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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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통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늘어빠진 고음이 감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에, 오늘은 7월7석이라서 특별급식이 차례졌다. 다들 신나게 먹고 하느님과 당국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급식―》
묵직하게 지켜지던 고요가 깨뜨려졌다.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키득키득 웃는 소리, 걸죽한 마구잡이욕설들…
《허, 개물이구나.》
《견우직녀상봉날 이게 단가?》
《여, 아가릴 닥쳐.》
성민은 키높은 담벽우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결수 석달동안에 얻어진 유일한 자유란 바깥하늘을 바라보는것뿐이다.
(그러니 오늘이 바로…)
손바닥만큼한 하늘로 13년전의 이날이 비껴들었다.
순정이와 처음으로 다시 만난 날이 바로 13년전 오늘이였던것이다.
요즘은 거의 매일마다 안해며 집생각을 하군 했지만 별스럽게 가슴이 미여지는듯 아파들었다.
무료한 나날, 운명은 이미 결정되였고 그 시각을 기다리는 최종공판싸움은 다 각오된것이니 그것이 비록 괴로운 추억이든 즐거운 추억이든 자기 인생의 떳떳한 총화로서 지금같이는 가슴을 허비지 않았다.
너무 편안한탓인가.
1주일에 두세번씩 륙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사를 만나는것과 고독과의 싸움이 전부라고 할수 있었다.
따분하고 지루한 문답, 그의 법정기소를 담당하게 된 법대출신의 애젊은 검사는 근 석달동안 악을 쓰며 그의 《범죄》를 법조문에 맞추려 애썼고 성민은 하루빨리 그 문서작성이 끝나기를 바라 여러모로 훈수도 하고 편달도 하며 각근히 도와주었다.
처음에는 성민의 《범죄문》작성보다 그의 《빨갱이》사상과 리론에 더 흥미를 가지며 그의 사상과 리론을 일격에 부셔버릴듯 하던 검사는 함무라비법전으로부터 나뽈레옹법전의 세부까지 파고들며 일일이 반격하는 성민의 말에 《어휴, 선생님한텐 손을 들었습니다.》 했고 죽음을 초월하는 기상과 죽음을 앞당기려는 성민의 친절한 도움에는 검사로서의 충심마저 흔들렸는지 《그럼 안돼요. 이러이러하게 하는것이 좋지 않아요.》하며 기소문작성까지 토론에 붙였는데 그검사의 감동과 호의가 작용해서인지 이 서대문지옥에서의 처우도 성민에게만은 여전히 대감님대접이였다.
《선생님, 면회입니다.》
감시창구가 열리며 간수의 얼굴이 보이는가싶더니 찌쿠덩 하고 문이 열렸다. 한발자국 들어선 간수는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일어나앉는 성민을 보며 혀를 찼다.
《어데 편치 않으신가유?》
《면회자는 누구요?》
《부인이라는데 그밖에 또 있다는것 같아유.》
성민은 구겨진 옷자락을 펴며 망설이였다.
(그자가?…)
며칠전에 찾아왔던 명례를 생각했다.
소장실에서 찾는다고 하여 끌려가보니 소장이 아니라 명례가 그를 맞았다.
《성민이, 나야. 날세, 명례야.》
두팔을 쳐든 명례는 반가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태도로 성민이를 와락 그러안으려 했다. 그때 한걸음 물러섰던가. 하지만 그때까지는 례의를 잃지 않았다.
명례는 많은 말을 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다 안다고 하며 살아야 한다고, 자기도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 성민은 먼저 라진조선소의 파괴사건에 대하여 물었다.
《어찌겠나, 쾅! 해치웠지. 우리 친척의 재산을 그냥 남겨둘수 없잖어.》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대답에 그만 물러가라고 소리쳤다.
《왜?》 명례는 깜짝 놀라는 기색이였다. 《듣자하니 자네가 일루 온데는 나를 만나자는 목적도 있었다는데―》
《그렇네.》
《그렇다면 진지하게 얘기를 해봐야지.》
성민은 더 참을수 없었다.
《난 인간을 만나러 왔지 지금같은 흉물과 만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
《허허, 그러니 내가 그전엔 인간이였구 지금은 짐승이라 그 소린가.》
《물론 그때도 절반짜리였어. 하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
《야!》 명례는 책상을 쳤다. 문이 벌컥 열리며 간수가 총을 들고 뛰여들었다.
