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5
《오전에 택규가 왔다갔어.》
와이샤쯔바람의 박정희는 앉은 자리에서 인사를 받고는 우유빛장쏘파의 옆자리를 눈짓해보였다.
지태민은 그냥 서있었다. 5.16혁명후부터 박정희는 그에게서 박형이 아니라 의장각하인것이다.
재털이에서 한줄기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는것을 보며 박정희의 심기가 여의치 않음을 알았다. 무엇때문에 찾았는가. 하루 두세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박정희에게서 점심식사뒤의 휴식은 누구도 침해할수 없는것으로 되여있다.
박정희는 그의 생각을 엿본듯 심드렁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택규 그 사람 신통치 못해. 오늘 점심땐 좀 눈을 붙일가 했는데 그 사람 설레발때문에 안되더라구. 한데 왜 그러고 섰나. 여기 와 앉으라구.》
예나 다름없이 무랍없는 사이임을 강조하는 말투였다. 앉았다.
《그래, 집의 녀왕이랑 다들 잘 있나?》
《네.》
《뭐 앓고있겠지.》
박정희는 싱그레 웃으며 탁우의 담배갑을 그에게 떠밀어주었다. 지태민은 받을가말가 망설이다가 흔연한 태도로 담배를 뽑아들었다.
그가 박정희를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만주군관학교 첫 학기시험 직후였다. 태민의 방에 찾아들어 자기를 소개한 박정희는 태민군과 같은 수재를(예과학기말시험에서 태민이 수석으로 꼽혔던것이다.) 알게 된것을 더없는 기쁨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친교를 청했다.
첫인상에서는 그닥잖게 보였다. 체소한 몸매에 거동도 말투도 조용하고 온화하여 문관이나 시골훈장에 합당한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잘못된 생각이였다.
신경의 중국인차집에서 있은 일이였다.
차와 함께 술을 파는 이곳에서 박정희는 술을 청했다.
《태민군도 술을 하겠지? 상을 보니 대주간데.》
박정희는 술을 사발채로 들이켰다. 태민도 지고싶지 않았다. 차집주인의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게 하며 네홉술을 말끔히 비워버렸을 때 박정희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였다.
《자넨 날 어떻게 보지?》
그뒤를 이어 하는 말에 덴겁할 정도로 놀랐다.
《자넨 나를 쥐상으로 볼테지. 아아, 너무 바빠할것 없어. 지금은 달리 본다는걸 아니까. 하지만 쥐상이면 어떤가. 부지런하고 영악하고 눈치 빠르고, 안 그래?》
박정희는 너털웃음을 웃고는 태민의 손목을 꼭 잡았다.
《내가 자넬 왜 끔찍이 생각하는줄 아나? 건 바로 자네 얼굴에 새겨진 대감님 기품때문이야.
뭐, 얼굴을 붉힐것까지 없어. 하지만 이건 내가 왜 자네를 가까이하는가 하는걸 알리자는거니까. 세상에 사람은 많아도 인걸은 적어. 사내가 한번 세상에 태여났으면 뭔가 자취를 남겨야 하는데 그러자면 재목이 돼야지. 재목이 못되면 재목이 될만 한 인걸을 찾아 하인배노릇이라도 해야 하는거구. 그래서 난 자네의 견마잡이로 될 용단을 내렸다 이거야.
뭐, 취했다구?!… 난 취할줄은 몰라. 그러니 똑바로 들어두라구. 내 오늘 자네와 함께 여길 찾은건 바로 이런 뜻에서 사지동고를 맺자는걸세.》
이 일이 있은 뒤부터 태민은 또 다른 눈으로 박정희를 보게 되였다.
그의 특출한 지감과 야심에는 두려움까지 느꼈지만 그에 끌려드는 감정을 막을수 없었다. 이렇게 보면 박정희에게는 남다른 용인술이 있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다.
