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1

1

 

리옥은 아까부터 밋밋한 모래불우에 미츨한 두다리를 곧게 내뻗치고 앉아 수평선 저 멀리에 낮추 드리워있는 고국의 푸른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대마도는 기온이 비교적 온화한 일본땅에서도 제일로 따스한 고장이다.

한겨울에도 내리는 눈이 땅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녹아내리는 바람에 땅에 덮인 눈은 거의나 찾아볼 길이 없다.

숲도 들도 사시절 푸른빛을 띠고있었다.

사람들은 노방 홑것을 입고 다니면서도 전혀 추운줄을 모른다.

지금은 겨울을 눈앞에 둔 마가을.

아무리 더운 지방이라 해도 철은 역시 철이여서 홑것차림으로 한지에 오래 앉아있으면 으시시 몸이 떨려난다.

하지만 착잡한 번뇌에 싸여있는 리옥은 지금 지궂게 옷섶을 파고드는 랭기를 거의나 의식하지 못하고있었다.

리옥의 마음은 오늘도 하냥 조국으로 달리고있었다.

청동거울마냥 티 한점없이 맑고 푸른 고국의 하늘, 꽃송이처럼 점점이 떠있는 흰구름장사이로 죽촌의 정갈한 자기 집과 앞뜰에 무성한 구기자덤불이 그림처럼 생동하게 떠올랐다.

지금은 가을철이라 앞뜰의 구기자열매들은 죄다 떨어졌으련만 하늘가에 그려진 환상적인 구기자덤불에는 피방울같이 빨간 열매들이 주렁주렁 많이도 달려있었다.

문득 그 열매더미우로 맛스럽게 구기자차를 마시는 박위의 흰 얼굴이 생동하게 그려지였다.

아버지의 흉내라도 내듯 단숨에 차종을 비우고 무슨 장한 일이라도 치른듯 보조개를 파며 방그레 웃는 현중의 귀인성스러운 얼굴도 비껴들었다.

리옥은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끼며 앵두알같은 입술을 암팡지게 감쳐물었다.

(아, 현중 아버님, 언제인가 당신께서는 인생의 쓴맛은 단맛을 빚어내는 원천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생활의 하루하루가 시종 쓴맛으로 이어진다면 사람이 무슨수로 그 장구한 괴로움을 이겨낼수 있을가요?

소녀는 그만 지쳤습니다. 지겹고 역스러운 이국살이 반년에 몸도 마음도 심령까지도…

따져놓고보면 소녀가 본의아닌 실수로 현중 아버님을 파멸적인 위기에 몰아넣게 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소녀는 만사를 체념했습니다.

정말이지 왜구들도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 각성없이 그들에게 당신께 보내는 문안편지를 쥐여준것은 참으로 잘못된 실책이였습니다.…)

리옥의 절망적인 사색은 이 대목에 이르러 돌연히 사다께쪽으로 돌아갔다.

…그날 리옥을 자기의 관사에 불러들인 사다께는 징그러운 웃음을 띄운채 기고만장하여 말하였다.

《에또― 일전에 네가 쓴 문안편지는 그대로 박위에게 전해주었어야 옳았을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네 필적을 취하여 만든 거짓편지(물론 네가 박위에게 전하고저 하는 내용은 거의 그대로 넣었다.)를 그에게 보내였다.

본의가 아닌고로 미안스럽기는 하다만 너로서는 과히 나쁘게 생각할것이 없으리라고 본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와 고려가 화평을 맺자는 목적에서 그렇게 한것이니까.

헌데 내 명의로 된 편지와 네 이름으로 쓴 편지를 받아본 박위는 팔소앞에서 화평사절로 파견된 우리 군사들에게 화평을 뜻하는 례물이 아니라 전쟁을 원하는 불화살을 퍼부었다.

하여 우리의 아까운 군사들이 수십명이나 억울하게 죽었다.

결국 우리는 더이상 화평책을 견지할수 없게 되였다.

박위가 존재하는 한 량국간의 화평이 도저히 실현될수 없음을 피로써 절감한 우리는 부득불 새로운 방안을 선택하였다. 터놓고 말한다면 그것은 화평의 파괴자이며 우리의 극악한 원쑤인 박위를 역신으로 몰아 처형하자는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벌써 여러차례 내 이름과 너의 명의로 된 편지를 박위에게 보냈다.

편지의 내용들을 볼것 같으면 대략 이러하다.

〈…박원수, 당신은 팔소에서 우리 군사들을 적지 않게 죽였으니 고려조정은 앞으로도 당신을 계속 신임할것이다.

래일의 거사를 위해 그러한 제물이 또 필요하다면 우리는 비록 가슴아픈 손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다시 제공할것이다.〉

〈박원수, 우리에게 고려비단과 곡물, 피륙과 어물을 비롯한 희귀한 물산들을 또다시 다량으로 보내주어 매우 감사하다. 우리는 당신의 성의에 대한 답례로 적절한 기회를 리용하여 리별장의 딸과 반정에 쓸 병기를 보내줄테니 믿고 기다리라.〉…

리옥의 생각은 어떤가?

이러루한 내용의 편지들이 김해관가에 기적을 둔 기생과 김해부사의 손을 거쳐 고려조정에 들어간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것 같은가 말이다, 핫하하…

그러지 않아도 조정대신들의 미움을 받고있는 박위는 이제 머지않아 역신의 올가미를 들쓰게 될것이며 종내는 참형을 당하게 될것이다.

이쯤 말했으면 너도 자기의 처지에 대해 대체적으로 짐작이 갈게고 장차 어느쪽으로 살길을 택해야겠는가 하는 결심도 내릴수 있을것 같은데…》

사다께는 자기의 구미와 용도에 맞게 거짓말을 얼럭덜럭하게 섞어넣으며 저들의 음모의 내막을 거지반 다 털어놓았다. 사다께는 자기의 능활한 계략을 유감없이 시위하는 동시에 리옥에게 오도가도 할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를 뚜렷이 인식시킴으로써 처녀의 마음을 될수록이면 조속히 저들쪽으로 돌려세우려는것이였다.

리옥은 대바람 자기가 사다께의 음흉한 술책에 걸려들었다는것, 그로 하여 박위에게 뜻밖의 위험이 조성되였다는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였다.

자기를 롱락한 사다께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기름불처럼 가슴을 태웠다.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사다께를 노려보던 리옥은 별안간 탁자우에 놓여있는 둔하게 생긴 청자기를 후리쳐잡았다.

《너절한 놈!》

리옥은 사다께의 정수리를 겨누고 힘껏 자기병으로 내리깠다.

그 순간 처녀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노려보던 지또는 그 뚱뚱한 몸을 놀라우리만치 잽싸게 날리며 리옥의 손목을 틀어잡았다.

청자기는 방바닥에 떨어져 산산쪼각이 났다.

아무런 위험도 감촉하지 못한듯 침착하게 앉아있던 사다께는 야릇한 미소를 띄우며 뜨직뜨직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이를 노리는 독사마냥 파란 불꽃이 부서지는 눈으로 리옥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쏘아보던 사다께는 별안간 기다란 칼을 스르륵 뽑아들었다.

《요로시, 나는 올데갈데없이 된 네년을 우리 땅에 받아들이고 대부인 마님처럼 공대해주려 했는데 사례는 못할망정 이따위 망동을 부려?!…》

리옥은 이를 사려문채 사다께의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상판을 쏘아보며 오연히 부르짖었다.

《나는 이미 죽고사는 리치를 달통한 녀자다. 고려의 개돼지로 살지언정 왜구의 부귀는 절대로 원하지 않으니 죽일테면 죽여라!》

사다께의 누런 이발이 드러나면서 쇠덩이같은 턱주가리가 한쪽으로 실그러지였다. 째는듯 한 악청이 방안의 살벌한 공기를 찢었다.

《오멘!―》

날카로운 칼날이 홱 공기를 베며 힘차게 내리박히였다.

리옥의 볼편을 스쳐내린 칼날은 서탁우의 연적을 두쪽으로 갈라내치였다.

웬간한 녀자 같으면 단박에 기절을 하여 나동그라졌으련만 리옥은 여전히 까딱없이 굳어진채 사다께를 쏘아보고있었다.

발치에서 번뜩이는 연적쪼박과 리옥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사다께는 갑자기 미친 놈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으핫하하… 너는 과시 희한한 녀자다. 천생 무관의 배필로 태여난 담찬 녀자란 말이다, 핫하하…》

게걸스레 웃어대던 사다께는 불시에 웃음기를 싹 거두더니 고려식으로 만든 교자우에 들어앉으며 씨벌거리였다.

《너는 지금 죽고싶기도 하고 발광이 나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럴 까닭은 없다.

마음을 눙치고 진정을 해라. 가슴속에 아무리 크고 아픈 상처가 있다 해도 세월이 흐르면 아물기마련이요, 아물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성정이다.

우리는 방금 몽우리진 꽃망울과도 같은 처녀인 너를 절대로 죽이지 않을것이며 또 죽지도 못하게 하겠다.

에또― 그 리유는 첫째로…》

사다께는 리옥의 표정을 슬금슬금 훔쳐보며 손가락을 꼽아내리였다.

《…네가 죽었다는 소문이 혹여 고려땅에 날아가는 경우 박위를 제거하려는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많이 지연될수 있기때문이다.

둘째로, 에또― 그에 대해서는 네가 속을 진정한 뒤에 가서 명백히 알려줄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는 무엇을 할것인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살기가 번뜩이던 사다께의 넙적한 상판에는 회심의 미소가 그득히 발려있었다.

사실 사다께는 철들어 지금까지 적지 않은 계집들을 떡반죽 이기듯 제마음대로 주물러본 경험많은 호색한이였다.

사다께의 경험에 의하면 상판이 밴밴한 계집들은 대개 변덕이 심하고 코가 높아서 일을 치려들면 일쑤 정조가 어떻소, 수절이 어떻소 하고 속에도 없는 소리를 참새처럼 재재거리며 몸을 뒤트는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미인이나 추녀나 정조관념이 희박하기는 매일반이였다.

미인으로 소문난 계집들 역시 희귀한 재물을 듬뿍 안겨주거나 시퍼런 칼날을 목에 가져다대면 즉시 초친 문어처럼 나긋나긋해지여 제쪽에서 먼저 나팔꽃넌출처럼 휘감겨들었다.

헌데 고려의 처녀 리옥은 어떠한가.

티없이 깨끗하고 수려한 얼굴모양과 청신하고 싱싱한 몸매도 탐스러웠지만 그 어떤 재물도 반기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도도한 기상은 탄복할만큼 신기하고 매력적이였다.

하기에 방금전 리옥이가 청자기병을 휘둘렀을 때도 사다께는 놀라거나 악증이 나기 전에 여직껏 느껴보지 못한 신비한 매력을 느끼였다.

이처럼 아름답고 도담한 고려처녀를 거사에 계속 써먹으면서 차츰 온공하게 길을 들이여 제것으로 만든다면 한꺼번에 두가지 득을 얻는 셈이요, 그 쾌감은 비길데없이 감미로울것이였다.

얼추보매 리옥은 칼벼랑우에서 노니는 매처럼 길들이기가 매우 어려울것 같으나 따져보면 그 역시 언젠가는 남성과 어울려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일개 녀자요 또 이미 박위에게 정을 주었던 계집인만큼 정신적인 공세를 들이대면서 박위이상의 인격을 보여준다면 능히 휘여낼것 같았다.

어쩌면 박위가 고려조정에 의해 처형되는 경우 박위를 제거하는 음모에 말려들었던 제 처지와 죄의식으로 하여 리옥은 제스스로 사다께 자기에게 엎어질수도 있을듯싶었다.

여하튼 모든 일이 다 때가 있고 철이 있는 법.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웠다면 열매가 맺히고 익을 때까지 직심스레 가꾸며 참을성있게 기다려야 할것이다.

사다께는 성공에 대한 확신이 굳어질수록 여직껏 체감하지 못했던 류다른 희열이 가슴속에는 물론 얼굴거죽에까지 근지럽게 퍼져오르는 듯싶었다.

사다께는 화독처럼 달아오르는 상판에 술렁술렁 손부채를 부치던끝에 무슨 큰 용단이라도 내리듯 호기있게 말하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너에게 대부인마님의 지위를 선물할테니 너는 그에 맞는 자유와 부귀와 권세를 누리게 될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으로의 너의 일이다!…》…

…리옥은 여전히 고려의 푸른 하늘가에 시선을 박고있었다.

자기의 목언저리에 도두룩하게 박혀있는 팥알만 한 기미를 습관적으로 매만지고있었다.

박위의 정겨운 시선이 때없이 와닿군 하던 자리, 사다께의 음탕한 시선이 번마다 털벌레처럼 지나치군 하던 자리.

리옥은 벌써 몇번이나 기미가 박혀있는 이 자리에 박위가 선물로 준 단검을 깊숙이 들이박고싶은 충동을 느꼈었다.

그렇게 하는것으로써 박위에게 용서를 빌고싶었고 치욕스러운 지금의 지옥살이를 끝장내고싶었다.

하지만 결심과 실행을 일치시킨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요, 언제나 가능한 일도 아니였다.

결코 죽기가 겁나서 칼을 박지 못하는것이 아니였고 밤낮으로 주위를 감도는 외통눈의 파수군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하는것도 아니였다.

박위의 체취가 슴배여있는 단검을 뽑아들기만 하면 리옥의 귀전에는 위불없이 아버지 목소리, 박위의 목소리가 준절하게 울리군 했다.

때로는 현중의 노란 목소리가 날아들기도 했다.

그들의 음성은 저마끔 달랐으나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대의 타락이라고 하나같이 웨치였다.

또한 고려의 모든 사람들은 리옥이가 절망과 고통속에서 승리자로 솟아오르기를 믿고있노라고 부르짖었다.

리옥은 세상에서 가장 친근한 그들의 목소리에 마음의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하여 리옥은 매번 단검을 꺼내들었다가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다시 품속깊이 간수하군 했다.

그가 이렇게 번마다 자결을 포기하게 된데는 또한 박위나 군영의 군사들을 위해, 고려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기 전에는 죽을수 없다는 생각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이 생각, 저 생각 두서없이 번져가던 리옥은 문득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두눈을 유난스레 빛내이며 하늘가에서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리였다.

오늘 아침 사다께가 하던 말이 아무런 론리적련관도 없이 귀전을 징징 울리였다.

그때 사다께는 기분이 매우 족한탓인지 아니면 단지 리옥을 깜짝 놀래워주고싶었던지 느물느물 웃으며 여직껏 감추고있던 비밀한 속내를 꺼림없이 터놓았다.

《이봐 리옥, 일전에 박위가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글을 보니 아직도 그 사람의 기개가 제법 장하더군.

에또─〈너와 나는 백년숙적이요, 필생의 적이다. 적과는 오직 판가리싸움만이 있을뿐이다.

내 기어이 대마도에 찾아갈테니 이번에는 바로 너의 땅에서 검으로 결산을 하자!〉 이렇게 썼더군, 으핫하하…

역시 박위는 사내야, 용감하단 말이야.

다만 천동인지 지동인지 판별 못하는 그 우직성만은 참으로 유감스럽거던.

고려의 한 지방군을 가지고 우리 대마도를 치겠다?! 그게야 말똥구리가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수작이나 무엇이 다른가 말이야, 으핫하하.》

그때 리옥은 세면물을 뜨러 샘터로 나가던 길인데다 사다께의 웃입술이 훌렁 뒤번져진 징그러운 상판과 기고만장한 꼴이 보기에 역스러워 그의 말을 개짖는 소리쯤으로 흘려버렸었다.

그러나 지금에는 사다께가 뇌이던 말마디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띠고 자자구구 되새겨지였다.

(현중이 아버님이 고려군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왜구들과 판가리 싸움을 하겠다고 했다지?!)

박위의 그 불같은 선언속에는 왜구의 소굴을 송두리채 요정내고야말 고려장수의 당당한 배짱과 철석같은 의지가 어려있었다.

자기를 비롯한 죽촌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애족의 일념이 빛발치고있었다.

또한 그 선언속에는 리옥이 자기에게 고려군이 진격해들어갈 때까지 절대로 맥을 놓지 말고 꿋꿋이 싸워달라는 박위의 절절한 당부도 들어있는듯싶었다.

리옥의 가슴은 숯불처럼 지글지글 달아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는새 자그마한 주먹을 돌멩이처럼 단단히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이 불행과 난관에 도전한다고 해서 반드시 구원되는것은 아닐것이다.

그러나 모든 파멸은 항상 완강한 저항력과 돌파의식을 상실하는데서부터 초래된다.

그런즉 지금이야말로 맥을 놓아서는 안된다. 아니, 백배로 마음을 도슬러먹고 힘을 내야 한다. 고려군대가 대마도진공을 준비하고있는 이때 나는 기어이 살아서 현재의 난국을 헤치고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야 하며 오늘의 수치와 원한, 현중 아버님께 지은 죄를 씻어야 한다.

가능한껏 아니, 최대의 힘과 지혜를 짜내여 사다께의 흉악한 모략의 내막과 김해땅에 박혀있는 세작년의 정체를 군영에 알리는것으로써 우리 군대의 대마도원정과 현중 아버님의 거사를 도와야 한다.)

누군가 저벅저벅 매우 느린 걸음으로 모래불을 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였다.

보나마나 노상 리옥의 주위를 맴도는 외통눈파수군일것이였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파수군이 아니라 죽촌에 살 때부터 풋낯이나 알고있던 벙어리 장서방이였다.

사람이 지나치리만큼 말이 없고 용해빠지여 드살센 동네아낙네들로부터 죽에 든 가시도 못 뽑을 위인이라고 뒤손가락질을 받던 사람.

그는 죽촌이 변을 당하던 그날에도 갓 돌이 지난 자기의 아들 백동이가 왜구의 칼에 찔려죽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주먹 한번 둘러멜 생각을 못하고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던가.

아무튼 과묵하고 용해빠진 덕분에 장서방은 요즘 왜구의 두목들에게 따로 처먹일 희귀한 해산물들을 잡아다바치는 중임을 맡고있었다.

콜콜한 비린내를 풍기는 불룩한 멍구럭을 지고 꺼꺼부정해서 지나치는 장서방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리옥은 그리 멀지 않은 모래불에 꺼꾸로 엎어놓은 퉁궁이가 피끗 가려지는 순간 불시에 심장이 곤두뜀을 하는듯 한 충격을 느끼였다.

황황히 타는 시선은 어느결에 퉁궁이쪽으로 돌아갔다.

높뛰는 심장은 벌써 몇번이나 똑같은 말마디를 소리없이 웨치고있었다.

(바로 저 배! 장서방의 고기배를 타고 나서면 얼마든지 이 섬을 빠져나갈수 있지 않겠는가.

아아, 내 왜 여직껏 장서방 생각을 하지 못했을가?)

높뛰는 가슴속에서 송진불같은것이 활활 타번지였다. 리옥의 입에서는 어느결에 나지막한 소리가 터져나갔다.

《장서방, 내 말 좀 듣소.》

장서방은 잔등에 비수가 날아와 박히기라도 한듯 흠칫 몸을 떨었다.

허연 소금기가 얼룩덜룩하게 피여있는 잔약해보이는 어깨를 느리게 돌리였다.

늙은이처럼 지거미가 꼬약꼬약 흘러나오는 정기없는 눈으로 장님 등불보듯 멀끄러미 리옥을 쳐다보았다.

리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저 멀리 석양이 비낀 바다우에서는 이른바 해상공격전을 가상한 전투훈련을 하는 왜구들이 오리새끼들처럼 퍼덕거리고있었다.

외통눈파수군은 그리 멀지 않은 안침진 바위벽에 기대앉아 병든 닭새끼처럼 거불거불 졸고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장서방에게 다가선 리옥은 흥분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장서방은 대체 언제까지 그따위 퀘퀘한 멍구럭을 메고 다니겠소?

그따위를 메고다니면서도 속마음은 편안하고 남들보기는 부끄럽지 않소?》

리옥의 말은 시작부터 야멸차게 울리였다. 허나 장서방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석양이 비낀 저녁하늘만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리옥은 속이 바질바질 타는중에도 밸머리가 통으로 빠져버린듯싶은 장서방이 그지없이 원망스러웠다.

《…장서방은 그래 왜구들에게 장참 이렇게 고기나 잡아다 섬기면서 살아가겠소? 장서방의 지금의 모양을 고향에 있는 백동이 엄마가 본다면 얼마나 분해하겠소.

불쌍하게 죽은 백동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갈수야 없지 않소?》

장서방의 불룩하게 튀여나온 어지게 생긴 황소눈에 눈물이 핑 고이였다.

리옥의 맑은 음성은 절절하게 번져갔다.

《…그런걸 생각해서라도 한시바삐 지긋지긋한 고역살이를 벗어던지고 고향으로 가야 하오.

오늘의 한을 풀고 어제의 원쑤를 갚기 위해 그리구 이곳의 죽촌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여기를 빠져나가야 한단 말이요. 모름지기 고향의 백동이 엄마도 그걸 바라고있을거요.》

장서방의 어깨는 세차게 오르내리였다.

그의 황소눈에서는 뿌연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리고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여가지고도 고사리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생을 부여잡으려던 아들애의 마지막모습이 다시금 삼삼히 떠올라 새삼스레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모양이였다.

장서방은 한참만에야 눈물매닥질이 된 얼굴을 간신히 들어올리며 떠드박거리였다.

《그런데… 아씨… 무슨 수로 여기를… 빠져나간단 말이웨까. 도대체 아니될 소리웨다.》

리옥은 이런 바지저고리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안되게 된 지금의 자기의 처지가 기막히였다.

하지만 장서방을 놓아준다면 탈출의 출구는 영영 막혀버릴것이였다.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서방, 겁낼것 없소.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 하겠소? 이렇게 구지레하게 천년을 살아서는 무엇하겠소.

죽기를 각오하고 달라붙으면 못할 일이 없소.

내가 아무때든 적당한 기회를 틈타서 연통을 하거든 장서방은 누구도 몰래 바다에 나와 배를 띄우오. 그뒤의 일은 내가 다 장담하겠소.》

고기비늘이 하얗게 달라붙은 설핀 턱수염을 바들바들 떨던 장서방은 갑자기 커다랗게 눈을 흡떴다.

노을빛을 받아 불그레한 바다물을 헤가르며 이쪽으로 헤염쳐오는 왜구들을 띄워본것이였다.

리옥은 장서방의 눈길을 따라 바다쪽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바다우에서는 수십명의 왜구가 정신없이 헤염을 치고있는데 그들의 뒤로는 알락달락한 차일을 친 커다란 배 한척이 유유히 따르고있었다.

배의 갑판우에는 지또를 비롯한 섬안의 고위관리들과 수급장교들을 대동한 사다께가 관복자락을 펄펄 날리며 서있었다.

얼마전에 본토와 규수지방에서 새로 모아온 고께닌들의 해상훈련을 직접 현지에까지 나와 지휘하는 모양이였다.

헌데 물에 들어선 놈들은 거개가 륙지에서 제멋대로 바라다니던 알건달군들이라 헤염솜씨가 여간만 서툴지 않았다.

제법 물건너가는 개새끼처럼 대가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철썩철썩 물을 가르는 놈들도 있으나 태반이 무거운 몸을 내리드리우고 미욱한 곰새끼처럼 마구 허우적거리고있었다.

어떤 놈들은 떡돌처럼 자꾸만 가라앉는 몸을 이길수 없어 사다께가 탄 배에 매달리여 가긍한 소리들을 질러댔다.

《령주도노,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제 물에 들어가면 소인은 꼼짝없이 죽습니다.》

불에 구워낸것처럼 누르끼레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장사귀에 달라붙은 파리떼마냥 배전을 그러잡고 아우성을 치는 왜구들을 노려보던 사다께는 칼을 홱 뽑아들었다.

《이놈들! 범도 새끼를 낳으면 벼랑에 굴려보고 산 놈만 품에 안는다는것을 아는가?

시라소니들은 모두 죽어라!》

사다께의 칼등이 배전을 딱딱 때리며 줄달음쳐나갔다.

칼등에 손잔등을 얻어맞은 왜구들은 자지러진 비명을 지르며 철썩철썩 물속에 떨어져내리였다.

사다께는 그에 아랑곳없이 번쩍거리는 칼끝으로 기슭쪽을 가리켜보이며 더한층 거센 소리를 내질렀다.

《헤염을 칠수 있는자들! 우리와 함께 필생의 대망을 이룰 용기를 가진자들은 계속 앞으롯!》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다께의 광기어린 작태를 바라보던 장서방은 금시 왜두목의 칼이 자기의 가슴에 날아오기라도 하는듯 두팔을 엇갈아끼며 황망히 머리를 흔들었다.

《안되웨다.… 그러다간 아씨도 소인도 다 죽쉐다.…》

장서방은 리옥이가 어쩔새도 없이 허둥지둥 모래언덕으로 치달아올랐다.

리옥은 그만 온몸의 기운이 쫙 풀리였다. 평생 입에 올려보지 못한 모진 소리가 서슴없이 터져나왔다.

《얼간이! 바보! 치욕을 들쓰고도 능히 살아갈수 있다면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이요.―》

그러거나말거나 장서방은 조개껍질들이 옥쪼각처럼 반짝거리는 모래언덕을 구을듯이 넘어가버리였다.

리옥의 매섭게 치뜬 눈에도 피빛같은것이 얼른거리고 앙다문 입술언저리에도 피자욱이 번들거리였다.

차츰 날이 어두워지자 갖가지 희귀한 무늬를 펼쳐보이던 감빛구름장들은 꺼멓게 흐려지였다.

2

2

 

휘영청 밝은 달이 중천에 걸려있는 추석날 밤이였다.

군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록산의 어느 자그마한 동네에서 갑자기 북소리, 징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였다.

이어 술기운에 휘감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질박한 소리가 들썩하게 잇달리였다.

미구하여 은백색달빛이 주단처럼 고르게 깔린 행길우로 거부기모양의 커다란 가장물을 앞세운 수십명의 농군들이 줄레줄레 올라섰다.

년례로 펼치군 하는 거북놀이를 시작한 꼴이였다.

추석날 밤이면 이 고장 농군들은 기장짚이나 벼짚으로 거부기모양의 굉장히 큰 가장물을 만든다.

가장물을 다 만들면 네명의 힘꼴이나 쓰는 총각녀석들이 앞뒤에 각각 두명씩 갈라서서 가장물을 뒤집어쓰고 마치 거부기가 기여가듯 굼불굼불 걸음발을 맞춰나간다.

그때면 대기하고있던 마을농군들이 북과 징을 두드리며 얼씨구나 좋다 거부기의 뒤를 따라서는데 이렇게 떠난 거부기행렬은 온 마을 집집을 거지반 다 들린다.

행렬이 집앞에 이르면 목청좋은 선통군이 기가 나서 소래기를 질러댄다.

《바다의 거부기가 파도를 헤치고 이 마을을 찾아왔는데 무엇이든 맛좋은것이 있거든 몽땅 내놓으시오.―》

그러면 집식구들이 모두 나와 행렬을 집뜰에 들여앉히고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술이며 음식을 대접한다.

집주인의 성의있는 음식대접을 받은 거부기행렬은 그에 대한 답례로 한바탕 춤판을 벌리고나서 다시 대오를 수습해가지고 다음집을 찾아 떠나간다.

이러한 거부기놀이는 오랜 전통을 가진 가면무의 한 변형으로서 동네와 이웃간의 화목을 도모하고 추석명절의 흥취를 멋들어지게 돋구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있었다.…

거북놀이행렬은 록산동네 중심부를 벗어나 소리소리 지르며 지향없이 흘러갔다.

벌써 여러 집을 걸치면서 술판, 춤판을 벌린 뒤라 사람들은 누구라 없이 종작없는 소리를 웨치면서 비틀거리였다.

그러면서도 행렬은 용케도 외딴집으로 들어가는 고샅길어구에까지 이르렀는데 바로 그 순간에 거부기대가리가 우뚝 굳어지였다.

거부기 바로 뒤에서 건들건들 춤을 추며 따라오던 중로배가 거부기탈을 쓴 사람들앞에 썩 나서며 짜증스럽게 고아붙이였다.

《이 사람들아, 왜 갑자기 이 모양인가?

썩썩 걸음을 재우쳐야 한집이라도 더 들릴게 아닌가?》

그러자 벼짚속에서 술기운에 젖은 총각들의 분명치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외딴집이 우리 동네이기는 하지만 이름난 기생년의 집인데 그냥 짓쳐들어갔다가 망신이라도 당하지 않을가요?》

아직도 놀음놀이를 좋아하던 한창나이때의 흥취가 채 가라앉지 않아 이 판에 끼워들어 제스스로 꼭지노릇을 하는 중로배는 취기에 젖은 눈을 얼뜨게 슴벅거리며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따 이 사람들아, 기생도 우리 동네 기생인데 무얼 꺼릴게 있나.

우리같은 무지렁이농군들이 오늘같은 날 기생의 낯판대기를 구경하지 않으면 언제 구경하겠나.

자, 이러구저러구 할것없이 곧장 저 기생년의 집을 들이치세.…》

중로배는 거부기탈을 쓴 총각들을 손으로 썩썩 떠밀치고나서 선통군이 나서기도 전에 제먼저 수닭처럼 왝왝 소래기를 질러댔다.

《바다의 거부기가 파도를 헤치고 이 집에 찾아왔는데 무엇이든 극상등으로 좋은것을 얼씨덩 내놓으소―》

신명이 난 농군들은 웃고 떠들며 고샅길로 쓸어내려갔다.

거부기가 기생의 집 뜰앞에 이르자 화려한 비단치마저고리를 지르르하게 흘려입은 매화가 반달음을 쳐서 나왔다.

이어 일행은 풍성한 술상과 마주앉았다.

행렬이 기생집을 나설 때는 모두가 고주망태가 되여 저저마다 이게 정말 내가 옳긴 옳은가 하고 생각하게끔 되였다.

행렬의 맨뒤에서 벙어리처럼 거짓흉내를 내며 따라서던 고양이처럼 령리하게 생긴 정체모를 작자가 기생집에 스며들어간 뒤 다시 나오지않은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북소리, 징소리, 웃고 떠드는 소리…

록산의 밤은 놀이군들로 하여 오래동안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저녁밥이라고 지은 누룽지가 반나마 섞인 보리밥을 장국에 말아 대충 먹고난 오천과 여삼은 서둘러 군영을 나섰다.

요즘에 들어 오천과 여삼은 매일과 같이 어슬녘이 되면 하던 일을 털어버리고 군영에 들어와 저녁밥을 재촉해먹고는 바다가를 돌아보거나 김해부중으로 뻗은 행길을 오르내리군 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보이는 행인이 나지면 한나절씩 붙잡아놓고 기름을 짰다.

왜구의 세작이나 세작과 줄이 닿아있는 놈팽이를 잡아내려는것이였다.

사실 여삼은 진작 이렇게 야경을 돌면서 왜구의 세작을 뚱기쳐내고싶었으나 절대로 뒤숭숭한 소문을 내지 말라고 한 박위의 당부를 어길수 없는데다 혼자서는 아무래도 조금 자신이 없어서 피일차일 미루어왔었다.

그런데 염초장사람들이 명통사의 염초감을 실어온 그날 밤 오천이 여삼의 당부를 잊지 않고 그의 집을 찾아왔었다.

애기설이를 하느라고 얼굴이 얼룩덜룩해진 여삼의 색시는 오천이가 들어서자 오래간만에 찾아온 그를 모셔들이느라고 그 얌전한 성미에 쩔쩔매고 돌아갔다.

게다가 오천이 뒤에는 취금이까지 달려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너나들이를 하던 취금이 또한 어떻게 부르고 대해야 할지 내외가 다 난감하였으나 그 역시 여삼이부부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손이라 자못 례절있게 맞아들이였다.

좌중이 정돈되자 언제나 히죽벌쭉하며 롱말부터 시작하던 오천은 여느때없이 정색을 띠고 말하였다.

《그새 별로 큰일도 치지 못하면서 자주 들려보지 못해 여삼이한테나 제수한테 여간 미안하지 않구려. 죄만 하우.》

이어 오천은 가져온 보자기를 헤치고 돌멩이처럼 검스레한 덩어리들을 척척 꺼내놓았다.

《저번날 봉은사에 갔다오던 길인데…

일이 되려면 엎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더니… 허허 참.

흠암령 바위고개를 넘어서다가 그만 주르르 미끄러 떨어지지 않았겠나.

일어서자고보니 바로 눈앞의 바위틈에서 산벌들이 윙 쓸어나오데.

이게 또 무슨 벼락이냐 하구 냅다 도망질을 하려는데 바위틈에서 무엇인가 번들번들하는게 아니겠나.

그게 바로 몇년 잘 묵은 이 산꿀이데. 대바람 임자 색시 생각이 나더군.

그래서 죽자꾸나 하구 바위틈에 손을 들이밀어 쪼각쪼각 뜯어냈지.

돌멩이처럼 굳은걸 뜯어내느라고 낑낑거리는데 이런 변 봤나, 산벌들은 무리로 달려들어 얼굴이고 목덜미고 사정없이 침을 찔러대네.

아프다못해 나중엔 숨이 다 꺽꺽 막히데. 어지간히 혼쭐이 나긴 했지만 어찌나 기쁘던지, 헛허허…

여삼이, 잘 간수했다가 이제 금줄에 고추를 매다는 날이 오거든(어린애가 출생하면 경사의 표시로 금줄(왼새끼)을 대문이나 처마끝에 늘이는데 출생아가 남자면 고추를, 녀자면 솔잎 또는 숯덩이를 매달았다.) 꺼내서 쓰도록 하라구.…》

오천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취금이가 상글상글 웃으며 커다란 보퉁이를 밀어내놓는데 그속에는 말린 미역과 김 같은것이 가득 들어있었다.

개다리소반우에 푸새김치며 토란볶음 같은 음식들을 챙기던 색시도, 시렁우에서 무엇을 내려놓기도 하고 봉당에 나가 무엇을 들여오기도 하며 부산을 피우던 여삼이도 슬며시 굳어져버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자책과 죄의식으로 속이 젖어있던 여삼은 그만에야 울가망이 되여가지고 털버덕 주저앉았다.

《형님, 내 무슨 말을 더 할게 있겠소. 그렇게 속속들이 진정인 형님을 잘못 생각한 내가 워낙 몹쓸놈이요.

내 이제부턴 말수도 줄이고 걸핏하면 남을 그릇 생각하는 엷은 성격도 고치겠소.》

오천은 여삼이 색시와 여삼의 얼굴을 정차게 갈마보며 은근진 어조로 말하였다.

《혼사말하는데 제사말한다더니 통 생청같은 소리만 하는구먼.

제 잘못을 말할것 같으면 나도 잘못한 노릇이 많다. 노상 일만 일이라고 하면서 형제간의 우의 같은것은 깊이 살피지 않았으니 그게 어디 잘된 일이냐.

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테니 이제 그 말은 그만하자꾸나.

한노래를 가지고 장밤을 새울텐가.》

《나도 길게 말하지 않겠소. 그대신 이제부터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군사노릇도 더 잘하고 동생노릇도 더 착실히 할테니 두고보우.

그리고… 이제는 염초감대기가 풀렸으니 형님이나 내나 우리 군영어방에 박혀있는듯 한 왜구의 세작놈을 잡아내는 일에 힘을 넣는게 어떻소?》

《네 말이 옳다. 너나나나 맡은 일을 착실히 거행하면서 세작놈을 잡아내는 일에 모를 박자꾸나. 워낙 세작놈을 곁에 두고는 아무 일도 바로할수 없느니…》

《형님말인즉 내 마음이요. 오늘 밤부터라도 당장 밤길을 타면서 눈밝혀 찾아보자구요.》

아래방에서는 오천이와 여삼이 세작 잡을 궁리를 겨끔내기로 터놓는데 웃방에서는 취금이와 얌전이가 따뜻한 음성으로 생활적인 화제를 나누고있었다.

《얌전언니, 산달은 제대로 잡았수?

남의 달을 잡으면 야단이라우…》

《어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제대로 잡은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골속이 노상 뒤숭숭해.

아이고, 이 자식이 또 발길질을 하네.》

《배속에서도 아이들이 발길질을 하우?》

《응, 벌써부터 세찬것이 올데갈데없이 사내자식이야.…》

《그게 좀 좋수? 애를 박서방처럼 팔팔한 군사로 키우면 그에서 더 바랄것이 무엇이겠수.》

《그야 그렇지만 지금은 영 거북한게 뭐나 다 시들해.》

《그게야 녀자들이면 누구나 다 겪는 행복한 고통이겠지 뭐.…》

웃방에서 도란도란 흘러나오는 녀자들의 말소리에 귀를 주던 두사람은 다같이 까닭모를 행복감이 치밀어올라 벙그레 마주 웃었다.

이어 오천은 웃음기를 싹 가셔버리고 말하였다.

《정말이지 이제 태여나는 우리 애들은 설음도 고통도 모르고 행복하게 자라나야 할텐데…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도 우리가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더 많은 피를 바쳐야 할게야. 난 그러지 않아도 가락촌과 구렁촌의 염초장에도 자주 나가봐야 하는데 겸두겸두해서 오늘 밤부터 순찰을 돌자꾸나.》

《옳소, 밤길을 도는게 상수요.》

두사람은 술방구리를 앞에 놓고도 술생각을 까맣게 잊은채 부지런히 밥을 먹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깨나란히 행길로 나선 두사람은 하루밤사이에 배나 더 친밀해진듯싶었다.

그날부터 두사람의 순찰은 계속되였다.…

오천이와 여삼은 바싹 귀를 강군채 사위를 휘휘 둘러보며 길을 재촉했다.

얼마후 그들은 찌그러진 도가집을 지나 구렁촌어구에 들어섰다.

구렁촌염초장앞에 이른 오천은 안으로 들어가보려다가 오늘이 바로 추석날이라는것을 상기하자 아쉬운대로 그냥 지나쳐버리였다.

얼마 안 가서 굴암산의 웅장한 모습이 우줄우줄 다가왔다.

허우룩한 심경에 싸이여 잠시 다리쉼을 하고난 그들은 행길로만 내처 걸어온것이 잘된 일 같지 않아 이번에는 거치장스러운대로 행길에서 내려서기로 하였다.

두사람은 김해벌의 우둘투둘한 두렁길을 타고 다시 록산쪽으로 돌아섰다.

