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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다.

늘 희읍스름한 천정과 거뭇한 형체들이 얼른거리다가는 사라지고… 때로는 순정이며 아버지도 보군 하였는데 대체로 시쁫한 얼굴들이였다.

입원 첫날부터 성민이의 곁에 붙어있다싶이 하고있는 해성이와 설화에 대해서도 그닥 반가움을 느끼지 못했고 때없이 찾아드는 위문객들에 대해서는 어서 가주기만을 바랐다. 옥영이가 찾아왔을 때 태민이의 비명횡사를 놓고 가슴 쩌릿한 아픔을 느꼈지만 그것도 그때뿐이였다.

사색도 감정도 죄다 마비된듯 한 속에 작별인사로 찾아든 감옥동지들의 모습도 먼 다른 행성의 사람들처럼 보게 되였고 전향에 대해서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조국에 가서도 꼭 그렇게 보고드리겠다고 하던 말들도 무심히 스쳐들었다.

그들이 다시 만나자고, 꼭 다시 만날것이라고 하며 떠날 때 순정에게만은 뭔가 인사말이라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성민은 이것이 죽음을 앞둔 사람의 체념이고 허탈이라는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부디 거기서 벗어날 의욕도 기력도 없었다.

죽은 사람은 이 세상 모든것에 대해 정을 뗀다고 했다. 하여 가까운 친지나 벗들에 대해서까지 랭담하게 되는 경우가 일쑤라고도 한다.

그런데 죽은 시신들의 눈가에 물기가 맺히는것은 무엇때문일가.

하튼 성민은 지금의 자기가 바로 그런 심경속에, 현실의 모든것을 체념하고 아득한 심연의 다른 세계를 그려보고있음을 애절한 비탄속에 느끼고있었다.

그런데도 미음이건 과일이건 주는대로 먹었고 점적관의 약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수자를 헤이며 언제면 일어날수 있을가 하는 자기로도 서글픈 생각을 하며 삶의 본능이란것이 이처럼 지독한가 하고 쓴웃음을 머금기도 했다.

그런 어느날 성민이 처음으로 이불을 고이고 반쯤 몸을 일으켜 누워있을 때 해성이와 창호가 나타났다.

그동안 창호 역시 몇번인가 본듯싶어 반갑다는 눈인사를 보내는데 《아니, 형님이 일어나셨군요.》하며 해성이 떠들썩하는 바람에 성민이도 처음으로 올스러운 인사말을 했다.

《다들 잘있냐?》

해성이 하는 대답이 걸작이였다.

《아버진 지금 매일 아침저녁으로 형님소리만을 하는데 형님이 안나타나니까 목소리두 더 높아지구… 기다리는 근력때문인지 건강도 더 좋아지는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된걸 아느냐?》

《그건… 알리지 않았습니다.》

《잘했다.》

《그런데 형님, 의사선생들 말로는 살랑살랑하는 기분좋은 얘기는 일없다는데 깜짝 놀랄 소리를 해도 꽤 견디겠습니까?》

《허허, 깜짝 놀랄 소리란 뭐냐?》

《경자가 형님한테 와서 통곡을 하겠답니다.》

해성은 창호를 얼핏 보는데 창호의 얼굴은 교수대에 오르는 사형수 같았다.

《경자가 언제 미국에서… 왔다는거냐?》

《아니 형님두, 그거야 제주도에 있을 때 안것 아닙니까.》

《음… 한데 그 앤 어데 있냐?》

《여기 와있습니다.》

《여기?!…》

성민은 일어나려 했으나 기력이 딸렸다.

해성이 황급히 그를 눌러앉히며 창호에게 눈짓했다.

창호는 주저하는 기색으로 성민을 보다가 돌아섰다.

《저들은… 어떻게 됐니?》

《딱 붙었습니다.》

해성이 히죽이 웃을 때 경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달라진 중년녀성이 머밋머밋 들어섰다.

겁먹은듯 한 눈길로 성민을 보던 그는 가슴팍에 안고있던 가방을 의자에 놓고는 소리없이 조용히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두손을 모아붙이며 조선절을 하였다.

《일어나거라.》

성민이 손을 내밀자 경자는 입술을 옥문채 두손으로 마주잡고는 눈길을 어데 둘지 몰라하였다.

《형님, 이건 신파극장면이니 웃어야 돼요.》

해성이 억지스러운 롱담을 해댔다.

