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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나흘째 폭풍치는 바다는 급한 배길도 막아버리고있다.

쉬임없이 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의 광란, 크지 않은 배들은 죄다 뭍으로 올라왔고 도크쪽의 큰 배들도 가랑잎처럼 흔들거린다.

《형님, 그만 들어갑시다.》

비물에 후줄근히 젖은 해성이가 을씨년한 얼굴로 돌아서는 바람에 성민이도 맥없이 돌아섰다.

제주도에 온지도 엿새가 넘었다.

성민이와 해성이 물에 함뿍 젖은 몸으로 항만려관에 들어서니 홀가운데 탁에서 신문을 보고있던 담당형사가 황급히 마주왔다. 북송될 비전향통일수라지만 의연히 보안관찰대상이니 끝까지 돌봐주려 따라온 형사였다.

《감기들지 않겠어요. 너무 걱정되여 방금 나가보려던 참이였는데.》

퍼렇게 얼어든 해성이와 성민을 본 그는 이렇게 인사성을 보이고는 《서울에서―》하며 말을 계속했다.

《선생님 찾는 전화가 왔는데요. 두분을 찾다가 나오지 않으니 걱정이 크시더라구요. 바다물녘에 나가 물세가 잦기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성민은 해성을 피끗 보았다. 그 눈길에 해성은 우비안쪽의 휴대용전화기를 꺼내고는 눈섭을 찌프렸다. 통화차단장치에 불이 꺼진것을 봐서 모름지기 비바람과 파도소리때문에 못 들었을것이다.

《그래 무슨 전화입니까?》

《정창호라는분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경호 어머니가 뉴욕―서울항로루 방금 도착했답니다.》

《그밖에 다른 말이 없었습니까?》

《저… 형님되시는분의 장례는 국장으로 하기때문에 래일 아침에 시신을 내간다고 하면서… 그걸 알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저도 지장군의 장례식엔 꼭 조문하려고 하였는데…》

《고맙소.》

성민은 계단을 오를 때도 다리가 휘청거려 해성의 부축을 받았다.

비물을 대충 닦고 호실의자에 앉으니 온몸이 천길나락속으로 잦아드는듯 했다.

여느때면 경자가 왔다는 소리에 기쁨이 컸겠으나 그 일도 별반 힘이 되지 않았다. 뭔가 육신도 정신도 병이 든듯싶었다.

《해성아, 내 좀 눕겠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런닝그바람의 해성의 둥싯한 어깨와 탐탁한 가슴팍을 보며 침대에 누웠다.

잠시나마 모든것을 잊고 잠이라도 들어볼가 했으나 중중첩첩 아픈 생각만이 겹쳐들었다.

정말 모를 일이였다.

사흘전에 걸려온 정창호의 전화에서 태민형이 사망되였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였다.

물론 태민의 나이에서 있을수 있는 일이지만 성민으로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였다. 그간 심근경색같은 소리는 전혀 없었고 지응석아주바이와 화해를 한 뒤부터는 기분상태도 무척 좋았다. 성민이 떠나오기 전까지 뻔질나게 해성이네 집을 찾아와서는 쩍하면 롱담이였고 고향시절이야기로 웃음판을 펴놓기도 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속옷주머니에 태민이 려비로 쓰라고 억지다짐으로 준 돈봉투가 만져지자 속이 더 쑤셔들었다.

《혹시… 모른다. 나도 너와 함께 따라갈지…》

태민의 말이 귀전을 쟁쟁히 울렸다.

(《혹시 모른다》?!)

형의 이 말은 결국 자기의 최후를 예시한 말이 아니겠는가.

깜풋 잠들었다가 깨여보니 설화가 저녁식사를 하자고 그를 일쿼세웠다.

설화도 통일애국투사들의 령전에 인사도 올리고 성민의 취재사업을 돕겠다고 하며 여기까지 따라왔다.