얼마후 눈에 익은 록산마을이 가까와지자 두사람은 다같이 오늘도 또 허탕이구나 하는 허전한 생각에 싸이여 그만 시무룩해지고말았다.

이럴 때 어디선가 분명 인기척이 났다.

순간에 바싹 긴장하여 앞쪽을 살펴보니 록산에서 뻗어나온 소로길로 웬 사람 둘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비틀 걸어오고있었다.

오천이와 여삼은 눈독, 손독을 올리며 냅다 뛰여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알고보니 그들은 구렁촌사람들인데 록산의 친척집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그만 거북놀이패에 걸리여 함뿍 취해가지고 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제미, 곤죽이 되게 술을 퍼마실만큼 셈평이 늘어져서 살 재미는 있겠소.

술을 마셔두 좀 가량있게 마시우.》

공연히 화딱지가 난 여삼이 애꿎은 주정군들에게 한바탕 밸풀이를 하고나서 곁을 돌아보니 오천이 보이지 않았다.

여삼은 오천을 따라잡느라고 힝힝 반달음을 놓았다.

멀찍이 간줄 알았던 오천은 바로 몇발자욱앞의 탱자나무뒤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웬일이우, 장딴지에 쥐가 올랐소?》

여삼이가 다가서며 말을 붙이자 오천은 쉿 하고 바람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여삼은 무슨 일이 생긴줄로 짐작하고 오천이곁에 공손히 쭈그리고앉았다.

《여삼아, 방금 저 집의 뒤담을 넘어 웬 사내놈이 나왔다.

저기 봐라, 힐끗힐끗 사방을 살피면서 나무숲쪽으로 가는 저놈이 어디 례사놈같으냐?》

여삼이 눈여겨살펴보니 아닌게아니라 어떤 외딴집의 뒤담에서 내려선 한 놈팽이가 연방 사위를 둘러보며 나무숲으로 슬몃슬몃 다가들고있었다.

잠시 정체모를 놈팽이의 수상쩍은 거동을 세세히 살펴보던 여삼은 흠― 하고 코소리를 내며 싱그레 웃었다.

《난 또 굉장한 놈이 하나 걸린줄 알았더니… 흠, 오천형님! 저 집은 올해초엔가 김해관가에 새로 기적을 들인 기생년의 집이요.

그 기생년이 낯판대기가 밴밴하고 가야금을 잘 튕기는데다 시조까지 제법 주어댈줄 알아서 고을의 한다하는 량반들은 단꿀에 파리덤비듯 한답니다.

그쯤 되는 계집의 집에 오늘같은 명절날 밤에 개구멍출입을 하는 놈이 없을리 있소?!

보나마나 저놈도 오입쟁이 량반님이거나 기둥서방노릇을 하는 날바람둥이일게요.》

여삼은 자기가 가장 료량이나 잘한듯이 자신있게 말하고나서 오천의 팔을 끌어당기였다.

오천은 여삼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리였으나 왜서인지 자꾸만 나무숲으로 도적고양이처럼 스며든 놈팽이에게 왼심이 갔다.

두사람은 군영을 향해 터벌터벌 맥풀린 걸음을 옮기였다.

휘영청 밝은 달빛에 락동강의 드넓은 하구와 남해의 어름점이 한눈에 환히 바라보이는 록산등성이에 올라섰을 때였다.

부지불식간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오천은 자신으로서도 딱히 설명할길 없는 힘에 떠밀리워 바다가 도래굽이쪽으로 홱 몸을 돌리였다.

멀지 않게 보이는 바다가에서 참대갓을 쓰고 짧은 바지를 입은 꼴이 배군차림새가 분명한 웬 놈팽이가 배를 끌어내느라고 낑낑 기운을 뽑는 모양이 뚜렷이 안겨왔다.

오천의 가슴은 후두둑 높뛰였다.

《여삼아, 저놈인즉 기생년의 집에서 나온 놈 같은데 역시 쪼간이 붙어있는 놈이 분명하다.

우리 저놈을 덮치자!》

이제는 여삼이도 오천이와 견해가 일치했다.

《옳소, 저놈이 김해사람이라면 의례 강을 건너 평성이나 중촌으로 가겠는데 무엇때문에 이밤에 바다길을 잡겠소.

명호도와 신도를 지나서 대마도로 가려는 세작놈이 틀림없소.》

오천이와 여삼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도래굽이를 향해 달리였다.

헌데 공교롭게도 앞에는 나무 한대 없는 반반한 공지라 곧바로 내닫다가는 세작놈의 눈에 띄울것 같았다.

어쩔수없이 변두리의 나무숲기슭으로 길을 에돌다나니 퍼그나 지체가 되여서야 바다가에 이르렀다.

놈팽이는 벌써 너벅선을 타고 저 멀리 바다우로 가뭇가뭇 사라져가고있었다.

여삼은 바다쪽으로 냅다 달려나가다말고 힘껏 팔매돌을 던지였다.

《악―》 멀리 바다우에서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까마득하게 날아왔다.

여삼은 다시 팔매돌을 꺼내들었으나 너벅선은 바다물속에 잦아들기라도 한듯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희푸른 달빛에 젖어 넘실대는 바다물만이 눈이 시글게 안겨왔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온밤 고시랑고시랑 속을 앓던 여삼은 어뜩하게 날이 밝자 록산앞바다로 뛰여나갔다.

지난밤에 도망질을 한 수상쩍은 놈팽이가 바다가에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남긴것이 없는가 하여 모래불은 물론 크고작은 바위들까지 낱낱이 살펴보았으나 이렇다 하게 이상한것은 전혀 띄우지 않았다.

여삼은 그만 떡심이 풀리였다.

속이 알찌근하기도 하고 영문모를 악증이 우걱우걱 치밀어오르기도 했다.

그런중에도 의혹은 더욱 깊어지였다.

(어제 밤 그놈이 정말 기생집을 나드는 날바람둥이나 기둥서방일가.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밤중으로 바다를 넘어간단 말인가?!

십중팔구는 왜구의 세작놈이다.

이 생각, 저 생각 할것없이 지금 당장 그 기생년을 옥쳐다가 다불려보는게 어떨가.

헌데 그 구미여우같은 기생년이 올곧게 밥을 토할 대신 닭의 다리 내뻗치듯 하면 야단이 아닌가?!

거기에다 김해부사같은 량반들까지 들고일어나 소란을 피우면 우리 군영이 크게 망신을 당할것이요, 그러지 않아도 어수선한 장군의 신상에 더욱 복잡한 일이 겹칠게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구.)

아침밥을 대충 설때린 여삼은 군영으로 들어오면서도 물었다 놓친 범처럼 그냥 속이 알찌근하여 연해 록산바다쪽을 돌아보았다.

군영대문앞에 이른 여삼이 막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수닭처럼 거센 청으로 여삼을 찾았다.

《여보― 여보시―》

고개를 돌려보니 도끼로 마구 깎아만든것처럼 못생긴 얼굴에 사람좋은 웃음을 가득 담은 생면부지의 작달막한 중로배가 겅정겅정 다가오고있었다.

여삼은 기분이 쾌하지 못한데다 알지도 못할 사람이 잔뜩 아는체 하고 다가오는것이 공연히 비위가 상하여 몰풍스럽게 물었다.

《그 댁은 대체 어디 사는 누군데 무슨 일로 우리 군영에 찾아왔소?》

중로배는 새파랗게 젊은 녀석이 시작부터 무슨 시비라도 캐듯 따지고들자 대뜸 웃음기를 싹 지워버리였다.

중로배 역시 인상은 좋으나 여삼이나 마찬가지로 속은 그다지 너르지 못한 모양이였다.

그는 괜스레 먼지오른 미투리를 탁탁 털며 시푸녕스럽게 까붙이였다.

《난 밀양관가의 통인이요. 보매 그녁은 이 군영의 군사같은데… 장군께 그대로 전해주우.

이제 밀직사(왕에게 올리는 문건을 접수하고 왕명을 전하며 왕을 보위하는 일과 군사관계의 일을 맡아보는 중앙관청)의 부사께서 이곳으로 오시니 장군께서는 어디 나뜨지마시고 계셔달라고 전갈이 왔다고…》

여삼이도 밀직부사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은 알고있었다.

지난 여름 박위를 따라 개경에 갔을 때 그 집 행랑에서 맛좋은 탁배기를 게트림이 나오도록 실컷 마시고나서 희한한 불구경을 했던 일도 잊을수 없었지만 그 밀직부사로 하여 박위의 기분이 심히 흐려졌던 일도 지워버릴수 없었다.

밀직부사 최칠석이 박위의 막역지우라 하지만 여삼이에게는 이모저모로 불만스럽게 생각되였다.

그런 사람이 개경에서 수천리나 떨어진 여기 군영에 긴급히 내려온다는것은 박위의 신상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겹씌워졌음을 시사해주는듯싶었다.

여삼은 그리 넓지도 못한 이마를 잔뜩 찌프리며 중로배에게 물었다.

《아니, 그 량반님이 대체 무슨 일로 예까지 오신다우?》

여삼에 대한 아니꼬운 생각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밀양통인은 가로꿰진 소리로 대답했다.

《내니 알배때기 있소? 말심부름이나 다니는 사람더러 동헌방에 곕시는 원님이나 알 소리를 물으니 참 맹랑한 사람이로군.》

밀양통인은 말을 마치기 바쁘게 여삼의 약이라도 올려줄셈인지 일부러 휘휘 멋스럽게 활개짓을 치며 행길쪽으로 걸어갔다.

여삼은 무거운 숨을 길게 내불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니 이제 드디여 된우박이 터질 모양인가. 그렇게 되면 장군은 어찌 되고 대마도원정은 또 어떻게 될가?!)

오천이가 나가있는 바다가로 달음질을 놓으려던 여삼은 생각을 고쳐먹고 군영쪽으로 돌아섰다.

자못 당당한 걸음으로 군영대문앞에 다가서던 여삼의 발길에 닭 한마리가 채워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걸레뭉치처럼 나딩굴었다.

3

3

 

바다가로 나가려던 박위는 다시 군막안으로 들어섰다.

어수선한 생각이 뒤머리를 쿡쿡 쑤시였다.

(노상 조정에 들어앉아 문서놀음을 해야 하는 밀직사의 관리인 백운이 무슨 일로 여기까지 내려오는가.

나한테 어디 뜨지 말고있으라는 전갈까지 하면서… 그 사람이 이제는 나에게까지 조정관리의 위신을 차리자는건가.

아니면 진실로 무슨 일이 급하고 중해서일가. 아무튼 이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닌가?)

조정에서도 노란자위라고 할수 있는 밀직사의 중진관료인 최칠석이가 한개 도의 군영에 내려온다는것은 공적인 용무든 사적인 일이든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였다.

게다가 최칠석으로 말하면 박위쪽에서 먼저 절교를 선언한 옛적의 벗으로서 그사이 어떻게 변했는지 가량할수 없는 사람이였다.

과연 칠석은 이제 무엇을 안고오겠는가?!…

박위는 저으기 불안하면서도 은근히 궁금하였다.

이윽하여 박위는 심상한 낯빛, 침착한 거동으로 군막을 나섰다. 피덩이처럼 빨간 단풍잎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앞뜰을 지나 대문쪽으로 걸어나갔다.

고려조정의 법규에 의하면 정3품관인 동시에 전서(당우에 올라갈수 있는 량반, 후날의 당상관을 이르는 말이나 고려 말기까지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급에 해당한 중앙관리가 지방에 내려올 때 그를 맞아들이는 의식은 여간만 번잡스럽지 않았다.

지방관은 중앙관리가 당도하기 전에 대문앞에 서있다가 그가 말에서 내리면 먼저 재배를 한다.

다음 중앙관리가 제 먼저 마루에 올라 자리에 앉은 후 지방관은 서편 층계로부터 마루에 올라와 방안쪽으로 물러선다.

지방관이 다시 절을 올린 후 중앙관리는 북쪽에, 지방관은 동쪽에 자리를 정하고 앉는다.

시작부터 마감까지 조정관리의 위세를 돋구기 위한 허식적인 례법이였다.

박위는 자기자신이 누구보다 경멸하는 그 번다한 허례허식을 차리기 위해 대문가로 가고있었다.

이제 와서 최칠석은 허물없이 맞아들일 절친한 벗이 아니라 허식적인 례의로 깍듯이 모셔들여야 할 조정의 지엄한 관리였다.

박위는 허례허식인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페습에 말려들어야 하는 자기의 처지가 새삼스레 구슬퍼났다.

하지만 제 의사대로 휘거나 제칠수도 없고 무시하거나 도피할수도 없는것이 바로 세속의 풍습이요 조정의 법규였다.

대문안쪽에 이른 박위는 덤덤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미구하여 육중한 참나무대문이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제껴지였다.

그러자 그리 멀지 않은 앞쪽에서 건장해보이는 말 한필이 갈비뼈를 불끈거리며 기운차게 달려오는 모양이 한눈에 안겨왔다. 대문앞에 이른 말은 앞발을 껑충 들었다놓더니 요란스럽게 투레질소리를 내며 멎어섰다.

말우에 올라앉았던 중키의 관리가 뻘건 관복자락을 날리며 훌쩍 뛰여내리였다. 두말할것도 없이 그가 바로 최칠석이였다.

예전의 감정은 어찌됐든 오래간만에 옛적의 벗을 보니 우선 반가운 정이 사무쳐올랐다.

허나 박위는 칠석이가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반가운 마음을 애써 누르고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원로에 얼마나 수고가 막중하셨겠소?!》

칠석은 벼락같이 박위에게 다가들더니 숙어진 그의 어깨를 버쩍 들어올리며 노기에 차서 부르짖었다.

《해암, 이게 무슨 짓이요, 망녕이 나셨소?》

《그럴리가 있겠소. 나는 망녕이 나서가 아니라 례법을 지키자는게요.》

《례법? 해암이 내게다 조정의 례법을 지킨단 말이요? 그것 참, 고마운 생각을 했소그려.》

박위의 딱딱하면서도 정중한 인사가 진정으로 서운해난 칠석은 악의없는 조롱으로 박위를 꾸짖고나서 그의 팔소매를 세차게 잡아끌었다.

결국 박위는 예나 다름없이 소탈하고 대활한 칠석의 태도로 하여 조정관리를 맞이하는 지방관의 번페스러운 의식을 한 조항도 실행할수 없었다.

그럴수록 의문은 더욱 짙어갔다.

(이 사람이 정녕 어쩌자고 이러는것인가?)

얼마후 박위와 칠석은 조촐한 주안상을 앞에 놓고 조용히 마주앉았다.

이것 역시 벗을 맞이한 기쁨에서가 아니라 중앙관리를 모시는 지방관의 례식에서 시작된것이였다.

수하의 군사들이 성의있게 상을 차리느라고 한참이나 분주탕을 피워댔으나 정작 상을 차려놓고보니 그 분주탕에 비해 반찬의 가지수는 많지 못했다.

그나마도 동자질에 서툰 남정들이 거칠기 짝이 없는 손으로 복닥소동을 피워서 만든것이라 어느것 하나 먹음직스러워보이지 않았다.

다만 쌉쌀한 냄새를 풍기는 도라지무침만은 칠석에게 그런대로 이채로운 안주가 된것 같았다.

《찬은 변변치 않으나 로독도 풀겸 한잔 드소그려.》

박위는 커다란 놋주발과 두둑이 솟아있는 도라지무침을 번갈아 가리켜보이며 뚝한 어조로 말꼭지를 떼였다.

잠시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잠기였던 칠석은 술상같은것은 본체도 않고 전혀 왕청같은 화제를 꺼내놓았다.

《해암,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소만…

지난 여름 해암이 상경하여 우리 집에 들렸을 때 내 못난 꼴을 보여주어 지금껏 부끄럽고 죄스럽소.》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소리요?》

뜻밖의 말이라 박위는 어안이 벙벙해지였다.

칠석은 진중한 표정으로 아무런 특징도 없는 방안을 휘둘러보고나서 계속하였다.

《해암이 내려간 뒤 내 며칠밤을 궁싯거리며 자신의 됨됨과 지나온 나날들을 심심히 돌이켜보았소.

돌이켜보니 나라는 사람은 확실히 젊은 시절의 순결과 이 나라 사내의 기개를 상실한 놈이요, 말로만 애국을 떠드는 관리가 분명하데그려.

사실 개경에서 십수년 좋이 벼슬살이를 하는 사이 정의와 진실에는 눈이 어두워지고 사치와 허욕에는 눈이 밝아진 위선자가 됐더군.

개경의 벼슬살이속에서 때벗이를 한게 아니라 때투성이가 됐드란 말이요.》

《새삼스럽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하우?

어서 술이나 들지그래.》

칠석의 갑작스럽고도 심각한 자기 타매에 립장이 다소 난처해진 박위는 얼추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연해 술을 권했다.

칠석이 무엇때문에 찾아온 사연을 말하기 전에 이렇듯 장황한 자기반성부터 터놓는지 까닭을 알수 없었다.

나를 중떠보자는건가, 아니면 진심인가. 칠석은 진정 무슨 리유로 예까지 왔는가.

박위의 내심은 착잡했다.

칠석은 박위가 무엇을 생각하든 아랑곳 없다는듯 단정하게 포개잡은 두손을 가늘게 떨며 뒤말을 심어나갔다.

《…그건 새삼스러운 소리가 아니라 나의 진정이요.

아까의 계속이오만 해암이 군영에 내려간 뒤에도 그처럼 어렵고 복잡한 정황에서 계속 원정준비를 드세게 밀고나간다는 소식을 자주 들었소.

그때마다 나는 해암의 높은 뜻과 완강한 의지에 탄복하는 한편 속심지가 다 빠지여 허울만 남은 자신이 창피하고 저주스러워 홀로 가슴을 들때리며 통탄해마지 않았소.…》

여기서 칠석은 윤통의 회답편지를 받은 뒤 다시한번 자기의 저조한 인생관과 박위의 강건한 기상을 대비해보며 며칠밤을 자책과 번뇌로 지새웠다는 말도 하고싶었으나 애써 눌러참았다.

그렇게 되면 자기의 마음은 더욱 후련할것이나 윤통의 립장은 난처해질것이였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칠석은 불시에 주먹을 불끈 틀어쥐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고보면 나는 〈호유장군〉의 지기가 될 자격이 없는 용렬한 인간임에 틀림없소.

그대가 우리 집 사랑방에서 화약처럼 터쳐놓은 절교선언은 너무도 응당한 타격이였소.

아니, 고마운 매질인지도 모르오.》

박위는 그제서야 칠석이가 언제한번 타인의 마음을 중떠보는따위의 유치한노릇을 해본적이 없는 깨끗한 인간이였음을 상기할수 있었다.

칠석은 필경 자기의 진심을 토파하고있었다.

사실 칠석은 박위가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을 때 벌써 내부적인 갈등에 직면하였다.

그후 박위가 반정음모를 꾸민다는 소리가 나돌자 칠석은 그것이 전혀 무근거한 랑설임을 뻔히 알면서도 바싹 긴장해지였다. 어차피 마음속의 갈등을 종결짓고 생활의 새 방향을 선정해야 했다.

박위의 편을 들것인가, 리성계를 추종할것인가?

리성계일파에 가담한다는것은 마음에도 내키지 않았지만 현세의 량심적인 인간들에게는 물론 후세사람들한테도 권력에 아부하여 정의를 외면한 비렬한으로 규탄을 받을것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박위를 지지한다면 필수불가결적으로 리성계와 대립될것이며 그 대립은 장차 인생파멸로 이어질것이였다.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지 않는 길, 그 어떤 위험도 없는 길을 택하는것이 현책이였다.

하여 칠석은 박위에게 조심스레 원정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할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박위는 절교선언으로 대답하였다. 천성적으로 결곡한 칠석은 그때부터 심각한 내부모순에 빠지였다.

그 모순은 박위의 원정준비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더욱 격화되였다.

요즘에 와서야 칠석은 어떤 위험이 닥쳐온다 해도 정의와 량심에 살려는 결심을 다지고 오늘의 어려운 길을 떠나온것이였다.

박위는 칠석이가 겪어온 그 모든 정신적인 굴절과 성장을 희미하게 나마 짐작할수 있었다. 마음속의 자기와 힘겨운 싸움을 벌리던 끝에 오늘의 높이에 오른 칠석이가 고맙기도 하고 쳐다보이기도 하였다.

허나 무엇이라고 딱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슬며시 칠석의 말허리를 꺾었다.

《백운, 이제는 그만하지그래.》

칠석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축축하게 젖은 소리로 계속하였다.

《아니, 하려고 마음먹은 말을 죄다 해야겠소. 해암도 아다싶이 나는 여직껏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혀본적이 없소.

하지만 내 오늘 그대에게만은 허리를 굽혀 사죄를 하리다.

진심으로 당부컨대 이 못난 사람을 용서해주오.》

박위는 눈굽이 쩌릿해났다.

역시 칠석은 바탕도 좋고 본태도 깨끗한 사람이였다. 자기의 결함도 주저없이 터놓고 용서를 빌줄 아는 솔직하고 대범한 인간이였다.

세상을 둘러보면 졸장부들은 대개 자기의 결함이 들춰지는 경우 어떻게 하나 그것을 미화분식하거나 정당화하려고 열을 올린다.

그러나 결곡한 사람들은 과감하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주저없이 갱생의 힘겨운 길에 자기를 던진다.

물론 이끼오른 마음이 일조에 물행주를 친 청동거울처럼 알른알른하게 빛날수는 없겠지만 반성이 있고 회개의 결심이 있으며 그에 맞는 노력이 있다면 이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허점이나 과실이 있을수 있겠는가.

하고보면 완성된 인간은 물론 훌륭하지만 자기의 결함을 의식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 역시 아름다운것이 아니겠는가?!…

박위는 이처럼 결바른 인간을 한순간의 충동에 사로잡혀 손쉽게 털어버리려 한 자기가 도리여 부끄러워 자꾸만 얼굴이 달아올랐다. 박위는 상우에 놓여있는 칠석의 커다란 손을 힘주어 부여잡았다.

《백운, 그대가 이렇게까지 적라라하게 속을 터쳐놓으니 내가 되려 괴롭소그려.

백운의 집을 찾아갔을 때 나 역시 처신을 옳게 하지 못했소. 그때로서는 앞날이 암담한데다 그대한테서까지 리해와 공감을 받지 못하고 보니 이래저래 심사가 나서 과하게 행동한듯 하오만 그것 역시 워낙 나라는 인간이 그릇이 작은탓에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고 보는게 옳겠지.

내 맹세컨대 다시는 순간의 흥분에 사로잡혀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리다.

자, 쾌하지 못했던 지난 일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보다 굳은 우의와 신의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한대접씩 마시세그려.》

박위의 절절하고도 명쾌한 말에서 다시금 자기를 벗으로 받아준 그의 너그럽고 뜨거운 마음을 저저이 읽은 칠석은 연방 더운 침을 삼키였다.

조금후에야 칠석은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듯 표정을 바꾸더니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지금은 한만하게 술이나 마시고있을 때가 아니요. 오죽하면 내가 일부러 안동대도호부에 일을 만들어가지고왔다가 동경(현재의 경주, 당시 경상도 도소재지 격이였음.)에도 들리지 않고 밀양을 거쳐 곧장 이리로 왔겠소?!》

《그래, 무슨 일이 또 생기였소?》

박위는 술대접을 내려놓으며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칠석의 흰 얼굴은 불식간에 꺼멓게 흐려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해암에 대한 조의(조정의 여론)가 이제는 남산만큼이나 불어나서 더이상 덮어둘수 없을 지경이 되였소.》

칠석은 조정의 관리인 자기가 국가의 중대기밀에 속하는 문제를 현지에 내려와 사건관계자 당자에게 루설하는것이 얼마나 엄중한 죄로 되는가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칠석에게는 조정의 엄중한 형벌보다 정의와 량심이 더 중하였다. 놀라움보다 그 어떤 감사의 정이 더 진하게 어려있는 박위의 얼굴을 피끗 살펴보고난 칠석은 급급히 뒤말을 심어나갔다.

《내가 지난 여름 해암이 상경했을 때도 얼핏 비친바있지만 그때 벌써 조정에서는 경상도원수가 반정준비를 차린다는 소문이 쉬쉬 나돌았소.

그런데 똑똑한 증거가 없는탓인지(애초에 그런것이 있을수도 없겠지만) 얼마 안 가서 그런 소리가 모래불에 물잦듯 하더군. 천만다행이로다 하구 안도의 숨을 쉬였는데 웬걸, 요즘에 와서 다시 흉흉한 소리들이 홍두깨처럼 불쑥불쑥 튀여나오는게 아니겠소.

헌데 근래의 소문은 저번때보다 훨씬 험악하더란 말이요.

가만, 얼마전에 여기 군영에서 굴암산 어디엔가 있다는 봉은사라는 절에 올라가 절간 여러채를 뒤진 일이 있소?》

말없이 채수염을 쓸어만지던 박위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였다.

《그런 소문이 날만 한 일이 있었소.

조정에서는 인차 화약을 구해줄 잡도리가 아닌데 세월없이 조정의 도움만 기다리고있을수 없기에 내가 군사들에게 염초를 만들 절간마루밑의 먼지를 파오라고 했댔소.

화약이 없이야 원정도 할수 없지만 시시로 쳐들어오는 새앙쥐같은 왜구도 잡을수 없지 않소?!》

박위는 애당초 오천이나 염초장사람들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무슨 변이 생기든 자기가 다 들쓰고나설 잡도리였다.

《그러니 그건 생판으로 꾸며낸 소리가 아니였구려. 그다음 또 한가지, 이곳 군영에서 지난달 어느땐가 팔소바다가에 나가 왜구들을 잡은 일이 있소?》

《있었소. 그때 일은 이미 장계로도 올리고 동경류수를 통해 조정에도 상세히 알렸소. 헌데 왜구를 잡은 일도 죄목에 걸렸단 말이요?》

《그렇소. 사헌부에서는 지금 해암이 자기의 역신음모를 가리우기 위해 왜구들과 짜고 그런 놀음을 꾸몄다고 떠들고있소.》

《아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요?》

바위처럼 듬직하게 틀고앉아 심상한 어투로 칠석이와 말을 나누던 박위는 짙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박위는 이미 팔소전투를 전후한 때 왜구들의 화평회담이라는것이 사다께의 기만책이라는것을 분명히 짐작하였으나 그것이 이렇게 고려조정과 련결되여 자기의 목을 조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사다께라는 놈은 찢어발기고싶도록 가증스러웠지만 그놈의 서뿌른 작간에 놀아나는 조정관리들의 처사도 숨통이 꾹 막히도록 답답하고 안타까왔다.

왜구는 천생 타고난 강도배들이요, 승냥이와 여우를 접해붙인 악당들이니 그렇다치고 나라의 정사를 맡아본다는 기둥뿌리 관리들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우매할수 있는가.

박위의 넓은 가슴은 풀무질이라도 하듯 들썩거리였다.

칠석은 그리 덥지 않은 방이건만 몇번이나 목깃을 들척거리더니 허허 탄식조로 말을 이었다.

《기막힌 일이요. 나로서는 아직 어떤 놈이 어떻게 씹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수 없으나 사헌부에서는 해암이 대마도에 잡혀간 리별장의 딸을 뽑아오기 위해 여러 고을들에서 군품명색으로 징수한 재물을 왜구들에게 수없이 빼돌렸다는 소리도 돌리고있소.

대마도령주는 그에 대한 답례로 해암에게 반정에 쓸 병기와 리별장의 딸을 보내주기로 했다던가?!

허어― 이건 날조라 해도 너무나 빈틈없이 사개가 맞물려진 날조이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박위는 불식간에 혀가 굳어지여 한마디의 말도 꺼낼수 없었다.

커다란 주먹만이 찡찡 울리며 후둘후둘 떨리였다.

박위는 지금껏 자기에게 묻어돌아가는 반정음모라는 헛소문이 무척 불쾌했으나 무섭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뭐니뭐니해도 자기의 마음이 청백했기때문이였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니 일은 벌써 자기의 청백한 마음 하나만을 내대가지고 해결할 정도가 아니였다.

사다께라는 놈과 그놈이 파한 세작은 자기의 발밑에 보이지 않는 그물을 펴놓고 앉아 걸음을 옮기는대로 한치두치 그물의 아구리를 조이고있었다.

과연 우리 땅에서는 어느 놈이 사다께가 늘인 그물의 한귀를 잡고있는가?!…

박위의 굳어진 얼굴을 점도록 지켜보던 칠석은 조급증이 가득 어린 어조로 뒤를 조이였다.

《사헌부의 대계가 아직 밀직사에 접수되지는 않았으나 가부간 들이닥칠것은 명백하오.

그리되면 입이 열개, 백개라 해도 발명할 도리가 없을게요.

옛적부터 역모죄를 뒤집어쓴 사람은 세력이 빨래줄같은 재상재추라해도 빠져나오지를 못했는데 요즘같은 때야 더 말해 무엇하겠소.

해암, 내 생각에는 사건의 전모가 쨋쨋하게 밝혀질 때까지 당분간 몸을 피하는게 상책일듯 하오.》

《몸을 피하라고?!》

박위는 장걸한 몸집을 흠칫 떨며 눈을 지릅떴다.

몸을 피하는것은 눈앞에 닥쳐온 위험을 손쉽게 털어버릴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무런 죄도 없이 좀도적처럼 도망질을 한다는것은 너무도 비렬하고 너절한 행동이였다.

그렇게 하는 경우 지금까지 대마도원정을 위해 기울인 자기자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막중한 수고는 하루아침새 물거품처럼 사라질것이였다.

원정은 영영 실현될수 없을것이였다.

또한 칠석은 국가비밀을 루설한 죄로 옥살이를 하거나 귀양살이를 하게 될것이였다.

인간이 뜻을 꺾고 신의와 의리를 저버리면서도 기어이 살아서는 무엇하리.

죽음이 떳떳하고 삶이 치욕이라면 죽음을 택하는것이 천백번 지당하다.

우러러 하늘에 죄스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을진대 무엇때문에 한 나라의 당당한 장수가 구차스럽게 도망을 하겠는가?!

피할수 없는 불행이라면 과감히 맞이하자!

이렇게 마음을 다지자 박위의 가슴은 이상할 지경으로 평온해지였다.

박위는 녀성적인 매력이 풍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말하였다.

《백운, 나를 걱정해주는 그대의 진정은 정말 고맙소. 하지만 내 어찌 도망질을 할수 있겠소.

일의 옳고 그름을 밝힐수 있는껏 밝히고 대마도원정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할수 있는껏 주장하다가 종시 죽을 운수가 뻗친다면 떳떳하게 칼을 받는게 옳은 처신일게요.

그러니 나에게 더이상 도망같은것을 권하지 말아주오.》

칠석은 눈을 치켜뜨며 입을 하 벌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무엇때문에 있지도 않는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벌을 받는단 말이요?!》

《백운, 그러지 마오. 이제 와서 내게 필생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모든 변이 다 원정이 끝난 뒤에 왔으면 하는거요.

나는 물론 원정준비를 더욱 다그치겠지만 백운도 개경에 돌아가 할수 있는껏 내 뒤를 막아주오.

물론 나는 벌을 받는것이 겁나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 원정을 실현하자고 그러는거요. 원정을 끝낸 뒤에는 내 곤장이든 칼이든 웃으면서 받겠소.》

칠석은 치밀어오르는 격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운듯 한참이나 아래턱을 덜덜 떨었다.

조금후에야 오열이 섞인 청으로 무슨 분풀이라도 하듯 소리쳐 웨치였다.

《해암, 그대는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기에 죽고사는 일이 눈앞에 닥쳐온 이 마당에서까지 온통 원정소리만 하는거요. 이 나라에 그대와 같이 뼈대가 실한 장수가 있는것은 실로 자랑스러우나 그 남다른 인격때문에 남에 없는 고초를 겪으며 운명의 랑끝으로 몰리니… 아아, 하늘이 무심하오.

깊이 든 주옥이니 그 광채를 뉘라서 알리오. 어허허…》

칠석은 마침내 어깨를 들썩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위는 칠석의 물결치는 어깨를 힘주어 잡으며 곡진한 청으로 뇌이였다.

《백운, 그만 자중하오. 나는 그대의 과분한 치사를 지우의 기대와 믿음으로 가슴속에 깊이 새기겠소.》

이윽하여 칠석은 불타는 두눈을 들어올리더니 아까와는 판다르게 힘찬 어조로 말하였다.

《해암의 심정이 그러할진대 내 어찌 뒤탈을 생각하면서 몸을 사리겠소.

짧은 팔로 먼곳의 돌을 집을수 있겠는지 모르겠소만 내 죽을 기를 쓰고 나서서 해암의 일을 바로잡아보겠소.

만약 모든 일이 옳게 밝혀지고 바로 펴지여 원정이 실현된다면 그땐 나도 해암과 함께 대마도원정에 참가하겠소.》

박위는 물론 밀직사의 중급관리에 불과한 칠석이가 나라의 중대결정을 자기 의사대로 손쉽게 조종할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의 심정을 깊이 헤아려주고 죽기로써 자기의 일을 도우려 하는 칠석이가 여느때없이 고맙고 미더웠다.

솔의 푸름은 겨울에 알고 벗의 진정은 역경에서 헤아리게 된다는 옛 문장의 진의가 새삼스레 가슴에 마쳐왔다.

《백운, 별스러운 말 같소만 그대와 같은 지기를 가진것은 나의 제일 큰 자랑이고 행복이요.

나에게 있어서 백운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나날은 가장 쓸쓸하고 서글픈 시기였소. 고맙소, 정녕 고맙소.》

박위의 상기된 얼굴에서 벗의 뜨거운 진심을 여실히 헤아려본 칠석은 벅찬 감격과 환희로 하여 가슴이 훅훅 달아올랐다.

《해암, 나야말로 그대를 벗으로 가진것을 인생의 제일 큰 복으로 알고있소.

그대로 하여 나는 문생과 좌주간의 사사로운 도의보다 나라와 민족앞에 지닌 본분을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는 인생의 참된 지주도 되찾을수 있었소.

그러니 내 어찌 그대와 더불어 생과 사를 같이하지 않으리오.

따져보면 실상 생이란 그리 요란한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것도 별로 무서운것이 아니요.

옛시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소.

 

살고 죽음이 괴롭다 하되

원래가 괴로움이 아니렷다

드러나고 숨고 살고 죽고

세계는 넓으리라

 

헛허허, 인생이란 충의로 살다가 충의로 마치면 족한것이요, 깨끗하게 지내다가 깨끗하게 끝내면 여한이 없는게요.

해암, 우리 새로이 정립한 인생리치와 오늘의 맹약을 더욱 굳게 다지는 의미에서 한대접씩 내세그려.》

어느결에 본래의 소탈하고 쾌활한 성격이 되살아난 칠석은 방금전까지 술을 마실 계제가 못된다고 손사래질을 하던 사람같지 않게 껄껄 웃으며 거의 대접만 한 주발을 들어올리였다.

벗과 화해를 하고 인생사의 리치를 새로 수립한것으로 하여 한껏 가슴이 넓어진 칠석은 지금 불행이나 죽음 같은것이 눈아래로 아득히 내려다보이였다.

어느결에 칠석의 기분에 감염된 박위는 자기도 마음이 쇄락해지여 껄껄 웃으며 주발을 추켜들었다.

술이 철철 넘쳐나는 주발을 단숨에 비워버린 두사람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상대의 손을 억세게 틀어잡으며 또다시 속이 후련하게 웃어제끼였다.

여러가지 의미가 담겨진 대장부들의 뜻깊은 웃음이였다.

얼마후 칠석은 오늘중에 기어이 돌아서야 한다며 만류하는 박위의 손을 뿌리치고 부등부등 밖으로 나왔다.

저녁어스름이 깔린 괴자누룩한 행길로 홰군도 없이 홀로 말을 몰아가는 칠석의 모습을 바라보는 박위의 가슴은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못 견디게 아프고 쓰리기도 했다.

4

4

 

헐벗은 산과 들, 우불구불하게 뻗어나간 행길, 그 행길가에 간간이 늘어붙어있는 쭈그렁박같은 초가마가리들의 지붕우로 호함진 함박눈송이들이 오뉴월 나비떼마냥 가볍게 날아내리고있었다.

원래 소설이후 대설이전에 내리는 첫눈은 길할 징조요 복할 조짐이라고 하여 그런 눈이 오는 날이면 대궐에서는 물론 지방관청들에서까지 첫눈맞이의식을 요란하게 벌리군 했다.

축하표문을 올리고 절을 하고 각종 짐승의 탈을 쓴 아이들과 악대를 앞세운 행렬이 잡귀신들을 내쫓는다는 세상에 있지도 않는 괴이한 짐승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러대며 빙빙 돌아가고…

그런 날에는 일년내내 고생살이에 짓눌리워 하루한시 맘편히 허리펼새 없었던 민가의 상사람들도 희희락락하며 첫눈맞이를 하느라고 촌촌호호가 명절날처럼 북적거리였다.

하늘을 우러러 복을 빌고 자연에 비추어 길흉을 론단하는 이러한 의식을 훌륭한 풍속이라고 할수는 없겠지만 한때나마 겨울의 신선한 자연을 즐기며 심신을 수련하는 첫눈맞이를 노상 부질없는노릇이라고 볼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이 시각 틀림없이 소설이후 대설이전의 첫눈이 내리건만 마을과 마을은 두툼한 눈이불을 뒤집어쓴채 무거운 정적에 잠겨있었다.

년년이 겹치는 재해와 흉작탓인지 아니면 모기다리에서도 피를 내려 들고 마른 나무에서도 즙을 짜려드는 량반, 서리들의 그악스러운 갈퀴질바람에 모두들 옛 풍속을 즐길 흥취와 기력을 죄다 잃어버렸는지?!…

아니, 결코 그때문이 아니였다.

이 땅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풍속의 파괴자도 다름아닌 왜구들이였다.

왜구들의 그칠새 없는 침략과 략탈로 하여 이 고장 백성들은 너나없이 가슴이 데고 마음이 졸아들어 이제 와서는 옛 풍속을 즐길 정신적인 경황이 없었다.…

맹렬한 기세로 달리는 황부루의 잔등에 올라앉아 스칠듯이 지나치는 마을과 마을들을 바라보던 박위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였다.

