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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장의 계곡과 릉선들에는 여러개의 등산길과 탐승도로가 있다.

아침저녁 달리기선수들이 그 길을 오르는가 하면 몸단련을 위해 오르는 늙은이들과 부녀들도 많다. 쌍쌍의 련인들도 있고 일요일이면 젊은이들과 가족, 친척들이 저마끔의 자리쟁탈전을 벌리기도 한다.

그런데 한자리만은 어떤 산보객이건 들놀이군이건 넘보지 못하는 곳이 있다. 그것은 운동복차림의 풍신좋은 백발로인, 언제나 두세명의 보호자나 여러명의 남녀청년들속에 섞여오는 성민이에 대한 존경때문이다.

성민은 오늘도 말끔히 씻고 닦이운 바위우에 앉아서 휘연히 트인 북쪽하늘을 바라보며 꿈꾸듯 조을고있다. 조는것이 아니라 추억이고 명상이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그의 옆에는 자명종시계가 붙은 굵직한 지팽이가 놓여있다. 이제 그 지팽이의 자명종이 울리면 성민은 끙― 하고 일어설것이며 그 종소리에 맞춰 일떠서는 보호자들과 함께 이리저리 휘돌아뻗은 도로를 따라 하나둘 걸음발을 세며 숫기좋게 걸을것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단풍맞이 가을을 즐기는 놀이패들과 지루한 업무에서 풀려난 사람들로 도처에서 뚱땅거림이고 웃음들이다.

하지만 성민이네 일행만은 례없이 단출하고 조용하다. 꼭 와야 할 사람들중에서 설화만은 보이지 않는다. 성민이 집을 떠나온지 43돐이 되는 날이여서 설화는 며칠전부터 이날을 별렀건만 아직껏 나타나지 않고있다.

경자는 미국에 갔다.

그사이 경자도 퍼그나 달라졌다. 《미운 삼촌》소리는 두번다시 없었고 혹간 만나거나 전화를 걸 때면 예쁜 소녀시절의 그대로 깔깔거리기도 하고 재롱스러운 롱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러나 속깊은 이야기는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있은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넘겨버리기가 일쑤고 태민형이나 남북관계문제가 화제에 오를라치면 아예 자리를 피하든가 입을 봉하는 상태다.

경자가 이번에 미국으로 간것은 로스안젤스에 있는 집과 가산을 처리하고 아들애인 경호까지 데려오기 위한것이다.

어찌된 일인지 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자를 따서 경호라고 이름지었다는 아들녀석은 태민형의 장례때도 수학려행이요 뭐요 하며 안온데다가 환국수속을 해야겠다는 옥영이와 경자의 전화에는 왜 미국에서 떠나겠느냐고 볼부은 소리까지 했다는것이다.

성민은 경자가 미국으로 갈 때 창호가 수록한 록음테프를 아들애한테 꼭 가져다 들려주라고 했다.

그때 경자는 얼마간 당혹한 빛이였으나 《네…》하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명례에 대한 경자의 원한은 5~6월의 서리발같다. 법정에까지 상소하여 재판에 걸겠다는것을 성민이와 창호가 말렸다.

이 사회가 그런것이니 사회악의 근원과 싸워야지 그런 추물들과 무슨 이러구저러구가 있단 말인가.

성민으로서는 창호의 체면도 생각했다. 량심선언발표만으로도 곤혹스러웠을터인데 명례를 변호할 수많은 입들앞에서 구질스러운 도청과 끄나불행위가 론단되면 가냘프게 키워지고 지켜지는 그의 깨끗함에 또 다른 상처가 생겨날것이 아닌가.

(다 잘되겠지.)

성민은 또다시 눈을 반쯤 감은채 하던 생각을 이어갔다.

수십수백번 되씹어본 생각이고 그려본 추억이지만 이날은 왜서인지 하많은 사연들이 엇돌며 심장을 쿡쿡 쑤셔댄다.

퇴원할 때 의사는 30대의 심장이라고 했지만 나이는 못 속이는것같다.

몸의 기력이 빠지거나 마음이 괴로울 때면 하는 습관대로 두주먹에 힘을 주며 태민이와 명례의 마지막대결을 돌이켜보았다.

록음기테프에서 울려나오던 거치른 숨소리와 악에 받친 웨침들…

―그래, 사장님은 언제 빨갱이편이 되셨소?―

―야, 너 뉘앞이라구―

―누구시긴 누구겠소. 빨갱이동생편에 섰으니 용공에 친공이지요―

―더 말해봐라―

―말하지요. 당신은 나에게 어떤 수단을 부리든 석방을 시키라고 하고는 다 죽은 목숨을 옥밖에 내놨으면 감사할 일이지 이제 와서 전향이 뭔가고 을러메는건 뭐요―

―야, 내가 전향자로 만들라고 했느냐―

―어떤 수단이든지 쓰라고 했으니 그것이 승인으로 된거지 반대로 됐다는겁니까―

―용타, 대단하다―

―말이 났으니 더 합시다. 그래 성민일 끝까지 북으로 보내자는건 무슨 속심이시오?―

―그러니 당국에서 허락된것도 《친공》으로 된다는거냐―

―말은 바른대로 그렇지요―

―예끼, 빌어먹을 녀석! 썩 사라져라―

―나갑지요―

록음테프의 마지막부분은 이것으로 끝났다.

