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

1

 

고려의 바다는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왔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다림질이라도 해놓은듯 일매지게 매끈하고 푸른 바다.

그우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소복단장을 한 갈매기들.

겨끔내기로 울리는 갈매기들의 청쾌한 울음소리, 시원스레 풍겨오는 비릿한 해감내…

시종 바다우에 시선을 얹은채 적동백꽃향기와 생강꽃향기가 향긋하게 어울려 떠도는 산비탈의 소로길로 느리게 말을 몰아가던 경상도원수(도의 군사장관) 박위는 까만 수염발속에 반나마 파묻혀있는 자그마한 입을 벙긋이 터치며 천천히 고개방아를 찧었다.

(이즈막에 우리 경내의 군사일이 썩썩 잘돼나가니 날씨도 운을 맞추는 모양인가?! 하기사 하늘도 고려의 하늘이요, 바다도 고려국의 바다일진대 우리 군대의 애국지심에 어찌 무심하리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생긴것이리라.

아무튼 근래의 날씨가 이리 좋으니 매 고을들에서 군사일들이 부쩍부쩍 축이 날게라.)

박위는 지금 해변가고을들에서 새롭게 시작한 군사일들을 일일이 돌아보고 보름만에 경상도군영이 있는 김해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박위는 고려의 무관들이 일치하게 공인하듯이 자나깨나 군사일을 두고 마음쓰는 진짜배기무장이였다.

그는 이미 지난해(1387년)말에 임금에게 직접 연호군(적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림시로 조직되던 지방군부대.)제도를 철페하고 매 고을, 특히 해변가고을들에 상비군을 조직하는 동시에 더 많은 병선을 건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었다.

그의 제안은 필경 혁신적인 발기였다.

허나 나라의 전반적인 형세를 놓고볼 때 북방의 외적을 견제하기 위해 수만의 대군이 동서북면에 항시 둔을 치고있는 조건에서 더우기는 군사징발의 기초인 호적, 군적이 심히 헝클어지고 군역대상이 훨씬 줄어든 정황에서 또다시 군사를 뽑고 싸움배를 뭇는 역사를 벌린다는것은 사실상 조련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데다 당시 문하시중이라는 국가의 최고관직을 타고앉은 부패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리인임은 군사일에 물력을 들이자는 박위의 제안이 꼭 제집 재물과 하인들을 털어쓰자는 소리처럼 들리여 상비군조직과 병선건조에 대한 말만 나오면 오만상을 찌프리고 홰홰 손을 내저었다.

허나 백전로장으로 나라안에는 물론 나라밖에까지 널리 알려진 최영은 임금이 《경들은 박위의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을 때마다 제일먼저 조정의 백관들앞에 나서서 《천만번 옳은 제안이니 커다란 난관이 있고 의견이 있더라도 조속히 실행해야 할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최영과 탐욕스럽고 완악한 리인임이 겯고 트느라고 문제는 쉬이 풀리지 않는데 그 샅짬에 끼운 년소하고 유약한 임금은 안팎곱사등이가 되여 어쩔바를 몰라하다보니 제안의 실행은 인차 결정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론의속에서 달과 달을 넘겨오던 박위의 제안은 올해 봄 최영장군이 과감한 용단을 내리여 리인임일파를 숙청한 뒤에야 비로소 임금의 윤허를 받고 정식으로 수락되였다.

박위는 임금의 교지를 받자 그 즉시 해안고을들에 상비군을 조직하고 병선을 건조할데 대한 군령을 떨구었다.

뒤이어 열흘에 한번씩 매 고을의 원이나 호장이 직접 경상도군영에 들어와 자기 고을 군사일의 진척정형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령을 추가로 내리였다.

했으나 박위는 군영의 교자우에 틀고앉아 지령이나 내리고 올라오는 보고나 듣고있자니 오금이 근질거려 견딜수 없었다.

모든것을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지휘하고싶었다.

하여 그는 보름전 어뜩새벽에 자기가 직접 현지에 나가 군사일의 추진정형을 확인하고 더욱 다그어댈 결심으로 지방순행의 길에 올랐었다.

현지에 나가보니 간데 족족 군사를 뽑아들이고 전함을 뭇느라고 야단법석이였다.

나라님의 교지와 병부의 명령도 어마어마했지만 박위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장수가 얼마나 드센가를 너무나 잘 아는 고을의 부사, 현령, 판관, 감무들은 우선 박위에게 걸려들지 않기 위해 오금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분주하게 뛰여다니고있었다.

고을마다 성과도 있었지만 페단도 없지 않았다.

어떤 고을에서는 군막도 세우고 싸움배도 몇척 무어놓았으나 무턱대고 일을 다몰아대기만 하다보니 병영의 지붕새로는 하늘이 파랗게 올려다보이는가 하면 엉성한 전함의 밑창으로는 물고기뼈다귀를 훔쳐문 부덕쥐들이 무시로 나들고있었다.

군사랍시고 제정된 인원수를 다 채워놓기는 했으나 노닥다리, 포병객(병자)이 절반나마 되는 고장도 있었다.

어느 고을에서는 제법 화약을 만든답시고 덩실하게 염초장까지 지어놓았으나 염초뽑는 방법을 전혀 모르다보니 일껏 품을 들여 세워놓은 아까운 염초장을 소득없이 비워놓고있었다.

박위는 외기둥에 집짓듯이 어설프게 해놓은 일이나 일시 눈가림식으로 건성 해놓은 일들은 건건이 발기짚어내여 호되게 꾸짖은 다음 빠른 시일안에 말끔히 시정하라고 엄명했다.

허나 염초장일처럼 모르고 비워놓은 일들은 자기가 직접 가르쳐주거나 이전에 개경의 화통도감에서 일할 때부터 슬기단지로 소문난 군영의 대정(초급지휘관) 오천에게 차근차근 배워주게 하였다.

하여 적지 않은 부족점을 내포한채 갈피없이 전개되던 해변고을들의 군사일은 기본적으로 제 곬에 들어서게 되였다.

더불어 이발빠진 얼레빗처럼 성글던 해안방어선은 하나하나 빈구석을 메꾸며 견고하게 일떠서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박위의 뒤를 따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군영군사들이 한층 목청을 높이여 떠들어댔다.

보름동안이나 박위와 함께 외지에서 나돌다가 정든 군영으로 돌아가자니 너나없이 기분이 흥떠오르는 모양이였다.

《…대정형님, 오늘도 우리 색시는 시큼털털한 탁배기를 걸러놓고 나를 기다릴게요. 이제 군영에 려장을 풀어놓고나서는 나하구 같이 우리 집에 갑시다. 밸이 푹 젖도록 탁배기를 마시잔 말이우.》

박위의 시위군사(호위군사) 여삼이의 아이처럼 챙챙한 목소리가 사뭇 살갑게 울리였다.

여삼은 눈썰미가 빠르고 몸놀림이 민첩한데다 소시적부터 김해일판에서 이름을 들날리던 석전군이라 시위군사로서는 나무랄데가 없었다.

헌데 말이 무척 헤프고 매사에 부산스럽기 짝이 없어 자주 곁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군 하는것이 탈이였다.

그는 얼마전 군영의 앞동네에 사는 얌전데기처녀와 짝을 뭇고 상투를 틀어올렸다.

하지만 아직도 형님, 형님하던 예전의 버릇이 그냥 남아있는데다 난다뛴다하는 오천의 인끔에 어느 정도 눌리우기도 하여 로총각인 오천에게 반말을 쓰지 못했다.

여삼의 맑고 창창한 목소리가 잦아들자 이번에는 웃음기가 흐들흐들하게 배여있는 오천의 음성이 잇달리였다.

《글쎄 탁배기는 무척 먹고싶은데… 여삼이네 집에까지야 어떻게 가겠나?!》

오천은 무슨 일이나 막힘없이 수월수월하게 해제낄뿐아니라 매양 남에 없는 신통한 궁냥을 내놓군 하는 슬기단지였다. 게다가 성미는 대활하고 선들선들하여 어디 가나 사람들의 호감을 사군 했다.

그런 오천이 전에없이 자기의 청을 거절하자 여삼은 잔뜩 못마땅하여 볼메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 새삼스레 그건 무슨 소리우? 탁배기가 생각있으면 나와 함께 집에 가면 되는건데 못 가긴 왜 못 간단 말이우?!…》

《이렇다니… 임자 아직두 개구장이때를 깨깨 벗지 못하고 제 궁냥대로 놀아나니 얌전한 색시가 얼마나 속을 썩이겠나.

이보시, 지금 자네 색시가 탁배기만 걸러놓고 앉아서 랑군을 기다리는줄 아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수없이 중한것을 품어안고 기다린단말이여. 그러니 내가 어떻게 탁배기만 크게 여기고 덜레덜레 임자를 따라가겠슴나, 핫하하…》

오천의 걸죽한 롱담에 여러 군사들이 일시에 와 웃음보를 터뜨리였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웃던 여삼은 조금후에야 오천의 숨은 말뜻을 가려들은듯 불시에 새된 청을 왈칵 높이였다.

《아따, 그렇다면 형님은 구서방네 집으로 나가구려, 누가 말린다우?》

《아니, 내가 구서방네 집에는 왜 간단 말이?》

《흠, 시치미를 떼면 장땅이우?! 요새 형님이 구서방의 외동딸 취금이한테 반해서 틈만 나면 그 집 뒤담을 넘나든다구 동네의 애녀석들까지 지껄지껄합디다.

헤살을 놓기 싫어서 가만있으니까 사람을 아주 장님으로 아는게야.》

《알기는 칠월귀뚜라미 한가지로군. 사실 취금이와 어쩐다는 말이 날만 한 일이 아주 없는건 아니지만… 헛허허… 임자가 헤살을 놓겠다니 대체 어쩌자는건가?! 석전군의 팔매돌을 가지고 둘사이를 갈라놓겠슴나?! 핫하하…》

오천의 유들유들한 대답소리, 웃음소리에 군사들은 또다시 푸지게 웃어댔다.

일쑤 발끈하기는 잘하지만 마음이 여리고 뒤가 무른 여삼이도 언제 짜증을 냈던가싶게 깔깔 웃어댔다.

박위도 소리없이 느슨한 웃음을 피워올리였다. 기분은 더욱 흥그러워났다.

새삼스레 자기의 군사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자기의 마음속을 기탄없이 터놓는 그들의 소박한 생활세계가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인가.

저마끔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과 취미도 각각이지만 하나같이 점잔을 뺄줄도 모르고 겉발린 례의를 차릴줄도 모르며 유식한 문자말로 자기를 미화할줄도 모르는 저네들.

하지만 저들의 투박하면서도 엇구수한 말마디속에는 나라의 군사일에 사심없는 땀과 지혜를 바치고 정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인간들의 기쁨과 긍지가 얼마나 진실하고 따뜻하게 슴배여있는가!

훈훈하게 더워나는 가슴을 안고 생각에 잠겨있던 박위는 문득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가슴속 복판에서 홀연 싸늘한 눈가루같은것이 타래쳐올랐다.

(…저들에게 있어서 군영은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초소인 동시에 청춘의 꿈을 꽃피우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군영이란 무엇인가! 시종 딱딱한 구령소리와 병장기들의 부딪침소리 같은것만이 울리는 병영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박위는 단정하게 박힌 대문이로 귀인성스럽게 생긴 작은 입술을 아프게 짓물었다.

꽃향기에 축축히 젖은 사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두마리의 노랑나비가 눈앞이 어지럽도록 깝치며 돌아가더니 뿔뿔이 갈라져 날아올랐다.

어느 전장에서 왜구의 날카로운 칼날에 한쪽귀가 뭉청 잘린탓에 《짝귀》라는 점잖지 못한 별명을 달고다니는 박위의 황부루는 때마침 번번한 길녘에 파수군처럼 홀로 서있는 나무밑을 지나고있었다.

포도송이마냥 주렁주렁 내리드리운 하얀 꽃방망이들에서 코가 아리도록 싱그러운 꽃향기가 미여지게 쏟아져내리였다.

그 순수한 꽃향기가 어느 옛적 자기 안해의 몸에서 늘 풍기군 하던 이채로운 향내와 엇비슷하다는것을 감촉하는 순간 박위는 사금파리같은것이 가슴의 벽을 빡 내리긋는듯 한 예리한 아픔을 느끼였다.

박위는 슬며시 눈길을 내리떨구며 느슨하게 고삐를 놓아주었다.

2

2

 

…그해 초봄 김해부사로 있던 박위는 어느 해변고을의 만호(고려 후반기 지방의 요충지에 배치되였던 군사지휘관 또는 지방관.)로 임명되였다.

박위는 만호벼슬이 승급인지 좌천인지 선명하게 가려지지 않았으나 새 직무를 받자 그 즉시 군말없이 임지로 떠났다.

그의 안해 최씨는 갓 태여난 아들 현중이를 싸업고 밀양의 친정집으로 향하였다.

최씨는 친정집에서 아들의 젖이나 뗀 다음에 박위에게 가는것이 가군의 일을 옳게 돕는것이라고 생각한것이였다.

그가 친정집으로 온지 꼭 열흘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항간에서 즐거운 봄명절이라 일컫는 삼월삼짇날이였다.

고향마을의 야트막한 뒤산기슭에서는 그날을 기다려 한껏 피여난 진달래꽃송이들이 봄바람을 타고 설레며 이쁘게 웃고있었다.

그 진달래꽃속에서 최씨를 위시한 동네녀인들도 꽃다림(화전놀이)에 쓸 진달래꽃지짐을 지지고 꽃국수를 사리며 떨기떨기 웃음꽃을 피우고있었다.

그럴 때 갑자기 한무리의 왜구가 마을을 에워싸고 갈가마귀떼처럼 달려들었다.

고요속에 날이 밝고 적막속에 해가 지던 아늑한 산골마을의 곳곳에서 비명소리, 아우성, 고함소리가 터져올랐다.

곳곳에서 두리기둥같은 불길과 삼단같은 연기타래가 치솟았다.

마을사람들은 승냥이무리에게 쫓기우는 사슴무리처럼 산지사방으로 황급히 흩어져 달아났다.

최씨도 현중을 둘쳐업고 대중없이 내뛰였다. 황망히 꽃무더기를 헤치고나온 최씨가 뒤산골짜기에 들어가기 위해 음침한 벼랑그림자가 드리운 골어구에 다가섰을 때였다.

목을 지키고있던 세놈의 왜구가 솟아나기라도 한듯 우뚝우뚝 일어서더니 와르르 최씨에게 다가들었다.

무작정 칼을 휘두르려던 왜구들은 무엇때문인지 일시에 칼을 내리웠다.

아직 서른살도 채 안된 젊은 녀인, 한창 피여나는 작약꽃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최씨의 자태에 그만 얼혼이 빠진것이였다.

왜구들은 음독이 올라 지지벌개진 눈망울을 희번득거리며 저마끔 씨벌거리였다.

《보매 당신은 귀부인같은데 우리가 어찌 함부로 살해할수 있겠는가.》

《부인이 우리에게 잠시 몸을 허락한다면 머리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살려주겠다.》

이를 사려물고 왜구들을 쏘아보던 최씨는 품속에서 번쩍거리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왜구들을 노려보며 통통히 호령하였다.

《이 짐승같은 놈들아, 내가 구구히 목숨이나 건지자구 네놈들의 개수작에 귀를 줄것 같으냐. 내 오늘로써 이 세상을 하직한다만 네놈들은 머지않아 내 피값이 얼마나 비싼가를 똑똑히 알게 될게다.》

말을 마친 최씨는 자기의 가슴에 힘껏 칼을 들이박았다.

급보를 받은 고을의 군사들이 달려왔을 때 최씨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흘러 10여년이 지나갔다.

10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옛적의 일은 아무리 가슴아픈것이라 할지라도 차츰 희미해지거나 가뭇없이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기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세월의 흐름은 망각의 휘장이라고 일러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위는 안해의 최후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그날의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기는커녕 더 자주, 더 생동하게 뇌리속에 비껴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박위는 왜구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더더욱 이가 갈리고 살이 떨리였다. 지금도 마음속깊이에 안해의 모습이 떠오르자 대번에 복수의 붉은 피가 사품쳐 끓어번지였다.

뒤이어 순간이나마 그 어떤 자기만족에 빠지였던 자신에 대한 불만이 쓴 물처럼 우러났다.

(옛 병서에도 《네가 하루를 방심하면 적은 두배로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해변고을들의 군사일을 돌아본것이 무슨 공적이라도 되는듯이 여기지 않았는가.

어제 저녁 회군하던 길에 부산관가에 들어가 늦도록 술을 마신것도 그리고 지금껏 놀량으로 길을 걸어온것도 따져놓고보면 다 내 마음의 탕개가 풀어진 까닭이리라.

그런데다 새빠지게 녀인에 대한 생각에 빠진것은 또 웬일인고?!…

아서라, 왜구가 언제 어디로 쳐들어와 무슨 지랄을 할지 모르는 요즈음 어디 가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이때 나라의 최전역에 나선 장수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한참이나 자신의 신통치 않은 정신상의 과실을 두고 정도이상으로 심각하게 속을 썩이던 박위는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였다.

무슨 말끝엔가 또 한바탕 크게 웃어제끼느라고 어깨를 들썩거리던 오천은 박위의 시선과 부딪치자 금시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얄팍한 어깨를 달싹거리며 해망스럽게 깔깔거리던 여삼이도 가느다란 눈을 샙뜨며 황급히 웃음기를 삼켜버리였다.

《그만들 해라. 이제는 그만 길을 재우쳐가야겠다.》

박위는 위엄기 배인 청으로 웨치듯이 말하고나서 세괃게 고삐끈을 나꾸어챘다.

주인의 불같은 성미에 익숙된 황부루는 박위의 급작스러운 신호에 놀라기는커녕 투레질 한번 하지 않고 화닥닥 네굽을 놓았다.

오천과 여삼을 위시한 10여명의 군사들도 박위의 흉내라도 내듯 일제히 고삐끈을 세차게 당기였다.

태평스레 드러누워 인간세상의 범인들로서는 감히 륜곽조차 헤아릴수 없는 거창한 꿈을 꾸는듯싶던 장려한 바다는 야단스러운 말발굽소리에 놀라 깨여나기라도 한듯 불시에 하얀 물이랑을 말아올리며 거방진 몸통을 뒤틀기 시작했다.

군마들의 행렬앞으로는 불덩이같은 꽃송이들이 다닥다닥 박혀있는 해당화덤불들이 빠르게 다가왔다가는 미처 여겨볼새도 없이 홱홱 스쳐지나갔다.

얼마후 가락촌을 지나서 구랑마을을 에돌아나온 군마행렬은 록산쪽으로 내리달리였다. 눈깜짝할새에 록산마을을 비껴치우고 야트막한 언덕우에 올라서니 적토색평야우에 엎어놓은 놋바리처럼 보이는 그리높지 않은 군영뒤산이 우렷이 안겨왔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삘틈없이 들어찬고로 사시절 푸르게만 보이는 군영뒤산기슭에 덜썩덜썩 몸을 솟군 군막들도 뚜렷이 가려지였다.

박위의 두툼한 가슴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군영대문우로 문득 현중의 고집스럽게 생긴 귀여운 얼굴이 달덩이처럼 떠올랐다.

어머니의 살뜰한 사랑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라난 현중이.

키는 벌써 엄부렁하게 크지만 몸은 아직 봄날의 물버들처럼 애리애리한 현중이.

하지만 아들녀석은 벌써부터 활쏘기, 칼쓰기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고있었다.

아마 오늘도 현중은 죽촌에 사는 리별장의 딸 리옥에게 내려가 활재주를 익히고있을것이였다.

아들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대견한 마음을 안고 고개를 끄먹거리던 박위는 부지중 리옥이가 군영에 들어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지그시 입술귀를 짓물었다.

후둑후둑 가슴이 높뛰였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리옥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있는 얼굴모습이 아프게 심장을 찌르며 육박하듯 다가왔다.

일찌기 체험해본적 없는 류다른 번민이 가슴의 벽을 아리게 허비며 떠올랐다.

(이제 리옥을 만나거든 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고?)

박위는 난감한 표정을 하고 이런저런 말마디를 골라보았다.

허나 군영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름내내 짚여지지 않던 신통한말마디가 이제 갑자기 떠오를리는 만무했다.

박위는 애써 번거로운 생각을 털어버리려 했으나 리옥이와 결부된 그날 밤의 일은 하냥 생동하게 떠오르며 괴롭게 속을 허벼팠다.

각일각 다가오는 군영에는 사랑하는 아들도 있지만 옛 전우의 외동딸인 리옥이와 련관된 환희로우면서도 딱한 생활상의 고충도 있었다.

박위의 심중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군영대문앞에 아름드리몸통을 비틀고 서있는 소소리높은 느티나무는 기다란 팔을 벌려 흔들며 어서 오라 반기고있었다.

3

3

 

…박위의 체구는 일류 무장답게 장걸하면서도 탄력에 넘쳐있으나 동그스름한 얼굴은 그 볼만 한 체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희고 예쁜데다 노상 연한 웃음기까지 실려있어 적지 않은 무관들은 그를 두고 《백옥장군》이라고 불렀다.

무관으로서의 실력은 어떻든 녀성적인 미를 가진 장수라는 의미의 호칭으로서 조롱의 뜻이 아주 없는것도 아니였다.

다만 밀직부사 최칠석만은 박위를 두고 범의 젖을 먹고 자란 장군이라고 반롱조로 칭하군 했는데 그 부름속에는 자기의 벗에 대한 진심으로 되는 찬탄과 존경심이 짙게 어려있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조정안팎에는 최칠석의 말을 그대로 믿으려는 사람이 거의나 없었다.

박위의 외관을 보아서는 절대로 그럴수 없다는것이 무관일반의 견해였다.

하지만 사향이 있는 곳에서는 향내가 나기마련이요, 풍경이 있는 곳에서는 소리가 나기마련이였다.

무과에 급제한 박위가 처음으로 받은 벼슬은 룡호군(고려때 왕실과수도 개경을 지키던 중앙상비군의 하나, 2군6위중에서 한개의 군.)의 중랑장이였다.

박위가 처음으로 룡호군지휘부에 들어서니 무엇때문인지 군의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찌뿌둥하고 먼산바라기를 하고있었다.

슬며시 기분이 언짢았으나 아마 자기가 오기 전에 무슨 좋지 못한 일이 있었는가부다 하고 제 좋게 생각한 박위는 상장군, 대장군 같은 상관들에게는 물론 동격의 중랑장들과 하급인 랑장들에게도 깍듯이 인사를 차리였다.

하고는 자기의 자리로 짐작되는 빈 교자우에 단정히 앉았다.

그러자 몸집이 황소만큼이나 요란스러운 중랑장 김극기가 퉁방울같은 눈을 디룩거리며 제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다.

《여보 동관! 그대는 우리 군에 새로 온 사람인데 례법대로 우선 신래를 하고나서 면신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신래는 빼먹고 면신부터 하니 그게 옳게 된 일이요?》

그제서야 박위는 방안의 공기가 랭랭해진 리유를 확연히 간파할수 있었다.

법적으로 규제된 조항은 아니지만 새로 벼슬을 받고 관가에 들어온 신관리는 오자바람 구관리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례를 차려야 하는데 그것을 신래라고 하였다.

그 신래는 한번으로 그치는것이 아니라 적어서 열흘, 많으면 30일을 넘기는것이 통례였다.

여하튼 그 신래가 끝나야 신관리는 자기 자리에 들어가앉을수도 있고 사람들과 말도 나눌수 있는데 그것을 면신이라 일렀다.

하고보면 맨손으로 들어와 술대접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들어앉은 박위는 례의도 모르고 렴치도 없는 사람이였다.

박위는 조정안에 이러한 페습이 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십일간이나 술과 음식을 펼쳐놓을 밑천도 없었고 조정관청에 인박힌 천하고 어지러운 페습을 지키고싶지도 않았다.

신래야말로 군기를 문란시키는 페풍중의 하나요 관헌의 인격을 좀먹는 페습중의 하나였다.

박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은 몹시 언짢았으나 애써 인상적인 미소를 띄우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꼭지를 뗐다.

《본관은 시골에서 나서자라다보니 미거한 점이 다수한 사람입니다.

그저 전하의 하해같은 은덕을 입어 분에 넘치는 벼슬을 받았사온데 일후 결함이 없도록 여러분께서 잘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구 방금 저 뒤쪽에 앉아계시는 중랑장께서 신래를 권유하셨는데 그것은 후일 기회를 얻어 잘 준비하겠습니다.

본관은 우선 일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본관이 속한 령(룡호군은 두개의 령으로 되여있다.)이 어느 령인지 그것부터 알려주시면 지금 당장 령에 나가 군사일에 손을 붙이겠습니다.》

박위의 표정과 말마디는 더없이 부드러웠으나 사람들의 낯색은 더욱 흐려들었다.

마침내 하늘소처럼 귀가 빨쭉한 랑장 하나가 올롱하게 눈을 치뜨며 경망스럽게 손을 내리그었다.

《우리 룡호군으로 말하면 2군6위(고려중앙 상비군의 통칭.)가운데서도 전하의 신임을 제일로 많이 받는 정예부대인데 이런 훌륭한 부대에 들어와서도 신래를 못하시겠다니 중랑장께서 너무하신듯 합니다.》

촐랑이처럼 천박하게 생긴 랑장은 박위보다 한품계나 벼슬이 낮건만 제법 꾸중 비슷한 훈시질을 하는데 보매 그는 예쁘장하게 생긴 박위가 상당히 우습게 생각되는 모양이였다.

박위는 더이상 자기 속을 털어보이기가 싫어 탁자우에 놓인 선생안(전직벼슬아치들의 이름이 적힌 문건)을 끄당겨놓고 건성으로 읽어내려갔다.

아까부터 부리부리하게 잘생긴 눈으로 박위의 일거일동을 주의깊게 살펴보던 상장군 김종연이 뒤로 젖히였던 거방진 몸집을 앞으로 당기며 장히 거드름스럽게 말을 뗐다.

《여보 중랑장, 내가 바로 그대가 속한 령을 통솔하는 상장군이요.

보매 공은 신래라는것을 몹시 경원시하는것 같은데 나 역시 그런 놀음을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요. 그러니 신래는 그만두고 신, 구관리가 대항하여 수박희를 하는것으로 피차 무관다운 인사를 차리는게 어떻소?》

종연은 박위의 당당한 언행이 은근히 마음에 들면서도 어딘가 가소롭게 생각되여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싶었다.

박위는 종연의 제의야말로 진정 반가운듯 싱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거야말로 무관다운 통성이고 례의인듯 합니다.》

당장 먹자판을 벌리고싶어 몸달아하던 룡호군량반들은 금시 누구의 사등뼈라도 분질러내칠듯 기세등등하여 마당으로 쓸어내려갔다.

제일먼저 맨손으로 황소의 뿔을 비틀어뽑는 장사라고 소문난 김극기가 깍지동같은 상체를 멋스럽게 뚱깃거리며 깔판우에 올라섰다.

극기는 박위의 기를 꺾어놓으라는 종연의 은근진 사촉을 받기도 했지만 그 사촉이 없더라도 정도이상으로 태연하고 당당한 신임중랑장을 단박에 까뭉개놓고싶었다.

박위가 깔개우에 올라서자 극기는 호랑이앞에 나선 하루강아지처럼 보이는 상대가 우습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여 시물시물 입술을 놀리며 여유작작하게 다가들었다. 두손을 유연하게 쳐들고 방어태세를 취하고 서있는 박위에게 접근한 극기는 불식간에 솥뚜껑같은 손을 펼쳐들었다.

드센 손칼질로 단매에 박위의 목줄기를 꺾어놓을 심산이였다.

극기의 손칼이 내리박히는 찰나 박위는 뒤로 넘어지기라도 하듯 상체를 뒤로 잔뜩 제끼였다.

이어 박위는 세칭 나비잡이라 일컫는 모두발을 버쩍 허공으로 솟구쳐올리였다. 극기가 미처 앞으로 쏠린 상체를 바로잡기도 전에 박위의 모두발이 꺽지게 생긴 극기의 턱에 세차게 들이박히였다.

극기의 우람진 몸집이 돗자리우에 통으로 나가떨어지였다.

재차 드센 타격을 가하면 극기는 더이상 자기를 수습할수 없을것이였다.

허나 박위는 손을 툭툭 털며 극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정히 안아 일으켜주었다.

《어디 상하지나 않으셨소?》

극기는 단 한번의 타격에 쓰러진것이 조금 창피하기는 했으나 워낙 무관답게 속이 확 트인데다 솔직한 사내라 껄껄 웃으며 머리를 흔들어털었다.

《헛허허… 그만한 놀음에 상할리야 있소. 내 오늘 희떱게 놀다가 단단히 버릇을 배웠소그려, 헛허허…》

그날 저녁 박위는 룡호군량반들을 모두 자기의 처소로 데리고갔다.

풍성하지는 못하나 성의껏 차린 주안상이 나오자 박위는 량반들에게 일일이 술을 권하고나서 자기의 진속을 그대로 터놓았다.

《터놓고말하여 사내로 나서 술을 마시는게야 무슨 흠절이겠습니까.

하지만 병기를 잡고 나라를 보위하는 우리 무관들이 뚜렷한 명분도 없이 수십일동안 내처 술을 마신다는것은 옳은 일이 아닌줄 압니다.

그래가지고야 어떻게 맡은 군무를 정확히 실행할수 있으며 군영안의 군기는 또 어떻게 정연히 세울수 있겠습니까.

소장이 오늘 초면에 다소 어줍잖게 놀아댄것은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군기와 군풍을 옳게 세웠으면 하는 소원에서 그리한것이니 너그럽게 리해해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가지 좌중에 제의할것은 앞으로 신래를 하려거든 술이 아니라 오늘처럼 수박희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술을 장려하는 의미에서도 좋고 친교를 가까이하는 뜻에서도 좋으며 군기와 군풍을 세우는 의미에서도 좋을듯 합니다.》

《헛허허… 그거 참 뜻이 깊은 말씀이요. 워낙 우리 군대의 신래야 그렇게 돼야지요, 헛허…》

사람이 우둘렁거리기는 하나 뒤가 없는 김극기는 얼룩덜룩하게 고약을 바른 목덜미를 조심스레 쓸어만지며 시원스레 박위의 말을 받아주었다.

최랑장도 올롱한 눈을 반짝거리며 뾰족한 턱을 들까불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관은 예쁘게 생기신 중랑장께서 그렇게 수박희에 능하신줄은 정녕 몰랐소이다. 일후에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무관들은 이구동성으로 박위를 추어올렸으나 김종연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떡거릴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턱없이 자존심이 강한 김종연은 박위의 인품과 실력이 남달리 뛰여나다는것을 여실히 느낄수록 기분은 더욱 무거워났던것이였다.

그후 룡호군에는 신래라는 말과 관습이 차츰 사라져버리였다.…

박위는 불의라고 생각되는것은 비록 사소한것이라 할지라도 타협없이 도전해나서는 강건한 사내였다.

정의를 위한 일이라면 상대가 조정의 재상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룡호군의 상장군 김종연의 고맙지 않은 추천에 의해 김해부사로 내려간 박위는 1377년 5월 황산강(락동강하류)에 기여든 왜적선 50척을 일격에 함몰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다.

임금은 친히 박위를 개경에 불러올리여 전공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를 차려주었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여느때없이 너그러워진 임금은 부드러운 어조로

박위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김해부사의 날이니 그대가 원하는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풀어주겠노라. 그대의 가장 큰 소원이 무엇인지 어려워말고 말해보라.》

자나깨나 나라의 군력강화를 두고 마음쓰는 박위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기의 속생각을 그대로 펼쳐놓았다.

《황공하오나 신은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나라의 한 페단〈이것은 소신의 가장 큰 소원이기도 합니다.〉에 대해 아뢰겠습니다.

지금 전국도처에 널려있는 수천수만의 땡땡이중들은 산수 좋은 곳에 화려한 집을 짓고 살면서 해괴한 거짓말로 순박한 백성들을 미혹시키는 일만을 업으로 하고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큰 죄인데 중놈들은 절마다 수십수백의 노비와 수십리지경을 넘어서는 방대한 토지까지 가지고 제후장상들을 찜쪄먹을 부귀를 누리고있으니 이런 괴이한 죄상을 어찌 더이상 묻어둘수 있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하루빨리 땡땡이중들과 절간소속의 노비들은 군사로 박아넣고 사원의 토지와 비품은 여러 군영에 고루 나누어준다면 나라의 주요페단을 없애는 동시에 국고의 지출이 없이 전반적군력을 한층 강화할수 있으니 이는 실로 일거량득일줄 압니다.》

화색이 충천하던 임금의 옥안이 금시 흙빛으로 변했다.

그도 그럴것이 하루가 멀다하게 벌리는 잡다한 궁중행사때는 물론이요, 무슨 제사, 무슨 놀이때마다 의례히 상추쌈에 된장 곁들이듯 중들을 불러들이거나 절을 찾아가는 임금이였다.

상고해보면 불과 몇십년전인 충선왕시절에 충선왕은 매일 2천명의 중들에게 반승(중잔치)을 차려주는가 하면 닷새에 한번씩 만등회라 하여 1만등의 등불을 켜고 만명의 중들을 푸짐히 먹여주는 의식을 벌리면서 노상 중놈들과 어울려지냈었다.

지금 임금의 아버지 공민왕도 충선왕 못지 않은 불교광신자로서 사시장철 중들을 달고다니고 절들을 찾아다니였다.

지어 신돈이라는 교만방자한 중을 궁중의 스승으로 들여앉히고 나라의 정사를 통으로 그에게 맡기다싶이한적도 있었다.

이러한 왕가에서 태여난 임금에게 있어서 절과 중을 없애라는 박위의 소청은 선대임금들의 치적과 유풍에 대한 악의에 찬 시비중상인 동시에 오늘의 궁중행사들도 시급히 페절하라는 무엄하기 짝이 없는 훈시질로 들리였다.

임금은 너무도 기가 막히여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박위를 가리키기는 했으나 언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뒤에서 보면 금빛찬란한 왕관과 시누런 곤룡포를 흘려입은 지엄한 임금이지만 앞에서 보면 아직도 해맑은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10대의 소년인 우왕은 한참만에야 비린내나는 목청을 기운껏 내질렀다.

《천생 무식한 무관놈의 말본때로다.

나라의 록을 받는 신하로서 네 어찌 과인앞에서 그런 망발을 주어섬길수 있느뇨. 이봐라, 저눔을 당장 헌부에 나리여 엄히 치죄하도록 하라―》

따져보면 임금의 령이라는것은 그 어떤 리치나 론리에 준한 정치적인 견해인것이 아니라 성숙하지 못한 소년의 충동적인 기분의 반영에 불과했다.

