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1
편지들은 하나같이 보풀져있었다. 마음이 울적하거나 그늘이 질 때마다 밝음과 따스함을 찾아 펼쳐보는 편지다.
존경하는 지성민선생님께
진종일 기뻐 웃는데 응주라는 학생이 왜 좋아하나 묻길래 30여년 감옥살이하시는 할아버지한테서 편지를 받았어 했지요. 순간 《30년이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왜 감옥에 갔느냐고 묻겠지요. 간단하게 말해주긴 했는데 쉽지가 않았어요. 분단을 설명하는것도 어려울뿐더러 전향을 하지 않은것이 죄가 되고 전향을 하지 않은 사상이 뭔가는 저로서도 다 설명하기 어려웠거던요. 그러니 계속 묻지요, 감옥엔 나쁜 사람만이 가게 된것이 아닌가 하며. 막 안타까왔어요. 철없는 아동이고 제한된 환경에서 자라온 풋초록 망울이지만 짭짤히 눈물을 쏟게 했어요. 《애들 욕하면 안돼.》하고 선생님 나무람하실줄 알면서도 성을 냈어요.…
그럼 제가 왜 장애자학교 교사가 되였는가 하는 선생님 질문에 답변을 드리겠어요.
여기엔 우선 선생님의 감화로 갱생을 얻으신 아버님의 유지가 크게 작용했어요. 《나 인생 잘못 살았어. 세상탓이야, 이렇게 말할수도 있다만 꼭 그런것만 아니야. 그러니 너락도 참삶을 살아. 나 속죄가 너 순결로 도움되게.》
재벌의 파수군이라 아버님 고민 컸어요. 깡패들과의 싸움에서 감옥살이몸이 되고 그 여독으로 떠나가실 때에야 참삶의 깨달음을 얻은 아버님이시지만 선생님께서 선하게 추억해주시리라 믿어요.
다음으로 꼭 찍어 밝힌다면 선생님 크고크신 사랑마음 받아들인것이랍니다. 분단조국의 고통을 안고 몸부림치는 선생님, 하나된 민족을 위해 희생의 제단에 한생을 아낌없이 던지는 선생님 그 마음을 해발로 자그마한 가슴 크게 넓히려 한것이예요. 불쌍한 애들 위해 사랑등불 되자고.
저의 장애자학교는 선천성불구가 태반이지만 아빠엄마 잘못 만나 (아빠엄마 탓만이겠는지) 불구로 된 애들도 적잖아요. 응주라는 애도 그런 애예요. 아빠엄마싸움이 애한테까지 뻗쳐 우울증과 마귀환각증이 생겼거던요.
일은 고되여요. 잠재우기, 투정받기… 저의 교수란 옛말얘기가 기본이예요. 콩쥐팥쥐이야기부터 백두산이야기, 선생님이야기… 이런 옛말을 들려줄 때면 지각장애아동들도 눈이 올롱해 재미난다고 해요.
지금은 밤 12시 반, 선생님을 그려보며 졸음을 이겨내요. 이제부턴 애들 기저귀를 빠는 시간이예요. 사진을 동봉해 올립니다.
1996년 12월 10일
설화 올림
보고싶은 선생님께
선생님 생신날에 맞춰 손수건 2개와 봄내의,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손수건과 봄내의는 반입품목이 아니라는 금지훈시와 함께 편지까지 되돌려보냈더군요. 그전에도 언젠가 사탕이 되돌아왔을 때 편지만은 가닿았던데 이번에는 편지마저 되돌려보내니 《문민정부》의 허구성에 개탄을 금할수 없습니다.…
1997년 3월 30일
설화 올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숨통이 트이지만 지난 주까지만 해도 말그대로 찜통같은 더위였어요. 어떻게 견뎌냈는가구요. 선생님을 그리며 이겨냈어요. 0. 75평, 선생님 건강이 걱정되여요. 하지만 이것도 부질없는 소리겠지요.
