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5

 

이즈음 정창호는 경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일은 경자의 무용교습을 돌봐달라는 옥영사모님의 부탁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창호씨는 무용에도 밝고 태권에도 능하다니 그 앨 잘 지켜주리라고 믿어요.》

지태민도 선선히 허락해주었다.

《군무에만 지장이 없으면 되지.》

골치거리의 동생이 간 뒤부터 생겨난 따뜻한 변화였다.

그 사연은 어떻든 정창호로서는 일생 처음되는 호사라 기쁘기 그지없었다. 저녁마다 지장군의 차를 타고 무용교습장에 갔고 돌아올 때 역시 그 차를 타고와서는 썰렁한 장교식당이 아니라 옥영사모님의 솜씨가 깃든 알뜰살뜰한 료리로 포식하군 했다. 그까짓 포식은 제쳐놓고라도 서울장안의 한다하는 미녀들과 향긋한 분내에 취하여 피를 끓이는것이야말로 호사중의 호사였으니 이중에도 뽑아고른 무용교사들과 날라리아가씨들마저 감탄할 정도로 률동과 맵시에서 이목을 끌게 되는것이 더없는 쾌감이였다.

경자는 벌써 첫날에 그한테 쏠리는 처녀들의 눈길을 놓고 시샘을 했다. 《헛눈 팔지 말어요.》 그뒤에는 《야, 자》하는 호칭도 삼가하라고 하며 어른처럼 대해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재미거리로 응했다.

그런데 경자는 어데서 이 모든것을 배웠는가. 그야말로 녀왕이였다.

차붓이 가슴에 안겨 눈을 사르르 내리깔 때면 요염한 녀인의 교기로 가슴 울렁거리게 했고 빠금히 눈을 치뜨고 마주볼 때면 숨구멍까지 꽉 막힐 지경이였다.

요런 햇병아리한테… 틀지게 마음을 가다듬으려 해도 안되였다. 조금 몸이 부딪치거나 박자를 맞추지 못해 동작이 헝클어질 때면 《아이, 미안해요.》하고 살짝 얼굴을 붉히는데 이럴 때면 자기가 안고 도는 경자가 소녀라기보다 이골 튼 춤아가씨였다.

경자는 집에 와서야 그 모든 허울을 벗어버렸다. 웃고 떠들고 어리광을 부리고 《아저씨.》, 《아저씨.》하며 본래의 소녀로 돌아갔다.

이럴 때마다 창호는 헛가비한테 속히운듯 한 기분에 혀를 찼으나 이상스럽게도 그 소녀로의 환원도 일종의 유혹으로 마음을 간지럽혔다.

엄청난 공상에 몸이 달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7살이나 우인데 하는 생각도 무시되였다. 오히려 그 비슷한 경우의 실례로 가능성을 기정화하였다. 달콤한 공상속에 그와 나란히 혼례식장에 들어서보기도 하고 뜨르르한 장성들과 유명인사들앞에서 《제 처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령은 못돼도 중령쯤 될 자기를 그려보며 개미가 지나가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군 했다. 이런 환상때의 경자는 지금의 경자이기도 하고 옥영사모님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군장성 부인들속에서 단연 손꼽히는 옥영사모님. 경자는 그 어머니마저 릉가할 미모인것이다. 이런 속에 꿈나무는 시간마다 커갔다.…

《아이, 손님이 왔네요.》

응접실창문이 환히 밝은것을 본 경자는 팔굽까지 와닿은 비단장갑을 벗어버림과 동시에 덜렁이처럼 차에서 뛰여내렸다. 정창호에게는 그것 역시 발랄한 처녀의 신선미로 느껴졌다.

마당 한구석에는 보지 못하던 승용차가 서있었다. 번호판도 알아볼수 없었다. 현관문밖으로 나온 집지기사병으로부터 미국인손님이 왔음을 알게 되였다. 경자가 환성을 올렸다.

《엔트로우, 저의 교부군요. 어서 들어가자요.》

응접실에 채 닿기 전에 문이 열리며 옥영이 서둘러 나왔다. 향긋한 고급려송연냄새와 위스키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오늘은 일찍 왔군요.》

여느때보다는 서름서름한 태도였다. 손님의 래방이 불시적이여서인지 옷차림은 평소의 집안차림 그대로였다. 미색뜨개옷우에 까만 숄을 걸친것만이 여느때와 달랐다.

《엔트로우씨가 오셨다.》

경자에게 하는 말도 례없이 뚝뚝했다.

정창호는 돌아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흰 문전거절인가요.》

경자 역시 뭔가 색다른 기미를 알아차렸는지 성난 고양이처럼 입술을 뾰조롬히 내밀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인사는 하려무나. 주인도 계십니다.》

정창호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일 때 귀에 선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부인, 왜 그러고있습니까, 내 딸이 온것 같은데―》

정창호는 반쯤 열려진 문안에서 지태민과 마주 앉았던 사나이가 움쭉 일어서는것을 보았다.

《들어가요.》

옥영은 향기나는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저씨!―》

경자가 호들갑스러울 정도의 애교를 흘리며 뛰여들어가자 정창호도 어쩔수없이 따라섰다.

