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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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는 인간을 언제나 두편으로 갈라놓는다. 카인과 아벨(구약성서의 악인과 선인), 강한자와 약한자, 통치를 하는자와 통치를 받는자, 물건을 파는자와 사는자, 부자와 가난뱅이, 벗과 원쑤, 뚱뚱보와 말라꽹이…―
태민은 비단잠옷안의 흐벅진 배를 슬며시 만져보았다. 불룩하게 솟구친것이 임신 막달때의 옥영이와 흡사했다.
《제길.》
베개를 높이 고인 다음 몇줄 건너뛰며 읽었다.
―력사는 그 인간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하는 목적보다 무엇을 이룩했는가 하는 실체로 평가된다. 그런데 력사는 상반되는 세력과 견해의 싸움이니만치 그 어떤 위인이든 성인이든 모두의 지지를 받기는 어렵다.―
태민은 멀뚱히 천정을 쳐다보았다. 그럴듯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그의 일은 잘되여가고있었다. 회사초기에는 여러가지 협잡과 사기에 걸려 적잖게 랑패를 보았지만 업계의 요령을 터득한 다음부터는 얼음에 박 밀듯이 일이 잘 펴나갔다.
(모두의 지지를 받기는… 그래, 옳은 말이야.)
그동안 태민은 일이 잘되는 대신 중소기업인들과 회사산하의 사원들로부터는 여러모로의 지탄과 항의에 파업이요, 시위요 하는 싸개질에 언제 한번 마음 편한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태민은 한 인간의 힘으로써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체념하려 했다. 그들모두의 요구를 만족시키자면 애당초 기업을 운영하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기업이 있어 수천명의 밥줄이 생긴것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자기를 위안하기도 했다.
방안은 끝없이 조용했다.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젠장.》
요즈음 옥영은 도박에 미쳐있다. 말로는 심심풀이오락이라고 하지만 돈을 놓고 하는 놀음이니 도박이라고 할밖에 없다. 그렇다해서 막을수는 없었다. 경자가 미국으로 간 다음부터는 집이 텅 빈 절간같아서 피아노만 두드려대기는 옥영의 성미로써 도저히 맞지 않는것이다.
더구나 맞다드는 대상들이 거의나 다 장차관 마님들이거나 재계의 사장이요, 뭐요 하는 사람들의 령부인님들인지라 옥영이의 체면에도 걸맞는것이고 태민에게도 도움이 컸다. 사교술에 능한 옥영은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업계의 신출내기인 태민을 재계의 거목들과 다리를 놓아주었고 마님들의 베개머리 속삭임에서 얻어진 정보로 태민의 눈을 더 밝게 해주었다. 군사에서도 정보가 우선시되는것처럼 기업활동에도 정보가 성패의 관건으로 되기때문이였다.
후― 탁상등을 끄려고 하는데 침대밑에 던져버린 신문장이 눈에 띄였다.
《아사히신붕》의 특간호였다. 뼈밖에 없는 앙상한 얼굴의 죄수복이 태민을 묵묵히 쏘아보고있었다. 재도조선인류학생간첩단사건으로 구속된 주인공의 사진이였다. 약삭바른 일본인기자가 무슨 수를 써서 만났는지 장시간의 인터뷰끝에 옹근 한면의 기사를 쓰고 사진까지 박아넣은것이다. 태민은 자재계약차로 일본으로 갔다가 그 신문을 얻어왔었다. 신문기사에는 성민이에 대해서까지 써있었기때문이였다.
《아사히신붕》은 한다하는 각료들과 업자들의 정기구독물로 되여있지만 《남한》비판과 적화요소의 기사가 실린 신문은 공보부의 뒤창고에서 썩게 되는것이다.
태민이 그 신문을 찢어버릴가 말가 망설일 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들었던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드바삐 양복을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간 그는 불빛이 빠끔히 새여나오는 서기실문을 기척도 없이 열어젖혔다. 《한국경제신문》의 주식란을 읽고있던 서기(이전 사단통신대의 소위로서 경제학석사였다.)에게 응접실을 정리하라고 소리치기 바쁘게 밖으로 나갔다. 거무칙칙한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다음에야 긴숨을 내쉬였다.
《이건 왜 아직도 안 와서.》
애매한 옥영을 윽벼르며 서성이는데 보통승용차 광도의 두배되는 전조등빛이 칼날처럼 어둠을 찢으며 들이닥쳤다. 현관문앞에까지 와서 칙― 하고 멈춰선 차에서는 까만 제낀양복의 박정희가 내렸다.