임금의 령이 내리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선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듯 꼭같은 소리로 대답했다.

《지당합신 분부외다.》

임금의 령이라면 무턱대고 《지당하외다.》라는 말만을 입버릇처럼 뇌이는 대감들.

무턱대고 임금을 찬양하고 무턱대고 임금을 추종하여 임금에게 한껏 잘 보임으로써 벼슬자리를 영구히 고수하고 부귀영화를 길이 누리려는 권신들.

바로 이들의 《지당하외다.》라는 말 한마디때문에 국사의 백가지, 천가지가 공전, 역전을 하고 아까운 충신, 인재들이 소장, 류실되건만 나라님은 언제나 그 《지당하외다.》라는 말만을 듣고싶어한다.

결국 박위는 솔직하게 자기의 소원을 아뢰인 값으로 전공을 세운 장수로부터 임금의 뜻을 어긴 죄인으로 굴러떨어지였다.

누군가가 그린듯이 서있는 박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제라도 임금앞에 엎드려서 용서를 빌라는 뜻이였다.

허나 박위는 서글픈 기색을 띄운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용서를 빈단 말인가.

소원을 말하라기에 진정을 고한것뿐인데 정의를 아뢰고 주장한것이 어떻게 죄로 되는가?!

박위는 억울하게 벌을 당할지언정 속에 없는 용서를 빌어 구차하게 위기를 모면하고싶은 생각은 꼬물만큼도 없었다.

이때 백전로장 최영이 박위대신 우왕앞에 백발을 조아려박고 엎드렸다.

《전하! 박공으로 말하오면…》

박위의 뛰여난 군사적지략과 용맹, 사내다운 배짱과 의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최영은 진정을 다해 열변을 토하였다.

최영의 땀에 젖은 옆얼굴과 잔등을 바라보는 박위의 가슴은 쓰리였다.

고려안에서는 물론 외진 지방에까지 무적필승의 백전로장으로 널리 알려진 최영.

박위가 전공을 세울 때마다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던 최영.

그는 박위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군 했다.

《푸른 물감은 대쪽에서 뽑지만 대쪽보다 더 푸른 법이라더니… 공이야말로 고려군대의 으뜸가는 장수일세.》

선생보다 제자가 월등 낫다는 의미, 최영이 자신보다 박위가 더 훌륭하다는 뜻이였다.

그런 과찬을 받을 때마다 박위는 송구스럽다못해 죄스럽기까지 했다.

너무도 겸허하고 소탈한 최영이 열배, 백배로 쳐다보이였다.

헌데 그처럼 존경하여마지않는 백전로장이 보잘것없는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대신 땀을 철철 흘리며 절절히 용서를 빌고있었다.

박위는 최영을 와락 안아일으키고싶었다.

하지만 최영을 일으켜세운 다음 임금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역시 할말이 없었다.

스승에 대한 도의를 지키느라고 속에도 없는 용서를 빈다는것은 정의에 대한 우롱이요, 진실에 대한 롱락이 아니겠는가?!

박위는 최영에게 무등 죄스러웠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고 입은 열리지 않았다.

박위는 입술귀를 힘주어 짓물었다.

입술귀로 실오리같은 피줄기가 구불구불 흘러내리였다.

이 일이 있은 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박위를 《도의도 렴치도 없는 매정한 사람》, 《례의보다 자존심을 더 중히 여기는 거만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위는 그날의 자신의 처신을 두고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박위는 최영의 덕으로 간신히 처벌을 면할수 있었다.…

4

4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 기세좋게 내달리던 군마들은 군영앞에 이르자 푸푸 누런 게거품을 내불며 투덕투덕 걸음을 멈추었다.

말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실오리같은 느침들이 얼기설기 뒤얽히며 휘휘 날리였다.

박위가 안장에서 뛰여내리자 어느새 벌써 자기 말에서 내리여 짝귀앞에 서있던 여삼은 잽싸게 말끈을 받아쥐였다.

찌글사하게 박혀있는 기둥에 말끈을 빙빙 둘러감았다.

박위는 땀발이 지르르하게 내번진 볼편을 쓱쓱 문대기며 대문앞에서있는 느티나무밑으로 걸어갔다.

아스라하게 솟은 나무의 우듬지에서 이름모를 풀벌레들의 늘어빠진 울음소리가 한낮때의 정적을 째며 쓰르륵쓰르륵 쏟아져내리였다.

그 소리때문인지 군영안팎이 별스레 더 괴괴하게 느껴지였다.

아니, 실지로 굿해먹고난 집마당처럼 어수선하고 썰렁했다.

박위는 까닭없이 기분이 찜찜해났다.

예전같으면 짝귀의 뻐기는듯 한 투레질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대문이 활짝 열리고 부원수를 선두로 한 숱한 장교들이 쏟아져나왔을것이였다.

군영이 통채로 술렁거렸을것이다.

헌데 오늘은 군마들마다 투레질소리를 청청히 내건만 대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사위는 귀가 멍멍할 지경으로 괴자누룩했다. 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까부터 대문 한쪽귀에 붙어서서 불안한 눈길로 박위쪽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나배기파수군이 장창자루를 질질 끌며 허위허위 다가왔다.

《장군께서 그지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파수군은 깊숙이 허리를 꺾으며 여느때없이 떨리는 청으로 인사말을 뇌이는데 그것은 더욱 짙은 불안감을 몰아왔다. 허나 박위는 침착한 표정을 허물지 않은채 나직이 물었다.

《오냐. 헌데 군사들은 다 어디 가고 군영은 왜 이렇게 나간 집처럼 썰렁하냐?》

주름투성이좀상에 난색을 떠올린채 별로 처져내리지도 않은 통좁은 바지를 추썩거리던 파수군은 불식간에 울가망이 되여가지고 말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이까? 오늘 새벽에 그 육실할 놈의 왜구들이 죽촌에 달려들어 마을을 통채로 태워버렸소이다.》

《무엇이 어째?!》

박위는 파수군의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금시 뒤머리가 빠개져나가는듯 한 충격을 느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파수군은 우두두 진저리를 한번 떨고나서 계속하였다.

《소인은 꽁지대가리 없는 소문을 듣다보니 자상히 알지는 못하오나 오늘 새벽난에 죽촌의 백성들이 죽기도 많이 죽고 잡혀가기도 수다히 잡혀갔다고 하오이다.》

박위는 그만 숨길이 꾹 막혀버린듯싶었다. 잠시후에야 제 목소리같지 않은 거센 청을 터치였다.

《이놈아! 왜구가 군영의 코앞에까지 기여들어 그 지랄을 하도록 군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있었느냐? 모두들 늘비하게 누워서 코배기가 삐뚤어지도록 잠만 잤단 말이냐?!》

애매한 두꺼비라 장교들이 맞아야 할 떡돌에 제가 치운 파수군은 혼겁을 하여 더이상 대꾸를 못하고 비실비실 가재걸음을 놓았다.

어깨를 헐썩거리며 박위와 파수군을 갈마보던 여삼은 분노로 하여 빨갛게 달아오른 턱을 오천이쪽으로 돌리였다.

《대정형님, 이게 무슨 일이요? 그놈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옳소?

지금 당장 다그쳐가서 왜구의 뒤대가리를 바사놓아야 옳지 않겠소?》

흥분하면 말수가 더욱 불어나면서 좀체로 자기를 다잡지 못하는 여삼이였다.

허나 오천은 충격적인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말수가 줄어들고 생각이 깊어지였다.

여삼이 계곡을 휩쓸어내리는 흐름세찬 산골물이라면 오천은 드넓은 대지를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깊고 넓은 강이였다. 두툼한 입술을 이리저리 놀리며 제딴의 생각에 깊숙이 잠겨있던 오천은 분기에 젖은 눈으로 여삼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하였다.

《소견없는 소리 그만해라. 그게 어디 말주먹질로 바로잡을 일이냐?》

오천이 퉁을 주자 여삼은 더욱 등이 달아 열을 내였다.

《아니, 그럼 형님은 분하지도 않소? 왜구들이 우리 군영의 코앞에까지 기여들어 죽촌백성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별의별 란장을 다 쳤다는데 해가 기울도록 그렇게 생각만 하고 서있겠단 말이요?!》

《너 정말 진정하라는데 왜 그렇게 울뚝거리는거냐?!》

오천의 분기와 짜증기가 섞인 질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티나무밑에서 박위의 석쉼하게 갈린 청이 쩌렁 울리였다.

《모두들 말에 올라라!》

박위는 벌써 자기의 군마우에 올라 단단히 고삐를 틀어쥐고있었다.

군사들은 황급히 자기의 군마우에 힝힝 날아올랐다.

이어 군마들은 다시금 먼지구름을 뽀얗게 말아올리며 네굽을 놓아 달리였다.

박위의 황부루가 선두에 서서 행길쪽으로 나섰다.

박위는 쌍까풀이 진 둥그스름한 눈을 스르시 내리깔았다. 머리는 훅훅 달아오르고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쿵쿵 높뛰였다.

두서없는 생각이 마구 뇌리를 들쑤시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만사는 불측지변(모든 일은 예측할수없이 변한다는 뜻)이라더니 왜구가 군영앞에까지 달려들어 미친 지랄을 하고 돌아갈줄이야 누가 알았는가.

이야말로 전만고에 없을 변괴가 아니겠는가?!

우리 군영의 망신이요, 우리 군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헌데 죽촌에서 사상자도 많이 나고 잡혀간 사람도 적지 않다니 그마을 백성들의 고충과 고통은 얼마나 크리오. 가만있어라. 변을 당한 사람들중에 혹시 현중이와 리옥이도 끼워있는게 아닐가?)

불안스레 들뛰던 박위의 가슴속에서 돌멩이같은것이 툴렁 떨어져내리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들면서 사지가 나른해왔다.

…박위가 지방고을순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였다.

하루종일 배무이장에 나가있다가 늦게야 처소로 돌아온 박위는 저녁상을 물리자 곧 서탁에 마주앉아 병서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있어 소리없이 문이 열리더니 현중이가 들어섰다.

박위가 고개를 드니 현중은 밤새 편히 주무시라는 격식바른 밤인사를 하였다. 하고는 왜서인지 서성거리며 쉬이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밤인사를 올린 뒤면 의례히 작은 사랑으로 나가군 하던 현중이가 오늘은 이 웬일인가?!

의문을 느낀 박위가 다시 시선을 들자 현중은 나부시 꿇어앉더니 그리 크지 않은 꾸레미 하나를 펼쳐놓았다.

《아버님, 이건 마른 쑥을 넣어서 만든 요대입니다.

아버님께서 객지에 나가시여 습한 자리에라도 드시면 묵은 속탈이 도질듯 하여 마련한것입니다.》

박위는 대뜸 속이 뜨뜻해났다.

한창 장난에 정신이 팔려 돌아갈 어린 자식이 매사에 어른스럽게 처신하려드는것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어미없이 외로이 자라는 까닭에 남달리 올되여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했다.

잠시 아무말없이 더운 침을 삼키던 박위는 축축하게 젖은 청으로 꾸중 비슷한 소리를 꺼내놓았다.

《이애 현중아, 아버지걱정은 할것 없다. 너는 그저 열심히 글을 읽고 부지런히 무술을 닦으면 그만이다. 알겠느냐?》

현중은 스르시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질을 했다.

《아버님, 이건 소자가 만든것이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수일내에 지방순행을 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리옥누님이 제 손으로 햇쑥을 뜯어다 말리워서 만든것입니다.》

《리옥이가?!》

박위는 어망결에 현중의 말마디를 받아 뇌이였다.

왜서인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리옥이가 나를 위해 요대를 만들었다?!)

고맙게 생각되기 전에 왜서인지 슬며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리옥은 거제도에서 별장벼슬을 지내던 리일경의 외동딸이였다.

몇해전 박위가 경상도원수로 갓 부임되여왔을 때 일경은 제일먼저 배를 타고 군영에 찾아왔는데 그것이 두사람간의 첫상봉이였다.

일경은 그때 벌써 60나이가 불원한 로인이였다.

무관치고는 나이부터 넘고 처지는데 착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에는 병색까지 컴컴하게 비껴있었다.

박위는 첫상면에서 벌써 일경에게 실망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고리삭은 샌님같기도 하고 어리무던한 늙은이같기도 한 리일경이 지금껏 무관노릇을 해왔다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장차 커다란 섬 하나를 옳게 지켜낼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역시 전혀 생기지 않았다.

허전하고 서운하고 서먹서먹하고…

일경을 처음으로 만난 박위의 느낌은 이것이 전부였다.

몇달후 박위는 거제도의 방비정형을 료해하기 위해 섬으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리일경의 일이 마음놓이지 않았던것이였다. 헌데 정작 섬에 가보니 거제도의 군사일은 애초의 짐작과는 판다르게 펼쳐져있었다.

무너진 곳 하나없이 든든하게 수축되여있는 성곽, 하나같이 다듬어가꾼듯 칠칠한 군사들, 흠잡을데없이 정연한 경비체계와 비상동원체계…

미비하거나 허술한 구석은 한군데도 없었다.

박위는 만족하기 전에 어벙벙해났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외형에 준하여 평가한다는것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인가 하는 자기반성과 죄책감이 아프게 속을 비틀었다.

점심녘이 되자 박위는 일경이가 잡아끄는대로 그의 집에 갔는데 거기서 또 한번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구기자덤불에 묻혀있는 대나무울타리, 무성한 참대숲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서있는 아담한 초가집…

겉모양처럼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사랑방.

방안의 시렁우에는 크고작은 화살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벽면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활촉이 박혔던 자리가 벌둥지처럼 송송 뚫려있었다.

일경은 몸이 불편하거나 눈비가 내릴 때면 집안에서도 작은 화살을 가지고 활쏘기연습을 하는 모양이였다.

어디 가서도 본적이 없는 방안의 류다른 풍경앞에서 박위는 한참이나 할바를 잊고 굳어져있었다.

일경에 대한 그윽한 존경심이 따갑게 타래쳐올랐다.

요즘 량반들은 거개가 한쪼각의 벼슬이라도 얻어걸치면 천량재산을 뭉그려들이고 집안팎을 번듯하게 꾸리느라고 정신없이 뛰여다닌다. 그런데 리일경은 어떠한가. 다 실그러져가는 자기의 살림집마저 아늑한 생활의 요람이 아니라 하나의 격렬한 군사훈련장으로 꾸려놓았다.

그나 그뿐인가.

로쇠하고 병약한 그가 얼마나 애면글면했으면 섬안의 방비상태와 동원태세가 그리도 빈틈없이 든든하게 꾸려졌겠는가.

일경은 진정 심산에 홀로 핀 향기로운 꽃송이마냥 누가 보지도 알아주지도 않건만 자기의 심신을 깡그리 바치여 나라의 한 전구를 믿음직하게 지켜가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진짜배기 무관이였다.

이런 사람을 미타하고 허술하게까지 여긴 자기가 못내 죄스러웠다.

누구앞에서나 자기의 진심을 가리울줄 모르는 박위는 영문을 모르는 일경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제서야 박위의 내심을 알게 된 일경은 제쪽에서 도리여 옹색해하며 자기의 소박한 인생지론을 간명하게 풀이했다.

《소관은 이제 늙은 말 한가지로 기력도 빠지고 정신도 쇠미해졌습니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전복을 입고 이 땅을 지키자고 합니다.

늙은 말이 만리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즉 소관은 늙은 말이 만리를 가듯 생의 마감날까지 꾸준히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전력을 다하렵니다.

실상 누가 보든말든 병기를 잡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것이 우리 무관들의 사는 멋이 아니겠습니까.

사치나 부귀같은것은 제 갈데로 가라지요. 헛허…》

박위는 일경과 겨우 두번째로 만나지만 그의 인간적인 전모를 확연히 헤아려 짐작할수 있었다.

일경은 진정 성실하고 량심적인 무관이였다. 박위 자기와는 성격도 판다르고 지식정도도, 나이와 군무년한도 엄청나게 차이나지만 병약한 나배기 무관인 리일경이 스승이상으로 쳐다보이였다.

그후 박위는 리일경을 다시 볼수 없었다.

이태전 봄 어느날.

5백도 넘는 왜구의 대부대가 아침나절의 짙은 안개발을 타고 불의에 거제도를 공격하였다.

어느때나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있던 거제섬의 군사들은 즉시 반격을 가하였다.

치렬한 공방전은 아침부터 중낮까지 계속되였다.

성밖의 왜구들속에서도 수백의 사상자가 나고 성안의 거제군사들도 반수이상 쓰러지였다.

공격을 시작할 때부터 성을 허물기 위해 지랄발광을 하던 왜구들은 마침내 뒤쪽 성 한귀퉁이를 헐어내였다.

화살에 찔리고 불덩이에 끄슬리여 온통 피자박이 되여가지고도 정열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던 일경은 성이 허물어졌다는 급보를 받자 급히 뒤쪽 성으로 달려갔다.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왜구들이 불개미떼처럼 밀려들고있었다.

최후를 예감한 일경은 더없이 침착한 어조로 남은 화약을 전부 뒤쪽 성으로 날라올것을 명하였다.

그윽한 웃음기같은것이 비낀 얼굴로 성안의 정경을 둘러보던 일경은 제 손으로 화약통에 불을 달았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일경은 물론 새까맣게 밀려들던 수십명의 왜구도 재가루가 되여 하늘가로 흩어졌다.

그때 마침 군영 군사들을 이끌고 거제도 앞바다의 배길을 순회하던 박위는 요란한 폭음이 들려오자 즉시 섬으로 방향을 돌리였다.

상륙하자바람 무자비한 소탕전이 벌어지였다.

석양이 불탈무렵 박위네들은 거제섬에 올랐던 왜구들을 남김없이 전부 잡아치웠다.

거제도의 하늘에도 피가 흐르고 거제도의 땅에도 피가 흘렀다.

싸움은 이겼으나 승리는 너무도 가슴아픈 피의 대가였다.

뭐니뭐니해도 그처럼 진실하고 열정적인 리일경을 잃은것이 뼈가 아프도록 괴로왔다.

박위는 거제도에서 선뜻 발을 뗄수가 없었다.

하여 며칠동안 섬에 머무르면서 전장을 수습하는 한편 전사한 군사들의 장례를 성의껏 치르어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으나 끝끝내 고집을 부리여 고인의 근친자만이 입을수 있다는 회복(제일 거칠고 굵은 베로 지은 상복으로서 가장 많은 슬픔을 나타낸다는 의미)을 입고 상례를 주관하던 그 나날 박위는 처음으로 리옥을 알게 되였다.

참대지팽이를 짚고 상주노릇을 하는 처녀(리일경에게는 아들이 없었다.)의 청초한 모습을 대하는 첫 순간 박위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전혀 처음 보는 처녀건만 너무도 낯이 익었다. 깨끗하고 그윽한 생김새도, 조용하고 현숙한 행동거지도 자기의 안해 최씨와 한판에 찍어내기라도 한것처럼 방불했다.

최씨와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시원스럽게 쑥 빠진 처녀의 하얀 목언저리에 팥알만 한 기미가 박혀있는것이였다.

(환생이란 말은 많이 들었어도 여적 실체를 본적은 없었는데 드디여 그 사람의 환생을 보는것인가?!)

허망한 생각인줄 알면서도 허망하게 스쳐버리고싶지 않았다.

뼈저린 아픔우에 또 하나의 고통이 겹쌓이였다.

하여 박위는 되도록이면 리옥이와 마주서는 일을 피하였다.

7일제까지 보아주고나서 서둘러 거제섬을 떠났다.

하지만 영용하게 싸우다 전사한 늙은 전우의 외동딸이요, 거제섬방어전때 적지 않은 왜구를 쏘아잡은 녀무사인 리옥의 운명을 두고 무심할수는 없었다.

일경의 돐제가 지나자 박위는 군영의 군사들을 파하여 리옥을 뭍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하고는 군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실한 어촌마을인 죽촌에 리옥의 살림집을 지어주고 각색 살림도구와 식량을 보내주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따금 현중을 죽촌에 보내여 며칠동안 처녀와 함께 지내게 하는가 하면 명절이 오거나 빛 다른 음식이 생길 때면 리옥을 친히 군영에 불러들이였다.

박위가 각근히 살펴줄수록 리옥의 가슴에도 박위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의 정이 층층 두터워졌다.

요즘에 이르러 리옥은 박위와 현중을 한집안식구처럼 친근히 여길뿐아니라 그들을 위해 제나름껏 성의를 다하고있었다.

하지만 박위는 리옥이가 이처럼 자기의 속탈까지 념려하여 정성껏 요대까지 만들어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별치 않은듯 하나 스쳐지날수 없는 이 요대를 그 어떤 은혜에 보답하고싶어하는 처녀의 순수한 정성으로만 생각해야 하겠는가?…

…리옥의 따뜻한 마음이 슴배여있는 요대를 매만지며 추억의 나날을 더듬어나가던 박위는 문득 보라빛요대천이 무척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들자 저도 모르는새 눈에 힘을 주었다.

보라빛비단천은 분명 어느땐가 자기가 리옥에게 보내준것이였다.

올해 정초 조정에서는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박위에게 상을 내리였는데 그속에는 맛좋은 계피술과 함께 여러가지 색고운 비단옷감이 들어있었다.

박위는 사실 생활면에서는 매우 투미한편이였으나 오래전부터 과년한 처녀인 리옥의 장래일을 위해 무슨 마련이든 차근차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만은 가지고있었다.

그 생각은 언제인가 누구에게서 요즘 행세하는 집 딸들은 시집을 갈때 저고리 삼작이라 하여 초록저고리, 노랑저고리, 보라저고리를 갖추어입고 또 치마삼작이라 하여 웃치마, 속치마, 무지기를 겹겹으로 떨쳐입는다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 더욱 굳어지였다.

허나 재산이라고는 칼 한자루밖에 없는 박위로서 그 모든 값진 옷감을 고루 마련한다는것은 너무도 아름찬 일이였다.

그러던차에 희귀한 옷감이 여러벌 생기게 되자 박위는 무슨 큰 소원이라도 성취된듯이 기뻐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리옥에게 보내주었다.

헌데 뜻밖에도 박위의 사려깊은 마음이 담겨진 그 옷감중에서 한토막이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온것이였다.

고마운 생각은 차츰 숯불처럼 사위여들고 서운한 마음이 아릿하게 우러났다.

(그러니 리옥은 내가 보내준 옷감을 전부 이런 식으로 소모하려는것인가?

며칠전에 현중이한테도 무관복을 한벌 지어주겠다고 했다던데 그것 역시 내가 보내준 천으로 만들 작정일수 있으렷다.

허― 나로서는 서운하기 이를데 없지만 처녀의 마음은 얼마나 갸륵한고?!

지금 한창 얼굴단장, 몸단장에 왼심을 쓸 나이의 처녀가 어쩜 이렇게 웅심깊을수 있을고?!…)

다시금 훈훈해나는 가슴을 안고 요대를 쓸어보던 박위는 문득 요대끝머리에 끼워있는 종이쪼박을 띄워보자 서둘러 그것을 집어들었다.

무심결에 종이쪼박을 펼치니 거기에는 리옥의 단정한 글씨가 빼곡이 박혀있었다.

《현중 아버님, 소녀의 가슴에 그냥 묻어둘수 없는 사연이 생기여 외람된줄 알면서도 이렇게 서툴기 그지없는 글월을 올립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생겼기에 엎디면 코닿을데 있으면서 이런 이상야릇한 편지를 보낸단 말인고?!

박위는 얄팍한 호기심과 가느다란 불안을 느끼며 글줄을 더듬어내리였다.

《…사실 말이지 현중이는 소녀에게 있어서 마음과 정을 나눌수 있는 가장 가까운 혈붙이가 아닐수 없습니다.

정말 소녀는 현중을 친동생이상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금껏 변변치 못한 재주로나마 그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면서 할수 있는껏 성의를 다하고있습니다.

헌데 요즘에 이르러 현중은 소녀의 성의에서 어머니의 정같은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어머니의 사랑이 정녕 그리워선지 때없이 저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리까?!

너무도 귀에 설은 부름을 그냥 듣기도 섬찍하고 만류하기도 수월치 않아 수일을 모대기던 소녀는 비로소 이 일이 소녀의 결심 하나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확연히 깨닫게 되였습니다.》

박위는 와뜰 놀라 머리를 들었다. 종이장을 쥔 손이 중풍이라도 만난듯 부들부들 떨리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러니 리옥은 나에게 한마디 대답으로 두가지 일을 결정하라는 뜻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변사가 어디 있을고.

리옥이 정녕 이리도 도담한 처녀였는가?!

박위는 창호지를 얼비치며 들어온 희푸른 달빛에 휘감긴채 돌상처럼 굳어져버리였다.

사색은 하냥 리옥에게로 달리였다.

리옥은 올해 들어 스물일곱살, 과년해도 지나치게 과년한 처녀였다.

하지만 그는 필경 린근 동네 처녀들과는 겨룰터수가 안될만큼 인물도 절등하고 성품도 우아했다.

거제도에 살 때부터 제노라고 꺼떡거리는 량반댁도령들은 쥐며느리 새우아재 사모하듯 가당치도 않은 사랑에 빠지여 리옥의 주위를 부절히 감돌았다.

혼담을 싸안은 매파들이 문돌쩌귀에 불이 일도록 리옥의 집을 나들었다.

하지만 매파들은 번마다 퇴를 맞고 뿌옇게 밀려나군 했다.

그도그럴것이 무관의 가정에서 태여나 결곡한 아버지의 신칙과 초달을 받으며 결바르게 자라난 처녀는 자기의 부풀어오른 가슴이 사랑을 속삭이는 첫 순간부터 뜻이 높고 기개가 헌헌한 무관총각을 배우자로 택하리라 굳게 결심하고있었다.

헌데 안팎으로 훌륭한 총각이 어디 그리 흔하랴.

한해, 두해 무정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열성좋고 구변좋은 매파들도 하나, 둘 기가 진하여 리옥이라 하면 들떼놓고 홰홰 손을 내저었다.

허나 리옥은 불안과 애수에 시달릴망정 아무에게나 허턱 자기를 내던지려 하지 않았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 높이 세운 뜻도 없고 사내다운 열정과 의지도 없는 범박한 필부에게 한생의 운명을 기탁한다는것은 너무도 허망한 일이였다.

그러던중 거제도전투가 터지고 아버지의 희생이 잇달리였으며 그로하여 박위를 가까이 알게 되였다.

리옥은 이미 아버지를 통해 박위라는 예쁘게 생긴 장수가 뜻이 높고 무술에 능하며 배짱과 인정도 사내싸다는 소리를 귀에 절도록 들어왔었다.

소문은 과연 헛된것이 아니였다.

죽촌에 나온 뒤에 리옥은 박위의 인간됨을 자기의 눈과 페부로 직접 확인할수 있었다.

리옥은 비로소 자기가 그처럼 애타게 찾고 부르던 진정한 사내가 바로 자기의 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있음을 커다란 환희속에서 발견하였다.

사랑의 불길은 고요히 솟아올랐다. 그 불길은 날이 갈수록 걷잡을수없이 황황 타번지였다.

마침내 폭발의 순간은 다닥치고야말았다.

며칠전 리옥이 현중에게 무관복을 지어주기 위해 한창 옷감을 마르고있을 때였다.

그때 마침 집에 나와있던 현중은 한참이나 리옥을 여겨보던 끝에 물기어린 청으로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꺼내놓았다.

《지금껏 어머니처럼 각근한 사랑과 정성을 베풀어주시는분을 누님이라 불러온것은 너무도 경홀한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부터는 어머님이라 부르겠사오니 사양말고 허락해주십시오.》

《?!》

철없는 소년의 말이라고 흘려듣기에는 너무도 곡진한 현중의 진정앞에서 리옥은 당황해났다.

허나 리옥은 곧 현중의 간절한 소청이 정신상의 부담이 아니라 무한한 행복과 잇닿아있음을 깨달을수 있었다.

기쁨의 눈물이 샘솟아올랐다.

사랑의 파도가 키를 솟구었다.

며칠을 두고 바재이던 리옥은 마침내 한장 종이장우에 자기의 불붙는 가슴을 통으로 쏟아놓았다.

…최씨가 비명횡사를 당한 뒤 박위는 지금껏 그 어떤 녀자도 가까이해본적이 없었다.

최칠석과 같은 절친한 친지들은 만날 때마다 재취를 해야 한다고 못견디게 쑤셔댔지만 박위는 매양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에게는 이미 사랑의 의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이 깡그리 사라진듯싶었다.

아니, 지금같은 때 사랑이나 재취를 론한다는것자체가 안일과 해이의 표현이라고 생각되였다.

헌데 이밤 리옥의 비밀한 편지에서 은페된 사랑의 고백 같은것을 감득하게 되자 지금껏 깊은 잠에 들었던 박위의 가슴은 알릴듯말듯 박동을 높이였다.

자기에게도 련정이라는 감정상의 한뿌리가 의연히 존재하고있음을 기쁨과 괴로움속에서 의식할수 있었다.

허나 리옥의 사랑을 아무 꺼림없이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무질서하게 들뛰던 가슴이 적히 가라앉자 박위의 뇌리속으로는 엄연한 생활의 론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다. 태여나 지금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외롭게 자라난 현중에게 친어머니와 생김새도 꼭같고 마음씨나 행동거지조차 방불한 새 어머니가 생긴다는것은 기쁜 일이였다.

상처한 뒤 오늘까지 녀인의 살뜰한 정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한 자기에게 아름답고 젊은 녀인의 봄볕같은 사랑이 비쳐든다는것도 행복한 일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무턱대고 그러안아서는 안된다.

마땅히 인륜과 도의에 비추어보고 가려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놓고보면 리옥은 응당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젊은 사내에게 장래를 기탁해야 옳을것이였다.

자기 역시 왜구의 출몰이 그칠새 없는 이 세월 각처에 숱한 군사일을 번다하게 벌려놓은 이때 한 녀자와의 사랑에 몸적실수 없었다.

결심은 명백했으나 왜서인지 자기의 뜻을 리옥에게 알려야겠다는 용단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리옥의 요청(물론 우회적인것이라 할지라도)을 즉시로 거절한다

는것은 리옥에게도 그리고 현중에게도 죄가 되는 일같았다.

자신으로서도 어딘가 애석하게 생각되였다.

하여 박위는 환희로우면서도 난중한 운명의 숙제, 한순간에 수월히 풀어내칠수 없는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생활의 수수께끼를 안은채 지방순행의 길에 올랐었다.…

…군영 앞거리를 벗어난 군마의 행렬은 초여름의 따거운 해빛을 들쓴채 고즈넉한 정적에 깔려있는 앞마을 행길에 들어섰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야단스러운 말발굽소리에 또 어떤 변이 생겼는가싶어 이 집, 저 집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불안과 의혹이 비낀 까무잡잡한 얼굴들이 집집의 대나무울타리우에, 혹은 꽁꽁 닫아맨 삽짝문우에 조롱박열리듯 오롱조롱 매달리였다.

행길가 우물터에서 드륵 드르륵 다기차게 용드레줄을 당기던 구서방의 딸 취금이가 처음에는 군마의 행렬에 놀라고 다음에는 저같은것은 본체도 않고 지나치는 오천의 전에없이 험한 얼굴에 기가 질리여 다리던 줄을 툴렁 놓아버리였다.

번들번들한 물미역이 그득 담긴 함지박을 안고 허위허위 행길에 들어서던 꼬부랑로파 하나가 돌연히 다가서는 말떼를 띄여보자 혼겁을 하여 뒤로 나동그라지였다.

솔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지게를 지고 건들건들 마주오던 초군아이는 길을 피하느라고 헤덤비던 끝에 길녘에 파놓은 진흙구뎅이속에 곤두박히였다.

대나무울타리밑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던 동네개들이 후덕후덕 뛰쳐일어나 앞발을 벋디디고 짖어댔다.

병아리떼를 거느리고 유유히 산책을 하던 어미닭들이 꼬꼬댁 꼬꼬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행길을 가로질러 내달리였다.

박위는 지그시 눈길을 내리깔았다.

가슴은 숨가쁘게 옥죄여들었다.

(아, 왜구들의 때없는 침노와 악행으로 하여 백성들은 물론이요 짐승들까지도 속이 버들잎처럼 졸아들어가지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하고보면 이 나라에 과연 무관다운 무관이 있다고 말할수 있겠느뇨?!

정녕 수치로다, 망신이로다.)

박위는 지금껏 포악한 왜구들을 꼼짝 못하게 잡죄지 못한 자신이 나라와 백성앞에 더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박위의 뒤를 따르는 오천과 여삼을 비롯한 군사들의 심정도 박위와 크게 다를바 없었다.

5

5

 

박위는 이를 악문채 페허로 변한 죽촌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동구밖 등성이우에 굳어져있었다.

성벽처럼 동네를 둘러쌌던 무성한 대나무숲도, 올망졸망하게 박혀있던 수십채의 정갈한 초가마가리도 거의다 타버린듯 거칠것없이 번번한 마을터에서는 시꺼먼 연기타래와 뽀얀 재가루가 어지럽게 밀려다니고있었다.

천타는 내, 나무타는 내, 짚새기 타는 내…

별의별 역스러운 내가 코가 아리도록 풍겨왔다.

아까부터 군영군사들과 린근 동네 백성들은 애처로운 비명을 흘리는 부상자들과 시체들을 등성이쪽으로 날라올리고있었다.

등성이우의 펑퍼짐한 공지에는 벌써 숯등걸처럼 타고 끄슬리여 보기에도 끔찍한 시체들이 줄느른히 놓여있는데 거기서는 사람들의 애절한 울음소리와 넉두리소리가 귀따갑게 울려왔다.

한식경이나 칼자루를 움켜쥔 손을 후들후들 떨며 사위를 두릿거리던 박위는 자기도 모르는새 스적스적 공지쪽으로 걸음을 떼놓았다.

맨땅우에 퍼더앉아 초점없는 시선으로 멀리 어딘가를 바라보며 끅끅 마른 울음을 터치고있는 어떤 로인이 제일먼저 눈에 걸리였다.

로인은 박위가 다가서는줄도 모르고 도간도간 넉두리를 늘어놓는데 그의 무릎우에는 숯등걸처럼 타버린 잔약한 소녀의 시체가 놓여있었다.

로인의 울음소리, 넉두리소리는 박위의 귀가 아니라 심장을 꾹꾹 들쑤시였다.

《언년아, 네 아비어미도 다 왜구의 칼에 찔려 비명횡사를 했는데 네년마저 이렇게 처참하게 죽으면 이 할아비는 어쩌란 말이냐?!

