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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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소강당의 세면 벽에는 교도관들과 떡봉이들이 늘어서있고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던 신부들의 자리에는 전향테로의 명수로 소문난 교무과장 변철형이 근엄하게 앉아있었다. 이름자에 철자가 붙어서인지 목소리에도 쇠소리가 울렸고 《빨갱이》들을 보는 눈에서는 부시불같은 불꽃이 번쩍였다.
《좋다, 좋아, 전향을 하는가 마는가는 당신들의 자유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심중히 생각해보는것이 좋을것이다. 자유란 다같이 공평히 누리는것만큼 우리 역시 자유가 있는것이고 그 자유의 폭과 한계는 무한임을 강조해둔다. 그럼 전향을 하지 않을자들은 손을 들어보라.》
장내에는 왕파리들의 날개질소리만 들렸을뿐 어마어마한 침묵이 깃들었다. 침묵으로써의 반항이였다.
《왜, 겁나는가? 다들 전향을 안한다고 뻗치더니 이처럼 시치미를 딸 내긴가?》
성민은 코등에 달라붙은 쉬파리를 날려쫓았다. 그 순간 《하나!》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변철형은 자기를 보고있었다.
《어쩔수 없군.》 성민은 영기와 눈길을 마주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하나, 둘 손이 쳐들리는가싶더니 삽시에 수풀을 이루었다.
《음, 장하군, 장해.》
변철형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들을 헤다가 권교장한테서 눈길을 멈추었다.
《어, 사람다운 사람 있군. 누군가?》
《뭐란지라?》 권교장이 불안스럽게 성민을 보았다.
《아바이가 손을 못 드니 전향하는것으로 알고 좋아하는군요.》
《피, 방구나 먹으래. 난 안한다, 안해. 북망산에 간 다음에도 안한다, 안해.》
《야! 저자가 뭐라고 지껄여.》
변철형의 한마디 소리에 야구방망이를 든 두 떡봉이들이 춤추듯이 달려들었다.
《교무과장!》
성민은 그들을 막아서며 변철형을 쏘아보았다. 변철형의 박쥐눈이 올롱해졌다. 전향테로의 명수로 소문난 변철형은 수많은 비전향수들을 살해하고 또 전향자를 만들어낸것으로 이 교도소로 승진되여온자다. 아닐세라 이자는 첫 거조부터 전임들과는 판 달랐다.
《넌 뭐야?》
《내 한가지 할 말이 있다.
이분으로 말하면 당신들이 전신불수로 만든 사람이다. 때문에 손을 들려고 해도 들수 없다. 방금 이분이 나에게 한 말도 바로 전향을 하지 않는다는, 죽어도 전향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였다.》
《말대답질이 그게 뭐야. 야! 자! 교무과장님도 모르는가.》
《난 공평한 자유를 행사했을따름이다.》
《뭐 뭐라구?》
변철형이 입에 게거품을 물 때 그의 옆에 앉았던 교도관이 뭐라 쑹얼거리자 변철형의 낯색이 대번에 활딱 밝아졌다. 먹이를 본 맹수의 희열빛이랄가.
《아, 당신이였군. 괜찮아, 아주 훌륭해.》
웃는듯싶던 눈이 가느스름해지는가 동시에 조개턱을 한번 쳐들자 곁에 섰던 떡봉이들의 손에서 두개의 야구방망이가 성민에게 날아들었다. 눈앞에 불꽃이 번쩍이며 잔등뼈가 박살나는것 같았다.
우!― 그때까지 잠자코있던 수인들이 저마끔 노성을 터뜨리며 일떠섰다. 그러자 벽가에 섰던 교도관들과 떡봉이들이 살 때를 만난듯이 뛰여들려 했다.
《동지들!》
성민은 만신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이러지들 맙시다. 저자들은 바로 이걸 바라고있소.》
영기며 여러 동지들도 그와 같은 말을 하여 피비린 격투의 위험은 가셔졌다.
변철형은 이를 갈았다.
《됐다, 오늘은 이만하자.》
성민이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남원대망이가 근심가득해 나타났다.
《선생님, 오늘 조심하셔요. 찾거들랑 유하게 말씀하시구요.》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불안스런 얼굴로 물러갔다.
변철형이 오면서부터 교도관들 거의 전부가 교체되였다. 비전향장기수들과의 오랜 접촉과정에 《적화》되였거나 온건한 품성의 소유자들로 지목된 사람들에 한해서 그렇게 되였는데 남원대망이만은 여전히 붙어있었다. 그로 해서 그는 배가로 기세를 살구는 편이지만 성민이한테만은 그닥 심하지 않게 놀았다.
