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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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에 피빛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먼길을 달려왔는지 휘뿌연 먼지를 들쓴채 발동소리를 가쁘게 톺는 한대의 수인차가 대구형무소 철문앞에 이르렀다. 15척 담장과 보기에도 가슴이 섬찍해지는 녹쓴 철문앞에서 닭장같은 수인차는 다급하게 경적을 울리였다. 잠시후 철문이 열리고 수인차는 담장안으로 빨리우듯 들어갔다. 담쟁이넝쿨이 뻗어올라간 건물앞에 멎어선 차에서 앞수정을 찬 수인 한명과 두명의 호송경찰이 내렸다.
건물현관앞에 이른 수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돌려 노을이 불타는 하늘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도 붉은 노을빛이 물들어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현관안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후 수수떡같은 전등알이 희미하게 비치는 감방복도로 륙모방망이를 꽁무니에 차고 열쇠묶음을 손에 든 간수와 가슴에 《1010》이라는 번호를 단 수인이 걸어갔다. 간수는 눈빛이 싸늘하고 하관이 넓은 건강한 사나이였고 수인은 피를 뽑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고 몸이 수척한 젊은 사람인데 두눈만은 정기가 있었다. 살은 빠졌으나 큰 키에 발달된 체구이다.
그들은 정치범들이 갇혀있는 특별사동 9호실 철문앞에 이르렀다. 간수가 열쇠를 찾느라 절거덕거렸다.
《찌그렁!》
쇠이발 갈리는듯한 아츠러운 소리가 복도에 스산하게 메아리쳤다.
《1010번 들어갓!》
엄한 목소리가 울렸다. 수인은 얼른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어갓!》
간수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제야 수인은 감방안에 들어섰다.
《탕》하고 철문닫기는 소리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의 경종처럼 가슴 서늘해지도록 울렸다.
감방안은 어둑시그레했다. 천정에 촉수낮은 전등이 매달려있었지만 인차 주위를 분간해볼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관속같이 좁은 감방안에 앉은 두 사람이 자기를 보고있다는것을 알아보았다. 한명은 몸이 호리호리하고 얼굴이 영민해보이는 젊은이였고 다른 사람은 구레나릇이 검실검실한 중년사나이였다.
간수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지자 젊은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십시오.》
감옥안에 있는 사람같지 않게 옹골찬 목소리였다.
《고맙습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젊은 사람에게 이끌리여 그들옆에 앉았다. 한평도 되나마나한 바닥에 세명이 앉으니 꽉 차는듯 했다.
그는 피로한듯 벽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까딱 안하는 그의 모습은 모든것을 체념한 사람같았다.
잠시후 소지가 저녁밥을 날라왔다. 식구통으로 던져주는 콩이 드문드문 섞인 아이주먹만한 보리밥 두 덩이와 한공기씩 차례지는 멀건 국이다.
《왜 이것뿐이요?! 세사람인데…》
밥을 받던 젊은 사람이 식구통에 얼굴을 가져다대고 큰소리로 물었다.
《난 모르겠소. 주는대로 가져왔으니.…》
소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그래?…》
언제 따라왔는지 간수가 눈알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우리는 세사람이란말이요. 그런데 밥은 두명분이요.》
젊은 사람이 마주 소리쳤다.
《새로 입방한놈은 아직 취사실에 등록되지 않았어. 오늘 저녁은 한끼 굶어.》
간수는 시끄럽다는듯 이렇게 뇌까리고 다른쪽으로 걸어갔다.
《그만하오. 그런놈에게 말해야 소용없소. 자, 이리 오시오. 오늘저녁은 이것으로 한끼 땝시다. 진수성찬으로 생각하고 먹으면 배가 부르기마련이요.》
구레나릇의 사나이가 헌헌히 말하며 콩보리밥덩어리를 세등분으로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나자 구레나릇의 사나이가 새로 들어온 수인의 손을 다정히 잡으며 말했다.
《여기야 우리 정치범들만 있는덴데 뭐 다른 말은 할것 없고 이젠 한식구가 됐으니 통성이나 합시다. 난 박우갑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 사람은 정창식이요.》
수인은 바로 앉으며 고개를 숙이였다.
《전 한상수라고 합니다.》
저녁밥을 먹을 때부터 새로 온 수인을 여겨보던 젊은이가 거의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부둥켜잡았다.
《옳구만요.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선생님, 절 모르시겠습니까? 제 고려대학<오토바이>입니다. 선생님이 <태백>에 있을 때 우리 대학축구를 가르쳐주시지 않았습니까.》
격정을 누르며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에는 감방안에 쩡쩡 울리였다. 그랬었다. 서울축구단《태백》에서는 선수후비를 고를겸 자주 대학에 나가 훈련을 지도하군했다. 그때 보통키에 몸매가 다부지고 속도가 빨라 《오토바이》라고 부르던 청년이 있었다.
《아니, 그럼 그<득카이>(말)와 발이 맞던 고려대학 공격수?…》
한상수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의 목소리는 뜻밖의 상봉으로 하여 꺽 막혀 마지막말을 맺지 못하였다.
《예. 바로 제가 그 정창식입니다.》
정창식은 한상수가 자기를 알아보자 성수가 나서 곁에 있는 구레나릇 사나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좌동지, 이분이 우리 나라의 유명한 축구선수 <비수>입니다.》
그러면서 너무도 반가와 두손을 비비고 두무릎을 쓸며 어쩔줄을 몰라했다. 들떠있는 정창식의 어린애같은 행동에는 낯을 돌리지 않고 박우갑은 한상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만에야 석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비수>라면 나도 알고있소. 보안간부학교시절에 평양 모란봉공설운동장에서 <비수>가 뽈을 차는것을 보았으니까. 반갑소. 그 유명한 선수가 동무였구만.》
박우갑은 한손은 한상수의 손을, 다른 한손은 그의 어깨를 그러쥐였다. 그러고는 그의 이마에 자기의 이마를 부볐다. 여기에 정창식이 합세하여 셋은 서로 그러잡고 이마들을 맞부비였다. 타향에서는 제고향 까마귀도 반갑다는데 생사를 기약할수 없는 형무소감방에서 서로 아는 사람들을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세차게 들먹이던 가슴들이 가라앉았을 때 정창식이 옛말을 하듯 도란도란 이야기를 펼치였다.
《정말 굉장했지요. <경평축구대항전>때 평양의 <무호단>과 서울의 <태백>이 뽈을 찼는데 서울사람들은 이 선생님의 뽈차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서울신문들에 어떤 기사를 실었는지 아십니까.
<평양팀의 축구귀신 <비수> 질풍같은 속도와 무서운 타격술소유!>
<백의민족의 자랑인 스물두살의 축구왕자 <비수>는 자기 축구기술을 키워준 젖줄기는 대동강물이라고 언명!>》
《그건 무슨 소리요?》
박우갑은 처음 듣는 소리라 한상수와 정창식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정창식은 피씩 웃었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들이 몰려와 어떻게 되여 그처럼 뽈을 잘 차는가고 묻자 선생님이 자기는 대동강물을 먹고 자랐기때문이라고 했지요.》
박우갑은 아무 말없이 한상수의 얼굴을 점도록 쳐다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음》하는 웅글은 소리가 새여나왔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 그는 눈을 꾹 감았다. 부리부리한 눈, 길게 자란 구레나릇이 눈이 뜨이게 떨리였다. 감은 눈귀에서 번뜩이는것이 배여나왔다. 한참만에야 그의 입에서 혼자소리와 같은 말이 새여나왔다.
《그래 대동강물이란 말이지, 대동강물!…》
한상수는 목이 꽉 메여올랐다.
아, 대동강. 꿈결에도 잊을수 없는 대동강, 어머니강, 짜개바지시절부터 가막조개를 잡으며 물장구치고 강건너 대안을 헤염쳐가며 힘을 키우던 그 어머니강을 내 한시라도 잊은적이 있었던가. 말만 들어도 가슴들먹이게 하는 그리운 이름이다.
눈굽에 저절로 뜨거운것이 괴여올랐다.
《그런데 운동장에서 펄펄 날던 <비수>가…어떻게 된 일이요?》
자기로 하여 감방의 분위기가 무거워졌음을 깨달은 박우갑이 우선우선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상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였다. 묻는듯한 두사람의 눈길을 이기지 못하여 애매한 소리를 내뱉았다.
《별루 일도 크게 치지 못하면서…》
한상수는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말을 중도에서 끊어버렸다. 말하기가 거북했다. 두사람은 묵묵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미국놈들과 축구경기를 하러 38˚선을 넘어왔다가 체포됐지요.》
《미국놈과 경기를 하러오다니?》
박우갑이 놀라운듯 두눈을 치떴다.
《49년도에 서울경기장에서 남조선<태백>팀과 미국팀간의 축구경기가 있었는데 아, 글쎄 평양의 <비수>인 선생님이 경기장에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참 뜻밖이였지요. 그때 선생님이 서울사람들을 얼마나 격동시켰던지.…》
정창식은 그 경기를 목격한 한사람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설명을 했다.
《그래서?…》
박우갑은 호기심이 부쩍 동해 다가앉았다.
한상수는 딱했다. 별로 즐겁지 못한 추억이였던것이다. 그는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우리 나라 교통성체육단에서 뽈을 차던 나는 그무렵에 축구선수후비를 고르기 위해서 해주에 내려와있었지요. 해주동중학교에서는 해마다 시내 학교들의 가을철축구대항전이 벌어지군 했으니까요. 그런데 하루는 남조선축구단체인 <태백>에서 친구가 찾아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나를 찾아 평양까지 갔다가 해주로 출장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섰다는거지요. 그 친구로 말하면 <태백>에서 <왼쪽날개>로 이름을 날리던 축구선수인데 나와는 중학시절부터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였지요. 친구가 하는 말이 얼마후에 서울에서 <태백>팀과 미국팀과의 경기가 있는데 그 경기에 나를 참가시키기로 토론하고 데리러왔다는겁니다. 내가 어떻게 조직의 승인을 받지 않고 그를 따라가겠습니까. 그래서 그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친구는 그럼 우리 조선사람들이 미국놈들한테 져야되겠느냐고 하면서 잠간 다녀오면 될걸 뭘 그러느냐고 막무가내로 잡아끌지 않겠습니까. 사실 저도 조선사람이 미국놈들한테 져야 되겠느냐고 하는 소리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 평양에 가서 체육단의 승인을 받고 떠나자고 했더니 그는 밀선을 겨우 구해놓았는데 시간이 없다는겁니다.
저는 생각끝에 며칠간 서울로 가서 미국놈들에게 조선사람의 본때를 보여준 다음 체육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장군님품으로 올 생각을 했지요. 더구나 서울에는 사랑을 약속한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처녀도 볼겸해서 체육단에 편지 한장을 날린 다음 친구를 따라 38선을 넘지 않았겠습니까. 밀선을 타고 38선을 넘으며 아슬아슬한 고비를 몇번 넘긴끝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며칠후에 경기를 하러오겠다던 미국놈들이 몇달이 지나서 나타났지요. 할수 없이 기다리다가 미국팀과의 경기를 끝내고 북으로 떠나자고 하니 전쟁전야인지라 38선이 철통같이 막혔지요. 그래서 할수 없이 서울에 주저앉게 되였고 얼마후에 이미부터 좋아하던 부자집 딸한테 장가를 갔는데 전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한 다음 또 뽈을 차려고 총을 잡고 전선으로 나갔습니다.
허, 그런데 일이 안될 때라 목포근방에서 가슴에 중상을 입었지요. 어느 의원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미처 후퇴를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상처가 아물자 집으로 왔는데 인민군대에 나갔던 나를 그냥 둘리 있습니까. 내가 통일운동에 나서서 좀 활동을 했더니 놈들은 끝내 나를 체포하여 재판을 했습니다. 서울구치소에 있다가 형을 받고 여기로 왔지요.》
말을 마친 한상수는 후― 하고 긴숨을 내쉬였다.
《몇년형을 받았소?》
머리를 끄덕이며 한상수의 말을 듣고있던 박우갑이 나직이 물었다.
《20년입니다.》
감방안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어떤 무거운 돌덩어리가 세사람의 가슴을 꽈―악 누르는듯 했다.
20년! 교형리들은 또 한명의 애국자를 인간세상에서 영원히 매장하려는것이였다.
《음, 의롭게 시작한 일인데 그렇게 됐구만. 하여튼 장하오. 운동장에서 뽈을 차던 축구선수가 조국통일을 위해서 투쟁의 길에 나섰으니 말이요.
그러니 우린모두 하나의 뜻으로 맺어진 동지요.》
박우갑은 한상수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그 손길을 따라 믿음과 신뢰의 정이 뜨겁게 흘러들었다.