어허이구, 저 악귀같은 왜구들을 어떻게 쳐죽여야 분풀이가 될가보냐. 어허이구…》

얼추 내리드리웠던 로인의 얼굴이 서서히 다시 들리였다.

그제서야 박위는 그가 저대를 하도 잘 불어 린근동네에까지 《저대로인》으로 알려진 늙은이임을 알아볼수 있었다.

언제나 술이라도 마신것처럼 불깃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담고 돌아가던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로인.

헌데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모습이라고는 꼬물만큼도 찾아볼수 없었다.

왜구들은 로인의 유일무이한 재산이며 희망이며 행복인 손녀딸을 이렇다할 목적도 없이 그저 심심풀이로 등허리를 찔러 불속에 처넣은것이였다.

세상에 홀로 남은 저대로인은 이제 무엇을 여생의 지주로 삼고 살아가겠는가. 어찌어찌하여 생활의 터전은 다시 회복한다 해도 예전의 그 남다른 흥과 기분은 어떻게 되찾을수 있겠는가?…

박위의 가슴은 예리한 이발에 깨물리기라도 한듯 모질게 아파났다.

욱신욱신 들쑤시는 뇌리속으로는 지방순행을 떠나기 며칠전에 이 고장을 찾아왔던 일이 어제런듯 생생히 밟혀왔다.

그날 중낮때 죽촌에 나와 화살재로 쓸 대나무들을 돌아보고난 박위는 리옥의 집에 들려 살림형편을 살펴보고나서 마을을 나섰다.

사위는 그리 어둡지 않은데 동천에는 벌써 열나흘 밝은 달이 두둥실 떠있었다.

그리 바쁘지 않은 걸음이라 천천히 말을 몰아 동구밖에 이르니 길옆의 등성이우에서 구성진 저대소리가 흘러내리였다.

오래만에 들어보는 저대소리는 은근히 박위의 마음을 끌어당기였다.

말에서 내린 박위는 교교한 달빛을 밟으며 슬밋슬밋 등성이우로 올랐다.

뜻밖에도 등성이우의 풀밭에는 숱한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앉았는데 그 복판에는 다발좋은 흰 수염을 가슴노리까지 내리드리운 어떤 로인이 올방자를 고이고앉아 멋스럽게 턱을 들까불며 저대를 불고있었다.

박위는 달그림자를 끌며 천천히 사람들께로 다가갔다.

박위가 다가온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저대를 불던 로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삼스레 의관을 정제하고 박위앞으로 다가왔다.

두손을 배허벅에 올려 읍을 하고나서 깊숙이 허리를 꺾었다.

《장군께서 이렇게 루추하기 그지없는 우리 골에 오시여 미거한 백성들까지 찾아주시니 영광이오이다.》

로인의 하도 격식바른 인사말에 다소 거북해진 박위는 제꺽 화제를 돌리였다.

《로인장, 오늘은 명절도 아닌데 무슨 일로 이렇게 동네사람들이 모여앉아 흥을 돋구고있소?》

로인은 빙그레 웃음을 띄우며 흥뜬 어조로 대답했다.

《예, 왜구들이 이 땅에 얼씬 못하도록 우리들을 지켜주시는 장군께서 죽촌마을에 래림하신 오늘이야말로 소인들에게는 큰 명절이올시다.》

《아니, 그건 어떻게 하는 말이요?》

박위는 어벙벙해났다.

허나 로인은 여전히 웃음기를 띄우고 손세까지 써가며 계속했다.

《장군께서 손수 검을 드시고 바다가에 서계시니 이 고장에는 왜구들이 얼씬도 못하고있지 않소이까.

장군의 그 수고와 마음이 하도 고마워 소인들은 변변치 못한 음식이나마 성의껏 마련해가지고 이렇게 모였소이다.

장군께서 별장댁아씨의 집을 나서시거든 술 한잔이라도 올리려고…》

박위는 로인의 말허리를 꺾으며 청을 높이였다.

《그러니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있었단 말이요?》

《그렇소이다.》

《허어― 이런 변 봤나?!》

박위는 허허탄식같은 소리를 흘리며 어느결에 자기를 빼곡이 에워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문득 리옥의 집을 나설 때 황부루의 옆허리를 나는듯이 째고 지나가던 밤톨만 한 애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그놈이 리옥의 집앞을 지키고있다가 자기가 집을 나서자 바람같이 달려와 로인에게 선통을 한 모양이였다. 박위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해 늦도록 목을 지키고 기다린 이 고장 사람들의 성의가 고마왔다.

그들의 분에 넘치는 기대와 믿음도 감사했다.

그것이 어느 정도 송구스럽기도 했다.

박위는 이미 저대로인의 인생경력을 소상히 알고있었다.

그는 본시 전라도 어느 해변가마을에 살았는데 어부노릇을 하던 아들과 해녀노릇을 하던 며느리가 바다에 나갔다가 한날한시에 왜구들의 죽창에 찔려죽은 뒤 하나밖에 없는 손녀를 끌고 이 고장에 온 사람이였다.

그는 왜구들이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박위장군의 군영가까이에 오면 손녀딸이라도 등탈없이 키울수 있다고 생각한것이였다.

그의 타산은 틀리지 않았다.

한해가 가고 두해가 흘러도 왜구들은 죽촌어방에 얼씬도 못했다. 살재미도 나고 옛적의 흥도 살아올랐다.

그럴수록 죽촌의 평화를 철벽으로 지켜주는 박위와 군영군사들이 무등 고마왔다.

무엇으로든 그들에게 인사를 차리고싶었다.

하여 그는 박위가 모처럼 마을에 찾아오자 기회를 놓칠세라 동네사람들을 휘동하여가지고 소박하게나마 정성껏 음식마련을 한것이였다.…

박위는 그들의 심정이 십분 리해되였으나 그들의 성의를 받아들이자니 미안쩍기도 하고 거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박한 백성들의 곡진한 성의와 소청을 마구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박위는 로인네들이 이끄는대로 돗자리우에 마련해놓은 주안상앞에 마주앉았다.

그들이 권하는대로 술잔을 받아들었다.

박위가 사양없이 술을 마시자 사람들은 무슨 큰 은혜라도 입은듯이 감지덕지해하며 어떻게 하나 박위를 기쁘게 해주려고 저저마다 수선을 떨었다.

연방 술을 권하고 새삼스레 인사말도 올리던 저대로인은 문득 등뒤에서 감도는 계집애의 손을 잡아끌어 박위앞에 세워놓았다.

자못 무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년이 바로 전라도 바다가 문암촌에서 애비에미를 다 잃은 소인의 손녀딸이올시다. 비록 초년에 부모를 잃고 외로이 자라기는 하오나 장군의 하해같은 덕으로 요즘은 아무 걱정없이 편히 지내고있소이다.

이애 언년아, 어서 장군께 큰절을 올려라.》

초롱초롱한 눈으로 로인과 박위를 번갈아 바라보던 언년은 붕어처럼 입을 나불거리였다.

《장군께서 내내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우리 고을에 계시면서 백성들을 잘 지켜주시기 바라나이다.》

이미 저대로인이 인사말을 준비시켰댔는지 언년은 제법 그럴사한 인사말을 숨 한번 톺지 않고 줄줄 내리엮었다.

《나어린 년이 여간 여돌차지 않구려. 그래그래, 네 청대로 내 오래오래 이 고을에 있으마. 헛허허…》

박위는 언년이와 사람들을 둘러보며 껄껄 웃었으나 가슴은 더욱 후더워났다.

이어 저대로인은 박위의 건강과 무공을 축하하여 한곡조 불어 올리겠노라며 대나무로 만든 저대를 들어올리였다.

희푸른 달빛에 한껏 젖은 여름의 저녁하늘로 구성진 저대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지였다.

처음에는 만경창파가 밀려오는듯 근감한 소리가 울리더니 어느결에 파도소리같은것은 슬며시 사라져버리였다.

파아란 하늘가에서 꽃구름이 피여나는듯, 우거진 숲속에서 새들이 우짖는듯 맑고도 청쾌한 음조가 굴러나왔다.

곡조는 다시 바뀌여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감격에 겨워 환성을 터치며 설레는듯 한 격동적인 음향이 흘러나왔다.

여겨들으면 분명 하나의 생활적인 줄거리를 가진 곡조였으나 박위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음악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자기의 격발된 마음탓인지 곡조에는 필경 이 고을 군사들에 대한 백성들의 고마움의 노래, 래일에 대한 당부의 의미, 언제나 군사들과 뜻을 같이할 의지가 슴배여있는듯싶었다.

박위는 힘주어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허공중에 높이 달린 달은 눈이 시도록 밝았다.

달빛에 젖은 대나무숲도 사람들도 더없이 아름다왔다.

그보다는 이 나라 백성들의 깨끗하고 절절한 마음, 소박하고 열렬한 심정이 더더욱 아름답게 마쳐왔다.

정녕 생각도 많아지고 맹세도 깊어지는 잊을수 없는 밤이였다.…

…칼자루를 단단히 움켜쥔채 추억의 갈피를 뒤번지던 박위는 숫제눈을 꾹 감아버리였다.

갈비뼈가 우직우직 조여드는듯 한 모진 아픔이 전신에 동통같은것을 불러일으키며 몰밀려들었다.

전신의 피가 발밑으로 새버린듯 한 강한 허탈감도 느껴졌다.

(아, 내 이제 무슨 낯으로 이 사람들앞에 나선단 말인가?!…

나에게 그리도 또랑또랑한 음조로 감사의 인사말을 올리던 그날의 여돌찬 계집애는 숯덩이가 되여 나딩굴고있다.

나에게 보다 큰 무공을 축하하여 저대를 불어주던 그날의 유쾌한 저대로인은 슬픔에 잠겨 오열을 터치고있다.

나에게 지성으로 술을 권하고 감사를 드리던 그날의 마음착한 동네사람들은 반수이상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사람들조차 절망과 슬픔, 아픔과 분노에 싸이여 그날의 명랑하고 쾌활하던 기색은 찾아볼수 없다.

아, 정녕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연해 거친 숨을 내불며 말뚝처럼 굳어져있던 박위는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황망히 저대로인의 곁에서 물러섰다. 허나 몇걸음 나가지 못하여 또다시 가슴저린 광경과 맞부딪치였다.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밑에 산발한 어떤 녀인이 퍼더앉아 이미 죽은 아이에게 젖을 물린채 연방 아이를 들척거리는데 보매 녀인은 반정신이 나간것이 분명했다. 그는 박위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개개 풀어진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보며 쉬임없이 중얼거렸다.

《백동아, 어서 젖먹어라. 어서. 이 소견없는 어미가 건너마을 피서방네 집에 잔치일을 봐주느라고 밤새 나가있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느냐. 어서 먹어라. 응, 어서. 그런데 네 할머니와 네 아비는 어딜가구 너 혼자 먼지투성이뜨락에서 돌멩이처럼 뒹굴고있었느냐. 응, 백동아.》

박위는 황급히 백동 어미의 곁을 지나쳐버리였다.

박위는 몇걸음 못 나가서 다시금 우뚝 굳어지였다. 웬 젊은 사내가 펑퍼짐한 바위우에 죽은 녀인을 눕혀놓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직이 웅얼거리고있었다.

《이 사람아, 이제는 그만 눈을 뜨고 일어나게나. 고들이가 왔어.

임자 지아비가 왔단 말이여. 임자의 황달병에 민물고기가 약이라기에 황산강에 밤고기사냥을 나갔었는데 그새에 이렇게 왜구의 칼에 란탕이 되였으니 아, 이 일을 어쩌면 좋소?!

이제는 정말 임자가 이세상사람이 아니란 말이요? 어허이구!…》

박위는 무엇에 다쫓기기라도 하듯 거의 반달음을 치여 등성이를 내리였다.

이렇다할 작정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놓아 옛 마을터에 들어섰다.

가슴은 그냥 칼로 에이는듯 쓰리고 아리였다. 수치감과 분노는 기름을 들쓴 불길마냥 머리끝까지 확확 치달아올랐다. 참으로 섬나라 왜구들은 강도질을 해도 제일로 더럽게 하는 천하의 악한들이요, 도적질을 해도 비길데없이 너절하게 하는 세상에 다시 없는 추물들이였다.

왜구들은 어느때든 인가에 달려들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부터 죽인다.

철퇴로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죽이고 화살로 쏘아죽이고 불로 태워죽이고…

무자비한 살륙전을 끝낸 뒤에는 로략질을 시작하는데 쌀이든 천이든 재물이라고 생긴것은 비자루로 쓸어내듯 반반히 털어낸다.

그다음엔 영낙없이 불을 싸지른다.

집과 허청칸, 장독대와 울타리, 지어 마을주변의 논과 밭, 숲까지도 말짱 태워버린다.

하여 왜구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의 씨가 마르고 짐승의 종자가 사라진다. 기름진 농토는 황무지로 변하고 무성한 숲은 번대숭이로 변한다.

이즈막 세월 귀신의 화보다 더 무서운 왜구의 란을 당한 이 나라 사람들은 도처에서 설음과 분노로 터갈라진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있었다.

《더이상 참을수 없다. 단군의 후예들이요, 고구려의 후손들인 우리 고려의 백성들이 왜구에게 이처럼 무서운 변을 당하고도 어찌 더이상 참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나라에는 호미보다 검이 더 많아야 함을, 농사일보다 군사일이 백배로 더 중함을.

백성들이여, 우리도 분연히 떨쳐일어나 손에 손마다 검을 틀어잡자!…》

…재가루를 푸석푸석 밟으며 무작정 앞으로 걸어나가던 박위는 군영의 부원수인 윤통과 김해고을 부사인 조호백이 급급히 마주오는것을 띄워보자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윤통과 호백은 죽촌에 변이 났다는 급보를 받자 이곳에 나와 마을을 돌아보다가 좀전에야 박위가 동네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뒤쫓아온 모양이였다.

얼굴색이 남달리 검다고 하여 《흑면장수》로 불리우는 윤통은 더 말할것 없고 매끈한 얼굴이 노상 씻은 배추줄기처럼 해말쑥하던 조호백도 컴컴하게 낯색이 죽어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동작이 날랜 윤통에게 뒤질세라 급급히 걸음을 재우치던 호백은 제 먼저 박위앞에 다가서며 비통한 어조로 말꼭지를 떼였다.

《장군께서 영을 비우신 때 고을 경내에서 이런 참변이 생겼으니 무슨 말로 용서를 빌고 죄를 청해야 할지 실로 백골난망이올시다.》

김해부사는 고을의 행정과 군정을 함께 껴잡아보는 관헌인만큼 응당 오늘의 참변앞에서 죄의식을 느끼고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박위는 호백이보다 자기의 직하부하인 윤통이가 더 원망스러웠다.

박위는 윤통에게 먼저 준절한 청으로 질책을 퍼부었다.

《부원수는 본관이 영을 비운 사이 바다길순시는 어떻게 조직했고 순라군, 파수군은 어떻게 돌리였기에 청청하늘에서 이런 날벼락이 떨어졌소?!》

꺽뚜룩한 키를 곧추 세운채 먼산바라기를 하고 서있던 윤통은 매눈처럼 예리한 시선을 호백에게 돌리였다.

《모든 일이 다 하관의 잘못으로 하여 생긴것이니 무어라고 발명할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변을 놓고 제일 큰 책임을 느껴야 할 대상은 김해관가라고 생각합니다. 털어놓고말해서 김해관가는 우리 군영이 곁에 있는 덕에 지금껏 군사일에는 큰 물력을 들이지 않고도 이렇다할 피해가 없이 편히 지내왔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군영의 덕을 고맙게 여기고 고을 경내의 군사일에 각근한 관심을 돌리는게 례절이 아니겠습니까.

하관은 이 자리에서 김해관가가 우리 군영에 조달하기로 된 군량과 반찬감을 수량대로 내지 않은것은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주지하는바이지만 원래 죽촌까지는 김해군사들이 맡아 지키고 죽촌 다음촌부터 우리 군영이 맡게 되여있습니다.

그런데 일은 김해관가에서 맡은 죽촌에서 터졌습니다.

그러니 소장은 명백히 한계를 갈라가지고 책임을 묻고 죄를 따지는게 옳을줄 압니다.》

워낙 성정이 메마르고 성격이 팩팩한 윤통은 호백의 체면이나 립장 같은것은 알은체도 않고 콩이야 팥이야 빠개가며 마구 내쏘았다.

호백의 희좁은 얼굴은 금시 구워놓은 가재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몹시 강한데다 량반의 지체를 대단하게 따지고드는 호백은 저보다 월등등급이 낮은 윤통에게 거의 야비한 질책을 당한것이 참을수없이 분해난것이였다.

호백은 눈을 까뒤집고 새된 청을 톺아올리였다.

《부원수는 말이면 다 하는줄 아오?

우리 관가에 설혹 여하한 과실이 있다손쳐도 어떻게 그렇게 짜게 말할수 있소?

죽촌백성들이 허다히 죽고 잡혀간고로 억장이 무너져내린 이 관장에게 꼭 그렇게 혹독한 질책을 해야 속이 시원하겠소?!》

윤통이 역시 호백의 생억지를 곱게 흘려버릴 사람이 아니였다.

그는 원래 참을성이 없는데다 옳지 않은 경우를 정당화하려드는 사람앞에서는 그가 누구든 더욱 열을 올리는 성미였다.

《아니, 하관은 책임한계를 갈라가지고 정확히 죄를 따지자는건데 부사께서는 무엇때문에 당치도 않은 변명을 꺼내여 삼태기로 앞을 가리듯 합니까?》

호백은 너무도 기가 막히여 입을 딱 벌리였다. 설핀 수염몽치가 매달린 뾰족한 아래턱이 걷잡을수없이 달달 떨리였다.

《삼태기로 앞을 가리듯 하다니?!

부원수는 뉘게다 감히 그런 상스러운 말을 가져다붙이는게요, 엥?》

《누구긴 누구겠소? 김해부사 당신에게 하는 말이요.》

《무엇이 어째?》

《큰소리는 왜 치우? 내가 당신의 호령에 기가 질릴 사람 같소?!》

두사람은 수닭처럼 마주서서 길길이 뛰였다.

박위는 재가루가 날리는 페허우에서 네 밀둥 내 밀둥하던 끝에 청을 높여가지고 싸움을 하는 호백이와 윤통이가 다같이 한심하게 생각되였다.

박위는 재티가 뽀얗게 앉은 커다란 주먹으로 공기를 갈라던지며 목청을 높이였다.

《그만하지 못하겠소? 공들은 이런 마당에서 옥신각신하는것이 창피하지도 않은가?

더우기 부원수는 나라의 록을 먹으며 전수히 군사일만 보는 무관인데 패전한것이나 다름없는 오늘의 일앞에서 계속 책임한계와 방비구간만 따지는게 옳겠소? 길게 말할것없이 부원수가 바다길을 책임적으로 지키기만 했어도 이같은 일은 없었을게 아니요?》

윤통은 아무 대꾸없이 다시 먼산바라기를 시작하였다. 얼굴빛은 여전히 사나왔으나 박위의 질책에는 별로 의견이 없는듯싶었다.

박위는 호백이쪽으로 돌아섰다.

《부사에게도 할말이 있소. 방금 부원수가 꼭지를 떼다 말았지만 부사는 군사일에 너무 무관심한게 탈이요.

한가지만 찍어말한다면(이번 사건과는 무관계하지만) 우리 경상군영에서 새로 모집한 군사들에게 필요한 군장을 보장해달라고 청탁한게 어느때 일이요?

그런데 부사는 청탁을 받을 때는 아무 말 없다가 뒤에 돌아가서는 관가의 벼슬아치들에게 〈나라의 법에 군사로 뽑힌자는 자비로 복장과 장구를 갖추게 되여있으니 국법대로 시행하는게 옳지 않는가.〉고 시비 비슷한 소리를 했다는데 어디 말 좀 해보우. 요즘 모집한 신입군사들이란 태반이 왜구의 란을 만나 류랑걸식하던 농군들과 어부들, 관청과 대가집에 매여살던 관노, 사노들인데 덩그렇게 불쪽만 차고온 그 사람들이 무슨 수로 군장을 장만한단 말이요?

우리 관헌들이 바로 이런 식으로 군사일을 외면했거나 등한시했기때문에 오늘과 같은 가슴아픈 실패를 당하게 된게요.

당부컨대 부사는 진정으로 고을의 군사일에 전심전력해주시우.

지금같은 때 군사일을 정사의 첫째 항목에 놓지 않고 의연히 그 어떤 요령이나 발림수로 굼때려든다면 후날 돌이킬수 없는 랑패를 당하게 된다는것을 잊지 마오.》

박위는 오늘의 이 기회에 호백의 치명적인 결함을 고쳐주기 위해 진심으로 애타게 자기의 속마음을 터놓았다.

허나 호백은 박위가 오늘일을 기화로 자기를 아예 거부기처럼 납죽하게 짓눌러놓으려고 부러 기를 돋구는듯싶었다.

아래턱, 웃턱도 없이 마구 날뛰는 윤통을 애써 두둔해주는것 같기도 했다.

호백은 여간만 속이 알찌근하지 않았으나 속마음과는 달리 무슨 큰 인생사의 리치라도 깨달은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흔연히 대답했다.

《장군의 충고를 골수에 새기고 일후로는 군사일에 각별히 관심을 돌리리다.》

《부디 그래주시우.》

호백이 달게 충고를 접수하자 박위는 자기 역시 누구들을 질책할만큼 떳떳치 못하다는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였다.

언제나 속마음을 가리울줄 모르는 너무도 단순하고 고지식한 박위는 즉시 침통한 어조로 자기반성을 하였다.

《사실 오늘의 변이 생긴데는 누구보다 본관의탓이 제일 크다고 해야 할거요. 어제 저녁 본관이 회군하던 길에 부산관가에 들려 늦도록 술을 마시지 않고 밤길을 잡아 곧바로 군영에 왔더라면 모름지기 오늘같은 변은 없었을거요.

그렇게 놓고보면 오늘일의 책임은 본관에게 있으니 그쯤 여기고 더이상 책임문제를 거론하지 맙시다.

오늘의 건에 대한 장계는 본관이 직접 올리겠소.

후일 우에서 내리는 추궁도 본관이 다 받겠소. 그러니 부사는 여러생각 말고 살아남은 동네사람들의 생활과 죽은 사람들의 장례일을 잘 살펴주도록 하시우.》

박위가 시원스레 모든 책임을 맡아나서자 호백은 눈에 띄우게 화색을 피웠다. 이어 호백은 사뭇 헌걸스럽게 활개짓을 치며 아직도 곡성이 랑자한 등성이쪽으로 올라갔다.

벌레라도 씹은듯 상을 찡그리고 호백의 뒤모습을 쏘아보던 윤통은 불식간에 박위께로 고개를 홱 돌리였다.

《장군께서는 무엇때문에 저 좁쌀여우같은 김해부사의 죄까지 다 껴안으려고 합니까?

저 사람은 우리 일에 리익보다 해를 더 끼칠 사람입니다.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는거야 삼척동자에게도 명백한 인생리치가 아닙니까.

저 사람은 절대로 가까이해서는 안될 요물입니다.》

군사일에서는 사소한 빈틈도 없지만 생활상에서는 지나치리만큼 관후한 박위는 윤통의 일면적인 사고방식이 무등 답답하게 생각되였다.

허나 그것은 한두번의 추궁으로 고쳐줄 일이 아니였다.

박위는 부드러운 어조를 골라 타이르듯 말하였다.

《부원수, 옛 병서에 장수는 다섯가지 덕을 지녀야 하는바 그중에서 첫째가 사람을 믿고 어짐을 발휘하는것이라 했소.

우리는 변이 생길 때마다 벌을 내리여 사람을 떼내칠것이 아니라 흐린 마음이라도 잘 닦아주고 잘 이끌어주어 한사람이라도 더 많이 군사일에 인입해야 하오.

더우기 이 고을 부사로 말하면 한개 고을의 지방장관으로서 절대로 빗나가서는 안될 사람이 아니겠소.

그는 몇해전까지만 해도 칼을 잡았던 상원수요. 그러니 우리로서는 누구보다 믿고 의지해야 할 장수란 말이요.》

윤통은 검스레한 입술을 삐주름히 빼물며 길게 한숨을 내불었다.

그는 자기대로 박위의 일면적인 사고방식이 안타까왔다.

윤통은 박위의 과감하고 호방한 성격을 부러워하고 진중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존경했다.

하지만 박위의 인정과 관용이 누구에게나 차등없이 베풀어지는것은 질색이였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선과 악의 충돌, 진실과 위선의 알륵은 계속될것인즉 인간은 응당 매 사람들에게 선과 덕을 무턱대고 고루 베풀수 없다는것이 윤통의 굳어진 견해였다.

윤통의 체험에 의하면 선한 인간에게 돌려지는 덕은 대개 덕으로 되돌아오지만 악한 인간에게 베풀어진 덕은 해와 악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항간에는 길러준 개 발뒤꿈치 문다는 말도 나돌고 덕을 악으로 갚는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윤통의 단순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에 비낀 호백의 정신적인 초상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어딘가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같았다.

자기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불의의짓도 마다하지 않을것 같기도 했다. 누구보다 어질더분하면서도 누구보다 정의와 진실에 대해 크게 떠들고 다니는 사람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하기에 그는 호백의 일이라면 무턱대고 의혹을 품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박위는 지금처럼 안팎의 공기가 어수선한 때 호백이 같은 인간을 그저 좋게만 리해하려드니 윤통으로서는 여간만 안타깝지 않았다.

윤통이 다시한번 모난 말로 호백을 타매하려고 입술을 감빠는데 그 눈치를 알아채기라도 한듯 박위는 성큼 걸음을 떼놓았다.

반사적으로 박위를 따라서려던 윤통은 마음이 내키지 않을 때마다 늘 그러하듯 삐주름히 입술을 빼물며 스르시 굳어지였다.

꺼멓게 끄슬리여 도대체 무슨 나무인지 알수 없는 아름드리거목의 휘청거리는 가지에 올라앉은 참새들은 이 마을의 참변이 너무도 놀라와 날아가는 재주도 잊어버린듯 아까부터 솜덩이처럼 굳어진채 자그마한 눈만을 깜빡거리고있었다.

6

6

 

박위는 무거운 사색에 짓눌린채 이제는 명색뿐인 어질더분한 골목길을 따라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푹석푹석 재가루가 솟아오르고 으직으지직 그릇쪼각들이 부서져나갔다.

눈앞으로는 눈보라같은 재티가 연기처럼 뽀얗게 밀려들었다.

한여름때 몰아치는 이 재난의 눈보라.

과연 언제부터 이 나라의 평화로운 강토에 이처럼 으스산한 원한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던가?…

…왜구가 처음으로 고려땅에 나타난것은 지금으로부터 백수십년전인 1223년 5월 어느날이였다.

먼저 김주(김해)를 습격하여 숱한 재물을 략탈하였다.

첫 도적질에서 성공하자 재미도 나고 자신도 생긴 왜구들은 그후 련속 경상도 여러 고을을 기습하였다.

역시 공으로 재물이 생기는 도적질, 강도질은 밑천 안 들이는 생산, 유쾌한 오락이였다. 놈들은 갈수록 도적질의 회수를 높이였다. 판도 넓히였다.

이렇게 되자 고려정부는 원침략군과 싸우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지방군을 동원하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감분위록사 한경운을 비롯한 중앙관리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강도행위를 금지할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때마다 일본측은 저들의 죄행을 사죄하기도 하고 화친을 바란다는 막부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워낙 거짓말을 떡먹듯 하는 왜구들, 도적질, 강도질에 한껏 재미를 붙인 왜구들은 말로는 사죄요, 화친이요 하면서도 계속 고려땅 각지에 기여들어 파괴와 략탈을 감행하였다.

륙지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와 강에서도 고려의 세공선들과 조운선들을 련속 덮치였다.

1350년대에 이르러 왜구의 해적질, 강도질은 그전에 비길수없이 폭이 커지였다.

예전에는 소규모의 도적떼가 경상도 남쪽해안의 1~2개 고을이나 몇몇 섬들에 도적고양이처럼 기여들었다면 1350년 이후로는 백여척의 대선단과 수백명 지어 수천명의 대무리가 서해와 남해의 수십개 고을을 목표로 두억시니떼처럼 밀려들었다.

개경가까이에 위치한 섬들인 자연도, 상목도에 쳐들어와 민가를 불사르고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강화도근처인 파음도와 교동도에도 그리고 동해연안의 큰 고을인 강릉에도 략탈의 검은 마수를 뻗치였다.

지어 수도 개경의 문어구인 승천부(개풍)에까지 밀려들어 몇달동안이나 온갖 지랄발광을 다 하며 돌아치기도 했다.

고려조정은 더이상 소규모적인 방어전이나 외교적인 방법에 매달릴수 없었다.

압록강을 넘어온 북방의 외적들을 성과적으로 분쇄하고 북방정세를 어느 정도 수습한 고려군은 1364년 5월 드디여 왜구격멸을 위한 첫 대규모전을 벌리였다.

첫 대전에서 경상도 도순문사 김속명이 인솔하는 고려군은 진해현에 기여든 왜구 3천명을 일격에 생쥐무리 뚜드려잡듯 때려잡았다.

1372년 6월에는 만호 조인벽이 함주와 북청일대에서, 같은해 7월에는 백전로장 최영이 홍산일대에서 각각 수천명의 왜구를 소멸하였다.

1377년 5월에는 당시 김해부사였던 박위가 황산강하류에서 왜구의 전함 수십척을 침몰시키고 같은날 경상도원수(당시) 배극렴은 하까다지방의 령주이며 왜구의 한 괴수를 단칼에 찔러죽이였다.

그후에도 고려군의 대규모적인 왜구소탕전은 수십차에 걸쳐 계속되였다.

하건만 왜구의 침입은 오늘까지도 근절되기는커녕 더욱더 광포한 양상을 띠고 계속되고있었다.

작은 방망이로도 때려보고 큰 철퇴로도 조겨보고 좋은 말로도 타일러보고 엄한 소리로도 꾸짖어보았으나 왜구들은 그때마다 잠시잠간 움츠러들었다가는 또다시 피묻은 대가리를 쳐들고 이리떼처럼 달려들었다.

하기사 피맛을 볼대로 본 승냥이가 방망이찜질을 몇번 당했다 하여 금시 입맛을 돌리고 풀이나 열매 같은것을 먹으며 얌전하게 제 굴속에 죽치고 앉아있을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왜구로 인한 이 땅의 랑자한 류혈, 이 하늘에 뒤덮인 재티를 말강스럽게 걷어낼수 있겠는가?

…방향없이 걸음을 옮기던 박위는 마을의 유측, 초가지붕우에 하얀 박꽃송이가 서글프게 웃고있는 초가마가리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서야 박위는 자기가 리옥의 집(어찌된 일인지 유독 리옥의 집만은 성한채로 서있었다.)앞에 다달았음을 의식하였다.

박위는 옷자락을 활활 나붓기며 성급히 뜨락안으로 들어섰다.

혹시나 하는 그 어떤 막연한 기대감이 언뜰 떠올랐다.

허나 뜰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기대감은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버리였다.

활활 열어젖힌 아래방문과 웃방문, 텅빈 방안… 방안에서는 써늘한 랭기같은것이 산산하게 쓸어나왔다.

얼없이 휑뎅그렁한 방안을 들여다보던 박위는 갑자기 울너머 소로길쪽에서 무질서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오자 맥없이 고개를 돌리였다.

뜻밖에도 오천이와 여삼에게 량팔을 떠들리운 현중이가 병자마냥 비치닥거리며 질질 끌려오다싶이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살아있는 아들을 명백히 가려보았으나 왜서인지 다행스럽기 전에 더욱 불안하였다.

박위는 오천이네들이 뜰안에 들어서자 현중을 노려보며 거친 청으로 물었다.

《너는 어쩌다가 그 모양꼴이 되였느냐?》

현중이도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나보건만 반색을 띄우기는커녕 뽀얗게 먼지가 게발린 낯을 보기 싫게 찡그리며 비명같은것을 흘리였다.

《아버님, 리옥누님이 종시… 잘못된것 같습니다, 으흑흑…》

박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심상한 낯빛을 허물지 않은채 조금 청을 높이였다.

《리옥이가 어찌되였다는게냐? 어서 똑똑하게 말을 해라.》

현중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이리저리 입술을 궁싯거리더니 종시 말을 담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였다.

여삼이가 제꺽 발을 달았다.

《도련님은 어제 밤 군영의 작은 사랑에서 기침을 하다가 오늘 새벽 죽촌소식을 듣자 즉시로 군사들과 함께 이곳에 왔답니다. 오자마자 집집의 재무지를 다 헤쳐보고 뒤산 숲속까지 샅샅이 훑어보았는데 댁 아씨는 시신조차 없더랍니다.》

이미 그 비슷한 짐작은 하고있었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는것이 명백해지자 극심한 아픔과 허탈감으로 하여 금시 심장이 쭈그러드는듯싶었다.

박위는 꺼지는듯 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꺼내였다.

《그러니 리옥이가 왜구에게 잡혀갔다는 소리가 아니냐?》

《대체로 그리된것 같습니다.》

박위와 리옥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여삼은 리옥의 실종이 마치 제 잘못이기라도 한듯 고개를 비틀어꺾으며 골기없이 대답했다.

박위는 띠끔띠끔 들쑤시는 가슴을 안은채 천천히 앞마당 구석쪽에 어우러진 무성한 구기자덤불앞으로 다가갔다.

언제인가 리옥이 커다란 놋대접에 새빨간 구기자차를 담아들고 와서 하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현중 아버님, 거제섬에서 키우던 구기자뿌리를 여기에 옮겨심었더니 열매가 얼마나 잘 달렸는지 덤불이 온통 빨갛게 보일 지경입니다.

변변치 못한 솜씨로나마 차를 달였는데 성의로 알고 들어주십시오.

그전에 의생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구기자차는 단맛도 있지만 쓴맛, 아린맛도 있어 마시기는 그리 쾌하지 못하나 혈을 보하고 기를 성하게 하는 좋은 약이라고 하옵니다.》

그때 박위는 병약한 리일경에게 바쳐지던 리옥의 정성이 자기에게 돌아온것이 슬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여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끝에 반롱조로 응수하였다.

《쓴맛을 그리 탓할 까닭은 없느니, 고진감래라고 쓴맛을 본 뒤에 단맛이 찾아오는 법이지.

이것은 약물의 리치이기도 하지만 인생사의 리치이기도 하겠지, 헛허허…》

그후에도 리옥은 기회가 생기는대로 박위에게 제 손으로 달인 구기자차를 대접하군 하였다.