《누군가?》

경자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난 미국인이 누구에게라없이 묻자 정창호의 거수경례에 고개를 끄덕인 지태민이 《내 부관이요.》라고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앉소, 앉으라구.》

정창호에게는 앉으라고 하는 그 말이 그만 떠나가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묵묵히 담배만 피우는 지태민의 풀기없는 얼굴로 하여 더욱 그러했다.

《돌아가겠습니다.》

정창호는 구두발뒤꿈치를 요란스럽게 부딪치는것으로 때맞지 않는 장소에 때맞지 않게 들어온 옹색함을 눌러버렸다.

옥영사모님이 따라나왔다.

《그냥 가면 안돼요, 식사도 하고…》

정창호는 딱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간다면 옹졸한 소위로 되는것이고 그냥 눌러붙어 차려주는 밥을 먹는다면 자존심에 거슬리는것이다.

그때 경자가 뛰여나왔다.

《엄마, 샴페인 있다지.》

《응, 엔트로우씨가.》

《오케이. 아저씨, 가자요.》

《오늘은 그냥 갈가 하는데.》

《아니, 방금 아빠도 말했어요, 가지 말라고.》

경자의 손에 끌려 이 집 취사장이자 식당으로 쓰는 부엌방으로 들어갔다.

경자는 따라오려는 옥영을 되돌려보냈다.

《아빠, 엄마들끼리 싸우라요.》

취사장의 식탁을 보고는 또다시 뾰로통해졌다. 채 썰지 않은 꼴바싸와 쏘세지토막들이 널려있었다.

《아이참, 이게 무슨 꼴이람. 차라리 잘됐어요. 내 료리솜씨를 보이겠어요.》

경자는 가시대옆의 그물망태기에서 2병의 샴팡을 꺼내놓고는 자못 기세돋친 눈길로 취사장안을 둘러보다가 식탁을 맞들자고 했다. 응접실과 잇닿은 벽의 흰 모슬린천이 드리운 곳으로 바싹 가까이 가져다놓았다.

《이자 아빠엄마의 싸움이란 무슨 소리야.》

자리에 앉은 정창호는 이것부터 물었다. 경자는 쌔무룩 웃었다.

《그건 절대비밀인데… 이제 알게 돼요.》

경자는 눈길이 가느스름해져 흰 모슬린천을 들어올렸다. 연두색널판이 드러났다.

《이게 뭔지 아세요? 큰 연회때 쓰군 하는 배식구예요.》

《근데…》

정창호의 머리는 재빨리 돌아갔다.

《말소리를 낮춰요. 여기선 저안의 말들을 다 엿듣게 되거던요.》

《아 아, 내려. 어른들 말 엿들으면 못쓰지.》

《호호, 아저씬 석두야. 난 연회때마다 여기 앉아서 공부를 해요. 어른들 말 다 들으며 머리에 차곡차곡 챙겨두고 욕하는것, 웃는것 다 배우지요.》

《어, 대단한데.》

《그건 그렇구요, 내 가정비밀 말할가.》

《맘대로.》

《혼자만 알아야 돼요.》

경자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창호는 또 한번 개미가 가슴으로 지나가는감을 느끼며 새끼손가락을 맞걸었다.

《저기 엔트로우씨는 아주 멋쟁이예요. 이 세상일 모르는것 없고 사모님도 멋쟁인데 여긴 한번 오고 발길을 끊었어요. 왠지 알아요? 우리 어머니때문이예요. 엔트로우씬 일찌기… 우리 엄마한테 프로포즈(구혼)했거던요.》

《프로포즈를…》

《네, 그래서 그 멋진 사모님도 다신 안 오고… 우리 아빠도 엔트로우씰 그닥 좋아하지 않아요.》

《아까 교부라고 한건 그 프로포즈때문인가.》

《아니, 아녜요. 그건 엔트로우씨가 나의 미국류학까지 맡겠다고 해서 제가 그렇게 부르게 된거예요.》

《아, 그렇댔구만.》

《이건 절대비밀이예요. 한데 내가 이걸 아저씨한테 말하는건… 이런걸 알고 아빠한테 계몽을 시켜달라는거예요. 울아빤 다 좋은데 아직도 봉건내음이 물씬물씬해요. 샴페인을 마시세요.》

한동안 먹고 마시기만 했다. 정창호가 두번째 병을 기울일 때 첫 잔의 샴팡을 조금씩 핥아마시던 경자가 갑자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붙였다.

《쉿.》

응접실쪽에서 두런두런 울리던 말소리가 커졌다.

《그렇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지장군을 미워하면서도 막아나서는… 내 알기엔 옛날 귀국의 남이장군도 자기를 음해한 당사자가 미워 그가 비록 반역음모를 꾀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패당이라고 고발하여 함께 형장에 갔다지 않습니까.》

엔트로우의 장황한 말을 지태민의 목소리가 끊어버렸다.

《거야 당신네의 그 기곈지 약물인지 하는 덕택일테지요.》

《아니, 그 기계와 약물은 무관계한것이지요. 피심자의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토설하게끔 만들어진것이니까.

