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국의 첫 기슭에서
주체34(1945). 10. 18-인생의 봄날
무릇 뜻이 높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에서 참되게 빛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란다고 하여 저절로 그렇게 되는것은 아니다.
좋은 종자도 기름진 땅에 뿌리를 내려야 훌륭한 열매를 맺을수 있는것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참답게 살려는 인간의 소망과 지향은 그것을 알아주고 보살펴주는 절세의 위인의 품에서만 훌륭히 실현되고 참답게 꽃펴날수 있다.
이것은 해방전 일제에 의하여 인간으로서, 교육자로서의 존엄과 량심은 물론 종교인으로서의 신앙의 자유마저도 롱락당하다가 해방후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품에 안겨 비로소 애국의 길에 삶의 뚜렷한 자욱을 남긴 강량욱선생이 걸어온 인생행로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40여년간의 악독한 일제식민지통치가 끝장나고 해방의 새 아침이 밝아오자 삼천리강토는 만세의 환호성으로 진감하였다.
압제에 짓눌리고 얼어붙었던 사람들의 가슴마다에서는 눈물의 샘줄기가 터져올랐다.
강량욱선생은 평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라지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소식을 들은 그는 너무도 꿈같은 소식에 한동안 자기를 잊고있었다. 그러다가 교회당으로 달려가 종을 울리는것으로 해방을 맞은 자기의 격정을 터뜨렸다.
해방의 감격에 겨워 노래부르고 춤판을 펼쳐가는 우리 겨레의 가슴마다에 끓어넘친것은 백두광야를 주름잡으며 일제를 쳐부시고 해방의 날을 안아오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와 칭송이였다.
삼천리강산을 뒤흔드는 감격의 열풍속에 우리 인민은 그이의 조국개선을 학수고대하였다.
절세의 위인을 낳은 력사의 도시 평양은 위대한 수령님의 입성을 기다리며 밤에도 잠들줄 몰랐다. 평양과 평안남도의 각계층 대표들은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뭇고 그이를 환영군중대회장에 모시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벌써 평양역앞 광장에는 위대한 수령님을 모실 연단이 성의껏 마련되여있었다. 대동군인민들은 만경대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제일먼저 맞이하리라는 긍지와 기대를 가지고 김일성장군환영향토준비위원회를 따로 조직하였다.
서울에서는 홍명희, 려운형, 허헌 등 명망높은 인사들이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내오고 성대한 환영의식을 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강량욱선생도 이제나저제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양에 입성하시기를 고대하였다.
해방직후 어떤 사람들은 그더러 앞으로 북반부에 쏘련군대가 진주하는 조건에서 종교인들을 탄압할것은 뻔하니 미군이 들어오는 남으로 나가자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량욱선생은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고 평양에 남았다. 그자신이 공산주의를 신봉하거나 그것을 리해해서가 아니였다.
물론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지난날의 추억도 소중하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도탄에 빠졌던 겨레의 운명을 구원해주신 민족의 구세주에 대한 다함없는 경모의 마음이 그를 남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교직자로서 교회에 종사해온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좋지 않게 대하는 《혁명가》들만 보아온탓에 자기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가 하는 생각이 스며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러던 1945년 10월 중순이였다.
그때 강량욱선생은 평안남도 성천군에 내려가있었다. 교인들의 신앙심을 더 공고히 하고 교세를 확장하며 교회의 물질적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해마다 한두번 진행하는 성천지구부흥회가 부근의 목사들과 장로, 교인들 1 000여명의 참가밑에 며칠째 진행되고있었기때문이였다.
부흥회가 5일째 진행되던 날 그의 맏아들이 강량욱선생을 찾아 달려왔다.
그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아버지를 찾으신다고 하면서 빨리 평양으로 돌아가자고 아버지의 손을 끌었다.
온화하면서도 과묵한 형이였던 강량욱선생은 원래 좀해서는 자기의 감정을 겉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를 찾아온 맏아들의 말을 듣고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찾으시다니?!)
가슴이 쿵쿵 높뛰기 시작하는 그 순간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과 처음으로 상봉하던 20여년전의 잊지 못할 그날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누구나 생을 돌이켜보느라면 심장속에 소중한 자욱을 남긴 잊을수 없는 날이 있다.
강량욱선생에게 있어서 1923년 4월 1일이 바로 그런 날이였다. 바로 이날에 그의 인생길에서 가장 뜻깊은 연고관계가 맺어졌기때문이다.
그 당시 강량욱선생은 창덕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대교육사업에 전심하고있었다.
창덕학교는 1907년 봄에 위대한 수령님의 외할아버님이신 강돈욱선생님께서 청소년들에게 우리 말과 글, 력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애국의 넋을 심어주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칠골에 세우신 사립학교였다.
바로 이 학교에서 조선에서 태여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고 중국땅 팔도구에서부터 고향 만경대까지 혼자서 천리길을 걸어나오신 10대 초반의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공부하신것이다.
그날 학교 교감이신 강돈욱선생님께서 한 학생을 데리고 강량욱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선생들이 있는 직원실로 들어서시였다. 그 학생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교원들의 눈길은 강돈욱선생님께서 입학할 수속을 해야겠다고 하시며 소개하는 외손자분에게로 향하였다.
어리신 나이지만 도량과 너그러움이 슴배여있는 넓고 시원한 이마, 류달리 영채를 뿌리는 그 눈빛, 의젓하고 준수한 몸가짐…
학교 직원실에서의 첫 상봉, 강량욱선생은 그 상봉이 자신의 한생에 그처럼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교원들을 향하여 허리를 굽혀 인사하시는 그이의 남달리 환하신 모습을 대하는 강량욱선생의 머리속에는 만경대와 칠골일대 사람들속에서 전해져오던 해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한다.
… 2천만 백의동포가 나라와 민족을 구원해줄 유명한 장수가 태여나기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어느날 새벽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더니 만경대초가집뜨락에 한끝을 박은 칠색무지개를 타고 내린듯 한 해님이 껍질을 벗긴 삼대를 한줌 쥐고 만경봉에 휘-익 날아올라 그것을 대동강가에 뿌리자 하늘땅을 쩌렁쩌렁 울리며 수만명의 군사들이 나타났는데 해님이 어느새 날개돋친 백마를 타고 대렬앞에 달려오더니 능란한 솜씨로 군사를 령솔하는 비상한 재주에 감탄하여 《하늘에서 장수가 내려왔다.》, 《만경대에 장수가 났다.》며 마을사람들이 무릎을 쳤다. …
해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통하여 더우기는 조선을 알기 위해 어린 나이에 두 나라 지경을 넘어 혼자서 그 멀고 험한 천리길을 걸어나오신 그이의 남다른 위인상에 대해 전해듣고 경탄을 금치 못했던 그는 강돈욱선생님에게 외손자분께서 몇학년에 입학하게 되는가고 물었다.
강돈욱선생님께서는 외손자분께서 4년제소학교를 졸업했는데 어느 학년에 넣는것이 좋겠는지 하시며 생각을 더듬으시다가 강량욱선생에게 우선 시험을 받아보라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를 가까이 불러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공부하시던 정형과 전 과목이 최우등이고 결석이나 지각, 조퇴도 없었으며 품성도 아주 모범이라고 적혀있는 성적증을 료해하였다.
이어 그는 4학년 《조선어독본》과 국한문이 많이 섞여있는 《조선어독본》(5권)을 내놓으며 읽어보도록 하였는데 그이께서는 거침없이 줄줄 내리읽으시였다.
정말 보통실력이 아니였다.
다시 5학년 산수책에 있는 계산문제를 내놓았을 때에도 그이께서는 그 자리에서 술술 쉽게 푸시였다.
(역시 훌륭한 학생이다!)
직원실에 있던 교원들모두도 감탄해마지 않았다.
강량욱선생의 가슴속으로는 그이에 대한 호감이 밀물처럼 흘러들었다.
그는 어느모로 보나 이처럼 훌륭한 학생을 자기 학급에 받아들이고싶은 욕망이 솟구쳐 강돈욱선생님께 그이를 자신이 담임한 5학년에 편입시키자고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수령님께서는 창덕학교 5학년에 편입하게 되시였으며 강량욱선생은 그이의 담임선생으로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에 대하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나는 희망대로 강량욱선생이 담임한 학급에 편입되였다.》고 회고하시였다.
이렇듯 20여년전의 잊지 못할 추억을 되새기는 강량욱선생의 가슴은 좀처럼 진정할줄 몰랐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에 개선하시여 찾으신 사람들중의 한사람이 바로 창덕학교시절의 옛 담임선생이였던 강량욱선생이였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어린시절의 추억은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더우기 조국을 알고 조국의 숨결을 느끼려고 불원천리 찾아오신 수령님이시여서 창덕학교와 강량욱선생은 더더욱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되시였던것이다.
그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개선연설을 마치고 연단에서 내리시는 길로 강량욱선생을 찾으시였다.
여러 사람을 통해 그의 행방을 알아보시고 집에 사람을 보내여 가족들의 안부도 알아오도록 하신 수령님께서는 그가 부흥회가 열리는 성천에 가있다는것을 아시고는 빨리 데려오도록 하시였다고 한다.
사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개선을 환영하는 평양시군중대회가 있은 후 그이를 만나뵙고싶은 마음은 불같았으나 그것을 억제하고 성천으로 내려갔었다.
한것은 14살 어리신 나이에 조국을 독립하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굳은 맹세를 안고 압록강을 건너가신 수령님께서 조국해방을 이룩하고 개선하시였으나 자기는 그이앞에 나설만 한 떳떳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서였다.
강량욱선생은 맏아들의 말을 전해듣고 그길로 평양으로 갈것을 결심했다.
그리스도교신자로서 더우기는 교직자로서 자신이 주관하던 부흥회를 중단하고 떠난다는것은 계률을 어기는 전례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함께 와있던 교직자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설교를 도중에 그만두는것은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하느님앞에 이단적인 행위로 된다고 하면서 떠나면 안된다고 강량욱선생을 한사코 만류하였다.