어느 한 자리에서 사람을 끄당기고 주무르는 그의 솜씨를 놓고 칭찬하자 박정희는 허심탄회한 어조로 말했다.
《일은 사람이 치르는것이니 사람이 사람을 멀리하면 우자로 되는걸세. 그러니 밉건곱건 가까이 해두는것이 현자의 처신이라고 할수 있는거야. 이때문에 나에게는 동료들이 많지. 하지만 내가 제일 믿고 정을 주는것은 태민군 하나라고 할수 있어.
잘 믿어지지 않는다는건가? 그럼 들어보라구. 건 내가 사람을 정확히 보는데서 나온거야. 자넨 태음성을 띤 태양인이고 수재지. 한데 이런 사람은 극히 적어. 음은 물인데 자넨 깊은 물이야. 얕은 물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설레이지만 깊은 물은 그렇지 않아. 그러니 이건 내가 자네를 배반하지 않는 이상 자네 역시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되지. 그리고 양은 움직임인데 자네는 비상한 두뇌와 뜻이 있으니 큰일을 칠 재목이거던.
여기에 또 하나 덧붙이면 자네와 나는 판판 다른 형같지만 내가 추남이고 자네가 미남이라는것 내놓고는 거의다 같다고 할수 있어.》
그의 말은 사실로 증명되였다.
박정희는 별치 않는 문제거리가 생겨도 태민을 찾았고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야기까지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어느 봄날의 일요일이던지 시내외출을 나갔던 지기들이 유곽으로 밀려갔을 때 박정희는 술이나 먹자고 하며 사지동고를 맺던 차집으로 태민이를 이끌었다.
《태민군은 녀자생각이 안 나는가?》
술상머리에 앉은 박정희는 이것부터 물었다.
전 아직… 이런 식으로 머리를 젓자 박정희는 자못 진중한 기색이였다.
《참는다는거겠지, 남성의 그것은 생각없이도 든장질을 하는거니까. 아까 그치들은 유곽을 찾아갔어.》
《형도 가고싶다 그 말이군요.》
《그래, 사실 나도 녀자생각에 몸 달 때가 많아. 참을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참지. 정 참기 어려울 때엔 무도장(유술, 격검훈련장)에 가서 기운을 뽑지. 그통에 이 박정희는 훈련모범생으로 평가되고… 내 보기엔 자넨 그런 참을성을 천성으로 가지고있는것 같애.
자, 이러면 내가 태민군한테 속옷까지 벗어보인셈이지.》
1942년 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부의황제로부터 금메달을 받은것으로 세론의 초점으로 되였다. 기자들은 물론 고관들까지 찾아드는 속에서 박정희는 태민을 따로 만났다. 가나가와현의 일본륙군사관학교로 떠나게 된것으로 태민이와 마지막작별연을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날의 태민은 박정희에 대해 심한 회의감에 빠져있을 때였다. 교내 송별식때 박정희는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서 사꾸라꽃처럼 사라지겠다.》고 연설하였던것이다.
진심인가, 연기인가.
《군도 내뒤를 따라오겠지?》
그날도 중국인차집에서 술잔을 놓고 마주앉았다.
《그건 두고봐야지요.》
《나에 대해 불만이 많을테지.》
박정희는 그의 속을 말짱 꿰뚫어보고있었다. 태민이도 더이상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난 형의 답사연설을 곧이곧대로 다 믿진 않아요. 그렇지만 내가 알고있던 박형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옳아.》
박정희는 이렇게 긍정하고는 찌를듯 한 눈길로 마주보며 말했다.
