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장
갑자기 대궐안팎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지더니 숱한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개경장안의 곳곳에서도 등불들이 펑끗펑끗 솟아오르고 사람들이 북적북적 끓어번지였다.
2월의 연등회가 열린것이였다.
고려시기 가장 큰 명절로서는 봄의 연등과 여름의 류두, 가을의 팔관을 꼽는다.
연등은 선조의 명복을 빌고 그 여흥으로 화려한 식전을 벌리는것이요, 류두는 정화력에 의해 몸을 깨끗이 씻고 죄를 소멸한다는것이요, 팔관은 천신을 제사지낸다는것인데 고구려시기 가을제천에서 유래된것이였다.
이 세가지 명절중에서도 제일로 요란스러운 명절이 연등명절인데 그연등중에서 가장 야단스러운 대목이 지금 벌리고있는 이른바 환궁악식전이 거행되는 때였다.
절에 행차하여 조종(왕실의 선조)의 명복을 비는 이른바 봉은행향을 마치고 돌아오는 임금과 그뒤를 따르는 찬란한 조복차림의 조정관리들.
그림과 글씨로 장식된 포장과 병풍이 수없이 드리워있는 도성의 아홉거리.
그 거리를 지나온 임금의 행렬이 홍례리빈문으로 들어서자 승평문밖에서 기다리고있던 궁녀들이 락화마냥 분분히 흩어져나오며 홍례리빈문의 환궁악신전, 즉 돌아오는 임금을 궁악으로 맞이하는 의식을 벌린것이였다.
대궐안은 물론 온 개경장안이 등불과 춤과 노래소리로 뒤덮였건만 거기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듯 묵묵히 남산재를 내려선 두 량반은 남문으로 향한 행길로 곧바로 들어섰다.
박위와 최칠석이였다.
한참이나 묵묵히 걸음을 재우치던 칠석은 주위에서 번쩍이는 등불과 노래소리가 역스러운듯 벌컥 청을 높이였다.
《그러니 해암은 이밤중에 기어이 귀향길에 오르겠다는게요?》
박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그럼, 가야지. 쫓겨난 사람이 하루라도 여기서 더 묵으면 피차 부담스럽지 않겠소. 헛허허.》
칠석은 지금의 현실이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듯 휑하게 눈을 흡뜬채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금후에야 북소리, 장고소리, 노래소리가 울려나오고 오색령롱한 등 불빛이 흘러나오는 대궐쪽에 대고 허허탄식같은 소리를 꺼내였다.
《허어― 죽백지공을 세운 출중한 장수를 아무 죄도 없이 쫓아내고도 무엇이 그리 즐거워 저 야단들인고.
송편으로 목을 딸 일이로다.》
리성계는 지난해 11월에 창왕을 왕위에서 밀어내였다.
리유는 그가 왕족의 후손이 아니라 공민왕시절 이른바 국사로서 정계를 쥐락펴락했던 신돈의 자식이라는것이였다.
하고는 왕실의 먼 친척벌이 되는 공양왕을 왕좌에 올려앉히였다.
이것은 물론 리성계가 진정으로 왕실의 정통성을 계승하려는 충심의 발현이 아니였다.
명백히 말하여 왕권찬탈을 위한 또하나의 최종적인 음모의 실현에 지나지 않았다.
리성계는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을 올려세우는데서 공을 세웠다는 명목으로 자기를 포함한 9명의 신하들을 일등공신으로 엄명하도록 하였다.
그중에는 박위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리성계는 진정으로 박위를 크게 내세우고싶어 그를 일등공신의 계렬에 들게 했는가.
아니다.
대마도원정후 조정백관은 물론 백성들까지도 박위는 민족사에 길이 빛날 정의의 원정으로써 나라의 존엄을 떨치고 국가와 백성의 안녕을 수호한 일세의 용장이라고 떠들었다.
성계는 이러한 조의와 민심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그는 공양왕에게 박위를 일등공신으로 봉하게 하고는 그렇게 한것으로 하여 더욱 불안해했다.
이제는 가급적으로 자기가 직접 박위를 제거하는 일에 손을 대야 했다.
달과 달이 흐르고 해가 바뀌자 리성계는 사헌부에 은밀히 지시하여 박위가 원정을 준비하던 시기에 소모한 군량과 각종 재물들, 그것으로 하여 국세납부에 조성된 혼란상을 엄밀히 조사하도록 했다.
