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
다음날 아침 간수가 찾아서 감방을 나갔다가 들어온 한상수의 표정은 침울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왜 나오라고 했어요.》
정창식은 한상수의 낯색을 근심스레 살피였다.
《서울축구단 <태백>의 재정감독을 하던자를 만났댔소.》
한상수는 입이 쓰거운듯 나직이 내뱉았다.
《면회왔댔어요?》
《면회?… 그자가 간수부장이 됐더군.》
《?…》
둘은 놀라와 한상수를 바라보았다. 한상수는 더 말하고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감방벽에 기대여 생각에 잠겼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백근식이가 하던 말이 그냥 맴돌이쳤다. 그는 한상수에게 자네는 그 누구의 밀고에 의해서 체포되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밀고자!… 밀고자는 과연 누구일가. 혹시 놈들의 날조가 아닐가. 하지만 천태만상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 알며 믿을수 있단말인가.
한상수의 머리속은 터져나갈것만 같았다.
백근식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처신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일진광풍이 일었다. 백근식 제놈이 모략을 하고 아닌보살하면서 그런 나발을 불어대는것이 아닐가? 나와 가까운 사람들사이에 쐐기를 박으려고… 그럴수 있다.
한상수는 이렇게 백근식의 수작질을 해석하여 일축하면서도 그자의 소리가 사실일수도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쳐들었다.
(그렇다면 박영진이?! 장철수?!…)
눈앞에는 서울에 와서 가까이 지낸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밀고자는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속에 있을것이다. 그런 배신자가 자기의 주위에 있었다는것을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문득 안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처롭게 울며 섶을 지고 불속에 뛰여들지 말라고 애원하던 안해의 애절한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 혹시 옥야가?…)
아니, 아니다. 무슨 당치 않은 억측을. 그것은 생각만 해도 천벌을 받을 일이다. 그렇다면 누가? 한상수를 예심하던 정보부의 수사관은 모든것을 속속들이 알수 있었다.
한상수는 통일을 위해 스스로 이 길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한상수에 대한 예심과 재판은 속전속결되였고 《국가보안법》에 의해 20년의 형을 받았다.
《우갑동지.》
한상수는 불쑥 입을 열었다.
《녀편네란 남이라는게 사실입니까?》
《그건 뭘 념두에 두고 하는 말이요.》
박우갑은 한상수의 심상치 않은 물음에 미소를 담고 말했다.
《하긴 색시를 얻어보지 못했으니…》
한상수는 큰숨을 무겁게 내그으며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색시타령은 왜 하오? 무슨 일이 있었소?》
박우갑은 한상수의 어두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있었지요.》
한상수는 백근식을 만났던 사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상수가 불리워 들어간 방은 걸상들이 벽을 따라 주런이 놓여있고 큼직한 책상이 있었다. 취조실은 아니였다. 그는 이 방의 주인이 보통간수가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방의 주인은 큰 책상앞에 앉아 문서를 뒤적거리며 머리도 들지 않았다. 한상수도 그자의 얼굴을 별로 여겨볼 필요가 없어 눈길을 아래로 떨군채 묵묵히 서있었다. 간수가 나가자 방주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수군.》
어디선가 듣던 목소리였다. 한상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는 놀랐다. 서울축구단 《태백》의 재정감독이였던 백근식이였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간수복을 입고있는가?
《알아보는군. 한상수, 몇년만인가. 5년만이지? 내가 여기에 있는줄은 꿈에도 생각못했겠지. 거기 앉으라구.》
백근식은 히죽이 웃으며 한쪽구석에 놓인 걸상을 눈으로 가리켰다. 한상수는 말없이 걸상에 앉았다.
《운명의 희롱이 우리를 또다시 만나게 했네. 아무래도 우린 함께 살아가게 된가부야.》
백근식의 어조는 감회에 잠겨있었다. 한상수의 뇌리에는 수만가지 의혹이 한꺼번에 떼지어 떠올랐다. 어찌된 일인가? 전쟁전에 사라진 이자가 여기 감옥의 간수노릇을 하고있을줄이야… 원쑤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이 감옥에서 만나다니…
《하긴.》 한상수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비슷한 소리같소. 내가 38˚선을 넘어왔을 때도 당신이 맞아들였구 결혼식을 할 때두 나서주었지. 그 다음엔 나를 체포하여 감옥에까지 넣었구… 그러니 일생을 함께 있을수밖에.》
한상수의 목소리는 뜻밖이리만큼 조용하였다.
《내가 자네를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다구?!》
백근식의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내 한가지 정정해주겠네. 나는 <태백>의 재정감독이 아니라 적어도 이 형무소 간수부장일세.》
한상수는 의혹의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의 표정을 일별한 백근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러니 나를 밀고자로 확신하고있군. 이보게 한상수, 사람이 그러면 못써. 우리야 한때 의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아니였나. 나는 자네를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구. 그런데 자넨 김정식회장의 죽음을 놓고 나의 꼬리를 캐기 시작하더군. 참으로 인사불성이지. 내 후에 기회가 있을 때 말해주겠네만 나는 자네때문에 5년간을 시궁창에서 뒹굴었어.
진실을 말하지만 자네를 밀고한것은 다른 사람이야.
그것은 자네에게 숙제로 남겨주지…》
백근식의 말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악의와 조소에 차있었다.
《그래 감옥에 오니 기분이 어떤가?》
한상수는 대답을 안했다.
《하긴 자네같은 사람을 감옥안에 넣어두기는 아까워. 솔직히 말하면 자네같은 재사를 감옥안에서 썩이게 한다는것은 죄악이고 수치지. 상수군, 이제라도 개심을 하고 <한국>을 위해 뽈을 차겠다고 하면 감형을 시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석방시키는 문제에 대해서도 상부에 제기하겠네.》
《…》
백근식은 한상수가 침묵을 지키자 자기 말의 효력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축구광신자가 뭘 주저할것이 있어. 축구선수야 북에서든 남에서든 뽈만 차면 그만이 아닌가.》
한상수는 피곤한 기색으로 백근식을 쳐다보았다.
《여보, 난 지쳤소. 내앞에서 그런 사탕발림소리는 하지 마오. 난 돌아가겠소.》
백근식은 말할 흥미를 잃고 말았다. 절벽과 마주 선듯한 감이 들었다. 물론 한상수가 대번에 호락호락 순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백근식은 한상수의 거칠고 쌀쌀한 태도를 너그럽게 대했다. 한상수는 자기 출세의 발판이였던것이다.
하지만 한상수가 너무도 대답이 없고 무관심한 표정을 보이자 이미 입힌 그의 상처에 소금물을 뿌리리라 결심했다. 그는 걸상에 웃몸을 실었다.
《이보라구. 상수군, 자네는 자네를 밀고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싶지 않나?》
《밀고한 사람?!…》
아닐세라 그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지나갔다. 다음 순간 다시 한본새로 걸상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만약 부장님이 아니라면 부장님과 같은 인간이겠지 누군 누구겠소. 때문에 나는 구태여 알고싶지 않소.》
《인간은…》하고 백근식이 말했다.
《천치나 숙맥이 아니고서는 자기에게 해를 끼친자를 반드시 알아내서 복수를 해야 한이 풀리지. 안그렇나?
내가 이 자리에서 대줄수도 있지만 자네가 내 말을 믿을것 같지 않아 그만두겠네. 자네 스스로 밀고자를 추리해 보게.》
《우리 친구들한텐 그런 비렬한들이 없소.》
《하지만 인간생활에서는 친구는 물론 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는 때가 있지. 잘 생각해보게.》
백근식은 간수를 불러 한상수를 데려가게 했다.…
《친구들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라. 그건 혈육이나 안해를 념두에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요?》
박우갑이 한상수에게 하는 말이였다.
《…》
한상수는 덤덤히 앉아있었다.
《상수선생님은 북쪽사람이니 여기에 형제들은 없을거구.》
정창식이 한마디 끼였다.
박우갑이 다시 물었다.
《상수동문 부인을 믿소?》
한상수는 한참후에 대답했다.
《믿지요. 그 녀자는 나를 배반하지 않을겁니다.》
《그럼 됐소. 다행이요. 안해가 남편을 고발한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으니까.》
박우갑은 한시름 놓는듯 했다. 그러나 한상수는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박우갑이한테 모든것을 털어놓고싶었다. 얼마후에 그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의 처는 연약한 녀자지요. 부자집의 외동딸이란 말입니다.》
《부자집의 자식이라고 해서 남편을 배반한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소. 창식동무를 보오. 잘사는 집의 아들이지만 변함없이 잘 싸우고있지 않소.》
박우갑은 한상수를 위안하려고 했다.
《그건 신념이 있기때문이지요. 하지만 저의 처에게는 그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저를 위하는 마음만은 극진했지요.》
《단언하기는 이르오. 그런것은 두고 보아야 할 일이요. 놈들의 날조일수도 있고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면 남편을 위한 안해의 진정이 우롱당하였을 경우일거요. 상수동무, 우리는 통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요. 자기 안해조차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통일애국투쟁을 하겠소. 난 상수동무의 부인을 믿고싶구만.》
박우갑의 목소리는 심중하고 진지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다소 진정되는듯 싶다.
한상수는 안해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옥야! 자기의 일생에서 북남으로 갈라진 국토분렬의 비극을 사랑으로 도전하여 인연을 맺은 사람, 불시에 가슴을 저미는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는 옥야를 두번째로 만났던 때였지…
…1946년 5월 개성을 떠난 경의선렬차는 봄빛이 짙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서울을 향해 질풍처럼 달리고있었다. 차안에는 《경평축구대항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는 평양축구선수단이 타고있었다. 해마다 전통적으로 진행하던 《경평축구대항전》은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다시 재개될수 없었다.
미국놈들은 38˚선을 가로 막고 북남의 체육선수들이 자유로이 오고가는것을 악랄하게 방해하였다.
경애하는 수령님께서는 놈들의 분렬책동에 대처하여 만약 남조선축구선수들이 평양으로 오지 못하면 우리가 38˚선을 넘어 서울에 나가 경기를 진행할데 대한 주동적인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하여 평양의 축구선수들이 서울로 나가게 된것이다. 열어놓은 차창으로 봄의 훈향이 싱그럽게 흘러든다. 차창밖으로는 록색주단을 펼친 전야가 끝없이 흘러갔다. 최뚝에는 하얀 냉이꽃과 노란 민들레꽃이 수집은듯 다문다문 피여있다. 바구니를 든 아이들이 나물을 캐다가 기차를 보고 손을 흔든다. 그때마다 선수들은 벙실벙실 웃으며 마주 손을 저어주군 했다.
차창옆에 자리를 잡은 한상수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여 천천히 흘러가고있는 산천을 내다보고있었다. 숨가쁜 기적소리와 함께 그의 호흡도 가빠지는듯 했다. 서울이 멀지 않은것이다. 서울! 처음오는 길도 아니다. 하지만 왜 이처럼 가슴이 벅찰가. 왜 이번 길은 흥분이 더욱 세차게 솟구칠가. 그것은 단순히 체육경기를 하러간다는 감정에서 오는것만이 아니다. 서울에는 옥야가 있다. 평양 모란봉기슭에서 만났던 그 《쎄라복》처녀가!…
그해 봄의 평양은 온통 꽃속에 묻혀있었다. 대동강기슭에 실실이 늘어진 버드나무와 모란봉의 꽃경치는 참으로 황홀했다.
한상수는 한쪽 어깨에 축구뽈이 든 그물망태기를 메고 유유히 대동강가를 걸어오고있었다. 갑자기 모란봉송림속에서 녀자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갈마든 한상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급히 뛰여올라갔다.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창이 넓은 운동모자를 쓰고 반바지를 입은 세놈의 새파란 왜놈학생들이 한 녀학생을 에워싸고 먹이를 본 맹수처럼 천천히 다가들고있었다. 쎄라복을 입은 녀학생은 겁에 질려 손으로 입을 감싼채 뒤걸음을 쳤다. 뒤와 좌우에는 빽빽한 송림뿐이였다.
《히히… 어때? 야, 옷을 벗겨라!》
두볼이 축 늘어진 우두머리같은놈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두놈이 후닥닥 달려들어 녀학생의 쎄라복앞섶을 와락 잡아챘다.
《사람 살려요! 사람…》
한놈이 우악스럽게 녀학생의 입을 틀어막았다.
녀학생은 아무리 요동을 쳤으나 강약이 부동이였다. 놈들은 녀학생을 끌고 송림속으로 들어가려고 헤덤비였다. 한상수의 눈에서 불이 일었다. 우리가 네놈들에게 승냥이앞의 양처럼 다 죽은줄 아느냐. 민족의 울분이 온몸에 뻗쳐올랐다.
《이 쪽발이새끼들아!…》
그는 뽈이 든 그물망태기를 집어던졌다. 불의에 나타난 한상수의 출현은 세놈을 당황케 했다. 놈들은 처녀를 놔주고 야구방망이를 꼬나들었다. 그리고 조여들기 시작했다. 드디여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댔다.
《죠센징, 어디 이노무새끼 맛이나 봐라.》
《쪽발이새끼! 에익…》
한상수가 번쩍하고 몸을 날렸다. 가운데있는 놈은 머리로 받고 량쪽에 있는 놈들은 발길로 힘껏 걷어찼다. 한동안 혼전이 벌어졌다. 투닥투닥 치고 받는 소리로 저물어가는 숲속이 스산해졌다. 처녀의 동무인 다른 녀학생이 그때에야 헐레벌떡거리며 달려왔다. 두 처녀학생은 온몸을 사시나무떨듯 했다.
한상수의 주먹에 한놈이 나무토막처럼 꼬꾸라졌다. 다른 놈의 코에서 피가 터지자 두놈은 삼십륙계줄행랑을 놓았다. 한상수는 쓰러져 꿈틀거리고있는 놈을 지르밟았다. 왜놈을 거꾸러뜨렸다는 통쾌감과 함께 이런 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우리 처녀들이 모욕을 당한다는 분통이 터져올랐다. 그는 떡 버티고 서서 호령했다.
《야, 이 쪽발이야, 뒈지지 않겠으면 어서 일어나 사라져!》
놈은 그 소리를 기다리고있은듯이 죽어가던것 같지 않게 후닥닥 일어나 산아래로 구을듯이 도망쳐버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하마트면 큰일날번했습니다. 어디 다친덴 없으십니까?》
한상수가 물었다. 세놈과 한몸을 내대여 싸우고도 먼저 자기들을 걱정해주는 그를 보고 두 처녀는 당황하여 어쩔바를 몰라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거기선 일없으신지?…》
봉변을 당할번했던 녀학생의 입에서 혀아래소리가 새여나왔다.
《일없습니다. 아무려면 그 쪽발이새끼들한테 맞겠습니까. 자, 갑시다.》
한상수는 뽈이 든 그물망태기를 찾아 어깨에 걸치고는 앞서 걸었다. 그는 두 녀학생을 만수대언덕아래 도로까지 데려다주고는 조심히 잘 가라는 인사말한마디를 던지고는 가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해후에 한상수는 뜻밖에 그 녀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였다. 그는 평양에 수학려행을 왔던 서울녀고의 학생이였다. 그는 서울경기장에 축구구경을 갔다가 그렇게도 관중들의 이목을 끄는 《비수》라는 청년이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 은인이라는것을 알고 축구선수들을 찾아다니며 겨우 주소를 탐문하여 편지를 쓰게 되였다고 했다. 후에도 편지는 계속 왔다. 한상수는 처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회답을 했다. 어느덧 두 사람의 가슴속에는 서로가 잊을수 없는 귀중한 존재로 자리잡게 되였고 그것은 마침내 사랑이라는 끊을수 없는 동아줄로 이어지게 되였다.…
지금은 어떻게나 변했을가! 목갈린 기적소리, 환성소리에 한상수는 상념에서 깨여났다.
서울! 역명판이 확 다가온다. 어느새 렬차가 서울역구내에 들어선것이다. 나팔소리, 북소리, 환호소리… 꽃보라… 구내에 차고넘치는 사람들의 물결, 렬차가 통채로 하늘공중으로 떠오르는듯 했다. 《평양축구선수들을 열렬히 환영한다!》라고 쓴 대형프랑카드와 환영장식판들이 곳곳에 펼쳐졌었다.
한상수는 어떻게 역홈으로 내려갔는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쉴새없이 꽃보라가 뿌려졌다.
