의논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대의원들과의 사업을 한다는것은 어떻게 한다는것인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은 어떤 일을 하는가. …

일군들은 저마다 열띤 론쟁을 벌렸다. 하건만 모든것이 너무도 생소한것이여서 얻어지는것이 별로 없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이였던 강량욱선생은 이 문제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있은 며칠후에 그이께서 계시는 곳을 찾아갔다.

그가 집무실에 들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웃음을 담으시고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면서 그러지 않아도 한번 만나보자고 하였는데 마침 잘 찾아왔다고 하시며 반가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께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있은 후 상임위원회가 진행한 사업정형에 대하여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이 제기하는 의견을 하나하나 주의깊게 들어주시고나서 잠시 생각에 잠기셨다가 대의원들은 누구나 다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 하며 인민의 충복답게 사업과 생활의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주권기관의 대의원들과 부르죠아국회의원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혀주시는 말씀이였다.

인민이 추천한 인민주권기관의 대의원들은 인민의 머리우에 군림하여 그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그 무슨 벼슬아치가 아니다.

그들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인민의 충복이다. 때문에 대의원들에게는 인민들과 꼭같이 누구에게나 다 일정한 직업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일하고 그들속에서 살면서 대중의 목소리를 듣고 가장 정확한 의사를 주권기관에 제때에 반영하여 옳은 정사를 펴나가게 할수 있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인민정권의 참다운 인민적성격에 대하여 다시한번 깊이 알게 되였으며 대의원들이 인민을 위하여 참답게 복무하도록 상임위원회가 앞으로 그들과의 사업을 더 잘해나가리라 다짐하였다.

국가표창제도에도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일군들이 인민들을 위하여 더 잘 복무하도록 하시려는 절세의 위인의 뜨거운 손길이 어려있다.

공화국의 창건은 인민들속에서 무한한 힘과 열정을 폭발시켰다.

지난날 제 나라가 없어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숙명처럼 감수해야 하였던 사람들은 존엄높은 공화국의 당당한 공민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공장과 기업소, 농촌과 어촌 그 어디서나 희망과 기쁨에 넘쳐 기적과 혁신을 창조해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인민들을 더 높이 내세워주시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표창제도를 내올데 대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주체37(1948)년 10월초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을 만나주시고 새로운 국가표창제도로서 국기훈장을 제정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곧 해당 일군들과 함께 국기훈장에 관한 규정을 만들고 훈장도해를 완성하는 등 국가표창을 제정하기 위한 사업을 짜고들었다.

그리하여 1948년 10월 12일 정령으로 국기훈장 제1급, 제2급, 제3급을 제정하였다. 이어 그해 12월 21일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하여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조국보위와 인민의 리익을 위한 투쟁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수십명에게 훈장을 수여할데 대한 정령을 채택하였다.

이 소식은 신문과 라지오를 통하여 전국에 일제히 보도되였으며 신문에는 사진과 공훈내용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강량욱선생을 비롯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일군들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훈장수여식을 성대하게 진행하기로 토론하고 그의 성과적보장을 위하여 정력을 기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훈장수여식을 진행할 날자와 시간까지 몸소 정해주시였다.

주체38(1949)년 1월 8일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훈장수여식이 성대히 진행되였다.

그때 강량욱선생은 이 력사의 순간을 두고 얼마나 격동되였던지 후날 이날의 이야기를 자주 외우군 하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상벌을 옳게 적용하는것은 놓쳐서는 안될 정치의 중요한 원리로 간주되여왔다.

하지만 지난날의 상벌이란 지배계급에게 주는 상이였고 근로하는 대중에게 내리는 벌이였다.

그러나 인민이 주인된 새 정권에서는 그렇듯 큰 상을 근로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고있으니 력사에 일찌기 없었던 경사가 아니겠는가.

강량욱선생은 이것이 다름아닌 인류가 오랜 세월 리상으로 그려오던 인민의 정치, 인민을 위한 정치, 인민에 의한 정치라고 생각하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훈장수여식장에 들어서시였다.

그이를 한자리에 모신 기쁨으로 하여 수여식장은 폭풍같은 환호속에 끝없이 설레였다.

훈장수여식에서는 먼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인 강량욱선생이 개회를 선언한 다음 항일무장투쟁시기 영웅적으로 싸운 항일투사들과 조국보위와 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업에서 공훈을 세운 인민군대 및 내무성(당시)군관들에게 국기훈장을 수여할데 대한 정령을 전달하였다.

이어 국기훈장 제1급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훈장을 수여하였다.

수훈자들은 흥분과 격정이 북받쳐 절세의 위인의 뜻을 더 잘 받들어 내 나라, 내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모든것을 다해갈 결의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력사적인 훈장수여식이 끝난 후 수훈자들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으신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우리는 오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훈장수여식을 진행하였는데 훈장수여식이 잘된것 같다고, 앞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혁명투사들과 민주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위훈을 세운 일군들에게 더 많이 수여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강량욱선생을 고무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국가표창수여식에 참석하시여 수훈자들이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위한 길에서 더 큰 위훈을 세워나가도록 고무격려해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이렇듯 절세의 위인의 가까이에서 그이의 세심한 가르치심을 받으며 주권기관의 일군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원만히 갖추어나갈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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