헌데 그처럼 각근한 정성으로 사연많은 이 구기자를 가꾸던 속이 깊고 마음씨 착한 이 집의 녀주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각탓인지 뽀얗게 재티를 들쓴 구기자덤불도 연해 몸서리를 치며 상실의 아픔을 하소하는듯싶었다.

잠시후 박위는 얼혼이 다 빠진듯 한 현중을 군영으로 데려가라고 이른 다음 저 혼자 바다가로 걸어나갔다.

체소한 여삼이가 저보다 한뽐이나 더 키가 큰 현중을 질질 끌다싶이하며 등성이쪽으로 사라지자 오천은 급급히 박위의 뒤를 따랐다.

때는 들물때라 한껏 높아진 바다는 살찐 가슴을 소리없이 들먹이며 코가 시글도록 청신한 바람을 말아올리고있었다.

바람결을 타고 비릿한 해감내도 풍겨왔다.

저 멀리 아득한 물마루우에서는 연한 연기처럼 보이는 아지랑이가 가물가물 눈이 시글게 피여오르고있었다.

인적없는 도래굽이의 펑퍼짐한 바위우에 올라선 박위는 퍼런 불찌가 번뜩이는 눈으로 물마루쪽을 노려보고있었다.

저 물마루너머 어디엔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쯔시마)가 있을것이였다.

죽촌을 말끔히 짓이겨놓은 왜구들은 지금 저 물마루너머 대마도에서 또 한차례의 강도질에서 성공한 도적패의 쾌감을 나누며 희희락락 하고있을것이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씹으며 이렇게 빈주먹만 떨고있어야 하는가?…)

박위는 피가 나오도록 아프게 입술을 사려물며 옆구리의 칼을 더듬어잡았다.

불현듯 손녀딸의 시꺼멓게 끄슬린 시체앞에서 꺼이꺼이 마른 울음을 울던 저대로인의 처량한 모습이 떠올랐다.

죽은 애기에게 젖을 물리고 울던 실성한듯 한 아낙네의 얼굴과 안해의 시체를 정차게 매만지며 가슴저린 사연을 읊조리던 고들이라는 사내의 두리두리한 모습이 겹쳐지였다.

그 모든 수난자들은 말로써가 아니라 자기들의 처절한 모습으로 박위 자기를 준절히 꾸짖는듯싶었다.

《장군, 우리는 지금껏 군영군사들을 성벽처럼 든든히 믿어왔소이다.

그런데 왜구들은 군영군사들쯤은 허술히 알고 우리 동네에 달려들어 숱한 사람들을 죽이고 잡아갔으니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합니까.

구천에 사무친 이 원한을 누구에게 빌어 풀어야 합니까?》

《장군! 왜구들의 칼은 고려백성들의 피로 붉어졌는데 장군의 검은 노상 옆구리에 곱게 매달려있으니 그 물건은 대체 어디에 쓰는것이옵니까?》

박위는 어느 사이엔가 지르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신음소리 같은것을 내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건만 으득으득 이를 갈며 감사납게 부르짖었다.

《왜나라도적떼가 이제는 군영발치에까지 기여들어 수다한 사람을 살해하고 잡아가고 지어 우리 나라 장수의 딸까지 끌어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단순히 불행과 고통이기 전에 민족의 수치, 군대의 망신이 아닌가.

이제 와서 무엇을 더 캐고 따질것 있다더냐.

귀신은 경으로 떼고 도깨비는 방망이로 떼라 했거늘 왜구의 침노를 막자면 다른 수란 있을수 없다.

대마도에 짓쳐나가 군력으로 도적떼의 소굴을 짓뭉개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백수십년 쌓이고 엉킨 우리 백성들의 피맺힌 원한도 풀고 군대의 수치도 씻을수 있으며 고려국의 존엄과 기상도 떨칠수 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번의 변란도 저 대마도놈들의 소위라고 생각합니다.》

등뒤에서 오천의 저력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강렬한 흥분탓에 잠시후에야 오천의 존재와 그의 말뜻을 어렴풋이 의식한 박위는 여전히 물마루쪽을 노려보며 몰풍스럽게 대답했다.

《누가 그걸 모른다더냐?!》

오천은 박위의 흥분을 전혀 감촉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박위이상으로 격동되였는지 전에없이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장군께서 이미 통촉하시는바이지만 대마도에는 흉악한 왜구들이 보쌈에 엉킨 송사리떼처럼 득시글거리는데 우리는 그것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몇놈씩 잡고있으니(그나마도 빈번히 놓치기까지 하면서)이런 방식으로는 십년, 백년이 가도 왜구의 란을 막지 못할것입니다.

도적떼를 근멸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우리 군대가 대마도에 나가 놈들의 소굴을 짓뭉개버리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 량반들은 보잘것없는 일개 대정치고 너무나 푼수에 넘치는 소리를 하는 오천에게 《에끼, 이눔! 뉘게다 감히 어줍잖은 수작을 늘어놓는게냐!》 하고 된욕을 퍼붓는것이 상례였다.

허나 담대하고 배짱이 실한 사내, 군사일에 밝은 사내를 제일로 쳐주는 박위는 오천이가 전혀 방자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도리여 신통하게 자기와 견해를 같이하는 그가 무등 대견하고 기특했다.

잠시 믿음어린 시선으로 오천의 구리빛얼굴을 돌아보던 박위는 불현듯 귀인성스럽게 생긴 작은 입술을 아프게 감쳐물었다.

들뛰던 심장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랭정한 사고와 판단이 떠오른것이였다.

(옛적부터 군사를 쓸 때 지피지기하면 백전불패라 하였다. 적을 알고 자기를 알아야 백번 싸워 백번 다 이길수 있다는 리치를 내 어찌 순시도 망각할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현하 대마도의 형세는 어떠하고 우리 군대의 형편은 어떠한가.

날바다 한복판에 떠있는 대마도는 견고한 방어시설과 칼벼랑으로 둘러막혀있는 거의나 요새화된 섬이다.

게다가 섬에는 수백척의 전함과 실전경험이 풍부한 만여명의 정예한 군사가 항시 출동태세를 갖추고있다.

하지만 우리 경상도에는 통털어야 수십척의 전함과 수백의 군사(그나마도 갓 들어온 군사들까지 포함하여)밖에 다른 아무것도 없다.

이 정도의 병력과 군력을 가지고 대마도를 칠수 있겠는가.

아니, 승리보다 참패를 얻기가 더 쉽다. 그렇다고 나라에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할 형편도 못된다.

두달전인 지난 4월 18일 고려군의 주력이라고 할수 있는 수만의 정예한 군사들이 방대한 물자와 장비를 갖추어가지고 료동원정을 떠났다.

임금과 최영대감도(올해 봄 최영은 리인임을 제거한 후 조정의 최고벼슬인 문하시중으로 승탁되였다.) 원정군을 지휘하기 위해 서경(평양)에 나가있다.

그렇다면 대마도원정은 먼 후날로 미루어야 하는가.

아니, 이제 더이상 대마도원정을 미룬다는것은 우리 군대의 자제력의 발현으로 되는것이 아니라 비겁쟁이들의 맥빠진 침묵으로 해석될것이다.

무조건 가급적으로 대마도를 쳐야 한다.

물론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큰일이라도 누구든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성사된다.

내가 먼저 여기 경상땅에서 최상최대의 힘을 발동하여 원정준비의 첫 기치를 추켜들자.

그러느라면 리성계대감이 이끄는 료동원정군도 일을 성사시키고 돌아올것이요, 임금과 최대감도 개경으로 올것이다.

그때는 나라의 힘을 크게 빌수 있을것이며 따라서 대마도원정은 빠른 시일안에 실현될것이다.)

사색이 예까지 치달아오르자 또다시 세찬 격동이 취기처럼 전신에 퍼지였다.

박위는 엄엄하게 굳어진 얼굴로 오천에게 다가섰다.

확신에 넘친 어조로 말하였다.

《더 길게 말할것 없다. 우리는 한시바삐 준비를 차려가지고 대마도를 쳐야 한다.

왜구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자기의 존엄을 귀중히 여기며 우리 군대의 검이 얼마나 위력한가를 똑똑히 보여줘야 한단 말이다.》

오천은 아무 응대도 없었다.

하지만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빛으로 보아 그도 박위의 원정결단에 비낀 높은 기개와 배짱에 크게 감복하고 공감한것이 분명했다.

기척없이 설레이던 바다는 이 나라 사나이들의 높은 뜻과 억센 기상에 호응이라도 하듯 급기야 솨솨 소리를 높이며 집채같은 파도를 말아올리기 시작했다.

7

7

 

근 열흘째 군영안팎은 무슨 큰 란리라도 만난듯 설설 끓어번지였다.

그도 그럴것이 박위는 죽촌에서 돌아온 그날로 군영군사들과 각 고을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군령을 하달했다.

1. 군영과 고을들에서는 상비군사의 수를 종전에 지적해준것보다 배로 확장하며 그들에 대한 교련을 적극 다그칠것.

2. 전함 역시 이미 제정해준 수보다 5척이상 더 무을것.

3.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하여 시급히 고을자체의 힘으로 염초와 화약을 만들도록 할것.

4. 새로 제시된 군사일의 내막이 절대로 외부에 류실되지 않도록 매사를 철저히 경계할것.

5. 이상의 령을 어기거나 태공하는자는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전시군법으로 엄중히 다스릴것이다.

그날부터 박위의 령을 받은 파발들이 북 나들듯 군영대문을 나들었다.

군사를 뽑으러 나가는 장교, 뽑은 군사를 달고 들어오는 장교, 대장쟁이, 목수, 풀무군 같은 장공인들을 찍어가지고 오는 장교, 장공인들을 이끌고 일터로 나가는 장교…

진종일 들고나는 사람들은 많기도 했다.

사람들만이 아니였다.

량식과 젓갈따위를 실은 마바리, 소바리들이 쉬파리떼를 구름처럼 달고 줄레줄레 밀려들어오는가 하면 빈 바리들이 왈랑절랑 줄을 쳐서 나가기도 했다.

군영밖의 광경은 더한층 야단스러웠다.

얼마전까지만도 열댓명의 목수가 증펀하게 퍼더앉아 언제까지고 끝날상싶지 않은 시시껄렁한 한담을 주고받으며 슬렁슬렁 톱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던 바다가 배무이장에 사람사태가 났다.

백여명의 장공인들이 한꺼번에 쓸어들어 어기영치기영 통나무를 메나르는가 하면 스르릉스르릉 뚝딱뚝딱 배널을 켜고 박느라고 바다가가 노상 북적북적하였다. 거기서 두어마장가량 뒤로 나앉아있는 야산기슭에 띠풀이영으로 대충 웃설미만 씌워서 새로 만든 대장칸에서는 칼과 창, 활촉과 포탄깍지를 두드려 만드는 메질소리, 망치질소리, 풀무질소리가 밤낮없이 귀따갑게 울리였다.

대장칸과 이영을 맞대고 서있는 염초장에서는 염초를 끓이는 매캐한 냄새와 등황색연기가 쉬임없이 꾸역꾸역 솟아올랐다.

각 고을들에서도 판은 비록 군영보다 작으나 형편은 군영과 류사하였다.

대마도원정준비는 박위의 드센 손탁아래서 이렇게 시작부터 줄기차게 벌어지였다.…

불그레한 석양이 서켠하늘가에서 수시로 기괴한 무늬를 섞바꾸어 그리며 어룽대는 저녁무렵이였다.

하루종일 바다가에 나가 번잡한 일들을 하나하나 신칙하고 군영으로 돌아오던 박위는 대문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요즘에 들어 교련장으로 쓰는 대문앞마당에서 신입군사 수십명이 땀을 철철 흘리며 칼쓰기훈련을 하고있었다.

박위의 심신은 말할수없이 피로하였다.

잠시라도 처소에 들어가 허리를 펴고 누워있고싶었다.

하지만 신입군사들에 대한 교련도 홀시할수 없었다.

아니, 원정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중의 하나가 신입군사들에 대한 교련이였다. 사실 신입군사들에 대한 교련은 윤통이가 전적으로 맡았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 일을 전혀 들여다보지 않을수는 없었다.

박위는 잠시라도 자리에 누워보려던 애초의 생각을 고쳐먹고 교련장으로 다가갔다.

느티나무아래서는 두건을 질끈질끈 동여맨 신입군사들이 윤통의 거센 구령소리에 맞추어 서툴게 칼을 휘두르고있었다. 헌데 검술을 가르치는 윤통의 기상은 여간만 험상하지 않았다.

윤통은 가뜩이나 시꺼멓게 생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연해 짜증기가 실린 고함을 왝왝 질러대는데 군사들은 검술을 배우는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짓눌리여 쩔쩔매고 돌아가는듯싶었다.

꼭 무슨 일을 칠 사람 같았다.

아니나다를가 날카로운 환도로 허공을 쿡쿡 찌르며 소리소리 지르던 윤통은 무엇때문인지 갑자기 칼을 홱 내던지였다.

사나운 시선과 손짓으로 대오속의 누군가를 가리켜보이며 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놈아! 왜구의 멱을 찌르는 동작을 하라는데 그게 무슨 꼴이냐? 사냥놀이에 나와 메돼지를 튀기느냐, 버릇나쁜 녀편네의 궁둥짝을 조기느냐? 게다가 굼벵이 천장하듯 왜 그렇게 어기적거리는거냐?

에끼, 이 두부자루같은 놈! 천생 농군노릇이나 해먹을 놈이로다.…》

윤통은 과연 성미가 급한 사람, 전혀 자기의 속을 묻어둘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엊그제도 그는 신입군사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다가 별치도 않은 일에 부아가 나서 몇사람의 귀쌈을 불이 번쩍 나게 후려갈기고는 박위를 찾아와 푸념을 꺼내놓았다.

《이거 무슨 변을 내야지 쟈들을 가지고는 쇠통 안되겠습니다.

하나같이 두부자루같은 둔치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소에게 경을 읽히는것이 더 헐할겝니다.

저눔들은 전부 내보내고 새놈들을 끌어들입시다.

아무리 바가지가 없다 한들 짚신짝으로 국을 떠먹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그때 박위는 윤통의 언행이 적지 않게 불쾌했으나 부드러운 어조로 일러주었다.

《이보 부원수, 항간에 이런 말이 있소. 〈번개불에 콩 닦아먹으랴〉, 〈돼지꼬리 잡고 순대 달란다〉. 이건 어떤 일이든 조급하게 성사를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겠소?

그러니 화가 나더라도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실속있게 가르쳐주어야 하오. 하루밤에 명궁이 된 사람이 어디 있고 날 때부터 검술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야 그렇지요.》

윤통은 얼마간 화가 가라앉은 뒤라 선선히 박위의 충고를 받아들이였다.

하지만 타고난 성미는 쉬이 고칠수 없는것인지 윤통은 지금 그날의 일은 감감 다 잊고 또다시 왝왝 고아대다못해 이를 사려물고 주먹까지 후들후들 떨고있었다.

윤통은 진정 딱딱하고 팩팩한 사람이였다. 하지만 그는 거짓과 불의를 미워하고 진실과 정의를 사랑하는 결곡한 인간이였다.

하기에 박위는 남달리 윤통을 사랑했다.

그에게 자주 꾸중을 하고 신칙을 하는것도 구경은 그를 남달리 믿고 애중하기때문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고 윤통이 하는양을 지켜보던 박위는 천천히 교련장 복판으로 나섰다.

아무말없이 땅바닥에 내던져진 윤통의 칼을 집어들었다.

하고는 윤통에게 꾸중을 들은 군사를 대오앞으로 불러내였다.

정말 두부자루라는 소리를 들을만 하게 몸집이 투실투실한 젊은 사내가 지싯지싯 골기없이 걸어나왔다.

균형없는 몸집은 비록 볼모양이 없었으나 가느스름한 눈에는 제법 열기가 도는것이 그저 어리숙한 촌보리동지같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꼭 만나본듯 했으나 얼추 기억되지 않았다.

박위는 살가운 어조로 물었다.

《너는 어느 골에서 살다가 군사로 뽑혔느냐?》

《예, 소인은 죽촌에서 살았사온데 저번의 란에 처자권속을 다 잃었소이다.

그래서 제 손으로 단 한놈의 왜구라도 때려죽이자구 자진해서 군사로 나왔소이다.》

《자진해서 군에 나왔다?! 그래, 네 이름은 뭐냐?》

《고들이라 하옵니다.》

《고들이?!》

박위는 그제서야 고들이라는 우습강스러운 이름을 가진 이 군사가 죽촌에 나갔을 때 죽은 안해를 그러안고 마치 산 사람에게 말하듯 하던 그 불행한 사내임을 알아보았다.

공연히 속이 섬찍해났다.

그날에 보았던 저대로인의 꺼룩한 모습과 숯덩이같은 언년이의 참혹한 모습, 백동이라는 아기에게 젖을 물린채 미친것처럼 울부짖던 파리한 녀인의 모습이 연줄연줄 떠올랐다.

아무런 론리적련관도 없이 문득 현중의 구겨진 얼굴모습이 묻어올랐다.

죽촌에서 돌아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있는 현중은 요즘 박위가 작은 사랑에 들어설 때마다 열에 떠서 부르짖었다.

《아버님! 언제면 우리 군사들이 리옥누님을 찾으러 갑니까?

소자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던 누님께서 짐승같은 왜구들에게 욕을 당하고있을것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견딜수 없습니다.》

박위는 벌써부터 아이 같지 않게 궁냥이 틔우고 인정이 깊은데다 배짱과 담기도 록록치 않은 아들녀석이 무등 대견하였다.

그와 함께 리옥의 절망적인 처지와 현중의 슬픈 심정이 새삼스레 가슴에 마쳐와 절로 발작적인 복수의식이 끓어올랐다.

허나 애어린 아들녀석에게 자기의 착잡한 심중을 루루이 털어보일수는 없었다. 하여 박위는 매양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부러 엄한 표정을 짓고 마음에 없는 책망을 꺼내놓았다.

《이녀석! 되지 못한 소리 작작해라.

세상일이란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야.》…

잠시 괴로운 생각을 씹어나가던 박위는 고들의 우둥퉁한 얼굴에 눈못을 박으며 힘찬 어조로 말하였다.

《죽촌에서 네스스로 원쑤를 갚기 위해 군사로 나섰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군사를 배워야 할게 아니냐.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자고로 군사는 병기를 손에 들지만 다루기는 심장으로 한다고 일러왔다.

네가 진정 너의 처자를 무참히 살해한 왜구를 네 손으로 때려잡을 결심으로 심장을 불태운다면 어찌 검술이 그리도 늘지 않겠느냐.

어느때나 명심해라! 군사의 심장이 불타면 틀어잡은 검도 불타기마련이다.

불타는 검을 잡은 군사를 대적할자 누구라더냐. 자! 보아라!》

박위는 서슬푸른 장검을 번쩍 추켜들었다.

고들이도 부얼부얼한 얼굴에 결연한 빛을 띄우며 반사적으로 칼을 추켜올리였다.

박위는 불꽃튀는 시선으로 자기의 칼끝을 노려보며 웨치듯 말하였다.

《이렇게 일단 검을 추켜든 다음에는 머리를 곧추 들고 눈앞의 적을 노려보아야 한다.

왼쪽다리에 몸을 실을사 하되 두발은 너무 벌리지 말고…》

박위는 자기가 가르쳐준대로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 고들의 모습을 옆얼굴의 감각으로 포착하자 힘찬 어조로 계속하였다.

《그럼 나와 함께 본국검총도(오랜 전통을 가진 우리 나라 검법의 한개 종류)의 34가지 동작을 하나하나 훑어내려가보자.

제일 처음은 〈우내략〉!》

박위는 곧추 세웠던 칼을 오른쪽으로 힘차게 비껴내리였다.

고들이도 박위의 본을 따서 기운차게 칼을 비껴내리며 그의 문자말을 그대로 받아웨치였다.

《처음은 〈우내략〉!》

박위는 두세걸음 앞으로 내달리며 번개같이 칼을 내뻗치였다.

《다음은 〈진전살적〉!》

고들은 박위의 동작을 따라하며 또다시 그의 말을 받아웨치였다.

《다음은 〈진전살적〉!》

《초퇴방적!》(조금씩 물러나면서 방어한다는 뜻.)

《초퇴방적!》

《향우방적!》(오른쪽의 적을 막는다는 뜻.)

《향우방적!》

《룡약재연!》(룡이 못에서 뛰여나오듯 한다는 뜻.)

《룡약재연!》…

한참이나 뛰고 날며 칼을 휘두르던 박위는 34가지 동작을 다 해보이고나서 칼을 내리웠다.

박위의 흉내라도 내듯 서서히 칼을 내리운 고들은 무엇이 그리 흡족한지 우둥퉁한 얼굴모양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귀인성스러운 덧이를 빠끔히 드러내며 히뭇이 웃었다.

박위를 따라 칼쓰기를 해보니 자기가 노상 윤통의 구박이나 받을 못난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드는 모양이였다.

역시 고들은 맺힌데 없는 사람이 아니라 눈썰미도 있고 자각과 열정도 있으며 다소 능청스러운데도 있는 진실하고 재미있는 사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인간을 외형에 준하여 서뿌르게 판단하고 따버리려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릇된 처사가 아니라 너무도 허무한 상실이요, 너무도 잘못된 계책이 아니겠는가?!…

윤통이 박위의 곁으로 다가왔다.

윤통은 박위의 손에서 칼을 뽑아내며 병졸들이 들을수 없을 정도의 낮은 소리로 웅얼거리였다.

《소관은 한껏 참느라고 했는데 어느새 또 악증이 터져나와 실수를 했습니다.》

박위는 좀전까지만도 어깨가 잔뜩 처져있던 고들의 얼굴에 신심이 서려도는것도 기뻤지만 윤통의 솔직한 자기반성도 마음에 들었다.

《헛허허! 그럴수도 있는거지. 이보 부원수, 이네들은 모두 이발도 나지 않은 어린애나 같은 군사들인데 굳은 고기부터 씹으라고 닥달을 해서야 되겠소? 차근차근 품을 들여 가르쳐주어야 하오.

그건 그게고, 내 보건대 저 죽촌의 두부자루도 꽤 쓸만 한 두부자루 같소그려.》

롱담을 그리 즐기지 않는 박위는 결코 롱으로 한 말이 아니였으나 모여선 군사들은 두부자루라는 박위의 소리에 와 웃음보를 터뜨렸다.

고들이 당자도 박위가 자기를 알아봐준것이 무등 자랑스러운듯 동료들을 둘러보며 눈이 없어지게 웃었다.

윤통이 다시 검을 들고 교련을 시작하자 박위는 군영앞마당을 나섰다.

습관적으로 바다가를 향해 걸음을 놓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오천대정이 질그릇처럼 번들거리는 얼굴을 이리저리 문대기며 다가왔다.

그제서야 박위는 오늘 아침 자기가 오천을 김해관가에 보냈던 사실을 상기할수 있었다.

박위는 오늘 김해만이 아니라 군영의 린접고을들인 밀양과 창원관가에도 사람을 띄워 거의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었다.

군영군사들의 수효는 여느 고을에 비길수없이 많은데다 군영 앞동네의 장정들, 숱한 장공인들까지 생업에서 떼여 군사일에 동원시킨고로 군량이 어방없이 딸린다는것, 이제 한고비만 넘기면 군사들의 경작지에서 나오는 보리라도 풀어먹일수 있으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군량과 반찬감을 대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물론 박위는 어느 고을이나 다 식량사정이 어렵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군량부탁을 하자니 관가의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여간만 미안하지 않았다.

허나 달리 어쩌는 수가 없었다.

지금은 우선 싸움준비부터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그래, 너는 지금 김해관가에서 돌아오는 길이냐?》

걸음을 멈춘 박위는 궁금증이 가득한 어조로 물었다.

오천은 여느때없이 급급하게 인사를 차리고나서 볼메인 소리를 꺼내놓았다.

《아니올시다. 오기는 중낮때 왔는데 장군께서 영에 계시지 않기에 바다가를 한바퀴 돌고나서 다시 들어오는 길입니다.》

《길이 어긋났던게로군. 그래, 김해관가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되였느냐?》

《예, 김해에 득달하는 길로 관가에 들어가 원님께 편지를 올렸습니다.

원님께서는 장군의 편지를 읽으시더니 그 자리에서 제창 구실아치들에게 군량과 반찬감을 내주라고 하더이다.》

《그래, 군량은 얼마 주고 반찬감은 또 얼마나 내더냐?》

박위의 얼굴은 금시 환하게 밝아지였으나 오천의 낯빛은 여전히 찌뿌둥하였다.

《군량은 수수, 보리 다 합해서 세바리가 되옵고 반찬감은 미역, 김, 젓갈까지 해서 한바리가 조금 넘습니다.》

《그게 적은 량이 아니로다. 너도 그걸 마련해가지고 오느라고 고생했겠지만 그걸 손모아 보내준 김해부사의 성의가 여간이 아니구나.》

박위는 얼마전에도 적지 않은 군량을 보내준 조호백이 다시금 아무군소리없이 많은 물자를 내준것이 무척 고마왔다.

왜구들의 무시로 되는 침략탓에 바다농사나 땅농사의 소출이 다같이 시원치 못한데다 아직 춘궁기를 넘기지 못한 때 그렇게 많은 식량을 연거퍼 보내준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고보면 호백은 자기가 죽촌에서 한 당부와 추궁을 깊이 새기고 새로운 마음으로 군사일을 대하는것이 분명했다.

호백의 성의도 고마왔지만 그의 개준은 더욱 기뻤다.

허나 오천의 옥맺힌 마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오천이 김해관가에 들어가니 호백은 뒤뜰의 광앞에 산같이 쌓여있는 어물짐들의 수효를 세고있었다.

《절인 전광어가 스무짝이요, 생물도미가 열세두름이라, 말린 전복은 열닷통이요, 생물전어는…》

쉬파리떼가 윙윙 감돌아치건만 그에 아랑곳없이 노래가락마냥 말마디끝을 길게 끌어넘기며 신이 나서 짐짝들을 세여보던 호백은 오천이가 내주는 박위의 편지를 받자 금시 생콩씹은 상이 되였다.

편지를 다 읽고나서도 한참이나 눈을 까박거리며 무슨 생각인가를 굴리던 호백은 오천이로서는 알아들을수 없는 문자말을 비양기어린 음조로 씨벌거리였다.

《그런즉 다다익선(많을수록 좋다는 뜻)이라는 뜻인데, 흠…》

이어 호백은 밑도 끝도 없이 옆자리에 장부책을 들고 서있는 호장에게 꾸중 비슷한 소리를 쏟아놓았다.

《이 사람, 호장! 요사이 조세납부가 왜 그리 더디 되나? 공물의 징수형편도 말이 아닌데 진상마련까지 밀려돌아가니 대체 일을 어쩌자는게야? 고을형편이 여의치 못하다는것을 모르는게 아니야? 하지만 사사에 짓눌려 공사를 내밀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느냐? 제밀…》

가만 들어보니 엿가락처럼 질질 늘어놓는 호백의 개도라지타령은 호장이 아니라 오천이 자기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어찌 들으면 고을형편이 매우 곤난하나 군량만은 어김없이 보내노라는 뜻을 풍기는것 같았고 또 어찌 들으면 관가의 일만 해도 아름이번데 군영에서까지 무얼 자꾸 내라고 못살게 구느냐하고 짜증을 내는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호백은 진심에서 우러나와 군사일을 돕는것이 아니라 박위의 눈에 덧나지 않기 위해 얼림수를 쓰고있는게 분명했다.

오천은 아니꼽고 미심쩍은 생각을 종시 털어버릴수 없었다.

하여 마바리들을 끌고 관가에서 나오기 바쁘게 짐짝을 헤쳐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쌀이라는것은 전부 좀이 나서 시큼시큼한 냄새가 풍기는것이요, 반찬감이라는것은 고작 미역꽁다리, 잡어젓따위인데 그나마도 지푸래기와 모래가 반나마 섞인것이였다.

오천은 금시 홍두깨같은 밸이 치밀어올랐다.

(이 량반이 우리 군사들을 아주 사람셈에 넣지를 않는구나. 자기는 전광어나 도미 같은것을 산처럼 쌓아놓고 먹으면서 우리에게는 내버려도 아까울것 없는 이따위 썩은것을 내준단 말이야?)

오천은 량식이고 반찬감이고 모조리 개굴창에 처박아넣고싶었다.

하지만 고을원이 군영장수에게 보내는 물건을 중도에서 제맘대로 내버린다는것은 너무나 무엄한짓이라 끓어오르는 분을 간신히 눌러참았다.

군영에 당도한 오천은 윤통에게(그때 마침 박위는 바다가에 나가있었다.) 모든 사연을 낱낱이 고하였다.

그러지 않아도 김해부사를 곱지 않게 보는 윤통은 그 당장 노기충천하여 짐바리를 이끌어온 배뚱뚱이호장을 불러들이였다.

무작정 형틀을 내오게 하고 그우에 호장을 끼엎어놓았다.

《네 이놈! 너희 관가것들은 기름기 찰찰한 흰쌀밥에 전광어, 도미도 파들파들한것만 골라먹으면서 우리에게는 이따위 썩은것만 퍼넘기니 이게 사람의 행실이냐, 개짐승의 소위냐.

더 길게 말할것 없다. 네놈이 어디 원님대신 매를 좀 맞아봐라.

여봐라, 저 호장놈의 북통같은 배가 늑대배때기처럼 훌쭉히 꺼질 때까지 사정보지 말고 매우 쳐라.》

윤통의 성급한 령이 떨어지자 잘 자란 참나무처럼 탄탄하고 미끈미끈한 군사들이 물에 적신 몽둥이를 꼬나들고 달려들었다.

철썩철썩 모진 매가 정월대보름 찰떡치는 소리를 내며 연거퍼 떨어져내리였다. 허여멀쑥한 호장의 볼기짝우에 당장 시꺼먼 먹구렝이가 얼기설기 휘감기였다.

얼마후 제가 나서지 않아도 좋을 일이건만 군영장수들에게 생색도 내고 희떠운 수작도 펴놓고싶어 자진하여 오천을 따라나섰던 허풍선이호장은 털뜯긴 장꿩꼴이 돼가지고 허청비청 군영대문을 빠져나갔다.…

오천은 한식경이나 열을 내여 전후사연을 알리였다. 분명 천둥같은 노성을 터칠줄 알았던 박위는 뜻밖에도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오천의 짐작과는 달리 박위는 선뜻 호백을 의심하고싶지 않았다.

한개 고을의 관장인 조호백이 그처럼 좀스럽고 비루한짓을 할수 있겠는가.

더우기 호백은 한고향사람, 박위 자기에게 목숨까지 구원받은 사람이였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오늘같이 의리없는짓, 몰렴치한짓을 할수 있겠는가.

오늘의 불미스러운 일은 필경 아래도리 아전놈들이 중간에서 롱간을 했거나 김해고을의 량식형편이 하도 어려운탓에 생긴것이리라.

생각은 이렇게 흘렀으나 어째선지 마음은 침침해났다.

박위는 저녁어스름이 밀려드는 앞동네의 부산스러운 골목길에 한참이나 못박힌듯 서있었다.

8

8

 

…박위가 처음으로 호백을 알게 된것은 20대의 청년시절, 그러니 박위가 무과시험에 나가기 한해전 어느 가을날이였다.

그때 고향고을의 주봉인 달래봉의 버섯골에서 전고에 없던 비상사건이 발생하였다.

도관(고려시기 노비소송을 취급하던 기관)에 근무하는 원외랑(도관의 정6품 벼슬아치) 하나가 노비추쇄(소속노비들을 조사, 재등록하고 그들로부터 신공을 수탈하는 일)를 나왔다가 그만에야 버섯골근처에서 형적없이 사라진것이였다.

원외랑이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명색은 당당한 조정의 관리라 형체없이 실종되고보니 조정이나 임금이 잠자코 있을리 없었다. 장계가 오르기 바쁘게 무조건 원외랑을 찾아내라는 임금의 교지가 떨어지였다.

원외랑의 행적을 찾기 위해 숱한 백성들이 버섯골로 떠밀려들어왔다.

얼마 안있어 버섯골 막바지에서 원외랑의것으로 짐작되는 허리띠와 노비안(노비등록대장), 사람의 머리털과 피자욱이 발견되였다.

더 말할것없이 오래전부터 달래봉주변을 감돌던 호랑이(소문에는 백년나마 묵었다는 늙은 호랑이의 잔등에는 하얀 버섯까지 듬성듬성 돋아있다고 했다.)가 노비추쇄를 위해 산중의 오솔길까지 갈피갈피 뒤지며 나돌아다니던 영악스러운 원외랑을 잡아먹은것이였다.

이것 역시 전고에 없던 호환이였다.

왕실과 조정에서는 재차 로망한 호랑이를 잡아바치라는 령을 떨구었다.

그러자 고을관가에서는 누구든 호랑이를 잡아바치면 황마포 50필을 상으로 주겠다는 방을 내붙이였다.

황마포는 개경에서도 특별히 재주가 있는 장공인들만이 짤수 있는 아주 정교한 포목이여서 값이 여간만 비싸지 않았다.

개경에서 황마포 닷필에 량곡 한평석(고려시기 용량단위, 한평석은 15말)을 아무 흥정없이 맞바꾸는 판이니 궁벽한 시골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황마포 50필이면 결코 작은 재물이 아니였다.

범 한마리를 잡아 큰 재물을 낚아보려는 탐심에 빠진 젊은이들, 자칭 무예에 능하고 담기있노라는 사내들이 줄달아 버섯골에 밀려들었다.

박위도 소문을 듣자 그날로 좋은 화살들을 골라가지고 버섯골에 들어섰다.

그는 물론 황마포가 욕심나서가 아니라 그지간에 련마한 자기의 무술을 실천적으로 시험해보고싶었던것이였다.

박위는 련 이틀째 버섯골의 숲속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호랑이의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사흘째 저녁무렵, 이제는 그만 떡심이 풀린 박위는 물녘에 퍼더앉아 싸가지고온 과자를 점심 겸 저녁으로 먹고있었다.

이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버섯골 막바지 선바위쪽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쩡쩡 골을 울리며 들려왔다.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난 박위는 무작정 선바위쪽으로 내달리였다.

울창한 소나무숲과 바줄타래처럼 엉켜붙은 댕댕이덩굴을 헤치고 선바위밑에 이르니 열길은 실히 될 날카로운 벼랑이 한눈에 바라보이였다.

벼랑우에서는 거의 황소만 한 호랑이가 금시 날아오르기라도 할듯 기둥토막같은 앞발을 벋디디고 늘씬한 허리를 휘친거리며 연해 으르렁거리고있었다.

