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1

 

성민은 《음―》소리를 내며 눈을 치떴다.

서서히 어둠이 걷혀지는 속에 천정의 전등과 그 전등갓두리에 생겨난 그림자며 벽에 휘갈겨쓴 락서들까지 어렴풋이 나타났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감각은 살아있었다.

련 12일 뻐드렁이에 주름살투성이의 중령이 네다섯명의 샤쯔차림을 데리고 우르르 밀려든 때부터 사태가 달라졌다.

《흠, 상팔자로군. 그래, 나도 너를 쓰다듬을줄 알았더냐.》

《야, 여기 모셔!》

고문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각재와 몽둥이의 휘파람, 연신 내리차는 발타격.

《뭐 리해를 시키고 마음을 합치려구 왔다구? 우리도 계급투쟁을 한단 말이다, 계급투쟁을…》

《그래, 넌 아직도 지장군을 믿는것 아니야? 지장군은 널 죽여치우라고 했다, 죽이라고… 하지만 곱게 죽을 생각은 아예 말어. 야! 뭣들 하고있어?》

하루에 두세번 까무라쳤다가 깨여날 때마다 자기의 끈질긴 생명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이제 얼마나 견딜수 있을가.)

천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성민은 또 한번 손가락을 굽혔다 펴보고는 벽가의 락서들에 시선을 주었다. 어저께까지만 해도 글자들을 알아볼수 있었으나 지금은 뿌잇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답은 명백했다. 지금까지는 견뎌냈지만 앞으로 어찌될지 무슨 장담이 있단 말인가. 식물인간이 되여 손가락마저 움직일수 없을 때면… 최후의 결행조차 할수 없을것이다.

태민! 아 그와 한번만이라도 만났으면… 그렇게 되여 인간이 보일수 있는 모든 증오와 저주를 한가득 퍼부을수 있다면…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팔다리가 경련하듯 떨렸다.

그러나 인차 맥이 진했다.

곁에 누운 사병의 요란스러운 코고는 소리를 듣다가 몸을 일으켰다. 터져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이쑤시개만 한 나무살을 꺼내들었다. 합판으로 된 책상밑판에서 훑어낸것이였다. 이제 그 나무살로 혈관을 찌르면 모든것이 끝날것이다.

반듯이 누웠다.

놀랍게도 죽음에 대한 공포라든가 두려움 같은것은 전혀 없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지키는 길은 이밖에 없다는 생각을 수십수백번 했기때문일것이다.

《그까짓 죽음은 대수롭지 않아. 단지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가는것이 한스럽다.》

외삼촌이 하던 말 그대로의 심정이였다.

1944년 12월 외삼촌이 있는 감방의 널마루에는 하얀 성에가 은빛을 뿌렸고 그 은빛갈보다 더 하얀 외삼촌의 얼굴은 비범할 정도로 숭엄하였다.

그로부터 한달후 성민은 싸늘하게 식어든 그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아버지와 함께 비분의 눈물을 쏟으며 목단강까지 되돌아왔다.

(묻어줄 사람도 없고, 눈물을 뿌려줄 사람도 없고… 이것이 나한테는 또 하나 유감인데―)

성민은 싱그레 웃으며 자기의 태연함에 자부를 느꼈다.

하지만 외삼촌이 말한 한스럽다는것만은 골수까지 살아있었으니 그것이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저을 때면 결행의 의지는 부뚜막의 엿가락처럼 녹아들고말것이다.

팔목의 동맥을 찾기가 어려웠다. 오래도록 팔목을 주무르다가 미세하게 뛰는 맥박을 가늠하게 되였고 팔라닥거리는 혈관의 따스함을 느꼈다. 입술을 사려뭄과 동시에 나무살로 그 혈관을 힘껏 찔렀다. 그다음 두세바퀴 휘둘렀다. 팔목에서 뽀잇한 실오리같은것이 뻗쳐오르는것을 보며 안도의 숨을 쉬였다.

이제 몇분이면 끝날가?… 마지막기분을 밝게 가지고싶었다. 하여 가장 즐겁던 때를 그려보려 했다. 아니, 스스로 떠올랐다.

《순정이!》

검스레한 천정을 보며 안해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보았다.