점심녘부터 복도가 떠들썩해지며 이방저방 문따는 소리가 울렸다.
이런 때마다 있게 되는 인사말들이 울렸다.
《11방 떠납니다.》
《9방도 떠납니다.》
성민은 고무신짝에 받아놓은 국물과 파리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은 점심밥을 보면서 (여느때면 한입에 다 없애버렸겠건만.) 이제나저제나 기다렸으나 그만은 불러가지 않았다.
초조했다. 변철형의 태도나 남원대망이의 귀띔으로 봐서는 자기가 제일먼저 걸려들것으로 생각했던것이다.
불려갔던 사람들은 어슬녘에야 돌아왔다. 떠나갈 때는 다들 인사를 하던 사람들이 돌아올 때는 신음소리조차 제대로 못냈다. 놈들이 하는 거동을 봐서는 다 때려죽일 잡도리같았다.
(집단단식?! 그래 지금은 이 길밖에 없다.)
성민은 저녁밥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단식이다!》하고 소리치면 곁방 동지들도 받아 소리칠것이요, 그렇게 되면 집단단식으로 싸우게 될것이다. 바깥창구쪽을 보니 저녁밥때가 된것 같았다.
(점심밥은 먹어둬야 하는걸.)
이런 생각을 하는데 권교장방 열쇠를 따는 소리가 울렸다.
머리골이 섬찍했다.
권교장을?!…
《지동지―》
실낱같은 웨침에 벌떡 일어났을 때 그의 방문이 절컥 열렸다. 남원대망이가 뒤주춤 선 앞에 두명의 교도관이 뛰여들어왔다.
《가자.》
성민은 그러지 않아도 나가고싶던차라 군말없이 문밖을 나섰다.
2명의 교도관한테 포대자루처럼 질질 끌려가는 권교장을 보자 제잡답 소리쳤다.
《권동지를 끌어간다.》
단통 주먹이 날아들었다. 피를 꿀꺽 삼키며 또 한번 웨쳤다.
《동지들! 권동지를 고문하려고 하오.》
입에 자갈이 물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바줄로 입아귀를 동인것이다. 방들마다에서 문짝을 차고 두드려대는 소리와 목갈린 웨침들이 터져나왔으나 놈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여기 서있어.》
성민이를 끌고간자들은 권교장이 들어간 방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갈끈을 풀어주지 않은채 씩씩 가쁜 숨을 쉬는중에도 무엇이 좋은지 시죽벌죽 웃었다. 남원대망이도 제법 눈에 독기를 띠우고 위엄을 보였으나 허둥한 기색은 감추지 못했다.
《으윽―》
권교장이 들어간 방에서 숨 넘어가는 소리에 이어 퍽퍽! 매질하는 소리가 울렸다.
성민은 눈앞이 획 돌아갔다. 《이놈들아!》 무서운 힘으로 문짝을 걷어찼다. 무릎관절을 짓조기는 몽둥이의 타격에 쓰러지자 주먹으로 문짝을 두드려쳤다. 문이 삐써 열렸다.
《웬일인가.》
검정색안경을 낀 변철형이 와이샤쯔소매를 바로잡으며 나와섰다.
《탈출을 꾀했는가?》
성민이는 보지조차 않고 교도관들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반항에 탈출이라?! 들어와.》
평상우에 놓인 권교장은 숨기조차 없어보였다. 장신의 체구가 펼쳐놓은 빨래처럼 보이였다. 상끝모서리에 닿은 입술에서는 연자색피가 흘러내려 거밋한 실줄기를 이루고있었다.
성민은 또한번 태질을 쳤으나 꽉 죄인 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이 령감태긴 값을 치르고있어.》
변철형은 이마전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차겁게 웃었다.
《대답은 내가 하지 않았는가.》
《그건 알아. 그러니 덤빌건 없어. 그 값도 받아낼테니까. 한데 넌 왜 그따위 대답으로 불쌍한 로인을 죽게 하는가.》
《…》
《이제라도 잘못했다고 하면 이 령감태기를 봐줄수 있다.》
《…》
《왜?… 싫은가. 그래, 그렇지. 너는 말로는 인간성이요, 동지애요 하지만 사람목숨은 쥐벼룩보다 못하게 여기지.》
성민은 가슴이 터져나갈듯 했다. 아픈 눈길로 권교장을 일별하며 변철형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
《사실 너같은 악당에게 말을 한다는것은 어리석다만… 들어둬라. 너희들의 삶과 우리들의 삶에는 하늘땅차이가 있다.》
《허, 인간의 삶에도 서로 다른것이 있다?! 돌지 않언?》
《그래, 넌 100년 가야 알수 없어. 버러지니까.》
《뭐―야?》
《그럼 더 말해두자. 권동지는 버러지로 살지 않고 인간으로 살기 위해 반대한거다.》
《그럴듯 해. 령감!》
변철형은 권교장의 어깨팍을 흔들었다. 권교장의 입에서 푸― 소리가 나오자 머리를 돌려놓았다.