식탁에 마주앉은 설화는 오늘 권교장에 대한 자료정리까지 끝냈다고 하며 깜찍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전 오늘 글을 쓰면서요 뭘 생각했나 하면 멋진 소설을 구상했어요. 제목은 〈산 얼과 죽은 넋〉, 〈죽은 넋〉이라면 로씨야의 작가 고골리의 제목같아 좀 안스럽지만 참삶의 빛남에 대한 이메지가 함뿍 비쳐지지 않아요. 주인공은 물론 선생님이시구요.》

《허허, 그래 써봐라.》

설화는 글재간도 대단했다. 성민이 몇줄 쓴 자료를 옹근 몇장의 원고로 만들었고 제가 알고있는 자료들까지 보충하면서 제나름의 멋진 분석도 가했다.

하여 설화를 볼 때면 늘 가슴이 후더워지군 한다. 려아의 일로 하여 더욱 그랬다.

여기로 오기 전에 있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조국귀환을 축하하는 대학가 써클공연때의 일이였다.

사회자들이 뒤바뀌는 속에 전대협출신자격으로 설화가 무대석에 나왔을 때 그의 뒤로는 웬 조선치마저고리차림의 녀인이 수집은 미소를 보이며 따라섰다. 대학생들의 무대에 중년을 훨씬 넘은 녀인이 나타난것이 자못 의아스러워 고개를 뽑아들 때 마이크를 들고 섰던 설화가 생글웃음을 지으며 소개말을 하였다.

《존경하는 비전향장기수선생님들과 여러 선배님들, 열혈의 후배들에게 한시절 유명한 쏘프라노가수였으며 저의 음악교사였던 려아선생님을 인사시켜드립니다.

고향은 북관 라진, 북으로 가시는 선생님들 축하하고 애향담은 마음을 전하고저 무척 힘써 아껴 준비한 노래 한마당! 귀밝혀 들어주세요.》

려아는 한시절 솜씨여서인지 별다른 쑥스러움이 없이 나부시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는 손마이크를 높이 쳐들었다.

《존경하여 마지않는 북송선생님들! 고향길을 축하합니다.》

일시에 우렁찬 박수가 일었다. 그러자 려아는 약간 당황해하는 기색이였다. 하는 말도 떨렸다.

《저는 설화양이 소개말씀에서 하신것처럼 이북이 고향입니다.

하여 먼저 〈눈물젖은 두만강〉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어릴적에 저도… 눈물속에 건너봤던 두만강!… 이젠 늙어 목소리 이쁘지 못해도 너그러운 맘 가지시고 들어주세요.》

눈물젖은… 성민은 가슴이 울컥해졌다. 목단강으로 갈 때 철다리밑으로 흘러가던 두만강의 검푸른 물결이 떠올랐고 려아와 만나고 헤여지던 일까지 굽이쳐 떠오르며 목이 꽉 메여올랐다.

애잔하게 떨리며 울리는 흐느낌같은 노래가 요란한 박수속에 끝나자 려아는 손에 든 마이크를 휘저으며 단우에 설치된 고정마이크대앞으로 한걸음 다가섰다.

《선생님들, 저는 참삶을 살려는 마음을 전하고저 이 무대에 나왔습니다. 선생님들 마음따라 선생님들 마음담긴 노래로 마감하렵니다.》

려아는 잠시 숨을 톺는듯 객석을 보다가 은근하면서도 정감어린 목소리로 운을 떼였다.

성민은 놀랐다. 언젠가 설화의 편지에 씌여졌던 《선생님마음》, 조선예술영화의 한 주제가였다.

 

                                그대가 한그루 나무라며는

                                이 몸은 아지에 피는 잎사귀

                                찬바람 불어와 떨어진대도

                                흙이 되여 뿌리 덮어주리라

                                아 나의 조국아

                                흙이 되여 뿌리 덮어주리라

 

마지막소절까지 다 부르고난 려아는 《아 나의 조국아 나는 영원히 그대의 아들》이라는 후렴이 끝나자 두손을 높이 쳐들며 웨쳤다.