흩날려내리는 함박눈, 죽탕처럼 질쩍거리는 대지, 행길가에 움푹움푹 꺼져들어간 진흙구뎅이들…

날은 지체궂고 길은 험했으나 성실하면서도 성깔사나운 황부루는 투레질 한번 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짝귀를 곤두세운채 기운차게 네굽을 놓고있었다.

말이 달음을 놓는대로 엿덩이같은 진흙덩이들이 어질더분하게 튀여오르고 쌀가루같은 눈가루가 뽀얗게 흩날려 퍼지였다.

말궁뎅이와 말잔등에는 물론 사람의 어깨와 팔다리에도 진흙과 눈가루가 덮이여 인마가 다 볼썽사나왔으나 박위는 연해 말고삐를 세차게 당기였다.

《쩌, 쩌쩌!…》

박위는 지금 룡호군시절의 상관이였던 전라도원수 김종연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요즘 경상도군영의 원정준비는 그런대로 마감고비에서 다그쳐지고있었다.

기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 밀고나간다면 멀지 않아 원정준비를 끝낼것 같았다.

허나 박위는 한시라도 원정날자를 앞당기기 위해 전라도군영의 힘을 빌기로 하였다.

전라도군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준다면 대마도원정은 당장이라도 단행할수 있었다. 하여 박위는 칠석이가 다녀간 뒤 두차례에 걸쳐 김종연에게 대마도원정에 호응해줄것을 요망하는 사찰(개인적인 편지)을 보냈었다.

종연은 두번 다 차차 결심을 알릴테니 기다리라는 답전갈을 보내고는 지금껏 소식이 없었다.

간에 불이 달려가지고 종연의 소식을 기다리던 박위는 더이상 인내력을 발휘할수가 없어 군영의 바쁜 일감을 잠시 윤통에게 떠맡기고 순천부에 위치한 전라도군영을 찾아 떠난것이였다.

박위는 오래전부터 김종연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문벌좋은 가문에서 나서자란 김종연은 인물도 잘나고 체격도 좋은데다 병서에도 밝고 무술에도 능한 매력있는 장수였다.

성격은 침착하면서도 과묵할사 한데 그것으로 하여 종연의 인격은 더욱 무게있게 안겨왔다.

헌데 지나치리만큼 자존심이 강한 종연은 누구든지 눈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우습게 여기는것이 큰 흠절이였다.

그로 하여 박위가 룡호군의 중랑장으로 있을 때 종연은 상장군으로서 그의 아득히 높은 상관이였는데 두사람은 자주 의견이 상치되여 서로 곱지 않은 눈으로 마주볼 때가 많았다.

그때 종연은 《재하자 함구무언》(아래사람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입버릇처럼 뇌이면서 수하무관들의 견해를 무턱대고 묵살하려 했고 박위는 누구앞에서도 자기의 정당한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개개로 보면 두사람 다 훌륭하고 매력있는 무관이였으나 함께 있으면 서로가 다 상대를 불편해하고 못마땅해했다.

주위의 무관들은 그들을 두고 《두사람 다 동뜨게 뛰여난 무관이지만 영원히 의기투합(마음이 합쳐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지낼 사이》라고 수군거리였다.

그러던중 종연은 왜구의 침입으로 노상 소란스러운 김해부에 무관출신의 부사를 특별히 선발하여 보낸다는 조정의 소식을 알게 되였다.

종연은 지체없이 박위를 천거하였다.

박위만 한 적임자가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모저모로 불편한 그를 자기밑에서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박위는 종연의 곱지 않은 속심을 뻔히 짐작하였으나 무관인 자기가 전역에 나가는것을 너무나 응당한 일로 여긴터여서 아무런 내색도 없이 웃으면서 룡호군의 대문을 나섰다.

이것으로 두사람은 영영 헤여지는듯싶었다. 허나 운명의 장난이란 얄궂은것이였다.

몇해전 박위가 경상도원수로 승탁된지 얼마 안되여 어떤 과실로 내직에서 밀려난 김종연이 박위밑의 부원수로 내려왔다. 두사람 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뜻밖의 상봉이였다.

종연은 박위의 수하로 굴러내린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위를 늘 시끄럽게 여기던 끝에 멀리로 떠밀어보냈던 옛적의 온당치 못한 처사가 송구스러워 노상 어색해하였다.

허나 박위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종연을 무간하게, 지어 살틀하게까지 대해주었으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의 군사적재능과 공적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박위는 임금에게 장계를 올리고 병부에 전투보고를 보낼 때면 매번 김종연의 전투공적과 군사적자질을 상세히 언급한 다음 고려군의 강화발전을 위해 그를 크게 써주는것이 합당할것이라는 자기의 견해를 덧붙이군 했다.

이것은 그 어떤 위선이거나 누구에게 생색을 내려는것이 아니라 박위의 진심이였다.

당시(지금도 그러하지만) 김종연의 당형인 김종기는 중서 문하성의 좌우간의 대부(임금의 잘못을 충고하는 정4품의 벼슬아치)로 한창 위세를 떨치고있었다.

좌우간의 대부라는것은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조정백관들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관리로서 문벌이 좋고 인물이 청수하며 두뇌가 총명한 전도양양한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특정한 지위였다. 그러한 형을 통해 종연은 매번 박위의 보고내용과 그속에 비낀 박위의 진정을 알수 있었다.

종연은 박위가 고맙기 전에 너무도 대바르고 공정한 인간을 턱없이 하대하고 랭대한 자기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날이 갈수록 박위에게 머리가 숙어지였다.

종연은 경상부원수로 내려온지 1년도 못되여 전라도원수로 승진되였다.

좌천되였던 량반이 1년도 채우지 않고 승탁된것은 전고에 없는 일이였다.

무관으로서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장수 한사람이 천금처럼 귀중한 때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위의 적극적인 추천이 은을 낸것이였다.

부임지로 떠나던 날 종연은 성의를 다해 음식상을 차려놓고 박위에게 진심으로 되는 사죄와 감사의 말을 꺼내놓았다. 여적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여본적 없는 종연으로서는 생전 처음되는 일이였다.

종연의 말을 다 듣고난 박위는 빙그레 웃으며 채머리를 흔들었다.

《아니할 말씀이요. 사실상 동관이 나에게 고마울것이란 아무것도 없소.

나는 그저 벌어진 사실을 그대로 보고해야 할 자기의 의무와 본분을 실행했을뿐이요. 지난날의 감정이 어떻든 사람의 됨됨과 공적을 옳게 평가하고 보고하는것은 그 어떤 선행이 아니라 인간의 량심이고 도리가 아니겠소.

공의 이번 발탁은 전적으로 전하의 하해같은 은덕과 그대의 남다른 군사적재능으로 하여 이루어진것이니 나에게는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소.

어련하겠소만 나는 그저 그대가 나라의 준엄한 한 전구인 전라도를 잘 지켜주기만을 바랄뿐이요.》

전라도 군영으로 넘어간 종연은 얼마후 자기의 성의와 존경이 담긴 장검 한자루와 고급해산물 한바리를 박위에게 보내왔다.

박위는 장검만을 받고 해산물은 종연에게 되돌려보내였다.…

박위는 대마도원정을 준비하는 나날 이따금 종연이 생각났으나 그를 원정에 끌어들이고싶지는 않았다.

남에게 굽어들기 싫어하는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고싶지도 않았지만 그보다는 종연의 창창한 앞길에 혹여 어떤 그늘이라도 던져주지 않겠는가 하는 위구심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하지만 칠석이가 왔다간 뒤 박위는 생각을 달리하였다.

당길수 있는 일은 모두 당기고 나설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들어일구어야 했다.

그것은 원정을 가급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김종연과 같은 뛰여난 장수들의 재능과 애국심을 최대로 꽃피워주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였다.

하여 박위는 두번에 걸쳐 피가 뚝뚝 내돋도록 절절한 어휘로 원정참여를 요망하는 편지를 보냈건만 종연에게서는 확답이 없었다.

박위의 심정은 착잡했다.

종연은 원정에 나서기가 두려운가, 아니면 그의 유별스러운 자존심이 또 코를 쳐들었는가?!

종연의 심중은 딱히 가려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어느 세월 그의 회신을 기다리고있을수 없었다.

찾아가서라도 명백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가능한껏 그의 손목을 끌어당겨야 했다.…

박위가 경상도군영을 나선것은 어제 중낮때였다.

그때 벌써 박위는 자기의 몸이 별스럽게 무겁고 비둔해진듯싶었다.

오늘 아침 창원고을의 어느 한 역(역마가 머무르는 역참과 주막집등이 있는 일정한 규모의 거리가 형성되여있는 곳.)을 나설 때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골속이 들쑤시여 수월히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몇달째 지속되여온 과중한 정신육체적부담이 뼈속깊이에 배여있는데다 려로가 겹치고 찬바람이 스며들어 극심한 병세를 형성한것이였다.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가증되였다.

이제 와서는 온몸이 학질에라도 걸린듯 걷잡을수없이 덜덜 떨리였다.

눈뿌리가 확확 달아오르고 귀속이 웅웅 울어댔다.

여느때같으면 질주의 쾌감을 자아냈을 군마의 기운찬 발굽소리와 귀전을 감도는 세찬 바람소리는 소란스러운 굉음마냥 귀찮고 시끄럽게 감각되였다.

박위는 사실상 말을 타고가는것이 아니라 말에 실려가고있었다.

불현듯 여삼의 챙챙한 목소리가 꿈속에서처럼 아렴풋하게 들려왔다.

《…장군의 신색이 좋지 않소이다. 병세가 더 심해진게 아니오니까?》

박위는 근심이 가득 어린 여삼의 얄팍한 얼굴을 돌아보며 애써 웃음을 피웠다.

《이놈아, 고뿔도 병이라더냐? 그러다 말겠지. 아무 걱정말구 내뒤를 바투 따라서기나 해라.》

박위의 시원스러운 대답을 그대로 믿어버린 여삼은 즉시 근심기를 확 날려버리였다.

여삼의 얄팍한 입에서는 아까부터 사물거리던 말마디들이 들물처럼 쏟아져나왔다.

《황송하오나 장군께 긴히 사뢰일 말씀이 있소이다.》

《황송이고 누런 송이고 어서 말을 해라.》

박위는 심한 고통으로 하여 아무런 호기심도 동하지 않았으나 묵묵히 앞쪽을 바라보며 여삼의 뒤말을 재촉했다.

여삼은 벌써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 자기의 구랑말을 다몰아 박위의 황부루곁에 세우고나서 말을 이었다.

《저번날에도 대략 말씀올렸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난 추석날 밤에 기생년의 집 뒤담을 뛰쳐나온 놈이 례사 난봉군같지 않소이다. 그놈이 바다를 건너와 거북놀이행렬에 끼워들어가지고 기생의 집에 스며들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천의 짐작이였으나 여삼에게도 그렇게 생각되였다.) 더욱 그러하옵니다.

더구나 그 기생년이라는게 김해부사의 애기인데다 이 고장 태생도 아니고 타지에서 굴러들어온 얼쑹덜쑹한 잡년이라는데 아무래도…》

여삼은 아직까지 이렇다할 단서는 잡지 못했으나 거의 확정적으로 추석날 밤 바다로 내뺀 놈과 기생년 그리고 기생의 장단에 놀아난다는 김해부사가 한줄에 꿰여있는듯이 생각되였다.

하여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박위의 의향을 자아내기 위해 조심스럽게 변죽을 울려보군 했다.

박위는 진작 여삼의 심중을 짐작하고있었다. 하지만 여삼이네들과 견해를 같이하고싶지 않았다.

(…바다로 내뺀 놈을 꼭 기생의 집에서 나온 놈이라고 단정할수도 없고 기생의 집을 나드는 놈을 무작정 세작이라고 보는것도 무리하다.

호백이까지 거기에 련루시켜본다는것은 지나치기 짝이 없는 억측이다.

나라의 록을 타먹는 관헌인 호백이가 어찌 역신노릇을 할수 있겠는가.

나 역시 호백이가 깨끗하고 진실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지만…

자기가 곤경에 빠졌다 하여 아무 사람이나 함부로 의심한다는것은 사내답지 못한 소위다.

물론 추석날 밤 바다로 내뺐다는 수상한 놈과 기생년에 대해 그리고 조호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자상히 알아보기는 해야 할것이다.

이제는 윤통이만이 아니라 이 애들까지 호백을 의심하고있는데 이게 그저 일은 아닐것이다.)

박위는 생각이 난김에 그 모든 일에 대해 깊이 따져보고싶었다.

허나 눈앞이 휘휘 돌아가고 머리속이 지끈지끈 들쑤시여 도저히 사색을 지속할수 없었다.

한참만에야 박위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며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 애 여삼아, 각성은 높이로되 함부로 사람을 의심해서는 못쓰느니… 확실한 단서를 얻기 전에는 다시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라.…》

다음날 저녁무렵에야 박위네들은 전라도군영앞에 당도하였다.

원래 전라도군영은 순천부중심에 있었는데 얼마전에 김종연이 주장하여 바다가로 옮기였다.

종연은 바다가에 바투 나앉아 왜구의 동태를 살피다가 나타나는 놈들을 벼락같이 덮치군 하는 경상군영의 본을 따서 군영의 위치를 옮긴것이였다.

금시 자리를 잡은 뒤여서 군영의 건물들은 그리 미끈하지 못했으나 오가는 군사들은 제법 칠칠해보이였다.

박위는 엉금엉금 기여내리다싶이 말에서 내리였다.

땅에 발을 놓으니 물레에 태우기라도 한듯 눈앞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잠시 눈에 힘을 주고 앞쪽을 주시하던 박위는 안깐힘을 짜내여 걸음을 떼놓았다. 그 순간 허공이라도 짚은듯 온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리였다.

곁에 서있는 소소리높은 나무기둥에 몸을 의지하려고 손을 내뻗치던 박위는 그만에야 몸의 중심을 잃고 눈판우에 모재비로 나떨어지였다.

육신은 구름우에 올라선듯 더없이 편안한데 의식은 가물가물 흐려들었다.

자기를 부르는 여삼의 울음섞인 소리와 황부루의 투레질소리가 아득히 먼곳에서 들려오는듯 하더니 곧 사라져버리였다.

5

5

 

종연은 군막안에 들어서자바람 우뚝 굳어지였다. 울기가 내뻗친 시선으로 한참이나 허공을 노려보던 종연은 으흠 신음소리같은것을 흘리고나서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무엇이든 찢어발기고싶도록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극심한 수치감이 가슴을 옥죄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아침 담양의 어느 촌락에 왜구들이 기여들었다는 첩보를 받자 종연은 군사들을 이끌고 현지로 내려갔으나 한놈도 잡지 못하였다.

종연이 촌락에 당도하니 왜구들은 벌써 도망질을 친 뒤요, 재가루와 눈가루가 뒤범벅이 되여 흩날리는 페허우에서는 원성과 곡성만이 흐르고있었다.

종연은 요즘에 이르러 자주 이렇게 허탕을 쳤다.

근래에 들어 더욱 교활해진 왜구들은 꼭 미끼곁을 감도는 약은 잉어처럼 군영의 눈치와 대상물의 동태를 살살 살피다가는 벼락같이 재물을 털어가지고 내빼군 했다.

며칠전에는 남원과 령광이 재무지로 변하고 오늘은 담양이 털리였다.

래일은 과연 어느 고을이 또 화를 입을것인가?!…

온 도의 백성들은 매일, 매 시각 불안과 공포에 싸여 전전긍긍하고있는데 도의 안위를 책임진 나는 매양 이렇게 왜구들과 꼬리잡이놀이나 하고있으니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오래도록 돌상처럼 굳어져있던 종연은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건만 자기의 분을 이길수 없어 별안간 서탁의 모서리를 쾅 내리쳤다.

《괘씸한지고. 요 간특한 섬나라 도적개들을 어떻게 하면 모짝 잡아치울고?》

종연이 씹어뱉듯이 웅얼거리는데 서탁우에 놓여있던 종이두루마리가 두르르 굴러 그의 옷자락에 걸리였다.

종연은 무심결에 종이두루마리를 집어들었다. 분노로 하여 아직도 후들거리는 손으로 종이두루마리를 펼치였다.

어제 밤에도 두번이나 읽어본 개경의 형에게서 온 편지였다.

다시금 편지의 글발을 뜯어보던 종연은 마감대목에 이르러 눈못을 꾹 박았다.

편지의 글발이 김종기의 목소리로 변하여 귀를 울리고 가슴을 두드렸다.

《…나도 물론 박위가 반정모의를 할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란 비방중상이라는 흉탄에 맞아 죽을수도 있으며 헛소문이라는 올가미에 걸려 명이 잘릴수도 있다.

그러니 어찌 박위에게 묻어다니는 반정소문을 훌훌히 대할수 있겠느냐.

박위의 대마도원정이 비록 천추에 길이 빛날 큰일이라 할지라도 무작정 그를 따라섰다가는 필경 큰 해를 입을것이다.

절대로 그의 요청에 응해서는 아니될줄 안다.

만약 네가 그 어떤 옛적의 친분이나 무관의 자존심에 떠밀리워 박위의 요청에 응해나선다면 너자신은 물론 우리 가문모두가 멸문지화의 구렁텅이에 굴러내리게 된다는것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종연은 종이두루마리를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교자에 들어앉았다.

장대한 웃몸을 비스듬히 뒤로 젖히고 스르시 눈을 감았다.

사색은 갈피없이 뒤번져지였다.

종연은 박위가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왔을 때 벌써 그의 어벌이 큰 주장에 살이 뛰고 피가 끓었다.

박위의 인간됨됨에 다시금 크게 탄복하였다.

확실히 박위의 일은 선이 굵고 판이 큼직큼직했다.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은 어느것이나 다 자드락자드락해보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지금껏 별치 않은 공적을 세우고도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고싶어 몸이 달아하였다.

하지만 박위는 민족사적인 거사를 착안하고 내밀면서도 마치 일상적인 정사라도 보듯 조용하지 않는가.

세상에 과연 이처럼 희귀한 인물이 몇이나 있으련고?…

부러움이 엇섞인 탄복은 얼마 안 가서 야릇한 위구심으로 변하였다.

박위의 원정요청에 즉시 응하고싶었으나 정작 몸을 일으키자니 무엇인가 껄끄럼했다.

그렇다고 단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하는것은 물론 박위와의 의리를 저버리는것 같아 저으기 괴로왔다.

종연의 위구는 공연한것이 아니였다.

고려의 군법에 임금의 교지나 병부의 령이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것은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헌데 박위는 대마도원정에 참가해달라는것을 개인적인 청탁처럼 전해온것이였다. 오래도록 망설이던 종연은 자기의 번민을 적은 편지를 개경의 형에게 보내였다.

얼마 안있어 형의 회신이 왔는데 내용인즉 이렇게 박위의 대마도원정에 절대로 참가하지 말라는것이였다.

종연의 번민은 더욱 커지였다.

박위의 인간됨됨을 오래전부터 잘 알고있는 종연은 물론 반정음모라는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그것은 필경 박위의 인생길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던 시기심 많은 소인배들이 꾸며낸 헛소문일것이였다.

그렇다 할지라도 역모의 소문이 달린 대마도원정에 무모하게 뛰여들수는 없었다.

후날의 그 어떤 책임추궁이나 벌이 두려운것이 아니라 가정의 멸문지화가 두려웠다.

종연은 박위의 요청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헌데 그 결심을 박위에게 알리자니 그것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선뜻 붓을 들수가 없었다.…

음울한 표정을 짓고 앉아 한참이나 방안구석쪽을 노려보던 종연은 별안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부원수가 아까부터 방안에 들어와있음을 느낀것이였다.

《무슨 일이요?》

종연은 짜증이라도 내듯 물었다.

키는 작으나 몸집은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부원수는 격렬한 전투장에 뛰여들기를 무척 좋아하는 타고난 싸움군이였다.

하지만 요즘에 와서 한번도 시원스럽게 왜구들을 잡지 못하자 눈에 띄게 풀이 죽어가지고 다니였다.

그런 부원수를 볼 때면 종연도 덩달아 심한 죄책감과 우울증이 떠올랐다.

잠시 덤덤한 기색으로 종연의 낯빛을 살피던 부원수는 조심스럽게 말꼭지를 뗐다.

《우리 도에 전고에 없던 변이 또 하나 생겼소이다. 바다길순시를 나갔다 돌아오던 우리 군사들이 독소고개어방에서 화적패당을 잡았는데…》

《화적패당을 잡았다고?! 지금같은 난시에 화적패까지 횡행한단 말이요?》

가뜩이나 기분이 어수선하여 지글지글 끓어번지는 속을 간신히 제어하고있던 종연은 금시 울화증이 치밀어올라 버럭 청을 높이였다.

《예, 도적패당도 례사 도적무리가 아니라 마수레까지 끌고다니는 아주 큰 무리인데 패중에는 계집사람도 있사옵고 륙십나이가 넘어보이는 놈도 있습니다.》

《그래 그놈들을 잡아다가 어디에 두었소?》

《비여있는 광속에 처넣었소이다. 장군께 엿쭈고나서 한놈한놈 차례로 꺼내다가 다듬어볼가 하나이다.》

《왜구의 겁략만 겪자 해도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화적들의 성화까지 당하자니 백성들의 고생이 얼마나 막심하겠소.

부원수, 도적무리의 행적이 들춰진 다음에야 다듬고 솎고 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불문곡직하고 늙은 놈부터 마지막계집졸개까지 모두 내다가 목을 치오. 아니, 내가 직접 나가서 형을 집행하겠소.》

그러지 않아도 무슨 분풀이든 하고싶어 속이 들썽거리던 종연은 기품있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참 옆구리의 칼을 뽑아들고 부원수의 뒤를 따랐다.

눈은 어느새 내리기를 그쳤는데 싸늘한 바람에 불린 눈가루들이 방향없이 흩날리고있었다.

눈가루를 헤가르며 걸음을 재우쳐 광앞에 이른 종연은 칼을 비껴잡은채 우뚝 굳어지였다.

부원수는 공연히 눈에 독이 올라가지고 광을 지켜선 두 군사를 흘겨보더니 을러메기라도 하듯 청을 높이였다.

《화적놈들을 전부 꺼내오너라.》

두 군사는 익달된 동작으로 광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꽥꽥 고함을 쳐가며 《화적패》를 밖으로 끌어내였다.

도적이라면 상판에 기름기도 돌고 흉악스러운 기색과 뻔뻔스러운 표정도 엿보이련만 끌려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순박하고 어져보이였다.

게다가 사흘에 피죽 한그릇도 먹지 못한 사람들처럼 피골이 상접한것이 다치면 금시 무너질것처럼 기운들이 없어보이였다.

그런대로 괴수라는 늙은이만은 풍신도 좋고 거동이나 표정도 그닥 어둡지 않았으나 그에게도 흉악스러운 도적패두의 흔적같은것은 엿보이지 않았다.

종연은 다소 어정쩡해났다.

다짜고짜로 칼을 휘두르려던 충동적인 분노는 서서히 사그러들었다.

두툼한 입술을 짓씹으며 한사람한사람의 초췌한 모양을 뜯어보던 종연은 위엄기있는 눈초리를 늙은이에게 돌리였다.

《너희들은 어디서 사는 화적들이냐?》

늙은이는 너부죽한 얼굴에 어딘가 반가와하는듯 한 기색을 띄우며 또박또박 그루를 박아 대답했다.

《소인네들은 화적이 아니오라 경상도 김해에 사는 알쭌한 량민들이올시다.》

《경상도 김해에 사는 량민들?!》

김해라는 소리에 아무 까닭없이 박위가 상기되면서 은근히 속이 조여들었다.

《김해에 살면 그곳에서 살길을 찾을것이지 무엇때문에 남부녀대해서 마수레까지 끌고 함부로 넘나드는거냐. 네가 누구를 속이려는게냐?》

《뉘앞이라고 감히 거짓소리를 하오리까. 좀더 자상히 말씀드린다면 이 사람들은 김해 죽촌의 염초장일군들이고 소인은 경상군영의 박장군께서 내리신 염초장행수의 벼슬을 지내는 늙은이올시다.》

《염초장행수?! 그러니 박장군께서 너에게 그런 벼슬을 주었단 말이냐?》

종연의 말투는 어느새 조금 부드러워졌다. 로인은 그것이 매우 흡족하듯 히뭇이 웃음기를 띄우더니 제법 손세까지 써가며 말을 계속했다.

《그렇소이다. 장군께서도 이미 잘 알고계시겠지만 몇달전 우리 죽촌은 왜구의 란을 당하여 말짱 빈터만 남았소이다.

소인들은 그제서야 비로소 농사보다 훨씬 더 중한것이 군사요, 이나라사람들은 그가 누구든 농기보다 병기를 더 사랑해야 한다는 세상의 리치에 눈을 떴소이다. 하지만 그 어떤 세상리치에 눈 떴다한들 어리석은 우리 촌백성들이 무슨 일을 똑똑히 하겠소이까.

그저 죽기로써 군사일을 돕자고 마음다지고 배무이와 염초뽑는 일을 시작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자 우리 군영 박장군께서는 과분하게도 소인에게 행수의 벼슬까지 안겨주시고…》

종연은 비로소 도적패당으로 몰린 죽촌사람들의 내막이 어느 정도 짐작되였다.

불시에 심장이 훈훈하게 더워나면서 생각이 깊어지였다.

종연은 여직껏 백성이라 하면 먹고사는 일외 다른 아무것도 관심하지 않는 무지렁이들로 여겨왔었다.

헌데 박위로부터 행수벼슬을 받았다고 하는 이 풍신좋은 로인은 방금 뭐라고 했는가.

농사일보다 군사일이 더 중하다고 했다. 농기보다 병기를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저들은 전함도 뭇고 염초도 뽑는다고 했다.

얼마나 훌륭하고 또 갸륵한 백성들인가!…

감동이 증대되는 속에서도 의혹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은 어찌하여 우리 도지경을 넘어섰으며 어떻게 되여 이들중에는 계집사람까지 끼워있는가?)

총기좋은 행수로인은 어느새 종연의 내심을 읽었는지 급급히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는 통촉합시는 바이지만 우리 군사들이 왜구의 소굴을 깡그리 짓태워버리자면 뭐니뭐니해도 화약이 많아야 할게 아니오니까.

헌데 소인네들은 린근동네의 재먼지는 물론이요 창원과 밀양의것까지 거지반 긁어먹다싶이 했으니 이런 변이 어디 있소이까.

그래서 소인네들은 패패로 나누어가지고 좀더 멀리까지 나돌아다니던 끝에 그만 길을 헛들어서 이렇게 전라도지경을 넘어섰소이다.

헌데 독소고개에서 부닥친 이곳 군사들은 무엇때문인지 성이 독같이 올라가지고 무작정 소인네들을 화적패로 몰아붙이더니 이곳까지 끌고왔소이다.

…그리고 저 아낙네가 소인네들의 일에 끼우게 된 리유로 말한다면…》

로인은 언발을 강둥강둥 구르며 불안스러운 눈길로 종연을 살펴보는 체소하나 강단있게 생긴 녀인을 가리켜보이였다.

《…갓 낳은 애기를 왜구들에게 잃은데다 지아비마저 왜구들에게 잡혀갔사온데 군사들의 원정준비를 돕는 일인즉 자기의 원쑤를 갚는 길이라고 하면서 부등부등 따라나서기에 어쩔수없이 데리고다니옵니다.

여보게, 백동이 에미― 장군께 어서 인사를 올리지 않구 왜 그렇게 서있기만 하나?》

로인이 갑자기 자기를 찍어대는 바람에 까무잡잡한 얼굴을 어떻게 건사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녀인은 종연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녀인의 진흙탕에 게발린 커다란 미투리와 뿌옇게 먼지가 오른 수건 쓴 머리가 종연의 가슴에 아프게 마쳐왔다.

(계집사람까지 군사일을 도우러 떨쳐나섰다?!

하기사 갓 낳은 애기를 잃고 지아비까지 빼앗겼다니 저 나인의 좁은 가슴에 한인들 얼마나 쌓여있고 분인들 또 얼마나 덩이져있겠는고.

아무튼 모두들 기특한지고…)

종연은 가슴이 달아올라 더이상 죽촌사람들과 마주 서있을수 없었다.

아무말없이 군막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놓던 종연은 소리없이 뒤따르는 부원수에게 축축하게 젖은 음성으로 나직이 뇌이였다.

《부원수, 저 김해백성들이 며칠동안이나 길을 헛들어가지고 고생을 많이 한것 같은데 며칠간이라도 우리 군영에 두고 성의껏 대접해서 보내도록 하오.》

《알겠습니다.》

부원수는 무엇때문인지 갑자기 활기를 띄며 씩씩하게 대답하고나서 어디론가 급히 사라져버리였다.

군막으로 돌아온 종연은 어슬녘이 되도록 교자에 들어앉은채 움직일줄 몰랐다.

그렇게도 많아보이던 할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마음은 하냥 무죽하고 번거로왔다.

이제는 불을 켜야겠다고 생각하고 막 초대앞으로 다가서는데 문밖에서 부원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장군! 경상군영의 박원수가 우리 군영앞에 기절하여 쓰러졌습니다.》

《뭐라고?! 박원수가?!…》

깜짝 놀란 종연은 심장이 비틀리는듯 한 충격을 느끼며 우뚝 굳어지였다.

어떻게 손을 놀렸는지 탁자우의 초대가 딱 소리를 내며 넘어지였다.

이어 종연은 맨상투바람인지도 모르고 황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6

6

 

박위는 간신히 눈시울을 밀어올리였다. 네활개를 뿌리고 편안히 누워있는 박위의 눈앞으로 올챙이무리같은것이 은빛꼬리를 까불거리며 밀려들었다.

현훈증이 일고 구토감이 치밀어올랐다. 박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방안은 땀이 흐를 지경으로 훈훈한데 어디선가 씁쓸한 냄새가 풍겨왔다.

나직한 말소리도 들려왔다.

내가 지금 어디 와서 이렇게 편히 누워있을가. 할일은 산처럼 쌓였는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고?!…

박위는 애써 뇌리를 긴장시켜가지고 생각을 굴려보았으나 딱히 짚여지는것이 없었다.

그 대신 곁에서 울리는 나직한 말소리는 차츰 선명하게 가려들을수 있었다.

《…이제 인차 피여나실테니 너무 걱정마시오이다. 경상원수께서는 이미전에 심히 기를 상하시고 혈을 상하신데다 려로가 겹쌓였으나 신체가 건장하시니 이제 약 한대접만 더 드시면 씻은듯, 부신듯 나을것이오이다.

시생의 의술이 널리 알려지지는 못했으나 실속이 바이 없지 않은데 다 진맥에 들어서는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으니 영낙없이…》

얼추 듣건대 매우 겸손한듯 하나 실은 제 자랑이 가득 섞인 어떤 의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불만기가 력연한 종연의 음성이 울리였다.

《…그렇게 실속있는 의술이라면 고뿔이든 신뿔이든 어서 뽑아야 할게 아니요?》

박위는 다시 눈을 떴다.

정신은 그냥 몽롱한데 자기가 어떻게 되여 자리에 누워있는지 또 어떻게 되여 이 방에서 종연의 목소리가 울리고있는지 도시 깨도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전라도에 왔는가 아니면 전라도원수가 우리 군영에 왔는가?

헌데 저 의생같은 사람은 무엇때문에 여기 와서 저리도 장장한 소리를 늘어놓고있는가?)

한동안 꿈같은 현실, 현실같은 꿈속에서 오락가락하던 박위는 마침내 자기가 종연을 만나기 위해 눈발을 가르며 달려오던 일과 전라군영앞에서 허궁 나넘어지던 일을 아득한 옛일처럼 어렴풋하게 되살려내였다.

그러자 그 어떤 조바심과 궁금증이 발작적으로 머리를 들었다.

절로 상반신이 쳐들리였다.

또다시 눈앞이 휭 돌아갔다.

《아, 이제야 정신이 드셨소그려.》

종연이 저력있는 소리를 터치며 뚜벅뚜벅 다가왔다. 박위의 침상곁에서 이글거리는 청동화로앞에 이른 종연은 웃음기인지 울음기인지 알수 없는 괴이한 표정을 띄우며 말문을 열었다.

《장군, 이게 몇해만이요? 헌데 어쩌자구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먼길을 오시였소?》

박위는 희멀끔하게 잘생긴 종연의 너부죽한 얼굴을 정차게 바라보며 애써 웃음을 그리였다.

《그닥지 않은 병으로 알고 떠났더니… 헛허… 동관에게 창피한 모양꼴을 보였소그려.》

종연은 박위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끌끌 혀를 찼다.

《아직도 열기가 채 빠지지 않았소그려. 왕년에 병을 이긴 장수가 없다는데 아무리 일이 중하고 급하다 한들 이렇게 무리해서야 쓰겠소.

사람이 있고야 일도 있는게 아니겠소?!》

《헛허허, 난 검을 잡은 무장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한것이 군사일이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는 의미에서 이제는 병이야기를 하지 맙시다, 헛허.》

박위는 종연의 만류를 뿌리치고 부등부등 침상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축축한감이 있는 갖신을 찾아신은 다음 허리띠를 두르고 칼을 비껴찼다. 차림새를 끝내자 박위는 뒤늦은 인사말을 깍듯이 뇌이였다.

《그지간 장군께선 귀체만강하시고 가내일동은 모두 평안하시오?》

종연이 맞인사를 차리자 두사람은 곧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박위는 여느때없이 조급한 어조로 직팡 기본화제를 꺼내였다.

《동관도 아시다싶이 본관은 그닥 성급한 사람이 아닌데 20여년간 왜구들과 싸우는 사이 절로 조급한 사람이 돼버린것 같소그려. 하기사 우리사이에 무슨 겉치레의 말을 따로 할 필요가 있겠소.

용건부터 말합시다.

본관이 이미 편지로 알리기도 했지만 그 편지가 아니더라도 동관은 누구보다 왜구격멸의 필요성과 절박성을 잘 아실게요.

또 누구보다 왜구를 박살낼 의지로 가슴 불태우리라 믿어의심치 않소.

바로 그래서 경상, 전라가 힘을 합쳐가지고 대마도를 공격하자고 청을 낸건데 어떠하시오. 솔직하게 말씀해주오.

동관은 원정에 참여할 용의가 있으시오?》

박위는 아무런 수식도 없이 따져묻듯 물었다. 늘어지게 말을 펴놓고있을 경황이 없었다.

필시 심리적인 방황에 잠긴듯 한 종연을 숨돌릴틈이 없이 다몰아대고싶기도 했다.

종연은 가슴노리까지 드리운 다발좋은 채수염을 쓸어만지며 이따금 헛기침만을 톺아올릴뿐 철문처럼 닫겨진 입을 쉬이 열려 하지 않았다.

종연의 거동과 표정에서 박위는 그의 속내를 거지반 짐작할수 있었다.

박위가 보건대 종연은 원정참여를 단념하였거나 망설이고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단념하였다면 애써 끌어당길 필요가 없겠지만 망설이고있다면 그냥 내버려둘수 없었다.

원정참여는 단순히 군사작전에 나서는가 안 나서는가 하는 군사실무적인 문제이기 전에 민족의 존엄을 떨치려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민족적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헌데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김종연이 과연 그 어떤 불안과 위구때문에 자기의 자존심을 꺾어서야 되겠는가?…

박위는 종연의 침묵이 괴로왔다.

시시각각 가쁘게 가슴을 조이였다.

박위는 종시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동관, 내 지금 그대의 심정을 아주 짐작 못하는것은 아니나 진정으로 그대의 진심을 알고싶소.

오래전부터 병기를 잡고 나라를 지켜온 우리들사이에 꺼릴 말이 무엇이겠소. 터놓고 말해주시오. 동관은 원정에 나설 의향이 정녕 없으시오?》

박위의 절절하면서도 직설적인 말마디들은 종연의 량심과 자존심을 비수처럼 찌르고 쑤시였다.

문득 오늘 아침녘에 만났던 죽촌마을 행수로인의 너부죽한 얼굴이 떠올랐다.

농사보다 군사가 훨씬 중하노라고 하던 그의 말도 상기되였다.

도대체 기운이라고는 있어보이지 않는 백동 에미라는 젊은 녀인의 람루한 행색과 그의 고집스러운 표정도 떠올랐다.

보잘것없는 촌백성들까지 원정을 위해 필사의 각오를 안고 떨쳐나섰는데 자기는 아직 그에 참여할 용단조차 내리지 못하고있다고 생각하니 누구에게라없이 부끄러웠다.

어쨌든 더이상 침묵을 지킬수 없었다.

종연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본관이 어찌 사소하게나마 박장군을 원망하겠소. 사실 본관은 그처럼 방대한 규모의 원정을 조정의 령이 없이 단행한다는것이 여러가지로 불길하게 생각되여 지금껏 주저하는중이요.》

말을 마친 종연은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입귀를 꾹 짓물며 시선을 조금 내리떨구었다.

박위는 종연의 처지와 심정이 십분 리해되였다.

인간의 자존심을 짓누르는 세상의 중압감은 미워도 그 세월에 눌리워 모대기는 인간은 밉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박위는 아까와는 전혀 다르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였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어 고맙소. 터놓고말한다면 대마도원정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이미 아시고 리성계대감도 개별적으로는 응낙을 하였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을 곧 전하의 윤허나 조정의 령이라고 볼수는 물론 없소.

이런 상태에서 두 군영이 자의로 군사를 일으킨다면 후날 복잡한 문제가 야기될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오.

하지만 동관, 지금껏 본관은 그대의 남다른 배짱과 자존심을 누구보다 귀중히 여겨왔고 또 높이 보아왔소.

본관이 여기에 온것도 경상도곁에 전라도가 붙어있기때문이 아니라 바로 동관의 배짱과 자존심에 기대를 걸었기때문이요. 동관이야말로 민족의 기개를 크게 떨치게 될 이번 원정에 백사를 제치고 나설줄 알았단 말이요.》

《…》

종연은 얼굴이 지지벌겋게 익어가지고 공연히 전복자락만 주물거리였다.

《동관도 잘 알고있지만 왜구가 지난 백수십년간 우리 고려국에 끼친 피해는 이루 헤아릴수없이 크오.

옛적의 일, 타고장의 일은 말 말고라도 이달에 여기 전라도에서만도 얼마나 막대한 해를 입었소. 남원과 령광, 광주와 담양의 여러 촌락들이 페허로 변하고 수백의 인명이 살해되지 않았소?

이게 과연 참을수 있는 일이요?》

종연은 다시금 날카로운 쇠끝에 찔리운듯 한 아픔을 느끼며 번쩍 시선을 들었다.