《왜 그렇게 우거지상인가?》
태민의 인사를 받은 박정희는 늘 드나들던 집인양 거침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응접실앞에서 기절초풍한 자세로 굳어져있는 서기를 보자 알릴듯말듯 미간을 찡그렸다.
《한데 왜 이 집 녀왕님은 보이지 않나?》
녀왕님이라는 소리에 태민은 한숨을 놓았다.
《저녁마실을 가서…》
《흠, 이팔청춘은 다 지나갔다는거지.》
박정희의 입에서는 약간한 술내가 풍겼다. 태민이 응접실로 안내하려 하자 머리를 저었다.
《자네방으로 가자구.》
태민은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박정희가 그의 집을 찾기는 해방직후를 제하면 사단장으로 임명되였을 때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오늘이 처음이였다.
무슨 용건으로?…
《음침한것이 야꾸자 두령방 한가지구만.》
방에 올라온 박정희는 허물없이 쏘파에 주저앉으며 《뭘 좀 마실것 없겠나?》라고 물었다.
《저… 식당방에 가시는것이 좋지 않습니까?》
태민은 구겨진 모포보다 침대발치에 펼쳐진 신문이 걱정되였다.
《난 여기가 좋아. 우리 한번 옛날로 돌아가보자구.》
박정희는 감개무량한 기색이였다. 부엌으로 나간 태민은 위스키와 마른 안주 몇점을 챙겨들여올 때 신문위치부터 살폈다. 제자리에 그냥 놓인것으로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옥영이가 없어 대접이 초라하다는 인사말을 하려는데 박정희는 먼저 신문소리부터 입에 올렸다.
《자네 그간 구독범위가 상당히 넓어졌구만.》
다름아닌 《아사히신붕》에 눈길을 박고있었다.
《네, 두루 그저.》
《대사업가가 되셨으니 많이 봐야겠지. 저건 봤나? 자네 동생이 영웅처럼 묘사됐더군.》
아하, 이때문이로구나. 림기응변의 대답을 했다.
《쓸개빠진 녀석들이지요.》
《왜? 그렇게 볼건 못돼. 사실 내가 오늘 온건 저러루한 일때문일세.》
《네?!》
《뭐, 그건 괜히 해보는 소리고… 오늘 밤 달빛이 좋지 않아.》
태민은 달이 떴는지 아닌지도 가늠할수 없었다.
《만감이 교잡이라 이런 밤이야.》
박정희는 익숙한 솜씨로 병마개를 따며 말했다.
《그래서 내 오늘 한강반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어. 참, 자네도 〈한강반의 기적〉이라는 글 봤겠지. 어떤 녀석인지 기분 올릴줄 알거던. 한데 돌아보니 그럴듯 한 소리더란 말이야.》
박정희는 태민이 부어주는 술을 조금 입에 대였다가 떼고는 계속했다.
《아직 청소할것들은 있지만 옛때는 벗겨졌거던. 이제 몇개의 호화빌딩만 서면 멋진 스타일을 보일수 있어. 경제활성의 외피는 도시미관에서부터 나타나는거 아닌가. 그러니 뭔가 좀 해놓았구나 하는 성취감에 가슴이 부풀 정도였어. 해서 자네를 생각한거야.》
《감사합니다.》
《한데 골아픈것도 많아.》
박정희는 쭉 소리가 나게 한잔을 딴후 침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자네 집게에 물려본적이 있나.》
《건 무슨 말씀입니까?》
《집게야 집게지. 지금 내가 그놈의 쇠집게에 꽉 물린 처지란 말이야.》
태민은 어느정도 리해되였다.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7. 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온 나라가 좋다 나쁘다의 열기속에 팥죽끓듯 했다.
《큰일을 하시자면 어느 한편의 반대야 각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민은 방금전에 본 소책자의 글줄을 생각했다. 박정희는 손을 저었다.
《그런게 아니야. 이건 어느 한편이 아니라 량편 다 들이죄이거던. 유신을 놓고는 자유민주주의의 말살이라거니, 독재정치의 연장을 위해서라거니… 이건 따라지들만 아니라 한다 하는 국회의 어르신님들까지 왕왕 짖어대는거구… 리후락의 평양행을 놓고는 배신이라거니, 용공이라거니 하며 별의별 험구질로 다 죄겨댄단 말이야.》
《그거야 각하께서도 각오한것이 아닙니까. 제 알기엔 온 국민이 박수를 보내온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건 그래. 내 평생의 꿈 한가지는 꼭지를 뗀셈이고 참 말이 났으니 지금 후락이를 놓고 북의 김일성령수님한테 가서 절절 기였다고 구설들이 많지만 후락이 말 들어보면 공감이 간단 말이야.