《내가 참 똑똑이지요. 당신같은 미남자를―》

그 목소리, 그 눈동자가 안겨온다.

《그때면 이 나무는 흰눈을 소복이 쓰고… 흰 수염을 날리겠지요.》

처음으로 사랑이 언약된 버드나무…

성민이 순정을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1945년 봄 방학때였다.

무산에서 온 동무들과 함께 오래간만에 거리구경을 나섰을 때 책을 보며 걸어오는 한 《일본인처녀》와 부딪치게 되였다.

성민은 그가 보는 책이 안데르쎈의 동화집인것을 알아보았다. 새삼스럽게 그를 다시 뜯어보게 되였다. 안데르쎈할아버지가 동화의 주인공으로 삼을만큼 말쑥하고 아릿답게 생겼다. 고개를 갸웃하고 걷는것도 일본처녀들속에서 가끔 보게 되는것이지만 이 역시 허물로가 아니라 매력으로 보였다. 선하고 착한 마음만을 호소하는 안데르쎈의 책을 본다는것 역시 그랬다. 하지만 따가닥거리는 게다까지 보게 되자 역증스럽게 눈길을 찌프렸다.

(저렇게 얌전하고 말쑥해도 만들어내는것은 사무라이짐승일테지.)

일본애들이라면 한번씩 걸쳐봐야 속이 씨원해하는 무산동무 하나가 처녀의 앞을 막아나섰다. 교외의 어느 한 목재소 말파리군인 그는 익살과 장난이 세차기로 소문이 나있었다.

《오바상, 오하이오 고자이마쓰!(할머니, 안녕하십니까!)》

허리까지 깊숙이 굽히며 싱글거리던 그가 얼뜨기상이 되며 흠칫 굳어졌다.

그런데 처녀는 피끗 그를 스쳐봤을뿐 여전히 눈가에서 책을 떼지 않고 걸어갔다.

《체, 재수없는걸.》

한적한 거리에서 일본인처녀를 혼내울 잡도리였던 무산친구는 썩살이 돋은 손으로 뒤덜미를 쓸어만지는데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몇점 맺혀있었다.

《아는 사이나?》 성민의 물음에 무산친구는 쓰겁게 웃었다.

《안다면 알구 모른다면 모르는 사이일세. 우리 목재소어른의 딸이네.》

《아니? 그 사람은 조선사람이라구 하지 않았나.》

《조선사람이지. 저 애도 그렇구. 빌어먹을, 그가 늘 왜놈옷을 입고 다닌다는걸 알면서도 매번 헛갈리거던.》

《뭘 하는데?―》

《중학굘 마친 다음부턴 집안구석에서 책더미에 묻혀있어. 가끔 밖을 나설 때면 저따위 왜놈복색을 하고 나서는데 모를 일이야. 집안 부모님들을 봐서는 다들 점잖고 괜찮은데… 하긴 그 아버지라는 어른도 왜놈들한테는 찰떡처럼 감겨도는 사람이니 그럴만도 해. 왜놈뿐만 아니지. 이곳 관청과 경찰들까지 명절이면 명절마다 집에 끌어들여 흥야라 붕야라야.》

방학이 끝나 성민이 다시 려순으로 떠날 준비를 할 때였다. 시교외의 일본군 군수창고가 화재를 만나 밤새 포탄 튀는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온 시내가 술렁거렸다. 유격대가 쳐들어왔다거니 어느 술취한 왜놈장교가 담배불을 떨군통에 불이 났다느니 하며 이말저말 옮아갈 때 목재소의 말파리를 끄는 무산친구가 헐레벌떡 뛰여들었다.

《성민이, 우리 목재소어른이 오늘 새벽 잡혀갔는데 그 불탄 창고자리에서 목을 친대.》

《뭐?―》

성민은 깜짝 놀랐다.

《그가 군수창고를 불태웠다는거야. 글쎄 난두 평소부터 그가 좀 류다른 어른이다 하구 봤는데 그런 거사를 할줄이야.》

《그 집 사람들은 어떻게 되였나?》

길가에서 만났던 처녀가 생각되였다.