《투쟁은 이제부터요. 간고할것이요. 우리는 이 감방안에서도 조국통일의지를 굳건히 지켜 끝까지 싸워야 하오.》
박우갑은 이렇게 고무해주고는 정창식을 소개했다.
《이 정창식동무도 전쟁때 의용군에 입대하여 싸우다가 후퇴도중 식량을 구하러 집에 잠간 들렸댔는데 반동놈들에게 체포되여 10년형을 받았소. 감옥생활에서는 우리 셋중에서 선배지.》
박우갑은 다음으로 자기 소개를 했다.
《나는 조선인민군 소좌로 사단통신과장을 했소. 일시적전략적후퇴시기 지리산에 들어가서 전쟁이 끝난 다음해까지 빨찌산투쟁을 했소. 불질하는데서 부상이 왜 없겠소만 공교롭게도 놈들에게 체포되여 사형선고를 받았소. 그런데 이놈들이 무엇때문인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구만.》
(사형수라니?…)
한상수는 놀라운 눈길로 박우갑을 쳐다보았다.
박우갑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로서의 락망이나 비애같은것은 꼬물만치도 찾아볼수 없는 그의 표정을 한상수는 놀라움과 경이의 감정으로 여겨보았다.
《소좌동지, 많이 배워주십시오.》
한상수의 목소리는 떨리였다.
《서로 의지하며 싸웁시다.》
《뭐야?》
갑자기 시찰구에서 유리창깨는듯한 고함소리가 쨍하니 울렸다. 한상수는 깜짝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시커먼 눈알이 감방안을 들여다보며 데룩거린다.
《왜 잠을 자지 않고 말을 하는거야. 아가리에 자갈을 물려야 정신이 들테야?》
조폭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여, 한간수, 얼마 안있으면 영원히 입을 다물겠는데 뭘 자꾸 그래. 당신과 같은 종씨인 이 새사람에게 감옥규정을 대주댔어. 그래야 당신두 편안하게 제 밥벌일 할게 아니야.》
박우갑은 놈의 뒤잔등이라도 두드려주듯 비위를 부렸다.
《<빨갱이>들은 할수 없다니까.》
간수는 박우갑이와는 대척을 안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던지 증이 나서 투덜거리며 멀어져갔다.
《저놈이야말로 지독하게 교활한놈이요. 밤에도 신발을 벗고 살살 기여다니며 엿듣다가 감방안의 기미가 다르면 벅적 소란을 피우군 하오. 한을손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부산거리의 깡패로 소문난놈이라오. 나라가 광복되였을 때 부산항구에 쌓아놓은 적산물을 훔쳐다가 팔아먹던 자랑을 곧잘 하군 하오.》
이때였다. 옆방에서 바람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박우갑은 바람벽에 귀를 가져다대고 한동안 유심히 듣고있더니 마주 타전을 했다.
한상수는 그것이 감방 호상간에 련락을 하는 수단의 하나인 《통방》이라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도 그렇게 했다.
박우갑은 한참동안 답전을 보내고나서 빙그레 웃으며 돌아앉았다.
《옆방에 있는 김성교동지가 누가 들어왔느냐고 물었소. 공화국의 유명한 축구선수가 통일을 위해 싸우다가 들어왔다고 했더니 잘 도와주어 공화국체육인답게 잘 싸우도록 하라고 했소.》
한상수는 가슴이 확 달아올랐다. 이 감방안에서도 동지들의 관심과 고무, 뜨거운 정이 흐르고있는것이였다.
《김성교동지는 지리산빨찌산의 한 지대장이였소.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거듭 상소하여 무기형으로 넘어간 동지요.》
그러고보니 여기에는 대체로 사형수, 무기수들이였다.
《선생님.》
한옆에 잠자코 앉아있던 정창식이 입을 열었다.
《너무 막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직한 동지들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집니다.우리는 동지를 위해 자기 목숨을 서슴없이 바치지요. 많은 동지들이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그 소리가 또다시 한상수의 가슴을 쩡하니 울려주었다.
《오늘저녁은 이만 자기 소개를 하고 자자구. 먼길을 온 한동무가 피곤하겠는데.…》
박우갑이 벽에 어깨를 기대인채 눈을 감았다.
밤은 깊어가고있었다. 이따금 어느 방에선가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직일간수의 징박은 구두발소리가 무덤속같은 감방의 정적을 깨뜨리군 했다.
한상수는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저렇듯 태연자약한 박우갑동지!… 새로 들어온 자기를 잘 보살펴주라고 통방해온 김성교동지, 나이로는 아래사람이지만 감옥선배인 정창식이… 한상수는 이런 의지가 되는 동지들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든든해짐을 느끼였다.
2
대구형무소 간수부장 백근식은 책상우에 놓여있는 한장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정치범《1010번》 한상수! 창백한 얼굴, 수척하여 약간 두드러져보이는 관골, 검실검실한 수염이 덮인 든든한 턱, 푹 빠진 눈확속에서 날카로운 눈길이 백근식을 지그시 쏘아보고있었다.
백근식은 버릇대로 손가락마디를 와드득와드득 꺾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슴이 뛰였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원쑤를 여기서 만나다니!…
어느때이건 기어이 복수를 하리라고 벼르던 인물이였다. 그런데 지금 자기는 그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게 된것이다. 하늘이 가져다준 기회인가!
백근식은 복수의 쾌감에 벌써부터 마음을 다잡을수가 없었다. 자기를 파멸시키려고 하던자를 오히려 자기가 죽일수 있다는 기쁨때문이였다.
불현듯 그의 눈앞에는 5년전 일이 선히 떠올랐다.
서울축구단 《태백》의 재정감독이였던 백근식은 축구단의 운영자금을 잘라먹은 일로 하여 검찰에 기소되게 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흑막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백근식과 서울지방법원의 검사인 방치백사이의 유착관계로 인한것이였다.
그무렵 축구협회 회장 김정식이 차사고로 절명되였다. 김정식은 민족적인 감정이 강하여 친미세력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인물이였다. 축구선수들은 물론 수많은 축구애호가들의 존경을 받고있던 김정식의 죽음은 사회계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죽음은 순수한 차사고가 아니라 테로라는것이였다. 뜻밖에 북에서 온 한상수가 김정식의 죽음을 해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한상수에 의해 김정식이 승용차를 타고 창경원의 밤꽃구경을 가는 기회에 홍화문로타리에서 대형차가 옆으로 질주하며 밀어제낄 때 운전칸에 백근식이가 앉아있었다는것이 확인되였다. 한상수를 비롯한 축구선수들은 김정식테로사건을 해명할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한상수에 의하여 덜미를 잡힌 백근식은 상전의 지시로 대구형무소 간수로 피신했다. 몇달후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이 사건은 막을 내렸다. 백근식은 그후에도 서울에 나타나지 못하고 감옥안에서 숨어살다싶이 했다.
그러던 며칠전 백근식은 《법무부》차장으로 된 방치백으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방치백은 그를 곧 자기 방으로 불렀다.
《차장님, 그간 귀체만강하셨습니까?》
백근식은 차장의 방에 들어서자 그만 감격이 북받쳐 허리를 꺾어 인사를 했다. 자기를 잊지 않고 찾아준 고마움때문이였다.
《오래간만이요. 그새 잘 있었소?》
방치백은 숱진 눈섭을 내려뜨리고 백근식을 바라보며 동정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차장님께서 어느때든지 저를 잊지 않고 부르실줄 믿었댔습니다.》
백근식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문지르며 물먹은 소리를 했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지 않았나. 그동안 형무소에서 뭘 했는가?》
《간수노릇을 했습니다.》
《그런 보잘것 없는 말직에 있었단 말이지. 자네의 수완이 아깝네.》
《그렇다고 해서 뭐 갑자기…》
《하긴 그래. 대번에 장관자리를 비워두었다가 자네한테 줄수야 없지. 어때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겠나?》
백근식은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두 차장님의 지시대루… 차장님이 보살펴주고 이끌어주셔서… 그렇게 되면 더 바랄게 없습니다.》
백근식은 머리를 조아렸다.
《허허… 자넨 역시 도의를 알거든. 인간이 은혜를 입을 때는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처지가 펴이면 그것을 아는 사람은 쉽지 않아. 나는 도리를 아는 사람을 첫째루 놓네.》
《그점만은 믿어주십시오.》
《좋아. 그럼 자넨 이제부터 대구형무소 간수부장일세.》
《간수부장이요?》
백근식은 고개를 쳐들고 의아쩍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왜, 싫은가?》
《아니 그런게 아니라…》
백근식은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는 감옥이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기껏하여 형무소소장도 아닌 간수부장을 하란말인가.
《내려가서 정치범들을 전향시키는데 성과를 올리게. 주리를 틀든 사지를 찢어놓든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을 전향시켜 자유세계의 국민으로 만들도록 하게.》
방치백은 또박또박 못을 박아 말하였다. 그럴 때는 벌써 벗어날수 없는 올가미에 든다는것을 백근식은 잘 알고있었다. 백근식은 온몸이 긴장되고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차장님, 차장님의 분부라면 무조건 하겠습니다.》
《좋아,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구만. 역시 자네는 나의 믿음직한 딸레이랑(프랑스의 외교관)이야. 내 말은 단순히 법무부 차장의 말이 아니라 대통령, 아니 미국사람들의 뜻이라는걸 잊지 말아주게.》
《명심하겠습니다.》
백근식은 어떤 의미인지도 생각할새없이 머리만 조아렸다.
《그럼…》 방치백은 약간 어조를 낮추었다.
《정치범들의 전향공작에서 성과를 올리고 서울에 와서 나와 함께 일하세. 서울고등법원에 자네가 일할 자리는 얼마든지 있네.》
방치백은 미소를 지으며 백근식의 간지러운데를 긁어주었다.
《그렇게만 믿어주신다면 제 멸사봉공하겠습니다.》
백근식은 눈물이 글썽하여 방치백을 쳐다보며 열렬히 부르짖었다.
《허허허… 알겠네.》
방치백은 사뭇 만족한듯 껄껄 소리내여 웃고나서 지나가는 소리로 이제 며칠후에 자네의 구면친구인 한상수를 보낼테니 그자를 전향시켜야 한다고 한마디 던졌다.
《누구라구요?》
백근식은 처음에 무슨 소린가 하여 눈이 떼꾼해서 되물었다.
《벌써 자네의 원쑤를 잊었나? 한상수는 전쟁때 인민군대에 나갔다가 최근에 다시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자의 처가 우리를 도와주었소.》
《그 옥야라는 녀자가 말입니까?!》
백근식은 급기야 모든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네. 그자를 즉시 체포해서 재판을 했으니 곧 대구형무소에 처넣겠네. 이젠 자네 책임일세.》
방치백은 그루를 박았다.
이러한 연고로 하여 백근식은 대구형무소 간수부장으로 된것이였다.
형무소소장은 《법무부》에서 직접 점찍어 간수부장으로 내려보낸 백근식을 소홀히 대하지 못했다. 형무소 소장의 말에 의하면 벌써 한상수라는 수인이 도착했다는것이였다.
백근식은 형무소에 내려오자 바람으로 정치범들이 들어있는 특별사동을 돌아보고나서 한상수의 담당간수를 불렀다. 한을손이였다.
《자네가 담당한 사동에 한상수라고있지?》
《예, 어제 입방했습니다. 1010번입니다.》
《그자의 동향이 어떤가?》
《현재는 죽은듯 조용합니다. 그 방에 사형수와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돼. 그자는 권투와 유술을 겸비한 유명한 축구선수야.》
《아, 그렇습니까?》
《당신같은건 그자의 발길질 한번에 배창이 터질수 있어.》
《아니 그자가 그렇게 세찹니까. 개자식, 그 어떤 항우장사도 이 뱀대가리한테 걸리면야 뼈도 못추리지요.》
한을손은 백근식이가 자기를 업수히 여기는것 같아서 이를 갈며 뇌까렸다.
《물론.》 백근식은 몸을 뒤로 젖혀앉으며 잠시 말을 끊었다.
《아무리 날고뛰는자라 해도 그자는 수인에 지나지 않아. 한칼에 베여죽일수도 있고 종신불구자로 만들수도 있지. 그런건 간단해. 지금 우리 <한국>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어. 우방국들도 우리를 비난하거든. 요는 뭐냐? 우리를 지지하게 하는거야. 그래서 <빨갱이>들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자는거야.》
《예. 예. 이제야 그 높으신 뜻을 알겠습니다.》
한을손이 다시 머리를 조아린다.
《북의 <빨갱이>세력과의 투쟁!…》
백근식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앞을 왔다갔다하며 구술을 하듯 엮어댔다.