《군은 명치 천황을 어떻게 보나?》
《개혁자지요.》
《그래, 개혁자지, 그리고 일본의 구세주고. 그가 없는 오늘의 일본을 생각할수 있나? 명치때 일본은 미국의 흑함전술에 졌지만 그것으로 일본이 잃은것은 봉건의 무지몽매뿐이였어.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명백하지 않아. 패한자는 승자앞에서 배우고 그다음 그 승자를 눌러야 되지. 실지 현실이 그렇게 되고있지 않나. 진주만기습으로부터 오늘까지 일본은 련전련승이야. 물론 그것으로 미국을 완전히 없앨수 있다는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박형의 사꾸라꽃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일본을 위해 죽는다, 이거야말로 희극이 아닙니까?》
《아니, 아닐세. 태민군이 오늘은 범재로 추락되는군. 들어보라구. 자네가 나라 찾는걸 목표로 삼는것처럼 나 역시 그 뜻에서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국토도 병사도 죄다 잃은 상태에서 무슨 도리가 있나? 내가 이자도 말했지만 일본은 승세야. 지금의 기세로 나가면 조만간 대동아제국이 형성되지. 하지만 그건 일시적이야.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일본도 조만간 추락할 때가 오는거야. 미국까지 먹는다 해도 마찬가지지.
일본의 팔이 제아무리 길고 억세다 해도 그걸 다 그러안고 소화시킬순 없는것이거던. 그리고 먹힌 나라들에서도 가만 있자고 할텐가. 이 지나(중국)땅만 해도 장개석이와 모택동이 계속 반일항전을 벌리는것이고 군이 숭상하는 김일성장군 역시 관동군을 짓조기지 않는가.
그러니 시간문제이긴 하지만 일본은 억지스럽게 삼켰던 땅들을 하나하나 내놓을수밖에 없어. 난 바로 그 기회를 노리는것이고 그때를 타 풍운의 사나이로 나서겠다는 그것이야. 내가 일전에 와신상담을 말한것도 바로 그런 기회를 노린다는것이고 명치를 떠올린건 그처럼 이긴자한테서 배워 구국성업을 이뤄보자는거야. 그래, 틀린가?》
태민은 그에 대한 회의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지동고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했다. 이렇게 되여 한해후에 부의황제의 은시계표창을 받은 태민은 학교당국의 추천도 있었지만 박정희와의 연분을 줄잡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륙사에 갔다. 1944년에 들어서면서 미드웨이해전(미일해공군의 결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들에서 일본의 패전이 명백하다는것이 알려졌을 때도 그에 대한 존경감은 더욱 커졌고 결국엔 자기의 일신사와 장래문제까지 그의 조언을 지침으로 삼는데까지 이르게 되였다. 해방직후 성민이를 따라 북행길에 오른것도 박정희의 지지를 받아서야 결행하게 되였다.
그때 박정희는 지금의 민심은 김일성장군님께 쏠리고있다고 하며 태민이가 가서 보고 좋다면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태민의 되돌이걸음에도 박정희를 위한 생각이 적잖게 작용했다. 그때 서울로 돌아온 태민은 한동안 시세관망의 자세로 집에 붙박혀있었다. 그의 북으로의 길이 의심을 사 일거일동을 신중히 하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였다.
전날의 친구들도 그를 외면했는데 놀랍게도 박정희까지 잘있는가 식의 문안편지를 두세번 해왔을뿐 좀해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태민은 극도의 보신이라고 이를 갈았다.
그런 때 려수폭동이 터지고 이어 순천군인폭동이 터졌다. 그뒤로 숙군처형의 피비린 바람이 불어칠 때 태민은 박정희로 하여 또한번 무릎을 치지 않을수 없었다. 박정희가 려수, 순천군인폭동 주범자의 한사람으로 검거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던것이다.
매일같이 들이닿는 소식들엔 박정희가 《한국》륙군사관학교 교사를 할 때부터 지하조직에 들었고 거기서 군사책까지 하였다는 말도 있었다.
태민은 놀라움속에 과연 박정희는 박정희구나 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박정희가 자기를 찾지 않은것도 북에 갔다온것으로 의심을 사는 자기를 위해서였고 그 위태위태한 놀음에 자기를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념려때문이라는것으로 더욱 감심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중용지도의 처신법까지 집어던지고 륙군참모차장을 하는 원권을 수차에 만났고 옥영이네와 인연이 있는 미군 민사처 요원까지 찾아가 박정희의 구원을 요청했다. 남에게 머리를 수그리지 않는 그로서 생면부지의 외국사람에게까지 빌붙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였다.