그러나 목숨으로 담보해야 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계률도 위대한 수령님에게로 향한 강량욱선생의 불같은 마음을 막을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평양에 가있었던것이다.
주체34(1945)년 10월 18일 강량욱선생이 감격과 흥분으로 터질듯 부풀어오른 마음을 안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그가 뜨락에 들어서자 키가 후리후리하신분이 마주 나오시며 《강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창덕학교때 성주입니다.》라고 반갑게 말씀하시였다.
환하신 얼굴, 웃으실 때마다 생기던 볼우물…
그 모습은 창덕학교시절에 인기를 모으던 김성주, 그분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장군님!》
강량욱선생은 목이 메여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시여 그를 뜨겁게 포옹하시였다.
수령님의 품에 안긴 강량욱선생은 격정으로 하여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이윽고 수령님께서는 미소를 머금으신 눈길로 그를 찬찬히 살펴보시다가 성천에 나갔다더니 언제 오셨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이 장군님께서 부르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 급히 오는 길이라고 정중히 말씀올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손을 꼭 잡으신채 《이게 얼마만입니까. 선생님은 크게 달라지시지 않았습니다. 어서 방으로 들어갑시다.》라고 하시며 집무실로 안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자리를 권하신 후 이렇게 만나니 정말 기쁘다고 하시면서 건강은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건강은 여전하다고 대답올리자 그이께서는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시고나서 창덕학교시절의 선생들과 학생들에 대하여서도 알아보시였다. 그러시고는 내가 칠골을 떠난 후 지금까지 기억에 제일 많이 남아있는분이 강선생님입니다, 참 지금도 선생님이 력사시간이면 애국명장들의 이야기를 해주시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은 창덕학교와 대평학교와의 체육경기를 아주 멋있게 조직하군 하였다고, 선생님이 체육시간을 재미있게 조직하였기때문에 학생들은 그 시간을 손꼽아 기다리군 하였다고 감회깊이 말씀하시였다.
조선을 알기 위하여 팔도구에서 천리길을 걸어 만경대에 나오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 있어서 창덕학교는 정깊은 모교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일제에게 짓밟혀 신음하는 나라와 민족의 모습을 뇌리에 깊이 새겨넣으신 참으로 잊을수 없는 나날이였다.
강량욱선생이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계시는가고 말씀올리자 수령님께서는 저는 산에서 싸울 때 일제에게 짓밟힌 조국을 생각하였고 조국을 생각할 때면 늘 창덕학교시절이 떠올랐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창덕학교시절을 잊을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고 물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께서 창덕학교를 떠나신 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까지 교회목사로 있은 사실을 터놓으면서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장군님께서 나라를 찾기 위해 산에서 어려운 투쟁을 하실 때 저는 교회에서 조용히 지냈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연한 말씀을 한다고 하시면서 선생이 그리스도교를 믿은것은 일본놈들을 미워하는데로부터 시작되였다고 본다고 하시며 일본놈들이 우리 인민을 가혹하게 탄압한데 대하여서와 우리 인민이 일제에 항거하여 부단한 투쟁을 벌려왔지만 진정한 독립의 길을 찾지 못하여 투쟁에서 실패를 면치 못하고 많은 피를 흘린데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신에게 나라의 운명을 부탁하고 나라가 잘되기를 기도한것이 죄로 될수 없다고, 이런 사람들은 애국심이 있는 량심적인 종교인이라고 볼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김형직선생님께서 강동군 명신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시다가 일제경찰에 체포되였을 때 고읍면 동삼리일대의 교인들이 모여서 한달이상이나 왜놈들이 멸망하고 선생님께서 석방되시기를 간절히 바라서 기도를 한데 대하여 회고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렇기때문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력량을 총 망라하는 조국광복회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참가하였고 그들중에는 일제를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우다가 희생된 사람들이 많다고 하시며 천도교 함경남도 도정이였던 박인진선생에 대하여서도 회고하시였다.
그는 종교인이였지만 자기 산하의 천도교청년들을 교양하여 조선인민혁명군에 보냈으며 물심량면으로 유격대를 원호하였다. 그는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야수적고문을 당하였지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를 추억하시는듯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던 그이께서는 그의 투쟁업적은 우리 나라 력사에 길이 남을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에게 선생이 지난날 그리스도교를 믿은것은 문제될것이 없으며 해방된 조국에서 앞으로의 새 출발이 보다 중요하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그에게 나라에 조성된 정세에 대하여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시고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땅에 부강한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새 민주조선을 일떠세우는것은 어느 한 당파나 개인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재산이나 지식의 유무, 당파와 종교의 소속에 관계없이 건국사업에 나서려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굳게 뭉칠 때에만 실현될수 있습니다.》
그러시면서 얼마전에 개선연설을 하면서 힘있는 사람은 힘을 내고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을 내고 돈있는 사람은 돈을 내여 건국사업에 이바지할데 대하여 호소하시였다고 하시였다.
정견과 신앙, 재산의 유무에 관계없이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시려는 그이의 크나큰 도량과 포옹력앞에서 강량욱선생은 머리가 숙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선생은 지식도 있고 목사로서 교인들속에서 인망도 높으니 많은 일을 할수 있다고 하시며 우리 나라에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고, 그들을 굳게 묶어세워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도록 조직동원하는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그런데 지금 일부 종교인들은 우리와 함께 손을 잡는것을 두려워하고있는것 같다고 하시면서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게 된 력사적과정에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듣는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지난날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를 전도한 미국의 행적이 돌이켜졌다.
1882년 예속적인 조미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조선에 대한 포교의 길을 열기 위해 봉건통치배들을 구슬려 1883년 7월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있는 《비조선인들속에서 선교활동을 할수 있다.》는 비공식허가를 받아냈다.
이를 구실로 1884년 6월 《조선에서 학교사업과 의료사업을 허락해달라》는 청원서를 들고 막클레이라는 선교사가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데 이어 알렌, 언더우드, 아펜쉘라 등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발을 들이밀었다.
선교사들은 《자선》과 《박애》, 《계몽》의 미명하에 도처에 학교와 병원, 교회당을 세워놓고 사람들속에 그리스도교를 전파시키는 한편 미국에 대한 환상을 퍼뜨렸다.
해방전 그리스도교가 한창 번성할 때 우리 나라에는 수십만명의 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수가 줄어들었다고는 했지만 해방직후 북반부에만도 의연히 적지 않은 교인들이 있었다. 이들가운데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남조선에 들어온 미군과 미국선교사들을 쳐다보고있었다.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의 침략력사가 여실히 증명해주듯이 미국이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를 퍼뜨린것은 조선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조선사람들속에 미국에 대한 환상을 조장시켜 장차 우리 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교인들에게 잘 알려주어 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건국사업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는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강량욱선생에게 지금 남조선에 들어온 미군도 과거의 미국사람들과 다를바 없다고 하시며 그들은 우리 나라를 해방하는데 총 한방 쏜 일이 없으며 우리 나라가 해방된 다음 한달이 되여서야 남조선에 기여들었는데 이것자체가 침략적행동이라고 단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미국이 우리 나라에 종교를 전도한 목적을 똑똑히 알고 미국에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종교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애국심을 간직할수 있다고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된 오늘 우리 나라에서 애국자는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는 건국사업에 적극 나서는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종교인들전체가 인민들과 함께 새 조국건설에 적극 떨쳐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강량욱선생에게 그리스도교신자들이 진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 적극 나서도록 힘써줄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 의논하며 일해나가도록 하자고 고무의 말씀을 주시였다.
강량욱선생은 평범한 교직자인 자기에게 그토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그 은정이 고마와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맙습니다. 저에 대한 장군님의 믿음을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나가기를 바라시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건국사업에 미력이나마 다 바치겠습니다.》
주체34(1945)년 10월 18일.
정녕 이날은 강량욱선생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의 부강번영을 바라는 종교인이라면 어떤 자세와 립장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게 된 운명적인 날,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알리는 인생의 봄날이였다.
애국의 길로 이끄시여
해방후 저저마다 혁명가, 독립투사로 자처하는자들이 승벽내기로 내흔드는 각이한 주의주장은 사람들의 머리를 혼란시키고있었다. 매일같이 벌어지는 강연과 집회, 간담회, 로천대회들, 연사마다 부르죠아공화국이요, 프로레타리아독재정권이요 하면서 목터지게 고아대는 주의주장들…
하루밤 자고나면 그 무슨 인민통일전선이요, 백의청년단이요, 그리스도교녀성련합회요, 로동자평의회요 하는것들이 결성되여 광고를 내붙이고 프랑카드를 내걸며 선전물을 뿌려대였다.
이러한 와중에 강량욱선생은 조만식의 민주당에 관여하게 되였다. 해방과 함께 애국자로 둔갑하여 기업가, 상인, 그리스도교인들을 자기 주위에 끌어당기고있던 조만식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있던 강량욱선생을 회유하였던것이다.
한때 오산학교 교장과 조선일보사 사장까지 하면서 우국을 운운하던 조만식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감옥세례를 받고 저세상으로 갔거나 불구가 되여 나오는것을 보고는 일찌감치 비폭력무저항주의라는 합법적인 《애국투쟁》의 길로 완연히 키를 돌린 사람이였다.
뭇사람들로부터 애국선각자로 떠받들리는 안창호의 인격혁신론과 자아수양론, 교육과 산업의 진흥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실력배양론을 애국자의 체면을 세우면서도 위험이 없이 편안하게 살수 있게 하는 유일무이한 최선의 방도로 본 그는 3. 1인민봉기후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내 살림은 내것으로!》라는 구호밑에 물산장려운동을 벌릴 때 그 지도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상의 우국은 비겁성을 합리화하기 위한 면사포는 될지언정 결코 애국으로는 될수 없었다.