《다행히 미리 알고 피했는지 주인어른만 잡혀갔어. 이거 무슨 방도가 없겠나?》

성민은 다짜고짜 친구의 말파리에 올랐다. 3시간 넘게 걸리는 길을 시간반으로 당겨갔다. 하지만 그 집에는 얼씬조차 할수 없었다.

왜놈경찰과 군대 몇이 살기등등한 눈길로 집두리를 에워돌고있었던것이다. 하는수없이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의논했으나 아버지에게도 신통한 방안이 없었다.

《나도 그 사람을 몇번 만나본 일이 있다. 인격두 있구 뭔가 뜻을 품은 사람이라고 여느 목재상과 다르다고 보았다.》

《저두 그때문에… 어떻게 손을 쓸수 없을가 해서 그럽니다.》

《그렇게 할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만… 어디 맥을 찾을수 있겠느냐. 돈을 좀 쓴다 해도 될탁없는 일이구 너 외삼촌 친구들이 어데 남아있다면 움씰거릴진 모르겠다만 그들 역시 안될거다.》

다음날 아침 구장이며 경찰들이 요시찰대상이거나 그러루하게 의심스러운 집들마다 문을 두드리며 거리로 끌어내여서는 60리 가까운 군수창고쪽으로 몰아댔다. 피발선 왜군들의 총부리에 떠밀려 아버지도 그속에 끼였다. 성민은 려순공대 학생인것으로 제외대상으로 남겨졌지만 그냥 있을수가 없었다. 인차 아버지를 다쫓아간 그는 시시각각 늘어나는 대렬속에서 일본처녀복색만 보이면 무작정 가보군 하였다. 나많은 늙은이들과 녀인들, 젊은이들과의 간격이 뚜렷이 갈라질무렵부터는 젊은 사람들과 녀인들속을 자주 오가군 하였다.

해가 두세발 남아있을 때 형집행을 한다는 군수창고자리에 이르렀다.

꺼멓게 벽체만 남은 군수창고자리에서는 그때까지 그물그물 연기가 피여올랐고 가설무대처럼 만들어놓은 단우에 그 처녀의 아버지가 의자에 비끄러매여있었다. 평소에 잘 알던 사람이라 해도 전혀 가려볼수 없도록 피칠이 랑자한 얼굴이였다.

처녀일이 걱정되여 여기저기 헤살피며 찾아보았으나 숲속에서 바늘찾기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일본처녀복색은 별반 없었고 있었다 해도 그 처녀와 비슷한 모양은 하나도 없었다.

형집행은 왜놈장교의 악에 받친 욕설과 짐승의 울부짖음과 비슷한 구령으로 집행되였다.

성민이와 아버지는 맨 마감으로 자리를 떴다. 이 가까운 곳의 철도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스러지는 노을빛이 하늘을 뒤덮는무렵이였다. 검붉은 구름이 띠처럼 펼쳐진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쏟아지는 마지막잔광 역시 붉은빛이였다.

장엄하면서도 비장한 그 색조는 마치나도 독립투사가 휘뿌리고 간 선혈처럼 느껴졌다.

역에는 예상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 역시 성민이네처럼 다음역까지 기차로 가서 시내로 가는 말파리를 얻어타려는것 같았다.

첫차를 놓치고 다음차에 올랐을 때도 어지간히 사람들로 붐벼 자리를 잡을수 없었다. 어느 한 자리를 좁혀 아버지만을 앉히고 성민은 승강대쪽으로 나갔다. 그런데 거기에도 사람이 있었다. 처녀였다. 그것도 일본인처녀, 처녀는 창문에 이마를 붙인채 꼼짝않고 서있었다. 까만 기모노차림이였다.

어찌보면 사형장에서 본것 같은 처녀였다. 한번 얼굴이라도 돌렸으면 했으나 여전히 한자세, 한모습이였다.

앉을 자리를 찾아 오가던 승객들중의 하나가 성민이처럼 그 처녀를 기웃하고 보더니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사라진지 얼마후 철도보안경찰 2명이 나타났다.

성민이를 어깨죽지로 밀치며 대바람에 그 처녀의 어깨를 두드린다.

얼핏 고개를 돌리는 그 처녀를 본 성민은 숨이 꺽― 막혔다. 온종일 찾고찾던 목재상의 딸이였다.