《내가 너한테 편지를 썼댔다.》

《형님, 배달부역할을 제가 했습니다.》

성민은 경자의 낯빛이 파릿한것에 주의가 미쳤다.

해성이 통곡이 안 나와서인지 또 한마디 비추자 경자는 그때야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말을 했다.

구석쪽에 우두커니 서있던 창호가 경자를 찔 흘겨보며 궁색스럽게 말했다.

《그 편지는… 제가 실례되는줄 알면서도 선생님의 편지라서 먼저 봤습니다. 참으로… 생각도 많고 배운바도 컸습니다.》

《허, 그렇게까지야. 한데 이젠 선생님이 아니라 처삼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가.》

《네, 그렇구말구요.… 명심하겠습니다.》

창호의 눈굽이 벌깃해졌다.

《형님, 제가 더 놀랄 소리를 하랍니까?》

해성이 호기스럽게 물었다.

《하거라, 이젠 경자까지 있으니 끄떡없다.》

《그럼 말하지요.》

해성은 창호를 언뜻 보고는 의자를 침대 바투 당겨앉았다. 먼저 성민의 손부터 꽉 틀어잡고는 이제까지와는 판다른 침중한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저… 다른건 아니구 형님의 그것이 가짜였다는것이 밝혀졌어요.》

《그것이란건 뭔데―》

《전향이란거 있잖아요.… 명례라는 그 말뼉다귀같은 놈이 날, 날조했답니다.》

《그럴상싶다.》

《그럴상싶다니요. 이건 창호형이 안거구 이미 세상에 공개한거예요.》

해성은 안타깝다는듯 청을 높이며 피끗 창호를 돌아보았다.

창호의 얼굴색이 검붉게 변했다.

《선생님, 그건 사실입니다. 그놈으로 말하면 선생님만 아니라… 죄송합니다. 구체적인것은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창호형, 죄송이구 뭐구 말씀드려야지요.

형님, 이 창호형이 그 명례란 놈의 작간을 죄다 폭로했습니다. 태민형님을 죽게 한것까지… 그래서 지금 명례란 놈은 자기의 죄상이 공개되자 피거품을 물고 날친답니다. 이 창호형한텐 무기명전화에 무기명편지로 협박을 하고―》

《협박이라니?―》

《죽이겠다는거지요.》

《죽인다?!》

성민은 움찔하며 일어나앉았다.

자기로도 놀라운 일이였다. 온몸의 피가 와글와글 끓는것을 느끼며 해성에게 말했다.

《입원비가 얼마나 되니?》

《그건 무슨 소립니까.》

《당장 퇴원해야겠다.》

《퇴원이라니요?!》

《저 사람때문이야.》

그가 창호를 보자 두눈이 휘둥그래있던 창호는 당장 까무라칠듯 한 상이 되였다.

《뭐 달리 생각말라구. 임잘 지켜주자는걸세. 내 이래뵈두 한두놈쯤은 문제없어.》

성민이 정맥만이 앙상한 주먹을 쳐들어보일 때 간호부가 뛰여들어와 도대체 웬일이냐고 하며 야단법석을 했다. 성민에게 혈압계까지 들이대보고는 다소 안심하는 기색이였으나 해성을 보고는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나무람을 하며 다들 물러가라고 했다. 약속이란 이러루한 면회시의 주의사항일것이다.

해성이네가 나간 다음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이제 와서 밝혀졌대야 무슨 소용인가.)

자기의 전향이 명례같은자들의 조작극이라는것은 처음부터 짐작한것이였다.

그러나… 당국은 송환희망자들의 신청때도 수많은 가짜전향이 제기되였지만 아닌보살이였다. 그러니 다들 떠나간 지금에 와서 잘못했수다 하고 재차 보내줄리는 만무한것이 아닌가.

싸늘한 재바람이 가슴굽을 훑었다.

경자와 창호의 일이 풀린것으로 위안을 얻으려 했다.

창호는 문턱을 넘어설 때 눈물까지 글썽해 다시 오겠노라고 했다.

경자 역시 입술은 꼭 앙다문 상태였으나 곱게 절을 했다.

(그것이면 만족이지.)

온몸을 휩쓰는 피곤에 눈을 감은채 경자에게 썼던 편지들을 더듬어보았다.