그는 일제의 폭압이 강화되자 애국자연하던 량심의 마지막쪼각마저 집어던졌다. 그는 조선이라는 고기덩어리는 아예 일본의 위속에 들어가버렸는데 그것을 이제 어떻게 건져내오겠는가, 대세는 찌그러진지 오래다고 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동조동근》에 맞장구를 치다못해 학도병지원제와 징병제를 적극 지지하여 연설도 하고 글도 써내며 친일행적을 이어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만식의 이러한 과거를 모르지 않으시였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그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건국사업에 적극 나서기를 바라시여 여러 기회에 그를 만나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지향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애국적인민들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묶어세울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조만식은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새 민주조선건설로선과 통일전선로선에 대하여 잘 알면서도 그와 배치되게 백의동포라면 덮어놓고 모두 단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동단결》을 운운하였다. 지어 리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부르죠아공화국을 세울것을 꿈꾸면서 저들이 무으려는 민주당을 공산당을 반대하는 정당으로 만들려고 획책하고있었다.
강량욱선생은 조만식의 과거를 어느 정도 알고있었지만 당시 자신의 사상적미숙성으로 하여 더우기는 같은 그리스도교 교직자라는데로부터 그의 음흉한 속심을 다는 꿰뚫어보지 못하고있었다.
주체34(1945)년 10월 27일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해방된 조국땅에서 두번째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집무실에 들어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선생과 의논할 일이 있어서 찾았다고 하시며 몸소 자리까지 권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와 자리를 같이하시고 먼저 국내에 조성된 정세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시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은 되였으나 당시 조성된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은 첫날부터 38°선을 강토와 민족을 갈라놓는 인공적인 장벽으로 만든데 이어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규합하여 저들의 식민지지배체계를 확립하려고 책동하고있었다. 그리고 북반부의 도처에서 소요를 일으키거나 류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소란하게 함으로써 우리 인민의 부강한 자주독립국가건설을 각방으로 방해하고있었다.
한편 애국자, 지도자의 탈을 쓰고 지방정권기관에 기여든 어중이떠중이들은 인민정권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대중을 정권기관으로부터 리탈시키며 낡은 제도를 되살리려고 갖은 음모를 다하고있었다.
이러한 정세를 알기 쉽게 이야기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들으며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공산당을 지지하는척 하면서 돌아앉아서는 일부 각성되지 못한 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여기저기 놀음판을 벌려놓고 자기의 과거 《공로》를 자랑하는 한편 공산당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하던 조만식의 본심이 헤아려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조만식의 과거를 묻지 않고 손잡고 나갈것을 여러차례 권고한것은 그의 정체를 모르거나 그에게 큰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라 한사람이라도 옳은 길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였다고 하시며 그리스도교인들을 각성시킬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을 다 교양하여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묶어세울데 대하여 말씀하시고나신 수령님께서는 지금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이 반공숭미사상이 농후한데다가 조만식의 꾀임수에 넘어가서 우리가 하는 일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고있다고, 물론 그들가운데는 일부 악질적인 분자들도 있겠지만 절대다수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몰라서 그럴것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그이의 말씀을 긍정하며 이렇게 대답올렸다.
《그렇습니다. 지금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를 좋지 않게 여기기때문에 종교인들을 탄압할것이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강량욱선생에게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종교인들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이러한 립장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그이께서는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다고,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서울 일대에 많은데 그중에서도 평양이 제일 많다고 하시며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조만식의 죄행을 똑똑히 알려줄데 대하여서와 진보적이며 유력한 장로, 목사들을 인입하여 교인들이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기 위한 우리의 정당한 사업에 대해서도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선생은 교인들속에서 인기가 있는것만큼 그들과 접촉하기도 쉽고 그들도 선생의 말을 믿을것이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이렇게 적극적인 공세를 들이대면 많은 교인들이 각성될것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은 물론 자산계급들속에도 영향이 미칠것이라고, 이와 함께 조만식을 애국의 길로 돌려세우기 위한 교양사업도 포기하지 말고 인내성있게 해보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비록 잘못된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도 어떻게 하나 끝까지 애국의 길로 이끌어주시려는 그이의 크나큰 도량과 포옹력앞에서 다시금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유력한 장로, 목사들과 함께 각계각층 군중들과 그리스도교인들속에 들어가 적극적인 해설선전사업을 벌렸다.
그리하여 민주당의 영향하에 있던 각계층 군중들과 절대다수의 교인들이 공산당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조만식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도록 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러한 사상적변화는 그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해방직후 북반부에서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3국외상회의결정을 둘러싸고 더욱 치렬하게 벌어졌다.
당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것은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되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는 조선문제를 비롯한 일련의 국제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쏘련(당시)과 미국, 영국외무상들의 회의가 있었다.
회의에서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부흥시킬것을 예견하여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들과의 협의밑에 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하며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민주주의적, 자주적발전을 이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렬강들이 5년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후견을 실시할데 대한 결정이 채택되였다.
이것은 통일정부로서의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여 나라를 부강한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로 발전시키기를 바라는 전체 조선인민의 의사에 기본적으로 부합되는것이였다. 또 5년이내의 후견제문제를 놓고 말한다면 그것이 하루빨리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우리 민족의 념원과는 좀 거리가 있는것이지만 후견제를 《조선의 민주주의적자치발전에 대한 방조의 수단》, 《국가적독립과 부흥에 대한 국제적원조와 협력의 방도》로 규정한것만큼 그것은 조선에 대한 어느 한 외부세력의 일방적인 간섭 같은것을 배제한것으로서 미국이 들고나왔던 《신탁통치》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것이였다.
이미 테헤란회담(1943년 11월)에 뒤이어 얄따회담(1945년 2월)에서도 조선사람의 이른바 《자치능력》을 키워주기 위하여 적어도 20~30년동안의 《신탁통치》시기가 필요하다고 떠벌이였던 미국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에서도 자기들의 이러한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이 배격당하자 미국은 앞에서는 회의결정을 지지하는척 하면서 돌아앉아서는 이를 반대해나섰다. 조선에서의 통일적중앙정부수립을 막을 음흉한 목적에서였다.
회의결정이 발표된 다음날 미국은 철면피하게도 이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미, 쏘, 영, 중 4개국의 신탁통치위원회가 설치되였다.》는 허위보도를 날리였다. 남조선강점 미군사령관 하지도 후견제를 《신탁통치》라고 외곡하면서 남조선의 친미세력들을 추동해 《반탁총동원위원회》라는것을 조작하게 하고 《반탁》시위를 벌리도록 사촉하였다.
미국의 본심을 가려보지 못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즉시독립》이라는 구호를 내들고 《반탁》에 열을 올리였다.
이러한 때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주체34(1945)년 12월 31일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부장협의회에서 하신 연설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대하여》와 주체35(1946)년 1월 1일 《신년을 맞이하면서 전국인민에게 고함》을 통하여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의하면 38°선을 철페하고 조선에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쏘, 미, 영, 중 4개국이 조선에 대하여 5년제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되여있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튼튼히 결성하고 단결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려있으며 일제잔재를 철저히 숙청하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며 세계민주진영의 일원으로 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는가에 달려있다고, 결국 모든 문제는 우리 조선인민자체의 힘에 의하여 해결될것이라고 명철하게 밝혀주시였다.
그제서야 북반부는 물론 남반부의 민주정당, 단체들도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이를 적극 지지해나섰다.
북반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여 1946년 1월 2일 정당, 사회단체들이 공동성명을 채택하였으며 다음날에는 북조선 행정국 국장회의성명을 발표하였다.
같은 시기 남조선에서도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벌어졌는데 서울에서만도 공산당을 비롯한 민주주의적정당, 단체들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시민대회가 열리였다.
그러나 미국과 리승만을 비롯한 친미세력들은 이 결정을 한사코 반대해나섰다. 조만식일파도 이에 적극 추종하면서 민주당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한 림시정부수립을 반대해나서도록 암암리에 책동하였다.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과 관련하여 표리부동한 태도를 취하는 조만식일파의 처사에 분격해하던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기 위하여 주체35(1946)년 1월 5일 그이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집무실로 들어서자 애국의 열정을 안고 건국사업에 헌신하고있는 선생을 만나니 반갑다고, 요즘 건강은 어떤가고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선생이 나와 의논할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 오늘 시간을 냈다고 소탈하게 말씀하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생이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반대하는 조만식일파의 그릇된 태도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선생의 견해가 옳다고 본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적발전과 완전자주독립을 예견한것으로서 조선인민의 리익에 부합되는것입니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오늘 전체 조선인민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열렬히 지지하고있다, 이 결정이 발표되자 북조선의 정당과 민주주의적사회단체들은 그것을 지지하여 공동명의로 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선의 《한국민주당》을 비롯한 반동적인 우익정당들은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있는 후견제에 대한 개념을 외곡하여 그것이 《신탁통치》니 뭐니 하면서 이 결정을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벌리고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온 겨레의 념원에 배치되는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행동이라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반대하는 남조선우익정당들의 《반탁운동》을 뒤에서 부추기고있는것은 바로 미국이라고 하시면서 미국의 교활하고 철면피한 행동에 대하여 폭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현시기 조선문제에 관한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반대하는것은 곧 민주를 반대하는것이며 조선의 완전독립국가건설을 반대하는것과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미국의 책동에 추종하는 조만식일파의 책동으로 민주당이 애국을 거역하고 민주를 반대하는 당으로 전락될수 있다는 우려로 마음을 놓을수 없었다.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 우리 인민앞에 나선 긴급한 과업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하루속히 결성하는것이라고, 이 과업은 민주당이 각 정당, 사회단체들과 실제적인 공동행동을 취하여야 실현할수 있다고 하시며 우리는 조만식이 이제라도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버리고 그것을 지지하며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합류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집무실을 나서는 길로 조만식을 찾아가 모스크바3국외상회의결정을 지지해나설것과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합류해나설것을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끝까지 자기의 립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민주를 반대하고 애국을 거역하는자들과는 한길을 갈수 없다고 생각한 강량욱선생은 그와 단호히 결별하였다. 그리고 민주당조직을 발동하는것과 함께 군중속에서 신망이 높은 인사들로 조만식의 죄행을 폭로하는 사업을 적극 벌려나갔다.