박위의 음성은 격해지였다.

《…얼마전 대마도령주라는 놈이 본관에게 편지를 보내왔댔소.

놈의 수작인즉 이제는 서로가 칼을 놓고 물물교역을 하면서 화평시대를 만들자는거요.

그러면 그 바다승냥이가 양으로 변했단 말인가?!

아니, 그놈은 화평이라는 달콤한 말로 우리의 칼을 무디게 해놓고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고려군의 살멱을 물어뜯자는거요. 이제는 이렇게 잰내비같은 왜구들이 공공연히 편지까지 띄우며 우리를 조소, 우롱하고 기만, 협박을 하는 판이요.

우리가 그래 이처럼 혹심한 모욕까지도 군말없이 곱게 감수해야 하겠소?》

박위는 저도 모르는새 왕소라같은 주먹으로 서탁을 쾅 내리치였다.

서탁우에 놓인 주전자와 차종이 지르릉 금속음을 내며 울었다.

박위의 주먹은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우리 무관들의 배짱과 자존심은 고리삭은 문관들이나 우습게 여기고 수하장졸들이나 턱짓으로 부리는데서 나타날것이 아니라 나라의 존엄을 떨치는 격전장에서 과시되여야 한다고 보오.

혹시 우리의 애국심과 자존심이 역신의 죄로 오명될수도 있소.

하지만 오명이 두렵고 죽음이 무서워서 너도나도 구구히 생이나 보존하는 행로를 택한다면 장차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어찌되고 민족의 존엄은 또 어찌 되겠소?》

종연은 급급히 박위의 말허리를 꺾었다.

《그러니 박장군은 원정준비에 역모소문이 붙어다니는줄 알면서도 그냥 일을 다그쳐왔단 말이요?》

박위는 흔연히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애초부터 알고있었소. 이제는 단지 뛰뛰한 소문정도로 나도는것이 아니라 문서로 꾸며지여 조정의 층층을 오르내리고있다는것도 알고있소.》

종연은 그만 입을 딱 벌리였다.

가슴속 깊이에서 주먹같은 불덩이들이 우글우글 끓어올랐다.

무관의 고귀한 량심과 자존심이 두텁게 내리덮인 장막같은것을 깨치고 솟아오른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 순간 종연의 내심의 변화를 전혀 감촉하지 못한 박위는 구슬픈 심정에 싸이여 최후통첩을 했다.

《동관이 그예 원정에 나서지 못하겠다면 강박하지 않겠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도와주오. 전라도지경을 범한 왜구를 잡으러 가는셈잡고 본관에게 20척의 전함과 3백의 군사, 2백근의 화약을 빌려달라는거요.

후날 사헌부에서 오늘의 일을 발기짚어내면 모든 책임을 나에게 떠밀어도 좋소. 박위가 전라도앞바다에 나간 전함들을 강다짐으로 경상수역으로 끌고갔다고 말이요.》

박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종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종연은 자기가 지금껏 목숨이상으로 귀중히 여겨온 인간적인 존엄과 자존심이라는 무형의 실체가 형체없이 갈가리 찢겨져나가는듯싶었다.

(박위는 역모소문을 달고다니면서도 민족의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 전신의 피를 깡그리 태우고있다.

먹고 살 길조차 막막한 경상도백성들까지 원정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경주하고있다.

헌데 나는 노상 큰일이라도 칠것처럼 나다니면서도 왜구 한놈 변변히 잡지 못할뿐더러 박위의 청병요청까지 두려워하고있다.

그러니 지금껏 내가 고수해온 자존심이라는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범박한것이란 말인가.

박위는 지금 장수의 자존심이란 민족의 존엄을 떨치는 거폭의 전장에서 나래칠 때 진정으로 아름답고 매력있는것이라고 호소하고있다.

정녕코 옳은 말이다. 따를만 한 주장이다!)

종연은 저도 모르는새 옆구리의 칼자루를 힘껏 틀어잡으며 저력있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박장군은 도대체 본관을 무얼로 아는게요. 군사와 전함을 빌려달라니? 그리구 거짓말까지 하라니?

박장군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까지 용렬한 인간으로 보인단 말이요?

본관은 전함은 빌려줄수 없고 거짓발명도 할수 없소.

나는 단지 헛되게 죽는것을 두려워할뿐이요. 그래서 망설이면서 진정을 못했는데 터놓고 말한다면 본관은 참되게 싸우다 죽는것은 조금도 두렵지 않소.

아니, 나라와 민족을 위한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것은 본관의 진정한 소원이요.

장수가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서 싸우다가 말가죽에 싸여 환향하는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인생총화가 아니겠소?!》

박위의 넓은 가슴속에서 커다란 새 한마리가 후두둑 깃을 쳤다.

박위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동관은 이제 어떻게 할셈이요?》

《어떻게 하다니? 박장군도 아다싶이 예로부터 불교에는 열가지 계명이 있고 속세에는 다섯가지 계명이 있소.

그 다섯가지 계명중에서 〈신의로써 벗을 사귀라.〉,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두개의 계명이 가장 중하다 했거늘 명색 장수라는 사람이 어찌 나라를 떨치는 싸움앞에서 뒤를 사릴수 있으며 어찌 박장군과의 신의를 경홀히 저버릴수 있겠소?!》

박위는 불시에 가슴이 얼벌벌해났다.

자꾸만 따가와나는 눈시울을 슴벅이며 홀린듯이 종연을 쳐다보았다.

도래넓은 흰 얼굴에 시원스럽게 박혀있는 큼직한 두눈, 선이 뚜렷한 우뚝한 코와 널직하게 터를 잡은 두툼한 입술.

기름이라도 발라놓은듯 자르르하게 윤기가 도는 매력있는 코수염과 다발좋은 턱수염…

종연은 실로 생기기도 사내답게 잘생겼지만 속심지도 깨끗하고 실한 사람이였다.

《동관!》

박위는 거의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터치고나서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옛적에 어떤 무관들은 우리 두사람을 두고 영원히 〈의기투합〉으로 지낼것이라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그 시절에 벌써 우리는 반드시 의기상합될것이라고 솔직히 믿었댔소.

역시 본관의 짐작이 빗나가지 않았소그려.》

《허허, 이제와서 옛적의 소리는 꺼내 무얼하겠소?!》

종연은 멋적은 생각이 들어 손사래질을 하였으나 박위는 열띤 어조로 계속했다.

《사실말이지 요즘세월에 오명과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다는것은 누구나 다할수 있는 일이 아니요.

동관과 같이 그릇이 크고 배짱이 있는 사람만이 실행할수 있는 일이요.

본관은 오늘 그대의 배짱과 자존심에 다시금 탄복하였소.

어떤 역경속에서도 신의를 지키려는 그대의 순결무구한 마음 또한 고맙기 이를데 없소.

내 이런저런 감사한 마음을 다 합하여 그대에게 절인사를 한번 하리다.》

박위는 정말로 큰절을 하려고 두팔을 벌려올리며 꿇어앉을 차비를 하였다.

깜짝 놀란 종연은 황황히 박위의 숙어지는 어깨를 잡아올리였다.

그제서야 종연은 홍시처럼 붉어진 박위의 얼굴에 눈물자욱이 번들거리고있는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 젖어들었다. 울음기같은것이 섞인 음성이 절로 미여져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요? 망녕이 나셨소? 장군이 대체 뉘게다 절을 한단 말이요.

이 마당에서 진정 절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박장군 당신이요.

본관이 박장군께 절을 하리다.》

이번에는 김종연이 점잖게 절을 할 태세를 취하였다.

《동관! 무얼 이러시오?!》

박위는 울고 웃으며 종연의 어깨를 힘껏 그러잡았다.

종연은 박위에게 어깨를 잡힌채 자책에 젖은 어조로 말하였다.

《장군, 정녕 부끄럽소. 경상도에서는 군영군사들만이 아니라 명색없는 촌백성들도 길을 헛들어 전라도지경에 떨어지기까지 하면서 원정준비를 하고있는데 본관은 지금껏 바재이기만 했으니 이런 창피가 또 어디 있소?》

종연의 솔직한 자기 반성에 감동되여 고개를 주억거리던 박위는 조금후에야 그 어떤 의혹을 느끼였다.

《경상백성들이 길을 헛들어 전라도지경에 떨어졌다니 그건 대체 무슨 말씀이요?》

《그런 일이 있었소. 오늘 아침 우리 군사들이 화적패를 잡았다고해서 나가보니 그들인즉 화적무리가 아니라 염초감대기를 구하러다니는 김해고을 죽촌백성들이였소.

그들중에는 박장군에게서 직접 행수벼슬을 받았다는 로인도 있고 계집사람도 섞여있던데 모두들 피골은 상접하고 행색은 람루하지만…》

박위는 대뜸 그들이 누구들인지 짐작이 갔다. 새로운 감동과 충격이 따겁게 흉벽을 지지며 떠올랐다.

《그러니 죽촌백성들이 여기까지 왔다갔단 말이요?》

《왔다간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소.

모두 지치고 굶주린것이 보기에 딱하여 며칠간이라도 쉬여서 보내려고 잡아두었소.》

《그 참 고마운 일이요, 동관! 그 사람들을 만나 말로라도 치사해주고싶구려.》

《어서 그러시우.》

박위와 종연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대장군막을 에돌아 병졸들의 처소가 있는 나지막한 언덕우로 반달음치듯 하여 올라섰다.

사처에 화토불을 피워놓고 저녁밥을 짓던 군사들은 종연과 박위를 띄여보자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며 군례를 차리였다.

군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제일 유축진 군막앞에 이른 종연은 문앞에서 지금 한창 신바람이 나서 나무주걱을 휘젓고있는 군사에게 말을 붙이였다.

《이봐라! 여기 들어있는 경상도백성들을 모두 밖으로 불러내거라.》

수수밥알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밥주걱을 쳐든채로 영민하게 생긴 눈을 삼박거리던 애젊은 군사는 또릿또릿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그 사람들은 지금 여기 없소이다. 점심밥을 먹은 뒤로 그냥 가겠다고 강떼를 쓰는것을 간신히 눌러앉히고 저녁찬거리를 구하려고 잠시 자리를 비웠댔는데 그사이 모두 사라져버렸소이다.》

《그렇게 지쳐가지고도 밥 한그릇씩 먹고는 또 일을 찾아 떠났단 말이냐?》

종연은 기가 떡 막히여 입을 하 벌리였다.

박위도 서운하기에 앞서 감격한 마음이 들먹하게 괴여올라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후 박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순시도 허송할 때가 아니구려.

동관! 우리도 어서 들어가 미진된 문제들을 마저 상의합시다.》

《워낙 그게 옳겠소.》

그날 밤 박위와 김종연은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조정의 형세가 복잡한 이때 전격적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여 원정을 무조건 승리로 결속해야 한다는것, 대마도로 떠날 때 두 장수의 련명으로 원정의 필요성과 촉급성을 내용으로 한 장계를 올리자는것, 그밖에 현안군사문제들과 후날에 대비할 방책들을 진지하게 토의하고 합의하였다.

다음날 이른새벽 박위는 여전히 불편한 몸으로 전라도군영을 나섰다.

종연은 말을 타고 멀리까지 따라나와 박위를 바래워주었다.

7

7

 

경상도원수 박위를 잡아올리라는 나라님의 지엄한 교지를 몸에 받은 사헌부(관리들의 행동을 감찰하며 그들의 죄과를 론박하고 따지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앙관청)의 감찰어사가 한무리의 라졸을 뒤에 달고 풍우마냥 김해로 내려오고있을 때 며칠동안 자리보전을 하고 심하게 앓던 박위는 가까스레 침상에서 일어나앉았다.

때는 아침나절 사위는 무던히도 고요한데 어디선가 방금 잠에서 깨여난 이름모를 새들이 겨울의 청쾌한 대기를 들찢으며 명랑하게 우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아직도 이따금 뒤머리가 들쑤시고 맥없이 늘어진 두팔이 간헐적으로 떨리였다. 그러나 기분은 전에없이 개운했다.

몸을 일으키면 능히 행보를 할것 같았다.

《허, 요즘같은 때 내가 자리보전을 하고 며칠씩이나 누워있다니?!… 음음.》

박위는 개탄조로 웅얼거리며 느릿느릿 침상에서 일어섰다.

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꼼꼼히 옷갓을 차리였다.

박위는 전라도군영을 다녀온 그날부터 심한 고열에 싸이여 헛소리까지 쳐가며 앓았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의식을 회복하자 즉시 윤통을 불러들이여 자기와 김종연이 약조한 내용을 대충 알려주고 그지간의 정형을 꼼꼼히 캐물었다.

일은 그새 많이 추진된듯 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마음을 놓을수는 없었다.

박위는 불덩이처럼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몸을 일으켜세워 바다가로 나갔으나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쓰러지고말았다. 재차 병석에 누워 며칠동안 다시금 앓음치레를 하였다.

지금도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으나 전신이 나른한것이 도저히 맥을 출것 같지 못했다.

허나 병세는 완구히 회복기에 들어선것이 틀림없었다.

뭐니뭐니해도 시시로 치밀어오르던 구토감과 현훈증이 씻은듯이 사라진것이 기뻤다. 아니, 자나깨나 원정에 떨쳐나서려는 불타는 열망이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납득시켰는지도 몰랐다.

병고에 시달리던 나날 박위는 원정에 바치는 사람들의 비상한 노력에도 재삼 감동되였지만 자기를 위해 기울인 군사들과 백성들의 뜨거운 정성에도 깊이 감동되였다.

여삼은 매일과 같이 산지사방으로 뛰여다니며 제노라 하는 의원들을 수없이 불러들이였다. 김해부중에서 손꼽히는 의원들은 물론 어느 구석에 골박혀있는지 알지도 못했던 돌팔이의생들까지 침통이며 부항단지를 꿍져안고 줄레줄레 모여들었다.

오천은 진종일 염초냄새, 염초연기에 쏘이여 뻘겋게 눈이 부어가지고도 틈만 생기면 황산강에 나가 잉어나 메기 같은 민물고기를 잡아가지고 찾아왔다.

바다고기보다 민물고기로 만든 지지개를 더 좋아하는 박위의 입맛을 돋구어주기 위해서였다.

옥보와 구서방은 자기 집 고방에 깊숙이 건사했던 해묵은 산꿀과 산저담 같은 약재들을 내오고 고들이와 《만사태평》같은 군사들은 밀양과 창원의 친척집에 나가 말린 노루피와 곰열을 구해가지고 왔다.

실로 수많은 사람들의 뜨겁고도 각근한 인정이 물결처럼 박위의 처소로 밀려들고 쓸어들었다.…

《인간이란 참…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도 안되는 법이요. 량반상놈을 따져서 평해서도 안되는 법이라―》

멀거니 굳어진채 사색을 펴나가던 박위는 혼자소리를 뇌이며 곁에 있는 자리끼를 집어들었다.

물 한그릇을 다 비우고서야 박위는 씁쓸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도는 물이 보통 숭늉이 아니라 구기자차라는것을 느끼였다.

(한겨울에 어디서 이런게 생겼을고?

리옥이도 없는 때에…)

리옥이 생각이 떠오르자 대뜸 가슴이 쩌릿하게 저려들었다.

한송이의 호함진 정향꽃처럼 그윽하고 청순한 처녀의 자태가 눈앞을 가득 메우며 육박하듯 다가왔다.

이제는 필시 저세상에 갔을 사람,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지워버리려고 애를 쓰나 그럴수록 더욱 생생하게 가슴속에 파고들며 아리고 쓰린 추억, 달고 뜨거운 정회를 불러일으키는 처녀…

이런것이 바로 운우의 정인가?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것인가.

그건 어찌 됐든 예전에는 어느 정도 정신상의 부담이라고 여겼던 그와의 관계가 지금에는 어이하여 정신상의 소중한 보배로 느껴지는것인가.

다시는 그 모든것을 회복할수 없는 이 마당에 이르러서야…

서두를 까닭도 없건만 급급히 벽상에 걸린 칼을 벗겨든 박위는 밖으로 나왔다.

앓아누웠던 사이에 자기의 용력과 칼솜씨가 조금이라도 줄지 않았는지 스스로 가늠해보고싶었다.

다쫓기듯 다급히 후원에 들어선 박위는 칼잡은 손을 번쩍 추켜들었다.

예리한 칼날이 차거운 아침공기를 베며 곧추 일어섰다.

홱홱― 박위의 장검은 증오와 복수의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눈부시게 번쩍이며 꽃무늬같은것을 그리던 칼은 불식간 앞쪽으로 힘차게 내리박히였다.

황홀한 검무앞에서 얼이 빠진 적수가 뒤로 한발 물러서는 순간 벼락같이 달려들어 정수리를 내리까는 법수였다.

홱홱― 다시 칼을 끌어들인 박위는 돌개바람에 태우기라도 한듯 잉그르르 맴돌이를 하며 가로세로 마구 칼날을 휘날리였다.

사면팔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는 적들을 일격에 쳐물리치는 법수였다.

순간의 정지도 없이 길길이 날고뛰며 본국검총도의 34가지 칼쓰기동작을 미끈하게 수행한 박위는 내처 등패총도의 11가지 동작과 월도총도의 33가지 동작까지 수행했다.

《맹호장과!》

월도총도의 마지막동작을 끝내며 큰소리로 동작의 제명을 웨치고난 박위는 서서히 칼을 내리웠다.

앓기 전보다 호흡은 조금 가빴으나 근력이나 칼솜씨는 결코 줄어든것 같지 않았다.

한결 거뿐해진 기분으로 후원을 나서던 박위는 무심결에 처마밑에 줄줄이 드리워있는 빨간 열매무더기를 띄여보자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초들초들하게 마른 구기자열매였다.

(어디서 저런게 생겼을가?

옳거니, 현중이녀석이 벌써 초가을때 죽촌에 나가서 따온게 틀림없으렷다.…)

언제부터인지 현중은 이따금 구기자차를 들여오군 했다.

그때는 일에 다몰리고 병고에 시달리던 때라 별생각없이 마셔버렸었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니 현중은 단지 아버지의 원기를 돋구어주기 위해 구기자차를 들여온것이 아니였다.

현중은 리옥이가 못견디게 보고싶고 그의 정이 사무치게 그리워 처녀의 넋과 체취가 슴배여있는 열매를 따온것이였다.

엉큼한 녀석이 아버지에게 리옥의 정을 상기시켜주느라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박위는 한참후에야 구기자열매타래앞에서 물러섰다.…

오래간만에 조반상을 말끔히 비운 박위는 아침밥이 자위 돌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가로 갔다.

오늘은 전라도원수 김종연이 20여척의 전함을 끌고 군영앞바다에 들어서겠다고 약속한 날이였다.

안동원수 최단도 오늘 백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륙로로 도착하겠다고 이미 전갈을 보내왔었다.

그들은 모두 중낮때나 당도할것이니 지금부터 바다가에 나가 서성거릴 까닭은 없었으나 박위는 다시금 원정준비상태를 제눈으로 깐깐히 확인하고싶었다.

하얀 모래불이 끝간데 없이 펼쳐진 바다가에는 오늘도 숱한 사람들이 하얗게 쓸어나와 설렁거리고있었다.

겨울의 아침공기는 쌀쌀하건만 거의 모두가 한여름때처럼 맨 등거리만 입고 나서서 시뻘건 팔뚝을 울뚝불뚝 뽐내고있었다. 앞바다를 메우다싶이 빽빽이 늘어선 전함들의 아래쪽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선체에 석회를 바르거나 동백기름을 칠하고있었다.

시꺼먼 연기타래가 트레트레 오르는 불망치로 배널을 지지며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체가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미리 방비를 하는것이였다.

사다리나 널판자를 타고 분주하게 전함우로 오르는 사람들도 보이였다.

벌써 포알이며 화약 같은것을 적재하는것이였다.

바다가 모래불우의 광경도 장관이였다.

처마에 처마를 잇대고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대장간들과 염초장들에서는 망치질소리, 풀무질소리, 웃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썩들썩 울리는데 누렇게 마른 띠풀이영의 틈새로는 건회색 또는 등황색의 뜬김과 염초연기가 꾸역꾸역 퍼져오르고있었다. 눈처럼 하얀 염초가 담긴 함지나 멍구럭 같은것을 들고나오는 사람, 새로 벼린 칼이나 창을 장작단처럼 안고나오는 사람, 숯가마니나 먼지, 혹은 재가 든 가마니를 메고 들어가는 사람… 들고나는 사람들은 많기도 했다.

그뒤로 길게 뻗어나간 돌성의 성가퀴들에서는 물고 뽑은듯이 칠칠한 군사들이 초롱같은 눈을 빛내이며 멀리 바다길을 살피고있었다.

성을 지키면서 적정을 살피는 파수군들이였다.

박위가 앓아누운새 싸움준비는 한층 더 완비되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전투의욕은 훨씬 비등된것이 헨둥 알리였다.

쌍까풀이 선명하게 그어진 눈에 그윽한 정을 담고 곳곳을 모박아 살펴보던 박위는 대장간뒤쪽에서 숱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와자자 터져나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웃음소리가 잦아들기 바쁘게 어디서나 입심으로 한몫 보는 염초장옥보의 쨍쨍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오천대장이 과연 난사람은 난사람이로군. 또 이렇게 영절스러운 궁냥을 해낼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나나 구서방 같은 사람들로서야 어림반푼어치나 있는 일인가?!》

언제든지 구서방을 꺼들어가지고 악의 없는 약을 올리는것을 하나의 재미로 여기는 옥보는 이번에도 오천을 치사하는 말틈에 구서방을 끌어넣었다.

《암, 그 다 이를말인가. 나같은 사람은 일년내내 골을 썩인다 해도 땅띔도 못할 궁냥일세.

자고로 슬기단지란 따로 있는 법이야.》

옥보에 대한 승벽심과 사위감을 쳐들어올리는 뜻이 로골적으로 풍기는 구서방의 말소리가 잇달리였다.

《아니, 그게 무슨 요란한 궁냥이라고 모두들 이러시나요?!

날더러 난사람을 꼽으라면 난 선참으로 옥보아저씨를 꼽겠어요.

곰배질, 풀무질도 일등으로 잘하는데다 지금나이에 재가마니를 두개씩이나 포개메고 뛰여다니니 그게 보통 힘인가요.

상장군, 대장군들도 그 모양을 보면 기함을 할거예요, 헛허허.》

칭찬보따리를 슬그머니 옥보에게 넘겨씌우는 오천의 시원스러운 목소리.

그 바람에 더욱 기세가 오른 옥보는 다시 이야기판의 채를 잡았다.

《그 말 참 귀맛 좋으이. 그러니 오천대정이 도통사벼슬쯤 하면 이 옥보도 랑장이나 중랑장벼슬은 헐후히 얻어걸치겠네그려.

아무렴 이 옥보도 주기만 한다면야 중랑장벼슬이야 능준히 감당하지. 안 그런가, 구서방?》

핫하하… 또다시 솟구쳐오르는 웃음소리…

박위는 성큼성큼 대장간뒤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대장간과 염초장뒤쪽의 꽤 넓은 공지에 담을 두르고 서있던 사람들은 박위를 알아보자 저마끔 너푼너푼 허리를 꺾었다.

《장군께서 예까지 나오시다니요?!》

《찬바람을 맞으시면 몸에 해롭소이다.》

싱그레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것으로 사람들의 인사에 모두거리답례를 하고난 박위는 오천에게 다가섰다.

어찌된 일인지 오천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시꺼먼 먹물자욱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우습기도 하고 의문스럽기도 했다.

《여기서는 무슨 좋은 일이 있기에 웃고떠드는게냐. 어디 말 좀 해보아라.》

오천은 자기의 얼굴꼴은 전혀 모르는듯 팔뚝같이 실한 붓으로 발치에 펼쳐진 돛천을 가리켜보이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긴게 아니라 그럴듯한 궁냥이 떠올라 지금 막 펴보는중이올시다.

되지 못한 궁냥인지 모르겠사오나 모든 전함의 돛천에 룡이나 범같은 무서운 짐승들과 괴상한 무늬를 그려넣으면 원정군의 기세가 한층 장해보일듯 하옵니다.

또한 왜구들은 우리 함대의 돛천에 새겨진 그림들과 그림이 비쳐진 바다물을 보면 첫순간에 벌써 혼이 빠지고 기가 질릴줄 아옵니다.

그래서 지금 먹물에 아교를 타서 돛천에 그림을 그려넣고있소이다.》

박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채 말없이 고개를 끄떡거렸으나 마음은 못내 흡족하였다.

오천은 정녕 슬기단지였다.

허나 이번의 새로운 창안 역시 타고난 총명에 바탕을 둔것이 아니라 왜구에 대한 불타는 증오와 고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 뿌리를 둔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각방으로 동뜨게 잘난 녀석이니 최무선장군은 만날 때마다 그리도 각근히 당부를 한것이리라.

헌데 나는 이 녀석을 오해하고 미워하던 나머지 매까지 치게 했었지?!…

참으로 인생은 평면에서 살지만 평면으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리해해서는 안되는게라―)

박위는 어제날 자기의 경솔한 처사가 생각할수록 불만스러웠으나 오천의 기발한 궁냥이 비낀 그림은 볼수록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원정의 승리를 확증하는 또하나의 요인이 명백히 잡혀지는것 같기도 했다.

박위는 크게 고개를 끄떡이며 웨치듯이 말하였다.

《이는 필시 훌륭한 궁냥이로다.

이번 원정에서는 물론 앞으로의 바다싸움에서도 크게 써볼만 한 계책인줄 아노라.》

《황공하옵니다.》

박위의 과찬에 다시 쑥스러워진 오천은 먹물이 묻은 시꺼먼 손으로 공연히 자기의 볼편을 이리저리 문대였다.

그 바람에 오천의 얼굴은 아예 숯등걸처럼 새까매지고말았다.

심신이 더욱 개운해진 박위는 오천의 얼굴을 가리켜보이며 좀해서는 하지 않던 롱말을 꺼내놓았다.

《우선 나부터가 검덕귀신같은 네 얼굴만 봐도 더럭 겁이 나는데 이제 온갖 괴이한 그림들이 바다우와 바다물에 한벌 쭉 깔리면 왜구들이 어찌 혼비백산하지 않겠느냐.

덤벼들 생각도 못하고 홍찌를 내갈기며 줄행랑을 놓을게다, 으헛허허…》

핫하하… 모두들 박위를 따라 또 한바탕 유쾌하게 웃어제끼였다.

사람들의 웃음속에는 필경 박위의 치하를 고마와하는 뜻과 함께 엄엄하고 서슬푸른 장수로부터 정답고 친근한 인간이 되여 다시금 자기들속으로 돌아온 박위를 뜨겁게 반기는 의미도 깔려있었다.

살틀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류달리 큰소리로 웃고있는 죽촌의 행수로인을 띄여보자 까닭없이 가슴이 서늘해났다.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해주고싶었으나 혀끝으로 그네들의 수고를 치사하는것은 어딘가 성의없는 소위처럼 생각되여 그저 고개만을 크게 끄떡거려보이였다.

박위의 고개짓을 제나름대로 짐작한 행수로인은 박위앞으로 다가오더니 사뭇 정중하게 읍을 하고나서 말하였다.

《어제 소인네들은 장군께서 병석에 누워서도 미거한 우리 촌백성들을 념려하여 보내주신 식량을 받았소이다.

백성으로 생겨 군사를 돕는것은 너무도 의당한 일이온데 넉넉치도 못한 군량까지 덜어 보내주시니 실로 황감하기 이를데 없소이다.》

언제나와 같이 청청하고 격식바른 행수로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박위는 손을 내저었다.

《나는 군량을 덜어서 보낸것이 아니라 응당 보낼데로 보낸게요.

지금 이 고장에는 군사와 백성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모두가 군사요.

군사가 군량을 받은셈이니 고마울것도 없고 마음상에 부담을 가질것도 없소.》

이어 박위는 오천과 행수로인에게 일을 더욱 재우칠것을 당부하고나서 신도가 어렴풋하게 바라보이는 바다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이제는 김종연이네가 당도할 시각이 박두한듯싶었다. 차거운 모래불에 발을 묻고 선 박위는 전라도함대가 나타나게 될 신도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마음은 전에없이 초조하고 다급해났다.

(전라도원수와 안동원수가 오늘 중낮에 다같이 들어선다면 저녁중으로 작전토의를 초벌 끝낼수 있겠는데…

왜 이렇게 늦어질가. 혹시 그새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 아닐가.

아니, 내가 지금 공연한 근심을 하고있다. 김종연이나 최단은 다 묵직한 인물들이요 쉽게 마음이 흔들릴 장수들이 아니니 이제 곧 이쪽저쪽에서 나타날게다.…)

등뒤에서 다급한 발자국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꺼먼 얼굴을 보기싫게 찡그린 윤통이 전복자락을 날리며 드바삐 다가오고있었다.

박위앞에 온 윤통은 소금기가 허옇게 내번진 두툼한 입술을 실룩실룩거리더니 절망적인 음성을 끌어올리였다.

《장군! 전하의 어지를 몸에 받은 사헌부 감찰어사가 방금 군영에 도착했소이다.》

윤통은 감찰어사가 어떤 어지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박위는 어지의 내용이 대번에 짐작되였다.

박위는 하얀 대문이로 아프게 입술귀를 짓물었다.

(드디여 일이 닥쳐왔고나.…)

하늘은 푸르청청한데 어디선가 우뢰소리같은것이 꾸릉꾸릉 울리는듯싶었다.

대기는 티 한점없이 투명한데 짙은 안개장막이 밀려오기라도 한듯 눈앞이 뿌잇해났다.

하건만 박위의 마음은 자기로서도 놀라우리만큼 평온했다.

천둥이 울 때 뉘라서 소나기가 쏟아질것을 예측하지 못하랴?! 오늘같은 일은 아니아니 하면서도 이미 충분히 예견하고있었다.

단지 그처럼 애타게 바라던 원정을 당장 벌리려는 대목에 이르러 터진것이 못 견디게 아쉬웠다.

아니, 자기 몸을 통채로 땅바닥에 태질이라도 치고싶도록 분하고 억울했다.

허나 나라님의 지엄한 교지는 이미 내린것이요, 일은 눈앞에 현실로 닥쳐온것이니 불행은 피할수 없었다.

이제는 살점이 분분히 튀여나고 뼈가 산산이 바사진대도, 설사 형장의 대곤밑에서 목숨이 끊어진대도 끝까지 자신의 무죄와 결백을 표명하고 대마도원정의 촉급성과 필요성을 주장하는외 다른 출로가 없었다.

박위는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렇다면 어서 군영으로 가야지.…》

《예?》

찢어져나가는듯 한 가슴을 안고 박위를 주시하던 윤통은 그만 입을 딱 벌리였다.

사람이 아무리 강건하고 담대하기로서니 어쩌면 자기를 옥쳐갈 지옥사자같은 감찰어사가 왔다는데도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고 어서 군영으로 가자고 할수 있는가.

윤통은 놀랍고 분하고 앞이 캄캄해나는중에도 박위의 인간됨됨에 탄복을 금할수 없었다.

불식간에 박위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할 비장한 각오가 열탕처럼 세차게 끓어올랐다.

박위와 함께 만단고초를 당하고 죽음을 당하는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당하고 떳떳한 의리인 동시에 지난날에 대한 가장 속시원한 속죄로 될것이였다.

윤통은 두터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결연히 부르짖었다.

《장군! 하관도 장군과 같이 구격나래(중한 죄인의 손에 고랑을 채우고 목에 칼을 씌워서 잡아가는것)를 당하겠습니다.

장군이 한 일이자 하관이 한 일이고 하관이 한 일이자 장군이 한 일입니다.

피차 행한 일이 같은데야 당하는 벌에 어찌 등차가 있을수 있겠습니까.

어서 군영으로 갑시다, 어서!…》

당장 걸음을 내짚으려던 박위는 스르시 굳어지였다.

갈범처럼 길길이 날뛰는 이 언틀먼틀하게 생긴 사내의 가슴속에 샘물가의 조약돌처럼 정가롭게 깔려있는 고결한 인정이 낱낱이 헤아려지였다.

눈굽이 지지듯 따가워나고 속이 숯불처럼 이글이글 달아올랐다.

허나 이런 때일수록 사사로운 감정이나 즉시적인 충동에 빠져서는 안되였다.

서로가 격감을 누르고 리성적인 판단을 세워 앞날의 일을 도모해야 했다.

잠시 바위처럼 굳어져있던 박위는 마치 성이라도 난 사람처럼 눈섭을 치솟구며 와짝 언성을 높이였다.

《부원수는 지금 무슨 소릴 하는게요.

부원수에게는 아무 죄도 없거니와 설사 무슨 죄가 될 끄트머리가 있다손쳐도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오.

만약 모든 일이 여의치 못하여 본관이 다시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 부원수는 여기서 기어이 원정을 성사시켜야 한단 말이요.》

노방 딱딱하고 표표하던 윤통의 피진 눈에서 뜻밖에도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윤통으로서는 난생처음으로 흘려보는 눈물이였다.

잠시 동안을 두었던 박위는 좀전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원수는 오늘중에 내 청을 하나 들어주오.

이렇게 급작스레 떠나게 되고보니 그새 내가 일만 일이라고 부원수와 장졸들을 들볶아댄것이 미안쩍기 그지없소.

그러니 모두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푹 쉬도록 하오.

나를 대신해서 부원수가 걸구도 여러마리 잡게 하고 술도 푼푼히 가져오게 하여 군사들과 백성들을 한밥 푸짐히 잘 먹여주오. 부원수도 오늘만은 시름을 놓고 푹 쉬면서 량껏 술을 마셔주오. 그러면 떠나는 내 마음도 한결 가벼울듯 하오.》

그러지 않아도 우걱우걱 괴여오르는 속을 주체하기 어려워 헉헉 숨을 갑시던 윤통은 그만에야 말울음소리같은 오열을 터치였다.

《어흑흑…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장군은 구격나래를 지고 떠나면서 하관더러는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라고 하니… 그게야 상제보고 곱새춤을 추라는 소리나 무엇이 다릅니까.

어쩌면… 그렇게 말씀할수 있습니까.

못하겠습니다. 그 령만은 시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흑흑흑…》

얼마후 옷갓을 벗기우고 발병부 (군사를 동원할 때 쓰는 신임표의 하나, 두쪽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오른쪽은 지방군 장수에게, 왼쪽은 궁중에 보관되여있다.)와 임금의 어보가 찍혀있는 관교 (정부의 관리임명서)를 회수당한 박위는 칼을 차고 군영대문을 나섰다.

느티나무아래에 웅기중기 모여서서 웅성거리던 수십명의 군졸들과 백성들이 우르르 밀려왔다.

삽시에 박위의 주위를 담벽처럼 에워쌌다.

박위는 사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조용히 군영을 떠나고싶었다.

그래서 윤통에게 일의 내막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엄하게 일렀건만 어찌된셈인지 그 뚝뚝한 사람이 제쪽에서 먼저 마른 울음을 끅끅 갑시며 소리소리 지르고 돌아가는 바람에 소문은 순식간에 짜하게 퍼지고말았다.

박위는 맨상투바람에 칼을 쓰고 사람들앞에 나서는것이 창피하고 거북하였다.

게다가 노상 육체의 한부분마냥 중히 여기던 장검과 발병부, 관교까지 떼우고보니 자기라는 인간이 속심지는 싹 빠져버리고 허울만 남은듯 하여 허전하고 공허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사람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싹바싹 조여들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고을의 자랑으로, 고을의 수호신으로 여기던 박위가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전옥으로 끌려가게 되자 그의 존재가 더욱 귀중해지고 그의 처지가 더욱 비통하게 생각되여 모두 제정신들이 아니였다.

사람들의 앞장에서 흑흑 울음을 삼키던 오천은 베개통같은 주먹으로 눈굽을 빗씻으며 박위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장군께서 이렇게… 소인의 죄까지 들쓰고가시면 소인은 이 하늘아래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삽니까.

함께 가겠소이다. 소인의 죄는 소인이 당하겠소이다.》

박위는 축축하게 속이 젖어들었으나 짐짓 엄하게 꾸짖었다.

《당치 않은 소리 말아라.

왜구는 우리가 반드시 근멸해야 할 민족의 적이거늘 너는 여러 생각 말고 맡은 일에 더욱 착심해라.

소나기가 내린 연후에는 무지개가 비끼는 법이니라.…》

오천이 뒤에 서있던 구서방이 자기의 사위감을 전에없이 왁살스럽게 밀어젖히고 박위앞에 나섰다.

정중히 허리를 꺾어 하직인사를 올리고나서 지금의 정황에는 어딘가 맞지 않는듯 한 문자말을 꺼내놓았다.

《소인이 알건대 가장 어두운 때가 날이 밝기 전이올시다.

오늘의 일은 비길데없이 절통하오나 하늘은 반드시 창해속에 청룡이 누워있는줄 아실겝니다.

그러한즉 장군께서는 이제 하늘의 구원을 입어 채운을 허리에 감으시고 이내 다시 돌아오시리다.

이 애 취금아, 먼길을 떠나시는 장군께 어서 술 한잔 쳐올려라.》

구서방곁에서 실팍한 어깨를 떨고있던 취금은 두손으로 정히 술대접을 받쳐올리였다.

박위는 정찬 미소로 사의를 표하고나서 술대접을 기울이였다.

이때에야 어디선가 나타난 옥보는 급급히 사람들을 비집어헤치고 박위앞에 나섰다.

그렇게도 수다스럽던 옥보는 반나마 털을 뽑은 커다란 수닭을 부둥켜안은채 말 한마디없이 끅끅 느껴울기만 했다.

박위가 잡혀간다는 소문을 듣자 한번이나마 제손으로 기름진 안주를 마련해올리려고 급하게 닭을 튀기다가 랑자한 곡성이 울리는 바람에 그대로 진둥한둥 달려온 꼴이였다.

옥보는 한마디의 말도 여쭙지 못했는데 죽촌의 행수로인이 흰수염을 훨훨 날리며 옥보앞을 막아섰다.

행수로인은 자기의 의지와 결단으로 세상만사를 휘여내기라도 할듯 자신만만하게 두팔을 벌리고 박위의 앞길을 막았다.

《못 가시오이다. 소인네들을 두고, 원정을 앞에 두고 어딜 가신단 말이오니까?

정녕코 가서는 아니되오이다.》

박위는 목이 꽉 잠기여 아무런 말도 할수 없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이리도 눈물겨운 지성과 진정을 토로하는것인가.