그앞에는 몸집이 체소한 웬 사내가 칼을 뽑아들고 서있는데 그는 결정적인 공세를 취할 대신 주춤주춤 뒤걸음을 놓고있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범에게 물려죽기 전에 벼랑에서 굴러떨어져 죽을것 같았다.

박위는 지체없이 호랑이의 볼기짝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리였다.

궁력이 센 박위의 화살은 호랑이의 푸들진 볼기짝에 면바로 들어가 박히였다.

《으흐흥!》

난데없이 뒤쪽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호랑이는 너무도 놀라 한길이나 껑충 뛰여오르며 다급한 비명을 터치였다.

때를 놓칠세라 칼을 뽑아든 박위는 나는듯이 벼랑우로 치달아올랐다.

그때까지도 화살이 박힌 궁둥이를 비비탈며 어쩔바를 몰라하던 호랑이는 뒤쪽에서 나는 사람내를 맡자 홱 몸통을 돌리였다.

시뻘건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헌데 호랑이는 잔뜩 나이를 먹은 비둔한 놈이요, 박위의 화살에 궁둥이가 터진 부실한 놈이라 사나운 겉모양에 비해 동작은 그리 날래지 못했다.

병신스럽게 비척대며 달려드는 호랑이를 마주쳐나가던 박위는 별안간 몸을 한옆으로 홱 빗세우며 번개같이 칼을 비껴내리였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박위의 칼날은 미욱스럽게 곧추 날아드는 호랑이의 대가리뼈를 바수며 깊숙이 내리박히였다.

호랑이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방진 몸통을 서서히 비틀며 기운없이 나자빠지였다.

몸집 체소한 사내가 칼을 움켜쥔채 황급히 박위앞으로 달려왔다.

그가 바로 황마포 50필을 상으로 준다는 소리에 귀가 항아리만 하여 버섯골에 달려들었다가 방금 호랑이를 만나 다 죽을번 했던 조호백이였다.

호백은 박위의 손을 덥석 움켜쥐더니 목메인 소리로 웅얼거리였다.

《그대가 아니였던들 나는 필시 오늘로써 생을 마쳤을게요.

하늘보다 크고 산보다 무거운 그대의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오.

나는 저기 조촌동에 사는 조호백이라는 사람이요.》

박위는 인명을 구원한것도 기쁘고 자기의 무술을 성공적으로 시험해본것도 흡족하여 빙그레 웃음을 띠우며 손사래질을 했다.

《은혜는 무슨 은혜겠소.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여 내가 손을 쓴것인데…

아무튼 상한데없이 명을 보존했으니 천만다행이요.》

각기 제나름대로의 기쁨을 안고 말을 나누던 두사람은 얼마후 호랑이앞으로 다가섰다.

호백은 쓰러져누운 호랑이의 기름기 흐르는 잔등을 살살 쓸어만지던 끝에 조심스럽게 자기의 속을 터놓았다.

《우리 호랑이를 잡은 공을 절반씩 나누는게 어떻소?

호랑이를 잡기는 그대가 잡았으나 발견하기는 내가 발견했으니 그렇게 하는게 가장 공평할것 같구려.》

박위는 호백의 어딘가 뻔뻔스럽게 느껴지는 속심이 다소 불쾌했으나 아무 내색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구차스럽게 나누고 어쩌고 할게 없을듯 하오. 아닌게아니라 그대가 이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잡을수 있었겠소.

범을 잡은 공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있소. 상을 타는것은 나의 본의도 아니니 그대가 가져다 바치도록 하오.》

호백은 다 죽게 됐던 목숨을 살린것만 해도 하늘을 날것 같은데 한꺼번에 재물과 명성을 공으로 얻게 됐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도록 기뻤다.

허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그건 너무 렴체없는노릇 같소그려. 둘이서 상을 반분하는것이 가장 옳은 경우 같은데…》

《아니,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얻을것은 다 얻은셈이니 더 바랄것이 없소.

나는 이 길로 산을 내리겠소.》

박위는 호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나서 씨엉씨엉 산을 내리였다.

박위가 사라지기 바쁘게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냥군들이 사처에서 몰려들었다.

모두들 황소같은 호랑이와 호백을 번갈아보며 탄성을 터치였다.

호백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호기를 뽑았다.

《여보게들! 이 호랑이라는 놈이 듣던 소문보다는 약약하더구만.

내 단살에 이놈의 몸을 뭉청 주저앉히고 다음엔 단칼에 이놈의 대갈통을 바수어놓았소.

자, 이제는 그만들 구경하고 어서 한발씩 떠들고 관가로 가세.…》

호백은 그길로 관가에 내려가 푸짐한 상을 받고 푸짐한 치하를 받았다.

그후 무과시험을 볼 때도 호랑이 잡은 덕을 톡톡히 보아 그리 힘들지 않게 어보(임금의 도장)가 찍힌 합격증서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호백에게 있어서 박위는 생명의 은인인 동시에 벼슬길의 첫 대문을 열어준 고마운 은사였다.

그후 호백은 자주 박위네 마을에 찾아와 그와 함께 무술훈련도 하고 술도 마시였다. 헌데 두사람사이는 이렇다할 리유도 없이 차츰 뻐그러져나갔다.

호백은 호백이대로 박위의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박위는 박위대로 호백의 지나치게 경솔한 처사와 과도한 탐심이 비위에 거슬렸던것이였다.

두사람의 우정은 일년도 못되여 싱겁게 끊어져버리고말았다.…

…박위는 무관으로서의 자질은 차고넘치도록 풍부히 소유하고있었으나 인간생활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아는것이 적었다.

박위는 누구보다 호백의 래력과 됨됨을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를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았다.

지금도 박위는 김해관가에서 썩은 쌀과 너절한 반찬감을 보낸것을 호백이와 련관시켜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별로 크지도 않은 사건을 놓고 정도이상으로 심각하게 따져본것이 어딘가 옹졸하고 시시부나하게 생각되였다.

박위는 다시 군영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오천이 바투 따라서자 슬며시 고개를 돌린 박위는 말머리를 돌리였다.

《이 애 오천아,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우리가 주동적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자면 적지 않은 전함과 군사, 병기와 화약이 있어야 할텐데 그 모든걸 우리 군영의 힘으로 죄다 얻어내고 만들어낼것 같으냐 말이다.》

화제를 돌린다는것이 자기의 가슴에 늘 쇠쪼각처럼 아프게 맺혀있던 시름거리가 저절로 불쑥 튀여나왔다.

날은 살같이 흐르는데 일은 더디게 진전되고 화약과 전함 같은것은 얻어낼 방책은 묘연한데 임금과 최영은 아직 개경에 돌아오지 않으니 드세게 원정준비를 밀고나가면서도 가슴은 노상 무죽했다. 그러다보니 어망처망간에 일개 대정인 오천이한테까지 자기의 시름거리가 튕겨나간것이였다.

어찌 생각하면 남달리 총명하고 궁냥이 틔운 오천에게 언제부터 한번 해보고싶던 소리인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오천은 좀전의 울울했던 기색을 활 털어버리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모든것을 우리 군영이 안아올린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것입니다.

하오나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는데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떨쳐일어나면 그리 어려울것도 없을듯 합니다.》

오천은 때마침 박위에게 김해부사와 같은 껄꺼름한 량반님네들을 믿을게 아니라 자기와 같은 평범한 군사들과 백성들을 믿고 일을 다그쳐야 한다고 소리쳐웨치고싶던차였다.

말마디끝은 여느때없이 강개하게 여물궈지였다.

박위에게는 오천의 장담이 구체적인 타산이 안배된 대답이 아니라 주관적인 욕망에서 나온 뜬소리처럼 들리였다.

그런데도 왜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났다.

아직은 모든것이 안개속에 빠진듯 흐릿하고 료원하게 여겨지는 이 마당에서 하잘것 없는 일개 대정이기는 하나 추호의 의문도 없이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는것은 기쁜 일이였다.

의지가 되는 일이였다.

박위는 대체로 진중한 편이나 자기처럼 진중한 사람보다 쾌활한 사람, 락관적인 기분을 가진 사람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밀직부사를 지내는 최칠석이나 이곳의 오천에게 남다른 정이 가고 믿음이 가는지 몰랐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개운해진 박위는 틀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그래, 옛적부터 장부일언중천금이라 하였거늘 사내대장부가 한번 말을 내고 뜻을 세웠으면 시종이 여일하게 일을 내밀어 기어이 끝을 보아야지.…》

이것은 오천에게 하는 말이기 전에 때없이 뒤숭숭해지는 자기자신의 마음에 대고 하는 소리였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박위는 무춤 굳어지였다.

부지불식간 이처럼 사내싼 오천이가 아직도 둘레머리 로총각이라는 생각이 떠오른것이였다.

박위의 곱다랗게 생긴 입에서는 저도 모르는새 생청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애 오천아, 너 요즘도 구서방네 집에 더러 나가보느냐? 취금이한테 말이다.》

숫기좋은 오천이건만 박위의 입에서 불쑥 튀여나온 녀자 소리는 전혀 뜻밖이라 퀭하게 눈을 흡뜬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오천은 지난밤에도 구서방네 집 뒤담의 장독대곁에서 조용히 취금이를 만났었다.

취금은 얼굴도 둥실둥실하고 몸집도 두리두리한것이 덕성스러워보이기는 하나 삐여지게 인물이 고운 녀자는 아니였다.

하지만 오천의 눈에는 취금이가 세상에서 제일 고울뿐아니라 신기하리만큼 똑똑한 녀자로 보이였다.

오천이가 취금을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올해 삼월삼짇날이였다.

해마다 삼월삼짇날(음력 3월 3일)이 오면 박위는 어김없이 군영군사들의 무술시합을 조직하군 했다.

이것은 심심풀이로 해보는 일도 아니요, 제 흥에 겨워 벌리는 놀음도 아니였다.

옛적부터 고구려사람들은 삼월삼짇날이 오면 5부 군사들을 전부 동원하여 메돼지와 사슴을 잡아오게 한 후 그것으로 하늘과 산천신에게 제사를 하는것을 어길수 없는 관례로 지켜왔다.

이것은 단순한 사냥놀이나 제사행사가 아니라 명절을 기화로 병사들의 무술의욕을 더욱 높여주고 무술조련을 한층 다그치려는 상무기풍의 한 발현이였다.

헌데 고구려의 혁혁한 유풍은 날로 쇠미해지여 이제는 삼월삼질이 오면 문관들은 물론 무관들까지 의례 산에 올라가 꽃구경을 하고 꽃지짐에 꽃국수, 꽃술을 마시며 명절의 하루를 흥청으로 즐기였다.

하지만 박위는 자기의 군영에서만이라도 고구려의 전투적인 상무기풍을 면면히 이어가고싶었다.

군사들에게 꽃보다 검을 더 사랑하는 정신을 키워주고싶었다.

하여 그는 삼월삼짇날이 오면 군사들속에서 사냥경기와 무술시합을 진행하는것을 정례화하였다.

올해 삼월삼짇날.

처음으로 무술시합에 참가한 오천은 말타기와 활쏘기, 검술과 창쓰기 등 모든 종목에서 단연 1등을 하였다.

박위는 오천에게 상등으로 쇠가 좋은 검 한자루와 맛좋은 계피술 한방구리를 상으로 주었다.

상을 타자 오천의 뇌리속에는 제일먼저 선량하고 근실한 구서방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때인가 바다에 나갔다가 왜구들의 쇠장대에 얻어맞아 한쪽팔을 잃은탓에 곰배팔이라는 소리를 듣는 구서방은 누가 시키지도 않건만 틈만 있으면 그 부실한 몸으로 화살을 만들 대나무단을 묶어가지고 군영을 찾아오군 했다.

그러는 구서방을 볼 때마다 오천은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언제이건 구서방에게 단단히 인사를 차리고싶었다.

그러던차에 저로서는 희한하기 그지없는 상을 타게 되자 그길로 구서방을 찾아간 오천은 제잡담 술방구리부터 꺼내놓았다.

구서방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 군사를 우정 모셔다가 대접은 못할망정 군사의 1등상을 빼앗아먹어서야 어디 백성의 도리가 됐느냐.》고 펄쩍 뛰였다.

하지만 오천의 소탈하고 끈덕진 고집으로 하여 두사람은 종시 술상앞에 마주앉게 되였다.

그 자리에서 오천은 연해 웃음발을 날리며 술시중을 드는 구서방의 딸 취금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였는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처녀역시 군사일을 제일로 중히 여길뿐아니라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 자기를 으뜸가는 사내로 쳐주는듯싶었다.

그날의 일을 빌미로 오천은 구서방과도 친해지고 취금이와도 친숙해지였다.

취금은 지금까지 오천을 정성스레 대접해주고 허물없이 대해주기는 했으나 유별스러운 소리 같은것은 한마디도 꺼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천은 자기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것이 무슨 큰 공이라도 되는듯 말끝마다 1등군사라고 추어올리면서 번마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처녀를 무심히 대할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명랑하고 천진한 처녀, 담차고 오달진 취금에게 마음이 끌리였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취금이와 마주서기만 하면 오천의 입에서는 제 듣기에도 한심한 말마디만이 불려나갔다.

엊저녁에도 오천은 자신만만하게 취금이를 불러내기는 했으나 입을 여니 어느결에 또 씨알머리없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취금이! 나 말이야, 장군을 따라 해변고을들을 나돌아다닐 때 취금이가 보고싶어 혼났다구.》

취금은 희고 가쯘한 이를 박속처럼 하얗게 드러내기는 했으나 서운하게도 그의 대답말속에는 싸늘한 랭기가 섞여있었다.

《누가 그따위 실없는 소리나 듣겠대?! 그런 말이나 하려거든 난 집안으로 들어가고말테야!》

《사실이 그런데 그렇다고 말도 못할가? 정말이지 취금이 생각을 하면 마음도 즐겁지만 없던 힘이 불끈불끈 생기면서…》

《아유, 징그러워! 1등군사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게 다야?》

처녀의 말마디는 차거웠으나 오천의 생각은 제 좋을대로 흘러갔다.

(취금이는 말끝마다 나를 1등군사라는데 내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것이 그리도 마음에 드는가?

취금의 속마음이 정녕 그렇다면 취금이야말로 내가 사랑해야 할 하나밖에 없는 처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자 어느결에 또 어리석은 말마디가 불려나갔다.

《난 말이지 취금이가 없이는 못살것 같애. 취금이가 있으니 마음은 항상…》

맥락이 닿지 않는 소리를 웅얼거리던 오천은 불현듯 저로서도 알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에 떠밀리워 처녀의 탐스런 머리태를 감아쥐였다.

《어머머! 남의 머리태는 왜 잡아다리는거야? 흉측스럽게…》

취금은 황급히 등뒤로 손을 보내여 자기의 머리태를 당기려들었다.

오천은 얼결에 처녀의 통통한 손까지 덥석 움켜잡았다.

취금은 실팍한 상체를 두어번 세차게 뒤틀더니 곧 잠잠해지였다.

취할듯 한 기분에 휩싸인 오천이 무슨 말인가 또 동닿지 않는 소리를 꺼내려는데 취금은 와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오천을 쏘아보며 랭랭한 어조로 말했다.

《난 집에 들어가겠어.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낮에는 염초장일을 보시구 밤에는 밤대로 화살감을 다듬으시는데 내가 모르쇠를 해서야 그게 몹쓸년이 아니구 무어야?》

오천은 처녀의 심정이야 어떻든 그의 작별선언이 무척 서운하였다.

아무리 아버지의 손을 돕는 일이 바쁘다 한들 달밝은 이 저녁 오랜만에 찾아온 사내에게 살뜰한 말 두어마디쯤이야 왜 못해준단 말인가?!

《그러니 취금인 내가 안중에 없단 말이지?》

《흠! 어떤년이 저같이 늙은 총각한테 마음을 준담.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나 욕먹어.…》

처녀는 통통한 몸집을 놀라우리만큼 민첩하게 놀리여 장독대를 씽에돌더니 어느 틈에 집모퉁이로 꼴깍 사라져버리였다.…

오천은 박위에게 간밤의 일을 사실대로 아뢰기도 딱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수월치 않아 끙끙 갑자르던 끝에 잘 할줄도 모르는 거짓말을 힘겹게 번져놓았다.

《명색이 군사라는 사람이… 지금처럼 바쁜 때… 어찌 계집이나 찾아다니겠습니까?》

박위는 오천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였다.

그러자 여직껏 해본적 없는, 자기로서는 다소 게면쩍은 느낌이 드는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자고로 군사라 하면 아무런 정도 나눌줄 모르는 돌상같은 사람이여야 하는가?

아니, 꼭 그렇지도 않은게야.

우선 나부터가 리옥을 생각하면 아픔과 그리움이 열배로 가증되고 대마도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한시바삐 되찾아올 결심이 백배로 굳어지지 않는가.

이런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인생의 부담일수 없느니…

사랑은 분명 인생을 추동하는 열이고 힘이고 아름다움이라 해야 할게다.

헌데 언제부터 나의 가슴에 리옥의 모습이 이리도 깊숙이 새겨지였고 언제부터 그의 존재가 내 심장을 이리도 아프게, 이리도 뜨겁게 휘저어주기 시작했는고?!…)

박위는 다시는 이룰수 없을것 같은 자기의 사랑, 시작조차 떼보지 못한 자기의 서글픈 사랑이 새삼스레 애석해났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서성거리던 박위는 오천에게 또박또박 뇌이였다.

《이 애 오천아, 군사라 하여 목석처럼 살라는 규례는 없는거다.

내 혼자 생각인데 이 땅이 사무치게 귀중한것은 아마도 정다운 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이여서 더욱 그럴게다.

우리 군사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내대고 싸우는것 역시 어느 누구보다 이 땅과 정다운 사람들을 더 열렬히 사랑하기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취금에게 정이 가거들랑 열심으로 정을 나누어라, 군사답게 말이다.》

이것은 박위자신도 여직껏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였다. 이런 말이 스스럼없이 터져나온것이 자기로서도 이상하고 놀라왔다.

잠시후 박위와 헤여진 오천은 앞동네쪽으로 덜레덜레 나가다말고 무춤 굳어지였다.

자기 손에 들려있는 그리 크지 않은 꾸레미를 감촉한것이였다.

그것은 오천이가 바다가에 나갔다가 다시 군영으로 올 때 마을어구에 지켜서있던 취금이가 안겨준것이였다.

그때 취금은 엊저녁과는 판다르게 정찬 어조로 말했다.

《요즘 장군댁 도령이 몹시 앓는다지? 왜구에게 끌려간 리옥아씨 생각이 가슴에 맺히여 그리도 심하게 앓는다니 년소한 도령의 속이 얼마나 깊으면 그럴가.

이건 앵두인데 말랑말랑하고 달큼한게 맛이 폭 들었더라구.

군영에 들어가거든 도령에게 대접해주어. 그리구 1등군사에게 줄건 따로 건사해두었어.

이따 저녁때 나오면 꺼내줄게.…》

례장받은 벙어리마냥 저혼자 히죽벌쭉 웃으며 취금이를 만나던 광경을 되새겨보던 오천은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아무래도 취금의 마음은 조화속이다.

다시는 제집에 오지 말라더니 오늘 저녁에 또 나오란다.

게다가 내 몫으로 따로 간수해둔 첫물앵두까지 꺼내주겠단다.

그리구 1등군사라는 말은 또 얼마나 마음에 흐뭇한가.

내가 운수가 좋아 어쩌다 1등을 했지마는 사실 1등군사라고야 할수 있는가.

그런데도 취금이는 굳이 나를 1등군사란다. 취금이는 정말로 나를 우리 군영에서 제일가는 군사로 치부하는가.

아닐거야.

취금이는 나에게 군사를 더욱 열심히 배워서 고려국의 제일가는 군사가 되라는 당부를, 우리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왜구를 제일로 많이 잡아달라는 소원을 그렇게 말하는걸거야.

그러고보면 취금은 얼마나 속이 깊은가.

정말 장군의 말씀대로 나에게는 취금이라는 처녀가 있어 이 땅이 더욱 소중하고 우리의 군사일이 더욱 성수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애 취금아, 내 기어이 1등군사가 되여 대마도공격전의 그날 제일로 큰 공을 세울테니 조금도 념려말아.

여적 이 오천이가 결심을 다져서 못해낸 일이란 없단다…

생각을 마친 오천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듯 기운차게 활개를 치며 박위의 처소쪽으로 되돌아올라갔다.

저녁밥 지을 물을 뜨러 나가던 군사 여러명이 요즘에 들어 별스레 성급해지고 분주해진 오천을 저으기 놀란 눈길로 바라보았다.

허나 오천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도 현중에게 앵두꾸레미를 넘겨주고나서 잠시잠간 취금이를 만나보고는 그길로 염초장에 나가 장밤을 새워야 하는 오천이였다.

9

9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중천을 바라고 둥깃둥깃 떠오르자 앞쪽의 솔숲에도, 동쪽내가의 버들숲에도, 실실이 내리드리운 버들가지들사이로 빠금빠금 내다보이는 잔잔한 내물우에도 희푸른 달빛이 가득 덮이였다.

내가는 고요하고 저녁의 대기는 싱그러운 꽃내, 풀내로 그득 들어찼는데 고르로운 풀밭우에 펼쳐진 돗자리우에는 류두명절날음식이 울긋불긋하게 차려져있었다.

그런데다 곁에는 인물곱고 기예 뛰여나며 고임성과 붙임성이 뛰여나게 좋은 김해관가의 1등명기 매화가 해반주그레한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을 피우고 바싹 다가붙어있었다.

빠진것없이 차려져있는 류두명절의 저녁상이요, 손만 내뻗치면 무엇이든 집을수 있는 풍성하고 아늑한 좌석이였다.

하건만 단정하게 올방자를 고이고앉아 휘휘 사위를 둘러보는 호백의 희좁은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덕지덕지 발려있었다.

아까부터 호백의 음울한 기색을 할깃할깃 훔쳐보던 매화는 마침내 사내의 척 늘어진 팔을 가볍게 잡아흔들며 간지러운 애교를 떨었다.

《아이유 원님, 어인 일로 이리도 심란해하시오이까. 오늘이야 년중의 명절중에서도 제일로 운치있고 재미스러운 류두명절이 아니오니까?!》

호백은 멀리 군영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푸녕스럽게 대답했다.

《이년아, 아무리 운치있고 재미스러운 명절이래도 내가 흥이 나지 않는데야 무슨 소용이냐?》

계집은 앵두알처럼 도드라진 빨간 입술을 살살 감빨며 더한층 아양을 떨었다.

《어야나! 커다란 김해고을을 떡반죽처럼 쥐락펴락하시는 원님께서 이 기쁜 날 흥이 나지 않으시다니 이 어인 일이오니까?》

《이년아, 자발스러운 소리 작작해라. 속 상한다.》

《아유! 말씀을 지망지망히 해서 죄송하오이다.》

호백의 등을 문지르고 배를 쓰다듬으며 갖은 애교를 다 부리던 매화는 호백이 눈을 부라리며 짐짓 노여운체 하자 가장 황송한듯 나부시 고개를 숙이였다.

허나 사내다루기를 개떡 주무르듯 하는 계집은 벌써 호백의 얼어붙었던 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있음을 여실히 느낀듯 살그니 입을 가리고 뜻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조호백이 경상군영에서 상원수벼슬을 지내다가 여기 김해고을 부사로 돌아앉은지는 올해까지 꼭 다섯해가 되였다.

호백이 상원수노릇을 할 때까지만 해도 매 도의 군영에는 상원수요, 도원수요, 병마원수요 하는 동급의 군사장관들이 거의 10여명이나 되였다.

그로 하여 지방군은 도저히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수립할수 없었다.

일이 제기되면 매 원수들은 저마끔 마음내키는대로 령을 내리고 그에 따라 군사들은 방향없이 밀려다니였다.

당시 어느 고을 만호로 있던 박위는 누구보다 먼저 이러한 페단을 포착하고 임금에게 매 도에 한명의 원수를 두고 그에게 도안의 모든 군사들이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리였다.

임금은 최영과 거듭 토론한 후 박위의 건의를 조정의 군사정책으로 집행할것을 명령하였다.

그 바람에 숱한 원수들과 함께 호백이도 상원수자리에서 밀려나 김해부사로 내려앉았다.

사실 상원수에서 김해부사로 돌아앉은것은 거의나 동급조동에 가까왔다.

허나 도의 군사장관을 1명으로 규정하고 모든 원수들을 축출하도록 한 임금의 조치를 최영과 결탁한 박위의 음모로 여긴 호백은 자기의 조동을 무서운 좌천으로 생각하였다.

하여 호백은 이를 으득으득 갈며 군영을 나섰다.

헌데 정작 김해관가의 높직한 동헌마루에 올라앉고보니 최영과 박위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은 가뭇없이 사라지였다.

남해와 락동강하류를 끼고있는 김해는 땅이 비옥하고 물자원이 풍부한데다 기후가 온화하여 곡식과 과일이 여느 고장에 비길바없이 잘되였다.

희고 찰기 좋은 김해쌀, 대저벌에서 나는 김해배와 진영벌에서 나는 김해단감은 경향각처에 특히 이름이 높았다.

물고기 또한 없는것없이 다 잡히였다.

명지 앞바다와 록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칼치와 도미, 전광어와 숭어 같은 해산물들은 덩지가 크고 맛이 특이하게 좋아 나라안에는 물론 나라밖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헌데 그 모든 희귀한 재물이 호백의 줌안에 들었으니 엎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는 항간의 속담은 얼마나 그럴듯한가. 게다가 걸핏하면 위험천만한 전장에 뛰여들어야 하는 무관의 전복과 칼을 벗어놓았으니 마음은 또 얼마나 편안한가!

워낙 재물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호백은 우선 고을밖으로 개미 한마리 새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책을 세웠다. 하고는 손수 팔을 부르걷고나서서 살살 털을 불어가며 고을안의 알짬들을 찰찰하게 발그집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합법적으로 내려먹일수 있는 조세와 공물의 액수를 규정액보다 배로 높이였다.

또한 별선이라는 명목으로 각 촌의 술과 어물을 끌어들이고 잡공이라는 명색으로 밤과 대추, 개암과 같은 산열매들까지 끌어들이였다.

호백은 원노릇을 시작한지 불과 얼마 안되여 열칸도 넘는 너렁청한 광속에 각색 재물을 둥덩산같이 쌓아놓았다.

매일과 같이 주지육림에 파묻히여 풍청거리면서 기회가 생기는대로 임금과 조정의 재상들에게 품들여 마련한 뢰물을 섬기고 진상을 올리였다.

우황든 소마냥 껍질만 남은 백성들은 울며불며 원망을 터치는데 저멀리 개경의 만월대 궁궐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나라님과 재상들은 호백이를 두고 기특하다, 예쁘다 온갖 칭찬을 다 하였다.

호백은 정녕 살맛이 났다.

부귀는 날을 따라 늘어만 가고 권세는 온 고을에 샅샅이 뻗쳤는데 귀맛좋은 칭찬은 비발치듯 내리지 않는가!

이럴 때 재미나는 골에서 범난다고 호백이 그리도 절치부심을 하던 박위가 경상군영의 원수가 되여 김해로 내려왔다.

호백은 아뜩했다.

얼마간 흐릿해졌던 박위에 대한 반감은 다시금 바람맞은 숯불처럼 빨갛게 살아올랐다.

(그런즉 박위 너는 그때 벌써 여기 군영의 원수자리를 노리고 그따위 얼쑹덜쑹한 건의서를 올렸댔구나.

어쩌면 사람이 그리도 간특하고 모질수 있단 말이냐?!)

호백은 박위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갈고 치를 떨면서도 은근히 간이 오무라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확실히 박위는 두려운 존재였다.

재산이라고는 허리에 찬 칼 한자루밖에 없으면서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군사일에만 전념하는 청렴하고 강개하고 헌신적인 박위의 눈앞에서 예전처럼 마구 으르렁거리며 갈퀴질을 해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아침새 욕심스러운 마음과 생활습벽을 헌데딱지 뜯어내듯 떼내칠수도 없는노릇이였다.

호백은 군영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조심스레 공안(고려시기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국가세입을 기록한 장부)의 세입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인납(다음해공물을 미리 받는것)을 실시하였다.

수조지(정부로부터 전세를 내기로 하고 빌린 땅)의 규정액도 살금살금 불구어놓았다.

그밖에도 가지가지 교묘한 오그랑수를 계속 펼쳐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묘한 착안이나 음모라 해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법이다.

협잡과 권모술수가 하나, 둘 들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박위는 자기가 직접 관가에 찾아오거나 윤통이 같은 감때사나운 군영장수들을 보내여 오금을 박군 했다.

《왜구의 침탈로 고통을 받고있는 백성들인데 관가에서까지 핍박을 해서야 어디 살아내겠소?

관가의 공사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겠소만 웬간하면 조금 늦춰주시구려.》

《부사도 아다싶이 이 고장 백성들은 장차 군사로 쓰거나 군사일의 협력군으로 써야 할 사람들인데 초보적인 생계야 살펴주어야 하지 않겠소?》

호백은 차츰 사지가 가드라들었다.

권세도 예전처럼 마구 휘두를수 없었고 부귀도 예전처럼 마음껏 누릴수 없었다.

그럴수록 박위에 대한 반감과 격분은 부풀어올랐다.

더우기 요즘에 와서 군사일의 판이 더욱 크게 벌어지자 이제는 그만 박위의 이름만 들어도 이가 으득으득 갈리고 소름이 오싹오싹 내돋았다.

박위는 관가에 대고 내라는것이 많기도 했다.

군사들을 뽑아올려라, 군량과 반찬감을 바쳐라, 각색 장공인들을 골라보내라, 배널과 쇠쪼박따위를 모아바쳐라.

지어 염초를 만드는데 필요한 나무재까지 긁어내라.…

부르는대로 꼬박꼬박 섬겨바칠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번마다 모르쇠를 할수도 없었다.

그래 초기에는 눈치를 보아가며 미움이나 사지 않을 정도로 졸금졸금 보내주었다.

그러자 박위는 만날 때마다 건건이 찍어가며 우뢰질을 하였다.

거짓열성이라도 보이지 않고서는 견디여배길것 같지 못했다.

그 거짓열성바람에 피를 졸이며 뭉그려들인 갖가지 재물이 뭉텅뭉텅 관가밖으로 떠실려나갔다.

그때마다 호백은 생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고 선지피가 줄줄 새나가는듯싶었다.

괴로움과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였다.

요즘 박위와 군영의 장교들, 지어 보잘것 없는 군졸들까지 자기나 관가의 구실아치들을 소 닭보듯 하면서 걸핏하면 시비질, 엇드레질을 하려 들었다.

죽촌을 다녀온 그날 저녁도 호백은 밤늦도록 비단이부자리에서 궁싯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을관하의 한개 마을이 알쭌한 페허로 화한것도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박위와 윤통의 샅짬에 끼워 짚새기공처럼 이리 굴리우고 저리 굴리운것이 복통이 터지도록 분하였다.

(한개 고을의 방백이라면 조정의 재상들과도 떳떳이 항례(대등한 례로 대하는것.)를 할수 있는 나라의 당당한 관헌인데 이제는 시골의 무관나부래기들까지 내놓고 모욕을 하고 조롱을 하자고드니 이게 귀구멍이 막힐 일이 아닌가.

그놈의 군영은 왜 하필 우리 고을안에 들어와가지고 이 야단인가.

뭐니뭐니해도 제일로 괘씸한 놈은 박위 그 작자로다.)

군량바리를 마련해가지고 군영에 갔던 배뚱뚱이 호장이 매를 얻어맞고 징징거리며 돌아온 날 밤에는 너무도 기가 막히여 혼자 화술을 퍼마시며 기염을 토하였다.

《윤통이 너 이놈! 무엇이 어쩌고 어째? 〈너희 골 부사대신 매를 좀 맞아보라.〉고? 그러니 나를 때릴수 없어 호장을 두드린단 소린데…

어이구, 네놈이 그따위 불공설화를 늘어놓으며 몽둥이를 휘둘러댈때는 이 조호백을 거랑말코지쯤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냐.

오냐, 어디 두고보자.

네놈이 그렇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마구 날뛰는것도 구경은 박위를 등대고 하는 수작이렷다.

이놈들, 소금도 쉴 때가 있고 박달나무도 좀쓸 때가 있다더라. 어느때건 때가 오거든 내 네놈들을 모짝 한바리에 처실어서 저 율하천의 룡소에 꺼꾸로 처박아넣을테다.》

호백이도 물론 박위의 덕을 아주 모르는것이 아니였다.

오래전에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것은 더 말할것 없고 근일에 와서 박위의 군영이 김해에 있기에 이 고장에는 왜구의 침노가 극히 드물다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죽촌참변의 책임도 박위가 제 혼자 홈빡 뒤집어쓰고 나섰기에 그에게는 조정의 질책과 비난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지만 자기에게는 비방울 한꼬치 닿지 않았다는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박위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감소돼가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아니, 박위에게 입은 덕, 입고있는 덕은 날이 갈수록 별치 않게 생각되는 반면에 박위로 하여 당한 손해, 겪고있는 손해는 바람먹은 숯불마냥 더욱 따갑게 살아올랐다.

분노는 반격과 복수의 의지를 격증시켰다.…

…호백은 희푸른 달빛에 묻혀있는 내가의 고즈넉한 밤경치를 얼없이 살펴보며 검칙칙한 사색을 여념없이 씹어나갔다.

(장차 이 일을 어쩌면 좋을고?!

재물을 그러모으는 재미도 없고 권세를 휘두르는 멋도 없이 원노릇을 해서 무엇한단 말이냐.

차라리 종형대감께 내직으로 벼슬을 옮겨달라고 품해보는게 어떨가.

(호백은 시골구석에 박혀있으면서도 얼마전 좌군도통사로 료동원정에 나갔던 자기의 사촌형 조민수가 리성계와 함께 원정을 포기하고 개경에 돌아온 사실을 환히 알고있었다.)

아서라, 아직은 종형대감의 일도 조금 더 두고봐야 한다.

요즘 리성계대감이 무엇때문인지 우리 종형을 곱지 않게 본다던데 그에게 붙어돌아가다가 만일 종형이 밀려나게 되면 내게도 그 불똥이 튀게 될게다.

하다면 이 자리에 그냥 붙박혀있을수도 없고 내직으로 옮겨앉을수도 없으니 이야말로 호미난방이 아닌가?!…)

《아이고 원님, 이 팔을 어이 하오리까. 원님께서는 어이하여 이 매화를 이다지도 하대하시오이까?!》

매화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려왔다.

그제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여난 호백은 번쩍 눈을 치떴다.

술잔을 받쳐든 매화의 하얀 두손이 턱밑에서 살래살래 춤을 추고있었다.

