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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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단고을을 지나 취적교를 건는 박위와 여삼은 개경의 동대문인 숭인문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등성이로 군마를 쳐몰았다.

군마들은 융단같은 잔디가 고루 깔려있는 등성이마루에 오르자 투투 투레질을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말안장에서 뛰여내린 박위는 등성이앞코숭이쪽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파란 풀밭에 다문다문 박혀있는 노란색, 빨간색의 이름모를 들꽃들이 오랜만에 개경으로 올라온 박위에게 미쁜 웃음을 지어보이고있었다.

하나같이 시누런 비단조끼를 차려입은탓에 조금 건방져보이는 산벌들은 윙윙 이쪽으로 다가오며 엷고 투명한 나래로 단조롭기는 하나 더없이 열정적인 군악을 울리여 박위의 상경을 환영했다.

개경은 실로 정다운 고장, 한창나이때의 잊지 못할 추억이 어려있는 소중한 곳이였다.

까닭없이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박위는 송피를 벗겨낸 자리가 버짐자리처럼 듬성듬성 널려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밑에 이르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도 눈에 익은 송악산의 자태가 가슴을 지지며 안겨왔다.

아름다운 녀인이 조금 부른 배를 솟구고 단정하게 누워있는것처럼 보이는 송악산줄기의 모습, 그래서 재미나는 사랑의 전설도 많고 사랑의 노래도 수없이 엮어낸 개경의 자랑 송악산이였다.

허나 송악산이 그토록 자랑스러운것은 사랑의 전설과 노래가 많은탓만이 아니였다. 뭐니뭐니해도 송악산이 자랑스러운것은 거창한 봉이와 줄기마다 이 나라 백성들의 애국의 넋이 진하게 슴배여있기때문이였다.

감개에 젖은 박위의 시선은 벌써 송악산마루에서 시작되여 동서로 길게 뻗어내린 개경의 라성(고구려와 고려시기 일부 성곽들은 외성과 내성으로 쌓아 2중으로 방비를 강화하였는데 그런 경우 외성을 라성이라 하고 내성을 견성이라 하였다.)을 더듬고있었다.

개경의 라성은 지금으로부터 4백여년전 고려의 애국명장 강감찬이 수도방위를 목적으로 무려 30만의 군민을 동원하여 쌓은 장성이였다.

성돌마다에는 검푸른 이끼가 두텁게 덮이고 돌틈마다 살구나무, 메대추나무, 쑥덤불 같은것이 박혀있는 고색이 창연한 라성.

하지만 여겨볼수록 라성의 곳곳에서는 그 시절 애국명장과 수십만 군민의 애국열정이 후덥게 끼쳐나오는듯싶었다.

오, 정녕 금덩이와도 바꿀수 없는 하나하나의 성돌들에는 얼마나 뜨거운 애국의 피와 땀이 어려있는것인가.

그것은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 해도 사라지지도 마르지도 않을것이며 이 나라 력사와 더불어 길이 전해지리라.…

《그러니까 저 성이 바로 강감찬장군께서 쌓으셨다는 그 유명한 라성이오니까?》

개경걸음이 난생처음인 여삼은 발에 닫고 눈에 띄우는 모든것이 희한하여 사위를 두릿거리며 제 혼자 시시벌거리던 끝에 종시 박위의 사색을 깨쳐놓았다.

박위는 여전히 라성쪽을 바라보며 조금 눌린듯 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저 성이 바로 강장군과 그 시절 군민의 애국의 혼령이 스며있는 라성이다. 군사를 최대의 국사로 여기고 몸과 마음을 깡그리 군사일에 몰바친 강장군은 고려국의 첫째가는 명장이였다.》

말을 마친 박위는 다시 혼자생각에 휘감기였다.

소나무들의 우듬지에서는 바람을 안은 솔가지들이 솨솨 파도소리같은것을 내며 설레이고있었다.

그 소리는 박위의 사색을 해치기는커녕 더욱더 깊은 세계로 떠밀어갔다.

(강장군의 애국의 넋과 그 시절 군민의 애국지심은 지금도 저 송악산은 물론 이 나라 하늘땅 그 어디나 뜨겁게 배회하고있는데 나를 위시한 현세의 장수들은 과연 그네들의 혼령앞에서 떳떳이 머리를 들고 자기의 애국심에 대해 말할수 있는가?…

왜구들은 장장 백수십년세월 도적고양이 반찬광나들듯 우리 땅을 나들며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루 다 말할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들씌우고있는데…

지어 개경의 관문이라고 해야 할 승천부의 개태사에 달려들어 태조대왕의 화상까지 훔쳐가는 특대형의 만행도 서슴지 않고있는데…

고려의 국난, 민족의 수난을 막지 못하고있는 우리 장수들이 어떻게 선조들의 영령앞에, 오늘의 백성들앞에 그리고 래일의 후손들에게 떳떳할수 있겠는가?…)

얼마후 박위는 여삼을 뒤에 달고 개경장안의 중심부에 위치한 번잡스럽기 짝이 없는 공랑(고려시기 나라에서 상인들에게 점포용으로 빌려주던 저자거리.)을 에돌아 비교적 인적이 드문 소로길에 들어섰다.

여삼은 두고두고 입에 올릴수 있는 개경의 요란한 장거리를 구경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워 기름내, 술내 같은것이 풍겨오고 싸구려소리와 다툼질소리가 소란스레 울려오는 공랑쪽을 연해 돌아보았다.

여삼의 바글거리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깊은 생각에 잠긴채 묵묵히 말을 걸키던 박위는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꺼내놓았다.

《이애 여삼아, 오천이녀석이 요즘에 정말로 취금이에게 미쳐돌아가는 모양이더냐?》

여삼은 박위의 뜻밖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사랑도 형제간의 우의도 모르고 외토리로 막돌처럼 굴러다니며 자라난 여삼은 오천을 알게 된 후 그를 친형이상으로 따르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오천은 경상군영에 내려와 처음으로 여삼을 알게 되자 생활처지와 자라난 환경도 자기와 엇비슷하고 손재주도 비상한 여삼이가 불쌍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여 친동생처럼 살뜰히 위해주었다.

올해 초봄 여삼이가 장가를 갈 때 있은 일이였다.

부모도 형제도 없고 혼례식문세에도 깜깜인 여삼은 택일(날받이)을 해놓고도 어벙벙해서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럴 때 여삼을 찾아온 오천은 언제나 그러하듯 싱글벙글 웃으며 장담을 했다.

《여삼아, 잔치준비는 내가 다 할테니 너는 아무 걱정말아라. 부처님처럼 곱게 앉아있다가 상도 받고 새색시도 받으란 말이다, 핫하하!…》

그날부터 오천은 파발마뛰듯 쉴새없이 뛰여다니였다.

납페(남자측에서 녀자집에 보내는 례장.)로 쓸 무명도 구해오고 잔치상에 놓을 꿩과 기러기도 안아왔다.

썩 후날에야 여삼은 그 모든 물건들은 오천이가 밤마다 손에서 피가 나도록 호미와 낫따위를 벼리는 야장일을 해주고 얻어온것임을 알게 되였다.

물론 군영군사들과 박위도 여러가지로 여삼의 잔치준비를 거들어주었다.

하여 잔치는 제법 격식있게 거행되였다.

헌데 구고레(신부가 시부모에게 재배를 하고 페백을 드리는 의식.)를 할 대목에 이르러 그만 말썽이 생기였다.

여삼에게는 신부의 절을 받고 페백을 받을 부모가 없는것이였다.

여삼의 눈에는 대바람 눈물이 핑 고이였다. 신부의 얼굴도 컴컴하게 흐려지였다.

난중한 빛으로 신랑신부를 갈마보던 오천은 시부모가 앉아야 할 자리에 제가 넌떡 들어앉았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축축하게 젖은 청으로 말했다.

《나로 말하면 여삼이 형님이요, 형님인즉 부모없는 이 사람한테는 부모나 다를바 없으니 신부의 인사는 내가 받겠소.》

그러자 혼례나 장례때면 의례히 까다롭고 복잡한 례식절차를 따지는것으로 한몫 보는 동네의 나배기들이 무슨 큰일이라도 난듯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세상에 이런 깍두기판이 어디 있나?!… 아무리 의형님이라 해도 장가를 못 간 총각이 어떻게 시부모행세를 하는가 말일세.》

《신부나 신랑이나 다 섭섭하겠지만 주자가례에 없는 절차를 따로 만들어낼수는 없느니.》

오천은 금시 얼굴이 뻘겋게 달아가지고 버럭 증을 내였다.

《그러니 부모없이 자란 불쌍한 사람은 구고레구경도 못한단 말이요?

백사람, 천사람이 시비를 해도 소용없소.

나는 지금도 이 사람의 형님노릇을 하고 앞으로도 형님행실을 할테니 걱정들 말고 썩썩 물러나시오.

얼른 구고레를 해야겠소.》

오천은 여러 시비군들을 다 물리치고 끝끝내 자리를 지키고앉아 신부가 페백으로 올리는 대추쟁반을 받았다.

페백을 받는 부모들이 의례 그러듯 대추 한알을 맛본 다음 《다남다복》(아들을 많이 낳고 복을 많이 받으라는 뜻.) 하라는 내용의 덕담까지 격식대로 했다.

여삼이도 울고 신부도 눈물을 흘리였다. 오천이도 눈굽을 씻었다.

여삼과 신부는 저들의 서러운 심정을 깊이 헤아려준 오천이가 고마와서 울었고 오천은 불쌍하게 자란 여삼의 행복한 장래를 축복하여 눈물을 흘리였다.

여삼이가 오천을 친형처럼 믿고 따르는것은 그가 단지 인정이 깊기 때문만이 아니였다.

검술과 활쏘기도 능하고 무슨 일이나 다 자신만만하게 해제끼는데다 성격까지 시원시원한 오천은 정녕 같은 사내로서도 반할만 한 사람이였다.

하기에 여삼은 틈만 생기면 오천을 따라다니며 무엇을 배워달라고 떼질을 내기도 하고 실지 이일저일을 배우기도 했다.

지어 여삼은 오천의 조금 휘저울사 하는 걸음새와 말끝마다 《그까짓것》이라는 군소리를 붙이군 하는 그의 말투까지 본따려들었다.

헌데 요즘 여삼을 대하는 오천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우정 틈을 내여 찾아가도 만날새가 없노라고 손을 홰홰 내저으며 어디론가 바삐 가버리였다.

술을 마시러 집에 나가자고 해도, 제수(여삼의 안해)가 모셔오란다며 손을 끌어도 당치도 않는 구실을 대고 피하였다. 서운했다.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여삼은 요즘에야 오천이가 취금이한테 빠지여 자기를 멀리하려 한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사내들이란 녀자가 생긴 뒤에야 제 본색이 나오는 모양인가?

남들은 다 그렇다 한들 오천형님이야 그럴수 있는가?

나같이 그닥 속이 너르지 못한 놈도 녀자의 정보다 사람의 도리와 인정을 더 중히 여기는데 오천형처럼 대활하고 난다뛴다 하는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쉽게 녀자한테 엎어져서 인정이고 우의고 다 줴버릴수 있는가?…)

요즘에 와서 여삼은 오천이를 찾아다니기도 멋적었다.

확실히 오천과 여삼이 사이는 예전같지 않았다.…

여삼은 오천에게 해가 될 소리를 꺼내기도 딱하였고 거짓말을 제일로 싫어하는 박위를 속이기도 어려워서 한참이나 끙끙 갑자르며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허나 말을 묻어두고는 잠시도 참지 못하는 성미인데다 저로서도 오천이가 적지 않게 못마땅한 여삼은 종시 꼬부장한 속내를 털어놓고야말았다.

《소인이 제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동네아낙네들의 말을 들어보니 오천대정은 요즘 무슨 채단(신랑쪽에서 신부에게 보내는 포목 및 비단.) 같은것을 마련하느라고 바삐 뛰여다닌다고 하더이다.

소갈머리없는 아낙네들의 종작없는 소리를 그대로 곧이들을수는 없겠사오나 오천대정이 늘 염초장밖으로 나다니는걸 보면 그런 소문이 노상 허랑한 말 같지는 않소이다.》

박위의 예쁘게 생긴 입에서 허거픈 웃음소리가 불려나갔다.

《허어― 지금같은 때 명색이 군사라는 놈이 채단마련을 하느라고 나떠다닌다?! 괴이하도다.》

박위는 사실 오천에 대한 소문과 자기의 의심이 근거없는것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호젓한 기회에 여삼에게 넌지시 오천에 대해 물었었다.

그런데 오천이와 제일 가깝게 지내는 여삼이마저 오천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꼴이였다. 하고보면 돌아가는 소문은 결코 랑설이 아니요,

자기자신도 헛의심을 한게 아니였다.

새삼스레 속이 언짢아지였다.

박위는 물론 오천을 대단하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자기로서 할수 있는껏 중히 여기고 내세워주었었다.

최무선장군의 당부도 잊을수 없었지만 최무선의 뜻대로 오천이가 군사일에 자기의 힘과 지혜를 깡그리 바치리라 믿어의심치 않았기때문이였다.

그런데 오천은 제쪽에서 먼저 까치배때기같은 흰소리를 잔뜩 늘어놓고나서 이제 와서는 언제 그랬던가싶게 취금이를 끼고 제멋대로 나돌아치고있었다.

박위의 가슴은 진정 저리였다.

(아무리 배운것 없는 상놈이래도 속심지가 바로 박힌 놈이라면 운우의 정이라는것이 인간의 도리나 뜻보다 더 귀할수 없다는것쯤은 알아야 할게 아닌가.

참으로 오천이라는 녀석은 항간의 속된 말 그대로 마파람에 돼지불알 놀듯 하는 놈이야.…)

얼마후 장거리뒤쪽의 안침진 주막집에서 늦은 조반겸 이른 점심을 먹은 박위는 거기에 여삼을 떨구어두고 보행으로 왕궁을 향하였다.

급급히 길을 다그치여 만월대 축대우에 올라서니 제일먼저 한쪽벽이 허물어진 궁궐의 회경전(봉건관료들이 조회를 하던 곳.)과 꺼멓게 끄슬린 춘궁 (태자가 살던 곳, 동궁이라고도 함.)이 시선에 걸리였다.

아직도 20여년전(1361년)에 개경에 범했던 홍두적이 궁궐에까지 밀려들어와 불을 질렀던 흔적을 채 가시지 못한것이였다.

몇걸음 더 옮기자 이제는 쓰지 않는 건물인 대관전의 무너지다만 벽체에 누군가가 커다란 글씨로 써넣은 절구 두수가 안겨왔다.

 

만호장안 넓은 거리

재가루되여 남은것 없는데

고궁의 터전에

오동나무 한그루 천연하구나

내 비록 늙은 나이나

기필코 개경의 재건을 보고야말리

그때 훈풍이 다시 불면

오동나무 너 나의 거문고 될지어다

 

추연한 마음으로 거듭 시를 읊어보던 박위는 때마침 곁을 지나가는 중수도감(궁궐의 개건공사를 책임진 아전.)을 띄워보자 그를 불러 시의 사연을 물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시는 퍽 오래전에 왕명으로 입궐했던 안가성을 가진 어느 고을 부사가 외적의 화를 당한 궁궐의 모습이 너무도 기가 막히여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나서 분연히 써놓고 간것이였다. 박위는 중수도감에게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싶었으나 도감이 바쁜 태를 내는데다 때마침 자기의 련락을 안고 궁궐에 들어갔던 금오위(국왕을 호위하며 수도를 지키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앙상비군의 하나.)의 장군이 다가서는 바람에 더이상 말을 나눌수 없었다.

금오위장군은 소문으로만 알고있던 박위를 만나게 된것이 무척 반갑노라고 새삼스레 긴 인사를 늘어놓고나서 궁궐의 환관들이 전해준 소식을 되뇌이였다.

《…전하께서는 오늘 옥체 미령하시여 편전에 드신고로 일체 외인들과 상면할수 없다고 합니다.》

가능한껏 한줄기의 가능성이라도 잡아보려는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말았다.

이제는 리성계를 직접 찾아가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맥없이 만월대를 내려선 박위는 되도록이면 리성계에 대한 좋은 인상만을 살리기 위해 애쓰며 륙부아문(여섯으로 나누어진 중앙관청.)이 즐비하게 늘어서있는 대궐앞거리에 들어섰다.

내직에 있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오가던 길이요, 지난 4월 원정군의 열병식에 참가하기 위해 상경했을 때도 찾아왔던 곳이건만 어디가 어딘지 쉬이 가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퇴락한 옛 건물사이에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덩실한 집들이 비좁게 끼여들었는가 하면 휑하게 비여있던 공지들과 격구장터에는 울긋불긋한 새집들이 빽빽이 들어앉아있었다.

전에없이 간고하고 어수선한 이때 불과 몇달사이에 이처럼 웅장화려한 건물들이 숲처럼 솟아난것은 자랑스럽거나 흐뭇하기는커녕 놀라움과 의혹만을 불러일으켰다.…

박위는 한참이나 거리를 오르내리던 끝에 간신히 중서문하성(국왕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나라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최고행정기관.)을 찾아내였다.

중서문하성에 들어서니 텅 빈 방안에 홀로 앉아 무슨 문집같은것을 뒤적거리던 해사하게 생긴 낯선 관리는 큰 비밀이라도 일러주듯 리성계는 도평의사사에 가있노라고 소곤소곤 말하였다.

여기서 박위는 다시한번 크게 놀랐다.

원래 도평의사사는 필요할 때마다 소집되군 하던 높은 관료들의 비상설적인 림시합의기관이였다.

헌데 지금은 상설관청을 가진 최고행정기관으로 되고 거기에 리성계가 항시적으로 틀고앉아 전반정사를 본다는것이였다.

이 시기 리성계는 자기의 세력기반을 든든히 축성하고 왕권을 최대한 제약하기 위해 도평의사사를 중서문하성과 6부의 권한까지 대행하는 상설적인 최고행정기관으로 격변화시키였다.

하지만 자기의 심신을 온통 군사일에 쏟아붓고있는데다 노상 지방에 나가사는 박위는 시시각각으로 변천되는 조정의 형세와 야심가들의 속심을 구체적으로 알수 없었다.

어벙벙한 기분으로 중서문하성을 나선 박위는 다시 이 골목, 저 골목을 휩쓸고다니던 끝에 간신히 도평의사사를 찾아내였다.

하느님의 코배기라도 찌를듯이 높이 치솟은 합각지붕들, 여의주를 희롱하는 청룡, 황룡이 부각된 두리기둥들,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대청마루와 육중한 화강석섬돌들…

도평의사사는 여느 관청에 비길수 없이 덩지도 컸지만 웅장화려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공연히 노기등등해서 눈알을 희번득거리는 파수군들과 싱갱이를 하다못해 불호령을 터치고서야 겨우 대문안에 들어선 박위는 섬돌우로 오르려다말고 우뚝 굳어지였다.

관청안에서 비단관복을 지르르하게 흘려입은 십여명의 재상들이 틀스러운 걸음으로 쏟아져나온것이였다.

재상들은 어떤 중대한 국사를 론하고 나오는듯싶은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낯색은 저마끔 달랐다.

요즘에 와서 저들의 정치적변절을 합리화하기 위해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사람이 자기 본성을 알게 된다는것.)과 유교에서 말하는 양성(사람이 자기 본성을 키워나간다는것.)은 같은 뿌리와 목적을 가진것이라는 얼치기리론을 쳐들고다니는 조준과 윤소종 같은 관리들은 희색이 만면했다.

허나 임금에 대한 충정과 깊은 지식으로 하여 세인의 찬탄과 존경을 받고있는 수문하시중 정몽주의 퉁퉁한 얼굴과 판 삼사사 리색의 병색이 도는 갱핏한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떠돌았다.

박위는 맨뒤에서 풀기없이 걸어나오는 리색에게 다가갔다.

리색은 몸집이 체소하고 체질도 약한데다 내성적인 성격이여서 얼추 보매 매우 유약해보이였다.

그러나 실상 리색은 유학과 문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학자인 동시에 강력한 국가건설을 위해 제나름대로 애면글면하는 성실하고 강직한 정치가였다.

리색은 이미 공민왕시절에 벌써 교육기관을 질적으로 갱신하여 쓸만 한 인재들을 양성하며 불교행사에 재물을 랑비하는 현상을 철저히 없애는 동시에 강력한 수군을 건설하여 왜구를 격멸할것을 임금에게 제기했었다.

박위는 그의 모든 견해가 다 마음에 들었으나 그중에서도 군사를 중시하는 리색의 선견지명과 과단성있는 정치용단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당시 박위는 룡호군의 중랑장이였고 리색은 어보(임금의 도장.)를 간수하고있는 밀직사의 우대언(임금의 지시를 받고 내는 관직.)이였다.

그들은 벼슬품계와 나이도 훨씬 차이나고 출신도 문관, 무관으로 각각 다른터에 어울려지낼 기회는 많지 못했다.

하지만 박위는 리색의 장계내용을 알게 된 그날로 리색을 찾아가 자기의 존경심을 숨김없이 표명하였다.

리색도 박위의 군사적지략과 용맹, 사내다운 기개와 후덕한 인품에 대해 널리 들어 아는 까닭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장수와 사귀게 된것을 무척 기뻐하였다.

그날로 두사람은 십년지기처럼 친숙해지였다. 그후로도 박위와리색은 만날 때마다(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사심없이 세상사를 론하고 정을 나누었다.

헌데 그처럼 정열적이던 리색이 오늘은 이 웬일인가.

의혹과 불안에 싸여 리색을 여겨보던 박위는 때마침 자기앞을 지나치는 리색에게 성큼 다가섰다.

《판 삼사사(국가재정을 총찰하는 관직.)대감!》

그제서야 박위를 알아본 리색은 다소 공허해보이는 눈에 가까스로 반색의 빛을 떠올리였다.

《오, 박장군! 어수선한 이때… 수고로이 상경하셨소그려.…》

(어수선한 이때라니 무엇을 뜻하는 소린가?)

박위는 공연히 입안이 말라들고 혀가 굳어졌다.

재상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자 용기를 내여 말을 꺼냈다.

《대감! 그새 옥체건강하시고 가내일동 무고하시나이까? 헌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감의 안색이 그리 좋지 못하오이까?》

한식경이나 새털같은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가를 바라보던 리색은 동문서답같은 소리를 꺼내놓았다.

《내 나이 60에 이르는 오늘까지 밤낮없이 나라일을 두고 뼈를 깎아왔네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를만 한 가치가 없네그려.…》

워낙 내성적인데다 깊은 수심에 싸이고보니 길게 말하고싶은 의욕이 나지 않는듯 리색은 다시 하늘가로 시선을 들어올리며 난데없이 옛시를 읊조리였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참으로 아득하다

사람노릇 하기 힘들다는

옛말 바로 그대로구나

 

리색은 별로 흐리지도 않은 하늘을 새삼스레 둘러보며 혼자소리처럼 웅얼거리였다.

《박장군, 자고로 먹장구름이 떠돌 때는 된소나기가 쏟아질 조짐이라 하지 않았소.

이제 된소나기가 쏟아지면 이 땅에는 일진광풍이 일고 탁류가 덮일게요, 어허 기막힌지고…》

검버섯이 점점이 널린 리색의 여윈 얼굴에서 진액같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있었다. 리색은 분명 그 어떤 날씨타령을 하는것이 아니라 날로 어지럽게 번져지는 조정의 일을 개탄하는것이였다.

잠시후 리색은 박위의 존재를 감감 잊어버린듯 작별인사도 없이 허위허위 대문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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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는 리성계의 방으로 들어섰다.

휑뎅그렁한 방안의 상좌에 홀로 앉아 두툼한 문서장을 뒤적거리던 리성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로가 비낀 눈으로 박위를 바라보던 리성계의 길쑴한 얼굴에 홀연밝은 웃음기가 확 퍼지였다.

리성계는 보기 좋게 발달한 체구를 움쭉 일으켜세우며 제쪽에서 먼저 인사말 비슷한 소리를 활기있게 꺼냈다.

《박장군이 상경했소그려. 우리가 대체 몇해만에 만나는거요?!

헛허허…》

박위는 리성계의 예상밖의 언행에 다소 얼떠름해지였다.

박위는 요즘 조정의 권세를 거의다 줌안에 넣은 리성계가 차림새도 으리으리하고 언행도 거드름스러울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리성계의 차림새는 너무도 수수했다. 옛적의 붉은 직령을 입고 전이 좁은 주립을 썼는데 그나마도 물이 너무 날아 거의 분홍색으로 보이였다.

언행 또한 예전과 다름없이 소탈하고 진실해보이였다.

솔직성과 진실성을 인간의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기는 박위는 예나 다름없는 리성계의 수수한 모습앞에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 정도 감격하기까지 하였다.

똑똑한 근거도 없이 리성계를 의문시하고 불신했던 자기가 은근히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러자 진정으로 되는 인사말이 절로 우러나왔다.

《대감! 그지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념려덕분에 무탈했소. 박장군은 별고 없으셨소?》

살뜰한 문안인사를 나눈 뒤 두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리성계는 무엇때문인지 초조한 기색을 떠올리며 서둘러 말꼭지를 뗐다.

《박공도 십분 짐작하겠지만 우리 고려국이 건립된 이래 지금처럼 국력이 쇠잔하고 기강이 해이된 때는 일찌기 없었소. 왜 그렇게 되였는가?…》

성계는 급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정력적인 성격탓도 아니고 그 어떤 바쁜 일이 기다리고있기때문도 아니였다.

성계는 뭐니뭐니해도 박위가 최영의 축출리유를 따져물으며 저주와 규탄을 쏟아놓을가보아 속이 저리였다.

물론 성계는 박위의 항변을 무찔러버릴 론거와 배심이 없는것도 아니고 박위라는 존재가 그리 두려운것도 아니였다.

필요하다면 능히 해제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적지 않은 반대파들이 왕권강화를 고집하고있는 형편에서 그들에게 또 하나의 언터구를 잡힐 일을 한다는것은 너무도 우둔한짓이였다.

리성계의 심사는 이래저래 착잡하였다.

허나 대마도원정을 시급히 단행할 의지로 온몸이 달아있는 박위는 이미 최영의 축출이 아무리 가슴아픈 일일지라도 민족의 존망과 관련된 군사일우에 놓을수는 없다고 단정하고있었다.

성계는 근엄한 표정을 띄운채 급급한 어조로 계속 딴전을 펴나갔다.

《…남북으로 밀려드는 외적들과 장장 수십년동안 전쟁을 한데다 나라안의 몇 안되는 세신대족들의 손에 국가의 토지와 군대들의 둔전까지 거의 전부 흘러들어갔기때문이요.

또한 전임재상들인 림견미, 리인임 같은자들이 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광분하면서 나라의 페단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조장하고 확장시켜놓았기때문이요.

형세는 참으로 위급한데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세신대족들은 계속 저들의 줌안에 토지를 끌어들이여 이제는 한개 사영농장의 면적이 몇개 고을을 타고넘는 지경에 이르렀소.

이렇게 되니 얼마간의 제땅을 가지고있던 농민들까지 세신대족들의 사영농장에 의거하여 전호(소작농)로, 외거노비, 솔거노비로 굴러떨어지고있소.》

박위는 처음 한동안은 리성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여 다소 떨떠름하였다.

새겨들어보니 그의 말인즉 나라의 악페청산에 관한 문제요, 국력강화와 민생구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제나 국가의 번성과 백성들의 생활향상에 대해 무심한적 없는 박위는 저도 모르는새 자기의 용건과는 전혀 갈래가 다른 왕청같은 화제에 깊숙이 말려들어갔다.

박위는 마침내 피빛이 내번진 얼굴을 번쩍 들어올리며 청을 높여 말했다.

《대감,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세신대족들의 특대형범행을 방치해둔것은 지난 기간 우리 조정의 가장 큰 실책인줄 압니다.》

잠시 말을 끊고 상대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던 성계는 박위가 시비를 걸기는커녕 적극적인 공감과 성원을 보내자 더욱 기세가 올라 턱을 부들부들 떨며 열을 올리였다.

《옳소, 우리는 전시대 재상들의 과오를 인정해야 하며 (이것은 최영을 념두에 둔 말이였으나 박위는 리인임을 두고 하는 말로 리해하였다.) 그것을 과감히 시정극복해야 하오.

이제 더이상 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방치해둔다면 얼마 안 가서 나라안의 토지와 백성은 전부 세신대족들의 손아귀에 들게 될것이며 국가는 알쭌히 빈 허울만 남게 될게요.》

리성계는 체계적으로 글공부를 한적도 없었고 책권도 별로 읽은것이 없는 무식쟁이였다.

하지만 수십년세월 제노라 하는 조정의 엄지가락량반들과 어울려지낸데다 때없이 수하장졸들앞에 나서서 군령도 내리고 제나름의 인생풀이도 해온 덕에 언변은 그런대로 꽤 좋은편이였다.

그 좋은 언변, 그 좋은 목청으로 승기가 나서 장광설을 엮어나가던 리성계는 불시에 탁자의 모서리를 쾅 내리치며 결연히 부르짖었다.

《이제 더는 한시도 미룰수 없소.

우리는 조속한 시일내에 세신대족들의 방대한 토지를 말짱 몰수해야 하오.

그래야 백성들이 살아나고 국력이 제고되며 나라의 기강도 바로 설수 있소.

이미 전하께서 주달하셨고 방금 국책으로도 론의되였지만 조정에서는 우선 료물고(왕실창고)에 속한 360여개의 장, 처전에서 절에 기증한 토지들을 모조리 회수하고 비법적으로 차지한 세신대족들, 량반토호들의 사전을 가차없이 몰수할것이며…》

리성계는 세상의 모든 위정자들이 다 그러하듯 말끝마다 나라와 백성을 떠올리며 박위를 포함한 관리들과 세상천하를 솜씨있게 기만하고있었다.

농사나 토지경영의 물계 같은것은 초보도 알지 못하는 리성계가 만사를 젖혀놓고 사전정리건부터 들고나온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권욕실행과 일파의 리익을 위해서였다.

방대한 토지를 장악하고있는 세신대족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자기가 온 나라의 토지를 독점할수 있으며 모든 농민들을 《국가토지》에 결박해놓고 세력권확장과 왕권탈취에 소요되는 재정을 시급히 지속적으로 뽑아낼수 있었다.

이런 리유로 하여 리성계를 추종하는 관리들은 사전정리를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했으나 조락의 음영이 짙게 드리운 왕권의 회복을 갈망하는 리색과 정몽주네들은 사전정리를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방금전 이 집을 나서던 재상들의 얼굴색이 그처럼 심한 대조를 이룬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아직은 수면아래서 고요히 소용돌이치는 조정의 파국적인 형세와 극으로 대립된 관료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알리 없는 박위는 거듭 리성계의 과단성있는 정치소신과 용단에 경탄과 공감을 표시하였다.

박위는 리성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잔이나 나누자고 해서야 소스라치는 놀라움속에서 자기가 무엇때문에 이 방에 들어왔는가를 깨달을수 있었다.

헌데 정작 말을 떼자니 리성계의 거창한 정계쇄신의 구상에 비해볼때 자기의 대마도원정건은 너무도 지엽적이고 왜소한 문제같았다.

다음순간 대마도원정은 단순히 지역적의의를 가지는 협소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과 관련된 중대한 국사라는 생각이 불덩이처럼 가슴을 지지였다.

박위는 불타는 눈으로 리성계를 쳐다보며 비로소 자기의 용건을 터놓았다.

《이미 대감께서도 깊이 통촉하시는바이지만 왜구의 끝없는 침노와 략탈로 하여 우리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존엄은 훼손되고있습니다.

우리 군대는 지난 기간 왜구들을 바다에 나가 때려보기도 하고 륙지에 들여놓고 치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하여 물리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과 략탈은 근절된것이 아니라 더 자주, 더 큰판으로 계속되고있습니다.

열백번 생각해보아도 이제 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방비나 반격이 아니라 주동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도적무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통채로 짓뭉개버려야 합니다.

우리 군대의 정의로운 출동은 필경 백세의 한을 풀고 오늘과 래일의 참화를 방지하며 나라의 위세와 존엄을 만방에 떨치게 될것입니다.》

두툼한 입술귀를 짓물고서서 연해 고개를 끄덕거리던 성계는 불시에 목침같은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찍었다.

《옳소, 박공의 대마도진공결심은 백번 지당한것이요.

대고구려의 후손들인 우리가 잰내비같은 왜구들의 불장난에 고통을 겪고 망신을 당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소!》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리성계의 진심이였다. 그러나 리성계는 박위의 원정용단이 정당하다는것을 인정하면서도 시급히 그것을 단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성계에게 급한 일은 대마도원정이 아니라 온 나라의 토지를 탈취하고 리색과 정몽주 같은 반대파세력을 숙청 또는 흡수하여 자기의 정치경제적기반을 구축하는것이였다.

그와 함께 성리학을 국가정치의 리론적기조로 내세울것을 요망하는 조준, 윤소종 같은 관리들의 얼쑹덜쑹한 리론을 빌어 자기의 배신적인 죄행과 앞으로의 흉악한 사변을 장미빛으로 채색해나가면서 아직은 헐렁헐렁하게 잡혀있는 권력일체를 소고삐처럼 바싹 조여잡는것이였다.

총체적으로 말하여 리성계에게 있어서 가장 급하고 중한 일은 무혈의 역성혁명 즉 왕위찬탈이였다.…

천천히 자기의 교자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대마도원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박위라는 인간을 장차 어떻게 대하고 처리할것인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얼마전 리성계는 오래전에 조민수를 통해 알게 되였던 김해부사 조호백으로부터 상당한 량의 희귀한 어물과 함께 한장의 비밀한 사찰(사적인 편지.)을 받았었다.

호백은 편지의 서두에서 《리대감이 원정군을 돌려세우고 최영을 축출한것은 국가정치의 새장을 알리는 혁신적인 처사》라고 리성계를 극구 추어올리였다.

계속하여 호백은 자기의 사촌형인 조민수가 관직을 삭탈당한것은 (최근 리성계는 자기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좌시중 조민수를 파면시키였는데 공개적인 파면리유는 어떠하든 리성계로서는 전략적으로 반분했던 권력을 시한부적으로 회수한것이였다.) 전적으로 정당한 인사행정이노라고 덧붙이였다.