1948년 봄 고등군법재판장에 나선 박정희는 《당당하고 굳센》 태도로 태민을 또 한번 감동시켰다.
유감스러운것은 대질문답때 박정희가 지도급인물들의 이름까지 팔며 거사준비과정을 고스란히 토설하는 비겁성이였으나 그가 렬거한 인물들과 거사과정이 이미 말끔히 드러난 뒤끝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그 불만도 지워지고말았다.
세월을 속이려면 세월에 맞춰 차림을 해야 되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던 박정희의 말을 되살려보며 큰일을 하자면 우선 살아야 할것이니 어쩔수 없다고 생각했다.
6일간의 공판끝에 박정희는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태민으로서는 불행중다행이라고 마음속 위안을 가져보았으나 아까운 인재가 썩게 된다는것으로 괴로움이 컸다. 6.25전쟁발발과 함께 예비역은 물론 근시, 절름발이까지 군에 끌어들일 때 태민이 군에 들어가지 않은것은 동족상쟁에 말려들지 않으려는 그리고 성민이며 아버지에게 한 약속을 지키려는것이 기본이였지만 박정희 역시 하나의 차단봉으로 되였다. 민중의 지향, 민중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던것이 박정희의 《지론》이였고 태민 역시 그것을 자기의 신조로 삼았기때문이였다.
피난민대렬과 함께 부산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인편으로 박정희의 편지를 받게 되였다. 비상시국하의 특별조치에 따라 사면석방으로 풀려나와 군에 편입되였으니 태민군도 군에 들어와야 한다는 권고밑에 이에 응하지 않으면 돌이킬수 없는 화가 있을것을 암시한 편지였다. 그러지 않아도 태민은 자기에 대하여 별의별 험담이 다 돌고 조만간 헌병대나 경찰서 구류장에 끌려갈수 있는 형편에서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두 길뿐이였다.
반역자로 죽겠는가, 대의에 따르겠는가. 태민은 더이상 선택의 자유가 없음을 알았다. 우선 살아야 했던것이다. 중대장으로 군에 편입되였다. 될수록 후방에서! 죽일내기는 싫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자유는 없었다. 락동강전투에서 1선에 나서게 되였다.
미군고문관의 독전밑에 반돌격의 앞장에 섰다. 그뒤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가 살고 중대가 살기 위해 맞다드는 《적》을 무자비하게 쏴갈겼다. 이로 하여 두달후엔 대대장으로 승격하였고 부대안에서 나돌던 빨갱이성향에 대한 뒤소리도 없어졌다. 특무대의 감시도 해제되였다. 량심과 리성을 판 대가로 얻어진 승격이고 신임이였으나 그것을 잊으려 했다. 그러나 북으로 가는 길에서 미군의 폭격과 군경들의 총탄에 숨진 시체를 볼 때면 무서운 공포와 아픔에 전률하군 했다.
서울을 수복한지 얼마 안되는 어느날 폭격에 지붕이 날아난 벽돌단층집에서 박정희와 만나게 되였다. 그의 행처를 안 박정희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려 찾아왔던것이다.
하지만 기쁜 말들은 나누지 못했다. 박정희가 가지고온 미군보급품인 위스키를 나누며 지난날과 현재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자넨 나보다 한계급 높구만.》
그때의 태민은 소령이였고 박정희는 대위였다.
《내가 옛날에 하던 말 생각나나, 견마잡이로 되겠다던 말.》
그런 말은 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 그러자구. 참, 자네한테 먼저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인사는?―
《아니, 그건 평생 잊을수 없는거지. 내 자네의 뒤교섭에 대해서 많이 들었어.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다는 생각 옳았어. 정말 고마우이.》
원, 무슨 소릴―
《그런가. 한데 자넨 그때 나를 온곱지 않게 보더군. 피고석이였지만 난 자넬 놓침없이 보았네. 내가 동료들과의 거사과정을 말할 때 눈을 내리깔던것까지.》
그랬던가.