명례는 불이 이는 눈으로 성민을 노려보다가 간수더러 나가라고 소리쳤다.
《그럼 려아도 만나지 않을텐가.》 명례는 비양거리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려아는 지금 나와 사네. 자네한텐 안됐네만 어쩌겠나. 자네가 돌봐주지 않으니 내가 구원해줄수밖에… 그래, 어떤가.
물론 싫겠지. 그 역시 나같은 흉물과 사니 같고같은 흉물인것이고… 원쑤일테니까.》
성민은 그때 아무 대답도 않은채 문밖을 나섰다.…
(려아일것이다.)
전과 같이 긴 복도를 지나 면회장소라고 하는 교도소 소장의 방으로 갈 때까지 성민은 어떻게 만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아무런 준비도 못했다.
《나는 이런 려아를 보리라고는 생각 못했소.》
머리속에 감겨도는 말은 이 하나뿐이였다.
의자에서 다소곳이 일어서는 녀인은 려아가 아니라 옥영이였다.
진회색조선치마저고리에 목수건 역시 진회색뜨개천이였다. 그뒤에는 낯모를 중위와 함께 몰라보게 달라진 경자가 눈이 말똥해 서있었다.
《어서 말씀들을 나누십시오.》
소장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성민이와 옥영은 그냥 한자세로 보기만 했다.
《오래간만입니다.》
성민은 간신히 이 말을 했다. 옥영은 대답을 못했다. 맑은 눈에 눈물이 고여올랐다.
《영 못 만날줄 알았는데―》 성민은 아픈 마음을 누르며 경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경자, 친척이 친척한테 인사를 안하면 되니?》
눈이 휘둥그래 성민을 살피던 경자는 대번에 얼굴이 빨개지며 까딱하고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그래야지, 한데 저 사람 누구지?》 창문가에 선 중위를 가리켜보이자 그때에야 옥영이가 입을 열었다.
《정창호씨라고 애아버지의 부관되는이예요.》
정창호는 이때라고 생각하였다.
《지선생,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훌륭한분이라고. 그래서 저도 이렇게 뵈옵자고 찾아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정말 기쁜 소립니다.》
《배고프지요?》
옥영은 다행이다싶은 얼굴로 커다란 풀색가방에서 음식꾸레미들을 꺼내 펼쳤다. 빵과 단물, 통졸임, 사탕, 과자, 배따위들이 주런이 나왔다.
성민은 반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고맙군요. 그래, 어머님이랑 잘 계시는가요?》
《녜.》
《응석아주바이네는…》
《잘 있어요.》
《나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는가요?》
《안… 몇번 불려다녔지만―》
《지장군덕이겠지요.》
성민의 말에 옥영이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저… 얘아버지에 대해서 너무 나삐 생각말아요. 그이는…》
《그 얘긴 하지 맙시다.》
《지선생!》
정창호는 지태민과 옥영이앞에서의 자기 의무를 리행하자고 마음먹었다.
《선생에 대한 지장군의 심정과… 당시 과정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압니다. 그분은 명실공히 선생을 위해서 그런 용단을 내린것입니다. 그때의 지장군의 고민과 고통을 다 렬거한다면―》
《허, 당신은 그 어른을 무척 존경하는것 같구만.》
《그렇습니다. 진실로 존경할만 한분이니까요.》
《건 좋고… 상관을 존경하고 따르는것은 아름다운것이라고 봐야 할테니까. 한데 내앞에선 그런 소리를 더 하지 않았으면 하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왔습니까?》
성민은 헌헌한 태도로 옥영을 향해 물었다.
《어쩜…》
이 한마디를 번지고난 옥영은 애원하는듯, 원망하는듯 한 눈길로 성민을 바라보았다.
성민은 경자에게 눈길을 옮겼다. 눈이 휘둥그래있는 경자를 보자 가슴속에 몰아치던 질풍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경자, 내가 무섭지?… 이제 좀더 무서워진다. 이마에 뿔이 돋구 얼굴이 벽돌처럼 뻘겋게 되지, 〈빨갱이〉니까.》
《건 거짓말이예요.》
《그런가.》
《집안소식이나 들려줘요.》
옥영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성민의 손을 끄당겨 잡았다.