한데 난 지금 이 일때문에 곱새가 될 판이야. 글쎄 후락이 평양행을 선선히 응해주던 큰 집 량반들도 오만상이거던. 백악관의 어떤 보살들은 나에 대한 불신임안까지 제출했다던가. 하지만 어쩌겠나. 시집살이정권이야 내가 만든것도 아니고… 또 당장 뛰쳐나가기도 어려운거구… 그래서 내가 새로운 국시를 내놓은거야.》
박정희의 새로운 《국시》란 《국민단합》과 《치안강화》 특히는 사소한 용공요소도 가차없이 엄단한다는 강경시책이였다.
《한데 이건 또 이것대로 뭐 네로(고대로마의 폭군)요, 히틀러요 하며 야단이거던. 그런데는…》 박정희는 신문장을 가리키며 계속했다.
《저러루한 소동 역시 난사야. 국제대사령이요, 인권협회요 하는데서까지 우리 감옥이 어쩌구저쩌구 들까부니 워싱톤의 펜대쟁이들까지 맞장구거던. 자넨 저걸 다 봤겠지.》
《네, 전… 다는 믿지 않습니다.》
신문의 인터뷰에는 비전향사상수들에 대한 테로행위가 단죄되여있었다. 박정희는 태민의 말이 진심인가 하는듯 유심히 여겨보다가 말했다.
《그건 사실일세.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할건 바라지 않았지만 저 신문을 읽고 알아보니 사실이더란 말이야. 이 땅에 한명의 비전향사상수도 없어야 한다고 했더니 그 말을 육체적인 소멸로 받아들인거지. 그래 이런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거야 제가 말씀드릴것이 못되지 않습니까.》
《오 지성민?!… 후에라도 그를 만나면 말해주라구. 내가 7. 4를 성사케 한것은 바로 자네 동생이랑들의 극성때문이였다고… 말은 바른대로 통일을 외면해서야 안되지 않나. 한데 나의 애로를 리해 못하거던. 때리면 우는척도 해야 되고 때에 따라서는 기발을 바꾸는 흉내도 내야 하는데 영 아다모끼란 말이야.
오늘 내가 요구해 올라온 자료를 보니 자네 동생이 진짜 영웅이더군. 비전향리더라던가… 그때문에 제거대상으로 돼있고. 참, 자넨 그동안에도 한번 찾아보지 못했나?》
《네.》
《음, 과시 지조가 굳군. 그래도 난 내딴의 일은 했어. 죽일것이 아니라 무조건 돌려세우라고. 무조건!… 근데 이 무조건이 문젤세.… 자네같은 혈통의 고집으로는 이가 들지 않을건 뻔하고… 그렇게 되면 견딜상싶지 않거던. 이렇다 해서 살살 어루만지라고 할수도 없고.…》
《그에 대해선 너무 마음쓰지 말아주십시오. 그것도 운명인걸요.》
《운명?!… 그건 참 듣기 좋은 말이야. 운명에는 거역을 못한다, 요즘 나도 숙명론에 빠질 때가 많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모든것이 제한되여있거던.》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구두발자국소리가 울렸다.
《허, 녀왕님이 오시는것 같군.》
박정희는 이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갔다.
다음날부터 태민은 심화병에 걸린 사람마냥 침울해졌다. 한마디로 고민이였다.
《요즘 나도 숙명론에 빠질 때가 많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그랬다. 마음대로 할수 없는것에 숙명이 있고 고민이 있는것이 아닌가.
그동안 성민이를 잊으려 했다. 그러나 성민은 지워버릴수도, 잊을수도 없는 존재였다.
친혈육이라는 본능적애정때문이였는가. 물론 그것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성민이가 무슨 마약쟁이거나 강도같은 패륜아였다면 태민은 몸에 생긴 종양을 훌 떼여버리듯이 혈연의 본능적감정과 기억의 울밖으로 단호히 처버리고말았을것이였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인가?
지꿎게 파고드는 이 물음앞에서 태민은 컴컴한 나락을, 그 나락속에서 꿈틀거리는 더러운 벌레를 보았다. 량심도 뜻도 죄다 저버린 벌레를.