《선생님들 마음따라 저는 통일조국의 흙이 되고 피가 되고 순간을 산대도 값있게 살겠습니다.》

온 객석이 환호를 보냈다. 구석구석 서있던 경찰들도 입이 헤벌려져있었다. 모름지기 이북불온가요로 추궁을 받게 되면 《저희야 그걸 압니까.》라는 식으로 모르쇠를 할것이다.

성민은 공연이 끝나기 바쁘게 무대뒤로 달려갔다. 그러나 려아는 만나지 못했다.

설화를 통해 려아가 자기에 대한 좋은 추억만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급히 숨어버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저녁밥을 조금 든 다음 다시 자리에 누웠어도 성민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설화와 려아에 대한 생각으로 그닥 속뒤짐은 크지 않았으나 태민형의 죽음과 조상집의 어수선할 광경을 그려보게 되니 가슴이 비틀려지는듯 했다.

여느때면 그동안 쓴 글과 자료들을 놓고 씨름질을 하느라면 웬만한 고통쯤은 잊겠건만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다.

더구나 경자와 창호의 일까지 겹쳐드니 앞으로 평양에 가서도 이것이 짐으로 될것은 분명한 일이여서 시름이 컸다. 그지간 후회될 일들이 있을가봐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인사도 다했고 책점을 하면서 얻은 푼돈으로 설화의 학교에도 얼마간의 기부까지 했다.

그런데 채 못한 일이 바로 경자와 창호의 일이였다.

《삼촌은 미워.》

경자는 언젠가 그때처럼 얼굴이 새파래서 달려들수 있다.

《감옥에서 시들다빠진 삼촌이 뭘 안다고 이래라 저래라 해요.》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새벽에야 잠이 들었던 성민은 《배가 뜨게 되였다.》고 하며 뛰여드는 해성의 목소리에 벌떡 깨며 일어났다.

 

바다물은 폭풍뒤에 흔히 그러듯 검스레하게 흐려있고 뿌리채 뽑혀진 해초들과 판자부스레기며 비닐쪼각들이 너저분히 떠있었다.

말큰한 손이 성민의 두눈을 가리웠다. 청신한 샴프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설화냐?》

《맞혔군요.》

설화는 빙그레 웃으며 성민을 뺑 돌려놓고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바다물을 자꾸 내려다보면 어지러워진다고 하잖았어요?》

《그래, 그렇지.》

성민은 이 섬으로 오는 배에 올랐을 때 설화에게 멀리 앞을 봐야 멀미도 덜하고 기분도 좋아진다고 말했었다. 설화가 지금 그 말을 상기시키는것은 태민형의 일때문에 자기가 너무 상심하는것이 걱정스럽기 때문일것이다.

성민은 선수란간에 가 선 설화가 해성이와 뭔가 소곤거리는 모습을 보자 엉뚱한 욕심이 치받쳐 싱글서 웃었다.

그들 둘이 짝을 무었으면 하는 욕심때문이였다. 오늘 처음 느껴보는것이 아니였다.

해성이의 그전 처는 해성이가 류치장살이를 하게 된 다음날로 리혼을 선포하고 집을 뛰쳐나갔고 설화 역시 홀몸이였다.

그의 애인이였던 청년은 어느 한 시위때 총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경찰들과의 싸움끝에 잘못되였다.

성민이 지금까지 이 짝을 무었으면 하는 욕심을 비추지 못하는것은 바로 그 청년의 최후에 대한 애석함과 존중때문이였고 그를 잊지 못하는 설화에게 모욕으로 될수 있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젊음은 사랑을 바라는것이니 어느때건 마음의 화합만 이루어지면 불길은 일어날것이 아닌가.

봄의 꽃씨와 같이 조용히 싹이 트고 순이 솟고 줄기가 자라서 봉오리가 맺히고 열릴제면 애모쁘고 숫된 마음이 자오록이 넘쳐 타오르며 향기로, 색갈로 되여 밤이고 낮이고 님을 그려 사랑의 분출에 림한다.