그런데 그 당신의 동생은 지장군에 대한 혐의를 죄다 부정할뿐만아니라 나로서도 아슬아슬하다고 본 국면에서는 책상을 들이받으며 자결을 시도했단 말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귀가 항아리만 해 그쪽말을 엿듣던 정창호는 경자의 눈이 동실해진것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여길 떠나겠다는건 뭣때문입니까?》

《건 뭐 한두마디로 하기는 힘듭니다. 우선 지장군과 옥영부인의 부탁을 지키지 못한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사실 그 문제로 지금도 생각이 복잡합니다. 살리자면 뭔가 타당한 조건이 있어야겠는데 찾을수 없거던요. 순수 이 집을 위한다는 면에서 보면 그를 백치로 만들어 순응케 하던가.… 기밀을 제공한 밀고자로 만들어놓는건데―》

《그건 죽기보다 못한겁니다. 일단 우리 가문의 인간으로 알려진 이상 백치가 되여도 안되고 밀고군으로는 더욱 안됩니다. 죽어야지요.》

《지장군의 심정은 알만 합니다. 그런데 그건 이미 결정된거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평한 〈개심불가능〉은 사회와의 영원한 격리를 선포하는것으로 되니까.》

《떠나겠다는 리유는 또 뭐요.》

《이젠 지쳤고 또 싫어졌다는 그것입니다. 사실 내가 이 땅에 발붙일 때는 상당한 포부와 경륜이 있었지요. 허지만 그것은 다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대로 기대를 걸었다면 5.16혁명이지요. 나로서는 봉건과 군주제의 종말로 보게 될것이니까. … 아시겠지만 나는 링컨주의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링컨은 국토를 통일하고 신세계의 질서를 세웠습니다, 신세계! 이 땅에 올 때의 꿈이 바로 이것이였지요. 그런데 허망한 환상이였습니다.

땅이 다르고 인간들이 다르고… 〈영국사람 하나면 바보고 둘이면 스포츠, 셋이면 대영제국을 이룬다〉, 반면에 〈한국사람 하나면 똑똑이고 둘이면 바둑친구, 셋이면 패권싸움을 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비슷한 격언이 아닙니까. 이 한국땅을 보십시오. 여야싸움에 일본계요, 만주계요, 경상도요, 전라도요, 얼마나 복잡합니까.》

《엔트로우씨, 물고뜯는 싸움이란 오랑캐의 발굽밑에서 생겨난 이질이요.》

《그렇다칩시다. 그런데 이 나라엔 무슨 사상과 주의가 그렇게 많습니까.》

《미국엔 그런것이 없습니까?》

《정 없다고는 할수 없지요. 그러나 정치가와 철학가들이 만들어내는 주의와 사상도 내분과 싸움으로는 번지지 않았습니다. 그런걸 요란스럽게 떠들던 사람들도 돈과 실용이라는 가치관에서는 일맥상통이였으니까.》

《돈과 실용에만 정착한다면 인간이 뭘루 되겠소.》

《허, 내가 지장군의 공맹지도(공자맹자의 유교지론)를 무시한것 같은데 내가 말하자는건 하나의 통일된 가치관이야말로 내분도 싸움도 끝장내는 길이라는것입니다.》

《5.16이 바로 그걸 해결하자는것이 아닙니까.》

《해결한다?!… 그렇다칩시다. 그런데 이북은… 이북의 영향을 어떻게 막습니까. 남한자체의 정신적통일도 어려운데.》

《그때문에 5.16이 있는것이 아닙니까. 현재는 우리가 너무 렬세입니다.

여기서는 나 개인의 견해이긴 합니다만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힘이면 호상 공평한 상태의 악수가 있겠느냐 하는것입니다. 수법과 힘이 동등한 적수들은 악수를 하는데… 미국은 바로 이것을 도와줘야 할것입니다. 강한 국력과 군사력으로 이북과 평형을 이루거나 압도할수 있게끔―》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 역시 동감입니다. 사실 내가 떠나게 된 동기도 이 문제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나는 이 땅에 처음 왔을 때 얄따회담에서 제기한 루즈벨트대통령의 신탁통치안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력사발전상에서 볼 때 조선은 한단계 뒤떨어진만큼 선진국들의 도움이 꼭 필요될것이라고… 그런데 웬걸, 이 나라가 정치분쟁의 왕국일줄이야 알았습니까. 이런데서부터 리더(지도자)가 아니라 중재자, 조정자역을 하는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지(해방직후의 남조선 미군정장관)를 탓해야 할지, 애치슨(미국무장관)을 탓해야 할지 중재자, 조정자가 될대신 씨저(케자르, 고대로마의 독재관)가 되였단 말입니다. 처음엔 이것도 필요한것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아니였지요. 싸움에 또 싸움, 끝내는 전쟁이였고 오늘도 전쟁이나 다름없는 상태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일찌기 나는 평양에 갔다온 려운형선생으로부터 북조선이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을 희망한다는 소릴 들은바 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리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걸리는것이 있다면 력사적으로 이 나라가 중국이나 로씨야에 눌려있은것만큼 중공이나 붉은로씨야의 세력권에 들수 있다는것이고 이로부터 그 세력의 남하를 막기 위한 미군진주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들이 나간다면 이북은 그 즉시로 우리를 먹어치울것이요.》

지태민의 목소리엔 분기가 어려있었다. 대답이 빨랐다.