그는 꽃보라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수 없었다. 그러나 꽃보라를 털어버릴 생각이 없었다. 꽃보라가 함뿍 들씌워질수록 그것이 38선으로 갈라져있는 남녘동포들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하는 처녀가 안겨주는 친근한 손길로 생각되여 더욱더 후더워옴을 느끼였다.
이때 눈같이 흰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몸매날씬한 처녀가 꽃다발을 들고 한상수앞으로 나는듯이 달려왔다.
《상수씨!…》
한상수는 호흡이 꺽 멎는듯한 감을 느끼였다. 피아노소리처럼 명료하고 물기가 어린듯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었던 그 목소리임자를 쳐다보았다. 류달리 속눈섭이 길고 심연처럼 깊어보이는 처녀의 눈동자가 빛을 뿜었다.
《아, 옥야!…》
한상수는 높뛰는 심장의 박동을 누르며 그앞에 다가섰다.
《오셨군요.》
환희에 찬 처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핑 어리였다.
《옥야!》 한상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른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옥야가 평양축구선수들이 든 려관에 한 처녀를 데리고 찾아왔다. 수집어서 혼자서는 차마 못오겠던 모양이다. 옥야는 한상수에게 자기 벗의 이름이 인향이라고 소개했다. 함께 의학대학을 다닌다는것이였다. 그는 평양에 함께 왔던 이미 낯을 익힌 처녀였다. 옥야는 생긴대로 아련하고 사려깊은 사색형의 녀자라면 인향은 씨원씨원한 활동적인 처녀였다. 그가 바로 후에 박영진의 안해가 되였다.
그들이 함께 거리에 나서자 인향은 볼일이 있다는 핑게를 대고 둘을 남겨놓은채 달아나버렸다. 옥야는 불빛이 흘러나오는 가로등밑에 이르자 한상수를 쳐다보며 은근하면서도 수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창경원으로 가시지 않겠어요?》
한상수는 몰라보게 변모된 옥야를 이윽토록 내려다보았다. 서너오리의 머리칼이 드리운 도두룩한 이마며 순결의 상징인듯 백옥처럼 하얀 목, 흥분과 수집음에 발가스레 물든 두볼… 세상에 옥야처럼 아름다운 녀자는 없으리라는 생각이 꽉 찼다.
《옥야씨가 바란다면!…》
《고마워요.》
옥야는 정겨운 어조로 조용히 속삭이며 발길을 떼였다. 하늘에는 하나둘 첫 별이 뜨기시작했다. 봄바람이 처녀의 흰 옷고름과 이마의 잔머리칼을 가볍게 날렸다. 그날밤 사랑의 황홀경에 빠진 그들은 오래도록 거리를 거닐었다. 창경원의 밤꽃을 구경하는것보다 한상수는 련련하면서도 청초한 옥야의 모습을 보는것이 더 좋았다. 행복감으로 가득찬 처녀의 그윽한 눈은 봄밤의 별빛을 받아 더욱 황홀하게 반짝였다.
그밤에 한상수는 옥야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할것을 약속하였다.
옥야는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한상수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옥야를 세번째로 만난것은 1949년 미국팀과의 경기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였다. 박영진을 따라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한 그는 《태백》이 조직하는 환영연회에 참가하고 다음날 그와 함께 옥야가 근무하는 서울병원을 찾아갔다. 그들은 대학들 사이길을 걸어 빨간벽돌로 지은 2층짜리 건물앞에 이르렀다. 《서울병원》이라고 쓴 현판이 그들을 내려다보고있었다. 병원뒤에도 건물이 보이는데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천천히 거닐고있었다. 입원실같았다. 정문 좌측에 있는 키높은 뽀뿌라나무와 황철나무가 빼곡이 들어찬 소공원에도 몇명의 환자들이 나무걸상에 앉아 소풍을 하고있었다.
박영진이 나서서 정문지기와 몇마디 주고받더니 한상수에게 황철나무밑에 가서 기다리라고 이른 다음 건물안으로 사라졌다. 한상수는 가슴이 설레였다. 자나깨나 보고싶던 옥야를 만나게 된다는 흥분이 온몸을 짜릿하게 했다. 옥야와 헤여진지는 3년밖에 안되였지만 10년, 20년이 된것 같기도 했다. 리별은 짧았어도 그리움의 세월은 왜 그렇게 길어보이는것인지.…
《상수형!》하는 박영진의 웨침소리가 울렸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한상수는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박영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껑충껑충 뛰여오고 그뒤로 눈같이 흰 위생복을 입고 의사모를 한손에 감아쥔채 종종 걸음을 치는 처녀가 있었다.
(옥야!…)
한상수는 금시 심장이 멎는듯 했다. 옥야도 나무밑에 서있는 한상수를 보고 그만 그자리에 멈춰선채 선뜻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옥야!》
《상수씨!》
그들은 마주섰다. 처녀는 돌아섰다.그리고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주저앉으며 어깨를 세차게 떨었다.
한상수는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 어떤 환각에 사로잡힌것만 같았다. 앞에는 사랑하는 옥야가 아니라 그 어떤 환영이, 그 어떤 허상이 서있는것 같기도 했다.
《옥야!》 한상수는 허리를 굽히여 흐느끼고있는 옥야의 어깨를 다정히 잡으며 조용히 불렀다. 한상수의 손길에 이끌리여 일어선 옥야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념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점도록 쳐다보았다.
《오셨군요.》
한상수는 숨이 꺽 막히는듯 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믿었어요. 오실줄 믿었어요.》
옥야는 정에 사무친 눈길로 한상수를 애무하며 열렬히 속삭였다.
이때 그들앞에 위생복을 입은 박영진의 안해 인향이가 나타났다.
《오래간만입니다.》
한상수는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몸이 부해진 녀인에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드디여 오셨군요. 옥야가 그처럼 기다리더니…》
인향의 목소리도 눈물에 젖었다. 벗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여기는것이였다.
《상수형은 나한테 귀잡고 절을 해야겠소.》
박영진이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능청스러운 소리를 했다.
《내가 아니면 이런 미인을 다시 만날수 있겠소. 그러니 옥야씨도 그렇고 상수형도 나한테 턱을 내요.》
박영진은 지꿎게 달라붙었다.
《아무렴요. 영진씨의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
행복에 겨워 새뭇이 웃기만 하던 옥야는 진정으로 말했다.
《하하… 내 롱으로 하는 소리고… 그럼 난 우리 인향마님과 함께 물러가겠소이다. 리도령의 방자는 이것으로 자기 소임을 끝내는뎁쇼.》
박영진이 허리를 굽혀 절을 하고 껄껄 웃으며 자기 안해와 함께 돌아섰다. 행복한 부부였다.
《상수씨, 잠간만!…》
옥야는 뒤돌아서 급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잠시후에 그는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하얀 이마에 송골땀이 맺혔다.
《가셔요.》
옥야는 먼저 걸음을 떼였다.
《어디루?…》
《어디긴 어디예요. 집으로 가셔야지. 집에서들 얼마나 기뻐하겠게요.》
옥야는 한상수의 얼굴에서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는다. 한상수는 좀 게면쩍은 생각이 들었다. 부모들이 정말 자기를 환영하겠는지, 하여튼 부딪쳐볼판이다.
《언제 서울에 오셨어요?》
걸음을 옮기던 옥야가 고개를 살짝 쳐들고 물었다.
《어제…》
《제가 보낸 편지를 받으셨어요?》
《받아보았소.》
《그런데 어째서 회답을 안하셨어요.》
옥야의 얼굴에는 서운한 빛이 어리였다. 한상수는 말을 못했다. 분렬의 장벽으로 매우 힘들게 인편을 찾아 오가는 편지였다. 제 나라에서는 물론 국제서신거래도 이루어지는 때에 서로 편지조차 오고가도록 통신망이 없는 북과 남의 이 비극을 어떻게 한마디로 이야기한단 말인가. 침침한 얼굴로 걷는 한상수를 여겨 보던 옥야가 분위기를 일변하려고 다정히 팔을 끼며 입을 열었다.
《됐네요. 우린 끝내 이렇게 만나지 않았어요.》
옥야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들이 정류소에 이르자 곧 전차가 왔다. 옥야의 집이 있는 효자동은 두번을 갈아타야 했다. 전차는 북악산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한참 달린 후에 능금과수원이 있는 언덕을 넘어 멎었다. 전차에서 내린 그들은 고색이 짙은 덩지 큰 집들사이길을 따라 걸어갔다. 첫눈에도 호화주택구역이라는것이 알렸다. 옥야의 집도 이 구역에 있었다.
얼마후에 그들은 옥야의 집에 이르렀다. 솟을대문이 위압적으로 굽어보고있었다. 개명한 대부호의 집에 온듯 한 느낌이 들었다. 화강석으로 쌓은 층계와 청기와를 올린 담장이며 날아갈듯한 합각지붕은 도고하고 세도높은 이 집주인의 품격을 엿보게 했다. 사람들은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이면 대단하다고 하지만 이처럼 요란한 집에서 사는줄은 몰랐다.
옥야가 대돌우에 올라서 초인종을 누르자 자박자박 신발끄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찌―꿍 하고 열렸다. 대문사이로 하얀 명주치마저고리에 비단조끼를 걸친 녀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옥야냐?》
《예, 어머니. 제가 누구를 모시고 왔는지 알아맞춰보세요.》
옥야가 생글생글 웃으며 한상수의 손을 끌었다.
《누구게?》
옥야의 어머니는 대문앞에 서있는 한상수를 여겨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상수씨가 왔어요. 그 <비수>라는분 말이예요.》
《뭐 <비수>?》
녀인은 얼른 깨도가 되지 않는 모양이였다.
《아이참 안타까워라. 어머닌 정말…》
옥야가 민망한듯 눈을 빨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제야 옥야의 어머니는 리해가 된듯 두손을 맞잡으며 헤둥거린다.
《어이구, 내가 무슨 망녕이람. 귀한 손님을 밖에 세워두고… 어서 들어오세요.》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한상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요.》
옥야의 어머니 장씨는 대문을 열어놓으며 한상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자기의 실책을 깨달은 그는 손님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지 어쩔줄을 몰라했다. 대문안으로 들어서자 또 자그마한 중문이 나타났다. 중문을 지키던 송아지만한 쎄빠드가 낯선 한상수를 보고 으르릉거렸다. 옥야가 개를 보고 꾸짖자 쎄빠드는 한쪽에 쭈그리고앉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거린다. 뜨락에는 구렝이형국의 향나무 한그루가 서있고 덕대우에 꽃나무화분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한상수는 옥야의 뒤를 따라 윤기흐르는 마루를 거쳐 어느 한 방으로 들어갔다. 옥야의 방이였다. 방안에는 화장품이 놓여있는 삼면경대와 책이 가득 들어있는 자그마한 책장, 장식보를 씌운 전축과 피아노가 있었다.
《앉으세요.》
옥야는 방석을 한상수앞에 가져다놓고 잠시 옆방으로 나갔다가 수수한 아래우달린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윽고 어머니가 수정과를 유리그릇에 담아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목이나 좀 추기세요.》
장씨는 상냥하게 말하고 방에서 나갔다.
《드세요. 어서요. 목이 타시지요? 덥지요?》
옥야는 살뜰하고 정겹게 말하며 한상수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었다.
《고맙소.》
《아이참, 상수씨는 꼭 남한테 말씀하듯 하셔요.》
옥야는 밉지 않게 눈을 할기였다. 한상수는 가슴이 뻐근했다. 너무도 달라진 현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옥야와 함께 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았고 그의 얼굴, 그의 목소리가 곁에서 울린다는것이 꿈같기만 했다. 더구나 지금 자기가 옥야의 집에 와있다는것은 상상도 못해본 일이였다.
옥야가 살그머니 일어나 피아노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건반뚜껑에 한손을 얹고 한상수를 돌아봤다.
《상수씨, 피아노 한곡 들으시겠어요?》
《…》
한상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였다. 옥야는 머리를 비다듬어올리고 옷매무시를 바로 한 다음 피아노앞에 앉았다. 마음을 진정하듯 잠시 앉아있던 그는 건반뚜껑을 열었다. 한상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노옆으로 다가갔다.
곁에서 옥야의 체취를 느끼고싶었다. 건반우로 날아다니는 그의 손길을 보고싶었다. 문득 옥야의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에 홍조가 피였다. 이윽고 그는 길게 숨을 한번 내긋고 몇번 건반을 세차게 두드린 다음 살짝 한상수를 쳐다보았다.
《상수씨, 어떤 음악을 연주할가요? 목가적인 슈벨트음악? 아니면 폭풍같은 베토벤음악? 이슬의 속삭임같은 쇼펜의 음악을 듣겠어요?》
한상수는 그저 벙긋이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사실 그는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였다.
《옥야씨가 좋아하는걸…》 한상수는 얼굴을 붉히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옥야는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피아노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여 신기한 음악의 세계가 펼쳐졌다. 붓끝같은 하얀 손이 건반우에서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 한상수는 제나름의 생각에 잠겼다. 청신하고 깨끗한 아침노을이 피여나고 곡식이 무르익는 들길로 말을 타고 경쾌하게 달리는 두 청춘남녀, 아름다운 자연, 희망에 넘친 생활, 미래에 대한 사랑!…
옥야는 음악에 심취되여 건반우에 구슬같은 눈물을 떨구기도 하고 들꽃같이 깨끗한 미소를 피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열정에 북받쳐 건반을 더 세차게 두드리더니 문득 숨을 멈추고 타는듯한 눈길로 한상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 녀자의 눈은 행복과 기쁨에 빛나고있었다. 주위에서 그 어떤 폭풍우가 광란해도 옥야의 심혼은 오직 한상수에게 쏠리는듯 했다.
《어서 계속하오.》
한상수가 옥야의 어깨우에 손을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싫어요. 전 이렇게 상수씨를 바라보고있겠어요. 상수씨는 아마 제 마음을 다 모를거예요.》
《왜 모르겠소. 옥야! 이젠 우리… 떨어지지 말자구.》
《그래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지구가 깨져도 함께… 절해고도에 있어도 변함없이…》
옥야의 눈에는 눈물에 젖은 미소가 어렸다.
《그래 영원히 함께 있자구.》
한상수는 옥야의 얼굴에 뜨거운 눈길을 박으며 열렬히 부르짖었다. 그들의 숨결은 하나로 뒤섞여졌다. 옥야는 몸을 떨었다. 한상수의 심장도 흥분과 열광에 높뛰였다.
그러나 미국팀과의 두번째경기가 있은 날, 한상수는 뜻밖에 경찰서에 련행되였다. 문전코앞까지 몰고갔던 뽈을 넣지 않고 돌아선것은 우방국인 미국을 우롱한것이라는것이다. 경찰들은 한상수가 남조선과 미국간 친선에 금이 가게 했다는 죄명을 들씌워 몰매를 안기고 수일간 류치장에 가두었다.
사회적여론과 체육계의 항의에 의하여 그는 경찰서에서 놓여나왔지만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옥야의 집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얼마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가 빨리 회복될수 있은것은 체육으로 다져진 강철같은 의지와 젊은 육체라는데도 있었지만 중요하게는 그를 더없이 귀중히 여기는 옥야의 정성이 지극한데 있었다. 그동안 옥야는 누가 뭐라든 개의치 않고 아예 병원에 출근하지 않았다. 한시도 한상수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병치료에 전념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한상수는 어느날 병상에 누워 생각해온것을 조용히 털어놓았다.
《옥야, 아무리 생각해도 빨리 북으로 떠나야겠소. 옥야도 함께 가기요.》
사실 그는 북에서 떠나올 때 체육단에 서울로 떠나게 된 사연을 적은 편지 한장을 보냈을뿐이였다. 그때 그는 서울에 가서 미국팀과의 경기를 끝낸 다음 축구를 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북으로 오겠다고 했다. 축구선수후비를 고르기 위해 해주에 온 그가 평양에까지 가서 승인을 받을 시간적여유가 없었다. 그날 저녁에 떠나는 밀선이 있었던것이였다.
《그렇게 빨리요?》
옥야의 얼굴은 해쓱하게 질렸다. 끝내 운명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것이였다. 물론 그것을 예견하지 못한것은 아니였다. 녀자가 나이가 들어 시집을 가면 부모곁을 떠나는것은 인생리치의 하나지만 그가 집을 떠난다는 문제는 중대사변이였다. 외동딸인 자기를 금지옥엽처럼 키워준 부모들과 나서자란 집과 가까운 벗들과 헤여진다는것은 그 녀자로 하여금 괴로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은 강렬한것이였다. 옥야는 애인의 의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철없던 시절도 지나가지 않았는가. 자기 운명을 향해 서슴없이 용단을 내릴 때가 되였다. 옥야는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갔다.