《이것은 간단치 않아. 사생결단의 정신을 가지고 정치범들과 싸워야 해. 그렇게 할수 있는가?》
《예. 각오가 되여있습니다.》
한을손은 또다시 몸을 힘있게 펴며 소리쳤다. 불현듯 백근식의 눈앞에는 서울대법원의 으리으리한 쏘파에 틀고 앉아있는 《법무부》방차장의 눈길이 날카롭게 번쩍했다. 가슴이 섬찍했다.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면 그자는 자기를 짓밟아 버릴것이고 부산항 하역장이나 청량리 하수도관을 뒤지게 할것이다. 처자들은 일조에 거지가 될것이고 자기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게 될것이다. 나중에는 남산송림에 목을 매고 자살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정치, 이것은 네가 사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도박이다. 그것은 차장이나 내나 같다.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정치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짓밟히우고 쓰러박히고 죽어야 한다. 백근식은 이 순간 자기가 살륙전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어느 순간이든지 암흑의 나라에 처박혀 속절없이 썩어지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력사에는 제편끼리 출세와 공명과 책임회피를 위하여 피를 물고 싸운 실례가 얼마나 많은가.
장관은 차장에게, 차장은 과장에게, 과장은 하급공무원들에게 넘겨씌워 목을 따는것이 오늘의 남쪽현실이다.
그래서 그는 한을손에게 권력의 쾌감에 심취되여 일장 훈시를 하다가 문득 말을 끊은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다시 생각했다. 래일을 생각한다는것,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자의 인생관이다. 오늘을 즐기라. 오늘의 권력을 마음껏 휘둘러 보잘것없는 수감자들이 무릎을 꿇는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라. 내 권력의 보호자인 《한국》의 정치체제가 있는한 나는 마음껏 권력을 향유할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백근식은 자기가 별로 의젓해진듯 해서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백근식은 제가 무슨 《법무장관》이나 된듯 너그러워져서 한을손의 어깨우에 손을 얹었다.
《한간수, 그러니 자네는 이제부터 자기 직무에 더 분발해야 해. 알겠나?》
《알겠습니다. 부장님!》
한을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은 형무소에서 잡범간수노릇을 한 백근식을 괴여올리는것이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주인을 쳐다보는 충견같은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수단과 방법을 다해…》 백근식이 재삼 오금을 박았다.
《정치범들의 의지를 꺾고 전향시키는것이 상부의 일관한 전략이다.》
《부장님, 제 목숨을 다해 부장님을 협력하겠습니다.》
한을손은 부동자세로 부르짖었다.
한을손을 내보낸 백근식은 지나온 나날을 더듬으며 감회에 잠겼다.
… 백근식은 부산일대의 어촌들에 수십척의 배를 가진 선주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어느 사립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백근식은 학업에 전심하지 않고 아버지가 보내주는 돈을 방탕한 생활에 탕진해버리군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
백근식은 할수없이 대학을 중퇴하고 부산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집에 돌아와 허송생활을 하며 부산일대에서 소문난 깡패들과 휩쓸려 돌아갔다. 어느덧 그는 그들의 모사로 되였다. 대부호의 아들, 동경대학간판, 뛰여난 권모술수, 용의주도한 기질,이것이 깡패들의 인기를 끌었던것이다.
그무렵에 서울의 깽들로부터 《만철회사》부총재의 첩인 미노꼬라는 묘령의 녀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부산땅에 들어서는데 그 녀자의 왼쪽 세번째손가락에 다섯카라트짜리의 다야몬드반지가 끼워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였다.
백근식은 그 반지를 탈취하려고 결심했다. 그러자면 그 녀자의 신변을 호위하기 위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두명의 경관을 처리해야 했다.
어떻게 할것인가?…
그러던중 그 녀자가 오랜 려로의 피곤을 풀기 위해 부산에서 며칠동안 휴식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간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절호의 기회였다. 백근식은 쾌재를 불렀다. 허영심과 호화로운 생활에 습관된 녀자, 남편을 잃은 젊은 녀인의 슬픔, 20대 미모의 녀성들이 남자들에 대하여 품고있는 애정에 대한 갈구! 이것을 리용해야 한다.
《다 듣거라. 중국 단동깽들한테서 산 이 정보를 일본깽들에게 팔아먹는다는건 조선깽의 수치다. 이제부터 내 혼자서 그 녀자의 손가락에서 다야몬드반지를 뽑을테다.》
백근식은 호기있게 소리쳤다. 깽들은 눈이 떼꾼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빈틈없이 준비를 갖추고 혼자서 그 녀자가 들어있는 부산《해운호텔》로 들어갔다. 사각모에 제국대학생복차림인 백근식은 어느모로 보나 혈기왕성한 미남자였다. 그의 출현은 인차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언제나 미노꼬가 식사를 할 때마다 맞은편 식탁에 앉아 도수낮은 샴팡을 천천히 마시군 했다. 대학생의 얼굴에는 헤아릴수 없는 고뇌와 슬픔이 어려있었다. 처음 미노꼬는 그 대학생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나 식사때마다 슬픔에 잠겨있는 그를 보자 부지불식간에 녀성본능의 그 어떤 동정비슷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싹트게 되였다.
어느날 식당안으로 들어온 대학생은 그 녀자가 있는 식탁으로 다가오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 례의를 표시한 후 빈자리를 보며 여기에 앉아도 일없겠는가고 물었다.
미노꼬는 대학생을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이렇게 그들사이는 이어졌다. 대학생은 미노꼬와 식사를 하면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에 대하여 말했다. 일본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잃고 슬픔에 못이겨 서울로 가다가 부산경치가 하도 아름다와 마음의 안정이라도 할가 하여 잠시 머물렀다는것이다. 어쩌문 자기의 처지와 비슷할가, 미노꼬는 대학생을 동정하였다. 녀성의 젊은 남자에 대한 동정, 그것은 사랑의 최초의 감정의 하나다.
미노꼬는 호위경관들이 곁에 붙어있는것이 시끄러웠다. 그래서 경관들을 내보냈다. 일단 이성사이에 련모의 감정이 싹트면 그것은 벼겨가 타듯이 서서히 보이지 않게 급속도로 타번지게 되는것이다. 가슴속에 그런 사랑의 감정이 타번지기 시작한 어느날 대학생은 그 녀자의 손가락에 낀 다야몬드반지를 들여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기도 애인에게 이런 반지를 사주었는데 그를 안장할 때 저세상에 가서도 자기를 잊지 말라고 그대로 보내주었다고 했다.
미노꼬는 그 말에 목이 메였다. 이런 사나이, 이런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대학생은 미노꼬에게 그 반지를 자기에게 팔아줄수 없는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지를 보며 저세상사람이 된 애인을 추억하겠노라고 했다. 녀자는 거절했다. 대학생의 심정은 리해되지만 자기 역시 이 반지를 보며 남편을 추억하겠노라고.
대학생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렇게 되자 마음이 여린 그 녀자는 동요하게 되였다. 대학생은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더욱 간절히 요구했다. 돈을 요구대로 주겠으니 제발 팔아달라고, 하느님이 은총을 베풀듯이 도와달라고 별 감언리설을 다했다.
《그럼 드리겠어요.》
미노꼬는 할수없이 승낙하였다.
《고맙습니다. 본값의 열배를 드리겠습니다.》
《아유! 열배씩이나!…》
미노꼬는 그 수자에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그날 저녁 대학생은 지페를 넣은 트렁크를 들고 그 녀자의 침실로 찾아갔다. 대학생은 트렁크채로 그녀자에게 넘겨주었다.
미노꼬는 트렁크안에 가득 들어있는 지페뭉치를 대충 꺼내본 다음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아주었다.
대학생은 반지를 품에 소중히 간직하고 유유히 그 녀자의 방을 나섰다. 한개의 반지를 팔아 거액의 자금을 손에 넣게 된 미노꼬는 흥분하여 대학생을 바래주기 위해 방안에서 나왔다. 그 순간 아래방에 숨어있던 그의 졸개들이 미닫이문을 열고 그 트렁크를 감쪽같이 훔쳐냈다. 대학생을 바래주고 방으로 들어온 미노꼬는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돈이 든 트렁크가 없어진것이였다. 경관들이 달려왔으나 허사였다. 사실 트렁크안에 들어있던 지페도 절반은 가짜였었다. 그 가짜돈마저 도로 가져가고 다야몬드반지를 손에 넣은 백근식은 대번에 영웅처럼 떠받들리게 되였다.
성공에 도취한 백근식의 가슴속에서는 다른 야심이 꿈틀거리였다. 그는 지체없이 그 야심을 실현하는데로 나아갔다. 대학생이 호텔에 다시 나타났을 때 미노꼬는 중병을 앓고있었다. 대학생은 무슨 병인가고 물었다. 그녀자는 돈을 잃은 사연을 말했다. 대학생은 그 녀자의 불행을 진심으로 동정한 나머지 자기의 품안에 고이 간직했던 반지를 꺼내여 그에게 넘겨주었다. 처음에 그 녀자는 믿어지지 않는듯 그것을 선뜻 받을념을 못했다. 허나 대학생이 자기는 녀자의 불행을 보고 참지 못한다고, 우리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등가는 부자이니 아무 생각말고 받으라고 했다. 다만 자기가 바라는것은 이 반지를 부인이 다시 끼고 여기 내지에도 불행한 한 청년이 있었다는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했다.
대학생의 은근하고도 진정에 넘친 그 목소리는 그 녀자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그날밤 바다가를 거닐며 서로의 불우한 신세를 한탄했고 대학생은 그 녀자를 위로하며 끌어안았다.
그 녀자는 대학생의 얼굴을 눈물로 매닥질을 하며 입을 맞추고 자기의 몸을 맡겼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바다가에서, 숲속에서, 침실에서 마음껏 향락을 누리였다. 처음에는 아무리 신비하고 아름다운 녀인이라해도 육체를 점령해버리면 인차 싫증을 느끼는 백근식이였다. 달밝은 어느날 밤 해운대의 외진 으슥한 바다가에서 미노꼬의 육체를 마음껏 짓이긴 백근식은 그 녀자의 목을 눌러죽이고 반지를 빼앗은 다음 시체를 바다물속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자취를 감추었던 백근식은 광복이 되자 다시 고향도시에 나타났다.
부산항구에는 왜놈들이 저희 나라로 실어가기 위해 가져다놓은 갖가지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직 나라가 서지 않은 때여서 주인이 없는 그 물건은 벼락맞은 소고기처럼 되여 장사치들과 불량배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어 창고의 물건을 훔쳐가기 시작하였다. 백근식도 졸개들을 휘동하여 누구한테 질세라 자동차로 창고의 쌀을 실어내는데 열을 올리였다.
이무렵 부산의 좌익세력들은 자위대를 조직하고 나라의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창고를 지키였다. 그들은 팔에 《자위대》완장을 끼고 말을 타고 일본놈들한테서 빼앗은 칼을 휘두르며 넓은 항구를 순찰하면서 창고를 털어내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징벌하였다. 백근식도 그때 현장에서 《자위대》의 칼에 어깨를 맞고 쓰러졌었다.
당장 목에 칼을 받아야 할 위기일발의 순간 다행히 자기 졸개의 삼촌이 자위대장이여서 죽음을 면했다. 지금도 이따금 부산항구에서 시퍼런 칼로 자기의 목을 치는 꿈을 꿀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여나군 한다. 그때로부터 백근식의 가슴속에는 좌익세력에 대한 뿌리깊은 원한이 사무쳤고 복수의 일념이 불타오르군 했다. 한상수를 놓고보더라도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원쑤였다. 한상수때문에 서울에서 쫓겨났으며 5년간을 대구땅에 구겨박혀 잡범간수로 근근히 살았다.
한상수, 어디보자. 나는 기어이 너를 굴복시키고 승진할것이다.
백근식의 가슴속에서는 복수의 희열이 끓어올랐다.
3
한상수가 감옥에 들어온지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침이였다. 갑자기 감옥안의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얼굴에 긴장한 표정을 담은 박우갑은 좌우 감방에 부지런히 통방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다. 그의 낯빛은 점점 컴컴해졌다. 정창식이한테서 《타전법》을 배우던 한상수는 무슨 영문인가 하여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새로 임명된 간수부장이란 놈이 서울에 올라갔다 와서 대대적인 전향선풍을 일으키려고 한다오.》
《또 물고문이랑 하며 두들겨 패겠지요.》
정창식은 심상히 말하며 한상수에게 어서 감방바닥에다가 타전을 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잡도리를 잘해야 하오. 한동무는 그런 일을 당해본적이 있소?》
박우갑은 심중한 표정을 짓고 한상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놈들은 나를 체포하자마자 전향을 강요하더군요.》
한상수는 정보부 수사관놈이 전향하면 살려주겠다고 지껄이다가 굳이 뻗대자 지독한 고문을 들이대던 일이 생각나서 이렇게 대답했다.