《령감, 이 사람 하는 소리 들었나?》
《들은지라.》
권교장이 뜻밖에 하는 말에 변철형도 성민이도 깜짝 놀랐다. 권교장의 입가엔 벌깃한 피방울이 비누거품알처럼 풀럭거렸다.
《지동지 말 고마운지라. 난 정말 전향 안해… 내 심장…》
《에익―》
변철형의 손짓 한번에 소가죽채찍이 권교장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성민은 앞뒤를 잴 여유가 없었다. 수정찬 손을 높이 쳐들며 변철형에게 달려들었다. 뒤골이 부서져나가는듯 했다. 그다음 꺽지센 손들이 어깨를 옥죄였다. 성민은 좌절과 비통속에 몸부림쳤다.
《변철형, 너》 우들우들 떨며 말했다. 《이제 한번이라도 더 손을 대면 네 살멱을 물어뜯을테다.》
《어― 무서운걸. 좋아, 저 령감을 내가라.》
변철형은 와이샤쯔소매를 천천히 걷어올리며 철학가도 무색할 엄숙한 빛을 지었다.
잠시후 평상에 눕혀진 성민은 하나, 둘 내리치는 매채를 스물세개까지 세고나서 정신을 잃었다.
이날부터 비전향수들의 특별사동은 지옥의 아수라장이 되였다. 련 3일동안 계속된 고문에 두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에 대한 항의로 집단단식에 들어갔다. 대답은 강제급식이였다. 물고문과 같은 형태의 강제급식에서 또 희생자가 생겼다.
비가 내리는 날이였다. 강제급식을 당해 실신해있는 성민에게 변철형이 찾아들었다. 안됐다고, 이젠 타살적인 고문은 중지할테니 집단단식을 그만둬달라고 했다. 성민은 단마디로 거절했다.
《모든 비전향수들앞에서 사죄를 하고 그다음 말해봅시다.》
변철형은 악에 받쳐 이를 갈았다.
《좋아, 그렇게 하자. 하되 너만은 별도다.》
《별도라는건…》
《없애치운다는거다. 아니… 널 전향자로 선포할테다.》
그 말의 의미를 미처 해득하기도 전에 또다시 고문실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하고 병감에 옮겨졌다. 알심있는 치료와 흰쌀밥이 들어오는것으로 변철형이 무엇을 노렸는가를 알았다. 병감이 떠나갈듯 소리치자 입에 자갈을 물리였다.
그날도 변철형이 왔다갔다.
《맛이 어때, 응? 늬덕에 다들 고문세례를 면했다만 넌 배신자로 되였으니 꼴 좋게 됐지. 다들 침을 뱉더라구, 침을.》
그의 말은 사실로 증명되였다. 《과장님!》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2명의 교도관에게 포박된 영팔이가 나타났다. 불덩이같은 그의 눈길이 성민이쪽을 겨눠보자 변철형은 보란듯이 성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지선생, 이제 2~3일후이면 나갈수 있을겁니다. 먼저 명승지참관부터 하자구요.》
《흥, 그렇댔구나.》
영팔의 입에서 검찍한 피가래가 날아들었다.
영팔의 행동은 《이 짜식!》하는 따귀붙임으로 끝나고 그를 끌어내감과 동시에 《절컥.》하고 문이 닫겼다.
변철형은 기고만장해 웃었다.
《어때,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는것이 좋잖을가. 그렇게 되면 전향딱지만은 벗겨주지. 중립으로 조용히 살겠다는것으로 하고.》
성민은 단매에 그자를 거꾸러뜨렸다. 그러나 성민이 역시 반주검이 되여 땅바닥에 뒹굴게 되였다. 실컷 그를 차고 때린 변철형은 입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악이 나 씨벌였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넌 영원히 먹감방이다.》
저녁녘에 나타난 의무관으로부터 고문이 중지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다음날 아침 성민은 교도소소장에게 불려갔다. 무척 친절한 태도였다.
《이젠 당신과 헤여지게 되는가 보오. 잘됐지. 암, 잘되구말구. 그간 일들을 다 량해하라구.》
요령부득이한 말들을 잔뜩 늘어놓고난 그는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니 까만 승용차에 오르라고 하였다.