호백은 얄팍한 입술에 연한 웃음기를 띄우며 헌헌히 술잔을 받아들었다.

《이 애 매화야, 내가 너를 박대할 까닭이 있느냐. 마음이 하도 어수선해서 그러는게다.

누구니누구니해도 내 마음을 위로할건 다만 매화와 술뿐인가 하노라.》

말을 마친 호백이 술잔을 쭉 찌워버리자 매화는 기다란 저가락으로 수란(삶은 햇보리와 농마를 오미자물과 꿀로 반죽하여 만든 류두날 음식.) 한덩이를 집어 사내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고는 미색이면 만사통과라는듯 서슴없이 호백의 무릎우에 말궁둥이같은 엉치를 넌떡 올려놓으며 종달새 열씨까듯 종알거리였다.

《원님, 소녀가 듣자하니 요즘 군영의 박장군께서 가는 곳마다 군사일을 벌려놓고 백성들을 못 견디게 지지고 볶는다던데 혹여 그로 해서 원님의 마음이 상하신게 아니오니까?》

술기운이 퍼지여 툭툭 높뛰는 호백의 가슴속으로는 계집에게 무작정 너그러워지고싶은 얼간이의 자비심같은것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헛허, 네년이 신통맹통하게 알아맞추는고나. 정말이지 박위라는자가 내 고을을 타고앉아 좌지우지하고있으니 내 마음이 어찌 순편할수 있겠느냐?!》

《아유, 원님도 참 답답하셔. 박장군의 속내를 뻔히 아시면서도 곱게 두손 동여매고 앉아 강건너 불보듯 하시니, 원 참.》

《이년아, 그놈이 노상 임금의 어명과 병부의 군령을 부작처럼 휘두르며 날뛰는데 뭐라고 대거리를 한단 말이냐?

소갈머리없는 소리 작작해라.》

호백의 무릎우에서 그네라도 타듯 살집좋은 궁뎅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아양을 떨던 매화는 갑자기 두눈이 동그래지며 오똑 굳어지였다.

《소녀가 소갈머리 없다니요?

원님이야말로 천군만마를 호령하시던 상원수시절의 그 기상을 죄다 버린듯 하오이다.》

호백은 매화의 당돌한 대꾸질에 부아가 난듯 짐짓 눈을 흡뜨더니 이내 낯색을 풀며 당치도 않은 허세를 부리였다.

《이런 살똥스러운 년 보았나. 이년아, 내 비록 검을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상원수시절의 기상은 그대로 가지고있느니.

이제라도 호풍완우(바람을 부르고 비를 몰아오는 재주)도 할수 있고 둔갑장신(몸을 감추는 재주)도 할수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어이하여 원님을 시동다루듯 하려드는 박장군을 그냥 내버려두나이까?

원님을 극진으로 보살펴드리고 따르는 소녀는 그게 안타깝소이다.》

취기에 젖어 떨떠름해진 사내를 제 마음대로 주물러대던 매화는 이제야말로 가장 긴요한 이야기를 한다는듯 사뭇 긴장된 시선으로 사위를 휘둘러보더니 앵두알처럼 빨간 입술을 호백의 귀바투에 가져다붙이였다.

《원님, 듣자니 요즘 박장군이 왜구를 치겠노라며 분주탕을 피우고있는데 그게 사실은 저들의 역적모의를 가리우기 위한 방편이라고…

알만 한 량반들은 모두 뒤에 돌아앉아 수군수군한답니다.》

《무웨? 역적모의? 그게 무슨 소리냐?!》

호백은 자기의 곁에서 금방 화약무지가 터지기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갈고리눈을 한껏 흡떴다.

(이년이 안면이 너르다더니 못 물어들이는 소문이 없구나.

박위가 역적모의를 한다?! 그러니 조정을 뒤집어엎을 반정을 준비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게 정말일가, 아니면 매화가 나를 돕고싶은 마음이 하도 간절한 나머지 그런 생먹은 소리를 지어냈을가?)

호백의 가슴은 쿵쿵 높뛰였다.

호백이 알건대 매화는 전라도 령광의 어느 촌락에서 살다가 몇해전에 왜구에게 량부모를 다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김해에 들어와 어느 아전의 천거로 기적에 오른 녀자였다.

호백은 올해 정초 초닷새 자기의 생일잔치때 처음으로 매화를 보게 되였는데 첫눈에 그만 홀딱 반해버리였다.

매화의 나이는 올해 들어 열아홉, 휘친하게 쭉 빠진 몸에서는 한창 피여나는 매화꽃같은 싱싱한 기운이 약동하는데 요염하게 생긴 이쁜 얼굴에서는 노상 사랑의 욕구같은것이 지글지글 끓고있었다.

그때부터 호백은 기회가 생길 때는 물론이요 기회가 없을 때도 우야 기회를 만들어가지고 매화를 제곁에 불러들이군 했다. 매화를 끼고있으면 시간가는줄을 알수 없었다.

함께 술을 마시기도 즐겁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재미있었지만 시들시들한 호백의 몸에 향내풍기는 매화의 단단한 육체가 밀착해 들어올 때면 이루 형언키 어려운 무아경의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관가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우리 원님이 정사는 아주 전페하고 매화에게 빠져 세월 가는줄 모른다.》는 뒤소리가 쉬쉬 나돌았다.

그런데도 호백은 조사때마다 상판에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나서서 《매화로 말하면 량부모를 다 왜구에게 잃은 불쌍한 애인데 우리가 잘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도 그 애 일에 깊이 관심을 돌리느라 하지만 너희들도 그 애를 각별히 살펴주어라.》 하고 자기가 마치 양아버지노릇이나 하는듯이 얼레발을 떨었다.

일이 이쯤 되고보니 계집에게 혼이 빠진 어리석은 사내들이 대개 그러하듯 호백의 눈에는 매화의 모든 언행이 하나같이 신통맹통하게 보이였다.

호백은 매화가 방금 귀속말로 일러준 말도 훌훌히 스쳐버리게 되지 않았다.

아니, 매화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뜻밖에 얻어가진 홰불마냥 무등 반가왔다.

호백은 박위가 음흉하게 뒤에 돌아앉아 반역음모같은것을 꾸밀 사람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사건건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박위를 일격에 제거할수 있는 단서가 생긴 이상 그것을 버리고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한껏 확장하여 본때있게 써먹어야 했다.

호백은 너무도 긴장하여 돌부처처럼 굳어진채 당치도 않은 제나름의 리치를 억지다짐으로 전개해나갔다.

(…세상에 역적모의를 할 놈이 어디 따로 있다드냐. 박위쯤 그악스러운 놈이면 역적질도 능사로 할수 있으렷다.

그렇지, 그놈이 작년에 해변고을들에 상비군을 내오자고 제의를 한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일이 아니다.

요즈음 불시에 군사일의 판을 크게 벌리는것도 반역을 바싹 다그치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각빨리 역적고변을 해야 한다. 조정의 형세인즉 때마츰하다.

리성계대감이 회군한 후 임금은 왕좌에서 밀려나고 최대감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때는 누구도 세상일의 꼬리대가리를 판별할수 없는 때다.

이런 때 고변을 하면 십중팔구 내 뜻대로 성사되리다.)

사람이 약으면서도 경망스러운 호백은 이렇게 결심이 서자 금시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듯싶었다.

속이 훅훅 달아오르고 숨이 헐헐 가빠났다.

허나 저로서도 엄청나게 생각되는 자기의 비밀한 속내를 함부로 발설하고싶지 않았다.

겁이 나기도 하고 아직은 모든 일을 좀더 무르익혀야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참이나 모주 먹은 수돼지마냥 어깨를 들썩거리며 헐헐 가쁜숨을 내불던 호백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자 무슨 장난이라도 하듯 매화의 하얀 볼을 다독이며 짐짓 딴전을 부리였다.

《이 애 매화야, 설마하니 박장군께서 역적모의를 하겠느냐?

항간에 떠도는 소리를 그대로 믿어서는 못쓰느니.

자,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이야 동류두목욕날인데 동쪽내가에 나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부정을 말끔히 털어버려야지.

액막이술은 이미 마신셈이니 이제 목욕만 정히 하면 이런저런 시름거리도 날아나겠지.…》

호백은 아까와는 전혀 딴판으로 활기있게 주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참 얼결에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린 호백은 갑자기 후두두턱을 떨며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저게 무어냐, 엉? 저게…》

지금껏 호백의 표정을 놓칠세라 여겨보던 매화는 침착하게 치마폭을 휘감아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록산은 크고작은 지류들을 수없이 품어안고 흘러내리는 락동강의 드넓은 하류와 끝간데없이 펼쳐진 남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평야지대였다.

그러니 여기 내가의 두두룩한 등성이우에서는 락동강하류와 바다가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내다보이였다.

역시 달빛이 하얗게 내린 바다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와 소리까지 질러대며 끓고있는데 그 광경에 호백은 그리도 놀란것이였다.

주의깊게 바다가를 살펴보던 매화는 놀라기는커녕 싸늘한 미소를 띄우며 씹어뱉듯이 말하였다.

《요즘 군영군사들은 저렇게 밤에도 배를 뭇고 화약을 뽑느라고 복새를 떨고있소이다. 듣자니 대마도로 쳐나갈 준비를 차린다는데 그게 혹시 저들의 반정준비를 가리우려는 수작이 아닌지… 누가 알겠소이까?》

매화는 박위네가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소리는 누구에게서도 들은적 없건만 호백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마구 주어섬기였다.

아니나다를가 호백은 다시한번 크게 놀라 염소수염이 매달린 강파른 아래턱을 후두둑 떨었다.

그의 뇌리속에서는 연해 섬광같은것이 번쩍거리였다.

(이게 또 웬떡이냐?

그래, 그렇게 들떼놓고 역적고변을 할게 아니라 박위가 그 무슨 대마도원정준비를 차린다는 방편뒤에서 반역을 준비한다고 하면 얼마나 그럴듯한가?!

정말 박위 저자가 반역을 하기는 하려는가부다. 그렇지 않고야 저다지 기를 쓰고 날뛸리가 있겠는가. 한즉 일각이 여삼추로다.)

호백이 오늘 관가에서 수십리나 떨어진 여기 록산으로 조용히 나온것은 고요한 내가에서 젊고 예쁜 기생년을 짓주무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보려는 욕망도 있었지만 보다는 군영의 동태를 제 눈으로 살펴보고싶은 아기뚱한 마음이 작용했기때문이였다.

헌데 바늘을 찾다가 송이버섯을 발견한 격이라 할가, 개천을 치다가 금덩이를 얻은셈이라 할가.

록산에 나오자 앉은자리에서 역적고변의 기틀을 물샐틈없이 세운데다 인생의 새 출구까지 명확히 내다보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무엇을 더 캐고 따질것없이 대마도원정준비를 코에 걸어가지고 역적고변을 해야 한다.

잠시라도 시각을 늦구어서 저 야단스러운 원정준비가 계속된다면 나는 박위네들에게 더욱 괴퍅한 모욕과 행패를 당할것이요, 지금껏 고수해온 재물까지 깡그리 다 털리우고말게다.

박위 너 이놈! 버러지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온 세상이 다 아는 명관이요, 조민수대감의 사촌동생인 이 조호백이 노상 두손 동여매고 앉아 네놈의 무쌍한 행패를 곱게 당하고있을줄 아느냐.

그리구 윤통이 너 이놈― 네놈도 가재새끼 바위등대듯 박위를 등대고 나서서 무서운것없이 날뛰고있지만 이제 당해보아라.

대가리를 삶으면 귀도 익기마련이라더라.)

호백은 잔뜩 몸이 달아오른 탓에 요즘 새로 류행되는 자기의 양태넓은 새 갓이 풀밭에 구겨박힌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가쪽을 노려보고있었다.

희푸른 달빛, 불그레한 화광이 번뜩거리는 저 멀리 바다가에서는 여전히 숱한 사람들이 와와 기세를 올리며 분주하게 돌아가고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똑똑히 가려지지 않았으나 그것은 장차 호백에게 더 큰 재앙을 가져다줄것만은 분명했다.

이밤 군사들과 백성들의 가슴속에서는 애국의 붉은 피가 끓고있었으나 호백의 흉중에서는 일신의 권세와 부귀를 위해 그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릴 무서운 흑심이 사품치고있었다.

통통하게 부푼 가슴을 들먹이며 바다가의 군사들과 눈앞의 호백을 갈마보던 매화는 무엇때문인지 미묘한 미소를 띄우며 호백의 어깨우에 치렁치렁 매달리였다.

10

10

 

창밖에서는 이름모를 풀벌레들이 괴자누룩한 밤의 정적을 썰며 쉬임없이 바스락거리고있었다. 어디선가 이따금 개짖는 소리가 컹컹 광활한 대기를 공허하게 울리며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그린듯이 단정하게 앉아 개경에서 보내온 최칠석의 편지를 세번째로 읽어내려가던 박위는 갑자기 종이를 와락와락 구기였다.

머리가 통채로 물레에 태우기라도 한듯 빙글빙글 돌아갔다.

가슴속에서는 연방 돌담같은것이 와르르와르르 허물어져내리였다.

박위는 꺼지는듯 한 한숨을 길게 내불며 내심깊이로 부르짖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고?

그렇게도 장한 기세로 료동에 출정했던 원정군이 어찌하여 중도에서 걸음을 되돌려 개경으로 왔는가.

설사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돌아왔다면 무엇때문에 원정군은 오는 걸음으로 임금을 들어내고 최영대감을 밀어냈는가.

아아, 이 일이 과연 꿈 아닌 생시의 일이란 말인가?!)

의혹과 절망, 불안과 위구심이 집게처럼 아프게 뇌리를 조이고 가슴을 비틀었다.

그런 중에도 지난 4월 어느날의 일이 어제런듯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 중낮때 개경의 동쪽 교외에서는 료동으로 출동하는 원정군의 열병의식이 거행되였다.

임금과 최영이 조정의 재상들을 거느리고 단우에 올라서자 떠나갈듯 한 환성이 터지였다.

이어 백마를 탄 리성계와 조민수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단아래로 흘러갔다.

숲처럼 펼쳐진 기치창검이 위엄있게 번쩍거리였다. 무수한 군기들이 펄럭이였다.

고취악대는 장쾌한 군악으로 군사들의 위세를 한층 돋구어주었다.

그때 박위는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단우에 올라있었다.

최영은 왜구의 침노가 그칠새 없는 남도의 군영들에서는 원정군에 군사를 보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했으나 박위는 적지 않은 군사들을 떼내여 원정군에 포함시키였다.

박위가 보낸 군사들은 그자신이 직접 손때를 묻혀 키운 패기(당시 이름있는 장수들이 개별적으로 거느리고있던 사병)들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생력군(기운이 왕성한 군사)들이였다.

그들을 떼내자니 아쉬운 마음 금할수 없었으나 나라의 존엄을 떨치고 선조의 옛 강토를 수복하는 성스러운 국사앞에서 사사로운 욕심을 따로 차리고싶지 않았다.

아니, 남쪽의 긴장한 정세만 아니라면 자신부터 선참으로 원정군에 뛰여들고싶었다.

사실 료동원정은 하루이틀새 몇몇 고위관리들의 결심에 의해 결정된 단순한 군사문제가 아니였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원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새로 일어선 명나라의 사신 설사가 고려에 도착한 그때부터 명나라와 고려사이에 심각한 정치외교상의 알륵과 마찰이 시작되였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때 설사는 공민왕에게 비단 40필과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보내는 편지를 올리였다.

주원장은 편지에서 자기가 여러 봉건세력들을 통합하고 원의 지배를 뒤집어엎은 다음 새 나라의 황제로 등극하게 된 경위를 루루이 설명하고나서 이렇게 부언하였다.

《…나는 덕이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만 못하여 사이가 돌아오게는 하지 못하나 그러나 천하에 두루 알게 하지 않을수 없다.》

아무리 뜯어보아야 자세를 한껏 낮추고 쓴 겸허한 첫 인사편지였다.

하다면 주원장을 아무런 술수도 야욕도 없는 겸손하고 진실한 황제로 보아야 하겠는가.

아니다. 이때 벌써 주원장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계략을 펼치기 시작한것이였다.

새로 명나라가 섰다고는 하나 명나라안에는 아직 적지 않은 몽골귀족들이 그대로 남아있는데다 사막지대로 쫓겨난 북원은 여전히 옛땅을 회복할 야망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한편 북원과의 태줄을 완전히 절단하지 않은 료동지방의 할거세력들인 납합출과 홍보보는 의연히 명나라를 적대시하는 립장을 취하고있었다.

이처럼 명나라는 사방에 적을 가지고있는데다 대외적으로는 고립되여있고 대내적으로는 인정되지 못한것으로 하여 자기의 적수들을 견제하자면 당분간 고려에 접근하는 정책을 취해야 했다.

하여 주원장은 그리도 겸손하게 공민왕에게 선물도 보내고 편지도 보낸것이였다.

고려정부는 명나라의 속심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명이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조건에서 그것을 반원투쟁에 유리하게 리용할수 있다고 보았다.

고려와 명나라는 각기 제나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신과 사신단을 자주 교환하면서 대체로 순조로운 관계를 유지해나갔다.

헌데 1373년초 명나라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려사신단은 료동지방을 통과하지 말고 바다길로 오라는 거의 명령식의 통보를 보내여왔다.

같은 해 7월에는 주원장이 직접 《고려는 사신을 보내여 명나라의 내정을 렴탐하고있다.

명은 마땅히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징벌할것이다.》라는 터무니없는 강억지와 오만무례한 위협을 늘어놓았다.

명나라는 저들의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내부의 불안정을 어느 정도 수습하자 드디여 본색을 드러내놓은것이였다.

명나라의 대국주의적압력과 침략적기도가 날로 로골화되여가고있을 때 고려에서는 전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1374년 11월 본국으로 돌아가던 명나라사신 림밀과 채빈은 개주참(봉황성)에 들리여 진종일 술을 퍼마시며 온갖 야료와 행패를 다 부리였다.

고려의 호송관 김의는 보다못해 그들에게 점잖게 처신할것을 권고하였다.

그러자 림밀과 채빈은 술병으로 김의의 정수리를 내리깠다.

격분한 김의는 응당한 보복으로 즉석에서 채빈을 처단하였다.

이렇게 되자 명나라는 제쪽에서 도리여 사신살해사건을 코에 걸고 고려에 대한 위협공갈의 도수를 더한층 높이였다.

1380년대에 들어서면서 명나라의 행패는 더욱 우심해졌다.

1388년 2월 명나라는 드디여 철령이북의 고려땅을 전부 료동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날강도적인 요구를 들고나왔다.

명나라통치배들은 본래 철령이북지방은 원나라의 개원로가 관할하던 쌍성총관부에 속한 지역이므로 원이 망한 정황에서 응당 저들이 차지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명나라는 말로만 귀속을 주장한것이 아니라 실지 군대와 관리들을 강계일대에 보내여 철령위설치를 구조적으로 완비하려고 날뛰였다.

얼마후 정부특사의 명색으로 개경에 도착한 료동백호 왕득명은 정식으로 철령위설치를 통고하였다.

고려정부는 더이상 외교적경로에만 매달려있을수 없었다.

명나라의 침략적기도를 분쇄하고 나라의 존엄과 자주권을 수호하자면 강력한 군사력을 발동하는 길외 다른 방법이 없었다. 때마침 부패무능한 리인임일당을 제거하고 문하시중의 최고벼슬에 오른 최영은 일부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의 료동공격을 국책으로 선포하였다.

이것은 오만무례한 명나라통치배들에게 선제타격을 가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야욕을 일거에 분쇄할수 있는 가장 적극적방도인 동시에 지극히 정당한 조국수호전략이였다. 이것은 또한 료동지방의 거의 모든 군사들이 명나라군사들과 함께 북원의 주력을 격파하기 위해 멀리 포의아해(현재의 내몽골자치구 만주리남쪽)에 나가있는 조건에서 승산이 명백한 맵시있는 군사작전이였다.…

…헌데 원대한 포부와 양양한 조국수호정신을 안고 기세충천하여 떠났던 원정군은 위화섬에 이르러 돌연 걸음을 돌리였다.

원정군의 부사령관격인 리성계는 회군의 리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킨것은 시기를 잘못 택한것이다.

왜냐하면 장마로 하여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리고 대군이 병에 걸릴수 있기때문이다.

…그밖에 대군이 나라지경을 벗어난 기회에 왜구가 남쪽으로 쳐들어올수 있기때문이다.…》

박위는 리성계의 회군리유가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금의 윤허도 없이 갑자기 군사를 돌려세운 그의 모호한 태도는 쉬이 리해되지 않았다.

개경에 들어서자바람 원정군을 동원하여 임금을 내쫓고 최영을 귀양지에 밀어낸 너무도 무엄하고 가혹한 행위는 더더구나 리해되지 않았다.

박위는 스르시 눈을 감으며 몇번이나 되뇌여본 소리를 처절한 음성으로 다시금 웅얼거리였다.

《최대감의 원정용단은 지극히 정당하고 장한것이였다.

청렴결백하고 전투적인 그의 생활은 무관들모두가 따라배워야 할 인생거울이였다.

최대감은 또한 오래전부터 리성계를 애중하고 이끌어준 은인이요 오늘에는 원정군의 지휘권까지 사심없이 넘겨준 인생의 대선배다. 그런 최대감에게 설사 간과할수 없는 과실이나 흠절이 있다 해도 리성계가 어찌 군력까지 동원하여 그를 내쫓을수 있는가?!

모를 일이다, 정녕 모를 일이다.…》

박위는 우두두 몸을 떨며 다시 눈을 치떴다.

꼬리를 들까불며 피여오르는 초불이 커다란 불덩이처럼 확대되여 안겨왔다.

(리성계, 리병사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박위는 벼슬살이 초기에 얼마간 내직에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는 외직에 나가 지낸탓에 노상 동북면에서 활약하다싶이 한 리성계를 생활적으로 파악할 기회가 없었다.

다만 10여년전 어느 초가을 전라도 운봉에서 중앙군과 지방군의 협동작전으로 수천의 왜구를 요정낸 뒤 잠시잠간 만나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리성계와의 첫 상면이자 마지막교제였다. 허나 박위는 오래전부터 리성계의 래력과 그의 전투공적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리성계를 고려군대의 큰 기둥으로, 최영 다음가는 명장으로 깊이 존경해왔었다.

당시 27살의 젊은 장수였던 리성계는 오늘까지 근 30년간 적과의 수많은 싸움에서 련전련승하여 수시중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실로 리성계는 소문만 듣고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할만 한 고려군의 거물급장수였다.

그러한 리성계가 세인이 경악할 엄청난 군변을 청천백일에 창출했다는것은 놀라운 일이기 전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그처럼 깊이 존경하던 인간을 한순간에 증오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사랑에서 증오로 가려면, 존경에서 격분으로 가려면 다문 몇개의 세부라도 계단으로 놓여야 하지 않겠는가?!…

…최칠석은 편지에 《…자고로 짧은 혀바닥에 긴 목을 달아매고 죽은 수다쟁이가 한둘이 아님을 공도 잘 알고있으리다.

하고싶은 말은 많으나 그 많은 말을 다해야 리보다는 해가 더 많을듯 하여 이만 필을 거두리다.》라고 썼었다.

임금의 추방동기와 최영의 삭탈동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의도적으로 피한것이 분명했다.

칠석의 전에없이 소심한 태도는 자기에 대한 불신의 표시처럼 생각되여 박위는 오랜 지우인 칠석이조차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불안과 걱정은 역시 왕실과 조정의 래일, 나라와 군대의 장래였다.

자기 또한 장차 누구와 더불어 군사일을 론하고 떠밀어야 할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돌아가지 않는 수레바퀴를 떠밀어올리듯 힘겹게 사색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천근추라도 들어올리듯 무겁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기다란 그림자를 끌며 아무 목적도 없이 너렁청한 방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박위는 지금까지 대바르고 결곡한 성품탓으로 인생에서 적지 않은 풍파와 경난을 겪었었다.

하지만 언제한번 자기 인생을 두고 비관하거나 실망해본적이 없었다.

사람이 원체 강건하기도 했지만 고려군대와 조정의 상좌에 최영과 리성계 같은 거물급의 장수들이 튼튼히 틀고앉아있기에 마음은 늘 든든했던것이였다.

박위는 또한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이면 주저없이 결심을 내리고 완강하게 내밀군 했는데 그것 역시 그의 드틸줄 모르는 의지의 발현이기도 했지만 보다는 상층관료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탓이였다.

언제인가 오천이가 군사들과 백성들이 떨쳐일어나면 못해낼 일이 없노라고 했을 때 박위는 군말없이 그의 주장을 치하해주었는데 그 역시 오천의 말이 전적으로 믿어져서가 아니라 임금과 최영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헌데 갑자기 임금과 최영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고보니 박위의 사고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수 없었다.

사고에서 방향상실이 일어나자 가슴속에서는 극심한 좌절감과 소외감이 눈보라처럼 차겁게 회오리쳤다.

(아, 나는 이제 누구를 믿고 군사일을 해나간단 말인가?!)

불시에 숨이 꾹 막히는듯 한 생리적인 고통이 엄습해오는 순간 박위는 드르륵 사랑채 문을 활짝 밀어제끼였다.

사위는 먹물을 타놓은듯 캄캄했다.

하늘에는 별 하나 없고 대기에는 바람 한점 없었다. 가슴은 더욱 답답해났다.

문설주를 틀어잡은채 한참이나 캄캄한 허공을 노려보던 박위는 채수염을 부르르 떨며 침통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아, 천지신명이시여,

바라고 또 바라옵건대 세상사의 가불가를 옳게 밝혀주시고 의와 불의를 밝게 살펴주옵소서.

아사달민족의 래일과 대마도원정의 앞길을 참되게 이끌어주옵소서.…》

11

11

 

아침밥을 먹는둥마는둥하고 상을 물린 박위는 한잠도 자지 못했건만 아직 잠에서 채 깨지 못한 사람처럼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사랑채 뒤뜰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핑핑, 편전(작은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 딱딱 널판자로 만든 목표판에 화살이 들어가박히는 소리도 들려왔다.

박위는 무심결에 뒤뜰쪽으로 걸음을 놓았다.

여삼의 챙챙한 목소리가 아침의 청쾌한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도령의 활솜씨가 그새 퍼그나 늘었소이다. 두번씩이나 거퍼 오중몰기(다섯번 쏘아서 다섯번 다 맞힌다는 뜻.)를 했으니 군영의 활잡이들 못지 않소이다.》

박위는 한잠도 자지 못한탓에 골속에서 날벌레의 나래소리같은것이 징징 울렸으나 무겁던 기분이 다소 가셔지는듯싶었다.

조정의 형세야 어찌됐든 여전히 제나름대로 다사하고 분주한 여삼이의 현중에 대한 극진한 관심이 고마왔다.

요즘에 이르러 더욱 극성스럽게 무술을 익히려드는 현중의 열정과 속마음도 갸륵하였다.

(현중이녀석이 또 아침활쏘기련습을 하러 나온 모양이군.

여삼이녀석은 색시가 요즘 애기설이를 한다면서 어제 저녁 집으로 나갔다더니 어느새 또 군영에 들어왔노?!

타고난 신분도 량반상놈으로 현격하게 차이나고 나이도 10년이상이나 벌어진 여삼이와 현중이가 노상 한동아리가 되여 돌아가는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박위는 뒤뜰쪽으로 몇걸음 더 나가다말고 스르시 멈춰섰다.

소년의 단순한 심리가 비껴있는 현중의 볼메인 소리가 울려왔다.

《쳇, 그런데도 우리 아버님은 내 활솜씨가 서툴다구 장참 꾸중이시라우.

그건 그게구… 저기 대마도라는 왜섬에 왜구들이 디디구 쌓였다던데 그게 적실한 소리우?》

《적실하다마다… 썩은 물웅뎅이에 벌레알 끼듯 씨글씨글하답디다.》

《그렇다한들 살살 새들어가서 사람 하나 빼내는 일이야 못하겠소?》

《그게 식은죽먹기로 되겠소이까?

손칼을 들고 칼상어잡으러 나가는 격으로 허술하게 준비를 해가지고 나섰다가는 랑패보기가 십상이외다.

또 이왕지사 대마도로 갈바에야 숱한 군사들이 한꺼번에 쳐나가서 섬안의 왜구들을 쥐무리잡듯 모조리 쳐죽이고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말짱 찾아와야 할게 아니오니까?》

《제기, 차비 삼년에 제떡 쉬겠네.

우리가 노상 준비만 하는 사이 잡혀간 사람들은 열번도 더 죽어나가겠소.》

박위는 칼끝에 찔리기라도 한듯 가슴이 띠끔해났다.

문득 얼마전에 현중의 진맥을 보기 위해 군영에 들어왔던 청수하게 생긴 늙은 의원이 점잖게 뇌이던 말이 떠올랐다.

《어줍잖게 들릴지 모르겠사오나 시생이 지금껏 병자에게 손을 대서 못 고친 병이 별반 없소이다.

헌데 장군댁 도령은 신체에 병통이 생긴게 아니라 마음속에 은혈이 들었소이다.

이런 경우 백약이 무효요 화태, 편작의 의술이래도 어쩌는수가 없습니다.

자고로 마음에 생긴 병은 마음을 풀어서 치료해야 합니다.

도령의 나이 아직 년소하시니 상사병은 아닐게고… 대체 무엇이 도령의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응어리지여 그리도 풀리지 않소이까?》

박위는 늙은 의원의 오리무중한 소리가 꼭 변변치 못한 자기의 의술을 가리우기 위한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들리였다.

허나 현중은 무슨 큰 리치라도 깨달은듯 영민하게 생긴 눈을 빛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얼마전에 소자의 누님께서 왜구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소자의 병은 필시 누님을 찾아온 뒤에야 빠질줄 압니다.》

박위는 코끝이 매워나 슬며시 고개를 비틀었다.

현중의 책상우에 정히 포개져있는 구겨진 천덩이가 (그것은 리옥이 못다지은 현중의 무관복인데 무엇때문인지 현중은 죽촌에 나갔던 날 가지고와서 자기의 책상우에 올려놓고있었다.) 눈뿌리를 지지며 안겨왔다.

박위의 가슴은 더욱 쓰리였다.

현중의 작은 가슴에 항시 무엇이 끓고있는지 불을 보듯 명백했다.…

…지금도 박위의 심정은 그날 그때와 다를바 없었다.

때이르게 속이 여문 아들이 기특하다는 생각에 앞서 노상 선혈같은것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현중의 가슴은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수 없을것이라는 느낌이 재삼재사 굳어지였다.

한참이나 멍하니 굳어진채 사색의 페지를 번져가던 박위는 관습의 힘에 이끌리여 바다가로 걸음을 내짚었다.

바다는 노호하고있었다.

집채같은 파도는 주먹같은 포말을 수없이 날리며 껑충 뛰여올랐다

가는 내리꽂히듯 미끄러져내리였다.

무너졌다가는 다시금 솨― 으스산한 소리를 지르며 솟구쳐올랐다.

박위는 검푸른 파도가 연연 드달려와 골받이를 해대는 앞코숭이가 꼭 전함의 선수처럼 묘하게 쳐들린 바위우에 올라섰다.

눈길은 저도 모르는새 격파 날뛰는 바다를 건너 저 멀리 대마도쪽의 하늘가로 나래쳐올랐다.

대마도쪽의 하늘에서는 비기운을 머금은 검층층한 구름장들이 겹겹으로 뭉치여 아무런 규칙성도 없이 마구 뒹굴고있었다.

사납게 태질하는 바다, 시꺼먼 구름장들이 뒤덮인 하늘…

그래서인지 천지가 어두워지고 세상이 좁아진듯싶었다.

귀를 기울이면 저 멀리 하늘가 비구름장사이로 리옥의 애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올듯싶었다.

안해의 최후의 웨침소리가 파도소리에 어울리여 메아리쳐오는것 같기도 했다.

잡혀간 죽촌백성들의 처량한 울음소리, 왜구에게 화를 당한 수천수만의 이 나라 백성들의 령혼의 울부짖음이 파도의 목소리를 빌어 울리는것 같기도 했다.

파고 심은듯이 굳어진채 한참이나 속을 짓태우던 박위는 물바래에 젖어 눅눅해진 전복자락을 무겁게 날리며 염초장으로 향했다.

원정준비에서 첫째로 걸린것이 염초이기때문인지 아니면 언제나 자신만만해서 돌아가는 오천이가 별스레 보고싶어서인지 자신으로서도 자기의 마음을 정확히 가늠할수 없었다.

띠풀이영으로 웃설미만 대충 해씌운 너렁청한 염초장안에서는 여러 사람이 공기돌처럼 널려앉아 한담을 나누고있었다.

《이 사람 구서방, 내 눈으로 직접 오천대정이 임자 딸을 끌고 두이산속으로 들어가는걸 보았다니.…》

마흔살이 불원하건만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계집의것처럼 해망스러운 옥보라는 수다쟁이가 신바람이 나서 어수룩한 구서방을 몰아대고있는 판이였다.

구서방은 사람이 어지고 고지식하기는 하나 다소 의뭉스러운데도 있고 한창나이때는 어떤 시골글방에서 어깨너머로 글자깨나 외워두기도 한 까닭에 제깐에는 매사를 기품있게 처신하려 드는 사람이였다.

헌데 언제나 구서방을 놀려먹는것으로 한재미 보려드는 옥보가 느닷없이 알지도 못하는 딸년의 비행을 사람들앞에서 꿰여올리자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였다.

잠시 순박하게 생긴 눈을 슴벅거리며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던 구서방은 일부러 옥보의 약을 올릴 심산인지 점잖게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딴전을 피웠다.

《이보게 옥보, 그런 생먹은 소리를 누가 곧이 듣겠나.

우리 딸년은 지금 토방우에 앉아 저녁거리 보리쌀에서 뉘를 고르고있는데… 두이산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두이산인가?!》

옥보 역시 아무렇게나 둘러치는 구서방의 딴청에 홀홀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였다.

《저렇다니… 명색이 아비요, 한창때는 글자깨나 읽었다는 사람이 딸년의 흠절을 무턱대고 가리우자고만 하니.

두고보게, 그러다가 이제 취금이한테 큰 탈이 생기지 않나…》

《탈이 생기다니? 대체 우리 취금이한테 무슨 탈이 난단 말인가! 사람이 허랑하기는…》

《이 사람아, 가시내가 머슴애하구 밀려다니면 나중가서 어떤 탈이 나는지 아직 모르나?!

누구한테 물어볼것없이 님자가 젊었을 때 일을 한번 생각해보게나,

핫하하.》

옥보가 자지러지게 웃어대자 모두들 어깨를 들썩거리며 따라웃었다.