《하긴 그건 놈들의 상투적수법이니까.》
박우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데 벌써 간수들이 옆방의 철문을 따고 김성교를 끌어내갔다. 그리고 또 몇사람을 차례로 데려내갔다. 점심때림박에 소지가 척 늘어진 김성교를 업고 박우갑의 감방앞을 지나갔다. 뒤이어 감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고문을 한 모양이다.
《개같은 놈들!》
박우갑은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어딘가를 쏘아보며 부르짖었다. 한상수도 가슴이 저려들었다. 그가 잘못되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러웠다. 박우갑은 부지런히 옆방에다 저가락으로 통방을 했다.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였다. 박우갑은 그래도 쉬지 않고 계속 통방을 날렸다. 잠시후에 그쪽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박우갑은 벽에 귀를 도사리고 듣더니 목이 메이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조를 지켰으니 걱정말라고 하오.》
그의 두눈굽에는 끝내 맑은 이슬이 고였다.
한상수도 가슴이 뜨거워져 두눈을 슴벅이며 뙤창쪽으로 고개를 돌리였다. 손바닥만하게 보이는 하늘은 푸른 손수건을 걸어놓은듯 했다. 어디로 가는지 철새 몇마리가 날아가는것이 보였다.
《놈들은 우리 정치범들을 아예 죽이자고 달려드는군요.》
정창식이가 격분에 넘쳐 중얼거리였다.
《박동지, 전 살아서 이 감옥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있습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한상수는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박우갑은 몸을 벽에 기대며 바로 앉았다.
《그런 소린 하지 마오. 우리가 죽자고 혁명을 하는가. 조국을 통일시킨 다음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더 행복하게 살자고 생명을 내걸며 싸우는것이지.》
그 충고가 한상수의 가슴을 찔렀다.
밤이 왔다. 옆방에서 김성교의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박우갑의 입에서도 고통을 씹어삼키는 소리가 새여나왔다. 놈들은 김성교를 독방에 두고 말려죽일 잡도리인지 다른 수인들을 넣지 않았다.
복도끝에서 구두발소리가 뚜벅뚜벅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직일간수가 감방을 돌아보는 중이였다. 그 구두발소리는 한상수가 있는 감방앞에서 멎었다.
그들은 감방벽에 기대여 눈을 감고 자는척했다. 구두발소리가 옮겨진다.
한상수는 희미한 빛이 흘러드는 뙤창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눈앞에 박영진을 따라 서울에 와서 있었던 일이 삼삼히 떠올랐다.
… 한상수가 서울에 도착한 그날 반도호텔에서는 서울축구단《태백》이 주최한 환영파티가 있었다.
한상수와 박영진은 《태백》선수들의 열광적인 박수속에 주탁에 앉은 축구협회 회장 김정식앞으로 안내되였다. 철색의 얼굴에 력기선수처럼 어깨가 딱 바그러진 40대의 사나이였다.
《오느라고 수고했소.》
김정식은 무척 반가와하며 한상수의 손을 잡고 한참이나 흔들었다.
《회장님께 인사를 드립니다.》
한상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맙소. 이렇게 와주어서 정말 고맙소.》
김정식은 진심으로 사례하며 한상수의 팔을 잡아 자기 옆자리에 앉히였다. 그리고는 좌중에 손을 들어보였다. 박수가 멎고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김정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둘러보며 사뭇 감개무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군들, 나는 이 자리에 모인 <남한>의 축구선수들의 이름으로 지난날 여러 경기들에서 명성을 떨친 평양의 축구선수인 한상수군의 서울도착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또다시 장내가 떠나갈듯 박수가 터졌다. 김정식은 남조선체육계에서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원래 황해도 신천군에 있는 목사의 아들로서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의 축구주장을 한바있는 사람이다. 보성전문시절에 벌써 일본국가팀의 한성원으로서 베를린올림픽경기에 참가하여 도이췰란드꼴문에 한꼴을 넣어 마라손선수 손기정과 함께 조선사람으로서의 명성을 떨치였다. 성격이 칼날같고 정의감이 강한 김정식은 뽈을 차거나 훈련을 할 때에는 선수들을 무섭게 다루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대범하고 너그럽기까지 하여 선수들의 존경을 받고있었다.
《제군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한상수군의 서울도착을 환영하여 이 첫잔을 들것을 제의합니다.》
《축배!》
선수들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일제히 소리쳤다. 얼굴에 미소를 담은 김정식은 한상수의 잔에 자기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한상수는 고개를 숙여 회장에게 사의를 표한 다음 차례로 동료들의 술잔에 자기의 잔을 가져다댔다.
방안에서는 술잔부딪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축배》, 《건배》하는 웨침이 울렸다. 축음기에서 《아리랑》선률이 은근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접대부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날라오고 빈잔에 술을 부어주기도 했다. 김정식은 한상수의 빈잔에 술을 부으며 다정히 말을 건넸다.
《상수군, 려로에 수고가 많았겠는데 며칠동안 푹 쉬게. 이남땅에 이 김정식이 있는 이상 누구도 자네를 다치지 못해.》
《회장님, 고맙습니다.》
한상수도 존경심이 들어 회장의 빈잔에 술을 부었다.
《좋아, 나도 오늘은 자네를 만난김에 좀 마시겠네.》
술이 몇잔 들어가자 얼굴색이 구리빛이 된 김정식은 사뭇 다감해졌다. 그는 한상수가 부어준 술을 단숨에 비우고나서 음악을 끄라고 손짓했다. 축음기소리가 멎었다.
《더 취하기전에 제군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소.》
김정식은 앉은 자리에서 위엄있게 입을 열었다.
장내는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내가 제군들에게 말하고자 하는것은 우리와 대전하게 될 미국팀에 대하여 생각을 바로 가지라는것이요. 말하자면 미국은 축구력사가 짧고 국제경기에서 이름이 없다고 얕잡아보아서도 안되며 큰 나라이라고 무서워할 필요도 없소. 물론 세계축구계에서 미국은 명함도 없는 나라이지만 이미 1924년빠리올림픽경기때 미국팀과 우루과이팀이 대양을 건너 유럽대륙으로 왔으며 그에 앞서 1904년에 열린 올림픽경기대회에서 미국팀은 2위를 한 전적도 있소. 결코 무시할수 없는 팀이요. 미국팀에 대해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지금 세계대전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기회에 제4차 세계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할 야심을 가지고 여러 나라들에 나가있던 선수들로 구성하여 원정경기를 하려는거요. 그러면 어째서 미국이 첫 원정경기를 우리 <남한>에서 하려고 하는가?》
김정식의 말에 선수들은 술이 말끔히 깨여 귀를 기울였다. 한상수도 술잔을 한손으로 그러쥔채 긴장한 표정을 짓고 회장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미국사람들은…》 김정식은 거치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남한>축구가 보잘것 없지만 저들의 경기훈련대상으로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요.》
《우리가 훈련대상이라구요?》
누군가 분개해서 소리쳤다.
《그렇소. 유감스럽지만 우리 <남한>의 축구는 세계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이름이 없소. 그래서 나는 평양의 <비수>를 초청했소. 민족의 피는 물보다 진한것이요. 한상수군은 나의 초청을 받고 사선을 헤쳐왔소.》
장내에 또다시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한상수를 쳐다보는 김정식의 눈굽에 불현듯 물기가 어리였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제군들,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팀을 이겨야 하오. 조선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그 거만한 코대를 경기장에서 꺾어놓아야 하오. 나라가 작다고 해서 미국한테 눌리고있지만 체육에서야 왜 눌리겠는가. 우리는 결단코 민족앞에 책임지는 독한 마음을 품고 전장에 나선 병사처럼 싸워야 하오. 제군들, 축구는 전쟁과 같소. 우리는 이번 경기에서 민족의 슬기와 용맹을 보여주어야 하오. 알겠는가?》
김정식은 불이 펄펄이는 눈길로 선수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선수들은 일제히 목소리를 합쳐 우뢰처럼 대답했다.
《좋아, 그럼 술을 마음껏 들라구.》
회장이 거나해서 큰소리로 말하자 장내는 다시 흥성거리였다. 음악이 울리고 접대부들이 총총히 뛰여다녔다.
안면이 있는 친구들이 술잔을 들고 한상수에게로 다가왔다.
《<비수>, 난 자네가 꼭 올줄 믿었네. 고마우이.》
키가 크고 몸이 우람한 방어수가 한잔술에 마음이 격해져서 두눈을 슴벅이였다.
《그러게 회장님이 민족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았나. 만약 뽀이코트하면 <비수>가 아니지.》
다른 친구가 방어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벙글거렸다.
《정말 자네가 온건 잘했네. 우린 벌써 남북이 하나가 되여 경기에 참가하게 되니 이게 통일의 서막이 아니고 뭐겠나.》
《뭐니뭐니 해두 나라가 분렬되니 축구도 큰 손해를 본단 말일세.》
《여, 계집들처럼 무슨 사설이 그리 많아. 통일은 정치가들이나 론하라고 하고 우린 술이나 마시자구.》
재정감독 백근식이 술잔을 들고 한상수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도 술을 퍼그나 마신듯 낯색이 분홍빛이 되였다.
《<비수> 어때, 자신있는가?》
《이제부터 우리는 무적필승입니다.》
한상수도 술을 마신지라 허세를 부렸다.
《허허… 남아다운 대답이군.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재정감독을 찾아오게. 객지생활에서 불편이 많을걸세.》
《고맙습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찧자구.》 백근식은 술잔을 들었다. 한상수도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재정감독의 술잔밑굽에 부딪친 다음 함께 마시였다.
이때 박영진이 술잔을 든채 거나한 소리를 질렀다.
《제군들, 우리 노래를 부릅시다. <태백의 출전가>》
그리고는 제가 먼저 류창한 목소리로 선창을 뗐다.
출전이다 출전이다
태백선수 나아간다
용감하고 씩씩하게
무궁조선 빛내이자
…
흥분된 선수들은 일제히 일어나 거쉰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술좌석이 아니라 경기장으로 나가는듯 경건하고 정중하게 불렀다.
어떤 선수들은 격정이 북받쳐서인지 눈물까지 번쩍이였다. 한상수는 또다시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미국팀은 경기 5일전에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김정식회장과 《태백》축구단 단장이 그들을 맞이하려고 비행장에 나갔다. 그러나 미국선수들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국의 관리와 미국대사관 성원들의 안내를 받아 호텔로 들어가버렸다. 렬등감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김정식회장은 어디 경기장에서 보자고 이를 갈았다.
당국에서는 다음날부터 미국팀의 훈련을 보장하기 위해 서울경기장을 내주라고 지시했다.
《뭐라구? 그렇게 못하오.》
선수들과 함께 전술토의를 하던 김정식회장은 전화를 걸어오는 당국의 외교관계자에게 단마디로 거절해버렸다.
《회장, 고집부리면 재미없소. <한>미친선에 금이 가면 당신이 책임지겠소?》
로골적인 위협이다.
《걷어치우시오. 그 사람들이 우릴 보고 빤쯔를 벗어달라는 격인데 주고싶으면 당신이나 벗어주구려.》
성이 독같이 난 김정식회장은 전화기를 집어던졌다.
《그들이 뭐랍니까?》
곁에 있던 박영진이 물었다.
《훈련하겠다고 경기장을 내놓으라는거요.》
김정식회장은 입이 쓰거운듯 이렇게 내뱉았다. 그야말로 파렴치한 놈들이였다. 미국놈들은 축구선수들까지 오만무례하게 주인행세를 하려 든다. 더우기 너절한것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꼬리를 치는 당국의 비굴한 행동이다.
《회장님, 체육에서까지 미국놈한테 수모를 받아야 한단 말입니까?》
한상수는 감때사나운 눈길로 회장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회장은 한숨을 쉬였다.
《어찌겠습니까, 회장님 .그들이 손님인것만큼 경기장을 내줍시다.》
곁에 있던 박영진이 어쩔수 없다는듯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미국놈들한테 끝내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자는건가?》
한상수는 박영진을 사납게 쏘아보며 격해서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됐네. 그만들 두라구.》
회장은 더 버티지 못하고 《태백》선수들을 고려대학운동장에서 훈련시키도록 했다.
드디여 미국팀과의 첫 경기의 날이 왔다.