내가 저들의 상전이기때문일가. 아니면 지난날 내게서 그 어떤 은혜라도 입었기때문일가.

물론 그런것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자기들과 꼭같은 심정으로 왜구격멸을 주장하고 원정준비를 떠밀어왔기때문일것이다.

하다면 나는 이들의 기대와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서빨리 전옥으로 가야 한다.

국문장에 나서서 나의 무죄를 밝히고 대마도원정을 촉구해야 한다.

박위는 둘러선 사람들을 다시한번 정차게 살펴보고나서 한옆에 나서있는 감찰어사에게 말하였다.

《더 늦기 전에 빨리 떠나는게 어떻소?!》

말안장우에 높직이 올라앉아 의아쩍은 시선으로 박위와 상사람들의 적극적인 교감을 갈마보던 감찰어사는 또한번 크게 놀란듯 흰자위가 가득한 눈을 뜨부럭거리며 선뜻 대답을 못했다.

여직껏 전옥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죄인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것이였다. 그러는새 박위는 사람들이 터놓은 길을 따라 제먼저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감찰어사가 탄 껑충한 피말과 장창을 비껴든 십수명의 라졸들이 줄레줄레 박위의 뒤를 따랐다.

소소리높은 느티나무의 우듬지에서 까치들의 명쾌한 울음소리가 울리였다.

그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앞동네의 어느 한 집에서 쿵덕쿵덕 방아소리가 날아왔다.

그리 멀지 않게 보이는 행길가의 동뚝으로는 눈같이 흰 게사니들이 자못 거드름스럽게 걸어가고있었다.

사람들은 귀에 마쳐오고 눈에 안겨오는 목가적인 음향과 화폭이 공연히 못마땅하여 가뜩이나 어두운 얼굴을 저저마다 찡그리였으나 박위의 기색은 눈에 띄게 밝아지였다.

얼마나 선명하고 구수하고 아름다운 생활의 노래, 생활의 그림인가.

저렇듯 소중한 이 땅의 노래와 그림이 단 한순간도 사라져서는 안된다.

그러자면 우리 무관들이 큰집의 기둥을 받든 보이지 않는 주추돌처럼 온몸에 민족의 무게를 안고 자기를 불태워야 한다.

열렬하게 완강하게 그리고 묵묵히…

얼마후 박위를 앞세운 감찰어사일행은 석양의 잔광이 누렇게 게발려있는 밀양쪽의 헐벗은 등성이밑으로 사라져버리였다.

그때에야 군영대문앞에 당도한 김종연과 최단은 대번에 사태의 전말을 짐작하고 한판에 찍어내기라도 한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우수수―

박위네들이 에돌아들어간 어스름이 깃든 등성이쪽에서 조팝꽃같은 눈싸래기들이 아츠러운 비명을 지르며 뽀얗게 밀려오고있었다.

8

8

 

희벗하게 색이 바랜 겨울의 창백한 해가 구름너머로 사라지자 대지에는 곧 침침한 저녁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관사의 대돌아래 제법 무게있게 솟아있는 두개의 돌탑속에서 색스러운 등롱불들이 펑끗펑끗 눈을 떴다.

조잡하게 층층으로 덧놓인 관사지붕들의 추녀끝에서도 각색모양의 앙증스러운 등롱들이 빠금빠금 눈을 떴다.

삽시에 관사 앞마당은 대낮처럼 밝아지였다.

얼마 안있어 앞마당으로는 하나같이 어깨가 되바라지고 몸집이 똥똥한 십수명의 왜구가 불구경가는 게사니무리마냥 띠뚝띠뚝 들어섰다.

주변 남해안과 고려의 서해안고을들을 급습하여 적지 않은 재물을 략취해가지고 엊그제 돌아온 여러 도적패의 두령들이였다.

이들은 지금 사다께가 저들의 전공을 축하하여 손수 배설한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관사로 밀려오는것이였다.

노상 근검소박을 입버릇처럼 떠드는 사다께로서는 매우 드물게 차리는 이런 연회에 참가한다는것은 크나큰 자랑인 동시에 무상의 영광이였다.

하여 두목들은 섬돌우에 발을 올려놓으면서부터 저마끔 자기의 처지와 직분에 어울리는 표정을 짓느라고 상판들을 실룩거렸으나 모두가 섬세한 인간감정과는 인연이 먼 무지막지한 강도배들이라 얼굴들에는 과분한 은혜를 받아안은 아래사람의 황공감사한 기색이라기보다는 우는지 웃는지 알수 없는 기괴한 표정이 그려져있었다.

잠시후 관사의 너렁청한 도회청에서는 이 집이 생겨 일찌기 있어본적 없는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였다.

울타리짬을 비집고 나온 호박처럼 막생긴 대가리우에 물소뿔같은 죤마게(왜상투)를 치솟군 왜구들이 음식상둘레에 갈가마귀떼처럼 모여앉자 지또와 리옥을 대동한 사다께가 비단옷자락을 너풀거리며 위엄있게 나타났다.

졸개들은 일제히 대가리를 조아려박으며 왜가리청을 뽑아올리였다.

《황공하오이다―》

자못 틀스러운 거동으로 상좌에 틀고앉은 사다께는 등뒤의 바람벽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려진 새빨간 해를 얼핏 살펴보고나서 고개를 돌리였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라.》

사다께의 위엄있는 령이 내리자 졸개들은 무슨 큰 혜택이라도 입은듯 공경어린 시선으로 상관의 얼굴을 쳐다보며 우줄우줄 허리를 폈다.

사다께가 오늘 이 좌석에 리옥을 데리고 나온것은 요즘에 들어 더더욱 마음이 끌리는 리옥에게 자기의 막강한 권력과 권위, 비상한 군사적지략과 원대한 포부를 유감없이 과시하고싶어서였다.

리옥은 또 자기대로의 비밀한 속내가 있어 사다께의 청을 흔연히 받아들여 이곳에 나온것이였다.

기다랗게 잇대놓은 앉은뱅이식탁우에는 왜국의 음식은 물론 고려의 이름난 료리들이 울긋불긋하게 차려져있었다.

모두가 여러 나라를 무시로 나들며 순수 도적질을 해먹고사는 강도배들이라 같지 않게도 음식취미까지 다양한것이였다.

잠시 졸개들의 상통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사다께는 드디여 껄껄한 청으로 말문을 열었다.

《에또― 풍랑사나운 바다길을 헤치고 나가 전고에 없는 대공을 세우고 돌아온 너희들을 축하한다.

내가 이미 여러차례 강조했지만 한 인간의 성쇠도 재물의 유무에 좌우되고 한 나라의 흥망도 재력의 다소에 따라 결정된다.

그렇게 놓고볼 때 너희들의 이번 전공은 애국지심과 무사도정신의 거대한 발동으로서 우리 대마도의 급속한 번영과 래일의 령토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될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지간의 피로도 풀고 전승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밸이 푹 젖도록 실컷 마셔라.

온 세상의 술과 재부가 너희들의것이다.》

살인과 략탈로 일관된 천인공노할 만행을 애국심의 발동으로까지 추켜올린 사다께는 도적떼의 대두령답게 상스럽기 그지없는 어투로 연회의 개최를 선언했다. 하고는 햇비둘기처럼 배리배리한 왜계집들이 정히 올리는 커다란 주발을 받아들더니 제먼저 무슨 본보기라도 보이듯 단숨에 술을 찌워버리였다.

졸개들도 쭈룩쭈룩 소리를 내며 걸탐스럽게 술을 들이키였다.

왜구들은 독한 술을 한주발씩 퍼마시자 하나같이 구워놓은 가재처럼 상판들이 빨갛게 익어번지였다.

어느결에 꽛꽛하게 굳어졌던 표정들은 흐물흐물하게 풀어지고 그런대로 단정해보이던 몸가짐들은 거들거들하게 흐트러지였다.

질탕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곳곳에서 소란스럽게 울리였다.

세상만사를 초탈한듯 심상한 기색이 떠돌던 리옥의 청초한 얼굴에 모멸적인 랭소가 비끼였다.

리옥은 할수만 있다면 천박하고 무지스러운 왜구들의 비게진 몸뚱이에 기름을 활활 들붓고 불을 달아서 쥐무리처럼 통쾌하게 태워버리고싶었다.

하지만 복수는 아직 멀리에 있고 할일은 당장 눈앞에 있었다.

리옥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의 열을 애써 누르며 일을 벌리기에 가장 맞춤한 시각을 마음속으로 골라보기 시작했다.

숱좋은 코수염을 가락지모양으로 슬슬 비틀어꼬며 리옥의 기색을 훔쳐보던 사다께는 문득 취기가 가득어린 거센 목소리로 웨치듯 말하였다.

《모두들 듣거라.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맹렬하게 전과를 확대해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그 어느 나라보다 고려를 가장 중시해야 하는바 그 리유는 너무나 명백하다.

고려는 대마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있으니 왕복기일이 짧은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고려의 곡물과 피륙, 어물을 비롯한 모든 물산들이 천하의 상등이기때문이다.》

소란스럽던 방안은 금시 쥐죽은듯 고요해졌다.

사다께의 껄껄한 음성은 즈렁즈렁 공명을 일으키며 계속되였다.

《에또― 우리가 예상한바와 같이 고려조정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어수선해지고있다. 권력의 상좌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가급적으로 반대파전원을 숙청 또는 흡수하고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여 날뛰고있다.

조정의 형세는 이처럼 파국상태인데 가소롭게도 단신으로 대마도를 치겠다고 덤벼치던 경상도원수 박위는 드디여 우리의 계략에 걸려 칼을 쓰고 전옥에 갇혔다.

병든 호랑이가 혼자 날뛰는것도 무서울것 없는데 그나마 함정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박위야말로 비루먹은 강아지보다 두려울것이 없지 않는가, 으핫하하.》

사다께의 선창에 이어 졸개들의 웃음소리가 왁자하게 터져올랐다.

볼퉁이에 험상한 칼자리가 패인 추접스럽게 생긴 왜구 하나가 술대접을 받쳐들고 사다께앞으로 썰썰 기여올라갔다.

놈은 자라목처럼 파묻힌 굵은 목을 한껏 빼올리며 아첨기가 가득한 어조로 허풍을 떨었다.

《참으로 항우이상의 용력과 제갈공명도 따르지 못할 출중한 지략을 지니신 령주도노는 우리 대마도는 물론이요 전 일본국의 가장 큰 자랑이올시다.》

사다께는 졸개의 낯간지러운 아첨이 무던히도 흡족하였으나 소대가리만큼이나 큰 머리를 두어번 끄떡거리는것으로 대강 답례를 하고나서 술대접을 받아들었다. 또다시 술대접을 자신만만하게 기울이였다.

사다께는 지금 리옥과 졸개들에게 자기의 거물스러운 인격을 각방으로 과시하고싶었으나 슬프게도 그의 주량은 욕망이나 허영에 비해 어방없이 딸리였다.

두번째로 술대접을 비우는 사이 점잖게 눌러썼던 통버선모양의 관모는 어디론가 벗겨져 달아나고 바위처럼 끄떡없던 다부진 상체는 위태롭게 기울거리는데 혀는 잔뜩 꼬부라지여 말소리는 반나마 가려들을수 없었다. 그래도 허욕과 광기는 그냥 뻗쳐올랐다.

사다께는 굵고 탄탄한 팔을 앞으로 길게 내던지며 또다시 고아붙이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곧 경상도로 나가야 하겠는가. 아니다, 용맹은 항상 지모와 결합돼야 백전불패를 가져온다.

최대로 력량손실을 없애면서 최상의 리득을 얻자면 총진격에 앞서 우선 박위를 완전히 죽여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래일중에 우리 군사 몇명을 거제도에 보내려고 한다.

거제촌의 두령과 함께 두세척의 배에 병기를 가득 싣고 가서 무작정 경상군영바다가에 쏟아놓게 하겠단 말이다.

그다음은 요리꼬에게 그 모든 사연과 우리의 계책이 최종적으로 언급된 편지를 보내여 그것이 제창 고려조정에 들어가도록 할것이다.

그러면 박위는 옴치고 뛸데없이 목을 잘리게 될것이다.》

사다께는 음흉한 미소를 띠우며 두장의 편지 즉 요리꼬와 고려조정에 보낼 편지를 쳐들어보이였다.

리옥의 심장은 아까부터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사다께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가슴이 뻘겋게 달아오르는중에도 가지가지 짐작과 제나름대로 세운 타산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모든 일이 사다께의 계획대로 진척된다면 옥에 갇혀있는 현중 아버님은 십중팔구 생을 보존할수 없을것이다.

대마도원정계획도 수포로 돌아갈것이다.

그것을 위해 사다께와 왜구들은 미친개처럼 눈에 달이 떠서 뛰여다니는데 나는 이렇게 조롱에 갇힌 새처럼 꼼짝달싹 못하고있지 않는가.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다께는 큼직큼직하게 손세를 써가며 계속 씨벌거리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지체없이 대거출동하여 천백가지 보물을 바다가의 모래 푸듯 푹푹 퍼낼것이다.》

사다께는 별안간 바위같은 상체를 홱 비틀더니 바람벽에 그려놓은 피덩이처럼 시뻘건 해를 가리켜보이였다.

《모두다 〈력발산기개세〉(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세상을 뒤엎는다)의 의지로 더한층 분발하여 이 나라 천자의 웅대한 포부를 기어이 실현해야 한다!》

사다께의 열띤 호소가 끝나기 바쁘게 졸개들은 남생이소리에 자라떼가 호응하듯 투덕투덕 손벽을 치며 야생적인 소리를 터치였다.

《반쟈이!》, 《반쟈이!》

멋스러운 손짓으로 졸개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낸 사다께는 무슨 장한 일이라도 치른듯 헤벌쭉이 웃으며 리옥에게 고개를 돌리였다.

《리옥! 형세는 바야흐로 우리 대마도가 천하를 쥐게 될 성공의 전야에 이르렀는데 리옥이도 이제는 마음을 질정해야 하지 않을가?!

그렇다고 해서 당장 결단을 내리라는건 아니고…

이런 이야기는 조용한 기회에 다시 하기로 하자.》

사다께는 자기앞에 놓여있는 음식그릇을 리옥이앞에 가져다놓으며 은근한 어조로 수작을 계속하였다.

《이건 다른 나라 귀족들이 즐겨 먹는다는 닭고기료리와 돼지고기볶음인데 한번 먹어보라구.

처음 먹을 때는 진챠이(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양념)냄새가 나서 상당히 역스럽지만 차츰 익숙되면 세상에 이보다 맛좋은 료리가 있는것같지 않아. 알고보면 인생사의 리치도 이와 비슷하거던.

그래서 〈인간도처 유청산〉(인간이 가는 곳마다 청산이 있다.)이라는 말도 생긴것이겠지.

이제는 내 말뜻을 알만 한가?》

9

9

 

…사다께와 그의 졸개들이 모두 술에 휘감겨 곤죽이 되였을 때 리옥은 기척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연한 거동으로 관사를 나와 짙은 어둠이 엉켜있는 행길에 들어서자 자기로서도 알수 없는 초조감과 조급증에 떠밀리여 반달음을 놓기 시작했다.

한낮때는 귀가 멍멍할 지경으로 소란했으나 지금은 쥐죽은듯 고요한 장거리를 에돌아나온 리옥은 어질더분한 판자집, 돌집들이 빼곡이 박혀있는 민가로 들어섰다.

아직까지도 귀리 삶는 냄새가 퀴퀴하게 떠도는 골목길(이 고장의 천민들은 하루 삼시 귀리죽만 먹었다.)을 이리저리 에돌아나온 리옥은 그 걸음으로 후박나무가 몇그루 널려박힌 나지막한 등성이우로 치달아올랐다.

허청간같이 허술한 집 한채가 뿌옇게 안겨왔다.

죽촌사람들을 가두어넣은 집이였다.

걸음을 멈춘 리옥은 잠시 숨을 돌리며 이제 해야 할 일을 다시금 꼼꼼히 따져보았다.

마음이 안정되고 할바가 뚜렷이 정해지자 리옥은 독립가옥을 향해 자신있게 걸음을 내짚었다.

이때였다. 등뒤에서 누군가가 헐헐 숨을 톺아쉬며 다급히 뛰여오는 기척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외통눈이가 정신없이 뛰여오는 모양이 희미하게 가려지였다.

불안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수상쩍은 기미를 보인적이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마음은 다소 안정되였다.

리옥은 외통눈이를 마주쳐나가며 되알지게 말을 붙이였다.

《거기서 마침 맞게 오는구먼.》

《엉?! 헤헤헤, 여기 있었구만.》

리옥이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나자 제쪽에서 깜짝 놀란 외통눈은 말뚝처럼 우뚝 굳어지며 헤식어빠진 웃음을 날리였다.

리옥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이미 생각해두었던 말마디를 거침없이 뇌이였다.

《난 빈대나 벼룩이 같은것이 묻을가봐 저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하도소도(외통눈의 이름)가 가서 파수군에게 말 좀 해주어, 장서방을 내보내달라구.》

뜻밖의 요청에 어안이 벙벙해진 하도소도는 잠시 외통눈을 끔뻑이며 무슨 생각인가를 굴리더니 의아쩍은 어조로 되물었다.

《이밤에 장서방은 찾아서 무얼 하려구?…》

《령주도노께서 급히 시원한 사까나사시미(물고기회의 일종)를 만들어오라시는데 오늘 새로 잡아온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그래 장서방을 찾는거여.》

《오, 그렇군. 하기사 술안주야 사까나사시미가 제일이지.》

군침까지 삼키며 웅얼거리는 꼴이 리옥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관사의 돌담밑에 쭈그리고앉아 개떨듯 했던 이 못난이는 술생각이 간절한 모양이였다.

리옥은 옷자락밑에서 깜찍하게 생긴 자그마한 술방구리를 꺼내들었다.

벌써 이 비슷한 정황을 예견하고 연회장에서 건사해두었던 술이였다.

《하도소도가 나를 지켜주느라고 늘 고생이 많은데 이거 한잔 마셔, 제백술이야.》

《어엉, 이렇게 희귀한 술을 내가…》

외통눈은 너무도 황감하여 술방구리를 두손으로 싸안은채 공경어린 시선으로 리옥을 쳐다보더니 소리없이 대문안으로 스며들었다. 찌그러진 대문너머에서 하도소도와 파수군이 나누는 말소리가 쑤얼쑤얼 들려왔다.

얼마 안있어 못생긴 대문짝이 찌그덩 젖혀지더니 여느때나 다름없이 후줄근한 장서방이 어정어정 걸어나왔다.

그는 대문앞에서 서성거리는 리옥을 알아보자 뿌잇하게 정기없는 눈을 흡뜨며 말뚝처럼 굳어졌다.

장서방은 왜구들의 이목을 외딴데로 돌리려는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심정이 정녕 그러한지 볼멘 소리로 웅얼거리였다.

《이런 제기… 잠도 변변히 못 자겠네.… 내 관비들에게 물고기멍구럭은 대나무시렁우에 올려놓았다구 떡먹듯이 일러주었는데 모두들 귀구멍을 틀어막고있었나?!》

리옥은 맵짠 어조로 장서방의 어정쩡한 뒤를 바싹 조이였다.

《장서방은 어찌했든 관비들은 모두 오늘 복새판에 새로 잡은 고기멍구럭이 어디 갔는지 알수 없다고 야단이니 가서 찾아주어야지 별수 있소?!

령주도노께서 노여움이 나시기 전에 어서 가야겠소.》

…리옥은 오늘 이 시각을 마련하기 위해 그지간 장서방을 여러번 따로 만나 설복도 하고 항변도 했었다.

장서방은 매번 첫날과 마찬가지로 사시나무 떨듯 하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며칠전 저녁 바다가에서 장서방을 만난 리옥은 너무도 분하고 안타까운김에 저도 모르게 단검을 꺼내들었다.

번쩍이는 단검을 장서방의 턱밑에 들이대고 부르짖었다.

《장서방! 사내로 나서 그렇게 등신바보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서는 무얼해.

차라리 내 손에 죽는게 깨끗하지.

백동이 엄마도 그러길 원할거야!》

장서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여 와들와들 떨던 끝에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리였다.

마지못해 응낙한셈이나 리옥의 절절한 호소에 공감하였는지 아니면 처녀의 예상밖의 협박에 기가 질려 응했는지 장서방의 진속은 지금도 석연히 알수 없었다.

장서방을 뒤에 달고 등성이를 내려선 리옥은 하도소도와 파수군이 시시덕거리며 술을 나누어 마시는 모양을 띄워보자 즉시 길을 꺾어 바다쪽으로 향했다.

갑자기 호흡이 빨라지면서 전신이 호들호들 떨리였다. 하지만 사소한 소음이라도 놓칠세라 귀를 강구고 도담하게 앞으로 발을 내짚었다.

아직도 밑질긴 술주정뱅이들이 오글벅작거리는 오덴야(선술집)를 에돌아나오니 스산한 파도소리와 함께 차거운 바다바람이 덮치듯 다가들었다.

밤바다의 검은 형체가 뚜렷하게 가려지였다.

문득 장서방이 신음소리같은것을 섞어가며 나직이 웅얼거리였다.

《별장댁아씨, 이제는 어찌할 작정이시우?》

리옥이 자신도 적지 않게 속이 황황해났으나 애써 태연한 태를 내며 속삭이였다.

《아무 걱정 마오. 일은 벌써 다 된셈이요. 이제는 바다가에 나가 노대를 파내고 용층줄을 풀어낸 다음 배를 띄우면 그만이요. 이쪽길은 파수군이 없으니 장서방은 어서 가서 노대부터 찾아내오.》

리옥의 침착한 언행에서 한결 힘을 얻었는지 장서방은 더이상 군말을 하지 않고 허청비청 모래터로 내려섰다.

사위를 살펴보며 장서방의 뒤를 따르던 리옥은 부지불식간 아뿔싸하고 혀를 깨물었다.

자기가 지나치게 긴장하고 흥분한탓에 가장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것을 비로소 깨달은것이였다.

고려에 돌아가 박위의 반역음모라는것이 왜구들이 꾸며낸 거짓수작이라는것을 까밝히고 김해관가에 박혀있다는 세작년을 잡아내자면 확실하고 유력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고려조정의 현재형편을 놓고볼 때 그것이 없이는 도저히 박위도 구출할수 없고 세작년도 잡을수 없었다.

그렇게도 눈독을 들이였던 가장 유력한 증거인 사다께의 편지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예까지 나왔으니 실로 후회막급이였다.

(어떻게 할가? 이제 다시 관가로 들어간다는것은 천만번 위태로운 일이다.

자칫 잘못하면 이 좋은 탈출의 기회를 놓쳐버리는것은 물론 허망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냥 떠나는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녀자의 의무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가자, 우선 이 악마의 소굴을 벗어나고 보자.)

리옥은 기운을 내여 걸음을 옮기였다.

갑자기 발목에 쇠덩이라도 매달린듯 썩썩 몸이 나가지 않았다.

가슴은 바늘뭉치라도 삼킨것처럼 아프게 들쑤시였다.

세차게 높뛰는 심장속으로 어디론가 아득히 사라져버렸던 리성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

내가 과연 나 하나 목숨을 구하자고 이 길에 들어섰단 말인가.

나는 살고 장군은 잘못된다면, 그래서 고려군대의 대마도원정이 성사되지 못한다면 그보다 큰 죄악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안된다, 그래서는 안된다. 사람이라면 그가 남자든 녀자든 살아있는 기간 단 한순간도 인생의 뜻과 인간의 도리를 망각하거나 배반해서는 안된다.…)

이를 사려문채 비장한 사색을 굴리던 리옥은 결심이 굳어지자 장서방에게 다가갔다.

노대를 찾아들고 어찌할바를 몰라하는 장서방에게 자기의 결심을 대충 알려주었다.

장서방은 그당장 모래불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간… 다 죽게 되오이다. 댁아씨,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는게 상수외다.》

《안되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무난히 처리할테니 장서방은 여기서 기다려주오.》

생각같아서는 장서방이 다소라도 공포감을 잊도록 무슨 말이든 차근차근 해주고싶었으나 이러고저러고 할 경황이 없었다.

리옥은 이제 해야 할바를 급급히 따져보며 걸음을 재우쳤다.

관사앞에 이르니 연회는 이미 끝난지가 오랜듯 담장안팎이 괴괴한데 오지단지처럼 작달막한 파수군이 희뿌연 등롱불을 등지고 굴러오듯 다가왔다.

리옥이앞에 이른 파수군은 과일썩은내같은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이죽거리였다.

《어이구, 대부인마님이시구려. 이 밤중에 웬일로 이렇게?!》

리옥은 입에 올리기도 역겨운 거짓말을 힘겹게 번져놓았다.

《령주도노께서 연회를 파한 뒤에 다시 조용히 들어오라구 해서…》

사다께와 리옥이와의 관계를 제나름대로 짐작하고있는 파수군은 아무런 의문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그렇다면야 무슨 할말이 있겠소. 어서 들어가시우.》

종종걸음을 놓아 관사에 들어선 리옥은 협실을 지나 제일 구석에 있는 사다께의 침방앞에 다가섰다.

방안에서는 사다께가 코고는 소리가 파도소리만큼 요란하게 울리였다.

가슴은 또다시 숨가쁘게 조여들었다.

비로소 자기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모험을 하고있다는 현실감이 약간한 후회감과 함께 저저이 의식되였다.

허나 이제는 칼날이 날아들어도 앞으로 돌진하는수밖에 다른 출구가 없었다.

살며시 문을 밀어젖힌 리옥은 발을 저겨디디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뙤창을 넘어들어온 앞마당의 등롱불빛에 네활개를 펴고 누워있는 사다께의 모습이 뚜렷이 안겨왔다.

리옥은 조심조심 서탁앞으로 다가섰다.

서탁우에는 고려땅에서 자주 보아온 푸른 사기주전자와 역시 고려의것이 분명한 푸른 사기차종이 놓여있을뿐 편지같은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꼬노마 (바람벽 한부분을 장식벽함으로 만들고 꽃과 골동품 같은것을 놓는 곳)안을 여겨보았다.

역시 종이장 같은것은 띄우지 않았다.

리옥은 사다께의 침상곁으로 발볌발볌 다가갔다.

침상주변에도 그가 찾는 물건은 없었다. 망연자실하여 방안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리옥은 마침내 침대우에 네활개를 뿌리고 자빠져있는 사다께의 상판에 눈못을 박았다.

팔자수염밑에서 연방 게거품을 끓이며 푸푸 풀무질을 해대는 훌렁 뒤번져진 두툼한 입술.

뒤집어놓은 귤껍데기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스산하게 생긴 주먹코…

부지불식간 이 흉악한 도적떼의 왕초를 단칼에 찔러죽이고싶은 발작적인 충동이 치밀어올랐다.

걷잡을수없이 높뛰는 가슴을 애써누르며 사다께의 박통같은 대가리를 노려보던 리옥은 문득 그의 베개밑에 깔려있는 낯익은 종이봉투를 띄워보았다.

그러자 심장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쿵쿵 방안을 진동하며 울리는듯싶었다.

허나 떨리는 손은 벌써 베개밑으로 서서히 내뻗치고있었다.

사르시 봉투의 귀마리를 당기니 봉투는 찢어질듯이 팽팽하게 켕길뿐 조금도 빠지지 않았다.

잠시 굳어졌던 리옥은 심호흡을 길게 하고나서 살며시 베개귀를 들어올리였다.

베개가 한켠으로 들리자 천천히 실그러지던 사다께의 소대가리같은 머리는 툴러덩 이불우에 떨어졌다.

코고는 소리가 뚝 멎더니 사다께의 눈시울이 닭새끼의 눈꺼풀처럼 스르르 벗겨지였다.

리옥의 심장은 뚝 멎어버리고 전신에 소름이 오싹 내끼치였다.

정기없는 시뻘건 눈으로 리옥의 얼굴을 멀거니 올려다보던 사다께는 언청이처럼 분명치 않은 소리로 쑤얼거리였다.

《또 한주발 가져와! 얼마든지 마실수 있다니까…》

아직도 잠에 취하고 술기운에 휘감기여 맥없이 헛손질을 하던 사다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흔들대던 손을 기운없이 떨구며 드렁드렁 다시금 코를 골았다.

리옥은 불시에 전신이 나른해났다.

자꾸만 무릎이 접혀질것처럼 장딴지가 후들후들 떨리였다.

그런중에도 이를데 없는 안도감이 벅찬 환희마냥 가슴그득히 몰밀려들었다.

(맙소사. 세상에 이런 행운도 있는가.

하늘이 도왔을가. 아니면 장군이 굽어살폈을가. 실로 천행이로구나.…)

얼마후 사다께의 편지를 품속 깊숙이 간수한 리옥은 등뒤에서 금시 칼날이 날아드는듯 한 짜릿한 공포감을 느끼며 황황히 관사를 빠져나왔다.

천방지축으로 바다가를 향해 달리였다.

바다가에 나오니 그사이 배를 띄워놓고 기다릴줄 알았던 장서방은 모래불에 무릎을 꿇고앉아 절망적인 소리를 곱씹어 뇌이고있었다.

《아니올시다, 아니라는데두요. 소인은 도망을 하려는게 아니라 고기가 든 멍구럭을 찾으러 나왔소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눈에 힘을 주고 살펴보니 장서방앞에는 외통눈이가 칼을 추켜들고 서있었다.

하도소도는 금시 칼을 내리칠 태세를 취한채 회심의 웃음을 지으며 씨벌거리였다.

《으흐흐, 아름다운 꾀꼬리가 도마뱀을 잡아먹는다더니… 그렇게 곱다랗게 생긴 계집이 이런 흉측한 궁냥을 했단 말이지.

내 이미 그년이 네놈과 작당하여 도망질을 하려 한다는것을 짐작하고있었다.

어때?! 이쯤하면 이 보름보기 하도소도가 어떤 인물인지 알만 할테지.

이제 그 리옥이라는 년까지 홀치면 이 하도소도는 눈알이 세개있는 놈들도 부러워할 큼직한 상을 타게 될게다.

네 이놈! 이제는 그만 일어섯!》

리옥은 눈앞이 아뜩해났다.

리옥이가 하도소도를 어리숙한 못난이로 여긴것은 너무도 큰 실수였다.

리옥은 아프게 입술을 감쳐물며 내심깊이로 부르짖었다.

(아, 모든것이 이렇게 끝장나고마는가?!)

10

10

 

고려조정안에서는 요즘 가혹한 박해와 피비린내나는 탄압으로 얼룩진 전대미문의 정치사변들이 속출하고있었다.

이미 지난 7월 리성계는 지금까지 부덕쥐처럼 뛰여다니며 자기를 협력해온 좌시중 조민수를 탐욕죄에 걸어 정계밖으로 추방했다.

11월에는 최영의 조카벌되는 김저가 왕위에서 밀려난 우왕과 공모하여 리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다시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음모를 꾸며내여 김저는 물론 왕년에 외적과의 싸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변안렬을 비롯한 27명의 관헌들을 한꺼번에 축출, 처형하였다.

벌어지는 사변들은 몸서리치는데 돌아가는 소문들은 여간만 흉흉하지 않았다.

리성계는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엇서거나 반발하는 기미가 보이는 사람들은 누구도 몰래 흑산도 앞바다에 끌고나가 바다에 처넣어 죽이거나 배밑창에 구멍을 뚫어 배를 침몰시켜 죽인다는 소리가 어디서나 쉬쉬 떠돌았다.

리성계일당은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탄압과 음모로 정계에서 우세를 차지하던 종전의 지위에서 껑충 도약하여 나라의 정치적실권을 완전히 틀어쥔 제1의 세력으로 군림하였다.

시국이 소연할 때면 의례 그러하듯 흉흉한 소문과 함께 괴이한 소문도 수없이 나돌았다.

허다한 괴설과 잡설중에서도 제일로 기괴한것은 이제 나무아들이 나라를 얻게 된다는 소리였다.

나무 목자(木)에 아들 자자(子)를 쓰면 곧 오얏 리자(李)가 되니 결국 리씨가 임금이 된다는 뜻이였다.

이것은 결코 소갈머리없는 촌아낙네들이나 철딱서니없는 시골의 초동들이 제멋대로 지어서 내돌리는 속설이 아니였다.

그것은 리성계와 그의 아들 리방원, 그밖에 리성계의 사타구니에 들어붙어 대궁밥을 얻어먹는 졸개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작류포시킨 정치적인 광대놀음중의 한 변설이였다.

임금은 국정의 출발점으로 되는 현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였다.

밤낮없이 충성과 효성을 떠들며 《지당하외다》라는 말마디만을 외우던 지당대감들은 간곳없이 사라지고 바른 말을 하던 신하들은 없어졌다.

언제인가 임금이 어느 재상을 불러놓고 탄식끝에 했다는 말도 궁성의 높은 담을 넘어 새나왔다.

《죽자니 죽음이 괴롭도다. 살자니 그 삶이 또한 괴롭도다.》

이쯤 되고보면 왕권이 장차 누구에게 넘어가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이였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단순한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은 요즘도 리성계세력을 구축하고 왕권을 고수하기 위해 제나름껏 필사적으로 뛰여다니고있었다.

사실상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이 리성계패당과 맞서싸운다는것은 연약한 사슴떼와 사나운 승냥이무리와의 접전이나 비슷한것이여서 결말은 너무도 뻔드름했다. 리성계가 지금까지 정몽주와 리색이네들에게 칼을 내대지 않은것은 그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고작해야 입방아, 붓방아나 찧어대는 그네들이 그다지 위험하게 생각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또한 자국내는 물론이요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이 퍼진 대학자들인 정몽주와 리색을 폭력으로 마구 제거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최대한 자기들의 파에 흡수해보려는 내밀적인 목적도 있었다.

정국이 이쯤 되고보니 조정안에서는 쌀과 뉘를 확연히 가릴수 없고 옥돌과 푸석돌을 명확히 판별할수 없는데 사헌부의 일이라고 유독 잘 될리는 만무했다.

아니, 관헌들중에서도 제일로 성정이 혹독한자들로 꾸려진 사헌부량반들은 리성계의 환심을 사는 일이라면 생사람의 간이라도 뽑아낼 잡도리로 동이랴 서랴 마구 날뛰고있었다.

이런 판세에 리성계의 은밀한 추동으로 잡아들인 역모죄인이요 왜구와 내통했다는 증거까지 뚜렷한 중범인 박위의 사건심의가 과연 결바르게 흘러갈수 있겠는가?…

…박위는 개경에 도착한 그날로 국문장에 끌려나갔다.

워낙 국문장이라면 임금이 직접 나오거나 어명을 받은 최고관리가 나와 주관하는 최대규모의 심문장이였다.

허나 그날의 국문장에는 임금은 물론 요직의 인물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루우에는 사헌부의 대사헌(사헌부의 장관. 종2품, 대부, 헌장 또는 도헌이라고도 함.)이 숯불이 이글거리는 청동화로를 끼고 나와있었다.

그곁의 서탁에는 사헌부의 록사(지금의 서기격)가 지필묵을 앞에 놓고 앉아있었다.

사헌부앞뜰에 들어선 박위는 국문장의 초라한 광경이 불만스러워 사위를 둘러보는데 퇴마루우에서 대사헌의 새된 목청이 눈가루처럼 쏟아져내리였다.

《얘들아, 저놈을 당장 계하에 꿇려라.》

박위의 량옆에 장승목신처럼 뻗치고서있던 우악스럽게 생긴 라졸들이 우르르 덤벼들었다.

박위의 눈에 대뜸 퍼런 불이 달리였다.

《모두들 가만있거라. 너희들은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나는 계하에 꿇어앉을 죄인이 아니라 나라의 당당한 장수요, 경상도원수다. 저리 물러들가라―》

호령 한마디로 일거에 라졸들을 얼어붙게 한 박위는 칼을 쓴채로 퇴마루앞에 다가섰다.

입술을 삐주름히 빼물고앉아 잡아먹을것처럼 박위를 노려보는 대사헌의 해말쑥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청청한 목청을 터치였다.

《도헌령감, 내게 무슨 말을 물으려거든 먼저 계하수(섬돌아래 꿇어앉히는 죄인)로 대접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천마디만마디를 물어도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을테요.》

대사헌의 올롱한 눈은 당장에 깨질듯이 뒤집혀지였다.

《무엇이 어쩌고 어째?! 대역죄를 진 네놈이 사헌부의 일을 제멋대로 지휘할셈이냐?! 천하에 이런 괴변이 또 어디 있을고?!…》

박위에게 도리깨를 휘두르고난 대사헌은 재차 말뚝처럼 굳어져있는 라졸들에게 우뢰질을 했다.

《이 밥병신같은 놈들아, 저 역적놈을 당장 꺼엎지 못할테냐?!》

라졸들은 다시 용기를 내여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라졸들은 저마끔 지랄발광을 다했으나 박위의 불같은 호령과 드세찬 몸부림을 누르지 못했다.

종시 박위를 꿇어앉히지 못한 라졸들은 모주먹은 돼지떼마냥 씩씩거리며 하나, 둘 뒤로 물러섰다.

제가 바로 힘내기를 하듯 씨근거리며 기와골이 울리도록 고래고래 소래기를 지르던 대사헌도 세상에 소문난 박위의 배짱은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잠시후 그를 세워둔채 심문을 시작했다.

《네놈이 간특하고 흉악한 왜구들과 내통해가지고 역적모의를 했다는게 사실이냐?》

박위는 쑥바구니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결연히 흔들었다.

《나는 꿈에도 역적모의를 해본적이 없소. 여직껏 수많은 왜구들을 쳐죽인 내가, 지금도 애오라지 왜구격멸만을 원하는 내가 어떻게 왜구와 내통할수 있단 말이요?》

대사헌은 얼추보건대 하얀 얼굴에 올롱한 두눈이 반들거리는것이 무척 영민해보였으나 기실 그는 앞뒤가 꼭꼭 막힌 안타깨비로서 그 어떤 현상도 상하좌우로 깊이 따져볼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네가 정말 어떻게 죽고싶어 시작부터 외로 트는게냐?