조만식일당의 흉계를 간파한 절대다수의 민주당원들은 열성자회의를 열고 조만식을 당대렬에서 축출하였다. 이어 민주당은 제1차대회에서 진보적인 인사들로 새 중앙위원회를 꾸리고 민주주의적인 정당으로서의 자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한편 1946년 1월 29일 북반부의 모든 민주주의적정당, 단체들과 함께 통일적민주주의림시정부를 수립할데 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아래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적민주력량이 집결되였으며 새 조선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민주주의적인 모든 정당, 단체들이 통일단결되고 그들사이에 밀접한 협조가 이루어졌다는것을 과시한 계기로 되였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애국의 한길로 손잡아 이끌어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현명한 령도가 있어 북반부에서는 그처럼 짧은 기간에 각계각층의 애국적민주력량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될수 있었고 이에 기초하여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7월 22일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위원회가 결성될수 있었다.
이 나날 강량욱선생에게는 깊이 느껴지는것이 있었다.
(조만식이도 그리스도교인이고 나도 그리스도교인이다. 그러나 나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믿음속에서 애국의 길에 들어설수 있었고 조만식은 애국의 길에 들어서기를 바라는 절세의 위인의 뜻을 한사코 외면하고 끝까지 매국의 길을 걸었다.
애국과 매국!
위대한 사랑의 품에 안길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애국 그 한가지일것이다.)
슬픔을 이기게 한 힘
겨울은 물러가고 1946년의 봄이 오고있었다.
대동강을 둥둥 떠다니던 얼음장들도 나날이 줄어들었다. 소리없이 녹아버리는 그 얼음장밑에서, 물오리들의 원무로 잔물결 이는 수면우에서, 기슭에 드리운 버들개지의 작은 망울속에서 봄기운이 태동하고있었다. 해방의 첫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는 앞날에 대한 꿈과 희망이 한껏 어려있었다.
그러나 이해의 봄은 꿈과 희망, 즐거운 웃음만을 안고오는것이 아니였다.
봄은 약속의 계절이라 하지만 헤아릴수 없이 많은 땀과 눈물, 아픔이 없이는, 그것을 이겨갈 헌신적노력에 대한 약속이 없이는 그 무엇도 기대할수 없다는것을 이 봄을 맞는 사람들은 알고있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은 알게 되였다. 이 봄은 애국과 매국간의 심각한 투쟁의 봄이기도 하다는것을…
이 시기 미국과 그의 추종을 받는 반동세력은 우리 인민의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을 파탄시키기 위해 비렬하게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주요간부들과 새 조선건설사업에 떨쳐나선 애국적인사들에 대한 테로행위를 악랄하게 감행해나섰다. 지어 무엄하게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신변까지 어찌해보려고 책동하고있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역전광장에서 있은 3. 1인민봉기 27돐기념 평안남도경축대회때 시위군중이 토지개혁의 실시를 요구하는 프랑카드와 기발들을 높이 들고 구호를 웨치며 김일성장군님께서 서계시는 주석단앞을 지나갈무렵 돌연히 주석단을 향해 날아든 수류탄이 그 산증거였다.
강량욱선생은 가슴떨리는 이 사실을 전해듣고 너무도 격분하여 그날 밤 잠을 이룰수 없었다.
(세상에 태양을 외면하는 사람은 없다. 그 빛과 열에 등을 돌려대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 감히 태양을 욕보이려는자들이 이 땅에서 활개치고있다니?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것으로 하여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는데 온 겨레가 우러러 경모하여마지 않는 민족의 태양을 향해 감히 몹쓸짓을 한 나쁜 놈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왜 벌을 내리지 않는가? …
부디 우리 민족의 명줄과도 같으신 그분의 신변을 보호해주소서.)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의 신변은 아랑곳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비롯한 일군들의 안전을 먼저 생각해주시였다.
3. 1인민봉기 27돐기념 경축대회가 있은 다음날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의 집무실로 가게 되였다.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마주 걸어나오시며 자리를 권하신 후 잠시 말씀이 없으시다가 어제 3. 1인민봉기 27돐기념 경축대회장에서 있은 일에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지금 반동들의 책동이 매우 심하다고 말씀하시였다.
당시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앉아있던 반동들은 북반부에서 세차게 타오르는 건국열의를 꺾어보려고 미제의 사촉밑에 테로단을 무어 들여보내고있었으며 북반부에 숨어있는 반동들은 남조선에 기여든 미국에 커다란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발악적으로 책동하고있었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근엄하신 안색으로 그 어느때보다도 경각성을 높여야 하겠다고, 내가 전번에 선생의 집에 갔을 때 집위치와 주위환경을 살펴보니 어쩐지 불안한감을 느끼게 되였다고 하시면서 안전한 곳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였으니 인차 이사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사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지 며칠밖에 안되던 어느날 시내로 이사온 강량욱선생의 집을 몸소 찾아주시였었다.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의 안내로 집안에 들어서시여 방은 몇칸인가, 불은 잘 드는가고 세세히 물으시며 집안팎을 찬찬히 살펴보시였다.
그날 그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시는 그이의 생각은 자꾸만 갈마드는 이름할수 없는 불안으로 착잡하시였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우에 우뚝 솟은 교회당과 이웃하고있는 자그마한 살림집, 민가와는 멀리 떨어져서 외기러기마냥 호젓이 홀로 서있는 옛 선생의 집이 그냥 눈앞에 밟혀와서 도저히 마음을 놓을수 없으시였다.
반동들의 책동이 날로 악랄해지고있는 때여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를 일이였다. 더우기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의 중책을 지닌 그여서 놈들이 말끝마다 《빨갱이목사》라고 벼르고있는 때에 정녕 그의 신변이 걱정되시였다.
그래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에게 강량욱선생의 집에 가보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집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강량욱선생에게 안전한 곳으로 이사할데 대하여 이야기하였지만 원래 고정한분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수 있다고 하시면서 시내중심부의 안전한 곳에 집을 하나 마련하여 그곳으로 이사시킬데 대하여 당부하시였다.
며칠후 위치도 좋고 안전한 곳에 집 한채를 마련했다는 그 일군의 보고를 받으신 그이께서는 사소한 불편도 없도록 수리대책까지 세워주시였다.
이렇게 새 집을 마련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인차 그곳으로 이사하라고 말씀하기 위해 이날 강량욱선생을 부르시였던것이다.
평범한 종교인의 신변에 대하여서까지 세심히 마음쓰시는 절세의 위인의 다심한 은정이 너무도 고마와 그는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장군님! 저의 신변까지 념려해주시니 감사한 마음 정말 이를데 없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반동들이 한낱 종교인에 불과한 이 사람까지야 해치겠습니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우리가 선생이 일본놈들의 가혹한 탄압속에서도 애국적지조를 굽히지 않고 민족적량심을 지켰기때문에 선생을 존경해서 그렇게 할뿐아니라 반동들이 날뛰는것을 보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때문에 사전에 안전대책을 취하자는것이라고 간곡히 타이르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선생은 나라의 중요한 간부라고, 새로운 집에 한번 나가보고 선생의 마음에 들면 인차 이사하는것이 좋겠다고 거듭 당부하신 후 새로운 집에 이사하면 한번 가보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그처럼 강조하시였지만 각성이 높지 못했던 강량욱선생은 설마 나쁜 놈들이 종교인인 자기에게까지 손을 대겠는가 하는 미련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이사하는것을 하루이틀 미루었다.
그런데 그것이 돌이킬수 없는 큰 후과를 가져올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할수 있었으랴.
3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그날 그는 교회일로 평양에 올라온 지방의 목사들과 함께 집에서 밤이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는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그들은 저마다 토지개혁에 대한 자기들의 소감을 토로하였다. 그럴수록 나라를 찾아주시고 천대받고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시는 절세의 위인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금할수 없어 자기들도 건국사업에 한몸바쳐 나서리라 결심들을 굳히며 앞으로 할 일들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그는 자정이 훨씬 지나서야 손님들에게 자기가 사용하던 웃방을 내주고 자신은 아래방으로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로부터 한 30분이 지났을가 할무렵 별안간 집안에서 요란한 폭음이 터지고 총성이 귀청을 째는듯 하더니 화약연기에 숨이 꽉 막히면서 방안기물들이 와작지끈 부서져 날아났다.
소스라쳐 일어난 강량욱선생은 너무나도 처참한 광경에 억이 막혔다.
방안은 온통 뒤죽박죽되였는데 금시 곁에서 자던 맏아들과 맏딸은 피투성이된채 숨져있고 안해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있었던것이다.
웃방으로 올라가보니 거기서도 정주에서 온 목사는 이미 숨을 거두었고 황주에서 온 목사는 중태에 빠져 의식을 잃고있었다. 강량욱선생도 팔에서 피가 흘러내리고있었다.
온 집안에 피가 랑자하게 흘렀다.
(어느 놈이 이 지경을 만들어놓았느냐, 어느 놈이! …)
교인들에게 사랑과 박애를 설교하던 그였지만 자식들의 죽음앞에서, 방금전까지 건국사업에 힘껏 나서자고 열변을 토하던 목사들이 피흘리며 쓰러진 참변앞에서 피가 끓어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새로 마련한 집에 빨리 옮기라고 하시며 각성을 높일데 대하여 그처럼 간곡히 당부하시던 수령님의 말씀이 가슴에 새겨져와 자신의 실책을 통탄하였다.
강량욱선생의 집이 반동들의 테로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에 안전한 곳으로 이사하도록 해주시였으며 부상당한 사람들에 대한 치료대책까지 구체적으로 세워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마음이 아프시여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과 함께 불행을 당한 그의 집을 몸소 찾아주시였다.
그날은 주체35(1946)년 3월 18일이였다.