호백의 로골적인 아첨에 성계는 흡족한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왜서인지 자꾸만 속이 근지러워나고 얼굴이 뜨끔해났다.

마감으로 호백은 근래에 경상도원수 박위는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표구아래 모반음모를 꾸미고있다고 악의에 차서 력설했는데 그것이야말로 호백이가 사찰을 내게 된 근본동기인듯싶었다.

그 대목에 이르러 성계는 시큰둥한 표정을 띄우며 코방귀를 내불었다.

성계가 알건대 박위는 지나칠 정도로 진실하고 고지식한 무관으로서 역신음모 같은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사람이였다.

모름지기 버들잎처럼 속이 좁고 무엇이든 제 마음에 시쁜것은 갈구리로 걸어채야 속이 시원해하는 조호백이 서뿌르게 판단했거나 개인적인 앙심을 먹고 생먹은 소리를 아무렇게나 엮어댄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성계는 박위의 역신음모라는 대목을 훌훌히 넘겨버릴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자기에게 고분고분 숙어들것 같지 않은 박위.

최영의 축출로 하여 자기에게 극심한 의혹 내지 반감을 품고있을것이 분명한 박위는 필경 편안치 않은 인물, 거치장스러운 존재였다.

좀더 깊이 해부해본다면 한개 도의 군력을 총섭하는 군영의 원수요,

자기 손에 직접 검을 잡고있는 무관인 박위는 위험하기도 한 존재였다.

어느때든지 반드시 제껴버려야 할 대상이였다.

(리성계는 실지 공양왕 초기에 자기를 포함한 9명의 공신중에서 두명의 무관을 권력권밖으로 추방하였는데 그속에는 박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박위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아직까지 자기를 반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선망높은 장수를 이렇다할 명분도 없이 제거한다면 그것은 반대파의 력량을 보강해주거나 자기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것이였다.

적절한 기회에 보다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잘 익은 열매를 따듯 아무탈없이 손쉽게 따던져야 했다.

성계는 호백에게 지금같은 때 증거가 불충분한 고변은 소요와 혼란만을 빚어낼수 있으니 모쪼록 심사숙고하라는 내용의 아리숭한 련락을 은밀히 내리떨구었다.

그 련락인즉 너무 조급해말고 박위의 일거일동을 세심히 주시하면서 보다 뚜렷하고 충분한 증거를 채집하라는 우회적인 암시와 당부였다.…

리성계의 두툼한 가슴속에서는 검은 피가 소용돌고있었으나 그의 넓둥그런 얼굴에는 박위야말로 자기와 뜻도 배짱도 맞는 무관이여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다는 뜻의 미소가 은은히 흐르고있었다.

이윽하여 성계는 은근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속잎이 자라면 떡잎은 젖혀지기마련이라더니 과시 박공은 오늘날 우리 군대의 가장 큰 기둥이고 제일가는 장수요. 공같은 무장이 전역에 나가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정녕 든든하오.

그렇다면 우리 군대의 대마도원정은 언제쯤 하는것이 가장 합당하겠는가, 요는 이것인데…》

리성계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박위를 쳐다보았다.

다시한번 알락달락한 문양으로 치장된 기만극을 본때있게 연출할 잡도리였다.

여기서 잠시 리성계일가와 그의 래력을 소급해보자.

퍽 오래전에 전라도 전주에서 나지래기벼슬을 지내던 리성계의 조상 리안사는 13세기 중엽 당시 교전상태에 있던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대가로 리안사는 원나라가 타고앉아있던 쌍성총관부의 동계(현재 강원도 북부일대와 함경남도지방)에서 비교적 큰 세력지반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리안사의 아들인 리행리와 손자인 리춘도 원나라로부터 천호라는 벼슬자리를 얻어가지고 한개 지역의 토호로 뚱땅거리며 살았다.

리춘의 아들 리자춘 (리성계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리자춘일가의 토호생활을 감싸주고 떠밀어주던 원나라가 급기야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자춘과 그의 아들 리성계는 원나라에 치중하던 종래의 생활태도에서 탈피하여 수평선상에서 고려와 원나라에 각각 한발씩 잠그고 량국의 형세를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망하면 고려로 넘어가고 고려가 무너지면 원나라에 가붙을 심산이였다.

그무렵 고려는 강경한 자세로 반원의 기치를 추켜들었다.

원나라는 내리막길에 들어선 찌그러진 수레모양으로 더이상 본래의 모양을 수습할수 없었다.

오직 파멸만이 원을 기다리고있었다.

자춘과 성계는 재빨리 원나라에 잠그었던 한발을 각각 뽑아올리였다.

이제는 통으로 고려편에 가붙는것이 현책이였다.

그러한 때인 1356년(공민왕5년) 고려정부는 동북병마사 류인우에게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동계를 회복할것을 명령하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리자춘은 자기가 직접 개경에 들어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는 돌아가자바람 동계전역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류인우의 공격에 호응한 리씨부자의 폭동으로 하여 고려군은 삶은개 눈뽑듯 손쉽게 동계를 되찾을수 있었다.

리성계의 특기는 활을 귀신같이 다루는것인데 사실 그는 활쏘기만이 아니라 검술과 기마술에도 능하였다.

리성계의 군사적재능을 포착한 최영은 그를 고려군대의 장군으로 끌어올리였다.

군대의 요직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북원의 납합출과 덕흥군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1376년 개경을 위협하는 왜구의 집체를 요정낸것을 비롯하여 련속 전과를 거두었다.

성계는 시중벼슬을 거쳐 수시중의 관직에까지 톺아올랐다.

리성계는 시중이 되였을 때 연회장에서 시 한짝을 지었다.

 

석자 되는 환도로

나라를 평정하고

 

이렇게 운을 뗀 성계는 최영에게 자기의 시에 대구를 채워줄것을 요청했다.

최영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그에게 더욱 잘 보일 심산이였다.

성계의 간특한 속심을 알리 없는 최영은 도리여 기마술에 능한 성계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대구를 채웠다.

 

한가닥 채찍끝에

천하가 평정되리

 

시는 필경 고려장수들의 높은 뜻과 웅건한 기상을 노래하며 내용적인 련관을 이루었으나 시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흑심과 진심으로 각각 달랐다.…

실로 리성계는 한생을 두길보기를 하며 흑심과 이심으로 살아온 사람이였다.

그 덕에 료동원정군의 부사령관격인 우군도통사의 벼슬과 조정의 최고관직인 문하시중 다음가는 자리의 수시중벼슬에까지 오른 리성계는 마침내 왕위찬탈의 무서운 야망을 품게 되였다.

야욕실현의 첫 단계로 그는 료동원정군을 되돌려세우고 임금과 최영을 군력으로 몰아내였다.

성계는 최영을 제 손으로 묶어서 끌어내면서도 《도통사대감, 세상에 이처럼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소. 하늘의 뜻이 이러하오니 달리 어쩌는 수가 없소이다.》하고 넉두리를 해가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리성계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능칼진 위선자인가를 극치의 높이에서 보여준 세련된 광대극이였다.

진정 리성계는 수십년세월 단 한번의 좌절도 없이 정계와 군계의 풍랑속을 교묘하게 누비며 오늘의 봉우리에까지 치달아오른 교활하고 영악스러운, 로회하고 야심만만한 늙은 여우(올해 그의 나이는 54살이지만)였다.…

리성계는 또다시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박위의 결곡하고 단순한 마음을 우롱하기 시작했다.

《공도 아다싶이 본관은 얼마전까지 노방 전역에 나가살던 장수로서 누구보다 공의 심정을 통절히 헤아리고있소.

하지만 공의 제안을 조정의 탁자우에 쳐들어올리자니 자연 나라형편을 둘러보지 않을수 없구려.

수십년세월 줄창 전란을 겪은고로 나라는 피페해지고 국고는 텅텅 비였는데 가도와 산야 그 어디나 류랑하는 백성들과 굶어죽는 시체들이 돌멩이처럼 나딩굴고있소. 그런데다 옹이에 마디격으로 올해에는 혹심한 자연재해로 온 나라 들판이 벌거숭이가 되였으니 그 후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누구도 가량할수 없소.

오죽하면 전하께서 엊그제 친히 흥왕사의 중들을 대궐에 불러들이여 금강경도량(비오기를 빌어 경전을 읽게 하는것.)을 펴시였겠소.

그 마당에서 본관은 숯불에 팔을 태우며 비가 내리기를 안타깝게 빌었소.

나라와 백성의 고통을 다소라도 덜수 있다면 팔이 아니라 온몸이라도 태우고싶은것이 본관의 진정이요.》

성계는 이마살을 찡그리며 조심스레 팔소매를 걷어올리였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성계의 시꺼멓게 탄 팔이 드러났다.

박위는 호흡장애같은것이 느껴지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아니, 대감께서 몸소 팔까지 태우시며 기우제를 지내셨단 말입니까?!》

성계는 비통한 음조로 박위의 말을 받아넘기였다.

《어쩌겠소. 그런 일은 절차에도 없는것이지만 속이 끓어번져 견딜수가 없더란 말이요.

공도 알겠지만 원래 기우제라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다섯마리 룡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련못의 물독속에 도마뱀을 띄워놓고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여 비를 펑펑 퍼부어야 너를 놓아보내리라.〉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바라를 치는게 정해진 절차가 아니겠소.

헌데 그 번다한 절차를 꼬박꼬박 다 시행해도 비가 오지 않으니 너무 안타까워 본관의 살을 태워본거요.

애국이 지극하고 애민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응할게라―하고 말이요.》

박위의 가슴은 훗훗하게 더워났다.

리성계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애국애족적인 관리,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의식이 따겁게 속을 파고들었다.

성계는 석쉼한 음성으로 계속하였다.

《…이러한 형세로 하여 본관은 누구보다 박공의 심정을 잘 알면서도 지금 당장 대마도원정건을 들어올릴수 없소그려.

하지만 박공, 원정에 관한 문제는 조속히 전하께 품달하겠소.

이미 전하께서도 알고계시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전면적인 리해가 가도록 두번세번 설유를 해드리겠소.

그러니 공은 절대로 맥을 놓지 말고 이미 경상군영에서 시작한 원정준비를 계속 다그치면서 나라가 허리를 펼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오.

단언하건대 원정은 반드시 가까운 시일안에 성사될것이요.》

리성계의 속심을 알리 없는 박위는 나라와 백성들의 일을 두고 가슴태우면서도 대마도원정에 깊은 관심을 돌리는 리성계가 눈물겹도록 감사하였다.

박위는 실상 리성계와의 상면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으나 전혀 그것을 감촉하지 못했다.

도리여 격정으로 가슴이 들먹거리여 바이 자신을 진정할수 없었다.

박위는 리성계의 당부대로 나라가 허리를 펼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원정을 단행하는것이 여러모로 옳을것이라고 자신을 납득시켜버리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박위는 자기자신이 기만과 롱락을 당한 수난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란자인 성계에게 진심으로 되는 위로의 말까지 덧붙이였다.

《대감, 너무 상심마시오이다. 대감과 같은 충신들이 충의로 일관된 정사로 전하를 받들어나간다면 우리 고려국은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강성불락의 나라로 다시금 우뚝 솟을것입니다.》

성계는 색날은 전복의 앞자락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결속된것이 저으기 흡족한 리성계였다.

박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계의 어깨너머 벽면에 쌍으로 내리드리운 두폭의 족자가 또렷이 안겨왔다.

《충을 위해 살고 의를 위해 죽으리라》,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제몸을 돌본 후에 나라를 다스린다)

초자로 휘갈겨쓴 족자들의 글발 역시 성계의 진심을 반영한것이 아니라 위선과 기만으로 충만된 그의 얼룩진 마음을 가리워주거나 윤색해주는 여러가지 소도구들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박위에게는 그것 역시 성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생의 의미깊은 병장명계(병풍에 쓴 좌우명)처럼 생각되여 다시한번 크게 감복하였다.

3

3

 

개경장안의 언덕받이라고 할수 있는 남산재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예로부터 남산재는 조정의 고위관리들만이 사는 반촌(량반동네)중에서도 으뜸가는 반촌이여서 낮에도 조용했지만 밤에는 더욱 고요했다.

그 고요에 휘감기기라도 한듯 최칠석의 집 사랑방에 주안상을 마주하고앉은 박위와 칠석은 아까부터 덤덤히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주안상복판에서는 울긋불긋한 신선로가 구수한 고기내, 향긋한 양념내를 풍기며 지글지글 끓고있었다.

신선로주위에서는 설리적(소등심살로 만든 소고기산적)과 전유화(물고기지짐), 문어회와 붕어탕, 참대순볶음과 유밀과 같은 상등음식들이 맛스러운 향기와 아지랑이같은 김을 피워올리고있었다.

박위는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고 풍성한 주안상을 마주했건만 왜서인지 술을 마시고싶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서글퍼지면서 뒤머리가 욱신욱신 들쑤시였다.

과연 무엇때문일가?!

…리성계와 헤여진 뒤 병부로 향하던 박위는 불식간에 속이 허우룩해나면서 무엇인가 마음속의 귀중한 보배를 잃은듯 한 극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히였다.

그 어떤 소외감도 떠올랐다.

사실상 박위는 성계에게 모욕이나 무시를 당한 일도 없었고 따돌림같은것을 당했거나 무엇인가 절취를 당한 일은 더우기 없었다.

아니, 환대라면 환대를 받은셈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울적해지고 쓸쓸해지고 공허해지는것인가,

무엇때문에 갑자기 서러워지고 맥적어지는것인가?!…

박위의 걸음은 저도 모르는새 칠석의 집이 있는 송악산기슭으로 꺾어들었다.

경상도군영에는 하루 늦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서 속을 터놓을수 있는 유일한 지우인 칠석을 만나 울울한 마음을 활활 씻어버리고싶었다.

활달하고 통쾌한 친구의 위로와 조언을 듣고싶기도 했다.

느리게 흐르는 개울물곁에 자리잡은 낯익은 반촌에 들어서니 소풍을 하던 동네늙은이들이 그새 칠석은 남산재로 이사를 갔다고 일러주었다.

박위는 그들에게 자세히 길을 물어가지고 남산재로 향하였다.

저녁때건만 칠석은 집에 없었다.

박위는 이미 잘 알고있는 상노아이에게 문을 열게 한 다음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이전과는 판다르게 으리으리하게 꾸려진 넓다란 사랑방에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앉은지 얼마 안되여 칠석이가 들어섰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사무쳐올라 한참이나 인사말과 그지간의 소식말을 나누고난 끝에 칠석은 화색이 충천하여 제쪽에서 먼저 묻지도않는 말을 꺼내놓았다.

《해암(박위의 호), 내 지금 좌주(자기가 급제한 과거의 수석시험관.)님댁에 갔다오는 길일세.

오늘이 좌주님의 손자 돌생일이라 우리 문생(과거의 시험관이 급제시킨 사람들.)들이 모두 모여가서 축하를 해주었지.

참말 생일잔치판이 대단하더구만.》

전혀 뜻밖의 화제에 처음 한순간 떨떨해졌던 박위는 인차 그의 말뜻을 가려들었다.

요즘 과거의 시험관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자기가 급제시킨 사람들을 문생이라 부르며 아들이나 동생처럼 각근히 대해주고 문생들은 시험관을 좌주 또는 은문이라 칭하며 부모처럼 정성스레 섬기고있었다.

그들의 관계를 꼭 사제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옛 인연을 잊지 않고 웃사람, 아래사람이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일을 두고 옳지 않은 례절이라고 탓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라안팎이 다 복잡한 때 나라일을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애써 뛰여다녀야 할 조정의 관리들이 좌주의 손자 돌생일까지 잊지 않고 찾아가 진종일 술상을 껴안고있는것을 정당한 처사라고볼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칠석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좌주에게 기쁨을 드린것이 무슨 큰 공적이라도 되는듯이 하냥 즐거워하고있지 않는가.

박위는 그때부터 기분이 흐려지였다.

저도 모르는새 비틀린 소리가 흘러나갔다.

《요즘같은 때 개경의 량반들은 좌주의 손자 돌생일까지 꼬박꼬박 찾아가 즐기니 정말 살 재미가 있겠네그려.》

박위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칠석은 흥이 나서 대답했다.

《그럼, 좌주와 문생들사이에 애경(슬픈 일과 경사스러운 일.)간의 인사는 분명해야지 그걸 몰라서야 사람인가.》

《역시 개경량반들의 례법이 다르구만.

하긴 요즘세월에 나같은 쑥이 또 어디 있겠나, 헛허…》

허거프게 웃고난 박위는 무슨 말이든 좀더 짭짤하게 하고싶었으나 그것이 칠석에게 옹졸한 마음의 표현으로 곡해될것 같아 화제를 돌리였다.

박위는 될수록이면 자기의 감정을 섞지 않기 위해 왼심을 쓰며 리성계를 만났던 일과 까닭없이 뒤숭숭하고 울울한 자기의 기분까지 털어놓았다.

화색이 충천하던 칠석의 얼굴색이 금시 컴컴하게 변하였다.

거동조차 전혀 딴사람처럼 이상해졌다.

덤덤히 앉아있던 끝에 마치 성이라도 난것처럼 소리높여 주안상을 재촉하더니 그다음은 꾸며낸듯 한 미소를 띄우며 새삼스레 문안인사같은것을 늘어놓았다.

《해암, 이게 정말 몇해만이요? 지난 4월에 상경했을 때는 우리 집에 들리지도 않고 그냥 내려갔더군.

아무튼 반가우이. 이렇게 불쑥 나타날줄은 정말 몰랐소그려, 헛허.

 

림진강 봄도 깊어 물가풀도 고울시고

흰모래밭 백구백로 한가로이 조은다오

저 멀리 들려오는 노소리에 놀라 깨니

어드메 고기밴고 안개속에 손님 왔네

 

헛허허… 마침맞게 주안상이 나왔소그려. 자, 오랜만의 상봉을 축하하여 한잔씩 냅세그려.》

칠석은 몸집도 그리 크지 않고 얼굴도 안존하게 생긴것이 어딘가 얌전한 선비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성격은 생김새와 판다르게 소탈하고 대범했다.

장난기도 심하고 시읊기도 즐기는 유쾌한 사람이였다.

헌데 리성계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전에없이 심중해지더니 좌석의 공기에 맞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던 끝에 시조까지 읊어내리였다.

박위는 아연해났다.

아니, 전혀 처음 보는 칠석의 류다른 언행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칠석은 내가 리성계를 만난것이 불만스러운가? 아니면 리성계에 대한 나의 불만조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여하튼 칠석은 무엇인가 몹시 불안해하고있다, 그래서 눅거리광대극같은것을 놀고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요즘세월이 흉흉하고 어수선하다 해도 벗의 진정에는 진정으로 대답하는것이 지우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진정을 토파하는 벗에게 진속을 터놓기 꺼려한다면 그는 벌써 참된 우의를 가진 벗이라고 말할수 없다.…

…그때부터 박위는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별안간에 속이 꽁해진것이 아니라 칠석의 이상한 태도가 섭섭하고 벗에게까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가 서글퍼나서 술도 마시고싶지 않았고 말도 나누게 되지 않았다.

침묵, 침묵, 침묵…

마침내 칠석은 자기의 마음을 소리없이 칭칭 동이는 지루한 침묵이 지겨운듯 짜증어린 어조로 부르짖었다.

《해암,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시자는건데 왜서 술을 들지 않소?》

그제서야 박위는 갑자기 술생각이 난듯 맑은 술이 철철 넘쳐나는 놋주발을 집어들었다.

술을 마시고싶어서가 아니라 술로써 자기의 쓰라린 마음, 허우룩한 마음을 다소라도 가시고싶었다.

박위는 단숨에 주발의 술을 말끔히 비워버리였다.

불덩이처럼 따거운 술이 목을 지지며 굴러내리자 무거운 기분은 가셔지는것이 아니라 더더욱 아프게 뇌리를 조이였다.

박위는 칠석의 속마음을 알고싶었다.

벗의 진정을 느끼고싶었다.

박위는 턱수염에 튕겨난 술방울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백운(칠석의 호), 나는 그대에게 털끝만 한 거짓도 없이 진속을 다 털어놓았소. 그런데 백운은 나에게 전혀 할말이 없는가본데 그대야말로 이 웬일이요?》

칠석은 너무도 직선적인 박위의 질문이 몹시 난처한듯 어줍은 미소를 띄우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해암, 오랜만에 조용히 마주앉았는데 반가운 정이나 나누면 그만이지 무얼 자꾸 그런 소리를 하우. 우리 피차 정치에 너무 바투 다가서지 맙시다. 〈하이해후요, 유주내강〉이라는 옛장수의 말대로 술로써 시름을 풀며 그럭저럭 세월을 누벼나가는게 현책일줄 아오.

자, 또 한잔 마시세그려.》

박위는 무엇에 들레이기라도 한듯 번쩍 눈을 치떴다.

이제는 칠석의 너무도 변화된 정신적인 모습이 확연히 가려지였다.

칠석은 의심할바없이 리성계를 두려워하고있었다. 박위 자기를 꺼리고있었다.

그것은 상층권력가들에게는 될수록 밉지 않게 보이는것으로써 자기의 권력과 부귀를 길이 부지해나가려는 이 세월 권력배 일반의 공통된 심리에 뿌리를 둔것이였다.

박위의 속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백운은 이제 와서 나에게도 속을 터놓기가 무척 힘겨운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지기가 아니라 비편하고 부담스러운 객이 아니겠소?》

칠석은 주둥이가 묘하게 꼬부라진 은주전자를 기울이여 술을 붓다말고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객이란 무슨 소리고 비편과 부담이란 또 웬말이요?!

그거야 롱이라도 지나친 롱이 아니요?》

《백운은 내가 지금 롱을 하고 다닐 경황이 있다고 보우? 또 지금껏 내가 실없는 롱담을 하는걸 본적이 있소?》

주발을 잡으려던 박위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다.

박위는 아득히 흘러가버린 옛시절 고향마을에서 나누던 티없이 깨끗했던 우정이 못 견디게 그리워났다.

박위와 칠석은 참대말을 타고 참대칼을 휘두르며 뛰여놀던 소년시절에는 물론 여기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한창나이때도 순진한 소년들처럼 서로 꺼리는것이 없었고 기이는것이 없었다.

네것이자 내것, 네 마음이자 내 마음…

슬픔도 기쁨도 언제나 반반씩 나누어가졌다.

박위가 칠석을 남달리 사랑하는것은 단지 한고향 태생, 유년시절의 흔치 않은 벗이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어릴 때부터 군사를 애중하던 칠석이 (소년시절 칠석은 무관을 지향했으나 아버지의 강권으로 문관이 되였다.), 누구보다 군사를 중시하는 칠석의 마음이 돋우보여서였다.

지나치게 군사일에 끼여든다고 뒤소리를 들을만큼 군사일에 극성스럽게 나서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리색이 해군력증강을 주장해나섰을 때도 제일선참으로 그의 발기를 지지찬동한 사람이 바로 최칠석이였다.

그런데 그때의 열렬하던 칠석은 어디로 갔는가?

애국이 말로만 떠들고 다니는것이라면 이 세상에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박위의 눈앞에는 예전의 솔직하고 유쾌하고 강직한 최칠석이가 아니라 조정의 벼슬살이속에서 조약돌처럼 동그랗게 다듬어진 꾀발발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최칠석의 탈을 쓰고 앉아있는것 같았다.

서글프고 괴로운 마음탓인지 사랑방의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은주전자며 옥차종, 은향합, 옻칠을 먹인 문갑따위의 값비싼 기물들마저 야릇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번들거리는 벽장에 아직까지 붙어있는 춘축(립춘날 새봄을 축하하여 대문이나 문설주, 벽장 같은데 써붙이는 글)의 《수여산 부여해》

(오래 살기를 산과 같이, 부유하기를 바다와 같이 되라), 《립춘대길 건양다경》(봄이 오자 행복이 오고 계절따라 경사가 많다)이라는 글발까지 꼭 칠석의 변화된 인생목표처럼 생각되여 더더욱 쓸쓸해났다.

박위의 낯색을 불안스레 살펴보던 칠석은 공연히 허리를 둘러감은 사치한 슬띠를 매만지며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러니 해암은 그예 송헌(리성계의 호)대감을 다시 만나겠다는거요?》

《만나겠소. 오늘은 내가 정신이 조금 흐려졌댔는지 아니면 도까비한테 홀리웠댔는지 군영에서부터 뼈물러가지고온 말을 절반도 하지 못했소.》

《…내 생각에는 송헌대감과 다시 만나는것은 삼가하는것이 좋을듯 하오.

아니, 대마도원정자체를 당분간 덮어두는게 옳을것 같소.

주역에도 〈때가 행함즉하면 행하고 때가 그침즉하면 그치라〉고하지 않았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해암, 놀라지 마오. 털어놓고 말해서 지금 조정의 일부 량반들속에서는 경상도원수가 대마도원정준비를 차린다고 하면서 실은 정변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소문이 쉬쉬 돌아가고있소.》

《정변음모?!》

박위는 정변이라는 당치도 않는 소리가 지나치게 들리기는 했으나 그런 생각은 꿈에도 품어본적이 없는지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허거픈 웃음이 나갈만큼 어이가 없을뿐이였다.

《내가 반정준비를 차린단 말이요?! 헛허허.… 그게야 할일 없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해보는 소리겠지.…》

박위의 심상한 낯빛을 의아쩍게 쳐다보던 칠석은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계속하였다.

《글쎄… 아직은 근거없는 랑설이니 해암의 말대로 롱담이라고 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원정준비의 첫발을 떼기 바쁘게 이런 험한 소리가 나도는데 장차 준비가 성숙되는 경우 어떤 변이 생길지 누가 알겠소.

조정의 기둥뿌리노라고 꺼떡거리며 돌아가던 조민수대감도 하루아침새 떨컥하는판인데 매사를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사실말이지 누가 시키지도 않는 대마도원정을 하겠다고 뛰여다니다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전정을 망친다면 그런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전정(앞길)을 망친다?!》

박위는 침먹은 지네모양으로 잔뜩 쭈그리고있던 칠석이가 내놓고 대마도원정을 반대하자 기분이 상하다못해 격분하기까지 했다.

칠석이가 박위의 대마도원정을 애써 제지시키려는것은 자기도 무사하고 박위도 탈이 없게 하려는 의도로서 정의와 진실, 나라와 백성의 고통 같은것은 안중에 두지 않은 자기 보신책에서 나온것이였다.

박위는 이 정도로 생각할만큼 저급하게 변모된 칠석이가 측은해났다.

이런 사람을 세상에 둘도 없는 벗으로 믿고 허위단심 찾아온 자기가 새삼스레 구슬퍼났다.

《내 이제야 백운의 진속을 알만 하오그려.

그대가 무엇때문에 송헌대감의 소리를 꺼내기 주저하고 무엇때문에 대마도원정을 한사코 만류하려 하는가를 손금보듯 알만 하단 말일세.

백운은 분명 송헌대감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될가봐 그것으로 해서 자기의 전정을 흐리게 할가봐 그리도 조심을 두는것 같은데…

옳은 처사일세.

요즘처럼 조정의 공기가 어수선한 때 백사만사를 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듯 조심해야 벼슬자리도 오래오래 지키고 부귀영화도 길이길이 누릴수 있겠지.》

박위의 말속에 심각한 질책과 조롱이 스며있음을 감촉한 칠석은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으나 애써 딴전을 피웠다.

《해암,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오?! 해암이 그만 취했소그려.》

박위는 단정하게 올방자를 고이고앉은채 무겁게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그건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소. 이왕 말부리를 헐어놓은김에 내 몇마디 더 하리다.

솔직히 말한다면 백운은 지금 송헌대감도 무섭고 대마도원정도 두렵고 역적소리가 묻어다니는 이 박위와 술을 마시는것도 껄끄럼할게요.

그대는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변했소?

옛적의 그 정갈하고 의기양양하던 최칠석은 어디로 갔느냐 말이요.

하기야 누구를 탓할것도 없지.

요즘 세월이야 묘하게 인생의 노를 저어가면서 자기가 탄 배를 깨지 않는자가 현명한 재사로 인정되는 때이니 백운도 역시 그렇게 사는거겠지…

하지만 나는 세상이 모두 미련둥이라고 흉을 보고 촌보리동지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옛모양대로 살아가겠소.

내 손으로 내 인생의 보습을 틀어쥐고 험악한 삶의 들판을 갈아엎으며 희망의 씨앗을 묻어나가겠단 말이요.…》

《…》

《하고보면 그대와 나는 물과 불처럼 도무지 어울릴수 없는 사람이요.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도 판판 다른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피차 거치장스럽게 우의라는 화려한 외피는 해서 무얼 하겠소.

속시원히 벗어던지는것이 홀가분할게요. 오늘로써 우리 영영 작별을 합세.

일후로는 내가 다시 이 집에 발길을 안할테니 그러더라도 어찌 생각지 마오.

그렇게 알고 난 그만 가겠소.》

박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혀 뜻밖의 결별선언에 깜짝 놀란 칠석은 반사적으로 튀여일어났다.

박위의 팔소매를 틀어잡으며 노기에 젖어 웨치였다.

《해암, 이 무슨 망녕이요? 취해도 류만부동이고 주정을 해도 한도가 있는게 아니요.》

《취중의 망녕이라면 작히나 좋겠소.

나는 그대에게 더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이요.》

점잖게 칠석의 손을 털어버린 박위는 사랑채 문을 밀어제끼였다.

그 순간 만월대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였다.

불시에 궁궐쪽의 밤하늘이 빨갛게 타올랐다. 박위는 문지방을 넘어서다말고 칠석에게 놀란 눈길을 돌리였다.

《이게 무슨 일이요?!》

칠석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아마 불놀이를 구경하시는 모양이요.》

박위는 더욱 놀라워 커다랗게 눈을 흡떴다.

박위도 궁중의 불놀이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연등회나 팔관회와 마찬가지로 오랜 연원을 가진 불놀이는 궁중의 주요행사중의 하나로서 궁중행사전반이 그러하듯 막대한 비용이 드는 놀이였다.

불놀이는 매번 궁궐의 후원과 뒤산에서 진행되는데 후원에서 먼저 석류황, 염초, 반묘, 버드나무재 같은것을 두터운 종이에 싸서 만든 폭발물질을 터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여러 줄기의 불기둥이 솟구쳐 오를 때면 수천개, 지어 수만개의 불화살을 묻어놓은 뒤산마루에도 불이 달린다.

불이 당긴 화살들이 길게 꼬리를 끌며 무수히 밤하늘로 솟구쳐오른다.

밤하늘은 온통 불화살에 덮이여 눈이 시글 정도로 번쩍거린다.

이 정도의 불놀이는 그래도 작은 폭이다.

대판으로 벌릴 때면 이외에도 후원복판에 보퉁이를 매단 장대들을 수없이 세워놓고 불을 다는데 그때면 보퉁이속에서도 불화살들이 홱홱 날아오른다.

돌로 깎아만든 커다란 거부기들의 입에서도 불줄기와 연기타래가 쉬임없이 쏟아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넓다란 풀밭에서 일어난 불길은 마치 화공이 커다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꽃모양, 새모양, 포도송이모양을 그리며 기묘하게 퍼져나간다.

이때라 갈파리떼처럼 쏟아져나온 광대들은 불붙는 풀판을 이리저리 뛰여넘으며 절묘한 춤가락을 펼친다.

임금은 2품이상의 문무량반들과 함께 후원의 솔숲에 들어앉아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밤늦도록 재미있게 불놀이를 구경한다.…

오늘 불놀이도 대판으로 벌어진듯 왕궁쪽에서는 연해 폭발소리가 울리고 련속 불기둥과 불화살들이 솟구쳐올랐다.

왕궁쪽의 하늘은 통으로 타번지는듯싶은데 그 장엄한 화광은 여기 남산재에까지 번뜩번뜩 날아들었다.

하염없이 궁궐쪽의 하늘을 바라보던 박위는 허청비청 퇴마루를 내려섰다.

근래에 이르러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불놀이였다.

헌데 어떻게 되여 세월도 어수선하고 나라와 백성들도 어렵게 살아가는 이때 랑비밖에 가져오는것이 없는 저 불놀이가 다시 생겨났는가.

과연 어느 누가 오늘의 불놀이를 기안하고 추진했는가.

그 사람은 두말할것도 없이 리성계일것이다.

성계는 분명 임금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명목밑에 자기파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저렇듯 야단스러운 놀음을 벌려놓은것이였다.

(아! 단지 몇몇 관리들의 흥과 위세를 돋구기 위해 이 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이 피와 땀을 몰부어만든 귀중한 화약을 하루밤새 수천근이나 태워버린다는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한심한 일인가.

이제 와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팔이 아니라 온몸이라도 태우겠다던 송헌대감의 말을, 백성들의 생활이 추설 때까지 대마도원정을 미루자던 리성계의 말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박위는 술이 아니라 너무나 무거운 번민에 취하여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대문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새로 일떠선 도 평의사사의 으리으리한 건물이 우렷이 떠올랐다.

흐리지도 않은 하늘을 쳐다보며 된소나기가 터질 조짐이노라고 탄식하던 끝에 누런 눈물을 줄줄 흘리던 리색의 암울한 얼굴도 생생히 안겨왔다.

화사스럽게 꾸민 방안모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게 차리고 앉아있던 리성계의 모습도 얼찐얼찐 비껴왔다.

침착한 얼굴표정과는 달리 불안과 긴장감을 띄고 쉬임없이 돌아가던 리성계의 꾀어린 눈동자, 나라와 백성들에게 거대한 덕행이라도 베풀듯이 고아대던 그의 열띤 음성도 상기되였다.

리성계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위해서 사는 인간인가?!…

박위는 비로소 자신이 리성계에게 우롱과 기만을 당했다는것을 통감하였다.

그러자 학질에라도 걸린듯 전신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머리속에서 날벌레의 나래소리같은것이 윙윙 울리였다.

행랑방의 퇴마루에 걸터앉아 연송 탄성을 질러가며 왕궁쪽의 하늘을 재미있게 구경하고있던 여삼은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박위를 띠여보자 덴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곤두박질하듯 달려와 박위를 부축해주었다. 박위는 여삼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나서 몇번이나 헛발질을 하던 끝에 가까스로 말우에 올라앉았다.