《물론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 국민들의 래일을 생각할 때 과히 나쁘지 않는 일이라는것입니다.

지장군도 알겠지만 북에는 내분도 정치싸움도 없습니다. 놀랍게도 하나의 사상, 하나의 가치관으로 굳게 결속되여 남한과는 하늘땅차이를 보여주고있습니다. 이런데서부터 남한의 많은 사람들까지 북에 동조하고있지 않습니까.》

《허허, 엔트로우씨는 오늘 나의 동향을 검토할 과업을 받은것이 아닙니까?》

《실례했습니다. 내가 지장군의 반공열을 무시한것 같은데… 하지만 지장군도 이북을 그리 적대시하진 않겠는데요. 하긴 이 말도 실례겠지요. 그러나 말이 난김에 다 합시다. 만약 이북이 당신네를 삼키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싸우겠지요?》

《피할순 없습니다.》

《그럴테지요. 그렇게 되면 무척 많은 피가 흐를것입니다, 피! 류혈은 좋지 않지만 이 나라의 발전을 생각하면 그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엔트, 오늘 취하셨군요.》

옥영이가 끼여들었다.

《부인,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왜 류혈이 필요한가. 그 피를 통해 다시는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찾고 서로 싸우지 말자는 결론을 얻게 한다는것입니다. 지금 발전된 나라의 적지 않은 정치가들이 그걸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미국에는 그런 정치가들이 적습니다. 이곳도 마찬가지고…

내 심정으로 보면 당신들이 이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걸 우리가 맡아보는 빨갱이들을 통해 더욱 실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뻐젓이 할수 있는것은 지장군의 동생을, 그 공산당론설원과의 대화를 통해 완전한 결론을 보았기때문입니다.》

《그럼 이젠 조선로동당 입당청원서를 내야 하지 않습니까.》 태민의 말이였다.

《허허, 하긴 난 이미 그 비슷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트루맨시절같으면 히틀러법에 걸려 전기의자에 오를수도 있을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미합중국의 리익을 떠난것이 아니라 바로 미합중국의 권익과 명예를 생각했기에 이런 주장을 하게 되는것입니다.

왜 그런가. 당신의 위구대로 이북이 통일을 한다 해도 그에 따른 대책은 있기때문입니다. 북의 김일성령수는 옛날부터 오늘까지 사랑으로 정치를 주도합니다. 사랑, 이것이야말로 만능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조선인들은 사랑에 주리고 사랑에 쉽게 끌려가는 속성을 가지고있지요.

이렇게 볼 때 북이든 남이든 통일을 하면 우린 막강한 자금과 차관으로 이 나라를 포옹할수 있습니다. 물론 이건 내 생각입니다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것 같습니까. 김일성령수는 한평생 인민을 위한것을 신조로 삼는것만큼 제 인민, 제 자식을 잘 도와주는것을 나쁘다고 보지 않을것입니다.

그까짓 사상과 주의는 갈데로 가라고 합시다. 그들이 통일된 나라의 치안을 잘 다스리고 우리와 가까이 하면 만사 오케이가 아닙니까.》

《당신같은 견해가 미국에 또 있을수 있다고 봅니까.》

《왜 없겠습니까. 나는 이제 본국에 가면 이런 내용의 글도 쓰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정치가들을 찾아 적극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진심입니까?》

《희망을 잃었기에 배머리를 돌린것이지요.》

《떳떳하니 좋군요. 한데 그것이 배신이라는 생각은 없습니까.》

《배신?! 누가 누구에 대하여 배신한다는것입니까.》

《우리 남한의… 당신네들이 말하던 혈맹 우방국이지요. 구체적으로는 나나 이사람까지 포함해서―》

《그렇다고 합시다. 그럼 지장군은 누구를, 무엇을 믿고있습니까.》

《사람은 다 제나름대로의 신념을 가지고있는 법이요.》

《신념… 그 신념이란 도대체 어떤것입니까. 정몽주의 일편단심입니까? 지장군, 그런 잠에선 깨여나십시오. 구체적인 신념이란 실용입니다. 나, 나와 가족들, 친지들을 위한 실용, 관념의 유희는 필요없습니다.》

《엔트로우씨, 나 역시 나와 가족들을 생각해서 그러는겁니다. 공산제도는 두번 그들을 배신한 나를 용납하지 않을것입니다.》

《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동생은 일체 과거를 백지화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걸 믿습니까?》

《믿지요. 그건 그들의 주의와 사상이고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그럴수밖에 없는것이지요. 그런 면에서는 그들도 실용에 접근하였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상과 주의도 철저히 민족과 국가를 위한 계산에서 나온것이니까.》

《엔트로우씨, 오늘 당신은 뭔가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그럼 한가지 실례를 듭시다.

우리가 어떻게 되여 일본을 이기게 되였는가.