《나삐 생각하진 않았어. 역시 도와 의를 중히 여기는구나 하고 높이 봤지. 사람이 자기 동료들을 판다는것은 더러운 일 아닌가.》
모든것을 리해했다고 했다, 동료들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죄다 잡혔거나 처형당한 상태였으니.
《그렇게 알아주니 더 고맙구만. 한데 그렇게 된건 아니야. 그때 내가 말한 동료들중에는 잡히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어. 그러나 그들에 대해서는 잊었어. 나! 나를 살려야 한다는 이 생각 하나뿐이였어. 놀랍지 않어?》
박정희는 묻는듯 한 눈길로 태민을 보다가 계속했다.
《자네, 사람이 태여날 때 무슨 소리부터 하는지 알아? 응―아! 라고 하지. 아!― 아란 나라는 소리지. 우선 나부터!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물론 자네 아닌 다른 사람앞이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아, 대의를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고. 하긴 이것도 전혀 거짓말은 아니야.
내가 살아야 한다는건 나 하나의 개인적욕구만은 아니였어. 가깝게는 자네나 원권, 백선엽준장의 의사였고 또 다른 어른들도… 내가 살아날것을 바랬어.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끌어줬고.
이렇게 보면 나를 살리기 위한 배신과 변절은 나라는 생명체의 욕구와 외계의 요구에 따른 불가피한 행위였어. 그래, 군의 생각은 어떤가, 이래도 박정희를 벗으로 볼텐가?》
어색스러운 물음이라 화제를 돌렸다. 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하는 소린가?》
이건 선배님한테 하기 전에 자기자신을 두고 하는 고민이라고 했다.
한때엔 자기 역시 민중이요, 뭐요 했지만 동족을 쏴눕히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 말에 박정희는 순간적으로 침울한 얼굴이 되였다.
《물론 그건 자네나 나나 그리고 우리 민중전체의 비극이지. 하지만 우리에겐 죄를 묻지 않을걸세. 약소민족의 숙명으로 지어진 이 불행앞에 자네나 난들 무슨 방법이 있는가. 끌려가는 양, 어느 흐름이든 끌려가는 양은 자유롭지 못하거던. 하긴 량자택일의 자유는 있어. 민중의 흐름을 따른다면 민중이 이북편을 따르니 그를 따라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럴수도 없어. 량편이 다 리성을 잃은 상태이니 옛사람들의 말대로 이긴자는 장군이요, 진자는 역적이라는 그 리친데 미군이 달려붙은 싸움에서 남한이 이길것은 명백하지 않나. 인생을 태여났다가 승자로, 장군으로 되는것이 낫지 패자로, 역적으로 될텐가.
자네의 그 공자라는 사람도 제 리속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 헤매지 않았나. 그리고 큰뜻을 품은 사람들은 아녀자식의 감정과는 결별하였다는것을 잊지 말라구.》
아녀자식감정과의 결별! 지태민은 《5.16》을 통해 박정희의 이 말이 그의 체질로 되였음을 알았다.
무자비성! 박정희는 제딴의 뜻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상대가 친구든 혈친이든 관계없이 목을 쳐버렸다. 《5.16》준비때는 20여년의 정분을 맺고있던 죽마지우의 목도 거침없이 쳐버렸고 얼마전에는 어린시절의 유정한 추억으로 늘 입에 올리던 자기의 옛 담임선생까지 총살형에 처하게 했다.
타고난 랭혈인간.
그때부터 태민은 박정희를 대할 때마다 은근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다.
력사에는 화려한 겉치레와 분식된 말로 자기를 위장하고 희세의 악당, 폭군으로 군림한자들이 오죽 많은가. 인간을 하나의 리용물로, 장기쪽으로 보는 초인들.