극심한 좌절감과 소외감을 안은채 아직도 이글이글 타번지는 왕궁쪽의 하늘을 추연히 바라보던 박위는 제 듣기에도 구슬픈 음조로 옛시 한수를 뜨직뜨직 읊어내리였다.

 

하늘은 옛하늘 그대로건만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요

달은 명월이로되

사람들은 밝지 못하구나

 

《어허! 그러니 내 이제 누구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고 누구와 더불어 장부의 큰뜻을 이루리오.》

4

4

 

일전에 현중을 치료해준바 있는 늙은 의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든 병은 병자의 육체와 함께 정신까지도 심히 해치는데 그것으로 하여 마음속에 든 병은 육체에 든 병보다 훨씬 더 나쁘고 위험한것이였다.

그 의원의 말은 기실 적지 않게 난해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아주 무시해버릴만큼 허무맹랑한 견해라고 볼수는 없었다.

개경에 올라가 여적 받아본적 없는 심대한 정신적타격을 받은 박위는 군영에 돌아오자 예전의 그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과격한 언행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현상이 혹시 그 의원이 말한것처럼 마음속에 든 병이 정신까지 침해한 경우라고 봐야 하지 않을가?!…

아무튼 요즘 박위는 별치 않은 일을 놓고도 짜증을 내거나 화증을 터치였으며 뻔드름한 리치앞에서도 생억지를 쓰거나 우격다짐을 들이댔다.

평소에는 위엄기가 있기는 해도 늘 밝은 표정으로 누구나 너그럽게 대해주던 박위, 장교들은 간혹 드세게 다불러대도 군졸들은 하냥 부드럽게 살펴주던 박위가 이 어인 일인가?…

사람들은 모두 뻥뻥해지였다.

단지 어리둥절해지기만 한것이 아니였다.

원체 윤통의 딱딱하고 팩팩한 성미만 겪자고 해도 숨이 가쁠 지경인데 전에없이 드세지고 다급해지고 사나워지기까지 한 박위의 단근질까지 겹하여 당하자니 군사들은 노상 꽁무니에 불이 달려가지고 진둥한둥 드달아다니였다.

이제 와서 장교들은 물론 군사들과 여삼이, 지어 현중이까지 되도록이면 박위에게 걸려들지 않기 위해 슬슬 눈치를 살피며 뒤를 사리군 했다.

오천은 된꾸중을 당할것이 두려워선지 아니면 사랑놀음에 더욱 깨가 쏟아지는지 아예 박위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박위자신도 과하다못해 사납게까지 번져가는 자기의 언행이 원정준비를 다그치는 필수적인 방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경 박위의 가슴속에서 항시 우글거리는 그 어떤 울화와 초조감의 폭발인 동시에 때없이 밀려드는 좌절감과 공허감을 뿌리쳐보려는 충동적이면서도 서뿌른 시도에 불과했다.

박위는 스스로도 자기의 극적인 변화가 어느 정도 불만스러웠으나 그것을 쉬이 시정하거나 다잡을수 없었다.

오늘 아침도 일찌감치 염초장에 나간 박위는 산산하게 식어있는 염초가마앞에 퍼더앉은 구서방을 띠여보자 대바람 불호령을 터치였다.

《이놈들아! 하루 고기잡고 사흘 그물 말리는 격으로 일을 해서야 어느 하가에 염초를 다 뽑는단 말이냐?

이렇게 굼벵이 천장하듯 하다가 일이 터지게 되면 화포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쏠테냐? 고이현―》

염초장사람들은 경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구석쪽으로 비실비실 가재걸음을 놓았다.

그래도 말주먹질깨나 한다고 으시대는 옥보가 용케 용기를 내여 박위앞에 다가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네들은 지금 염초감대기가 제때에 썩썩 닿지 못해서 별로 일축을 못내고있습니다.

하오나 이제 감대기만 나지면 밀린 일을 열배로 벌충하겠소이다.》

제딴에는 사리정연하게 염초장의 형편을 알리고 앞날의 결심도 아뢰였다고 생각한 옥보가 자신있게 고개를 들어올리는찰나 머리우에서 다시 천둥이 울었다.

《무엇이 어째? 네 이놈! 지금껏 얻어내지 못한 염초감대기가 불시에 하늘에서 떨어져내린다더냐?

설혹 어느때인가 떨어져내린다 한들 그때까지 너희들은 빈절에 구렝이 꾀듯 모여들어서 그냥 공념불만 하고있을셈이냐?》

옥보의 긴 목이 대번에 쑥 들어가버리였다.

노기띤 얼굴로 염초장안을 휘뚜루 둘러보던 박위는 거친 청으로 말을 이었다.

《오천이란 놈은 어째서 오늘도 보이지 않느냐? 요즘도 되지 못하게 계집을 끼고 산놀이를 다닌다더냐?

워낙 그놈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못쓰겠구나.

이봐라 여삼아, 이제 오천이라는 놈이 나타나거든 그 당장 오라를 지워서 내 앞에 끌어오너라. 알겠느냐?》

《알겠소이다.》

여삼은 습관적으로 제꺽 대답을 했으나 오천에게 오라를 지우라는것은 너무도 난처한 분부라 얄팍한 입술을 헤벌린채 말뚝처럼 굳어져버리였다.

구서방을 위시한 염초장사람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리였다.

이어 배무이장으로 나간 박위는 거기서도 또 한바탕 야단복장을 놓았다.

《이게 도대체 어느때부터 시작한 일인데 아직까지도 배는 보이지 않고 왼통 뼈다귀같은것들만 널려서있느냐.

네놈들은 밥이 아니라 거미장을 지져먹고 나와서 일을 하느냐?》

그러자 된욕도 잘 타지 않고 조롱이나 야유 같은것도 시물시물 웃어넘기군 하는 키 꺽두룩한 군졸 하나가 말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있게 박위앞에 나섰다.

그는 어느 대가집에서 주로 목수일을 하다가 군졸로 뽑혔는데 신통치 않은 목수재간이 장교들의 눈에 걸리여 곧장 배무이장으로 떠밀려나온 사람이였다.

막생기기는 했으나 무척 선량해보이는 그는 노상 셈평이 유하여 동료들로부터 《만사태평》이라는 별명을 얻어가지였다.

박위앞에 나선 지금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고 한없이 느려빠진 어조로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지금처럼 일이 더디되는것은 소인네들이 거미장을 지져먹은탓이 아니오라 배무이재로 쓸 나무가 속속 닿지 못하는 까닭이오이다.

소인네들도 너무 안타까워 어제 중낮에는 배무이재로 쓸만 한 상무리나무(너도밤나무)가 한벌 쭉 깔려있다는 쇠풀골로 밀려갔댔소이다.

헌데 관가의 아전들이 미리 쇠풀골에 결진을 하고있다가 〈이곳의 나무는 동헌개축에 쓸것이니 다치지 못한다.〉고 욱대기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되밀려 왔소이다.》

《만사태평》의 다소 능갈친 대답말이 끝나기 바쁘게 박위는 벌컥 화증을 터치였다.

《에끼! 순 밥병신같은것들! 도끼를 둘러메고 산에까지 갔다가 관가것들에게 쫓겨서 되온단 말이냐!

그래 네놈들은 전함을 뭇는 일이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이란 말이냐?

페일언하고 오늘 해중에 쇠풀골의 나무를 말짱 베다가 내앞에 쌓아놓아라.

그렇지 않다간 네놈들의 다리정갱이를 죄다 분질러내칠테니 그리 알아라!》

일이 늦어진 책임을 슬그머니 관가 아전들에게 넘겨씌우려던 《만사태평》은 금방 어깨가 축 꺼져내리여 뻐꾹소리 한마디 잇대지 못했다.

군사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뿔뿔이 흩어져가자 박위는 할바를 망각한 사람마냥 우두커니 굳어져버리였다.

가는 곳마다 호령을 터치고 을러멨으나 속은 조금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아니, 갈수록 더욱 답답해나고 무죽해났다.

박위의 눅눅한 뇌리속으로는 불현듯 개경에 갔을 때 군자시(군수품의 저장보관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 잠시잠간 들리여 목격했던 그곳 량반들의 유들유들한 모습이 떠올랐다.

…박위가 군자시대문안에 들어서니 앞마당 구석에 박혀있는 향오동나무밑에서 한유하게 바둑을 두고있는 군자시량반들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얼추 보아도 몸이 너무 나서 숨이 차보이는 소윤(군자시의 벼슬아치)은 박위를 띠여보자 어색해하거나 당황해하기는커녕 태연하게 인사말을 건네고나서 다시 바둑판에 고개를 구겨박았다.

이 소윤이라는 작자가 바로 구워서도 데쳐서도 먹을수 없는 소가죽같이 질긴 사람이요, 능구렝이같이 흉물스러운 인물임을 박위는 이미 알고있었다.

박위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딱히 책 잡을 건덕지도 없고 그럴만한 상대도 아니여서 끓어오르는 부레를 애써 눌러참았다.

바둑판에 다가선 박위는 눈앞으로 날아드는 한쌍의 노랑나비를 휘휘 밀어던지고나서 찾아온 연유를 꺼내놓았다.

《소윤, 상경했던 길에 우리 군영에 화약을 좀 돌려줄수 없겠는가 알아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소.

그래 어떠시우? 군자시의 화약형편이?…》

소윤은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살집좋은 얼굴을 바둑판우에 드리운채 배포유하게 대답했다.

《화약광이 동이 난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화약소리를 하시우? 허허 참.》

박위의 속에서 주먹같은것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아니, 어제 밤 불놀이때에는 숱한 화약이 터지던데… 그게 여기서 나간게 아니란 말이요?! 그게야 오늘 죽은 사람 어제 장례지냈다는 소리나 비슷한 말이 아니요?!》

박위는 다소 흥분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극력 삼가해야 할 말을 꺼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최칠석이같은 사람조차 매사에 조심을 두고 사는 요즘세월에 거의나 파악이 없는 군자시량반들앞에서 임금과 리성계를 념두에 두고 시비를 캔다는것은 저으기 위험한 일이였다.

그러나 박위는 자신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나이로 세상에 나서 진실을 말하기도 두렵고 속생각을 터놓기도 무섭다면 과연 무슨 큰 일을 하겠는가.

《아니, 그건 대체 뉘게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요?》

아니나다를가 소윤은 박위의 말꼬리를 후리쳐잡더니 염소눈처럼 노란 눈알을 디굴리며 고개를 들었다.

《박장군도 병이나 재앙이 입을 거쳐 들어온다는 말을 모르지 않을 텐데…

궁중행사에 쓰인 화약을 두고 옴니암니 시비를 캐서야 일이 되겠소?

그리구 군자시의 업무는 병부에서 간참할 일도 아니고 군영의 일개 원수가 캐고 따질 문제도 아니요.

어련하겠지만 일후로는 분수에 넘치는 일은 삼가하는게 좋을듯 하오.》

소윤은 제법 훈계조로 오금이라도 박듯 말했다.

그의 속심인즉 임금과 리성계의 위엄을 빌어 올적마다 시끄럽게 구는 박위를 한시바삐 떠밀어보내려는것이였다.

박위는 소윤의 내속이 빤히 들여다보였으나 새암바리계집처럼 속이 꼬부라든 그와 시야비야 하고싶지 않았다.

박위가 제일로 관심하는것은 역시 화약이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줄 화약은 한근도 없다는 말이겠소?!》

《그렇소. 쌓아놓고 주지 않는게 아니라 없어서 못 주겠단 말씀이요.》

소윤은 다시금 잔뜩 가로꿰진 소리를 하고나서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박위는 속이 왈칵 치밀어올랐다.

군자시량반들의 너무도 무책임하고 라태한 태도를 그냥 내버려둘수 없었다.

《여보 소윤, 지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왜구들의 침노가 그칠새 없어 매일과 같이 백성들의 원성과 곡성이 랑자한데 공들은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면서 모든 허실을 말휘갑질로 굼때려 하니 이래서야 되겠소?》

《아니, 말휘갑질이라니 그건 누구보고 하는 소리요?》

다시 고개를 쳐든 소윤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튕기였다.

박위는 소윤을 맞바로 쳐다보며 더욱 청을 높이였다.

《누구긴 누구겠소? 바로 당신보고 하는 소리요.

사실말이지 당신들처럼 한유하고 무사태평한 무관들이 이 나라에 천이 있으면 무엇하고 만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요?

우로는 비위를 맞추고 아래는 내리누르며 잡스러운 놀음으로 허송세월하는 당신들같은 무관들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왜구를 잡지 못하고있는게요.

전하의 대해같은 은혜를 입어 조정의 벼슬을 하고 나라의 록을 타는 당신들이 오늘날 정녕 이렇게 살아야 옳겠소?》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소윤은 독기서린 눈길을 스르시 내리깔았다.

같지않은 시골의 무관따위가 으르딱딱거리는 꼴은 장히 비위에 거슬렸으나 아침부터 관청앞마당에 바둑판을 펴놓은것은 역시 떳떳치 못한 일이였다.

자칫하다가는 도리여 박위에게 뒤덜미를 잡힐것 같았다.

소윤은 슬며시 고개를 외로 비틀며 쑤얼거리였다.

《…하도 속이 답답해서 바둑판을 펼쳤던것인데 책망이 너무 과하구려.

우리도 판을 거둘테니 장군도 그쯤해주시우.》

소윤의 말투는 뻣뻣하고 유들유들했으나 한손접고 물러서는 뜻이 분명했다. 사실 이들과 더 말해봤대야 리속은 없고 속만 더 졸아들것 같았다.

박위는 건성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나서 군자시를 나섰다.

그 걸음으로 공조서(왕정귀족들의 각종 가구제작을 맡은 관영 수공업장)뒤쪽에 무성한 살구나무로 담을 두른 최무선의 집으로 갔다.

수년전 력사적인 진포해전을 준비할 때부터 친교를 가지고있던 최무선에게 화약을 부탁해보려는것이였다.

최무선은 화약과 화포를 발명한 학자인 동시에 라세장군과 함께 진포해전에 부원수로 참전하여 왜구들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한 유명한 군사지휘관이였다.

박위가 무선의 조촐한 사랑방에 들어서니 왕년의 혈기방장하던 장군은 로환으로 앓고있었다.

허나 로인의 애국적열정과 기개는 예나 다름없이 펄펄했다.

그는 박위가 화약소리를 꺼내자마자 이마를 동이였던 수건을 풀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의 침착하고 안존한 성미와는 달리 분주스럽게 설치고 돌아갔다.

하인들을 시켜 자기 집의 화약광을 반반히 쓸어내게 하는가하면 화통도감으로 사람을 띄워 자기의 옛 직분과 명망으로 얻을수 있는껏 화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로인의 성의와 수선에 비해 모아진 화약은 많지 않았으나 그 화약에는 분명 최무선의 뜨거운 애국심과 변함없는 우의가 어려있어서 바라볼수록 가슴이 미여져올랐다.

박위는 거듭 사의를 표하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최무선은 고집스럽게 박위를 눌러앉히더니 빈한한 자기 집살림을 털어내다싶이 하여 주안상을 차리게 했다. 차려내온 주안상은 그런대로 풍성해보였으나 무엇인가 못마땅하여 서성거리던 최무선은 터밭에 나가 수전증이 이는 손으로 오이와 참외를 한아름이나 따들여왔다.

칠석의 집에서는 수라상같은 주안상을 마주하고도 칠석의 어질더분해진 속마음이 가슴에 마쳐와 쾌하게 술을 마실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세월의 풍랑속에서도 변함없는 로인의 성실하고 정갈한 마음이 가슴을 지지여 쉬이 술을 넘길수 없었다.

무선은 병환으로 하여 전혀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술마신 사람보다 더 흥분하여 대마도원정을 기어이 승리적으로 단행할것과 예전에 자기가 부리던 오천을 부디 잘 키워줄것을 재삼재사 당부했다.

박위는 석양이 비낄무렵에야 무선의 집을 나섰다. 개경에 올라온 뒤내내 무거운 기분에 짓눌려있던 박위는 무선의 집에 와서야 비로소 한가닥의 기쁨과 환희를 맛볼수 있었다.…

5

5

 

맴 매앰 맴―

느티나무의 우듬지에서 귀따거운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리고있었다.

그 자지러진 소리에 그만 기혼이라도 하였는지 이따금 나무가지속에서 손가락만큼이나 큰 청벌레들이 뚝뚝 떨어지였다. 징그럽게 구불거리며 나딩굴었다.

박위는 아까부터 누구인가 자기의 등뒤에서 서성거리고있다는것을 감촉했으나 깊은 고뇌에 눌리워 그에 관심을 돌릴수가 없었다.

한참후에야 사색에서 채 헤여나지 못한 흐릿한 시선을 등뒤로 돌리였다.

뜻밖에도 부원수 윤통이 시꺼먼 얼굴을 짓수굿한채 무슨 생각엔가 옴해있었다.

윤통이가 사색에 잠긴것도 의아했지만 그의 얼굴이 흐려있는것도 의아쩍었다.

내내 호랑이의 간이라도 빼올것처럼 딩딩해서 돌아가던 그가 어떻게 되여 갑자기 후줄근해졌는가.

박위는 부드러운 어조로 나직이 물었다.

《부원수는 어디 갔다오는 길이요?》

《둔전을 한바퀴 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윤통의 말소리는 첫술부터 곱지 못했다.

(둔전을 돌아보았다?!)

박위의 기분은 삽시에 흐려지였다.

박위는 요즘 군영군사들 거의 전부가 둔전에 붙박이로 나가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신입군졸들까지 교련을 전페하다싶이하고 수수밭으로 밀려다니는것을 볼 때마다 박위는 어느때든 한번 윤통을 단단히 책망하리라 벼르군 했다.

허나 요즘 줄창 바다가에 나가 살다싶이 하는데다 기분 또한 무겁고 착잡한 까닭에 윤통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까박까박 잊어버리군 하여 지금껏 벼르기만 하고 추궁을 하지 못했었다.

윤통이자신이 제발로 찾아와 둔전소리를 꺼림없이 꺼내놓는 지금 더이상 태만에 가까운 그의 과실을 용허할수 없었다.

노상 속이 시꺼멓게 타있는 박위라 입을 여니 대바람 몰풍스러운 소리가 쏟아져나왔다.

《그러니 여직껏 수수밭 김은 채 잡지 못했단 말이겠소?!》

《예, 보리농사라는건 한해농사가 시원치 못해 태반이 쭉정이라 골라골라 베느라니 자연히 일이 더디되고 수수밭이나 조밭은 범이 새끼를 칠 지경으로 풀이 무성해서 썩썩 일축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 일이 끝나겠는지 아직은 겉가량도 할수 없습니다.》

윤통은 아무런 자책감도 없이 제쪽에서 도리여 못마땅한투로 대답했다.

《그러니 부원수는 군사들을 장참 둔전에만 비끄러매둘 심산이요?

우리 군사들을 전부 농군으로 돌려앉힐 작정인가 말이요?》

《그럴리야 있습니까. 군사들의 수효는 날을 따라 늘어나는데 관가에서 보내주는 군량으로는 어방없이 모자라니 자연 농사일에 무관할수 없습니다.

군사들도 우선 먹어야 사는게고…》

박위는 뒤로 돌려잡았던 주먹을 앞으로 쭉 내뻗치며 윤통의 어정쩡한 소리를 중도에서 무질러버리였다.

《여보 부원수, 군사는 먹자고 사는게 아니라 싸우자고 먹는게요.

농사일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싸움준비보다 더 중할수는 없소.

나는 우선 부원수의 전에없던 그 태만이 리해되지 않소.

농사일같은거야 번을 짜서 교대로 하든가 싸움에 나설수 없는 나배기군사들을 따로 골라 시킬수도 있는데 무엇때문에 참깨, 들깨 다 섞어가지고 한대중으로 내모는거요? 우리 군사들은 태반이 신출내기들인데 활이나 검이 익숙치 못한 손에 다시 호미, 낫 같은것을 한가득 들려놓았으니 이제 싸움이 나면 농쟁기들을 휘두르게 하겠소?

부원수가 그런 리치를 모를 사람인가?

대체 어떻게 되여 그런 암담한 생각을 가지게 되였소? 우선 그것부터 말 좀 해보우.》

윤통의 거무틱틱한 얼굴에 다시 못마땅한 기색이 뚜렷이 떠올랐다.

박위는 근간에 이르러 너무나 달라진 윤통이 불만스럽기 전에 무척 의아쩍었다.

(사람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조급하고 팩팩하기는 하나 진실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부원수가 어째서 이렇게 엇드레질, 뜸베질을 하는가?

윤통이 워낙 그런 사람인것을 내 여직껏 가려보지 못했는가?…)

이 시각 윤통은 윤통이대로 자기의 인생에서 일찌기 겪어보지 못한 중난한 번민에 시달리고있었다.

얼마전 윤통은 삼촌의 졸곡제사(죽은지 석달만에 지내는 제사)를 보려고 창원에 내려왔던 최칠석의 하인으로부터 칠석이가 보내는 비밀한 편지를 받았었다.

윤통은 최칠석이가 현임재상이요, 자기의 삼촌인 윤소종의 문생인것으로 하여 대강 면목은 알고있었다.

하지만 칠석은 어디까지나 박위의 벗이였다.

헌데 칠석이 무엇때문에 박위가 아니라 자기에게 그것도 비밀히 편지를 보낸단 말인가?…

칠석의 편지는 대략 이러했다.

《…부원수도 잘 알다싶이 해암은 나의 둘도 없는 지우지만 그에 앞서 이 나라에 없어서는 안될 기둥뿌리 장수들중의 한사람이요.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해암을 모해할 목적으로 괴이한 소문을 지어돌리고있소.

소문인즉 박위가 대마도원정준비를 차린다는 허울뒤에서 왕권을 뒤집어엎을 반정을 준비한다는거요.

나는 물론 그따위 헛소문을 절대 믿지 않소만 조정백관의 심정이 다 나와 같을수야 없지 않소.

소문이 돌고돌던 끝에 그것이 조의(조정의 견해)처럼 굳어진다면 장차 어떤 화단이 생길것인가는 부원수도 십분 짐작할게요.

지금 나도는 소문만 해도 아짜아짜한데 요즘 군자시의 소윤이 들고 일어나 박위가 군자시관리들을 참혹하게 모욕하던 끝에 임금과 리대감을 비방하였다고 먹어대여 일은 한층 더 복잡해질듯 하오.

…내 이미 해암이 개경에 왔을 때 원정준비를 일시 덮어두는것이 좋으리라고 권유했으나 종시 받아들이지 않았소.

아니, 도리여 절교를 선언하는것으로 가슴아픈 대답을 하였소.

해암의 성격이 강직함은 이미 알지만 그렇게까지 강경하고 무자비하게 나올줄은 미처 예기치 못했댔소.

…누가 뭐라든 나는 여전히 해암을 나의 소중한 지우로, 이 나라의 귀중한 장수로 깊이 존경하고 사랑하오.

부원수의 심정 역시 나와 다를바 없으리라 생각하오.

하오니 부원수가 해암의 곁에서 사사건건 심중히 조처하여 모쪼록 불길한 일이 나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오.

물론 해암은 쉽게 자기의 결심을 철회하려 하지는 않을거요.

그렇다고 하여 해암의 머리우에 날벼락이 떨어질것을 번연히 알면서 곱게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한다면 그대나 나나 어찌 우의와 도의를 아는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소.

나는 물론 여기서 할수 있는껏 일을 바로잡아보겠지만 가까이에 있는 부원수가 더 애를 써야 할줄로 아오.

되도록이면 원정준비를 뒤로 미루게 함으로써 박장군의 창창한 앞길에 사소한 랑패도 없도록 해주오.…》

편지를 다 읽고난 윤통은 너무나 기가 막히여 한참이나 후들후들 몸을 떨었다. 박위에 대한 칠석의 우의에 감동되기 전에 박위를 모해하려 한다는 은페된 음모군들이 찢어발기고싶도록 가증스러웠다.

(아마 나만큼 박장군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게다.

헌데 그리도 나라일, 군사일에 극성이고 그리도 사람들앞에 결곡한 박장군이 역신음모를 꾸민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대체 어떤 개아들놈이 그따위 말방귀같은 헛소문을 지어냈을가?…

가만있거라, 그게 혹시 조호백의 작간이 아닐가?!…)

윤통의 창끝처럼 날카로와진 신경은 아무런 론리적련관도 없이 호백이쪽으로 쏠리였다.

그러자 대뜸 호백이가 헛소문을 날조하여 조정에 꽂아넣었을것이라는 제나름의 견해가 굳어지였다.

당장 읍으로 짓쳐나가 호백의 멱살을 끌어내고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개 고을의 관장을 마구다지로 죄인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절대로 소란을 피우지 말라던 칠석의 당부도 무시할수 없었다.

강렬한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이번에는 박위에 대한 경탄이 새삼스레 솟아올랐다.

(그러니 박장군은 조정에서 나돈다는 험한 소문을 알고있으면서 아무 내색없이 원정준비를 계속 내밀고있지 않는가!…

조정의 여론이 심화되면 자기의 신세를 망치게 된다는것을 뻔히 알면서도…

실로 박위라는 인간이 난 사람은 난 사람이로다.

헌데 그처럼 강건한 장수가 터무니없는 험턱을 쓰고 군직에서 밀려나게 된다면 밀직부사나 내가 가슴아픈것은 차치하고 우리 고려군에

얼마나 큰 손실인가!…

절대로 일이 그렇게 번져지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온몸을 내대서라도 박장군에게 밀려드는 음산한 비구름을 제껴버려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밀직부사의 말대로 원정준비를 당분간이라도 덮어두게 하는것이 상책인데 박장군이 내가 권유한다고 하여 쉽사리 마음을 돌려먹겠는가?…)

윤통은 자기의 신상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대마도원정의 제창자, 지휘자는 어디까지나 박위인것만큼 그 어떤 변이 생긴다면 모든 죄는 박위에게 쏠리기마련이였다.

그런데다 윤통의 가문은 대대로 개경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는 문벌좋은 집안이였다.

윤통의 당삼촌인 윤소종만 놓고봐도 그는 현재 조정의 재상으로서 리성계의 각별한 애중을 받는 뜨르르한 량반이였다.

물론 윤소종은 제 조카를 가문에 없는 무식한 무관놈이라고 실큼하게 여기고 윤통은 저대로 제 삼촌을 권력자의 사타구니에 붙어 대궁밥을 얻어먹는 비루한 인간이라고 시큰둥하게 여기는 까닭에 두사람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허나 그들의 관계가 어떠하든 지금 한창 기름진 몸뚱이에 날개까지 돋혀가지고 무서운것없이 퍼덕거리는 재상의 당조카를 해치려고 날뛰는 얼빠진 작자는 없을것이였다.

하기에 윤통은 오직 박위의 운명을 두고 머리를 썩이였다.

그러던중 마침내 제나름의 그럴사한 궁냥을 떠올리였다.

다음날부터 윤통은 자기의 궁냥을 행동으로 옮기였다. 그는 우선 수하의 군사들을 김매기와 가을을 핑게로 전부 둔전에 내몰았다.

벼락에는 바가지라도 뒤집어쓴다고 지금 당장 원정준비의 분위기를 다소라도 해소시키려면 그런 방법이라도 써야 했다.

그 다음은 박위에게 이른바 최후통첩을 들이댈판이였다.

헌데 최후통첩이라는것이 자기의 진심에서 우러나온것이 아니라 순수 전략적인 수단에 불과한것이라 정작 실행하자니 솔직하고 고지식한 윤통으로서는 여간만 괴롭지 않았다.

며칠을 바재이던 윤통은 박위를 주저앉히려면 최후통첩을 하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재삼재사 자신을 납득시키고나서 오늘 드디여 박위앞에 나선것이였다.…

…헌데 정작 박위와 마주서고보니 자기의 최후통첩이라는것이 그지없이 범박하고 유치한 아이들의 놀음같은것이여서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다 박위가 먼저 둔전문제를 걸고 된우박을 퍼붓자 천백번 정당한 그의 추궁에 대거리도 할수 없었고 최후통첩은 더구나 꺼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윤통은 누구앞에서나 자기 할말은 하고야마는 사람이였다.

이 마당에서 마음을 늦추고 뒤로 물러선다면 자기의 비밀한 작전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갈것이였다.

모질게 마음을 도슬러먹은 윤통은 마침내 짓물었던 입술귀를 풀며 최후통첩의 서두를 떼놓았다.

《하관은 지금까지 장군의 높은 뜻과 강건한 의지를 누구보다 깊이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하관의 마음은 이제 와서 전혀 달라졌습니다.》

윤통의 착잡한 심사와 비밀한 궁냥을 알리없는 박위는 그의 단도직입적인 소리에 흠칫 놀라기까지 하였다.

《그건 어떻게 하는 소리요?!》

워낙 말주변이 없는 윤통은 이렇다할 전제도 없이 제창 문제의 정면으로 돌입했다.

《지금 조정에서는 우리 군영의 원정준비를 두고 반정준비라 한다는데 어쩌면 그럴수 있습니까!

옛적부터 도와주는 손은 적고 시비하는 입은 많다고 하지만 이건 시비를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박위는 윤통의 전에없던 언행이 어디에 뿌리를 둔것인지 비로소 환하게 헤아려지였다.

윤통이 어디서 반정소문을 얻어들었는지 자못 의문스러웠다.

이제 그 소문이 군영에 퍼지여 장교들과 군졸들까지 알게 되면 위불없이 그들의 기세도 쭈그러들것이라고 생각하니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흥분한 윤통은 점점 더 청을 높이였다.

《하관은 참을수 없습니다. 더이상 데데한 소문을 뒤에 달고 다니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그러니 부원수는 어쩌겠다는거요?》

박위의 청수한 얼굴은 컴컴하게 흐려들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아까

보다 훨씬 더 침착하고 부드러웠다.

윤통은 커다란 주먹으로 허공을 꾹꾹 찌르며 다시 말을 잇는데 지나치게 흥분한탓인지 그의 말은 박위의 물음에 전혀 동닿지 않았다.

《우리가 대마도를 공격하자는것은 국치를 씻고 국난을 막으며 국명을 떨치자는건데 여기에 어떻게 역적모의라는 딱지가 붙을수 있습니까?》

《부원수, 우리의 뜻이 정당하고 우리의 마음이 결백한데야 무엇이 두려울것 있소?》

《아무리 뜻이 정당하고 마음이 청청하다 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데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무엇때문에 하지 않아도 별일 없을것을 부등부등 하겠다고 하다가 세상에서 제일 험한 험턱을 들쓰고 신세를 망치겠습니까?》

《그러니까 부원수는 헛소문이 무서워서 원정을 포기하자는거요?》

《포기하자는게 아니라 껄렁한 소문이 잦아들 때까지 덮어두자는겁니다.》

《명백히 말해두오만 원정준비는 순간도 덮어둘수 없소.》

《그렇다면… 하관은 소지(관청에 내는 글)를 바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뭐라구?!》

박위는 너무도 예상밖의 타격에 그만 신음소리같은것을 흘리며 입을 딱 벌리였다. 눈앞이 잉그르르 돌아갔다.

윤통의 시꺼먼 얼굴이 둘 혹은 셋으로 보이였다.

지금까지 자기의 오른팔로 확고하게 믿어온 부원수가 정면으로 원정준비를 반대하던 끝에 모든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겠다고 할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박위였다.

과연 복은 외곬으로 오고 화는 쌍으로 든다고 한 옛사람들의 말은 틀린것이 아니였다.

리성계를 위시한 조정의 일부 량반들은 원정준비를 도와주기는커녕 요리저리 발뺌을 하고 지어 엄청난 모해까지 하려드는데 누구보다 든든하게 자기 뒤를 받쳐줄줄 알았던 윤통은 주저없이 탈퇴를 선언하지 않는가.

너무도 가혹한 타격이였다.

외로운 섬에 홀로 남은듯 한 극심한 소외감이 몰밀려들면서 전신의 기운이 와르르 풀리였다,

박위는 긴숨을 내불며 멀리 바다가쪽으로 시선을 날리였다.

(인간이란 결국 이런것인가.…

유리한 형세가 조성되면 허장성세하며 분주를 피우다가도 불리하거나 위험한 때에 닥치면 아던정 보던정없이 뒤를 사리는 비루하고 비겁한 존재란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윤통이가 어쩜 이럴수 있는가. 아니, 어쩌면 윤통의 사고방식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대마도원정은 누가 시킨것도 아니요, 누가 간절히 원하는것도 아니다.

무엇때문에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지어는 역신의 험턱까지 들쓰며 끝끝내 고집하겠는가.

이미 백운이 권하였고 지금 윤통이가 주장하는대로 원정을 일시 덮어두거나 포기한다면 나의 육신은 편할것이다.

벼슬자리를 길게 유지하면서 그럭저럭 부귀를 누릴수도 있으리라.)

박위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준수한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안해 최씨와 리옥의 아름다운 자태도 방불하게 다가왔다.

죽촌의 저대로인과 《두부자루》고들이, 백동이 엄마라 부르는 젊은 녀인의 파리한 얼굴모양도 연줄연줄 솟아올랐다.

그들모두는 자기의 개성적인 표정과 각이한 거동으로 무엇인가를 소리없이 격렬하게 호소하고있었다.

박위는 소스라치듯 놀라며 번쩍 눈을 치떴다.

절로 도리머리가 힘차게 저어지였다.

(아니, 그래서는 안된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도 가정도 티끌처럼 바칠것을 맹세하고 검을 잡은 내가 시련과 난관이 닥쳐왔다 하여 겁을 먹고 물러선다면 어느 누가 나를 일러 이 나라의 뜻있는 사내라 하겠는가.

가자, 나 혼자서라도 기어이 가자.

걸음걸음 죽음이 뒤덜미를 당기고 시시각각 츠렁바위, 가시덤불이 앞을 막는다 해도 변함없이 완강하게 돌진해나가자.)

불시에 성이라도 난것처럼 윤통이쪽으로 홱 돌아선 박위는 준절한 어조로 그루를 박아 말하였다.

《부원수의 결심이 진정 그러하다면 내 말리지 않겠소.