박위는 시시껄렁한 그들의 대화에 더이상 귀를 주고싶지 않았다.

큰 기침을 톺아올리며 성큼 염초장안으로 들어섰다.

그제서야 박위를 알아본 염초장사람들은 서둘러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일어서더니 너푼너푼 허리를 꺾었다.

박위는 괴괴한 염초장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한유한 태도가 저으기 불쾌했으나 아무말없이 염초장복판에 우뚝하게 걸려있는 염초가마앞으로 다가갔다.

시꺼먼 끄스름이 더깨로 앉은 가마의 속안은 휑하게 비였는데 터실터실한 솥가리에는 거미줄이 얼기설기 엉키여 흐느적거리고있었다.

화약을 만드는데서 가장 힘겨운 일은 염초를 뽑는것이였다.

염초는 대개 부엌에서 나오는 재나 오래된 집, 오래된 절간의 마루

밑에서 긁어낸 먼지를 물에 타서 끓이는 방법으로 얻어내였다.

얼핏 생각하면 부엌의 재나 마루밑의 먼지 같은것은 어디서나 헐하게 얻어낼것 같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지는 더 말할것 없고 재라는것도 매일 무더기로 나오는것이 아니였다.

그나마도 농군들이 봄내, 여름내 진거름을 만드는데 쓰고 염초장 장인들과 군영군사들이 매일과 같이 염초가마에 쏟아붓다보니 군영앞동네는 물론 김해일판의 부엌재와 먼지가 말짱 동이 나버리였다.

염초가마는 벌써 며칠전에 산산하니 식어버리고 염초장일군들은 매일 이렇게 시시부시한 한담으로 날을 보내고있었다.

박위는 애초에 원정에 쓸 화약은 전량 조정에 건의하여 얻어올 작정을 했었다.

그런데 오천이가 화통도감의 현재형편에서 다량의 화약을 얻어내기는 어려운 일이니 자기에게 사람만 떼주면 수요되는 화약을 거지반 자체로 만들겠노라고 장담을 하고 나섰다.

박위는 오천의 장담이 그대로 믿어지지는 않았으나 아직 조정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는데다 오천에 대한 기대감도 없지 않아서 군말없이 그가 달라는대로 사람도 주고 염초가마며 풀무따위들도 얻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요즘 아무리 일감이 없다 한들 염초장을 책임진 대정이라는 놈이 자기가 맡은 일은 아주 덮어놓고 백주에 계집을 끼고 나갔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박위의 속은 우걱우걱 괴여올랐다.

언제인가 오천에게 틈이 나는대로 취금을 찾아가 정을 나누라고 권유했던 자기의 진정이 모욕으로 되돌아온것 같기도 하여 기분은 더욱 불쾌하였다.

(그러니 무식한 상사람들은 다 이렇게 사람의 정의나 도의 같은것을 옳게 새기지 못하는 막된것들인가?!

그건 그게고… 사실상 지금형편에서 오천이라는 녀석이 오만가지 재주를 다 부린다 해도 원정에 소요되는 염초를 다 뽑아낼수는 없을게다.

그러고보면 일개 대정에 불과한 오천이녀석의 일을 두고 지나치게 왼심을 쓰는 내가 도리여 부질없는 사람이 아닐가?)

입귀를 꾹 짓문채 두서없이 생각을 펼쳐나가던 박위는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말없이 염초장을 나섰다.

비릿한 해감내를 머금은 누습한 해풍이 불어와 숱좋은 채수염을 훨훨 날리였다.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전복자락을 퍼득퍼득 물어뜯었다.

가슴은 여전히 연덩이를 삼킨것처럼 무죽하고 기분은 그냥 진연기를 쐬운것처럼 울울했다.

눅눅한 모래불을 걷어차며 스적스적 바다쪽으로 걸음을 놓던 박위는 부지불식간 걸음을 멈추었다.

뇌리속에서 돌연 기름불같은것이 펑끗 일어번지였다.

그것은 필경 새로운 발견의 섬광이 아니라 울울한 가슴속에서 터져나온 발작적인 충동의 불길이였다.

(이제는 더이상 임금이나 최대감에게 기대를 걸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오천이같은 상사람들과 시골구석에 골박히여 버들쩍거린다는것은 뒤가 뻔드름한 일이다.

지금처럼 똑똑한 결심이 없이 일을 하다가는 범을 그린다고 소문을 내놓고 개모양을 만들어놓는것과 같은 결과를 빚어낼것이다.

지체없이 대담하게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결정적인 출구를 개척하기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항간의 속된 말에도 길고 짧은것은 대보아야 한다고 했거늘 내가 직접 상경하여 리성계대감을 만나는게 어떨가?

현재의 정황에서 조속히 원정을 단행하자면 리대감을 움직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는가.

리대감을 직접 만나 임금과 최대감을 축출하게 된 동기를 저저이 들어보는것 역시 나쁘지 않을것이다.

그래야만 의혹과 불신을 해소할수 있으며 앞으로의 모든 군사행정에서 견해의 일치를 도모할수 있을것이다.

사실 리대감은 누구보다 왜구와의 싸움을 많이 해본 장수로서 왜구격멸의 필요성과 의의를 누구보다 잘 알것이다.

그는 료동원정도 왜구의 대거침입이 우려되여 포기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박위는 대마도원정의 성사를 두고 너무도 속을 태우던 나머지 그처럼 원망스럽고 의문스럽던 리성계를 되도록이면 좋게 생각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리성계의 지지와 동의, 구체적으로는 그의 도움이 있어야 대마도원정이 성공할것이라는 현실적인 타산이 굳어질수록 더더욱 리성계가 중시되였다.

박위는 갑자기 무엇에 들레이기라도 한듯 서둘러 군영쪽으로 걸음을 돌리였다. 때는 마침 점심참이였다.

군영앞동네도 고요하고 군영안팎도 조용한데 대문앞 느티나무밑에서는 몸집이 두리두리한 웬 사내가 저 혼자 날고 뛰며 칼을 휘두르고있었다.

그는 보습을 끄는 황소마냥 씨근거리면서도 연해 큰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옳지, 네놈이 오른쪽으로 덤벼들 때는 〈우내략〉을 하나 먹고싶은 모양이구나. 엣다, 〈우내략〉이다.》

《그렇지, 네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 때는 〈룡약재연〉을 한번 써야겠구나. 자, 이번에는 〈룡약재연〉이다!》

그는 언제인가 윤통에게 《두부자루》라는 별명을 얻어가진 고들이였다.

고들은 지금 점심참이 되였다는것도 모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칼쓰기훈련을 하고있었다.

험하게 낯을 찡그리고 휙휙 칼을 휘두르는 모양이 그의 눈앞에는 정말로 집안식구들을 도륙낸 왜구들이 나타난듯싶었다. 박위의 가슴은 뜨거워났다.

왜구의 침입은 이 땅에 파괴만을 가져온것이 아니였다.

왜구의 침노로 하여 이 땅에는 병기만이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지킬수 있다는 인생의 새로운 철리를 피로써 체득한 용맹한 복수자들이 숲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고있었다.

고들이와 같은 너무도 평범한 이 나라 백성들은 저들이 흘린 붉은 피로 정의의 칼을 갈며 판가리결전을 준비하고있었다.

박위는 겉모양과는 판판다르게 웅심깊고 열정적인 고들이가 정녕 대견하였다.

어깨라도 정히 두드려주고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길차비를 다그쳐야 래일 아침 일찌감치 개경길을 잡을것이였다.

박위는 한결 기운차게 활개짓을 치며 대문앞으로 다가섰다.

고들의 웨침소리는 박위의 잔등을 따갑게 지지며 계속 힘차게 울려왔다.

《이놈들아, 이번에는 〈진전살적〉을 한대 먹어라.

이것은 네놈들의 칼에 찔려죽은 불쌍한 우리 녀편네의 몫이다!》

12

12

 

날바다 한복판에 찢어발긴 걸레짝처럼 널려있는 해적떼의 소굴 대마도에 또 하루의 아침이 밝아왔다.

짙은 안개발속에서 수닭들의 거센 울음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깨며 겨끔내기로 울리였다.

감때사나운 섬계집들이 아침밥 지을 물을 길으러 가며 쌈싸우듯 고아대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허나 대마도령주가 틀고앉은 이즈하라(대마도의 큰 고을중의 하나)의 중심부에 청색기와를 층층 겹올려 지은 관사안팎은 아직 고요했다.

관사주위에 공기돌처럼 널려있는 군막들도 괴괴한 정적에 묻혀있었다.

아까부터 관사의 대문앞에서 서성거리던 박달몽치처럼 다부지게 생긴 파수군은 입아귀가 찢어지도록 기껏 하품을 하고나서 슬며시 대문틈새에 깨꼬눈을 가져다붙이였다.

바로 그 순간 높직한 돌담에 쌓인 관사의 앞마당쪽에서 영문을 알수 없는 왜가리소리가 왝왝 터져나왔다.

《오멘―》

《도―》

《후꾸―》

파수군은 대문에 바싹 들어붙어가지고 여념없이 앞뜰의 광경을 훔쳐보고있었다.

넓다란 판사 앞마당에서는 웃동을 홀딱 벗어제낀 왜구 하나가 미친것처럼 고래고래 소래기를 질러대며 칼을 휘두르고있었다.

그가 바로 대마도의 최고통치자인 동시에 해적무리의 대두령인 오바 사다께였다.

사다께는 청돌처럼 탄탄해보이는 상체를 껑충껑충 날리며 연해 칼을 내리찍고 후려치고 비껴내리였다.

돼지멱따는듯 한 청으로 꼭같은 소리를 곱씹어 웨치였다.

《오멘―》

《도―》

《후꾸―》

그 소리인즉 곧 얼굴, 정수리, 배라는 말인데 자기의 칼은 언제나 적수의 급소만을 타격한다는 뜻이였다.

사다께는 북부 규수지방에서 기비요꼬메 (사탕수수의 재배 및 수확을 감시통제하는 하급관리)노릇을 하던 제 아비와 함께 아시까가막부를 위한 가렬처절한 싸움판에 뛰여들었던 그때로부터 40고개를 넘어선 오늘까지 수십년세월 단 한번도 검을 놓은적 없는 알짜배기 사무라이였다.

돌이켜보면 사다께에게 있어서 검은 가장 친근하고 믿음직한 인생의 길동무인 동시에 유일무이한 운명의 수호신이였다.

만약 이 세상에 검이라는 날카로운 물건이 없다면 사다께의 일생은 물에 물탄것처럼 더없이 슴슴하고 적막하였을것이였다.

검이 아니였다면 사다께는 40평생을 누벼온 전란속에서 절대로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것이였다.

검은 또한 사다께에게 있어서 오늘의 막강한 권세와 부귀, 눈부신 명예를 가져다준 고마운 은인이였다.

그가 만일 검이 아니라 붓을 택했다면 오늘까지도 자기의 조상들처럼 규수의 산골마을에서 항시 하브 (강한 독성을 가진 독사의 일종)떼의 위협을 받으며 사탕수수밭을 나돌아다니는 기비요꼬메노릇을 하고있을것이였다.

무자비한 검으로 점령지를 확대하고 적대세력들을 쓸어버렸기에 사다께는 오늘 다이묘(봉건제후)가문의 귀족출신으로 둔갑하여 나라사람들이 모두 아는 유명짜한 정객으로 될수 있었다.

검은 또한 희한한 래일을 눈짓해주는 희망의 혼이였다.

온 세상을 타고앉아 천하를 호령하려는 사다께의 엄청난 꿈을 검이 아닌 무엇으로 이룰수 있겠는가?!…

하기에 사다께는 작지 않은 섬을 방석처럼 깔고앉은 일류 고관의 지위에 올랐으나 지금까지 단 하루도 검을 놓아본적이 없었다.

전장은 이미 눈앞에서 사라졌어도 여전히 검의 언어를 심장에 새기고 무사도의 열렬철저한 기개와 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하면서 섬안의 모든 정사(정사의 주요항목은 물론 해적행위와 타민족에 대한 략탈로 일관되여있었다.)를 역시 무사도의 기백으로 과단성있게 처리해나가고있었다.

그와 함께 대마도의 군력을 가일층 강화하고 재력을 루거만으로 확장하여 자기의 통치구역을 계속 늘이며 나아가서는 권력의 자리까지도 타고앉을 웅대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있었다.

하기에 섬밖에서나 섬안에서나 조금이라도 사다께의 속심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귀신다께》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또 부러워했다.

사다께는 졸개들앞에서 때없이 자신을 《항우의 용력과 제갈공명의 지모를 한몸에 껴잡아 지닌 희세의 검객》이라고 거의 로골적으로 지껄이군 했다.

그것은 물론 자신의 능력과 욕망을 혼돈한 터무니없는 자기 과찬이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전혀 근거없는 말이라고 할수는 없었다.

얼추 보면 사다께는 밸통머리 사나운 우직한 메돼지같았으나 세세히 관찰해보면 분명 승냥이의 흉맹성과 여우의 약은 꾀를 한데 어울려가진 야심만만한 검객인 동시에 과대망상증이라는 고치기 힘든 병을 가진 허풍선이 정객이였다.

어딜 가나 매일같이 칼싸움이 벌어지여 이제는 피바람이 일어번지는 칼싸움이 하나의 즐거운 유희로, 뜻있는 사내들의 자아수양의 《교실》로 인정된 이 나라의 살벌한 공기.

무엇이든 물리치고 찔러죽여야 자기와 가문의 생존과 명예를 고수확장할수 있다는 잔악한 생활법칙이 가장 현명한 인생지론으로 공인된 이 나라의 썩은 토양…

과연 그러한 공기와 토양속에서 아름다운 꽃송이의 탄생같은 기적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지금은 이 땅 어딜 가나 필수불가결적으로 사다께와 같은 악질, 괴질의 인간들이 수없이 생겨나고 형성되고 살판뜀을 하는 세월이였다.…

한식경이나 정신없이 날고 뛰며 끓어넘치는 정력과 비상한 칼재주를 유감없이 시위하고난 사다께는 호기있게 칼을 비껴내리더니 땀방울이 숭숭 내번진 시뻘건 얼굴을 장하게 들어올리였다.

관사의 뒤뜰에서 쓸어나와 사다께의 훈련모습을 경탄에 젖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가병들은 일제히 야생적인 탄성을 터치였다.

《반자이!》,《반자이!》

아까부터 나설듯말듯 바재이던 쌍상투를 틀어올린 해사하게 생긴 애젊은 시녀가 안타까운 종종걸음으로 사다께에게 다가왔다.

두무릎을 단정히 꺾으며 차종을 들어올리였다.

달크무레한 기문홍차를 천천히 마시고난 사다께는 졸개들에게 관사의 두리기둥에 초자로 휘갈겨쓴 《력발산 기개세》(용력은 산을 뽑을수 있고 기상은 천하를 덮을수 있다는 뜻의 항우의 말.)라는 글발을 가리켜보이였다.

보기흉하게 뒤번져진 웃입술을 너덜거리며 소리높이 웨치였다.

《너희들 듣거라. 일찌기 600년에 벌써 우리의 수이꼬녀왕은 수나라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은 해뜨는 나라요, 우리는 해뜨는 나라의 천자들〉이라고 썼다.

녀왕의 그 말은 우리 일본남아들로 하여금 드높은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 해뜨는 나라의 천자들인 우리들은 마땅히 세상천하를 거머쥘 웅지를 안고 만고에 길이 빛날 큰일을 성취하기 위해 분골쇄신해야 한다.

내 말뜻을 알겠는가?》

《하잇―》

사다께의 드센 손탁에 주물리워 하나같이 침략열에 들뜨고 살륙의욕에 충만된 졸개들은 열광적으로 웨치였다.

대마도의 아침은 매일 이렇게 사다께의 고함소리와 칼부림소리, 거의 반정신이 나간 졸개들의 야생적인 웨침소리로 시작되군 했다.

사다께는 흐뭇한 미소를 띄우고 청바위처럼 단단한 웃몸에 천천히 하오리를 걸치였다.

이럴 때 후끈하게 달아있는 앞마당의 공기를 아츠럽게 찢으며 관사의 대문이 열리였다.

난쟁이나 겨우 면한 작달막한 키에 땡땡한 몸집이 잔뜩 가로퍼진 지또(령지관리인) 세가오 무라나가가 귤쪽같이 삐죽한 상판을 강하게 꺼떡거리며 띠뚝띠뚝 들어섰다. 그뒤로 무슨 변을 당했는지 상판과 앞가슴에 온통 피를 게바른 왜구 세놈이 각기 눈챠꾸(쇠사슬에 방망이를 단 흉기)와 구사리가마(쇠사슬끝에 낫과 쇠뭉치를 단 옛 무기)같은것을 질질 끌며 줄레줄레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

금시 기분이 사나와진 사다께는 세모진 눈을 곤두세우며 왝 소래기를 질렀다. 세가오는 두손을 모두어잡고 황황히 사다께앞으로 다가왔다.

이즈음 어느 고장의 지또이든 주인대신 령지관리를 착실히 거행하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지또라는 평화로운 직무를 맡은 놈들까지 칼을 뽑아들고 령주라는 우두머리를 보좌하고 대행하는 무뢰배들은 작은 패두노릇을 하고있었다.

《령주도노, 이놈들은 대륙에 나갔다가 어제 밤에 돌아온것들입니다.

하관이 오늘 아침도 일찌감치 바다가를 순시하느라고 나섰는데 이것들이 글쎄 저기 도래굽이에서 싸움질을 하고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싸움질은 왜?》

사다께의 음성은 조금 누그러지였다.

그것은 사다께의 기분이 다소 가라앉은 표현이 아니라 가장 무서운 발작의 전조였다.

《예, 내막을 알아보니 이놈들은 저들끼리 따로 감추어가지고온 외국비단을 남몰래 노누메기를 하다가 서로 의견이 상치되여 싸움을 하는것이였습니다.》

소대가리같이 커다란 머리를 찌글사하고 서서 세놈의 왜구를 하나하나 노려보던 사다께는 옆구리에서 스르륵 칼을 뽑아들었다.

족제비굴에 갇힌 병아리새끼들처럼 파들파들 떨고있는 세 왜구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사다께의 페장은 벌써 비릿한 피냄새를 흡인하기를 갈망하고있었다.

사다께는 칼끝으로 제일앞에 서있는 추접스럽게 생긴 왜구의 이마빡을 가리켜보이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겐고가 아닌가?》

겐고는 퍽 오래전 어느 싸움터에서 부상을 입은 사다께를 등에 업고 30리 밤길을 달린바 있는 생명의 은인이였다.

겐고는 사다께가 자기를 알아본것이 너무도 고마와 단박에 주르르 눈물을 흘리였다.

《네, 소인이 바로 시즈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 남부에 위치했던번)과 싸울 때 부상을 입으신 령주도노를 등에 업고 30리 밤길을 달렸던 겐고올시다.》

겐고는 사다께에게 자기의 충실성과 공적을 다시금 눈물겹게 상기시켜주기 위해 나오지도 않는 웃음을 띄우고 열심히 질벌거렸으나 사다께의 상통으로 보아 그것은 별로 효과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이놈! 나의 뜻을 어기고 군기를 문란시키는 경우 어떤 벌이 차례진다는것을 모르는가?

그가 누구든 나의 검은 용서를 모른다. 도―》

사다께의 칼이 허공을 가르며 힘차게 내리박히였다.

정수리뼈가 깨져나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겐고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풀썩 무너져내리였다.

《오멘―》

사다께의 칼이 다시 휘파람소리를 내며 비껴내리였다.

또 한놈의 왜구가 피가 쏟아져내리는 얼굴에로 두손을 올리다말고

맥없이 나동그라지였다.

《후꾸―》

사다께의 칼이 또 한번 날카롭게 번뜩이였다.

마지막놈은 시누런 창자와 피덩이가 꾸역꾸역 쏟아져내리는 배를 그러안다말고 모재비로 나떨어지였다.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하고 살벌한 공기가 떠돌았다.

하지만 사다께는 심상한 낯으로 피범벅이가 된 시체들을 대충 훑어보고나서 세가오쪽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이 더러운 놈들의 시체를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개무리에게 던져주어라.

배신자, 졸장부들의 말로가 어떤가를 똑똑히 보여주란 말이다.》

사다께는 세가오의 대답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관사를 향해 뚜걱뚜걱 걸음을 놓았다.

13

13

 

관사로 돌아온 사다께는 시중군계집의 말큰말큰한 손을 빌어 깨끗하게 몸을 씻은 다음 니찌렌상이 모셔져있는 정갈한 방으로 들어갔다.

돌로 깎아 만들기는 했으나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너무도 생동한 니찌렌의 부얼부얼한 얼굴을 사뭇 경건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사다께는 두손바닥을 마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숙연히 고개를 숙이였다.

명상에 잠기려는것이였다.

이것은 매일과 같이 준수해야 하는 니찌렌교(불교에서 파생된 일본의 얼치기종교, 련꽃을 숭상한다.)도들의 한 계률인 동시에 도적떼의 대두령치고는 맞지도 않게 공상에 잠기기를 즐기는 사다께의 생활습벽이였다.

살아있는 니찌렌앞에 나선듯 한 황홀하면서도 경건한 마음이 사무쳐오르자 사다께는 니찌렌에게 진정을 다해 일생일대의 소원을 아뢰기 시작했다.

(니찌렌도노, 해뜨는 나라의 《천자》로 태여난 이 몸이 어찌 일생 범박한 욕망에 시달릴수 있으며 어찌 보잘것 없는 성공에 만족할수 있겠습니까.

현철하시고 대자대비하신 도노께서는 그대의 충실한 적자인 이 사다께의 앞길에 춘하추동 번영의 비를 뿌려주옵소서. 하루빨리 거창한 대망의 실현을 보게 하여주옵소서.)…

…왜국에서는 수십년전부터 정확하게는 수백년전부터 크고작은 전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되였다.

멀리 옛적의 일은 다 그만두고 12세기말에 수립된 가마꾸라막부시대때부터 이야기해보자.

전쟁을 통해 정권의 기반을 다지고 전쟁으로 정권을 탈취한 가마꾸라막부가 집권하자 도시상업과 대외무역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고리대자본은 급속히 장성하였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가마꾸라막부가 디디고섰던 무사계급의 경제적기초를 약화시켰다.

무사출신 농민들은 소철나무가지와 열매를 분쇄하여 먹는가 하면 옷똔(두꺼비)까지도 귀중한 식량원천으로 여기게 되였다. 이는 필경 말기증상이였다.

가마꾸라막부를 뒤집어엎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근왕파세력은 또다시 전쟁의 불을 걸었다.

물먹은 담을 떠밀치는 일은 그다지 힘들것도 없었다.

1330년대초에 가마꾸라막부는 제거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치세력이 편성되였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아시까가막부의 창시자인 아시까가 다까우찌가 규수지방 봉건세력들의 지원밑에 근왕파가 틀고앉은 교또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이를 발단으로 《천황》제 중심을 고집하는 근왕파와 막부정권을 주장하는 무인세력간의 정권쟁탈전과 각기 두파세력을 추종하는 봉건세력들의 개싸움은 근 30년동안 계속되였다.

비로소 온 나라 방방곡곡에 차넘치던 칼부림소리와 대류혈은 가까스로 봉합되였다.

불안전하게나마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상업자본은 현저한 장성추이를 보이였다.

그렇게 되자 막부정권수립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상층무사들과 상인들은 막대한 리익을 얻었으나 덩그렇게 불쪽만 차고 싸움판으로 뛰여다니던 고께닌(하층무사)들과 농민들은 빈절의 빈대마냥 알쭌히 껍질만 남게 되였다.

《이렇게 굶어죽느니 강도질이라도 해야겠다.》

《또 한번 조정을 갈아엎어야 살수가 생기리다.》

원체 흉폭한 고께닌들과 농민들은 저저마다 녹쓴 칼을 꺼내 갈며 내놓고 으르렁거리였다.

이러한 때 봉건령주들과 신흥상인들은 빈민구제와 치부의 주요원천을 타국에서 략탈하여 충당해야 한다는 공통된 견해를 정립했다.

그들은 이미 악당 혹은 도적으로 굴러떨어진 고께닌들은 물론 아직까지 거지꼴을 하고 가도에서 방황하는 얼뜨기 고께닌들에게도 해외침략만이 살길이라고 로골적으로 꼬드기였다.

그러지 않아도 지랄발광을 하고싶어 뼈투성이 알몸을 들썽거리던 고께닌들은 귀가 항아리만 하여 너도나도 해적질하기에 제일 유리한 대마도로 등겨섬에 새앙쥐 엉키듯 몰려들었다.

하여 가마꾸라막부시대인 1220년대에 국내전쟁과 병행하여 발생한 소규모적인 해적단은 열배, 백배로 확장되였다.

고려는 물론 중국과 동남아시아나라들까지 대상으로 하여 새로운 형태의 전쟁 즉 해외략탈전을 시작했다.

결과 령주들과 신흥상인들은 비대해지고 고께닌들은 그들대로 저들의 체질에 맞는 그럴듯한 직업과 생도를 얻게 되였다.

이제 와서 령주들은 교또의 궁성에 높직이 올라앉은 막부조차 제마음대로 휘고 부릴수 없을 지경으로 막강한 세력과 재력을 가진 한개 지역의 절대적인 제왕으로 군림하고있었다.

허나 해외략탈전의 피비린내나는 력사를 소급해보면 강도질이나 도적질이 매번 리득과 승리만을 가져온것은 아니였다.

침략과 략탈의 회수가 늘어나고 판이 커지자 그에 대처한 당지 군사들의 반격도 판이 커지고 도수가 높아지였다.

특히 고려에 나갔던 왜구들은 한꺼번에 수백명, 지어 수천명씩 무리로 죽어넘어지군 하였다.

10여년전에는 백전로장 최영이 동서남해안을 휘돌며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러대더니 근년에는 경상도원수 박위가 김해바다가에 바투 나앉아 호랑이처럼 사납게 으릉대고있었다.

하기에 졸개들은 요즘 경상도쪽에 나가라면 너나없이 오줌맞은 개구리처럼 쭈그러들어가지고 되도록이면 꼬리를 사리려들었다.

천하에 두려운 상대가 없노라고 흰목을 뽑는 사다께자신도 박위를 생각하면 꼭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괴로왔으나 은근히 오금이 가드라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10여년전 5월 어느날 사다께는 하까다령주와 함께 황산강을 거슬러오르다가 불시에 박위와 부딪친적이 있었다.

단 한번의 접전에서 사다께는 무던히도 예쁘게 생긴 고려장수 박위의 완력과 검술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수 있었다. 그때 사다께는 박위의 칼끝에 턱살이 찢어지기 바쁘게 황산강에 뛰여들었기망정이지 무모한 싸움을 계속했더라면 위불없이 천리 타국에서 하백(물귀신)이 되였을것이였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많이도 흘렀다.

그사이 추억의 세부들이 더러 지워지기도 한데다 엉터리없을 지경으로 자기를 과신하는 사다께는 이제 와서 박위의 용력과 검술이 결코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이따금 황산강격전을 회고할 때면 온몸이 으시시해나면서 수치감과 시기심이 동해오르고 복수의 검은 피가 끓어올랐다.

자기 개인의 복수를 위해서도 그렇고 세력권을 끝없이 팽창하여 이름을 날릴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가급적으로 박위를 없애버려야 했다.

그러되 무분별한 접전으로가 아니라 능활한 지략으로 솜씨있게 후려쳐 잡아야 했다.

하여 사다께는 지난해부터 침략의 예봉을 기본적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나라들 그리고 고려의 전라도와 서해안일대로 돌리게 한 후 자기자신은 박위를 꼼짝없이 제거하기 위한 음모의 그물을 한코두코 착실하게 떠나갔다.

그는 우선 거제도 왜촌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표류된 일본어민들과 살길이 막혀 찾아온 왜인들을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살도록 해주었다.)의 두목이 나무랄데 없는 세작(간첩)이라고 천거한 무찌야마 요리꼬라는 계집을 대마도에 불러들이는것으로부터 일을 시작하였다.

요리꼬는 거제도에서 나서자란 알쭌한 시골계집이건만 용모와 언행에서 전혀 촌티가 나지 않는데다 인물도 요염하고 교태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게다가 고려의 지리와 풍습에도 밝고 고려의 음률도 제법 튕길줄 아는 총명한 계집이였다.

올데갈데 없는 세작감이였다.

사다께는 관사의 밀실에서 근 열흘동안 계집의 그닥지 않은 처녀성을 산산이 짓이겨놓은 후 요리꼬의 작은 가슴에 세작일의 묘리와 앞으로 해야 할 일, 성공하는 경우 차례지게 될 희한한 지위와 막대한 재물의 량을 꽁꽁 심어주고는 고려의 김해로 떠밀어보내였다.

고려로 넘어간 요리꼬는 시작부터 교묘하고 다기차게 일을 벌려나가는데 수법도 령롱하고 진척도 빨라서 그에게 세작일을 가르쳐준 사다께자신도 혀를 내두르지 않을수 없었다.

불과 한두달사이에 김해관가의 동헌에까지 나들게 된 요리꼬는 그 요염한 자태와 애교로 부사를 초 친 문어모양으로 흐물흐물하게 데쳐놓았다.

부사를 통하여 또는 제 눈으로 김해관가와 경상군영의 실태, 조정의 형편까지 알아내여 속속 대마도로 뽑아넘기였다.

요리꼬가 보낸 정보가운데는 죽촌에 사는 리별장의 딸이 박위와 가깝게 지낸다는 이채로운 소식도 끼워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유난히 사다께의 관심을 끌었다.

궁리를 거듭하던 사다께는 지체없이 요리꼬에게 고려조정의 형세가 복잡한 이때 박위와 호백의 갈등과 리옥의 대마도체류를 리용하여 박위에게 역신의 올가미를 씌우게 하라는 지령을 새로 떨구었다.

거제도의 왜인들, 사다께가 직접 파견한 대마도의 간자들이 요리꼬와 사다께사이로 줄을 늘인 거미새끼들모양으로 부지런히 오고갔다.

발이 착착 맞아떨어지고 사개가 척척 물려들어갔다.

이제는 박위를 사갈시하는 김해부사에게 그럴사한 미끼를 몇개 던져주면 일은 자기의 의도대로 산뜻하게 결속될것 같았다.

박위를 결정적으로 요정내게 할 미끼는 자기 사다께와 리옥이(본의든 본의아니든)가 공동으로 제출하게 될것이였다.

일의 성공을 확고하게 내다보게 된 이 마당에서 사다께는 흥분하지 않을수 없었다. 천리밖에 나앉아 손에 피 한방울 묻히지 않고 적장의 목을 도린다는것은 제갈공명도 상상할수 없는 명쾌한 전투가 아니겠는가.

박위의 처형과 때를 같이하여 대마도군사들은 경상도를 공격할것이며 그것으로써 자기는 재력과 군력을 더한층 불구고 다질것이였다.

어이 알랴, 고려를 타고앉은 뒤에는 막부의 룡상까지 끌어당겨 앉게 되겠는지? 그것은 결코 까마득히 멀리에 있는 일이거나 보라빛꿈일수 없었다.

《사략》이라는 옛책에도 씌여있지 않는가.

왕과 장상의 종자가 어디 따로 있다더냐?!…

…지엄하신 니찌렌도노에게 자기의 대망과 진정을 속속들이 아뢰인 후 니찌렌이 음성이 없는 하늘의 목소리로 일러주는 래일의 방도와 격려를 몸에 받은 사다께는 한층 넓어진 가슴으로 돌상앞에서 물러났다.

소리없이 문을 열고 나서니 명상중에 계시는 령주를 감히 방해할수 없어 협실앞에서 서성거리던 지또가 다가왔다.

《도노께서 분부하신대로 세 도적놈의 시체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개무리에게 던져주었습니다.

하나를 벌하여 열을 징계하려는 령주도노의 의도대로 군사들은 깨닫는바가 자못 클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급하게 결처를 받아야 할 일이 생겨서…》

《무슨 일인가?》

사다께는 아침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딴판으로 부드럽게 물었다.

《예, 오늘 전라도에 나가게 된 구리부네 패들이 낮때부터 바다길이 사나워질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주저하는 꼴이던데… 어찌했으면 좋을는지?!…》

칼자리가 박혀있는 아래턱을 습관적으로 긁적거리던 사다께는 대바람 세모진 눈에 파란 불꽃을 띄우며 지또를 노려보았다.

《고노야로― 바다길이 무서워서 길을 못 떠나겠다는 그따위 겁쟁이들이 우리에게 천이면 무엇하고 만이면 어디에 쓰겠는가.

위험은 용맹의 교련장이다. 천자인 우리들에게 공포나 불안이 있을수 없다.

구리부네에게 일러라. 룡왕제를 지내고는 지체없이 떠나라고 말이다.

그리구 지또부터가 그따위 얼간이들의 잡설에 귀를 기울이거나 마음이 동해서는 안된다.

내 벌써 몇번이나 말했는가.

포부를 크게 세우고 검을 잡은 이상 유약한 문관나부래기들같은 소심성, 농사군류의 인정이나 사고방식과는 인연을 싹 끊어야 한단 말이다.》

연방 귤쪽같은 대가리를 조아리던 지또는 저도 모르는새 사다께가 그리도 싫어하는 농사군류의 어정쩡한 소리를 다시금 꺼내놓았다.

《…그런데 제를 지내자면 제물로 쓸 아이놈이 또 하나 있어야 할게 아니오니까.

제를 지낼 때마다 아이놈을 잡아 대다보니 이제는 씨가 마를 지경이여서…》

왜인들은 옛적부터 귀신놀이라면 기를 빡 쓰고 달라붙는 종자들이였다.

룡왕제를 지낼 때면 산 아이의 배를 가르고 그속에 생쌀을 집어넣어 상우에 올려놓거나 산 아이를 통채로 바다물에 던져놓는 끔찍한짓도 꺼림없이 행하였다.

헌데 여러 갈래의 크고작은 도적패가 무시로 로략질을 떠나고 그때마다 대개 룡왕제를 지내다보니 이제 와서는 번마다 귀신놀이에 바칠 아이놈을 찍어대는것도 헐후한 일이 아니였다.

잔뜩 못마땅한 시선으로 귀족냄새도 나지 않고 무장의 체취도 풍기지 않는, 다만 열성과 아첨으로 자기의 무능을 메꾸려드는 지또를 노려보던 사다께는 세모진 눈에 다시 독을 올리였다.

(인간은 인간앞에 승냥이이상으로 무자비할 때 인간세상의 승자로 군림할수 있다. 사람이 사람앞에 사람일반의 인정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존재한다면 그는 영원히 바다물에 휩쓸린 하나의 물방울처럼 개성적인 형체를 가질수 없게 된다.