그래, 네놈의 대마도원정이라는것이 실상은 왜구를 치러나간다고 배를 띄웠다가 일제히 돌따서서 개경을 치자는 수작이 아니란 말이냐?》

《그런 억측의 소리는 대체 어느 놈이 꾸며냈소? 청천백주에 그런 터무니없는 수작을 누가 만들어냈는가 말이요?》

《이놈― 네놈과 배가 맞아돌아가는 대마도령주놈의 편지가 이렇게 두장, 석장씩 내앞에 와있는데도 그냥 생파리잡아떼듯 할테냐?》

대사헌은 록사가 넘겨준 종이장을 세차게 흔들어보이며 경망스럽게 발까지 탕탕 굴렀다.

박위의 정연한 론리와 완강한 부정을 교활한 적수의 기만적인 술책으로 굳게 확신하고있는 대사헌은 자기대로 분이 치밀어오른것이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간교한 수작을 한사코 그대로 믿으려드는 암매한 대사헌이 가증스럽기 전에 안타깝고 답답했다.

인간의 진정을 기만으로 인식하는것은 그 어떤 무지나 암둔이기 전에 신성모독으로서 일종의 도덕적범죄행위다.

그러한 범죄행위가 평민들사이에 생활사말사를 놓고 벌어진대도 후과가 작지 않을텐데 관헌들 호상간에 국사를 놓고 감행된다면 얼마나 많은 피해가 생기겠는가.

자고로 암둔한 관리들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범죄로 하여 나라와 백성들은 겪지 않아도 될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많이 당해왔던가?!…

잠시 괴로운 사색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의 정신력을 최대로 발동해야 할 시각임을 새삼스레 절감하였다.

무지와 암둔의 횡포한 도전앞에서 잠시라도 정신력을 잃는다면 지금껏 고수해온 정의와 순결은 역적의 외피를 쓰고 매장될것이였다.

박위는 순시도 리성을 잃지 않기 위해 정신을 도사리며 준절한 어조로 또박또박 그루를 박아 말했다.

《…그런 미심쩍은 편지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수 없소만 령감은 정녕 제 나라 장수의 말보다 좁쌀여우처럼 잔꾀가 말짱한 왜구들의 거짓수작을 더 믿소?

그렇다면 내 한마디만 물읍시다.

오늘은 경상도원수를 모함하는 왜구들의 편지가 나돌아서 무작정 나를 잡아왔는데 만약 래일에는 도헌령감을 모해하는 편지가 들어온다면 그땐 어찌하겠소. 그때도 왜구들의 수작만을 진실로 믿고 본인의 진술은 알은체도 없이 령감을 포박하고 문초하고 핍박한다면 령감의 심정은 어떨것 같소?!

내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조정의 관리들이 정의와 진실에 립각할 대신 상관의 비위를 맞추고 그 어떤 낯을 내기 위해 왜구들의 롱간질에 놀아난다면 나라일도 크게 망칠것이며 자신의 앞길도 심히 그르치게 될게요.》

대사헌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얼추 말을 꺼내지 못하는데 그것은 필시 대답말이 궁할 때마다 드러내군 하는 그의 점잖지 못한 버릇인듯싶었다.

허나 아래사람의 정당한 견해와 요구앞에서 권력배일반이 그러하듯 대사헌도 곧 당치도 않은 분을 터치며 생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엇이 어째?! 네가 죄인의 몸으로 헌부의 장관을 희롱하는거냐?

워낙 네놈은 말로 곱게 일러서는 안되겠구나.》

박위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평생에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단 한사람도 희롱해본 일이 없소.

나는 지금 정의와 진실에 립각해서 사건의 진상을 옳게 밝히자는게요.》

박위는 말끝마다 자신을 《나》라고 자칭했다.

죄인이 죄과를 따지는 조정의 관리앞에서 자기를 나라고 칭하는것 또한 엄중한 죄로 되건만 박위의 련속적인 공세에 위압도 되고 얼떨떨해지기도 한 대사헌은 한번도 《나》라는 소리에 왼심을 쓰지 못했다.

박위는 숨돌릴틈없이 계속 강세를 보이였다.

《나는 먼저 왜구의 편지가 어떻게 되여 내 손에는 한번도 닿지 않고 (사다께의 편지는 내게 보내는것이라고 하는데) 련속 조정에만 날아드는지 그 연유부터 캐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오.

내가 만일 정말로 왜구와 내통한 사람이라면 왜구들도 상당히 조심해서 련계를 취했을텐데 어째서 내 손에는 단 한번도 그런 편지가 와닿지 않았는가.

혹시 도헌령감에게 편지를 날라온 사람이 왜구와 내통이 있는게 아니요?!

그놈이 나를 모함하려는 대마도령주와 짝자꿍을 하는 나쁜 놈이 아닌가 말이요?》

대사헌에게 있어서 박위의 맵짠 질문은 치명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왜구의 편지라는것은 사실 김해부사가 보내온것으로서 리성계가 은밀히 자기에게 넘겨주었었다.

그런 사정으로 하여 대사헌은 편지가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자초지종 따져볼수 없었다.

그것을 캐보면 진상규명에는 매우 유리하겠지만 그자체가 벌써 리성계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되는것이라 극력 삼가해야 했다.

하여 대사헌은 거북한 구석은 다 밀어던지고 자복하라는 소리만을 곱씹어뇌이며 강짜를 부리는데 박위는 바로 그 미타한 고리를 들춰가지고 돌입하는것이였다.

대사헌은 어느 정도 속이 찔리기도 하고 가위가 눌리기도 했으나 그것으로 하여 더욱 노기가 동해올랐다.

그는 뜰아래 벌려선 라졸들을 사납게 훑어보며 또다시 아츠러운 고함을 질러댔다.

《저놈이 아직도 올곧게 자복을 할 대신 제쪽에서 도리여 관장을 우롱하고 타매하는것은 나라법을 우습게 아는 까닭이다.

되게 다듬어가지고 다시 말을 물어야겠다. 이봐라, 저놈에게 사정두지 말고 된매를 안겨라.》

대사헌의 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물에 적신 몽둥이를 꼬나들고 서있던 집장라졸들이 우르르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뜰앞에 깔려있던 하얀 눈가루가 후루루 날아올랐다.…

…그날로부터 이러구러 보름 남짓한 기일이 흘러갔다.

그사이 박위는 무려 십여차나 모욕적인 심문과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으나 매번 변함없이 자기의 죄상을 전면부정하고 진상규명을 완강히 요구했다.

그럴수록 대사헌은 억지와 기광의 도수를 더욱 높이였다.

대사헌은 반드시 박위의 자복을 받아내야만 리성계의 눈에 긴한 존재로 어여삐 보일수 있었다.

만약 자기가 박위의 기개와 론리앞에 쭈그러든다면 그때부터 파멸은 시작될것이였다.

하여 두사람은 각각 자기나름의 목적과 지향을 품고 필사적으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정의는 량심과 진실을 가지고, 부정의는 권력과 억지를 가지고…

박위가 개경전옥에 갇힌 때로부터 꼭 스무날이 되는 날 아침.

대사헌은 또다시 박위를 심문장으로 끌어내였다.

《네 이놈, 오늘도 이실직고를 하지 않고 삐뚜루 나올테냐?》

대사헌은 첫시작부터 을러대며 여느때없이 사나운 기세를 보이였다.

박위는 태연하게 얼굴을 들었다.

이제는 대답말을 꺼내기도 지겨웠다.

하지만 말을 해야 했다. 해도 더 크게, 더 많이 불을 토하듯 해야 했다.

만일 이 지긋지긋한 대결전에서 한걸음이라도 맥을 놓고 물러선다면 자신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으로 쌓아올린 원정준비라는 거대한 애국의 탑은 졸지에 봄날의 얼음산처럼 무너질것이였다.

목숨은 버린다 해도 그것만은 잃을수 없었다.

박위는 거밋거밋한 피딱지가 엉켜붙은 험상한 입술을 가까스레 터치였다.

《나는 어제도 이실직고를 했고 오늘도 있는 그대로 바른말을 하는거요.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일구월심 왜구를 깡그리 격멸하여 나라의 수치를 씻고 민족의 존엄을 만세에 떨치려 했소.

그런데 령감은 수상쩍기 그지없는 왜구의 편지만을 부작처럼 휘두르며 그예 나를 잡으려 하고있소.

생각해보오. 흉모를 꾸미는데 이골이 난 왜구들이 그래 그 정도의 거짓편지도 만들어내지 못할것 같소?!》

박위의 피타는 웨침소리는 휑뎅그렁한 앞마당을 즈렁즈렁 울리였다.

무엇인가 호기있게 짓뭉개는 형국을 해보이려던 대사헌은 하얗고 매끈한 주먹을 허공에 매단채 독 쐬운 개구리처럼 찔금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박위의 주장이 별로 이상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하여 리성계의 지시를 거역할수도 없었고 자기의 체면을 버릴수도 없었다.

좋기는 무슨 실오리만 한것이라도 새로운 끄트머리를 잡아내는것인데 그런것은 도무지 찾아낼수 없었다.

대사헌은 올롱한 눈을 깜빡거리며 주저주저하는데 박위는 청청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계속 뒤를 조이였다.

《령감도 잘 알겠지만 나라는 큰 산이요. 이내 몸은 한점의 티끌이요.

나는 이미 나라에 내 한몸을 티끌처럼 바칠것을 맹세하고 손에 검을 잡은 사람이요. 한고로 나는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한적이 없소.

내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것은 나라의 존엄과 위명을 천하에 떨치려는 나의 초지,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의 애국의지가 허랑하게 꺾이는것이요.

령감은 지금 왜구와 소인배들의 롱간질에 넘어가 기어코 나를 죽이려 하는데 그래 이처럼 무지몰각하고 후안무치한 행위를 오늘 세상과 후세사람들앞에 책임질수 있소?》

박위의 호령에 가까운 질책을 또 하나의 커다란 모욕으로 감수한 대사헌은 너무도 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뒤일은 어찌 되든 모욕받은 설분을 속시원히 하고싶은 저급한 욕망이 설설 끓어번지였다.

대사헌은 성난 문지기개마냥 희끗희끗한 코수염을 빳빳하게 곤두세우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저놈이 줄창 해괴한 변명만 늘어놓을 때는 아직 매가 무른탓이다.

밥을 토할 때까지 대곤, 중곤 가리지 말고 사그려조겨라!》

원래 형구의 하나인 곤에는 대곤, 중곤, 소곤, 치도곤이 있는데 대곤은 2품이상의 고위관리에게, 중곤은 고을원이상의 관헌에게 그리고 소곤은 첨사, 만호, 별장 등에게 적용하게 되여있었다.

하지만 요즘세월은 일일이 조항을 따져가며 법을 시행할만큼 정연하지도 못한데다 발끈하기 잘하는 도헌령감께서 잔뜩 골딱지가 난 때라 중곤이고 대곤이고 가릴게 무엇이랴.

철썩철썩… 넉가래같은 방망이들이 언거번거로 솟아오르고 언거번거로 내리박히였다.

피방울이 튀여오르고 살점이 뿌려져나갔다.

박위는 금시 어깨가 으깨지고 정갱이가 바사지는듯 했으나 이를 악문채 신음소리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허나 보름여의 나날 내처 식음을 전페하다싶이 한채 모진 악형만을 당해온 몸이라 오래 견디지 못하고 눈판우에 나동그라지였다.

바로 그 순간 대사헌의 뇌리속으로는 불쑥 어제 밤 대궐에서 만났던 리성계의 흐린 얼굴이 떠올랐다.

어제 밤 궁중에서는 연회상을 물린 뒤 녀악(고려 중기이후 녀성예술가들에 의해 진행되던 궁중음악과 무용)이 펼쳐지였다.

무엄하게도 임금과 나란히 앉아 삿대질까지 해가며 왕에게 무슨 훈시같은것을 늘어놓던 리성계는 불쾌해진 얼굴로 만장을 휘둘러보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이쁘게 생긴 얼굴에 화사스러운 차림을 한 계집들은 은방울굴리듯 아름다운 목소리를 한껏 뽑아올리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물새처럼 미끄러져 날기도 하며 온갖 자태를 다 펼쳐보이였다.

성계는 계집들쪽은 보지도 않고 대신들속에 끼워앉은 대사헌을 거드름스러운 손짓으로 불렀다.

연회때 조금 과하게 마신 술바람에 끄떡끄떡 졸고있던 대사헌은 성계의 손짓 한번에 정신이 번쩍 들어 게질게질 흘러내리는 느침을 홱 털어버리고 썰썰기여 당우에 올라섰다.

한나라의 지엄한 임금이 바로 앞에 있건만 그를 코흘리개 동네애녀석 보듯 얼핏 살펴보고난 대사헌은 성계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였다.

리성계 역시 임금 같은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사헌에게 말을 걸었다.

《령감! 박위에 대한 치죄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게요. 듣자니 왜구의 편지라는것이 조정에 들어온 경로가 확연치 않다던데 너무 과하게 치죄를 하다가 혹여 말밥이 생기거나 무죄로 판명된다면 도리여 사헌부가 탄핵을 당할수 있소.

잘 알아서 과실이 없도록 하오.》…

그때는 술기운에 휘감기여 얼떨떨할 때라 그저 박위를 바싹 다불러대라는 소리쯤으로 여겼었다.

헌데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되였다.

리성계의 말속에는 분명 역모죄의 증거라는것이 명확치 못하니 박위를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라는 충고가 진하게 섞여있었다.

삽시에 방향감각을 상실한 대사헌은 꼼짝없이 굳어진채 올롱한 두눈을 쉬임없이 깜박거리였다.

며칠전까지만도 박위의 자복을 얼른 받아내지 못한다고 기름을 짜던 리성계가 이 무슨 일인가.

이제와서는 제가 직접 넘겨준 증거물의 경로까지 명확치 않노라고 수염을 빡 내리씻고 아닌보살을 하니 나는 대체 어쩌라는건가?!…

사실 이때 리성계는 박위가 위험하고 불편한 존재이기는 하나 반대파세력에 가담한 인물은 아닌고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는 보지 않았다.

헌데 조호백이 하도 극성스럽게 뢰물을 섬겨바치며 들쑤시는 바람에 그럼직한 증거가 생겼을 때 박위를 제창 제껴버리는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였다.

박위를 잡아올리자 예상밖으로 사방에서 항의가 일어났다.

조정안에서는 쟁쟁한 중진관료로 자타가 공인하는 최칠석과 김종기가, 조정밖의 지방에서는 전도유망한 장수로 이름난 김종연과 최단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은 일치하게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면 박위를 모함한 왜구의 편지가 조정에 들어온 경로부터 세세히 빠개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런데다 경상도에서 올라온 숱한 백성들은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박위의 무죄를 론증하는 등장(관료기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내는 신소장)을 내돌리고있었다.

최칠석이나 김종기, 김종연과 최단과 같은 만만치 않은 관리들의 의사도 무시할수 없었지만 백성들의 견해도 마구 쓸어덮어버릴수도 없었다.

리성계는 진퇴량난에 빠지였다.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보아야 이번에도 역시 조호백은 그 어떤 조급증에 사로잡히여 서툴게 일을 꾸민것이 틀림없었다.

조호백의 편을 들어 수많은 관리들과 백성들을 또다시 처형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사실 시골의 개천에서 날뛰는 한마리의 송사리에 불과한 조호백은 리성계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으면서까지 두둔해주어야 할 재목일수는 없었다.

사헌부에서는 애초에 박위에게 역적모의죄와 함께 그 무슨 절간파괴죄라는것도 덧붙이였으나 리성계는 그것 역시 크게 꼬집어들수 없었다.

성리학파 관리들은 모두 불교를 배척하는 유교계 인물들이요, 리성계는 그들로부터 리론적인 옹호와 찬양을 받는 사람이였다.

따라서 리성계가 박위의 절간파괴죄를 들고나선다면 그것은 벌써 불교를 두둔하고 장려하는것으로 될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리론정신적진지를 스스로 차버리는 행위로 될것이였다.

리성계는 립장이 딱해질 때마다 매번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모든 책임을 사헌부에 전가시키고 자기는 슬그머니 박위의 사건에서 손을 떼기로 결심하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자기에게 더 큰 악감을 품었을 박위는 후날 자신이 직접 고급한 술수를 써서 제껴버려야 했다.

그러면 장차 조호백은 어떻게 처리할것인가?

성계가 보건대 호백은 아첨기가 많고 눈치가 빨라서 그런대로 쓸만하였으나 사람이 잘고 경망스러워 큰일을 칠만 한 위인은 못되였다.

아니, 이런 위인을 자기의 일에 섞어넣었다가는 사사건건 실패하기나 쉬웠지 크게 덕을 볼것 같지 않았다.

호백은 매양 변함없이 리성계를 따르겠노라고 귀맛좋은 맹세를 다지군 했으나 조민수의 축출로 하여 자기에게 앙심을 먹고있을수도 있었다.

이리의 상판을 보고서야 그놈의 속마음이 흐렸는지 개였는지 뉘라서 알겠는가?!…

만약 박위의 역모사건이 허위로 판명된다면 성계는 호백에게도 큼직한 죄를 씌워 (사실 역모가 아닌것을 역모로 고변하는것은 최대의 범죄였다.) 정계에서 완전히 매몰해버릴 결심이였다.…

…대사헌의 빈약한 두뇌로써는 리성계의 능활하고 변화무쌍한 계교를 륜곽조차 짐작할수 없었다.

허나 민물고기치고 감탕내가 나지 않는 놈이 없듯이 대사헌도 조정의 모든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지모는 저급해도 벼슬살이리치에는 여간 밝지 않았다.

대사헌은 리성계의 속내는 똑똑히 알수 없었으나 박위가 잘못되는 경우 자기에게 운명적인 날벼락이 떨어지게 된다는것만은 분명히 예감할수 있었다.

그러고보면 리성계의 은유적인 충고를 그릇 판단하고 밸이 동하는대로 날뛰면서 박위를 때려눕힌것은 참으로 잘못된 계책이였다.

대사헌은 즉시 박위를 조기라고 한 자기의 죄는 덮어두고 매를 친 라졸들의 죄만을 남산만큼 불궈내리라 생각하였다.

갑자기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라졸들을 쏘아보던 대사헌은 미친놈처럼 왁작 고아댔다.

《천하에 불한당같은 놈들아, 누가 멀쩡한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으라 했느냐?

만일 경상도원수가 병인이 되거나 숨이 진다면 네놈들을 모두 눈망울을 뽑아서 원악도로 귀양을 보낼테니 그리 알아라.

예봐라― 어느 한놈 얼른 뛰여가서 랭수 한그릇을 떠다가 경상도원수에게 먹여보아라.

아니다, 랭수가 아니라 따끈하게 덥힌 술을 한대접 가져다가 먹여보아라.》

11

11

 

개경의 전옥이 중앙감옥이기는 하나 이 집 역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든 시설이라 살창 몇개를 건숭 박아넣은 창으로도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사개가 물리지 않은 문틈으로도 눈가루가 훅훅 끼쳐들어와 한지나 다름없이 추웠다.

하지만 짚검불우에 아무렇게나 몸을 뿌리고 누워있는 박위는 거의나 추위를 의식하지 못했다.

몸은 어디라없이 바늘로 찌르고 불로 지지듯 쓰리고 따가웠으나 그것 역시 세세히 감각되지 않았다.

뚜렷이 감촉되는것은 여직껏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운명적인 절망과 공허감뿐이였다.

박위는 캄캄한 옥안이요, 누구도 마주한 사람이 없건만 절통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막막한지고… 옳은 리치가 통할 길이 없고 바른 마음을 전할 길이 없으니 나는 결국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아무런 뜻도 펴보지 못하고 억울하게, 허무하게…》

문득 옥살창사이로 여러 줄기의 달빛이 꽂히듯 날아들었다.

감방벽과 땅바닥이 희벗하게 밝아지였다. 떠오르는 달인지 기우는 달인지 알수 없었으나 여하튼 눈앞이 조금 밝아지니 마음속도 다시 개이는듯싶었다.

박위는 무의식중에 슬며시 손바닥을 펼치였다.

피묻은 손바닥우에 은회색달빛이 소리없이 올라앉았다.

못 잊을 추억의 페지들이 알알하게 가슴속을 허벼파며 두서없이 번져지였다.

박위는 스르시 눈을 감으며 입속으로 조용히 뇌이였다.

(그날 그때도 달빛밝은 밤이였지.…)

그렇다. 오천이네들이 보계산과 굴암산, 신어산과 불모산의 절간들에서 먼지를 퍼가지고 염초장으로 돌아오던 그 시각에도 달이 밝았다.

이제는 퍽 오래전 리옥의 편지를 곱씹어 읽으며 뜨겁게 근질거리는 가슴을 달래던 그날그때도 사랑방 뙤창으로는 은사같은 달빛이 교교히 흘러들었다.

한일생 잊지 못할 달밤은 그날뿐이 아니였다.

박위의 뇌리속으로는 정다운 사람들의 모습이 희푸른 달빛에 어루싸이여 연줄연줄 다가왔다.

자기와 함께 옥으로 가겠다고 울부짖던 윤통의 질그릇같이 시꺼먼 얼굴.

목숨바쳐 자기를 돕겠노라며 비장한 감회에 싸이여 시구절을 읊던 최칠석의 깨끗하면서도 강건한 모습.

죽기를 각오하고 원정에 나서겠노라고 결연히 다짐하던 김종연의 무게있는 모습…

박위의 뇌리속으로는 엊그제 저녁에 있은 전혀 뜻밖의 일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저녁밥을 꿍져든 여삼은(그는 개경에 올라와 취금이와 함께 박위의 옥바라지를 하고있었다.) 여느때없이 설레발을 떨며 살창앞에 다가서더니 울먹거리는 어조로 박위를 찾았다.

박위는 심상한 마음으로 살창앞에 다가섰다.

헌데 이 어인 일인가.

희푸른 달빛이 깔려있는 앞마당에는 여삼이 혼자가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웅기중기 서있었다.

그들은 박위를 띄여보자 눈물어린 얼굴을 번들거리며 욱 살창앞으로 모여들었다.

죽촌의 행수로인, 구서방과 옥보, 고들이와 《만사태평》… 모두들 낯익은 얼굴들이였다.

박위는 살창을 움켜쥔채 와짝 청을 높이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모두들 어떻게 예까지 찾아왔소?》

모두들 끅끅 울음을 삼키며 절인사를 하고나서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후 행수로인이 정중한 자세로 격식바르게 말문을 열었다.

《그지간 장군께서 옥고를 치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이까?》

구서방이 질적한 눈굽을 찍어내며 행수로인의 뒤를 받치였다.

《소인들은 장군의 존안을 뵙고싶은 마음도 간절했지만 그보다는 장군께서 입은 죄목이 터무니없는것이니 한시바삐 내놔줍시사 하는 내용의 등장을 바치는 일이 더 급하여 황망히 상경하였소이다.》

박위는 대번에 속이 울컥 괴여올랐다.

《그러니 모두들 내 일때문에 이 추운 때 그 먼길을 부러 왔단 말이요?》

《그렇소이다.》

모두들 축축하게 젖은 소리로 대답했다. 박위는 목이 꽉 감겨들었다.

역적모의죄로 옥에 갇힌 사람을 구하기 위해 등장을 돌린다는것은 여간만 위태한 일이 아니였다.

자칫하다가는 등장에 이름을 박아넣은 사람들까지 모두 역적모의죄에 걸려들수 있었다.

헌데 이들은 그런 내막을 전혀 모르고있는가.

어쩌자고 그런 위험천만한 일을 벌린단 말인가.

박위는 석쉼하게 갈린 소리로 말했다.

《그러지들 말라구. 내 일은 등장이나 돌려서 풀릴 일이 아니야.

여차하다가는 모두 해를 입을수 있으니 등장을 걷어가지고 당장 내려가라구, 당장!》

구서방에게 선수를 떼우는 바람에 은근히 속이 까부라들었던 옥보는 박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제꺽 입을 열었다.

《소인네들은 등장때문에 모두 옥에 갇혀 옥귀신이 된다 해도 그냥 내려갈수는 없소이다. 소인네들의 등장은 벌써 조정에 입문이 되였소이다.》

《그렇소이다.》

모두들 옥보와 한마음이라는듯 입을 모아 웨치였다.

《벌써 입문이 되였다고? 세상에 이런 변이 또 어디 있을고?!…》

박위는 너무도 기가 막히여 입을 하 벌린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이나 얼벌벌한 가슴을 안고 벙벙해있던 박위는 축축하게 젖은 어조로 화제를 돌리였다.

《헌데 오천이가 어째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껏 말참녜를 할 기회를 엿보던 여삼은 고들이와 《만사태평》이 나설세라 서둘러 대답했다.

《예, 오천대정은 군영에 그냥 남아있다고 합니다.》

여삼은 더이상 말을 잇지 않았으나 박위는 오천이가 어찌하여 이 사람들의 행렬에 끼우지 않았는지 대번에 짐작이 갔다. 오천은 분명 김해땅에 박혀있는 왜구의 세작을 제 손으로 잡아내기 위해 군영을 뜨지 못한것이였다.

모두들 제나름의 충동과 흥분에 싸여 잠시 덤덤해있는데 그것이 못마땅하여 연신 헛기침을 끌어올리던 《만사태평》이 큼직한 술방구리를 살창틈으로 밀어넣으며 화제를 돌리였다.

《변변치는 못하오나 소인들이 추위를 막을수 있는것들을 가지고왔소이다. 받아주시오이다.》

그제서야 고들이도 정신을 차린듯 부근부근한 털토시를 들이밀며 웅얼거렸다.

《서툰 솜씨로 만든것이라 부끄럽기 이를데 없소이다.》

행수로인도 묵직해보이는 베보자기를 힘겹게 쑤셔박으며 송구해하였다.

《소인네 촌에서도 되지 못한 음식이나마 조금 마련해왔사온데 나무람마시고 받아주소이다.》

박위는 아까부터 무슨 말이든 하고싶었으나 혀가 굳어지여 좀처럼 말마디를 굴려낼수 없었다.

살창을 떼고 들어서기라도 할듯 그냥 제자리걸음을 하면서도 바투바투 다가서는 사람들의 모습은 갈수록 뿌잇해졌으나 그들의 마음속진정은 갈수록 선명하게 그려지였다.

그들만이 아닌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의 심장의 웨침소리는 가슴속에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며 즈렁즈렁 울리는듯싶었다.

《장군께서는 왜구격멸을 위해 반드시 군영으로 돌아오셔야 하오이다―》…

박위는 슬며시 고개를 내리떨구었다.

달은 벌써 기울어졌는지 손바닥우의 달빛은 가뭇없이 사라져버리였다.

허나 추억을 부르는 은은한 달빛은 마음속 깊이로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이제는 퍽 오래전 어느해 정월대보름날 저녁이였다.

소년 박위는 희푸른 달빛이 얼비치는 조용한 글방에 앉아 따분하기 그지없는 옛글을 읽고있었다.

문득 문밖에서 어머니의 자애에 넘친 음성이 부드럽게 울려왔다.

《이 애 위야! 잠시 책을 덮어두고 밖으로 나오너라. 아버님께서 너를 부르신다.》

박위는 분분히 밖으로 나왔다.

천지간에는 은회색달빛이 가득차넘치는데 중천에 높이 뜬 휘영청 밝은 달은 벙싯벙싯 웃으며 꿈많은 소년에게 래일의 희망을 소리없이 묻고있었다.

그리 멀지 않게 보이는 앞마을에서는 방금 배고사(룡왕신에게 새해에 풍어를 맞게 해달라고 정월대보름날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어부들이 북과 꽹매기를 두드리며 봉죽놀이를 하고있었다.

즐거운 배사람들의 놀이소리는 운치있게 달밤의 대기를 적시며 울려왔다.

《어야디야, 어야디야. 빨리 저어라. 바다로 나가잔다.…》

선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노래소리, 북소리, 꽹매기소리가 와자자하게 울리였다.

봉죽놀이에 신명이 나서 벙글벙글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환히 보이였다.

거들거들 곱새춤을 추며 돌아가는 남정들.

나풀나풀 고사리춤을 추며 미끄러져나가는 녀인네들…

밭최뚝에서 쥐불놀이를 하다말고 불을 놓던 홰를 그대로 추켜든채 봉죽놀이판으로 뛰여가는 조무래기들의 모양도 환히 안겨왔다.

박위는 들썽거리는 가슴을 눌러잡고 아버지곁에 다가섰다.

생각깊은 표정으로 달빛에 젖은 앞마을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박위에게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물었다.

《위야, 너 지금 무슨 책을 읽고있었느냐?》

《예, 〈효경〉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하니 불감훼상은 효지시야〉라는 대목을 읽고있었소이다.》

《그래 그 문장의 뜻이 무엇이냐?》

《우리의 몸은 부모가 준것이기때문에 터럭 하나 상하지 않는것이 효도의 시작이란 뜻이오이다.》

아버지는 아무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마을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버님께서 왜 이러실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걸가?)

박위의 가슴은 은근히 조여들었다.

이윽하여 아버지는 달빛이 어리여 더욱 청수해보이는 얼굴을 돌리더니 어찌 들으면 준절하고 어찌 들으면 곡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위야, 이 아버지는 지금껏 네가 문장으로 우리 가문을 빛내기를 바래서 너에게 고금의 문장들을 열심히 통독하게 했다. 헌데 이제와서 내 생각은 달라졌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 북방에서는 늑대무리같은 외적들이 지분거리고 여기 남쪽에서는 이리떼같은 왜구들이 쏠라닥거리고있지 않느냐.

이러한 시국에 민족의 남아로 태여나 허구헌날 책장이나 번지고있는게 과연 옳겠느냐?

사처에서 외적들이 칼을 들고 날뛰는데 붓을 들고앉아 문장이나 익혀서야 되겠느냐 말이다.》

박위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대뜸 짐작하였다.

아버지는 필경 오늘날의 사내는 붓을 들것이 아니라 칼을 잡아야 한다고 말씀하려는것이였다.

저렇듯 흥겨운 백성들의 노래소리를 붓으로 그려낼것이 아니라 칼로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려는것이였다.

박위는 진정 기뻤다.

기실 그것은 이미 자기가 아버지에게 아뢰고싶었던 일생일대의 소원이였고 최상최대의 희망이였다.

아버지의 의미심장한 말은 계속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같은 때 진정으로 높은 뜻을 지닌 사내라면 문장으로 립신양명할것을 꿈꿀것이 아니라 검을 들고 전장에 나가 나라와 백성을 지킬 열망으로 심장을 태워야 한다고…

내 생각은 이러한데 네 결심은 어떠냐? 이제부터라도 병서를 탐독하고 무술을 익히는것이 좋지 않겠느냐?》

박위는 힘차게 대답했다.

《아버님, 미거한 소자도 이미 그런 생각을 가지고있었소이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이렇게 일일이 깨우쳐주시고 이끌어주시니 기쁘고 감격할뿐 어찌 다른 생각이 있을수 있겠소이까?》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아버지의 코수염밑에서 함박꽃같은 웃음이 고요히 피여났다.

《장하다, 위야. 나는 육체의 터럭 하나 상하지 않는게 효도의 시작이 아니라 검을 잡고 전장에 나서는것이 참된 효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박위는 입이 아니라 높뛰는 심장으로 대답했다.

《아버님의 뜻깊은 말씀을 일생 골수에 새기고 평생을 검과 함께 전장에서 살겠습니다.》

이어 박위를 데리고 사랑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주안상을 차려오라고 일렀다.

어머니는 벌써 이런 일이 있을줄 알고있은듯 이내 성의있게 차린 술상을 들여왔다. 아버지는 박위앞에도 잔을 놓아주었다.

박위는 여적 마셔본적 없는 술을 아버지앞에서 마시는것이 례의에 어긋나는듯 하여 거듭 잔을 밀어놓았다.

과묵하고 근엄하나 세속의 까다롭고 허식적인 례의같은것은 우습게 아는 대활한 아버지는 기어이 박위의 손에 잔을 쥐여주었다.

《세상의 헛된 례의야 어찌됐든 우리는 우리 집안의 례법대로 살자꾸나.

나는 네가 그토록 장한 뜻을 가지고있는것도 기쁘고 또 부자일심동체도 기쁘다.

그래서 함께 술을 마시자는것이니 어서 잔을 비워라.》

술이 철철 넘쳐나는 잔을 받아든 박위는 조금 모로 꺾어앉아서 모금모금 술잔을 기울이였다.

아버지의 기대와 믿음대로 기어이 이 나라를 철벽으로 지키는 백전불패의 장수가 되리라는 억척같은 맹세가 전신의 피줄기를 활활 태웠다.

이날로써 박위의 소년시절은 때이르게 끝났다.…

살창과 옥문틈새로 게을러빠진 겨울의 새벽빛이 느릿느릿 흘러들고있었다.

여느때없이 가볍게 몸을 일으켜세운 박위는 지척지척 살창앞으로 다가갔다.

눈덮인 앞마당과 마당앞으로 연연 겹쳐있는 전옥들의 지붕이 희끄무레하게 안겨왔다.

아직은 모든것이 선명치 않은 어스레한 대기속으로 차거운 새벽바람에 불린 눈가루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있었다.

박위는 창살을 힘껏 틀어잡은채 저 멀리 고향하늘가로 마음의 시선을 날리였다.

청수하면서도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모습이 생생히 안겨왔다.

이 아침도 고향마을의 나지막한 뒤산기슭에 조용히 누워계실 아버지.

몸은 비록 봉분속에 들었지만 이 새벽도 차거운 겨울바람에 그날의 절절한 당부를 뜨겁게 실어보내고계시는 아버지…

박위의 가슴은 열탕처럼 끓어올랐다.

(아버님, 불효한 소자는 노상 전장으로 나돌아다니느라고 남들이 다 하는 막도 짓지 못했소이다.

그런데도 언제 한번 이 아들을 꾸짖은적 없으신 아버님께서는 오늘도 미거한 소자의 시들어가는 마음속에 마침 맞게 찾아오시여 또다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니 황공한 마음, 고마운 심정 실로 한량없소이다.

소자는 아버님의 그날의 당부와 믿음을 죽어서도 잊지 않을것이며 아버님앞에 다진 그밤의 맹세를 기어이 실행하고야말겠소이다.…

나와 함께 원정을 맹세하고 준비를 다그쳐온 군영의 군사들과 백성들이여, 나와 더불어 원정의 그 길에서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지우들이여, 그대들의 기대와 성의를 내 어찌 순시인들 잊을수 있으며 저버릴수 있겠소.

내 죽어서도 그대들과 한 맹약을 지킬것이오니 부디 믿어주오.…)

새벽의 하늘은 아직 캄캄했다.

마음의 시선으로 캄캄한 하늘에 새별처럼 어리여 빛나는 정다운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던 박위는 부지중 장지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든든한 어금이로 손가락끝을 힘껏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냄새가 물씬 떠오르더니 시뻘건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였다.

모진 동통이 손가락을 거쳐 팔전체에 엄습해왔으나 박위는 이를 앙다문채 자기의 덞어진 가슴우에 피흐르는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한자두자 피로써 글을 새겨나갔다.

《일심원정》

12

12

 

저벅저벅…

여러 사람이 전옥앞마당의 눈을 밟으며 성급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위는 비몽사몽간에 스르시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살창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였다.

살창앞에 다가선 사람들의 륜곽은 어룽어룽하게 알리였으나 그들의 얼굴모상은 뚜렷하게 가려지지 않았다.

의식이 흐릿한데다 살창밖의 사람들은 전부 밝은빛을 등에 지고있는탓이였다.

(헌부의 라졸들이 또 나를 내가려고 왔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드러누워 추한 꼴을 보여서야 안되지.

어서 일어나서 내 발로 나가자.

헌데 저놈들이 오늘은 어인 일로 창앞에 늘어붙어서 들어올념을 않는고.

이제는 저것들까지 나를 조롱할셈인가?!

그건 어찌 됐든 오늘은 완강하게 리성계나 전하의 국문을 요청하자.

대사헌과 아무리 골싸움을 해봐야 소득이 있을리 없다. 리성계나 전하앞에서 나의 청백과 원정의지를 밝혀야 한다.)

박위는 쇠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세웠다.

전신이 들쑤시고 눈앞이 핑핑 돌아갔으나 강잉히 한발두발 걸음을 내짚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걸음은 옥문쪽이 아니라 살창앞으로 옮겨지였다.

불현듯 살창밖에서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이 울음소리와 엇섞이여 날아왔다.

《…어쩌다 장군께서 이 지경이 되였소이까. 어쩌다.… 어흐흑.》

박위는 흠칫 몸을 떨며 굳어지였다.

이게 누구의 소리인가?

여삼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아침저녁으로 때식을 날라들이는 여삼이가 새삼스럽게 울고불고할 까닭도 없었다.

그렇다면 오천의 목소리인가.

아니, 오천은 지금 김해에 남아 새로 무은 전함들과 화약창고를 지키는 한편 왜구의 세작을 잡기 위해 뛰여다니고있을것이다. 헌데 웅글진 음성은 아무래도 오천의 목소리와 비슷하지 않는가?!

으흑, 이번에는 어떤 녀자의 짓눌린듯 한 흐느낌소리가 간헐적으로 날아들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고?

무슨 연유로 계집사람이 옥에 왔으며 어이하여 오자바람 울음부터 터치는것인가?!

살창앞에 다가선 박위는 궁금증이 가득한 시선으로 밖을 내다보며 다급히 물었다.

《그대들은 대체 누구들인가?》

어떤 젊은 녀자가 나부시 수그렸던 고개를 오연히 들어올리였다.

눈물매닥질이 되기는 했으나 유순한 색조와 청순하면서도 도담한 기운이 어울려도는 젊은 녀자의 백옥같이 흰 얼굴이 눈부시게 안겨왔다.

그는 분명 자기의 안해 최씨였다.

10여년전 왜구의 란을 만나 죽은 최씨가 환생하여 옥앞에 나타난것이였다. 이 어찌된 일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들뛰는 가슴을 안고 녀인의 낯익은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박위는 녀자의 목언저리에 박혀있는 까만 기미를 찾아보는 순간 소스라치듯 놀라며 창밖으로 손을 내뻗치였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극에 달했을 때만이 울릴수 있는 거의나 기괴한 음성이 터져나갔다.

《이게 리옥이 아닌가, 엉?!》

할끔하게 살이 깎이여 다소 생소해보이기는 했으나 처녀는 분명 살아있는 리옥이였다.

대마도에 잡혀간 리옥이, 이제는 필시 저세상 사람이 된줄로 알고있던 리옥이가 어떻게 되여 여기 개경의 옥문앞에 나타났단 말인가?

벅찬 환희로 하여 심장은 금시 흉곽을 터뜨리고 튀여나올듯이 세차게 높뛰였다.