거기서는 녀성이건 남성이건 매한가지다. 자연과 다르다면 간절한 욕구와 소망을 자기식으로 위장도 하고 숨기기도 하며 조심스레 살짝 비추는가 하면 때로는 포효하는 사자와 같이 리성도 뭣도 다 잊고 광열의 절정에서 몸부림치고 울부짖는다.

이럴 때면 짝사랑이란 없다. 진정한 사랑, 거세찬 사랑의 불길이란 자기 하나의 마음속 짝사랑으로는 성립이 되지 않기때문인것이다.

그렇게 볼 때 짝사랑이란 순간의 불꽃이고 저홀로 타다가 마는 불길일뿐이다.

그것은 불길이 일자면 연소제가 필요하고 산소가 있어야 하듯 대방의 눈빛과 호흡에서 그 연소제의 불꽃과 산소의 전달이 없다면 타드는 심장은 괴롭게 꿈틀거릴뿐 서서히 식어드는 쇠덩이로 되는것이다.

그렇게 한쪽만의 사모만이 있고 끌려옴이 없을 때 애꿎게 가슴을 태우며 손짓하는것은 지꿎은 욕망이 빚어내는 어리석음이고 남의 령지에 수레를 모는것과 같은 무례라고 해야 할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외면과 랭대를 극복하고 점령하는것을 남성의 장끼로, 진지한 사랑의 모범으로 떠들기도 한다.

(우린… 그러지 않았어.)

성민은 안개자욱한 바다를 보며 순정을 애틋이 그려보았다.

1957년 봄 모란봉 청류벽쪽의 버드나무에 기대섰던 순정은 흘러가는 강물을 즐기듯 보다가 성민에게 돌아섰다.

《동문 왜 장가를 안 가지요?》

장난기어린 그의 눈에는 비웃음이 어린듯싶고 말투는 쌀쌀했으나 성민은 대뜸 몸이 건공중에 뜨는듯 했다. 머리속에 온갖 대답이 떠올랐으나 말을 뗄수가 없었다. 순정의 재차 하는 말은 놀림조였다.

《듣자하니 한다 하는 기자여서 다들 우러러 본다고 하는데… 동무의 그 중절모만 나타나면 처녀들이 줄지어 따른다더군요.》

《허허, 난 아직 그런걸 한번도 못 봤소.》

가슴은 화당탕 뛰고 언제부터 품고있던 공상이 마구잡이 날개바람을 일으켰다.

351고지전투시, 대학생출신들을 다시 대학으로 보낼데 대한 명령서를 받고도 그냥 전선에 남아있을 때 성민에게 써보내온 순정의 편지가 공상의 첫 날개를 달아주었다.

―동문 왜 대학으로 오지 않았는가요.… 총정치국에까지 찾아가서 다시 알아보니 본인의 강경한 요구에 따라 제외되였다고 하더군요. 잘못되였는가 했는데… 제가 얼마나 가슴죄였는지 알아요. 살아있다고 하니 이젠 일없어요. 하지만 동물 보지 못하니… 섭섭하군요―

그때 성민은 전쟁승리후에 꼭 가겠다고 하며 가지가지 사연을 담아 긴 편지를 써보냈으나 왜 가지 않으려 했는가에 대해서만은 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에 대한 순정의 정에 가슴들먹였을뿐이였다.…

《그러니 총각으로 늙겠다는거예요?》

순정이 재차 쏴붙이는 말에 성민은 동무는 왜 시집을 안가느냐 하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으나 그에 대한 대답이 두려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뭔가 조롱하는듯 한 눈빛과 마주치자 사내다운 반발심이 치밀었다.

《그럼 어디 한명 소개해주구려.》

《대상소개를요?》

《그렇소.》

성민의 우울해하는 대답을 듣자 순정은 누군가를 찾는듯 사위를 두릿거리다가 성민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찾았어요.》

《누구요?》

성민이 얼어드는 혀로 간신히 이 말을 했을 때 순정은 나무잎사귀를 재빨리 훑어 성민의 가슴팍에 던졌다.