―경자, 나는 이제 얼마후면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수 없는 길이다. 그래서 이곳의 가까운 사람들과는 거의다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할말도 다 했다. 그런데 가장 가깝게, 가장 따뜻이 품어보고 손도 잡아봐야 할 너와는 아득한 바다가 가로막고있구나. 어쩌면 바다보다 더 먼 마음속 간격이라고 해야겠는지. 너한테서 삼촌은 슬프게도 여전히 미운 삼촌일테니까.

긴말을 하지 않으련다.

우선 경호 아버지와 풀거라.

사람이 사람으로 제일 고통스러운것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헤여져 사는 일이다. 리유는 잘 모르겠다만 너희들은 무엇때문에 갈라져 산다는거냐.

물론 좋던 사이라도 상대가 나쁠 땐 헤여질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그럴만 한 리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내가 언젠가 말했다만 그 옴쟁이같은 추물이라면 백번 갈라지는것이 옳을것이다.

그러나 창호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질 않으냐. 그때문에 너도 그를 사랑했고 그 사람도 역시 너에 대한 정은 지금도 변함없는것 같다.

사랑! 사랑앞에서는 각자가 경건해야 하고 진중해야 하며 그 사랑을 고이 지킬줄 아는것이 참사랑의 륜리고 아름다움이 아니겠느냐.

난 네가 그 무슨 미국청년과 어울렸다는 말을 들었다만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고정한 사람도 때로 술취한 사람들속에 들어서면 그 비슷한 흉내를 내야 축에 드는것으로 되니 너도 그 비슷한 연기를 했다고 생각할뿐이다. 하지만 그런 날라리속에 계속 끼이고 연기에 익숙되면 그 고정함과 깨끗함에도 병이 들고 결국에는 타락과 자기 신세를 망치는길로 끝날뿐이다.

이것은 자기 일신사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앞에서 또 세월앞에서 지녀야 할 인간적본도와 사명과도 관계되는것이다.

너무 뾰로통해하진 말거라.

너의 할아버님은 일찌기 못난 세월에도 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군 했는데 이건 주위생활의 어지러움과도 싸워야 한다는것이고 나아가서는 어지러운 사회환경과도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왜정때의 그 험한 세월에 나라찾을 일념으로 싸운 애국자들을 돌이켜봐야 할것이 아니겠느냐.(그중에는 나의 외삼촌도 있다.)

그분들은 목숨까지 바쳐 인간으로서의 참삶을 빛내이려 했는데 가문의 《똑똑이》라구 본 네가 방랑아들속에 섞여 녀성으로서 더구나 조선녀성으로서의 아름다움마저 속되게 했으니 삼촌으로서는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때문에 너와 다투고 예까지 쫓겨와서 고독스레 있는 창호를 보면 더욱 그렇구.

아서라. 이제 네가 남편과 헤여져 그냥 산다면… 그리고 후날 그에 대한 후회로 인생의 석양을 슬픔속에 본다면 (꼭 그렇게 된다. 명심해라.) 너를 아끼고 잘되기를 바라던 부모님과 나에게도 같은 슬픔으로 될것이다.

그리고 아들애를 생각해라. 나는 지금까지 싸우고 헤여지는 부모들자식이 잘되는것은 아직 한번도 못 봤다. 네 아들도 너와 같은 식(식이라고 해서 안됐다.)으로 살면… 후날 그도 너를 버릴수 있다. 그건 각자의 《자유》와 자기만을 추구하는 그곳 사회악이 낳은 병페이니 네가 잘 시범을 보이구 편달을 한다 해도 어렵겠는데 지금처럼 살면 그가 앞으로 무엇이 되겠니.

간절히 부탁한다만 창호와 다시 손을 잡거라. 아버님도 어머님도 너희들 일때문에 밤잠을 못 잘 때가 많다고 한다.

이 말은 부부간의 헤여짐이 무엇이고 그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를 40여년세월 매일매시 맛본 나로서 하는 말이니 부디 명심하길 바란다.…

 

                                                                       제주도에서.

 

놀랍게도 매 글줄들의 단어까지 생생히 떠오르는통에 기뻤다. 자기병이 심근경색이라고 하지만 사색과 기억에는 조금도 손상이 없는것이다.

(그래, 헛된것은 아니였다. 할수 있는껏 했고… 비렬한 날조도 밝혀졌다.)

설사 세상사람들 다가 나를 오해한다 해도 이겨내야 하며 지금처럼 쓰러져서는 안될것이다.

칭찬을 바라고 사는 삶인가.

하지만 가슴속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순정이!》

입속으로 나직이 뇌이며 희읍스름한 천정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쩝절한 눈물도 마르지 않았고.