얼마전 시인 고은선생의 작품을 올리는 대학가 써클공연때였어요. 여기서 제가 누구를 만난지 알아요. 저의 어릴적 음악교사였던 려아선생님을 만났어요. 통일수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구요. 그런데 어릴적 저한테 들려주던 통일수가 선생님이시였다는것 오늘에야 밝히겠지요. 년전에도 쓴것 같은데 제가 애들한테 옛말을 자주 한다고 했지요. 그 옛말이란 바로 려아선생님한테서 배운것이랍니다. 음악은 심혼의 호흡, 슬픔의 하모니라고 하며 철가락없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옛말도 들려주군 했답니다. 그중에도 《멀고먼 옛날에―》하며 한 소년과 소녀의 우정을 말할제면 눈에 핑그르 눈물까지 고이군 하셨습니다.…
전 려아선생님을 자주 만나군 해요. 길거리에서도 만나고 집에 가서도 만나고, 지난 기간에는 넌 왜 음악을 안했냐, 하필이면 장애자교사를? 하는 질문을 당할 때면 적당한 얼버무리기로 굼때군 하였는데 이번에는 존경하는 성민선생님을 따라배우련다고 했더니 부럽다고 하는것이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가 저에게 남기고 간것은 쓸쓸한 웃음뿐이였어요.
선생님, 려아선생님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그 슬픔은 무엇일가요?
1998년 8월 30일
설화 올림
오늘 저의 학교의 세 아동, 바로 제가 글을 배워준 애꾸러기들이 그곳 선생님들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선생님한테는 위정 쓰지 않게 했습니다. 왜냐구요, 그건 제가 그 애들한테 선생님을 빼앗길가봐 두려워서였지요. 호호, 욕심아줌마 됐지요.
요즘은 선생님께서 념려해주신대로 하루 세끼 밥도 잘 먹고 잠도 뒤척이는것 없이 달게 잡니다. 이렇다해 선생님 주신 과제(숙제?) 다 푼건 아니예요.
사회와 인생, 민족과 나… 자리길은 명백했어요.
선생님모습 기발이니까. 하지만 언제면 그 심층에까지 가닿을가, 남은 숙제는 이것이예요.
끝으로 선생님한테 노래 한곡 배워드리겠어요. 이즈음 대학가의 선풍이랍니다. 제딴으로는 《선생님마음》이라 제목을 붙여봅니다.
그대가 한그루 나무라며는
이 몸은 아지에 피는 잎사귀
찬바람 불어와 떨어진대도
흙이 되여 뿌리 덮어주리라
건강 또 건강!
1998년 10월 30일
설화 올림
성민에게는 차설화의 이 편지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온 편지들이 있었다.
대부분 남조선운동권단체성원들이 보내온 편지고 멀리 해외에서 보내온 편지도 있었다. 그중에 제일 많은것이 해성이와 설화의 편지였다.
정창호도 두번인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는 경자도 인사를 보낸다는것으로 써있으나 그닥 믿을것이 못되였다.
설화는 면회도 여러차례 왔다.
암흑가의 왕초라고 하던 호은에게 어쩌면 이런 딸이 생겨났을가 할 정도로 순결하고 발랄한 처녀였다.
차호은의 최후를 생각하면 눈물을 머금기도 했다. 서울대학생들의 반미시위때 경찰들이 애어린 학생들을 두드려패는것을 목격하게 된 차호은은 그 란투속에 뛰여들어 힘장사의 용력을 과시했다. 그통에 호은은 재판정에 올랐고 검사의 기소에서는 반미《죄》에 재벌깡패로서의 죄목들까지 겹쳐 10년형을 먹게 되였다. 돈이 활개치는 세상에서 그의 상전재벌이 조금만 힘을 써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겠건만 그 재벌이란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재판때 뇌졸중을 일으켜 반신불수로 된 호은은 교도소감방에서 한많은 세상을 마쳤다. 다행스러운것은 성민의 지기들― 비전향장기수들이 마지막까지 그를 돌봐준것이다. 호은은 정신이 맑을 때도 그랬지만 죽는 날에도 성민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고 한다.
성민은 이야말로 이 땅의 얼이요, 이 나라 사람들의 량심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리화녀대를 졸업한 설화는 처음부터 올곧은 길을 걸었다. 전대협(후날의 한총련)일군으로 첫 걸음을 뗀 그는 오늘날 불구로 된 아이들을 위해 자기를 바치고있다.