이 촌장같은 작자도 응당 아첨과 열성만이 아니라 맹수와 같은 결단력과 독사와 같은 무자비성을 가지고 나를 받들게 해야 한다.)

결심이 서자 사다께는 단호한 어조로 언명했다.

《이봐, 무릇 승리란 가슴아픈 희생우에서 피여나는 피로 얼룩진 꽃이다.

희생이 없이 승리를 얻겠다는자는 영원히 자기의 소원을 성취할수 없다.

그러니 이번 제사에는 너의 둘째아들놈을 바치도록 해라. 네자신부터 수범을 보이란 말이다.》

지또는 허옇게 눈망울을 까뒤집으며 전신을 후들후들 떨었다.

자기 자식이 아니라 자기가 바로 지옥의 문어구에 들어선듯 신음소리까지 끙끙 흘리였다.

한참만에야 달리 어쩔수 없는 자기 운명의 애달픔을 탄식하며 가까스로 대답하였다.

《그리… 하겠소이다.》

물론 지또는 자기의 농민적근성과 사고방식을 뿌리뽑으려는 사다께의 깊은 속마음에 감동되여서가 아니라 습관적인 복종심과 공포심에 짓눌리여 대답한것이였다.

했으나 눈앞으로는 자꾸만 광란하는 바다물속에 개구리처럼 사지를 뻗고 알몸으로 곤두박히는 아들놈의 형국과 미친년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행악질을 하는 녀편네의 모습이 언거번거로 떠올라 각일각 피가 졸아들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사다께는 볼장을 다 보았다는듯이 대청마루쪽으로 당당히 걸어나갔다.

잠시 그 자리에 못박혀있던 지또는 자기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약성을 드러내다가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이 고기밥이 될수 있다는 섬찍한 생각이 떠오르자 불시에 정신이 버쩍 들어 황급히 사다께의 뒤를 따랐다.

대청마루에 뒤짐을 돌려잡고 위엄있게 서있는 사다께의 등뒤에 바싹 다가붙었다.

지또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본 사다께는 자기의 교육방식이 만족하고 지또의 즉시적인 성장이 무척 갸륵하여 속이 흐뭇했으나 아무런 내색도 없이 다시한번 고삐를 바싹 조여잡았다.

《그건그게고… 내가 어제 밤 일러준대로 혼슈와 규수, 시꼬꾸지방으로 오늘중에 또 사람들을 띄워라.

아직도 가도와 산야에서 방황하는 고께닌들과 농군들을 될수 있는대로 더 많이 끌어와야 한다.

우리의 군세를 더욱 확장하고 큰일의 성취를 앞당기자면 군사들을 모집하는 일 역시 항시 중시해야 한다.》

《알겠소이다.》

《내 보건대 너는 지금도 아이놈일때문에 속을 떨고있는데…

격동하는 시대에 남아로 나서 그렇게 속이 얍슬해가지고야 무슨 큰 일을 하겠는가. 마음을 크게 먹어라.

해뜨는 나라의 천자답게 사사로운 감정일체를 털어버리고 오로지 큰일의 실행을 위해 줄달음쳐 살아야 한다.》

《령주도노의 높은 뜻과 헌앙한 기개를 충심으로 받들고 따르겠소이다.》

지또는 사다께의 거창한 뜻과 실한 배짱에 진정으로 탄복하고 공감한듯 한 표정을 진실하게 그려보이기 위해 애쓰며 자못 강개한 어조로 대답했다.

관사의 담너머에 바싹 들어붙어있는 이찌대(1대)군영쪽에서 사나운 섬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더한층 소란하게 들려왔다.

숱한 군사들앞에서 세구의 시체를 말강스레 뜯어먹은 개들은 먹이를 깨깨 다 삼켜버리고도 아직 왕성한 식욕을 누를길 없는듯 저들끼리 물고뜯으며 싸움을 하는것이였다.

14

14

 

조촐한 방안의 왼쪽벽에 동그랗게 뚫린 뙤창너머에는 한쪼각의 밤하늘이 그림처럼 까닭없이 드리워있었다.

거기서는 쥐여뿌린듯이 무수한 별들이 은싸래기처럼 바글바글 끓고있었다.

큰 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작은 별들은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살아움직이는 물체라고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탓인지 아니면 고려에서 바라볼 때나 다름없이 유난스러운 정체를 발산하는 낯익은 별들이 정에 겨워선지 하나하나가 다 의미깊게 안겨왔다.

(저기 먼 웃쪽에서 유난히 빛나는 제일 큰 별은 나라님이시고 그곁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은 나라님의 거동길을 따라나선 룡호군의 군사들이라고 해야 할거야.

그렇다면 왕별곁에 초간히 떨어져있는 조금 큰 별은 현중이 아버님이라고 봐야지.

그뒤에 바투 따라선 애기별들은 군영의 군사들과 귀여운 현중이?!…

그럼 나 리옥은 어디에 있는거나?

아, 저기 맨 구석에서 애처롭게 파들파들 떨고있는 자그마한 저 별,

그만에야 기다란 은꼬리를 끌며 곤두박혀 떨어지는 저 별이 바로 내가 아닐가.

아아 그래, 나는 정녕 저 별처럼 인간세상에서 떨어져서 지옥속으로 굴러내리였어.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가?!)

대마도에 끌려온 리옥이 정신을 차리자 제일먼저 안겨온것은 동그란 뙤창속에 들어있는 한쪼각 밤하늘, 그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무리였다.

리옥은 그 별무리를 살펴보며 절망적인 사색을 두서없이 이어가고있었다.…

…리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기가 겪은 며칠간의 일이 도무지 현실처럼 실감되지 않았다.

꼭 악몽속에서 겪은 일같았다.

(어떻게 되여 아늑한 시골동네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나의 운명이 하루 아침새에 이렇게 엄청나게 뒤번져지였는가?!

이것이야말로 귀신의 작희가 아니고 무엇이랴?…)

리옥은 절망과 공포, 불안과 위구가 가슴을 옥죄일수록 이 땅에서의 래일이 소름끼치게 두려웠다.

그런중에도 고국에서 흘러간 나날, 다시는 돌아올것 같지 않은 지난 나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날 아침 여느때없이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리옥은 대숲속에 청동거울쪼박처럼 박혀있는 정갈한 샘둥천에 나가 말끔히 세면을 하고 나서 난생처음 얼굴치장에 달라붙었다.

그러지 않아도 하얀 얼굴에 조개껍질을 보드랍게 가루내여 만든 조개분을 고루 문대기였다.

윤기가 자르르하게 도는 검은 머리에는 향긋한 동백기름을 조금 진할사하게 발랐다.

그다음은 앞가슴우로 태머리를 끄당겨놓았다.

몇번이나 풀었다꼬았다 하던 끝에 실하지도 여위지도 않게 탐스러이 땋아지자 머리태끝에 장농깊이 간수했던 새 다홍색댕기를 곱게 드리웠다.

얼굴치장, 머리치장에 이어 몸치장까지 꼼꼼히 하고난 뒤 잠시 할바를 잊고 서성거리던 리옥은 자꾸만 들썽거리는 마음을 눅잦힐양으로 앞마당에 나섰다.

구기자포기마다 질벅하게 물을 주었다.

몽당비로 앞마당을 쓸고 걸레로 마루를 닦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리옥은 짓다가 만 현중의 무관복을 꺼내들었다.

바늘을 들고 골무까지 끼였으나 왜서인지 일손이 놀려지지 않았다.

저로서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자기의 모양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하여 절로 허거픈 웃음이 나갔다.

조금후 단단히 마음을 조여먹은 리옥은 화살을 벗겨들고 뒤뜰로 들어갔다.

했으나 활쏘기에도 집념할수 없었다.

한껏 부풀어오른 처녀의 마음은 하냥 박위에게로 달음쳐갔다.

오늘은 해변고을들을 돌아보러나간 박위가 군영으로 오게 된 날이였다.

박위가 군영에 들어서면 현중은 그 즉시 여기 죽촌으로 달려올것이였다.

어쩌면 박위가 직접 이곳에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보름전의 그날 밤 자기가 불타는 마음을 통으로 기울이여 써올린 편지의 회답을 받게 될것이였다.

말로든 글로든…

헌데 그 회신은 과연 어떤 내용일가.

찬동일가, 거절일가?!…

얼굴생김새는 준수해보이기도 하고 위엄있어보이기도 하지만 속마음은 깊고 너그러운 박위는 필시 절절한 자기의 마음에 찬동을 보낼것 같았다.

어찌 생각하면 노상 군사일에만 집착하는 딱딱하고 드바쁜 그의 생활태도로 보아 거절할것 같기도 했다.

찬동은 더 말할것없이 기쁠것이요, 거절은 제일로 괴로울것이였다.

아니, 씹어 생각해보면 꼭 그럴것 같지도 않았다.

박위가 선선히 찬동한다면 일변 기쁜중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울것 같았다.

그가 거절한다면 한켠으로는 슬프면서도 다른 한켠으로는 다행스러울것 같았다.

한참이나 번거로우면서도 환희로운 사랑의 감정에 빠져있던 리옥은 자기의 살진 귀밥이 따갑게 달아올랐음을 의식하자 살풋이 얼굴을 붉히며 살래살래 도리머리를 저었다.

(무슨 녀자의 마음이 이렇게 경망스러울가.

내가 이렇게 싱숭생숭해가지고 마음을 진정 못하는것은 나의 됨됨이 천박한탓이 아닐가.

아니, 그렇지 않을거야. 나는 지금 그 어떤 찬동이나 거절을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몰리해를 겁나하고있어.

그걸 어떻게 천박하다고 볼수 있으랴.

그래, 나의 청순한 진정이 전혀 다른 뜻으로 곡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가슴아픈 일일거야.…)

겉모양은 아련하나 내성적인 가슴속에는 풍만한 정서와 도담하고 열정적인 성품이 넘치도록 그득히 들어있는 리옥은 자기로서도 알길없는 슬픔과 기쁨에 잠기여 상반되는 두 감정의 근원을 찾아보느라고 무던히도 속을 태우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저벅저벅 앞마당쪽에서 청신한 고요를 짓째며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아, 현중이가 왔구나!)

가슴속에서 후두둑 새가 깃을 쳤다.

리옥이 높뛰는 가슴을 제어하며 앞마당으로 나가려는데 뒤뜰의 참대숲언저리에서도 소삽한 발자국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리옥은 이상한 느낌, 불길한 예감에 싸이여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앞뜰, 뒤뜰의 울바자를 타넘고 들어온 왜구들은 리옥을 에워싸고 갈가마귀떼처럼 모여들었다.

한뉘 무관의 집에서 무관들과 어울려지낸 처녀, 어릴적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와 같은 무술을 열심히 련마해온 리옥은 자기가 승산없는 정황에 맞다들렸음을 직감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적들에게 공손히 목을 내댈수는 없었다.

익달된 동작으로 재빨리 살을 메워든 리옥은 맨 앞장에서 다가드는 절구통같이 생긴 왜구의 목대를 겨누고 살을 날리였다.

상대가 마닐마닐해보이는 아녀자라 시물시물 웃기까지 하며 다가들던 절구통은 번개처럼 날아온 리옥의 화살에 멱살을 찔리자 상판에서 징그러운 웃음기를 채 지우지도 못한채 뒤로 나떨어지였다.

리옥은 다시 시위에 살을 메웠다.

순간 뒤쪽에서 달려든 검덕귀신같은 왜구가 처녀의 머리에 검은 자루를 푹 내리씌웠다.

리옥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으나 두억시니떼처럼 달려든 왜구들은 우악스러운 손질로 순식간에 자루속에 든 처녀의 몸을 꽁꽁 묶어버리였다.

아늑한 정적에 묻히여 또 하루의 생활을 즐겁게 꿈꾸던 죽촌마을의 곳곳에서 급작스레 무엇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비명소리가 귀따갑게 터져올랐다.

초가이영과 나무기둥, 천뭉테기 같은것이 타는 소리가 황황 들려오고 후끈후끈한 열풍이 밀려드는 소리가 훅훅 울려왔다.

리옥은 자기의 몸이 말달구지우에 허궁 날아 떨어지는 순간 그만에야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가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것은 다락배의 갑판우에서였다.

간신히 눈시울을 올리고보니 왜구의 다락배는 기세좋게 물살을 헤가르며 왜땅쪽으로 미끄러져가는데 갑판우에 패패로 모여앉은 왜구들은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술을 퍼마시고있었다.

리옥은 순식간에 자기가 어떤 지경에 처했는가를 포착하였다.

수치와 모욕을 모면하자면 죽든살든 바다물에 뛰여들어야 한다는 발작적인 충동이 떠올랐다.

리옥은 무작정 몸을 솟구쳤다.

무엇인가 온몸을 세차게 나꾸어채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리옥은 자기의 몸이 돛대에 꽁꽁 묶이웠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

리옥은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입술을 깨물며 맥없이 고개를 푹 내리떨구었다.

다시금 까박까박 의식이 흐려들었다.

이것은 결코 리옥의 기질이나 속심지가 섬약한탓이 아니였다.

리옥은 숫눈처럼 깨끗하고 샘물처럼 정갈한 처녀였다. 불의라면 추호도 용납할줄 모르고 정의라면 온몸을 태워서라도 지키려드는 강개하고 정열적인 녀자이기도 했다.

하기에 그는 자기의 눈앞에 수치와 모욕의 진구렁이 꺼멓게 입을 벌리고있다는것을 깨닫자 심장이 터져나갈듯 한 극렬한 분노와 반발감에 휩싸이였다.

바로 그래서 홀연 의식을 잃어버리였다. 까마귀는 구린내나는 오물더미우에서도 먹을것을 헤집어내며 살수 있지만 물새는 맑고 푸른 물과 청신한 공기를 떠나서는 순시도 살수 없지 않는가?!…

…세월의 흐름은 정지되고 세상만물은 순환의 섭리를 망각한채 죄다 화석으로 굳어진듯싶었다.

그속에서 또 하나의 석상으로 변한듯 까딱없이 앉아있는 리옥의 명상적인 눈에서는 맑디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생각탓인지 뙤창너머에서 울리는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한층 높아진듯싶었다.

예전에는 으스산하게만 생각되던 밤바다의 파도소리조차 지금에는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 저 파도를 가르며 가고 또 가느라면 이삼일도 안되여 그리운 고국땅에 가닿을것이다.

현중이가 있고 현중 아버님이 계시는 곳, 오늘도 오가는 바람결에조차 이 딸의 명복을 실어보내고계실 아버님의 령혼이 있고 구기자열매들이 어우러진 아늑한 내 집이 있는 그곳에…

아아! 현중 아버님! 대체 이 어인 일이옵니까!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끼친적 없는 이 소녀에게 이런 악몽같은 현실이 차례진단 말입니까!

현중 아버님! 흉폭한 왜구들은 이제 소녀에게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는 모욕과 수치를 강요할것입니다.

소녀는 아무리 큰 시련이라도 능히 견디여낼수 있지만 수치와 모욕은 비록 하잘것없는것이라 할지라도 들쓰고는 한시도 살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소녀는 죽음을 택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기쁜 일도 있었고 서러운 사연도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도 많은 미련이 남아있는 이승입니다.

그 이승과 서둘러 작별하자니 가지가지 한과 원이 얼음덩이처럼 차겁게 이 가슴에 맺혀오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아픈것은 평생을 조용히 살아오시다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인생의 문을 소리없이 닫으신 아버님처럼 그렇게 살지도 못하고 또 아버님의 원쑤도 갚지 못한채 값눅게 세상을 하직하는것입니다.

…현중 아버님이 지방순행을 떠나시기 전날 저녁 소녀는 열번, 스무번을 바재이던 끝에 그리도 힘겨운 글월을 써올렸습니다.

그것이 옳은 례절인지 바르지 못한 행실인지 지금도 소녀는 똑똑히 가늠할수 없습니다.

하오나 진정을 고하건대 소녀는 당신의 중하신 군영일을 성심으로 도와드리고 현중이의 성장을 성의껏 살펴주는것이 곧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 길이요, 고려땅에 태를 묻은 녀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불행한 이 소녀는 당신의 대답말씀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떠납니다.

그것 역시 무척 한스럽고 애석한 일입니다.

현중에게 무관복을 채 지어주지 못한것도, 그에게 있는 정을 다 기울이지 못한것도 무척 서운합니다.

장군! 소녀는 비록 왜땅의 한구석에서 빛없이 스러지지만 당신께서 가끔이라도 이 세상에 당신을 열렬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녀자가 있었다는것을 추억해주신다면 그것만이라도 소녀는 행복할것입니다.

모쪼록 당신께서 내내 건강하시여 왜구와의 싸움에서 더 큰 공을 세우시기를, 그래서 소녀의 쌓이고 맺힌 원한도 백배로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리옥은 자정이 훨씬 지난 뒤에야 잊지 못할 그날 박위를 맞이하기 위해 그처럼 가슴설레이며 정히 드리웠던 다홍색댕기와 머리태를 감싸쥔채 살풋이 잠이 들었다.

15

15

 

짙은 어둠이 덮여있던 뙤창이 하얗게 벗겨지였다.

사위는 귀멍멍할 지경으로 고요한데 어디선가 이름모를 바다새들의 명쾌한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비릿한 해감내와 싱긋한 나무잎새냄새같은것이 바다바람을 타고 느긋하게 쓸어들어왔다.

여기 도적떼의 소굴에도 고려땅이나 다름없이 맑고 신선한 아침이 밝아오고 새울음소리며 나무잎내 같은것이 풍긴다는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였다.

밤이 가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새가 우짖고 싱긋한 바람이 불어오는것은 너무도 엄연한 자연의 리치건만 자연은 과연 인간세상이 아닌 짐승들의 세계에도 자기의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숨김없이 펼쳐보일수 있단 말인가.

리옥은 뒤엉킨 심리, 어벙벙한 기분에 사로잡히여 별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머리를 비다듬어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뙤창가로 다가섰다.

체념이 깃든 시들한 시선으로 아무런 목적도 의욕도 없이 창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창밖의 자연이 한폭의 그림처럼 선명하게 안겨왔다.

하얀 꽃무더기를 한가득 품어안고 그 어떤 심원한 사색에라도 잠긴듯 미동도 없이 서있는 애젊은 때쭉나무.

그 나무의 상가지우에서 술래잡기라도 하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숫제 랑군처럼 보이는 호구니와 숫색시처럼 보이는 호구니…

여기서도 여름의 자연은 아름다운 화폭을 펼치고 즐거운 음향과 싱그러운 향기를 날리며 약동하건만 리옥의 가슴은 더더욱 아프게 비틀리고 허우룩하게 무너져내리였다.

갑자기 참대쪽을 깔아놓은 복도의 바닥이 쿵쿵 울리였다.

리옥은 변함없이 뙤창너머에 시선을 던진채 까딱없이 서있었으나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활랑거리였다.

공포와 불안의 한순간이 지나가자 자기는 이미 죽음을 결심한 사람이라는 옹골진 마음이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뭉쳐지였다.

출입문이 펄썩 열리였다.

키는 무척 작고 몸집은 대단히 뚱뚱한데 대가리는 귤쪽처럼 삐죽한 왜구가 바싹 다가왔다.

전혀 알아들을수 없는 왜말로 쑤얼거리였다.

《고려처녀! 령주도노께서 몸소 너의 숙소에 래림하셨다. 인사를 올려라!》

리옥은 서서히 고개를 돌리였다.

방안에 들어선 놈은 두놈.

보매 령주의 막하 부하인듯 한 뚱뚱보는 절구통에 귤쪽을 접해놓은듯 한것이 첫눈에 벌써 저급한 지능을 가진 아둔패기라는것이 헨둥 알리였다.

허나 그놈의 뒤에 잇꽃무늬가 조잡하게 그려진 푸른색비단관복을 지르르하게 흘려입고 족도리같은 관모를 눌러쓴 놈팽이는 쇠덩이같이 단단해보이는 몸집에 독사의 눈알같은것이 판들거리는것이 여간만 독하고 사나울것 같지 않았다.

리옥은 심상한 낯빛으로 장님 은빛보듯 두놈의 모양꼴을 훑어보고나서 다시 고개를 돌리였다.

화가 동해오른 지또는 가느다란 눈을 지릅뜨며 서툴기 짝이 없는 고려말로 다시금 그 무슨 례의를 강박했다.

《무스메, 어서 령주도노께 인사를 올려라!》

리옥은 불뭉치같은것이 치밀어오르는듯 한 충동을 느끼는 순간 매서운 눈길로 지또를 노려보며 쏘아붙이였다.

《나는 당신들에게 강제로 끌려온 사람이요.

아무런 죄도 없이 강제로 잡혀온 사람이 누구에게 뭐라고 인사를 한단 말이요?》

《이년이 뉘앞에서 감히…》

지또는 리옥의 항변이 실지로 골이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기회에 사다께에게 보다 잘 보일 심산으로 자기의 분노를 턱없이 과장하며 당장 후려치기라도 할것처럼 수선을 떨었다.

사다께는 지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것으로 졸개의 과장기가 농후한 저급한 행동을 제지시키고나서 방구석쪽에 놓여있는 까만 옻칠을 한 자그마한 밥상앞에 다가갔다.

밥상에는 기름떡과 연어회, 대순볶음 같은것이 조금조금 담겨있는 나무그릇들이 올망졸망 놓여있었다.

그런대로 성의를 넣어 차려준 상이건만 어디에도 사람의 손이 닿았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물그릇만이 반나마 비여있었다.

비양기어린 미소를 띄우고 소대가리같이 커다란 머리를 끄떡거리던 사다께는 자못 틀스럽게 올방자를 고이고 앉았다.

허옇게 뒤집어진 웃입술을 너덜거리며 흠할데없이 류창한 고려말로 씨벌거리였다.

《흠! 며칠동안 줄곧 입을 봉하고있단 말이지. 지독하군.

그러니까 적국의 음식은 죽어도 먹지 않는다, 이런 뜻이란 말이지?!

너는 정말 죽고싶은가?!》

사다께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그 나직한 말속에 얼마나 끔찍한 행동의 뿌리가 들어있는가를 잘 아는 지또는 제쪽에서 먼저 흠칫 놀라며 리옥을 쳐다보았다.

리옥은 싸늘한 랭기가 풍기는 하얀 얼굴을 여전히 뙤창쪽에 돌린채 또박또박 그루를 박아 말했다.

《그렇소. 생도 내가 요구하는것이고 의도 내가 원하는것이요.

그러나 두가지를 다 얻을수 없다면 난 기꺼이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할것이요.》

만약 리옥이가 아니라 수하의 어느 누가 이런 말을 했다면 사다께는 즉석에서 《오멘!》하고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칼을 날렸을것이다.

허나 사납고 독할 망정 절대로 우직하지 않는 사다께는 이 처녀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이며 이 녀자를 통해 얼마나 많은것을 벌어들여야 하는가를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게다가 처녀의 도고한 기품은 난생처음 보는것이여서 그의 쌀쌀한 언행이 다소 화를 돋구기는 하지만 여간만 신기하지 않았다.

리옥의 나무랄데없이 깨끗한 얼굴과 몸매를 걸탐스럽게 여겨보던 사다께는 별안간 소대가리같은 상판을 뒤로 젖히며 껄껄 웃어댔다.

《핫하하! 리별장의 딸이요, 박위의 안으서감이라더니 과시 담기가 보통이 아니군. 그럴듯해, 그럴듯하단 말이야. 으핫하하!》

사다께의 전혀 뜻밖의 소리에 리옥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였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고려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는 여기 왜구의 섬에 골박혀있는 이놈이 내가 누구의 딸이라는것은 어떻게 알며 누구의 안으서감이라는 말은 또 무슨 소린가?)

리옥의 청초한 얼굴에 떠오르는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놓칠세라 여겨보던 사다께는 우야 멋을 내느라고 쓰고나온 관모가 아무래도 불편스러워 조금 뒤로 제껴놓고나서 한결 여유있는 청으로 말을 이었다.

《생과 의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의를 지키겠다?!

녀자가 그렇게 의를 중히 여긴다는것은 갸륵한 일이다. 아주 좋아.

헌데 너는 우리에 대해 심히 그릇인식하고있는것 같은데…

우리는 네가 생각하는것처럼 의리도 모르고 도리도 안중에 없는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에게는 우리의 의가 있고 우리의 도가 있단 말이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것 없다. 너는 생도 구할것이며 의도 잃지 않을것이다.》

《?!…》

사다께는 자기의 거침없이 흐르는 말재주를 스스로 흡족해하며 성수가 나서 뒤말을 심어나갔다.

《에또― 그러면 내 이제 우리의 용건을 말해주겠다.

듣자니 너는 경상도원수 박위와 매우 친좁게 지낸다던데 사실인가?》

창날로 쿡 찌르는듯 한 사다께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리옥은 숨이 꾹 막히는듯싶었다.

이제는 그저 놀라운것이 아니라 그 놀라움속에서 상서롭지 못한 추측이 연줄연줄 묻어올랐다.

(이놈은 우리 군영과 김해고을의 내막을 자상히 알고있는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 김해땅에 이놈과 줄이 닿아있는 렴탐군이 박혀있는게 아닐가?… 정말 모든것이 우연치 않다. 죄없는 생사람도 마구 때려죽이는 짐승같은 왜구들이 무엇때문에 저들의 병졸을 쏘아죽이기까지 한 나를 손톱눈 하나 다치지 않고 예까지 고이 데리고왔는가?

왜 지금까지도 살상의 《죄》를 전혀 따지지 않는가?

과연 무엇때문에 죽촌에서 잡아온 사람들은 죄다 마구칸같은데 쓸어넣으면서 나만은 유독 이렇게 깨끗한 방에 혼자 들여앉히고 귀빈처럼 대하는것일가?…)

리옥의 대답말을 별로 기다리는 빛도 없이 턱주가리의 칼자리를 슬슬 매만지며 침묵을 지키던 사다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자기의 거대한 음모전반을 놓고볼 때 너무도 지엽적인것이여서 (그러나 가장 중요한 첫 공정이였다.) 타인으로서는 전혀 음모의 륜곽을 짐작할수 없는 첫 미끼를 슬쩍 뿌려던지였다.

《털어놓고말해서 우리는 너에게서 큰것을 바라지 않는다.

무슨 거짓말을 하라는것도 아니요, 어떤 요란한 물건을 내라는것도 아니다. 박위는 지금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너로 하여 무척 근심하고있을게다.

그러니 간단하게라도 그지간의 너의 소식을 박위에게 알리라는것이다. 그것은 너도 소원하는바일줄 안다.》

《?!》

《너는 물론 우리의 청을 이상하게 생각할수 있으나 사실상 의문날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번에 데려온 고려백성들중에 리별장의 딸이 끼워있는줄은 전혀 몰랐다. 본의는 아니라도 한 나라의 장수인 박위와 가깝게 지내는 녀자를 예까지 잡아온것은 우리로서 매우 미안쩍은 일이요, 떳떳치 못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죄겸 너의 소식을 박위에게 알려주자는것이다.》

《?!》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고 한가지 거짓말을 꺼내놓은 사다께는 그 거짓말을 사실처럼 묘사하기 위해 수다한 거짓말을 꺼내놓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너를 포함한 고려백성들을 예까지 데려왔으며 인차 되돌려보낼수 없는가.

에또― 그것은 박위와 화평교섭을 하기 위해서이다.

터놓고말해서 우리는 오늘날에 이르러 지치기도 했지만 마음이 달라지여 이제는 피차 검을 놓고 평화적인 교역을 하며 의좋게 살았으면 한다. 그런데 호전적인 성향이 농후한 박위가 우리의 청을 옳게 리해하고 쉽사리 응낙하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는데 박위는 계속 옛적의 원한을 따지며 검을 휘두른다면 우리로서는 여간만 괴롭지 않을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가지로 신중히 따져본 끝에 박위가 평화교섭에 응해나설 때까지 고려사람들을 이곳에 그냥 눌러앉힐 결심을 내리였다. 그런즉 너의 편지는 박위에게 보내는 문안편지인 동시에 량국간의 력사적인 평화교섭의 첫시작으로 될것이다.》

사다께는 장광설을 끝내기 바쁘게 리옥의 반응을 슬며시 살펴보았다.

사다께의 검은 속심을 전혀 알리 없는 리옥은 아미를 나부시 내리깐채 제나름대로 무거운 생각에 잠기였다.

(이놈의 수작이 절반만 사실이라 해도 얼마나 좋겠는가.

평화교역! 그것은 파괴도 살륙도 없고 불과 피도 없는 생활을 전제로 하는것이다. 헌데 그것이 과연 이들의 본의겠는가?…)

아무리 되굴려 생각해보아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의혹과 불안만이 갈수록 불어올랐다.

(…벌써 백수십년전부터 고려에 대한 침략과 략탈을 일삼아온 왜구들이 이제 와서 갑자기 검을 놓고 제 먼저 화평을 운운한다는것이 과연 있을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놈들이 진정으로 화평을 원한다면 우선 먼저 우리 고려국 조정에 찾아가 지난날의 대죄를 일일이 반성하고 앞날의 맹세를 진심으로 다져야 할것이다.

그런데 화평을 원한다는 놈들이 무엇때문에 죽촌을 불태우고 숱한사람들을 죽인단 말인가?…

정녕 무엇때문에 여기 섬구석에 똬리를 틀고앉아 일개 시골녀자에 불과한 나를 내세워 화평교섭의 첫 꼭지를 떼겠노라고 구차스러운 소리를 하는가.

화평수작은 필경 거짓이다. 흉물스러운 이놈들은 나를 미끼로 무서운 음모를 꾸미려는것이 분명하다.)

예까지 생각이 이르자 절로 숨결이 높아지였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짙어가는 의혹속에서 리옥의 사색은 줄차게 내뻗치였다.

(혹시 이놈들이 나를 구렝이 닭알녹이듯 해가지고 현중 아버님과 군영군사들을 어째보려는것이 아닐가?…

그렇다면 나는 이 마당에서 무턱대고 죽을 생각만 하면서 만사를 체념해야 하겠는가.

아니야, 오늘의 이 일이 나 하나의 목숨에 관계되는것이라면 내가 죽는것으로 끝장낼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할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 일은 분명 현중 아버님과 군영군사들의 운명과 관련된 일이다.

크게 본다면 우리 고려국의 안위와 운명에 관한 문제이다.

그렇다면 기어이 살아서 가능한껏 김해땅에 박혀있는 왜구의 세작을 알아내고 여기 도적굴의 속내를 내탐하여 군영에 전하는것이 옳은 도리일것이다.

그것이 내 사랑 고려를 위해 내가 할수 있는 마지막일일것이다.

자결은 어느때든 할수 있는 일, 내 생의 마지막과제를 끝낸 뒤에도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이다.)

리옥의 결심은 드디여 쇠덩이처럼 굳어지였다.

사실상 자기가 생의 마지막과제로 내세운 그 모든 일은 너무도 막연한것이여서 마치 하늘의 구름을 끌어내리려는것처럼 허

황하게 생각되기도 했으나 절대로 외면할수 없는 일인것만은 명백했다.

불안과 절망에 싸여있던 리옥은 생활의 준엄한 목표를 설정하였다.

실행행로는 오리무중했으나 타산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허나 다음순간 지나치게 결곡하고 정열적인 녀자들이 쉽게 편견에 빠지듯이 리옥이도 그만 한가지 착오를 범하였다.

그것은 놈들의 궁냥이 어찌됐든 자기의 행적을 몰라 안타까와할 박위에게 한쪼각의 소식이라도 전한다면 피차가 다 한시름 놓을것이라는 극히 단순한 생각에 사로잡힌것이였다.

솜씨있는 화공이 섬세하게 붓질을 하여 그려놓은 한폭의 정교한 인물화마냥 까딱없이 굳어져있던 리옥은 그 어떤 마술에서 풀려나기라도 한듯 고개를 들어올리였다.

사다께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전혀 예상밖의 일이라 사다께의 세모진 눈에 금시 의혹의 자욱이 허옇게 매달리였다.

그러거나말거나 리옥은 사다께앞에 작고 고운 버선발을 멈추더니 나부시 무릎을 꺾고 앉았다.

좀전과는 훨씬 다르게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꺼냈다.

《실례인것 같은데 난 지금 몹시 시장하오. 무엇이든 조금 먹어야 생각도 하고 글도 쓸것 같으니 내가 술을 뜨는 동안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으면 하오.》

의혹과 놀라움이 비꼈던 사다께의 떡판같은 얼굴에 기쁨의 혈조가 징그럽게 번져지였다.

리옥이 자기가 던진 미끼를 연추채로 삼킨것이라고 짐작한것이였다.

여직껏 검둥개 굿구경하듯 아무런 흥심도 없이 사다께와 리옥을 갈마보던 지또의 가느스름한 곰눈도 휑하게 커지였다.

지또는 고려처녀가 제아무리 도고하다 해도 사다께의 비상한 계략의 그물에는 걸려들지 않을수 없노라는 뜻의 비굴한 웃음을 띄우며 칼자리가 얼기설기 흘러간 상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다께는 상당히 휘여내기 어려울줄 알았던 리옥이가 이처럼 수월하게 굽어들자 다소 어정쩡한중에도 여간만 기쁘지 않았다.

계집이란 역시 제아무리 도담하고 총명하다 해도 단순하고 편벽한 물건이요, 자기의 계략으로 말하면 하늘과 감응하는것이니 의당뒤끝은 이렇게 될법 아니냐 하는 자기나름의 판단과 자부심이 무덕무덕 괴여올랐다.

그러거나말거나 리옥은 유연하게 팔을 내뻗치여 기다란 저가락으로 기름떡 하나를 꿰들었다.

기름이 찰찰 흐르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몰몰 풍기는 기름떡이건만 정작 입에 넣으니 모래덩이처럼 깔깔하고 써벅써벅한것이 쉬이 씹어넘길수 없었다.

리옥은 전혀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몸에 힘을 주어 강다짐으로 기름떡을 씹어나갔다.

마당삼이라도 얻은 놈처럼 희색이 만면하여 노냥노냥 기름떡을 씹고있는 리옥을 유심히 뜯어보던 사다께는 처녀의 목언저리에 박혀있는 까만 기미를 띄워보자 왜서인지 흠칫 몸을 떨었다.

투실투실한 상판에서 어룽거리던 웃음기는 씻은듯이 사라져버리고 세모진 눈에서는 이상한 불꽃이 파랗게 부서지고있었다.

뙤창너머로 내다보이는 진회색하늘에서는 시꺼먼 비구름장들이 서리서리 뒤엉키며 이쪽으로 달음박질쳐오고있었다.

머지않아 무서운 폭우가 터질 조짐이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되돌이 목록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2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辽ICP备15008236号-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