성민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예나 오늘이나 인정은 변함없는것이 아닌가.
성민이 집안형편으로부터 옥영이가 알수 있는 친척들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펼쳐가는 이야기에 옥영은 물론 경자까지 눈이 게슴츠레해있을 때 정창호는 오제도를 생각했다. 그처럼 예민한 시각과 판단으로 지성민이라는 인간을 파보고 개심의 열쇠를 찾아보자고 했다. 법조계나 정보계가 못한 일을 자기가 성사시킨다면 옥영이네 집안에는 물론 나라앞에서도 큰 공으로 될것이 아닌가. 하지만 수많은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숙질붙이들의 이름자와 생활사가 나오자 어언중 가정세태사에 열중하는 청강자가 되였고 성민이 역시 자기와 다를바 없이 가까운 사람들의 행복에는 기쁨을, 불행에는 슬픔을 금치 못하는 인간이라는데서 애착 비슷한 련민과 동정을 느꼈다.
《내 아들애의 눈도 경자와 비슷해, 쌍까풀이 있고 못되고 앙칼지고.》
성민이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웃음으로 버물어졌으나 정창호는 눈굽까지 시큰해졌다.
《이제 너도 앞으로는 꼭 만나보게 될거다. 이런데서가 아니라 경성바다가나 다도해에서 만날수 있지.》
성민의 이 말에 옥영은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었다.
《이걸 좀 들어요.》
옥영이가 귤을 쪼개 성민에게 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하다니요?》
성민의 반문에 옥영은 가늘게 숨을 내뽑았다.
《거기서는… 죄를 다 인정했다지요.》
《죄?!… 어떤 죄말입니까?》
《법에서 금하는…》
《허허… 전 애당초 그런 법은 인정도 하지 않지만 그 법이 죄라고 하는건 인정했습니다.
공화국이 좋기에 좋다고 한것이고 조국통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것이니 그 희망을 우기게 된것이고… 량심을 팔수 없으니 지키겠다 한것인데 이것이 죄라니 어쩔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 형수는 이런 저의 결심을 되돌리려는건 아니겠지요.》
《그러나 당장 살아야 하지 않아요. 법과 싸워야 무슨 승산이 있어요.》
《지금의 나에게서 승산여부는 무관계한겁니다. 그저 이 지성민이 가문에도 나라에도 수치스럽지 않은 인간으로 남기를 바랄뿐입니다. 이밖에 더 있다면 형수도 그리고 경자도 제가 택한 길, 저의 량심과 뜻에 대해서만은 리해하리라는걸 바라게 되고 믿고싶은것입니다.》
《그에 대해선… 취급하는이들도 장하게 본다고 합니다만… 무엇때문에 죽을 길을 찾는가 안타까와 한대요.》
《그런 말은 더 하지 맙시다. 참, 려아소식은 모르는가요.》
《왜 모르겠어요.》 옥영의 얼굴에 한가닥 밝은 웃음이 피여올랐다.
《사실 난 오늘 그와 함께 오려고 했다가 그만두었어요.》
《건 잘했습니다. 한데 그가 누구한테 시집을 갔는가요?》
《저… 명례라고… 거기서도 알지요?》
《알고있습니다. 사람질을 못할 개차반이지요.》
성민의 날카로운 말에 옥영은 면구한 기색이였다.
《나도 그닥잖게 보지만 지금 그는 중앙정보부라는데서 과장을 해요.… 한데 려아는 그닥 행복하지 못해요. 생활적으로 보면 괜찮게 산다고 할수 있지만… 여기 와서 할아버지쪽 재산을 물려받고 지금은 음악학원을 경영하는데 명례씨도… 그의 재산덕을 많이 보았어요.》
《그렇다면 금슬도 좋고 생활도 행복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질 못해요. 그들사이는 처음부터 의가 맞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말이 부부이지 별거생활과 다름없어요. 다음번엔 그와 함께 오겠어요.…》
《그만두십시오.》
《왜 그래요? 려아는 거기 소식을 듣고는 잠도 끼니도 번지고… 거기탓이지요. 무엇때문에 그를 버렸어요?》
성민은 억이 막혔다.