…복도에서 병원답지 않게 와당탕거리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처음에는 환각이려니 했는데 해성의 굵진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뭣때문에 들어가겠다는겁니까?》

《아… 이건… 당국에서 제정한것이라서―》

대답하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문이 열리며 해성이와 설화가 뛰여들어오고 그뒤로 제주도에까지 따라갔던 형사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밋머밋 들어섰다. 성민의 치뜬 눈을 보고는 허리가 90도 되도록 절을 했다.

《아버님!》

설화가 울음질린 소리를 내며 성민의 앞에 물앉았다.

《설화!》

해성이 엄하게 말하며 뒤따라 들어온 간호부를 눈짓했다. 간호부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있었다.

《무슨 일인지?》

성민이 영문을 몰라 이 사람, 저 사람 보자 설화는 눈물고인 눈에 방글방글 웃음을 실으며 서있었고 해성은 입술을 꽉 앙다문채 시계만을 흘끔흘끔 내려다보았다.

간호부가 성민의 팔에 주사침을 꽂고 약물이 들어가서야 해성은 입을 열었다.

《형님! 이제 15분가량 있다가 전화를 받으셔야 해요. 받을만 해요?》

《무슨 전환데―》

《허, 오후 종일 찾았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데도 집엘 찾았다나요.》

《아마 그 사람들 몰라서 당신을 찾은거지. 계속 찾았지만 받질 않더래요.》

형사의 말에 해성은 언짢게 쏴붙였다.

《병원에서야 정숙이 기본이니 전화호출차단을 한것 아닌가.》

눈에 피발이 선 해성은 휴대용전화기를 꺼내들고 성민의 침대머리맡에 앉았다.

여전히 엄엄한 낯빛이였다.

《형님, 이제 탐지기고문을 받던 때처럼 마음을 잘 가다듬으시라요.

저… 다름아니라 전화가 오는데 평양에 계시는 형수님한테서 오는 전화예요.》

《건… 무슨… 소리냐?》

《형수님이 말이예요. 지금 베이징에 와있는데 도착하자바람으로 계속 전화를 걸었대요. 젠장, 그 어른들이 조금만 성의가 있어도 낮에 받는걸.》

《낮에? 지금… 몇시냐?》

《8시 20분입니다. 8시 30분에 전화를 걸게 했으니 이제 인차 올거예요.》

《전화가?!…》

성민이 어떤 반응을 보였던지 해성이와 설화가 《왜 그래요?》하며 놀란 소리를 쳤다.

《음… 일없다, 일없어.…》

천정이 빙 돌아가는가싶더니 제자리에 멈춰졌다.

(믿었을가 아니면… 여하튼 마음속에는 재가 앉았을거야.)

입안의 소리로 천천히 수자를 헤였다.

마음속 고통을 이겨내기 어려울 때마다 하던 습관이였다.

삑― 하는 해성이의 휴대용전화기에서 호출신호가 울릴 때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2~3번인가 다른데서 오는 호출신호를 차단시키는가싶던 해성이가 《네, 네.》소리를 연방 하고는 손바닥 절반크기의 전화기를 성민의 귀에 바투 붙였다.

《나왔어요.》

성민은 그의 손에서 전화기를 받아쥐였다.

《나요, 지성민이 받습니다.》

《지성민?!…》

《그렇습니다.》

《한데… 왜… 이럴가. 목소리가… 정말 당신 맞아요?》

성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북받치는 오열과 감정의 분출을 막기에는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했다.

《순정이, 난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있소.… 하여튼… 미안하오.》

《그건 무슨 소리예요?》

《내… 말하자는건―》

《그래 어떤 말씀하시자는거예요. 저랑 애들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순정이다운 뾰족한 반발, 앵돌아지며 쏴보는 두눈이 보이는듯싶었다.

《그래… 다들… 애들이랑 잘 있소?》

《잘 있구말구요. 큰애는 인민군 대좌고 둘째는 외무성 지도원이예요.》

《그동안 수고가… 난… 맘고생만 시키구 끝내는… 당신과 애들한테 면목이 없게 됐으니… 용서하오.》

《여보, 건 무슨 소리예요. 도대체 동무가… 나의… 그전 동무가 옳아요?》

쨍― 하고 귀전을 치는 그 소리에 성민은 눈물을 삼켰다.

《거긴… 베이징이요?》

《네…》

순정이 역시 마음을 가다듬는듯 나직이 말했다.