광명단시절의 경험때문이였던가. 반대쪽문으로 밀려났던 성민은 처녀의 어깨를 다친 경찰의 팔목을 건듯 잡아들었다.

《왜 그 처녀를 다치는가.》

일본말로 소리쳤다. 그러자 그 경찰은 이건 웬 녀석이냐 하는 눈찌로 마주보다가 《아는 사인가.》하고 묻는데 이미 한풀 죽어있었다.

《그렇소.》

만주국경찰이란 거개가 사각모(대학생모자)들앞에서는 움츠려드는 자세다. 사각모들이란 하나같이 부자집자식들이거나 관청관리들의 자식들인데도 있지만 높은 지식앞에서의 굴종도 있다.

그 경찰은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옆의 경찰과 뭐라 수군거리고는 또다시 기세를 돋구었다.

《그렇다면 이 처녀의 신분과 사는 곳을 말하오.》

성민은 입이 얼어붙었다. 자칫 시뿌르게 말하다가는 완전파탄인것이다.

《그한테 묻지 말고 나한테 물어요.》

아, 얼마나 다기차고 지혜로운 처녀인가. 차창에서 고개를 돌릴 때만 해도 비애의 짙은 구름이 비껴있던 얼굴이 놀랍게 달라졌다.

《무얼 알자는거예요?》

재차 말을 떼는 그의 눈에서는 종잡을수 없는 광채가 뿜겨나왔고 비웃음을 머금은듯 한 입가에는 오만하면서도 차거운 기상이 서려있었다.

《저 아가씨, 이름은 어떻게 부르는지요?》

처녀의 미모와 도고함에 경찰은 한절반 넋이 빠진 몰골이였다.

《아이스께 미쯔꼬.》

《아, 내지인이십니까?》

《그래요. 방해말고 물러가세요. 그러지 않았다간 국장한테 고소할테예요. 저의 집은 신경 ○○○구에 있어요.》

은방울소리처럼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마구 버무려 하는 소리라 일본말에 밝은 성민으로도 우의 말은 짐작을 덧붙여 해득한셈이였다. 그러니 이 만주국경찰로서야 더욱 해득하기 어려울것이 아닌가. 하지만 국장이라는 단어만은 뚜렷했으니 경찰은 그 관직때문인지 더더욱 황송해하는 꼴이였다.

《저… 잘못 신고를 받고… 우린 일본처녀로 가장한 조선처녀를 찾지요. 비적의 딸년입지요.》

성민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처녀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웃음까지 지어보이는듯싶었다.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라요.》

《이거 정말 실례했습니다.… 두분의… 좋은 다툼을 방해해서…》

두 경찰은 헤식은 웃음을 남기고 다음차칸으로 쫓기듯 갔다.

성민이와 《일본인처녀》가 나란히 있는것을 무슨 련애관계로 본것 같았다.

《어디서 사세요?》

불쑥 처녀가 물었다.

《이곳 시내에서 삽니다.》

《고마웠어요.》

처녀는 유심히 그를 보다가 다시 돌아섰다. 문손잡이를 잡은 하얀손에 한가닥 파아란 피줄이 팔라닥거리는것이 보였다.

가슴이 아파들었다.

그리고 놀라왔다.

분명 처녀는 자기 아버지가 잘못된것을 알고있을것이였다. 그런데 나이로 봐서는 극상해야 성민의 나이또래겠는데 이 처녀가 어떻게 되여 그런 모진 아픔을 이겨내고 경관들앞에서 그처럼 태연자약하게 처신할수 있는가. 그에게 말을 붙이고싶었으나 그에 대해 안다고도 할수 없고 자칫 잘못하면 그를 도와줬다는 생색으로 될가봐 침묵을 지키는수밖에 없었다.

《얘, 이젠 내릴 때가 된것 같다.》

아버지가 렬차이음짬 발판을 잘못 짚을가봐 어름어름 다가오다가 처녀를 본 순간 우뜰 놀랐다.

《아니?!―》

흡뜨는 소리를 내는 순간 처녀도 깜짝 놀라는 기색이였다.

《아이, 아버님이―》

《쉿, 이자 너를 찾더라.》

아버지는 량쪽차칸들에서 띠염띠염 일어서는 사람들을 엇돌아보며 처녀를 싸안듯이 몸으로 가렸다.