《어델 간다는거요?》
《가보면 아오.》
2명의 교도관에게 끌려 차에 오를 때 변철형과 몇명의 청지기들이 나오더니 뒤이어 특별사동안의 동지들까지 거의 다 끌려나왔다. 의아쩍은 기색의 그들을 휘돌아본 변철형은 활짝 웃음을 지으며 성민이 탄차를 향해 손을 저었고 다른 청지기들 역시 살갑게 손들을 휘저었다.
성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자기를 진짜 변절자로 만드는것이 아닌가.
묵묵히 서있는 수인들중의 대부분은 고개를 비틀고 외면한 상태였고 쌍지팽이를 짚고선 진영팔은 침을 찍 내뱉고는 절뚝거리며 되돌아들어갔다.
성민이 간 곳은 고급호텔이였다.
3명의 사복쟁이가 안내하는 방으로 가니 한명의 장년이 커피를 마시고있었는데 성민이 들어서기 바쁘게 탄성을 질렀다.
《지선생, 이게 얼마만입니까.》
한인수였다.
사복쟁이들과 보안관들을 내보내고난 한인수는 성민의 손목까지 덥석 잡으며 반가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여전히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한다고 했다.
《한데 지금 하는 이 놀음은 뭐요? 지금도 그때 사업의 계속인가.》
《원, 무슨 말씀을. 그러니 선생은 아무것도 모르고 오셨군요. 형님께서 지선생을 만나기로 하셨습니다.》
《그가?!…》
《네, 전 그저 사전준비차로 온것이구요. 헌데 지금 그분의 건강이 좋지 않으셔요. 고혈압으로 신고하고있거던요. 그러니… 잘 료량하시면서 우선 목욕도 하고 좀 가꾸셔야 하겠습니다.》
성민은 목욕실에 들어가 처음으로 자기 용모를 찬찬히 볼수 있었다.
몸을 깨끗이 씻었다. 감옥동지들한테 미안스러웠으나 이것이야말로 마지막전투를 앞둔 준비라고 생각했다.
《원, 오라질 놈들, 이처럼 만신창을 만들다니.》
성민의 몸의 상처자리를 볼 때마다 혀를 차던 한인수는 샤와실에서 나온 뒤에도 분을 금치 못해하였다.
《당신은 그동안 다른 나라에 가있었소?》
듣다못해 한마디하자 한인수는 놀랍다는 기색이였다.
《글쎄 저도 정 모르는건 아니지만 선생같은분에게야 너무하지 않습니까.》
《왜, 나야 〈빨갱이〉가 아니요?》
《거야 그렇지만 선생이야… 그저 마음속 지조와 량심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형님이 나를 만나자는건 뭣때문인것 같소?》
《거야 선생을 살리기 위해서지요. 구체적인 내속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사령관님의 말씀을 봐서는 그대로 놓여나갈것 같습니다.》
《사령관?!… 그는 누구요?》
택규가 아닐가 하여 묻는 성민의 말에 한인수는 다 알겠노라는듯이 싱긋이 웃었다.
《선생은 전혀 모를분이지요. 그지간 우리 헌병사령관만 해도 네번씩이나 갱질되였으니까요. 선생이 처음 만나셨던 택규부사령관님은 중앙정보부에 가셨구요. 지금 사령관을 하시는분은 지장군하고 별로 특별한 교우관계는 없지만 그분도 선생에 대해 알아보시고 적잖게 마음을 쓰셨습니다. 국가공로자되시는 지장군에게 징역군동생이 있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이때부터 성민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샤와실에서 나와 30분쯤 쉬고났을 때 《지장군이 오셨습니다.》라고 하며 굽신 절을 하는 사람도 알고보니 옥영이네 집에서 처음 보았던 그 집지기상사였다.
그들의 안내밑에 두툼한 창가림이 드리운 2층소연회실로 들어서니 커다란 식탁앞에 두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태민은 은회색등산복차림이였다. 그 은회색때문인지 태민의 얼굴이 무척 검스럽게 보였다. 길가에서 만났다면 전혀 몰라볼 얼굴이였다.
실팍진 배와 처져내린 볼살, 눈은 반쯤 잠긴듯 했다.
《게 앉거라.》
한인수와 집지기사병이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자 성민에게 맞은켠 의자를 가리켜보였다. 그때 태민의 옆에 앉아있던 녀인이 다소곳이 일어나 머리를 숙여보였다. 성민은 그 녀자가 다름아닌 려아인것을 알아보았다.
태민은 한동안 묵묵히 성민을 보다가 몸을 뒤젖히며 헌헌한 웃음을 지었다.