얼마나 이쁘고 참된 마음들인가.
해성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심정이였다.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며(올해 86살인 지응석은 통일이 될 때까지 절대 죽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모질게 삶을 지켜가는 형편에서도 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성업을 위해 헌신하고있었다. 차호은과 함께 류치장생활을 하였으나 그것으로 하여 재벌과는 완전히 손을 끊고 식당업을 하고있고 틈만 있으면 성민이를 찾아오군 했다.…
성민은 옥영이가 차입품을 가지고 왔을 때 남긴 보자기에 편지들을 정히 싸넣었다. 보자기안에는 편지와 함께 30년나마 그의 몸을 감싸준 내의 두벌과 양말 한컬레가 있었다. 너무 깁고기워 원바탕보다 기운 실줄이 더 많은것이였다. 그 내의와 양말을 기울 때 쓴 바늘은 내의 목깃에 감춰두었다. 검방에서 걸리면 자살용구나 가해흉기로 인정되여 되게 경을 치게 되는 바늘이였다.
성민은 해그림자가 짧아진것을 보며 신문을 집어들었다. 감옥살이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 이때였다. 짚검불속에서 낟알을 찾아내듯 꼼꼼히 읽어가느라면 국제국내정세로부터 조국소식도 반쪽낟알만큼 찾아볼수 있기때문이였다.
신문 1면 부제목으로부터 5면, 6면, 7면을 훑던 그는 《전통의술 경주 김 의원씨와 만나―》하는 대목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이전의 국군공로자이신 지태민씨를 낫게 해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맞습니다. 그분입지요. 그분께서 여러 병원을 전전하시다가 저한테 오셨는데 약뜸 몇장과 침으로 완쾌를 보셨지요.―
―뇌졸중치고는 매우 중하다고 하셨던데―
―암, 심했지요. 자칫하면 이 세상을 하직할 중환이였습니다만 고쳐드렸지요.―
―예후는 어떨가요?―
―섭생과 운동치료를 잘하셔야지요. 그건 제가 다 알으켜드렸으니 90살까지는 장담합니다. 요즘에 또 그분 비슷한 중환에 누워계시는 국회의원 한분을 치료하는중인데요.…―
성민은 어둠이 짙어지고 흐릿한 별빛이 뙤창가를 쓸 때까지 그냥 한자리에 앉아 태민을 생각했다.
별빛이 비쳐드는 뙤창쪽을 보느라니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하며 놀던 어릴적부터 마지막으로 태민을 본 일까지 삼삼히 떠올랐다.
성민에게서 태민은 이미전에 단념한 죽어가는 존재였다. 태민도 마찬가지일것이였다. 서로의 자기마당속에 끌어들이려던것이 실패한데서 서로를 죽은 존재로 치부하게 되는것이고 이로부터 마음과 기억속에서도 서로의 봉분을 쌓게 되는것이다.
하지만 단념속에서도 존재는 존재인것이다. 실제의 존재일뿐만아니라 마음속에서도.
1979년 박정희가 측근의 심복에게 살해되였을 때 성민은 기억의 무덤속에서 태민을 다시 끄집어냈다. 온 세계를 들었다놓은 《나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시해자의 말에서 태민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희망이 반짝였기때문이였다.
태민의 출발점은 항일무장부대에서였다.
박정희도 한때는 태민이 비슷하게 《적색이면 어떻고 백색이면 어떤가.… 민중의 편을 따르면 그만이야.》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야말로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질 탁월한 연기였다.
그리고 죽었다. 무엇때문에? 거짓된 량심과 서뿌른 망상, 그 무엇보다 히틀러나 니체의 초인을 꿈꿨을것이다. 만사람우에 올라서는자 아! 그 나의 유아독존과 나의 광휘를 위해 그러면서도 《정의》와 진리로 자기를 채색하려 했다. 7. 4남북공동성명에 응한것도 그 실례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이라는 조종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벗어나지 못했을뿐만아니라 죽음을 당했다.
우연인가. 박정희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것이다. 때문에 반통일악법과 대미추종으로 희세의 폭군이 되지 않았던가.
만약 그가 진정으로 민중을 생각하고 통일된 조국을 생각했다면 그의 죽음이야말로 비극일것이다.