이렇게 볼 때 박정희 역시 그런 초인을 꿈꾸는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태민은 그를 리해하려 애썼다. 리해하려 했을뿐만아니라 큰뜻을 실현하자면 불가피한것이라고 합리화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자기자신을 기만하는 어리석음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처음에는 속히우고, 다음에는 속히움의 관성에 끌려가는것이 인간의 본태일가.
태민의 이러한 리해와 타협은 자기자신도 감정과 인정을 초월해야 한다는데로 떠밀었으나 태민에게는 뭔가 부족되는것이 있
었다.…
《내가 자넬 부른건.》 박정희는 성냥불이 타는것을 지켜보다가 옆탁우의 두툼한 종이철을 집어들었다. 《이때문일세.》
표지우의 타자문을 본 태민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성민이가 쓴 글이였다.
《제가 꼭 봐야 됩니까?》
《봐야지, 형님이 안 봐서야 되겠나. 택규 그 사람 말로는 유서라고 하는데… 나까지 때렸더군.》
태민은 떨리는 손으로 진술서를 받아들었다. 박정희까지 때렸다는것과 이 유서에 대한 자기의 처신을 생각하느라니 등골까지 땀이 괴였다. 굳센 표정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두세장 넘어가자 그 굳셈에 지진이 일었다.
―일제강점하에서도 우리 집안은 서로의 결렬과 흩어짐이 없었다. 크건적건 모두가 조선독립의 뜻을 품고 반일선상에서 살았다. 특히 당시의 고향일대를 휩쓴 백두산바람, 항일무장투쟁의 드세찬 바람은 가문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치를 따르게 하였다.
여기서는 나의 형님인 지태민도 례외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우리 가문의 반렬에서 떠나갔고 가문의 수치로 되였다. 동족이 동족에게 총을 겨누는 속에서 그도 우리 가문의 적이 되였기때문이다.…
그 인간으로 볼 때 처음부터 우리를, 가문을 배신할 사람은 아니였다. 하지만 여기에선 우선 그의 책임을 론해야 할것이다. 일제를 미워하면서도 일제에 편승한 행동, 잘못된 선택은 만주군관학교부터라고 할수 있다. 철저하지도 굳세지도 못한 《애국》과 《량심》은 그 어지러운 환경속에서 첫 이질을 가져왔고 새로운 종주국, 미국식민주의화의 제물로 됨으로써 인간자체의 본도와 량심마저 저버렸다는것이 지금의 나의 견해이다.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물론 형님만을 탓할 일은 못된다. 형님도 한때 말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스승을 모시는가, 어떤 벗을 택하는가에 따라 그 인간의 진퇴가 결정된다고. 그런데 형님은 어찌하여 그 어지러운 인간들을, 매국노들과 사기군들, 자기 하나만을 생각하는 추물들을 가려보지 못했는가. 형님이 늘 말하던 도와 의는 어데 갔는가.…
보다 진심을 말한다면 나는 나의 이러한 모든 생각과 판단이 잘못이기를 바란다, 잘못된 오해와 잘못된 착각이였다고. 하여 나는 형님을 만나러 왔고 어릴적 그때의 따뜻한 마음으로 《형님!》하고 불러보고싶다.…
태민은 그다음의 글들은 제대로 못 봤다.
택규로부터 성민이가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을 때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충격에 전률을 느꼈다.
택규의 말을 들었을 때는 발작적인 분노와 고통만을 느꼈다면 지금은 심장이 비틀려지는듯 한 아픔과 절망적인 불안속에 마음을 다잡을수 없었다.
《그 뒤장을 자세히 보라구.》
박정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아니 이건?)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이 땅의 《5.16정변의 지도자》와도 만나고싶다. 그도 한때는 민중의 뜻을 말했다. 그렇다면 그도 역시 민중의 뜻, 갈라진 겨레와 혈육들이 손잡는 통일을 위하여야 할것이 아닌가.…
《어때, 아깝지 않어.》
태민이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박정희는 침울한 눈길로 태민을 보았다.