《그래… 너두… 거길 갔댔냐?》

《…》

《어데서 내릴테냐?》

《모…르겠어요.》

처녀의 눈에서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얘, 일없다.》

아버지는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아쥐며 또다시 량쪽차칸을 휘둘러보고는 성민에게 눈짓했다.

《넌… 내뒤를 따르며… 살피거라.》

장명등이 껌뻑이는 역구내로 차가 들어서자 아버지는 초조한 눈길로 밖을 살폈고 성민이 역시 차칸이며 바깥을 분주스레 살폈다.

그 처녀와 함께 집에 들어섰을 때는 한밤중이였다. 손님들이 많다나니 말파리 역시 늦게야 잡아타게 되였던것이다.

그날 밤 그 처녀―순정은 아버지앞에서 어린애처럼 흐느껴울었다.

《울어라, 울어. 실컷.》

아버지도 눈굽을 자주 훔치는데 그 옆방에 있던 성민이 역시 미닫이유리창으로 보게 되는 그 광경앞에서 비감을 금할수 없었고 그 처녀를 위로해주고싶었으나 차마 들어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순정은 열흘가량 성민이네 집에 숨어있다가 누구도 모르게 떠나갔다.

그 역시 태민이처럼 쪽지편지 한장을 남기고 갔는데 단 여섯줄로 된 글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 아버님, 급한 사정으로 떠나갑니다.

그동안 보살펴주고 기울여준 정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찾아뵈일테니 그때까지 부디 몸성히 안녕히 계셔주십시오.

성민씨에게도 후날 다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성민이 순정을 사랑하게 된것은 퍽 후날이라고 할수 있지만 이때부터 그 씨가 묻혀지고 싹이 트기 시작했을것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 성민이 그와 그의 가정에 대해서 알고있는것이란 처음 알게 되였을 때나 별반 달라진것이 없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번 그 집에 갔다가 순정이와 낯을 익혔을뿐이였다.

그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다시 만났을 때에야 모든것을 알게 되였다.

순정이 아버지는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였고 순정이 역시 그걸 아는 상태에서 아버지를 도왔다.

일본옷차림도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서였고 경찰들과 마주쳤을 때의 도담성과 령활함도 아버지가 심어준것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말이라면 절대적이였다. 어떤 심부름이든, 어떤 일이든 아버지의 분부라면 무조건이였다. 그가 아버지의 분부를 어긴것은 위험을 예감한 그의 아버지가 한 동지네 집에 그를 피신시키고 다시 찾을 때까지 얼씬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마지막분부를 지켜내지 못한것뿐이였다.

순정이가 떠나간 다음 성민은 마음 한구석이 텅 빈것 같음을 느꼈다. 그리고 순정이가 떠난것을 형때문이라고 하며 태민이를 원망했다.

일본륙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심양에 가기 전에 집에 들린 태민은 웬 낯선 처녀가 있는것을 보자 꼬치꼬치 캐물었고 비록 랭대까지라고는 할수 없으나 늘 근심어린 기색을 보였던것이다.

물론 순정으로서는 일본군 별을 단 장교가 모르는척 하는것만으로도 감사해하는 빛이였고 후날 다시 만났을 때도 그 말을 했다. 형님의 처사가 고마왔노라고…

종합대학에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모란봉, 청류벽우의 버드나무, 날리는 나무잎사귀들…

눈가에 뜨거운것이 그득히 고여올랐다. 온몸이 허궁 날아오르는것 같기도 하고 무슨 솜더미의 나락속으로 내려앉는듯 했다. 모든것이 희읍스름한 안개속에 잠기는가싶은데 문득 꽃밭이 펼쳐진다. 성민은 순정의 손을 꼭 잡고 꽃밭으로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다양한 색갈의 꽃, 빨갛고 노랗고 희고… 심장이 꿈틀했다. 그다음 밤이 왔다.…

 

《뭘 알겠다고 구접스레 만나.》

태민은 꽥 소리를 지르고는 집어삼킬듯 한 눈길로 정창호를 노려보았다.

《그저… 우연히 만났습니다.》

정창호는 볼부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눈치를 살폈다.