나는 누가 뭐라고 하든 설사 죽음이 닥친다 해도 절대로 이 길에서 물러서지 않을테니 부원수는 마음이 내키는대로 하오.

누구보다 깊이 믿었던 또 한사람의 장수가 나와 뜻을 달리한다는것은 그지없이 애석한 일이나 나는 여직껏 마음에 없다는 사람을 억지로 비끄러매둔적은 한번도 없소.》

《아니, 그러니?!…》

이번에는 윤통이가 깜짝 놀라며 떠드박거리던 끝에 종시 말끝을 여물구지 못했다.

사실 윤통은 자기가 사퇴를 원하는 소지를 바치겠다고 하면 박위가 펄쩍 뛰며 팔소매를 당길줄 알았다.

원정을 아예 포기하지는 않는다 해도 (원정의 완전한 포기는 윤통이자신도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음험한 소문이 잦을 때까지 원정준비를 얼마간이라도 덮어두자는 의견은 따를줄 알았었다.

헌데 박위는 여전히 강하게 원정을 주장할뿐아니라 자기의 손을 끌어당기기는커녕 무슨 배신자를 따버리듯 주저없이 결별을 선언하는것이 아닌가.

윤통은 애초의 궁냥이 빗나간것이 아쉽기 전에 서슴없이 자기를 털어버리는 박위의 소위가 원망스러웠다.

무엇인가 억울하기도 하였다.

(박장군이 어쩌면 이럴수 있는가.

아무리 내가 소지를 바치겠다고 한들 한마디의 만류도 없이 대뜸 찬성을 하고 결별을 선언한다는것은 인정으로 봐도 너무 박절한 처사가 아닌가.

그러니 박장군은 이 윤통을 지금껏 그렇게 헐값으로 여겨왔는가?…)

박위에 대한 원망이 한물 슬어들자 이번에는 연하게나마 자기반성감이 떠올랐다.

(나는 우선 박장군을 원망하기 전에 그의 믿음을 도용하여 속에도 없는 최후통첩을 꺼리낌없이 뇌까린 나자신의 너절하고 고약한 심보를 꾸짖는게 옳지 않을가?…)

윤통은 눈살을 찌프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엇인가 남에게 몹쓸짓을 하고난것처럼 기분이 찜찜했다.

대마도원정을 두고 주야로 애면글면하는 박위에게 힘을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그에게 또하나의 아픈 상처를 새겨준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그러자 필사의 의지로 기어이 험난한 길을 헤쳐가려는 박위의 인품이 더욱 돋우보이였다.

그만큼 박위의 운명이 불안스럽기도 했다.

윤통의 발밑으로는 하얀 알을 입에 문 개미들이 길다랗게 행렬을 지어 질서있게 이동하고있었다.

얼마 안있어 비가 내릴 조짐이였다.

6

6

 

아침나절이였다.

대기는 싱그러운 여름내에 푹 젖었는데 대문너머 느티나무의 상가지에서는 방금 잠에서 깨여난 뭇새들이 밤새 저들의 목청에 별다른 고장이 생기지 않았는지 시험이라도 해보는듯 연해 짹짹 우짖고있었다.

자연은 이 땅우에 또 하루의 신선한 아침을 유감없이 펼쳐놓았으나 군영의 장군막 앞뜰에는 사뭇 험악한 공기가 떠돌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 아침, 장군막 앞뜰에서는 근래에 이르러 군영의 군기를 심히 문란시킨 오천을 징계하는 의식이 펼쳐진것이였다.

대청마루에 교자를 내다놓고앉은 박위는 엄엄한 시선으로 웅기중기 모여선 장졸들과 그들앞에 볼기를 까뭉개고 엎드린 오천을 휘뚜루 살펴보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아침나절의 느긋한 바람에 박위의 윤기도는 검은 채수염이 보기 좋게 훨훨 나붓기였다.

박위는 자그마한 입술을 아프게 옥문채 무엇때문인지 자꾸만 물러지려는 자기의 마음을 조여잡느라고 무진애를 쓰고있었다.

최무선이 만날 때마다 잘 키워달라고 신신당부하던 오천이.

자기 역시 한때는 남달리 사랑하고 중히 여겼던 오천이.

그러나 누구의 당부가 어떻든 자기의 예전의 사랑과 믿음이 어찌됐든 현재의 오천은 최무선과 자기의 기대를 저바린 인간, 군기를 문란시킨 죄인이였다.

(자고로 군대안에 군기가 해이되면 군사들의 검에 녹이 오르고 군사들의 검에 녹이 쓸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하거늘 그가 누구든 군기를 문란시키고 군무를 태공했다면 가차없이 벌을 내려야 한다.

죄는 오로지 벌로 다스릴뿐이다.)

결심을 다진 박위는 형형이 빛나는 시선을 대문너머 느티나무쪽으로 보내며 청청한 목청을 터치였다.

《모두들 듣거라. 저 오천이란 놈은 명색이 염초장을 책임진 대정으로서 의당 맡은 중임을 옳게 거행했어야 했노라.

하지만 오천은 염초장일을 자행자지(제 마음대로 했다말았다 한다는 뜻.)하는것은 물론 록산과 죽촌, 구렁과 가야를 비롯한 여러 촌촌과 봉은사와 천관사를 위시한 여러 절간들을 쏘다니며 군기와 군무를 태공하고 원정준비에 막중한 해를 끼쳤노라.

이 어찌 가벼운 죄라 하겠는가.

그런즉 지금 당장 저놈의 대정구실을 떼내치고 큰매 50대를 내리노라.》

박위의 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물에 추긴 참나무몽둥이를 꼬나든 건강한 군사들이 형틀앞으로 대들었다.

《엇사! 엇사!》

먹임소리까지 내며 언거번거로 기운차게 몽둥이를 내리박았다.

오천의 희멀쑥한 볼기짝우에 시꺼먼 먹구렝이가 얼기설기 휘감기였다.

앵두알같이 빨간 피방울이 후둑후둑 튀여나기도 했다.

오천을 지켜보는 군사들은 너나없이 입을 딱 벌리고 후들후들 어깨살을 떨었으나 형틀우에 고개를 구겨박고 엎드리여 무지스러운 매를 맞는 오천은 신음소리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그것이 까닭도 없이 박위의 부아를 더욱 돋구었다.

박위는 집장군사들을 노려보며 재차 령을 내리였다.

《이봐라― 저눔이 아직도 용서해줍시사 하는 소리는커녕 무언으로 앙버틸 때는 매가 무른탓이다.

사그려 조겨라!》

《예잇―》

공연히 악이 치받쳐오른 집장군사들은 더욱 사납게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철썩철썩, 볼기짝우에 떨어지는 매소리는 한층 더 맵짜지였다.

지금껏 숨을 죽이고 서서 형장을 주시하던 장교들과 군사들이 갑자기 바람맞은 물결마냥 설레이기 시작했다.

박위는 반사적으로 장졸들을 휘둘러보았다.

뜻밖에도 자기의 강단있는 일처사에 공감을 표시할줄 알았던 장졸들은 누구라없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있었다.

(오천대정이 실지로 군기를 문란시켰는가?…) 하는 뜻의 의혹에 젖은 얼굴이 있는가 하면 (죄를 범했다쳐도 예전의 공을 아주 돌아보지 않는다면야 경우가 옳게 됐다고 할수 있는가?) 하는 의미의 못마땅한 기색이 실린 얼굴도 보였다.

지어 (오천대정이 허파에 바람이 들어 일시 과실을 범했다 해도 이건 너무 과한 벌이 아닌가?) 하는 의미의 거의 로골적인 반감이 어린 얼굴도 띄웠다.

대돌아래 시립하고있는 여삼은 잔약한 어깨를 후들후들 떨며 쏟아져나오는 오열을 간신히 씹어삼키고있었다.

여삼은 요즘도 자기같은것은 본체도 않고 나돌아다니는 오천이가 여전히 섭섭하고 원망스러웠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처럼 큰 벌이 내려지기는 바라지 않았었다.

물론 오천을 징계할데 대한 박위의 군령은 탓할것이 못되였다.

이같은 변이 터지게 된것은 전적으로 자기가 입빠르게 오천의 요즘 행실을 박위에게 일러바친데서 생긴것이였다.

본의는 어찌됐든 여삼은 결국 지금까지 자기에게 그처럼 각근한 인정을 베풀어준 오천에게 매가 떨어지도록 추동한셈이였다.

하여 여삼은 자기의 설익은 처사를 제스스로 저주하며 진정으로 괴로워하고있었다.…

한식경이나 수하장졸들의 얼룩진 표정을 살펴보던 박위는 다시 오천에게 시선을 떨구었다.

오늘 이 아침 오천에게 벌을 내린것은 군영의 군기를 옳게 세우는 일로서 백번 지당한 처사였다.

하기에 박위는 지금 사소한 후회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그냥 시서늘해나고 머리속은 번거로왔다.

과연 무엇때문인가?

박위의 교자곁에서 뚝뚝한 표정으로 뜰아래 광경을 내려다보던 윤통이 문득 고개를 돌리였다.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건늬였다.

《장군, 그만하면 저놈도 자기 죄를 깨달았을것이고 장졸들도 징계가 됐음직한데 이제는 그만 분을 풀고 매를 거두는게 어떻습니까?》

《음?!》

들을만 해있던 박위는 갑자기 비명비슷한 소리를 흘리며 윤통을 쳐다보았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 윤통이였다.

며칠전까지만도 당장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가겠다던 사람이 요즘은 제스스로 둔전에 나갔던 군사들을 모두 끌어들이여 밤낮으로 교련장에서 뒤굴리고있었다.

또 예전같으면 지금같은 좌석에서 박위가 매를 거두려 해도 제쪽에서 더 열을 내여 지은 죄는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한수 더 뜨고나섰을것이였다.

박위는 그의 속내를 잘 알수 없었으나 군영에 그냥 남아 군졸들의 교련에 한층 박차를 가하는 윤통이가 무등 고마웠다.

매를 거두자는 그의 소청 역시 동기는 잘 알수 없었으나 은근히 다행스러웠다.

박위는 어망처망간에 자기 목소리같지 않은 청으로 웨치였다.

《이제는 그만 매를 그쳐라!》

앞마당은 금시 고요해졌다.

박위는 술취한 사람마냥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오천을 주시하다말고 아까보다는 훨씬 눅어진 청으로 말했다.

《오천이 너 이놈! 일후에 다시 사소하게나마 군률을 어긴다면 그때는 장하에 물고가 날줄 알아라. 아니, 군영에서 아주 들내치여 원악도로 귀양을 보낼테니 알아해라. 들었느냐?》

뚜드려잡은 부엉이모양으로 거푸수수해서 서있던 오천은 고개를 들었다.

그 어떤 원망의 빛이 꽉 실려있을줄 알았던 오천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뜻밖에도 밝은 기색이 스멀거리고있었다.

박위는 어마뜨거라 놀랐다.

(저눔이 갑자기 실성이라도 한게 아닐가. 울어도 시원치 않을 이 마당에서 저게 무슨 모양인가.

아무리 속이 너르고 성격이 선들선들하기로서니 저럴수가 있는고?

괴이한지고…)

그러거나말거나 오천은 연한 미소가 발려있는 두툼한 입술을 힘겹게 놀리여 떠뜸떠뜸 말을 꺼내는데 그의 목소리는 거의나 명랑하게 울리였다.

《장군의 령을 골수에 새기고 일후로는 매사에 각별히 주의하겠습니다.

헌데 소인에게 간절한 소청이 하나 있사오니 깊이 통촉해주시오이다.》

《그 소청이라는게 무어냐?》

《예, 소인은 대정구실을 떼는것은 아무 의견도 없사오나 염초장일만은 끝장을 볼 때까지 그대로 하게 해주시오이다.

그리구 또 한가지 청은 이제 소인에게 며칠간만 더 말미를 주셨으면 하는것이오이다.》

박위는 아연한 색을 띄우며 엉거주춤 교자에서 일어서기까지 했다.

《며칠간의 말미는 해서 어디에 쓴다는거냐?》

《예, 자상한 사연은 후날 따로 사뢰일가 하나이다.》

《무얼?! 후날 따로 사뢰인다?! 저런 방자스러운 놈 보았나. 뉘앞에서 감히…》

박위는 또 한바탕 야단을 칠듯이 커다란 부들부채를 앞으로 쭉 내뻗치며 큰소리를 질렀으나 이제 와서 그의 가슴에 의혹은 있을망정 분노는 없었다.

(저놈이 며칠간의 말미는 해서 과연 어디에 쓰려는걸가?

오천은 최무선이가 각근한 애정을 담아 장래를 부탁한 녀석이다.

나도 그를 누구보다 애중해왔고 군사들도 지어 윤통까지도 귀히 여기며 두호해나서는판이다.

그러한 놈이 지금같은 때 그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믿음을 망각하고 계집에게 반해 돌아갈수 있겠는가.

혹 저 녀석이 며칠간의 말미를 달라고 하는것도 염초장일과 련관된게 아닐가?…

그렇다면… 앞뒤사연을 똑똑히 캐보지도 않고 무작정 매를 치게 한 이번 일도 근일에 이르러 한껏 좁아진듯 한 나의 마음에서 튀여나온 조급하고 서뿌른 행위가 아니겠는가.…)

박위는 다시 교자에 맥없이 들어앉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불현듯 개경에 갔을 때 도 평의사사 앞뜰에서 만났던 리색이 눈물을 흘리며 뇌이던 옛 시구절이 뇌리를 지지였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참으로 아득하다

사람노릇 하기 힘들다는

옛말 바로 그대로구나

 

이윽하여 스르시 눈을 떠보니 앞마당은 굿해먹고난 집뜰처럼 괴괴하고 휑뎅그렁한데 저 멀리 동쪽하늘에서는 다홍색아침노을이 소리없이 이글거리고있었다.

노을빛을 받아 장미색을 띠고 응결되였던 구름장들은 차츰 새털모양으로 갈기갈기 찢겨져나가며 서서히 자기 본태의 순수한 흰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7

7

 

칠월칠석날을 명절로 기념하는 풍습은 일찌기 삼국시기부터 전해내려오는 즐거운 유습이였다.

그 시절 고구려사람들은 칠월칠석날을 굉장히 큰 명절로 요란스럽게 쇠였으나 요즘에 와서 고려사람들은 그다지 크게 쇠지 않았다.

가족끼리 혹은 사랑하는 남녀가 조용히 모여앉아 흘러간 사랑의 추억, 다가오는 사랑의 봄계절을 더듬어보며 견우와 직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것으로 이날 밤을 기념하는것이 고작이였다.

비록 다른 명절때처럼 떡을 치고 술을 빚거나 모여서 노는 일은 없어도 사랑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서정의 명절 칠월칠석날은 필경 이채로운 명절이였다.

그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나 견우와 직녀에 대한 이야기,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이 저녁.

박위는 군사 몇을 데리고 바다가를 돌아보고있었다.

요즘도 박위의 리성은 변함없이 원정준비를 내밀어야 한다고 웨치고있었다.

허나 리성의 목소리와는 달리 감성은 그 어떤 평온과 안정을 주장하고있었다.

현재의 모든 일이 부질없는짓, 승산이 없는노릇이라는 운명적인 체념이 무시로 리성의 소극적인 몸부림을 결정적으로 제압하려하군 했다.

오늘의 정황에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정의 큰 량반들은 누구하나 원정에 관심이 없다.

아니, 그저 무관심한것이 아니라 원정소리가 날 때마다 왼새끼를 꼬거나 반정이라는 헛소문으로 사지를 결박하려 한다.

그런데다 윤통과 오천이같은 군영의 장졸들까지 예전처럼 나를 절대적으로 믿는 기색도 아니요, 성심으로 따르려는 자세도 아니다.

겉으로 보건대는 예나 다름없이 성실히 복종하고 추종하는듯 하나 모두들 제나름대로의 궁냥에 집착하여 옹송그리고 사는게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원정준비를 완성할수 있으며 원정을 실현할수 있겠는가.…

오늘 저녁도 처소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며 침울한 사색을 방향없이 이어가던 박위는 갑자기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것처럼 저녁밥을 재촉해 먹고나서 군영을 나섰다.

불시에 해안선 순시를 할 생각이 난것이였다.

워낙 야간의 해안선순시는 윤통이 맡은 소임중의 하나였으나 박위는 잠시라도 시원한 바다바람을 맞으며 온갖 무거운 잡사를 잊어볼양으로 자기가 나선것이였다.

바다가에 나오니 애초의 짐작과는 달리 또다시 풀길 없는 운명의 숙제가 번거롭게 뇌리에 비껴들었다.

마음은 여전히 무직하고 머리속은 진연기라도 마신것처럼 흐리멍텅하였다.

하여 박위는 오늘이 어떤 명절인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채 짝귀의 잔등에 맥을 놓고앉아 관습적으로 바다가를 누벼가고있었다.

파수군들을 박아놓은 곳에 이를 때마다 역시 습관적으로 푸릿한 어둠속에 대고 군호를 확인했다.

《산천!》 박위의 군호소리가 나기 바쁘게 파수군들은 《초목!》하고 대구를 웨치며 황망히 달려나와 황공한 자세로 절인사를 하군 했다.

박위는 매번 아무말없이 고개를 두어번 끄먹거리고나서 파수막을 지나쳐버리였다.

지금까지 파수막은 몇개나 지나치고 일행은 어느 마을 지경에까지 왔는지?…

박위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검푸른 밤하늘에 광대한 폭으로 하얗게 내리드리운 은하수를 아무런 미적흥취도 없이 멀거니 쳐다보며 말을 몰던 박위는 갑자기 여삼이가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홀연 현실감을 의식했다.

《너는 왜 또 부잡스레 구는거냐?》

박위가 짜증스럽게 따져묻자 여삼은 가느다란 눈을 새별처럼 빛내며 명쾌하게 대답했다.

《저기 죽촌쪽에서 무슨 소리가 와자자하게 들려옵니다.》

《그러니 여기가 죽촌 앞바다란 소리냐?》

죽촌이란 소리에 공연히 가슴이 띠끔해난 박위는 조금후에야 여삼의 말뜻을 가려듣고 다시 물었다.

《소리라니, 무슨 소리가 난단 말이냐? 아닌밤중에…》

《저기 마을어구 등성이쪽을 좀 보시오이다.》

여삼이가 쳐들어올린 손을 따라 죽촌 어구쪽을 살펴보니 아닌게아니라 나직한 등성이우에는 화광이 충천한데 거기서는 숱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소리가 와와 울리고있었다.

간데마다 박혀있는 파수군들은 아무런 적정도 없다고 했으니 왜구의 란같은것은 아닐것이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인고?!

《소인의 짐작에는 죽촌사람들이 호미씻기놀이를 벌려놓은것 같소이다.》

구경이라면 어떤것이든 다 좋아하는 여삼은 늦을세라 제꺽 뒤를 받치였다.

여삼은 자기도 호미씻기놀이를 구경하고싶었지만 그보다는 요즘에 와서 시종 울울한 기분에 쌓여있는 박위의 마음을 순간이라도 가셔주고싶어 자신의 호기심을 과장하여 내비친것이였다.

호미씻기란 김매기를 전부 끝낸 다음 호미를 깨끗이 씻어 건사한다는 뜻인데 그런 날이면 김매기를 끝낸 기쁨을 안고 온 마을이 한자리에 모여 명절처럼 즐기였다.

떡을 치고 술을 빚고 빛다른 음식들을 지지고 볶고…

공동연회를 펼치는데 연회 뒤끝에는 의례히 흥겨운 오락회가 동반되였다.

어려운 농사일의 한 고비를 넘긴 기쁨과 배불리 먹은 탁배기에 기분이 얼근해진 잡이군들이 먼저 건드러진 농악으로 오락회의 첫막을 열어제낀다.

그러면 쇠스랑이, 곰배, 호미 같은것을 비껴잡은 농군들이 뛰여나와 북과 장구, 꽹과리의 장단에 맞추어 너풀너풀 춤을 추며 돌아간다.

이런 호미씻기놀이는 흔히 7월 보름경에 하지만 지방마다, 마을마다 김매기를 끝내는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서 놀이날자는 지방과 동네별로 들쑥날쑥하였다. 박위는 순간에 떨떠름해지였다.

(왜구들에게 집도 잃고 밭도 잃고 식솔들마저 빼앗긴 죽촌사람들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무슨 여유가 있어 호미씻기놀이를 하겠는가.

그럴리는 없다.

하다면 저 소리, 저 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고?…)

박위는 말고삐를 죽촌쪽으로 돌리였다.

짝귀는 워낙 밤눈이 밝기도 했지만 칠월칠석날의 밤은 과히 어둡지도 않아서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길을 꺾어 등성이쪽으로 향했다.

여삼이와 군사들은 잰걸음으로 박위의 뒤를 따랐다.

행길에서 벗어난 일행은 별빛이 어리여 은빛으로 번들거리는 참대잎새들을 슬치며 소로길에 들어섰다.

너무도 눈에 익은 마을어구의 등성이가 선명하게 안겨왔다. 박위는 말에서 내리였다. 예전에는 팔뚝같이 실한 대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던 등성이가 지금은 거의나 알몸으로 솟아있었다.

펑퍼짐한 등성이우에서는 여러 무지의 화토불이 기세좋게 황황 타오르고있었다.

죽촌사람들모두가 이곳에 떨쳐나온듯 수십명의 백성들이 불무지의 화광을 들쓴채 오글복작 끓고있었다.

태반이 널판자나 각자 같은것을 메나르거나 망치질, 톱질을 하는것으로 보아 죽촌사람들은 이제서야 저들이 쓰고살 집을 새로 짓는 모양이였다.

천천히 등성이우로 오르는 박위의 뇌리속으로는 언제인가 조호백이 죽촌백성들에게 집지을 재목과 살림재구들을 적지 않게 보내주었노라고 생색이라도 내듯 하던 말이 피끗 떠올랐다.

지금껏 군영의 일에 다몰리우다보니 한번도 이 고장에 나와보지 못한것이 저으기 면구스러웠다.

이렇게 나온김에 죽촌사람들이 사는 모양이며 집짓는 역사를 살펴주면 어느 정도라도 면무식이 될것 같았다.

박위는 눈앞으로 밀려드는 하루살이떼를 휘휘 들날리며 등성이우에 올라섰다.

화토불의 화광에 젖어 하나같이 구리빛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각이한 모습이 환하게 안겨왔다.

제일먼저 눈에 걸리는 사람은 등성이 복판에 우뚝 서서 옷자락과 채수염을 훨훨 날리며 소리소리 지르는 저대로인이였다.

그리도 푼푼하던 웃음기를 싹 가셔버린 로인의 둥글넙적한 얼굴은 화광탓인지 전에없이 근엄해보이였다.

올리뽑고 내리지르는 그의 우렁찬 목청은 마치 전장의 진두에서 군령을 내리는 장수의 목소리처럼 위엄있게 들려왔다. 보매 저대로인은 오늘의 일판을 단신으로 총찰하는듯싶었다.

《이 사람 인실이! 아까운 널판자를 그렇게 대구 베내치면서 흥청망청 써서야 되겠나?

어림짐작으로 하지 말구 번마다 자막대기로 재가며 톱질을 하게.

여보게 문서방, 우리 일인즉 촌시를 다투는 매우 바쁜 일인데 한번 짐을 나르고 열나절씩 숨을 돌려서야 언제 끝을 보겠나. 힘을 돋구어서 재우재우 다니게!》

장검마냥 추켜든 작대기로 톱질을 하는 사람, 짐을 나르는 사람들을 일일이 신칙을 하던 저대로인은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리는지 사람들이 모여선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내찍었다.

그러다가 어둠속에서 화광이 비낀 곳으로 들어서는 박위를 띠여본 로인은 작대기를 휘두르며 박위앞으로 다가왔다.

깊숙이 절인사를 하고나서 감격에 겨워 뇌이였다.

《장군께서는 군영의 일만 보시재도 겨를이 없으실터인데 미거한 우리 골 백성들의 일까지 보아주시려고 이렇게 왕림해주시니 황감하기 이를데 없소이다.》

로인은 박위가 일부러 저들의 일을 보기 위해 나온것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박위는 대답말이 궁하여 무턱 고개를 끄떡거리고나서 한창 신이 나게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웃고 떠들며 일손을 다그치던 사람들은 박위를 알아보자 잡은것들을 놓고 우르르 일어섰다.

저마끔 허리를 꺾으며 제나름대로의 인사말을 아뢰였다.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끄떡거리는것으로 모두거리답례를 하고난 박위는 뒤바투 다가선 로인에게 고개를 돌리였다.

《듣자니 일전에 김해부사가 집지을 목재와 살림재구들을 보내주었다던데…

이제 겨우 문짝 같은것을 만드는것을 보니 일을 퍽 더디게 하는 모양이구만.》

《글쎄 빠르다고는 할수 없사오나 과히 더디다고 생각되지는 않소이다.

다 된것들은 벌써 바다가 한옆에 내다 놓았소이다.》

로인은 막대기를 들어 바다가쪽을 가리켜보이며 다소 뻐기는투로 대답했다.

(바다가에 내다 놓다니?! 그건 무슨 소린고?!)

박위는 그 어떤 의혹과 함께 로인과 자기가 저마끔 제 좋은 소리를 하고있지 않는가 하는 다소 우습강스러운 짐작이 떠올랐다.

《아니, 다 된것들은 바다가에 내다 놓다니?! 집을 지어서는 바다가에 내간다는 소리요?》

《집이 아니라 배를 두고 하는 말씀이오이다. 이제 전함 두척을 더 만들면 모두 네척이 되는데 래달 초생에는 그 네척을 다 끌고 군영앞바다에 들어서겠소이다.》

그제서야 로인의 말뜻을 완연히 깨달은 박위는 어깨를 흠칫 떨며 눈을 지릅떴다.

가슴이 훅훅 달아올랐다.

(그러니 죽촌사람들은… 왜구에게 집도 가산도 식구들도 모두 빼앗긴 이 불쌍한 백성들은 집을 지으라고 내준 목재로 싸움배를 뭇고있단 말이렷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요, 당부한 일도 아닌데… 이럴수가 있는가?!…)

그러고보니 죽촌사람들이 지금 만들고있는것은 문짝따위가 아니라 전함의 선미쪽에 깔 갑판의 한 부분이였다.

그들은 이렇게 전함의 부분품들을 만들어가지고 바다가에 나가 조립을 하는 모양이였다.

모든것이 선명해질수록 감동의 열물은 더욱 따갑게 가슴을 달구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싶었으나 너무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은탓에 선선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격정이 어린 시선으로 다시 일손을 놀리는 사람들과 저대로인을 갈마보던 박위는 배무이장과는 초간히 떨어져있는 화토불무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놓았다.

설치며 돌아가던 아낙네 몇이 다가오는 박위를 띠여보자 닭무리 풍기듯 확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돌우에 걸어놓은 여러개의 가마가 뚜렷이 안겨왔다.

가마앞에 줄느런히 놓여있는 질자배기들도 똑똑히 가려지였다.

박위는 다가서는참 질자배기들을 휘뚜루 둘러보았다.

질자배기속에는 맹물이나 다름없는 멀건 보리죽이 골숨골숨하게 담겨있었다.

박위는 짓눌린듯 한 음성으로 곁에 다가선 저대로인에게 나직이 물었다.

《이렇게 보리죽만 먹으면서 장참 배 만드는 역사만 하고있으니…

앞으로 사람들의 살아갈 길은 어떻게 구처할셈이요?》

로인은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소인네들은 저번의 란을 겪고나서 통절히 느꼈소이다.

지금은 농사보다 중한 일이 군사라는것을 말이오이다.

쌀이 없으면 풀을 뜯어먹거나 송피를 벗겨 먹으면서도 살수 있지만 왜구를 가만 내버려두어서는 죽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소이까.

우리 죽촌백성들은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그리고 잡혀간 마을사람들을 찾아오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군사일에 떨쳐나서자고 서로서로 맹약을 했소이다.

그래서 한켠에서는 싸움배를 뭇고 다른 한켠에서는 저렇게 염초장을 만들어놓고 서툰대로 염초를 뽑고있소이다.》

로인은 다시 막대기를 들어 바로 옆에 이영만 해씌운 외양간처럼 초라한 집을 가리켜보이였다.

《염초까지 뽑는단 말이요?!》

박위는 한층 목청을 높이며 로인이 가리켜보이는 허술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방안에는 관가와 린근동네에서 손모아 보내준것이 분명한 밥가마 여러개가 주런이 걸려있었다. 그곁에는 그리 크지 않은 염초무지가 눈더미처럼 하얗게 쌓여있었다.

이것 역시 상상밖의 일이였다.

박위는 로인에게 따져묻듯 재우쳐 물었다.

《아니, 염초를 내는 방법은 어디서 배우고 염초감은 어디서 났기에 염초까지 뽑는단 말이요?》

로인은 조금 득의연한 어조로 말했다.

《예, 지난 초생무렵 소인네들은 한자리에 모여앉아 장차 어떻게 해야 살아갈수 있겠느냐 하는 공론을 했소이다.

조금 옥신각신하기는 했소만 종당에는 군사일을 협력하는것이 둘도없는 살길이라는 생각을 모으게 됐소이다.

그 다음날로 소인네들은 동네에서 그중 말주변깨나 있고 눈썰미, 손썰미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뽑아가지고 군영의 오천대정을 찾아갔소이다.》

《오천이를 찾아갔다?…》

《예, 찾아가서는 우리도 군사일에 발벗고 나설테니 군영에서 제일로 걸린 일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니 대정이 하는 말이 〈전함을 만드는 일과 염초를 뽑는 일이 제일 난사외다.〉하는게 아니겠소이까.

그래 소인네들은 〈방법만 가르쳐주면 우리도 힘닿는껏 전함도 만들고 염초도 뽑겠소.〉하고 대답했소이다. 그랬더니 오천대정은 그 자리에서 일의 속내를 자상히 가르쳐주었는데 그후에도 왔소갔소하면서 소인네들을 바르게 이끌어주어 오늘은 이렇게 적으나마 군사일에 보탬을 주게 되였소이다.》

본래의 쾌활한 성미가 어느 정도 되살아난 로인은 일을 총섭할 때와는 달리 흥이 나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보매 로인은 군사일을 협력하는 요즘의 일에서 생의 보람을 한껏 느끼는듯싶었다. 죽촌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 감사의 정이 눈물겹도록 치밀어올랐다.

그러던중에도 오천의 일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한듯 한 의혹과 자책감이 다시금 아릿하게 속을 허비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언제인가 백성들과 군사들이 한동아리가 되여 일떠서면 능히 자체로 원정준비를 끝낼수 있다던 오천의 말은 결코 허궁 뜬 소리가 아닌듯싶었다.

오천은 실지로 백성들의 힘을 제일로 믿고 그들과 함께 하나하나 실속있게 일을 떠밀어가고있지 않는가.

한참이나 기쁨과 자책이라는 상반되는 감정에 쌓이여 침묵을 지키던 박위는 다시 로인에게 말을 붙이였다.

《염초감대기를 연연 이어댄다는게 수월치 않을텐데… 그건 어떻게 충당하우?》

《예, 린근동네의 부엌재는 다 긁어먹은 뒤라 염초감을 련이어 들이대는 일이 사실 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의논들을 하다가 멀찍이 창원쪽에도 나가보자고 결정을 내리고 한패를 그리로 띄워보냈소이다.》

아무리 작은 폭으로 하는 일이래도 염초감대기를 끊기지 않게 보장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련만 로인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처럼 수월수월 대답했다.

이럴 때 로인의 말이 죄다 사실임을 확증하듯 등성이아래쪽에서 숱한 사람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썩하게 울려왔다.

그들중에는 녀자들도 섞여있는지 녀인들의 쨍쨍한 목소리도 들리였다.

《내 오늘에야 우리 죽촌 백동이 엄마가 힘장사라는걸 알았다니까.

그 가냘픈 몸에서 어쩜 그리 쎈 힘이 쏟아져나오우.

멍구럭보다 세배나 더 큰 자루를 힝힝 메나르니 나같은건 감당도 못하겠다니까…》

《내가 무슨 장사겠소.

왜구에게 잡혀간 백동이 아버지도 찾아오고 참혹하게 죽은 우리 백동이 원쑤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로 이를 사려물게 되는구만.》

《아무튼 옛적에 우리 나라에 설죽화라는 처녀장수가 있었다더니 우리 죽촌에서도 내인장수가 날라는가부야.》

이쪽으로 점점 가까와지는 녀인들의 말소리에 솔곳이 귀를 주고있던 로인은 박위에게 돌아섰다.

《저네들이 바로 창원쪽에 나갔던 패올시다.

배를 몰아갈적에는 고기를 잡고 돌아올 때는 염초감대기를 실어가지고 오니 한배에 백성의 일, 군영의 일을 다 싣고다니는셈이올시다.

이제 창원고을을 다 뒤져먹으면 전라도까지라도 나가볼 작정이올시다.》

《전라도에까지?!》

박위는 어망결에 로인의 말을 받아외웠다.

오, 정녕 얼마나 신심에 차넘치고 확신에 달아있는 사람들인가.

얼마나 슬기롭고 완강한 백성들인가.

참말이지 이들처럼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끈지게 달라붙는다면 이세상에 못해낼 일이 무엇이겠는가.

박위는 이처럼 훌륭한 백성들을 가난하고 무식하다 하여 무지렁이 불상놈으로, 마음먹은대로 휘고 부릴수 있는 하잘것 없는 존재로 치부해온 지난날의 자신이 죄스러웠다.

이네들의 고결하고 순직한 마음같은것은 애초에 들여다보려고조차 하지 않은 자신이 무등 민망스러웠다.

오늘에야 비로소 군사들과 백성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뭉치여 일을 벌리면 능히 승산을 볼수 있다던 오천의 주장을 한귀퉁이라도 실감있게 깨닫는듯싶었다.

박위는 자꾸만 이어지려는 사색을 애써 중단하고 고개를 돌리였다.

저대로인이 또다시 막대기를 쳐들어 아래쪽을 가리켜보이며 무엇이라고 승기가 나서 고함을 지른것이였다.

박위는 그제서야 로인이 쳐든 작대기가 아무데서나 꺾어든 나무가지가 아니라 그가 평소에 그리도 애용하던 참대로 만든 저대임을 알아보았다.