《옥야, 정 떠나기 괴로우면 그냥 있소. 내 혼자 먼저 가겠소.》
한상수가 련민의 정어린 눈길로 옥야를 보며 말했다.
순간 옥야의 눈에 노여움에 찬 불꽃이 튀였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우린 이미 약속하지 않았어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말은 또릿했으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상수는 가슴이 찌르르해옴을 느꼈다. 그랬었다. 지구가 깨져도 함께 있고 절해고도에 있어도 변함없이 사랑하자고 약속했었다.
《옥야.》
한상수는 그의 두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옥야 아버지가 있는 서재로 들어갔다. 허락을 받기 위해서였다.
서무진은 쏘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무슨 생각에 잠겨 담배연기를 피워올리고있었다.
《아버님, 그동안 페를 많이 끼쳤습니다.》
한상수가 무릎을 꿇고앉으며 조용히 인사를 했다. 옥야도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음, 자넨가?》
서무진은 자기 딸과 나란히 앉아있는 한상수를 얼핏 일별하고나서 재털이에 담배재를 털었다.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서무진이 입을 열었다. 《자넨 요즘 기분이 썩 좋지 못하겠구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영웅남아로 떠받들리우던 자네가 수만군중들앞에서 부정선수로 퇴장을 당하고 경찰에까지 불리워갔다 왔으니… 허지만 그건 응당한 일이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했지만 자네는 <한국>국민도 아닌데다가 첫 경기의 마지막에서 미국에 무척 불손했어.》
한상수의 몸이 푸들거렸다. 곁에 앉은 옥야가 그의 손을 꼭 쥐여주었다. 흥분하지 말고 참으라는것이였다. 만약 옥야가 곁에서 진정시키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몰랐다.
《이젠 어떻게 하겠나?》
잠시 동안을 두었던 서무진이 넌지시 물었다.
《아버님, 전 아버님이 승낙하신다면 옥야씨를 데리고 38˚선을 넘으려고 합니다.》
한상수는 고개를 들어 서무진을 쳐다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우리 옥야를 데리구?!》
서무진은 대경실색했다. 금시 얼굴이 험악해졌다.
《예, 승낙해주십시오.》
《그건 안돼!》
서무진은 단마디로 일축해버렸다. 그리고는 불맞은 짐승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이북과 <남한>의 체제는 량립할수 없는 물과 기름이야. 갈테면 자네 혼자나 가게.》
《…》
잠시후에 한상수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이미 결심했습니다.》
《우리라구?!》
서무진의 칼날같은 눈길이 몸을 옹송그리고있는 딸에게 날아와 박혔다.
《아버님, 용서하세요. 저도 상수씨와 함께…》
옥야가 기여드는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
서무진은 입을 약간 벌린채 얼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였다. 지금껏 이 딸자식 하나를 믿고 애지중지 길러놓았더니 부모를 버리고 달아나겠다고 한다. 그것도 북으로!…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그래 그게 사실이냐?》
서무진은 노여움과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확인하듯 물었다.
《네.》
옥야는 고개를 들지 못한채 겨우 알아들을수 있게 대답했다.
그 순간 서무진은 지금껏 가슴속에 쌓아놓았던 딸에 대한 애정의 탑이 와르르 무너짐을 느끼였다. 그만에야 분격하여 천둥같은 고함을 질렀다.
《고얀년같으니, 좋다. 따라가라. 이제 당장 썩 사라져!》
부엌에서 동자질을 하던 장씨가 와뜰 놀라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오며 《여보 령감, 왜 이러시우. 차근차근 타이르지 않구.》 하고 남편을 나무랬다.
《필요없어. 나에겐 딸자식이 없다. 갈테면 가라.》
서무진은 후들후들 떨며 옷을 입고는 밖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어머니!》
옥야가 장씨의 품에 와락 안기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것아,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네가 떠나면 이 에민 어떻게 하라는거냐.》
장씨도 딸을 껴안고 꺼이꺼이 울며 넉두리를 했다.
이때 박영진이가 찾아왔다.
한상수는 고개를 푹 꺾고 황소숨을 몰아쉬며 뿌리내린듯 방안에 앉아있었다. 내가 정말 한 가정에 불화의 씨를 던져넣는거나 아닐가. 그의 얼굴에는 형언할수 없는 고뇌가 깃들어있었다.
박영진이 방안에 들어서자 모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무슨 일이 있었소?》
박영진이 방안의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며 조심히 물었다.
《떠나자구!》
《어디루?!》
《북으로 가야지.》
한상수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박영진은 잠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지금 38˚선지대는 일촉즉발의 정세가 감돌고있소. 사람들은 머지 않아 전쟁이 일어난다고 수군거리고있는데 이런때 38˚선을 넘는다는건 호박을 쓰고 돼지우리로 들어가는 격이요.》
《가다가 죽는한이 있더라도 난 가겠네.》
한상수의 목소리는 울분에 젖어있었다. 박영진은 미간을 찌프렸다.둘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창밖에는 어둠이 깃을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는 언제 전쟁이 일어나느냐는듯 싶게 전차소리가 울려오고 네온싸인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이윽고 박영진이 입을 열었다.
《가더라도 정세나 좀 풀린 다음에 갑시다.》
《아니, 난 가겠네. 자네 정 오금이 떨리면 그만 두게. 북으로 갈 친구들은 얼마든지 있네.》
한상수는 긴말을 하지 않고 단호히 일어섰다.
박영진이와의 친분은 혈육처럼 뜨겁지만 가는 길은 서로 다르다는것을 어렴풋이 느끼였다.
사랑은 무서운것이다. 다음날 한상수와 옥야는 한장의 편지를 집에 남겨놓고 몇명의 축구선수들과 함께 북으로의 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박영진이와 함께 온 통로를 따라 38˚선을 넘으려고 인천으로 빠지였다. 연평도로 가는 배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다에는 군함들이 한벌 쭉 깔려있었다. 할수 없이 연안쪽으로 붙었다. 연안에서 산등성이를 하나 넘으면 청단을 거쳐 북으로 갈수 있었던것이다. 거기서도 38˚선일대에 전호들이 굴설되여 철갑모를 쓴 남조선군들이 북쪽을 향해 총을 겨눈채 엎디여있었다. 개성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나 대포와 땅크들이 38˚선을 향해 굴러갔다. 그들은 할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한상수는 옥야와 결혼을 했다. 그들은 서무진이 사준 남산재밑의 아담한 양옥집에서 새 살림을 시작했다. 그렇게 사랑이 맺어졌고 가정을 꾸린 안해였다. 그런데 옥야가 나를 밀고하다니!…
한상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수가 없었다. 이 남쪽땅이 아무리 인륜의 불모지라고 한들 그가 어떻게 나를?… 절대로 그럴수가 없었다. 한상수는 그것을 확신하고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예감은 그냥 머리를 파고들었다.
2
택시는 눈뿌리가 시도록 펼쳐진 평야를 달리고있었다. 눈보라는 차창을 휘뿌려 때렸지만 워낙 속도를 높인차인지라 어느새 사라지고 웅웅 소리만 남길뿐이였다. 옥야에게는 그 모든 풍경과 바람소리가 자기가 가는 길을 더디게 하는 방해꾸러기처럼 여겨졌다. 얼굴은 파릿했고 두눈은 절망의 빛이 가득차 변속을 넣는 소리에도 흠칫 놀라 커지군 했다. 옥야는 자기가 꼭 벼랑한끝에 서있는것만 같았다. 어떻게 되여 자기의 생활이 돌개바람에 휘말리우듯 이렇게 갑자기 달라질수 있을가. 아니 그것은 피할수 없는 운명의 귀결이 아닐가. 이제 대구형무소로 가면 옥살이를 하는 남편의 모습을 어떻게 봐주며 그때 겪게 될 마음속 충격을 어떻게 견디여낼가, 아마 심장이 터져나갈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스며들었던 불안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칠줄은 몰랐다. 그것은 전쟁전 남편의 북으로의 길이 가로막혀 서울에 주저앉게 된 그때로부터 가정에 비껴들기 시작한 그늘이였는지 모른다. 그때 축구협회 회장 김정식은 한상수가 서울에 남게 되자 무척 기뻐하며 남편을 《태백》팀의 축구감독으로까지 임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식에 선물까지 들고 와서 축하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회장은 테로를 당하여 절명하였다. 김정식회장은 남편이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남편을 서울로 초청했고 누구보다 극진히 사랑한 사람이였다. 축구로 민족의 존엄을 지키고 슬기를 빛내이자는데서는 남편과 뜻이 맞았다. 정의를 위해서는 작두날우에라도 올라서는 성격까지도 어쩌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축구선수들모두가 그의 인간됨을 존경했고 남《한》축구를 대표하는 인물로 생각하였었다.
김정식회장의 죽음은 남편을 딴 사람처럼 만들어놓았다. 언제나 열정에 넘쳐있던 그의 눈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엄하고 침울한 빛이 어려있었다. 말수더구도 적어지고 생각에 잠겨있는 때가 많았다. 정신을 그 어디에다 뽑아던진것 같기도 했다. 집에서는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회장의 죽음은 남편의 생활에서 활기를 송두리채 앗아갔다. 그는 남편의 심정을 리해했다. 누구보다 존경하던 회장의 죽음이 그에게 너무도 큰 상실의 아픔을 주었다고 생각했던것이다. 하늘도 한 귀퉁이부터 열린다는데!… 이제 남편의 마음도 밝아지겠지. 이렇게 자기를 위안하며 남편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얼마후부터는 자기를 되찾은듯 친구들과 휩쓸려 돌아갔고 경기장에서 불을 피우며 욱욱 뽈을 찼다. 전과 달라진것이 있다면 말과 행동거지가 침착했고 분별이 있는것이였다.
그때까지는 이것이 멀리서 비구름이 서서히 밀려오듯이 자기의 신상에 불행의 검은 그림자를 던지는것임을 알지 못했다. 다만 활달하고 솔직하고 직선적인 남편이 과묵해지고 속이 깊은 사람으로 되는것은 아버지가 될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해 몸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고있었던것이다.
얼마 안있어 1950년 여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던 38˚선상에서 드디여 전쟁의 불구름이 타래쳐올랐다. 기세등등하여 공격좌지를 떠났던 남조선군은 몇㎞ 나가보지 못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였다. 전쟁을 일으킨지 3일후에는 인민군대의 포성이 미아리고개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총을 거꾸로 메고 뽀얗게 먼지를 들쓴 군복입은 무리들이 밀려오고 《정부》관리들과 돈많은 부자들이 황급히 짐을 꾸려가지고 한강교를 건너 남으로 나갔다. 집에 승용차를 끌고 나타난 아버지도 무작정 차에 오르라고 호통을 쳤다. 하지만 옥야는 아버지를 따라갈수 없었다. 남편이 어디에 갔는지 나타나지 않았던것이였다. 남편을 버리고 집을 떠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아버지는 욕사발을 퍼붓고 어머니와 함께 한강교를 건넜다. 남편을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고있는데 벌써 시내에 인민군땅크가 지축을 울리며 들이닥쳤고 중앙청상공에 공화국기가 휘날렸다. 뒤이어 시민들의 만세소리가 터졌다. 옥야는 겁에 질려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 떨고있었다. 당장이라도 인민군대가 달려들어 자기를 묶어갈것만 같았다.
그날 밤이 퍼그나 깊어서야 여느때없이 흥분한 남편이 벙글거리며 집에 들어섰다.
《여보!》
공포에 질려있던 옥야는 남편의 가슴에 와락 안기며 설분을 터뜨렸다.
《당신은 어딜 그렇게 다니세요. 전 무서워요. 이제 인민군대가 우릴 잡으러 올지 몰라요.》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잡으러 오겠소. 걱정마오. 인민군대는 우리 군대요.》
남편은 성수가 나서 그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었다.
《그래두 우리야 다른 사람하고 처지가 다르지 않아요.》
《아버지가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이라구? 그게 무슨 상관이요. 괜찮소. 거리에 나가보오. 온통 환희와 기쁨의 거리요. 당신두 병원에 나가서 부상자치료도 하고 인민군대를 도와주는 일을 해야겠소.》
《제가 어떻게 이몸을 가지구…》
달아오른 얼굴을 붉히며 그는 남편의 등뒤에 머리를 기대였다.
《하하… 그런걸 난 전쟁이 끝나면 손자없이 어떻게 어머니한테 갈가하고 걱정했구만.》
남편은 그저 기쁘기만 한듯 고개를 쳐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참, 당신두 어떻게 38˚선을 넘어요?》
한번 38선을 넘다가 혼이 나서 돌아오던 일이 있어 걱정스러워 하는 소리다.
《요 새침데기, 이미 38˚선은 무너졌어.》
남편은 그의 오똑한 코를 손가락으로 꼭 눌러주며 또다시 소리내여 웃었다. 남편의 웃음에 불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저 남편만 곁에 있어주면 아무 걱정도 없겠다. 아침을 먹자 남편은 또 집을 나갈 차비를 했다.
《어딜 가세요?》
애원에 젖어 물었다.
《시내에 인민군대후원회가 조직되였소. 나가봐야겠소.》
《당신이 꼭 나가셔야 해요?》
그것은 곧 남편의 신상에 대한 우려때문이였다.
《이러한 때 북에서 온 내가 한몫 해야지 누가 하겠소. 나라가 통일된 다음 뭘 했느냐고 물으면 녀편네치마폭에 숨어있었다고 하겠소? 오늘은 박영진이한테도 가보고 친구들 집에도 가봐야 하겠으니 너무 기다리지 마오.
박영진이 얼씬 안하는것이 심상치 않단 말이요. 그 집에서 사내애를 낳았다는데 당신두 한번 가봐야지.》
남편은 옥야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고나서 밖으로 나갔다. 저녁무렵에 남편은 인편을 통해 한동안 어디에 갔다오겠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쪽지편지를 보내여왔다. 처음에 옥야는 무심히 생각했었다. 어느 한순간도 집안에 박혀있지 못하는 남편의 성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그렇게 나갔던 남편은 며칠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쟁 전기간에도 종무소식이였다. 남편을 찾아 체육단에도 가보고 그의 친구들 집에도 가보았지만 누구도 딱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갔던 사람들이 돌아와도 남편의 행처는 묘연했다. 언제면 올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이런 방정맞은 생각이 갈마들 때면 옥야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수 없었다. 전쟁의 복새통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죽지 않았으면 인민군대에 나갔다가 북으로 갔을수도 있다. 옥야는 이런 예감이 들었지만 사람들에게 절대로 그런 생각을 내비치지 않았다. 바람벽에도 귀가 있다는데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함부로 발설하겠는가. 옥야는 그저 남들이 남편에 대하여 물으면 피난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자나깨나 눈물속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편이 대문가에 불쑥 나타난것은 전쟁이 끝난지 몇달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남편을 본 옥야는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한동안 굳어져있었다. 그러다가 대문가에 서있는 사람이 남편임을 깨닫자 그의 름름한 가슴에 정신없이 뛰여들었다.
《어디에 갔다가 이제야 왔어요.》
옥야는 눈물에 젖어 부르짖으며 종주먹으로 남편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남편은 옥야를 뜨겁게 껴안고 수염이 꺼칠한 볼편으로 안해의 여린 뺨을 비비며 애무했다. 상봉의 기쁨은 하늘에 닿았다. 옥야는 이 세상을 다시 찾은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환희가 가라앉을 때 옥야는 생각되는바가 있어 어느날 남편에게 조용히 물었다.
《그새 어디에 가계셨어요?》
옥야의 눈길은 기어이 남편의 속내를 알아내려는듯 지꿎게 그의 얼굴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당신 말대로 피난갔댔지.》
책을 들여다보고있던 남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옥야는 남편이 거짓말을 한다는것을 알았다.
《아니예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인민군대에 나가셨댔죠?》
옥야의 어조는 확고했다. 남편은 한동안 옥야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맞아. 인민군대에 나갔댔소. 나야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소.》
옥야는 자기의 예감이 사실임을 깨닫자 가슴이 후두둑 떨렸다. 왜그런지 무섬증이 불쑥 갈마들었다. 옥야는 속이 언짢아서 푸념을 했다.