그런데 그 벌레는 비통스러운 울부짖음을 터뜨린다.
《세상살이란 그런것이야. 량심은 뭣이고 뜻이란 또 무엇인가? 나, 나 하나만을 위했다면 벌레라고 하자. 하지만 나는 처와 딸을 위해서… 수치도 뭣도 다 이겨낸단 말이다.》
그래, 그렇지.
이때면 그 벌레는 사라지고 자기 합리화의 위안속에 입술을 강다문다.
몸과 가정을 지켰으니 지겨운 이 세월에 그만하면 괜찮게 구실을 한셈이 아닌가.
뭘 그건 거짓이야.
이럴 때면 또다시 컴컴한 나락속의 벌레가 떠오르고 때로는 지겨운 악몽속에서 염라국에 가있는 자기를 보기도 했는데 깨여나면 온몸에 땀이 질퍽히 내고였다.
이건 다 그녀석때문이야, 그녀석. 아니, 아니야.
정치?!… 그놈의 정치때문이야. 정치란 수놀음이 아닌가. 수란 간계와 거짓의 통칭인것이고 그때문에 이 땅의 인간들은 정치라는 수놀음앞에서 인간의 본색마저 잃게 되는것이다. 그러지 않고 고지식하게 량심대로 산다면 자기 역시 응석이나 성민이같은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것이다.
비전향사상수들에 대한 전대미문의 전향테로가 국제사회와 언론계의 주목을 끌고 재야세력의 반정부공격자료로 되면서부터 성민이로 인한 고민은 태민에게만 아니라 옥영에게도 뗄수 없는 고민으로 되였다. 국민모두가 보라는 선전매체의 글보다도 쉬쉬 돌아가는 뒤구석여론과 출간금지의 소책자나 외국출판물의 토막글들을 상식자랑으로 읊조리는 마님들은 중세기 마녀감옥(종교의 이단자들을 벌하여 가혹한 폭행을 가한 감옥, 비전향사상수들의 감옥에 대한 별칭)의 재현을 놓고 갖은 기담들을 다 펼쳤는데 그 화제의 초점은 옥영에게 가 멎군 했다.
《남편되는분의 동생이라는이도 거기에 있다죠?》 《소학교동창이였구요. 인물 잘나고 말 또한 웅변이라며?》 찰찰스런 물음과 기름바른 감탄뒤에는 《근데 어쩜 빨갱이가 되였을가. 맘고통 크시겠네.》하는 위로에 《몇번 가봤나? 돌려세우지 못하나? 아무리 빨갱이라도 혈육인데.》하는 먼발치기의 비난도 있었다.
하여튼 그것이 동정이든 비난이든 옥영에게는 매정스러운 채찍질이였고 그런 자리에 앉을 때마다 불방석에 오른 심정이였으니 이로 하여 도박놀이회수도 줄게 되였다.
《이젠 당신도 한번 찾아가봐야 하지 않겠어요.》
어느날 옥영은 매섭게 태민에게 들이댔다.
《군에서도 나오고 합동참모의원직도 없어진지 고망년인데 뭘 주저할것이 있어요. 남들 하는 말도 생각해보세요. 빨갱이라면 다들 치를 떤다면서도 십수년 넘게 담을 쌓고있으니 돌부처라고까지 해요. 해발딱한년들은 당신이 겁쟁이라서 만날념을 못한다구요.…》
《겁쟁이라구―》
그때 태민은 너털웃음을 웃었으나 정통을 찔리웠다고 생각하였다.
박정희며 입바른자들의 뒤소리까지 겁낸건 사실인것이였다. 물론 여기에도 수가 작용했다. 서뿔리 만나면 자기에 대한 의존심과 기대로 더 고집을 부릴수 있다는것과 고생고생하느라면 돌아설 때가 있겠지 하는 자기로도 믿어지지 않는 타산이 있었다.
이로 하여 옥영의 감옥출입도 막아버렸고 령치금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기업초기에는 돈이 딸린데도 원인이 있었다. 경자와 창호의 류학금보장만으로도 매달 수판알을 튕겨야 했던것이였다.
《좀더 생각해보자구.》
옥영의 긴 사설을 이렇게 밀막고난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단호한 결심을 내렸다.
(만나자. 억지로라도 굽혀내야 한다.)
한개의 군단작전을 설계할 때처럼 여러가지 방도와 방안을 생각했다.
그다음 청와대의 박정희를 찾아가 만났다.
박정희는 그전과 달리 뜻밖이라는 태도였다.