《그 문제에선 버리고말고가 없습니다. 물론 내 잘못도 있지요.》
《그럼 꼭 만나요, 꼭…》
《형수, 형수는 지금 뭔가 내 말을 오해하는것 같은데 난 그가 인간으로서 인간을 지키지 못한것이 괴로와 하는 말입니다. 무엇때문에 그가 명례같은 인간과 결합되였는가, 분합니다.》
《거야 방금 말하지 않았는가요, 자기탓이라고.》
《허.》
성민은 옥영에게 명백히 말해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말하는 잘못이란 형수가 생각하는것과는 다른겁니다. 형수는 내가 마치 그를 사랑하다가 버린것처럼 보는데 려아에 대한 나의 감정이란 소꿉시절의 벗으로서… 그밖의 다른것은 없었습니다. 깨끗하고 맘씨 고운 녀자였다는 그뿐이였지요.》
《그래도 그와 그 집에서는…》
《옳습니다. 나도 그런 눈치를 모른것은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알고도 명백히 말해주지 못한것이 또 하나 잘못이라고 할수 있는데… 나의 진짜 잘못이란 소꿉시절의 벗으로서 그를 돕지 못한것입니다.》
《아이구,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럼 그한테 한가지만은 꼭 전해주십시오.
고향에서 당한 그의 비극적인 일은 우리 공화국의 정책이 그래서가 아니라 일부 그릇된 사람들의 처사였다는것을 꼭 말해주십시오.
이런 면에서는 형수도 형님도 반드시 알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정치는 패덕한, 역적들이 아닌 이상 모든 인간들을 따뜻이 품에 안는 사랑의 정치라는것입니다.
또 하나 형님에게 하고싶은 말은 더이상 인간의 본도에서 벗어나지 말아달라는것입니다.
나를 마지막으로, 그렇지요,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성민은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옥영은 얼어붙은듯 꼼짝않고 서있었다.
성민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돌아섰다.
《형님은 나를 만날 생각이 없답디까?》
《저… 경자 아버진 일이 바빠서―》
《그럴테지요. 그럼 형한테 한가지만은 더 전해주십시오. 제가 옴쟁이에 대해서 묻더라고.》
《건 무슨 소리예요?》
《제가 한 말이라면 알것입니다.》
성민은 옴쟁이라는 소리에 눈이 올롱해있는 경자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밖으로 나섰다.
호실에 돌아오니 점심밥이 와있었다.
성민은 옥영이가 색색으로 꾸려온 음식들을 호실수인들한테 넘겨주고 그 점심밥이 담긴 목곽을 끌어당겼다.
7월7석명절이여서인지 아침에는 꽁보리밥우에 새우젓이 버물려있더니 이번에는 썩은 정어리토막이 놓여있다.
헤식은 밥을 한숟가락 넣기 바쁘게 그것부터 집어들던 성민은 불시에 목이 콱 메여올라 얼른 놓고말았다.
한쪽면이 까맣게 탄 정어리… 성민은 그 밥마저 밀어놓았다.
영문을 모르는 호실수인들은 그것마저 날래게 가무리해치웠다.
(왜 이럴가? 이건 정신적쇠약인데…)
이렇게 자기를 다잡으려 했으나 안되였다.
또다시 뙤창밖을 내다보았다.
물고기탄내, 그때는 바싹 마른 망챙이였다. 그것을 굽는 부엌에는 연기가 자오록했고 그때문에 어머니는 연신 눈굽을 훔쳤다.
《이건 꼭 순정이한테만 줘라. 그 애가 물고기구이라면 사족을 못썼다.》
가는 길에 변할가봐 바람이 잘 통하는 베보자기에 싸주며 어머니는 몇번이고 이 말을 했다.
어머니의 말대로 순정은 그 보따리를 받아안고 어쩔바를 모르며 자기만 먹겠다고 했다.
성민이 김일성종합대학 추가편입추천장을 안고 평양에 도착한것은 이른새벽이였다.
전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종합대학청사에 가닿으니 한창 아침등교중이였다.
커다란 트렁크를 든채 활기넘쳐 밀려드는 그들을 지켜보던 성민은 도착하는 즉시로 순정이를 만나려던 계획을(이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부이기도 했다.)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편입시험에서 합격된 다음 떳떳이 만나는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편입도 1학년이 아니라 2학년으로.