《그런데 어디 잠간 다녀오겠다고 쓴 쪽지편지는 뭐예요. 사실대로 알려주면 못써요?》
남편은 면구스러운듯 껄껄 웃었다.
《인민군대에 나가겠다고 하면 당신이 내 발목을 잡을것 같아서 그랬지. 그리고 전쟁이 인차 끝날것으로 생각했던거요. 리해하오.》
옥야는 어이가 없었다. 남편은 그렇게 능청스러운데가 있었다.
얼마후에 옥야는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나타났어요?》
남편은 락동강전투에서 총상을 당하여 강물에 떠내려가댔는데 다행히 한 로인의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에 어느 의원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천만다행이군요.》
옥야는 한시름 놓은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그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여전히 체육단의 축구감독노릇을 했다. 생활은 전쟁전이나 변함없이 흘렀다. 이따금 파출소에서 남편을 불러 전쟁시기에 어디에 갔댔느냐고 따지긴 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태연히 피난갔다가 폭격을 맞아 늦게 집에 돌아왔노라고 했다. 그러나 옥야는 언제나 줄에 앉은 새모양 잠시도 진정하지 못하고 가슴을 떨었다. 남편은 자주 집을 나갔다가 밤이 깊어 돌아오군 했다. 그의 눈빛은 예리했고 표정은 긴장해있었다. 옥야는 남편이 무엇인가 자기가 모르는 일에 몸을 잠그고있음을 어렴풋이 느끼였다.
어느날 파출소에서 또 남편을 호출했다. 북에서 보내온 남북이 체육교류를 할데 대한 호소문을 받고 남편이 기자회견에 출현한 다음날이였다. 그 일로 하여 남편의 신상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계속 생기였다. 불안은 날이 갈수록 커갔다. 무슨 일이 꼭 생길것만 같았다. 파출소경찰이 집변두리에서 어슬렁거리며 감시를 하고 어떤 때는 전화로 남편이 어디에 갔는가고 따지기도 했다.
옥야는 문득 김정식회장이 생각났다. 정의감이 강하고 뽈을 잘 차는것으로 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민족이요 뭐요 하다가 눈에 거슬리는자들한테 종시 죽지 않았는가.
며칠전에 친정집에 갔다가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날 아버지와 형제처럼 가까운 《법무부》방치백차장이 응접실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하는 말이 최근에 《국가보안법》위반과 관련한 큰 사건을 들추어냈는데 그 련루자들을 모조리 총살한다는것이였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수가 없었다. 그저 남편이 집에 붙어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였다. 남편은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자기는 남편에 대하여 이 어두운 밤보다 더 캄캄하다는것을 깨달았다. 과연 남편은 파출소에서 정체불명의 인간으로 감시를 받을만한, 이 사회가 용납 할수 없는 그런 인간이란 말인가. 그것은 사실이다. 옥야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남편은 총을 들고 이 제도를 반대하여 싸운 사람이 아닌가.
옥야는 몸서리가 처졌다. 이 순간에도 어떤 검은 그림자가 모퉁이를 지키고있는지 어이 알랴.
그런데 남편은 그것도 모르고 분주하게 돌아치고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옥야는 온 가정이 불행의 심연속에 빠지고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드디여 남편에게 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날은 여느때보다 남편이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눈물부터 나와 입을 뗄수가 없었다.
남편이 집안에 들어와 외출옷을 벗는 동안에도 옥야는 옷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한손으로 얼굴을 덮은채 방안에 앉아있었다.
《웬일이요? 어디 아프오?》
남편은 그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러운 눈길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요.》
그는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럼 무슨 일이 있었소?》
남편은 점점 의아해하며 캐물었다. 그는 모든 사연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심중한 얼굴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들으면서도 자고있는 딸 은옥의 머리를 애틋한 정을 담아 쓸어주었다. 출출하다고 하며 빨리 밥을 가져오라고 할 때에야 남편이 저녁식사전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나갔다. 잠시후에 밥상을 차려들고 들어오니 그는 석상처럼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남편은 묵묵히 밥을 먹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불었다. 대문에 매달린 딸랭이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이 흠칫흠칫 떨렸다. 그의 몸은 의연히 무거운 중압감에 눌려있는듯했다. 그는 남편이 밥상을 물린 후에도 한동안 내갈 생각을 못하고 그냥 앉아있었다.
《어서 상을 치우오. 피곤하구만.》
남편은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보!》
옥야는 드디여 입을 열었다.
《?…》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나무람마세요. 당신은 뭔가 2중생활을 하고있지요?》
그는 심장이 담차져 직방 이렇게 물었다.
《허허…별소리를 다 하는군. 내가 무슨 2중생활을 한다는거요. 괜히 피해망상증에 걸려서…》
한상수의 침울한 눈에 당황한 표정이 얼핏 스쳐지나갔다.
《아니 피해망상이 아니예요. 저는 당신의 마음을 알고있어요.》
《그랬으면 됐지 뭘 그러오.》
《그런데 전 그것이 무서워요. 당신에게는 행복한 가정도 있고 사랑하는 직업도 있는데 무엇때문에 섶을 쓰고 불속에 뛰여들려고 하는가 말이예요. 당신이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기나 하세요?》
이렇게 말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래도 남편은 말이 없었다.
《여보,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를 불쌍하게 여겨주세요. 당신이 없으면 난 못살아요.》
그는 끝내 남편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울기 시작했다.
《…》
이윽고 남편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옥야, 이러지 마오. 내라고 왜 당신의 심정을 모르겠소. 우리 가정의 행복보다 더 귀중한건 조국통일이요.》
《저도 통일이 귀중한건 알아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예요. 그런데 하필 당신이 통일운동에 나설건 뭐예요.
더우기 인민군대에 나갔던 사람이!》
그는 남편의 무릎에서 얼굴을 들고 간절히 부르짖었다.
《그럼 누가 나서겠소. 모두 당신처럼 생각한다면…》
《통일운동에 참가하고싶은 사람은 하래요. 그러나 당신만은, 당신만은 안돼요.》
그는 세차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당신 그게 무슨 소리요? 남의 일처럼 말하면서…》
남편이 자기무릎에 묻고 흐느끼고있는 그의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안아든다. 옥야는 자기가 잘못 말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깨여진 사발이다.
《그래 당신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평양에 있는 시어머니한테 인사한번 올리지 못한것이 죄스럽지도 않소?》
《…》
아, 이럴 땐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부르짖고있었다. 그게 어디 제 탓인가요.
나는 설사 나라가 갈라져 이렇게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길에 당신이 나서는건 반대예요. 당신이 통일운동에 나섰다가 감옥으로 가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어요.…
《여보.》남편은 옥야의 손목을 다정하게 잡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두 기억날테지. 49년도에 미국놈들과 두번째경기를 할 때 내가 부정선수라고 경기장에서 쫓겨났던 일을…》
한상수는 말을 멈추었다. 필생의 한을 남긴 그 치욕스러운 날을 한상수는 영원히 잊을수가 없었다. 그때 한상수는 경기장에서 밀려나 궂은비 내리는 거리를 정처없이 걸었다.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온몸이 가을비에 푹 젖는줄도 모르고 수치와 모멸감에 가슴을 치며 어째서 만국평화대회장에서 고종의 밀사인 리준이 배를 가르지 않으면 안되였는가를 생각했다.
《당신두 생각을 해보오. 내가 어째서 부정선수란 말이요. 선수권대회나 다른 나라와 경기를 할 때에는 그가 어디에 있건 소환해다가 나라를 위해 출전하게 돼있소. 하물며 나는 당당한 조선청년이요. 그런데 미국놈들은 내가 <한국>국민이 아니라는데서, 평양선수라는 리유로 무조건 퇴장하라고 오만무례하게 행동했소. 나라가 분렬되였기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국노들은 내가 미국놈들에게 도전했다고 체포하여 각목으로 때렸소. 난 그때부터 미국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통일이 되지 않는 한 민족체육도 발전할수 없으며 내 사랑인 축구도 할수 없다는것을 깨달았소. 그래서 장군님께서 계시는 북으로 갈것을 결심했으며 전쟁시기 미국놈을 몰아내기 위해 총을 잡았댔소.
옥야, 통일은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깃들어있는 념원이요. 나라의 통일을 외면하고 분단을 가슴아파하지 않는 사람은 민족반역자요.
조국이 통일되느냐, 분렬되느냐 하는 준엄한 이때 내가 당신의 말대로 일신의 행복에 도취되여있다면 나는 어느때 가서든지 력사의 심판을 받고야말거요.》 옥야는 흠칫 놀랐다. 그다지도 엄엄하게 말할건 뭐람. 옥야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남편을 돌려세운다는것이 막막하게 생각되였다. 원망스럽고 야속스러웠다. 남편은 기어이 아슬아슬한 외통길을 걸으려는것이였다.
남편은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또 말했다.
《나는 구태여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소. 그러나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지 결심할 때가 왔다고 보오. 나는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길에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싸울것이요!》
《?!…》
청천벽력같은 남편의 말을 들으며 온몸에 전률이 흘러감을 느꼈다. 얼음장같은 저 랭담한 태도! 내가 그처럼 믿어오던, 그처럼 뜨거운 애정을 가진 남편이 그런 말을 하다니?…
옥야는 후려갈기운것과 같은 좌절감과 배신당한듯한 분함에 못이겨 목놓아 울고싶었다.
그다음, 그다음부터는 병원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면 정신나간 사람처럼 방안에 멍청히 앉아있기가 일쑤였다. 가슴에는 불안이 매지구름처럼 까맣게 끼여있어 밖에서 자동차멎는 소리만 나도 경찰이 남편을 잡으러온것만 같아 와뜰와뜰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칼날우에 올라선 남편에 대하여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다른데로 돌리려했지만 마음의 안식처는 도시 보이지 않았다. 옥야는 가슴이 종이장처럼 얇아져 살얼음판을 건느는 심정으로 아니아니 하며 시간을 보내군 했다.
드디여 눈섭끝에 불이 떨어지는 시각이 왔다. 그날은 해질무렵이였다. 병원에서 퇴근하여 유치원에서 은옥을 데려다놓고 저녁을 짓고있는데 누군가 대문을 우악스럽게 두드려댔다. 금시에 심장이 졸아드는것만 같았다. 온몸이 나른해지며 한걸음조차 움직일수 없었다. 응답을 하지 않으니 또다시 대문이 부서져나가도록 두드려댔다.
할수없이 간신히 일어나 대문을 열었다. 몇명의 사복쟁이들이 자기를 떠박질하듯 하며 뜨락으로 들어섰다.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서 왜 문을 열지 않아?》
키가 호리호리하고 매끈한 얼굴에 흰테안경을 쓴 자가 사납게 소리쳤다. 대번에 소름이 끼쳤다. 다른 두놈은 벌써 집안팎을 샅샅이 뒤지며 돌아갔다. 방안에서 놀던 은옥이가 기겁을 하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옥야는 방안으로 뛰여들어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남편 어디 갔어?》
안경쟁이가 쏘파에 앉아 까치다리를 하고는 매서운 눈길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몸이 와들와들 떨려 입을 열수가 없었다. 남편의 일이 끝내 터진것 같았다.
《몰라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모른다? 우린 네 남편의 과거를 손금처럼 알고있어. 네 남편의 신원을 확인하느라 이때껏 가만 놔두었어.
네 남편은 이젠 어항안의 물고기신세야.》
안경쟁이의 말은 마디마디 창날이였다. 그 말은 그대로 온몸 여기저기에 와서 찌르는것 같았다.
한순간에 집안은 수라장이 되였다. 놈들은 뒤뜰안과 부엌에까지 가서 여기저기 뒤지였다.
안경쟁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싸늘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네 남편이 나타나면 말해. 빨리 와서 자수하라구. 체포는 시간문제야. 알겠어?》
금시 졸도할것만 같았다.
헛탕을 친 놈들은 우르르 대문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그는 무너지듯 그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그때부터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눈앞에 준엄한 고개턱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그것은 생활전체를 불태워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게 했다. 남편은 끝내 파멸의 함정에 굴러떨어진것이였다.
그가 정신없이 누워있는데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은옥에미야. 왜 불도 켜지 않고있느냐?》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할머니!》
겁에 질려있던 은옥이가 할머니를 알아보고 달려나간다.
《엄마 없니?》
《있어. 근데 엄마 아파해. 순경들 왔댔어.》
은옥이가 두서없이 종알거렸다. 불시에 방안이 환해졌다. 어머니가 바람벽에 붙은 스위치를 켠 모양이다. 수라장이 된 방안이 어머니의 눈앞에 펼쳐졌다.
《아니, 이게 웬일이니?!》
어머니는 와뜰 놀라 부르짖었다.
《도적을 맞았니? 이게 무슨 일이냐?》
어머니는 너무도 기가 차서 어쩔바를 몰라하며 재차 물었다.
《사복쟁이들이 왔다갔어요.》
옥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앉으며 조용히 뇌이였다.
《사복쟁이들이라니? 무엇때문에?…》
《은옥아버지를 잡으러왔댔어요.》
《은옥애비가 무슨 잘못을 했게 잡으러왔단 말이냐?》
《…》
옥야는 눈물이 터져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말해라.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옥야의 어깨를 흔들며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였다. 옥야는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 은옥아버지는 나라에 죄를 지었어요. 그이는, 그이는…》
옥야는 또다시 설음이 북받쳐 말끝을 맺지 못했다.
《얘야, 어서 말해라.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이냐?》
어머니는 다시 딸의 어깨를 흔들며 안타깝게 물었다.
《전쟁시기 인민군대에 나갔던 일을 경찰에서 알고있어요. 체포는 시간문제래요.》
옥야는 겁에 질려 어머니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인민군대라니? 피난갔다 왔다고 하더니…》
《아니예요. 그이는!…》
《아이구,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어머니는 복통이 터진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사색이 된 옥야도 금시 가슴이 무너지는듯했다. 인민군대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자수하지 않은것도 죄이지만 그동안 통일운동을 하며 돌아간 사실을 어떻게 무마할수 있단 말인가.
옥야는 생각할수록 눈앞이 점점 캄캄해졌다.
《일어나라. 가자.》
어머니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옥야의 팔을 끌었다.
《?…》
《아무래도 방치백 그 량반의 힘을 빌려야겠다. 지금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술을 자시고있는데 가보자.》
어머니는 은옥을 다짜고짜로 둘쳐업었다.
《아니? 그 사람한테 말해도 일없을가요?》
옥야는 앉은채로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반신반의한 어조로 물었다.
《그 사람만이 네 서방을 구원할수 있다. 아무려면 제 친구의 사위를 잡겠느냐? 어서 가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법무부》차장 방치백은 아버지 서무진과 송아지친구였다. 그들은 모두 광주출신으로 밥술이나 먹는 집안에서 태여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방치백은 법률을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갔고 서무진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이던 미국인의 소개로 미국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자기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들이였다. 일본에서 법학을 공부한 방치백은 광주지방검찰청에서 검사로 있다가 서울검찰청으로 승진하였다.
얼마후에 그는 《법무부》차장으로 벼락출세를 하였다. 아버지는 미국에서 돌아와 서울쎄브란스병원 의사로, 부원장으로, 의학박사로 활약하고있었다. 그런 관계로 그들의 안주인들까지 오고갔으며 명절날에는 서로 집을 방문하는것을 의례행사처럼 여겼다. 아이들도《큰아버지》《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 그가 나서면 남편이 체포된다고 하여도 곧 석방될수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와 함께 집에 이르니 그들은 응접실에서 한담을 하고있었다. 얼굴이 벌거우리해진 방차장은 옥야를 보자 무척 반가와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이미 결심을 했어도 가슴이 흠칫 떨렸다.
너그럽게 웃고있는 그의 눈에는 어딘가 독이 서려있는듯했다.
옥야는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고 앉아 인사를 했다.
《작은아버지, 그새 안녕하셨어요?》
《잘 있었다. 왜 남편과 함께 오지 않았느냐?》
방차장은 여전히 인자한 어조로 물었다.
《뽈차는 친구네집에 가셔서…》
남편의 말이 나오자 또다시 가슴이 떨려와 말끝을 맺지 못했다. 심장이 터져나올듯했다.
《여기에 와 앉아라. 얼굴이 못쓰게 됐구나. 하긴 아이를 기르며 병원에 나가자니 오죽 힘들겠니.》
방차장은 손목을 끌어 자기곁에 앉히며 인정깊게 말했다.