예전에는 가지가지 기묘한 가락을 뽑아내여 동네사람들의 흥취를 돋구어주던 로인의 저대는 오늘 마을의 군사일을 총찰하는 지휘도로 변하여 이 동네에 거세찬 군사적열풍을 불러일으키고있었다.

박위는 허공을 이리저리 엇갈아베며 번쩍거리는 로인의 저대를 그어떤 신비로운 귀물처럼 여겨보며 속깊이로 뇌이였다.

(남은 여생과 말년의 취미까지 통으로 군사일에 쏟아붓는 로인은 얼마나 장한 인간인가.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우리 군영의 일을 도와나선 죽촌백성들은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정녕코 힘이로다.

암야의 등불이라더니 진정 캄캄한 밤길에 등불이 달린듯 원정의 앞길이 보이지 않는가.)

박위는 지휘도를 번쩍번쩍 휘두르며 등성이 아래쪽으로 내려서는 로인을 따라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였다.

자기도 멀리 창원에까지 나갔던 사람들을 만나보고싶었다.

그들을 만나면 해감내와 먼지내가 훅훅 풍기는 그들과 마주서면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의 리치와 새로운 생활의욕을 얻을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수록 수억만개의 보석을 쪼아박은듯 한 밤하늘의 은하수가 눈앞을 메우며 바투바투 다가왔다.

현란한 별의 바다, 쏟아지는 폭포수마냥 길게 뻗어내린 은하의 흐름…

오늘은 저 멀리 신비로운 은하의 세계에서 일년내내 사랑의 목마름을 안고 애태우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상봉을 하는 기쁜 날이란다.

그래서인지 광활한 밤의 대공에서는 견우직녀의 상봉의 환희, 사랑의 환희가 선률이 되고 가락이 되여 은은히 쏟아져내리는듯싶었다.

박위도 상봉의 환희, 사랑의 환희를 안고 등성이를 내리고있었다.

박위 역시 이제 사랑하는 사람들과 상봉하게 될것이였다.

지금까지 아무런 힘도 없는 미미하고 무능한 존재로, 일고의 존경도, 애정도 품을수 없는 보잘것 없는 상대로 여겼던 백성들과 난생처음 강렬한 사랑을 안고 만나게 될것이였다.

하늘에도 의미깊은 선률이 흐르고 땅우에도 뜨거운 노래가 흐르는 잊을수 없는 밤이였다.

8

8

 

아침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박위는 여느때없이 기운찬 손길로 사랑채문을 열어제끼였다.

오는듯마는듯 하던 장마철은 때이르게 지나가버리고 초가을의 신선한 공기가 밀려다니는 때라 자연은 고요히 얼룩덜룩한 가을의 색옷을 갈아입고있었다.

멀리 동켠하늘에서는 솔개미 한마리가 날개에 아침노을의 피빛광선을 반사하면서 유유히 날아예고있었다.

싱그러운 공기를 호흡하며 솔개미의 무한히 자유로운 아침운동을 바라보던 박위는 잠시후 방안의 서탁앞에 마주앉았다.

요즘 박위는 잠에서 깨면 곧 서탁에 마주앉아 두툼한 목책을 펼쳐보군 했다.

목책은 군영과 여러 고을들에서 새로 모집한 군사들과 새로 만든 전함의 수, 새로 생산한 화약과 염초의 수량, 새로 확보한 군량과 반찬감의 수량 같은것을 매일같이 기록한 기밀문서였다.

한장두장 손때묻은 책장을 번져나가던 박위는 《…7월 열이레중낮때 김해부사가 직접 3백근의 량식과 2백근의 어물을 령거해가지고 찾아오다.》라고 쓴 대목에 이르자 우뚝 시선을 멈추었다.

그날 10여대의 마바리, 소바리를 뒤에 달고 범잡은 포수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군영에 들어서던 호백의 장한 모습이 방불히 떠올랐다.

박위앞에 다가온 호백은 제 손으로 흰쌀이 들어있는 자루와 전광어, 칼치 같은 절인 어물이 들어있는 대나무통의 뚜껑을 열어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장군! 저번날 군영에서 량식청탁이 왔을 때는 본관이 일이 잔뜩 밀려놔서 아래것들에게 일임했댔소이다.

헌데 그것들이 중간에서 롱간질을 하여 종내는 듣기에도 창피한 썩은 쌀소동이 났댔소이다. 허허… 참, 무엇이라 사과해야 할지…》

《사과는 무슨… 나도 그쯤 짐작했댔소. 아무렴 부사께서 그런 좀스러운 일을 벌렸겠소. 아무튼 또 이렇게 군량을 대주니 감사의 말 무엇이라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박위는 지나간 일을 놓고 가타부타 따질것 없다는 뜻으로 빙그레 웃으며 호백의 변명을 듣기 좋게 거들어주었다.

호백은 더욱 기가 올라 수염을 빡 내리씻고 련속적으로 거짓말을 널어나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관이 직접 백사를 제치고 나서서 시작부터 마감까지 일을 간검해가지고 나왔습니다.

사실말이지 이 고급어물들은 조정의 리부(고려시기 관리들의 임명과 성적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특별히 부탁을 해서 따로 잡아 건사했던것인데… 지금이야 리부의 일보다 우리 고을 군사일이 훨씬 더 급하고 중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가져온 물자들을 군영의 군사일에 긴요히 써주시면 본관으로서는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

손수 짐을 꾸려가지고 군영에까지 찾아온 호백의 헌신적인 행동도 무등 고마왔고 그의 길다란 설명 역시 조금 간지럽기는 해도 귀맛이 좋았다.

호백은 단단히 개심을 하고 군사일에 특별히 관심을 높이는것이 분명했다.

박위는 호백의 수고를 진심으로 치하해주고나서 그와 함께 처소로 들어갔다.

급급히 재촉을 하여 성의있게 차린 주안상을 내오게 하였다.

기름에 튀긴 전복꼬치(그것은 호백이가 박위에게 특별히 선사한것이였으나 박위는 통털어 호백에게 대접하도록 했다.)를 연해 저가락 끝으로 집어내며 맛스럽게 술을 마시던 호백은 취기가 오르자 새빨갛게 익어번진 희좁은 얼굴을 호들갑스럽게 흔들어털며 말하였다.

《정말이지 오늘처럼 우리 고을 지경이 평온하고 우리 고을 민심이 안연한것은 전적으로 박장군의 덕이요, 군영의 덕이올시다.

그런즉 우리 관가가 군영군사들에게 군량과 반찬감을 대주는것쯤은 고맙다고 하실것도 없습니다.

너무도 의당한 일이지요.

그리구 듣자니 일전에 우리 관가의 아전들이 쇠풀골에 배무이목재를 찍으러 온 군사들을 막무가내로 쫓아버렸다가 봉변을 당했다던데 그런 좋지 못한 광경이 생긴것은 구경 하관의 불찰입니다.

하관이 평시에 아래것들을 옳게 주물러놓았다면야 어찌 그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늦게나마 하관이 단단히 신칙을 하고 닥달을 해놓았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겝니다.》

호백의 뜻밖의 사죄와 반성앞에서 박위는 일순 떨떠름해지였다.

《부사가 그렇게 나오니 할말이 없소그려. 사실은 우리 군사들이 아전들에게 떠밀려내려온 뒤 본관이 다시 군사들을 내몰아 마구다지로 나무를 베오게 했소.

오늘 부사의 말씀을 듣고보니 나로서도 그때 일이 여간 미안하지 않구려.》

호백은 저가락을 든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털며 자못 대범한 태를 보이였다.

《아니할 말씀이요. 그까짓 나무 몇대가 무엇이라고…

왜구를 소탕할 원정에 쓸것이라면 나무가 아니라 온 고을을 통채로 퍼넣는다 해도 아까울것이 있겠소이까.

자고로 대공이나 대첩은 만반의 준비우에서 피여나는 꽃이 아니였소이까?》

《고마운 말씀이요. 부사의 그 곡진한 마음과 사심없는 지원을 잊지 않겠소.》

박위는 전에없이 대활하고 우선우선해진 호백이가 무등 고마운 한편 다소 기이하게 생각되였다.

사실 이 순간 호백의 심리는 여간만 뒤숭숭하지 않았다.

그가 몸소 짐바리를 이끌고 수십리 울퉁불퉁한 산골길을 누벼온것은 물론 박위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제 눈으로 직접 군영의 동태, 박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또한 희귀한 어물로써 박위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있을수 있는 자기에 대한 의심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여 그는 겉으로는 시종 소탈하고 대담한 태를 내면서 마음속의 날카로운 시선으로는 박위의 언행과 표정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박위가 혹시 조정에 꽂아넣은 자기의 고변을 눈치채지 않았는지, 그것으로 하여 자기를 의심하거나 지레 겁을 먹고 원정을 포기하지나 않았는지…

헌데 아무리 뜯어보아야 박위는 자기의 역적고변을 아는것 같지 않았다.

자기를 의심하는 눈치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정준비는 포기하기는커녕 더욱 큰 판으로 더 줄차게 내미는것 같았다.

이제는 마음놓고 리성계가 암시해준대로 박위의 목대를 바싹 옭아맬 빈틈없는 증거를 찾아내는데 전력해야 했다.

박위가 기어이 원정을 하겠노라고 날치는 이상 그럴듯한 증거를 찾아내는것은 별로 어려울것 같지 않았다.

매화의 말에 의하면 대마도에 잡혀간 죽촌사람들중에는 박위와 친밀하게 지내던 리옥(그는 박위의 후실감이란다.)이라는 계집도 있는데 그는 사실 잡혀간것이 아니라 제발로 찾아간것이였다.

박위는 왜구들에게 반정을 지원받기 위해(례컨대 병기의 조달같은것.) 부러 죽촌기습사건이라는 기만극을 꾸미고 감쪽같이 자기의 계집을 대마도령주에게 띄웠을수 있다는 뜻이였다.

그러니 박위의 원정준비(반정준비)가 계속된다면 대마도령주나 리옥에게서 무슨 소식이든 반드시 날아올것이였다.

그 소식을 손에 쥐면 더욱 좋고 설사 쥐지 못한다 해도 리옥에 대한 이야기만 잘 반죽해놓으면 그럴듯한 증거는 능히 빚어질것이였다.

허나 어째선지 박위의 원정준비가 명백한 역신음모라는 매화의 말과 그에 대한 자기의 계략은 미심쩍게 생각되기도 하고 허황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가 새로운 이때 다 익은 감이 저절로 물러떨어지기를 세월없이 기다리고있을수는 없었다.

가능한껏 확실하거나 확실해보이는 증거를 거머쥐기 위해 눈을 밝히는 한편 이미 주어진 건덕지를 우리고 또 우리여 누가 보아도 그럼직한 증거물을 만들어야 했다.

이제 와서 박위를 제끼는것은 단순히 그 어떤 앙갚음이나 하고 협착된 부귀와 권세를 회복하는 일 정도가 아니였다.

그것은 필경 조민수건으로 하여 리성계의 눈에 미운 털이 박혔을 조씨가문과 자기의 영상을 새롭게 개선하고 오늘의 벼슬자리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한 일이였다.

그러니 리성계가 박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있는 이때(호백은 리성계의 우회적인 권고를 받았을 때 벌써 그것을 여실히 감촉했었다.) 지체없이 박위를 찍어넘길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섬겨바쳐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박위를 들내치니 좋아, 리성계에게 어여쁜 인물, 요긴한 존재로 지목받으니 좋아, 정말 꿩먹고 알먹기요, 일거량득이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기분이 좋아진 호백은 주량에 겨웁도록 술을 퍼마시고나서 다시금 박위에게 헛맹세와 겉발린 아첨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 비쓸거리며 군막을 나섰다.

아전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쪽으로 나가는 호백의 뒤모습을 쏘아보던 윤통은 독설에 가까운 소리를 꺼내놓았다.

《터놓고말해서 하관은 저 사람을 볼 때마다 기분이 상합니다. 어쩐지 말과 행동이 판판 다른듯 하고 가슴속에는 겉모양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이상한 얼굴이 있는것 같단 말입니다.》

박위는 윤통이가 소지를 바치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뒤로는 될수록이면 그에게 모진 소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

윤통이가 가는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한명의 장수라도 제곁에서 떨어져나간다면 원정준비는 그만큼 오래 걸리고 왜구와의 싸움은 그만큼 어려울것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호백을 불신하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에 대한 독설을 퍼내는 윤통의 편벽한 심리와 피상적인 판단은 그냥 스쳐버릴수 없었다.

《부원수, 내 진정으로 하는 말인데 김해부사는 근래 단단히 채심을 하고 우리 일을 열심으로 돕고있소.

그런데 치사는 못할망정 헐어서 말해서야 일이 되겠소?》

박위는 한껏 부드럽게 말했으나 윤통은 벌컥 증을 내였다.

《김해부사가 채심을 했다고요?

흠, 아무리 애를 써도 게를 곧바로 걷게 할수는 없습니다.

원체 삐뚜로 걷게 된 물건이니까요.

하관은 오히려 김해부사가 예전보다 더 험하게 변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앞에서는 살살 웃으며 돌아가다가는 뒤에 돌아앉아서는 썩썩 칼을 벼리는 음모군같단 말입니다.》

《음모군?!》

박위는 흠칫 몸을 떨며 윤통을 노려보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념두에 둔것인지 직감적으로 느껴지였다.

(그러니 윤통은 조호백이가 반정준비라는 거짓소문을 지어내여 조정에 꽂아넣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우리의 원정준비에 대해서는 개경의 량반들보다 이곳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고있다.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이 고장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겠는가.

아니야. 호백이 무엇때문에 나를 모함하려 하겠는가, 과연 무엇때문에…)

박위 역시 저도 모르는새 호백에 대한 의혹이 갈마들었으나 애써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모지름을 썼다.

한참만에 박위는 다시금 준절한 어조로 말을 꺼냈는데 그 말은 윤통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기자신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부원수, 사람이 황달에 걸리면 세상이 전부 노랗게 보인다는 말이 있소. 우리 함부로 속단하지 맙시다.

의심이 병이요. 그 병이 커지면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사람을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수 없게 되오.》

두툼한 입술을 삐주름히 내밀고 서서 듣는둥마는둥하던 윤통은 아무 대꾸없이 교련장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목책우에 가벼운 붓방아를 찧으며 여념없이 사색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느리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조호백― 다른 일은 다 말말고라도 예전에 고향의 버섯골에서 내손에 의해 목숨을 구한 그가 무엇때문에 왜구격멸을 주장하는 나를 해치려 하겠는가.

모해의 불똥은 필경 다른 곳에서 튀여올랐을것이다. 이제 더이상 당치도 않는 헛소문에 왼심을 쓰면서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는 좀스러운 노릇을 하지 말자.

우리의 원정이 천백번 정당하고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청백한데야 두려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이 진정되고 결심이 굳어지자 박위는 교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벽에 걸려있는 환도를 벗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검술훈련은 어느 하루도 어겨본적 없는 아침일과중의 하나였다.…

뒤뜰에 돌아가 온몸에 땀이 내돋도록 칼을 휘두르고난 박위는 날아갈듯이 거뿐해진 기분으로 앞마당에 나왔다.

어느새 왔는지 마당 구석쪽에서 서성거리던 윤통이 커다란 키를 꺽둑거리며 성급하게 다가왔다.

감때사납게 생긴 눈을 희번득거리며 대충 인사를 차리고나서 급급히 말을 꺼냈다.

《급보올시다. 오늘 아침 우리 군사들이 바다길순시에 나갔는데 갑자기 왜구의 배 한척이 나타나더니 우리 배 돛대에 수상한 화살 한대를 쏘아박고는 정신없이 내빼더랍니다.

화살을 뽑아보니 살깃에 편지 두장이 끼여있더랍니다.

하나는 대마도령주가 쓴것이고 다른 한장은 리옥이가 쓴것인데 모두 박장군앞으로 보냈습니다.》

《?!》

왜구들이 편지를 보내온것도 전에 없던 일이요, 대마도령주와 리옥의 편지가 함께 날아온것도 기이한 일이였다.

박위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후에야 윤통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박위는 우선 대마도령주의 편지라는것부터 펼치였다.

령주라는 작자는 거드름스러운 어투로 문안인사 비슷한 소리를 건숭 해넘기고나서 역시 거만하기 짝이 없는 글귀로 되지 못한 수작을 질질 늘어놓았다.

《…듣자니 박장군은 요즘 대마도를 치겠노라며 복닥소동을 피우고있다는데 자중하는게 어떠시오?

당신들이 대마도를 공격하겠다는것은 잠자리가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수작과 엇비슷한것으로서 도저히 성사될수 없는 망상에 불과하오.

털어놓고말하여 당신네 고려군은 생소한 날바다길을 헤쳐오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온다 한들 튼튼한 성곽과 험준한 천연바위들로 싸여있는 우리 섬, 수백척의 전함과 수만명의 정예한 군사들이 항시 출동태세를 갖추고있는 우리 섬을 무슨 수로 깨치겠소.

부질없는 망상을 품고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헛되이 소모하지 마시오.…

박장군! 나로서는 오래동안 깊이 생각하고 고려한 끝에 하는 말인데 이제부터 우리는 각자가 새로운 인생길을 선택했으면 하오.

이를테면 량국간의 화해와 화평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우리가 물물교역의 새 장을 열자는거요.

그러자면 쌍방이 다같이 독기서린 검을 내려놓고 협상의 자리에 마주앉아야 할게요. 주지하는바이지만 검과 검이 부딪치면 죽음과 파괴가 생기지만 물건과 물건이 교역되면 진흥과 향상이 따르는 법이요.

깊이 생각해보고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주기 바라오.

우리는 당신의 회신을 받기 위해 또 협상문제를 론의하기 위해 성의껏 례물을 마련해가지고 이달 보름날 팔소앞바다에 우리 군사들을 보내겠소.

어련하겠지만 당신의 군사들도 다음과 같은 항목의 물건들을 례물로 마련해가지고 바다가에 나와 우리의 평화사절들을 맞아주기 바라오.

1. 곡물(김해흰쌀) 5천근

2. 과일(김해배와 김해단감) 2천근

3. 호피 300장

4. 비단 600필…》

사다께는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박위의 원정준비를 비난조소하고나서 그 무슨 화해와 화평을 뇌까리며 물물교역을 운운했다.

박위의 시점에서 볼 때 사다께의 모든 수작은 새로운 음모의 시작이거나 군사적도발의 서곡일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였다.

보잘것없는 작자에게 하대를 받고 조롱을 당한것이 여간만 분하지 않았으나 눈앞에 없는 놈을 놓고 분을 터친다는것은 우스운 일이였다.

잠시 거친 숨을 내불며 대마도쪽을 노려보던 박위는 다시 편지의 글발을 더듬어나갔다.

《…내가 보건대 박장군의 성미와 처지로써는 우리의 제의를 선뜻 받아물기가 조련치 않으리다. 하지만 서둘러 거절하기 전에 조성된 오늘의 정황을 신중히 따져봐야 할게요.

알고있겠지만 여기 대마도에는 지금 100여명의 경상도백성들과 죽촌사람들 그리고 왕년의 거제도별장이였던 리일경의 딸이 와있소.

장군이 만약 우리의 화평제의를 거절하거나 이달 보름날 팔소에 당도하게 될 대마도의 평화사절에게 군사적위해를 가한다면 우리는 부득불 당신을 화평의 교란자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리옥의 목을 잘라보내겠소.》

《잰내비같은 놈이 누구를 감히 협박하는고?!》

박위는 종시 애써 누르고있던 울분을 터치며 와락와락 종이장을 구기였다.

불타는 시선으로 이윽토록 사위를 두릿거리던 박위는 피끗 리옥의 편지에 생각이 미치자 남은 편지장을 마저 펼치였다.

리옥의 단정한 글씨들이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후두둑 가슴이 뛰였다.

편지내용은 어찌됐든 리옥이가 살아있다는것이 우선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장군께 올립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리옥은 자기가 대마도로 잡혀오던 날의 정황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단히 언급하고나서 침울하기 그지없는 필치로 급기야 기본화제를 펼쳐놓았다.

《…이곳 령주는 현중 아버님에게서 좋은 소식이 오는 경우 그날로 고려백성들과 소녀를 돌려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 갇힌 고려백성들과 소녀의 생사여탈권은 전적으로 현중 아버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현중 아버님과 현중을 만나보고싶은 소녀의 마음 하늘에 닿도록 간절하건만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와 같은 소녀의 불행한 운명은 과연 구원될수 있사온지…

부디 소녀의 일생일대의 소망을 이루게 하여주옵소서.…》

박위는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입술귀를 짓물었다.

리옥의 편지를 읽고나니 그리도 바라던 리옥의 소식을 알게 된것이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딱히 가늠할수 없을만큼 속이 허우룩해났다.

또한 왜구들이 죽촌을 급습하여 백성들과 리옥을 잡아간것은 이처럼 자기를 우롱하고 협박하기 위한 계획적인 모략이였다는 짐작이 굳어지였다.

박위는 아무말없이 윤통에게 두장의 편지를 다 넘겨주었다.

박위의 어수선한 뇌리속으로는 착잡하기 이를데없는 사색이 갈피없이 뒤번져지였다.

(내가… 리옥을 구원하기 위해 고려장수의 본분을 저바리고 왜구들과 짝자꿍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마도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이 왜구들의 손에 죽도록 가만히 내버려둘수도 없지 않는가. 과연 무엇을 어찌해야 두가지 일을 다 옳게 처리할수 있는가?)

박위는 불현듯 지난해 어느 여름날 저녁이 생각나자 곱살하게 생긴 작은 입술을 푸르르 떨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창원의 어느 촌락에 출몰한 왜구들을 소멸하고 군영으로 돌아가던 박위는 대오가 죽촌어구에 이르자 말에서 내리였다. 부원수에게 부대를 이끌게 한 다음 홀로 마을에 들어섰다.

리옥의 집에 나와있는 현중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꼭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조금 민망스러우나 은근히 리옥이가 보고싶어 그런 핑게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수레바퀴자리가 움푹움푹 패이고 잡풀들이 듬성듬성 널려있는 행길을 지나 리옥의 집앞에 이른 박위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울타리를 타고넘은 앞뜰의 구기자잎새들은 석양빛을 들쓰고 와슬와슬 설레는데 그 모양은 마치 이기고 돌아온 고려장수를 손벽을 치며 환영하는듯싶었다.

뒤울안에서는 리옥의 나직한 노래소리가 은은히 울려나오는데 그 소리 역시 박위의 전승을 축하하는 의미깊은 환영곡으로 해석되였다.

 

비단필을 수놓아

변방 멀리 싸움터에 보내옵니다

귀중한 몸 아끼시고

끼니나 많이 드시기 바라나이다

나라위해 공세움이

사내대장부 할일이니

원쑤 베지 않고는

돌아오지 마옵소서

 

리옥의 목청은 맑고 그윽했으나 소리하는 솜씨는 그닥 신통치 못했다.

허나 가락마다 처녀의 절절한 심정이 슴배여있는탓인지 노래의 구절구절은 감동적으로 마쳐왔다.

그와 함께 노래의 내용 그대로 리옥에게도 마침내 사랑하는 사내가 생긴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떠올랐다.

그러자 왜서인지 슬그머니 속마음이 알찌근해났다.

박위는 데데한 잡념을 털어버리려는듯 갑자기 활개를 휘휘 뿌리며 뒤울로 들어갔다.

옥돌같은 두손을 모두어잡고 평상우에 앉아 저 멀리 바다쪽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던 리옥은 가벼운 탄성을 터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회군하시는 길이오니까?》

리옥은 여느때없이 당황해하며 간신히 말끝을 여미였다.

그의 하얀 볼우로 꽈리빛이 번져지였다.

웬일일가?!… 내가 혹시 처녀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는 그 어떤 보지 말아야 할것을 훔쳐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박위는 심상치 않게 두근거리는 자기의 가슴을 애써 누르며 리성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훌륭한 장수의 딸인 리옥에게 좋은 배우자가 생겼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다.

일이 정녕 그리 되였다면 처녀의 래일을 축복해주어야 한다.)

《그래, 지금 돌아오는 길이야. 오늘 싸움에서도 수십놈의 왜구를 모짝 때려잡았으니 작은 전승이 아니지.

헌데 현중이녀석은 동네에 나가 애놈들과 장난을 하는 모양인가?!》

부러 활기를 띄우며 우선우선한 태도로 말문을 연 박위는 자기의 허리춤에서 정교하게 만든 단검을 떼내였다.

싱그레 웃으며 리옥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뭐라구 할가, 리옥의 노래를 훔쳐들은 값이라 할가, 전승을 축하하는 의미라 할가. 아무튼 이건 내가 몹시 애용하던 물건인데… 네게 이걸 줄만 한 사내가 생겼거든 내 마음까지 합쳐서 그에게 선물로 주도록 해라.》

《황송하옵니다.》

리옥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면서도 사양없이 단검을 받아들었다.

(리옥의 선물을 받을 사내는 과연 누구일고?)

참대숲사이로 빠끔히 내다보이는 저 멀리 바다가 선바위쪽에서 한무리의 호구니떼가 저마끔 제 짝을 애타게 찾으며 분주히 날아예고있었다.…

…박위는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그처럼 속이 깊고 도담한 리옥이가 아무리 절망적인 처지에 빠졌다한들 왜구들의 음흉수에 거의나 장단을 맞춘 편지를 쓸수 있겠는가?)

그사이 두장의 편지를 다 읽어본 윤통은 마치 이가 쏘는 사람처럼 보기 싫게 얼굴을 찡그리며 부르짖었다.

《박장군,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왜구의 건수작에 발을 맞출수도 없고 우리 백성들과 리별장의 딸이 참을 당하도록 내버려둘수도 없고… 이야말로 호미난방이 아닙니까?…》

박위는 천천히 채머리를 흔들며 준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검으로 말을 하는 무관들이요. 동풍이 불건 서풍이 불건 한시도 손에서 검을 놓을수 없소.

아니, 오늘처럼 안팎의 형세가 복잡한 때일수록 더욱 힘껏 검을 틀어잡아야 하오.》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사다께의 제의에 검으로 대답하는 경우 리옥은 왜구의 칼에 목이 잘릴겁니다.

리별장이 우리에게 맡기고간 외동딸인 리옥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위는 가슴복판에 칼이라도 박힌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이나마 리옥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무관으로서의 결기만을 살린 자기를 의식한것이였다.

(그러니 내가 검을 들면 리옥은 목이 잘리게 된단 말이지.…

세상에 이런 괴이한 변사가 또 어디 있을고?…)

앞마당 저편 구석쪽에서 돌연 현중의 울음소리가 끅끅 흘러나왔다.

그는 검술훈련을 하다말고 박위와 윤통이 나누는 말을 엿들은 모양이였다.

《이애 현중아―》

윤통은 울음소리가 새나오는쪽으로 겅정겅정 반달음을 놓았으나 현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맞은 장닭모양으로 후줄근해진 여삼이가 지척지척 골기없이 걸어왔다.

여삼이도 현중이와 함께 두 량반의 대화를 말끔히 훔쳐들은게 분명했다.

박위는 입빠른 여삼에게 오늘 엿들은 말을 일체 내돌리지 말라고 일러야 했으나 왜서인지 전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산기슭에 널려있는 군막쪽에서 아침밥을 짓는 군사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추 드리운 비구름탓에 밥짓는 연기는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그물그물 땅바닥을 핥으며 이쪽으로 밀려내리고있었다.

박위는 졸지에 할바를 망각한 사람마냥 우두머니 굳어진채 움직일줄 몰랐다.

…그날 저녁 김해관가의 조호백도 박위가 받은 편지와 엇비슷한 내용의 얼쑹덜쑹한 편지 두통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물론 매화가 록산의 어느 촌길에서 주은것이라며 가져다준것이였다. 호백은 편지를 다 읽고나서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이런저런 증거물을 꾸미거나 주어모을것도 없이 편지 두장만 조정에 가져다바치면 박위의 목대는 그날로 뎅겅할것이였다.

잔인한 환희로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 호백은 수상쩍기 짝이 없는 두장의 편지가 어떻게 되여 유독 매화의 손에 들어오게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캐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9

9

 

검충충한 구름장들이 갈가리 터지고 찢어지며 이쪽으로 빠르게 밀려오는 꼴이 머지않아 또 한차례의 된소나기가 쏟아질것 같았다.

우수수― 벌써부터 물기를 머금은 습한 바람이 밀려들며 손바닥만큼이나 넓은 나무잎새들을 희끗희끗하게 뒤번져놓았다. 시꺼멓게 색이 죽은 하늘을 흘낏흘낏 살펴보며 쩔뚝쩔뚝 걸음을 옮기던 오천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봄소나기 삼형제라더니 가을소나기도 삼형제인가?… 줄금줄금 내리기는 젠장… 이제 또 한차례 소나기가 쏟아지면 산을 오르내리기가 여간 구접스럽지 않을텐데…

에라― 해가 쨍쨍한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며 걷기보다는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걷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놈의 소나기 퍼붓겠거든 실컷 퍼부어라.…》

만사를 락관적으로 감수하는데 습관된 오천은 으스산한 날씨조차 제좋게 해석하고는 공연히 더 기분이 좋아지여 벌씬벌씬 웃기까지 하며 걸음을 내짚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허리가 지끈지끈 결리고 장다리가 쿡쿡 쑤시여 절로 이를 사려물게 되였다.

아직도 매맞은 어혈이 깨끗이 풀리지 않은탓이였다.

하지만 오천의 기분은 지금 무척 좋았다.

뭐니뭐니해도 오늘중에 염초감대기를 큼직하게 얻어내게 된것이 제일로 기뻤다.

하여 오천은 벙그레 웃음을 띄운채 그냥 제 혼자 시시벌거리였다.

《사람이 마음먹고 나선 다음에야 못해낼 일이 무엇이랴.

염초감대기도 고양이뿔이나 자라털이 아닌 다음에야 못 구해낼 턱이 없느니… 이 오천이 염초일때문에 박장군에게 애매한 매를 좀 맞기는 했다만 그게 무슨 대수냐. 큰일을 하러 나선 사내대장부의 앞길에 어찌 노상 평탄태로만 있으리오, 헛허허…》

오천은 마음이 들썽들썽해나는중에도 은근히 박위에 대한 악의없는 반감이 떠올랐다.

물론 그것은 억울한 매를 맞았다고 하여 옹졸하게 도사려먹은 치졸한 악심이 아니였다.

오천은 무엇보다도 임금이나 조정의 량반들과 어울려야 모든 일이 성사될수 있다고 보는 박위의 삐뚤어진 관념(박위는 언제한번 내놓고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으나 오천은 추호의 의문도 없이 그렇게 믿고있었다.)이 진저리가 날만큼 싫었다.

원래 오천은 량반일반을 그다지 신통하게 여기지 않았다.

개경의 화통도감에서 일할 때부터 그의 눈에 비쳐진 량반들은 거개가 조상뼈다귀를 추켜들고 허세와 교기를 부리는 허풍선이들이였고 말시비질과 음풍영월로 허송세월하는 건달군들이였다.

그들중에는 외적이 출몰했다는 소문만 들어도 혼맹이가 건공중에 떠서 부들부들 떠는 겁쟁이가 있는가 하면 앞에서는 기가 나서 충의를 떠들다가도 뒤에 돌아앉아서는 저 하나의 권세와 영달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위선자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물론 최무선이처럼 진정으로 나라일을 걱정하고 자기의 힘과 지혜를 깡그리 나라와 백성을 위해 바치는 량반들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사람은 쌀에 섞인 뉘만큼이나 희소했다.

하기에 오천은 권세있는 량반들이 떠밀어주어야 이번 원정이 성사될것이라고 믿고있는 박위가 적지 않게 못마땅하였다.

박위 역시 량반일반이 다 그러하듯 자기를 포함한 무세한 상사람들을 무턱대고 우습게 여기는듯싶어 은근히 섭섭하기도 했다.

물론 오천은 뜻이 높고 무술에 능하며 배짱과 기개도 헌헌할뿐아니라 자기를 각방으로 내세워주고 믿어주는 박위를 깊이 존경하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껏 드팀없이 고수해온 인생신조와 생활관념을 굽히게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큰일이라 할지라도 참깨, 들깨 다 섞어가지고는 일이 옳게 될것 같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들과는 처지도 다르고 궁냥도 다른 조정의 량반들과 김해부사같은 사람들을 믿고 일을 내민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제일 확실한것은 자기 몸에 붙어있는 머리와 팔다리요, 제일로 믿음직한것은 평범한 군사들과 백성들의 힘이였다.

오천의 인생관은 정녕 이러했다.

그의 인생관은 단순하고 소박할망정 절대로 허망한것이 아니여서 이번에도 역시 간난신고끝에 염초감대기를 쓰고도 남을만큼 얻게 된것이였다.…

부슬부슬 비방울이 떨어지였다.

허나 오천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채 산중깊이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오천의 고향은 교주도(오늘의 강원도지역)에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문난 도지촌이라는 곳이였다.

바다에는 철따라 각색 물고기떼가 오르내리고 들에는 갖가지 곡식들이 기름지게 잘도 되는데 집오래와 산기슭에는 온갖 과일들이 가지가 휘도록 주렁지였다.

오천이 아버지는 서글서글한 성격에 남의 어려운 사정을 제일처럼 살펴주고 도와주는 인정많은 사람이였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남들의 곱으로 걸싸게 해제끼면서도 눈썰미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아서 바다에 나가면 주장 목대잡이노릇을 하고 들에 나가면 꼭지대접을 받았다.

성격이나 취미가 꼭 아버지를 닮은 오천은 연골적부터 바지런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바다일과 농사일에 몸을 적시고 농구나 어구를 손질하는 방법도 열심으로 익히였다.

부자가 억척같이 일하는데다 오천이 어머니까지 흑달과 해소병으로 장참 앓으면서도 고기밸을 따거나 미역과 조개를 말리우는따위의 잡일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관가에서 불러대는 온갖 명색의 가렴잡세를 빠짐없이 훑어바치고나면 군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이였다.

마을 앞바다로는 초복의 더운 물줄기를 타고 여느때없이 큰 낙지떼가 연연 밀려들었다.

도지촌사람들은 너도나도 바다에 뛰여들었다. 오천이부자도 뒤질리 없었다.