전쟁사가들과 언론가들은 미국의 막강한 경제력을 운운하고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있지요. 하지만 그보다 사상때문이였습니다.》

《사상이라니, 당신은 그걸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왜 사상이라고 하는가.… 조선전쟁에서 미국군인들은 비겁쟁이로 락인되였습니다.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무모한 싸움에 말려든걸 안 이상 누가 용감성을 발휘하겠습니까. 그러나 태평양전쟁은 이와 달랐습니다. 진주만의 비극, 수많은 미국청년들의 죽음은 무서운 복수심과 증오를 낳았지요. 일본놈을 쳐죽이라! 미국전체가 들고일어났지요. 내가 말하는 사상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북은 국토통일을 하나의 절대적목표, 절대적사명감으로 삼고 매진하고있습니다. 여기에 또한 남한의 전반민심이 발맞추고있습니다. 그러니 별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좋기는 원자탄을 쓰는것이지만 그건 지장군과 옥영부인까지 무덤속으로 끌고가는 일이니 안될것이지요.》

《너무 성급하구만. 로마는 하루이틀에 이룩된것이 아니지요. 다 때가 있는 법이 아닙니까.》

《그때가 어느때입니까.》

《그건 우리의 국력이 이북과 평형을 이루거나 압도할 때―》

《그것이 가능할것 같습니까?》

《그때문에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것이지요. 이 나라의 분렬과 비극에는 당신도 말했지만 미국의 책임이 크지 않습니까.》

《책임에 대해선 인정합니다. 하지만 어떤 도움도 무력하다는데 대해서는 지장군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그래 지금의 한국을 보십시오. 어느 정도 안정은 있다지만 이것이 실제적인것입니까.

총칼로 유지되는 안정인데 이 안정밑에는 어마어마한 반항이 꿈틀거리고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것도… 해결할것입니다.》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겠지요.》

《얼마동안만일것이요.》

《허, 신라의 이른바 3국통일도 당나라가 돌아서니 끝장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엔트로우씨한텐 어떤 방안이 있다는것입니까.》

《우리가 일찌감치 물러가는것이지요. 물론 이런 일이 기분좋은건 못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지배하고싶은 욕망이 있다는데 나 역시 미국시민으로서 이 땅과 온 세계가 우리한테 고분고분할것을 바라고 그우에 군림한 씨저가 되고싶습니다. 이런 소린 지장군한테도 옥영부인한테도 실례긴 합니다만 리해해줘야 할것입니다. 식민지총독이 되는것, 이것은 미국의 거의 모든 남성들의 꿈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정창호는 입술을 사려물었다.

저 빌어먹을 철면피, 항간의 글쟁이들이 침략성이요, 식민지성이요 하며 미국과 이 남쪽땅의 관계를 종주관계로 묘사하더니 저자도 식민지총독이요, 뭐요 안하무인이 아닌가.

그런데 엔트로우는 더욱 성수가 나 말했다.

《꿈! 하지만 이것은 말그대로 꿈이지요. 잘못된것이라기보다 어리석은… 이 땅의 사람들이 옛날의 인디안들이 아니라는걸 몰랐던거지요.

그전에 우리 병사들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까. 온순한 사람들의 나라로 알고온 이 땅에서 아침저녁으로 돌벼락에, 주먹찜질에 넋이 빠진다고… 이건 오늘날에 내가 겪는 고통보다는 한결 또 나은겁니다. 나로 말하면 매일마다 눈에 불을 달고 쏴보는 사람들과 싱갱이를 해야 하는데 사람이 얼마를 산다고 이 놀음을 계속해야 한다는겁니까. 될수 없는것, 실현될수 없는것에서 일찌감치 손을 떼는것이 현명한 처신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걱정할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떠벌이지만 미국은 당신네의 희망을 존중시할테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고 물러가겠습니다.》

《벌써요?》

옥영사모님의 말소리였다.

《떠나기 전날 다시 오겠습니다. 부인의 어머님이랑 만나야 할테니까요.》

《저… 그 사람은 어찌 되나요?》

《말하지 않았던가요? 륙군본부 검찰부에 송치되였으니 이제부턴 지장군네의 군법회의가 결정할것입니다. 래달쯤 검찰측 기소가 제기되고 심의가 있고… 잘되면 래년초안으로 공판이 있을수 있지요.

너무 비관할건 없다고 봅니다. 당신네 대통령도 관심을 두는 인물이니…》

《아깐 극형을 예고하지 않았소?》

《사회와의 영원한 격리란 사형만은 아니지요. 우리측에서 사형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제가… 막았습니다. 간첩죄는 없으니까.》

《감사해요.》

《이제라도 가능성은 있습니다. 개심의 실증만 보이면 되지요. 검사측 기소처리가 끝난 다음엔 면회도 할수 있는것이니… 이젠 지장군과 옥영부인의 재량에 맡길수밖에 없지요.―》

걸상을 밀어젖히는 소리에 정창호는 재빨리 일어섰다.

《경자, 오늘 말은 못 들은것으로 돼야 돼.》

식탁을 닁큼 들어 옮겨놓았다.