《어디 아프냐?》
방차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아니예요.》
《작은아버지에게 한잔 부어올려라.》
아버지가 넌지시 귀띔을 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놋주전자의 술을 잔에 따랐다. 하지만 손이 자꾸 떨려와 잔에 술을 제대로 부을수가 없었다.
《고맙다. 옥야의 행복을 위해 마시겠다.》
방차장은 부드러운 표정을 담고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어머니가 곁에서 조심스럽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옥야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래 옥야가 나에게 부탁할게 뭐냐?》
방차장이 눈길을 떼지 않으며 나직이 물었다. 부모들이 벌써 무슨 말인가 한것 같았다.
드디여 언제나 가슴을 짓누르던 그 무서운 고개턱이 다가온것이였다. 이제는 말을 해야 했다.
《작은아버지에게만 조용히 할 말이 있어요.》
《허허… 아버지에게도 말못할 사연이란 말이지…》
방차장은 호협스럽게 웃으며 서무진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컴컴해있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 차장아저씨와 나는 한형제같은 사이니 어서 사실대로 말해봐라.》
그러나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사연을 터놓자니 불시에 온몸의 피가 마르는듯했고 눈물이 자꾸 샘솟듯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자기가 남편을 헤여나올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고있지 않는가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몸이 또다시 떨리는것을 느꼈다.
《어서 말씀올려라. 네 마음속 고심을 차장아저씨는 리해하실거다.》
아버지가 답답한듯 독촉을 했다.
《허허… 옥야가 나에게 선뜻 말 못하는것을 보니 대단히 심중한 일인 모양이구나.》
방차장은 또다시 웃으며 마음속 문을 두드렸다. 가슴이 쓰라렸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기 처지가 가긍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옥야는 고개를 쳐들었다. 방차장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어리였다.
《작은아버지, 그럼 제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요?》
방차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담은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답답해라. 아저씨가 언제한번 네 부탁을 거절한적있니. 씨원하게 말 좀 하려무나.》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어머니가 옥야의 어깨를 안타깝게 흔들며 물먹은 소리를 했다.
《작은아버지, 정말 저의 비밀을 지켜주실것을 맹세하시죠?》
방차장은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이 나갔다.
《그럼 말씀드리겠어요. 작은아버지, 제 남편을 도와주세요.》
눈물에 젖은 옥야의 목소리는 처절하게 떨렸다.
《왜? … 무슨 일이 생겼느냐?》
방차장은 웃음을 거두고 의아쩍은 어조로 물었다. 그는 사실을 터놓은 후에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울었다.
《?!…》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니 그것은 무시무시한 정적이였다. 드디여 아버지의 노성이 터졌다.
《할수 없다. 그놈은 <빨갱이>가 분명하다.》
《조용하오. 누가 듣겠소.》
방차장은 이렇게 아버지를 제지하였다. 그는 술을 마신 사람같지 않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 사람, 이걸 어쩌문 좋은가.》
아버지가 사색이 되여 부들부들 떨었다.
《적은이, 도와주세요. 은옥애비가 잘못되면 이앤 못살아요.》
어머니도 방차장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걸복걸했다. 모두들 남편의 운명이 그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기라도 한듯 바라보았다.
《아, 아, 진정들 하시오. 아직 잡혀가지도 않았는데 소란을 피우면서…》
방차장은 못마땅한듯 혀를 차다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너무 걱정말아라. 내가 있는 이상 아무려면 네 행복을 잃어버리게 하겠느냐.》
《고마와요, 작은아버지.》
눈굽이 축축히 젖어왔다. 저도 모르게 감사의 말이 나왔다.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네 남편이 어떻게 개심하는가에 달려있다.》
《그이는 칼날이라도 올라서는 성미예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죽어두 굽어들지 않는답니다.》
스스로 놀라우리만큼 매정한 말이 나왔다.
《허, 그게 문제구나.》
방차장은 사뭇 랑패한 표정을 지었다.
《작은아버지, 그럼 어떻게 해요. 방도를 대주세요.》
그는 또다시 절망에 잠겨 방차장에게 매달렸다.
《당장은 네 남편에게 아무말도 해서는 안된다. 네가 나에게 말했다는것을 그 사람이 알면 그때에야말로 네 친정집까지 파멸된다. 그러니 너도 비밀을 꼭 지켜야 한다.》
《알겠어요.》
《비밀이고 뭐고있는가. 당장 이 밤으로 잡아넣게.》
아버지는 얼굴이 시퍼래서 으르릉거렸다.
《형님, 너무 흥분하지 마오. 잡아넣는건 아무때고 할수 있소. <국가보안법>은 이 집도 무사치 못하게 되여있소. <빨갱이>사위를 얻은 장인은 책임이 없고 죄가 없는줄 아시오?》
방차장은 꼼짝 못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작은아버지, 부탁해요. 제발 아무 일도 없도록 해주세요.》
《걱정말라는데두. 이 세상에 잘난 사내는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네 남편을 구원해보자꾸나.》
방차장은 이렇게 옥야를 안심시키며 한손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차장을 태운 차가 엔징소리를 가볍게 울리며 사라졌을 때에야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생각에 소스라쳐 놀랐다. 내가 남편을 천길 벼랑아래로 밀어버린것이나 아닐가. 과연 방차장이 남편의 생명을 담보할수 있을가. 그러나 사태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다음날 남편은 체포되였고 자기는 지금 그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수백리길을 가고있는것이였다.
3
기다리던 안해가 면회를 왔다는 간수의 말을 듣고도 한상수는 기쁜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를 만날 일이 두렵기까지 했다. 백근식이 무엇인가 모략을 꾸민듯한 예감이 들었다. 밀고한자가 누구인지 숙제를 준다고 지껄이던 백근식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놈은 한상수, 자기를 그 어떤 심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작정인것 같았다. 이제 옥야가 나타났으니 무대우에서 그 연극을 창출할것이다.
《뭘해? 빨리 나왓!》
감방문을 열고 한상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간수가 증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한동무, 어서 나가보오. 아주머니가 왔다는데.》
박우갑이가 부드러운 눈길로 한상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는 흥분하지 말고 처신하라는 무언의 부탁이 실리여있었다.
한상수는 간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생각을 굴리였다. 백근식은 한상수를 만난 이후부터 아직 한번도 구차스럽게 전향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를 잘 알고있는 이놈은 그런 소리가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한상수는 백근식의 립장에 서서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밀고자가 누구인가를 서뿔리 말하지 않은것은 한상수로 하여금 번뇌에 잠기도록 한것이다. 이제 옥야를 맞대면시켜놓고 한상수의 가슴에 날창을 박듯이 밀고자는 아무개다 하고 말할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분노를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만들것이다. 그러나 폭발은 순간이다.
그다음 허무, 회의, 좌절감에 빠질것이다. 내가 치명상을 입고 정신적고통에 몸부림칠 때 백근식은 쾌락을 느끼며 전향의 바람을 불어넣을것이다.
《면회는 간수부장의 방에서 하게 됐어.》
간수는 마치 선심이나 쓰듯 이렇게 말하며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했다.
한상수가 방에 나타나자 백근식은 하루밤사이에 몰라보리만큼 변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을 좀 설친것 같구만. 그래 내가 준 숙제를 풀어봤나?》
《여보, 나와 가까이한 사람들중엔 당신 하나를 내놓고는 그런 비렬한은 없소.》
한상수는 그야말로 한담을 하듯 평온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럼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고발자는 다름 아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서옥야 당신의 안해요!》
드디여 백근식은 있는 힘을 다해 자기의 가슴복판에 날창을 콱 들이박았다. 한상수의 얼굴은 한순간 흠칫했다. 백근식은 희열에 잠긴듯 여전히 웃음을 짓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러나 한상수는 뜻밖에도 천천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허튼소리 마오. 난 믿지 않소. 그건 날조요.》
《좋네.》
백근식은 타협조로 말했다.
《이제 곧 그 진실성여부를 알려주지.》
백근식은 책상옆에 설치되여 있는 호출신호단추를 눌렀다. 한상수의 뇌리는 복잡해졌다. 그는 젖은 가죽조끼를 입고 불앞에 서있을 때처럼 온몸이 조여들었다. 안해가 자기를 밀고했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인간백정들인 이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랴. 그러나 한상수는 백근식의 그 마디마디 쪼아박는듯한 말마디들이 무서웠다.
《상수군.》백근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나는 같은 인간일세. 다만 다른것이 있다면 나는 간수부장이고 자네는 수인이라는것뿐일세. 나는 지금껏 내 량심에 묻건대 남을 모함한적도 없고 더구나 날조를 해본적도 없었네. 나는 인간본연 그것으로 여태껏 살려고 애써왔네. 하지만 어찌겠나. 진실을 알려주는것이 고통스럽긴 해도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옥야씨는 어느날 방차장이 친정집에 왔을 때 직접 찾아가 자네가 우리 <한국>을 반대하여 <빨갱이>짓을 하고있다는것을 고발했네.》
(방차장한테?!…)
한상수의 얼굴은 치명상을 입었을 때처럼 무섭게 이그러졌다. 백근식이 그의 가슴복판에 박고있던 날창을 쑥 뽑은것이다. 한상수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듯 해쑥하게 질렸다. 빈혈을 일으켰을 때처럼 머리가 핑 돌며 심장이 마구 뒤틀리우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걸상아래로 나동그라질번 했다. 그러나 간신히 참아내여 그런 치욕만은 모면할수 있었다. 그는 두손으로 걸상모서리를 꽉 그러쥐고있었다.
(어때 친구,이 백근식이한테는 안되겠지?…)
백근식은 사냥군의 총알을 맞고 림종직전에 놓여 몸부림치는 맹수를 내려다보듯이 괴로움과 고통을 애써 참고있는 한상수에게 다정히 말했다.
《이제 옥야씨가 올걸세. 뒤잔등도 남이라는 말이 있어. 한 이불속에 들어있을 때는 자기 색시지만 이불밖에 나서면 다른 놈팽이의 정부로 될수 있는게 녀편네들이야.》
《닥쳐라!》
갑자기 한상수가 고개를 번쩍 들며 실성한듯 웨쳤다. 그는 정조를 헌신짝 버리듯하는 화냥년들을 빗대놓고 옥야를 모욕하는데는 참을수가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옥야는 한없이 순결한 인간이다. 한상수가 리성을 잃고 노성을 지른것은 안해에 대한 크나큰 믿음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백근식의 말을 반박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방차장이란 자는 옥야가 《작은아버지》로 부르는 놈이다. 그에게 무슨 말인들 못했으랴. 그러나 옥야를 만나봐야 했다. 그는 점점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불안스러웠다.
《하하…》백근식이 널털웃음을 터뜨렸다. 수인은 어디까지나 수인이다. 그가 아무리 몸부림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백근식의 웃음소리가 멎자 방안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깃들었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 정적도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한을손이 옥야를 앞세우고 나타난것이다.
《옥야!…》
첫순간 한상수의 입에서 이런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두손을 뻗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해에게로 어정어정 다가갔다. 자나깨나 그립던 녀자,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 한상수의 두팔은 폭발적인 반가움으로 후들후들 떨렸다.
《여보!》
옥야도 마주 부르짖으며 남편의 품에 안겼다. 처음에는 알아볼수 없이 변한, 퍼런 수인복을 입은 사람이 다름아닌 자기의 남편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눈물의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여보!…》옥야는 또다시 목메여 부르며 남편을 두팔 벌려 그러안고 손으로 잔등을 어쓸기도 하고 뼈만 남은 얼굴을 쓰다듬기도 했다.
백근식은 한쪽에 비껴서서 연극의 한장면을 감상하듯이 두사람을 지켜보고있었다.
한참만에야 한상수가 입을 열었다.
《은옥이는 잘있소? 집에서도 별일 없고?》
《예. 다 잘있어요.》
《그럼 됐구만. 내 걱정은 마오.》
한상수는 옥야를 안심시키며 걸상에 천천히 앉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못쓰게 됐어요?》
옥야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고나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옥야.》
한상수는 젊은시절 련인을 부르듯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했으나 차마 다음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허나 알아야 했다. 괴로와도 사실을 알아야 했다.
《왜 그러세요. 말씀하세요.》
옥야는 남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재촉했다.
《내 당신한테 하나 묻고싶은것이 있소.》
《무슨 일이예요?》
한상수는 안해의 얼굴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체포되기 전에 그 누구를 만난적이 있소?》
옥야는 한순간 생각을 굴리는듯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모양인지 《예 있어요. 당신을 구원해달라고 방차장을!… 그게 당신의 체포와 무슨?…》하며 말을 맺지 못했다.
한상수의 손이 맥없이 풀려내렸다. 아니아니 하며 믿지 않으려 했던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전신의 맥이 쑥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순간 옥야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새하얘졌다.
《아니 그럼 제가?!…》
옥야는 어정쩡하게 물었다. 그 당황한 어조에서 한상수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을수 있었다. 처음에는 분격보다도 그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공허가 덮쳐들며 아무런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 다음은 심장이 죄여들었다. 아무리 모른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어리석을수가 있는가. 아, 분하다. 한생의 먼길을 쉬임없이 함께 걷자고 약속한 이 녀자가 나를 다시는 솟아나올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다니.…
그는 한쪽가슴을 움켜잡고 비칠거리는 뒤걸음질로 앉았던 걸상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렇소. 옥야씬 남편을 잡았소. 그것으로 하여 국가의 안전에 큰 기여를 했소.》
백근식이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우고 야멸차게 말했다.
《아!…》
옥야는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다음은 차디찬 바닥에 쾅 하고 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한상수를 감방으로 보내고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옥야를 택시에 태워보낸 백근식은 사무실에 돌아와 걸상에 앉아 두손가락으로 책상우를 다독였다.
(이 백근식이와는 안돼. 한상수군과 옥야씨! 내 앞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고서는 못배길걸.…)
백근식의 눈앞에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방치백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가 고등법원의 사치하고도 요란한 방에 틀고앉아 뭇사람들을 호령하는것을 그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4
한상수는 감방에 들어서자 흙담이 무너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내번지고 얼굴은 백지장같았다.
《선생님.》
정창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상수를 부축했다. 한상수는 아무말없이 감방바닥에 실신한듯 누워버렸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였다. 아래턱이 잘게 떨렸다. 눈은 감고있어 표정을 알수 없었다. 고문에 의한 고통이 아닌것만은 틀림없었다.
《한동무, 웬일이요?》
박우갑이 조용히 물었다. 한상수는 눈을 떴다. 초점잃은 눈으로 감방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볼뿐 종시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흐려진 눈에서는 형언할수 없는 고뇌의 빛이 깃들어있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도대체 자식을 낳은 안해가 남편을 고발하여 감옥으로 밀어넣었다는것을 누가 믿을수 있으며 상상이나 할수 있겠는가. 물론 그는 남편의 신변에 위험이 닥쳐오자 불안으로 전전긍긍하던 끝에 《작은아버지》로 믿고 방치백에게 도와달라고 말했던것이다.
아, 승냥이가 양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그렇게도 모른단 말인가.
자기도 함께 옥살이를 하겠다고 통곡을 하며 따라오던 안해의 애절한 목소리가 귀전을 친다.
그렇다고 일이 될 노릇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고 호되게 질책하고싶었지만 백근식이 앞에 있고 바로 그것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자기 방에서 면회를 시킨 놈의 속심을 알았기때문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백근식은 속으로 쾌재를 부를것이다. 놈은 내가 절망에 몸부림치다가 무릎을 꿇을것이라고 생각할것이다. 결코 그렇게는 안될것이다.
하지만 가위에 눌린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육신과 넋이 활활 타서 한줌의 재가 되는것 같았다.
한상수는 자리에 누운채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박우갑과 정창식도 더는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한상수는 시간이 퍼그나 흘러서야 마음속의 폭풍을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안해를 만나봤는데 그가 나를 밀고했다는 간수부장의 수작이 무근거한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는 나를 구원할 생각으로 어리석게도 아버지의 친구인 <법무부>차장한테 나에 대해 말해버렸지요.》
한상수는 깊은 고뇌에 잠긴 눈길로 감방천장을 응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감방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박우갑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고 정창식은 기가 막혀 씨근덕거렸다. 잠시후 박우갑은 물었다.
《그래 이젠 좀 마음을 진정했소?》
《…》
몇시간사이에 중병을 앓고난 사람처럼 얼굴이 수척해진 한상수는 입을 꾹 다문채 대답이 없었다.
《한동무.》 박우갑은 한상수의 아픈 가슴을 달래여주려는듯 전에 없이 따뜻한 목소리로 불러놓고 말을 이었다.