그날도 너벅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장밤 낙지잡이를 한 오천이부자는 동녘이 희붐하게 밝아오자 기슭쪽으로 배머리를 돌리였다.

밤새껏 기름불을 켜들고 낙지잡이를 한탓에 눈정기도 어지간히 흐렸지만 사방에 젖빛안개가 자오록이 덮이여 한치 앞도 가려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배꼽에 굴껍데기가 더께로 앉았다고 할만큼 바다물계에 밝은 오천이 아버지는 조금도 당황해하지 않고 침착하게 노를 저어나갔다.

안개발에 몸을 잠그고 부지런히 노를 젓던 아버지가 갑자기 흠칫 몸을 떨더니 우뚝 굳어지였다.

앞쪽에서 돌연 코숭이가 뾰족하게 쳐들린 낯선 다락배 여러척이 안개덩이를 가르며 불쑥불쑥 나타난것이였다.

다락배들에서는 쌈싸우듯 하는 왜구들의 말소리가 왁자하게 들려왔다.

《아뿔싸! 왜구들의 배로다! 오천아! 어서 물에 뛰여들어라!》

아버지는 한손에 노대를 틀어쥔채 오천의 등을 마구다지로 떠밀었다.

《아버지도 같이 뛰여내리자요. 저놈들에게 잡히면 죽어요.》

오천은 아버지의 솥뚜껑같은 손을 힘껏 끌어당기였다.

아버지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절망적인 초조감이 류황불처럼 파랗게 타올랐다.

《이녀석아, 좁쌀여우처럼 잔꾀가 말짱한 왜구들이 빈 배를 보고 그냥 갈상싶으냐. 저놈들이 참빗질하듯 바다를 훑으면 너도나도 다 잡혀죽는다. 내 저놈들을 끌고갈테니 너만이라도…》

아버지는 제잡담 오천을 버쩍 안아들더니 바다물에 내동댕이라도 치듯 던지였다.

하고는 일부러 노소리를 야단스럽게 내며 다락배들을 맞받아 배를 몰아갔다.

왜구의 배들은 먹이감을 발견한 구렝이떼마냥 아버지의 너벅선으로 우르르 밀려들었다.

물속에 곤두박혔던 오천이 수면우에 떠오르니 바다는 더없이 고요했다.

아버지는 필경 왜구들의 칼에 찔려 난탕이 되였을것이라는 끔찍한 예감이 오천의 뇌리를 번개처럼 때리였다.

쏟아져나오는 비명을 씹어삼키며 방향없이 바다를 헤가르던 오천은 중낮무렵에야 바다우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빈 배를 발견하였다.

황급히 배에 올라보니 그들먹이 쌓여있던 낙지무지는 간곳 없고 그자리에는 온통 피자박이 된 아버지가 고기밸따는 칼을 틀어쥔채 쓰러져있었다.

목터지게 찾고 불러도 아버지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가슴이 꺼져내리였다. 바다가 빙그르르 돌아갔다. 오천이 아버지를 업고 집에 들어서니 그러지 않아도 건강이 좋지 못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어머니는 기혼을 하여 쓰러진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오천은 왜구로 하여 하루아침새 량부모를 다 잃은 혈혈단신, 천애고아로 세상밖에 내던져지였다.

소년의 작은 심장은 복수의 피로 끓어번지였다.

그후 오천은 군사가 될 꿈을 안고 이 고장, 저 고장으로 나돌아다

니던 끝에 화통도감에서 행수(관청수공업장에서 일하는 장공인들에게 주던 낮은 급의 벼슬.)노릇을 하는 먼 친척벌되는 사람의 권유로 개경에 올라가 화통도감에서 일하게 되였다.

당시 화통도감은 최무선의 지휘밑에 화약과 화약무기를 생산하는 조정소속의 병기창으로서 그곳에서 일하는 장공인들은 군사들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고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일군들에게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게 하는 한편 각종 화약무기의 사용방법도 배워주고있었다.

오천은 부모들의 원쑤를 갚는 심정으로 도감의 일에 심신을 다 바쳐가면서 화약무기들의 사용방법을 열심히 배워나갔다. 하지만 오천의 소원은 병기를 만드는 군사가 아니라 병기를 잡고 싸우는 군사가 되는것이였다.

오천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최무선에게 지금 한창 왜구들과 싸움을 벌리는 전역으로 보내줄것을 열렬히 요청하였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학자이며 사려깊은 인간인 최무선은 오천의 심정을 십분 리해하고 그의 갸륵한 소청을 높이 치하해줄뿐아니라 적절한 기회에 전방에 보내줄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무선은 오래전부터 화통도감에서 생산하는 화약과 화약무기로는 전군의 수요를 충족시킬수 없는 조건에서 오천과 같은 재능있는 젊은이들을 현지에 파견하여 지방군자체로 화약과 화약무기를 만들어쓰게 하면 여러가지로 유익할것이라고 타산하고있었다.

일이 될 때라 지난해 여름 개경에 올라왔던 박위가 화통도감에 들리였다.

무선은 박위를 조용히 따로 만나 자기의 속생각을 자상히 알려주고나서 오천을 수하의 군사로 받아줄것을 부탁하였다.

박위는 무선의 청을 쾌히 수락하였다.

그리하여 오천은 자기의 념원대로 통좁은 바지를 가뜬하게 차려입은 전역의 군사가 되였다.

이러한 오천이기에 대마도원정을 준비할데 대한 박위의 령이 떨어지자 그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팔을 부르걷고 원정준비에 떨쳐나섰다.

부모의 원쑤를 열백배로 갚게 된것도 기뻤지만 불구대천의 원쑤인 왜구가 다시는 나라지경을 범접하지 못하게 도적떼의 소굴을 통채로 짓뭉개버린다는것은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였다.

오천은 힘에 겨운 염초장일도 자진하여 맡아나섰다.

헌데 정작 염초장일을 껴안고보니 염초를 만드는 일은 애초의 짐작처럼 썩썩 풀려나가지 않았다.

역시 제일로 걸린것은 염초감대기였다.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염초감대기가 들나게 되자 오천이네들은 군영앞동네와 린근마을은 물론 수십리밖에까지 나돌며 촌촌호호를 훑었으나 번마다 모아지는 부엌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염초생산을 확장할수 없었다. 염초감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 밤낮으로 골을 썩이던 오천은 불현듯 최무선이가 처음으로 화약을 만들 때 오래된 절간마루밑의 먼지로 염초를 만들어 썼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오천은 무릎을 탁 치며 환성을 올리였다.

(챠, 어째서 그 생각이 이제야 떠올랐을가?… 아무튼지 이제는 됐다.

여기 김해는 옛적부터 타고장에 비길수 없이 미신놀이가 성해온 고장이니 오래된 절간도 많을것이다.

우선 오래된 절간들을 전부 알아낸 다음 절마다에 마루밑먼지가 얼마나 되는지 일일이 확인하자.

그다음은 절의 주지들에게 군영의 형편을 잘 알려주고 협력을 요청하면 일은 그야말로 다 먹어놓은 떡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당장 일을 시작하자니 한가지 불안하고 께름한 문제가 있었다.

만약 절간의 주지들이 자기의 요청이나 설복을 옳게 리해하지 못하고 울뚝불뚝 소동을 일으킨다면 일은 예상외로 복잡해질것이였다.

여삼의 말에 의하면 지금 조정의 일부 량반들은 박위를 모해하기 위해 별의별 험한 소리를 다 지어돌린다고 한다.

그런데 자기의 절간마루밑의 먼지를 파낸 일이 절간파괴죄로 오도되여 그 죄가 박위에게 재차 덮씌워진다면 박위는 더 큰 위험에 처하고 원정은 파탄의 랑끝에 오를수도 있었다.

이 점이야말로 신중한 고려를 돌려야 할 문제였다.

오천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마침내 그는 후날 절간사건이 복잡해지는 경우 자기 혼자 그 죄를 홈빡 뒤집어써야 하며 그러자면 절간마루먼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몰라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럴 때 뜻밖에도 죽촌에서 찾아온 저대로인은 저들도 전함건조와 염초생산을 한귀퉁이라도 맡아하겠노라고 자청해나섰다.

그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인 동시에 또 하나의 혁신적인 방도를 튕겨주는 계기로 되였다.

(우리의 군사일을 돕고싶어 몸달아있으면서 방도를 몰라서 바재이는 백성들이 어찌 죽촌사람들뿐이겠는가.

절간위치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동네방네 들리여 염초일이 얼마나 중하고 급한 일인가를 잘 알려주고 가능한껏 저들끼리 만들게 한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것이다.)

그때로부터 오천의 일감은 두배, 세배로 불어났다.

오천은 죽촌은 물론 구렁촌과 가락마을에까지 나들며 사람들에게 배를 뭇는 방법과 염초일의 묘리를 직심스럽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생소한 이 고장의 지형과 오래된 절간들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았다.

누구도 모르게 산을 나들던 오천은 어느날 조용한 기회에 취금이를 찾아갔다.

때마침 구서방은 염초장으로 나간 뒤여서 집안팎은 쥐죽은듯 고요한데 취금은 토방우에 실팍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수수쌀에 섞인 뉘를 고르고있었다.

오천은 셈평좋게 취금이곁에 털버덕 걸터앉았다.

《마침 집에 있었구먼. 내 오늘 먼길을 다녀와야겠는데 수고스러운대로 점심밥 한그릇 얼추 싸주어.》

이제는 상당히 친숙해지여 예전처럼 만나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생청같은 소리가 터져나오군 하는 일은 거의나 없었다.

헌데 말부리를 털어놓고보니 오늘도 첫마디부터 썩 영글게 나간것같지 않아 은근히 속이 조여들었다.

사실 오천은 점심밥을 싸는것마저 남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것 같아 군영에서는 일체 입을 봉하고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매번 점심을 굶으며 나돌아다닐수는 없었다.

하여 오늘은 취금에게 조용히 점심밥부탁을 하려고 그의 집에 나온것이였다. 헌데 군말없이 응할줄 알았던 취금은 시작부터 의외의 태도를 보이였다.

《내가 무엇때문에 그녁의 밥을 싸준단 말이야? 군영에 가서 군졸들 보고 싸달래여.》

오천은 등이 달았다.

《챠 이런, 보리밥이나 수수밥 한덩이에 절인 조개 몇쪽을 꾹꾹 박아주면 될텐데 뭘 그리 비쌔구 저쌔구 하는거여?

군영에 대고는 밥싸달라고 할 형편이 못돼서 그래.》

취금은 숙어들기는커녕 더욱 랭랭하게 나왔다.

《군영에서 못 싸주는 밥을 내가 왜 싸준단 말이야. 객적은 소리 그만하구 저리 비켜.

샘둥천에 나가서 저녁반찬으로 쓸 고사리를 씻어야겠어.》

무엇때문인지 잔뜩 앵돌아진 취금의 속을 풀어놓자면 앞뒤사연을 죄다 빠개놔야 할것 같은데 일의 시작부터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을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들개처럼 노상 굶어가지고 산속을 나돌아다닐수는 없는노릇이였다.

잠시 고개를 비틀어꽂고 서서 바재이던 오천은 사랑에 취한 총각녀석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처녀만은 절대적으로 믿을수 있다고 자신을 납득시켜버리였다.

오천은 자기가 취금의 깜찍한 수에 넘어간줄도 모르고 루루이 량해까지 구해가며 자초지종을 전부 토설해놓았다.

오천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취금은 수수쌀이 골숨하게 담긴 질자배기를 드르륵 밀어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함께 갈테야.》

일이 이렇게 번져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오천은 퀭하게 눈을 흡뜨고 취금의 상기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어딜 함께 간단 말이야?》

《어디긴 어디야, 저 가는데지. 그녁은 여기 온지 한해도 되나마나 하니 이 고장 산길도 잘 모르고 오래된 절간들이 어디어디에 있는지도 똑똑히 모르지 않아.

하지만 난 봄내, 가으내 나물캐러 다니고 송피벗기러 다니고 또 아버지를 따라 화살감을 베러 다니기도 했으니 어느 산이나 다 손금보듯 환하단 말이야.》

잠시 어정쩡해있던 오천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취금이와 함께 나섰다가는 후일 그에게까지 무서운 불행이 떨어질수 있다는 섬찍한 예감이 들자 다소간 흔들리던 오천의 마음은 다시 단단하게 굳어졌다.

《딴은 그렇지만… 이번 길은 나 혼자 가야 해.》

취금의 덕성스럽게 생긴 하얀 얼굴은 그 어떤 원망의 빛을 띠고 이그러들었다.

《안되긴 왜 안된다는거야? 저한테만 가슴아픈 사연이 있고 저한테만 왜구에 대한 원한이 있다구 생각지 말아.

우리 엄만 내가 두살도 되기 전에 바다에 무잠이질을 나갔다가 왜구의 칼에 찔려 돌아갔어.

시신도 찾을수 없게 먼바다 어딘가로 피물을 흘리며 밀려갔단 말이야.

또 우리 아버지는 갓 스무살 한창나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바다복판에서 왜구들의 쇠장대에 얻어맞아 한쪽팔을 잃었어.

어깨뼈가 다 으스러졌단 말이야.…》

서럽게 흐느끼며 간신히 말을 이어가던 취금은 눈물이 번들거리는 얼굴을 오연히 쳐들었다.

《그러니 나도 왜구를 요정내는 일에 마음 한귀퉁이라도 바쳐야 조금이나마 속이 개운할거야. 그녁처럼 일등군사는 못된다쳐도 꼬리잡이군사노릇이라도 해야 하겠단 말이야.

거기서 그예 나를 따버리려 한다면 난 이길로 군영에 들어가 장군께 금방 들은 소리를 몽땅 일러바칠테야.》

오천은 취금의 눈물어린 진정과 결연한 의지에 가슴이 저리도록 감심이 되였다.

자기의 비밀한 일의 속내를 박위에게 일러바치겠다는 취금의 위협 또한 여간만 두렵지 않았다.

취금이를 데리고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 고장 지형에 밝은 취금이와 함께 일을 펼치면 도움이 될 일도 적지 않을것 같았다.

그날부터 오천과 취금은 산과 산을 넘고 골과 골을 누비며 오래된 절들을 찾아다니였다.

가시덤불, 넝쿨나무에 할퀴우고 걸려 넘어지고…

츠렁바위에서 굴러내리고…

때로는 헛길을 잡아 밤새껏 수십리산길을 빙빙 에돌기도 했다.

언젠가는 봉은사의 응진전(석가모니의 제자라는 라한부처를 놓아두는 건물.) 마루밑을 들척거리다가 도적년놈으로 몰리여 하마트면 중놈들의 모두매에 들번 하였다.

또 어느날 밤엔가는 죽촌사람들의 일을 살펴주고나서 그곳 미륵불앞을 지나다가 굶주린 늑대무리를 만나 여차하면 맹수들의 밥이 될번한적도 있었다.

심신은 말할수없이 고달팠으나 일이 진척되는것이 기쁘기만 한 오천은 노상 싱글벙글 웃으며 나다니였다.

《아이유! 오천대정이 요즘 별스레 얼굴이 환해진다?…

일이 아주 잘돼가나부지?》

입심센 동네아낙네들은 취금이와 오천을 볼적마다 공연한 호기심을 품고 이런 식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면 자기의 일이 누구도 모르게 썩썩 풀려나가는것이 흐뭇하기만 한 오천은 매양 신중성없는 롱담으로 그들의 말을 아무렇게나 받아넘기였다.

《그러문요. 이 오천대정의 일이 잘 안될 까닭이 있나요.

이제 채단마련만 다되면 이 늙은 총각도 제꺽 두루마리상투를 뭉그려 꽂으렵니다, 헛허.》

이렇게 되여 오천의 비밀한 속내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언행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오해를 사게 되였고 결국은 억울한 매까지 맞게 되였다.

그래도 오천은 모든 일이 자기의 뜻대로 흘러가는것이 기쁘기만 했다.

여하튼 장근 두석달을 남모르게 애쓴 보람이 있어 이제는 오래된 절간들의 위치는 물론 들고나는 길도 환하게 알게 되였고 어느 절에 마루밑먼지가 얼마만큼 있다는것까지 알뜰하게 파악하게 되였다. 또한 절간의 주지들을 여러차례씩 만나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가슴을 치며 염초의 필요성과 절박성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미 짐작했던대로 가장 큰 골치거리는 역시 매 절의 주지들이였다.

오천의 소청을 옳게 여겨듣고 그까짓 마루밑먼지같은것이야 왜 못내겠느냐 하고 선뜻 응해나서는 주지들도 있었으나 그런 사람은 겨우 두명뿐이였다.

어떤 주지는 오천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세상에 이런 괴변이 어디 있느냐고 왝왝 고아대는가 하면 어떤 주지는 골살을 잔뜩 찌프린채 검다희다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또 어떤 작자들은 매번 한본새로 저들의 절은 그 누구도 다칠수 없노라고 무턱대고 내우기였다.

보람없는 설복과 애원을 하고다니는 사이 날은 사정없이 흘러갔다.

더이상 주지들의 암매한 견해가 달라지기를 기다리고있을수 없었다.

오천은 마침내 오늘까지 설복을 해도 먹어들지 않는다면 강짜를 써서라도 마루밑의 먼지를 전부 퍼내리라 결심하였다.

모든 절의 주지들이 거의 일치하게 반대하는 조건에서 오천의 이러한 용단은 장차 어떤 화단을 가져올지 알수 없는 매우 위태로운것이였다.

하지만 모든 위험을 다 각오한 오천은 결심을 다지자 주저없이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첫 과녁을 봉은사로 정한 오천은 아침일찍 염초장사람들에게 짐을 담을수 있는 물건들을 갖춰가지고 봉은사절문앞으로 오라고 이른 다음 제 먼저 길을 떠났다.

한걸음 앞서가서 봉은사주지를 다시한번 잘 주물러볼 작정이였다.

또한 중놈들과 어떤 드잡이가 벌어질지 알수 없는 오늘만은 취금이를 자기곁에서 떼버리기 위해서였다.

하여 오천은 군영에서 자고 나오자 잔입 그대로 황망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발은 더욱 굵어지였다.

하지만 쩔뚝거리는 다리모양과는 판다르게 기운차게 활개짓을 치는 오천의 뇌리속에서는 취금의 사랑스러운 얼굴모양이 따갑게 맴돌고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천진하고 새침하고 또 명랑하기도 한 처녀의 이채로운 성격과 덕성스럽게 생긴 생김새에 마음이 끌렸었다.

허나 지금에는 왜구를 족치는 그 길에서 군사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자기를 바치려는 처녀의 웅심깊고 강단있는 속심지에 걷잡을수없이 넋이 끌리였다.

그것이야말로 취금의 가장 큰 장점이요, 두사람이 한일생 시들지 않는 사랑의 꽃을 피워나갈수 있는 공통된 사랑의 바탕이 아니겠는가?!…

오천은 취금이가 마치 눈앞에 있기라도 한듯 벙시레 웃으며 중얼거리였다.

《지금쯤 취금이는 내가 혼자서 봉은사에 갔다는걸 알아차렸을게야.

눈이 쌍그레가지고 한창 야단을 치겠군. 하지만 혼자서야 따라올 생의를 못 내겠지. 저번날처럼 숲속에서 늑대들이 기여나올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테지. 이제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나 혼자 갔다왔다고 성화가 이만저만 아닐게야.

헛허허… 그럴테면 그러라지. 취금이가 아무리 야단을 쳐도 밉기는 커녕 정나미가 폭폭 드는데야 그 성화인즉 얼마나 즐거운것이냐, 허허…》

후둑후둑… 솨― 솨―

어느새 소나기로 변한 비발은 제법 소란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몰박으로 쏟아져내리였다.

그제서야 확연히 현실감을 의식한 오천은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몽몽한 안개, 쏟아져내리는 소나기, 뒤척거리는 숲…

아무리 급한 길이라 해도 초입부터 온몸을 화락하게 적시고싶지는 않았다.

오천은 다리도 쉬우고 소나기도 그을겸 오솔길가에 홀로 허리를 꼬부리고 서있는 늙은 소나무밑으로 들어갔다.

지끈지끈 들쑤시는 거북스러운 다리를 쭉 내뻗치고 퍼더앉았다.

심상한 기색으로 소나기에 잠긴 숲속을 휘휘 둘러보던 오천은 바로 발치앞에 드리워있는 넝쿨속에 밤알만 한 머루알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것을 띠여보자 벌씬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즘 여삼이 색시가 입쓰리인지 눈쓰리인지 한다던데 채 익지 않은 저 머루를 따다주면 좋아하겠구나.

근래 그 집에 자주 나가보지 못하니 여삼이나 여삼이 색시가 날 원망하겠지.)

머루넝쿨을 향해 몇걸음 다가가던 오천은 다시 우뚝 굳어지였다.

어제 저녁 저녁밥짓는 모닥불가로 우정 자기를 찾아왔던 여삼의 얄팍한 얼굴이 떠올랐다.

한동안은 제쪽에서 공연히 시뜩해다니던 여삼은 오천이가 매를 맞고난 뒤로는 왜서인지 마주칠 때마다 까닭없이 어색해하면서 무슨 말이든 정답게 나누고싶어하는 눈치였다.

헌데 어제 저녁 여삼의 말은 그의 평소의 표정과는 달리 제법 훈시조로 펼쳐지였다.

《형님, 내 일전에도 여러번 말하지 않았소. 지금 개경의 어떤 량반들은 우리 군영에서 반정을 준비하고있노라구 떠든다구… 아, 그런데 저번날 아침에는 우리 군영에 대마도령주라는 놈의 편지가 날아들었소.

그게 바로 우리가 어떤어떤 물건들을 저들에게 가져다바치지 않으면 잡아간 고려사람들을 다 죽이겠다고 떵떵 으르는 내용의 편지랍디다.

내참, 이런 괴변이 또 어디 있겠소.

부원수나리는 우리 군영근처에 왜구의 세작이 박혀있는게 분명하다구 찍어서 말합디다.

판국은 이러한데 형님은 허구헌 날 나돌아다니기만 하니 이게 어디 일이 됐소?

누구보다 일축을 많이 내야 할 형님이 그러고 다니니 나부터 안타깝고 서운하우.》

여삼은 박위가 군심민심이 다 소란해질수 있으니 절대로 대마도령주의 편지사건에 대해서는 소문을 내지 말라고 했다는 소리까지 털어놓으며 알고있는 소식을 죄다 뱉아놓았다.

오천은 여삼의 말을 듣는 첫 순간에도 그러했지만 그의 말을 되새겨보는 지금에도 까닭모를 죄의식으로 가슴이 옥죄여들었다.

내외의 형세는 날로 험악해지는데 여삼의 말과 같이 남보다 몇배로 일축을 내야 할 자기는 한정없이 늦장을 부리는듯싶었다.

매일, 매 시각 곤두박질하듯 뛰고 달려서 시각빨리 원정준비를 끝내야 했다.

그와 함께 앞에서 날뛰는 왜구도 때려잡고 뒤에 숨어서 군영의 비밀을 뽑아내는 왜구의 세작도 튕겨잡아야 했다.

어느결에 머루열매같은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오천은 자기의 눈앞에 금시 어떤 흉악한 적이 나서기라도 한듯 눈을 지릅뜨고 줄대처럼 쏟아져내리는 폭우속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갑자기 뒤쪽에서 와작와작 젖은 나무가지들과 잎새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리였다.

오천은 잽싸게 몸을 돌리였다.

한껏 긴장된 시선으로 뿌잇한 비발속을 노려보던 오천은 온통 물참봉이 되여가지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가려보자 너무도 기가 막히여 입을 딱 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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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그렇게 놀라는거야? 무슨 귀신같은것이 다가붙는가 했는 모양이지, 호호호…》

온몸이 화락하게 젖었으나 후줄근해보이기는커녕 여느때보다 오히려 더 싱싱해보이는 취금은 유쾌한 꽃다림놀이에라도 나선듯 상글상글 웃으며 경쾌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내짚는대로 젖은 나무잎들과 풀포기들에서 구슬알같은 물방울들이 후둑후둑 튀여났다.

치마자락에서도 구슬꿰미같은 물방울들이 줄줄 떨어져내리였다.

《아니, 취금이가 어떻게?!…》

천생 반죽좋고 숫기좋은 오천이건만 전혀 예상밖의 일이라 혀가 굳어지여 얼추 말마디가 굴려지지 않았다.

놀라움이 가라앉자 이처럼 지겨운 날씨에 기어이 자기뒤를 밟아온 취금의 고집스러운 성격과 뜨거운 속마음이 헤아려지여 가슴이 뭉클해났다.

취금이도 오늘의 이 길이 험악한 드잡이판과 이어질수 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이 후날 녀자로서는 이겨내기 어려운 악형과 옥살이로 번져질수 있다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취금은 종주먹을 부르쥐고 끝끝내 뒤쫓아온것이였다.

홀로 비내리는 숲속길을 걸어서, 그것도 상글상글 웃으면서…

단지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간다는 식의 세속적인 인정에 끌려서일가.

물론 그런 마음도 아주 없는것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모진 고생속에서도 비꼬이지 않고 결바르게 자라난 처녀의 가슴속에는 왜구격멸의 전장에 화포알 하나라도 제힘으로 마련하여 섬기고싶은 열렬한 마음, 오천이와 고난도 위험도 함께 나누려는 고결한 마음이 끓어넘치고있기때문이 아니겠는가.

오천은 감동에 젖고 비물에 젖어 그냥 쓰려나는 눈을 재게 슴벅거리며 공연히 헛기침을 톺아올리였다.

희멀끔한 얼굴탓인지 뚱뚱할사 한 몸집탓인지 비물, 흙물에 매닥질이 되였어도 보름달처럼 환하게만 안겨오는 취금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잠시 오천을 마주보던 취금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살며시 뜻있는 웃음을 빼여물었다.

취금은 오천이가 도망이라도 치듯 혼자 몰래 떠나온것이 조금 고깝기는 했으나 바로 거기에서 자기를 더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내의 웅심깊은 속마음을 더욱 저저이 느낄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뜨거운 정이 사품쳐끓었다. 허나 이런 때면 대개 그러하듯 취금은 자기의 끓어오르는 마음을 웃음과 생청같은 화제로 가리우고싶었다.

《흠, 그렇게 혼자 도망을 쳐서야 그게 무슨 인정이람. 참, 알량도 하지…》

《할말이 없게 됐군.》

《헌데 이렇게 장참 먼길을 걸어서야 매맞은 어혈이 어디 풀리겠어?》

취금의 표정과 어투는 여전히 맑고 명랑했다. 허지만 옥쪼각처럼 반짝이는 처녀의 눈을 여겨보는 오천의 가슴은 갈수록 그들먹하게 괴여올랐다.

오천은 힘겹게 머리를 흔들며 떠드박거리였다.

《그까짓거… 이젠 거지반 풀렸는데 뭐.》

《아니야. 지금도 쑤시고 결리는걸 애써 참겠지.

아무튼 그렇게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절간소리는 한마디도 내놓지 않았다니 그녁이 독하긴 독한 사람이야.》

《독하기야 뭘, 말을 해서는 일을 그르치겠기에 참고 견딘거지…》

《어쩜 사람이…》

오천의 넓둥그런 얼굴에도 격정이 어리고 취금의 퉁퉁한 낯에도 감동이 실려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색고운 노을빛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물도 씻어내지 못했다. 이윽하여 취금은 꽤 묵직해보이는 베보자기를 오천이앞에 들어올리였다.

《참, 울아버지 몰래 그녁이 좋아하는 수수탁배기를 한방구리 떠가지구왔어.

이걸 마시고 걸으면 다리도 덜 아프고 허리도 덜 쑤실거야.》

《아니, 그건 뭘… 난 취금이가 이렇게 따라나선것만 해도 기운이 나는데 뭐…》

오천은 주체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속이 넘쳐나는 바람에 종시 말끝을 여미지 못했다.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후끈후끈해나는 얼굴을 문지르며 술방구리를 받아들념을 내지 못했다.

진정 취금의 맑고 랑랑한 말마디에서는 얼마나 후덥고 진실한 사랑의 향기가 풍기고있는가!…

어머니를 여읜 뒤 지금까지 녀자의 살뜰한 정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한 오천은 자기의 몸에 생긴 별치 않은 상처의 뒤탈까지 깊이 념려해주는 취금의 다심한 마음에 그만 코끝이 매워나고 눈시울이 깔깔해났다.

취금은 취금이대로 오천이가 여느때없이 사랑스러웠다.

예전에는 노상 싱글거리며 다니는것이 어딘가 맺힌데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허나 근래에 이르러보니 오천은 온갖 시련과 난관을 웃음으로 휘감아던지며 간고한 인생길을 자신만만하게 맹속으로 달리는 쾌남아였다.

그의 넓은 가슴에는 진정 비길데없이 높은 뜻과 가지각색 재주, 뜨겁고 웅심깊은 인정이 넘치도록 출렁이고있었다.

오천은 어느모로 보나 일등의 품격을 갖춘 군사요, 제일로 믿고 따르고 사랑하고싶은 사내였다.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을 내리깐채 높은 가슴을 세차게 들먹이던 취금은 오천의 담벽같은 가슴에 살며시 볼을 가져다대며 눈을 감았다.

《누군 뭐 그렇지 않나. 나도 그녁만 곁에 있으면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힘이 나고…》

꿈속에서처럼 분명치 않은 소리를 흘리는 취금의 곱게 감겨진 눈에서는 순결한 처녀의 한생에 두번다시 있을수 없는 사연깊은 눈물이 소리없이 굴러내리고있었다. 오천은 부지불식간 자기로서도 쉬이 제어할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에 떠밀리워 취금의 실한 어깨를 와락 그러안았다.

그 서슬에 처녀의 발밑에서 술방구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울리였으나 두사람은 다같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비는 여전히 몰박으로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인적없는 숲속에 쉬임없이 내리는 초가을의 소나기는 을씨년스러웠으나 불타는 사랑과 열정으로 충만된 두 청춘에게는 그것이 저들의 사랑을 축복하여 뿌려주는 자연의 선물처럼 의미깊게 느껴지였다.…

…신라의 미추왕때 고구려에서 넘어온 아도라는 법사가 이 땅에 처음으로 불법을 전파하면서 세웠다고 하는 상당히 미심쩍은 유래를 가지고있는 봉은사는 보전(절의 기본건물)도 웅장하고 승방(중들이 사는 집)과 암자도 무수히 많았다.

종루(종을 매달아두는 다락)와 경주(불경을 보관해두는 건물), 절문과 절탑따위들도 여느 절에 비교할수 없을만큼 크고도 근감했다.

그런데다 방금 휩쓸고 지나간 소나기에 함씬 미역을 감은 절의 건물들과 주변의 울창한 숲은 기름이라도 발라놓은것처럼 선명하게 색이 두드러지여 더한층 현란한 맛을 돋구고있었다.

8각의 돌탑과 대웅전, 웅진전, 무량수전, 극락전, 보당전 등 각색건물들의 추녀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풍경들은 오가는 바람결을 타고 잘그랑잘그랑 부드러운 금속음을 내는데 그 소리 또한 이 절의 유구한 력사와 풍미를 은은히 자랑하는듯싶었다.

어디선가 향불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목탁소리, 불경 외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세상사가 여의치 못해 절을 찾아온 속인들이 제를 지내놓고도 불당의 령험이라는것이 아무래도 좀 미타하여 예서제서 수군덕거리는 소리도 띄염띄염 울려왔다.

오천은 절문앞에서 떼를 쓰는 취금을 강다짐으로 떨구어두고 절의 중심건물을 향해 힝힝 걸어나갔다.

본전앞에 이른 오천은 주지를 찾아낼 길이 난감하여 잠시 사방을 두릿거리는데 때마침 대웅전에서 비둔하게 생긴 주지가 뚱뚱한 몸을 띠뚝거리며 걸어나왔다.

원체 중일반을 삭발한 협잡배로 경멸하는 오천은 상판이 유들유들한 주지와 마주서자 피가 역류하는듯 한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였다.

하지만 애써 속을 누르고 공손히 인사를 차리고나서 역시 공손한 어조로 이미 여러번 되풀이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절절히 펼쳐나갔다.

《…스님께서도 잘 아시는바이지만 지금 왜구들은…》

오천의 말이 끝나자 군살이 두겹으로 처져내린 푸들진 턱을 느리게 들어올린 주지는 귀에 길이 나도록 들은 당치도 않은 장광설을 뜨직뜨직 곱씹어내리였다.

《소승이 이미 루차에 걸쳐 이야기했소만 아도법사가 열반에 드신 이후(죽었다는 뜻의 불교술어) 천년 가까이 줄곧 석가를 모시고 돈독히 불법을 지켜오는 우리 사찰을 이제 와서 벌둥지쑤시듯 하겠다니 천지간에 이런 괴변이 어디에 또 있으리오.

소승이 불가에 적을 둔지 수십년세월이 흐른터여서 속세의 일을 자상히 알수는 없으나 사찰침해는 교리와 천도에 어긋나는 범행이요, 국법에도 저촉되는 중죄라는것만은 분명히 알고있소.

상고해보면 우리 고려국은 태조대왕이래 지금까지 팔관회나 연등회를 해마다 빠짐없이 실행해오는데 그것은 모두 불법을 귀중히 여기는데서 나온것이요.

또한 임금의 맏아들은 대대로 태자가 되지만 둘째아들은 반드시 불가에 적을 두게 하는 관례를 엄격히 지켜오는것도 불법을 존중시하는데서 나온것이요.

또한 상감께서 매달 중전마마를 대동하시고 절에 올라…》

주지는 이번에도 역시 왕가의 행사와 그 무슨 국법의 위엄을 빌어 오천의 소청과 기세를 찍어누를 잡도리였다.

오천은 이 뻔뻔스러운 주지가 수많은 토지와 노비, 지어 10여명 처첩까지 거느리고 만판 호강을 하는 파계승이며 패덕한이라는것을 이미 잘 알고있었다.

그런데도 주지는 상판에 돼지가죽을 뒤집어쓰고 나서서 또다시 불법이 어떻소 국법이 어떻소 하며 자기야말로 불법과 국법에 충실한듯이 진수작을 늘어놓고있었다.