세월! 풍랑은 세차고 길은 여전히 험하다.

명례는 재판은 면했으나 사회적으로 추물로 락인되였다. 그를 두둔하던 수구세력들도 찍소리를 못했다.

성민이가 마지막일격을 가했다. 법무부와 《매스콤》에 내돌린 성민이의 항변기사는 명례와 그 패거리들을 단죄하는 단호한 선고로 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경자는 여전히 간격을 두고있는가. 적의?!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부끄러움?… 그것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세월의 이끼속에 부식되며 자라온 편벽과 타성이 작용할것이다.

그속에는 아녀자의 비좁은 옥감정도 있을것이고… 사람은 때로 사상과 뜻에서라기보다 사소한 오해와 옥감정으로 삐뚜렁길을 걷는것이 아닌가.

한데 경자는 그렇다쳐도 경호는?…

심장은 여전히 아프게 쑤신다. 고개는 수그러지고…

지난날의 일들이 번개같이 떠오르다가는 번개처럼 사라진다.

목단강, 려순… 황포강의 먼지바람, 패잔병의 무리들, 마적떼의 말발굽소리, 중국남해의 거센 물결, 배전에 엉켜붙던 성에덩이, 림당수의 드센 파도…

자명종소리가 울렸건만 성민은 여전히 눈을 감고 어제를 그려보고있다.

《이보게, 그냥 기도를 드릴셈인가.》

소나무밑에 앉아있던 옥영이가 시까스르듯 한마디 붙였다.

하지만 성민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상념은 여전히 꿈의 세계에서 줄달음치고있다. 맥주기운에 맑아진 옥영의 목소리가 조금 방향을 바꾸게 했을뿐이다.

순정의 쪽으로, 순정의 목소리로.

(《못난이… 미남자이고…》)

성민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손은 저절로 앞으로 나가고.

활짝 핀 장미, 별같은 눈…

《순정이! 당신한테 가는중이요.》

조용히 뇌이며 지팽이를 잡았다. 그리고 움씰하며 일어섰다.

《자, 이젠 다들 가보자.》

그가 지팽이를 휘두르며 일어서자 잔디밭우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해성이가 《그건 왜 안 와.》하며 게두덜거렸다. 《그건》이란 며칠후에 그와 혼사를 치르게 될 설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해성은 설화앞에서는 옴짝 못하면서도 남들앞에서는 자못 조를 빼는 투다.

그때 굽이진 포장도로로 달려오던 한대의 승용차가 삑― 하고 멈춰서더니 거기서는 범이 제 말하면 온다고 설화가 냉큼 뛰여내렸다.

《아니, 저 애가?》

그릇들을 챙기고 일어서던 옥영이가 깜짝 놀란 소리를 하며 안경을 추슬러올렸다.

설화의 뒤로는 한 녀인이, 다름아닌 려아가 내려서는것이였다.

긴 치마자락을 감쳐든 려아는 설화의 손에 팔을 맡긴채 둔덕을 오르는데 해성이 설화에게 《왜 이제야 오우.》하는 볼부은 소리에 누구에게라없이 미안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고개를 숙였다.

《형님, 이제 기쁜 일이 있습니다.》

해성이 진한 소주냄새를 풍기며 성민이한테 눈을 끔쩍여보였다.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미리 짜고든 일인것만은 분명했으나 려아의 출현이야말로 너무나 뜻밖이였기때문이였다.

그간 옥영이네 집에 갔을 때도 두세번인가 려아가 와있는것을 알았고 한번은 창문쪽에서 려아의 뒤모습을 보긴 했으나 그도 만날념을 하지 않았고 성민이 역시 찾지 않았다.

려아에 대한 존중감때문이였다고 할가. 만나면 서로가 어색할수 있고 혹시 좋은 추억에 실금이 가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저씨!―》

설화가 한걸음 앞서 달려왔다. 그는 성급히 손가방을 뒤지더니 한권의 얄팍한 책을 내들었다.

《뭔지 맞춰보세요.》

려아를 할끔 돌아보며 책을 뒤전에 감추었다가 다시 내밀었다.

하얀 애기꽃 한송이가 그려진 우에 《고운 님 고운 얼》이라는 표제가 내리글로 써있었다. 꽃송이는 신통히도 감탄부호를 련

상시켰다.

성민은 언젠가 《산 얼과 죽은 넋》의 소설을 쓰겠다고 하던 설화의 말을 상기하며 빙그레 웃었다.

《제목이 바뀌웠구나.》

《안예요. 그땐 잘못 생각한것이지요.》

설화는 뾰로통한 기색으로 책에 덤벼드는 창호와 해성이를 스쳐보고는 옥영이와 뭔가 소곤거리는 려아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보세요. 여긴 다들 고운 맘, 고운 사람들만 있는것 아니예요.