하지만 력사는 그의 표방이나 속심에는 무관계하다. 남겨놓은것, 해놓은것만을 평가하는것이 력사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해놓았고 무엇을 남겼는가. 그의 분묘를 형상한다면 한쪽에는 피에 젖은 손을, 다른 한쪽에는 감옥을 그려넣는것이 적당할것이였다. 만약 박정희가 다시 살아 만날수 있다면 46년도때처럼 민중이요, 대세요 하며 자기를 합리화하려 할수 있을것이다. 목적은 이러이러했는데 어쩔수 없어 이러저러 했노라고.
력대의 제왕들과 통치자들이 늘 그랬다. 《휘황한 목적》과 《복지》에 대한 약속속에 무자비한 탄압과 가죽벗기기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하여 그 목적을 위한 횡포속에 한 세대, 두 세대의 인간들이 원한과 아픔속에 죽어가고 시들어갔다.
그렇다면 형님은?…
같은 배를 탄데서는 마찬가지였으나 뭔가 부족되거나 더한것이 있었다. 박정희에게는 《초인적의지》가 있었다면 태민에게는 그것이 부족한것이였고 박정희가 인간성과 량심을 파묻어버렸다면 태민은 그 인간성과 량심사이에서 몸부림을 쳤다고 해야 할것이다.
인간성과 량심, 성민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태민의 모습에서 고뇌와 방황을 보았다.
불행한 태민, 무엇때문에 거기서 초월하지 못했는가.
성민은 태민으로부터 받아보았던 편지까지 되생각해보았다.
1991년 쏘련이 해체된지 며칠 지난 어느날 십수년 넘게 담을 쌓고있던 태민이 편지를 보내왔다. 단 석줄로 된 편지에는 《너의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하길 바란다. 쏘련과 동유럽이 붕괴되였다. 너를 기다리는 형님으로부터. 대답을 기다린다.》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년후인 1994년 7월에 또다시 그의 편지가 왔다.
그때 성민은 생명중태의 위험에 빠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을 잃은데서 오는 정신적타격과 슬픔이 그를 꺼꾸러뜨렸던것이다.
편지는 리인모의 조국귀환이 실현되면서부터 비전향장기수후원회 역군으로 된 카톨릭교회의 문신부가 가지고 왔었다.
흰 모조지에 검은 마지크로 쓴것이였다.
《네 소식을 들었다. 난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란다.》
문신부가 그에 대한 보충설명을 하였다. 성민이때문에 태민을 만났고 성민에 대한 그의 걱정이 크다는것, 가장 중요한 말은 그뒤에 있었다.
《그분도 김일성주석님의 서거에 커다란 애환을 안고있소, 마음속으로 심심히 조의를 표시했고…》
그때 성민은 죽은 별에서 새로운 빛이 반짝임을 보는듯 했다.
날이 희붐히 밝고 넘어가지 않는 아침식사를 하고났을 때 범이 제소리하면 온다고 문신부가 찾아들었다. 교도소측에서 비전향통일수들의 《세뇌교육》을 위해 끌어들이는 신부들중에서 문신부는 통일수들의 처우개선에 왼심을 쓰면서 바깥소식을 전해주는 고마운 소식통이기도 했다.
60대의 나이에도 몸차림에 무척 주의를 돌려 언제나 반듯하게 빗어넘긴 장발과 눈부신 와이샤쯔차림에 넥타이까지 받쳐맨 문신부는 성민이 내미는 담요가 아니라 구접스런 방바닥에 그대로 눌러앉으며 빙그레― 웃음부터 지었다.
《오늘 선생은 나한테 먼저 절부터 해야겠어요.》
《절이라니요.》
성민이가 94년 여름에 살아난것은 이 문신부의 덕이 컸지만 언제한번 그 수고를 비친적이 없었다.
문신부는 또 한번 비주룩이 웃으며 말했다.
《내 오늘 아침 베벨부인한테서 전화를 받았어요.》
《베벨?!―》
《그렇습니다. 그 부인은 선생한테 문안을 하면서… 선생의 부인을 만났다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처를?!―》
성민은 숨이 꺽 막혀들었다.