4
1949년 5월 10일,
바람 한점 없는 맑은 날이였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물밀듯이 경기장으로 흘러들었다. 그야말로 조선의 축구명절과도 같은 광경이였다. 서울경기장에서 미국팀과의 축구경기가 진행된다는 소식을 신문과 소리방송으로 전달받은 남조선 전역의 체육애호가들은 물론 중고등체육교원들까지 달려왔다. 7만능력의 경기장에 15만장의 입장권이 팔렸다. 경기장은 물론 입구와 복도 지어 다니는 길에까지 관람자들로 꽉 찼다. 밖에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경기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경평축구대항전》때처럼 경기장주변의 뽀뿌라나무 꼭대기와 건물지붕우에 올라갔고 나머지는 고성기에서 울려나오는 경기소식을 듣기 위해 아예 밖에 자리를 잡고앉았다.
한상수는 경기시작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관람석에는 립추의 여지없이 사람들로 꽉 찼다. 저 사람들속에 옥야가 있을것이다. 옥야는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인 아버지와 함께 주석단근방의 좋은 자리에 앉게 된다고 했다. 그동안 그 녀자는 퇴근시간이 되면 부지런히 경기장으로 찾아와 한상수의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군 했다.
그러다가 훈련이 끝나면 그와 함께 다방으로 가기도 했고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사랑의 열에 뜬 옥야의 시선에서 한상수는 하루도 제외되지 않았다.
이윽고 아침 10시, 두 팀의 선수들이 뽈을 한손에 든 오스트랄리아주심과 보조심판원을 앞세우고 경기장으로 입장하기 시작하였다. 관람석에서 우뢰같은 박수가 울렸다. 《태백》선수들은 아래우 흰색운동복을 입었고 미국선수들은 푸른색운동복을 입었다. 뒤이어 나어린 녀학생들이 달려나와 선수들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태백》선수들은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꽃다발을 흔들어보이며 경기장둘레를 한바퀴 뛰여돌았다. 사람들은 선수들에게 열광적인 고무와 격려의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상수는 군중속에서 옥야를 찾을 듯 꽃다발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관중속에서 《아니, 저게 <비수>가 아니요? <경평축구대항전>때 왔던…》하는 소리가 울렸다.
《옳아요. <비수>요. 평양에서 <비수>가 왔어요!》
사람들이 격동에 넘쳐 환성을 올렸다.
《<비수>다!… <비수>가 평양에서 왔다!》
그 소리는 전류처럼 15만관중들의 머리우로 날아갔다. 한상수가 자기들의 앞에 나타날 때마다 박수를 치며 《비수》, 《비수》하고 환호를 터쳤다. 경기는 미국팀의 먼저차기로 시작되였다. 그들은 여유작작하게 경기를 운영하면서 자기네끼리 련락하다가 불의에 공격할 기회를 엿보군 했다. 상대방을 깔보는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러나 《태백》선수들은 처음부터 주도권을 쥐고 빠른 속도와 정확한 련락으로 드센 공격을 들이댔다.
《왼쪽날개》인 박영진은 그야말로 팔방돌이로 기동하면서 상대편 선수들을 재치있게 빼돌리며 문전역습을 조직하군 했다.
한상수는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은페되여있으면서 우리 선수들의 득점기회를 마련하여주군 했다. 《태백》선수들은 미국선수들보다 키가 작고 체격이 약했지만 빠르고 이악했다.
두 선수가 부딪쳐 함께 딩굴어도 먼저 일어나는것이 《태백》선수였다. 경기는 점점 백열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날개들이 재치있게 공을 빼앗아 구석으로 몰고가다가 문전쪽으로 슬쩍 뽈을 띄워주면 어느새 《태백》의 공격수들이 나타나 머리받기나 강한 차넣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멋있는 득점기회가 조성되군 했다.
그것은 경쾌하고 박력있는 음악선률에 발을 맞추어 뽈을 차는듯한것이였다.
위기는 미국팀 문전에서 계속 조성되군 했다. 그때마다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보던 관람자들은 미친듯 환성을 올리군 했다. 미국선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면을 벗었다. 돌아가면서 《태백》선수들을 까며 경기를 란폭하게 진행했다. 주심도 로골적으로 편심을 하기 시작했다. 몇번이나 미국팀문전에서 득점기회가 조성되였지만 그때마다 주심은 《태백》팀의 반칙을 선언했다. 관중들속에서 격분에 넘친 고함소리가 터졌다. 끝내 일진일퇴의 아슬아슬한 정황이 조성되다가 전반전시간이 되였다.
중간휴식시간에 《태백》선수들은 김정식회장의 주위에 모여들어 울분을 터뜨렸다.
《회장님, 시시한 경기를 뽀이코트합시다.》
주장이 얼굴이 시뻘겋게 되여 부르짖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신사의 나라라고 하더니 아주 더러운 족속의 나라요.》
또 다른 선수가 분개하여 소리쳤다.
《문제는 주심이요. 그 자식을 축출합시다.》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터치였으나 김정식은 입에 빗장을 지른듯 꽉 다물고 어느 한곳을 응시하고있었다. 두눈에는 무서운 적의가 번뜩이였다.
이때 주석단에서 회장을 찾는다는 련락이 왔다.
김정식은 주석단에 갔다가 얼굴이 컴컴해서 돌아왔다.
《주석단에서 미국과의 친선을 고려하여 경기를 점잖게 하라는 지시요.》
김정식은 걸상우에 주저앉으며 쓰거운듯 내뱉았다.
《뭐요? 그러니까 우리보고 양보하라는 소린가.》
《제기랄, 너절하다.》
선수들이 성이 나서 땅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조용하라!》
김정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이제부터 내 말을 명심하라. 체육은 전쟁과 같다고 했다. 사생결단으로 싸워이겨야 한다. <비수>!》
김정식은 불이 펄펄 이는 눈으로 한상수를 찾았다.
《옛!》
한상수가 회장앞에 나섰다. 김정식은 한상수의 어깨를 꽉 잡고 어딘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하오. <비수>!》
《알겠습니다.》
한상수는 회장의 목소리에서 그 어떤 결사의 시각이 닥쳐왔음을 절박하게 느끼였다. 지금이야말로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조선의 뽈을 차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드디여 후반전경기시간이 되였다. 경기는 시작부터 치렬했다. 지금껏 공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은페하고있다가 상대편이 주의를 돌리지 않는 기회에 불의에 단독돌입하던 한상수는 후반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말그대로 비수처럼 펄펄 날았다. 그것은 관중들을 격정에로 몰아넣는 장쾌한 동작이였다.
《잘한다. <비수>!》
관중들속에서 경탄의 웨침소리가 울렸다. 그야말로 가슴이 후련한 드센 공격이였다. 미국선수들은 한상수의 공격을 막아보려고 필사적으로 발악하였다. 질풍같이 경기장을 휘몰아가는 한상수의 공격앞에서 미국선수들은 갈팡질팡하였다. 통쾌한것은 한상수가 찬 뽈을 막으려던 미국선수들이 그 자리에서 너부러지거나 비칠거리는것이였다. 사기가 충천한 《태백》선수들은 상대편이 정신을 차릴사이없이 공격속도를 더욱 높이였다. 한상수는 연방 오른쪽으로 공격의 화살을 집중하다가 상대편 방어수들이 그쪽으로 쏠리면 불의에 왼쪽날개인 박영진에게 넘겨주어 불의기습하는 유인전술을 쓰기도 하고 직접 약한 고리를 비수로 찌르듯 눈깜짝할 사이에 뚫고 들어가기도 했다.
《과시 대동강물을 먹은 이북선수가 다르군. 남북이 합치면 세계의 패권은 문제없네요.》
《아무렴. 통일만 되면야 무서울것이 없지요.》
관람석에 앉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주고받는 말이였다.
미국선수들은 한상수에게 몇사람씩 붙어 대인방어를 하며 결사적으로 그의 공격을 좌절시키려고 했다. 주심은 한상수를 어떻게 해서라도 퇴장시키려고 벌써 두번이나 경고딱지를 내흔들었다. 이제 한번 더 경고를 받으면 경기장에서 퇴장해야 한다. 후반전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미국팀은 시간을 끌어서 무승부가 되거나 11m벌차기를 하려는 속심이였다.
이때 결정적인 정황이 일어났다. 뽈을 잡은 한상수가 어느새 상대편 방어수들을 빼돌리고 꼴문앞으로 번개같이 몰아가고있었다.
《<비수>! 좋다! …》 손에 땀을 쥔 수만관중이 일시에 목청이 터지라고 고함을 질렀다. 한상수는 문전 11m지점에까지 돌입하자 멋진 오른발차기로 꼴문을 향해 드센 강타를 들이댔다. 순간 관중들은 자기를 잃고 《꼴잉이다!》하고 경기장이 떠나가게 함성을 질렀다. 동시에 뽈은 총알처럼 날아들어가 그물에 걸렸다. 경기장은 격정과 환희의 바다로 변했다. 그러나 주심은 긴 호각소리를 냈다. 공격위반이라는것이였다. 관중들은 사태를 알아차리자 분격하여 고함을 질러대며 심판을 쫓아내라고 아우성쳤다. 《태백》팀 주장이 주심에게 달려가 항의를 들이댔다. 그러나 주심은 막무가내로 도리질을 하며 억지를 부렸다.
한상수는 저도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주심을 때려눕히고싶었다. 미국놈에게 아부하는 저런 놈이 체육인이라니, 당장 경기를 걷어치우고 퇴장해버리고싶기도 했다. 과연 내가 이처럼 더럽게 경기를 하는 미국놈의 꼴문에 뽈을 넣어야 하겠는가. 체육의 고상한 정신과는 담을 쌓은 미국놈의 꼴문에 뽈을 넣는 그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경기는 다시 시작되였다. 또다시 미국문전에서 혼전이 벌어졌다. 미국측이 완강하게 방어를 했다. 저런식으로 경기를 하면 시간만 허비할뿐 득점을 할수가 없다.
《뽈을 뽑으라!》
경기장밖에서 속을 태우던 김정식회장이 안타까와 고함을 질렀다. 뽈은 중앙선으로 다시 나왔다. 상대편 선수들도 뽈을 따라 중간지대로 밀려나왔다. 이 찰나에 뽈을 잡은 한상수는 총알처럼 단독돌입을 했다. 뽈은 그의 발에 붙어돌아가며 미국팀 중간방어수, 최종방어수까지 빼돌리고 문전 3m앞에 이르렀다. 이것은 눈깜짝할사이에 벌어진 일이였다. 관중들속에서 《때리라!》하는 격양된 웨침이 일시에 터졌다. 그러나 한상수는 문지기까지 넘긴 다음에도 좀처럼 꼴문을 향해 뽈을 차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팀문지기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는데 한상수는 오히려 꼴문앞에서 뽈을 멈추었다.
《빨리 때리라!》
김정식회장이 또다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그의 귀전을 때렸다. 이 순간에 한상수는 피끗 관중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관중들은 어서 뽈을 차넣으라고 안타까와 발을 동동 굴렀다. 그의 얼굴에 그 어떤 숭엄한 표정이 비끼였다. 이제 텅 빈 꼴문에 조금만 다쳐도 뽈은 그물에 걸릴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한상수는 문선우에 뽈을 멈추어놓은채 그냥 서있었다. 《차라!》, 《때리라!》사방에서 초조한 웨침이 울렸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일격을 가하지 않고 뽈을 그 자리에 놓은채 돌아서 천천히 걸어나오는것이 아닌가! 정적! 정적!… 천길 물속같은 고요가 경기장에 깃들었다. 그처럼 용맹하게 활약하던 《비수》가 어찌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꼴잉을 포기하는 기상천외한 일을 저질렀는가. 관중들은 호흡을 정지하고 한상수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미국팀선수들도 넋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져있는데 관중석에서 드디여 우뢰같은 박수가 터져올랐다. 관중들이 한상수의 의도를 알아차린것이였다.
인간의 깨끗하고 건전한 도덕을 찾아볼수 없는 더러운 미국의 꼴문에 조선사람의 신성한 뽈을 넣지 않겠다는, 그 꼴문에 뽈을 넣는 그 자체가 수치라는 한상수의 도전을 통쾌하게 느낀것이였다. 그것은 현대체육문명을 떠들던 미국식체육의 썩고 병든 진면모를 온 세상에 고발한 행동이였으며 참신하고 깨끗한 조선사람들의 존엄있는 체육정신을 시위한것이였다.