력사학부를 지망했으니만치 자신만만했다. 조선력사는 일찌기 할아버지와 구학교사 아버지의 신칙과 방조밑에 년대별, 왕조별 비사까지 휑하니 알고있는 상태고 현대사는 체험자, 목격자이니 더욱 자신만만했다. 세계사는 이미 중학교때 뗀것이고.
2학년! 여기에는 순정이한테 꿇리지 않으려는 승벽도 없지 않을것이였다.
더 속깊이 말한다면 고맙고 슬기로운 그 아름다운 녀성한테 잘 보이려는 이성의 감정, 문득 되돌이켜보면 얼굴이 뜨뜻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세차게 활랑거리는 오직 풋사랑을 앞둔 총각시절에만 갖게 되는 감정때문일것이였다.
그런데 대학교무부에 들어가 초벌인물심사를 받고 림시로 배정된 기숙사호실에 들어가 짐을 풀 때 순정이가 나타날줄이야.
여러가지 펼쳐놓은 잡동사니들때문에 더욱 당황하게 되였다.
왜 당황했을가? 그것 역시 그러루한 어설핀 감정때문일것이였다.
그러나 순정은 달랐다.
뛰여들기 바쁘게 손을 잡았고 부모님들의 안부를 물은 뒤끝에는 왜 자기부터 만나지 않았는가 다짜고짜 나무람을 앞세웠다.
이 나무람때문에 성민은 기가 죽었다. 변명할 말을 찾을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말린 낙지와 구운 망챙이가 그를 구원해주었다.
《아이, 이건 어머님이 저한테 보내주신거지요.》
베보자기꾸레미를 안아든 순정은 어린애처럼 기뻐 어쩔줄 몰라했다. 그통에 성민은 부모님의 인사말뒤끝에 자기의 속감정까지 얼마간 비칠수 있었고 강의시간을 뚜꺼먹으면 되느냐고 한살 우 년장자로서의 존엄도 보였다.
한데 그때문에 또 퉁을 먹을줄이야.
《사람들이 다 동무같은줄 알아요? 남은 눈이 까매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는데… 이른아침에 왔다면서 그게 뭐예요.》
자기가 잘 아는 외국어강의시간이여서 승인까지 받고왔다는것은 그뒤에 한 말이고…
그날 성민은 자기가 어떻게 종합대학에까지 오게 되였는가를, 자기와 가정에 대한 보증은 순정이나 외삼촌의 동무들만이 아니라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동지께서 친히 말씀까지 계셨음을 알게 되였다.
그리고 김일성장군님께서 함북도당안에 잠입한 종파사대주의분자들의 좌경책동에 또 한번 경종을 울리시였다는 사실도 깊은 감동속에 듣게 되였다.
이렇게 볼 때 순정은 두분의 위대한 뜻과 사랑을 성민에게 심어주는 첫 교사였고 생활의 걸음걸음에 비쳐지는 인도의 별이기도 했다.
별! 별은 그만큼 가까이, 따스하게 있었으나 여하튼 하늘에 있는것이니 존경과 애정속에 보기만 할뿐 손잡을수도 오를수도 없는 가깝고도 먼 공상속의 꿈나무일뿐이였다. 하지만 성민에게는 이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마음속의 상처만 더 헤집어놓았던 옥영이가 열흘후에 또다시 찾아왔다. 이때도 정창호와 함께 왔다. 경자만은 보이지 않았다.
성민은 무엇보다 옴쟁이소리에 대한 태민의 반응이 궁금해 어지간히 반가움을 보였다. 그런데 령치금과 음식꾸레미를 싸들고 온 옥영은 건강을 잘 돌보라는 말만 했을뿐 옴쟁이에 대해서는 전혀 비치지 않았다.
부득불 묻지 않을수 없었다.
《형님이 옴쟁이를 놓고 무슨 말이 없었습니까?》
《아이, 내 머리를 봐. 깜빡 잊다보니 말해주지 못했어.》
너무나도 수월히, 재빨리 나오는 대답이였다.
(거짓말이로구나.)
예견했던 일이였다. 분명 태민은 성을 냈을것이다. 별의별 험한 욕을 다 했을수 있고… 하지만 속는척 할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번엔 꼭 잊지 말고 전해주십시오. 아마 형님이 들으면 무척 좋아할것입니다.》
속에서는 노기가 태질을 쳤다.