그이께서는 슬픔을 누르며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강량욱선생과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시고 반동분자들의 테로에 아들딸을 잃었으니 얼마나 가슴아프겠는가고 하시면서 선생의 집에서 불행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에야 짬을 내였다고 위로의 말씀을 하시였다.
그러시고 강량욱선생과 부인의 부상당한 상처가 어떤가도 알아보시며 제때에 치료를 받아야 하겠다고 이르시였다.
강량욱선생은 죄스러운 감정을 안고 장군님과 녀사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고집을 쓰다가 사고를 저질러 뵈올 면목이 없다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의 심정을 모르지 않으시였지만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괴로우시여 우리가 선생에게 여러번에 걸쳐 집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보초도 세우자고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고, 우리의 권고를 듣지 않고 이것저것 재다가 큰일을 저질렀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몇번이나 이야기하였는가고, 참 아까운 아이들을 먼저 보냈다고 가슴아파하시였다.
괴로운 마음을 안고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던 수령님께서는 지금 해방은 되였으나 우리 나라 안팎의 정세는 의연히 첨예하고 복잡하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테로분자들은 새 민주조선건설을 위하여 활약하고있는 강선생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면서 허튼 소리를 돌리다못해 이번에는 비렬하게도 집에 수류탄을 던져 생떼같은 아들딸과 선생의 집에 왔던 목사를 살해하였다고 격하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이런 형편에서 우리가 어찌 한시인들 경각성을 늦출수 있겠는가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지금 우리는 계급적원쑤들과 치렬한 투쟁속에서 민주건설을 하고있습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시고는 놈들은 테로행위를 통하여 우리 인민의 투쟁기세를 꺾고 우리의 전진운동을 가로막아보려고 하며 우리가 맥을 놓고 주저앉기를 바라고있다고, 놈들은 교활하고 악착하며 저들의 반동적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살인, 방화 등 못하는짓이 없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그래서 우리가 집을 안전한 지대로 빨리 옮기고 보초도 세우라고 여러차례 권고한것이라고 하시며 수령님께서는 우리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때문에 일어나지 않을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분하다고 몹시 격해하시였다.
원쑤가 얼마나 악착하고 교활한가를 절감한 강량욱선생이여서 절세의 위인께서 그토록 가슴아파하시는 심정이 그대로 가슴에 닿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격분을 묵새기고있는 그에게 앞으로 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이번 일은 미국과 남조선반동들의 계획적인 작간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환상도 가져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물기가 가득 고인 눈길을 들고 다 자란 아들딸들과 가까이 지내던 목사를 잃고 내외가 부상까지 당하고보니 미국에 대한 환멸을 더더욱 금할수 없다고, 그리고 지금은 일이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이께서는 괴로와하는 그의 심정이 리해되시는듯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시며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시였다.
이윽고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아들딸이 희생되였다고 하여 울고만 있을수 없다고, 원쑤들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되며 놈들은 그것을 바라고있다고, 앞으로 이보다 더 준엄한 시련에 부닥칠수 있는데 그때도 주저앉아서는 안되며 그럴수록 일떠서서 원쑤놈들을 복수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그전에 우리가 산에서 싸울 때 생사를 같이하던 적지 않은 사람들을 잃었다, 그들은 다 꽃나이청춘이였다, 그때마다 우리들의 가슴은 미여지듯 아팠다, 그러나 우리는 맥을 놓고 주저앉은것이 아니라 슬픔을 증오로 바꾸고 일제를 쳐부시는 싸움에 성난 사자처럼 뛰여들군 하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이으시였다.
《원쑤들의 발악이 우심해질수록 불타는 복수심을 안고 힘차게 싸워나가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길에 나선 사람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이어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을 바라보시며 놈들이 제아무리 발악하며 날뛰여도 겁날것 없다고, 달려드는 놈들은 맞받아 쳐갈겨야 한다고,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이 이번 일로 하여 동요하거나 맥을 놓고 주저앉아있다고 하는데 선생까지 그러면 되겠는가고 하시며 이렇게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선생은 기가 꺾여 주저앉을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 이번 테로사건의 내막을 폭로하여 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국놈들은 조선인민의 벗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온 불구대천의 원쑤이다, 남조선에 기여들어서 《해방자》라고 한것은 어리석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놈들은 남조선뿐아니라 북조선까지 먹을 꿍꿍이를 하면서 벌써 촉수를 뻗치고있다, 3. 1인민봉기기념시위때 주석단에 수류탄을 던진 놈도 미국놈들이 들여보낸 테로단이며 이번에 집에 수류탄을 던진 놈도 같은 놈들이다, 미국놈들이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지만 사실은 원쑤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이 미국놈들의 얼림수에 넘어가 그들을 쳐다보는것은 나라와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이며 우리 나라를 또다시 외래제국주의자들에게 내맡기는 불순한짓이라고 일깨워줌으로써 그들이 미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새 조국건설에 떨쳐나서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슬픔에 잠겨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강량욱선생에게 자기 할바를 깨우쳐주는 말씀이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돌아가시기에 앞서 그에게 권총을 주시였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희생된 맏아들이 시내에서 진보적인사들에 대한 반동들의 테로가 우심해지고 집주변에도 이따금 수상한자들이 나타나군 하자 아버지의 신변이 걱정되여 자그마한 권총 한자루를 얻어온적이 있었다.
그런데 강량욱선생의 부인이 그것을 알고 목사네 집에 무슨 권총인가고 하면서 기어코 보안서에 가져다 바치게 하였던것이다.
사건이 일어나고보니 그것이 다 후회되였다.
(원쑤들은 목사라고 하여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목사였기때문에 더 피를 물고 달려든것이 아닌가. 총을 든 원쑤에게는 오직 총으로! …)
이것이 강량욱선생이 얻은 피의 교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한 사정을 아시고 권총을 주신것이였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황송해하는 그에게 장군님께서 주시는것이니 받으십시오, 그 권총을 늘 몸에 간수하셔야 합니다라고 다정히 이르시였다.
그후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와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힘이 되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슬픔을 조금이라도 가셔주기 위하여 마음쓰시였다.
이처럼 강량욱선생이 해방직후 불행을 당하고도 마음의 동요를 모르고 애국의 한길을 꿋꿋이 걸어나갈수 있었던것은 절세의 백두산위인들의 따뜻한 보살피심이 있었기때문이다.
사라져버린 우려
주체35(1946)년 5월 25일이였다.
이날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고나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강선생과 좀 의논하자고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우리 나라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으므로 앞으로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하며 그들과의 사업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토의해보자고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당시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체35(1946)년 3월 23일에 발표하신 《20개조정강》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할것이라고 천명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하고서도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다른 방법으로 자기들을 탄압하지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을 의연히 버리지 못하고있었다. 오랜 기간 일제의 악선전만 받아온데다가 교인들을 차별하고 종교자체를 적대적으로 대하던 《혁명가》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언동, 특히는 뿌리깊은 숭미사상이 그들의 사고를 흐리게 하고있었던것이다.
강량욱선생은 정권기관 책임일군의 한사람으로서, 더우기는 교직자로서 그들의 마음속그늘을 거두어줄수 있는 신통한 방도를 찾을 길 없어 안타까웠다.
그는 자기딴에 고심참담하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되였다는 생각에 기꺼이 좋다고 말씀올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조선에서 그리스도교가 가장 많이 퍼진 곳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이며 서울보다도 평양이 더 많을것이라고, 평양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라고 말할수 있다고, 그렇기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사업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미국군대가 들어와있는 남조선을 쳐다보고있는데 대하여 지적하시면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를 어떻게 하는가 보자,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지 않는가, 이렇게 우리를 의심하는것 같다고 말씀하시였다.
일부 교인들이 우려하는바를 어쩌면 그리도 신통히 알아맞히실가 하는 생각에 강량욱선생의 얼굴에는 어줍은 미소가 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을 망라하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함으로써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적인민들을 굳게 단결시키고 전민족의 단합을 이룩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서는 군중은 물론 그리스도교인들도 다 통일전선의 기치밑에 묶어세워야 하며 능히 그렇게 할수 있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주를 지향하는 절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믿음의 말씀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북반부의 정치를 반대해나서게 함으로써 조선사람들끼리 싸우게 하고 그것을 리용하여 저들의 침략적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미국의 속심을 까밝히시고나서 우리는 미국의 교활하고 음흉한 간계에 절대 속아넘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우리는 종교를 믿는것도 안 믿는것도 다 자유라는것을 잘 알려주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종교인들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무러한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것을 그들이 철저히 믿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는 수령님을 우러르는 강량욱선생의 귀가에는 한달전에 그이께서 하신 말씀이 되새겨졌다.
이미 여러 기회에 앞으로 수립될 인민정권은 신앙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한다는데 대하여 명확히 밝혀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4월 19일 함경남도안의 정당, 사회단체일군들과 무소속인사들을 만나신 자리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일부 종교인들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의 종교시책에 대하여 의심을 가진다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인민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있습니다. 우리 인민정권하에서는 누구든지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으며 반면에 종교를 믿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종교를 믿는다는 미명하에 숭미사상을 전파하는것을 반대할뿐입니다.》
수령님께서는 생각에 잠겨있는 강량욱선생에게 종교인들과의 사업에서 특별히 류의할것은 그들을 경솔하게 대할것이 아니라 인내성있게 신중하게 대하는것이라는데 대하여 밝혀주시였다.
목사인 그조차도 이에 대하여 전혀 생각해보지 못하였던 문제였다.
그래서 그이께서 하시는 한마디한마디의 말씀이 다 가슴에 새겨졌고 종교를 대하는 진정한 공산주의자들의 립장과 태도가 리해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였다가 지난날 조선에서 그리스도교가 미국선교사들에 의하여 전파되다나니 교인들속에서 미국에 대한 숭미사상이 생겨나게 되였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들으며 강량욱선생은 지난날 마치도 《하느님의 사도》로 자처하던 미국선교사들의 모습을 되새겨보았다.