이윽고 주심이 경기의 끝남을 선언하자 관람석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해일처럼 경기장안으로 쏟아져나왔다. 경기는 결국 무승부였으나 미국팀은 도덕적으로 만신창이 되여 패배의 쓴맛을 느끼면서 퇴장하였고 한상수는 영웅남아로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비수>! 장하다.》, 《<태백>선수 이겼다.》 관중들은 이렇게 웨치면서 한상수를 비롯한 《태백》선수들을 목마태우고 경기장을 돌았다. 그것은 하나의 반미시위와도 같은 격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며칠후에 있은 미국팀과의 두번째경기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커다란 상처를 남기였다. 서울경기장은 두번째 경기날에도 초만원을 이루었다. 첫 경기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남녘의 모든 지역에서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김정식회장은 당국의 체육관계자들, 미국대사관 요원들과 함께 주석단에 앉아서 름름하게 경기장으로 입장하고있는 《태백》선수들을 대견하게 내려다보고있었다. 그는 오늘의 승리도 의심치 않았다. 두 팀의 선수들이 경기장복판으로 들어가자 량쪽으로 갈라져 서로 마주섰다. 바로 이때였다. 주석단아래 자기네 선수들과 앉아있던 미국팀감독 웰톤이 급히 경기장 복판으로 달려가더니 주심한테 무슨 항의인가 하는듯 했다. 주심이 《태백》팀에 와서 한상수앞에 멎어섰다. 그러자 《태백》팀 선수들이 주심과 웰톤을 둘러쌌다. 미국팀쪽에서 뭐라고 웨쳐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기장안은 술렁거렸다. 주심이 한상수와 《태백》팀주장 그리고 웰톤감독을 앞세우고 주석단쪽으로 왔다. 김정식회장은 무슨 영문인가 하여 급히 경기장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요?》
김정식회장이 얼굴이 댕댕해서 누구에게라 없이 물었다.
《당신네 부정선수 있습니다.》
웰톤은 비교적 정확한 조선말로 항의했다.
《부정선수? 어느 선수가 부정선수란 말이요?》
《이 사람!》
웰톤은 손가락을 권총처럼 꼬나들고 한상수를 가리키며 뇌까렸다.
《<태백>선수가 아니라 평양선수란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미국팀은 이 선수를 퇴장시키기전에는 경기를 뽀이코트하겠습니다.》
《어째서 <태백>선수가 아니란말이요? 당신도 알다싶이 선수권대회나 다른 나라와 대전할 때는 그 어디에 가있건 소환해다가 자기 나라를 위해 출전시키는게 아니요. 그런데 뭐가 잘못됐단말이요?》
《그러니 평양에 있는 이 선수가 <태백>팀 선수란 말입니까?》
웰톤의 얄팍한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렇소. 당신네 선수 9번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에스빠냐<바로샤>구락부에 가있다가 이번에 데려온게 아니요. 그리고 또 7번선수도 그렇소. 그런식으로 말하면 당신네 미국팀에는 부정선수가 4명이나 있소.》
《천만에. 그들은 프로선수로서 미국민의 명예를 걸고 그 나라에 돈을 받고 가서 축구기술을 배워주고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미합중국 국민이란말이요. 그래 한상수씨가 <한국>민인가?》
《<한국>민?!…》
김정식회장은 달려나가다가 돌부리라도 걷어차고 멎어선듯 주춤했다. 예상치 못한 타격이였다. 그는 입에 자갈이라도 물린듯 한참동안 갑자르다가 짜내듯 말했다.
《하지만 한상수는 조선사람이요!》
《조선사람? 그러나 이 사람은 공산체제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네는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사는 <한국>민이고… 당장 퇴장시키시오.》
《…》
김정식의 쇠빛얼굴은 점점 꺼멓게 변해갔다.
《자유민주주의체제와 공산체제?…》
이윽고 김정식은 가늘게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통탄하듯 하늘을 우러러 《그러니 이 삼천리강토는 끝내 둘로 갈라졌단 말인가? 아, 아!…》하며 비통하게 얼굴을 이그러뜨렸다. 《태백》의 선수들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주석단에 앉아있던 체육관계자가 사태의 진상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달려내려왔다. 그리고는 웰톤한테 루루이 사죄했다. 김정식회장은 더 항변할수 없었다. 끝내 한상수는 퇴장당하고말았다. 생각할수록 억이 막혔다.
지금껏 한번도 다르게 생각해 본적이 없는 그것! 북에 있으나 남에 있으나 하나라는 생각, 하나의 민족이라는 그것이였다.
설사 미국놈들이 38선을 갈라놓았어도 한상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팍에 《태백》이라는 명찰판을 달고 떳떳이, 자랑높이 경기장을 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미국놈들은 이 땅에 기여들자마자 경기장에서까지 북과 남을 갈라놓고 뽈도 함께 차지 못하게 하고있지 않는가. 한상수는 나라가 분명히 둘로 되였다는 현실을 통절하게 느끼자 가슴이 터지는듯 했다. 불시에 가슴이 파도우에 실린 쪽배마냥 세차게 오르내리고 이마에 식은 땀이 번지면서 두눈에 차거운 분노가 피여올랐다. 그것은 이전에 볼수 없었던 그 어떤 무섭고 결사적인 표정이였다. 모든것이 미국놈때문이다. 바라지도 않은 미국놈들이 이 땅에 기여들어 나라를 두 토막으로 갈라놓았기때문이다. 결단코 미국놈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여 더럽혀진 이 치욕을 씻으리라!
한상수는 두주먹을 꽉 틀어잡고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며 자신의 통일의지를 굳게 가다듬었다.
그날 경기는 2대 0으로 미국팀이 이겼다.
5
다음날 밤에도 뙤창밖의 하늘에는 여전히 별이 떴다. 한상수는 낮보다 밤을 더 좋아했다. 밤에는 조용히 명상에 잠길수 있고 간수들의 성화를 덜 받을수 있었기때문이다. 함께 있는 박우갑은 여전히 옆방과 통방을 하고 정창식은 차입물속에 끼워 들여보낸 애인의 편지를 정신없이 들여다보고있었다. 한상수는 뙤창으로 보이는 별들을 하나 둘 세여보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별들중에 한쪽에 있는 조금 큰 별이 애처롭게 떨고있었다. 한상수는 그 별이 어머니같이 생각되였다. 박영진을 따라 38˚선을 넘을 때 잠간 다녀오리라 생각하고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서울로 왔던 그였다. 그런데 이제는 영원히 어머니를 만나뵙옵지 못하고 이 감옥에서 생을 마치게 될것 같았다. 일찌기 남편잃고 이 아들 하나를 기둥삼아 살아오신 어머니, 옥야를 데리고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려던 노릇이 그만 감옥에 갇힌 몸이 되였으니 자식은 죽을 때까지 효도는 커녕 부모의 애간장을 말리운다는것이 옳은 말인것 같다. 한상수도 그랬다. 어려서는 이 못난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손톱 발톱 다 닳아지도록 삯일을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강가에 나간 철부지자식처럼 놀아대여 어머니를 걱정시키군 했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축구를 한다고 팔도강산을 돌아치다가 문득 나타나기도 하고 민족적울분을 못참아 왜놈들과 주먹행사를 하다가 경찰서에 련행되여 반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고 집에 오기도 했다. 광복후 세계청년학생축전에 가지 못하게 되였을 때도 어머니를 가슴아프게 했다. 이 밤에도 어머니는 토방마루에 앉아 저 하늘의 뭇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이 아들을 생각하고계실것이다. 아, 어머니, 오늘도 가슴을 조이며 이제나 저제나 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계실 어머니, 어머니는 자주 나가다니는 이 아들을 생각하며 하루 세끼 밥을 떠놓군 했지요. 그래야 객지에 나가서도 굶지 않는다고…
그러다가 불쑥 제가 대문안으로 들어서면 어머니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신채 달려나와 이 아들을 부둥켜안고 기쁨에 겨워 어쩔줄 몰라하며 눈물을 흘리군 했지요. 그랬다가 이 아들이 뽈을 차려 또 집을 떠나면 어머니는 흔연히 대문가에 서서 잘 다녀오라 바래주군 했지요.…
오늘도 어머니는 이 아들을 기다리며 대문가에 서있을것이다. 거리에 나갔다가 그새 혹시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하여 가슴을 두근거리며 집으로 달려올것이다. 한밤중 잠을 자다가도 바람결에 대문에 매달은 딸랭이 소리가 울리면 깜짝 놀라 깨여나 방문을 열것이다. 그러다가 아무런 기척이 없으면 텅 빈 방에서 허전한 마음을 안고 잠못드실것이다. 아, 어머니, 이 아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그리고 기다려주십시오!…
《뭘 생각하나?》
옆에서 잠든줄 알았던 박우갑이 나직이 물었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댔습니다.》
한상수는 철창가에 여전히 시선을 박은채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라!…》
박우갑은 추억이 서린 어조로 나직이 뇌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동문 고향에 어머니가 계시고 남쪽땅이지만 안해와 아이들이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오. 난 회령에 누이가 하나 있을뿐이요. 혈육중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누이여서 어머니 맞잡이로 이 동생에게 극진했는데 그만 그 누이 가슴에 못박을 일을 생각하니 내 가슴도 저미는것 같소.》
한상수도 가슴이 저릿해졌다. 자기는 그래도 박우갑에 비하면 행복한 사람이였다.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 죽는건 할수 없지만 무우밑둥같이 하나뿐인 누이가 불쌍하단말이요. 혹시 동무가 살아나간다면 우리 누이에게 나의 소식을 전해주오. 서른다섯살에 유언비슷한 소리를 한다고 웃겠지만 어찌겠소. 부탁하오.》
박우갑은 이렇게 말하며 히죽이 웃었다. 한상수는 왜 그런지 마음이 비장해짐을 느꼈다.
박우갑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같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늘 평온하였고 밝았다. 그는 감방생활에서 알아야 할 이런저런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한동무, 이놈들과의 싸움에서는 언제나 생명을 내걸고 정면대결을 해야 하오. 잔꾀를 부려서는 안되오. 그래야 놈들이 얕보지 못하고 허술하게 대하지 않소. 그리고 고문할 때 소금물이나 고추가루물을 먹지 않겠다고 뻗대지 말고 먹이는대로 먹어야 하오. 그러다가 정신을 잃으면 더 다치지 않소. 하여튼 내가 없더라도 이 정창식이 한테 단식투쟁과 고문을 받는 방법을 배워야 하오. 뽈차는데서는 동무가 낫겠지만 감옥생활에서는 선배니까.》
박우갑은 또다시 빙그레 웃었다.
《하긴 뽈을 찬 다음 땀을 흘리고나서 맥주나 탄산수는 한바께쯔라도 먹겠는데 물은 두사발도 마시지 못하겠단 말입니다.》
한상수는 정보부패들한테서 고문받던 일이 생각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선생님한테는 고문보다 회유공작을 많이 할것입니다. 나한테도 그랬으니까요.》
정창식이 그들의 이야기에 끼여들며 자기가 겪어온 일들을 말했다.
…그가 륙군형무소에 있다가 대구형무소로 이감된지 얼마후인 어느날이였다. 간수가 나오라고 하여 따라갔더니 형무소소장방으로 데리고 가는것이였다. 형무소소장은 정창식을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거기 앉소.》
턱으로 걸상을 가리켰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소장은 문건을 뒤적이며 너그럽게 물었다.
《정창식이요.》
수감자들의 번호를 부르는것이 관례인 형무소에서 그것도 소장이 직접 이름을 묻는 바람에 정창식은 얼떨떨해졌다.
《음, 정창식, 의용군출신, 50년 9월 26일 체포라…》
문건을 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리던 소장은 주독이 오른 뻘건 순대코를 쳐들고 정창식을 한동안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는것이였다. 정창식은 긴장해서 놈의 수작을 기다렸다.
《어제 부친이 왔다갔소. 매우 괴로워하더군. 나 역시 자식을 기르는 아버지로서 그 정상을 보고 생각이 많았소. 그래서 도아주자고 하오.》
형무소소장의 얼굴에는 련민의 정이 어려있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형무소에 왔다가도 아들을 만나지 않았다.
서울메리아스공장주인 아버지는 반공사상이 골수에 사무쳤다. 정창식이 인민군대에 탄원할 때에도 결사반대했었다. 그러나 정창식은 아버지를 무시하고 자기의 주견대로 행동했다. 정창식이 일시적후퇴때 체포되여 재판을 받을 때 아버지는 한 10년쯤 콩밥을 먹여야 정신을 차린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정창식은 10년형의 징역을 언도받게 되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온 다음에도 아버지는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정창식은 오히려 그것이 편안했다. 만약 자기가 아버지의 덕으로 출소한다면 동지들을 배반하는것으로 될수 있었기때문이다. 그는 량심대로 살고싶었다. 의용군에 입대하여 석달동안 따라다니는 기간에 정창식은 인민군대의 참모습을 알게 되였다.