《여전히 소학생때군요.》
태민은 억지스럽게 웃어보였다. 박정희도 따라웃었다.
《하긴 철부지라 해야겠지.… 더 좋긴 천사라고 해야 할가. 얼마나 아름답고 순결한가. 어느 한군데도 그른데가 없어. 친척이 친척을 보고싶어 왔다, 옳지. 서로의 반목과 싸움이 없어야 한다! 그것도 그렇고 모두가 자네의 이 동생같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태평하고 아름다워지겠나. 통일은 물론이고… 그렇지 않나?》
태민은 어떤 대답도 할수 없었다.
《난 오늘 이 글을 보며 예전에 봤던 그를 떠올려봤어. 그 앤 신통히 자네를 먹고 게웠지.》
《그렇게들 말했습니다.》
《그래, 이 글에도 일편단심이거던.》
박정희는 잠시 눈을 감고있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넬 부른건 이 앨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때문일세.》
태민은 무릎우에 떨어진 재가루에 눈을 주었다.
《각하로선… 그에 대해 너무 마음쓰지 마십시오.》
《뭐 그저 그렇다는거지.》
박정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우선우선한 태도로 말했다.
《자네 그 동생에 대해 택규는 절망적이야. 나도 역시 저 글을 보고나니 난감해. 철두철미 적색에 빈틈없는 론리거던. 되돌려세우기 불가능하다는 말엔 나도 반박 못했어. 그래서 택규더러 구면지기의 연분으로 직접 솜씨를 보이라고 하니 못하겠다는거야. 하긴 택규로도 어림없는건 사실이야. 우선 리론과 인격으로 적수가 못될것 같애. 택규도 그걸 알지. 하긴 설유공작이 실패된 뒤의 체면을 먼저 생각했을테지. 그런데선 역바르니까. 택규는 박사급의 이북전문가를 붙여보자는건데 그것도 실패작일건 뻔해.
그 글을 보니 이북비평가들의 무기가 조금도 날이 들어갈것 같지 않아. 자네도 보았지만 우리가 타매하는 공산사상의 부조리를 말끔히 뒤집지 않았나. 실지 이북은 레닌이나 쓰딸린의 아라사식주의와는 퍼그나 다른것만은 사실이거던. 저기에 쓴 부르죠아타도론에 대해서도… 이북에서는 계급으로서의 타도지 인간에 대한 육체적말살까지는 없었다고 한것만 봐도 그렇고, 사상과 리념을 초월하여 남북이 합심하여 살자는것도 그렇지 않나. 물론 합심이요, 제도초월이요 하는건 이북의 정략선전이긴 하지만 그에 대한 론단은 궤변으로 들릴거거던.
정치와 인생에는 량면생리가 있고 필요하면 이렇게 저렇게 기발을 바꿔야 한다는걸 심어주면 좋겠는데 자네처럼 도와 의에 젖어있는데다가 인민군 사단군중문화지도원까지 했다니 어데 먹어들텐가. 모름지기 나나 자네가 설유한다고 해도 침을 뱉을건 뻔하거던.》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태민은 몸이 떨렸다.
대답은 명백한것이다. 《각하, 눈 꾹 감고 그를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동생고발의 수치도 면하는것이요, 부모님과 가문에도 불륜의 인간으로는 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을뿐이다. 이 글을 보기 전이였다면 말할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할수 없는것이다. 설사 그를 맡는다 해도 어림없는 일일것이다. 그렇다. 돌려세울 방도는 없다. 택규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저 글은 더욱 그렇다.