《그간 안됐다. 날 많이 욕했을테지.》
《그렇습니다.》
성민은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태민은 면구스런 기색으로 려아를 얼핏 돌아보고는 입술을 씨루었다.
《우선 먹자.》
태민은 닁큼 술병을 들더니 먼저 성민의 잔에 술을 쏟아부었다. 코르크마개쪼각이 뜬 병안에서 쿨럭쿨럭 소리를 내며 쏟아지던 포도주는 식탁우에까지 흘러번졌다.
《저야 술을 못한다는걸 알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그래. 여기서도 비전향이라 그거구나. 뭐 타낼건 없지. 임자도 들라구.》 려아에게까지 술을 부어주고난 태민은 지나가는 소리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이 사람은 지금 혼자야.》
성민은 분탕에 저를 대였다. 잘 집혀지지 않았다.
《그래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다지.》
《네.》
《그럼 그쪽 소식부터 좀 듣자. 옥영이한테서도 대강 듣긴 했다만.》
태민은 먹는 시늉만 하다가 성민의 입이 열리자 연신 질문을 퍼부었다. 선산은? 고향집은 그냥 있고? 나의 동무들은?… 이런 식의 물음에까지 대답을 하다나니 퍼그나 시간이 흘렀다. 성민이 입을 다물자 태민은 소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말을 뗐다.
《그럼 이제부턴 내 얘기를 하자. 네가 찾아온 목적이 이 형님때문이라니까.》
태민은 대활스럽게 말했으나 눈에는 짙은 비애와 향수가 실려있었다.
《너두 좀 들었을테지만 내 지난 일이란 몇마디면 족하다. 50년도 가을에 중위로 입대했다. 그땐 돌격전에도 여러번 뛰여들었댔는데 그때문에 여러군데 부상을 입었다. 그 공로루 대대장, 련대장이 되구 정전후엔 관구 부사령관에, 참모장에, 사령관으루 있다가 군복을 벗었다. 군복을 벗은건 네 덕이라고도 할수 있어. 어때, 만족하냐.》
태민은 빙그레 웃으며 려아를 돌아보았다. 《이 사람 혼자 사는것도 네 덕이라고 해야지.》
려아의 얼굴이 단번에 빨개졌다.
《참, 형수랑 경자랑 잘있습니까?》
성민은 화제를 돌렸다.
《그래, 잘있지. 경자는 지금 미국에서 살고있다.》
《그러니 거기에 영 주저앉았습니까?》
《그렇게 됐다. 남편되는 사람이 거기 눌러앉는통에… 너도 알것이다, 내 부관하던 사람. 그는 지금 법률상담소를 꾸려놓고있다. 재미교포들을 위한 상담소라고 하더라.》
《응석아주바이랑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 형님은 나이도 있는데다가 두루 앓고있다.》
《그럼 그 집 살림고생이 말이 아니겠군요.》
《해성이한테 처와 아들인가 하나 생겼다더라. 지금 그 앤 어느 식당에서 주먹군으로 있다는데 그 애도 널 닮아서인지 류치장출입도 꽤나 자주 했다. 그런 얘긴 더 하지 말자.》
태민은 침통한 안색으로 담배를 꺼내물었다.
《너도 피우련?》
《전 안 피웁니다.》
《넌 그저 아버지 그대로구나.》
태민은 탁가운데 음식그릇들을 성민이앞에 밀어주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먹어라. 넌 어릴 때 방어국을 좋아했지.》
태민은 부초를 잘게 탕쳐 입힌 방어토막을 끌어다주며 싱그레 웃었다.
《이건 내가 특별히 주문해 만든건데 중국식으로 만들었구나.》
성민은 먹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드니 태민은 먹지 않고 성민이만 보고있었다. 눈에는 물기가 핑 고여있었다. 성민이와 눈길이 마주치자 태민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젠 환갑나이가 돼오니 로시현상인지 뭔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쩍하면 눈물이 내배는구나.》
《그건 눈물구멍이 막힐 때 생긴다더군요. 지금 시력은 어떻습니까?》
《거저 그러루하다만 글을 볼 땐 돋보기를 쓴다.》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돋보기는 쓰지 않으셨는데…》
《그건 집안래력이다. 할아버지도 돋보기를 쓰지 않지 않았니. 한데 나만은 별나거던.》
《거야… 풍토가 바뀌여지면 잡병이 생긴다는 말이 있더군요.》
《허허, 네가 지금껏 벼르던 말이겠구나.》
《그렇습니다. 책을 보려니 사람들의 건강은 제가 태여난 고장에서 사는것이 제일 좋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나때문에 연구를 많이 했구나.》
태민이 쓰겁게 하는 말에 성민은 가슴이 아팠다.