《그래요. 폴랜드(뽈스까)에 교회일로 갔다가 조선대표단을 만났는데 거기서 선생 부인을 알게 되였다는겁니다.
김순정이라고, 맞습니까? 지금 그는 공화국의 교육성부문 간부로 일한다고 하는데 굉장한 미인이라고 하며 30, 40대로밖에 안 보인다는거예요.》
문신부는 말하다말고 주머니에서 교갑알약 두알을 꺼내주었다.
《먼저 이걸 자시십시오. 진정제입니다.》
《일없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비전향장기수들속에서 가끔 심한 정신적충격을 받을 때 심장마비를 일으켜 숨을 거두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성민이 까딱않고있는것을 보자 문신부는 실눈이 되여 입을 열었다.
《그럼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지요. 선생의 부인은 두 아들 다 대학에 다닌다는것을 말하며 〈나는 행복하다. 생활도 그렇고 이 세상 가장 훌륭한 사람, 영웅을 남편으로 삼았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그와 헤여져있지만 매일, 매시 그와 함께 산다. 추억과 래일속에 그는 언제나 아름답고 장하다. 조국 역시 그를 믿고 사랑하기에 더욱 그렇다.〉 베벨은 그때 자기 역시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로마에서 사는가요?》
《그렇습니다. 로마 교황과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였으니 거기에 안주한셈이지요.》
베벨이란 다름아닌 나쟈였다.
문신부가 떠나간 다음 성민은 순정의 소식으로 인한 충격과 흥분을 눅잦히려 겨울철일과로 되였던 제자리뛰기를 500번 한 다음 순정이며 나쟈의 일을 두루 생각했다.
1994년 7월 위대한 수령님의 추모제를 위한 집단단식끝에 성민이와 여러 동지들이 생명위험의 중태에 빠져들어 쓰러졌었다. 그때 감옥에는 전도설교와 비전향장기수들의 《처우상태》를 알아보러 국내외의 여러 교단과 교회의 성직자들이 찾아들었는데 그속에 나쟈가 있었다.
로마교황청에 입적한 나쟈는 베벨이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성민의 침상을 밤낮없이 지켜있었다.
그가 가끔 《정신이 드셨는가요?》라고 조선말로 물을 때도 나쟈인줄은 전혀 몰랐다. 외국인성직자들속에 조선말을 아는 사람들이 드문한것으로 그러루한 계통의 신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쟈의 모습은 몰라보게 달라졌던것이다. 세월이 찍어놓은 늙음을 피할수 없겠지만 빛 꺼진 눈과 성직자의 위엄때문인지 아무러한 감정변화도 느낄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현세를 떠난 인간의 침울한 고독과 애수만을 엿볼수 있었다.
그런 어느날 밤 나쟈는 처음으로 웃음 비슷한것을 보이며 자기를 밝혔다.
《날 정말 몰라보겠어요?》
머리칼을 쓸어올릴 때 어딘가 그 동작이 예전의 나쟈를 상기시켜주었다. 솔직히 말했다. 그리스챤(그리스도교인)이 될줄은 전혀 몰랐노라고 변명삼아 덧붙였다.
《그럴테지요. 이전의 나쟈는 없으니까요.》
그 말을 할 때 나쟈의 눈에는 한점의 물방울이 맺혔다. 그리고 그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급급히 고개를 돌리며 모리아민점적관을 바로잡는척 했다.
성민은 가슴이 찢어지는듯 했다.
《동문 체까였지요?》
마음속 아픔을 이런 물음으로 눌러버렸다.
나쟈는 놀랍게 그를 보다가 본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그랬어요. 정확히 말하면 대외정보국 상좌, 동무와 비슷한 일을 했다고 봐야겠지요.》 생긋 웃기까지 했다.
《난 동무가 생각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정탐은 아니였다 그 말이겠지요. 나도 그건 알아요.》
《지금도 그 사업을 계속합니까.》
성민의 물음에 나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누구를, 무엇을 위하여 그 일을 그냥 한다는거예요?》
성민은 실언했음을 알았다. 쏘련의 붕괴, 그 소식이 전해왔을 때 교도소당국자들은 미쳐날 정도로 좋아했다,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나쟈의 모습이 그 반증처럼 보였다.