《남진때 있었던 얘기를 하나 들어보겠소? 우리 사단이 전라도 남원일대를 해방했을 때 일이였소. 우리가 련대지휘부를 정하느라고 마을에서 어느 큰 기와집에 들어가게 되였는데 첫눈에 그 집은 지주집같았소.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어깨가 선뜩 하지 않겠소. 몸을 홱 돌려보니 허, 글쎄 더벅머리총각이 우리를 까겠다고 도끼를 휘두르는것이였소. 나는 지체없이 권총을 뽑아들고 그 총각을 쏘려고 했소.
<쏘지 마오.>
뒤에서 들어오던 련대장이 소리쳤소. 우리는 총을 겨눈채 그 자리에 서있었소. 옷이 람루하고 얼굴에 검뎅이가 묻은 총각도 도끼를 든채 총구앞에서 어쩔바를 몰라했소.
련대장동지가 더벅머리총각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다정히 잡으며 당신은 어째서 인민군대를 죽이려했는가고 물었소.
<우리 주인님이 빨갱이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해서…>
더벅머리총각은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중얼거렸소. 알고보니 그 더벅머리총각은 지주놈의 악선전에 넘어가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것이요. 나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이 살인미수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소.
그러나 련대장동지는 항일무장투쟁시기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왜놈들의 꾀임에 넘어가 우물에 독약을 치려고 했던 사람을 용서하여주신 사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면서 지주놈의 꼬임수에 넘어간 이 청년을 총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소.
우리는 그를 용서하여주었소. 자기를 살려준다는것을 알게 된 머슴군총각은 그만 무릎을 꿇고 엉엉 울다가 도끼를 들고 움속에 숨어있는 지주놈을 요정낸 다음 인민군대에 입대시켜줄것을 청원하였소. 그후 군복을 입은 그는 손에 총을 억세게 틀어잡고서 원쑤들을 격멸하는 싸움에서 언제나 용감했소. 한동무, 만약 내가 일시적인 흥분에 못이겨 그를 총살하였다면 어떻게 될번 하였겠소.
…나는 이 사실을 놓고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모든 투쟁은 동지들의 뭉친 힘에 의해서만 승리할수 있음을 느끼게 됐소. 그런데 그 동지라는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아니라 머슴군총각처럼 아직 계급적으로 각성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그들을 동지로 삼을 때 우리는 원쑤와의 싸움에서 더 큰 승리를 이룩할수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단말이요.
한동무, 잊지 마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혁명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말씀하셨소. 이건 우리 매부가 나에게 알려준 금언이요. 그러니 동무도 안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야 하오. 안해가 본의아닌 실수로 남편에게 죄를 졌다고 해서 그를 용서못한다면 조국통일의 길에 나선 우리가 어떻게 자기 본분을 다하겠소. 전민족을 단합시켜 조국을 통일하자는 우리가 그래 제 안해 하나 동지로 못만들겠소. 한동무, 동무의 별명이 <비수>라고 했지. 우리가 무엇때문에 여기에 있소. 모든 화근은 우리 조국을 둘로 갈라놓은 미제와 그 주구들때문이요. 그 비수로 안해를 찌를것이 아니라 통일의 원쑤들을 무자비하게 찔러야 하오. 지금 원쑤들은 이 기회를 리용하여 한동무와 부인사이에 쐐기를 박고 불화의 씨를 뿌려 둘이 다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워하기를 바라고있소. 결국은 한동무의 정신적지탱점을 무너뜨리여 전향에로 유도하고있소. 정신을 차려야 하오. 남편을 구원하겠다고 뛰여다닌 부인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야 하오. 바로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그 눈먼 사랑이 그만 그런 일을 저질렀단 말이요. 그렇다면 자기때문에 그렇게 된 안해를 용서할수 없겠는가. 동무는 통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니요. 도량이 넓어야 하오.》
《…》
한상수는 생각이 깊어졌다. 진정이 담긴 박우갑의 절절한 일깨움은 차겁게 얼어들었던 그의 가슴을 어느 정도 녹여주는듯 했다.
그날밤, 한상수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박우갑이 해준 말이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혁명은 동지를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신 김일성장군님의 가르치심은 그의 가슴속에 깊이 인백혀졌다.
아, 동지라는것이 무엇인가? 뜻과 의지를 함께 가진 사람일진대 과연 나는 동지를 위해 목숨을 바칠수 있게 준비되였는가, 정녕 통일혁명을 위해 과오가 있는 사람, 미처 알지 못하여 좌우로 헤매이는 박영진이와 같은 사람들을 믿고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 동지로 만들 생각을 하였던가.
그는 자책으로 하여 잠을 이룰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였다. 소지가 가져다준 보리밥덩어리를 하나씩 먹고앉아있는데 갑자기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철문이 열리자 손에 수갑을 든 두명의 간수가 서있었다.
《900번 나왓!》
한을손이 위엄있게 소리쳤다. 박우갑을 불러내는것이다. 한상수와 정창식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간수들의 행동거지가 심상치 않았다.
박우갑은 태연한 얼굴로 한상수와 정창식을 둘러보았다. 정창식은 무슨 기미를 챘는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소좌동지!》하고 불렀다. 박우갑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비꼈다. 그는 한상수의 손을 꽉 잡고 부탁하듯 나직이 입을 열었다.
《한동무, 안해를 잘 도와주오.》
한상수는 불시에 눈물이 쿡 솟구쳤다.
《빨리. 뭘 꾸물거려!》
문가에 서있던 한을손이 짜증이 난듯 다시 소리쳤다.
《여보, 간수, 감방비품을 인계나 하고 떠나야 할게 아니요.》
박우갑은 오히려 놈에게 호령하듯 말하고나서 속내의를 천천히 벗기 시작했다.
한상수는 영문을 몰라 그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내의를 벗고 다시 수인옷을 입은 박우갑은 한상수의 손에 자기의 내의를 들려주며 입을 열었다.
《이걸 받소. 추운 감방에서 이거라도 입으면 좀 나아질거요.》
한상수는 목이 꽉 막혀 말이 나가지 않았다.
박우갑은 빙그레 웃으며 두사람의 어깨우에 손을 올려놓았다.
《동무들, 잘 있소.》
그의 꺼먼 눈섭이 구핏했다. 한상수는 그제야 박우갑의 마지막시각이 왔음을 깨달았다.
《소좌동지!》
둘은 약속이나 한듯 그의 가슴에 와락 안겼다. 박우갑은 두팔을 벌려 한상수와 정창식을 꽉 그러안았다.
《동무들, 굴하지 말고 잘 싸워주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조국만이 있을뿐이요.》
얼마후에 박우갑은 수갑을 찬채 두손을 들어 인사를 보내고는 복도를 걸어나갔다.
《소좌동지!》
정창식은 주먹으로 감방문을 쾅쾅 두드리며 세차게 흐느끼였다. 한상수는 너무도 억이 막혀 그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어깨를 떨었다. 비분의 눈물이 걷잡을수 없이 쏟아졌다.
박우갑이 나가자 감방안은 텅 빈듯 했다. 한상수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감방안을 휘둘러보았다. 피고름이 덕지덕지 붙은 포대기 한채, 세개의 물공기, 변기통, 이 방 재산의 전부였다. 불시에 한평도 못되는 감방이 한상수의 심혼을 압박하고 짓누르는것 같았다. 그는 지금까지 인간사회에 이런 구석이, 인간의 육신을 질식시키고 흔적도 없이 마멸시키는 이런 생지옥이 있다는것을 처음으로 보는듯 했다. 바로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이런곳에서 다름아닌 자기가 존재하며 숨쉬고있다는것이 기이하게 생각되는것이였다. 이곳이야말로 최대의 악의 본거지이며 생지옥이였고 이 행성, 이 우주에 없는 인간말살의 막바지였다. 박우갑이 남기고 간 그 체취와 마지막으로 남긴 목소리가 좁고좁은 감방안의 구석구석에 그대로 슴배여있는것을 느꼈다.
5
박우갑이 사형당한 후부터 한상수는 입을 꾹 다문채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침침한 얼굴로 감방벽에 기대여 앉아 하루종일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누구든지 자기를 다치기만 하면 그냥 두지 않을듯 두눈에는 피발이 서있었다. 요즈음에는 백근식도 그를 찾지 않았다. 한상수의 귀전에는 박우갑이가 남기고 간 말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그냥 맴돌이쳤다. 우리에게는 하나된 조국만이 있을뿐이라고, 굴하지 말고 잘 싸우라고 하던 그 뜨겁고 열렬한 목소리!… 그 조국을 위해 동지들은 목숨까지 바치는데 자기는 과연 무엇을 하였던가. 전쟁전부터 분렬된 조국의 아픔을 감수하고 미국놈의 거만한 코대를 꺾어놓으리라 결심하고 남으로 나왔고 또 전쟁때에도 그후에도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느라고 동분서주하였지만 끝내 감옥살이로 끝났다. 한상수는 이렇게 철창에 갇힌 몸이 되고보니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중에서도 한상수의 가슴에 맺혀있는 사람은 박영진이였다. 박영진은 그의 인생에서 버릴수 없는 사람이였다.
49년도에 미국팀과 《태백》팀간의 경기를 앞두고 박영진이 김정식회장의 초청장을 가지고 한상수를 찾아 해주에 나타났을 때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들은 현우섭의 이모네집에서 청주병을 놓고 마주앉았다. 객지에 나다니느라 클클했던 박영진은 한상수보다 더 마시고 객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상수형, 어째서 시원한 대답을 안하는가. 언제부터 이런 졸장부가 됐는가 말이야.》
박영진은 충혈진 눈을 번뜩이며 상을 쾅쾅 두드렸다. 서울로 가는 일에 성큼 동의를 하지 않는 한상수에 대한 불만이였다.
《영진이, 서울로 가는 문제는 우리끼리 결정할 문제가 아니야.》
한상수는 빙그레 웃으며 박영진을 타일렀다.
《뭐라구? 아니 그럼 뽈차러 가는것두 누구 승인을 받아야 하는가?》
박영진은 놀랍다는듯 두눈을 크게 떴다. 한상수는 생활환경이 다른 곳에서 살고있는 박영진이가 결코 리해할수 없다는것을 느끼자 너그러운 어조로 깨우치듯 말했다.
《이보라구 영진이, 설사 간다고 해도 이 길로는 갈수 없네. 체육단에 승인을 받은 다음…》
《하하하…》
박영진은 불시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상수형이 그새 영 딴 사람이 되였군. 놀라운데. 북은 자유세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에끼 이 사람, 이래뵈두 내 새 민주조선의 체육인이야.》
한상수는 짐짓 화가 난듯 박영진의 말을 무찔러버리다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다 미국놈 탓일세. 미국놈들이 38˚선을 가로막지만 않았어두 이런 일은 없을터인데.》
《상수형, 미국을 욕하지 마오. 그건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요. 우린 그저 뽈이나 차면 돼. 상수형, 가겠소 못가겠소? 어서 말을…》
박영진은 점점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몹시 취한 모양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진이, 자네 취했구만. 피곤하겠는데 쉬자구.》
한상수가 이렇게 말하며 상을 치우고 자리를 폈다. 그리고 박영진을 자리에 눕혔다.
《상수형은 변했어. 축구선수가 연설쟁이가 됐단 말야. 우린 뽈이면 돼. 상수형, 가자구. 서울로…》
박영진이 자리에 누워서도 계속 중얼거리였다. 그러다가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네활개를 펴고 정신없이 자고있는 박영진을 보니 한상수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청주를 퍼그나 마셨는데도 정신은 더욱 또랑또랑해졌다. 높이 들린 하늘에서는 둥근달이 마당가의 살구나무가지에 교교한 빛을 뿌려주고있었다. 봄이 짙어가는 밤풍경은 한없이 고요하였다.
한상수는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정신없이 자고있는 박영진의 모습에서 남조선에 있는 체육선수들의 정신상태의 일면을 보는것만 같았다. 아직도 그들은 나라를 갈라놓은 미국놈들을 해방자로, 은인으로 생각하고있는것이다. 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주어야 한다. 더우기 박영진은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는 사이가 아닌가. 나이는 한상수보다 한살 아래이지만 깍듯이 형님대접을 하며 따르는 마음이 수정같이 깨끗한 인간이다. 축구에서는 한상수와 짝이 맞는 쟁쟁한 선수이기도 했다. 벌써 중학교시절에 그들의 우정은 경기장에서 시작되였다. 한상수가 삯뽈을 차러 서울땅에 나타나면 누구보다 반가와한 사람이 박영진이였다. 그들은 모자를 바꾸어쓰고 함께 운동장을 달렸고 경기가 끝나면 함께 식당에도 가고 하숙집에 나란히 누워 앞날의 축구왕자가 될것을 꿈꾸기도 했다.
비록 평양과 서울에서 떨어져 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랬던 박영진이기에 한상수는 그를 따라 서울로 서슴없이 왔던것이다.
가정생활에서는 박영진이 옥야의 동창생인 인향과 결혼을 했다. 두 집은 친척처럼 가까왔고 허물이 없었다.
이렇게 놓고보면 두사람은 뜻을 같이 할 친구가 되여야 했지만 인생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달랐다.
…전후의 어느날 한상수는 체육단에서 몹시 흥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북에서 체육교류와 관련하여 회담을 하자는 제의를 해왔던것이다.
남조선체육계에서는 이 제의를 적극 지지찬동하면서 기자회견에 한상수를 출연시키기로 했다.
한상수는 밥상을 차린 안해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했다.
《아니, 오늘은 웬일이세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옥야는 의아해했다.
《오늘은 기쁜 일이 있소. 우리 둘이서 한잔 찧자구.》
《그래요!》
옥야도 좋아했다. 장식장밑에서 술병을 꺼낸 그는 두개의 잔에 술을 부었다.
《박영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상수는 박영진이 생각이 나서 술잔을 든채 이렇게 말했다.
《그럼 데리고 오실것이지…》
이때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옥야가 급히 나갔다가 박영진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보. 누가 왔나보세요. 범도 제 말하면 온다고, 당신이 술 한잔 놓고 철숙이 아버지생각이 난다고 하더니…》
옥야는 남편의 사나이다운 인간미에 감심한듯 밝게 웃었다.
《마침 잘 왔네. 여기 앉으라구.》
한상수는 마음이 흥그러워져 박영진의 손목을 끌었다.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이렇게… 혹시 상수형의 생일이 아니요? 그런줄 알았으면 맨손으로 찾아오는게 아닌데…》
박영진은 한상수의 곁에 앉으며 옥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일날보다 더 기쁜날이래요. 어서 한잔 드세요.》
옥야는 박영진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북에서 체육교류를 하자고 제기한 오늘같은 날에 맨숭맨숭해서 보낼수야 없지 않나.》
《나도 그래서 왔어요. 상수형이 기자회견에 출두한다기에.》
박영진은 저가락으로 안주를 들며 조용히 말했다.
《자네가 조언을 줄건 뭔가?》
한상수는 한없이 너그러워졌다.
《조언이야 무슨…》
《그래두 자넨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느는 끈끈이서방이 아닌가.》
《허허… 상수형은 이 박영진을 졸장부로 여기지만 <비수>곁에는 언제나 <왼쪽날개>가 있다는걸 알아두시오.》
《고맙네.》
《내 마음을 안다면 이 박영진의 말을 명심해주시오. 이번 기자회견에서 절대로 모난 말을 하지 말아요. 모난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지 않소.》
《여보, 철숙이 아버지 말씀이 옳아요.》
옆에 앉았던 옥야도 한마디 참견을 했다.
《허허… 영진이, 자네 말을 명심하겠네. 하지만 내 원래 성미가 고약해놔서 어찌겠나. 맞을 땐 맞더라도 할 말은 못참겠으니…》
한상수는 껄껄 웃으며 상우에 있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사실은 당국에서 북의 제의를 그리 달가와하지 않기때문이요.》
박영진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그러니까 더 말해야지. 그들은 나라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자들이야. 우리가 당국의 눈치나 보면서 가만있으면 통일은 안돼. 그러니 통일을 앞당겨오도록 체육을 하는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하네.》
한상수는 술기운이 말끔히 깨여 열렬하게 부르짖었다. 박영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컴컴했다.