《아까 채 하지 못한 얘긴데 아버진 돌아가실 때까지 늘 형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해라.》
담배를 비벼끄는 태민의 손이 떨렸다.
《물론 나도 고향엘 가고싶다.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가서 술도 붓고 옛날 소꿉동무들과도 만나고… 그러나 우리 대엔 틀린것 아니냐.》
《하긴 그렇군요. 다른 사람 아닌 형님마저 통일을 외면하시니―》
《허허― 나때문이란 말이지.》
태민은 술기운에 붉어진 뿌잇한 눈길로 성민을 보다가 불시에 등산복을 벗어제꼈다. 목언저리와 왼쪽어깨, 바른쪽죽지우에 상처자국들이 드러났다.
《이게 뭔지 알겠냐?》
《그런건 나도 있습니다.》
성민은 단추를 와락 벗기고 가슴자락을 내보였다. 육박전투때 총창에 찔린 쇄골부위와 파편상을 당한 자리를 가리켰다.
《으음―》 태민은 만족한듯 웃었다. 등산복을 다시 입고는 등받이에 몸을 젖혔다. 웃음이 걷혀졌다.
《그래, 이런건 우리만이 아닐게다. 한데 우리처럼 이런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을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잡아야지요. 물론 기억에서까지 잊혀진다는것은 어려울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문에 서로가 옥신각신하고 절치부심한다면 우리의 후대들까지 원쑤지간이 될것이고 결국 분렬의 비극은 계속 남아있게 될것이 아닙니까.》
《전쟁때 네가 나와 맞부딪쳤다면 어떻게 했겠니?》
《그걸 몰라서 묻습니까?》
성민은 속이 울끈해졌다.
《쏜다는거겠지.》
《그렇지요.》
성민은 태민의 낯이 지지벌겋게 달아오르는것을 보며 가빠지는 숨결을 눅잦혔다.
《물론… 정황에 따라 다른 경우도 있을겁니다. 모름지기 〈형님, 여기로 오십시오.〉하고 소리칠수도 있구요.》
《나를 의거시킨다?!… 한데 난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거다.》
《그렇다면 저한텐 형님이 없는것으로 되지요.》
《허허, 누가 없어졌겠는가는 장담하기 이르다. 내 사격술은 너보다 훨씬 나을테니까. 그래, 한번 해보자니?》
태민은 어릴적에 씨름을 하자고 하던 때처럼 두눈을 지릅떠보이며 당장 일어날듯 한 자세로 상모서리를 눌러짚었다.
성민은 일희일비의 서글픔을 느끼며 화제를 돌렸다.
《형님, 언젠가 집에서 따라스 불리바를 놓고 론쟁을 하던 일이 생각납니까?》
《따라스 불리바?!… 고골리의 아따만 말이냐?》
《그렇습니다. 아들을 쏴죽인 주인공을 놓고 밤새 론쟁을 벌렸댔지요.》
《생각난다. 그 주인공령감태기는 전쟁때도 그렇고 지금도 내 우상이고 모범이라구 할수 있다.》
태민은 싱그레 웃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였다.
주인공인 따라스 불리바를 놓고 그가 어떻게나 격찬했던지 아버지도 그 책을 읽었고 성민이도 읽었다.
론쟁은 제 동족인 까쟈크들을 배반하고 뽈스까군영으로 넘어간 아들을 주인공인 아버지가 쏴눕힌걸 놓고 옳으냐 그르냐고 할 때 태민은 무작정 주인공이 옳다고 했고 아버지는 지나치다는것으로 아퀴를 짓지 못했다.
《그러니 넌 그… 뽈스까 귀족딸한테 반해 뽈스까군에 넘어간 안드리가 나 비슷하다는 소리겠구나.》
태민의 말에 성민은 씩― 웃었다.
《절반은 옳고 절반은 틀립니다.》
《건 무슨 소리냐?》
《기질상 형님은 경박한 안드리보다 과묵하고 굳센 오스따프를 닮았다고 해야지요. 그런데 결과는 반대로 되였거던요.》
성민은 그가 오스따프가 아니라 안드리처럼 미국의 총대잡이가 되였다는것까지 말하고싶었으나 그렇겐 할수 없었다.
《네 말뜻을 알겠다. 그런즉 네가 경자 엄마한테 <옴쟁이>소리를 한것두 바로 이때문이겠구나.》
《거슬렸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재미있게 들었다. 한데 <옴쟁이>라면 쏴버려야 하지 않느냐.》
《…》
《왜 말 못하니. 난 지금도 그따위 녀석이 있으면 당장 쏴갈길거다.》
태민의 눈이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성민은 그의 분기와 노염이 반가왔다.