나쟈는 성민의 측은해하는 눈길과 마주치자 화제를 돌렸다.
《동문 내가 왜 조선에 나왔댔는가 하던 말을 잊지 않고있겠지요?》
《잊지 않고있습니다. 나때문이라고 했지요.》
성민이 웃어보이자 나쟈 역시 웃었다.
《그때가 그립지 않아요?》
《글쎄… 하긴 난 동무가 준 뿌슈낀시집에서 지난날에 대한 그리움의 시구를 읽었습니다.》
《고맙군요. 지나간 날은 그리우니라!… 난 정말 그때가 몹시 그리워요.》
나쟈는 한결 밝아진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 난 진짜 동무한테 반했던것 같애요. 조선에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도 동무로 하여 기뻤고… 한데 동문 인사도 없이 도망쳤지요.》
《허허, 인사없이 떠난데 대해선 용서를 빕니다.》
《하긴 잘한것이지요. 이루어질수 없는 유희였으니까.》
《지금 남편되는분은 뭘하고있습니까?》
《남편?!…》 나쟈는 나직이 뇌이며 창문쪽을 내다보았다.
《지금 그는 이국땅에 묻혀있어요. 그를 파견했던 사람들이 팔아먹은것이지요. 어쩌겠나요. 혁명의 신성을 떠들던 크레믈리가 배신하니 다들 그럴수밖에―》
《그도 동무와 같은 일을 하였습니까?》
《그랬어요.》
나쟈는 손수건을 꺼내여 눈물을 닦았다.
성민은 가슴이 울컥해졌다.
《동문 그때문에 성직자가 되였습니까? 물론 사업상필요때문일수도 있지만.》
《둘 다 맞아요. 처음엔 사업때문이였구 오늘에 와선 내가 다달은 마지막항구지요. 다 허물어진 세상에서 그래도 뭔가 의지하고 기대할것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 없는 하느님이라도 믿을수밖에―》
《왜 다 허물어졌다고만 생각합니까.》
《희망?!… 희망을 가지라는것이겠지요.》 나쟈는 서글피 되받고는 머리를 저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레닌의 기치가 있었어요. 하지만 세월이 가니 거기에도 퇴색이 오고 풍화가 왔지요. 빠벨 꼴챠낀, 조야, 청년근위대, 그 모든 아름다움도 세월의 이끼속에 묻혀버렸구요. 그러니 저희들 가슴속에 남은것이 뭐겠나요.
배신당한 혁명, 그 혁명을 위해서 저의 친척들은 백파로 처형되기도 했고 또 다른 친척들은 백파들과 파쑈도이췰란드와의 싸움에서 희생되였어요. 혁명을 반대해 죽고 혁명을 따르다가 죽고―》
《나쟈, 난 혁명에서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하던 동무의 말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아름다운 철부지시절이였지요.》
《희생이란 의미에선 나 역시 희생입니다. 하지만 이 희생이야말로 값지고 훌륭한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요. 동무네들의 희생엔 승리가 있고 위대함이 있어요. 인간성의 불변과 사상의 불변, 얼마나 숭엄하고 훌륭한가요. 그리고 당신들이야말로 이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지요, 위대한 령도자가 아껴주고 위해주고. 이번에 바티칸교회에서까지 우릴 여기로 보낸것은 당신네 정부의 성명들과 호소문작용이 컸어요. 물론 제가 온것은 비전향장기수명단속에서 동무를 알아보았기에 그런거지만.》
《나쟈! 고맙소.》 성민은 저도 모르게 그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그렇다. 지켜주고 아껴주는 품, 그 사랑, 그 믿음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견뎌내기 어려웠을것이다.
사람이란 그가 제아무리 훌륭한 사상을 지녔다 해도 그 사상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빛발과 열의 광원이 있어야 한다, 인간사랑의 태양의 빛발!)
성민은 나쟈에게 무슨 말부터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조선에서 떠난 다음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던 나쟈는 로씨야정교회에 입적하여(그 역시 사업상임무로) 뽈스까에서 있었다고 한다. 거기서 로마교황으로 된 사람과 가깝게 되였고 쏘련의 붕괴로 《까게베》(체까의 후신)가 해체되면서 로마교황을 따라 바티칸교회에 입적한것이다.