성민은 저 글 하나만으로도 교수대에 올라야 한다. 《불법잠입》은 제하고라도 적화선전죄를 어떻게 덮어버린단 말인가. 그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냥 내놓아줄것을 청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고… 더구나 자기의 은사까지 처형한 박정희가 제아무리 《아깝소.》뭐요 했지만 일단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고 시비가 벌어지면 《나 역시 자유스럽지 못하니 어쩌겠나. 정은 정이고 일은 일이니까.》하며 성민은 물론 자기라는 존재도 대의의 제물로 만들것은 불보듯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성민이가 가증스러웠다.
《전 이미… 택규군과 각하에게 그의 처분을 부탁한 이상… 그밖에 없습니다.》
《허 허…》
뜻밖의 너털웃음에 태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네 너무하구만.》
박정희는 시름겨운 기색으로 입을 다시였다.
《난 말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될줄 알았네. 택규는 자신만만해 했지만 북에서 자네같은 집안사람들에 대해선 뒤전에 밀어제쳤다는 자료를 놓고 그 애의 있음직한 고행을 소설처럼 추리해 떠들었지. 일종의 심리학까지 강의하면서 여느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심문도 문죄도 없이 해대자는것이였어. 량순한 학생물림을 붙여 지조요, 뭐요 하는건 그저 그러루하다는걸 느끼게 해서… 간단히 받아내고 내보내자는것이였어. 너무 요란스러운 실력가를 붙여 설유공작을 하면 반발심이 생긴다나. 그땐 나도 그럴상싶었지. 한데 싱겁게 되였거던. 허나 어쩌겠나. 살리긴 살려야겠고…》
태민은 눈굽이 핑― 젖어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문젤세. 택규는 비밀스럽게 한다지만 귀와 눈은 어디에나 있지 않나. 사실 나의 선생건도 비밀리에 하려던것이 허, 며칠사이에 큰집어른들까지 알더란 말이야.》
박정희는 불이 죽은 담배를 다시 붙여물었다. 성냥불이 벙끗할 때 눈살이 가늘게 떨리는것이 알렸다.…
곱살하게 생긴 접대부가 세번째로 가지고 들어온 브라질산 고급커피를 점잖게 받아 마시던 정창호는 《가자.》하는 소리에 펄쩍 뛰여일어섰다. 목소리도 그렇거니와 지태민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차에 올랐을 때 대기실에서 슬쩍해온 《말보로》를 터쳐 한대 권했으나 지태민은 보지조차 않았다.
《효자동으로.》
지태민은 긴의자 몇개가 놓인 공원쪽에서 차를 세우게 하고 아무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정창호는 뒤덜미가 팽팽히 켕길 정도로 불안한 속에 부관으로서의 처신을 생각하며 잽싸게 뒤따라 내렸다.
지태민은 공원쪽으로 슬밋슬밋 걸어가다가 짝지발을 든 상이군인 한명만이 있는 공원가녁에서 멈춰섰다. 정창호도 따라 섰다.
《이보게.》
지태민의 얼굴은 이때야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얼굴빛만은 여전히 어두웠다.
《내 한가지 부탁을 하자구. 자네 한인수를 잘 안다고 했지?》
《네, 저의 학교 3년 선배였습니다.》
《그럼 이제 그를 가서 만나라구.》
지태민은 주머니를 뒤지더니 두툼한 돈뭉치를 꺼내였다.
《좀 어려울수 있네만 이걸 한인수에게 전하게. 다른건 아니구 내 동생 녀석한테 술이나 한번 실컷 먹이라는거야.》
《저… 사식 차입도 엄금할텐데 술을…》
《그래서 부탁이라지 않나.》
《알았습니다. 명령대로 집행하겠습니다.》
정창호는 요란스럽게 발뒤꿈치를 부딪쳤다.
《명령은 아니야. 그럼 난 먼저 가겠네.》
정창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의 뒤모습을 지켜보았다.
순간 사형수들의 형집행직전에 술을 먹인다던것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 그럴수도 있어. 한데 건 너무하지 않는가, 제 동생을…)
오한이 난듯 몸이 떨렸다.