오천은 무작정 주지의 우둥퉁한 볼퉁이를 불이 번쩍 나게 후려갈기고싶었다.

하지만 후날의 화를 피하자면 가능한껏 소동을 피우지 말아야 했다.

오천은 끓어오르는 부레를 애써 누르고 다시금 말주머니를 끌러놓았다.

《스님! 아무리 불법이 중하고 국법이 엄하다 해도 나라가 있고야 그 모든것도 있을게 아닙니까.

갈수록 광패스러워지는 왜구를 이제 더이상 내버려둔다면 우리 경상땅은 불시에 페허로 변할것이며 나라는 위험에 빠지게 될것입니다.

그때 가서 불법은 누구에게 론하고 국법은 또 어디 가서 휘두르겠습니까. 지금에 이르러 제일로 급하고 중한 일은 군사일이요 왜구를 때려잡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기 봉은사의 중들이 고구려시기 중들처럼 승병을 무어 싸울것을 바라는것도 아니고 살례탑을 쏘아죽인 김윤후스님처럼 어떤 요란한 적장을 잡아줄것을 원하는것도 아닙니다.

다만 염초를 만들 마루밑의 먼지를 내달라는것인데 따져놓고보면 그것은 절을 파괴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절을 깨끗이 부셔내는 일입니다. 그렇게라도 우리 일을 도와주면 이 절의 스님들도 여러가지로 좋으면 좋았지 나쁠게 무엇이겠습니까?》

주지는 사실 진정으로 그 어떤 법도나 불도를 지키자는것이 아니라 같지않아보이는 상놈들의 일에 함께 말려든다는것이 시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여 공연히 심술을 부리는판이였다.

헌데 오천의 론박할수 없는 리치에 몰리워 더이상 할말이 없게 되자 지금껏 눌러오던 분통이 저절로 터져올랐다.

《그러니 너희들은 기어이 우리 절을 부셔놓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뜻인데…

우리는 살생을 철저히 엄금하지만 신성한 불가에 대한 무도한 침해는 살생을 내면서라도 막아야겠다.

이놈― 지금의 이 일을 가람신께서 지켜보시는줄 알기나 하느냐?―》

주지의 돼지멱따는듯 한 소리가 채 잦기도 전에 승방과 암자쪽에서 칼을 든 알대가리들이 가사자락을 훨훨 날리며 꾸역꾸역 쏟아져나왔다.

주지란 놈은 이미 오천이와 싸움을 벌릴 잡도리로 불한당같은 놈들을 따로 골라 등대시켜놓았던것이 분명했다.

가슴 한귀퉁이가 철렁 무너져내리였다.

싸움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소동을 피할수 없게 된것이 난감해서였다.

하지만 중놈들이 먼저 칼을 뽑아들고나서는데 뒤탈이 싫다고 하여 부처님처럼 곱게 앉아서 당할수는 없었다.

이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제일로 심악스럽게 나오는 이 절의 주지와 중놈들에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주고 또 여러 절의 주지들에게도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했다.

오천은 결코 양순하게만 자라난 사람이 아니였다.

왜구들에게 량부모를 다 잃은 뒤 여기저기로 떠돌이생활을 할 때 오천은 어느 명성높은 소악패에 들어가 두목으로 활약한적도 있었다.

4월 초파일 등불놀이때면 집집의 대문앞에 내다 건 수박등을 깨치고 도망하는 놀음도 수다히 해보았고 잔치집, 상가집에 둔을 치고있다가 개비위를 부리며 밀려드는 각설이떼를 쫓아내는 장난도 적지 않게 해보았다.

화통도감에 들어간 뒤, 더우기는 여기 군영에 내려온 후 오천은 이를 악물고 무술을 련마하였고 기를 쓰고 왜구들과의 싸움판에 뛰여들었었다.

하기에 오천은 지금 칼을 빼들고 우쭐거리며 다가오는 중놈들이 두렵기는커녕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비양기가 실린 미소를 머금고 다가드는 중놈들을 노려보던 오천은 슬며시 옆구리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천천히 중놈들을 마주쳐나갔다. 불현듯 절문밖에 떨구어둔 취금이 생각이 들자 오천은 칼을 쳐든채로 피끗 절문쪽을 돌아보았다.

절문밖에서 두손을 모두어잡고 떨고있으리라 생각했던 취금은 치마자락을 날리며 이쪽으로 달려오고있었다.

그의 손에는 보기에도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활이 들려있었다.

오천의 심장은 바람이라도 머금은듯 삽시에 확 부풀어올랐다.

이 세상에 자기와 생사를 같이할 의지를 지닌 처녀가 있다는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였다.

이것은 결코 어느 사내나 다 맛볼수 있는 범상한 행복이 아니였다.

(고맙다, 취금아. 뉘라서 행복이라는것이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자취없이 숨어있는 진귀한것이라 하더냐.

내게는 네가 곧 행복이고 기쁨이다.

이 오천이가 있는 한 그 어떤 놈도 너의 머리칼 한오리 다치지 못한다.)

오천은 중놈들을 향해 달음쳐나갔다.

날카롭게 반짝이는 오천의 칼과 둔탁한 빛을 뿌리는 중놈들의 환도 여러개가 허공에서 막 엇갈리려 할 때였다.

무거운 정적이 드리워있던 아래쪽솔숲에서 불시에 우렁찬 영각소리가 울리였다.

이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구성진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에라― 에헤라

울타리옆 꽃가지에

까치 우짖네

그리운 우리 님

이내 돌아오시리

 

유난스레 쨍쨍하게 울려오는 노래소리의 임자는 분명 염초장의 으뜸가는 수다쟁이인 옥보였다.

말재주를 부리는 솜씨를 보아서는 대단히 성급할듯 하나 실은 한정없이 성미가 느려빠진 그는 이제야 사람들을 이끌고오는것이였다.

그것도 제 나이에는 맞지도 않는 사랑가를 느릿느릿 흘려뽑으며…

오천은 싱그레 웃으며 칼을 내리웠다.

업혀가는 돼지눈처럼 뿌연 눈을 디룩거리던 중놈들도 하나, 둘 추켜들었던 칼을 맥없이 떨구었다.

입만 벌리면 이 땅의 천만중생을 다 사랑해야 한다고 떠벌이던 불교승들이 숱한 사람들앞에서 칼부림을 한다는것이 저들 생각에도 부끄러웠던지 아니면 이쪽으로 밀려오는 사람들도 오천의 짝패들로 짐작되여 지레 겁을 먹었는지…

중놈들은 둥지를 털리운 개미새끼들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흑돼지같은 주지도 애어린 상좌중의 부축을 받으며 허둥지둥 웃방향의 암자쪽으로 내뛰였다.

《핫하하! 타고난 복은 귀신도 못 물어간다더니 이 오천의 복은 정말 누구도 어쩌는 수가 없는 모양이로다!》

오천은 중놈들이 내빼는 꼴을 두루 훑어보다말고 큰소리로 웃어제끼였다.

칼을 들었다가 한번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내리운것이 조금 싱겁기는 했으나 옥보네들의 출현으로 하여 중놈들의 기세를 소리없이 찍어누르고 소동을 피하게 된것은 여간만 기쁘지 않았다.

이제는 먼지를 말끔히 퍼낸 다음 원상대로 마루널을 정히 놓아주고 깨끗이 청소까지 해놓고 가면 후일에 무슨 탈이 생길것 같지 않았다.

오천은 취금에게 모든 일이 썩 잘되여간다는 뜻으로 지끈 눈을 감았다떠보이고나서 절문안으로 우줄우줄 들어서는 옥보네들을 향해 씨엉씨엉 걸어나갔다.

그리 멀지 않게 보이는 솔숲우에는 현란한 칠색무지개가 천궁으로 들어가는 신비의 대문인양 드높이 걸려있었다.

무지개를 떠받들고 서있는 소나무들의 우듬지에서는 무수한 물방울들이 은구슬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있었다.

11

11

 

《왜구들이 나타났소이다.》

바다기슭에서 두어마장가량 들어와있는 솔숲에 뒤짐을 돌려잡고서서 바다쪽을 주시하던 윤통은 날카로운 시선을 박위에게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윤통이곁에 심상한 표정을 짓고 서서 바다쪽을 노려보던 박위는 알릴듯말듯하게 고개를 주억거리였다.

이른새벽이라 사위는 더없이 고요한데 배에서 내린 왜구들은 도적고양이떼처럼 소리없이 기슭으로 게바라오르고있었다.

모래불에 올라선 놈들도, 배우에 그냥 남아있는 놈들도 하나같이 눈이 화등잔같아가지고 사위를 두릿두릿 살펴보는 꼴이 여간만 불안하지 않는 모양이였다.

하긴 적국의 장수라고 해야 할 박위에게 어느날 어느시 어느 장소에 당도하겠노라고 희떱게 선통까지 하고온 놈들이였다.

박위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아는 놈들은 그가 어떤 희한한 례물을 안겨주기보다는 무서운 불화살을 퍼붓기가 십상일것이라는 짐작을 못할리 없었다.

하지만 포악한 사다께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마구다지로 떠밀어보내니 범의 굴인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수없이 혹시를 바라고 예까지 왔을것이였다.

그래서 왜구들은 지금 여차하면 줄행랑을 놓을 잡도리로 연해 사위를 살피며 발을 저겨디디는것이요, 타고온 다락배들의 돛폭도 내리지 않는것이리라.…

《나가보자구.》

박위는 저력있는 음성으로 누구에게라없이 이르고나서 성큼 걸음을 떼놓았다.

윤통이 박위의 앞을 막아섰다.

《꼭 박장군이 나가야 할 까닭이 뭡니까? 저것들은 하관이 나가서 처리하겠습니다.》

《아니, 나를 찾아온 놈들인데 내가 나가서 대접을 하겠소.》

박위는 가볍게 윤통을 비켜세우고나서 당당하게 걸음을 놓았다.

윤통이와 여삼을 위시한 스무명남짓한 군사들도 더 어쩔수없이 박위의 뒤를 따라나섰다.

저들쪽으로 위풍당당히 걸어오는 고려군사들을 띄여본 왜구들은 극심한 공포감에 질리여 말뚝처럼 우뚝우뚝 굳어지였다.

박위는 놈들의 거동을 예리하게 살피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혹을 두고 다시금 생각을 거듭했다.

(사다께라는 놈은 무엇때문에 날자와 장소까지 찍어가지고 수하의 병졸들을 보냈을가?

정말로 놈들의 속심이 변하여 화평과 교역을 하자는건가!…

아니, 그것만은 절대로 있을수 없는 일이다.

설혹 왜구의 흉심이 이제 와서 조금 달라졌다 해도 우리는 반드시 피에 젖은 과거를 피로써 결산해야 한다.

민족이 흘린 피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물로 계산될수 없다.

헌데 사다께는 내가 저들이 던진 음모의 올가미에 선선히 목을 들이밀리라고 타산했을가.

그럴리 없다.

승냥이처럼 흉악하고 여우처럼 교활한 그놈은 우리가 저들의 속임수에 들지 않으리라는것을 십분 짐작했을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때문에 사다께는 졸개들을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이곳으로 보냈는가?…)

윤통이 힝힝 걸어나가며 다시 박위에게 말을 건네였다.

《박장군, 천행으로 맞다들린 기회인데 다시한번 생각해보는게 어떻습니까?

무슨 물건흥정을 하는체 하다가 저놈들을 산채로 모짝 잡아가지고 대마도에 끌려간 우리 백성들과 바꾸어먹는게 아무래도 득책일것 같습니다.》

윤통은 어제 저녁에도 이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때 박위는 싸움에 나갈 군사들을 뽑고 그들에 대한 교련정형을 료해하느라고 (박위는 신입군사들을 위주로 선발했는데 그것은 실전을 통하여 군사들을 더욱 알차게 키우려는 의도에서였다.) 미처 윤통의 말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윤통의 견해는 물론 왜구에 대한 그 어떤 환상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제나름의 전술적타산에서 시작된것이였다.

하지만 칼을 든 무관이 노상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장차 어떤 오유에 빠질지 알수 없었다.

박위는 여전히 왜구들쪽에 시선을 박은채 낮으나 단호한 어조로 언명했다.

《부원수, 우리는 장사군이 물건을 흥정하듯 해가지고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찾아오려 해서는 안되오.

또 그렇게 되지도 않을거요.

우리는 반드시 전투의 승리로 우리가 원하는 모든것을 당당하게 획득해야 하오. 병기를 잡은 장수가 적국의 흥정에 다소라도 마음이 끌리면 놈들의 음모에 말려들게 되고 음모의 나락에 빠지면 수치와 패배를 면할수 없소.

우리의 검은 오로지 승리를 위한 접전외에 다른것은 절대로 몰라야 하오.》

박위와 고려군사들이 병든 닭새끼들모양으로 오구구 몰켜선 왜구의 무리앞에 이르니 놈들은 그사이 어느 정도 마음을 도슬러먹었는지 제법 어깨를 으쓱거리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막돼먹은 상통들을 휘뚜루 살펴보고나서 말문을 열었다.

《내가 경상군영의 원수인 박위다. 너희들중 누가 대장이냐?》

맨 앞장에 무슨 꾸레미같은것을 안아들고 서있던 옴두꺼비같이 생긴 작자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내짚으며 꽤 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제가 대장이올시다.》

《오, 네가 대장이라니 한가지만 묻자.

너희들은 항복하러 왔느냐, 아니면 전쟁을 하러 왔느냐?》

전혀 뜻밖의 물음에 옴두꺼비는 한참이나 눈알을 디룩거리며 박위의 근엄한 낯을 살피더니 자신없는 소리로 떠드박거리였다.

《난 군사들을 이끌고가서 박장군에게 이 뢰물을 올리고 또… 박장군이 주는 고려뢰물을 받아가지고 오라고 해서 왔는데… 그 무슨 말씀인지?…》

박위는 버럭 청을 높이였다.

《이놈아! 내가 누구의 뢰물을 받고 또 누구에게 뢰물을 섬긴단 말이냐?! 천하에 너절하고 좀스러운것들…

나는 오직 두가지만을 원할뿐이다.

네놈들은 항복을 하겠느냐 아니면 전쟁을 하겠느냐?》

그제서야 사다께에게 속았다는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은 옴두꺼비는 사납게 흡든 눈으로 박위를 노려보더니 들고있던 꾸레미를 내동댕이치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왜구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와자자 산개대형으로 널리였다.

역시 하나같이 지독한 왜종자들이라 죽으면 죽었지 항복은 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박위는 서늘한 미소를 띄우며 칼을 뽑았다. 윤통과 군사들도 칼과 활을 들어올리였다. 박위는 아무런 겁기도 없이 칼을 쳐들고 서있는 옴두꺼비앞으로 척척 걸어나갔다.

옴두꺼비가 무슨 수인지 쓰려고 한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비호처럼 몸을 날린 박위는 자기의 발이 미처 땅에 닿기도 전에 왜구의 비게진 목대에 칼끝을 틀어박았다.

악― 옴두꺼비는 학춤이라도 추듯 두팔을 너풀거리며 뒤로 나자빠지였다.

《이것이 나의 뢰물이다!》

박위의 우렁찬 웨침소리가 잦기도 전에 고려군사들은 왜구들의 무리속으로 노도와 같이 뛰여들었다.

혼전이 벌어지였다.

사방에서 칼날이 번뜩이고 화살날아가는 소리가 핑핑 울리였다.

선두에 서서 제법 대거리를 하던 왜구 몇놈이 거의 동시에 밸이 빠져나가는듯 한 괴성을 지르며 픽픽 쓰러졌다.

그러자 싸울 궁냥보다는 도망칠 생각에 골독했던 왜구들은 와― 소래기를 지르며 저들이 타고온 다락배쪽으로 정신없이 내뛰기 시작했다.

박위는 피빛으로 번들거리는 칼을 추켜들고 제먼저 뛰여나가며 소리높이 웨치였다.

《나가자!―》

박위의 뒤를 따라 수십명의 군사들이 사태처럼 바다쪽으로 쏟아져내리였다. 허겁지겁 물속에 뛰여드는 놈, 출렁출렁 물탕을 튕기며 배전에 다가붙는 놈들의 잔등과 목덜미에 칼날이 박히고 장창이 꽂히였다.

예서제서 얼음쪼각같이 하얀 물탕이 튕겨오르고 꽃이파리같이 새빨간 피방울이 퍼져나갔다.

《이놈! 어딜 내빼자구?》

《게 서지 못할가!》

《한칼 먹어라!》

고려군사들의 힘찬 웨침소리가 사처에서 울리였다.

《요로시―》, 《고노야로―》

쓰러지면서도 악에 치받치여 혹은 마지막기력을 다 짜내여 짖어대는 왜구들의 비명소리도 들리였다.

무릎을 치는 물속에 들어서서 또 한놈 왜구의 잔등에 우지직 갈비뼈 바사지는 소리가 나도록 깊숙이 칼을 들이박은 박위는 문득 자기 곁에서 춤추듯 날뛰며 돌아가는 고들을 띄여보자 무춤 굳어지였다. 창황중에도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여치다리처럼 껑충한 왜구의 어깨에 엇비듬히 칼날을 들이박은 고들은 예전의 그라고는 상상도 못할만큼 날래게 홱 몸을 돌리였다.

돌아서는 참 옆으로 달려드는 왜구를 힘찬 발길질로 차눕히더니 물속에 엎어지여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놀리는 놈의 잔등에 기운껏 칼을 들이박았다.

파란 수면우에 시뻘건 피물이 떠올랐다. 고들은 어지게 생긴 퉁투무레한 얼굴에 거의 잔인해보이는 미소를 띄우며 제 혼자 웅얼거리였다.

《악귀같은 놈이 어째 죽촌 〈두부자루〉보다 쎄지 못하구나.》

고들의 민첩한 몸놀림과 칼재주는 정녕 볼만 하였다. 그의 담차고 당당한 말마디도 새겨들을만 하였다.

박위는 고들이가 노는 태를 좀 더 여겨보고싶었으나 그럴 경황이 없었다.

박위는 곧 군사들을 이끌고 다락배쪽에 몰키여 오뉴월 송사리떼처럼 오글복작거리는 왜구들속으로 뛰여들었다.

싸움은 그리 오래 갈것도 없었다.

기슭에 올라섰던 놈들은 깔축없이 피범벅이가 되여 나동그라지고 배우에 남아있던 놈들은 황망히 배머리를 돌리여 내빼는데 돛폭마다 삼단같은 불길이 활활 일어번지는 품이 그놈들의 운명도 뒤끝은 뻔드름 하였다.

도망치는 세척의 배중에서 제일 뒤에 선 배 하나만이 용케도 성해있었다.

《새앙쥐같은 놈이 어딜 내빼려구?!…》

여삼이가 활시위에 화전을 걸며 사람들앞으로 썩 나섰다.

성한 배의 돛폭을 겨냥한 여삼이 당겨잡은 시위에서 막 깍지손을 떼려는데 그곁에 서있던 박위가 나직이 말하였다.

《화전을 쏘지 말아라. 그래도 한놈쯤은 살려보내야지.…》

여삼은 물론 모여선 군사들모두가 의혹에 찬 눈길로 박위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박위는 자기가 들고있던 화살 한대를 여삼에게 내주었다.

《여삼아, 이걸 저 성한 배의 돛대에 쏘아박아라.》

화살깃에 손바닥만 한 천쪼박이 매달려있는 이상야릇한 화살이였다.

박위가 준 화살을 얼추 살펴보고난 여삼은 군말없이 시위에 살을 메웠다.

별로 겨냥도 하지 않고 획― 살을 그었다. 별스레 실해보이는 화살은 뒤꼬리에 달린 천쪼박을 댕기처럼 날리며 빠르게 날아갔다.

윤통은 찢어진 팔소매자락을 여미다말고 물었다.

《장군, 저건 무슨 화살입니까?》

박위는 꺼먼 연기타래를 트레트레 말아올리며 끼우뚱끼우뚱 위태롭게 내빼는 왜구들의 배를 노려보며 심상하게 대답했다.

《편지요. 대마도령주가 내게 편지를 보냈으니 나도 그자에게 회신을 하는게 례절이 아니겠소.

나는 그자에게 이렇게 썼소.

〈너와 나는 필생의 적이다. 적과는 오직 판가리싸움만이 있을뿐이다.

내 기어이 대마도에 찾아갈터이니 이번에는 네놈들의 땅에서 말로써가 아니라 검으로 결산을 하자!〉…》

말을 마친 박위는 절벅절벅 물을 걷어차며 모래불로 나갔다.

모두들 무릎을 치는 물속에 말뚝처럼 굳어진채 찬탄과 공경이 어린 시선으로 박위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윤통은 두툼한 입술을 사려문채 우두두 몸을 떨었다. 왜구의 칼에 찢어진 그의 팔소매가 누데기처럼 오리오리 날리였다.

박위의 오늘의 결단과 배짱이 얼마나 괴로운 마음속에서 솟아났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윤통은 존경과 감격이 우러나기 전에 자기반성이라는 가볍지 않은 고통에 휘감긴것이였다.

일시 소요스러웠던 바다가는 다시 고요해졌다.

어디론가 사라졌던 갈매기들은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떼를 지어 밀려왔다.

소복단장을 한 산뜻한 갈매기들은 전승을 축복하는 고취악대마냥 명쾌한 울음소리를 목청껏 휘뿌리며 박위네들의 머리우를 유유히 감돌았다.…

군사들은 가을의 다양한 해빛을 받아 찌르는듯 한 반사광을 내쏘는 고요한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군영으로 가고있었다.

그들은 저저마다 오늘의 첫 싸움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본 일, 제몸으로 직접 겪은 일들을 조금씩 과장을 섞어가며 주고받았다. 그러다가는 유쾌히 웃고 떠들기도 했다.

신출내기군사들은 은근히 공포감을 자아내던 왜구들을 제손으로 쏘아눕히고 찔러죽인것이 그리도 통쾌하고 자랑스러운것이였다.

대오는 연해 웃음발을 날리며 흘러가고있었으나 군사들의 앞장에서 말을 타고가는 박위는 아무런 감각도 없는 사람처럼 흐릿한 표정으로 멀리 앞쪽만 바라보고있었다.

대오의 맨뒤에서 박위와 거의 비슷한 표정을 하고 뚜걱뚜걱 말을 걸키던 윤통은 불현듯 그 어떤 내부적인 충동에 떠밀리워 번쩍 눈을 치뜨더니 세차게 말고삐를 나꾸어챘다.

윤통의 검정말은 빠른 달음으로 대오를 거슬러 박위곁에 다가섰다.

그런데도 박위는 여전히 앞쪽만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였다.

무슨 말인가 꺼내려던 윤통은 두툼한 입술귀를 꾹 짓물었다.

전에없이 수척해보이는 박위의 모습이 아릿하게 가슴을 허빈것이였다.

예전에는 연한 분홍색이 돌 지경으로 희맑던 박위의 얼굴색은 검스레하게 죽어있었다.

친근감을 자아내고 귀인성스러운 맛을 불러내던 볼편은 훌쭉하게 꺼져있었다.

담벽처럼 든든해보이던 어깨마저 별스럽게 삐죽이 솟아오른듯싶었다.

윤통은 무엇에 할퀴우기라도 한듯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괴로운 번민에 시달리면서도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왜구의 거짓 화평사절을 짓뭉개버린 이 사람!

오만무례한 대마도령주에게 바로 대마도에서 결판을 내자고 당당히 선언한 이 사람…

정녕 얼마나 높은 기개를 지닌 사내인가!…)

감탄과 찬사가 새삼스레 치밀어오르며 뜨겁게 속을 지지였다. 그에 정비례하여 그 어떤 죄의식과 수치감이 얼음덩이처럼 차겁게 가슴속 밑굽을 고패돌았다.

(…사실 나는 최칠석의 편지를 받은 뒤로 박위의 원정준비는 《무너져내리는 룡마수를 쳐다보면서도 절구질을 하는 무지스러운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솔하게도 최칠석의 견해에 즉흥적으로 공감하고 추종했다.

꼭 본의라고 할수는 없으나 여하튼 《최후통첩》이라는것을 착안해가지고 박위를 더욱 괴롭히였고 그것으로 하여 나자신은 스스로 유치하고 치졸한 인간으로 굴러내리였다.

내가 과연 이럴수 있는가?

길게 생각할것없이 오늘중으로 최칠석에게 편지를 쓰자.

나의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달리는 될수 없는 나의 진심을 알리자.

이제와서 박위에게 원정준비의 중단이나 포기를 요구한다는것은 인간으로서도 무관으로서도 비렬하고 저속한 행위다.

아니, 정의에 대한 가장 혹독한 모독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풍파가 밀려온대도 사생동고의 억센 의지로 박위를 따를것이다.)

윤통은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얼굴을 건뜻 들어올리였다.

눈앞에서는 온몸이 새빨간 고추잠자리들이 솟구치고 내리박히며 재주껏 깝치고있었다.

마음은 하냥 박위에게 쏠리였다.

박위가 어떤 마음으로 자기를 다시 받아주겠는지 알수 없었으나 여하튼 그에게 진정으로 되는 사죄를 해야 했다.

아프고 허우룩할 박위의 심경을 다소라도 위로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해야 자기의 마음도 편하고 심혼도 깨끗해질것 같았다.

그래야 의리와 도리를 알고 정의와 진실을 아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정신적면모를 다시 찾을것 같았다.

윤통은 용기있게 말부리를 헐었다.

헌데 정작 말을 떼고보니 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장군, 조반을 치르고 옷도 말리울겸 저기 고샅길어구의 소나무밑에서 잠시 쉬여가는게 어떻습니까?》

그제서야 고뇌의 심연에서 현실로 올라선 박위는 군사들모두가 꼭두새벽부터 싸움차비, 길차비를 하느라고 아침밥도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할수 있었다.

강렬한 식욕이 동해오르자 머리속에서 끓던 복잡한 심리작용이 일시에 날아나버리였다.

《그게 좋겠군.》

박위는 헌헌히 응낙하였다.

잠시후 산기슭의 평평한 잔디밭우에 패패로 모여앉은 군사들은 저마끔 멍구럭속에서 비릿비릿한 젓갈내가 풍기는 밥보자기들을 꺼내놓았다.

박위와 윤통은 군사들과 조금 떨어진 소나무밑에 꿰진 돗자리를 깔고 마주앉았다.

가을의 따스한 해빛은 호듯호듯 퍼져내리는데 바다쪽에서는 갈매기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풀숲에서는 유정한 풀벌레울음소리가 귀간지럽게 들려왔다.

윤통은 여삼에게 의미있는 턱짓을 해보이였다.

눈치빠른 여삼은 허리를 한번 갑삭해보이고나서 돗자리우에 술방구리와 말린 전복, 기름에 튀긴 게살과 유밀과가 담긴 모랭이들을 줄달아 꺼내놓았다.

《허, 이건 꼭 산놀이에 나온 사람들이 마음먹고 준비한 음식같구려.…》

박위는 음식그릇들을 두루 살펴보며 연한 웃음을 띄웠다.

윤통은 맑은 술이 찰찰 넘치는 커다란 술대접을 박위에게 들어올리였다.

제딴에는 일껏 사죄와 위로의 뜻을 표현하느라고 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그의 말은 그다지 신통하게 들리지 않았다.

《장군, 후련하게 쭉 내시고 속을 푸십시오.》

박위는 그저 히뭇이 웃으며 술대접을 받아들었다. 몇모금 소리없이 술을 마시던 박위는 스르시 그릇전에서 입술을 떼였다.

문득 싸움판에서 보았던 고들의 날렵한 모습이 뇌리에 떠오른것이였다.

박위는 고들이가 그지간에 바친 남모르는 수고와 오늘 첫 싸움에서 거둔 뛰여난 전공을 축복해주고싶었다.

하나 지금 당장 손에 든것은 술밖에 없었다.

박위는 아직도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여삼을 가까이 오게 한 후 넌지시 물었다.

《술은 이 한방구리밖에 더 없느냐?》

《그렇소이다. 이 술도 사실은 부원수나리께서 특별히…》

박위의 속생각을 제꺽 알아차린 여삼은 윤통이까지 찍어대며 만류의 뜻을 펴놓았다. 그랬으나 박위는 여삼의 말자루를 초입에서 문질러버리였다.

《알겠다, 그럼 여기서는 이 대접의 술을 돌려가며 마실테니 방구리의 술은 저기 풀밭에 앉아있는 고들이에게 가져다주어라.

저눔이 오늘 첫 싸움에서 왜구 세놈을 찍어넘겼는데 그게 어디 간단한 공이냐?…》

반말들이는 실히 될것 같은 커다란 술방구리는 량반좌석에서 고들에게 통으로 넘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산놀이에라도 나온듯이 흥성거리던 군사들은 와 환성을 터치였다.

언제인가 배무이장에서 박위에게 구변껏 말재주를 부리다가 된우박을 맞았던 《만사태평》이라는 뒤말을 달고다니는 군사가 말코를 벌름거리며 고들에게 다가갔다.

량반들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능글거리였다.

《이보시― 고들이, 나도 다음번 싸움때는 자네만큼 왜구를 때려잡아서 상을 탈테니 외상삼아 한대접 먼저 돌려주게나.》

만사태평은 실지 술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전공을 세우고 치하를 받은 고들이가 부러워 악의없는 노죽을 부려본것이였다.

군사들은 저마끔 입을 싸쥐고 킥킥 웃어댔다. 그 바람에 잔뜩 심기가 뒤틀려난 윤통은 험하게 눈살을 찡그리였다.

술로나마 박위에게 자기의 진정을 고하려 했던 은밀한 속궁냥이 여지없이 빗나간것이 서운하다못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어 훈련에 성실하고 싸움에서 공을 세운 군사들을 제일로 사랑하고 쳐올리는 박위의 무관다운 성품이 새삼스레 마쳐와 가슴이 얼벌벌해났다.

박위는 진작 윤통의 유난스러운 언행에서 그의 속마음을 거지반 느낄수 있었다.

역시 본태를 저버리지 않은 윤통이가 고맙고 미더웠다.

이처럼 결바른 인간을 지나치게 몰아댄듯 하여 미안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와서 서로가 면구해질 어색한 말마디로 그 어떤 화해를 하고싶지 않았다.

말은 간사하고 행동은 진실한것이다.

앞으로 피차가 마음속의 그 모든 말을 행동으로 표명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박위는 윤통에게 술대접을 내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부원수, 행동속에 사내대장부의 말이 있나니 우리 각자가 서뿌르게 말로써 행동을 약속하지 맙시다.

자, 부원수도 속이 활 풀리게 쭉 내우.》

윤통에게 술대접을 넘겨준 박위는 저가락끝으로 유밀과 한개를 꿰여들었다.

술을 마시면 다소라도 개운해질줄 알았던 마음은 더욱 어수선해났다.

한구석으로 밀려났던 울울한 번뇌는 다시금 뇌리를 헤집어파며 움쭉움쭉 고개를 들었다.

(오늘의 승리는 일시 통쾌한것이나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것이다.

왜구들은 분명 그 무슨 《화평교섭》에서 패배를 당한 앙갚음으로 무고한 죽촌백성들과 리옥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할것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나에게 온갖 성심을 다 기울이던끝에 처녀의 가장 귀중한 마음속 보배인 사랑까지 선물한 고맙고 귀중한 리옥.

헌데 나는 본의는 아닐지라도 그에게 처참한 죽음을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아! 리옥! 그대의 때아닌 절명은 정녕코 박위가 무정하거나 모질어서가 아니요.

그것은 전수히 롱락과 음모를 꺼리지 않는 저 개창자에 사람가죽을 뒤집어쓴 왜구들의탓이요.

리옥이, 그대도 이러한 리치를 아주 모르지는 않으리다.

하지만 지금의 아픈 내 마음, 터져나가는 내 심장을 무엇으로 기워매고 무엇으로 씻어낼수 있으리오.

맹세컨대 내 기어이 대마도를 산산이 박살내는것으로써 우리 백성들과 리옥의 피맺힌 원한을 천백배로 갚아주리다.

이제는 이 나라 산야에 혼령으로만 떠돌고있을 잊지 못할 리별장!

당신도 나의 이런 마음을 부디 옳게 헤아려주고 또 믿어주시우.…)

박위는 어제 밤 자기의 문갑에 깊숙이 건사해두었던 리옥의 옛 편지를 꺼내여 대마도에서 온 편지와 까근히 대조해보았다.

얼추 보매 두장 편지의 필적은 신통히 비슷했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니 대마도에서 온 편지의 글씨는 세련된 맛은 있어도 단정하고 섬세한 느낌은 없었다.

속이 깊고 열정적인 리옥이의 체취 같은것은 더구나 풍기지 않았다.

틀림없이 대마도에서 온 편지는 리옥의 필적을 본딴 위조편지였다.

박위는 왜구들의 능활한 롱간질에 넘어가 순간이나마 리옥을 오해했던 자신이 괴롭고 부끄러웠다.…

갈피없이 번져지던 박위의 사색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사다께는 무엇때문에 패배가 정해진 지점으로 졸개들을 보냈을고?

그것이 또 하나의 음흉한 음모의 발단이라면 사다께가 궁극적으로 노리는것은 무엇일고?…)

술대접을 쳐든채 한식경이나 우중충한 그늘이 드리운 박위의 얼굴을 쳐다보던 윤통은 갑자기 성이라도 난 사람처럼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였다.

지금같은 때 박위에게 아니, 민족앞에 진정으로 사죄를 하자면 말이나 술로써가 아니라 량심과 의리가 비낀 행동으로 하는것이 가장 떳떳할것이다.

얼마후 제먼저 자리에서 일어선 윤통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듯시각빨리 군영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소리 지르며 정신을 차릴수 없이 뒤설레를 떨었다.

12

12

 

군영에 돌아온 박위는 팔소싸움에 나갔던 군사들에게 하루동안의 휴식을 주고나서 곧장 배무이장으로 나갔다.

푸르다못해 진록색으로 보이는 바다물우에는 그사이 새로 무은 열척가량의 천료주와 발로도, 경질주와 급수소선(각종 배이름)들이 송진내와 생나무내를 향긋하게 풍기며 물결의 노님을 따라 느리게 흥떡이고있었다.