《나쟈, 난 동무가 성직자로 되였지만 그전때의 나쟈 그대로라고 믿고싶습니다.》
《아니예요. 고맙긴 하지만… 저에게서 지난날은 한갖 아름다운 추억일뿐이고 잠시동안의 꿈과 같은거예요.
한데 꿈에서 깨여나면 허무하지요. 그 꿈속에도 비참한것이 많고… 하여 진짜로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래세에 몸을 던진거예요. 하지만 이 역시 거짓된 추구지요. 자기 기만, 거짓위안.
하긴 동무네를, 동무네 조국을 생각하면 한결 위안이 돼요.》
뽈스까에서 살 때부터 베벨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나쟈는 이러한 슬픔으로 성민에게 아픔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런데 오늘 문신부에게 한 전화에서 자기 역시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 나쟈의 말은 생에 대한 시각에서 적으나마 변화가 왔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 아닐가.
다음날부터 성민은 몸단련에 더욱 열중했다.
달리기시간을 더욱 늘였고 밥씹는 회수를 더 늘였다. 이따금 들어오는 염물고기토막은 가시뼈들이 물로 될 때까지 씹었다.
그런 어느날 교도소소장이 그를 불렀다.
4. 19세대로 불리워지는 40대의 교도소소장은 그전의 폭력배들과는 달리 비전향통일수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온화한 태도였고 성민이를 만날 때면 력사학이나 인간학문제로 곧잘 토론을 벌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날 성민이를 찾은 교도소소장의 신색은 좋지 않았다.
왜 불렀느냐 하는 물음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먼저 축하한다고 말했다.
《축하라니요?》
《선생은 래일안으로 출소하게 되였습니다.》
성민은 깜짝 놀랐다.
기한을 앞당기는 출소란 주로 전향을 했거나 병약한 사람들중에서 크게 문제시될것이 없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에게만 차례지는 특혜였던것이다.
성민의 얼굴을 묵묵히 지켜보던 소장이 또다시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 특별히 생각할것은 없습니다. 정부에서 새로 취한 사면석방이 있지 않습니까.》
《사면이라구요?!》
사면석방이란 《대통령》의 《은사》로 나가게 된다는 말이였다.
《에, 그러니 거취장소문젠데 선생님의향은 어떠신지?―》
성민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에 인차 대답을 못했다.
하긴 그 지간 동지들이 하나, 둘 나갈 때마다 무척 신경을 써본 일이였으나 정작 닥치고보니 선뜻 짚어댈수가 없었다.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제 5촌숙부인 지응석씨의 댁에 가서 살겠습니다.》
《거긴… 우리도 알아봤는데 곤난할것 같습니다. 5촌숙부되시는분은 누워계시고 그 아들되는 사람은 보안관찰대상이니 허락이 안될것입니다.》
《그렇다면 양로원밖에 없군요.》
그 지간 출소한 동지들이 자취를 하는 집들을 생각해보았으나 자기까지 가서 얹혀산다는것이 무리라고 생각했다.
교도소소장은 묵묵히 생각에 잠긴 성민이를 보고는 다시 말을 떼였다.
《저… 형님되시는분의 집엘 가면 안되겠습니까. 제 생각입니다만 그분들도 마다하지 않을것 같은데요.》
《아니, 거긴 안됩니다.》
94년후부터 형의 집과는 완전히 두절상태였다.
언젠가 옥영이 마지막으로 왔을 때 반백이 된 성민을 보며 《에그, 동생은 무슨 고집에…》하며 눈굽을 훔치던 일을 생각하니 얼마간 흔들리긴 했으나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그 집엔 후날 찾아보긴 하겠습니다만… 지금은 안됩니다. 가능한껏 저의 5촌숙되는분의 집에 가도록 힘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좀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아직은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희색이 만면해진 교도소소장이 성민의 뜻대로 되였다고 하며 짐을 싸라고 하였다.
성민은 이때 문신부가 주고간 진정제를 먹었다. 너무나도 가슴이 후두둑거렸기때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