《바로 그거예요.》

순정의 얼굴은 숯불처럼 타오르고 이제껏 여무지게 반짝이던 눈길은 허둥이였다. 성민은 심장이 멎는듯 한 속에 공상의 날개깃을 묶고있던 생각을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난 동무와… 다릅니다… 내가 전선에 그냥 남은것도 그렇고… 못난인데다가… 계급적환경을 봐도… 동무와는… 어림없소.》

《에이― 바보!》

또다시 나무이파리가 날아들었다.

장미처럼 타는 얼굴, 별같은 눈!

성민은 더는 자신을 억제할수 없었다.

성민의 거센 팔에 안긴 순정은 숨찬 소리로 말했다.

《전… 동무가… 이렇게 바보기때문에… 더 좋아해요. 그 마음을, 인간으로 참답게 살려는 그 마음을 말이예요. 그리고… 미남자이고―》

성민은 그때처럼 넘치는 환희와 애정의 회오리바람속에 순정의 따스한 체온을 느꼈고 마디마디 울려오는 목소리에 마파람속의 산불처럼 거세차게 타오르는 광열의 태동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제 얼마후면…)

다시 만날 순간을 그려보니 심장이 튀여나올듯 뻐근했다.

(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지.)

심장마비를 경계해야 했다.

붕― 하는 배고동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뭍이 보였다. 그러자 형의 묘소에 찾아갈 일과 비록 순간이지만 안해에 대한 생각에 파묻혀있은것으로 사람의 리기주의란 이런가 하며 한숨을 지었다.

성민이와 일행이 서울에 이른것은 다음날 아침이였다.

역에서 한동안 말다툼이 벌어졌다. 동행한 형사가 성민이들의 도착정형을 먼저 해당 경찰서에 보고한 다음 움직여야 한다는때문이였다.

보안관찰대상은 떠날 때도 그렇지만 돌아온 다음에도 그 즉시 과정사를 보고하게 되는것이 법인것이다.

성민은 근친상가의 조문례절과 도덕을 가지고 형사를 몰아치는 해성이와 설화를 만류하고 형사님 요구대로 하자고 했다.

택시에 올라 경찰서에 이르니 형사가 한발 앞치기로 나섰다.

왜서인지 당황한 기색으로 맞는 담당경찰관에게 그간 아무 일도 없었으니 성민을 당장 형님묘소에 보내야 한다 하며 한급 높은 형사로의 위세까지 보였다.

그런데 다른 때라면 형사의 이같은 담보에 《예.》하고 나갑시다라는 고개짓을 할 담당경찰관은 을씨년한 얼굴로 좀 기다리라는것이였다.

《그건 뭣때문이요?》

성민이 말을 떼기 바쁘게 형사 역시 자기의 위신마저 납죽하게 짓뭉개는 경찰관을 아니꼽게 노려보자 경찰관은 잠간 있으면 알 일이라고 하며 전화통을 들었다. 누군가를 찾더니 《왔습니다.》하는 말을 하고는 《예, 예.》한 끝에 해성이와 설화는 그만 나가보라고 하였다.

《도대체 무슨 일때문입니까?》

《뭐 잠간만 기다리면 되겠습니다.》

《우린 무엇때문에 나가라는거요?》

해성이가 울퉁그러진 소리로 묻자 담당경찰관은 성민이를 슬쩍 훔쳐보고는 나가지 않겠으면 그냥 있어도 된다고 했다.

설화에게는 미안했다는 기색으로 웃어보이고 형사에게는 눈을 한번 끔쩍하는것으로 우리야 다 통하는 사이가 아닌가 하는 빛을 보이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다들 서름해 얼굴만 마주보는데 경찰관은 다반에 차잔들과 과자쪼박들을 담고 들어왔다.

《좀 입놀림들을 하시죠.》

매정스럽게 발길을 얽어매는 경찰관이라지만 호의적인 인사를 뿌리칠수 없어 씁쓸한 차물을 줄금줄금 마시는데 다급한 발걸음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더니 머리를 매끈하게 빗어넘긴 사복쟁이가 들어섰다.