지난날 이 땅에 발을 들이민 미국선교사들은 미국을 천당처럼 선전함으로써 저들에 대한 환상을 류포시켰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략탈해간 수많은 재부들중에서 몇푼 안되는 돈으로 학교와 병원 같은것을 차려놓고 조선사람들을 도와주는척 하면서 미국을 숭배하도록 하였다.
미국은 또한 선교사들을 통하여 장차 조선침략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서도 광분하였다.
미국선교사들의 왕궁출입과 《자선사업》, 《포교》활동의 전 과정은 곧 그들의 정탐행정이였다. 미국선교사들의 정탐활동에 대하여 미국의 한 출판물까지도 《… 미국에서의 중국, 일본 및 조선과 기타의 대양건너편 나라들에 관한 정보의 주요원천으로 된것은 선교사들의 서한과 통보였다.》(비거스토프 《합중국과 극동》 15~16페지)라고 까밝히고있다.
미국선교사들의 정체를 알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들이 마치도 조선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는것으로 잘못 인식하였다.
미국선교사들에 대한 숭배는 곧 미국에 대한 숭배, 미국을 섬기는 숭미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였으며 결국 해방된 후에도 일부 교인들은 미국군대와 미국선교사들이 들어와있는 남조선을 넘겨다보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강량욱선생에게 우리는 미국선교사들이 처음부터 조선사람을 도와주려고 온것이 아니라 장차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을 닦으며 정탐행위를 감행하기 위하여 파견되여 와있었다는것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어야 한다고, 미국선교사들의 이러한 정체를 발가놓아야 그들이 미국을 다시는 믿지 않게 되고 미국에 대한 환상도 깨뜨려버릴수 있다고 강조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종교인들에게는 조국이 있어야 하며 식민지교인들에게는 사실상 신앙의 자유가 없고 자주독립국가의 신자만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을수 있다는것을 똑똑히 알려주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그들이 조국이 귀중하다는것을 알게 함으로써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미워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종교인들에게도 조국이 있다!
제 나라를 빼앗겼던탓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고 교파이름마저 빼앗기지 않으면 안되였던 지난날의 일들을 되새겨보며 강량욱선생은 그 말을 속으로 몇번이고 곱씹어보았다.
그럴수록 그 깊은 뜻이 안겨와 마음속으로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에게 교인들에게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을 잘 알려줌으로써 그들속에서 숭미사상을 뿌리뽑을데 대하여서와 민족적량심을 가진 목사, 장로들과의 사업을 잘하여 그들이 일반 교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데 대하여 그리고 각성되지 못한 그리스도교인들을 잘 교양하여 그들이 새 민주조선건설에서 우리와 함께 손잡고 나아가도록 할데 대한 문제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인들과의 사업에서 나서는 문제들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그이의 집무실을 나선 강량욱선생은 자기가 그처럼 고심하던 문제들이 순간에 풀리여 가슴속에 덧쌓였던 시름들이 단번에 사라지고 눈앞이 환히 열리는것 같았다.
그후 강량욱선생과 민족적량심을 지닌 목사, 장로들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위대한 수령님의 이날의 말씀사상을 널리 알려주어 그들이 새 조국건설사업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는 한편 아무런 걱정없이 신앙생활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나가도록 하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벌려나갔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집권하면 신앙의 자유가 어떻게 되겠는가를 우려하던 교인들이 그것이 공연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는것을 점차 깨닫게 되였다.
어떤 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은 옳은 일을 하기때문에 위선적인 부르죠아정객들과는 달리 모든것을 숨기지 않고 공개한다더니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해도 행복한 생활을 마련해준 내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내용의 기도를 하면서 건국사업에 자신들의 애국의 열정을 다 바쳤다.
한편 각지의 주일학교와 성경학교, 신학교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였으며 신자들의 적극적인 방조밑에 오랜 교회당들을 개축, 증축하거나 새로 짓기도 하였다. 이무렵 평안북도 룡천군에서 룡암포제1교회와 중앙교회가 증축되고 신암교회, 다사도교회, 무산교회들이 새로 일떠선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라고 할수 있다.
청진에서 진행된 부흥회는 공화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어떻게 보장되고있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1949년 7월초였다.
그무렵 함경북도의 청진제1교회에서는 황해남도 신천에 있는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가지려고 하였다. 그 목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결성대회에 참가하여 토론하였을뿐아니라 중앙위원회 위원으로까지 선거된 목사였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결성대회 주석단에 앉았던 목사가 부흥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교인들이 청진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부흥회에 참가하려는 교인들의 수가 예상밖에 갑자기 불어나다보니 교통운수에 지장을 주게 되였다. 일부 교인들이 나라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종교활동에만 치우쳤던탓에 생긴 일이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당 기관에서는 교통질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일면만 생각하면서 그들을 단속하였다.
당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던 강량욱선생은 이것을 알고 한동안 난감해하였다.
이 모든 사정을 헤아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교인들의 부흥회가 성과적으로 진행되도록 해당한 대책을 몸소 취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만나주시고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통질서를 문란시킨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시면서 그렇다고 하여 부흥회까지 못하게 한것도 잘못된 일이라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리고는 청진제1교회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의 부흥회를 가지도록 하는것이 좋겠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러되 교통질서는 지키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청진제1교회에서 조직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부흥회와 관련하여 내무성(당시)에 이야기하겠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즉시 내무성(당시) 책임일군을 전화로 찾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제기된 자료를 알려주시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통질서를 문란시킨것은 옳지 않으므로 이에 대하여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계속하여 수령님께서는 그러나 이러한 문제때문에 종교인들의 부흥회를 방해한것은 잘못되였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며 공화국헌법에도 신앙의 자유가 명기되여있는데 법을 집행하는 동무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하면 광범한 군중을 잃어버릴수 있다는데 대하여 엄하게 지적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청진시내무서(당시)에 이야기하여 교통질서를 세우되 청진제1교회에서 조직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부흥회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데 대하여 지적하시였다. 그리고 청진시에서와 같은 현상이 다른 도, 시, 군들에서도 나타날수 있으므로 해당한 대책을 세우라고 강조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서 제기되는 자그마한 문제도 다 풀어주시며 신앙의 자유가 철저히 보장되도록 관심을 돌려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그리하여 함경북도그리스도교도련맹위원회에서는 청진시그리스도교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결성지지환영대회를 열고 부흥회를 가지였다.
여기에서 신천에서 온 목사는 성대하게 열렸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결성대회소식을 그대로 전하고 교인들을 향해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 적극 떨쳐나서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후날 강량욱선생은 이때를 돌이켜볼 때마다 깊은 감회를 가지고 《절세의 위인의 세심한 보살피심이 있었기에 해방후 북반부에서는 신앙의 참다운 자유가 보장될수 있었다.》고 이야기하군 하였다.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의 결성
해방된 조국땅에 새 민주조선을 건설하는것은 어렵고도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있는 방대한 과제였다. 이것은 어느 한 당파나 계급의 힘만으로는 이룩할수 없는 전민족적인 과업이였다.
이 중대한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자면 새 조국건설을 지향하는 각당, 각파, 각계각층의 민주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모든 힘을 건국사업에 총동원하여야 하였다.
더우기 해방직후 애국과 매국사이에 치렬한 투쟁이 벌어지고 남조선을 강점한 미국이 그리스도교인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갖은 책동을 다하고있던 조건에서 교인들이 건국사업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는것은 중요한 문제로 나서고있었다.
항일전의 나날 로동자, 농민뿐아니라 애국적종교인들까지 반일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묶어세우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해방직후 광범한 근로대중을 민주주의기발아래 결속하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시면서 종교인들을 애국의 한길로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이 땅우에 건국의 마치소리가 높이 울려퍼지던 1946년 가을이였다.
그즈음 강량욱선생은 한가지 문제에 생각을 모으고있었다.
당시 북반부의 광범한 민주력량은 계급별, 계층별로 통일적인 대중단체들을 결성하고 새 조선건설사업에 자기들의 애국의 구슬땀을 다 바쳐가고있었다.
북반부의 청년들은 북조선민주청년동맹(1946. 1. 17)에, 로동자들은 북조선로동조합총련맹(1945. 11. 30)에, 농민들은 북조선농민조합련맹(1946. 1. 31)에, 녀성들은 북조선민주녀성동맹(1945. 11. 18)에 망라되여있었고 북조선공업기술총련맹과 북조선예술총련맹, 북조선기자동맹과 같은 민주주의적사회단체들도 조직되여 광범한 민주력량을 건국사업에 조직동원하고있었다. 지어 불교도인들도 북조선불교도련맹(1945. 12. 26)을 결성하고 애국사업에 헌신하고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때까지 자기들의 통일적인 조직을 내오지 못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등 여러 계파로 나뉘여 제각기 활동하고있었다. 또 장로교만 놓고보아도 일제식민지통치시기 조선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강요당함으로써 우상을 숭배하였기때문에 과거의 교회와 교직을 무효로 선포하고 새로 복구,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밑에 복구파와 재건파로 갈라져 서로 옥신각신하고있었다.
이 모든것은 교인들을 새 조국건설을 위한 애국위업에 불러일으키는데서와 광범한 력량을 민주주의기발아래 묶어세우기 위한 사업에 일정한 영향을 주고있었다.
이것을 해결하자면 계파를 초월하여 중앙으로부터 하부말단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체계를 이룬 교인들의 통일적인 조직을 내오는것이 중요하였다.
이것은 비단 강량욱선생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였다. 그는 여러 교직자들과 교인들을 만나보는 과정에 자기의 생각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였다.
그래서 강량욱선생은 뜻을 같이하는 교직자들과 함께 계파와 주의주장을 초월하여 민주의 새 나라를 건설하는 애국위업에 자기들의 지성을 다 바쳐나가도록 교인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조직을 뭇는 사업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준비위원회를 내오는 한편 여러 목사, 장로들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조직결성의 취지에 대하여 해설해주면서 그 준비사업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량심적인 교직자들과 교인들이 새 조선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애국의 일념밑에 그리스도교도련맹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벌리고있다는것을 아시고 그들의 사업과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특히 수령님께서는 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사업을 맡아보는 어느 한 목사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과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 목사로 말하면 해방전에 중국에서 종교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 영향력이 컸다.