《글쎄 상수형의 말은 하나에서 열까지 다 옳죠.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할 소리를 다하며 살겠소. 더우기 상수형은 당국의 신경을 건드려서는 안될 사람이 아니요.》
박영진의 어조에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경고가 섞여있었다. 한상수는 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속이 몹시 언짢았다. 이런 순간에 누가 조금만 다쳐도 그는 화약처럼 폭발한다. 방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옥야는 그들곁에 앉아있기가 괴로운지 빈 사발을 들고 부엌으로 나가버렸다.
(이 박영진이 언제부터 이렇게 죽지부러진 까마귀새끼가 되였는가. 말끝마다 미국이 어떻소 하더니, 너는 정녕 식민지민족의 설음을 잊었단말인가?)
광복되기 한해전에 한상수는 박영진과 함께 우리 나라 《함축》(함경도축구단)선수로 도꾜《명치신궁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현해탄을 건너간적이 있었다. 《함축》은 일본팀과 대전하기 위하여 함흥의 의학박사인 최명학이 자기 돈을 내여 전국적으로 이름있는 선수들을 모집한 팀이였다. 이 팀에 망라된 한상수와 박영진은 경기때마다 두각을 나타내며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조선의 《함축》팀이 일본의 각 현팀과의 경기에서 련전련승하자 일본놈들은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우승컵을 조선사람들에게 빼앗길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자 왜놈들은 부랴부랴 전국적으로 우수한 선수들을 모아 《함축》팀과 대전하도록 하였다. 결과 조선팀과 일본팀간의 경기가 되고말았다. 이 경기에서도 조선선수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였다. 바빠맞은 왜놈들은 주심을 시켜 박영진을 비롯하여 몇명의 우수한 조선선수들을 반칙이라는 딱지를 붙여 경기장에서 퇴장시켜버렸다. 그러자 《함축》선수들은 일제히 항의하며 경기를 《보이꼬트》했다. 그리하여 《명치신궁대회》결속이 그만 유명무실해졌다. 화가 꼭두까지 치민 왜놈들은 《함축》선수들을 경찰서에 련행하여 각목세례를 안기였다. 온몸에 피멍이 들어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 선수들은 배전을 치며 식민지민족의 설음을 통탄하였다. 그때 박영진은 한상수의 어깨를 잡고 《<비수>, 이게 도대체 뭐요. 왜 우리는 이렇게 맞아야 하느냐 말이요 .》하고 울부짖었다. 그랬던 박영진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민족적설음과 수치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신의 안일과 명예만을 바라고있는것이 아닌가.
광복후에도 식민지민족의 수치는 가셔지지 않았다. 이 땅을 강점한 미국놈들은 얼마나 오만무례하게 행동하고있는가. 그래도 박영진이처럼 참아야 하는가. 피가 동이로 끓는 우리가…
침묵을 지키던 박영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국을 생각해요. 지금 어떤 때요. 매 사람마다 전쟁때 있었던 일을 계산하고있단말이요.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해요.》
《그러니까 자네는 나에게 뭘 설교하자는건가?》
한상수는 불꽃이 튀는 눈길로 박영진을 쏘아보았다.
《뽈차는 사람이야 뽈이나 잘차면 되는거지 뭣때문에 정치에 나서는가 말이요.》
《걷어치우게. 그건 도피행위야!》
한상수는 더 참지 못하고 박영진의 말을 무찔러버렸다. 박영진은 그만 아연해서 한상수를 쳐다보았다.
《좋아요. 그렇다면 더 말하지 않겠소.》
《그런 넉두리는 듣고싶지두 않아.》
모욕감을 느낀 박영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상수는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 그렇게 헤여진 그들이였다. 후에 한상수가 체포되는바람에 그를 더 만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여보면 자기가 얼마나 도량이 작았는가를 뼈아프게 느끼였다.
어느날 한상수는 정창식에게 조용히 말했다.
《창식이, 이제 출소하게 되면 <태백>에 있는 박영진선수를 꼭 찾아가보게. 그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일세.》
《선생님, 념려마십시오. 사모님도 만나고 그분도 만나겠습니다.》
정창식은 성근히 대답했다. 얼마전에 교도소장이 불러내여 무슨 집행유예라는 명목으로 불원간 석방된다고 알려준것이다. 10년형이 돈으로 5년이 감형된 셈이다.
한상수는 자책에 잠겨 다시 입을 열었다.
《그사람이 마음에 걸려 죽을 때까지 편안치 않을것 같네. 원래 좋은 사람인데 변했어. 미국놈에 대한 환상과 공포증에 걸렸거든. 그를 바로잡아야겠는데… 난 그렇게 하지 못했지.》
《알겠습니다. 선생님.》
《꼭 부탁하네. 자네야 내 마음을 알아주리라 믿네.》
이때 갑자기 《1010번 무슨 말을 했어?》하고 한을손이 시찰구에 눈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한상수는 간수놈의 약을 올려주고싶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종씨라고 말했소.》
《건방진 자식, 그게 무슨 상관이야?》
한을손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알겠소. 족보를 캐면 내가 당신의 할아버지가 되겠는지.》
한상수는 이렇게 약을 올렸다. 그러다가 달려들면 박우갑의 몫을 받아낼 잡도리였다.
《뭐 할아버지?… 우리 종씨에는 너같은 <빨갱이>는 없었다.》
《그래 우리 한씨가문에도 력대적으로 너같은 민족반역자는 없었다.》
《뭐 뭐, 민족반역자?… 이 자식 어디 두고보자.》
한을손은 분해서 펄펄 뛰다가 사라졌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놈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한상수를 데리고 오고갈 때 자기와 성씨가 같다는둥, 감옥에서 나가면 자기를 몰라보아서는 안된다는둥 시시껄렁한 소리를 지껄이며 별로 사근사근하더니 오늘은 무슨 언터구니를 잡지 못해 안달아하는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조석으로 변하는 놈이였다. 속이 울컥했다. 박우갑의 말대로 놈들에게 호락호락 보여서는 안되겠다.
잠시후에 감방문을 여는 소리가 절커덕 하고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것은 한을손이 아니라 퍼런 수인복을 걸친 죄수였다. 뺨에 칼자리가 가로질러가고 험상궂게 생긴것을 보니 정치범이 아니라 잡범이라는것이 알렸다.
감옥측에서는 제놈들의 악행을 은페하기 위해 포악하기 그지없는 이런 강력범들을 앞잡이로 써먹고있었다.
한상수는 저으기 긴장했다.
《야, 왜 쳐다봐. 내가 누군줄 알겠지?》
허우대가 꺽두룩한 《칼자리》가 각목을 떡 짚고서서 도발을 걸어왔다.
《안다. 네가 이 감옥안에서 우리 동지들을 떡처럼 쳐서 불구로 만들어 소문낸 <떡봉>이란 놈이지?…》
《이런 륙실헐, 아가리를…》
《칼자리》는 입을 열자마자 한상수에게 달려들어 각목으로 후려쳤다. 순간 한상수는 슬쩍 옆으로 몸을 피하며 발끝으로 놈의 배아래부분 급소를 힘껏 타격했다. 《칼자리》는 각목을 땅에 떨구고 《윽》소리를 내며 사타구니를 두손으로 잡고 감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디여 한상수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그는 놈이 정신을 차릴사이 없이 사정을 두지 않고 조겨댔다. 후에는 어떻게 될지언정 오늘은 동지들의 이름으로 아예 죽여버릴 잡도리였다.
《아이쿠, 선생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한번만!…》
놈은 피가 랑자한 얼굴을 싸쥐고 애걸복걸했다.
《이 개보다 못한 새끼, 살려달라구?… 너 내가 축구선수 <비수>라는걸 알겠지. 네놈은 오늘 나한테 죽어야 한다.》
《<비수>형님, 제가 정말 어른을 몰라봤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아니야. 네놈은 죽어야 해.》
《아이쿠, 형님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다시한번 그러면 내 손에 죽는다.》
《예 예, 사실은 한간수가…》
《뭐 한간수?!…》
한상수는 놈의 멱살을 틀어잡아 일으켜 세워놓고 노려보았다. 놈은 한간수가 형님에게 본때를 보여주라고해서 그랬노라고 토설했다.
시찰구로 이 광경을 들여다보고있던 한을손은 이를 갈며 백근식에게로 달려갔다.
《음, 그랬단 말이지!…》
백근식은 얄팍한 입술을 놀리였다.
(네놈이, 아직 매라는걸 덜 맞아보았구나. 이제 네놈을 여기서 병신이 되던가, 기가 뽑히게 할테다!)
백근식은 이번에 새로운 묘안을 생각했었다. 절대로 그를 고문의 방법으로 굴복시키지 않을 잡도리였다. 자기의 처가 밀고자라는것을 알게 함으로써 가혹한 정신적타격을 준 이후 백근식은 한상수의 심리적분렬이 일어나도록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감방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할줄 알았던 한상수는 더욱 기광이 나서 날치는것이 아닌가. 할수없이 매로써 길을 들여야 했다. 이제는 그에게 혹독한 육체적타격을 주어 기운을 깡그리 뽑을것이다. 그렇게 하여 낚시군이 미끼를 문 물고기를 서서히 걷어올리듯이 굴복시킬것이다.
《떡봉》이가 한상수에게 용서를 빌고 나간다음 정창식은 놈들이 보복하지 않을가 하여 걱정했다.
《괜찮아. 그런것 무서워서 <떡봉>이를 놔주겠나?》
한상수가 오히려 정창식을 안심시켰다.
《하긴 그렇지만…》
《어서 타전법이나 마저 배워달라구. 자네가 출소하면 난 누구하고 의사소통을 하겠나. 이것으로 동지들과 대화해야지…》
한상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으나 만약 정창식이마저 출소하면 자기는 고독으로 하여 더욱 괴로울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특별사에서는 련대투쟁이 벌어졌다. 한상수가 들어있는 감방에 《떡봉》이를 들여보낸 악질간수를 수감자들앞에서 사죄시키고 파면시키라는 요구였다.
한상수는 동지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감옥안에서도 정의와 량심은 살아있고 동지에 대한 관심과 뉴대는 열렬했다. 결코 외롭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한상수를 지켜준 힘이였고 방패였다. 이 동지적의리에 대한 최대의 보답은 원쑤들에게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것이다. 수감자들의 함성소리에 놈들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수감자들은 그 이튿날부터 단식투쟁으로 들어 갔다.
바빠맞은 놈들은 한을손을 시켜 운동시간에 수감자들앞에서 사죄하는것으로 일단락지었다.
6
지난밤에 봄비가 소리없이 내리더니 아침이 되자 감방철창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은 때를 말쑥하게 씻어버린듯 연푸르렀다. 이제 눈부신 해빛이 저 하늘에 꽉 차겠지. 감옥마당가에 있는 뽀뿌라나무잎은 청보석마냥 은은한 빛을 뿜을것이고 대지는 다채로운 색갈로 단장했을것이다.
한상수는 가슴이 설레여왔다.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활기에 넘쳐 뛰여다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불현듯 철창으로 보이는 푸른 공간으로 한개의 축구뽈이 날아오른다. 그 다음에는 새끼공, 고무공, 가죽뽈이 풍선마냥 한꺼번에 하늘을 메우며 솟아올랐다. 함성!…함성!…
어느덧 한상수의 눈앞에는 어린 시절 평양 모란봉골안의 넓은 운동장에서 벌어진 축구경기때의 일들이 연줄 떠올랐다. 가난뱅이아이들이 공부하는 경상울종사립학교와 왜놈자식들이 공부하는 서문거리소학교간의 봄철축구경기인것이다. 두 학교 선수들을 응원하는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사립학교에서는 학부형들도 달려와 꽹과리를 치며 응원에 합세했다. 두 학교 선수들의 경기는 치렬했다. 허우대가 큰 왜놈아이들은 조선아이들을 얕보고 란폭하게 뽈을 차며 으시댔다. 동무들과 함께 응원하던 한상수는 왜놈종자들이 노는 꼴을 보니 눈에 불이 이는듯 했다. 사립학교의 후보문지기인 한상수는 운동장에 뛰여들어 뽈을 차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처럼 후보문지기에 불과한 자신에 대한 수치감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경기는 전반전에서 사립학교가 한꼴 먹은것으로 끝났다. 한상수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싶었다. 후반전에 사립학교의 꼴문을 한상수가 지켜서게 되였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끝내 사립학교가 지고 말았다. 두 학교의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퇴장하였으나 한상수는 너무도 분하여 꼴문대를 두팔로 그러안고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동무들이 달려와 그를 끌어내려 하였으나 한상수는 꼴문대에 얼어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상수, 이젠 그만 해요.》
녀담임선생이 그에게로 다가와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나 한상수는 막무가내였다.
《왜놈들이 보고있어요. 상수가 이러면 그들이 좋아해요. 눈물을 씻어요.》
녀선생은 엄하게 말하며 향수내가 연하게 풍기는 손수건으로 눈물범벅이 된 한상수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선생님, 전 문지기가 싫습니다. 꼴을 넣는 공격수가 되겠습니다.》
한상수는 얼굴을 들고 담임선생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요. 이제부턴 공격수가 되여 꼴을 본때있게 넣으세요.》
녀선생은 한상수의 어깨를 뜨겁게 그러안으며 열렬히 속삭였다. 그때부터 한상수는 후보문지기로부터 꼴을 넣는 공격수가 되였던것이다.…
한상수는 손가락만한 쇠꼬챙이로 감방마루바닥에 금을 긋기 시작했다. 운동시간에 감옥마당에서 간수모르게 슬그머니 주어들고 온것이였다.
곁에 있던 정창식이 호기심이 들어 뭘 하는가고 물었다.
《축구경기장이야.》
한상수는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열성적으로 금줄을 새겨나갔다.
《축구경기장이요? 그건 갑자기 무엇때문에?…》
정창식은 어이가 없는듯 미소를 띄우며 반문했다.
《경기전술을 연구해야지. 긴긴 세월 뭘 하겠나.》
한상수는 여전히 등을 구부린채 앉아 부지런히 문지기구역과 벌축구역, 중앙선을 그려나갔다.
정창식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생각깊은 표정이 어리여있었다. 《떡봉》이를 조겨댄것으로 하여 놈들의 보복이 있겠는데 한상수는 태연히 감방바닥에 축구경기장을 새기며 전술을 연구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하긴 감옥생활에서는 무엇인가 취미를 붙여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가고 날이 가는지 모르는것이다. 멍청히 앉아 하루하루 날을 세다가는 지레 고독에 말라죽고 말것이다.
《어떤가? 비슷한가?…》
한상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여 《축구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비슷합니다.》
정창식도 기쁨에 넘쳐 맞장구를 쳤다.
《이젠 선수들이 있어야 되겠는데…》
한상수는 감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안타까운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정창식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나가거든 장기쪽 한조를 들여보내주게. 신통히 한쪽팀이 후보선수까지 열일곱명이니 서른네개면 두팀을 조직할수 있네. 그전까지는 내가 아무렇게 변통해서라도 이 경기장에 선수들을 세워놓을테니…》
한상수는 조용히 웃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창식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다음날 아침 뜻밖에 정창식은 출소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한상수를 혼자 남겨놓고 나가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아무쪼록…》
정창식은 더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돈으로 출소하는것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역시 피줄은 속일수 없는것이다.
정창식의 아버지는 아들이 《빨갱이》라고 감옥에 처넣어 5년이나 콩밥을 먹이더니 이제는 정신이 들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던지 《법무부》에 뭉치돈을 들이민것이다.
《사람두 참. 자네야 5년을 살지 않았나. 나야 이제 1학년생이구. 박우갑동지말대로 우리 몫까지 통일을 위해 싸워달라구.》
한상수는 그동안 정이 든 정창식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선생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우갑동지하신 말씀 잊지 마시고…》
정창식은 또다시 목이 메여 말을 못하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한상수는 부지중 뜨거운것이 북받쳐올라 그를 부둥켜안았다.
《잘 가라구, 창식이.》
《예. 선생님의 부탁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창식까지 떠나가자 감방안은 정적이 꽉 찼다. 불시에 고독감이 덮쳐들었다. 동지들이 있을 때에는 간수에게 끌려나갔다가도 감방으로 돌아오면 한결 안온하고 마음을 놓게 되더니 이제는 공허감이 떠돌았다. 저녁을 먹고나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세멘트벽에 귀를 가까이 대고 저가락으로 옆방에다 정창식이가 가르쳐준 통방을 해보았다.