《아, 이거 기다리게 해서 안됐습니다.》

례절맞게 깍듯이 인사말부터 하는 그는 성민이 송환수속을 할 때 만났던 적십자사 역원이였다. 자그마한 가방을 책상우에 놓다가 해성이와 설화에게 눈길을 멈추었다.

《이분들은 누구시죠?》

《내 친척들이요.》

《그러심 계셔두 되겠습니다.》

역원은 가방의 번호쇠를 열고는 뭔가 꺼낼듯말듯 하다가 송구스런 눈길로 성민을 보았다.

《저… 건강은 어떠신지요?》

《뭐, 늙은게 건강자랑이야 못할거지만… 이렇다 할 탈은 없습니다.》

《네, 그렇겠습지요. 선생님들이야… 특별한분들 아니십니까.》

역원은 어금이쪽의 금이까지 드러내보이며 활짝 웃고는 못내 딱하다는 기색으로 형사며 해성이들까지 빙 둘러보고는 성민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떼였다.

《참 이거 말씀드리기 거북합니다만… 선생님의 북송은… 기각되였습니다.》

《무슨 말씀인지요?》

《저… 해당 기관에서 제기된것인데… 선생님은 에… 저희들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향을 하신것으로 되여서… 갈수 없게 되였습니다.》

《…》

성민은 방안이 빙― 휘돌아가는것을 느꼈다. 해성이와 설화의 입에서 뭔가 울부짖음 비슷한 소리가 나오는것도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그건… 무슨 착각이나 오해가 생긴것 같은데요.》

성민은 혀가 굳어지며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지난 기간 가짜전향서를 만드는 위조행위가 있다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자기에게는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다는것만을 생각했다.

역원은 차마 마주보기 어렵다는듯 눈길을 내리깔고있다가 뭔가 결심한듯 가방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들었다.

《안됐습니다만… 여기에 그 증거가… 선생님 쓰시고 날인하신 문건이… 이겁니다.》

그가 내미는 종이장을 해성이가 나꿔채듯 받아들었다.

《우리 형님은 이런걸 쓸수 없소.》

해성의 거치른 소리에 이어 《아.》하는 설화의 신음비슷한 소리에 성민이도 그 종이장에 시선을 주었다.

방안이 또 한번 빙―휘돌아가는것 같았다.

글밑에 찍힌 지문은 누구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향한다고 쓴 글씨만은 성민의 글체였던것이다.

온몸의 피가 밑으로 싹 빠져내리는듯 한 속에 가까스로 말을 떼였다.

《난… 이런걸 쓴 일도 없고 나올 때도 지금도… 전향자는 아니였소. 관에서도 그렇게… 인정받고―》

순간 번개치듯 떠오르는 생각이 뇌리를 쳤다. 사면석방이라고 하면서도 어딘가 당혹해하던 교도소소장, 이곳에서의 거취수속이 한나절새 끝나던 일…

마지막힘을 짜내며 말했다.

《이건 분명… 위조입니다.… 이런걸… 만드는것이 당신네들―》

말은 하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여 재차 말을 떼려는데 심장한구석에서 뭔가 툭― 소리가 나는것 같았다.

《그래서 난… 이걸… 무효라고―》

성민은 자기 몸이 기울어진다는것을 알았다. 누군가의 《악.》하는 소리와 함께 거무스레한 형체가 움직이는가싶더니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의식을 잃었다.…

성민의 트렁크에서는 쓰다만 편지들과 수신인주소를 몰라 보내지 못한듯 한 편지 몇통이 나왔다. 거기에는 경자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다.

태민이의 3년제를 치른 다음날 옥영이네 집에서는 이 편지로 하여 약간한 소란이 있었다. 창호가 집을 뛰쳐나갔던것이다. 량심선언인지 뭔지 한다고 하며 가막소(감옥)밥을 먹겠다고 하는 그를 옥영은 물론 경자도 해성이도 돌려세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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