그는 조국에 돌아와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건국로선을 적극 지지하면서 교인들속에서 정열적으로 활동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량욱선생에게 그 목사가 그리스도교인들속에서 영향력이 있고 또 결성준비위원회 위원장인것만큼 그와의 사업을 잘하며 그를 적극 도와줄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그리고 그가 평양에 올라온 기회에 면식이 있는 목사, 장로들을 만나 회포를 나눌수 있도록 간담회를 마련해줄데 대한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강량욱선생으로부터 절세의 위인의 믿음이 어린 말씀을 전해들은 그 목사는 평양시내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김일성장군님은 과시 온 민족의 어버이이시요!
나는 그이의 품이 이렇듯 하늘같으신줄 몰랐소. 예로부터 따뜻한가 하면 다심하고 뜨거운가 하면 진실한 사랑을 어버이사랑이라고 했거늘 내 이제야 진정한 인간사랑의 품에 안겼소.》
그후 그는 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을 위하여 년로한 몸이였지만 여러 기회에 교인들을 만나 일찌기 예수께서도 로마병사들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는 마지막순간에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나가 되기를 념원하여 기도하지 않았는가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그 시각 예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것은 교인들의 하나됨이였다고 하면서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건국사업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열과 성을 다 바치기 위해 하루빨리 그리스도교도련맹을 결성하고 그 주위에 뭉칠데 대하여 호소하군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애국의 한길을 끝까지 걸어가려는 량심적인 교직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하여 1946년 11월 28일당시 평양시 서문밖교회에서는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식이 진행되게 되였다.
결성식에는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을 지지하는 그리스도교 각 교파들의 교인들이 참가하였다.
결성식에서는 보고와 토론들이 진행되였으며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결성을 온 세상에 공포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이어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렇게 되여 그리스도교인들은 자기의 당당한 조직을 가지고 건국사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강량욱선생을 자주 만나주시며 련맹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를 지향하는 자기의 사명에 맞게 일해나가도록 보살펴주시였다.
1949년말이였다.
당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던 강량욱선생은 련맹중앙위원회청사문제로 하여 애를 먹고있었다.
그때 련맹중앙위원회청사는 2층짜리 건물로 되여있었는데 1층은 사무실로 리용하였고 2층은 직원들의 살림집으로 쓰고있었다.
그런데 민주당중앙위원회에서 청사를 같이 리용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제기해왔다. 나라가 해방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기관들의 청사문제가 긴장되여있었던것이다.
그 요구를 물리칠수 없었던 그는 2층살림집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해결방도를 찾으려고 위대한 수령님을 찾아갔다.
그날은 주체38(1949)년 12월 2일이였다.
예전처럼 강량욱선생을 따뜻이 맞아주신 수령님께서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나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청사일부를 민주당에 내주기로 한것은 정당, 사회단체들간에 좋은 일이라고 본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이 추운 겨울날에 살림집들을 이사시켜 일군들의 생활에 불편을 주어서야 되겠는가고, 좋은 방도는 다른 청사를 구하는것인데 지금 청사문제가 좀 긴장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노력하면 청사 하나쯤 못 얻겠는가고, 노력해보자고 하시면서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중앙위원회청사로 알맞춤한 집이 있는가 알아보겠다고 하시였다.
그로부터 며칠후 강량욱선생을 다시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련맹중앙위원회청사로 리용할만 한 집을 한채 구하였는데 선생의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다고 겸허하게 말씀하시면서 청사로 쓸 건물에 대하여 설명해주시였다.
수령님으로부터 건물에 대한 설명을 들은 강량욱선생이 거듭 고맙다고 인사를 올리자 그이께서는 비록 목조건물이지만 2층이기때문에 기관맛이 나고 위치도 좋다고, 건물의 내부구조도 괜찮고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있다고 하시였다.
절세의 위인의 이렇듯 세심한 보살피심이 있어 이 땅의 애국적인 그리스도교인들은 련맹의 두리에 굳게 뭉쳐 새 민주조선건설과 나라의 통일을 위한 길에 자기의 정열을 다 바칠수 있었다.
그무렵 미국과 그 주구들은 인민이 나라의 주인된 공화국에서 새 생활, 새 제도가 활짝 꽃펴나고 그 위력이 날로 장성강화되자 공화국을 요람기에 압살하기 위해 전쟁준비를 로골적으로 다그쳤다.
조성된 정세는 모든 애국적민주력량을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의 기치밑에 하나로 굳게 묶어세워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갈것을 요구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정세의 요구로부터 북과 남의 광범한 통일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미국의 전쟁도발책동을 짓부시며 나라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도록 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조선민족은 하나의 피줄로 련면히 이어온 유구한 단일민족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은 결코 외세에 의하여 둘로 갈라질수 없다.
이러한 웅지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교시하시였다.
《조국을 사랑하고 통일을 념원하는 애국적인민들, 특히 남북조선의 진보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을 하나의 민주주의적력량으로 총집결하기 위하여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여야 합니다. 더우기 우리 나라에 유일한 합법적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조건에서 남북조선의 진보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을 총집결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는 문제는 더 미룰수 없는 절박한 문제로 나서고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 당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할것을 주장하여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8(1949)년 5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 제37차회의를 비롯한 여러 기회에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은 전조선의 애국적인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들이 자원성의 원칙에서 망라되는 조직으로 되여야 한다는것과 조국전선의 사명과 임무는 조국의 통일과 완전독립을 달성하며 나라의 민주주의적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는데 있다는것을 천명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민족대단결사상에 공감한 북과 남의 민주주의정당, 사회단체들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준비위원회를 뭇고 여러차례의 회의끝에 6월 하순 평양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할것을 결정하였다.
모든 통일애국력량을 하나로 묶어세워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공화국정부의 노력을 적극 지지해온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에 자기의 대표를 파견할것을 결정하고 이 사업을 밀고나갔다.
그리하여 주체38(1949)년 6월 하순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결성대회가 온 겨레의 커다란 관심과 기대속에 성대히 열리였다. 대회에는 북과 남의 좌익, 중간, 우익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 인사들, 재일본조선인련맹 등 70여개 정당, 사회단체대표 70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 북조선그리스도교도련맹 대표로 참가하였던 어느 한 목사는 대회주석단성원으로 선거되였다. 그는 대회보고와 공화국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며 남조선에서 미군을 철거시키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에 그리스도교인들도 적극 동참하겠다는 내용의 토론을 하여 참가자들의 열광적인 박수까지 받았다.
대회에서는 온 나라의 모든 애국력량이 단합된 힘으로 전쟁의 위험을 막고 조국의 자주적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북조선민전과 남조선민전을 통합하고 거기에 조국의 통일독립을 바라는 그밖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새로 망라하여 전국적인 민족통일전선의 상설적조직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전체 조선인민에게 보내는 조국의 평화적통일방책에 관한 선언서가 채택되였다.
선언서에는 조선인민자신이 조선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조선에서 미군을 즉시 철거시키고 비법적인 유엔조선위원단을 해체하며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중앙정부를 조직할데 대한 평화적조국통일방책이 천명되여있었다.
평화적조국통일방책은 진심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의 통일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접수될수 있는 가장 공명정대한 통일방안인것으로 하여 북과 남의 온 겨레는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해나섰다.
북반부에서는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 기업가, 종교인 등 각계각층 군중이 직장대회, 군중대회, 가두집회를 열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언서를 지지환영하며 새로운 투쟁을 결의하는 결정서를 채택하였으며 각계 인사들은 방송과 출판물을 통하여 련이어 담화를 발표하였다.
남조선의 각계각층 인민들도 평화적조국통일방책을 전적으로 지지환영하면서 조국전선의 제의를 실현할것을 강력히 요구해나섰다.
인민들의 대중적인 진출의 영향밑에 남조선괴뢰군안에서도 반《정부》감정이 급격히 높아졌는데 괴뢰군장병들속에서는 집단적으로 또는 비행기와 해군함정을 몰고 의거입북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남조선괴뢰군의 2개 대대 병사들이 무기를 가지고 북반부로 의거한것도 이무렵이였다.
미국은 할수없이 1949년에 일으키려던 침략전쟁을 뒤로 미루지 않을수 없었다.
강량욱선생은 단결하면 이기고 분렬되면 망한다는 력사의 철리를 깨우쳐주시며 북과 남의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당, 사회단체들을 하나로 묶어세워 미제의 전쟁책동을 짓부셔나가시는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위인상에 더욱 매혹되여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위한 투쟁에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칠 결의를 굳게 다지였다.
크나큰 도량에 감동되여
그윽한 꽃향기가 만발하던 주체37(1948)년 4월 14일이였다.
그날 아침 강량욱선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고있었다.
곧 열리게 될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준비로 들끓는 모습들이 시내의 곳곳에서 언뜻언뜻 보였다.
북과 남의 각계 인사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앉아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기 위한 방도를 의논하게 되였으니 오랜 력사의 도시 평양이 어찌 설레이지 않을수 있으랴.
그가 남북련석회의준비와 관련하여 부르실것이라는 생각을 안고 집무실에 들어서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여느때와 같이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그에게 자리를 권하신 수령님께서는 심중하신 어조로 남조선에서 김구가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평양에 도착하는데 선생님이 그를 한번 만나보아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강량욱선생은 마음속으로 크게 놀랐다.
김구선생으로 말하면 지난날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상해림시정부를 미래의 조선정부로, 자기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 내세우면서 해방이 되자 서울에 들어와 한국독립당 당수로 리승만과 《정권》쟁탈전을 벌려온 완고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러한 그가 북반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주관하는 회의에 참가하러 온다니 강량욱선생으로서는 쉬이 믿어지지 않았던것이다. 더구나 남조선에서 들어온 반동들의 테로에 의해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은 강량욱선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따뜻한 시선이 자기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무엇인가 기색을 살피시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강량욱선생은 인차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하며 수령님의 모습을 우러렀다.