전함들의 선수에는 대장군포와 2장군포, 3장군포와 륙화석포, 화통신포와 질려포 등 각이한 모양새의 화포들이 무게있게 틀고앉아 둔탁한 빛을 발산하고있었다.

그리 많지는 않으나 군영자체의 힘으로 새로 무은 전함들과 화포들을 바라보느라니 가슴속에서 소용돌던 온갖 구지레한 시름들이 순간에 말짱 날아나버린듯싶었다.

전에없던 신심과 용기가 취기처럼 훈훈하게 퍼져오르기도 하였다.

습관적으로 전함들의 겉모양을 깐깐히 살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던 박위는 방금 무어놓은듯 한 천료주앞에 이르자 무춤 굳어지였다.

어딘가 모르게 배모양이 부자연스럽게 안겨왔다. 한식경이나 전함의 모양을 상하좌우로 살펴보던 박위는 사다리를 타고 배의 갑판에 올라섰다.

때마침 천료주에 올려앉힐 화포를 목도해메고 《어기영 치기영》 먹임소리를 쳐가며 이쪽으로 오던 장공인들과 그뒤에 따라섰던 장교들은 배우에 올라선 박위를 발견하자 황망히 포를 내려놓았다.

장교들은 급급히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올라와 박위에게 다가섰다.

그사이 자귀밥과 톱밥이 하얗게 깔려있는 갑판의 구석구석을 낱낱이 살펴보고난 박위는 장교들쪽으로 돌아섰다.

장교들은 전장에 나갔다온 박위에게 인사를 차릴 차비였으나 박위는 본체도 않고 허공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꾸지람부터 펼쳐놓았다.

《이 배는 도본보다 한자이상은 키가 높아진게 분명하다. 여기 선수에는 대장군포를 앉혀야 할텐데 배의 키가 이렇게 높아졌으니 어찌 한단 말이냐?

화포를 쏠 때 진동에 의해 배가 흔들리는것은 물론이려니와 자칫하다가는 갑판이 깨져나갈수도 있겠는데 그리되면 적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고기밥이 될게 아니냐?

이게 과연 제정신들을 가지고 한짓들이냐?》

첫마디부터 된욕설을 퍼붓던 박위는 곁에 서있는 텁수룩한 장교의 손에서 자막대기를 후리쳐뽑아냈다.

씨엉씨엉 배전으로 나가더니 누가 어쩔 사이도 없이 바다물속으로 풍덩 뛰여내리였다.

허리춤을 치는 바다물은 몹시 차거웠으나 박위는 그에 아랑곳없이 자막대기로 배의 바깥높이를 한치두치 재올라갔다.

어쩔수없이 박위의 뒤를 따라 풍덩풍덩 물속에 뛰여든 장교들은 박위의 젖은 손을 움켜쥘듯이 수선을 떨며 송구스러운 어조로 한마디씩 뇌이였다.

《물이 차거운데 이제는 그만 뭍에 오르시오이다.》

《소인들이 어리석다보니 일을 다그치기만 하면서 옳게 간검을 못했소이다.》

《일후에는 다시 이런 과실을 내지 않겠소이다.》

아무런 응대도 없이 배의 높이와 너비까지 꼼꼼히 다 재보고난 박위는 휘적휘적 물을 가르고 모래불우에 올라섰다.

전복자락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였다. 추들추들해진 가죽신속에서도 꿀찌럭꿀찌럭 모래알이 섞인 누런 물이 꾸역꾸역 솟구쳐나왔다.

후줄근하게 젖은 장교들이 줄레줄레 기슭으로 나오자 박위는 자막대기를 칼처럼 휘두르며 아까와는 판다르게 절절한 어조로 말하였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지만 특히 군사일에서는 티끌만 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내 이미 몇번이나 일렀느냐.

우리는 구천에 사무친 민족의 원한과 수치를 씻고 나라의 존엄과 기상을 만세에 떨치려고 원정을 하자는것인데 이런 소소한 실수로 해서 원정을 망친다면 세상에 이런 창피가 어디에 또 있겠느냐? 모두들 심장에 쪼아박으라구.

천년강대국 고구려의 후손들인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지는 전쟁을 할수 없으며 이겨도 크게 이기는 전쟁만을 해야 한다.

페일언하고 오늘 해중에 이 배의 높이를 한자세치 더 내릴뿐아니라 이미 무어놓은 배들도 정확하게 도본대로 되였는가를 세밀히 따져보도록 해라―》

《알겠소이다.》

장교들은 입을 모아 기운차게 웨치였다.

박위는 젖은 옷을 말려입을 생각도 못하고 염초장쪽으로 걸음을 돌리였다.

또다시 염초라는 두글자가 바늘뭉치처럼 따끔따끔하게 흉벽을 찌르며 돌아갔다. 납덩이처럼 무죽하게 가슴을 짓누르기도 했다.

(전함과 화포는 저런 식으로 계속 밀고나가면 그런대로 마련을 볼듯 한데 아직도 염초와 화약이 없어서 포알을 썩썩 만들어내지 못하고있으니 이게 큰일이 아닌가!

최무선장군이 보내준 화약으로 만든 포알이 서른개정도, 이미 있던 염초로 만든 포알이 스무나무개.

그리고 죽촌에서 실어온 염초로 만든 포알이 일여덟개…

이것을 가지고 또 이런 속도로 포알을 뽑아가지고 언제 원정준비를 다 끝내겠는고?…)

박위는 죽촌에 나갔던 그날 밤 그곳 사람들의 열의와 기세, 그들이 만들어낸 염초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나니 염초를 마련하는 일이 예전처럼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아니, 죽촌백성들처럼 매 고을, 매 동네 백성들이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일치하게 떨쳐나선다면 조정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능준히 염초를 해결할것 같았다.

하여 그는 얼마전 각 고을 관가에 백성들의 애국적열의를 발동시켜 염초생산을 대판으로 벌리라는 내용의 군령을 새로 시달하였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능력간에는 언제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 법이라는 엄연한 생활상의 리치가 무시로 뇌리를 들쑤시였다.

백성들이 순수 욕망 하나만 가지고 하는 일이 아무래도 미타하여 자꾸만 고개가 기웃거려지였다.

죽촌과 같은 자그마한 동네에서 벌어진 현상이 전반적인 경상고을에서도 일제히 일어날수 있겠는지는 누구도 장담할수 없는 일이였다.

최근에 이르러 염초생산에 원정승리의 열쇠가 있다는 생각이 굳어질수록 박위의 초조감과 조바심은 거의 생리적인 고통까지 동반하면서 시시로 급증되였다.…

금싸래기같은 모래불에 큼직큼직한 발자국을 찍으며 소리없이 걸어나가던 박위는 누군가가 아동판수 륙갑외우듯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웅얼거리며 다가서는 바람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자기앞에는 생면부지의 뚱뚱한 중이 념주알을 만지작거리며 서있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박위는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은 뚱뚱보중의 버릇없는 행동이 화가나기 전에 중자체가 혐오감을 자아내여 버럭 청을 높이였다.

《대사는 대체 무슨 연고로 바쁜 사람의 앞길을 막는게요?》

중은 여전히 깊숙이 내려쓴 삿갓을 짓수굿한채 항아리에 대고 하는 소리처럼 으스산하게 울리는 목청을 끌어올리였다.

《소승은 봉은사의 주지로소이다. 소승이 장군을 찾아온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곳 군영에서 대정노릇을 한다는 오천인지 륙촌인지 하는 군사의 불법무도한 행위를 항소코저 함이올시다.》

주지의 입에서 뜻밖에도 오천의 이름이 튀여나오자 박위는 이상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우리 군영의 오천이가 대체 무슨 일을 어찌했다는게요?》

주지는 퍼덕퍼덕 나붓기는 장삼자락을 여며잡으며 슬며시 고개를 드는데 보매 그는 박위의 거친 음성이 오천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오는것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예, 그는 벌써 몇달전부터 우리 봉은사를 나들며 갖가지로 수상쩍은 행동을 하던끝에 엊그제는 열도 넘는 무뢰배를 이끌고 칼까지 휘두르며 절에 달려들었소이다.》

《칼까지 휘두르며 절에 달려들다니?… 그눔이 왜서 그런 소란을 피웠단 말이요?》

박위는 더한층 거친 청으로 울부짖듯 했다. 그것이 주지의 용기를 부쩍 돋구어주었다.

《예, 소승이 이제 그 사연을 자상히 말씀올리겠소이다.

오천이네들은 절간 마루밑의 먼지로 무슨 염초인지 염소인지 하는걸 만든다고 하면서 하루아침새 석가와 라한, 무량수불을 모신 절간들을 참혹하게 파헤쳐놓았소이다. 이런 괴변은 실로 후만고에 다시 없을 엄청난 범행으로서 마땅히…》

오천이네들은 그날 마루밑의 먼지를 퍼낸 후 마루널을 다시 잘 덮어놓은것은 물론 주변의 마당까지 깨끗이 쓸어놓았으나 상판에 개가죽을 뒤집어쓴 주지는 그들이 온 절을 까부셔놓기라도 한듯이 허겁을 떨었다.

저급한 복수의식과 도발심리로 가슴이 까맣게 달아오른 주지는 지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오천이네들을 속시원히 때려눕히고싶었다.

허나 주지의 심리를 전혀 알길없는 박위는 처음으로 알게 된 오천의 뒤생활이 소스라칠 지경으로 놀랍기만 하였다.

(그러니 여직껏 오천이가 가을중 쏘다니듯 나다닌것은 구경 염초감대기를 얻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결국 오늘에 와서 그는 염초감대기를 쓰고도 남을만큼 얻어낸셈이 아닌가.

언제인가 했던 그녀석의 장담이 결코 헛장담이 아니였단 말이렷다?…)

놀라움이 가라앉자 오천에 대한 탄복감이 치밀어올랐다. 그것은 다시 아릿한 죄의식으로 환원되였다.

(허어… 그런데도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박위의 표정이 연해 석바뀌는것을 제 좋을대로 해석한 주지는 정기없는 거적눈을 험하게 번뜩거리며 더욱 승기가 나서 고아붙이였다.

《이는 정녕 석가여래를 참람히 무시하는 범행이요, 가람신(절을 지킨다는 신)을 우습게 여기는 망동이며 나라님과 국법을 허술히 보는 죄행으로서…》

원체 중 일반을 황당한 거짓말로 순후한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협잡배로, 건달군으로 경멸하는 박위는 더이상 주지의 말을 귀에 담고싶지 않았다.

오천의 일과 자기의 처사를 놓고 홀로 조용히 생각을 굴려보고싶었다.

박위는 습관적으로 뒤짐을 돌려잡고 스적스적 지향없이 걸음을 옮겨놓으며 생각하였다.

(나 역시 오래된 절간의 먼지로 염초를 뽑는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하지만 어이하여 나는 그것을 파다쓸 용단을 일찌기 내리지 못했는가!

궁냥이 미처 돌아가지 못했는가 아니면 후날에 들이닥칠 죄책이 두려워 애초에 몸을 사리려 했는가?…

여하튼 나의 궁냥이나 담략이라는것은 일개 군졸에게도 미치지 못하지 않았는가.

헌데 오천이란 녀석은 알다가도 모를 놈이로다.

그녀석은 벌써 오래전부터 절먼지를 퍼낼 작정을 하고 나다니면서도 왜서 내게는 일언반구도 그 소리를 하지 않았는가. 저로서는 억울한 매까지 맞으면서…)

주지는 뚱깃거리며 다가오더니 다시 박위의 앞을 막아섰다.

오천을 어떻게 다스리려는지 박위의 결심을 똑똑히 알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속심이였다.

모멸적인 시선으로 주지의 상판을 쏘아보던 박위는 준절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우리 군영 군사들의 일은 내가 알아 처리할테니 그리 알구 대사는 더이상 상관마우.

그리구 대사께 내 한마디 일러줄 말이 있소.

대사도 그 무슨 번뇌로 가득찬 어지러운 인간세상을 아름답고 깨끗한 정토의 세계로 만든다는 교리를 세우고 사는 사람이겠는데 그대가 진정으로 순정한 세상을 원한다면 번뇌를 없애는 일에 앞서 왜구를 없애는 일에 나서야 할게요.》

말을 마친 박위는 주지의 반응 같은것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놓았다.

주지의 뿌잇한 거적눈은 독을 머금고 번들거리였다. 그 눈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있었다.

《오냐, 항간에 나도는 말에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네놈도 군졸놈들과 한배속이로구나.

이놈들, 승속간에 생불스님으로 명망높은 내가 이런 창피를 당하고도 곱게 두손 동여매고 앉아 부처님흉내만 내고있을줄 아느냐.

내 이제 네놈들을 모두 지옥의 기름가마 같은데 처넣구 알알이 튀겨낼테니 어디 당해봐라.》

주지의 가슴속에서 어떤 악심이 끓고있는지 알리 없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박위는 시원한 바람이 마주쳐오는 바다가로 씨엉씨엉 걸어나갔다.

바다는 진분홍빛저녁노을을 들쓰고 고요히 누워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쉬이 헤아려 감득할수 없는 웅건하고도 심원한 사색에 깊이 잠겨있는듯싶었다.

박위는 바다에서 하늘로 시선을 들어올리였다. 석양이 비낀 하늘은 아름다왔다. 그리고 신비로왔다.

붉은색, 분홍색, 감색으로 얼룩진 구름송이들이 처음에는 화포알을 무져놓은것처럼 보이더니 차츰 옆으로 펼쳐지면서 달리는 세마리의 군마모양으로 변하였다.

이어 세마리의 군마는 량손에 검을 든 장수가 전복자락을 날리며 칼을 엇갈아 휘두르는 모양으로 뒤번져지며 하늘높이로 훨훨 날아올랐다.

하늘에 껑충 뛰여올라 검을 든 거인의 곁에 다가서면 지상의 크고 작은 인생사의 리치가 손금보듯 선명하게 가려질것 같았다.

노을에 물든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아이들같은 공상에 잠겼던 박위는 슬며시 고개를 내리드리웠다.

아! 과연 내 인생은 어디에 뿌리를 두어야 하며 그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정녕 잡힐듯 하면서도 쉬이 더위잡을수 없는 진정한 인생사의 리치는 어디에 골박혀있는가?…

박위는 붉은 하늘, 붉은 바다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움직일줄 몰랐다.

13

13

 

놋양푼같은 보름달은 육중한 자기 몸을 이기기 어려운듯 둥깃둥깃 힘겹게 바다물우로 떠올랐다.

만월은 수면우에 떠오르자 그렇게도 무겁게 뚱깃거리던 좀전과는 달리 하늘중천을 향해 쑥쑥 날아올랐다.

그러자 검칙칙하던 밤바다는 금빛, 은빛으로 쪼각쪼각 부서져나가며 인간의 언어로써는 쉬이 형용할수 없는 신비스러운 자연의 선률을 도란도란 읊조리기 시작했다.

문득 도래굽이쪽에서 숱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차츰 이쪽으로 가까와지자 바다는 그만 그렇게도 큰 입을 슬며시 다물어버리였다.

이제는 누구누구의 목소리라는것을 분명하게 집어낼수 있을만큼 사람들의 행렬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게 내 애초에 뭐라던가, 계집의 인물이 반드르하면 애만 들지만 취금이처럼 덕성스러우면 복만 든다고 하지 않던가.

이 일이 주장 오천대정이 선을 잡은 일이기는 하지만 임자네 취금이가 뒤를 받쳐주지 않았다면 될번이나 했겠나.

하여튼 구서방은 사위감도 칠칠하지만 딸년도 여간만 잘 두지 않았단 말일세.… 핫하하!…》

옥보의 챙챙 울리는 말소리, 웃음소리였다.

언젠가는 구서방에게 딸년의 흠절을 덮어두면 큰일난다고 타박을 하던 옥보가 지금은 아닌보살을 하고 취금을 잔뜩 추켜올리는 판이였다.

《이 사람아, 일이 이렇게 잘되여가는게 어떻게 우리 딸년의 덕이겠나. 난 그게 다 오천대정이 남모르게 땀을 내고 피를 흘린 덕이라고 생각하네, 말은 바른대루…》

구서방은 바로 점잖게 오천을 추켜올리는투로 겸사를 표명했으나 그속에는 자기 딸에 대한 찬사도 적지 않게 배여있었다.

박위는 달그림자를 길게 끌며 자기앞을 지나가는 염초장사람들을 홀린듯이 바라보고있었다. 자기도 모르는새 한걸음, 두걸음 그들을 따라서기 시작하였다.

가슴은 자꾸만 울렁거렸다.

무엇인가 거대한 발견에 직면한듯 가슴은 자꾸만 부풀어올랐다.

이제는 오천의 지난 일이 거의나 뚜렷하게 짐작되였다.

어떻게 되여 자기가 그리도 엄청난 오해를 하게 되였는지도 명백히 리해가 갔다.

오천이와 취금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열매를 안아왔는지도 저저이 느낄수 있었다.

박위는 걸음발을 재우치며 앞서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여겨보았다.

사람들의 맨앞에서 쩔뚝거리며 걸어가는 총각이 다름아닌 오천임을 알아보는 순간 박위는 공연히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오천은 너무도 기쁜탓인지 자기들을 따라서는 박위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채 손세를 써가며 열변을 토하였다.

《여러분네들, 오늘 명통사에 갔다오는 길이 멀기는 해도 다리 아픈줄은 조금도 모르겠수다.

이제 이놈의 감대기를 가져다가 백설같은 염초를 콸콸 뽑아내서 왜구의 소굴을 활활 태워버릴 생각을 하니 갈매기처럼 훨훨 날아갈것만 같수다.…》

오천의 말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소리건만 하나같이 기분이 흥뜬 사람들은 또다시 와하 소리높이 웃어제끼였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오천의 말과는 전혀 동닿지 않는 옥보의 해망스러운 목소리가 울리였다.

《그러게 내 뭐라던가. 옛적부터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 했어. 우리도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며칠새에 절간 여러개를 싹 쓸어내지 않았다.

한두사람이 나서서야 어디 될법이나 한 일인가?!》

옥보에게 뒤질세라 구서방이 제꺽 꼬리를 물었다.

《아무렴, 지푸래기도 모아서 엮으면 호랑이를 동인다네.

무지렁이 촌백성들이래도 모두들 단단히 마음을 합쳐가지구 떨쳐나서면야 큰산도 허물고 대병도 막아내다마다.

말은 바른대로…》

달빛을 휘감고 흘러가는 사람들의 행렬, 소수레, 마수레들의 행렬을 얼없이 바라보던 박위는 힘주어 고개를 끄먹거리였다.

(하기사 옛적부터 큰일을 해제끼고 수천수만의 외적들을 물리친것은 언제나 백성들이였지.…

그 백성들덕에 우리도 이제는 다시 염초를 뽑아낼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이윽하여 박위가 염초장앞에 이르니 사람들은 한창 짐을 부리고 들이느라고 정신없이 돌아가고있었다.

복새판이라 누구 하나 저들속에 박위가 들어선것을 알지 못했다.

기쁨과 감동에 젖은 시선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던 박위는 갑자기 거친 숨을 훅 내불었다.

부지불식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 어떤 노여움과 분기가 폭발적으로 뻗쳐올랐다.

박위는 누구에게라없이 와짝 청을 높여 웨치였다.

《모두들 잠시 일손을 거두어라. 그리구 오천이란 놈을 당장 내앞에 오라구 해라―》

흥이 나서 일손을 다그치던 사람들은 때아닌 벼락에 와뜰와뜰 놀라며 허리를 폈다.

저들속에 박위가 끼워있는것도 놀라왔지만 그의 불호령은 더욱 놀라운것이여서 모두들 겁에 질린 눈을 커다랗게 흡떴다. 저편 구석진 곳에서 큼직한 짐짝을 메고 오던 오천은 박위의 호령소리를 가려들은듯 소리없이 짐을 내려놓았다.

밤눈에도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것이 헨둥 알리는 얼굴을 이리저리 빗씻으며 박위앞에 다가왔다.

《오천이 불러 왔사옵니다.》

박위는 제잡담 천둥같은 소리를 터치였다.

《오천이 너 이놈! 요즘 너희 염초장것들이 린근의 절간들을 나들며 마루밑의 먼지를 말강스럽게 퍼낸다던데 사실이냐?》

오천은 먼지투성이머리를 더 깊이 조아려박았으나 그의 대답소리에는 한꼬치의 겁기도 없었다.

《네,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일을 작정한것도 소인이옵고 일을 휘동한것도 소인이옵니다.》

《뭐라구?! 작정도 네놈이 하고 휘동도 네놈이 했어?! 그래, 네놈은 그렇게 한것이 장한 일같아서 번마다 제 이름을 찍어대느냐?》

《…》

《네놈은 명색 대정노릇까지 했다는것이 군기도 모르고 군률도 아랑곳없단 말이냐? 그런 궁냥이 나고 작정이 섰다면 우선 군영에 보고를 한 다음 군영의 지휘를 물어가지고 일을 펴야 할게 아니냐. 모두 네놈처럼 제갈래로 놀아난다면 부대의 군기는 뭐가 되고 또 싸움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

둘러선 사람들중에서 여러명은 비로소 박위가 성내는 까닭을 제나름대로 짐작하고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아하, 장군께선 오천이가 제멋대로 일을 지휘하는것이 지금껏 노여운 모양이고나…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볼에 밤알을 물고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아니, 군기문제로 말하면 이미 매를 쳐서 벌을 내린것이요, 요즘일을 말할것 같으면 오천이가 직접 취품을 하여 말미를 받고 하는것인데 무엇이 또 새삼스럽게 분격하단 말인가!…

사람들의 기색은 각이했으나 박위는 그냥 눈을 지릅뜨고 오천을 노려보았다.

오천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진실을 터놓기가 딱하여 잠시 망설이던 끝에 헐쑥하게 살이 빠진 얼굴을 들었다.

《사실은 군기를 모르거나 망각해서가 아니오라…》

《무엇이 어째?! 네놈은 아직까지도 빙빙 에돌면서 사실을 바로 대지 않을셈이냐? 털끝만 한 거짓도 없이 바른대로 아뢰지 못할고!―》

오천은 마침내 모든 일이 결속단계에 들어선 이제 와서 더이상 일의 내막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매 절간의 주지들은 물론 염초장사람들도 모두 오천이가 주동이 되여 절간침해를 했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지 않는가.

후날 탈이 생긴다면 모든 죄는 자연히 오천이 자기에게 쏟아질것이였다.

오천은 드디여 입을 열었다.

《황송하오나 미리 내막을 알리고 일을 벌리면 후날에 가서 절을 파헤친 루가 장군께 미칠것 같아 그렇게 하지 못했소이다.

소인은 옥살이를 해도 별일없고 귀양살이를 가도 탈이 없지만 장군께 루가 미친다면 그만큼 원정이 늦어지거나 아주 파탄될수도 있겠기에…》

박위의 가슴속에서 불덩이처럼 따가운것이 목젖을 치받으며 솟아올랐다.

자기의 예감이 한치의 드팀도 없이 면바로 들어가맞은것이였다. 박위는 석쉼하게 갈린 청으로 부르짖었다.

《네 이놈! 되지 못한 수작 그만두지 못할가!》

박위는 불가마속에라도 들어선듯 전신이 훅훅 달아올랐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절간먼지에 대해서는 자기도 이미 생각했댔으나 뒤에 생길 후과가 시끄러워 손대지 않은 일이였다. 헌데 오천은 뒤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니, 뒤에 생길 후과를 저 혼자 고스란히 들쓰기 위해 누구에게도 내막을 알리지 않고 오늘의 일을 떠밀어온것이였다.

온몸의 피가 다 몰린듯 화끈화끈해나는 얼굴을 들어 초점없이 허공을 응시하던 박위는 다시금 노성을 터치였다.

《그러니 네놈의 수작인즉 나는 뒤전에 나앉아 구경을 하다가 죄가 쏟아지거든 그 죄를 전수히 네게다 밀어붙이라는 뜻인데…

이놈아, 세상에 제 새끼를 잡아먹는 망둥이라는 고기는 있어도 제가 살겠다고 수하군사를 구렁속에 밀어넣는 장수가 어디 있다더냐?

에끼, 이 고이현놈―》

박위의 질책과 꾸중은 엄엄했으나 그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시작부터 거의 확연하게 감득하고있던 오천은 마침내 박위의 웅심깊은 사랑앞에 통으로 가슴이 젖어들었다. 오천의 눈에서는 달빛에 젖은 파아란 눈물이 쉼없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속이 한줌만큼이나 졸아들어가지고 전전긍긍하던 사람들도 그제야 박위의 호령속에 깃들어있는 하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여실히 깨달은듯 눈굽을 찍어내고 코밑을 훔쳐냈다.

북받쳐오르는 오열을 흑흑 씹어삼키는 축들도 있었다. 박위는 오천이네들에게 감동되였으나 오천이네들은 박위에게 감격한것이였다.

그것이 박위의 가슴을 더욱 아프고 따갑게 휘저어주었다.

자기가 한 일은 조금도 크게 여기지 않으나 남의 사소한 인정에는 크게 감동하는 소박하고 진실한 이 사람들.

예전에는 마음먹은대로 휘고 부릴수 있는 하잘것 없는 존재로 여겼던 이 사람들이 지금은 쉬이 가량할수 없는 높은 뜻과 비범한 슬기를 지닌 거인들처럼 쳐다보이였다.

박위는 울컥울컥 괴여오르는 속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슬며시 바다가쪽으로 돌아섰다.

이때를 놓칠세라 구석쪽에 박혀있던 여삼이가 대들듯이 오천에게 다가섰다.

그의 동글납작한 얼굴에도 눈물자욱이 번들거리고있었다.

팔소전투를 치르고 돌아온 뒤 신출내기군사들과 함께 코가 삐뚤어지도록 밀린 잠을 자고난 여삼은 깨나자바람 박위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군영안에 없었다.

여삼은 박위의 털등거리를 찾아들고 바다가에 달려나왔다.

그렇게 되여 염초장사람들속에 섞이게 된 여삼은 방금전의 광경을 죄다 목격하였고 오천의 일도 낱낱이 알게 되였다.

속이 깊지 못한탓으로 하여 누구보다 쉽게 오해를 품기는 하나 그대신 남달리 감동이 빠르고 리해가 빠른 여삼이였다. 한참이나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오천을 흘겨보던 여삼은 무슨 행풀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뽑았다.

《형님이 매정하고 모진줄은 오늘 다 알았소. 내가 아무리 입이 빠르고 말이 헤프다 한들 내게까지 일의 내막을 숨긴단 말이우.

너무하우, 세상에 그런 형이 어디 있고 그런 인정이 어디 있소?…》

여삼은 마치 오천이가 원망스러운듯 소리소리 질렀으나 사실상 그는 자기의 엷은 성격을 전에없이 아프게 꾸짖고있었다.

(오천형님은 지금껏 원정준비를 시각빨리 끝내기 위해 발에 불이 일도록 뛰여다니였다.

장군께 루가 미칠것이 두려워, 후날 자기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려고 절간먼지소리 같은것은 애당초 입에 올리지도 않고… 그런데 나는 형님의 일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취금에게 반해다닌다고 고깝게 여기던끝에 꽁지대가리없는 헛소문을 그대로 장군께 일러바치였다.

그래서 오천형님에게 매가 떨어지게 하고 그의 일을 더디게 하였으니 세상에 나처럼 경망스러운 놈, 나처럼 고약한 놈이 어디 있는가?!)

여삼은 소리쳐울고싶도록 마음이 괴로왔다. 허나 오천은 그의 울음기섞인 말같은것은 별로 여겨듣지도 않고 여삼의 어깨를 툭툭치며 싱글거리였다.

《헛허허, 당장 애기아버지가 될 녀석이 속은 꽁해가지고…

젠장, 눈섭을 뽑으면 똥이 나오겠구나.》

여삼은 손을 홱 내리그으며 발칵 짜증을 내였다.

《형님, 난 지금 롱을 하는게 아니우.

아무튼 오늘 밤엔 짬을 내가지구 우리 집에 좀 나오우. 속이 쭉 풀리게 말을 해야지 장밤 잠을 못 잘것 같소.》

《아따, 삼년만에 만나는 가시애비냐.

새삼스럽게 말은 무슨 놈의 말… 하여간 내 틈을 봐서 나가도록 할테니 이제는 그쯤하고 우거지상을 풀어라.》

가까운 바다우에서 두점의 불꽃이 펑끗 살아올랐다.

박위는 더이상 오천과 여삼의 대화에 귀를 보낼수 없었다.

(저게 무슨 배일가. 우리 군영의 배라면 내가 모를리 없는게요, 왜구의 배라면 바다길순시를 나간 우리 군사들이 가만 내버려둘리 없을 텐데…)

박위는 가벼운 의혹을 안은채 바다쪽으로 걸어나갔다.

달밝은 밤이라 바다는 꼭 은빛비단필을 펴놓은듯 한데 그우에서 두척의 배가 뚜렷한 륜곽을 드러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오천이 급히 뛰여와 바다우의 배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아까는 미처 아뢰옵지 못했사온데… 저 배들은 죽촌사람들이 무어가지고오는 전함들이옵니다.》

박위는 첫순간 오천의 말뜻을 가려듣지 못했으나 인차 사연의 앞뒤를 짐작할수 있었다.

언제인가 죽촌에 나갔을 때 목격한 알고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언뜰언뜰 안겨왔다. 오천은 하얀 이발을 번쩍거리며 신명이 나서 뒤말을 심어나갔다.

《달이 좋은 이밤을 타서 그새 뽑은 염초를 제창 새로 만든 전함에 싣고 군영앞바다로 들어오겠노라고 일전에 벌써 통기해왔댔소이다.》

《그래?!》

염초장사람들은 어느결에 벌써 죽촌의 전함들을 알아보고 와와 소리를 지르며 이쪽으로 밀려오고있었다.

박위와 오천은 그 소리에 떠밀리기라도 한듯 성큼성큼 바다쪽으로 걸어나갔다.

배는 벌써 기슭에 이르러 닻을 내리고있었다.

누구인가 잽싸게 배우로 사다리를 뻗쳐놓았다.

박위는 천천히 사다리우에 올라섰다.

박위가 움쭉 몸을 솟구며 배우에 올라서자 배전에 두손을 모두어잡고 서있던 저대로인은 정중히 허리를 꺾으며 흥뜬 어조로 아뢰였다.

《우리 죽촌백성들이 군영에 기증할 전함과 염초를 만들어가지고 지금 막 당도하는 길이올시다.》

훨훨 나붓기는 저대로인의 다발좋은 채수염을 홀린듯이 바라보던 박위는 그의 나무뿌리같은 손을 덥석 잡아주고싶은 충동을 가까스레 누르며 말했다.

《누구들보다 고생스럽게 사는 죽촌백성들이 군영의 일을 위해 전함과 염초까지 만들어가지고 왔으니 무엇이라고 치하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실로 갸륵하오.》

박위는 후둑후둑 골풀이치는 가슴을 안은채 뚜벅뚜벅 갑판을 거닐며 관습적으로 배안의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촘촘히 박혀있는 갑판우의 널판자들은 기름을 먹여 대우를 낸듯 청동거울처럼 알른거리는데 선미쪽에는 두세바리는 실히 될 흰눈같은 염초가 무져있었다.

무엇인가 크고 뜨거운것이 가슴버겁도록 밀려들었다.

(이 사람들은… 문벌좋고 권세 뜨르르한 량반들은 외눈으로도 보지 않는 이 사람들은 알쭌히 맨손으로 이 모든것을 만들어냈다.

아무런 평가도 대가도 바라지 않고 소리, 소문도 없이…

하고 보면 이 땅에서 누가 정녕 아름다운 인간, 힘있는 사람이며 진정한 애국자인가?

나는 진정 어느 토양에 인생의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쳐야 하는가?!…)

한참이나 아무 말없이 생각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마침내 오늘 밤짧은 순간에 열번도 더 되굴려본 사색을 간추려 군령으로 선포하였다.

《오천이, 듣거라. 오늘부터 너는 다시 대정벼슬을 맡아보되 이제부터는 단지 군영의 염초장일만 간검할것이 아니라 도안의 염초장들을 모두 총찰하도록 해라.

따라서 너에게는 염초도감이라는 벼슬을 덧붙여준다.

또한 염초장일의 급속한 진전을 위해 각 고을, 각 촌의 염초장마다 정식으로 행수벼슬제를 내오도록 하겠노라.

죽촌의 좌상로인은 제창 여기 나와있으니 관령을 기다리느라 할것없이 이 시각부터 행수벼슬을 행사하도록 하라.

이상의 사실은 곧 우에 품하고 아래에 알리여 정식 군령, 관령으로 통하게 할것이다.》

《황송하오이다.》

오천이와 저대로인을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감격에 젖은 청을 모아웨치였다.

잠시후 지금껏 괴괴한 정적에 묻혀있던 염초장에서는 기운찬 풀무질소리가 푸르르 딱딱, 푸르르 딱딱 울려나왔다.

은백색의 화광이 펑끗펑끗 솟구쳐오르는가 하면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주고받는 먹임소리가 들썩하게 쏟아져나왔다.

박위는 기다란 달그림자를 끌며 염초장주위를 거닐고있었다.

격정은 갈수록 세차게 끓어올랐다.

그것이 억제할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박위는 뜨거운 숨을 내불며 얼굴을 추켜들었다. 온 세상이 다 듣도록 백성들의 덕에 염초가 풀렸다고, 원정은 필경 승리로 결속될것이라고 소리쳐웨치고싶었다.

하늘에서는 도래멍석같은 보름달이 화려한 얼굴을 구름장속에 숨겼다가는 서둘러 빠져나오군 하는데 그때마다 천지간은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환하게 밝아지군 했다.

그렇다, 정의나 진실, 인생사의 참된 리치는 잠시잠간 구름장같은데 가리워지여 보이지 않을수는 있어도 영영 사라질수는 없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영영 사라졌다고 때이르게 탄식하며 자기의 인생을 실패에로 몰아가는 경우가 왕왕 있을뿐이다.

하거니 그 어떤 광풍이나 어둠속에서도 한번 포착한 정의와 진실, 인생사의 참된 리치를 철석같이 믿고 그것에 의거하여 만사를 줄기차게 떠밀어나간다면 내세운 뜻이 아무리 크고 무겁다 한들 어찌 성사를 이룰수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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