《저… 공판이란 그를 재판한다는건가요?》

경자의 눈에는 겁기가 흘렀다. 정창호 역시 속이 화드드 떨렸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지.》

《야― 그럼 어떻게 될가. 학교엔 어떻게 다니고 춤도… 아이, 속상해.》

창호는 눈이 덩둘해졌다.

《야, 떠나신다.》

옥영이가 들어섰다. 별반 축이 나지 않은 음식상을 보고는 미안쩍은 기색으로 창호를 보았다.

《오늘 안됐어요. 참, 쟤 아버지도 부댈 나가겠다고 해요.》

 

빨깃한 담배불, 후사경속에 비쳐진 그 불빛이 커질 때마다 지태민의 침침한 눈과 코언저리의 주름살이 뚜렷이 드러났다.

차안은 담배연기로 꽉 찼다. 그처럼 창호의 마음속도 번뇌와 시름으로 꽉 찼다.

(어떻게 할것인가.)

명백한것은 지장군의 밑에서는 더이상 미래를 기약할수 없다는것이였다. 물론 엔트로우는 개자식이지만 지장군은 변함없는 충신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걸 알아준다던가.

북한 《빨갱이》의 형님, 미구하여 그 《빨갱이》는 처형될것이고 그때면 제아무리 《대통령》이 그를 싸고돈다 해도 지장군이 무슨 얼굴로 사병들을 대하며 자기 아래사람을 위해 마음쓸수 있겠는가.

(아아, 이 무슨 일이람.)

지장군의 동생이 그처럼 악질인줄은 몰랐다. 개심은 먹어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았다.

후사경속의 담배불빛이 꺼진것이다. 지태민의 심정을 헤아려보았다. 어제날의 자기와 같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백포에 싸여 돌아온 시체… 그날의 일을 돌이켜보자 자기 운명의 길라잡이가 떠올랐다. 놀기 잘하면서도 뱀처럼 차거운 방첩계의 인물, 며칠전 무도장에서 만났던 그는 중앙정보부 과장으로 출세하였다고 으시댔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관계는 변함없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방금 들은 말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거침없이 내뱉던 《용공》, 《리적》발언들, 하지만 지태민에게 루가 미칠짓이야 할수 없지 않는가.

이전 방첩계의 장교가 자기의 길라잡이라고 할 때 지태민 역시 마음속 의지고 희망의 길라잡이가 아니였던가. 이렇다 하여 그 엔트로우라는 개자식을 폭로하지 않으면 《호국》의 남아로서 참답지 못할뿐만아니라 사소한 이색이라도 죄다 보고하겠다고 한 이전 방첩대장교와의 약속을 어기는것으로 된다. 그 약속은 국가와 군의 안녕을 위한 서약이기도 했다.

이전 방첩대장교와 지장군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륙군특무대장 김창룡이 피살되였다는 사실로 온 나라 여론이 물끓듯 할 때 사단검찰감으로 있던 창호의 아버지가 불시에 체포되고 얼마후에는 시체로 되여 집에 돌아왔다.

군부요인 살해, 국가반역의 어마어마한 죄명을 진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헌병대에서 온 사람들과 친척밖에 없었다. 누구도 창호네를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는 더욱 깊어갔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나의 장래는? 눈물속의 외로움과 슬픔은 미구하여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적의로 바꿔졌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생겨났다. 아버지를 잃은지 2년 채 안되는 어느날 창호의 집에는 군부내의 모모한 인물들과 함께 오늘의 중앙정보부 과장이 찾아왔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처형은 잘못된자들의 음해라는것과 《호국일선》에서 분투한 아버지를 륙군공로자로 높이 평가하게 되였다고 하며 동리 뒤산에 묻혔던 아버지의 시신을 대전국립공동묘지에 옮기는 요란스런 행사를 벌렸다. 그 행사에서 창호는 오늘의 중앙정보부 과장이 귀띔하는데 따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기를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여 법과대학 학생이였던 그는 사관학교에 갔고 졸업때에는 대번에 중위로 되는 특전을 얻었다. 사실 그의 희망은 군이 아니였다. 그것은 창호자신의 뜻이기에 앞서 아버지의 영향때문이였다. 사립변호사로부터 군에 징집되여 검찰감으로 승진한 아버지였지만 군이라고 하면 도리를 쳤다. 군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를 만드는 도형장이라고 했고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죽일 놈이요 하며 군대의 부패상을 놓고 개탄했다. 창호 역시 그러루한 이야기들과 실지 목격하게 되는 군병들의 치졸함과 무지스런 행동에 머리를 젓게 되였고 중학교졸업을 앞둔무렵에는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예능이냐, 법률이냐 하는 길에서 법과를 택했다. 그가 천성의 소질로 인정받은 예능과 문학이 아니라 법과를 택한것은 법은 량심과 도덕의 파수병이라는 인식과 아버지를 음해한자들을 찾아 복수하리라는 엉뚱한 야심때문이였다.

오늘의 중앙정보부 과장은 바로 그의 이런 야심에 불을 질러 군으로의 방향전환을 하게 했다.