자기의 불찰로 혹시 수령님의 심중에 부담을 끼쳐드리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으로 그의 가슴속에서는 조용한 파동이 일어났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 김구가 자기의 과거를 백지로 해준다면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겠다고 제기하여왔기때문에 우리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의 눈앞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날로 짙어가는 민족분렬의 위기에 대처하여 나라를 살리고 민족을 살릴수 있는 방도를 토의할 남북련석회의를 발기하시고 그 성과적실현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오시던 나날들이 돌이켜졌다.
미국과 그 주구들의 민족분렬책동이 더욱 로골화되자 온 겨레는 이를 결사반대해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마음을 담아 민족의 분렬을 방지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는 남북련석회의를 발기하시고 그 실현을 위해 온갖 심혈을 다 바치시였으며 남조선의 각계 인사들에게 초청장까지 보내주시였다.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초청장을 받아안은 남조선의 수많은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회의에 참가할 의향을 표명하자 김구, 김규식선생들을 비롯한 남조선의 우익지도급인사들도 뒤늦게나마 참가의사를 표명해나섰다.
그러자 급해난 미국은 김구, 김규식선생들의 북행길을 각방으로 방해해나섰다.
그러나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주신 4월남북련석회의의 특별초청장을 가슴에 안은 김구, 김규식선생들은 북행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북행반대파들의 론거를 재음미해보기도 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정말 우리들의 어지러운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믿어주실가?)
그리하여 4월 어느날 그들은 자기들의 파견원들을 평양으로 보내면서 김일성장군님께 남북련석회의에 꼭 참가하겠다는 내용과 반대파들의 방해책동을 고려하여 련석회의개최날자를 며칠간 미루어주실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올리게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쁘신 속에서도 그들을 몸소 만나주시고 과거지사를 우려하는 김구선생과 김규식선생의 심정을 깊이 헤아리시여 우리는 지난 기간 나라와 민족앞에 어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뉘우치고 새 출발을 하려는 사람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고, 이것은 우리가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산에서 싸울 때나 오늘에나 변함이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국토량단과 민족분렬의 엄중한 위기를 타개하자는 이 마당에서 구태여 과거를 론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거를 가지고 시야비야 시비를 가르는것은 큰일을 그르치게 하는 옹졸한 태도이다, 과거불문의 원칙에서 지난날의 일을 다 백지화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또한 김구, 김규식선생들의 제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시여 4월 14일로 정했던 남북련석회의개최날자를 4~5일간 연기하는 조치까지 취해주시였다.
이에 크게 감동된 김구, 김규식선생들은 반대세력의 압력을 물리치고 공개적으로 북행길에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생각에 잠겨있는 강량욱선생을 바라보시며 잠시 동안을 두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구가 오래동안 반공사상에 물젖어있었기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선생님이 그를 먼저 만나서 이야기하는것이 여러가지 의미에서 좋을것 같다는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강량욱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길에 나선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건 과거를 백지화하고 한품에 안아주시는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도량에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한편 강량욱선생은 자신에 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에 다시금 심장이 젖어들었다.
사실 강량욱선생은 이름난 혁명가가 아니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속에서 그리스도교 목사로, 민주인사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때문에 일생을 반공으로 살아온 김구선생에게 조선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통일위업을 성취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투철한 립장과 북반부에서 실시되는 인민적시책들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려주는데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강량욱선생이 적임자였다고 말할수 있다.
강량욱선생은 자기를 개인의 세속적인 감정의 울타리를 넘어선 준비된 인간으로 보고계시는 수령님의 믿음과 은정이 너무도 고마워 《장군님의 높은 신임에 꼭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였다.
그후 강량욱선생은 평양에 도착한 김구선생을 따뜻이 맞이하였으며 평양에 머물러있는 전기간 그와 동행하면서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에 대하여 그리고 북반부에서 실시되고있는 인민적시책들과 부강조국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드높은 열의와 투쟁소식에 대하여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우리 민족자체의 힘으로 통일위업을 이룩하고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시려는 절세의 위인의 견결한 립장과 투철한 의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강량욱선생의 이야기는 아무런 사심이나 의혹도 없이 김구선생의 뇌리에 그대로 새겨졌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뵈옵고 수령님께서 그를 진심으로 열렬히 환영해주시면서 그가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한것을 애국적장거로 평가해주시자 김구선생의 감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회의가 끝나 숙소에 돌아온 김구선생은 벅차오르는 흥분을 금할수 없어 이 세상 천지를 다 뒤지며 찾아도 김일성장군님 같은 뛰여난 령도자를 찾지 못할것이다, 나라를 통일하는것도 통일후에 나라를 륭성발전시키는것도 다 타국사람의 간섭이 없이 조선사람자체가 해야 한다고 하시니 이보다 귀한 말씀이 또 어데 있겠는가고 자기의 심중을 터치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뵈옵고 그이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에 매혹된 김구선생이 자기의 모든것을 그이께 맡겨버렸던것이다.
그러니 강량욱선생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혹도 없이 더더욱 그의 가슴에 움직일수 없는 진리로 새겨지게 되였다.
김구선생이 머리속에 남아있던 반공의 마지막잔해마저 훌훌 털어버린것은 강량욱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만경대고향집과 혁명자유가족학원(오늘의 만경대혁명학원)을 돌아보고 온 후였다.
김구선생이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의 할아버님이신 김보현선생님께서는 웃옷을 벗어놓으시고 집일을 하고계시였다.
마당에 들어선 김구선생은 이 자그마한 초가집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신 고향집이라는데 놀랐으며 더우기 수령님의 할아버님께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계시는 사실에 눈이 둥그래졌다.
헛간에 놓여있는 모지랑호미며 나무쟁기들, 방안에서 싱싱하게 자라고있는 고구마싹이며 소박한 가구들과 부엌세간들은 평범한 농가의 살림형편을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김구선생은 두손으로 할아버님의 거치른 손을 모아잡고 손주님을 일국의 수령으로 두신분이 년로하신 몸에 왜 아직도 이렇게 험한 일을 하시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내 손자는 그렇지만 나는 철 알아서부터 한평생 농사로 늙어왔은즉 농사는 천하지대본인데 내가 농사를 잘 지어야 손자가 보는 나라의 정사도 잘될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은 김구선생을 크게 탄복케 하였으며 이루 헤아릴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하였다.
김구선생은 오늘의 만경대혁명학원에 갔을 때 그곳에서 또다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실에 부닥치게 되였다.
그것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전에서 희생된 혁명가들의 아들딸들과 함께 민족주의자들의 자녀들까지 데려다 공부를 시키고계시는 사실이였다.
김구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한때 독립군 사령이였던 량세봉의 아들이 이곳 학원에서 공부하고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잘 믿어지지 않아 그를 만나보기까지 하였다.
북반부의 약동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리고 강량욱선생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대하여 더욱 깊이 알게 된 김구선생은 사람들에게 김일성장군님은 훌륭한분이라는것 특히 군사에 매우 뛰여난분이라는것을 예전부터 알고있었으나 이렇게까지 훌륭한 수령이신줄은 미처 몰랐다고, 만백성을 한몸에 안아 보살펴주시면서 나라를 통일할 방략까지 빈틈없이 짜놓고 세상대세를 움직이니 김일성장군님은 과연 하늘이 내신분이라고 말하였다.
강량욱선생과 김구선생은 그사이 퍼그나 가까와졌다.
김구선생은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강량욱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양체류기간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강목사를 보면서 당신을 그렇게 내세워준 김일성장군님의 인간상을 보았소.
하나를 보면 열을 알수 있다고 정녕 그분은 만민을 안아주는 넓은 도량과 포옹력을 지닌 위인중의 위인이시요.》
절세의 위인의 대해같이 넓은 도량과 포옹력, 한없이 고결한 풍모에 그토록 매혹되였기에 김구선생은 그후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통일애국의 길을 꿋꿋이 걸어나갈수 있었다.
김구선생만이 아니였다.
당시 남북련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반부에 들어온 우익정객들속에는 오래동안 교회에서 장로로 있은 김규식선생도 있었다.
김규식선생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사람이였다. 봉건정부의 권력을 둘러싸고 치렬하게 벌어진 당파싸움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는 6살에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원에 들어간것이 계기가 되여 그리스도교신자로 되였으며 그후 미국에서 류학하고 서울로 돌아와 새문안교회 장로로까지 되였던 사람이였다.
이러한 그였기에 평양에 왔던 걸음에 김구선생과 함께 북반부의 종교실태를 알아볼겸 교회도 돌아보고 례배를 볼 결심을 하게 되였다.
강량욱선생은 요구대로 그들을 서문밖교회로 데리고 갔다. 서문밖교회는 교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례배를 보는 교회로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에 적합한 곳이였다.
강량욱선생은 교회내부도 보여주고 교인들이 모여 례배하는것도 다 보여주었다. 그리고 례배하기 위해 교회당에 모여온 교인들앞에서 그들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김규식선생은 교회참관을 통하여 북반부에서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있는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였고 그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의 위인상에 대하여 다시한번 똑똑히 알게 되였다.
김규식선생이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도량과 고결한 풍모에 매혹되였기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판가리하던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주저없이 위대한 수령님의 품을 찾아 북행길에 오를수 있었고 생의 마지막까지 자기를 보살펴주신 그이를 우러르며 혼신의 힘을 모아 이런 시를 남길수 있었다.
오호라!
위대하도다 현명하도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
이내 인생을 구원해주셨소
이 한몸 죽은들 천만년 잊을손가
자애깊으신 김일성장군님!
강량욱선생은 후날 김규식선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기회에 그가 생의 마지막시기에 남긴 이 시는 오늘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민족의 위대한 태양의 품에 안기면 값높은 애국의 인생을 살수 있고 죽어서도 빛나는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깊이 새겨주고있다고 말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