이제 자기가 하는 말에 놀라기도 하고 눈섭을 실룩거리기도 하며 푹 어깨가 잦아질 그를 생각하니 여간 재미스럽지 않다. 물론 그가 측은하고 동정이 가는것도 없지 않지만…

《실은 오늘 제가… 우연히 한인수를 만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일도 궁금하고… 마침 술집이 옆에 있어 그리로 끌어들였습니다.》

《거 실없는 서론은 그만하고 할 얘기나 있으면 하고… 가서 누워.》

《네.》

정창호는 능숙한 연출감독이 서툰 작가의 극대본을 뜯어고치는것처럼 한인수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보면서 말을 이었다. 대목에 따라 표정과 말투도 적당하게 변화시켜야 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이 과정을 통해 지장군의 심리적반응과 동요가 어떤가를 알아야 할것이며 그것이 어느 정도 자기의 판단과 맞는가를 확인해야 하는것이다.

정창호는 먼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한인수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그는… 그 북의 동생의 일에서 손을 뗐다고 합니다.》

흘깃 태민을 쳐다보며 약간 분개한 기색으로 어성을 높이였다.

《그 사람 말로는 자기는 반대였지만… 체형을 가하는 식의 혹독한 고문을 들이댔답니다. 헌병대적으로 제일 드센 최 뭐이라는 중령이 맡았는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야 한다고―》

태민의 눈섭이 쭝깃해지는것을 보며 괴로운듯 눈길을 내리깔고 계속했다.

《근 20일간을… 각종 형태의 고문을 다 들이대니… 사람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야! 죽었으면 죽구 살았으면 살았구 그것만 말해.》

태민의 눈에 불꽃이 튀였다.

《네.》

정창호는 머리속에 짜둔 꾸밈새가 죄다 허물어지는것을 느꼈다.

《죽지는 않구… 하긴 그가 그렇게 되게 하지 않기 위해 고문이 끝난 다음엔 약도 발라주고 주사도 놓아주었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자살?!》

《네.》

태민의 치떠진 눈섭이 꿈틀거리고 관지뼈가 돌처럼 굳어지는것을 보며 정창호는 한인수의 말을 듣던 때의 송연한 기분속에 빠지며 계속했다.

《그… 동생되는 선생은 나무살로 팔목 동맥을 찔렀는데… 다행히 피가 흐르다가 응고되며… 더 흘러나오지 않아서… 생명은 건졌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라는게 무지막지해서… 숨만 남은 선생을… 이번에는 자살을 시도했다구 마구 짓조겼는데… 한인수의 말로는 자기와 김택규라는 부사령관님이 제기해서 손을 뗐다고 합니다.》

정창호는 태민의 손이 가늘게 떨리며 담배곽을 끄집다가 도로 놓는것을 보자 왜서인지 코등이 저릿해졌다. 하긴 한인수로부터 그 끔찍한 고문과 그 고문속에서도 억척같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는 북의 동생을 놓고 감탄했고 자살까지 하려 했다는 그 행동세부까지 들었을 때 눈물이 날번 했다.

《그래, 그 애한테 뭘 좀 사먹였대?》

태민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 한인수는 제가 부탁한대로… 양주 10병을 사서 비닐통에 채워 그한테 줬다는데… 마시진 않고… 발을… 씻었답니다.… 상처가 도질가봐 발라준 약을 씻어버리느라고…》

태민은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앤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아.》

속이 후두두해있던 정창호는 태민의 말에 한결 마음이 놓여 주머니에 정히 싸넣어두었던 돈을 꺼내 슬며시 그의 책상앞에 놓았다.

《이건 뭔가?》

《술을 사고 남은 돈이랍니다.… 사식공급은 엄금이라서… 그 술을 주는것도 최가라는 사람을 겨우 설복시켜… 하였답니다.》

《흠.》

태민은 뜻도 색갈도 없는 군소리를 내고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왜 그러고 섰나, 앉지 않고.》

책상앞 의자도 아니고 쏘파를 가리켜보였다. 친밀감이 느껴졌다.