《내 말이 들리는가. 내 말이 들리는가?》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는 실망하여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반대편 세멘트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곧 그쪽에서 신호가 왔다. 기쁨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소리높은 세멘트담장으로 감옥을 둘러싸고 방마다 든든히 칸을 막아 외부세계와는 물론 감옥안에서까지 철저히 격리시켜놓았지만 동지들 호상간에 오고가는 마음과 마음만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그들은《통방》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하고 싶은 말을 다할수 있었다.
육체는 철쇄로 얽매여놓을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심장까지는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다.
한상수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벽을 두드렸다. 싸움은 이제부터이다. 한상수는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놈들은 새로운 보복을 준비할것이다.
7
드디여 그 시각이 왔다. 이튿날 오후 운동시간이였다. 고문으로 인해 운신할수 없는 수인들을 내놓고는 모두 이 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독거운동을 하던 정치범들까지 모두 감옥뜨락으로 내몰았다. 그곳에는 벌써 간수부장 백근식과 일반사동의 간수들까지 모두 나와 나무걸상에 앉아있었다. 그들의 얼굴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특별사동간수들은 정치범들을 한쪽으로 모여앉게 했다. 오늘은 운동을 불허한다는것이였다. 운동이라야 뜨락안을 빙빙 돌며 산보를 하는것이였다. 이것도 수인들에게는 금같이 귀한 시간이다.
정치범들은 여느 때없이 운동을 시키지 않고 한쪽에 모여앉게 하는것이 이상스러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간수들이 옆에 곤봉을 들고 붙어있어서 말을 할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사소통을 하는 경우에는 무자비한 징벌이 가해지는것이다. 모두들 긴장한 표정으로 놈들의 거동만 지켜보고있었다.
이윽고 백근식이 정치범들앞에 나서서 사뭇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부터 이 운동시간에 수감자 1010번과 최간수와의 무차별 프로레스링경기를 하겠다.》
조용하던 수면에 돌덩이를 던진듯 수감자들속에서 파문이 일어났다. 감옥이 생겨 있어본적이 없는 기이한 일이였다.
순간 한상수의 낯빛은 쇠처럼 굳어졌다. 그는 놈들이 무엇을 의도하여 이 경기를 조직했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떡봉》이를 때린 보복이였다. 드디여 백근식은 살륙의 칼을 든것이였다.
가슴이 후드득 뛰였다. 너무도 뜻밖이였다.
백근식의 얼굴에는 사뭇 즐거운 미소가 피여났다. 그는 수감자들의 머리우를 스쳐지나가는 파문을 일별하고 내심 흡족해했다. 그들이 공포감을 느끼도록 꾸민 모략이 은을 내는것이였다. 물론 물리적인 방법으로 한상수 한명의 의지는 꺾을수 있지만 정치범전체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 경기를 통해 한상수는 물론 그것을 구경하는 정치범들로 하여금 전률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듦으로써 감옥안의 질서에 고분고분 순종하도록 하자는것이였다. 바로 백근식은 이것을 노렸다. 그러니 취조실에 끌고 들어가 한상수 하나를 고문하는데 비기겠는가. 물론 백근식은 이 경기를 제머리로 짜낸것은 아니였다.
하루는 몸이 기둥통같고 힘이 황소같은 최간수가 백근식을 찾아왔다.
《어제 <떡봉>이가 특별사에 들어갔다가 혼났다면서요?》
잡범간수인 이자는 손가락마디를 와드득와드득 꺾으며 넌지시 물었다.
《그건 왜 물어?》
백근식은 기분이 잡쳐 자기 할 일을 하며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이게 수치가 돼서 그럽니다. 나한테 넘겨주시오. 내가 버릇을 떼놓겠시다.》
백근식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쳐다보며 최간수가 어지간한 유도선수라는것을 생각했다.
《자네 유도 몇단이던가?》
《5단입지요.》
최간수는 이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을것 같이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대답했다.
《5단이면 높은 급이지?》
《그렇지 않구요. 사실 이건 3년전에 판정받은건데 지금은 8단쯤 되지요.》
《좋아. 그럼 자네 죄수 1010번과 붙어보지 않겠나?》
백근식은 즉흥적으로 레스링경기같은것을 시켜볼 생각이 떠올랐다.
《아, 거 <비수>라는자 말입니까?》
《<비수>는 무슨 말라빠진 <비수>야.》
백근식은 왜 그런지 심사가 좋지 않아 온곱지 않게 내쏘았다.
《예 예, 알았습네다. 축구선수를 하던자 말입지요.》
최간수가 얼른 시정했다.
《축구선수니 <비수>니 하는 따위의 표현은 필요없어. 그자는 울타리안에 갇힌 일개 죄수에 불과해. 자네 한번 맞서볼만한가?》
《원 부장님두. 저를 어떻게 보고… 걱정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하던참인데… 그자를 때려죽이랍니까?》
《죽이진 말게. 하지만 병신이 되는건 할수 없지.》
백근식은 최간수의 어깨를 두드려 내보냈다. 그는 이미부터 최간수의 솜씨를 알고있었다. 웬만한 폭력범도 최간수와 마주서면 치를 떨었다. 그러나 한상수는 서울구치소와 이곳에 와서 인간이하의 한심한 생활조건과 정신육체적고통으로 하여 약해질대로 약해졌다. 최간수는 둘째치고 중학교학생과 맞서도 단매에 쓰러질것이다. 한상수는 최간수한테 곤죽이 될것이다. 육체가 병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 그때 그의 의지를 뒤흔들어놓아야 한다.
백근식은 자기 말의 효력을 찾아내기라도 하듯 수감자들의 얼굴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백근식은 속으로 흡족해하며 다시 뇌까렸다.
《이 경기에서 1010번이 이기는 경우에 너희들이 제기한 요구조건을 들어줄수 있다. 그러나 지는 경우에는 그 요구조건은 불허한다. 알겠는가?》
그것은 악질간수인 한을손을 파면시키는 문제였다.
뜨락에는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았다. 납덩이같은 무거운 정적이 수감자들의 가슴을 꽈악 내려눌렀다.
《그럼 최간수와 1010번 나오라!》
백근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간수가 기다리고있은듯 빤쯔만 입은채 황소같은 몸집을 흔들며 마당 한가운데로 어정어정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벌써부터 승리자연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그러나 한상수는 어금이를 꽉 앙다문채 최간수를 쏘아볼뿐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도전에 응하지 않으면 놈들은 그 보복으로 무슨짓을 할지 모른다. 한상수는 자기때문에 동지들이 앞으로 고통을 당하는것을 참을수 없었다. 죽더라도 동지들을 위하여 경기에 나가야 했다. 비굴하게 물러설수는 없었다. 박우갑이 언제나 그를 일깨워주던 말이였다. 이제야말로 동지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가 온것이다.
《간수부장, 이런 살인경기가 세상에 어디 있소?》
수인들속에서 나이지숙한 김성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이 펄펄이는 눈길로 백근식을 쏘아보며 항의했다.
《뭐? 살인경기?…》
백근식의 눈길도 당장에 창끝처럼 날카로와졌다.
《그렇소. 세상 어느 나라에도 없는 고문경기란 말이요. 차라리 우리 정치범들이 다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경기는 못하오. 끝내 하겠다면 우린 <법무부>에 상소할테요.》
그는 도고하면서도 사리정연하게 수감자들의 립장을 밝혔다. 간수들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그러나 백근식은 당장에 표범처럼 사나와졌다.
《담당간수, 뭘해, 저 자식을 당장 끌어다 먹방에 처넣으라!》
백근식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륙모방망이를 든 간수 몇이 우르르 달려가 그 수인을 후려치며 끌어갔다. 그는 간수들에게 끌려가면서도 《한동지! 경기를 하지 말라. 죽어도 하지 말라!》하고 눈물겹게 웨쳤다. 한상수는 가슴이 확 불타오르는듯했다. 눈에 살기가 뻗친 백근식은 한상수를 쏘아보며 물었다.
《1010번! 경기에 응하겠는가 그만 두겠는가.》
그는 백근식에게 조용하나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자 끌고간 동지를 내놓으라. 그래야 응하겠다.》
《좋다. 끌어와!》
이윽고 한상수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짙은 안개와도 같은 재빛이였다. 그는 동지들을 비장한 눈길로 둘러보더니 몸에 걸쳤던 수인복을 하나하나 벗어던졌다. 걸레짝같은 수인복을 벗어던지자 뼈가 앙상한 몸이 드러났다. 말그대로 뼈에 가죽을 씌운 몸이였다.
《경기시간은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다. 심판은 내가 하겠다.》
백근식의 목에는 제법 호각까지 데룽거렸다.
한상수는 묵묵히 마당가운데로 걸어나왔다. 수감자들의 눈이 빛살처럼 그에게 집중되였다. 그들은 한상수가 경기를 하는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는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한상수는 막상 경기장앞에 나서니 뛰던 가슴도 멎고 마음도 오히려 평온해지는듯도 했다. 맞아죽는 한이 있더라도 동지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싸울것이다. 그는 동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주먹을 틀어쥔채 괴로움과 긴장감이 한껏 어린 눈길로 한상수를 응시했다. 눈길은 서로 부딪쳐 불꽃이 튀는듯 했다. 한상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지들, 이 한상수가 어떻게 싸우는가 보아주시오. 죽더라도 굴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것은 박우갑이 최후를 앞두고 남긴 말의 반복이였다. 한상수는 모든 감각이 마비된듯 했다. 뜨거운 해볕에 눈앞이 아물아물했다. 문득 그의 눈앞에 최간수가 히물히물 웃으며 다가오는것이 보였다. 그것은 한상수를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악마와도 같았다. 한상수는 정신을 버쩍 차렸다. 그러나 어느새 최간수는 한상수의 팔을 거머쥐고 홱 집어던졌다. 한상수는 허공에 떴다가 저만치 딴딴한 땅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그야말로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수감자들의 귀전에 아츠럽게 때렸다. 《아!》 수감자들은 일시에 신음소리를 질렀다. 한상수도 몸이 부서져나가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한상수가 비칠거리며 일어서자 최간수가 또다시 둘러메쳤다. 한상수는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악착한 최간수는 조금도 사정을 보지 않고 한상수에게 달려들었다. 한상수는 련이어 최간수의 들어메치기에 걸려들었다. 고양이가 쥐를 다루듯하는 격이였다. 그대로 경기를 하다가는 얼마 못가서 한상수는 만신창이 되여 죽을것 같았다. 그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최간수는 땅바닥에 쓰러진 한상수의 등허리를 지르밟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제 내손에 병신이 되던가 죽을수 있다. 나는 너를 마음껏 희롱하다가 동네개처럼 때려죽일테다. 최간수의 자세와 태도는 이러했다.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광경이였다. 수감자들은 더는 참을수가 없어 《경기를 중지하라!》, 《살인경기를 걷어치우라!》하며 그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섰다.
《이제 소리친놈이 어느 새끼야?》
간수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수인들에게 곤봉세례를 안겼다.
《가만!》
백근식이가 경기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한상수에게 물었다.
《1010번, 경기를 기권하겠는가. 기권하면 살아날수 있지만 패한것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한상수의 귀에는 그 소리가 우뢰처럼 들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눈앞에 조선의 뽈을 차야 한다고 하신 김일성장군의 말씀을 전달하여주던 북조선체육련맹일군의 얼굴과 사형장으로 나간 박우갑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공화국의 체육인이다. 원쑤와의 대결에서 기권이란 있을수 없다. 죽어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
한상수는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좋다. 경기를 계속하라!》
백근식은 기고만장하여 소리치며 호각을 길게 불었다.
《<비수>! 힘을 내라!》
정치범들속에서 누군가 안타까이 소리쳤다. 그 소리는 한상수에게 간신히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전광석화마냥 그의 뇌수에 불꽃을 튕기였다.
그는 입안에 가득찬 피를 뱉으며 상대방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최간수가 달려들어 또다시 내동댕이 치려했다. (개자식! 우리 동지들의 이름으로!…)
순간 한상수의 몸에 자기도 알수 없는 힘이 솟구쳤다. 피를 본 야수를 방불케 하는 놈의 징그러운 상통이 눈앞에 다가드는 찰나에 한상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골받이를 하였다. 이것은 안심하고 접근하던 최간수에게 있어서 불의의 타격이였다. 뜻밖의 공격에 최간수는 턱을 싸쥐고 주저앉았다. 사태는 전도되였다.
《최간수, 일어나라!》
간수들이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기운을 얻은 모양인지 최간수는 두손으로 턱을 잡은채 비칠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다. 《얏!…》하는 공기를 째는 쇠된 웨침과 함께 한상수의 온몸이 그대로 비수가 되여 최간수에게로 날아갔다. 그것은 두번째 드센 강타였다. 금방 숨이 넘어가리라고 생각했던 수인이 그처럼 무서운 힘으로 타격을 가할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최간수는 그만에야 두손으로 아래배를 그러안고 《윽!》하는 신음소리를 지르며 비칠거리더니 기둥통이 넘어지듯 《쿵》하고 땅바닥에 나딩굴었다. 수감자들은 자리를 차고 왁 일어나 《만세》하며 환성을 질렀다. 한상수가 그 유명한 발끝차기로 상대방의 급소를 내찌른것이였다. 얼굴이 피와 땀으로 얼룩진 한상수는 불사신마냥 마당 한복판에 거연히 서있었다. 그의 두눈에서는 린광같은 파란 불찌가 펄펄 일고 먼지투성이가 된 앙상한 가슴팍이 세차게 오르내리고있었다.
《한동지, 장하다!》
《<비수>가 이겼다!》
수감자들은 격정에 사무쳐 웨치며 한상수에게로 왁 달려가 와락 끌어안았다. 모두가 눈물범벅이 되였다. 한상수는 동지들의 품에 안기여 의식을 잃었다. 최간수도 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간수들이 담가로 들어내갔다.
간수들은 입이 쓰거운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가버리고 백근식이만이 뾰족한 턱을 살살 문지르며 텅빈 마당에 서있었다.
밤이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뜨니 한상수는 감방에 누워있었다. 정신을 잃자 간수들이 끌고와 감방에 던진 모양이였다. 옆구리가 쑤시고 어깨팍이 떨어져나갈듯이 아팠다. 어딘가 잘못된것 같았다. 몸에 고열이 났다. 한상수는 또다시 의식이 흐리마리해졌다.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 소리는 아득히 먼곳에서 울려오는듯 했다. 옥야의 구슬픈 한숨소리같기도 하고 사형당한 박우갑이 질책하는 소리같기도 했다. 전쟁전 한상수가 종로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른 후 옥야의 집에서 치료를 받을 때 그는 지금처럼 한숨을 쉬군 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순간도 한상수의 머리맡에서 떠난적이 없었다. 옥야의 그 지극한 정성으로 하여 한상수는 며칠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수 있었다. 벽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 선명하게 울려왔다. 그 소리는 분명 박우갑의 안타까와하는 말이였다.
(상수, 정신을 차리라. 맥을 놓으면 죽는다. 넌 죽을수 없는 사람이다!)
한상수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으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끄을며 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옆구리가 꼬챙이로 쑤셔대는것 같기도 하고 칼끝으로 도려내는듯도 했다. 한상수는 간신히 벽에까지 기여가 귀를 가져다댔다. 옆방에서 동지들이 보내오는 통방이였다.
《비…수…정…신…을…차…리…라》
한상수는 가슴이 뭉클했다. 불덩어리같은것이 목을 콱 치받는다. 아픔도 한결 멎는것 같았다.
《비…수…왜…대…답…이…없…는…가》
한상수는 자기가 울고있음을 느꼈다. 동지들이 곁에 있다는, 자기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그것때문이였다. 그는 격정에 사무쳐 답전을 보냈다.
《1010번 듣는다.》
《비수, 장하다. 잘 싸웠다.》
《동지들, 고맙다.》
《비수, 신심을 잃지 말라. 승리는 우리의것이다.》
한상수는 그가 감옥마당에서 경기를 할 때 살인경기를 걷어치우라고 항의하다가 몽둥이로 매를 맞으며 취조실로 끌려갔던 김성교라는것을 알아차렸다.
《많은것을 가르쳐달라.》
《정황이 있을 때마다 련락하라. 벽 저쪽의 동지들과도 련계를 가지라.》
한상수는 동지들이 곁에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에 반석같은것이 들어앉는듯 했다. 그는 거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몸은 부서져나갔어도 온몸에 갑옷을 두른것 같았다. 그것은 놈들과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자부심, 동지들을 위해 자기를 바쳤다는 긍지였다.
한상수의 눈앞에는 문득 박우갑의 미소어린 얼굴이 우렷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