《형님, 제가 그에 대해 말한것은 그 인간의 출발점도 출발점이지만 인간으로 돌아갈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용렬성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형님은 출발점도 달랐거니와 일단… 벗어났다 해도 그 수정에선 단호한 용기와 대담성을 발휘할수 있는분이 아니겠습니까.》
《음, 넌 지금 여기서도 선전이구나.
그러니 넌 내가 옛날처럼 너를 따라가야 한다는거니?》
《아니, 형님으로선 그럴수도 없거니와 설사 그러자 해도 그럴 형편이 못되지 않습니까. 제가 바라는것은 형님이 본래의 형님이 되였으면 하는것이고 더 있다면… 적으나마 통일을 위해 마음을 써달라는 그뿐입니다.》
태민의 량뺨에 돌같은 근육이 살아올랐다. 담배를 집는다는것이 술잔을 엎질렀다.
《이젠 그런 말은 그만하자,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담배를 몇모금 빨고난 그는 우악스럽게 담배불을 부벼끄고는 재털이를 밀어놓았다.
《내 말하자는건 그만큼 고생했으면 됐다는거다. 넌 나를 찾아왔다가 지금까지 옥고를 치르고있는데 잘못이 누구에게 더 있느냐는 말하지 않겠다. 문제는 현실이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거다. 이렇게 볼 때 네가 여기 와있는 이상 네가 나를 따라 살아야지 내가 너를 따라갈수야 없지 않니.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건 없다. 전향이구 뭐구 그것두 필요없다. 그저 나를 따라가 살면 되는거다.》
성민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전향을 하지 않고?!…
《이에 대해선 대통령한테도 허락을 받았다. 참, 너도 박정희를 알지. 그러니 더 왈가왈부할것이 없다. 조용히 살면 그만이지.
일감도 있다. 네가 력사공부를 했으니 어느 력사박물관엘 갈수도 있구 내 사업도 도울수 있는거지. 그것이 싫다면 집안에서 놀건 구학연구를 하건 건 네 마음대로 해라. 그것도 정 싫으면 때를 봐 3국에 나가 살수도 있고, 어떠냐?》
성민은 숨이 가빠올랐다. 너무나도 큰 유혹이였다.
자유?! 일정한 기간 조용히 살다가 통일역군으로 활동할수 있지 않는가. 감옥동지들을 위해서도 뭔가 할수 있고… 활동이야말로 놓칠수 없는 유혹이고 정당성이였다. 더구나 3국에로의 길!… 그것은 곧 조국으로 갈수 있는 길이 아닌가.
태민은 넌지시 그를 보다가 려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 사람도 너만 반대없다면 함께 살자는거다. 너야 이 사람과 어릴적부터 가까운 사이가 아니였니. 물론 너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울수 있다. 그런데선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너와 이 사람이 갈라진거야 세월때문인거구 또 세월이 이렇게 마주앉게 했으니 연분이 아니겠니.
네가 쓴 글을 봐도 이 사람에 대해선 남다른것 같더구나.》
려아는 탁우의 빵부스레기를 쓸어모으고있었다. 청보석반지가 번쩍거리는 매끈한 손은 진지하게 로동을 하고있었고 하얀 목언저리의 피줄은 심장의 박동을 보여준다는듯 분주스레 팔라닥거렸다.
타락도 정도가 있는것이 아닌가.
성민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비통과 허무감속에서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할말은 해야 했다.
《전 형님이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부모님들이 계시여 형님말을 들으셨다면 어떻게 생각할것 같습니까.》
태민의 눈섭이 이그러졌다.
《야, 내가 사람도리를 몰라서 하는 말이냐. 넌 글에도 썼고 또 이사람을 만났을 때도 후회한다고 하지 않았니. 그렇다면 사는것이지 무슨 군말이냐.》
태민이 벽력같이 내지르는 소리에 성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려아씨에 대하여 말한다면 가까왔던것만은 사실입니다.
순결하고 착하고… 어린시절의 려아에 대한 표상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때문에 제가 아는 녀동무들중에선 려아가 제일 가까운 벗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사이로 말하면 그이상 전진이 있을수 없었습니다. 거기엔 우리 둘 서로의 지향과 감정에서 합치될수 없는 계선이 있은때문입니다. 려아씨에겐 예수의 세계가 첫자리에 있었다면 저에겐 해방된 조국과 혁명이라는 신성한 세계가 우선시되였습니다.》
《그렇다면 후회고 뭐고 했다는 소린 뭐냐?》
태민의 얼굴은 밤빛처럼 흐려졌다.