《한데 그 앨 이제 어떻게 한다는 얘긴 못 들었나?》

《미군 502부대에 보낸답니다.》

《502?!》

《네, 거… 저 CIA(미중앙정보부)계통의 부대 있잖습니까. 제가 들은 말로는 거기 가면… 아이적에 한 일도 죄다 말할 정도로 심문기재와 기술이 대단하답니다. 지금 중앙정보부사람들은 거기 가서 기술을 배우고…》

《그밖에 다른 말 없던가.》

태민의 표정은 뜻밖일 정도로 밝아졌다.

무엇때문인가 하는 의문은 있었으나 그와 오늘 더없이 가까와진듯 하고 그리고 그가 자기에게 적잖게 마음을 의지하는듯싶은 믿음을 느껴 정창호 역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런데 또 한가지 들은것은… 그 동생되는 선생의 부인이 북조선교육성의 간부랍니다. 부처장이라고 하던지― 무척 미인이라고 그 말까지 하더랍니다.》

《어데 녀자래?》

《건?…》

《고향 말이야.》

《그것까지는… 이름이 곱더군요. 김순정이라고…》

《김순정?!》

《네. 무슨 독립운동자의 아니, 혁명자의 딸이랍니다.》

《그―래?!》

《한데… 이런건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동생은… 정식 심문할 땐 말하지 않다가… 생활사를 말하던중에 우연히 얘길 했다는데… 한인수는 그와 약속한대로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았답니다.》

《그게 무슨 비밀인가.》

《건 동생되는분의 주장때문이랍니다. 개인사는 필요에 따라 말할수 있지만 그건 자기가 결심할 일이지 공식심문에서 대답할것이 못된다고 법을 가지고 주장하기에 그렇게 되였답니다.

어떻게나 론리가 세고 선이 명백한지 한인수는 그런 사람 처음이라고 놀라더군요. 하여튼 그가 발을 잘못 붙였으니 그렇지 여기 그냥 있었으면 사령관님 못지 않게 큰일을 할 아까운 인물입니다.》

《그런 뻐꾸기소린 그만둬.》

말과는 달리 얼굴색은 여전히 밝았다. 정창호는 사기가 났다.

《참, 한가지 더 말씀드릴것이 있습니다. 동생되는 선생의 배낭에… 송이버섯이 있었답니다.》

《뭐―이, 송이버섯?!》

《네, 헌데 그 사람들이 한심합니다. 송이버섯에 뭔가 들어있지 않는가 해서 하나하나 쪼개보고 거기에 다른것이 없으니까 시험액에 잠가 검열하다나니 죄다 못쓰게 됐답니다.》

태민은 입술을 꽉 깨물고있었다. 손에 쥔 담배대에서 재가 떨어져내리는것도 모르고있었다. 정창호는 그 송이버섯에 무슨 사연이 있는듯싶어 꼬리를 붙였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법이 어떻고 해도 분명 사령관님께 가져온것인데 인사로라도 몇송이 보내와야 하지 않습니까. 북쪽 송이버섯맛은 특별하다는데…》

《그런 소린 그만해…》

태민은 이제까지와는 판다른 소리로 몰박스레 내고는 일보철을 끄당겨잡았다. 창호가 무슨 일인가싶어 눈을 꺼벅거리며 있자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젠 가서 쉬라구. 하여간 오늘일은 고마우이.》

부관실로 나온 정창호는 송이버섯의 일이 되게 궁금스러웠다. 혹시 거기에 무슨 비밀신호약속이 있지 않았을가. 동생이 502부대에 간다고 하는데도 천연스럽던 지장군이 어떻게 되여 그 송이버섯소리에 혼들린 사람처럼 되였는가.

(그건 그렇고. 송이버섯을 보내왔으면 나도 좀 맛볼수 있는건데―)

울적한 기분을 이런 생각으로 돌리려는데 태민의 굵진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매번 문을 닫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조금 삐써 열어놓은 새짬으로 그가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수 있었다. 옥영사모님과 하는 말 같았다.

《응… 그래. 그 사람 말이야. 엔트로우… 그를 청하라구.… 뭐 꼭 명절만이야 되는가. 내가 그를 만난지도 반년은 더 되는것 같애. 그래.… 리유는 적당히 붙이라구.…》

정창호는 엔트로우라는 이름을 한두번 들은적이 있는것 같았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엔트로우라?!… 이름도 별나구나.)

정창호는 주섬주섬 책상우의 문건들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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