《전 지금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말씀이 계셔 여길 온거예요.》

《뭐?― 국방위원장님께서?!―》

《그래요. 장군님께서는 절 보내시면서… 동무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여보, 들어요?》

《듣소!…》

《장군님께서는… 지금… 동무가 이처럼 못난이가 된것도 다 알고계셔요. 고민이 클거라구, 얼마나 괴롭겠느냐 하시며 아니다! 동무같은 사람은 절대로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해방전에 잘사는 집안형편에서도 우리 수령님을 따랐고 전시에도 전후에도 당을 따라 산 사람이 어찌 변할수 있겠느냐 하시며 자신께서는 그 누가 뭐라고 하든 당신을… 지성민동무를 믿는다고… 그러시면서 지금 당신은 고향과 처자들 생각때문에 더욱 괴로울것이라고… 그래서 저를 이렇게 비행기까지 태워 여길 보내주신거예요. 저의 목소리를 들려주구 그간 이야기도 나누고… 동무가 쓰러질가봐… 어떤 일이 있든지 조금도 락심하지 말고… 저와 아이들과 다시 만날 때까지 앓지도 말고 굳세게 살라고 하셨어요. 여보, 들으세요?…》

《듣소, 듣소.》

성민은 목이 꽉 막혀 더 말을 못했다.

《여보세요.》

《응.》

눈물을 닦았다.

《이제 말이예요.… 당신 무척 못쓰게 됐겠지요.…》

《응. 아니 쬐꼼…》

《쬐꼼?! 쬐꼼이라도 안돼요. 이제 당신과 만날 때 허리가 굽구 지푸라기처럼 메말랐다가는 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른 총각한테 시집가고말터예요.》

《허허, 그렇게 하자구. 나도 당신의 새별눈이 흐려지구 호물때기할망구가 되면 다른 체네한테 장가가구말겠소.》

《아이, 장해라!》

기뻐 뛸듯 하는 말에 이어 흐느낌이 터져 울렸다.

《여보… 순정이!―》

성민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자 본래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안됐어요. 너무 좋아서… 한데 조금 앓으신다던데… 정말 몸은 일없어요?》

《일없소. 내 앓는다는건 거짓말인거구. 내가 언제 앓는걸 본적이 있소.…》

《하긴 그렇지요. 여기 오신분들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강철같다구, 의지 강하구… 미장부이구… 또 뭐라든지…》

《못난이, 바보지.》

《호호, 당신은 여전하군요.》

《고맙소. 한데… 우리 그… 중매비나무가 그대로 있소?》

《중매비나무?!… 아이, 신통한 말 생각했군요.

그대로예요. 애들과도 가끔 가보는데 더 끼끗하고 멋있구…》

《흰수염도 있을거구.》

《아이, 겨울에 그렇지 지금이야―》

《한데 난 백발이요.》

《그럼 나도 백발이지요.… 여보, 그런 소리 말고 정말 애들을 봐서두 몸조릴 잘하세요.》

《걱정마오. 난 이제부터 조금도 앓지도, 늙지도 않겠소. 그전에 내가 하던 말 있지. 세월앞에서―》

《못난 세월 말이지요.》

《그거요. 못난 세월에도 지지 말아야 되구 싸워 이겨야 하는데 난 이제부터 가는 세월과 싸우겠소. 당신한테, 별님한테 채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말이요.》

성민은 으스러지게 전화기를 틀어잡고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집으로 가면 꽃다발 두묶음을 가지고…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녀사님을 가뵙고… 내 몫까지 인사를 올려주오. 경애하는 장군님께는 내가 편지를 쓰겠소. 이 세상 나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 대를 이어 위인들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건… 순정의 사랑이 후광으로 비쳐진때문이요. 여보, 듣소?》

《들어요. 그리고… 나 역시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것도 잊지 마세요.》

다음날 성민은 병원문을 나섰다.

담당의사는 그가 나가겠다는 소리에 무척 놀랐으나 심전도검사를 마친 뒤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였다.

《선생님은 30대 젊은이의 심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건… 우리 장군님의 지시구… 나의 처가 요구한거요.》

그날 저녁 성민은 정창호가 언론계에 공개한 록음테프를 들었다. 성민이 제주도로 갔을 때 명례와 태민형이 주고받은 말을 수록한 테프였다.

태민형의 죽음은 바로 명례가 찾아온 그날 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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