옥영은 미안스럽게 성민을 훔쳐보고는 차입음식속에 려아가 보낸것들도 있다고 하며 서둘러 떠나갔다.
감방에 돌아가 그 음식꾸레미를 헤쳐보니 백합꽃을 수놓은 손수건이 있었다. 이번에는 속이 왈칵 뒤집히는것 같았다.
명례! 그자의 공작이 아니겠는가.
모두가 치사스러웠고 그만큼 분노가 컸다.
령치금과 차입음식을 그전때처럼 감방수인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런 어느날 성민이 담당검사와 최종기소문을 합의보고났을 때 또다시 면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날의 면회는 소장실이 아니라 일반면회실에서 하게 되였다. 면회때마다 한번쯤은 얼굴을 비치던 소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들반들 닳은 쇠그물앞에 이르자 고깔솜모자를 쓴 경자와 정창호라는 중위가 서있었다.
《이젠 경자가 엄마대신이냐?》
성민이 웃음을 보이자 경자의 입귀가 일그러졌다.
《왜, 무슨 일이 있니?》
다우쳐묻는 성민의 물음에 경자는 흑― 하고 울음을 터쳤다.
면회를 지켜보던 간수가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었소?》
성민이 정창호를 보자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뿜었다.
《지장군이… 잘못되였습니다.》
《잘못되다니―》
《별일 없을것이라고 봅니다만 직책에서 물러나 연금되였습니다.》
《연금?!…》
《네.》
《삼촌탓이야!》 경자의 날카로운 웨침이 면회실을 쨍― 하게 울렸다.
《얘, 그럼 못써.》
정창호가 그의 어깨를 다치자 경자는 더 서럽게 울었다. 창호는 게면쩍은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뭔가 오해가 생긴것 같습니다. 군에선… 지장군말고도 여럿이 당하셨는데… 무사히 해명될걸로 믿습니다.》
성민은 놀랐다. 마음속에 지워버린 형님이였지만 이 시각은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와도 일없겠소?》
《저야 뭐―》
《하여간 고맙소. 난 당신이… 이 경자랑 잘 돌봐줄줄 믿소.》
《아, 거야 더 말할 여부가 있습니까.》
《경자 아버지가 좋은 부관을 두고있었구만.》
《원, 무슨 과분한 말씀을.》
경자와 창호가 왔다간 뒤부터 성민은 자기에 대한 대감님대접이 깨끗이 끝났다는것을 알았다. 간수들의 얼굴에 씌워졌던 곰살궂은 도금도 말끔히 벗겨지고 끼때마다 받군 하던 1등식(감옥안에서 제일 높은 급의 음식)은 곰팽이투성이염장무 한쪼박이 댕그랗게 놓인 썩은 꽁보리밥 4등식으로 바꿔졌다.
성민으로서는 오히려 이것이 마음에 편안하였으나 그대신 태민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수많은 혹시와 만약이 엄청난 환상과 기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백두산 무장부대로 가겠다던 말을 다시 상기하게 되였고 그 본심에 돛을 올리자 따뜻한 추억과 믿음의 정이 마파람의 산불처럼 불붙어 식어버린 애정을 되끓게 했다.
이로부터 그를 만나고싶은 그리고 꼭 만나야 한다는 욕구와 의무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고 이것은 단념했던 삶에 대한 의욕을, 아직 죽기는 이르다는 생명과 활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불러일으켰다. 하여 그는 얼마동안 중단했던 랭수마찰도 다시 시작했고 옥영의 면회까지 간절히 바라게 되였다. 배고픔속에 시들어가는 육체를 보존하자면 먹을것이 필요했던것이다. 하지만 면회나 차입은 두번다시 없었다.
그런 어느날 담당검사가 찾아왔다. 매번 검찰부 비둘기장에서 의좋은 벗인양 마주앉던 담당검사는 시죽은 얼굴로 래일이 공판일이라는것과 공판과정에 지켜야 할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상서롭지 못한 말은 절대 하지 말아줘요.》
여느때면 성민은 이러루한 말에 코웃음을 쳤겠으나 이때는 상당히 주의깊이 들었다.
《주로 어떤 경우를 념두에 둡니까?》
《공화국에 대한 선전과 통일에 대한 지론 말입니다.》
담당검사가 성민이앞에서 손을 들게 된것은 통일문제에 대한 론전에서 패한 뒤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