남북의 대치상태에서 군대야말로 《호국》남아의 활무대인것이고 아버지를 음해한자들이 아직도 군부내에 남아있으니만치 그들을 찾아 복수하는데도 유리하다고 했다. 아버지처럼 그런 불의한자들의 손에 죽을것이 아니라 그런자들을 먼저 적발색출하여 짓눌러버려야 한다고 하며 창호의 사관학교입학으로부터 배치에 이르기까지 숨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로부터 창호는 그를 자기의 은사로, 길라잡이로 따르게 되였던것이였다. 그런데 왜서인지 그에게는 정이 붙지 않았다. 반대로 지태민에게는 이름할수 없는 친근감이 생겼고 마음 전부를 기탁할 정도였다.…

《땐스홀에 아는 사람이 많어?》

지태민의 목소리에 창호는 소스라치듯 생각에서 깨여났다.

차는 서라벌호텔옆을 지나가고있었다.

《전 별로 없지만 따님한텐 많습니다. 학교동무들도 있고… 여러 사모님들도 다들 따님을 놓고 칭찬이 대단합니다.》

《이제부턴 주말 토요일이나 한번쯤씩 가지. 학생은 공부가 기본이니까.》

지태민은 이로써 말을 끝냈다.

불빛 한점 없는 본부청사앞에 차가 멎었을 때 창호는 다시 시작될 한랭을 생각했다.

다른데로 가야 한다, 다른데로!

졸업할 때 그의 길라잡이는 방첩대를 권고했다. 하지만 그때는 뿌리쳤다. 똥별 하나를 달고 수색견처럼 여기저기 뛰여다니며 킁킁 냄새를 맡고 필요에 따라 따귀도 붙이고 팔삭둥이흉내도 내야 하는 좀스러운 일이 자존심에 걸렸던것이다. 될바에는 대뜸 이목을 끌고 존경을 받을만 한 탐정계의 인물로 되여야 했다. 그러자면 여러 방면에서 안목을 넓히고 경험을 쌓고 권력계의 인사들속에 깊이 몸담근 다음 이 나라 안보의 기둥이 되여야 했던것이다.

《참, 군의 부친 제사날이 모레지.》

현관문으로 들어서던 지태민이 돌아섰다.

《그날은 잊지 말고 묘소에 꼭 가보라구.》

태민은 이 말을 남기고 컴컴한 복도로 사라졌다.

창호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던것이다.

(그래, 인간으로서는 더 나무랄것이 없어. 얼마나 우애 깊고 다심한가.)

그가 아버지의 제사날을 기억해낸것은 미구하여 처형될 그 동생때문이겠지만 창호의 여린 마음에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경자의 말이 귀전을 울렸다.

《학교엔 어떻게 다니고… 춤도… 아이, 속상해.》

철부지의 한심스럽던 말이 새로운 의미로 가슴을 쳤다.

(그래, 이 집은 하나같이 굳건해.)

순간이나마 지장군을 배반할번 했다는것으로 낯이 화끈거렸다.

 

다음날 밤 창호는 그의 길라잡이의 호출을 받았다.

예나 다름없이 단골료리점으로 자리를 정한 그의 길라잡이는 자그마한 앉은뱅이책상을 마주하고 20대의 녀자가 쳐주는 약주를 졸금졸금 마시며 기다리고있었다.

창호가 들어서자 매양 그러듯이 그 녀자는 사뿐히 일어서 사라지고 과장은 긴 팔을 내뻗쳐 창호의 손을 정겹게 잡아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지?》

과장의 모상과 차림은 그동안 조금도 달라진데가 없었다, 푹 우무러져들어간 눈확을 가리우는 진주빛 대모테 안경이며 높이 춰 깎은 머리에서 발산하는 번들번들한 머리기름의 광채도.

《내가 임자를 찾은건―》 20대의 녀자와 술기운때문인지 얼굴이 개고기빛으로 된 그는 목이 긴 술잔에 가득 부은 술을 창호에게 내밀며 말을 이었다. 《임자의 지장군을 잘 돌볼 필요성때문일세.》

껄, 게트림을 하고는 창호의 속까지 꿰뚫듯 찬찬히 보다가 실그레 웃었다.

《한데 요즘 임잔 보고란걸 죄 잊은게 아니야?》

《어떻게 찾을지 몰라서―》

《뭐 이전처럼 암호를 쓸것도 없고 번호로 찾을 필요도 없어. 중앙정보부 과장 박명례씨 하고 찾으면 되지.》

명례는 물수건으로 입술을 닦고 담배를 꺼내물었다. 넥타이는 반쯤 풀어져있고 와이샤쯔단추도 밑에것 두개만 채워진 상태였다.

명례는 오늘만 아니라 다른 때도 이런 차림으로 맞았고 이런 차림으로 상하간의 격식도 초월해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느날인가는 창호앞에서 그 20대녀자와의 포옹도 보여주었다.