그런중에도 도저히 풀릴것 같지 않은 의문이 그냥 샘처럼 솟구쳐올랐다.

리옥은 눈물자욱이 번들거리는 흰 얼굴을 다시금 나부시 숙이며 더 한층 세찬 오열을 터뜨렸다.

《으흐흑… 리옥이옵니다. 죄많은 소녀 리옥이 장군께 문안드리옵니다.》

《과연 리옥이로군. 헌데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떻게 살아서 예까지 올수 있었나 말이야.》

모든것이 꿈아닌 현실임을 저저이 느낄수록 기쁨과 환희는 가슴버겹게 몰밀려들었다.

문득 만난고초를 헤치고 오늘에 이르렀을 리옥의 지난 생활이 막연하게나마 짐작되자 가슴은 오리오리 터갈라지는듯싶었다.

더운침을 삼키며 사무치게 그립던 리옥의 청순한 모습을 뜯어보던 박위는 그가 미처 대답말을 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왜구의 소굴을 박차고 예까지 오자니 속인들 얼마나 썩이고 고생인들 얼마나 했을텐고…

사내대장부도 쉬이 헤치지 못할 험난한 길을 아녀자의 몸으로 뚫고왔으니 정녕 갸륵하도다.》

리옥은 리옥이대로 박위와의 꿈같은 상봉이 기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헤쳐온 아슬아슬한 위험의 고비들이 더없이 자랑스럽고 긍지로왔다.

그러면서도 예전의 미쁜 모색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박위의 처절한 모습이 볼수록 가슴이 찢어지였다.

하여 리옥은 박위의 물음에 한마디도 변변히 응대할수 없었다.

온순한 소녀애마냥 무턱대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처 흐느끼기만 했다.

한옆에 물러서있던 오천은 이제야말로 자기가 나설 때라고 생각한듯 성큼 박위앞으로 다가서더니 때늦은 인사를 정히 차리고나서 그쯘한 이를 하얗게 드러냈다.

《기뻐하시오이다. 이제는 모든 일이 대낮처럼 쨋쨋하게 밝혀졌소이다.》

박위에게는 너무도 비약이 심한 오천의 말 역시 리옥의 돌연한 출현과 마찬가지로 선뜻 리해되지 않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어느 정도 자기의 들뜬 기분에 사로잡힌 오천은 연방 손세까지 써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연은 대략 이러했다.

…그날도 오천은 날이 저물자 새로 무은 전함들과 화약광을 돌아보고나서 팔팔한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길순시에 올랐다.

오천의 견해에 의하면 지난 추석날 기생년의 집에서 나와 바다로 내뺀 놈은 틀림없는 왜구의 세작이였다.

지금이라도 무작정 요망해사한 기생년을 잡아다 족치고싶었으나 그렇게 하는 경우 그년과 짬짜미를 하던 세작놈은 바싹 꼬리를 사릴것이요, 개경에 잡혀간 박위에게는 더 큰 루가 미칠것 같았다.

이제는 바다에 나가 목을 지키고있다가 기여드는 세작놈을 산채로 모짝 그물질해 올리는것이 제일로 현책이였다.

하여 그는 박위가 잡혀간 뒤 거의 매일 밤 전함정박장을 감돌거나 바다에 나가 대마도쪽의 바다길을 살피군 했다.

윤통은 물론 오천의 일을 각방으로 떠밀어주었다.…

오천이가 이끄는 세척의 전함은 느긋하게 불어내리는 북동풍을 타고 비교적 빠른 속도로 신도를 지나 가덕도쪽으로 나갔다.

세척의 전함이 각기 자기가 맡은 길목으로 흩어져가려고 돛폭을 펄럭이며 선수를 돌릴 때였다.

매일과 같이 소연한 파도소리만이 떠돌던 가덕도쪽에서 낯선 퉁궁이 한척이 자그마한 몸통을 들까불며 불쑥 떠올랐다.

불어내리는 바람탓에 퉁궁이는 거부기처럼 속도가 느린데 그뒤로 역시 속도가 변변치 않은 두척의 다락배가 기를 쓰고 다가들고있었다.

다락배갑판우에서 왜구들이 벅작 떠들어대는 소리가 오천이네들의 귀에까지 그대로 들려왔다.

《하야꾸(빨리) 하야꾸…》

선수에 나서서 눈앞의 정황을 예리하게 살펴보던 오천은 쾌재를 올리였다.

(이게 웬 떡이냐? 매일 밤 빈 그물만 당기던 이 오천이가 오늘 밤엔 한꺼번에 두세두름의 왜구를 떠올리게 되지 않았는가.

아무렴 이 오천의 궁냥이 빗나갈리 없지. 이놈들― 오늘은 내 손에서 한놈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오천은 신속히 령을 내리였다.

《모두들 퉁궁이쪽으로 배를 달려라! 우선 앞에 선 퉁궁이부터 먹어야겠다!》

전함들은 일제히 퉁궁이를 향해 달리였다.

불현듯 오천의 뇌리속으로 이상한 예감이 비껴들었다.

오천은 다시금 눈앞의 정황을 세세히 살피였다.

퉁궁이 역시 왜구들의 배건만 고려의 전함들이 다가오는것을 뻔히 보면서도 그냥 마주 달려오고있었다.

헌데 퉁궁이를 따르던 다락배들은 차츰 뒤걸음을 치면서 고려의 전함이 아니라 퉁궁이에 대고 기수없이 화살을 퍼붓고있었다.

(이게 무슨 쪼간이 붙어있는 판이로구나. 다락배나 퉁궁이는 다 왜구들쪽에서 나왔는데 퉁궁이는 꼭 승냥이에게 쫓기는 애기사슴꼴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오천은 여념없이 뒤로 물러나는 다락배들과 내처 이쪽으로 다가오는 퉁궁이를 갈마보며 착잡한 생각을 굴리였다.

실상 다락배들은 퉁궁이를 추격하고있었다.

리옥이가 대마도를 탈출하기 위해 장서방을 이끌고 바다가로 나왔던 그날 밤.

리옥은 자기가 하도소도의 교활한 수에 걸려들었다는것을 깨닫게 되자 잠시 절망과 공포에 휘감기여 할바를 찾지 못했다.

바로 그때 품속깊이 간수한 박위의 단검이 리옥의 심장에 대고 말을 시작했다.

(정의와 도의를 리해한다고 하여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할수 없다.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그것을 지킬 때 그는 정녕 아름다운 사람이다. 실행하라. 실행이 없다면 아름다운 인간도 없다.)

갑자기 불가사의한 힘과 용기가 뻗쳐올랐다.

발소리를 죽여가며 하도소도의 뒤로 돌아간 리옥은 혼신의 힘을 다 내여 놈의 잔등에 단검을 들이박았다.

하고는 얼혼이 다 빠져버린 장서방을 질질 끌다싶이 하여 바다우에 배를 띄웠다.

다음날 정오때가 되여서야 술에서 깨여난 사다께는 밤새 벌어진 천만뜻밖의 사건을 알게 되자 관사가 떠나갈듯이 고아대며 길길이 날뛰였다.

파수군 세놈이 사다께의 칼에 《오멘》, 《도》, 《후꾸》를 얻어맞고 피범벅이 되여 나동그라지였다.

이어 사다께는 두척의 날랜 다락배를 따로 뽑아 퉁궁이를 뒤쫓아가게 하였다.…

오천은 물론 멀리 왜땅에서 벌어진 이러한 사연을 전혀 알수 없었다.

단지 직감적으로 매에게 쫓기우는 장꿩이나 다름없는 퉁궁이는 잠시 내버려두고 다락배들부터 소멸하는것이 옳을듯싶었다.

오천은 고쳐 령을 내리였다.

《퉁궁이는 내버려두고 다락배들부터 태워버려라.》

세척의 고려전함은 물갈기를 날리며 다락배들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면서 불꼬리가 달린 화전들을 련속 날리였다.

화전들은 밤하늘을 빨갛게 째며 비발처럼 무수히 날아갔다.

얼마 안있어 다락배들의 돛폭에 불이 달리였다.

불달린 새앙쥐꼴이 된 다락배들은 검푸른 바다에 불그레한 화광을 던지며 황망히 뺑소니를 쳤다.

그들의 파멸은 정해진것이라 더이상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오천은 곧 배머리를 돌려 가랑잎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퉁궁이에 다가갔다.

전함의 선수가 퉁궁이에 다가붙자 홰를 쳐들고 빈배처럼 괴괴한 퉁궁이갑판에 뛰여내리였다.

천만뜻밖에도 배안에는 고려복색을 한 젊은 사내와 젊은 녀인이 쓰러져있었다.

홰불을 바투 가져다대고 남녀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던 오천은 녀자의 얼굴에서 리옥의 모색을 찾아내는 순간 너무도 놀라 그만 홰불을 바다물에 떨구었다.

어느 옛 문헌의 갈피에 《대마도를 탈출한 고려인부부…》라고 잘못 기록된 대목의 실상은 대개 이러했다.

그날 밤도 윤통은 홀로 처소에 들어앉아 도저히 해결할 가망이 없어보이는 박위의 일이 통분하여 연방 술대접을 기울이고있었다.

이럴 때 오천이가 범잡은 포수의 얼굴을 하고 윤통의 처소로 뛰여들었다.

오천을 통해 리옥의 탈출소식과 역모사건의 대략적인 진상을 알게 된 윤통은 그 당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술대접을 내동댕이친 윤통은 분분히 칼을 비껴차며 사려문 이발새로 부르짖었다.

《내 벌써 조호백의 밑구멍에서 구린내가 난다는것을 감촉한지는 이미 오랬다. 박장군은 호백이 네놈이 개심하기를 그리도 원하고 믿었는데 네놈은 종시 덕을 악으로 갚았구나.

하기사 검둥개 열번 목욕시킨다고 하얀 개가 될가부냐.

조호백이 네 이놈― 쥐새끼같은 네가 호랑이같은 박장군을 모함하고도 무탈할줄 알았느냐?》

한참이나 분을 토하던 윤통은 곧 문을 차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그당장 말을 몰아 읍내까지 치달아오른 윤통은 앞을 막는 관가의 문지기들을 허깨비처럼 차넘기고 곧장 동헌으로 돌입했다.

동헌앞뜰은 물속처럼 고요한데 환하게 불을 밝힌 동헌방에서는 음탕한 년놈이 마음놓고 진수작을 하는 소리가 두세두세 흘러나왔다.

그들은 두말할것도 없이 조호백과 매화였다.

《이 애 매화야, 박위라는 놈이 잡혀가니 요즘은 먹지 않아도 살이 오를것 같구나.

네가 아니였더면 박위는 지금도 김해땅을 타고앉아 우리 관가와 고을백성들을 못 견디게 지지고 볶고 할게다.

참말이지 너의 령롱한 수단덕에 만가지 시름이 다 사라졌구나.》

호백은 매화가 그지없이 고맙고 기특한듯 계집의 통통한 어깨를 정차게 쓸어만지였다.

허나 호백의 심사는 사실 박위가 이곳에 있을 때보다 훨씬 무겁고 착잡했다.

귀넓은 동자보살처럼 시골소식, 개경소식을 죄다 휑하게 꿰뚫고있는 호백은 조정의 요즘소식을 낱낱이 알고있었다.

처음 얼마간은 일이 유리하게 번져가는 바람에 박위의 처형은 먹어놓은 떡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안있어 예견치도 않았던 최칠석과 김종연들이 울뚝불뚝 솟구쳐올랐다.

백성놈들까지 와와 밀려다니며 박위의 무죄를 떠들어댔다.

차차 리성계파의 량반들까지 《분명치도 않은 증거를 가지고 박위와 같은 견실한 장수를 처형하는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제 손으로 죽이는것과 같은 미련한 행위》라고 수군거리였다.

그렇게도 믿고있던 리성계는 수염을 빡 내리씻고나앉아 박위의 사건을 먼산의 불구경하듯 했다.

호백은 간에 불이 달리였다.

이러다가 만일 박위가 무죄로 판명된다면 출처가 분명치 않은 왜구의 편지를 련속 주어다섬긴 자기에게 죽음이상의 형벌이 차례질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였다.

허나 이제와서 모래불에 흘린 물을 어떻게 주어담는단 말인가.

호백은 사실 박위가 역적모의를 한다고 처음으로 고변할 때 그에게 왜구와 한동아리가 되였다는 험턱까지 씌울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헌데 매화가 그럴듯한 편지와 소문을 들고와 배를 쓸고 등을 문지르는 바람에 한발두발 걸음을 내짚은것이 이제는 도저히 헤여나올수 없는 진구렁속에 깊숙이 빠지였다.

그때는 이왕지사 젖은 치마에 이슬을 가리랴, 박위만 제끼면 그만이다 하는 생각에 용기도 나고 배심도 생기였으며 실지 모든 일을 삶은개 눈알 뽑듯 손쉽게 해제낄 자신도 있었다.

모든 일이 마른 개다리 탈리듯 뒤탈리는 요즘에 와서야 호백은 비로소 지금까지 자기가 행한 일이 스스로도 엄청나게 생각되여 돌이켜 볼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러고보면 매화는 왜구와 줄이 닿아있는 암개귀신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며칠동안을 내처 술상을 끼고앉아 골을 썩이던 호백은 마침내 매화를 조용히 없애치우리라고 작정했다.

벼락에는 삼태기라도 뒤집어쓴다고 죽을고에서 헤여나오자면 지금 당장 그를 죽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매화를 없애치우면 후날 자기가 심문을 당하는 경우 모든것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뒤번져놓아도 사헌부에서는 도저히 실상을 캐낼수 없을것이요, 따라서 죄상은 훨씬 가벼워질것이였다.

호백은 오늘 밤중으로 굴대장신같은 자객들의 손에 죽게 될 매화가 다소 측은했으나 원체 곱게 생긴 계집은 박명하다는 문자말이 떠오르자 자기의 행위가 전혀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을뿐아니라 계집의 운명도 타고난 팔자로 의당하게 생각되였다.

《아유, 아퍼요. 좀 살랑살랑…》

호백은 음기가 바싹 동해올라 계집을 끄당기고 계집은 달아오른 사내놈을 골려먹는 재미가 달달하여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바로 이때 거칠기 짝이 없는 손길이 거침없이 방문을 밀어제끼였다.

눈에서 퍼런 불이 뚝뚝 떨어지는 윤통이 먼저 신발을 신은채로 들어서고 그뒤로 오천이와 여러 군사가 같은 본새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금시 지붕이 꺼져내리기라도 한듯 깜짝 놀란 호백은 탐라말같은 계집을 간신히 밀어제끼고 후닥닥 뛰여일어났다.

불길한 예감이 쇠몽치처럼 뒤머리를 때렸으나 한껏 기를 돋구어가지고 소래기를 내질렀다.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짓이냐?

군영것들은 법도 없고 례절도 모르느냐?》

윤통은 가뜩이나 험하게 생긴 눈을 사납게 뒤굴리며 을러메듯 말하였다.

《부사는 좀 가만있소. 이제 저 세작년에게 말 몇마디 묻고나서 법이든 례절이든 따져봅시다.》

호백은 잔뜩 속이 궁글어가지고도 구멍뚫린 새납소리 같은것을 그냥 질러댔으나 윤통은 본체도 않고 매화앞에 다가섰다.

세차게 들먹이는 계집의 불룩한 가슴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독수리울음소리같은것을 터치였다.

《이년아! 너도 이 〈흑면장수〉의 선성을 아주 모르지는 않을테지?

한마디로 외로 댔다간 당장에 찔러죽일테다.

네년은 왜구의 세작 요리꼬! 대마도령주놈의 비밀한 령을 받고 이땅에 스며들어 군영원수를 모함하는 몹쓸짓을 꾸며냈지? 옳으냐?》

매화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휘저으며 떠드박떠드박 분명치 않은 소리로 옹알거리였다.

《왜구의 세작이라니요?!… 쇤네는 저기 전라도에서 살다가…》

《무엇이 어째? 빌어먹을 암여우같으니… 당장 살멱을 찢어죽일테다!》

윤통은 번쩍 칼을 들어올리였다.

오천이 재빨리 윤통의 앞을 막아서며 계집의 기름기도는 머리끄뎅이를 휘감아잡았다. 하고는 다른 한손으로 사다께가 요리꼬앞으로 쓴 편지를 펼쳐보이였다.

《네가 거짓말이 난당인걸보니 세작이 분명하구나.

눈을 똑바로 뜨고 이 편지를 봐라.

대마도에 잡혀갔던 우리 사람이 대마도관사에서 꺼내온 이 편지는 네년에게 마지막으로 해야 할바를 일러주는 령주의 자필이다.

이래도 닭의 다리 뻗대기듯 할테냐? 이 더러운 년…》

흰자위가 가득한 눈으로 편지의 글발을 대충 훑어보고난 요리꼬는 더이상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깨달은듯 얄팍한 입술을 독스럽게 감쳐물더니 쑥바구니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푹 떨구었다.

낚시에 물린 붕어새끼처럼 갈고리눈을 삼박거리며 달달 떨던 호백은 자기의 파멸을 확연히 예감한듯 모래자루처럼 풀썩 무너져내리였다.

다음날 아침 윤통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광속에 처박아두었던 왜년을 끌어내다 말잔등우에 짐짝처럼 동여싣게 했다.

아침밥을 먹는둥마는둥 하고난 윤통은 오천과 리옥을 비롯한 여러 군사들을 뒤에 달고 개경을 향해 풍우마냥 내달리였다.

밤낮으로 길을 재우쳐 개경에 당도한 윤통은 극심한 과로로 하여 눈앞이 어질거렸으나 즉시 리옥과 오천이 그리고 요리꼬를 앞세우고 승기가 나서 여러 관청을 들고날며 사건의 좌우전말을 고하였다.

최칠석과 김종기, 김종연과 최단도 더 한층 기세가 올라 뛰여다니였다.

사건인즉 전고에 보기 드문 중대사변이라 즉시에 관청들이 설설 끓고 왕궁까지 들썩거리였다.…

살창을 움켜잡은 박위의 터갈라진 손은 중풍이라도 만난듯 와들와들 떨리였다. 박위는 불같은 격정을 토하고싶었으나 목이 마르고 속이 젖어들어 도저히 말을 굴려낼수 없었다.

(얼마나 장한 사람들인가.

왜구의 세작을 잡으려고 매일 밤 바다길을 나돌다가 리옥을 구원한 오천이도 갸륵하지만 왜구의 비밀한 속내를 파가지고 대마도를 뛰쳐나온 리옥은 또 얼마나 기특한가.

아니, 모두가 비범한 인물들이요, 고마운 나의 은인들이다.)

저벅저벅… 앞마당 구석쪽에서 또다시 여러 사람의 무게있는 발자국소리가 울리였다.

눈길을 들어보니 앞마당으로 낯익은 무관 여러명이 전복자락을 날리며 헌걸차게 들어서고있었다.

그들의 뒤로 사팔뜨기 옥사장이 허겁지겁 따라서고있었다.

《어서 옥문을 따고 밖으로 모셔내여라!》

김종연의 위엄기있는 목소리가 앞마당을 쩡쩡 울리였다.

박위의 심장은 다시금 세차게 곤두뜀을 하였다.

입만 벌리면 환성과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나올것 같았다.

육중한 옥문이 열리자 박위는 제 먼저 허청비청 밖으로 걸어나갔다.

옥문곁에 바투 붙어서있던 최칠석이 울고웃으며 반달음으로 다가오더니 박위의 험한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입술을 실룩거리던 끝에 울음기가 가득 배인 청을 왈칵 쏟아놓았다.

《해암!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종연은 틀스러운 걸음새로 다가오다말고 부리부리한 두눈을 슴벅거리였다.

《고초가 심하셨소그려.》

윤통은 선자리에서 시꺼먼 얼굴을 찡그리며 웅얼거리였다.

《박장군을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정겨운 시선으로 미더운 무관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속깊이에서 뜨겁게 고패도는 격정을 그대로 드레질해 올리였다.

《공들의 념려덕분에 별다른 탈이 없이 지냈소.

정말로 고생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엉킨 실꾸레미처럼 헝클어진 일을 바로 잡느라고 백사를 젖혀놓고 뛰여다닌 그대들이요. 내 정녕 결초보은하리다.》

《과찬의 말씀이요.》

《해암의 뜻이 하 높으매 하늘이 굽어살핀게요.》

종연과 칠석은 한마디씩 답례를 하고나서 어제오늘 왕궁과 조정에서 새로 내린 결정을 번갈아가며 알려주었다.

조정에서는 박위를 무죄석방하여 본직으로 돌려보내고 매화는 참형에 처하며 조호백은 원악도로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와 함께 대마도원정을 위한 준비가 상당히 성숙된 현조건에서 더 미룰것없이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원정군의 총지휘는 지금까지 왜구들과 수많은 싸움을 해보았을뿐아니라 충의와 량심을 다하여 원정준비를 떠밀어온 박위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조정에서는 또한 원정에 필요한 군수물자들과 장수들을 박위에게 보충해주기로 하였는데 병부에서 추천한 장수들의 명단에는 최칠석과 박자안이 올라있었다.

진정 나라의 수치를 씻고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떨치게 될 첫 대마도원정은 이렇듯 깊은 사연속에서 자기의 서막을 열게 되였다.

박위는 하염없이 쏟아져내리는 눈물로 하여 눈앞의 광경을 뚜렷이 가려볼수 없었다.

허나 마음은 날아오를듯이 기뻤다. 무한히 행복하기까지 하였다.

지금껏 겪어온 가슴아픈 번뇌와 뼈저린 고초마저 허무하거나 억울하기는커녕 오늘의 성공과 행복을 빚어올린 보귀한 밑거름처럼 생각되였다.

박위는 미덥고 고마운 세 무관을 한아름에 껴안고 눈판우에 마구 딩굴고싶었다.

천지가 들썩 울리도록 만세를 부르고싶기도 하였다.

한참후에야 박위는 천천히 눈굽을 찍어내며 누런 물딱지가 더덕더덕 매달려있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헤치였다.

《천은(임금의 은혜)이 망극(끝이 없다는 뜻)하오이다.》

뻘겋게 짓물린 눈으로 박위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그의 가슴팍에 씌여진 혈서를 띠여보고 하나같이 눈을 흡떴다.

《일심원정》.

그것은 정녕 박위의 필생의 초지요, 자나깨나 가슴을 짓태운 심장의 노래였다.

사람들의 가슴은 누구라없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고로 세상에는 원대한 뜻을 지녔노라고 하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그 뜻을 실행한 사람보다 빈소리만 요란하게 질러놓고 뒤를 꼬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하기에 사람들은 큰뜻을 품었노라고 자처하는 인물들에게 서둘러 감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력사는 시련과 난관속에서도 사생결단의 의지로 과감히 자기의 뜻을 실현해나가는 뼈대있는 인간만을 민족의 장한 아들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만세에 길이 자랑하는것이다.

13

13

 

김해의 2월은 드바쁜 일계절이다.

물이 따스해지니 어부들과 해녀들은 그물질, 무잠이질을 하느라고 젖은 몸이 마를새 없고 땅이 부근부근하게 부풀어오르니 농군들은 밭을 갈고 씨를 묻느라고 굽은 허리를 펼 틈이 없었다.

집집의 큰애기들까지 산나물을 캐고 송피를 벗기느라고 사랑에 불타는 높은 가슴을 한가락의 애가로 달래이며 이산저산을 오르내리였다.

2월은 또한 여느때없이 번잡스러운 굿계절이였다.

오랜 옛적에 벌써 《…거북아 거북아…》라는 구절로 시작된 《구지가》라는 원시적인 신앙숭배를 내용으로 한 첫 가요를 엮어낸 고장이여서 그런지 일찍부터 이 고장 무당, 판수, 승려들은 비길데없이 신귀가 밝고 불법에 능통하다고 전국에 소문이 파다했다.

하여 경향 각처에서 세상사 여의치 못해 마음고생, 몸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뻔질 이곳으로 밀려드는데 2월이면 온갖 귀신놀이가 가장 성행하는 때라 김해의 방방골골, 촌촌호호가 노상 북적북적 하였다.

허나 이해 기사년(1389년) 2월의 아침.

이 고장 사람들은 모두다 그처럼 번다한 일사를 깡그리 잊은듯 군영앞 바다기슭에 하얗게 모여있었다.

창원과 밀양, 부산과 동래를 비롯한 주변고을의 백성들, 지어 멀리 개경에서 길량식을 축내가며 부러 예까지 내려와 새벽부터 부산을 피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숱한 사람들의 맨 앞장에는 만나기만 하면 기가 나서 승벽내기를 하던 옥보와 구서방이 여느때없이 깨끗한 백저포(주로 농민, 장공인들이 입던 흰색의 겉옷)를 차려입고 의좋게 나란히 서있었다.

흐뭇한 미소를 띠운채 연해 기다란 수염을 쓸어내리는 죽촌의 행수로인과 전에없이 멀끔해진 얼굴로 바다우의 전함들을 살펴보는 백동이 엄마 그리고 어지게 생긴 황소눈을 슴벅거리는 장서방의 모습도 보이였다.

몸에 꼭 맞는 흰 저고리를 입고있어 복성스럽게 생긴 얼굴과 조금 부할사 한 탄력있는 몸매가 더욱 두드러져보이는 취금이의 생기발랄한 모습,

초록색바탕에 빨간 깃선을 댄 저고리를 차려입은 리옥이가 자그마한 꾸레미를 들고 서있는 모양도 뜨이였다.

이들은 모두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요정내기 위해 출정하는 고려군사들을 전송하기 위해 백사만사를 제껴놓고 달려온것이였다.

원정군사들은 이미 전함우에 모두 올라있었다.

군영 앞바다를 꽉 메운 100여척의 전함우에서 출전의 시각을 기다리고있었다.

천료주의 갑판우에 뒤짐을 돌려잡고 서있는 박위는 아까부터 주위의 전함들과 그우에 올라있는 군사들, 봄볕에 강철의 몸체를 번쩍이는 화포들을 얼없이 바라보고있었다. 때로 바다가에 장사진을 이루고 서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내려다보기도 했다.

가슴은 하냥 후더워올랐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려온 이날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날, 이 시각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리고 밤을 지새웠던가!

정녕 2월의 오늘은 자연이 안아왔지만 원정의 이 시각은 이 나라 백성들의 애국충정과 멸적의 기상이 빚어낸것이 아니겠는가?

《헛허, 이런 난감한 일이 어디 있소?》

칼을 비껴잡은 최칠석이 껄껄 웃으며 박위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서야 사색에서 깨여난 박위는 느슨한 미소를 띠우며 물었다.

《왜 그러우?》

《아니, 글쎄 현중이녀석이 날더러 원정에 가게 해달라구 땅파기로 졸라대는구려. 나는 어쩔 도리가 없으니 해암이 군령으로 쫓아내시우, 헛허허.》

칠석은 모든 일이 그저 기쁘기만 한듯 노방 웃어가지고있었다.

박위는 별로 놀라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대답했다.

《제가 가겠다면 내버려두구려.》

칠석의 크지 않은 눈이 대번에 떼꾼해졌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뼈도 채 굳지 않은 현중이를 싸움판으로 데리고 간단 말이요?》

《원래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대공에 날아오를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 따오기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횡단할 꿈을 가진다오.

무관의 자식이 어려서부터 원쑤와 싸울 생각을 하는게야 너무도 응당한 일인데 무얼 놀랄게 있소?》

어느 틈에 박위의 뒤에 와 서있던 현중은 나직한 환성을 터치였다.

군사들이 입은 궁노(고려시기 군사들이 입던 통좁은 바지)를 가뜬하게 입고있어 한결 날렵해보이고 어른스러워보이는 현중은 곧 선미쪽으로 뛰여가더니 아래쪽에 대고 기운차게 손을 흔들었다.

바다가 모래불에 외따로 나와 서있던 리옥은 현중의 손짓을 보자 그윽한 미소와 은근진 고개짓으로 화답을 보내였다.

보매 현중은 이미 리옥에게 원정에 참가할 자기의 의사를 표명하였고 리옥은 그의 의향을 두말없이 찬성한 모양이였다.

이어 리옥은 보꾸레미속에서 새파란 솔잎을 한줌 듬뿍이 집어내더니 박위가 탄 천료주주위에 무슨 씨라도 뿌리듯 솔솔 뿌리였다.

오늘은 항간에서 《꽃아침》이라 이르는 날이다.

옛적부터 2월의 이 아침이면 출입문과 방안, 지어는 앞뜰과 뒤뜨락에까지 솔잎을 뿌리였다.

새봄에 들어 빈대가 성하지 못하게 바늘(솔잎)을 뿌린다는 의미였다.

별로 신통한 방책은 아니지만 솔잎을 따기 위해 봄날의 신선한 대기를 호흡하며 소나무 우거진 산으로 오르는 등산도 나쁠것 없는 일이요, 불결한것을 꺼리고 순결한것을 취하려는 건전한 생활지향도 탓할것이 아니였다.

리옥은 배둘레를 따라가며 여념없이 솔잎을 뿌리고있었다.

그는 지금 빈대가 바늘에 찔려죽듯이 왜구들이 우리 군사들의 화살에 나서는 족족 맞아죽기를 바라며 솔잎을 뿌리는것이였다.

리옥의 일거일동을 놓칠세라 바라보는 박위의 눈뿌리는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아 리옥, 정답고 소중한 그대여.

뉘라서 사랑을 마음의 부담으로 여긴적 있었던가.

사랑은 마음속의 가장 큰 재부요, 인생의 큰뜻을 떠밀어주고 생활의 의의를 증대시키는 신기하면서도 확실한 하나의 기적이 아니겠는가?!…

세련된 무희의 률동을 련상케 하는 리옥의 유연한 손놀림을 지켜보는 박위의 가슴에는 불이 일어번지였다.

보이지 않는 그 불길은 전신을 활활 태우는듯싶었다.…

며칠전 저녁이였다.

군영에서는 대마도원정작전을 최종적으로 토의결정하는 장수들의 중대한 모임이 있었다.

첫 의제인 원정날자를 정하는 대목에서부터 말썽이 일어났다.

박자안이 아닌밤중에 홍두깨 내밀듯 첫날은 모든 일을 조심하고 함부로 출입을 하지 말아야 하며 다음날에는 찰밥을 지어 제사를 하고 떠나야 한다는따위의 타령을 꺼내놓은것이였다.

박위는 즉각 자안의 귀신타령을 일축해버리고나서 출정날자를 2월초로 찍어서 눌러놓았다.

다음의제는 바다길을 어느 방향으로 택할것인가 하는것인데 그 문제는 그런대로 무난히 락착되였다.

마감으로 대마도대안에 접근한 후 어떤 형식으로 섬의 외곽을 타격하며 외곽을 깨친 후에는 어떻게 섬의 종심을 공격할것인가 하는 가장 주요한 의제에 이르자 의견은 다시 분분해졌다.

그것은 저마끔 전투경험과 실전능력이 다르고 사색의 농도와 궁냥의 깊이가 다른데도 원인이 있었지만 보다는 누구라 할것없이 대마도지형을 잘 모르는데 근본원인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는 박위도 례외가 아니였다. 갑론을박하던 끝에 대체적인 공격안을 짜기는 했으나 그것은 꼭 장님들이 모여들어 지은 집처럼 어설프게 생각되여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무죽한 마음을 안고 처소로 돌아온 박위는 저녁상을 치르고나서 리옥이 내온 차종을 받아들었다.

오랜만에 리옥이 달여온 구기자차를 마시고난 박위는 감회깊은 어조로 말하였다.

《오랜만에 그대가 달여온 차를 마셔보네그려. 그래서인지 맛이 참 유별스러우이.》

박위는 리옥을 다시 만난 뒤로는 해라를 쓰지 않았다.

부러 쓰지 않는것이 아니라 절로 그렇게 되였다.

리옥은 그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박위를 만류하기는커녕 자연스럽게, 지어는 기쁘게 받아들이였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이며 무슨 까닭인가?!…

《유별스럽다니? 맛이 답니까?》

한삼(속저고리)만 입은 리옥은 박위곁에 살풋이 모꺾어앉으며 은근지게 물었다.

《달리야 있겠소. 쓴맛이 유난히 마음에 즐겁다는 뜻이지.

아마도 칼잡은 무관은 쓴맛을 사랑해야 하는가보이. 그래야 백성들이 달게 살아갈수 있을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리옥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집게 들어올리였다.

《…대마도에서 돌아온 뒤 작은 사랑에 들어가보니 현중은 소녀가 짓다가 버려두고간 무관복을 서탁우에 그냥 놓아두고있더이다.

그걸 보니 소녀의 마음 아프고 쓰려서…》

《그건 그대가 버려두고간것이 아니라 왜구들탓에 채 못 지은것이지.

이제라도 마저 지어준다면 나도 기쁘고 현중이도 좋아할게요.》

박위가 여러가지 뜻을 담아 신중히 말하자 리옥의 얼굴은 더욱 붉어지였다.

이어 리옥은 꽤 큼직한 종이두루마리를 꺼내여 박위의 무릎앞에 주르르 펼쳐놓았다.

우불구불한 선들과 크고작은 동그라미들, 세모형과 네모형… 각이한 도형이 빼곡이 들어찬 종이장을 얼추 내려다보고난 박위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리옥을 쳐다보았다.

《이게 무엇인가?》

《대마도의 지형입니다. 소녀가 그곳에서 지낼 때 눈여겨 보아두었던것을 어제 오늘 생각을 더듬어서 그려보았습니다.

이번 거사에 꼭 필요할것 같아서…》

박위는 재빠른 시선으로 급급히 종이장을 뜯어보기 시작했다.

해변가의 성곽들과 바위벽들, 전함들의 정박장소와 왜구들의 병영, 무기고와 군수창고, 관사와 마을, 산야와 구릉지대…

대마도의 모든것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안겨왔다.

도형을 표기한 솜씨는 서툴렀으나 그것은 단순한 지형도가 아니라 대마도원정에 절실히 필요한 실용적인 군사지도였다.

박위는 룡의 알이라도 얻은듯 기뻤다.

리옥이가 더욱 소중하고 미더웠다.

사랑은 최고의 령봉에서 홰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도적떼의 소굴을 빠져나온것만 해도 장하다 하련만 왜구의 흉계를 일격에 분쇄할 증거물을 빼오고 대마도의 지형지물까지 낱낱이 알아왔으니 리옥이야말로 세상에 소리쳐 자랑할만한 이 나라의 훌륭한 딸이요, 고금에 드문 녀걸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녀자와 사랑을 나눈다는것은 희한한 행운이 아닐수 없다.…

리옥의 맑은 얼굴과 하얀 목언저리에 박혀있는 까만 기미를 갈마보며 사색을 이어가던 박위는 종이장우에서 한마리의 귀여운 새처럼 파들파들 떠는 처녀의 작은 손을 담쑥 움켜잡았다.

속깊이에 묻혀있던 불덩이같은 진정을 폭발적으로 쏟아놓았다.

《내 여직껏 그대가 지난 여름에 보낸 편지에 회답을 못했었는데 지금 하려네.

난 그대의 마음이자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제와서 무슨 말을 길게 할게 있겠나.

바라건대 부디 현중이의 좋은 어머니가 되여달라고…》

리옥은 아무말없이 언제인가 박위가 따를만 한 사내가 생기면 선물로 주라고 했던 사연많은 단검을 두손으로 받쳐 올리였다.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받아든 박위는 리옥의 깊은 심중에 감동되여 한동안 고개만을 끄덕거리였다.

《…그대의 심정은 고맙기 이를데 없소만… 내 나이에 너무 체신머리 없는노릇이 아닌지 모르겠네.》

박위의 말은 심히 비약된것이였으나 총명한 리옥은 대번에 그의 말뜻을 알아차리였다.

살래살래 도리머리를 젓던 리옥은 불식간에 꽈리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을 박위의 담벽같은 가슴에 묻으며 자기의 들끓는 심정을 퍼올리였다.

《소녀는 현중 아버님의 나이를 모릅니다. 하오나 불덩이같은 심장을 지니신, 백년이 가도 늙지 않는 심장을 지니신분이라는것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소녀는 그 심장을 사랑하고 존경할뿐 다른 아무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고마운 말일세.》

박위는 떨리는 소리로 대답하고나서 리옥의 싱싱한 어깨를 으스러지게 그러안았다.

군영 뒤산에서는 밤깊도록 봄날의 새생활을 토의하는 이름모를 밤새들의 청아한 우짖음소리가 유난히 정겹게 울려왔다.…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금 전함들과 군사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잠풍한 바다와 인파로 설레는 백사장이 통으로 들썩하도록 우렁차게 웨치였다.

《대취타 하라!》

나팔소리, 북소리를 크게 울리라는 뜻이였다.

지휘함선인 천료주의 갑판우에 모여서있던 고취악대(관악기와 타악기를 위주로 한 군악대)가 명문고취(군대의 전투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행군음악)를 터치였다.

쿵짝쿵짝 쿵쿵쿵 짝짝…

생황, 피리, 퉁소, 큰저 등의 관악기들이 풍작거리고 소가죽으로 만든 대북이 쿵쿵거리였다.

어느 틈에 악사들사이에 끼워든 여삼이도 납주그레한 턱을 유난스레 들까불며 차거라(소라로 만든 나팔)를 불고있었다.

어디선가 죽촌의 행수로인이 오래간만에 불어제끼는 세련된 저대소리도 들려왔다.

《출동하라!》

박위의 두번째 령이 울리였다.

커다란 돛폭을 활짝 펼친 전함들은 류랑한 군악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일제히 배머리를 돌리였다.

나팔소리, 북소리, 원정군을 전송하는 사람들의 격정에 찬 환성은 하늘을 뒤흔들고 바다를 진동했다.

나라의 존엄과 기상을 온 나라에 과시할 드높은 각오, 민족의 백년숙적인 왜구를 씨도 없이 소탕할 멸적의 투지를 지닌 고려의 장한 아들들은 대마도를 향해 질풍같이 달리였다.

14

14

 

…정오가 지난지 얼마 안되여 날마다 한복판으로 예상치 않았던 돗굉이바람(회오리바람)이 밀려들었다.

배군들이 제일로 꺼리는 손돌바람보다 훨씬 더 사납다고 하는 돗굉이바람은 허연 물머리를 높이 쳐든 집채같은 파도가 껑충 뛰여오르게도 하고 허궁 내려꽂히게도 하면서 거대한 바다를 통채로 마구 휘저어댔다.