《굽혀낼 자신이 있나?》
《어쩌겠습니까. 그길밖에는 없는데… 각하를 만난데 대해서는 일체 비밀에 붙이겠습니다.》
《허허, 난 자네를 생각해서 그런거야. 일이 잘 안되면 자네의 체신이 깎일거거던.》
《저야 이젠 쓰다버린 기와장이 아닙니까.》
《자네 날 원망하는건가.》
박정희의 눈빛이 표독스러워졌다. 태민은 대번에 속이 써늘해졌다.
박정희가 이쯤 나올 때면 그 대상은 피해를 본다. 김형욱정보부장의 죽음이 떠올랐다.
《하여튼 잘해보겠습니다.》
박정희의 표리부동을 새삼스럽게 다시 느끼면서도 비굴하다는 생각은 씹어삼켰다.
마음은 불안한 대신 각오는 더 굳세여졌다.
렴치도 도덕도 죄다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길로 옥영이와 함께 려아를 찾아갔다.
려아는 어머니와 고학을 하는 녀대학생 합해 셋이 살고있었다. 동양식도 아니고 서양식도 아닌 3칸짜리 양철지붕집은 꽃밭으로 둘러싸여있었다. 샤프란, 튜맆, 백합, 봉선화, 나리꽃들이 무덕지게 핀 꽃밭은 화초원을 련상시켰다.
태민이가 옥영이와 함께 갔을 때 려아는 피아노교수중이였다. 하여 잠시동안 화초원 구경군노릇을 하는데 후원 담장밑에서 봉선화 손톱물들이기를 하는 처녀애와 만났다. 서너살밖에 안돼보이는 처녀애였다.
《넌 누구지?》
《학생이예요.》
《학생? 학생이면 이렇게 나와 놀면 안되지 않어.》
《전 아직 노랜 못 배워요.》
《그럼 뭘 배워?》
《선생님 몸가짐과 품성 배워요.》
《몸가짐?!…》 서너살밖에 안되는 소녀애의 어른스런 대답에 태민은 아연해졌다.
《몸가짐과 품성이란 뭐이지?》
《이쁜거야요. 걷는거, 말하는거 다 이쁘고… 불쌍한 사람 사랑 다 이뻐요.》
《불쌍한 사람 사랑한다는건 뭐냐?》
《거지애, 병신애 다 사랑하는거죠. 그리고… 아저씬 가막소 알아? 가막소 불쌍한 사람 돌보는거 다 이쁜거야.》
려아가 나타난통에 처녀애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끊어져버렸다.
차설화라고 부르는 이 처녀애의 이름을 성민이가 지어줬다는것은 꿈에도 알수 없었다. 려아는 옥영에게는 반가운 웃음을 보였으나 태민에게는 서먹한 태도였다.
(이거 안되겠는걸.)
새삼스럽게 여겨보게 된 려아의 젊음에 더욱 기가 질렸다. 무대복차림과 비슷한 날씬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의 곡선미를 선명히 드러내는 까만 달린옷은 려아로 하여금 20~30대의 녀성으로 착각하게 했다. 옥영은 턱과 몸에 군살까지 생겼지만 진주목걸이가 드리운 려아의 희디흰 가슴팍과 목에는 한오리의 주름살도 없이 매끈했다.
려아의 방에 들어가서야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였다.
검은 휘장을 드리운 방안에서 색다른 기물이란 록음기 한개뿐이였고 침대옆탁에 소녀시절에 찍은 려아의 독사진 한장이 댕그랗게 놓여있었다.
이리로 올 때 옥영이와 나눈 말들이 떠올랐다.
《려안 아직도 수녀생활인가?》
《수녀까지야. 하긴 고독이 즐겁다니 그 비슷하지요 뭐.》
《기둥서방은 없대?》
《당신은 그저… 녀자들은 남자들과 달라요.》
자리를 잡고 앉자 려아는 깍듯한 태도로 《이거 방이 어지러워 죄송합니다.》하며 고개를 수그려보였다. 하지만 다시 머리를 쳐들때의 눈빛에는 죄송스러워하는감도 수집어하는 빛도 없었고 오히려 뭣때문에 왔느냐 하는 비난과 오만스러운 빛이 풍겼다.
태민은 거북스러운중에 봉천조병창(심양병기공장)의 뒤마당을 그려보았다.
희푸름한 쪼각달, 눈물을 쏟던 려아, 그때의 려아는 수집음과 고마움에 찬 눈길로 태민을 보았었다.
힘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