《그래, 요즘도 지장군은 쇄신분툰가?》

《네.》

《그럴테지, 하지만 뭔가 변화가 있겠는데…》

《예, 변화라기보다》 창호는 명례가 자기의 땐스홀출입은 물론 엔트로우의 방문건까지 알수 있을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장군은 북에서 온 동생을 빨리 처리할걸 바라는것 같습니다.》

《바라는것 같다, 건 어떻게?》

《건 제 추리입니다.》

《이보게, 내가 언제부터 말했나. 나에겐 추리가 아니라 사실이 필요하다고. 물론 추리도 필요하지. 하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 특히 임자의 상태에선 추리라는건 나한테 맡기고 사실을 밝혀야 돼.》

《사실을 말한다면―》

창호의 뇌리에는 엔트로우와 주고받던 지장군의 말이 토 하나 빠짐없이 생생히 감겨돌았으나 그 말은 할수 없어 자기딴의 지혜를 펼쳤다.

《며칠전에 제가… 그의 동생에 대해 얼핏 물었던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는가고. 그랬더니… 왈칵 성을 내며 빨리 꺼지라던지… 그 비슷한 소릴 했습니다.》

《꺼지라, 죽여달란 소리로구만.…》

《네, 제 생각도… 빨리 처단하는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제 사병들한테까지 알려지면―》

《건 임자가 생각할 몫이 아니야.》

명례는 날카롭게 말하고는 시죽이 웃었다.

《임자생각 진심이야?》

《네, 그자가 지장군의 동생이라지만 상당한 빨갱이지식분자라고 하니 우리에게 해가 클것이 아닙니까.》

《단순해. 물론 나도 그런자를 없애는데선 조금도 유감이 없어. 하지만 그 모든것은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것이고 우리에게 유해한것이 큰것만큼 유리하게 써먹게끔 해야 하거던.

물론 이것까진 우리로서 할일은 못돼.

그럼 군으로서 할일은 무언가. 그 동생일을 걱정해주면서 친척이 친척을 찾아온만치 말과 행동에서 그걸 표시하는거야.》

《아니, 그럼 제가 용공분자로 되게요?》

《이건 정치의 필요고 지장군을 위한 일이야. 그럼 정식 임무를 받으라구. 임잔 장도영사건을 잘 알지.》

《네.》

《지금도 장도영의 아류들은 적잖아. 이건 최고지도급의 지신데 그 아류와 동조자들을 적발분쇄하는것이 군과 나라를 위한 중요사업으로 됐어. 그런데 임자의 지장군에 대해 불미스런 말들이 많아.》

《과장님, 지장군은 충신으로서 다른 야심에 탐혹될수 없다고 봅니다.》

《또 추린가. 물론 그런 믿음은 좋아. 그런데선 나도 임자와 크게 다른 점은 없지. 그에 대해선 임자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까.

하지만 우린 모든것을 의심해야 돼. 생각해보라구. 그의 집안은 거의다가 적색이고 그도 북을 동경하며 고향에까지 가지 않았댔나. 북의 동생이란자는 친척을 만나러 왔다지만 신문사 부장까지 했다는 그자가 단순히 친척상봉을 위해 왔다는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오기바쁘게 포박을 당할줄 알았다면 그런 생념도 내지 못했을텐데 왔거던.

이건 지장군한테 뭔가 발붙일수 있는 큼직한 요소가, 말하자면 친북경향, 심하게는 북에 갔을 때 그 어떤 내밀적인 약속이 있었다는걸 의미하지 않나.》

창호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이제까진 동생을 고발했다는것으로 지태민에 대해서는 일푼의 의심도 두지 않았는데 명례의 말을 듣고보니 그럴상싶은 생각이 커졌다.

《진짜 추리란 바로 이런데서 필요한것이지.》

명례는 독스럽게 그를 쏴보았다.

《이봐, 사람이 인정에만 끌리면 대의도 잊게 될 때가 많아. 지장군은 용인술이 있는 사람이여서 임자같이 순결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의 마음을 찰떡처럼 끄당길수 있어. 거기에 너무 침혹되지 말라구.》

대모테안경밑에서 번쩍거리는 눈을 본 창호는 또 한번 가슴이 섬찍해졌다.

《그렇다면 전… 자리를 옮겼으면 합니다.》

《거― 무슨 망발인가. 군으로서야 지금같은 기회가 천재일우라고 봐야지.

북의 동생에 대한 공판은 5~6개월안으로 있을것 같은데 지장군의 동향에 대해 각별히 살피라구. 그의 일거수일투족으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해서까지.》

《알겠습니다.》

《한데 요즘 임잔 지장군의 집에 자주 다닌다지.》

《네, 땐스홀출입때문에…》

《건 나로서도 기쁜 일이고… 그 집에 다닐 때 려아라는 녀자가 찾아온건 못 봤나?》

《여러 부인들이 오는건 보았지만 인사소개가 없어서―》

《경자를 통해 알수 있지 않나.》

《이제부터 알아보겠습니다.》

《려아라는 녀자가 나타나면 즉시로 나에게 알리라구. 자, 이걸 보라구.》

명례는 지갑에서 한장의 사진을 내밀어보였다.

창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언젠가 옥영이와 마주앉아 있던 《요단강을 건느는 성모마리아》같다고 감탄했던 녀자였다.

《왜 놀라나?》

《너무 이뻐서―》

《허, 임자 누이에 또 누이벌일세.》

명례의 얼굴은 벌레씹은 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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