질서있게 렬을 지어 전진하던 전함들은 삽시에 휘뿌려던진 락엽무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면서 곤두박질이라도 할듯이 위태롭게 기울거리였다.

팽팽하게 불어난 돛폭들은 금시 찢어져나갈듯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펄럭거리였다.

다락안의 평상우에 단정히 앉아 대마도지형도를 보고있던 박위는 선체의 심상치 않은 요동을 감촉하자 돗굉이바람이 터졌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

평상을 차고일어선 박위는 다락을 뛰쳐나왔다.

갑판우에 나서니 언제 어떻게 지휘선으로 넘어왔는지 여러 장수들이 배가 흔들리는대로 비칠거리며 박위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엥이, 내 그만큼 첫날에 길을 잡아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끝끝내 고집을 쓰더니… 변을 만날수밖에…》

연방 들씌워지는 물보라에 온몸이 촉촉히 젖은 박자안이 쥐꼬리같은 수염을 비틀어짜며 두덜거리였다.

《종작없는 소리 그만하오.》

박위는 박자안의 얼뜬 소리를 단호하게 무찔러버리고나서 광란하는 바다를 휘둘러보았다.

사처에서 연해연방 솟구쳐오르는 거방진 파도, 그속에서 방향없이 밀려다니는 전함들.

귀가 아플 지경으로 소란한 파도소리.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으스산한 바람소리.

다급한 비명소리, 짜증어린 고함소리…

(어떻게 할것인가?)

박위의 긴장된 뇌리는 난국을 타개할 출구를 찾아 총망히 모대기였다.

노상 쟁개비 끓듯 하는 성미인데다 책을 통해서나 전쟁을 알고있지 실지 싸움마당에는 별반 나서본적 없는 박자안이 또다시 동닿지 않는 소리를 꺼내놓았다.

《옛글에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라 했소. 일은 사람이 꾸미지만 성사는 하늘이 한다는 뜻이 아니겠소.

암만 봐야 오늘은 하늘이 노한듯 하니 일시 회군했다가 좋은 날을 잡아가지고 다시 나오는게 어떻소?》

김종연이 비양기어린 시선으로 자안을 흘겨보더니 위엄기있는 청으로 면박을 주었다.

《그런 창피한 소리를 할바에야 함께 오기는 왜 왔소? 방략이 없거든 차라리 입다물고 가만있는 편이 낫겠구려.》

박위는 더이상 자안을 그대로 내버려둘수 없었다.

장수 한사람의 동요는 전군에 비관과 실망을 부식시킬수 있거늘 애초에 그 동요를 짓뭉개버려야 했다.

박위는 자안이쪽으로 돌아섰다.

또 한차례 솟구쳐오른 물바래를 뒤집어쓴 박위의 얼굴은 기름이라도 바른것처럼 번들거리였다.

《그러니 박공은 풍랑이 무서워서 원정을 포기하자는거요? 도대체 공은 이번 원정이 어떻게 마련되였으며 이 원정에 어떤 뜻이 담겨져있는지 알기나 하오?

우리는 절대로 이 길에서 물러설수 없소.

기어이 풍랑을 헤치고 나가 왜구를 격멸하는 길밖에 다른 길은 없단 말이요.

풍랑이 무섭고 죽음이 두렵다면 박공은 혼자 조용히 돌아가오.

하지만 그냥 여기 남아서 군심을 소란하게 한다면 즉시 군률의 칼을 받게 될게요.》

박자안은 황급히 채머리를 흔들며 몰풍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랑패가 있을가보아 한 소리지 풍랑이 무섭다는 뜻은 아니요.》

박위는 더이상 자안과 가타부타할 정신적경황이 없었다.

둘러선 장수들을 빠르게 살펴보고난 박위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제공, 천하에 제일로 간흉한 왜구를 소멸하기 위해 정의의 검을 들고 나선 우리가 이쯤한 풍랑에 기가 질려 배를 돌린다면 현세의 사람들과 래세의 후손들이 고려장수들을 두고 뭐라고 하겠소.

다들 아실테지만 사람의 몸은 오늘에 살고있지만 사람의 얼굴은 오늘과 래일앞에 다같이 떳떳하고 자랑스러워야 하오.

본관이 풍랑을 극복할 한가지 방법을 생각해보았는데… 어떤고 하니 매 전함들을 바줄로 묶어서 하나로 쭉 잇자는거요. 그러면 배가 홀로 뒤집히는 일도 없을게고 전함마다 풍랑의 힘도 덜 받게 될거란 말이요.》

《그것 참 명안이요.》

《당장 시행해봅시다그려.》

최칠석과 김종연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선참으로 호응해나섰다.

박위는 지체없이 령을 내리였다.

령을 받은 장수들은 저마끔 소리를 지르고 기발을 휘둘러 주위에서 떠도는 자기의 배를 가까이 오게 했다.

배가 다가오자 훌쩍훌쩍 뛰여서 넘어가거나 바줄을 타고 미끄러져 넘어갔다.

제일 나중에야 박위의 지휘선을 떠나려던 칠석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다.

《새삼스러운 말 같소만 해암은 진정 우리 장수들의 거울이요 아니, 살아있는 기념비라고 해야 옳을게요.》

박위는 쑥스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했으나 웃음의 소리로 응대했다.

《헛허허, 백운은 이런 마당에서까지 시조를 지어 읊는게요?

그대의 그 말은 나의 인생목표이지 나자체는 아니요.

자, 그런 말은 후날에 하기로 하고 어서 제 배에 넘어가 그대의 우군을 잘 통솔해주오.》

칠석은 박위의 손을 힘껏 잡아 흔들고나서 끼우뚱거리며 다가온 자기의 전함으로 훌쩍 몸을 날리였다.

미구하여 사방사처에서 장수들의 청청한 웨침소리가 으스산한 파도소리를 짓누르며 울려퍼지였다.

《바줄을 썩썩 당겨라!》

《그쪽에서 바줄을 걸었거든 어서 이쪽으로 넘겨라!》

《굼벵이 천장하느냐, 빨리 배를 이쪽으로 바싹 붙여라!》…

얼마후 백여척의 전함은 모두 바줄과 바줄로 이어지였다.

방향없이 오가던 배들은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면서 일매지게 진격방향으로 미끄러져나갔다.

전함들마다에서 기세가 오른 군사들이 왁작 떠들어댔다.

《돛대를 조금 틀어라!》

《노를 좀 더 세게 저어라.》

《나가자!》, 《나간다.》…

고함소리, 웨침소리는 바람소리, 파도소리를 짓누르며 기세차게 울리였다.

군사들의 사기가 고조된탓인지 풍랑은 아까보다 훨씬 숙어든듯싶었다.

홈빡 젖은 몸으로 선수에 나서서 진격하는 전함들을 살펴보던 박위는 자그마한 입술을 곱게 피우며 고개방아를 찧었다.

(정녕 배짱이 있고 기개가 있는 장수라면 할수 없다는 말을 가장 큰 적으로 여겨야 한다.

우리의 검이 제일먼저 찔러눕혀야 할 적은 바로 그 〈할수 없다.〉는 말이다!)

뜻밖에 다닥친 돗굉이바람으로 하여 일시 소요스러웠던 원정의 첫장은 성과적으로 열리였다.

고려의 전함들은 아직도 거방진 몸통을 흉물스럽게 뒤트는 사나운 파도를 헤가르며 흐뭇하게 달음쳐나갔다.

15

15

 

짙은 안개속에 웅크리고있는 대마도는 꼭 옛말에 나오는 커다란 뱀이 서리서리 똬리를 틀고 누워있는것처럼 으스산하게 보이였다.

푸르스름한 안개는 차츰 섬을 둘러싼 벼랑들과 성곽들, 그뒤로 연연 겹놓인 구릉들을 벗어나 서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섬의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생각탓인지 비릿한 해감내와 함께 피비린내 같은것이 들쩍지근하게 풍겨왔다.

어디선가 맹수의 체취같은것이 시큼시큼하게 날아오는것 같기도 했다.

고려의 전함들은 이미 약속한대로 열척 혹은 스무척씩 패를 나누어 조용히 흩어지였다.

섬을 동서남북으로 에워싸고 일격에 해변의 군사시설들과 성곽을 분쇄한 다음 지체없이 대마도의 중심부인 기미쯔시미와 이즈하라로 돌입할 계획이였다.

좌군을 맡은 김종연과 우군을 맡은 최칠석이 각각 20척의 전함을 이끌고 좌우로 갈라져나간 뒤 박자안과 윤통, 최단이 각기 10여척의 전함을 달고 때맞춤하게 바다쪽으로 밀려나오는 안개발속으로 스며들었다.

김종연은 동쪽을 치고 최칠석은 서쪽을 깨치며 최단은 북쪽을 공격하고 윤통과 박자안은 가미섬(웃섬)과 시모섬(아래섬)을 견제해야 했다.

전군을 총찰하면서 중군을 통솔하기로 한 박위는 나머지배를 이끌고 섬의 남쪽어구인 동시에 섬의 중심부를 통하는 관문인 쯔시요리(두지포)를 돌파해야 했다.

고려의 전함들은 섬을 에워싸고 소리없이 전진하여 대안바투까지 접근했으나 섬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바다우에 아직도 짙은 안개가 깔려있어 진공하는 고려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저들의 소굴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굳게 믿고 마음을 푹 놓고있는지?!…

애초에 박위는 대마도앞바다에서 치렬한 싸움을 한차례 벌린 뒤에야 섬에 상륙할수 있으리라 타산했었다.

헌데 왜구들은 고려의 전함들이 하나둘 닻을 내리는 지금까지도 사뭇 기척이 없었다.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촌시도 머밋거릴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팽배한 전투의욕을 안고 전함들의 움직임과 섬의 지형을 엇갈아 갈마보던 박위는 눈이 시도록 빛나는 장검을 번쩍 추켜들었다.

목이 터지게 웨치였다.

《군사들, 싸움의 승패는 불의의 타격과 높은 진공속도에 달려있다. 먼저 화포를 터쳐라!》

박위의 령이 내리기 바쁘게 박위가 탄 천료주에서 제일먼저 요란한 포성이 터지였다.

《꽝!》

시뻘겋게 익은 박통같은 포알이 위잉― 무자비한 죽음의 노래를 읊조리며 창공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우에 두개의 해가 매달리였다.

그중에서 어느것 하나가 급기야 적진을 향해 곤두박히였다.

때를 같이하여 수십척의 전함들에서 화포들이 흠칫흠칫 몸을 떨며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꽝! 꽝! 꽝!…

화전, 철령전, 피경전, 철탄자, 류화, 주화(각종 포탄들과 불화살들)가 천지를 진감하는 굉음을 터치며 기수없이 날아갔다.

좌군과 우군도 성과적으로 공격위치에 진입하여 포격을 개시한듯 동서량면에서도 요란한 포성이 북치듯 울려왔다.

해변은 금시 하늘땅이 터져나가는듯 한 포성과 버섯모양의 연기덩이들, 치솟아오르는 불길로 뒤덮이였다.

저 멀리 대마도의 중심지역도 불길과 연기에 휘감기여 어디가 어딘지 거의나 가려볼수 없었다.

허나 박위는 이미 마음속으로 열번도 더 확인해본 중심지대의 지형을 다시금 머리속에 그려보며 두번째 령을 내리였다.

《중군은 모두 나를 따르라!》

박위는 서슬푸른 장검을 비껴들고 선참으로 배에서 뛰여내리였다.

박위의 뒤를 따라 화살과 창, 검과 철퇴를 틀어잡은 원정군사들이 사태처럼 쏟아져내리였다.

와― 우렁찬 함성을 울리며 파괴된 성곽과 우죽삐죽한 바위를 타고넘은 중군은 섬의 중심부를 향해 성난 파도마냥 달리였다.

좌우군도 공격을 개시한듯 이쪽저쪽에서 고려군대의 기세찬 함성이 왁자하게 들려왔다.

박위를 선두로 한 중군이 시가지어구인 오덴야근방에 이르자 그제서야 급급히 편성된 왜구의 방어군이 바퀴떼처럼 무질서하게 밀려나왔다.

싸늘한 랭소를 머금고 놈들을 노려보던 박위는 뒤따르는 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였다. 가쁜 숨을 헐썩거리며 힘차게 웨치였다.

《군사들은 내 말을 들으라!

고려국의 존엄을 걸고 정의로운 징벌의 전장에 나선 우리의 용맹을 당할자 세상에 없다.

모두다 죽기를 두려워 말고 지금껏 우리 백성들이 흘린 피로 벼려온 정의의 검을 유감없이 휘날리라!

오늘로써 백여년의 원한을 풀고 고려군의 무적필승의 기상을 만천하에 떨치라!》

박위의 열띤 호소에 목갈린 함성으로 호응한 군사들은 다시금 맹렬한 기세로 박위의 뒤를 따라 왜구의 무리속으로 뛰여들었다.

그렇게도 바라던 대마도에서의 격전은 드디여 시작되였다.

박위는 왜구들이 나타날 때마다 장검을 틀어잡은 손에 전신의 용솟는 힘을 그러모아 내리긋고 올리찌르고 앞으로 내찔렀다.

놈들은 다가서는 족족 피범벅이가 되여 자반뒤집기를 하였다.

박위의 곁에 바싹 붙어선 오천은 어딘가 잔인해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드세게 칼질을 해대는데 왜구가 나동그라질 때마다 영낙없이 한마디씩 씹어뱉았다.

《고려군사의 칼맛이 짭짤할테지?》

《이건 우리 부모님의 피값이다!》

《오냐, 장인장모의 원한까지 풀자면 아직 멀었으니…》

두터운 입술을 푸들푸들 떨며 오천의 뒤를 따르는 고들이도 실한 몸을 잽싸게 날리며 칼을 휘두르는데 피바래가 일 때마다 그 역시 오천의 흉내라도 내듯 씨벌거리였다.

《이놈, 죽촌 〈두부자루〉의 칼솜씨가 어떠냐?》

《이놈아! 우리 색시의 피가 물인줄 알았더냐?》

고들이와 나란히 달리는 《만사태평》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왝왝 내지르며 갈범마냥 펄펄 날고뛰였다.

박위의 뒤를 따르는 여삼이와 현중이도 연해 《받아라!》, 《먹어라》하고 소리를 지르며 살을 날리고 돌을 던지였다.

알몸뚱이에 칼 하나 잡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다가 창끝에 찔려 나번져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웃옷의 한쪽소매만을 걸친채 마구 칼을 휘두르다가 상판에 화살을 맞고 뒤번져지는 놈도 있었다.

개중에는 독한 놈도 있어 화살에 멱을 찔려가지고도 칼을 지팽이처럼 짚고 비척비척 걸어나오다가 《도쯔께끼》를 부르며 모재비로 꺼꾸러지는 놈도 있었다.

드디여 왜구의 방어군은 누데기모양으로 여기저기 터지고 찢어지여 주춤주춤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연록색의 햇이파리가 무수히 내돋은 노린재나무와 쪽동백나무들이 듬성듬성 널려있는 행길어구에는 탕친 고기뭉치처럼 된 왜구들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깔리였다.

고려군사들은 성난 맹수들처럼 계속 다기차게 활을 날리고 검을 휘두르며 섬의 중심부를 향해 진격했다.

중군의 맹렬한 공격에 거적때기 밀리듯 맥없이 뒤로 밀리던 왜구들은 마침내 상투꼭지를 뒤로 제끼고 줄행랑을 놓았다.

도망치는 왜구들을 쫓아 내달리던 박위는 갑자기 달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몰이군이 메돼지무리 튀기듯 무작정 왜구들을 밀고나간다면 놈들은 필경 장거리를 돌아 관사아래쪽으로 내뺄것이였다.

중군은 시가지중심으로 돌입하고있고 좌우군은 관사의 량익측을 압박하고있는 이때 관사아래쪽은 거의 개방된 상태에 있었다.

예까지 왔다가 한놈의 왜구라도 놓쳐버린다면 그것은 완벽한 승리라고 말할수 없었다.

왜구들에게 아니, 온 세상에 고려군대가 어떤 군대이며 고려국의 존엄과 기상이 어떤것인가를 유감없이 과시하자면 단 한놈의 왜구도 구릉지대의 숲으로 스며들게 해서는 안되였다.

박위는 현중을 소리쳐 불렀다.

《현중아, 너 얼른 우군에 뛰여가서 관사의 지붕에 불화살을 쏘아박으라고 일러라.

관사에 불이 나면 왜구들의 기세는 더욱 쭈그러들게다.》

현중은 한창 독을 품고 왜구들을 쏘아잡는 재미에 자리를 뜨기 싫었으나 군말없이 우군이 있는 쪽으로 뛰여갔다.

박위는 재차 여삼을 찾았다.

《너는 좌군으로 가서 전라도원수께 내 령을 전해라.

군사를 두쪽으로 나누되 한패는 계속 관사의 옆구리를 조이고 다른 한패는 관사아래쪽 길을 막으라고 해라.

그렇게 되면 왜구는 필시 날개부러진 까마귀 채롱속에 든 격이 되리다.》

멍구럭을 걸메고 무작정 뛰여가려던 여삼은 다시 박위쪽으로 돌아서더니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근심의 빛을 가득 떠올리였다.

《소인이 자리를 뜨면 장군의 신변은 누가 시위하리까?》

《이놈! 무슨 군말이냐? 어서 가지 못할고―》

미치미치하는 여삼을 쫓아보내듯 떠밀어보낸 박위는 중군의 기본집체를 이끌고 시가지중심으로 돌입했다.

쑤셔놓은 벌둥지마냥 수라장이 된 왜구들의 병영 하나를 순간에 해일처럼 휩쓸어버린 박위는 얼마후 관사의 청기와지붕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드넓은 대통로에 들어섰다.

용기백배하여 관사의 량익을 각일각 조이는 좌우군군사들의 장한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관사의 아래쪽에서는 어느결에 벌써 왜구의 퇴로를 차단한 김종연의 군사들이 밀려내려오는 놈들을 세괃게 올리밀고있었다.

관사의 지붕우에서는 두리기둥같은 불길이 널름널름 하늘을 핥고있는데 화광이 얼른거리는 대문 앞마당에서는 왜구들이 오뉴월 개천에 자가사리끓듯 오글복작거리고있었다.

왜구들은 벌써 싸움판에 나선 군대가 아니라 사냥군들의 포위에 빠진 굶주린 늑대무리나 다를바 없었다.

싸움은 벌써 다 이겨놓은 싸움이였다.

박위는 벌써부터 몰밀려드는 전승의 환희로 하여 숨이 가빠났다.

그는 더러운 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붉은 장검을 높이 추켜들었다.

필경 이번 원정에서 마지막군령으로 될 령을 내리였다.

《중군은 관사정면으로 돌입하라!》

중군의 집체는 한달음에 행길을 건너 대문 앞마당으로 쏟아져내리였다.

박위는 중군만이 아니라 원정군전체의 마지막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행길가에 시체처럼 자빠져있는 돌탑우에 우뚝 올라섰다.

중군의 군사들이 모두 앞마당으로 달려나간 까닭에 박위의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데 불현듯 등뒤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같은것이 울려왔다.

《박위는 내 칼을 받으라!》

박위는 관습적으로 날래게 칼을 비껴올리며 홱 몸을 돌리였다.

체구가 청바위처럼 단단해보이는 어떤 왜구가 소대가리같은 상판을 꼿꼿이 쳐들고 자신만만하게 다가오는데 놈의 심술궂게 생긴 눈에서는 퍼런 불덩이가 이글거리고있었다.

어디선가 마주쳤던 놈 같았으나 얼추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 왜국에 내 얼굴을 아는 놈이 있다?!

헌데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자기의 칼을 받으라고?!…

이놈이 미쳐도 이만저만 미친놈이 아니로다.

모두들 죽을기를 쓰고 도망질을 하는 판인데 언감 내 이름까지 부르며 싸움을 걸어?!…)

박위는 돌탑우에서 훌쩍 뛰여내리였다.

칼을 추켜든채 침착하게 마주 걸어나가며 위엄있게 웨치였다.

《너는 대체 어떤 놈이기에 하늘 높은줄 모르고 함부로 기광을 부리는거냐?》

괴한은 누런 이발을 사려문채 칼잡은 손을 부르르 떨며 개승냥이처럼 울부짖었다.

《나는 대마도의 령주 사다께다. 우리는 오늘 운이 기울어 패했으나 나는 너와 단병접전을 하여 네놈의 목대를 분질러버릴테다.

나 개인의 승리를 하겠단 말이다. 내 칼이 무섭지 않거든 이리 썩나서라!》

박위의 심장은 가볍게 골풀이쳤다.

이놈이 바로 사다께로구나.

10여년전 황산강에서 마주섰던 원쑤, 우리 백성들을 수없이 살해하고 우리 나라에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운 살인귀…

하기에 내 이놈과 마주서기를 꿈결에도 원하지 않았던가.

헌데 이놈은 제쪽에서 먼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마구 날뛰지 않는가?!

박위는 랭소가 어린 입술을 느리게 터치였다.

《오냐, 네가 바로 해적떼의 대두령 사다께로구나.

같잖게 노는 꼴을 보고 벌써 그런 짐작을 했었다.

내 이미 편지로 알렸지만 나 역시 네놈과 판가리싸움을 하는것이 소원이였다.

하거늘 내 어찌 네놈의 칼을 피하겠느냐. 네놈이야말로 내앞에 썩 나서거라!》

박위는 사다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사다께도 자못 용기있게 박위앞으로 다가들었다.

…사실 사다께는 퍽 오래전부터 박위가 대마도공격을 준비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고려국력과 형세로 보아 고려군의 한 지방부대가 완전히 요새화된 대마도를 친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설사 박위가 쳐들어온다 해도 자신을 희세의 모사로, 용장으로 과신하고있는 사다께는 일거에 고려군을 불개미떼처럼 쓸어내칠 자신이 있었다.

헌데 이 아침 상상밖으로 강력한 타격력을 앞세운 정예한 고려군이 사태처럼 밀려들었다.

북치듯 울리는 화포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여난 사다께는 처음 한동안 코웃음을 킁킁 쳐가며 여유작작하게 방어군을 편성하여 보내고는 파발군들을 이리저리 띄워 각방면의 전투를 지휘하였다.

고려군의 첫 타격에 해변가의 견고한 방어시설과 적지 않은 병력, 수많은 전투기재들이 파괴되고 소멸되였다.

왜구들은 그전날 강도배의 용기같은것은 어느 구석으로 날려보냈는지 얼혼이 빠지여 갈팡질팡했다.

방어군의 선두에 서서 가장 치렬한 전방인 오덴야근방에 나갔던 지또는 어째보지도 못하고 허깨비처럼 나떨어지였다.

방어군은 떠밀어보내는 족족 화토불에 가져다댄 연덩이처럼 물렁물렁 녹아버리였다.

고려군의 물샐틈없는 포위환은 각일각 조여들었다.

고려의 경상땅을 거의나 제 주머니에 따서 넣은듯이 생각했던 사다께, 박위의 원정군같은것은 눈가루처럼 가볍게 날려버릴수 있다고 타산했던 사다께는 그제서야 자기가 오산을 하고 착각을 해도 얼마나 엄청나게 했는가를 통감하였다.

이제 박위가 관사에 뛰여드는 순간이면 모든것이 끝장이였다.

오늘의 막강한 권세와 부귀도, 막부의 높은 자리를 획득할 래일의 거창한 꿈도 다시는 이룰수 없을것이였다.

허나 사다께는 닥쳐온 자기 인생의 파멸이 강도배의 응당한 말로로 생각되기는커녕 하늘의 온당치 못한 처사로 여겨지였다.

분하고 억울했다.

하늘이라도 찢어발기고싶도록 악이 치받쳐올랐다.

대마도는 비록 망해도 자기만은 세상과 력사앞에 용맹한 사나이로, 승리한 《천자》의 아들로 알려져야 한다는 비장한 최후의 결심이 돌덩이처럼 굳어지였다.

사다께는 훌렁 뒤번져진 입술밑으로 으득으득 이를 갈았다.

《소라도부 도리 아도오 개가라와즈.》(하늘을 나는 새는 자기의 보금자리를 더럽히지 않는다는 뜻)

이어 사다께는 그 어떤 타산이나 감정에 끌려서가 아니라 순수 관습의 힘에 떠밀리워 니찌렌상이 걸려있는 방으로 뛰여들었다.

니찌렌상앞에 지그시 눈을 감고 최후의 명상에 잠기였다.

(아아, 니찌렌도노!

얻는것은 세월의 힘이요 잃는것은 천도의 순서이니 내 이제 와서 과연 무엇을, 누구를 원망하리까.

나의 대마도는 비록 가혹한 운명의 희롱에 말려들어 멸망의 위기에 처했으나 이 사다께는 혼자서라도 력사앞에 희세의 남아로 찍혀지고싶사오니 부디 소원을 이루게 해주소서…)

벙긋이 눈을 뜬 사다께는 홀린듯이 니찌렌을 쳐다보았다.

니찌렌은 대마도와 대마도의 령주가 파멸의 위기, 림종의 시각에 처했건만 오늘도 변함없이 련꽃단우에 단정히 올라앉아 이상야릇한 미소를 피우고있었다.

사다께의 흉중에서 부지불식간 그 어떤 강렬한 반발감과 거부반응이 불길처럼 치밀어올랐다.

전지전능하기는커녕 우직하고 매정한 이 돌덩이가 지금껏 자기에게 손톱눈만 한 리득도 가져다준적 없다는 엄연한 현실감이 떠오르자 이번에는 무분별한 복수의식이 발작적으로 북받쳐올랐다.

《퉤!》

사다께는 일생 그렇게도 깊이 숭상해온 니찌렌의 거룩한 상판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았다.

가차없는 발길질로 그 신성한 돌덩이를 힘껏 떠밀어넘기였다.

해괴한 요설과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인간들을 기만하고 세상을 희롱하던 니찌렌은 자기의 독실한 적자의 발길질에 걸리여 볼꼴없이 나자빠지였다.

사다께는 야릇한 환희를 느끼며 니찌렌의 몸뚱이를 타고넘어 밖으로 나갔다.

대마도는 불길과 매연에 뒤덮여있었다. 어디 가나 시체와 재무지가 밟히였다. 불달린 들쥐마냥 방향없이 마구 헤바라다니던 사다께는 마침내 나자빠진 돌탑우에 서있는 낯익은 고려장수를 찾아내였다.

그는 지체없이 대마도의 최고통치자 《천자》의 적자의 명예를 걸고 박위에게 《력사적인》 단병접전을 요청했다.…

박위의 칼과 사다께의 검은 연해 바람가르는 소리를 홱홱 일으키며 세차게 맞부딪치고 힘차게 엇갈리였다.

쨍쨍… 날카로운 금속음이 주위의 소란스러운 대기를 아츠럽게 들찢었다.

퍼렇게 불타는 두쌍의 눈은 허공을 태우며 무섭게 엇갈리였다.

만만치 않은 용력과 칼재주를 가진 뛰여난 두 검객은 연방 악악 고함을 터치며 성난 표범처럼 날고뛰였다.

사다께의 근력과 검술은 그가 일쑤 내놓고 흰목을 뽑을만큼 절등한것은 사실이나 박위와 겨룰만 한 수는 못되였다. 게다가 사다께는 전면적인 패망을 눈앞에 둔 죄많은 도적두령이라 맹수의 단말마적인 발악같은것은 있어도 승리에 대한 신심이나 자긍심같은것은 꼬물만큼도 있을리 없었다.

원쑤에 대한 치솟는 분노와 증오, 정의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안고 자신만만하게 공세를 취하던 박위는 어느 한순간 사다께가 병든 닭새끼처럼 비치닥거리자 때를 놓칠세라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서슬푸른 장검으로 사다께의 굵은 목덜미를 힘껏 내리찍었다.

허연 비게살이 훌렁 뒤번져지며 검붉은 피가 덩어리처럼 왈칵 쏟아져나왔다.

사다께는 밑둥잘린 통나무처럼 위태롭게 기우뚱거리더니 행길가의 파란 풀밭우에 모재비로 나가떨어지였다.

불맞은 송충이마냥 두어바퀴 나딩굴던 사다께는 차츰 사지를 뻣뻣하게 내뻗치였다. 박위는 먼지와 피로 얼룩진 커다란 갖신으로 사다께의 가슴팍을 힘껏 지르밟았다.

각일각 흐려지는 사다께의 뿌잇한 동공을 내려다보며 힘진 어조로 부르짖었다.

《네 이놈, 다시한번 지껄여봐라.

네놈은 우리 고려사람들에게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불행을 들씌웠을뿐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 군대를 모독하는 망발을 수없이 늘어놓았다.

또한 〈해뜨는 나라의 천자〉요, 〈력발산 기개세〉요 하면서 흰소리, 개소리를 수없이 뇌까렸다.

우리는 네놈의 모든 죄행을 어느것 하나도 용서할수 없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고려국의 존엄을 유린하고 모독한 죄는 특히 용서할수 없다.

죽으면서라도 똑똑히 알아둬라.

앞으로도 이 세상에 고려국의 존엄을 조금이라도 해치는 놈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하늘땅 끝에라도 찾아가 철저히 무자비하게 소탕할것이다!》

박위는 사다께의 두터운 가슴팍에 기운껏 칼을 들이박았다.

악! 항아리가 터져나가는듯 한 비명과 함께 검붉은 피줄기가 한길이나 솟구쳐올랐다.

박위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관사쪽으로 힝힝 걸어나갔다.

행길가에 어우러진 각색 이채로운 나무들이 박위의 래림을 환영하듯 손에 손을 맞잡고 가볍게 설레이였다.

흰 꽃송이들이 구름처럼 피여난 백당나무, 황록색꽃송이들이 주렁진 딱총나무, 이제 겨우 남자색, 붉은색꽃망울들이 쌀알처럼 다닥다닥 맺혀있는 순비기나무, 누리장나무, 작살나무들이 이 시각을 위해 고이 아껴두었던 독특한 꽃향기를 진하게 내뿜고있었다.

이곳의 자연도 결코 불결한것이 아니였다.

자연은 언제한번 인간을 괴롭힌적 없건만 이곳의 악당들이 그리도 악명을 떨쳤기에 대마도는 자연과 지명마저 세인의 저주와 규탄을 받아온것이였다.

하고보면 고려의 원정군은 포악무도한 강도배들을 징벌한 정의롭고 용감한 군대인 동시에 이 땅의 자연에도 순수한 아름다움을 되찾아준 고결하고 성스러운 미의 건설자들이였다.

승리의 기쁨과 환희로 하여 술이라도 마신것처럼 얼굴이 벌개진 김종연과 최칠석을 비롯한 장수들이 반달음을 놓고 다가오고있었다.

그뒤로 오천이와 여삼이, 현중이와 고들이… 알고 모르는 수백수천의 고려군사들이 목청껏 환성을 올리며 강물처럼 밀려오고있었다.

16

16

 

력사에 길이 빛날 민족사적인 대공을 세운 고려의 군사들은 대첩의 기쁨으로 가슴들먹이며 고국으로 돌아오고있었다.

하늘도 기쁨에 물젖어 떨기떨기 꽃구름을 피워올리고 바다도 기쁨에 둥 떠올라 소복소복 잔파도를 말아올리였다.

장수들과 함께 지휘선의 갑판에 나와 류량한 군악을 울리며 회군하는 고려함대의 장쾌한 모습을 둘러보던 최칠석은 솟구쳐오르는 격정을 억제하기 어려운듯 벌겋게 짓물린 눈을 슴벅이며 시 한수를 뽑아올리였다.

 

기발은 어이 저리 빛나게 나붓기고

군악소리 어이 저리 우렁찬고냐

외방의 왜구를 산산이 쳐부시니

고려군의 높은 기개 장하기도 하여라

2월의 봄바람은 옥촉처럼 고른데

천하가 다투어 우리 군대 칭송하리

 

칠석이가 시읊기를 마치자 장수들은 너나없이 그의 시재를 과분할 정도로 치사하고나서 또다시 승리의 기쁨을 들썩하게 나누었다.

《오늘의 승리는 실로 크게 자랑할만 한 일이요.》

《백세의 수치를 씻고 만세에 존엄을 떨쳤으니 이 아니 통쾌하리오.》

《박장군의 담대한 기상과 신묘한 지략이 오늘의 대성을 낳았소그려.》

사사건건 개경량반의 재세를 쓰고싶어 몸달아하던 박자안까지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빠질세라 께끼였다.

《옛말에 얌전하게 생긴 선비가 귀신을 쫓는다더니 정말 미모의 박장군께서 이렇듯 큰 승리를 빚어놓을줄은 몰랐소그려.》

이어 장수들의 시선은 박위쪽으로 돌아갔다.

배머리에 홀로 뒤짐을 지고나선 박위는 장수들이 주고받는 말마디를 전혀 가려듣지 못한채 하염없이 고려의 하늘가를 바라보고있었다.

그의 눈길은 저 멀리 고국의 푸른 하늘가에 박혀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잊지 못할 지난 나날들, 잊지 못할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어보고있었다.

재가루가 펄펄 날리던 그 아침의 죽촌풍경이 떠오르는가 하면 바로 그날 어떤 일이 있어도 왜구의 소굴을 들부셔야 한다고 주장하던 오천의 모습이 안겨왔다.

달밝은 그밤 염초감대기를 메고 지고 바다가로 흘러가던 염초장사람들의 행렬이 다가오는가 하면 혼자 칼쓰기련습을 하던 고들이, 노상 바다가에 붙박여살던 옥보와 구서방, 여삼이와 《만사태평》의 얼굴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은하수 비끼였던 그밤 저대를 장검처럼 비껴잡고 동네의 군사일을 지휘하던 죽촌의 행수로인과 그의 지휘를 물고 열심히 뛰여다니던 백동이 엄마를 위시한 죽촌사람들의 모습도 얼찐얼찐 다가왔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으나 왜구의 소굴을 뛰쳐나오던 리옥의 도담하고 슬기로운 모습도 방불하게 그려지였다.

최칠석과 김종연, 윤통과 최단, 최무선과 이미 작고한 리일경의 얼굴도 언뜰언뜰 비껴들었다.

원정의 승리로 하여 한껏 부풀어오른 박위의 가슴은 더더욱 세차게 끓어번지였다.

(내가 대마도원정을 결심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얼마간의 나날이 흘렀는가.

넉넉잡아도 열달은 넘지 않으리다.

한 인간의 일생에서 열달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 나날에 한생을 두고도 체험하지 못할 인생고초를 다겪었고 평생을 두고도 깨치기 어려운 세상사의 새 리치를 분명히 감득하지 않았는가?!

하고보면 이번 대마도원정은 우리 고려군대가 민족의 존엄을 얼마나 귀중히 여기는가를 소리높이 과시한 력사적인 군사원정인 동시에 인생의 새로운 리치를 심장으로 깨달은 뜻깊은 인생원정이로다.)

박위는 채수염이 훨훨 날리는 동그스름한 턱을 자랑스럽게 들어올리였다.

하얀 비단옷을 일매지게 차려입은 갈매기들이 한껏 부푼 돛폭을 감돌며 그리 곱지는 못하나 더없이 열광적인 소리로 단조로운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박위에게는 무심한 바다새들조차 원정대를 마중나온 고국의 친근한 사절마냥 정답게 안겨왔다.

박위는 허리춤에서 건둥거리는 묵직한 칼자루를 으스러지게 틀어잡으며 내심깊이로 부르짖었다.

(그렇다. 세상사의 리치, 인생사의 철리는 더할나위없이 명백하다.

군사의 심장이 사랑과 증오로 열렬히 불탈 때 그가 잡은 검은 순간의 동요나 좌절도 없이 활활 불타오르거니.

검이 불타면 인생길에 시련은 있을지라도 실패는 있을수 없다.

검이여, 불타라!

애국에 차넘치고 슬기와 용맹으로 충만된 백성들의 심장과 함께…

그러면 승리는 언제나 확정적이다!)

갑판에 나와있던 군사들이 불시에 와― 환성을 터치였다.

《고국이 보인다!》

《우리 군영이 보인다!》

군사들은 소리소리 지르며 손을 흔들고 발을 굴렀다.

떠나온지 이제 겨우 열흘정도밖에 되지 않건만 민족의 존엄과 영예를 떨치고 돌아오는 길이여서 고국은 그리도 눈물겹게 반가운것이리라.

박위는 들레이는 가슴을 안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아닌게아니라 고국의 모습, 군영앞동네의 모양이 한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안겨왔다.

동구밖에 의좋은 형제마냥 쌍으로 솟아올라 꼭 성문처럼 보이는 두그루의 소소리높은 향오동나무.

아지랑이 가물가물 피여오르는 황산강가의 드넓은 벌판.

그 벌판의 여기저기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거나 태평스레 배를 붙이고 엎드리여 느릿느릿 새김질을 하는 누렁소들…

자세히 여겨보면 싸움터에 나간 지아비와 아들을 기다리며 서성거리는 녀인들의 희맑은 얼굴도 보일것 같았다.

들국화처럼 청초하고 그윽한 리옥이 아니, 단검처럼 단호하고 용감한 리옥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젖살이 포동포동 오른 아기를 껴안은 얌전이의 모습 그리고 회군하는 즉시 성례를 치르기로 한 취금이의 얼굴도…

박위는 사품쳐오르는 그리움의 열물로 하여 가슴의 벽이 데는것 같았다.

그는 숫제 눈을 꾹 감아버리였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내 나라 고려인가.

아사달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리우며 단군이래 수천년의 자랑스러운 력사를 새겨온 우리 민족.

선조의 뼈가 묻혀있고 귀중한 사람들이 살고있으며 래일의 희한한 꿈이 꽃펴나는 삶의 요람…

과연 어느 오랑캐가 우리 고려를 한발자국이라도 범할수 있으며 어느 왜적이 언감 우리 민족을 순간이나마 턱아래로 굽어볼수 있단 말이냐.

이 땅에 뜻높은 무관들과 백성들이 있고 서슬푸른 장검이 있는 한우리 고려는 영원히 철의 수호속에 민족의 존엄과 기개를 온 세상에 떨쳐가리라.…

승리자의 기쁨과 자랑, 고려군사의 영예와 긍지를 가득 실은 전함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승벽내기를 하며 기운차게 썩썩 달리고있었다.

고려의 푸른 바다는 살찐 가슴을 들먹이며 승리하고 돌아오는 민족의 장한 아들들을 고국으로, 고국으로 힘차게 떠밀어주고있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