《창식군, 이제라도 개심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면 감형시키던가 병보석으로 감옥에서 나갈수 있으니 잘 생각하여보게.》
소장은 정창식의 기색을 살폈다. 아버지로부터 뭉치돈을 받은 모양이였다. 정창식은 침묵을 지켰다.
《사실 자네야 <빨갱이>연설 한마디 듣고 속히워서 의용군에 나갔던것이 아닌가.》
《그런 소리는 걷어치우시오. 나는 내 량심과 신념에 의해서 의용군에 자원탄원하였소.》
정창식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리해할수 없단말이요. 당신이야 <빨갱이>들이 증오하는 자본가계급인데 어떻게 그네들이 쥐여주는 총을 들고 자기 편의 가슴을 겨눈단말이요. 이게 어디 정상사고를 가진 인간이요?》
소장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창식은 어이가 없어 입가에 경멸의 랭소를 띠웠다. 도대체 이런자들이 인간의 정상사고에 대하여 운운하는것부터가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소장님, 우리 아버지가 또 나타나면 말하시오. 아들은 감옥에서 죽을지언정 전향은 하지 않겠단다고, 그럼 난 가보겠소.》
정창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
소장은 아연하여 정창식을 멍청히 바라보았다. …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던 박우갑이 저으기 심중한 표정을 짓고 불쑥 물었다.
《창식동문 어째서 전향하려 하지 않소?》
《어째서 전향하려 하지 않는가구요? 그건 우리 전우들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까닭이지요.》
정창식은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그 전우들중에는 식량공작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동무를 두고 변절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는데…》
《있겠지요. 그래서 나는 더 전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량심은 최고의 재판관이니까요.》
정창식은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한상수도 마음이 숙연해졌다. 얼마후에 정창식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분대는 모두 일곱명이였지요. 광산로동자였던 분대장동지와 황주에서 소학교선생을 하던 부분대장동지 그리고 남진의 길에서 입대한 <숯쟁이> 남해라고 부르는 7보총수가 있었지요.
원래 이 <숯쟁이>는 이름조차 없는 까막눈이였는데 마을이 해방될 때까지 전쟁이 일어난것도 모르고 산속에서 지주놈의 숯을 굽고있다가 총을 잡게 되였는데 련대에서 남조선을 해방하는 전사라는 뜻으로 남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군복을 입혔지요. 자기 이름자도 쓸줄 몰라 부분대장인 <황주선생>이 짬짬이 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후퇴때 휴식참에 공부를 시키려고 하니 글쎄 남해가 행군해오는 도중에 어디서 꽁다리연필을 흘려버린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디쯤 해서 잃어버린것 같은가 캐물어가지고 <황주선생>이 5리나마 되돌아가 연필꽁다리를 찾아가지고왔는데 땀으로 미역을 감았습니다. 그렇지만 <황주선생>은 내색도 하지 않고 남해의 손을 잡아 한자두자 글을 익혀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행군하던 대오에서 우리 분대장이 슬그머니 없어졌는데 얼마후에 총소리와 함께 중상을 당한 그가 간신히 기여와서 하는 말이 <오늘이 창식동무의 생일날이요. 이걸…>하며 가슴속에서 닭알 세알을 꺼내놓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나자신도 생각못한 생일날을 잊지 않고 색다른 음식을 해주려고 마을에 내려갔다가…》
정창식은 끝내 목이 갈려 말을 못하고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잠시후에 끊기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소좌동지, 내가, …이런 전우들을… 배신하면… 무슨 인간이겠습니까. 전 죽어두 그들을… 잊을수 없습니다.》
《알겠소, 알겠소.》
박우갑도 목소리가 갈려나왔다. 한상수도 눈굽이 지지는듯 뜨거워났다. 자기 중대에도 그런 소대장, 분대장들이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김일성장군님께서 키워내신 인민군대의 모습들이였다. 자기 역시 정창식이처럼 인민군대의 명예를 지켜야 했다.
얼마후에 박우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량심이고 의리라는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감옥안에서 죽겠다고 해서는 안되오. 만약 아버지가 돈으로 창식동무를 감옥에서 빼내려 한다면 굳이 버틸 필요가 없소. 나가서 우리 몫까지 통일을 위해 싸워야 하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있듯이 돈이 없으면 죄가 많아지고 돈이 있으면 죄가 없어진다는것이 이 사회의 생리인데 아버지가 통일애국투사인 아들을 위해 돈을 쓴다고해서 량심에 꺼릴건 없소. 더우기 변절은 더욱 아니요. 나가서도 량심과 의리를 간직하면 되는것이요.》
정창식은 존경어린 눈길로 박우갑을 쳐다보았다. 박우갑은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언젠가 창식동무에게도 말했지만 나에게는 훌륭한 매부 한분이 있었소.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고 싸운 항일빨찌산이였소. 나라가 광복되여 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에 돌아온 매부는 고향에 와서 보안사업을 하다가 반동놈들에게 피살되였는데 그는 생전에 나에게 늘 이렇게 말하군 했소. 사람은 정에 살고 의리를 지켜 죽을줄 알아야 한다. 우리 항일빨찌산들이 어째서 사령관동지의 안녕을 위해 목숨도 아낌없이 바쳤겠는가.
그것은 나라없이 길가의 돌멩이처럼 버림받던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혁명가로 키워주신 그 은정을 잊지 못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기때문이요. 나 역시 일찌기 부모를 잃고 남의 집 대문가에서 밥을 빌어먹던 신세였지만 우리 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고 학교에 보내주시고 조국을 지키라고 총을 주신 그 은혜를 잊을수 없소. 난 김일성장군님께 다진 맹세를 지켜 떳떳이 죽겠소.》
《…》
한상수는 비장한 표정이 깃든 박우갑의 얼굴을 쳐다보며 뜨거운것을 삼켰다. 그의 말은 천만번 옳다. 나역시 어버이장군님께서 인생을 구원하여주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될번 했는가.
《저도 김일성장군님의 은정을 잊을수 없는 사람입니다.》
한상수는 감회에 잠겨 이렇게 허두를 뗐다. 박우갑과 정창식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나라에서 광복후 처음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때 있은 일이지요. 나도 축구선수로서 축전에 참가하는 한 성원으로 뽑히여 훈련을 맹렬히 하고있었습니다. 누구나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게 된것을 더없이 부러워했지요. 나의 친구들은 평양은 물론 청진과 해주, 원산에서 축하편지까지 보내오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축전에 갈 때 신으라고 소가죽구두까지 사왔지요. 그런데 막상 출발을 며칠 앞두고 평양시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축전참가자명단을 불렀는데 아, 글쎄 내 이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의 수치감을 무슨 말로 말해야 할지… 친구들이 어떻게 된 판국인지 알아보겠다고 떠드는것을 말리고 내가 직접 축전상무위원회를 찾아갔단말입니다.》
한상수는 말을 끊고 그때 있었던 일을 잠시 더듬다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6
축전상무위원회는 시인민위원회의 어느 한 방에 자리잡고있었다. 한상수는 방문을 두드렸다. 그리 넓지 않으나 탐탁하고도 무게있게 꾸려진 방이였다. 넓은 량수책상우에는 3대의 전화기가 품위있게 놓여있고 필통에는 각이한 필기도구들이 화살처럼 꽂혀있었다.
방안에는 장발한 머리와 은테안경을 끼고 로씨야식가죽잠바를 입은 사람이 큼직한 대통을 입에 물고 맛스러게 흡연을 하고있었다. 축전상무에서 중요위치에 있는 사람이였다. 그는 안개처럼 피여오르는 연기속으로 실눈을 짓고 문턱에 있는 한상수를 찌글써 쳐다보았다.
《동문 누구요?》
《축구선수 한상수입니다.》
《음…》 《가죽잠바》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더니 습관적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왔소?》
《축전에 가지 못하게 된 리유를 알고싶어서 왔습니다.》
《축전에 가지 못하는 리유를 알고싶어서 왔다. 그건 동무자신이 생각해보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할수 없군. 야박스러워도 말해야겠는걸. 동무가 미리 알고있어야 할것은 우리 프로레타리아계급성은 칼날같이 날카롭고 철저해. 그런데 동무는 <경평축구대항전>때 서울에 가서 세브란스병원의 부원장이라는 친미분자의 딸과 련애질을 했다며?!…》
그는 한상수를 노려보며 따지였다.
《우리는 이미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한상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폭발직전의 무서운 그 무엇이 깃들어있었다.
《가죽잠바》는 제김에 격분한듯 책상을 꽝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바로 계급성이 없는 표현이야. 프로레타리아트가 부르죠아처녀와 련애를 하다니. 그러니 동무를 어떻게 믿고 외국에 보내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못해. 축구를 못해도 계급성을 버릴수 없어. 그리고도 뭐 축전에 가지 못하는 리유가 뭐냐구? 나가!…》
《가죽잠바》는 한손을 들어 문쪽을 가리키며 열병환자처럼 광기를 부렸다. 《좋습니다. 축전에 가라고 해도 나는 가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섰던 공격수의 위치는!…》
한상수는 더 말을 못했다. 억울하고 분하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공연한 근심. 동무가 없어도 우리는 축구를 해. 동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구. 건방지게. 우리는 설사 축구에서 지더라도 계급성만 철저하면 돼. 나가!》
그는 또다시 벼락같이 소리를 질렀다. 한상수는 더 참을수 없어 문을 차고 나왔다.
《저런 반동놈의 새끼!》
《가죽잠바》는 방안에서 고함을 질렀다.
한상수가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있던 친구들이 둘러싸며 중구난방으로 물었다.
《어떻게 됐어?》
《뭐라구 그래?》
《축전에 가지 못하는 리유는 계급성이 없다는걸세.》
한상수는 쓰거워 이렇게 내뱉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섰다. 집이 가까와올수록 어머니를 볼 일이 난처하여 대동강반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들이 축전에 간다고 소가죽구두까지 사오며 좋아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어떻게 마주 본단말인가. 한상수는 강반의 수양버들아래에 놓여있는 돌걸상에 주저앉았다. 강물을 희롱하던 석양은 저멀리 맑게 개인 하늘밑으로 사라지고 양각도쪽에 물오리떼들이 까맣게 내려앉아 먹이를 찾느라 부지런히 자맥질을 한다. 강가 여기저기에 밀짚모자를 쓴 낚시군들이 한가스럽게 앉아있다. 하루일을 마친 젊은이들이 쌍쌍이 강반을 거닐고있었다.
한상수는 불현듯 그 어떤 말못할 애수가 온몸을 휘감는듯 했다. 격정의 파도가 가슴속에서 사그라지자 금시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문득 옥야의 자태가 눈앞에 떠올랐다. 이 순간에도 옥야는 눈이 까매서 자기를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와 헤여진지도 2년이 되여온다. 《경평축구대항전》때 서울역에서 그에게 곧 다시 오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 지금까지 편지한장 보내지 못했다. 옥야는 어떻게나 지내고있는지… 불시에 가슴을 조이는 그리움을 그 무엇으로도 달래일수 없었다.
《여기 있는걸 찾았구만.》
등뒤에서 현우섭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한축구단에서 한상수와 함께 뽈을 차는 친구였다. 한상수는 여전히 강물에 시선을 던진채 덤덤히 앉아있었다. 현우섭은 말없이 한상수의 옆에 앉았다. 그의 얼굴도 밝지 못했다. 둘도 없는 딱친구를 떨구어놓고 혼자서 축전에 갈수 없는 안타까움이 현우섭의 얼굴에 짙게 어렸다.
《내 방금 삼촌을 만나보고 오는 길이야.》
이윽고 현우섭이 입을 열었다. 삼촌이란 《가죽잠바》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한상수는 여전히 묵묵히 앉아있었다.
현우섭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가죽잠바》에 대한 신뢰가 자취없이 사라진 지금 심장은 다시 불타오를것 같지 않았다.
《한가지 너한테 물어볼것이 있다. 지금도 서울에 있는 처녀한테서 편지가 오니?》
현우섭이 심중한 어조로 직방 물었다. 그제서야 한상수는 고개를 홱 돌려 현우섭을 쏘아보며 되물었다.
《그건 왜 물어? 편지가 오던 안오던 그 어르신네가 무슨 상관이야?》
《문젠 그 편지때문이다. 38선이 막혀있는 현 시국에서 남쪽의 부르죠아처녀한테서 편지가 온다는건…》
《걷어치우라구. 편지가 오면 어쨌다는거야. 남의 사생활을 걸고들지 말게.》
한상수는 격하여 소리를 질렀다.