그리고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선생님에 대한 저의 분석글이거던요.》

《그런가!》

성민은 눈굽이 저릿해졌다.

《그리고 말이예요. 이 책은 아저씨에게 드리는 려아선생님의 인사랍니다.》

《차근차근 말씀드려줘.》

해성이가 한마디 비쳤다. 하지만 설화는 그 말은 들은듯마는듯 려아만 보았다. 그때야 려아는 성민을 보며 수집게 인사를 했다.

《반갑소.》

성민은 성큼 발을 떼여 그앞에 다가갔다.

려아의 머리에 얹힌 흰서리를 보며 헌헌한 태도로 손을 내밀었다.

《그 책은 려아선생님의 돈으로 출판한거예요.》

설화가 깜찍스럽게 돌아보며 말하자 려아는 《애두―》하며 다행이라는듯 성민이한테서 손을 뽑고는 약간 게면쩍어하는 태도로 말했다.

《안됐어요. 사실 오전안으로 가져오려고 했는데 책 만드는이들이 방금전에야 끝냈어요. 미안해요.》

《아이, 몽땅 말씀드려야지요. 아저씨 쓰신 책도 려아선생님이 출판해드리겠다고 하잖았어요.》

설화가 또 한번 간질거리는 소리로 말하자 려아는 쑥스럽게 얼굴을 붉혔다.

《고맙소. 난 이미전에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했소. 정말 반갑소.》

성민이 어색스러운 태도를 보이자 설화가 앙증스러운 소리를 했다.

《아이, 난 배고파 죽겠는데 왜 다들 이러고있어요.》

《아니, 식사전이냐?》

《그렇구말구요. 려아선생님은 배가 홀딱 달라붙었어요.》

《그럼 다시 합시다.》

해성이가 기다렸다는듯 창호가 들고있던 가방을 풀어헤쳤다.

그들이 소나무밑에 둘러앉았을 때 성민은 자기의 고정좌석인 너럭바위우에 올랐다.

비닐도판의 표지를 보다가 책의 앞머리와 뒤부분을 들췄다. 앞머리와 맨 뒤부분에 《백발》이라는 단어가 두세번 반복되여있는것을 보고 강한 주정이 담긴 그 마지막대목들을 읽었다. 설화의 담찬 기백과 절절한 심정이 뜨겁게 미쳐왔다.

―《모진 세월에도 살줄 알고 그 세월과 싸워 이겨야 한다!》

모진 세월은 그만큼 집요한것이요 끝없는 고배와 좌절을 강요했다.

하여 체념과 허무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님은 이겼다.

고운 맘, 고운 얼이 의지요 목표였기에.

그런데 세월은 그의 머리우에 월계관이 아니라 서글프게 얽힌 백발만을 얹어놓았으니 슬프게도 6. 15의 열기는 음달의 차디찬 랭기에 부딪쳐 좌절과 방황의 악순환에 시달리고있고 《통일!》이라는 느낌표는 《언제일가?》하는 물음표로만 남아있다.

북송되지 못한 통일수,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력사가 아파하는 통일의 과제이고 미래이며 통일의 믿음이기도 하다.

하여 그는 무성한 봄의 훈향이 떨치기를 바래 더더욱 젊어지시겠단다. 아, 이러한 통일수가 어찌 그이 하나뿐이며 분렬의 년륜속에 태질하는이들이 어찌 8. 15세대뿐이겠는가.

사람들이여, 모진 세월의 횡포속에 분렬의 고통을 떠메온 그들의 백발이 울음으로 되지 않게 하라.

사랑하는 우리의 주인공이 자랑스럽게 백발을 날리며 모란봉의 그 중매버드나무앞에서 사랑하는 안해와 뜨겁게, 뜨겁게 포옹하게!―

이번에는 에돌음길이 아니라 곧추 질러 산을 내렸다.

해는 서켠으로 얌전스레 내려앉으며 붉은 채운으로 산장을 휘감는다. 그뒤에는 부드러운 어둠속에서 잠시 숨을 돌릴것이고 또 다음날엔 더 밝고 따뜻한 빛을 뿌리며 조락의 산발을 황금색으로 빛내일것이다.

《아버님, 조심해요.》

《아니, 너희들이나 조심해라.》

성민은 이렇듯 큰소리는 쳤으나 설화의 손만은 꼭 잡았다. 어릴적 경자의 손같기도 하고 순정의 따뜻하고 여무진 손같은…

세월의 풍우를 이겨온 꿋꿋한 로송들과 애어린 잔솔들이 주―욱 벌려서며 그를 반기는듯 하고 따르는것 같기도 하다.

구새먹은 나무에서 산새 한마리가 《갸, 가.》소리를 내며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우뚝 걸음을 멈춘 성민은 까만 점으로 변하는 그 새가 장미빛구름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지켜서있다가 다시 발길을 뗐다.

입가에 한줄기 애틋한 웃음을 머금으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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