《형님도 글을 보셨다면 알겠지만 천성으로 순결하고 아릿답던 녀인이… 여기까지 오게 된데는 저의 책임도 크다고 보았기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것은 자기만이 아니라 가까운 친지들과 벗들에 대해서도 관심하는것이 응당한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러니 넌 나한테도 그때문에 찾아온셈이란거구나.》
태민은 쓰겁게 웃고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네 지론대로 이 사람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그걸 위해서도 함께 사는것이 바람직한것이 아니겠느냐.》
《형님!》
성민은 이발이 떡떡 마주 쪼였다.
《형님은 지금 인간의 초보적륜리와 도덕도, 저라는 인간의 인격과 감정마저 죄다 짓밟고있는데 이젠 알겠습니다. 형님이 어떻게 되여 이 땅에 와서 높은 벼슬길에 올랐는지―》
《뭐라구―》
탕! 소리와 함께 탁우에 있던 유리잔이 쟁강 하고 굴러떨어졌다.
태민의 얼굴은 붉다못해 거멓게 질렸고 이마전에는 바줄같은 피줄이 펄떡거렸다.
(아서라.)
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를 죽인자들에 대해서, 그자들에 대해 복수를 하지 못할망정 그자들이 던져주는 빵부스레기에 매달려 조국과 민족을 등지며 살아온데 대한 매춘을 규탄하려 했으나 참아야 했다.
애써 자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안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안해로 말하면 저의 한생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귀중한 첫사랑이자 죽어서도 함께 살아야 할 이 세상 제일 아름답고 훌륭한 녀성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녀성을 본다면… 건 제가 백치로 되거나 추물로 되였을 때겠지요.》
《허허―》
태민은 속빈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까지 끄덕였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다. 말뜻대로 보면 옳은것이구. 하지만 너두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통일은 어렵다고. 그래서 너의 집사람한텐 안됐다만… 생각을 돌리라구 한거다.》
《형님은 저의 말을 잘못 들으셨군요.
통일이 어렵다는것과 안된다는것간에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어렵다?!
물론 어렵습니다. 하지만 전 통일을 믿고있으며 또 그날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래 넌 징역살이로 통일을 한다는거냐.》
《어쩌겠습니까. 죽어서라도 성취해야 될 일이 아닙니까.
형님도 한때 조국을 찾아야 한다고 했고 분렬된 조국을 놓고 괴롭다고 했지요. 안 그렇습니까.》
《…》
《물론 그때의 처지와 립장과는 다르다는걸 압니다. 하지만 형님은 그릇된 사심과 그릇된 세파에 흔들리는 시정배… 약자는…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넌 나하고도 살지 않겠다는거냐?》
태민은 모든것을 체념한듯 한 표정이였다.
《살고싶습니다.》
성민은 가슴이 찢어질듯 했다.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저에 대해선… 강요하지 말아주십시오. 전… 나라와 민족앞에 부끄럽지 않고 벗과 친지들, 가족들앞에서 떳떳한 삶을 살려고 합니다. 지금 저만 아니라 수많은 동지들이 사랑하는 부모처자들과 헤여져 장장 수십년의 옥고를 치르고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제 한몸 살리자고 그들을 저버릴수 있겠습니까.》
삐그덕― 걸상 밀어제끼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드니 태민은 벌써 문쪽으로 나가고있었다.
쾅! 문이 닫겼다.
파랗게 질린 얼굴… 입술을 꼭 깨물고있는 려아의 눈에는 물기가 고여있었다.
《안됐소.…》
성민은 돌아서려다 말고 그를 다시 보았다.
《려아, 부탁컨대 부디 인간됨을 지켜주오.》
《작별인사치고는 너무하군요.》
놀랍게도 려아는 싸늘하게 웃으며 성민을 날카롭게 흘겨보았다.
성민은 마음이 한결 헐그러워졌다.
《고맙구만. 내 말이 지나쳤다면 나로선 기쁜 일이요.》
《그래요. 좋았어요, 아주 훌륭했어요. 옳은 말이니까요.》
려아는 뭔가 더 말을 할듯 하다가 얼굴을 싸쥔채 뛰쳐나갔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태민과 려아는 10년 넘도록 문안도 소식도 없었다. 그대신 새로운 벗들이 생겨났다. 그중에는 이 세상과 하직하는 순간에 뜨겁게 손을 내민 사람도 있었다.
《지동지, 오해했던 나를 용서해주오.》
진영팔이였다. 그는 병감에서 성민의 손을 잡은채 숨을 거두었다.
성민이 새롭게 사귀게 된 벗들속에는 차호은의 딸 설화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