《진정하라구. 넌 지금 지나치게 흥분하고있어. 이봐 상수, 우리 이제 함께 가서 삼촌한테 용서를 빌자구. 서울처녀와 사랑을 포기하겠다고 하면 축전에 갈수 있어.》
현우섭은 성질이 화약같은 친구를 설복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한상수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 비수같은 날카로운것이 번쩍했다.
《사랑을 포기한다구?!… 우섭이, 내 사랑, 내 명예를 짓밟은 그 <가죽잠바>를… 나는 기어코…》
한상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적의에 찬 숨가쁜 소리를 내지르다가 더 말을 못하고 발길을 떼였다. 현우섭은 아연하여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었다.
한상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여 방바닥에 얼굴을 묻고 매운 눈물을 뿌렸다. 그는 자기가 축전에 갈수 없다는것을 상상조차 못했었다. 자기의 가치가 이렇게도 헌신짝같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에도 필요없는 존재로 되였다. 뽈을 잘 차서 내 나라를 빛내여보겠다는 그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상수는 다음날부터 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대동강가를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며칠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번민했다. 오랜 생각끝에 그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인간적존엄을 짓밟고 축구선수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는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가슴아픈 일이였다. 나는 여기에 필요없는 인간이다. 내 사랑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온 한상수는 농짝문을 열고 경기를 다닐 때 지고다니는 배낭을 꺼냈다. 애지중지하는 뽈과 축구화부터 배낭속에 넣었다. 그가 사품들을 찾아 부지런히 배낭속에 넣고있는데 문득 등뒤에서 《뭘 하느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상수는 그만 와뜰 놀랐다. 언제 방안으로 들어왔는지 어머니가 《뭘 하느냐말이다.》하고 재차 따졌다. 그 목소리는 채찍처럼 머리를 호되게 후려쳤다.
굳어져있던 한상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형언할수 없는 노여움과 슬픔이 깃들어있었다.
한상수는 그만 어머니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채 목이 메이는 소리로 띠염띠염 말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난 축전에 가지 못하게 됐어요. 옥야를 사랑한것때문에…》
《나두 들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친듯 조용했다. 그는 허물어지듯 아들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엄하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디루 가겠단말이냐?》
한상수는 침묵을 지키다가 괴롭게 입을 열었다.
《내 축구를 인정하는 곳으로 가렵니다.》
《미국놈들한테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한상수에게는 벼락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칼날같은 눈길이 무섭게 아들의 얼굴을 지켜보고있었다. 한상수는 그 눈길에 기가 질려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머리우에서 들렸다.
《그래선 못쓴다. 너를 키워준 이 대동강을 버리고 가면 어딜 간단말이냐.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서울의 기자들앞에서 뽈을 잘 차게 된것은 이 대동강물을 먹으며 자랐기때문이라고…》
어머니의 목소리는 젖어있었다.
《어머니!》
한상수는 불시에 격정이 솟구쳐 어머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었다.
그 이튿날 아침이였다. 마당에서 승용차멎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한상수는 곱지 않은 심사를 가지고 마지 못해 문을 열었다. 체육단단장과 제낀옷을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또 한사람이 서있었다.
《마침 있었구만. 상수동무, 어서 옷을 입고 나오우.》
서글서글하고 사람좋은 단장이 말했다. 뒤에 있는 사람은 그저 빙긋이 웃을뿐이였다. 한상수는 약간 랭랭한 눈길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 친구 빨리…》
단장이 독촉했다.
《어딜 가자는겁니까?》
한상수는 맞갖지 않게 물었다.
《어딘 어디야. 가보면 알게 돼.》
단장의 말이다.
《아니, 그만두겠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축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체육단에서도 나오겠습니다.》
《상수동무.》 넥타이를 맨 사람이 말했다. 《지금까지 여의치 못한 일들이 있었다면 용서하시오.》
《아니, 저는 동지한테서 용서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한상수는 점점 뿔을 세웠다.
《허허… 보통옹고집이 아닌걸. 자, 어서 차비를 하우.》
그 사람은 껄껄 웃으며 한상수의 어깨를 철썩치고 등을 떠밀었다. 더 우길수 없었다.
이윽고 승용차는 집을 떠났다. 차창밖으로는 낯익은 건물들이 쉬임없이 흘러갔다. 드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화물자동차들, 종을 울리며 달리는 궤도전차들… 거리는 활기에 넘쳐 들끓고있었다. 넓은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간 대형구호가 류다르게 눈앞으로 안겨온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 만세!》
《모두다 새 민주조선건설에로!》
한상수는 이상하게 가슴이 찡해지는것을 느꼈다. 암흑속에서 광명으로 나온듯 모든것이 눈부시고 희한하게 생각되였다. 승용차는 해방산기슭의 어느 한 건물앞에서 멎었다. 북조선체육련맹청사였다. 차에서 내린 한상수는 체육단단장과 넥타이를 맨 사람의 뒤를 따라 청사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느 한 방으로 안내되였다. 넓고도 정갈한 방이였다. 윤기가 도는 응접탁에 앉아있던 사람이 일어나 한상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검은색의 닫긴형양복을 입고있는 일군은 어디로 보나 품위있고 점잖아보이였다. 한상수는 대번에 주눅이 드는것을 느꼈다. 왜그런지 가슴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일군은 한상수에게 다가와 그를 쏘파에 앉혀주었다. 함께 온 사람들도 자리에 앉았다. 잠시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자기 책상앞으로 천천히 다가간 그 일군은 몸가짐을 바로하고 정중히 입을 열었다.
《한상수동무에게 한가지 전달할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한상수는 저도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 하고 일군은 계속했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대표들을 료해하시다가 일부 편협한 일군들에 의하여 한상수동무가 명단에서 빠진것을 아시고 축전대표로 참가시킬데 대한 은정깊은 배려를 돌려주시였습니다.》
《?!…》
한상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어떻게 아시고… 그 일군이 한상수의 앞으로 다가왔다.
《상수동무, 축하하오. 쁘라하축전에서 조국의 명예를 힘껏 빛내여주기 바라오.》
일군은 한상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한상수는 그때에야 정신이 들었다. 꿈을 꾸는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중얼거렸다.
《장군님께서 저를… 정말…》
《그렇소.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동무를 몸소 대표단명단에 넣어주셨소.》
한상수는 급기야 고개를 떨구었다. 뜨거운 눈물이 사정없이 솟구쳐나왔다.
《상수동무.》 일군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동안 고심이 컸지. 면목이 없소. 장군님께서 가르치심을 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얼마나 큰 과오를 범했을지 모르오.》
일군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집무실은 숙연한 정적이 흐르고있었다. 방안에는 여러명의 일군들이 쏘파에 앉아 이제나 저제나 수령님의 말씀을 기다리고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이 제기한 대표단명단을 오래도록 깐깐히 보고계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 일군들에게 시선을 옮기시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수고들했소. 이만하면 대표들이 우리 의도대로 구성된것 같구만. 특히 문화예술인뿐아니라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들을 축전에 참가하도록 한것이 좋소.》
그이의 치하를 받은 일군들은 얼굴이 밝아졌다. 사실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진출하는 축전참가대상자를 선정하는것때문에 여간만 고심하지 않았는데 수령님께서 만족해하시는것이였다. 일군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런데 말이요. 축구선수들의 명단에 청진의 <기계다리>는 있는데 어째서 <경평축구대항전>때 명성을 떨친 평양의 <비수>는 빠졌소?》
수령님께서 일군들을 자애에 넘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물으시였다. 체육련맹에서 온 일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님, 그 동무가 서울에 가서 뽈은 잘 찼는데 서울의 녀대학생과 련애를 했습니다.》
체육련맹 일군은 얼굴을 붉히며 말씀올렸다.
《그렇소? 그러니까 그 동무가 경평축구경기때 뽈도 잘 찼지만 어느새 남쪽처녀를 후려챘구만. 과연 <비수>답소. 하하…》
수령님께서는 사뭇 즐거우신듯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일군들도 미소를 머금고 그이를 우러렀다.
《얼마나 좋은 일이요. 미국놈들이 아무리 38˚선을 가로막아도 우리 청춘들의 사랑은 막지 못하오. 조국이 통일되면 우리 그들의 잔치를 크게 차려줍시다.》
수령님께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담으시고 기쁨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체육련맹일군은 얼굴이 점점 흙빛이 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련맹에서 바로 그 서울처녀와 련애한것 때문에 명단에서 제명했는데 수령님께서는 오히려 그 일을 두고 못내 대견해하시는것이 아닌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말씀을 이으시였다.
《지난해 <경평축구대항전>때 남조선기자들앞에서 한 <비수>의 말이 아주 걸작이요. 기자들이 어떻게 되여 그처럼 뽈을 잘 차게 되였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대동강물을 마시며 자랐기때문이라고 대답했소. 하하…》
수령님께서는 또다시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일군들은 모두 흐뭇해있는데 체육련맹 일군들만은 머리를 떨구고있었다.
이윽고 수령님께서 웃음을 거두시고 련맹일군들을 넌지시 바라보시며 서울처녀와 련애한것때문에 축전참가명단에서 뺐는가고 물으시였다.
《그 이후에도 남쪽에서 편지가 계속 오고있다고 합니다.》
수령님께서는 아무 말씀없이 안색을 흐리시였다.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일군들은 모두 죄송스러운 표정을 짓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윽고 그이께서 사뭇 안타까우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래서 어쨌단 말이요. 처녀가 총각한테 사랑의 편지를 쓰는건 너무도 당연하지 않소. 그것때문에 축전에 보낼수 없다면 우리는 사랑도 모르는 편협한 사람들이란 말이요?》
체육련맹 일군들은 죄책감에 잠겨 고개를 더 깊이 떨구었다.
《말해보오. 그 편지때문에 명단에서 제명했소?》
장군님의 어조는 의분에 젖어있었다.
《장군님, 사실 저희들은 그 동무가 축전에 참가했다가 만약 적들이 처녀를 미끼로 그를 남으로 유인해가면 정치적손실이…》
《무슨 소리를 하오. 그렇게도 제 사람을 믿지 못하겠단 말이요. 정말 분하오.》
수령님께서는 일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손을 저어 그의 말을 자르시였다. 그러시고는 가슴이 답답하신듯 양복의 웃단추를 풀어놓으시며 창가로 다가가시였다. 방안에는 납덩이같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어버이수령님의 절절한 음성이 다시 울렸다.
《동무들, 생각해보오. 만약 동무들의 말대로 그가 처녀를 찾아 남으로 나간다고 하여 대동강물을 마시며 자란 사람이, 평양에 어머니를 둔 사람이 미국놈편이 되겠는가. 난 그를 믿소. 민족을 위한 뽈, 조선의 뽈을 차게 해야 하오. 보내야 하오. 그 <비수>를 축전에 꼭 보내시오.》
수령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알겠습니다.》
일군들은 자책감과 뜨거움에 잠겨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렀다.…
방안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여있었다.
한상수는 북받쳐오르는 격정을 어쩌지 못해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뭐길래 장군님께서 그처럼 마음을 쓰시였단 말인가. 그런데도 나는, 이 못난놈을 믿지 않는다고 남으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배은망덕한놈인가,
나는 반역의 길을 걸으려 했다. 천추에 씻지 못할 역적의 죄를 지을번 했다. 생각할수록 깊은 회오와 자책이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그는 고개를 버쩍 쳐들었다.
《장군님!》하고 그는 목메여 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방바닥에 떨구며 어깨를 세차게 떨었다.
(장군님! 장군님의 하늘같은 은덕을 어떻게 갚는단말입니까.)
《상수동무,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주신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은정을 잊지 말고 조국의 명예를 떨칩시다.》
일군도 손수건으로 눈굽을 문지르며 조용히 말했다.
며칠후 한상수는 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쁘라하로 떠났다.…
한상수의 이야기는 끝났다. 감방안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두사람의 눈굽에는 감동에 젖은 물기가 번뜩이였다.
《김일성장군님은 그런분이시군요.》
이윽고 정창식은 목이 메이는 어조로 나직이 뇌이였다.
《자넨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만. 김일성장군님의 그런 은정을 받아안은 자네야말로 이제 죽어도 원이 없겠네. 장군님께서 아시는 동무가 부럽네.》
박우갑도 부러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민족을 위해 뽈을 차라고 하신 장군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이렇게 잡혀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한상수의 목소리는 또다시 자책에 잠겨있었다.
감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박우갑과 정창식도 생각에 잠겨 철창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박우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동무, 동무는 죽지 말고 살아서 장군님께 다진 맹세대로 우리 조선을 빛내이기 위해 뽈을 차야겠소.》
박우갑의 말은 의미심장하였다. 그 말은 한상수의 가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알겠습니다.》
한상수는 새로운 각오를 안고 뜨겁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