사헌부가 애초에 생사람을 잡을 잡도리를 하고 접어든데다 원정준비에 적지 않은 군량과 재물이 소모된것은 명백한 사실이라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덩어리가 큼직한 《죄상》들이 연줄연줄 묻어나왔다.
박위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자기의 《죄상》을 전부 인정하였다.
결국 《대마도원정은 의의가 큰 군사작전이였으나 준비단계에서 물자의 과잉소비와 비법적인 군령란포같은것은 후날을 징계하기 위해 죄를 따지지 않을수 없다.》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박위의 관직은 삭탈되였다.…
박위는 입술귀를 꾹 짓문채 휘적휘적 걸음을 놓았다.
연해 무거운 한숨을 내불며 박위를 따라서던 칠석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해암, 이제 귀향을 하거든 무엇을 하실 생각이요?》
《농사를 지으면서 고을의 젊은이들에게 군사를 가르치려 하오.》
《역시 해암은 어쩔수 없는 사람이구려.
하지만 해암과 같은 귀재가 어떻게 벽촌에 골박혀 농사나 지으면서 중년의 귀중한 시절을 허무하게 보낸단 말이요.
자고로 공에는 상이 따르기마련인데 그처럼 큰공을 세운 장수에게 이처럼 혹독한 벌을 씌워 밀어내니 이런 기막힌 변이 어디 있소?!》
생각할수록 분이 치밀어오른 칠석은 점점 청을 높이였다.
박위는 여전히 쓸쓸한 웃음기가 떠도는 얼굴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미 받을만 한 상은 다 받았다고 생각하오. 이미전의 전하께서 내린 상도 큰것이지만 이제는 우리 땅에 왜구가 얼씬 못하니 그보다 더 큰 상이 어디 있겠소.
나는 내 인생에 세운 뜻을 실현한 사람이니 더 바랄것없이 족하오.
이제 남은 세월도 젊은이들을 끌끌하게 잘 키워 군사로 내세울 생각이니 어찌 허무하다고 하겠소.
그러니 백운도 내 일을 두고 너무 마음을 쓰지 마오.》
이건 박위의 진심이였다.
박위는 원정에서 돌아오자 왕이 내려보낸 문하평리 서균형을 통해 은덩이와 옷감을 비롯한 값진 선물과 축하문을 받았었다.
축하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정의에 립각한 그대는 용기를 뽐내며 헤아리기 어려운 바다를 건너가 다년간 자라오던 불행의 화근을 없애버리였다.
또한… 대마도의 건물과 함선을 불사르고 포로되였던 백성들을 데려왔으니 나라의 수치를 씻고 원쑤를 갚았으며 국가의 위명을 만세에 떨치였다.…》
지난해 8월 류구(현재의 오끼나와) 중산국에서는 고위관리가 고려를 찾아와 왕에게 《고려에서 왜구의 소굴을 친것은 당연하고 통쾌한 일로서 나는 고려임금의 신하가 되려 하니 승인하여달라.》는 중산국임금의 편지와 류황, 후추와 같은 진귀한 특산물을 례물로 바치였다.
대마도징벌소식은 일본본토에도 파다하게 퍼지였는바 규수탐제(규수지방의 최고통치자) 이미기와 료순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여 서로 사이좋게 지낼것을 청원하면서 값비싼 례물을 올리였다.
이로써 고려에 대한 왜구의 침략과 략탈은 완전히 종식되였다.…
박위는 정녕 일생일대의 소원을 성취한 사람이였다.
하기에 그의 기분은 어둡지 않았다.
한시바삐 고향으로 내려가 자기의 모든 힘을 군사일에 깡그리 몰바칠 일념으로 가슴이 훅훅 달아올랐다.
개경장안의 불빛은 차츰 박위의 등뒤로 멀어져갔다.
허나 박위의 앞길은 어둡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박위의 눈앞으로는 비길데없이 휘황한 광명, 즉 더없이 진실하고 열렬하고 철저한 평범한 백성들의 모습, 고향 젊은이들의 얼굴이 별무리처럼 찬란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다가오고있었다.
또한 우리의 고향땅을 넘보는 승냥이들, 이 나라의 존엄을 침해하는 오만무례한 강도배들은 철의 주먹, 불타는 검으로 소굴채 들부셔버려야 한다는 절대불변의 진리가 더욱 굳어지고있었다.
박위는 광명을 향해 더욱 힘차게 걸음을 옮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